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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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전술, 무기체계를 서술한다.2. 군사개혁
주인공 김시혁이 미래인인 덕에 당대 모든 군대들이 겪은 실책과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으며, 정답만을 선택해 개혁을 추진중이다.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기존 오군영 체제 및 신식군으로 육성되고 있던 별기군이 붕괴되고 청,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군사 육성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군 조직과 전통, 문화가 사라져버린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전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걸림돌이 없어지는 효과로 나타났다.
2.1. 보병
의화단 사건 개입을 앞두고 강습보병대대라는 중앙군 직할대를 만들어 현대전에 적합한 새로운 보병전술과 편제를 등장시켰다.[1]밀집하면 강력한 현대 무기의 살상력에 쉽게 표적이 되어 희생되기 쉽기에, 전술제대의 최소단위를 소대까지 낮추고, 분대급 이하에서 각개전투가 가능하게 만들어 적의 화력으로부터, 은/엄폐/침투기동이 용이하게 개편하는 한편, 전술단위의 소형화로 인해 수반되는 화력의 약화는 경기관총, 수류탄, 척탄통 같은 이전같으면 포병 등의 타 병과에서나 운용했을 장비를 보병 소부대에 편제시켜 보완, 치명성을 극대화[2] 하는 방향을 추구, 강습보병대대에 현대식 보병전술을 먼저 습득시킨 뒤 점진적으로 전군에 확대하여[3] 대한제국을 세계에서 제일 진보된 보병 및 보병전술 보유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타국에 비해 20년 가까이 새로운 방향성을 조기에 완성한 것 만으로 충분히 현대 군사사에 길이 회자될 업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4]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협상국의 군비 지원이 가시화되며 꾸준히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를테면 보병대대와 중대에는 박격포가 공용화기로 편제되기 시작하였고, 1부에서는 강습부대나 기병연대, 근위사단같은 중앙군 부대만이 중대에 6정을 간신히 편제시키던 경기관총이 원정군 보병분대에서는 분대당 1정, 원정군 강습분대에는 분대당 2정까지 보급량이 늘었으며 보병분대의 구조 역시 현대화되었다.
원정군 보병분대는 소총수 위주의 소총조와 경기관총 위주의 지원조로 나뉜 전간기~현대 유럽식 체제고, 원정군 강습분대의 구조는 냉전기에 완전히 정착된 미국식의 사격조 체제다. 이에 관한 대체역사 갤러리의 분석/설명
또한 강습보병을 단순한 정예보병부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자전거보병으로 개편, 트럭으로 움직이는 기동포병대 배속 등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가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미국에서 리버티 트럭이 도입되고 근위기병사단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예하 보병연대들을 차량화 보병대로 개편. 분대당 차량 한대씩을 돌려 연대 전체가 150대 이상의 차량을 운용하는 호화로운 편제를 구성한다.
2.2. 포병
군사개혁 과정에서 주퇴복좌기를 최초로 적용시킨 현대식 야포인 프랑스제 Mle1897을 대량으로 도입, 1부 완결시점에서 육군은 교육부대 1개 포대와 10개 포병대대[5], 해군은 러시아제 152밀리 해안포 6문과 프랑스제 야포 1개대대를 운용하는 현대식 대규모 현대식 포병전력을 운용하고 있다. 해당 야포가 곡사포가 아닌 평사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측반, 야전 통신수단과 연계된 간접사격을 구사하고 있는데, 야전포병은 표적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하던것이 일반적이던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된 포병전술을 구사하는 셈이다.[6] 또한 일본군의 야포들이 주퇴복좌기가 없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점을 이용해, 높은 연사력과 수준높은 전술로 부족한 수량을 만회, 대포병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강도높은 훈련을 통해 기초적인 TOT사격까지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대신 이런 연사력 높은 야포의 대량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대량의 포탄소모가 수반되며, 극동전쟁, 1차 세계대전 내내 열악한 교통 인프라와 맞물려 전쟁수행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1차 세계대전 시기 강승보병대가 차량으로 이동하는 75mm 포대를 배속받아 포병 자산의 기동화가 시작되었으며 동부전선 귀환 후 155mm 중포와 미국제 트럭 대량 도입으로 화력과 기동성이 일신된다.
2.3. 기병
1차 대전 시기까진 현역이고, 본격적인 전차와 차량화보병이 등장하기 전 유의미한 기동전력으로써 잘 써먹는다. 대한제국은 베이스도 거의 없다보니 개선 작업이 오히려 쉽게 이루어졌고, 1차 친위 쿠데타 당시 들어온 러시아 카자크들에게 기병 훈련을 맡겼으며 이후 러시아에서도 군마를 수입하고 하코트를 기병 고문으로 기용하며 제대로 된 기병대를 갖추게 된다.1차 대전 시점에선 강승보병부대의 전술 행동을 벤치마킹해 고전적인 운용법인 냉병기와 돌격은 물론 신속하게 하마해 분대 단위와 자동화기와 유탄을 퍼붓는 척탄병 역할까지 해내는, 충격력과 화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병종으로 거듭난다. 선두는 타이밍 잡아서 종심을 파고들고, 후발대는 보병 역할까지 해가며 돌파구 확대하는 게 철마 대신 말을 타고 있을 뿐 현대적 기갑부대와 완벽히 동일하다.
