{{{#!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1041, #062861 20%, #062861 80%, #06104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d1d1d,#e2e2e2 | 의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 ||||||||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 제2대 미즈노 렌타로 |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 제4대 시모오카 주지 |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 |||||
제6대 이케가미 시로 | 제7대 코다마 히데오 |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
제11대 엔도 류사쿠 | |||||||||
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제5대 윤덕영 | |||||
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folding [ 1910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고문 | ||||||||
<colbgcolor=#fff,#1f2023> 고영희 | 권중현 | 민상호 | 박제순 | 송병준 | |||||
이근상 | 이근택 | 이완용 | 이재곤 | 이지용 | |||||
이하영 | 임선준 | 장석주 | 조중응 | 조희연 | |||||
조민희 | 한창수 | ||||||||
찬의 | |||||||||
강경희 | 권봉수 | 김만수 | 김사묵 | 김영한 | |||||
남규희 | 민상호 | 박경양 | 박승봉 | 박제빈 | |||||
박중양 | 염중모 | 유맹 | 유정수 | 윤치오 | |||||
이건춘 | 이겸제 | 이재정 | 이준상 | 정인흥 | |||||
조영희 | 조희문 | 한창수 | 홍승목 | 홍종억 | |||||
부찬의 | |||||||||
고원식 | 구희서 | 권태환 | 김교성 | 김낙헌 | |||||
김명규 | 김명수 | 김준용 | 김필희 | 김한규 | |||||
김한목 | 나수연 | 민건식 | 민원식 | 박제환 | |||||
박희양 | 서상훈 | 서회보 | 성하국 | 송지헌 | |||||
송헌빈 | 신우선 | 신태유 | 어윤적 | 엄태영 | |||||
오재풍 | 오제영 | 윤치오 | 이도익 | 이만규 | |||||
이봉로 | 이원용 | 이항직 | 정동식 | 정병조 | |||||
정진홍 | 조병건 | 조재영 | 조제환 | 조원성 | |||||
최상돈 | 한동이 | 허진 | 홍우철 | 홍운표 | |||||
홍재하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folding [ 1920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고문 | |||||||
고희경 | 권중현 | 민병석 | 민영기 | 박영효 | |||||
송병준 | 이하영 | 윤덕영 | 이윤용 | ||||||
부찬의 | |||||||||
김현수 | |||||||||
칙임 참의 | |||||||||
김영진 | 김영한 | 김한목 | 남규희 | 민상호 | |||||
민영찬 | 민형식 | 박승봉 | 박이양 | 박기양 | |||||
박상준 | 박승봉 | 박의병 | 박제빈 | 박중양 | |||||
백인기 | 상호 | 서상훈 | 신석린 | 신응희 | |||||
어윤적 | 엄준원 | 염중모 | 유맹 | 유성준 | |||||
유정수 | 유혁로 | 이건춘 | 이겸제 | 정진홍 | |||||
조민희 | 조진태 | 조영희 | 조희문 | 한상룡 | |||||
한진창 | |||||||||
주임 참의 | |||||||||
강병옥 | 고원훈 | 권태환 | 김갑순 | 김교성 | |||||
김기태 | 김명규 | 김명준 | 김상설 | 김상섭 | |||||
김연상 | 김영무 | 김정태 | 김준용 | 김창한 | |||||
김필희 | 김현수 | 나수연 | 노창안 | 박경석 | |||||
민건식 | 민영은 | 박기동 | 박기순 | 박봉주 | |||||
박이양 | 박제환 | 박종렬 | 박흥규 | 박희양 | |||||
방인혁 | 서병조 | 선우순 | 송종헌 | 송지헌 | |||||
신석우 | 신태유 | 신창휴 | 심준택 | 심환진 | |||||
안병길 | 양재홍 | 오재풍 | 오태환 | 원덕상 | |||||
유기호 | 유빈겸 | 유익환 | 유흥세 | 윤치소 | |||||
이강원 | 이근우 | 이기승 | 이도익 | 이동우 | |||||
이만규 | 이병렬 | 이병학 | 이택규 | 이택현 | |||||
이항직 | 이흥재 | 이희덕 | 장대익 | 장도 | |||||
장상철 | 장응상 | 장직상 | 장인원 | 전석영 | |||||
정동식 | 정란교 | 정병조 | 정순현 | 정재학 | |||||
정태균 | 정호봉 | 조병건 | 천장욱 | 최석하 | |||||
피성호 | 한영원 | 한상봉 | 한창동 | 허명훈 | |||||
홍성연 | 현은 | ||||||||
참의 | |||||||||
구연수 | 김윤정 | 김춘희 | 김한목 | 김희작 | |||||
남규희 | 민병석 | 박기순 | 원응상 | 윤갑병 | |||||
윤정현 | 장헌식 | 정건유 | 현기봉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folding [ 1930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고문 | ||||
민병석 | 윤덕영 | 이윤용 | |||||||
칙임 참의 | |||||||||
고원훈 | 김관현 | 김명준 | 김서규 | 김영진 | |||||
김윤정 | 남궁영 | 민상호† | 박두영 | 박상준 | |||||
박영철 | 박용구 | 박중양 | 서상훈 | 신석린 | |||||
어담 | 엄준원 | 염중모 | 유정수 | 유진순 | |||||
