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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20:49:56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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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사개혁
2.1. 보병2.2. 포병2.3. 기병2.4. 기갑2.5. 군수2.6. 의무2.7. 해군
3. 보병장비
3.1. 피복류3.2. 소총3.3. 권총3.4. 기관단총3.5. 기관총3.6. 산탄총3.7. 대전차화기3.8. 폭발물
4. 중화기
4.1. 박격포4.2. 야포
5. 탑승물
5.1. 전차5.2. 장갑차5.3. 차량5.4. 군함5.5. 항공기5.6. 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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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전술, 무기체계를 서술한다.

2. 군사개혁

주인공 김시혁이 미래인인 덕에 당대 모든 군대들이 겪은 실책과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으며, 정답만을 선택해 개혁을 추진중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기존 오군영 체제 및 신식군으로 육성되고 있던 별기군이 붕괴되고 청,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군사 육성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군 조직과 전통, 문화가 사라져버린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전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걸림돌이 없어지는 효과로 나타났다.

2.1. 보병

의화단 사건 개입을 앞두고 강습보병대대라는 중앙군 직할대를 만들어 현대전에 적합한 새로운 보병전술과 편제를 등장시켰다.[1]

밀집하면 강력한 현대 무기의 살상력에 쉽게 표적이 되어 희생되기 쉽기에, 전술제대의 최소단위를 소대까지 낮추고, 분대급 이하에서 각개전투가 가능하게 만들어 적의 화력으로부터, 은엄폐/침투기동이 용이하게 개편하는 한편, 전술단위의 소형화로 인해 수반되는 화력의 약화는 경기관총, 수류탄, 척탄통 등 이전 같으면 포병 등의 타 병과에서나 운용했을 장비를 보병 소부대에 편제시켜 보완, 치명성을 극대화 하는 방향을 추구,[2] 강습보병대대에 현대식 보병전술을 먼저 습득시킨 뒤 점진적으로 전군에 확대하여[3] 대한제국을 세계에서 제일 진보된 보병 및 보병전술 보유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타국에 비해 20년 가까이 새로운 방향성을 조기에 완성한 것만으로 충분히 현대 군사사에 길이 회자될 업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4]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협상국의 군비 지원이 가시화되자 이에 힘입어 꾸준히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를 테면 보병대대와 중대에는 박격포공용화기로 편제되기 시작하였고, 1부에서는 강습부대나 기병연대, 근위사단같은 중앙군 부대만이 중대에 6정을 간신히 편제시키던 경기관총이 원정군 보병분대에서는 분대당 1정, 원정군 강습분대에는 분대당 2정까지 보급량이 늘었으며, 보병분대의 구조 역시 현대화되었다.

원정군 보병분대는 소총수 위주의 소총조와 경기관총 위주의 지원조로 나뉜 전간기~현대 유럽식 체제고, 원정군 강습분대의 구조는 냉전기에 완전히 정착된 미국식의 사격조 체제다. 이에 관한 대체역사 갤러리의 분석/설명

또한, 강습보병을 단순한 정예보병부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자전거 보병으로 개편, 트럭으로 움직이는 기동포병대 배속 등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가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미국에서 리버티 트럭이 도입되고 근위기병사단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예하 보병연대들을 차량화보병으로 개편, 분대당 차량 한 대씩을 돌려 연대 전체가 150대 이상의 차량을 운용하는 호화로운 편제를 구성한다.

2.2. 포병

군사개혁 과정에서 주퇴복좌기를 최초로 적용한 현대식 야포인 프랑스제 Mle1897을 대량으로 도입, 1부 완결시점에서 육군은 교육부대 1개 포대와 10개 포병대대,[5] 해군은 러시아제 152밀리 해안포 6문과 프랑스제 야포 1개 대대를 운용하는 현대식 대규모 현대식 포병전력을 운용하고 있다. 해당 야포가 원래 설계상 곡사포가 아닌 평사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측반, 야전 통신수단과 연계된 간접사격을 구사하고 있는데, 야전포병은 표적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하던 것이 일반적이던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된 포병전술을 구사하는 셈이다.[6] 또한, 일본군의 야포들이 주퇴복좌기가 없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점을 이용해, 높은 연사력과 수준 높은 전술로 부족한 수량을 만회, 대포병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기초적인 TOT사격까지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대신 이런 연사력 높은 야포의 대량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대량의 포탄 소모가 수반되며, 극동 전쟁과 1차 세계대전 내내 열악한 교통 인프라와 맞물려 전쟁수행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시기 강승보병대가 차량으로 견인하는 75mm 포대를 배속받아 포병 자산의 기동화가 시작되었으며 동부전선 귀환 후 155mm 중포와 미국제 트럭 대량 도입으로 화력과 기동성이 일신된다.

