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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등장인물. 배우는 김영란.[1]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그의 총애가 극진한 인물로 나오며 이성계의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2. 작중 행적
이방원과는 원래 사이가 괜찮았다.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이방원이 가족들이 인질로 붙잡힐 것을 막기 위해 신덕왕후와 이복동생들도 함께 피신시키기도 했고, 이성계가 실권을 잡은 뒤 그를 제거하려고 하던 정몽주를 이방원이 독단적으로 암살하자 분노한 이성계가 이방원을 죽이려 들자 이지란과 같이 말리고[2] 이성계가 그 이후에 군령으로써 방원의 목을 베어오라고 이지란에게 지시하자 "비록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다섯째도 자신의 자식이다"라고 울먹이며 이성계에게 선처를 호소한다. 중전이 된 이후의 강씨의 태도를 보자면 진짜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의 차이이다. 이방원 측에서도 부인 민씨 등이 신덕왕후를 경계 한다. 물론 1차 왕자의 난 이전까지는 정적으로서 경계라기 보다는 '저 사람 너무 믿으면 곤란' 이 정도였고 이방원은 그런 아내를 점잖게 타이르곤 했다.조선이 건국된 직후 왕궁으로 들어오는데, 이때 궁을 떠나는 고려의 마지막 대비인 정비 안씨와 마주친다. 안씨는 "새로 오신 중전이시구랴. 도둑질해서 들어앉은 지존의 자리는 어떠하신가?"라고 비꼬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했으니 자기 눈에도 가시가 박힐 거라고 저주하는데, 이후의 행적을 보면 복선이다.
이방원도 조선 개국 전까지는 어머니로서 극진히 모셨다. 그런데 개국 이후에 진안대군이 행방불명 되자 슬슬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3][4] 세자를 정하는 대전에서의 논의 도중에 대전 밖에서 울부짖으며 "인간백정 방원이는 안됩니다!!!" 같은 어그로를 끄는 기염을 토했다.[5] 결과적으로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면서 신덕왕후는 한씨 소생들, 그 중에서도 이방원을 홀대하게 된다. 신덕왕후 입장에서는 이성계와 전처 사이에 나온 자식들이 다들 장성했고 사병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가 죽고 나면 자신과 어린 두 아들의 처지가 무사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예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닌 것이, 기본적으로 한 가족이라지만 한씨 소생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사랑도 못 받고 죽은 어머니 한씨를 대신하여 나라의 중전이 된 강씨에게 기본적으로 어그로가 끌릴 수밖에 없다.[6] 때문에 방석을 세자로 봉하고 정도전 같은 고명대신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7]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석을 세자로 무리하게 밀어붙인 까닭에 한씨 소생 자식들이 결정적으로 분개하게 된다.[8]
처음엔 '에이 그래도 설마 어머니께서 나한테 그리하시겠나...' 모드였던 이방원 역시 갈수록 신덕왕후와 대립이 깊어지게 된다. 심지어는 추운 겨울에 사냥하여 잡은 노루를 신덕왕후의 다과상에 패대기친뒤 "아바마마께서는 여색에 빠지시어 몸이 쇠하셨소, 아바마마께 고기 한 점 떼먹지 말고 고아 드리옵소서, 중전마마"라고 할 정도였다. 여기에 세자빈의 간통 사건과 더불어 세자 방석의 흑화까지 겹치면서 홧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병사한다. 이 때 신덕왕후가 병석에서 정도전과 마주했을 때 "방원이가 살아있는 한, 우리 세자는 산 목숨이 아닙니다. 방원이가 죽어야 합니다! 방원이가 죽어야! 방원이가!!!!!!"[9] 라고 절규하는데 이 장면은 무인정사 이후 두고두고 태조가 회한에 잠길 때마다 등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나오는 장면은 방번, 방석 형제의 참살장면. 이성계의 깊은 한과 아들과의 애증을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그렇지만 얼마 후 죽음을 앞둔 가운데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는 걸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도 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겼던 당부를 망각하고 자기 욕심만 중시했다는 걸 깨닫는다. 임종 직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자식들을 불러 마주한 가운데 자네들이 무서웠다는 속내를 밝히며 사과하고 방석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눈을 감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였다. 이때 이방원은 가지 말라는 아내 민씨의 말에도 자신은 절대 중전을 용서 못하지만 왕족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며 의무감에 문병을 왔고 담담하게 유언을 지켜본다.[10]
숨을 거두기 전 요양 차원에서 절로 피접을 나갈 때 무학대사의 주선으로 이름없는 화가에게 본인의 초상화를 의뢰했고, 신덕왕후의 사후 이성계는 이 초상화를 받아서 매일 편전에 걸어두고 보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1차 왕자의 난 직후 이성계가 물러나고 이방과가 왕위에 올랐을 때도 이방과는 신덕왕후를 계모이자 왕후로 예우하는 마인드를 갖고있었기 때문에 계속 그 초상화를 편전에 걸어놓고 있었지만, 이방원은 발견하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형의 존재도 무시하고 신덕왕후의 초상화를 잡아채 쓰레기 버리듯이 바닥에 내팽개쳐놓고는 당장 저 초상화를 태워버리라고 이방과에게 윽박을 지르기까지 한다.[11]
