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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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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엄복동
嚴福童
파일:attachment/엄복동.jpg
출생 1892년 6월 20일[1]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중구 오방동)
사망 1951년(향년 58~59세)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現 경기도 동두천시)
본관 영월 엄씨
신체 165cm[2]
종목 사이클

1. 개요2. 생애3. 선수 경력4. 자전거 도둑5. 최후6. 자전거7. 기타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자전거 선수다.

2. 생애

3. 선수 경력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 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때 엄복동은 중고 자전거 끌고 털레털레 나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열리는 자전거 대회마다 다 휩쓸고 다니게 된다.

엄복동이 자전거 경기에서 항상 골 직전 한 바퀴 남았을 때 엉덩이를 들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관중들은 엄복동의 모습에 "올라간다!"라며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는것을 보고 환호했다고 한다. 이는 마지막 1바퀴가 남았을 때 댄싱 자세로 스프린팅을 쳤던 것으로 추정되고, 다른 선수들은 스프린팅의 개념에 대해 잘 몰랐을때 혼자 기술을 적용한것으로 보인다.

상기 실 사진에서도 체형을 볼 때 허벅지의 대퇴사두근은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장딴지로 추정해 보면 스프린터의 성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4]

한편, 일본의 우민화 정책이 극을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 계몽운동, 의병들이 한창 일어나던 시절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를 꺾고자 잘나가던 엄복동을 밟아주기로 결정한 일본은 1920년 5월 2일 일본의 고수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서 경성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를 열게 된다.[5] 그러나 엄복동이 모리 다카히로를 이겨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경성자전거 경기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동아일보의 1920년 5월 3일자 기사가 가장 당시 상황과 감정을 잘 전달해 준다. 조선을 털러 왔다가 역으로 털리자 억지 판정을 내리려 했다는 내용이다.
여덟 사람이 용기를 다 바쳐 주위를 돌 때,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뒤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嚴福童)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은 삼십여 바퀴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 선수보다 댓 바퀴를 뒤떨어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없이 엄 선수의 어깨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 선수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내게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하느냐!"
고 우승 깃대를 잡아꺾으매,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엄 선수를 구타하니 마침내 목에 상처가 나고 피까지 흘리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서,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압으로 군중은 헤치고, 대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이후로도 열린 경기에서 신나게 일본인들을 발라버리며 우승하였고, 이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安昌男·1900~1930)과 더불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6]가 불릴 정도로 둘의 인기는 엄청났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해 아래의 기사로 비꼬기도 했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직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여, 일본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불러와(招致) 자전차 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해 죽기나(憤死) 할는지.

1928년 6월 25일 평양 조선인 윤업조합 주최 제2회 전조선 자전차대회 예선 1위 이후엔 35년 전주 자전거경기회와 함흥자전거경기, 38년 경북 안강 윤업조합 주최 경기 등의 참가가 기사화되었으나 등수에 들지 못했다. 47년에는 런던 올림픽출전자격을 놓고 벌이는 자전거대회를 원로자격으로 관람하고 기념품을 받았다. 1949년 7월 대한자전거경기연맹주최 제1회 전국 자전차 급종별 경기대회에서 노장 3천 미터 1위를 끝으로 공식 경기기록은 없다.

