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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8:34:27

황화론

파일:attachment/yellowperil1.jpg
미카엘(독일 제국)이 브리타니아(영국)를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청나라)을 타고 날아오는 부처(일본 제국)를 경계하는 듯한 손짓으로 가리키고 있다. 아시아의 입장을 묘사한 반대 버전도 있다. #
Völker Europas, wahrt eure heiligsten Güter.
유럽의 민족들이여, 그대들의 신성한 재보를 지켜라.
헤르만 크낙푸스(Hermann Knackfuß), 1895

1. 개요2. 유럽에서3. 미국에서4. 유목 제국들과의 연관성5. 도교와의 연관성6. 관련 문서

1. 개요

Die gelbe Gefahr (Yellow Peril, 黃禍論)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 제국청나라를 비롯한 황인종들에게 정복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유럽인들의 위기론.

황화론에 대한 다트머스대학의 소개문[1]
두산백과의 "황화론" 항목

2. 유럽에서

이 "황화"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주창한 사람은 독일 제국빌헬름 2세이다. 이러한 황화론은 당연히 인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황화론과 인종주의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황인종에 대한 멸시적 인종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 제국의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과 그와 충돌하고 있던 동시대 러시아 제국범슬라브주의(Pan-Slavism)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당시 부동항을 찾아나서던 제정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맞물려있던 시기였다. 이 무렵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전하면서 일제의 국제적 발언권이 높아졌다. 빌헬름 2세는 이를 자신의 제국과 대치 상황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그 너머[2]로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킬 기회로 봤다. 그래서 새로운 열강으로서 힘을 확장시킬 단계에 있었던 일본을 경계 대상으로 몰아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의 국력을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집중시키도록 유도하려 했다.

페리 제독이 "개화시킬 야만족" 취급하던 일본이 몇십년 만에 열강으로 성장한 모습을 목도한 러시아와 영국은 이러한 황화론에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결과로 러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측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다. 다만 빌헬름 2세 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본래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는 황화론 주창 자체는 외교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정작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독일 제국 자체의 문제로 보인다.[3]

빌헬름 2세가 일본에 대한 황화론을 펼친 원인에는 빌헬름 본인이 일본인들을 싫어했다는 것도 있었다.[4] 일본이 적대국인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협력적인 관계를 가져왔으니 좋은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근대화 초창기 국가 차원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모델로 삼기 위해 유학을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빌헬름 2세 입장에서는 독일로 몰려온 수많은 일본인들이 나중에 뒤통수를 친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빌헬름 2세는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대한제국 시절 고종과의 개인적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5]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제국이 멸망한 한 뒤 들어선 나치 또한 황화론을 주장하긴 했으나 정작 중화민국 시절 당시의 대만에게 공산주의 방지 라는 명목 하에 지원하는 가 하며 아예 중화민국을 뒤통수 치고 마음에 안 들어 했던 일제와 손을 잡기도 했다.

3. 미국에서

원조인 유럽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정치적 수사로 쓰였던 황화론이 미국에 소개되고 나서는 약간의 의미 변화를 겪은 뒤 크게 주목받게 되었다. 미국이 "도금 시대"라 불리는 호황기가 끝나가면서 몇몇 하류층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 이민자들[6]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기회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인종갈등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화(Yellow Peril)"라는 말이 자신들의 위기감과 새 인종갈등론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단어로 여겨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중국계 미국인을 주로 타겟으로 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확대되었다.

이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표현이 이른바 "더러운 노란색 폭도들(Filthy Yellow Hordes)"이라는 문구이다. 게다가 미국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황화론은 굉장히 오래 이어져서 1917년의 이민제한법안과 1924년의 국적식별법안은 황화론이 주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20년대는 "재즈 시대(Jazz Age)"라고 일컬여진 풍요로운 시기였음에도 이런 인식이 유지되었다. 이런 동아시아계에 대한 악의는 서구 미디어에서도 노골적으로 재생산되었고, 서구 내 동아시아계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도 속속히 양산되었다. 이런 편견은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7]

일본진주만 공습은 이러던 황화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버렸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강제수용소에 강제이주당했고, 태평양 전선에서 맞닥뜨린 동양인들을 침팬지로 묘사하는 수준까지 갔다.[8]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도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확산으로 미국의 황화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화론은 일본의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여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의 경제 패권 자리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자 극에 달했다. 단적인 예로 1988년 기준으로 시가총액으로 따졌을 때의 "세계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다만 이 시기 직후 황화론이 사그라들었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게 되고 마침 동시에 냉전도 끝이 나면서[9] 황화론이 미국 사회에서 조금씩 옅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LA 폭동 때 두순자 사건을 집중보도 하기에 바빴던[10] 미국 언론들을 생각하면 뿌리 깊은 편견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국력이 급상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황인 전반에 대한 경계심으로 번지는 경우가 함께 나오고 있다. 중국 위협론 문서 참조.

