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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11:55:07

성빈 지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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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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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의 후궁
성빈 지씨 | 誠嬪 池氏
파일:성빈지씨제향단.jpg
성빈 지씨 제향단 전경
본관 충주(忠州)
부모 부친 - 지윤(池奫, ? ~ 1377)
모친 - 순흥 안씨
형제자매
2남 3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지익겸(池益謙, ? ~ 1377)
오빠 - 지득린(池得鱗)
언니 - 삼한국대부인 지씨(三韓國大夫人 池氏)[1]
여동생 - 숙의 지씨(淑儀 池氏)
배우자 정종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덕천군(德泉君, 1397 ~ 1465)
차남 - 도평군(桃平君, 1402 ~ 1439)
봉작 성빈(誠嬪)
능묘 황해도 개풍군 광덕산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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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정종후궁. 아버지는 고려 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지윤(池奫)이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이다.

지윤의 딸들은 모두 태조 이성계의 자식들과 혼인하였는데, 맏딸은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와 혼인하여 삼한국대부인이 되었고, 둘째 딸과 막내딸이 정종의 후궁이 되었다. 바로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이다.[2]

슬하에 덕천군 이후생, 도평군 이말생 두 아들을 두었다.

2. 생애

성빈 지씨가 언제 어떻게 정종의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애초에 지씨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성빈이라는 빈호가 쓰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라는 작호는 태종 때 처음 쓰이기 시작하여 세종때 내명부의 공식 품계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 첫 번째 후궁 빈은 명빈 김씨이고 그 이전의 빈들은 (가령, 그 유명한 효빈 김씨라든가) 훗날 대한제국 시기에 추숭된 것임을 기억하자. 또한, 정종이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을 뿐, 사실상 국왕 대접은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녀의 자식들도 왕자로서 대접 받지는 못하였다.[3] 일례로 그녀의 맏아들 덕천군은 1444년(세종 26)에 비로소 명선대부(明善大夫) 덕원정(德原正)으로 봉해졌다가 1460년(세조 6) 덕천군이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4][5]

또한, 1439년(세종 21) 세종은 당시 원윤(元尹)이었던 도평군 이말생의 고신(告身)을 거두면서 생모에 대해 안 좋게 말한 바 있다.
임금이 김돈에게 이르기를,
"전일에 원윤(元尹) 이말생(李末生)이 기생 첩을 사랑한 까닭으로 헌사(憲司)의 탄핵을 입었으나, 그 첩을 취한 것이 오래지 않은 이유로써 내가 용서하였더니, 이제 다시 듣건대, 이말생의 음란(淫亂)함은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며, 이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시끄럽게 전지하기를, '인덕전(仁德殿)의 아들이 모두 황음(荒淫)하였다.'고 하니, 그 낳은 어미가 올바르지 못한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세종 21년 6월 6일

사실 그녀의 아버지 지윤은 조선의 개국공신도 아니거니와 《고려사》에서 전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서 성빈 지씨에 대한 평가도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6]

3. 여담

4. 대중 매체


[1] 진안대군의 정부인.[2] 앞서 고려 때는 이와 같은 혼인이 흔한 일이었다. 이자연의 세 딸은 모두 문종과 혼인하여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가 된 사례도 있다.[3]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海東六龍: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에 정종은 아예 제외되어있다. 1681년(숙종 7)에야 숙종묘호시호를 올리면서 정식 국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4]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1월 10일 임오 1번째기사. #[5] 태종의 아들들이 바로 대군이나 군으로 봉작되는 것과는 대우가 달랐다.[6] 지윤은 이인임·임견미와 함께 권력을 잡고 탐학한 짓을 저질렀고, 우왕의 유모와 간통하고, 첩이 삼십여 명이 넘는다는 등 좋은 평가는 단 한 줄도 실려있지 않다.[7] 정종의 아들인 의평군, 선성군, 덕천군, 임성군, 도평군의 파종회장으로 구성된 봉성회(奉誠會) 주관이다.[8] 정실이 아닌 첩으로 들어갔다지만 저래봬도 대학사의 딸로 예법 하나 못 익혀서 엉덩방아를 찧어댈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언니가 이방우의 정처인데다가 고려말 일처다부제 문화, 유일한 빈의 지위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둘째부인에 준하는 지위라고 봐야 한다.[9] 이 장면에서마저도 "이 나라 세자가 머리 깎고 중이 되다니 이런 법이 어딨어"라고 말한다.[10] 용의 눈물에서도 이방원이 왕이 된 이후 정종에게 자식들을 도로 불러올 것을 권유해 출가한 자식들이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