이런 선진적인 안목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병장교들에 의해 전차 도입과 기갑부대로의 개편이 추진된다. 기병이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깊은 전통을 갖고 있었던 유럽과 미국에선 기병대 장교들이 전차와 기계화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일찌감치 기병 전통이 소멸했다 1900년대 초반에야 겨우 일정 규모로 성장한 한국은 기병대 창설 기수가 그대로 1차 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젊었기에 군마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강철 군마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2.4. 기갑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서부전선 파견 가능성에 대비해 근위기병사단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브루실로프 공세간 장갑차의 활약을 지켜본 이후 적시에 지휘관이 원하는 곳으로 전개가능한 장갑차량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이에 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을 시작으로 수요가 정식으로 제기되었지만 병과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았는데. 포병은 이동식 포대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생샤몽을, 보병과 공병은 방어선 돌파를 위해 Mk 시리즈를, 기병은 단순히 참호돌파라는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전차를 기동자산으로써 인식하여 기동성이 좋은 슈나이더 CA1을 원하다가 상위 호환인 르노 FT가 나오자 르노 FT를 원했다. 최종적으로는 기병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주인공의 지식이 합세하여 르노 FT를 도입하게 된다.
단순히 르노 전차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리캔, 지휘전차, 구난전차의 개발, 전차보다 더 많은 지원차량 등 기갑의 역량을 100% 발휘하기 위한 각종 투자와 발전이 동시에 이뤄졌다.
전차를 단순히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한 이동식 토치카"로 인식한 지휘관, 개발자가 적지 않은 유럽과 달리 주인공에 의해 현대전의 편린을 계속 교육받은 대한제국군은 전차를 기동전력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교리를 연구하는 등 주인공에게만 기대지 않고 현대전을 준비하며 성장하는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2.5. 군수
군대는 보급 없이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고, 김시혁 역시 미래에서 군수를 소홀히하다 일어난 참사들을 목격했으며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여야 했던 만큼 발언권이 강해질 수 밖에 없기도 했다. 작품 속 대한제국군에서 군수의 발언권은 매우 강력한 편으로, 장작림과의 전쟁에서도 탄약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겠냐는 질문에 대해 군수참모가 가능하다고 답하고 나서야 작전을 시작하였고. 1차대전 동부전선 원정군을 편성할때, 김시혁이 물자들을 모스크바에 두자고 하자 군수국장인 민영찬이 아예 정색까지 하면서 지적했는데, 극동전쟁의 영웅이자 원정군 최고사령관인 그에게 대놓고 반대가 가능할 정도로 발언권이 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2.6. 의무
의무는 군수와 마찬가지로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는 과정에서 발언권이 강해졌다. 원정군 편성중에도 러시아의 질낮은 수질, 풍토병에 대해 여러 해결책을 내놓는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김시혁의 미래지식을 이용해 머큐로크롬[7]의 조기발견, 현대식 지혈대의 도입 등으로 사상자를 극적으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해당 의료품들은 협상국도 사용하며 큰 효과를 발하고 있다.2.7. 해군
원역사에서는 대충 구색만 갖췄던 해군이 여기서는 프랑스로부터 구축함 6척을 도입하고 관련 교육도 제대로 받은 나름 싸울수 있는 해군이 되었다. 본래는 추가로 어뢰정 6척도 갖춰질 예정이었으나 해군 양성을 견제하려는 일본의 순양함 판매라는 미끼에 넘어가 무산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자칭(?) 순양함인 양무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결과 양무호를 뺀 나머지 배들은 극동전쟁에서도 제대로 싸우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양무호는 전쟁 막바지까지 후방에 틀어박혀있다가 의외로 원산 상륙작전에서 활약해서 독자들 사이에선 군밤의 혜안(...)이라 불리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도 칭해지기도 했다. 전후에는 보로디노급 전함과 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까지 운용하며 성장중.[8]1차 세계대전 시점에 거제, 옥포, 부산 등에 조선소를 두고 있으며 소형 함정인 포함과 구축함을 자체 건조할 역량을 갖고 있다. 보로디노급 도입으로 기존 창설 계획이 어그러졌으나 육군의 도입에 한 발 걸쳐 어렵사리 해군항공대를 창설했고, 기지방호와 상륙작전, 육해군 통합작전을 수행할 해군육전대 창설도 확정되어 지휘부 구성을 마쳤고 첫번째 기수가 강화도와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3. 보병장비
3.1. 피복류
- 전투복
군사 개혁 시기 위장성을 위해 카키색 군복이 도입되었다. 이후 1913년에는 새로운 쑥색 군복이 채택되는데, 워커부츠, 야전상의 등 냉전기 시대의 군복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혼자 40년은 앞선 군복을 입고있는 셈. 예복과 정복의 경우 원역사의 대한제국 군복에서 프랑스풍이 가미된 형식으로 변화했다.[9] 여담으로 모장이 이화문에서 태극으로 바뀌었다.[10]
- 아드리안 철모
1차 대전 참전을 앞둔 시점에 박격포와 함께 도입된 프랑스제 철모. 고종은 조선 초에 쓰던 첨주형 투구와 닮았고 보다 저렴하단 이유로 영국제 브로디 철모를 밀었으나 방호 성능, 중량, 착용감, 편의성 등 모든 부분에서 아드리안이 우월했기에 김시혁은 이쪽으로 강행한다.
3.2. 소총
- 게베어 1871
청나라에 요청해 1000정을 받아온 것이 동학농민운동에서 친위영의 무장으로 사용된다.
