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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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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정조'로 격상된 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종에 대한 내용은 정조(조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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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대 국왕
정종 | 定宗
파일:조선정종후릉.jpg
후릉 능침
출생 1357년 7월 26일[1]
(음력 공민왕 6년 7월 1일)
동북면 함주목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즉위 1398년 10월 22일[A] (41세)
(음력 태조 7년 9월 5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419년 10월 24일[B] (향년 62세)
(음력 세종 1년 9월 26일)
한성부 인덕궁 정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5길·7길 일대)
능묘 후릉(厚陵)
재위기간 조선 영안군
1392년 8월 25일 ~ 1398년 10월 14일
조선 왕세자
1398년 10월 14일[4][5] ~ 10월 22일[A]
(음력 태조 7년 8월 26일 ~ 9월 5일)
조선 제2대 국왕
1398년 10월 22일[A] ~ 1400년 12월 7일[C]
(음력 정종 즉위년 9월 5일 ~ 정종 2년 11월 13일)
조선 상왕[9]
1400년 12월 7일[C] ~ 1419년 10월 24일[B]
(음력 태종 즉위년 11월 13일 ~ 세종 1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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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방과(芳果) → 경(曔)[12]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의고황후
형제자매 부황 기준 8남 5녀 중 차남
모후 기준 6남 2녀 중 차남
배우자 정안왕후 (?년 혼인 / 1412년 사망)
후궁 성빈 지씨, 숙의 지씨, 숙의 기씨, 숙의 문씨
숙의 윤씨, 숙의 이씨, 가의궁주 유씨
자녀 15남 8녀[13]
종교 불교유교 (성리학)
광원(光遠)
봉호 영안군(永安君)
전호 인덕전(仁德殿)
묘호 정종(定宗)
시호 조선: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14]
: 공정(恭靖)
상왕 존호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 }}}}}}}}}

1. 개요2. 생애
2.1. 초년2.2. 세자 책봉과 즉위2.3. 노상왕
3. 가족 관계
3.1. 본가(전주 이씨)3.2. 외가(청주 한씨)3.3. 처가(경주 김씨)3.4. 배우자 / 자녀
4. 정종 무인정사 배후설?5. 공정왕에서 정종이 되기까지6. 여담7. 대중매체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2대 국왕.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15]이다. 는 '방과(芳果)'였으나 즉위 이후 피휘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경(曔)'으로 바꾸었다. 조선 건국 후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고 1차 왕자의 난으로 폐위된 이복동생 의안대군에 이어 왕세자로 책봉된 뒤, 부왕 태조의 선위를 받아 조선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우면서도 왕위를 탐하지 않아 효도를 다했고, 사고 친 동생 회안대군을 지켜주었으며, 불임인 아내 정안왕후를 끝까지 사랑하는 등 가족애가 강한 무장이었다. 또한 격동의 시기였던 여말선초에서 천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반강제적으로 왕이 되어 재위 동안 군왕의 대우를 온전히 받지 못한데다가, 사후에도 정통성 문제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했다. 다행히도 숙종 때 다른 조선 국왕들처럼 '묘호 2자+명나라 시호 2자+시호 8자+대왕'이라는 형식에 맞춘 칭호를 받으면서 뒤늦게나마 온전한 예우를 받게 됐다.

2. 생애

2.1. 초년

1357년(공민왕 6년) 음력 7월 1일, 함흥부 함흥본궁에서 태조 이성계신의왕후 한씨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의 명장이자 수호신이었던 이성계의 아들답게 그의 곁에서 오랫동안 무장으로 활약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긴 만 20세가 되던 1377년(우왕 3년) 5월에 아버지 이성계를 수행하여, 고려를 노략질하기 위해 지리산까지 진출한 왜구를 치는 데 동행했다. 그 유명한 황산대첩에서도 이성계와 함께 싸웠다.

이방과가 이성계의 실질적 장남 대우를 받으며 전장에서 함께한 것은 단순히 그가 첫째인 이방우 다음 서열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형 이방우의 장자권은 고려의 중앙 귀족인 개경의 전주 이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이방우가 개경에서 가문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때,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북면의 영지를 관리하고 가별초를 현장에서 통솔할 사람이 따로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다음 서열인 이방과는 동북면의 차기 영주이자 가별초의 차기 총사령관으로서 일찍부터 아버지 이성계에게 무장 수업을 받고 실전 경험을 쌓은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그가 문중에 미치는 영향력은 차남 치고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성계의 또 하나의 후계자였다.
왜구 20척(艘)이 황해도 해주(海州)를 침입하였을 때 창왕은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과 류만수(柳曼殊, ? ~ 1398)를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권105 > 열전 권제18 > 제신(諸臣) > 유경 > 유만수
이후 위화도 회군 때, 기인제도로 인해 개경에 잡혀 있었으나 형 이방우와 함께 우왕 진영을 탈출해 이성계 측에 신속히 합류했으며, 1389년(창왕 원년)에 절제사 류만수와 함께 해주에 파견되어 왜구들을 무찌른 기록도 있다.

조선 개국 논의가 한참 일어날 무렵에는 동생 이방원이 포은 정몽주를 척살할 계획을 세울 때 동참했다. 아버지 이성계는 정몽주 제거를 꺼리고 있었고 맏형 이방우도 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배제되어 협력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이 많은 아버지를 보필하며 공이 많은 둘째 형의 지지는 이방원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다. 태조와 정종의 역할이 축소됐다고 보는 학자들은 아예 정종을 정몽주 숙청의 주역으로 보기도 한다.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면, 청하건대 신들에게 죄를 주십시오.
고려사절요 35권, 1392년 (음)4월 미상 정쟁이 심화되자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다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16]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가 동생 이방원의 손에 의해 대낮에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이방과는 곧장 총대를 메고 공양왕에게 정몽주의 사망을 직접 통지했다. 동시에 "전주 이씨 가문과 전쟁할 것인지 아니면 전주 이씨 가문에 순응(항복)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공양왕을 사실상 협박했다. 이성계 곁에서 동북면 가별초를 이끌며 전장을 누볐던 이방과의 압박은 공양왕에게 적잖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인지 이방과는 정몽주 세력이 제거된 직후 이지란 다음으로 높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의 직위를 받았다. 고려사절요
<colbgcolor=#94153e> 작위 영안군(永安君) / 왕세자(王世子)
방과(芳果)
광원(光遠)
세자 책봉 1398년(태조 7년) 8월 26일
국왕 즉위 1398년(태조 7년) 9월 5일
생몰년 1357년(공민왕 6년) 7월 1일1419년(세종 1년) 9월 26일
비고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17]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1392년(태조 원년) 8월 초 7일에 만 35살의 나이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됐다. 또한 조선 건국 이후 막상 공이 있었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고 오히려 정도전, 남은 등 소수의 재상들에게 권력이 쏠리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입장에 있기도 했다.
장사길과 곽충보에게 문화현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공격토록 하다

왜적(倭賊)이 문화현(文化縣)[18]·영녕현(永寧縣)[19]의 두 현(縣)에 침구하니, 영안군(永安君)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 ?~1418)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곽충보(郭忠輔, ? ~ 1403년)를 보내어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6월 6일 (경진) 2번째기사.#
한편 그의 무인으로서의 행보는 태조 즉위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는데, 1393년(태조 2년) 6월 6일에 문화현, 영녕현에 몸소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을 정도다. 이는 조선의 왕자 신분으로 직접 출병해 왜구들을 격퇴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왜구가 아니라 정규 일본군, 그리고 세자 신분까지 포함한다면 임진왜란분조를 직접 이끌고 활약한 광해군도 있긴 하나, 광해군은 당연히 무관이 아닌 국왕을 대리하는 최고 사령관으로 군을 이끌었다는 차이가 있다.