죽기 직전에야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제발 세자인 이방석을 지켜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했지만 이미 마음을 완전히 굳히고, 모든 결심을 한 상태였던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씨의 아들들인 방석과 방번은 물론 사위인 이제마저 죽이면서 그녀의 혈통을 아예 끊어놓는다.[12][13] 심지어 태조가 승하한 후에는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던지 강씨의 무덤인 정릉을 헐어버리고 그곳의 석물들을 가져다가, 청계천의 광통교로 만들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놓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면서 강씨를 죽어서도 편치 못하게 만든다.[14]
3. 캐릭터 평가
사후 내레이션에서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입었던 여인이다' 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총명함과 정략은 다른 것인지 작중에서는 정도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며 왕자들(특히 이방원)에게 치인다. 권력에 욕심이 없는 방의, 방과는 방석의 세자 책봉 이후에도 별다른 마찰이 없었고 괄괄한 방간도 공적인 자리에선 예를 지키는데 반해 방원은 이성계나 신덕왕후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또 세자 방석이 엇나가는 모습을 보며 속이 썩으면서도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은 보여주지 못한다. 사실 이성계의 총애를 얻어 미모와 총명함이 빛날 시절은 위화도 회군 이전, 이성계가 동북면의 세력을 바탕으로 고려 중앙 정계에 주름을 잡아가는 과정에 속하는데 이 드라마는 1화부터 위화도 회군을 하고 조선왕조 개창까지는 이방원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총명함과 별개로 보이는 권력욕도 특징인데, 위화도 회군부터 나오는 신덕왕후의 모습은 경처,향처 따지지 않고 자신이 본처의 자리에 앉고 싶어 대놓고 신의왕후를 견제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이며 권력에 대한 집착을 암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진안대군이 떠나고 사라진 다음에는 아예 대놓고 화내고 있는 이성계 앞에서 다른 음모를 꾸미는 듯한 모습이 대놓고 나왔을 정도다.
여기에 종종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 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하는 꽤나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는 탓에 작품 속 이미지가 별로 좋지는 않다. 굿을 하는 게 꼭 한심한 행동으로 볼 수는 없으나, 주변 인물들의 이를 보는 시각과(무당이 홀대받던 시기였으니...) 굿 특유의 광적인 연출이 겹쳐 한심스러움이 배가 된다. 여기에 현대에도 무당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 아니니... 그런데 이 때 부르는 무당이 꽤나 용해서, 작중 일어날 일의 대부분을 예견해서 맞추는 신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작중의 불안한 상황 때문에 세자가 된 이방석에게 죽도록 공부만 하라고 몰아붙이고 사사건건 간섭하는데[16] 이 지나친 교육열로 인해 방석이 세자빈 유씨를 냉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천대를 참지 못한 유씨가 끝내 내시 이만과 간통을 저질렀으니 방석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신덕왕후 본인까지 며느리의 불륜으로 화병이 걸리게 된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원경왕후도 이 소식을 전해듣고 '중전의 욕심이 자식을 망쳐놓는다.'고 평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어떻게든 방석이 훌륭한 세자의 본을 보일 수 있도록 술이나 사냥 등의 행동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멀리하라고 닦달했지만, 정작 주변인들은 그래도 형제들이고 사냥같은 유흥 역시 크면서 다 할법한 것들인데 왜 그렇게 막아서냐고 걱정했고 무엇보다 방석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싫어하지 않았다.[17]
오히려 방석은 술이나 사냥 등의 다양한 활동들을 한씨 소생의 이복형들에게서 배우고 싶어했고, 연륜이 풍부한 형들을 본받고 싶어 했으나 신덕왕후의 경계심과 혐오심 때문에 이복형들을 그냥 무서워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아들들 중 가장 막내인 이방석이 세자 자리에 오른 이상 정통성이 부족하고 조정과 왕실에서의 지지도 역시 떨어지는 게 인지상정이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선 한씨 소생의 왕족 중 단 한명이라도 방석의 측근은 못 되도 지지라도 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신덕왕후의 편집증적인 악감정 때문에 그 누구도 같은 편으로 만들지 못했고 그 결과 왕실 종친들도 이방석를 지지하지 않고 그의 위기를 수수방관하게 되면서 1차 왕자의 난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방석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점이다.