- 모신나강
러시아 제국제 볼트액션 소총. 생산량의 일부를 러시아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조병창을 건설하여 생산하기 시작해 러일전쟁기에는 대한제국군의 제식소총이 되었다.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 중 하나인 아라사에서 따와 아식 보총이라 불리는데, 현실 한국에서 모신나강에 붙인 별명과 같다. 한국군 체형에는 너무 길고, 무겁다는 단점과 소총수의 실제 교전거리는 길어도 200미터 내외라는 극동전쟁에서 얻어진 전훈,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 기동전을 선호하는 한국군 교리등을 고려해 1910년부터 짧고 가벼운 개량형이 M91/10이란 제식명을 받고 개발되어 1915년 시점에 이미 북부 지역 부대들은 교체를 마쳤다. 단발속사가 가능한 베테랑들은 총알을 분무기처럼 뿌리는 강습소총의 특징을 못미더워하고 오히려 단축형 모신나강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 30년식 소총
일본군의 제식소총. 군제 개혁 와중에 고종이 미쓰이의 로비에 넘어가는 바람에 계획에 없던 3만 정이 도입되었다.[11] 극동전쟁을 앞두고 방어가 불가능한 남부 지역의 향교, 서원, 사찰 등지에 은닉해 두었다 현지 유격대에 보급되었다. 별도로 극동전쟁 중에 노획, 무장해제 과정에서 20만 정에 육박하는 수량을 확보해 종전 후 한동안 1.5선 장비로 쓰이다 민간에 불하된다.
이후 1차대전기에도 뜬금없이 대한제국 내에서 생산중이라며 등장하는데, 극동전쟁 당시 한국 해군의 통상파괴전에 시달린 일본이 소총과 소총탄을 현지에서 제작, 보급할 요량으로 용산에 30년식 소총, 6.5mm탄 제작 설비와 숙련공을 들여와 조병창을 구축했지만 대한제국군의 반격으로 패주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한국 손에 넘겨주게 된다. 뜻하지 않게 생산설비를 획득한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일본제 소총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된다. 군에서는 모신나강에게 밀려났으나 여전히 치안이 불안한 남만주 정착촌 등 민간에서는 인기가 좋아 미쓰이 사와 협력해 인력과 기계 설비를 보충하고 매월 10만발 가량의 6.5mm 탄환을 생산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 M16 강습소총/강습기병총[12]
다가오는 1차대전과 그 이후를 걱정하던 김시혁이 기관단총과 돌격소총을 보급하고자 했으나 서로의 문제로[13] 인해 고민한 끝에 민간 기업인 홍익 정밀과개연성 그 자체존 브라우닝과 조나단 브라우닝 형제, 현지 협조를 위한 외국 총기 기업 윈체스터 사 섭외를 통해 제품화에 성공했으며, 사용하는 탄환도 보틀넥 구조, 스피쳐 탄두를 적용하는등 개선되었다.[14]
이후 강습보병대에 선지급되어 1914년 장작림 토벌에서 실전성을 인정받았고 1차 대전 참전이 확정된 1915년 예정보다 빨리 대량 생산에 돌입한다. 본래는 1916년부터 본격 생산될 예정이었기에 군 제식명은 M16. 홍익정밀에서 붙인 상품명은 최초 독자모델 총기라는 의미에서 M1. 한국군 외에 미군과 프랑스군이 소량 도입해 운용중이며 프랑스군 운용분을 노획한 독일군도 이 총의 존재와 성능을 확인한다. 독일군 역시 이 총을 매우 높이 평가해 그대로 카피해서 만들 것이냐 vs 자국 기술력으로 새로 만들것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최종적으로는 군수역량의 한계 등으로 권총탄을 사용하는 근접전용 자동화기 선에서 타협, 원 역사에서 MP18이라 명명된 기관단총이 MP17이란 제식명을 달고 1년 이른 니벨 공세때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 아브토마트
강습소총이 러시아군에 소개되고 좋은 평가를 받아 개발과 양산이 탄력을 받게 되었고 쇼샤의 활약으로 더욱 필요성은 늘었으나 열악한 러시아 제국의 공업능력으로 한국에서 양산해줄 수 있을지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에 위치한 조병창들은 강습소총 및 러시아 지원용 소총 양산도 밀려서 불가능했고 이에 수소문 하던중 김시혁의 장인이 소유한 공장에 제작에 필요한 설비도 있겠다, 사용탄인 6.5mm까지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이쪽에 부탁해 양산을 시작한다.
- BAR
강습소총을 설계한 후 자동화기에 대한 관심이 커진 브라우닝이 원 역사보다 몇 년 빠르게 내놓아 1차 대전 참전 이전에 미군에 M1917이라는 제식명으로 채용된다.
3.3. 권총
- 콜트 뉴 서비스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 작중 물주 포지션인 최씨 어르신의 회사 "홍익정밀"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맡는다.
의화단 사건을 대비하여 강습보병대대 전원에게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지급되고 있다.
- C96
작중 홍범도가 가진 이질적으로 생긴 권총이라며 흘러가듯 묘사된다.
3.4. 기관총
- 맥심 기관총
러시아가 맥심 기관총을 대량 구매하던 시기를 잘 타고 들어가 1890년대 말경부터 도입하였다. 극동전쟁기의 대한제국군은 맥심을 지방군 진위여단에 6정씩, 중앙군(근위사단, 강습보병연대, 기병연대)에는 대대당 6정씩 배치하였다. 1900년대 초 당시 타국군은 여단, 사단에나 1~2정이 배치되는게 평균임을 감안하면 매우 많이 편제된 것이며, 이를 통해 침략한 일본군을 갈아버린다. 사용 탄환은 모신나강과 동일한 7.62x54mmR.