2.2. 세자 책봉과 즉위

이후 1398년(태조 7년), 셋째동생 정안군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그리고 신덕왕후 소생 무안군 이방번세자 이방석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유일한 형 진안군 이방우는 약 4년 전에 사망했기에 차남인 영안군 이방과가 이방원의 뜻에 따라 반강제로 세자 자리를 이었고, 고작 일주일 만에 아버지 태조가 왕위를 넘겨줌에 따라 조선의 제2대 국왕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사료에 의하면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때,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소격전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방원을 비롯한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 김인귀(金仁貴, ? ~ 1412)라는 자의 집으로 도망갔다. 자신은 이방원의 친형이니 신변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었겠지만,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절제사(節制使)로서 일부 중앙군의 지휘권이 본인에게 있었으니 쿠데타에 동참하거나 쿠데타군을 직접 진압하지 않으려면 몸을 피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자신이 세자에 책봉됐다는 말에 마지못해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온 후 "내가 세자라니! 차라리 정안군이 하지?"라며 발을 빼려다 결국 받아들였다.
임금의 아우 정안공을 책립하여 왕세자로 삼아 군국의 중사를 맡게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이(儲貳: 세자)를 세우는 것은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이요, 위호(位號: 작위와 명호)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너 정안공 【휘(諱).】은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고, 덕이 영명(英明)한 것을 갖추었다. 태상(太上: 이성계)께서 개국(開國)하던 처음을 당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주장하였고, 과형(寡兄)이 정사(定社)하던 날에 미치어 특히 큰 공을 세웠다. 하물며, 구가(謳歌: 칭송하여 노래하는 것)의 돌아가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감무(監撫: 세자가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돌보고 군사를 순무하던 일)를 맡겨야 하겠다. 이로써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지친(至親)으로 택현(擇賢)으로 이미 대통(大統)을 잇는 자리에 처하였으니,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여 이로써 정사하는 방도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중략)

이때에 대신으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2월 4일 (기해) 1번째기사.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
즉위 이후 이방원은 세자가 됐는데,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세제(弟)'가 맞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정종은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라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한다. 사실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건 "과인은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느니라."라고 대놓고 밝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정종은 개의치 않았다. 이후 비슷한 사례로 순종의 이복동생 영친왕이 순종의 황태제가 아니라 황태자로 책봉된 사례가 있으며, 이때도 황태제가 맞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순종이 이 일을 선례로 들어 황태자로 삼았다. 당시 상황 또한 상왕(태조, 고종)이 살아 있었고 정종과 순종은 실권이 별로 없었다는 유사점이 있었다.

아무튼 왕이 되긴 했으나, 실권은 세자 이방원이 모두 쥐고 있었기에 정종은 격구나 사냥을 즐길 뿐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왕자 시절에도 직접 왜구를 소탕하러 가는 등 일생 대부분을 무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궁궐에서 한가히 시간이나 때우는 삶은 성미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격구를 하다가 곁에 있던 사관(史官)에게 "내가 격구하는 것도 다 기록되냐?"하고 질문하자 사관이 "당연합니다."하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자 정종은 "옛날 사람들이 격구한 일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봐야겠으니 《고려사》를 가지고 오라." 말했다.[20] 그뿐 아니라 경연을 하다가도 "내가 병 때문에 팔다리가 저려서 격구를 해서 몸 좀 풀려고 한다."고 말하자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이 "하시는 건 좋은데 환관이나 간사한 애들하고는 같이 하지 마십시오."하고 권하는 일도 있었다.[21]

아울러 격구와 관련해 태조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는 일화가 많다. 대간에서 격구를 비판하며 "태조가 환관의 꾐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고 간하자 대간을 불러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냐"며 화를 낸 적도 있다.[22] 사냥을 나가면 언제나 중도에 사람을 시켜 잡은 짐승을 태조에게 보냈다고 한다.
태상전(太上殿)의 시위(侍衛)를 없애고, 보화고(保和庫)를 태상전의 사사 창고로 삼았다. 임금이 여러 공후(公侯)와 내상(內相) 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조영무(趙英茂)를 불러 말하기를,

"어제 밤에 하늘의 견고(譴告: 꾸짖는 뜻을 알리는 것)가 너무 심하니, 무슨 일이 천심(天心)을 어긋나게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부왕(父王)께서 내게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나의 시위(侍衛)는 가두어 지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시니, 내가 항상 마음이 아프다. 부왕의 마음이 이와 같으시니, 나와 경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한결같이 명령에 의하여 시위를 철폐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느냐?"

하고, 인하여 울어서 옷깃을 적시었다. 공후와 재상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박영문(朴英文)을 시켜 태상왕께 고하기를,

"모든 일을 일체 교지(敎旨)에 의하겠습니다. 시위(侍衛)도 또한 없애겠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왕은 성품이 본래 순후(順厚)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더니, 지금 내게 효도하는 것이 또 이와 같구나!"

하였다.
정종실록》 2권, 정종 원년(1399년, 명 건문(建文) 원년) 10월 8일 (갑진) 2번째기사. 태상전의 시위를 없애고 보화고를 태상전의 사사 창고로 삼다
또 재위 도중 아버지를 성심껏 모신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태조가 "정안공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없다"며 정종에게 하소연하자 직접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던 일이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정종은 조선의 수도한성부에서 개성부로 환도한 적도 있었다. 여러모로 고려에 대한 향수가 강했고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한양(경복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정종실록》을 보면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유독 까마귀까치에 시달린 기록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 까마귀와 까치 소동이 본격적으로 개경 환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결국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종척(宗戚)과 공신(公臣)을 모아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

임금이 이에 종친과 좌정승 조준(趙浚) 등 여러 재상들을 모두 불러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고, 또 피방(避方: 병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일)해야 될지의 가부를 물으니, 모두 피방하여야 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느 방위로 피방하여야 할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기 안의 주현(州縣)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松都)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第宅)이 모두 완전합니다.”