4. 유목 제국들과의 연관성

엄밀히 말해서 "황화"라는 말은 17-18세기 당시에는 조어되지도 않았고 당시의 유럽인들도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기는 했어도 심각한 경계심 같은 것을 가지지는 않았다. 고로 황화론이 청나라(더 거슬러가서는 "몽골 제국" 등의 유목 제국)에 의해 시작됐다는 주장은 사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적어도 유럽에서의 황화론은 19세기 말 빌헬름 2세의 정치적 계략에 온 유럽인들이 수선을 피운 소동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유럽인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한 "신빙성"이란 것도 사실 일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매우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사실 17-18세기 당시의 유럽인들은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 혹은 동경을 갖고 있었지 경계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시누아즈리라고 해서 당시에 떠오르던 로코코 예술에 중국풍을 가미하는 게 대유행을 했고 이 때문에 온갖 경로에서 중국 예술품이나 도자기 등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이 시누아즈리는 사실 꽤 오래된 전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그 뒤를 이어 대륙을 먹은 청나라가 괜히 아시아의 먹는 하마라고 불린 게 아니다. 청나라 때 가서는 청 정부가 소유한 은이 많다보니까 당시에 거두던 인두세를 토지세로 바꿔버렸다.[11]

황화론을 청나라의 중흥과 연결짓다 몽골 제국에서까지 기원을 찾는 건 사실 신빙성이 희박하다. 결론부터 확실히 긋자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배운 호사가들 중에서 몽골 제국의 원 황실과 만주족을 단순히 소위 "시베리아 유목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해서 아예 동족으로 여기는 경우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몽골의 원 황실과 근세에야 "만주족"이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 여진족, 알타이 제어 문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언어의 어족부터가 다르다.[12]

5. 도교와의 연관성

19세기 말의 황화론은 중국도교와 이에 대한 서구인들의 시각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해외 역사학계에서는 의외로 상당히 진지한 연구 주제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시각이 제기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의화단 운동 때문이다. 의화단 운동은 토착종교에[13] 광신적인 근간을 둔 중국 민간 세력이 거대 조직화해서 외국인들에게 집단적인 테러를 가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서구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의화단이 하던 행동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국적을 막론하고 의화단 외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을 줄 만한 행동이 많았다.

의화단 운동은 통상적으로는 서구인들의 중화 문명에 대한 환상이 팍 깨지고 중국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였다는 면에서 더 주목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의화단 단원들의 광신적인 행위들을 보고 서구인들로 하여금 "저들이 저렇게까지 광신적인 행위에 몸담게 하는 저 중국의 토착종교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것인가"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황화론과 도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역사학적인 시각이 제기되는 것이다.

단, 본인들이 도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억울한 시각일 수도 있다. 청말 당시 의화단 운동에서 돌았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현재까지의 성과로는 사실 의화단 운동의 기틀이 되었던 무언가는 엄밀히 따지면 도교보다는 불교정토교에 더 가까웠다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당시 의화단 운동의 적대 대상이었던 서구인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화단 운동의 광신적인 행위들에 충격을 받은 건 서구인들 뿐 아니라 의화단 운동과 관련이 없는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술영화인 황비홍(영화) 시리즈에서도 황비홍 일행이 외세에 맞서싸우는 무술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이 긍정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외세보다도 더 악질적인 이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의 말로를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6. 관련 문서



[1] 이 소개문을 쓴 티모시 양(Timothy Yang)은 현재는 오리건주퍼시픽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2] 19세기 당시와 그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때까지 볼가 강 유역에 독일계 러시아인이 거주했다.[3] 실제로 역사학계에서는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뤄놓은 성과를 무너트리기 바빴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런 평가를 유독 가혹하게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하버드대학교의 조지프 나이가 있다.[4]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5] 또한 이 황화론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도 알려져 있었으며 동아일보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이를 기자들이 대답하는 것을 연재한 '응접실(應接室)'이란 코너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6] 속어로 "쿨리(Coolie)"라고 칭한다.[7] # #[8] 심지어 어린이용 학습동화의 저자로 유명한 닥터 수스(Dr. Seuss)까지 이와 같은 포스터를 그리던 시절이다.[9] 중국과는 리처드 닉슨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관계가 완화되었다.[10] 미국인들, 심지어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LA 폭동의 공식적인 시발점은 보통 로드니 킹 사건으로 본다. 적어도 현대사학계에서 LA 폭동의 시발점이 두순자 사건이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고 봐도 된다.[11] 보통 지정은제라고 한다. 청나라 중기에 청의 인구가 폭발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12] 동서양의 교역은 생각보다 매우 활발한 편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에 가톨릭 교회와 이슬람 사원이 존재했고, 더 과거로 가면 기원전의 알렉산더 대왕도 "인도 너머의 제국"을 언급하는 등 서로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13] 도교는 동양적인 시각에서는 도가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완전히 "토착종교"로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당시 서구인들의 시각으로는 토착종교의 정의에 완전히 부합했다. 애당초 서구에서 "Religion"이라는 용어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외의 종교에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4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