- 마드센 경기관총
세계 최초로 실용화 된 경기관총. 러시아와 공동으로 구매하여 극동전쟁기에는 강습보병연대와 기병연대에서 중대에 6정씩 보급했으며 1차대전기엔 권총손잡이가 붙고 소염기도 장착하는 등 개선된 버전을 동부전선 원정군을 기준으로 일반 보병 분대마다 1정, 강습보병에겐 분대당 2정을 지급했다.
3.5. 산탄총
- 윈체스터 M1897
의화단 사건 때 공사관 경비대가 사용. 시가지에서 강력한 근접화력으로 의화단과 폭도들을 막아내거나 길을 뚫는데 쓰였다. 깨알같은 슬램파이어 묘사가 백미.
- Auto-5
반자동 산탄총. 제식화기는 아니지만 징발한 총포상에서 가져온 오토-5들이 백병전, 시가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김시혁이 M16 개발을 위해 장인을 찾았을 때 언급된 바에 의하면 포수와 순검들에게 인기만점으로 민간 총포시장에선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3.6. 폭발물
- 다이너마이트
의화단 토벌 때 수류탄처럼 사용했다.
- 수류탄
보병싸움의 핵심이 되는 폭발물. 마찰점화식 신관을 이용한다. 의화단 토벌 때 사용한 다이너마이트가 불편함이 많다는 지적 아래 개발되었다. 고종이 즉위 40주년 기념 열병식에 쓸 공포탄을 제작한다며 포공국 예산을 모조리 끌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엎어질 뻔 했던 걸 김시혁이 국내외 인맥을 총동원해 민간 기업에서 개발에 성공했다. 극동전쟁에서 이를 노획한 일본군도 손쉽게 복제해서 사용한다.
- 척탄통
유탄발사기와 수형 박격포 사이에 걸쳐있는 지원화기. 위의 수류탄을 탄약으로 하며[16] 수류탄이 개발될 때 함께 개발된다. 원 역사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것을 김시혁이 훨씬 빠르게 도입한 것으로 수류탄과 함께 보병의 화력 강화와 능동적인 전술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반 보병과 강습 보병을 가리지 않고 운용한다.[17] 극동전쟁에서 이를 노획한 일본군도 똑같이 복제해서 도입한다.
- 돌폭뢰
극동전쟁 당시 한국군이 사용한 푸가스. 아직 개발되지 않은 클레이모어의 역할을 대신해 원산 상륙작전 때 6백의 병력으로 2만의 일본군을 저지하는 데 공헌했다. 포로로 잡힌 한 일본인 장교가 이런 무기를 쓰는 건 반칙이라는 사용자 입장에선 극찬을 남기기도. 1차 대전 때는 독일군 불발탄까지 가져다 훨씬 큰 스케일로 써먹는다.
- 깡통 수류탄
다 먹은 통조림 깡통에 화약과 쇳조각을 가득 채우고 시한신관이나 수류탄 신관을 박아 제작한 급조 수류탄으로 잼 깡통 수류탄(Jam Tin Grenade)이란 명칭으로 협상군, 동맹군 가리지 않고 실제로 애용했던 무기. 엄폐호에 깊숙히 숨은 적이나 요새화된 진지 공략시 일반적인 파쇄 수류탄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작한 장비로 일반 수류탄 3발로 해치울 목표를 깡통 수류탄 1발로 해치울 수 있을만큼 위력은 강력하나 그만큼 피해 범위가 넓고, 급조된 물건인 만큼 자칫 사용자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의화단 토벌 때 공업용 다이너마이트의 신관을 잘라서 집어 던졌던 선배들을 기억하는 강습보병대는 위험성엔 크게 개의치 않고 참호선을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는 전술적 이점에 주목해 절찬리에 사용했다.
- 관형폭약
1차대전에서 철조망 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첫 출현.
- 도약지뢰
위력은 덜해도 제조 자체는 1차 대전 기술 수준으로 충분히 가능해 본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등장한다. 1935년은 되야 나올 물건을 양산해서 하필이면 독일군에게 사용하고 있다.
4. 중화기
4.1. 박격포
2부 프롤로그에서 박격포의 시안이 등장했으나, 대량 생산은 아직이라며 잠깐 언급된다. 1차 대전 참전을 목전에 두고 철모, 방독면 등과 함께 대량 생산에 착수한다. 구경은 60mm와 80mm이며 제식명은 불명.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동부대에 신속하고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기에는 기존 박격포로 부족하다는 전훈이 받아들여져 포공국에서 개발한 신형 120mm 중박격포를 전차대대 당 9문, 보병연대 당 12문씩 배치하는 양산 계획이 수립된다.4.2. 야포
- 1897년식 75mm 야포
프랑스제 75mm 야포. 세계 최초로 주퇴복좌기를 장착한 야포로 극동전쟁에서 대한제국군의 주력 야포로 활약한다. 극동전쟁 이후 개량을 거쳐 18도에 불과했던 포각이 45도까지 늘어나며 부족했던 사거리와 전술 유연성을 챙겼다. 극동전쟁 승리에 빼놓을 수 없는 무기지만 평사포라 살상력이 떨어지는 단점은 어쩔 수가 없었고 전후에 모든 물량을 곡사포로 개량했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되고 도입된 외국산 트럭에 이 야포를 실고 움직이는 기동포병대를 신설, 제2강습보병여단 예하로 배속시킨다.
