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max(40%, 5em);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대한제국 ] {{{#!wiki style="margin: -5px -1px"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212529,#e0e0e0> 군부 | <colbgcolor=#fff,#1c1d1f>김시혁 · 김시진 · 김석중 · 여운형 · 이응준 · 엄복동 · 조동윤 | ||
황실 | 강종 · 의친왕 | |||
기타 | 이승만 · 박두영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max(40%, 5em);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국외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212529,#e0e0e0> 러시아 제국 | <colbgcolor=#fff,#1c1d1f>니콜라이 2세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
소련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 |||
프랑스 | 페르디낭 포슈 | |||
독일 | 에리히 루덴도르프 · 알렉산더 폰 린징겐 | |||
대영제국 | 더글러스 헤이그 | |||
미국 | 존 조지프 퍼싱 · 우드로 윌슨 | }}}}}}}}}}}} |
1. 개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원 역사의 이승만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제국신문의 주필로 의화단 진압 당시 평안도 방면군 사령관인 이규태를 취재하는 모습으로 첫등장했다. 이후 독립협회 강경파 소속으로 징병제를 반대하는 모습으로 재등장.[1] 김시혁의 제안으로 원 역사보다 이른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둘 간의 밀담은 꽤나 대담한 편인데, 누가 들으면 역적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의 내용이었다. 극동전쟁이 벌어지고 나서는 미국 내에서 여론전을 주도하고 있다. 언변이 좋아서 주미 일본 공사관 직원들도 그를 주요 경계 대상으로 보는 중. 그러거나 말거나 이승만은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가지고, 국무장관과의 회담까지 하면서 여론전에서 승기를 잡고 미국인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원래 역사대로 우드로 윌슨 아래 수학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6년, 데모크라시에 대한 열망을 가득 품은 채 귀국한다. 그가 이끄는 파벌은 독립협회 내에서도 가장 과격하기로 유명하다. 황국협회 소속인 윤치호와는 자주 의견 차이로 다투어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하게 싸우기까지 한다.강종이 만인, 한인에 대한 포용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자 특유의 일민주의을 강조하며 만인, 한인을 몰아내고 흑룡강까지 오롯이 한민족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아주 전형적인 파시즘 사상을 내세워 지지세를 모으기 시작한다.[2] 본인도 이게 제국을 갈라버릴 수 있음을 알지만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상관없는다는 태도. 학생과 젊은 지식인들에게 지지세가 높아서 자칫 동방의 히틀러가 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기존에 내각, 군부와 황실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이용익이 중병으로 쓰러지고 황국협회가 고종의 사당이 아닌 정책정당으로 변화를 시도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기존 내각을 해산하고 새로 제헌내각을 꾸리는 선거를 실시하며 이승만을 총리라는 명목의 방패막이로 끌어들여 군부와 내각의 지지를 받는 민씨 척족의 민영환 등을 견제하려 한다. 윤치호나 안창호 앞에서는 시종 당당하게 굴면서도 고종과 독대하게 되자 불쌍할 정도로 겁먹었다. 고종이 그를 당장이라도 대역 죄로 처결 가능한 증거들을 갖고 있음을 내비치자 바로 엎드려 도게자까지 하기도. 한 정파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관록이 모자란 40대 정치인으로 왕 노릇만 50년 넘게 하며 셀 수 없는 쿠데타를 겪어온 노괴 고종 앞에선 스스로 장기짝에 불과하다 할 정도로 상대가 안 되었다.[3] 이후 고종과의 협의를 통해 총리대신이 되었고 한동은 기세등등했으나 이게 전부 고종의 노림수. 여흥 민씨라는 명문 경화사족 출신이자 실무 경험이 풍부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는 민영환 대신 편하게 써먹을 꼭두각시가 필요했을 뿐이었다.처음에는 그런 것도 모른채 해평 윤씨를 끌어들여 여흥 민씨를 견제하고, 박제순 앞에서 큰소리치며 자신만만했으나[4] 집권하자마자 부족한 경륜을 드러내며 신나게 지지율을 까먹기 시작한다.
자신이 주장했던 일민주의는 만주 사는 사람들까지 일민에 포함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며 속 편하게 생각하고 뒤집었다 고정 지지층이 흔들렸고, 일본과의 연해주 분쟁에서 숙이고 들어가 연해주 한인들을 보호하러 출병했던 군부를 저지해 군부와 척을 졌다. 당연히 현직 총리가 가야 회담에 무게감이 더해진다는 조야의 요청을 무시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는 민영환을 유럽으로 보냈고, 군부에서 누차 요구한 김시혁의 빠른 복귀도 거절했다. 자신이 직접 유럽에 가는 대신 민영환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권력이 흔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부의 요청을 누차 무시했던 이유도 그들의 문(文)이 무(武) 위에 있는 게 당연했던 조선식 문민통제에 당연히 따를 거라 혼자 착각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 구식 군대의 와해로 기존 군사적 전통이 소멸하고 완전히 새로 빚어준 대한제국군은 청, 일본 군대처럼 언제든 폭주할 위험이 상주해 있었던 것을 합법적 통수권자인 고종 아래 문민통제를 철저히 강조한 김시혁의 개인적 성향과 민영환, 이용익이란 유능한 관료들의 중재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 사실을 총리가 될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 민본당이란 당 자체도 게리맨더링으로 의석수만 불렸을 뿐 황국협회, 신민당 같은 확고한 지역기반이 없고 한 명의 리더 아래 뭉치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입장을 갖춘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든 정당이라 당론이 하나로 뭉쳐지지도 않았다.