이후 브루실로프 공세가 끝나고 성급하게 시작된 러시아의 추가공세가 실패하고 그동안 얻은 영토들을 잃고 코벨까지 다시 잃을 위기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첫 화학탄 포격을 하는데[7] 이때 현대적인 화학탄 교리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화학탄을 적 방어선에 직접 투발하는 방식이였는데, 방어선에 잔류한 작용제가 이후 진군하는 아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진격을 늦추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은 고농도의, 잔류시간이 긴 작용제를 적 부대의 후방에 투발하여 적이 퇴각하거나 증원이 오는것을 차단하고, 방어선 전면에는 잔류시간이 짧은 작용제를 투하함과 동시에 전선 곳곳에 일반 포격을 섞어 포격함으로써 적에게 포탄에 맞아 죽을지, 가스에 질식해 죽을지, 아니면 큰 희생 끝에 빠져나와 만신창이가 된 채 한국군과 맞붙을지에 대한 죽음의 삼지선다를 강요하고 고착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방어선 전면에 투하된 작용제는 지속시간이 짧아 아군이 진격할때 피해도 적어지는 것도 장점. 이를 이용해 오스만군 19사단을 괴멸시키고 동맹군 군단의 진격을 멈춰세우며 코벨을 지켜내는데 큰 활약을 했다.

시간이 지나 서부전선에 참전할때는 프랑스에서 GPF 155mm 야포 설계도를 받아[8] 라이센스 생산을 시작하며 재대로 된 중포 생산과 운용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2.3. 기병

2차 대전 시기까진 현역이고, 본격적인 전차차량화보병이 등장하기 전 유의미한 기동전력으로써 잘 써먹는다. 대한제국은 베이스도 거의 없다보니 개선 작업이 오히려 쉽게 이루어졌고, 1차 친위 쿠데타 당시 들어온 러시아 카자크들에게 기병 훈련을 맡겼으며 이후 러시아에서도 군마를 수입하고 하코트를 기병 고문으로 기용하며 제대로 된 기병대를 갖추게 된다.

1차 대전 시점에선 강승보병부대의 전술 행동을 벤치마킹해 고전적인 운용법인 냉병기돌격은 물론 신속하게 하마해 분대 단위 소전투부터 자동화기유탄을 퍼붓는 척탄병 역할까지 해내는, 충격력과 화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병종으로 거듭난다. 선두는 타이밍 잡아서 종심을 파고들고, 후발대는 보병 역할까지 해가며 돌파구 확대하는 게 철마 대신 말을 타고 있을 뿐 현대적 기갑부대와 완벽히 동일하다.

이런 선진적인 안목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병장교들에 의해 전차 도입과 기갑부대로의 개편이 추진된다. 기병이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깊은 전통을 갖고 있었던 유럽과 미국에선 기병대 장교들이 전차와 기계화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일찌감치 기병 전통이 소멸했다가 1900년대 초반에야 겨우 일정 규모로 성장한 한국은 기병대 창설 기수가 그대로 1차 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젊었기에 군마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강철 군마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2.4. 기갑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서부전선 파견 가능성에 대비해 근위기병사단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브루실로프 공세간 장갑차의 활약을 지켜본 이후 적시에 지휘관이 원하는 곳으로 전개가능한 장갑차량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에 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을 시작으로 수요가 정식으로 제기되었지만 병과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았는데. 포병은 이동식 포대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생샤몽을, 보병과 공병은 방어선 돌파를 위해 Mk 시리즈를, 기병은 단순히 참호돌파라는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전차를 기동자산으로써 인식하여 기동성이 좋은 슈나이더 CA1을 원하다가 상위 호환인 르노 FT가 나오자 르노 FT를 원했다. 최종적으로는 기병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주인공의 지식이 합세하여 르노 FT를 도입하게 된다.