- 1913년식 105mm 야포
프랑스의 슈나이더 사가 제작한 105mm 야포. 슈나이더 사는 원래 프랑스군 도입을 노렸으나 프랑스군이 이를 도입하지 않자 새로운 고객으로 대한제국을 골랐으며, 마침 화력보국[18] 이라는 이름하에 건실한 포병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와 맞물려 도입은 물론 아예 공장을 차려 라이센스 생산까지 하게 되었다. 다만 원역사의 105mm와 큰 차이가 있는데, 원역사에선 평사포로 개발된 105mm 야포지만 작중의 1913년식 105mm 야포는 곡사포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곡사포의 지형 극복능력을 고평가하는 한국군 포병의 입김이 제작간에 반영되어 생긴 차이점인 듯 하다.
특이하게도 김시혁 본인이 초도도입량을 2분의 1로 줄이는데 찬성하였는데 대한제국군이 이를 재대로 운용할 교리, 기반[19]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후 이 야포도 결국 프랑스군에 도입되긴 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독일군의 대공격으로 포병 자원이 슬슬 딸리던 프랑스가 마침 대한제국에 포장도 안뜯은 105mm 야포들이 있는 것을 보고 급하게 비밀리에[20] 도입해 온 것.
- GPF 155mm 야포
프랑스가 개발한 155mm 장포신 평사포. 사거리 19km. 군수산업 역량이 한계에 달한 프랑스는 미국에 설계도를 제공해 이 포를 양산하려 했으나 그놈의 야드-파운드를 SI단위계로 어떻게 치환하는지를 몰라서 미국이 오히려 프랑스에 공장 좀 세워달라고 청하는 지경에 이르자 협상국의 병기창을 자처하고 나선 한국이 끼어들어 생산량의 미국과 프랑스에 각각 생산량의 3분의 1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설계도를 넘겨 받는다. 한국은 105mm/155mm로 구성된 포병사령부 중포여단을 신설하고 장기적으론 105mm 대대 2개와 155mm 대대 1개로 구성된 현대적 포병연대를 결성하고자 한다.
- 31년식 75mm 야포
일본군의 주력 야포. 주퇴복좌기가 없는 구식화포로 분당 2발이라는 느린 발사속도를 가졌으며, 포방패의 부재로 운용병이 파편이나 적의 소총 사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약점이 있다. 극동전쟁 기간내내 일본군 포병이 한국군 포병에 밀린 원인. 전쟁 후반기에는 한국군 포병을 흉내내 급조 포방패와 간이 간접 관측 장비를 부착한 현지 개량형이 등장한다.
5. 탑승물
5.1. 전차
- 마크 전차
세계 최초로 실전에 등장한 전차이자 육상전함(Land ship)이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가진 전차. 솜 전투에 첫 등장한 이후 언론을 통해서도 대한제국에 알음알음 알려져있던 모양새로, 전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자연스레 후보중 하나가 되었으나 너무 비싼 가격, 느린 기동성, 영국 스스로 쓰기도 모자라 발주한 물량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점으로 인해 탈락한다.
- 생샤몽
프랑스제 전차. 75mm라는 고화력 주포를 탑재하여 포병의 관심을 끌었지만 후보 선정 과정 중 탈락했다.
- 슈나이더 CA1
기갑을 기동자산으로써 인식한 기병이 후보로 선정했지만 후술할 르노 FT의 등장으로 후보에서 탈락한다.
- 르노 FT
상술한 병과들간 설전과 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을 지켜본 주인공이 내놓은 해답. 기가막힌 타이밍[21] 덕에 싼값에 도입하게 되었고. 따따블 커미션[22]과 균형 잡힌 성능, 영국제에 비해 월등한 편의성, 밀덕후의 미학을 만족시키는 디자인, 무엇보다 당해년에 초도 물량 공급, 2년안에 250대 공급이란 막강한 생산성으로 칭제건원 20주년 열병식에 내보일 장난감이 필요했던 고종의 마음도 사로잡는다.
김시혁은 모든 차량을 주포가 달린 수컷형으로 통일하며 일부 차량을 내부 무장을 탈거하고 무전장비와 무전병이 들어가는 지휘전차, 차체를 베이스로 한 구난전차로 전용해 발주, 최종적으로 전차대대당 수컷형 르노 45대, 구난전차와 지휘전차 각 5대 배치가 결정된다. 이 쇳덩어리들에 빠르게 유류를 보급할 방안을 고심하며 머리 싸매는 군수책임자들에게 김시혁이 아이디어를 제공해 수십년 빨리 제리캔이 개발된다.
5.2. 장갑차
- 오스틴 장갑차
공세를 앞둔 브루실로프가 러시아군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주목한 병기 중 하나. 푸틸로프 - 가포드 장갑차와 함께 장갑대대를 구성한다. 독일에 전적으로 의존한 대가로 차량도, 정비 물자도 극히 부족했던 러시아군에서 귀하디 귀한 병기로 본래 43개 소대로 쪼개져 운용했으나 소규모 제대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12개 대대로 재편되어 브루실로프 손에 쥐어쥔다. 브루실로프가 직접 한국군 지휘부를 방문해 코벨 방면 공세를 부탁할 때 2개 대대가 넘겨져 대한군의 예비대로 편성된다.
- 푸틸로프 - 가포드 장갑차
오스틴 장갑차와 함께 장갑대대를 구성하는 차량. 대한제국군의 코벨 공세때 오스틴 장갑차와 함께 2개 대대가 넘어왔으며 오스틴 장갑차가 기동성을 활용한다면 푸틸로프는 화력 지원을 담당한다. 장갑차는 대단위 부대를 딸려 공세의 창끝으로 활용하는 게 1차 대전시기 군대의 일반적인 운용법이나 미래인 김시혁은 정예 강습보병과 묶어 기동예비대로 사용했다.