하니, 드디어 송경(松京)에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애초부터 도성 사람들이 모두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 하여 길에 연락부절하니, 성문(城門)을 지키어 이를 제지하도록 하였다.
정종실록》 1권, 정종 원년(1399년, 명 건문(建文) 원년) 2월 26일 (정묘) 2번째기사. 종척과 공신을 모아 도읍 옮길 것을 의논하여 송경에 환도하기로 정하다.
즉, 기껏 한성부로 내려와 대공사를 벌였지만 막상 골육상쟁의 난이 일어나 뒤숭숭한 와중에 까마귀들까지 수시로 울어대니 개경으로 돌아가자는 내용이다. 물론 태종이 즉위한 이후 한성으로 재환도하여(1405년(태종 5년) 10월 8일) 창덕궁을 지으면서 조선의 수도 개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제2차 왕자의 난 하나로 그치게 됐다.
"靖安公謀欲害我 我不得已起兵攻之 請上勿驚"

(이방간이 정종에게): "정안공이 소신을 해하고자 꾀하니, 소신이 부득이 거병코자 하나이다. 주상께옵서는 부디 놀라지 마소서."
"爾惑聽亂言 謀戕同氣 狂悖甚矣 爾其釋兵 單騎赴闕 予將保全之"

(정종이 이방간에게): "(크게 노하며) 네가 헛소리에 홀려서 형제를 해치고자 하니,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 군사를 해산하고 혼자서 대궐로 오면 내가 보호해 주마."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전문)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군사를 일으킨 다음 지지를 바라며 보고하는 둘째동생 회안군 이방간을 꾸짖으며 군사를 물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 태조 역시 이방간을 미련하다고 탓하며 성을 냈는데, 여기에는 이복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던 제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드디어 동복형제들끼리 싸움을 시작한 것에 대한 충격도 있었겠지만 이방간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탓도 컸을 것이다.
방간을 안산군(安山郡)에 옮겨 안치하였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예조 전서(禮曹典書) 성석인(成石因, ? ~ 1414)을 토산(兎山)에 보내어 방간에게 전지(傳旨)하였다.

토산군[23]은 동북면[24]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개경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

방간이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대성통곡하였다.
정종실록》 정종 2년(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2월 13일 (무신) 5번째기사. 방간을 안산군에 옮겨 안치하다.
결국 난을 진압한 세자 이방원이 패배한 형 이방간을 어찌 처분할지 조언을 구하자, 정종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것은 골육지정, 피붙이밖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그 조언을 받아들인 이방원은 이방간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귀양을 보내는 것에서 그쳤으며, 이후에는 식읍까지 내리며 예우했다. 이때 이방간에게 보낸 정종의 편지에서 그의 우애와 인간미가 잘 드러난다. 이방간은 큰형의 편지를 받은 뒤 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2.3. 노상왕

동생 정안공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여생을 보냈다. 제사도 지내고 불공도 드리다가 이를 핑계로 전국 각지의 온천 유람을 떠나는 등 말년에는 태종도 그의 생활을 부러워했다고 하는데 태종말년에는 고독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상왕이 된 형과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25]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과 태종이 첫눈이 내리는 날 서로 장난을 친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26]

태종도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도 형을 웃어른으로서 제대로 대접해주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 태종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경왕후에게 후궁 관할권(내명부의 권한)을 빼앗고 후궁을 더 들이겠다며 전 성균악정 권홍에게 단자 9필, 견 20필, 정5승포 250필, 쌀과 콩 각각 1백 석을 내려 주어 가례(嘉禮)의 혼수를 갖춰 후궁을 들이는데 거창하게 혼례를 올리려고 하자 상왕 정종이 "금상(今上)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는가? 내 비록 아들(적자)이 없어도 소시(少時, 젊었을 때)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금상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해 태종이 거창하게 하려던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이기도 했다. 이건 태종이 뭘하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형이 아니라 물러난 상왕으로서 유일하게 태종에게 직접적으로 한소리(충고)한 것이다.[27] 집안 어른으로서 그냥 좌시하고 보고만 있지는 못했던 모양. 물론 태종은 거창한 행사만 안 했을 뿐이지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후궁을 9명까지 다 들였다.

63살로 천수를 누렸으며, 셋째조카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하는 것(1418년)까지 보고 그 이듬해에 붕어했다. 당시의 평균적인 수명을 감안하면 오래 산 편이다. 당장 동생 태종은 3년 뒤인 56세의 일기로 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붕어했다.[28][29] 정종의 후예로는 덕천군후손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억기이경석, 서예가로 유명한 이광사이긍익이 정종의 서출로 이어진 직계 후손이다.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이 되자, 태상왕 호칭이 논위되었으나 정종이 태종보다 나이가 많으니 노상왕으로 부르면 충분하다 하여 노상왕으로 불렸다.

그의 묘는 현재 북한개성시에 있다. 함흥부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능을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왕들 중 유일하게 왕릉북한에 있으며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이다.[30] 정확한 위치는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現 개성시 개풍군 령정리).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정비 정안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인데 현정릉과 비슷한 형식이다. 남한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인조장릉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북한에 있는 탓에 후릉은 같이 북한에 있는 신의왕후의 제릉(濟陵), 왕릉의 제식을 못 갖춘 연산군묘, 광해군묘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관련 기사. 세계유산에 추가등재되려면 통일 이후를 기약해야 되는 상황이다.

3. 가족 관계

후일 정안왕후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갑자기 먼저 간 아내가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31]

허나 정안왕후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무려 7명의 15남 8녀를 두어 자녀가 상당히 많았다.

정종의 중 기매라는 이름의 기생 출신이 있었는데, 바람기가 대단해서 많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아들도 낳았지만 아버지가 의심스러워서 정종은 기매가 낳은 아들을 정식 아들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기매가 가짜 내시와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이 났는데, 원칙대로라면 이는 처형감. 태종과 중신들은 가짜 내시와 기매를 처형하려 했으나, 정종은 직접 태종에게 선처를 부탁하여 기매를 살려주었다.[32] 기매는 끝까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정종의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인정하지 않고, 대신 죽을 때까지 기매 모자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 사후 기매의 아들은 '지운'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지만, 승려의 모습으로 왕자 대접을 받고 돌아다니며 권세를 누렸는데, 왕족 사칭죄로 크게 문제가 되었다. 당시 상왕이 된 태종국왕 세종대왕은 일단 지운을 체포했는데, 태종세종은 지운이 정종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심증적으로는 정종의 아들이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지운에게 '왕족에 준하는 의식을 공급할 테니, 절대 왕자라는 소리를 입 밖에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지운은 이 명을 듣지 않고 계속 문제 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1424년(세종 6년)에 참수되고 만다.[33]

바로 아래에 설명했듯이 '원자'로 불렸다는 불노(佛奴)는 실록에 정종의 친아들이 아니라 유씨가 다른 사람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됐다. 불노도 지운처럼 자기가 상왕(정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결코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불노는 계속 정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가 공주유배하여 안치하게 했다.[34]

그 외에 서자로 5남 선성군이 있는데, 첫째 부인이 바로 정몽주의 손녀인 오천군부인이다.