단순히 르노 전차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리캔, 지휘전차, 구난전차의 개발, 전차보다 더 많은 지원차량 등 기갑의 역량을 100% 발휘하기 위한 각종 투자와 발전이 동시에 이뤄졌다.

전차를 단순히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한 이동식 토치카"로 인식한 지휘관, 개발자가 적지 않은 유럽과 달리 주인공에 의해 현대전의 편린을 계속 교육받은 대한제국군은 전차를 기동전력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교리를 연구하는 등 주인공에게만 기대지 않고 현대전을 준비하며 성장하는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2.5. 군수

군대는 보급 없이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고, 김시혁 역시 미래에서 군수를 소홀히하다 일어난 참사들을 목격했으며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여야 했던 만큼 발언권이 강해질 수 밖에 없기도 했다. 작품 속 대한제국군에서 군수의 발언권은 매우 강력한 편으로, 장작림과의 전쟁에서도 탄약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겠냐는 질문에 대해 군수참모가 가능하다고 답하고 나서야 작전을 시작하였고. 1차대전 동부전선 원정군을 편성할때, 김시혁이 물자들을 모스크바에 두자고 하자 군수국장인 민영찬이 아예 정색까지 하면서 지적했는데, 극동전쟁의 영웅이자 원정군 최고사령관인 그에게 대놓고 반대가 가능할 정도로 발언권이 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6. 의무

의무는 군수와 마찬가지로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는 과정에서 발언권이 강해졌다. 원정군 편성중에도 러시아의 질낮은 수질, 풍토병에 대해 여러 해결책을 내놓는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김시혁의 미래지식을 이용해 머큐로크롬[9]의 조기발견, 현대식 지혈대의 도입 등으로 사상자를 극적으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해당 의료품들은 협상국도 사용하며 큰 효과를 발하고 있다.

2.7. 해군

원역사에서는 대충 구색만 갖췄던 해군이 여기서는 프랑스로부터 구축함 6척을 도입하고 관련 교육도 제대로 받은 나름 싸울수 있는 해군이 되었다. 본래는 추가로 어뢰정 6척도 갖춰질 예정이었으나 해군 양성을 견제하려는 일본의 순양함 판매라는 미끼에 넘어가 무산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자칭(?) 순양함인 양무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결과 양무호를 뺀 나머지 배들은 극동전쟁에서도 제대로 싸우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양무호는 전쟁 막바지까지 후방에 틀어박혀있다가 의외로 원산 상륙작전에서 활약해서 독자들 사이에선 군밤의 혜안(...)이라 불리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도 칭해지기도 했다. 전후에는 보로디노급 전함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까지 운용하며 성장중.[10]

1차 세계대전 시점에 거제, 옥포, 부산 등에 조선소를 두고 있으며 소형 함정인 포함과 구축함을 자체 건조할 역량을 갖고 있다. 보로디노급 도입으로 기존 창설 계획이 어그러졌으나 육군의 도입에 한 발 걸쳐 어렵사리 해군항공대를 창설했고, 기지방호와 상륙작전, 육해군 통합작전을 수행할 해군육전대 창설도 확정되어 지휘부 구성을 마쳤고 첫번째 기수가 강화도와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3. 보병장비

3.1. 피복류

3.2. 소총

3.3. 권총

3.4. 기관단총

3.5. 기관총

3.6. 산탄총

3.7. 대전차화기

3.8. 폭발물

4. 중화기

4.1. 박격포

2부 프롤로그에서 박격포의 시안이 등장했으나, 대량 생산은 아직이라며 잠깐 언급된다. 1차 대전 참전을 목전에 두고 철모, 방독면 등과 함께 대량 생산에 착수한다. 구경은 60mm와 80mm이며 제식명은 불명.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동부대에 신속하고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기에는 기존 박격포로 부족하다는 전훈이 받아들여져 포공국에서 개발한 신형 120mm 중박격포를 전차대대 당 9문, 보병연대 당 12문씩 배치하는 양산 계획이 수립된다.