유혁로 | 윤갑병 | 이겸제 | 이범익 | 이진호 | |||||
장헌식 | 정교원 | 조경하 | 조성근 | 조희문 | |||||
주영환 | 최린 | 한규복 | 한상룡 | 한진창 | |||||
홍종국 | |||||||||
주임 참의 | |||||||||
강동희 | 강번 | 고일청 | 김경진 | 김기수 | |||||
김기홍 | 김도현 | 김두찬 | 김병규 | 김사연 | |||||
김상설 | 김상형 | 김상회 | 김신석 | 김영택 | |||||
김정석 | 김정호 | 김종흡 | 김진수 | 김창수 | |||||
김한규 | 김한목 | 김한승 | 남백우 | 노영환 | |||||
문종구 | 민병덕 | 박기석 | 박종렬 | 박보양 | |||||
박봉진 | 박철희 | 박희옥 | 방의석 | 방태영 | |||||
서병조 | 서병주 | 석명선 | 선우순 | 성원경 | |||||
손재하 | 손조봉 | 송지헌 | 신희련 | 안종철 | |||||
오세호 | 오태환 | 원덕상 | 유승흠 | 유태설 | |||||
이경식 | 이교식 | 이근수 | 이근우 | 이기찬 | |||||
이기승 | 이동우 | 이명구 | 이방협 | 이승우 | |||||
이병렬 | 이선호 | 이은우 | 이종섭 | 이충건 | |||||
이진호 | 이택규 | 이희덕 | 이희적 | 인창환 | |||||
장대익 | 장석원 | 장직상 | 장헌근 | 정관조 | |||||
정란교 | 정대현 | 정석모 | 정석용 | 정해붕 | |||||
조병상 | 주영환 | 지희열 | 최남선 | 최양호 | |||||
최연국 | 최윤 | 최윤주 | 최준집 | 최지환 | |||||
최창조 | 하준석 | 한영원 | 현준호 | 현헌 | |||||
홍치업 | 황종국 | ||||||||
참의 | |||||||||
강필성 | 김병원 | 김성규 | 김제하 | 박상준 | |||||
어윤적 | 유만겸 | 유성준 | 진희규 | 홍정철 |
- [ 1940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1000><bgcolor=#062861><-5> 고문 ||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란교† 정연기 진학문 최린 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집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룡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한정석 현준호 황종국 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재직 중 사망. |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 참의 | |||
<colbgcolor=#000><colcolor=#fff> 박두영 朴斗榮 | |||
| |||
본명 | 박중수(朴重樹)[1] | ||
창씨개명 | 야마시타 도에이 木下斗榮 | ||
출생 | 1880년 11월 28일 | ||
경상남도 밀양군 (現 경상남도 밀양시) | |||
사망 | 1960년 2월 10일 (향년 79세) | ||
본적 |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 세이죠학교 (졸업) | |
주요 경력 | 동민회 평의원 일본군 포병 대좌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민생단 단장 간도협조회 본부 고문 만주국 협화회 간도지방사무국 부국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 참의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감사 배영동지화 상담역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금강항공주식회사 고문 |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02년 ~ 1931년 | |||
대한제국군 | |||
1904년 ~ 1906년 | |||
최종 계급 | 대좌 (일본 제국 육군) 참령 (대한제국군) | ||
주요 보직 | 육군무관학교 교관 군기창 검사관 포병대 교감 포병중대장 시위 야전포병대장 군부 군무국 포공병 과장 군부 군무국 병기과장 | }}}}}}}}} |
[clearfix]
1. 개요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초기에는 항일 의병을 토벌 활동에 참여했다가, 이후 일본군 포병 대좌 계급까지 승진했고, 민생단이나 간도협조회 같은 밀정 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끝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생애
1880년 11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중수(朴重樹)였으나 1902년에 박두영으로 개명했다. 여성 밀정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 배정자가 남편인 현영운 등 8명을 뽑아 보낸 대한제국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 유학해 1898년 4월 도쿄 세이죠학교에 입학한 후 1902년 4월 졸업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제15기생으로 입학해 1903년 11월 포병과를 수료했고, 1개월 후인 12월 일본 근위사단에서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독립운동가 유동열과 이갑이 그의 동기였다. 졸업 후 망명한 그들과 달리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다.이후 같은 해 3월 대한제국 육군 포병 참위로 임관한 뒤, 7월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9월 육군 포병 부위로 진급해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배속되었고, 10월 군기창 검사관을 겸했다. 1905년 4월 포병대 교감을 거쳐 그 해 10월 육군 포병 정위로 진급하고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2.1. 친일 행적