이를 보완해 보고자 내부대신 김가진, 법부대신 이도재, 참정대신 이범윤, 이범진, 체신대신 민영규로 노련한 원로대신들을 대거 기용했으나 김가진을 제외한 이도재, 이범윤, 이범진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박제순의 궁내부대신 유임에, 민영규는 이승만이 일본에 유화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에 분노해 며칠만에 사직하고 나가버렸다. 역시 마음이 떠난 김가진을 붙잡을 때 눈물로 사정한 것이 소문이 나 낙루총리[5](...)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는다.
고종은 이승만의 일민주의에서 주창하는 '하나의 지도자'에 자신을 투영시켜 군 내부에 근황파 세를 불려가는 한편 박제순 모르게 궁내부와 헌병대를 움직여 한성에 땔감 파동을 조장해 이승만에 대한 민심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시킨다. 대신들과 모두 모여 땔감 파동을 원인을 조사하다 뒤늦게 고종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음을, 군부는 그저 김시혁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임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때마침 스페인 독감까지 창궐하자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고 친위 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1919년 친위 쿠데타가 발발했을 당시 다른 내각 관료들이 붙잡히는 동안 혼자 붙잡히지 않고 도주하는데 성공.[6]
이후 김시혁이 귀국하자 몰래 그의 차로 들어가서 무기고를 열고 정변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하나 김시혁은 그러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과 이승만의 사람이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는 태도 때문에 분노하여 쫓아내며 이승만은 바로 기록국 요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가 다시 대사관으로 들어간다.
박두영은 그가 이끄는 청년단에 끄나풀들을 넣고 다이너마이트를 흘려서 소요 사태를 조장하려 했으나 원수부 기록국에 발각되어 선조치로 폭발물을 다루던 중 실수로 폭사 처리된다.
이후 2.27 계엄령이 터지자 겁을 먹고 딘스모어 대사와 플랑시 대사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었으며 헌병대의 학살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대사관 쪽으로 피신하자 헌병들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해 그들을 퇴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그러던 중 이러다 자신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범부로 남을 것을 걱정해[9] 대사관 밖으로 나가 시위대를 이끌려고 했지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딘스모어 대사와 경비 병력들에게 저지당했고 그 후 여러번 몰래 나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방 한구석에 격리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시혁에게 편지를 쓴 뒤[10] 이기붕을 시켜 이를 전하도록 한다. 이 편지를 받은 김시혁은 기가 막혀하며[11] 이를 다른 원수부 장성들, 대신들, 중추원 의원들에게 폭로하면서 이승만 같은 놈이 나오면 안된다는 이유로 공화정이나 군정이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선택하게 된다.
이후 황제가 된 의친왕의 의회민주주의 존중, 스페인 독감의 엔데믹화, 소련과의 수교 및 영토 획득, 영국의 빈 자리를 대한 산업계가 파고들어 얻은 경제 호황으로 민심이 안정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 민본당, 공화파 인사들을 모아 새 정당을 창당하려는 책동을 보이나, 상황 고종을 민본당, 신민당, 독립협회가 추천하는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특별재판부에 회부하자는 막나가는 주장[12]을 하여 황제와 김시혁이 더이상 가만 놔둘수 없다고 판단, 결국 기록국에 체포되어 박용만, 김시혁에게 쿠데타를 부추긴 증거가 들이밀어지고 조동윤 국장에게 반역자로 기소되어 사형당할 것인지, 주미 대사 직을 맡아 속죄할 기회를 얻을 것인지 택일을 강요당한다. 이승만의 마지막 반항도 3.1 혁명의 날 김시혁에게 보낸 편지를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조동윤의 협박에 꺾이고 주미 대사 직을 받아들이고 곧바로 통계실장 김창수의 손에 붙들려 강제로 미국행 배에 태워진다. 꼭 권토중래해 복수하겠다는 독심을 품은 채로...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에서 대한제국 총리 길영수와 일본 총리 하라 다카시와 배후 협상에 참석해 중재를 맡는다. 일본과 어느 정도 낙찰을 본 뒤 미국 부통령 후버와 가진 회담에서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나서 한국의 역량을 강조한다.