4. 자전거 도둑

엄복동은 생전 자전거 수십 대를 훔쳐 장물로 팔았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는 상습 절도범이었다. 그것도 그냥 생활이 너무 가난해서 한두 대 훔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훔친 자전거 수십 대를 한꺼번에 팔아넘기는 전문 장물아비였다. 최초 보도는 1926년, 마지막은 1950년이므로 죽기 직전까지 24년간 계속 도둑질을 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자전거를 훔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사람들에게 쌓은 인지도로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는데 무리가 없었을듯 했는데.... 굳이 절도까지 해서 돈을 벌었던건 그가 상황이 안좋아져서 그랬다기보단 도벽이 있었거나, 판매&수리보다 더 손 쉬운 방법을 택했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절도 검거 전해까지도 우수한 성적을 내다 다음해 바로 장물아비로 걸렸으니... 아마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듯 하고 이후 이미지 실추로 영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을 듯 하다. 현대처럼 자전거 가게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가품이라 그 지역 돈좀 있는 사람들끼리 입소문 도는건 시간 문제라...
동아일보 26년 7월 10일자(3면)
(현대 국어) 조선의 자전거 선수로 유명한 엄복동이 절도 공범으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7]에 본적을 두고 시내 병목정[8] 229번지에 거주 중인 이효진(35)은 절도 전과 2범으로, 올해 2월 25일부터 시내 곳곳에 있는 타인의 자전거 십여 대를 훔쳐다가 시내 초음정[9] 111번지에 본적을 두고 병목정 129번지에서 자전거 매장을 운영 중인 엄복동에게 팔아달라고 의뢰하였다. 엄복동은 이효진과 함께 훔친 자전거를 수 차례 원산에 가서 판매하다가 발각되어 두 명 모두 원산 경찰서에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이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장물취급죄로 지난 9월 20일에 각각 징역 4년, 징역 1년 6월에 벌금 50원의 판결을 받았으나 두 명 모두 판결에 불복, 항소하여 며칠 전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다. 한때 조선의 자전거 선수로서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겨지던 용감한 엄복동은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의 철창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엄복동이 자전거 도둑으로 잡힌 1926년 당시 자전거는 지금과 달리 상당히 비쌌던 물건이다. 관련기사 비싼 자전거는 수십 가마니[10]수준이고, 엄복동이 26년 잡혔을 당시 훔친 자전거는 한 대가 아니라 십여 대였다.
경향신문 1950년 4월 1일자
자전차왕 엄복동 자전거 훔치고 철창왕래
자전차왕으로 한때 이름을 날리던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11] 이삼육 엄복동(61)은 생활에 궁한 나머지 지난 3월 22일 오후 9시경 시내 종로구 청진동 박연이(朴連伊)씨 소유의 자전차 시가 약 3만 원을 절취한 것이 탄로나 검찰청에서 문초 중 31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50년 4월 1일자(4면)
옛날의 은륜(銀輪)[12]왕자 자전거를 훔치다 들켜
비행사 안창남 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은륜계에 명성을 날리던 엄복동(61) 씨는 그 옛날의 명성도 어디로 생활에 궁한 나머지 남의 자전거를 훔치려다 구속되었으나 인정검사의 따뜻한 온정으로 석방된 사실이 있다. 즉 왕년에 자전거 선수로 천하에 용명을 날리던 엄복동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육순이 넘은 노인이 되어 지금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날 그날의 끼니에 어려워 지난 22일 시내 종로구 청진동 575번지 박연이씨 댁 앞을 지나다 훌륭한 자전거 한 대가 박씨 문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 자전거가 대단히 훌륭한 데에 욕심이 나서 그 자전거를 훔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안희경 검사의 담당하에 취조를 받아왔는데 안 검사는 엄의 과거지사와 현재의 사정에 동정하는 바 있어 30일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이것이 엄복동의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1950년 절도사건의 경우 30,000 원이라고 가격이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당시 쌀 가격은 약 8kg에 2,300원을 돌파한 상황이었으니 엄복동이 훔친 자전거는 쌀 한 가마니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인 9,300원에 비교하면 3배 이상이고 1950년 4월에 조사한 서울의 5인 가구 1개월 생활비가 약 40,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는 3~400만 원짜리 자전거를 훔쳤다.[13]

자전거가 왜 이리 비싸냐고 의아해 할 수 있으나, 당시 공업기술은 지금만큼 좋지 않았기에 정밀한 부품으로 구성된 자전거는 제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대부분 수제로 조립되었으며, 특히 대한민국은 1950년 당시 자전거 생산 기반이 없어[14] 자전거 자체를 전량 수입(일본,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 구리, 알루미늄 같은 산업 필수 금속의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기에 가격이 더욱 치솟았다.

자전거가 현대처럼 가격이 내려간 것은 대만에 있는 자전거 회사가 전 세계 자전거 프레임을 1980년대 말에 통일시키면서부터다. 1기 신도시 개발로 인해 자전거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인 1993년만 해도, 외제 로드바이크MTB 한 대 가격은 한국에서 600만원이였다. 1993년 당시 현대자동차스쿠프 가격이 700만 원대였다. 지금처럼 고급 로드바이크나 MTB가 50~100만 원대에 출시될 수 있는 것은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2019년 개봉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구설수에 올랐다. 아무리 당시 한일전에서 승리한 자전거 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기에 항일투사로 보기도 어려운 데다 자전거를 훔쳐 팔아치운 범죄자인데 이런 인물을 영화를 통해서 미화를 해도 괜찮냐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의 미화 논란 문단도 참조.