- 롬펠 장갑차
오스틴, 가포드 장갑차에 대응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장갑차량. 루츠크 방어선 전면에 배치되어 러시아 근위대의 공세를 저지한다. 투박한 러시아 장갑차와 달리 메르세데스 차대를 기반으로 한 우아한 디자인이 특징.
5.3. 차량
- 리버티 트럭
표준화 개념을 정착시켜 어느 공장에서 생산되든 완벽히 동일한 규격을 자랑하는 미군의 군용 트럭. 24km의 준수한 속도, 빼어난 험지 주파능력과 내구성을 갖춘 준수한 차량으로 한국군의 영향을 받은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등장으로 미군의 군사 개혁이 탄력을 받으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대량 배치된다. 한국은 1차 대전 참전을 준비하는 미군을 거들고 병기창 역할을 해주는 대가로 1,500대를 공짜로 배분받아 한창 기갑 장비 도입을 추진하던 기병대에 우선적으로 배치한다. 이 과정에서 포병 자산의 기동화를 추진하던 포병대가 기병대와 마찰을 빚기도.
5.4. 군함
- 아퀘부스급 구축함
프랑스제 구축함. 배수량 323톤의, 현대 기준으로는 대형 고속정 수준의 체급이지만 이 시대엔 어엿한 정식 군함. 주포는 러시아 해군과 규격을 통일해 75밀리로 강화했으며 외에도 47밀리 속사포 6문과 15인치 어뢰발사관 2문으로 무장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 시점에서는 상당한 고속인 최대시속 28노트로 항해가 가능하다. 극동전쟁 직전까지 6척이 도입되어 전쟁 기간 내내 활약했다. 2부 시점에서는 구형함으로 분류되어 신생 중화민국 해군에 제공할 계획이었으나 소형함 건조 역량이 무너져 고생하던 프랑스 측에서 전후 새 구축함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아퀘부스급 6척을 모두 넘겨 달라는 제안을 해온다. 중화민국과의 외교 문제를 우려한 대한은 아퀘부스급 대신 아퀘부스급 기반으로 자체 건조한 구축함을 판매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 양무호
대포 한 방 안 쏘고 한국 해군 전력에 구멍을 내고 프랑스와의 밀월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는 일제의 음흉한 속내에 고종이 넘어가 떠맞게 된 폐급 함정. 원 역사에서는 해군 육성을 위한 훈련함으로 도입되어 낡았어도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지만 역사가 바뀌어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저 큰 배가 가지고 싶은 고종의 욕망을 일제가 부채질하면서 어거지로 도입하게 된다. 엔진부터 시작해 모든 설비가 구닥다리에 폐선 직전 함정이라 내파성과 데미지 컨트롤이 취약하고 조함도 어려워 인수 요원이었던 부제독 이동휘는 마지막까지 도입에 반대했으나 친일파이자 고종의 총신인 이근택은 무시하고 인수를 진행시킨다.
양무호의 무리한 도입으로 해군은 본래 도입하려 했던 프랑스제 어뢰정 6척 도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막대한 유지 비용과 인력 소모까지 떠맡게 되면서 창설 당시부터 위태위태했던 고종과 해군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붕괴되고 만다. 워낙 성능이 쓰레기다 보니 극동전쟁 발발 이후에도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방치되어 있었으나 원산 상륙작전을 앞두고 뜻밖의 중임을 맞게 된다. 한국 해군이 보유한 함정 중에 대대급 병력과 중화기를 한 번에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함정이었기 때문.
낡아빠진 배로 한 겨울 악기상을 뚫고 일본군 감시망에 들키지 않으며 원산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지만 해안선을 따라 일본측 해안 초소들을 걷어내며 남하한 원수부 직할 병력과의 합동으로 기어이 성공시킨다. 한국 해군을 약화시키기 위해 떠넘긴 이 배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던 일본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고 전후 군부가 외무성에 패전 책임을 떠넘기는 명분 중 하나로 써먹는다. 군부는 최선을 다했으나 무능한 관료들이 적의 비수가 될 순양함을 팔아 먹어 패하고 말았다는 논리.
석탄 먹는 애물단지이자 해군 전력 구성에도 피해를 준 놈이지만 동시에 원산 상륙작전을 이끌어 극동전쟁 승리를 확정지은 이 애증의 함선을 잊을 수 없었던 해군은 전함에 딸린 소형 보트에 양무라는 애칭을 붙여 기념하고 있다.
- 보로디노급 전함
러시아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본디 대한제국 해군은 33함대라는 함대구축 계획을 세워 방호순양함을 우선 도입해 거함 운용법을 익히며 서서히 전함을 도입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도입이 되었다. 그 과정이 기가 막힌데 일본이 극동 전쟁 중 자신들이 격침시킨 제1태평양함대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을 건져서 수리해 쓰자 러시아에서 전함 반환을 요구하며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고종이 끼어들어 저 전함 4척의 일본행을 묵인하는 대신 러시아가 보로디노급 전함 1척을 대한제국에 팔아달라고 요청한 것. 당연히 원래 같다면 못 먹는 감 찔러나보자는 거지만 주변 상황이 기가 막히게 돌아가며[23] 실제 전함 도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보로디노급 전함 중 3번함인 오룔이 대한제국으로 들어와 충무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도입과정에서 잡음이 정말 많았고 해군과 고종은 다시 한 번 틀어지지만, 전함이 곧 국력의 현시이던 시절에 북양 군벌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였으며 거대한 전함을 본 민간의 마음도 사로잡아 해군 지원자가 폭증하는 등 해군도 나름 득을 본다.