3. 기타
2.27 계엄이 진압된 후 김시혁에게 보낸 편지는 실제 역사에서 1952~53년 사이 미 대통령 트루먼,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각색된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미국의 사정 따윈 무시하고 일방적인 요구만 늘어놓는 막무가내 외교를 자주했고 이는 한국전쟁 이전 미국이 국군에 대한 장비지원에 인색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말은 번지르르하게 마치 최종 보스인양 하는데 정작 상황 터지면 대책 없어서 어쩔줄 모르고 회피하기 바쁘고, 나중에 가서 터무니 없는 자기합리화만 늘어놓는다. 작중에선 대중에 영합해서 독을 퍼뜨리는 정치'꾼'으로 평한다.
언행이나 묘사되는 사고의 흐름과 행동양식을 보면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놓고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수준이 지극히 피상적인 수준[13]이며 인민을 위해 뭘 희생하는 건 없으면서 인민이 피 흘리는 건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오직 자신만이 한민족을 이끌어갈 리더라는 확신 혹은 아집으로 가득한 신념형 사이비 교주 내지는 터무니 없는 순교자 콤플렉스 환자에 가깝다.
김시혁과 의친왕이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미 대사로 추방했는데, 독자들은 미국에서 세력을 모아 3부의 메인 빌런으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 이때 징병제를 대체할 제도로 국민방위군을 언급해 김시혁을 당황하게 한다.[2]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이승만의 일민주의는 전형적인 에스닉 내셔널리즘으로 입양 대리기관을 통한 혼혈아 수출이 주요 정책에 포함되어 있었다.[3] 그게 아니더라도 고종의 잔혹성에 대한 공포도 컸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나 고종은 전근대 시절 조선 기준으로도 연좌제와 혹형을 심하게 남발했던,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도 손꼽히게 잔혹한 인물로 기분 나쁘면 조선시대 법 기준으로도 과도한 혹형과 연좌제 남발로 비판받았다. 갑신정변 패밀리와 김홍륙 일가에게 한 짓이 대표적. 사실 이승만이 생각한 '조용히 쓱싹'하는 수법도 본편의 고종이 성장(...) 해서 세련되게 바뀐 거지 예전 같았으면 닥치고 일가째로 효수 엔딩이었다.[4] 박제순은 일본 대사와 회견 후 독단으로 연해주 출병을 취소해버린 이승만의 행보가 고종(반환받은 국새를 자신이 고종에게 건내는 형식을 취해서), 군부(군부에서 헌병대에 협조까지 구하며 오랫동안 준비한 연해주 출병을 어그러뜨려서), 자기 정당인 민본당(일민주의를 내세워 놓고 정작 연해주 한인 동포들을 저버려서) 모두에게 지지를 잃는 악수임을 지적했으나 이승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럴 듯한 말로 오히려 박제순쪽에서 나중에 잘 봐달라 사정하게 만들었는데... 결국 박제순 말이 전부 맞았다.[5] 신성모의 별명인 낙루장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걸로 보인다.[6] 수를 급격히 불리면서 전문성 떨어진 헌병대는 포섭해둔 경무청 끄나풀들이 잡을 거라고 생각하고 놔뒀고, 이승만 자택 근처에 대기하던 경무청 끄나풀들은 이승만이 집에 오지 않으니 헌병대가 잡아갔나 보다 하고 말았다.[7] 극동전쟁 당시 소위로 참전했다가 야간 강습을 받고 거의 죽을 뻔했었던 일본대사관 육군 무관이 과호흡 증세와 더불어 발작 증세를 보이는 바람에 본국으로 후송되었다고...[8] 그러나 대사들은 퇴거시키는 것을 거절하고 피난민들을 받아준다.[9] 의친왕이 대사관 쪽으로 와서 대사들에게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보호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물자와 경비 병력을 나눠주자 질투감과 위기감을 느꼈다.[10] 지난번에 설득에 실패한 것은 눈치없이 김시혁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11] 그 편지의 내용이 실로 가관인게, 공화정 하겠다는 놈이 군부를 김시혁 개인소유 영지로 만들어주겠다는 내용이었다...[12] 예초에 강종을 법정에 세우지 않고 황제의 조치로 하얼빈 종신 유배로 끝낸것은, 전제군주국에서 군주의 월권을 처벌하는 법안이 부재해서 근거가 없었고, 군법회의에 넘길 경우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대한이 군국주의 국가로 비쳐질 위험이 있기에, 정식 재판에 넘길수는 없기에 부득이하게 내린 결정이었다.[13] 이승만의 민주주의란 적나라하게 말해 선거로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는 거, 자신이 탄압받지 않을 권리, 자신의 반대파를 탄압할 자유가 전부다. 삼권분립과 천부인권, 문민통제 같은 핵심 요소들이 모조리 결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