엄복동의 손자인 엄재룡 엄복동기념사업회 회장과 가족들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5. 최후

그 동안 벌어놓았던 돈을 다 탕진하고 집도 구하지 못해 지금의 동두천시의정부시 일대를 떠돌았으며,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행방불명되었다. 양주군 이담면(지금의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증손자의 언급에 따르면 가족들을 먼저 피난시킨 후 홀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동두천의 한 언덕에서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6. 자전거

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465호 466호 467호
의병장 김도현 칼 엄복동 자전거 381호 전차
파일:attachment/엄복동-자전거.jpg
등록문화재 466호로 지정
지금 남아있는 자전거는 1920년 자전거 경기 때 영국의 러지(Rudge-Whitworth)사[15]에서 1910~1914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자전거 중 가장 오래된 자전거이며 전 세계적으로 봐도 희귀한 자전거이다. 당시 차대번호는 1065274였다.

1920년 경기 당시 영국 러지사에서 자전거 홍보를 겸하여 엄복동에게 증여하였으며, 이후 엄복동의 우승신화와 함께하게 되었다. 맨 위 1923년 경평대회 우승기와 같이 있는 자전거와는 핸들바가 다르며, 그 외의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뒷 코그는 트랙 경기용과 동일한 1개 짜리 고정기어 방식이다. 프레임은 강철재이며 토클립, 경량화되어있는 체인링 등 당시 트랙용 자전거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림은 목재로 몇 겹의 나무 층으로 라미네이팅 공법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당시 경량화를 위해 1940년대까지 트랙 경기용으로 흔히 사용하던 방식이다.[16]

타이어는 당연히도 클린처 개발 초기(미쉐린에서 개발)였던 관계로 트랙용으로는 사용을 안 하고 있어서 튜블러.

이 자전거는 엄복동의 1929년 은퇴 후 후배에게 전했다고 하며, 이를 다시 박성열이 받아 소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박성열[17]이 자전거를 들쳐업고 피난을 가는 지극정성으로 보존하여서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문화재 등록 당시 소유주는 김근우로 상세한 사항은 주요 연표 참조.

7. 기타

8. 관련 문서


[1] 2017년 10월 12일 위원석의 네이버 칼럼에서 언급되었다.[2] 2011년 4월 6일 김주현의 설악신문에서 언급되었다.[3] 지금으로 치자면 수백만 원 값어치다. 소설 상록수라든지 레디메이드 인생 같은 당시 소설을 봐도 한 달에 30원 받는 직장인 언급이 나오는 걸 봐도 보통 직장인 한 달 월급 이상급 값어치다.[4] 당시 아직 국내 경기 중에는 오르막을 오르는 등의 산악구간 경기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경기도 트랙 혹은 드물게 구간경기가 있었다고 한다.[5] 사실 열강들이 식민지에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많이들 이랬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서 자주 했는데, 영국은 크리켓으로 인도 팀과 경기를 가졌다가 그만 져서 망신을 당해 이 실화는 인도에서 라간이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축구로 이짓을 했다가 크게 고전하면서 이러다간 우월감은 커녕 망신만 당하겠다고 인도네시아 인들과 네덜란드 팀은 축구 경기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축구에서 조선도 만만치 않아 1930년대만 해도 일본인이 들어간 팀이랑 경기를 하면 조선인 선수들은 작정하고 말 그대로 일본인 선수의 다리를 불구로 만들 의도로 격투기 축구를 신나게 일본인들에게 선사했다고 한다.[6] 민요인 '청춘가'라는 노래를 개사한 곡이다.[7]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8]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9] 現 서울특별시 중구 오장동[10] 한 가마니는 약 80kg, 쌀값이 많이 떨어진 22년 현재 쌀값은 등급에 따라 3~5만원/20kg인 것을 생각했을 때 열 가마니만 해도 지금 돈 200만원쯤이 된다. 30가마니면 지금의 중고차값쯤이 될 것이다.[11]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12] 은으로 된 바퀴. '자전거'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다.[13] 현대 기준으로 자이언트 프로펠 어드밴스 1 디스크 모델(399만원)이나 스페셜라이즈드 루베 콤프 디스크(390만원)정도 되는 자전거를 훔친 셈이다.[14] 최초의 대한민국 국산 자전거는 엄복동이 사망한 후인 1952년 기아산업(현 삼천리자전거)에서 생산되었다.[15] 1894년부터 자전거모터사이클을 만들던 회사지만, 모터사이클 회사라고 보는 것이 맞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혁신적인 변속기설계와 경주용 모터사이클의 디자인은 클래식 모터사이클 덕후들을 하악대게 만들기 충분하고도 넘친다.[16] 도로경기(Criterium)에서는 강도의 문제로 사용하기 힘들었다.[17] 서울에 거주하다가 2010년부터 일산신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도싸에 박성열의 제자가 활동하고 있다.[18] 공교롭게도 등번호 또한 17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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