1차 세계대전 때 대한제국 원정함대의 기함이 되어 지중해에 투입되었다. 전드레드노트급이라 해도 어엿한 전함이 들어오는 것이다 보니 오헝 제국 해군과 지중해 파견 독일 제국 유보트들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고 언급되며 이탈리아 해군도 이를 탐내서 대한제국 해군의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을 정도다.
- 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
대한제국 해군이 보로디노급 전함과 함께 들여온 순양함으로 급작스레 들여온 보로디노급 전함과 달리 처음부터 계획해서 증여받은 함선이며 한국에 와서 오룔이 충무함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받았듯 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도 경기도에서 따온 "경기"라는 한국식 이름을 받게 된다. 증여받은 뒤 1차대전 시점까지도 운영중에 있는데 대한 해군에서도 낡아빠진 구닥다리 함장이란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자체 건조 가능한 함정이 소형 구축함과 포함 밖에 없는 한국 해군 현실상 몇 안되는 대형함이라 구주 원정함대에도 당당히 포함되어 지중해로 향한다.
- 경기급 구축함
극동전쟁 때 운용한 아퀘부스급의 영향을 받아 설계한 400톤급 소형 구축함. 최초의 전력 강화 구상에선 주력 구축함으로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유럽에서 구축함들이 대형화되는 추세가 자리잡고 일본이 배수량 1천톤이 넘는 우미카제급 구축함을 개발하자 급선회. 한산급 구축함에 자리를 내준다.
- 한산급 구축함
유럽의 구축함 대형화 흐름과 일본의 우미카제급 개발에 자극받아 탄생한 한국 해군 주력 구축함. 30노트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는 800톤 이상 대형 구축함을 목표로 마침 부클리에급의 결함으로 울상을 짓던 프랑스와 합작으로 설계에 들어간다. 만재 1,050톤에 최대속력 32노트, 무장으로 프랑스제 100mm 주포와 러시아제 75mm 부포 4문, 450mm 어뢰발사관을 갖췄다. 초도함에 으레 따르는 결함을 감내하기 싫어 한국에 양보한 프랑스도 성능에 만족해 곧장 양산에 착수, 앙세뉴 루급이란 제식명을 붙였다. 앙세뉴 루급은 언니인 한산급과 달리 자국산 65mm 4문을 부포로 사용하는 차이점이 있다. 설계에 프랑스가 참여했기에 함수에 와인저장고가 존재하는데 한국 해군은 여기다 김치나 장류를 보관하고 있다.[24]
5.5. 항공기
- 파먼 III
한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항공기. 기초적인 복엽기라 정찰 용도로만 활용했다. 본래는 육군만 사용하고 해군은 따로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고종의 욕심으로 도입된 보르디노급 전함 탓에 해군이 세워둔 건함 계획이 다 꼬이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육군에 협조를 구해 나눠 사용했다. 한국군이 신형 장비를 도입하면 일단 따라하고 보는 일본도 뒤따라 도입.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뉴포르로 교체된다.
- 뉴포르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되어 항공 전력 강화가 절실한 시점에 브루실로프의 주도로 공군력 강화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군이 도입할 때 함께 도입한다. 탁지부에선 예산 문제로 난색을 표했으나 삐까번쩍한 신형 장비라면 사죽을 못쓰는 고종이 내탕금까지 꺼내며 열렬히 지지한 덕분에 도입에 성공. 정찰기인 뉴포르 10과 전투기인 뉴포르 11이 도입되어 항공정찰,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서부전선 참전을 계기로 스패드로 교체.
- 일리야 무로메츠
러시아군이 자랑하는 폭격기. 뉴포르10, 11과 묶어 초기형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한다. 수적 우위를 앞세워 달려드는 포커 전투기의 맹공을 특유의 단단함으로 버텨내며 공중포병 역할을 수행해낸다.
- 스패드
1917년 배치되기 시작한 프랑스의 신형 전투기. 한국군의 서부전선 참전에 대한 대가로 먼저 접촉한 일본과의 계약을 엎어버리고 우선 공급을 약속, 스패드 7과 12가 지급되어 뉴포르를 대체한다.
5.6. 군마
작중 조선-대한제국군이 최초로 사용한 탑승물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김시혁이 김석중을 시켜 말 잘타는 병사들을 모아 만든 임시 기병대는 당시 있던 말을 되는데로 끌어모아 만든터라 제대로 된 군마를 타진 못했다. 제대로 된 군마는 1차 친위쿠데타 이후 러시아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러시아에서 들여왔으며 1차 대전 시점에서는 하코트나 얀코프스키 같은 민간 업자들에게서도 구매하고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알 토르자 장군에게 군마 양산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한다.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제1근위기병사단이 기계화 사단으로 개편되며 조금씩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한다. 한국 육군의 상비사단 규모가 작고, 남만주 전체를 기계화 사단 하나로 커버하는 건 불가능한데다 헌병대와 경무청 수요도 있어 완전히 물러나는 일은 한참 뒤겠지만.