3.1. 본가(전주 이씨)

3.2. 외가(청주 한씨)

3.3. 처가(경주 김씨)

3.4. 배우자 / 자녀


일일히 눌러보면 알겠지만, 정종의 자녀들은 14세기 기준으로 대부분 굉장히 장수했다. 의평군은 69세, 선성군은 71세까지 살았으며 다른 자손들도 환갑을 넘겼는데, 이는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30세 후반에 승하한 문종, 성종, 현종등은 물론이고 50대까지 산 세종, 숙종에 비해서도 오래 살았다. 정종의 자녀들보다 오래 산 국왕은 영조가 유일하다.

4. 정종 무인정사 배후설?

흔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절 없었다고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 서자원자로 봉하려다 정안공 이방원압력 탓에 취소되고 그가 왕세자가 된 기록이 남아 있다.[36] 정치적 야심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 적장자 왕위 계승무인정사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으니만큼 이방우 사후 적장자가 된 그가 명분상 밀릴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태조실록》에서 태조정도전에 대한 곡필을 행한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정종 실록이라고 곡필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

사실 정종에 대한 연구는 많지는 않아도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가지 의문점에 부딪히게 된다. 개국 과정에 세운 공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방원과 달리 이성계를 따라 황산대첩에도 나섰고 조정의 중신으로 자리잡은 탓에 개국과정에서 세운 공도 상당하며 강건한 무장 출신에 중앙군 지휘권을 행사한 정도전을 위시한 공신그룹과 대치하던 왕자들의 가장 큰 형님이라 할 수 있는데 정작 무인정사 때는 동복 아우 전원, 숙부에 조카까지 다 참여하고 심지어 이방석의 형 이방번에게까지 회유가 들어간 마당에 혼자 아무것도 모른 채 제사나 지냈다는 실록 기록 때문이었다. 승정원일기가 없어 교차검증도 안 되는 탓에 결국 태종의 역사를 그대로 따랐고 다른 의견들이래야 만만찮은 배경을 가진 형을 제치기 위해 방원이 일부러 배제시켰을 가능성을 소극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였다.(윤두수, 조선 정종에 관한 연구, 1990년)

그러다 2000년대 이후 태조에서 정종, 정종에서 태종, 태종에서 세종으로 넘어가는 왕위 계승 과정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다른 의견이 제시되기 시작했다.(윤정, 정종의 즉위 과정과 즉위 명분, 2013년)

연구자에 따라서는 정몽주 격살은 물론 제1차 왕자의 난 주동자를 태종이 아닌 정종으로 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는 태종의 집권 명분과 정종이 무인정사 이후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종은 아버지 태조에게 전위를 받을 때 '장남'이란 명분으로 물려받았고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된 게 적장(嫡長)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태종의 즉위 명분은 이와 대척점에 있는 택현(擇賢)이다.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재주가 뛰어난 왕자이기에 국가를 반석에 올릴 재목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후계자적장자가 되면 자기 권위가 흔들리고 골육상쟁을 거쳐 왕위에 오른 자신의 도덕적 결함이 강조될까 두려워 자기 맏아들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택현에 맞는 후계자(충녕대군)를 세운 사람이 태종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태종이 모든 걸 주도했다고 보기엔 자신에겐 별 도움이 안 되는 적장자 계승이란 명분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택현을 명분으로 즉위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형(정종)의 아들이 되는 무리수를 감행했고[37] 뒷날의 용비어천가에서 빼버리는 건 물론 폐위당한 왕이 아님에도 묘호를 바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38] 이 때문에 제1차 왕자의 난까지의 정종태종의 행보에 왜곡이 적잖이 들어갔다 보고 둘째 형 밑에서 세력을 키워간 태종적장자가 없는 정종의 약점을 노린 넷째 형과의 경쟁(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형의 왕위를 가져갔다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즉, 아버지 태조와 이복동생 의안대군을 끌어내린 사람은 큰 형 정종이고, 그 형을 무력으로 끌어내리고 모든 걸 빼앗은 사람이 바로 태종이 된다.

사실 위의 내용은 학계에서도 비주류 의견일 뿐이다. 애시당초 태종은 정종의 적장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택현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데다가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명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기 때문이다.[39] 그리고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정종 무인정사 배후설을 밀어붙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애초에 정종의 원자 책봉 시도의 진정한 배후로 생각되는 사람이 바로 태조 이성계로 지목되고 있는데, 정몽주를 죽이고 자기 형제들마저 비명에 가게 한 이방원이 임금이 되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태조가 정종을 앞세워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려 했다고 보는 게 더 그럴 듯한 흐름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세자로 추대된 점을 볼 때 당시 정종 본인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조정의 세력이 모두 이방원 휘하의 인물들로 가득 채워진 상황을 보면 정종을 주동자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즉 정종 배후설은 원자 책봉시도와 같은 몇 안되는 기록을 보고 제시한 설일 뿐, 실록 및 타 기록에서 이방원제1차 왕자의 난의 실질적인 주체라고 적은 내용은 압도적으로 많다. 위에서 언급한 정몽주 척살의 주체가 정종이라는 설은 굉장히 논파의 여지가 많다. 재반론 때문에 덧붙이지만 나중에 조선 개국의 중추가 된 정도전조준, 남은 등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었던 정몽주를 어떻게든 살려두려 했던 이성계와 달리 이방원은 그를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 한가운데서 죽였고 또 이성계에게 질책을 받자 사죄는커녕 반항하기까지 했다.[40] 이성계 또한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발언했고 나중에도 계속 이 일로 이방원을 미워한 것으로 보아 이성계정몽주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리는 없고 이방원정몽주에 대해 극한의 친밀감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정몽주 살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다 알았음이 확실하다. 이방원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당황했을 리도 없고[41]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이렇게 총대를 매고 어그로를 끌 수 없는 것인데, 정종의 성격상 자기 막내 동생 보고 진짜 주동자인 자기 대신 정몽주를 죽인 다음 혼자서 아버지의 모든 분노를 감당하며 칼 맞고 죽으라고 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킨다 한들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혁명이 성공한다 해도 어차피 계승 순위가 다소 먼 이방원이 형님들 대신 목숨을 내놓고 척살모의를 주도하였고 정종은 문중의 실질적인 대표로서 사후처리를 맡은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42][43]