4.2. 야포

5. 탑승물

5.1. 전차

5.2. 장갑차

5.3. 차량

5.4. 군함

5.5. 항공기

5.6. 군마

작중 조선-대한제국군이 최초로 사용한 탑승물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김시혁이 김석중을 시켜 말 잘타는 병사들을 모아 만든 임시 기병대는 당시 있던 말을 되는데로 끌어모아 만든터라 제대로 된 군마를 타진 못했다. 제대로 된 군마는 1차 친위쿠데타 이후 러시아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러시아에서 들여왔으며 1차 대전 시점에서는 하코트나 얀코프스키 같은 민간 업자들에게서도 구매하고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알 토르자 장군에게 군마 양산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제1근위기병사단이 기계화 사단으로 개편되며 조금씩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지만 드넒은 만주를 기계화 사단 하나로 커버하는 건 불가능한데다 헌병대와 경무청, 철도경비대의 군마 수요도 있어 완전히 물러나기까진 한참 더 걸릴 전망이다.[29]

[1] 작중 구호나 역할을 보면 미군의 제75레인저연대를 모티브 삼은 게 확실하다. 레인저 연대처럼 특수부대와 정예 경보병대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새로운 장비나 전술을 도입할 시 최우선 적용해보는 교도대 성격도 띄고 있다. 작중에서 레인저란 명칭을 부여해준 사람은 미국인 고문관 하코트. 본국 레인저들과 임무와 성격이 겹치는 정예 보병들을 레인저라 불러주었는데, 그 뜻이나 유래는 잘 모르면서도 어감이 강렬하고 멋있어 적극 채용했다.[2] 1차 세계대전 중후기에 들어 동맹국/협상국 양 진영에서 수렴진화하듯 등장하여 현대에까지 큰 틀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 보병전술의 기본 전제이다.[3] 강습부대-> 중앙군 근위사단-> 지방군 여단.[4] 1차 대전 기준으로 서방에서 가장 전술적으로 뛰어난 군대인 독일 제국군이 전술 단위를 중대까지 내리는 교리를 정착시켜 가는 상태였는데, 동시기 한국군은 강습 보병과 일반 보병을 가리지 않고 분대 단위로 원활한 전술 행동이 가능하다.[5] 포병학교 교도대대 1개 포대, 중앙군 4개 대대, 지방군 6개 대대.[6] 실제 역사에서는 러일전쟁 중후반 경에야 러일 양국 포병에서부터 지형지물을 끼고 엄폐한 간접사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전훈은 독일군 같은 일부 열강 육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1차대전 개전시점에 이르러서는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다.[7] 이상저온 현상으로 기온이 낮아 작용제가 쉽게 퍼지지 못하는데가 기껏 퍼지더라도 평야가 많은 동부전선 특성상 바람에 빠르게 흩어져 살상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등 실용적인 문제는 물론, 주인공이 비인도적인 화학무기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 "역사에 죄를 짓지는 말자."라는 말까지 하며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화학탄을 투발하자 이에 보복하기 위해 화학탄 사용을 허락한다.[8] 받은 이유가 참 골때리는데, 미국이 참전을 준비하며 이 야포를 라이센스 생산을 하려 했으나 야드-파운드와 미터법 변환을 잘못하는 바람에 못써먹을 물건이 나와버리자 이를 한국이 생산하여 프랑스와 미국에 납품하는 조건하에 설계도를 얻었다. 마침 대한제국은 1차대전 직전 프랑스제 슈나이더 105mm 곡사포를 라이센스 생산하며 화포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쌓았고, 협상국의 지원하에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고 가공할 수 있는 제철소가 생겨난 시점이였다.[9] 머큐로크롬의 발견 자체는 1900년대 초였으나 미국의 휴 H. 영 박사에 의해 살균효과가 있음을 발견된 것이 1918년이다.[10] 다만 보로디노급 전함의 경우 해군에겐 영 좋지않은 루트로 도입하였다. 이에 대해선 하술.[11]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원역사의 대한제국 군복도 프랑스 군복을 모방한 일본군의 군복을 모방한 것이니 원점회귀라고 할 수 있다.[12] 사소한 것 같지만, 군의 상징이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에서 태극기의 태극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한국군이 더 이상 황제만의 군대가 아닌 국민의 군대로 거듭났다는 걸 나타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13] 이때문에 하마터면 모신나강 도입을 말아먹을뻔 하였고, 30년식 값을 군 예산이 아닌 내장원 자금으로 지불하여 고종의 독단적인 지름으로 마무리하였다.[14] 기병총버전은 M1A1카빈처럼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했다.[15] 기관단총의 문제로, 당시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탄은 림드탄이여서 자동화기인 기관단총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새로운 권총탄을 채택하자니 해당 권총탄을 사용할 권총도 새로 보급해야 하는등 문제가 있다. 