[1] 작중 구호나 역할을 보면 미군의 제75레인저연대를 모티브 삼은 게 확실하다. 레인저 연대처럼 특수부대와 정예 경보병대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새로운 장비나 전술을 도입할 시 최우선 적용해보는 교도대 성격도 띄고 있다. 작중에서 레인저란 명칭을 부여해준 사람은 미국인 고문관 하코트. 본국 레인저들과 임무와 성격이 겹치는 정예 보병들을 레인저라 불러주자 뜻이나 유래는 잘 모르면서도 어감이 강렬하고 멋있어 적극 채용했다.[2] 1차 세계대전 중후기에 들어 동맹국/협상국 양 진영에서 수렴진화하듯 등장하여 현대에까지 큰 틀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 보병전술의 기본 전제이다.[3] 강습부대-> 중앙군 근위사단-> 지방군 여단[4] 1차 대전 기준으로 서방에서 가장 전술적으로 뛰어난 군대인 독일 제국군이 전술 단위를 중대까지 내린 교리를 정착시켜가는 상태였는데 동시기 한국군은 강습 보병과 일반 보병을 가리지 않고 분대 단위로 원활한 전술 행동이 가능했다.[5] 포병학교 교도대대 1개 포대, 중앙군 4개 대대, 지방군 6개 대대[6] 실제 러일전쟁 중후반경에야 러일 양국 포병에서 지형지물을 끼고 엄폐한 간접사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전훈은 독일군같은 일부 열강 육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1차대전 개전시점에서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다.[7] 머큐로크롬의 발견 자체는 1900년대 초였으나 미국의 휴 H. 영 박사에 의해 살균효과가 있음을 발견된 것이 1918년이다.[8] 다만 보로디노급 전함의 경우 해군에겐 영 좋지않은 루트로 도입하였다. 이에 대해선 하술.[9]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원역사의 대한제국 군복도 프랑스 군복을 모방한 일본군의 군복을 모방한 것이니 원점회귀라고 할 수 있다.[10] 사소한 것 같지만, 군의 상징이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에서 태극기의 태극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한국군이 더 이상 황제만의 군대가 아닌 국민의 군대로 거듭났다는 걸 나타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11] 이때문에 하마터면 모신나강 도입을 말아먹을뻔 하였고, 30년식 값을 군 예산이 아닌 내장원 자금으로 지불하여 고종의 독단적인 지름으로 마무리하였다.[12] 기병총버전은 M1A1카빈처럼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했다.[13] 기관단총의 문제로, 당시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탄은 림드탄이여서 자동화기인 기관단총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새로운 권총탄을 채택하자니 해당 권총탄을 사용할 권총도 새로 보급해야 하는등 문제가 있다. 거기가 작중 대한제국군은 보병간 교전거리를 200m 내외로 보는데 기관단총의 교전거리는 길어봐야 100~150m라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고 돌격소총을 만들자니 기술부족으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워질것을 우려해야했다. 예시로 최초의 돌격소총으로 알려진 StG44의 무게가 5kg에 육박하고, 절삭가공으로 제작하던 초기형 AK-47도 4.3kg이 나간다. 대한민국 제식소총 K2 소총의 무게가 3.3kg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무거운 것. 이에 고민하던 중 꼭 둘중 하나만을 고를 이유가 없으며, 그 중간이라 부를 수 있는 M1 카빈을 제작하여 지급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자동사격이 기본으로 지원되는 것을 보면 M2 카빈에 가깝다.[14] 탄을 이렇게 만들 경우 정확한 위력은 화약의 양이나 탄두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치수 상 가장 비슷한 탄은 StG44에 사용된 7.92×33mm이다. 설정화에서는 탄 규격을 7.62×33mm로 명시하고 있다.[15] 당시에는 기관총을 포병이 운용했기 때문에 총이 아닌, 포라고 불렀다.[16] 척탄통에 쓸때는 신관을 충격신관으로 교체하고 밑바닥에 추진장약을 부착한다.[17] 극동전쟁기에는 중대 직할, 1차대전 시기에는 소대 직할, 구주원정군은 분대당 1문 편제[18] 강력한 화력이 부족한 인력을 매꿔주고, 인명손실을 줄여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들겠지만 이를 도입하지 않을때 전쟁에서 일어날 피해에 비하면 적을것이라는 논리에 의해 생겨났다.[19] 한국전을 예시로, 105mm 야포 대대를 재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차량이 최소 50대 이상이 필요하며, 자동차 기술이 아직 미비한 시대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차량이 필요할텐데 대한제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 군마로 수송하는 방안도 있지만 중포를 무리하게 견인하다 폐사해버린 것을 예시로 들며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20] 당시 대한제국은 남만주 문제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가져오는 건 무리였다.[21] 당시 프랑스군은 이 전차를 400대를 계약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어림도 없어서 해외에서 판로를 찾던 중이였다. 며칠만 늦었어도 마음을 바꾼 프랑스군이 1000대의 계약을 맺게되면서 싸게 팔 이유가 없어졌겠지만, 그걸 알고있는 건 미래인인 김시혁 뿐이였다.[22] 오사카 주식시장에 몰래 투자했다 물려서(...) 벌충할 돈이 필요했다.[23] 당시 드레드노트급 함선이 등장하며 러시아 역시 드레드노트 도입을 위해 준비중인 상황에서 남아있던 보로디노급 전함들이 애물단지가 되가고 있던지라 빠르게 처분하길 원했고 마침 태평양에서 활동할 제2중대의 개념으로 우방인 한국 해군을 강화시킬 명분도 있었다. 거기다 나머지 열강들도 전함 1척 가지곤 균형이 깨지진 않을거라 판단했다. 그나마 반발할 여지가 있던 일본 같은 경우에도 당장 전드레드노트급 4척을 얻은데다 어차피 대세는 드레드노트급이 될테니 한국이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2척 갖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본인들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다.[24] 하필 이 음식들이 발효음식이다 보니 이를 알게 된 이탈리아 해군 장교들이 얘들 이상한 거 먹어요!라고 난리를 쳐서 한국 해군 지휘부가 진땀을 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