이방원은 단순히 정몽주를 죽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문 전체를 구하기 위해 정몽주살해한 자라는 세간의 비난과 친구를 잃은 아버지분노를 한몸에 받고 비명 횡사하는(죽진 않았지만)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입지가 크게 올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제1차 왕자의 난에서도 동생들을 죽인 금수 같은 놈이라고 아버지에게 집중적으로 욕 먹고 야사에서는 진짜로 아버지에게 화살 맞고 철퇴 맞아 죽을 뻔했던 점, 정도전과 같은 친 이방석 세력의 주살 등의 주체가 이방원인 점이나 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 및 숨은 배후라 보기엔 매우 지지 기반이 약했던 점 등 여러 가지 주 기록들을 볼 때 정종 배후설이 이방원이 주도한 사건이라고 보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44]

그리고 정종은 무력은 강했지만 본래 야심이 별로 없고 웃어른들에게 순종적인 타입이었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주 이씨 가문은 고려 귀순 전부터 가주 자리를 놓고 문중 내의 내홍이 격심해서 당장 정종의 할아버지인 이자춘조차 적장손인 조카 이천계한테서 가주 자리를 먹튀해서 얻었을 정도인데 차남인 정종이 야심만만했다면 장남인 방우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는 만큼 동북면 가별초를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후에 이루어진 정종의 원자 책봉 시도는 결국 태조가 그나마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패였던 듯하다. 거의 유폐당하다시피 했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의 순후한 성품을 이용한 정치적 시도였다는 것.[45] 태조가 보기에 이방원의 편을 들어준 둘째 또한 밉긴 했지만, 주체인 이방원보다는 나아보였을 것이다. 정종이 그동안의 사건의 배후였다면 원자 책봉 시도 방식 자체가 매우 부실한 점 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막후라는 사람이 그런 거 하나 공론화시켜서 정치 싸움을 못할 정도로 지지 기반이 없었단 말인가? 결국 축출당한 이성계가 정종을 앞세워서 이방원의 왕위 등극을[46] 어떻게든 막아보려 친 몸부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본문에도 있지만, 태조는 정종에 대해 '한번도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정종이 무인정사의 실제 배후였다면 나올 수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생인 이방원세제가 아닌 세자로 책봉한 것은 단순히 이방원의 '세자' 타이틀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지만 정종 본인이 먼저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리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태조의 뒷공작이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친자가 후계구도에 거론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향후 정치권에서 상왕의 친자라는 명분으로 반역에 엮이기 딱 좋은 일이고, 그렇다면 아예 이방원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자신의 적장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들들이든 본인이든 목숨 부지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종은 이후 문제의 불노를 내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실제 친자가 아니건 불노의 목숨을 부지시키기 위한 눈물겨운 부성애건 간에 배후니 흑막이니 하는 타이틀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다.[47]

하지만 정종의 무인정사 배후 여부와는 별개로, 정종이 무인정사 계획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찍이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형 방우를 대신해 장자 노릇을 해오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방과가 과연 동생 방원의 권력욕이나 방석이 세자가 된 것에 대한 친동생들의 불만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방과는 딱히 이와 관련해 방원을 제지하거나 반대의사를 표했다는 기록이 없다. 난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에 관해 한탄하거나 방원을 꾸짖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이를 보면 정종은 제1차 왕자의 난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더라도, 암묵적으로 방원이 난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 하다못해 최소한 묵인 정도는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몰랐을 수도 있다. 정종은 효자로 유명했고 애시당초 무관으로서 아버지 이성계를 보좌해왔던 사람이고 온화한 성격이라 만약 사실을 알렸다면 여차했을 때 아버지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애시당초 무인정사 자체도 이리저리 알리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이 사실은 이방원, 이숙번, 하륜, 민무구민무질 형제들 정도만 알고 있었지 기밀사항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어떻게 될지 모를 사람들도 아니었다. 당장 종친 이천우는 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정말로 보안은 철저했을 것이며 또다른 방증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종은 선조의 묘에 제사지내러 갔다가 소식을 듣고 숨었다고 하니 만약 알았다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정종 배후설과 같은 주장은 조선전기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의 소실, 현재로서는 1차 사료라고 봐야 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모순점 등을 근거로 연구하고 있는 학설이라 아직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물증이 확보되어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주의해야 한다. 하륜이 주도한 태조실록의 곡필 범위를 확정하는 것도 애매하기도 하다.

5. 공정왕에서 정종이 되기까지

"대행 상왕(大行上王)의 능호·묘호·시호를 의논하여 아뢰어라. 내 생각으로는 사사 시호는 올릴 수 없고, 다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시호만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중략)
"우리 태조도 또한 사사 시호가 있었습니다. 묘호는 옛적에도 그 예가 없었으니, 지금도 없는 것이 좋습니다."
- 《세종실록》 6권, 세종 원년(1419) 두 번째기사.[48][49]
세종은 왜 큰아버지 정종을 "정통성 없다" 철저 무시했을까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은 상왕이자 으로서 제대로 대우했고, 세종 역시 큰아버지 정종이 살아있는 동안은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정종을 극진히 모셨으나, 태종은 태조가 붕어하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형을 배제하고 상주가 되어 자신이 태조의 적통을 이은 장자이며, 태종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왕통이 형성되었음을 알렸다. 즉, 정종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이미 왕실에서 정종의 지위는 정해져 있었다.

명나라의 경우, 정종을 조선국왕으로 인정하기 전에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죽었으므로 명나라는 정종을 前 권서국사(權署國事), 즉 임시로(권서) 나랏일(국사)을 처리했던 자로 간주하였다.# 이 또한 조선 왕실과 조정의 의중을 명나라가 반영해준 것이라 볼 수 있다.

태종의 왕통을 이은 세종은 1419년(세종 원년)에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을 극진히 모신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왕통을 위해 정종의 지위를 격하했고, 이 때문에 정종은 오랫동안 조선 국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세종은 정종을 정식 선대왕으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왕실의 웃어른으로 인정하고 종묘에 모시기는 하였으나, 그 대접은 박하면서도 모호했다. 첫 번째, 정종에게는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두번째, 시호도 처음에는 '온인 공용 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고 올렸는데, 명나라가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자 공(恭)이라는 글자가 겹친다는 이유로 시호에서 공용(恭勇)을 삭제하였다.# 즉 조선에서 정종에게 올린 시호는 (대왕을 제외하고) 온인 순효, 단 4글자에 불과했다. 조선에서 국왕들에게 올리는 시호는 (대왕을 제외하고) 8자가 기본이고, 사람에 따라 추가적인 글자를 덧붙였다. 정종에게 시호를 단 4글자만 올렸고, 삭제된 공용을 합쳐도 6글자에 불과하니 대접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아예 종묘에서 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제대로 선대 왕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명나라로부터 정식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지 못했다는 문제와, 태종왕통을 이은 후손으로서 방계인 정종을 제대로 인정하기 뭣하다는 문제까지 합쳐진 것이다.