1906년 4월 경기도와 경상도 진위대 시찰위원으로 활동했고, 6월 대구진위대 소속으로 의병 진압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참여했다. 이때 조선 의병장 이강년을 제천군에서 체포하고 사형 당하게 하면서 일제의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육군 포병 참령으로 진급해 포병중대장을 맡았다. 1907년 4월 시위 야전포병대장을, 6월 군부 군무국 포공병 과장을, 8월 군부 군무국 병기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순사대를 이끌고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또 다시 의병을 공격했다. 이러한 공로들 덕분에 1908년 2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6등 단광욱일장과 은사금 350원을 받았다. 1909년 5월 군법회의 판사를 맡았고, 7월 친위부에 배속되었으며, 10월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같은 해 8월 조선보병대에 배속되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는 등 일제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기도 했다. 1916년 10월 조선헌병대사령부에 배속되었고, 1919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만주의 군사 고문으로 파견된 후 연해주 일대에서 조선인 회유 공작에 종사했다. 1920년 4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구한국 군인 계급에서 일본군 계급으로 전환되면서 포병 중좌에 임명되었다. 1925년 1월부터 친일단체 동민회 평의원을 지냈고, 1930년 12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1년 4월 조선보병대가 폐지되면서 동시에 일본군 포병 대좌로 예편했으며, 같은 해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1932년 2월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후원하고 만주 지역 조선인들의 분열을 유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큰 해악을 끼친 친일단체 민생단의 단장을 맡았다.[2] 1934년 친일단체 간도협조회 본부 고문과 만주국 협화회 간도지방사무국 부국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주에서의 행적들 덕분에 1935년 3월 만주국 정부가 주는 만주국 건국대전기념훈장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받았다. 1937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 참의에 임명되어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두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18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되자 "반도 통치사상의 금자탑"으로써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다고 감격했으며, 같은 해 8월 경성일보가 주최한 '애국 조선을 말하는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1939년 2월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감사를 맡아 조선인 청년들의 지원병 참가를 독려했고, 같은 해 7월 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맡아 반영 여론을 조성하거나 반영궐기대회를 조직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지냈고, 그 해 9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1월 흥아국민계발선전사가 주최한 '지원병아 일어나라'라는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도 그의 노골적인 친일 활동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여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이 주최한 모임에서 "상재전장"의 마음으로 생활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해 1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앞장서서 학병 지원을 독려하기로 결정하자 경상남도에서 지역 순회 강연 활동을 벌이면서 청년들에게 징용, 징병 지원을 권유했다. 또한 같은 달 학병 지원 독려를 위한 익찬회 동대문위원회에서 상임위원을 맡았다. 12월에는 학병들의 장행을 축하하는 연성회 폐회식에 참석했다. 1944년 10월 전쟁 지원용 비행기 생산을 위한 금강항공주식회사 이사 및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