거기가 작중 대한제국군은 보병간 교전거리를 200m 내외로 보는데 기관단총의 교전거리는 길어봐야 100~150m라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고 돌격소총을 만들자니 기술부족으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워질것을 우려해야했다. 예시로 최초의 돌격소총으로 알려진 StG44의 무게가 5kg에 육박하고, 절삭가공으로 제작하던 초기형 AK-47도 4.3kg이 나간다. 대한민국 제식소총 K2 소총의 무게가 3.3kg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무거운 것. 이에 고민하던 중 꼭 둘중 하나만을 고를 이유가 없으며, 그 중간이라 부를 수 있는 M1 카빈을 제작하여 지급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자동사격이 기본으로 지원되는 것을 보면 M2 카빈에 가깝다.[16] 탄을 이렇게 만들 경우 정확한 위력은 화약의 양이나 탄두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치수 상 가장 비슷한 탄은 StG44에 사용된 7.92×33mm이다. 설정화에서는 탄 규격을 7.62×33mm로 명시하고 있다.[17] 당시에는 기관총을 포병이 운용했기 때문에 총이 아닌, 포라고 불렀다.[18] 1917년까지 협상국은 독일이 전차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알지 못했고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전쟁 막바지에 나왔고, 그마저도 생산성 문제로 '21대' 양산에 그쳤으니 전쟁 전개가 원래 역사와 크게 달라진 상황에 나올 일 없다 여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19] 척탄통에 쓸때는 신관을 충격신관으로 교체하고 밑바닥에 추진장약을 부착한다.[20] 극동전쟁기에는 중대 직할, 1차대전 시기에는 소대 직할, 구주원정군은 분대당 1문 편제[21] 강력한 화력이 부족한 인력을 매꿔주고, 인명손실을 줄여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들겠지만 이를 도입하지 않을때 전쟁에서 일어날 피해에 비하면 적을것이라는 논리에 의해 생겨났다.[22] 한국전을 예시로, 105mm 야포 대대를 재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차량이 최소 50대 이상이 필요하며, 자동차 기술이 아직 미비한 시대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차량이 필요할텐데 대한제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 군마로 수송하는 방안도 있지만 중포를 무리하게 견인하다 폐사해버린 것을 예시로 들며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23] 당시 대한제국은 남만주 문제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가져오는 건 무리였다.[24] 당시 프랑스군은 이 전차를 400대를 계약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어림도 없어서 해외에서 판로를 찾던 중이였다. 며칠만 늦었어도 마음을 바꾼 프랑스군이 1000대의 계약을 맺게되면서 싸게 팔 이유가 없어졌겠지만, 그걸 알고있는 건 미래인인 김시혁 뿐이였다.[25] 오사카 주식시장에 몰래 투자했다 물려서(...) 벌충할 돈이 필요했다.[26] 1차 대전까진 포병이나 항공기가 연막탄을 뿌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사히 굴러가는 전차를 양산하기도 벅찬 시대다보니 간단한 기술임에도 생각이 닿지 못했다.[27] 당시 드레드노트급 함선이 등장하며 러시아 역시 드레드노트 도입을 위해 준비중인 상황에서 남아있던 보로디노급 전함들이 애물단지가 되가고 있던지라 빠르게 처분하길 원했고 마침 태평양에서 활동할 제2중대의 개념으로 우방인 한국 해군을 강화시킬 명분도 있었다. 거기다 나머지 열강들도 전함 1척 가지곤 균형이 깨지진 않을거라 판단했다. 그나마 반발할 여지가 있던 일본 같은 경우에도 당장 전드레드노트급 4척을 얻은데다 어차피 대세는 드레드노트급이 될테니 한국이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2척 갖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본인들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다.[28] 하필 이 음식들이 발효음식이다 보니 이를 알게 된 이탈리아 해군 장교들이 얘들 이상한 거 먹어요!라고 난리를 쳐서 한국 해군 지휘부가 진땀을 빼기도 했다.[29] 애당초 기병이란 병과가 전장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건 한국 전쟁 시기는 되야하며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중국이나 몽골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험지 지역용으로 여전히 기병을 유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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