용비어천가에서도 해동육룡이란 구절은 정종을 뺀 것이다. 종친들에게 관대한 세종대왕도 정종의 자식들(모두 서자)에게 상당히 냉정해서,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모조리 유배형을 내렸다. 연산군 때에는 정종의 위패가 동쪽 제일 끝방(좌익)에 있었다고 하는데, 위치 자체가 푸대접이다. 종묘는 죽은 자의 공간이므로 해지는 서쪽을 높은 자리, 동쪽을 낮은 자리로 본다. 원칙대로라면 정종은 태종보다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한참 후손인 예종보다도 낮은 끝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자손들 또한 아무런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다른 임금들의 자손은 설령 서자라 하여도 대우를 받았다. 결국 자손들이 따로 임금에게 청원하여 그제서야 칭호와 직책을 받았다.

다만 묘호를 올리지 않은 데에는 당시의 분위기도 있었다. 묘호는 원칙적으로 황제에게만 올릴 수 있었으며, 제후에게는 올릴 수 없었기에 원종 이후로 한반도에선 묘호가 폐지됐었다. 따라서 태조는 태왕, 광종은 광왕, 현종은 현왕이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물론 왕실 내부에서 암암리에는 묘호를 안 쓸 수가 없었다.) 세종 당시는 이미 충렬왕 이후 150년 넘게 묘호가 쓰이지 않았으며,[50] 태조건국 직후엔 4대조를 목왕, 익왕, 도왕, 환왕으로만 추존했다가, 이후 1411년(태종 11년)에 태종아버지에게 태조묘호를 올리면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묘호를 같이 올렸다. 제후묘호를 올리는 것이 원래는 유교예법에 어긋나는 거라 처음엔 당나라 이전의 중국처럼 업적이 있는 에게만 올리는 것으로 묘호를 부활시킨 것이다. 당장 세종 대에 고려사가 편찬될 때에도 저자들이 고려왕들에게 묘호를 올린 것을 참람한 것이라 표현할 정도로 당시까진 묘호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후 세종태종묘호를 올릴 때에도 대행 태상왕의 공덕이 융성하여 전고에 드문 일이니 올린 것이었고,# 세종이야 뭐 말이 필요없는 명군의 대명사, 문종은 그 세종 치세의 후반부를 대리청정하며 사실상 이끌어간 명군,[51] 세조는 당시 조선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계유정난으로 종묘사직을 보전한 위대한 군주(...)였으니 각각 묘호를 받을 자격들은 충분히 인정되었다. 이렇게 4대 연속으로(노산군은 법적으로 폐위이니) 계속 묘호가 붙다보니 묘호제가 정착된 것이지 처음부터 묘호를 당연하게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종에게 묘호가 올려지지 못한 것엔 이런 분위기도 일조했다.

실제로 공정왕의 묘호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4대 연속으로 묘호가 올라간 뒤인 예종대의 일이었다. 1469년(예종 원년)에 예종은 "공정대왕은 이유도 없이 묘호를 빠트렸으니 이제라도 더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그러나 예종이 바로 그해에 죽었으므로 논의는 거기서 그쳤다.[52]

이후 정종의 자손들은 성종, 중종 때에 "예종대왕께서 공정 대왕께 희종(熙宗)이라는 묘호를 정하셨는데 그만 승하하셨으니, 이제라도 묘호를 올려주십시오."라는 요지로 상소하였으나, 역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였다.[53][54] 특히 성종은 자신이 받은 상소에 비답 자체를 아예 내리지 않았다.

정종이 죽은 지 무려 262년이 지나 숙종의 재위기였던 1681년(숙종 7년), 성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묘호가 빠졌다고 숙종에게 보고했다. 이때 교정청은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집안의 기록에 양도대왕(襄悼大王) 때 공정왕의 묘호를 정하여 안종(安宗)이라 했다고 하지만, 사사로운 기록이니 믿기 어려우므로 실록을 참고하여 문제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하였다.[55] 나중에 관리들이 조사해보니, 교정청의 상소와 달리 윤근수의 기록에 공정왕의 시호를 '안종'이라 정했다는 내용은 없다고 하였다.

송시열에게 묘호를 추가하는 문제로 의견을 물으니, 송시열은 대략 아래와 같은 요지로 찬성하였다.
공정 대왕께서 겸손한 뜻으로 물러나셨으므로 태종 대왕께서는 그분의 의사를 존중하여 억지로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후대의 왕들도 그 뜻을 받드셨습니다. 하지만 태종 대왕종묘에서 그분을 제치고 당신만 아름다운 칭호를 받음이 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묘호와 시호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숙종정종(定宗)이라고 묘호를 정하고, 기존에 올린 시호에 '의문 장무(懿文莊武)'란 글자를 더하여 종묘에 이를 고하는 부고제 제사를 올렸다. 그렇게 정종은 정말 뒤늦게 다른 조선 국왕들의 예에 맞추어 '묘호 2자+명나라 시호 2자+시호 8자+대왕'이라는 형식에 맞춘, 제대로 된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죽고 나서의 대접이 너무 박해서 왕실 제사를 맡는 하급관리 차식(車軾)[56]의 꿈에 나타나 전임들이 너무 소홀했다며 한탄했다는 야사가 있다. 꿈에서 깬 뒤 차식이 정종의 제사를 정갈하고 푸짐하게 잘 지내자 공정왕이 고마움을 표시하며 보답을 약속했다. 얼마 후 차식이 노모를 간병하고자 귀향하는 길에 갑자기 독수리[57] 한 마리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던져주었는데, 공교롭게도 노모의 병환에 즉효인 가물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서 출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아들 농사도 잘 지어 차씨 부자가 모두 문명을 떨쳤다.

6. 여담

7. 대중매체

재위 기간도 길지 않고 실권도 거의 없던 꼭두각시 국왕이기 때문에 대중매체에서는 그동안 유약한 모습으로만 주로 그려져 왔었고 비중도 낮았으나, 2010년대부터는 아버지의 무인적인 면모를 가장 닮은 무장 출신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증에 맞게 강인한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고 있는 상황이고, 또한 비중도 옛날 작품들에 비하면 많이 늘어났다. 여기에 아랫사람들을 최대한 챙겨주는 후덕한 성품이라, 능력도 인품도 없이 꿈만 커서 여러 사람 심란하게 만든 데다 인격마저 개차반이었던 이방간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방원 같은 비전도 없었고[67] 왕실국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는 냉혹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어 군주에 적합한 인물은 확실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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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1] 율리우스력 7월 18일[A] 율리우스력 10월 14일.[B] 율리우스력 10월 15일.[4] 율리우스력 10월 6일.[5] 조선 최고령 왕세자 책봉(41세)[A] [A] [C] 율리우스력 11월 28일.[9] 1418년, 조카 세종의 즉위 이후에는 상왕이 된 태종과의 구분을 위해 노상왕(老上王)으로 칭해졌다.[C] [B] [12] 즉위 후 피휘자 개명[13] 모두 서출이다.[14] 굵은 글씨는 1681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15] 1681년(숙종 7년)에서야 비로소 완성된 묘호 1자, 명나라 시호 2자, 조선 시호 8자. 숙종추숭이 있기 전에는 명나라 시호 2자, 조선 시호 4자가 전부였다.[16] 問罪=죄를 캐내어 묻는 것.[17] 태조 즉, 왕실의 친위부대 지휘관이었다.[18] 현재의 황해도 구월산 남쪽 지역의 문화면[19]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20]정종실록》 1권, 정종 원년(1399년, 명 건문(建文) 원년) 1월 19일 (경인) 3번째기사. #[21] 《정종실록》 1권, 정종 원년(1399년, 명 건문(建文) 원년) 1월 9일 (경진) 11번째기사. #[22]정종실록》 1권, 정종 원년(1399년, 명 건문(建文) 원년) 5월 1일 (경오) 1번째기사. #[23]황해북도 토산군, 옛 금천군의 일부[24] 함경도의 옛 이름. 이성계의 옛 근거지였던 만큼, 확실히 뒷말이 나올 법한 유배지다.[25] 사실 세종이 즉위하던 시기쯤 되면 아버지(10년전 사망)도 셋째형(14년 전 사망)도 죽었기에 형제나 자기 웃사람으로 치면 둘째형인 정종과 넷째형인 이방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방간은 이 사건 때문에 유배중인 상태였으니 남는 사람은 둘째형인 정종 하나였다.[26] 정확히는 고려의 옛 풍습에 첫눈을 다른 것으로 속여 보내고, 보낸 심부름꾼을 잡지 못하면 받은 쪽이, 눈치채고 심부름꾼을 붙잡으면 보낸 쪽이 한턱을 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7일 (계묘) 10번째기사. #.[27] 출처: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2월 11일 (갑자) 3번째기사. 상왕의 충고에 따라 가례색을 파하다.[28] 영조(83살), 아버지 태조 이성계(74살), 고종(68살), 광해군(67살) 다음으로 역대 조선 국왕들 가운데 5번째로 장수했고, 아울러서 본인 포함 앞사람들과 더불어서 환갑을 넘긴 5명의 조선의 군주 중 한 명이다. 6번째는 환갑을 맞기 한 해 전에 붕어숙종(60세)이다.[29] 물론 56세도 당시 기준으로 봐도 장수했다고 볼 수 있는 나이이다.[30] 왕비까지 포함하면 태조의 첫 부인이자 정종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濟陵)도 개성에 있다.[31]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8월 15일 (정묘) 2번째기사. 상왕을 받들고 본궁 수각에서 술자리를 마련하다.[32] 가짜 내시는 처형당한다.[33]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1월 25일 (임인) 6번째기사. #.[34] 태종실록》18권, 태종 9년(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10월 27일 (을축) 3번째기사. #[35]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 정종실록 권제3, 9장 뒤쪽~10장 앞쪽, 정종 2년 2월 4일(기해) (1400년)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36]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11월 7일 (기묘) 1번째기사. #.[37] 이것도 논란이 많다. 세제가 아닌 세자로 지칭된 것과 정종이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을 연결시키면, 이때의 子는 정종의 子이라기보다는 태조의 子라는 것을 지칭한다는 의견도 있다.[38] 세종이 벌인 일이긴 하나 정종이 승하할 때 태종상왕으로 여전히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누구의 의중일지는 뻔하다.[39] 사실 유교 사회가 아니더라도 명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 자체가 헛소리다. 정치사에서 명분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명분을 무시한 자들 치고 오래간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진한교체기에는 명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절대 그렇지 않았고 이는 명분을 잃은 항우나 영포가 결국 멸망한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명분의 힘이 약해진 게 아니라 싸움으로 명분을 만들던 시기, 즉 요컨대 난세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다. 즉, 이 때는 명분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가장 힘센 자가 나서서 나만이 천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명분을 세워야 했던 시기였는데 항우나 영포의 경우 이런 명분 쌓는 작업을 우습게 보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하게 된 것이다. 물론 패자가 된 유방은 그와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40] 면전에서 '아버지가 제게 화내시는데 어머니(신덕왕후)께서 제 편을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강씨이방원 편을 들어 주었다.[41] 이성계의 반응이 이방원을 당황시킨 게 아니라는 근거는 정몽주 척살을 논의하기 위한 회합 당시 이지란의 발언이다. 당시 그는 어르신(이성계)이 반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즉 이성계정몽주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데 납득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42] 물론 그보다는 가장 큰 벽인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새 나라 건국을 앞당기고 동시에 문중 및 혁명세력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늘려서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야망이 가장 컸을 것이다.[43] 그리고 이방과가 한 일도 이방과가 주도적으로 맡았다거나 동생 이방원과 연계해서 벌였다고 볼 수는 없고 그냥 뒤처리를 맡을 만한 사람이 그밖에 없으니까 맡았을 듯하다.[44] 무엇보다도 이방원은 무인 출신 가문에서 나온 과거급제자로, 이 인물 하나로 이성계 가문의 위격이 달라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과거급제 홍패를 보고 이성계가 절을 했을 정도로 감격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정몽주 척살 같은 정도가 아니라면 미움을 받을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또한 위화도 회군시기에는 개경으로 달려가서 신덕왕후와 이복동생들을 직접 탈출시키기까지도 하였다.)[45] 게다가 정종은 아버지 이성계고려의 무신으로 활약하던 시절 오랫동안 부관으로서 보좌했었다.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의 직속상관이기도 했었던 이성계의 말을 정종이 거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46] 왕위 찬탈이기는 하지만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형을 쫒아내는 등 패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명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진 않았다. 이방원왕위 찬탈을 꾀했다면 형 정종을 굳이 왕위에 올리고 그 양자로 들어가는 귀찮은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방원 외에는 왕위에 오를 만한 자도 없었을 텐데 굳이 사대부와 척을 지면서까지 급하게 왕위에 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치 9단인 태종이 모를 리도 없고. 그렇지만 아버지를 몰아내어 빼앗은 왕위에 처음부터 본인이 오르지만 않았을뿐 먼저 형을 허수아비로 왕위에 앉혔다가 그 다음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사전작업을 한 것 자체는 엄연한 왕위 찬탈이 맞다.[47] 실제 친자가 아니라면 집안도 좋고 확실한 친자이기도 한 성빈 지씨 소생의 덕천군 같은 선택지도 있었다.[48] 허조세종대왕의 대화.[49] 대행 상왕의 능호·묘호·시호를 의논해 아뢰게 하다.[50] 심지어 반원 자주노선으로 알려진 공민왕에게조차도 묘호를 올리지 못했다.[51] 이 시기엔 아예 명에 대놓고 묘호를 통보할 정도로 조선의 국력과 자신감이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이기도 했다.[52] 예종실록》 7권, 예종 원년(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9월 25일 (을사) 1번째기사. #.[53] 실록에는 예종이 '희종'이란 묘호를 정했다는 구절은 없고, 성종 때 정종의 자손들이 그렇게 주장했단 이야기만 나온다.[54] 성종실록》 51권, 성종 6년(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1월 15일 (을축) 2번째기사. #.[55]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5월 18일 (경오) 2번째기사. #[56] 조선 중기의 명시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아버지.[57] 라고도 한다.[58] 현재는 집현전이 아니라 경복궁 수정전으로 바뀌어 있다.[59]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6월 19일 (병인) 2번째기사. #.[60] 다만 위에서 보았듯 묘호 문제는 이때까지는 묘호를 써야하냐 말아야 하냐가 논란거리였다. 그나마 시호랍시고 올린게 겨우 6글자뿐인 게 논란거리. 애초에 묘호성종 시절까지 논란이 이어져 성종이 "우린 제후국인데 참람하게 묘호를 쓰고 있다" 라고 한탄했을 정도다.[61] 사실 이숙번이 숙청당한 결정적인 사유는 정종한테 무례하게 군 것도 있지만, 지 뜻대로 안 된 안건에 대해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하소연한 게 더 컸다. 아들바보인 태종이 보기에 이숙번은 오만방자한데 나이까지 창창한 40대니, 세자가 즉위할 때 경험이 부족한 왕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권신이 될 게 뻔하다고 봤을 것이다.[62] 세종이숙번에 대해서 "이숙번민무구민무질 등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고 나서 유양과 함께 부왕께 '세자께서 저희를 미워하실 지 모르니 자주 세자 저하를 뵙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직접 청한 것으로 보아 역심을 가졌다 할 수 없고 유양은 용서받았으니 숙번에게 무슨 죄가 없겠는가?" 라고 말했다.[63]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7일 (계묘) 10번째기사. #.[64] 다만 다이샨은 정치적인 야심이 적었다기 보다는 동생인 홍타이지에게 밀렸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누르하치 사후 다이샨은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홍타이지다이샨계모와의 불륜을 공개하면서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바람에 동생인 홍타이지에게 확실하게 밀려나고 말았다.[65]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생몰년도가 미상인 덕안대군은 일단 태종이 1367년(공민왕 16년) 생이니 1368년(공민왕 17년) 이후에 태어났고, 1387년(우왕 13년)에 숨졌다고 알려져 있다. 덕안대군도 일단 어른이 되기도 전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66] 예를 들어 문종단종, 예종, 인종, 경종, 헌종 등이 있다.[67] 이는 정종이 아버지 태조를 따라다니던 부관형 인물인 데다가 국가의 운영과 관련되는 문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아버지 태조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의 참모들을 들여 국가의 기틀을 설계할 정도의 배포나 능력은 있었다.[68]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남은 역.[69] 1954년 출생. 1992년 개봉한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성인 한병태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강 역을 맡다가 간암으로 중도 하차하고 당해 가을에 숨졌다.[70] 기록에 나왔지만 허수아비라고는 해도 공양왕에게 직접적으로 압박 발언까지 할 정도의 패기가 있었다.[71] 작중에서 처음으로 이방원이성계가 대면했을 때가 회군 후 포위 대치 중이었는데, 아버지를 도우러 찾아온 방원의 행동에 이성계"네 형 방과가 있는데 뭣하러?"라며 오히려 무모하게 온 이방원을 꾸짖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방과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72] 신덕왕후는 이에 대해서 우유부단하다고 대놓고 무시했으며 다른 인물들도 정치적 인사 등에 대해서는 정종을 무시하는 이들이 몇 있다.[73] 이는 뜻하지 않게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초 정도전 일파는 신의왕후 소생 대군들을 모두 으로 불러들여 몰래 죽일 계획을 짰었는데 이방과가 오지 않아 거사 실행이 지연되어 이방원이 낌새를 채고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74] 심지어 방탕하고 거만한 이복동생들(신덕왕후 소생의 이방석이방번)까지 딱히 미워하지 않았기에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어버린 이복동생 이방석시신을 보고 "굳이 죽였어야 했냐"며 슬퍼하고 이방원이방번흥안군 이제를 살려주려고 하자 참 잘했다고 칭찬한다. 이방간이 "화근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칼을 들고 쫓아가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려보려 하지만 이방원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1번 말려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면서 실패.[75] 처음에는 그래도 미워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덜 미운 아들인지라 밤중에 불러서 "방원이를 죽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나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설득하지만 아버지만큼 동생도 사랑하던 형인지라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거부하면서 도망치기도 했다.[76] 방간이라고 부르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전하라고 말하는 아우의 모습에서 더욱이 울분에 찬 듯한 목소리로 동생을 꾸짖는 것이 크게 느껴질 정도. 노함과 슬픔을 가지고 동생을 껴안으며 우는 장면 역시 명장면 중 하나.[77] 그러나 정작 이방원 앞에서는 "끝까지 구차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결국 목숨은 부지했지만 말이다.[78] 극중 정종이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친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이방간을 분노로 다그치는 모습이 정말 애절하다.[79] 이방원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형을 닥달한 신하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형에게 어떻게 우려를 불식시킬까 걱정하고 있던 상황이었다.[80] 이는 이성계에게 인정받고 형과 함께 사냥을 하며 우애가 돈독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알던 정종은 방원이 어떻게 하던 백성은 방원을 두려워 할 것이고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을 테니 내가 내리는 왕명으로서 그 왕위를 받아라라고 방원의 입을 막는데, 이후에 그 과정 단계를 들은 이방원은 물론이고 원경왕후도 그런 강단이 있었나하며 놀랄 정도.[81] 이는 아버지 이성계도성을 떠나 있어 반대할 겨를이 없는 사이 재빨리 일을 끝내버리기 위함이었기도 하다. 실제로 이방원이 즉위한다는 말을 들은 이성계는 황급히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즉위식이 끝나고도 남을 거리인지라 결국 포기하고 이후 조사의의 난이 끝날 때까지 아예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82] 극 중 이방원은 친혈육에 대한 정이 남달라서 이들과 관련된 일에서는 평소의 이방원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느슨해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때도 하륜원경왕후가 "태상왕 전하께서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리가 없다. 태상왕께는 백우전이 있다"며 경고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83] 실제로 정안왕후와 담소를 나누며 경치좋은 곳을 느긋하게 거니는 장면이 몇 번 스쳐지나간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있지만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정말 속 편하게 놀러다녔으며 왕위에 오른 후 일에 치이고 살던 태종은 "형님이 부럽다."고 직접 언급하기까지 했다.[84] 이성계도 죽기 전에 정종을 찾을 정도.[85]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안평대군 역,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혜종,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조준 역.[86] 영화 <부당거래>에서 류승범이 분한 주양검사 사무실에 앉아있던 남자 사법연수생을 연기한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