4. 기타
이방원이 노루를 던지는 장면은 용의 눈물 제작진이 김영란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18] 촬영 전에 사전 연습으로 큰 베개를 던져서 연기를 맞췄는데, 죽은 노루나 박제된 노루가 아닌 살아있는 노루를 마취시켰으니 더욱 실감났을 듯. 결국 김영란이 너무 놀라서 엉엉 우는 바람에 유동근은 촬영이 끝나고 커피를 뽑아주며 달랬다고 한다. 유동근도 노루가 무거워서 꽤 힘들었다고 밝혔다.여담으로 용의 눈물의 이방원, 이숙번, 세종이 각각 이성계, 이지란, 이방원을 맡은 것과 달리 정도전의 신덕왕후는 용의 눈물 및 대왕 세종에서 원경왕후을 맡은 최명길 대신 덕선이 엄마 이일화가 맡았다.
[1]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며느리 뻘인 원경왕후를 맡았다. 신덕왕후의 말년을 비참하게 만든 인물인 이방원의 아내가 원경왕후라는 걸 생각하면 묘하다.[2] 물론 "다섯째!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대감 심기를 거스르냐?"며 한 소리 하기는 한다.[3] 이성계가 진안대군이 사라졌다는 말에 다른 눈빛을 보인다.[4] 그 전에도 뭔가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 신의왕후를 만나는 것을 은연 중에 저지하기도 했고, 이성계가 만날까 할 때마다 다른 일들을 만드는 등의 경향을 보였다. 향처,경처로서가 아닌 이때부터 첫 번째 아내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 은연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신의왕후 사후에 이성계 낙마 사건 직전에 꿈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악몽까지 꿨었다. 근데, 신의왕후는 정작 임종 직전에도 신덕왕후에게 남편을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하며 떠날 정도의 대인배였다.[5] 실제로 실록에서 강씨가 대전 밖에서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태조실록에는 이 이야기가 없고 조준의 졸기에 나온다.[6] 다만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방석이 왕이 되었다면 한씨 소생 왕자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왕권에 위협이 되었겠지만, 반대로 엄연히 적장자인 한씨 소생의 왕자들 중 하나가 왕이 된다면 굳이 강씨 소생 왕자들에게 해를 입힐 정치적 이유는 없다.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대전에서 대놓고 이방원을 인간백정이라 비하하며 어그로를 끄는 것보다는 처세 면에서 훨씬 나았을 것이다.[7] 이때 정도전에게 오라버니 라는 호칭까지 쓰면서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도전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8] 어떻게 보면 조선이 건국되면서 숨겨왔던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허나 이로 인해 이방원 등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크게 마찰을 일으키면서 마음의 병을 얻는 등의 수난만 겪게 된다.[9] 41화. 이방원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으며, 이 장면으로 인해 배우 김영란씨는 주위에서 연기자로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호평을 들었다고 밝혔다.[10] 강씨도 결국 이방원 내외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감은 떨쳐내지 못했는지 마지막 유언을 남길 때 뒤늦게 도착한 이방원 내외가 시야에 포착되자 “우리 세..자..를..”에서 말을 이어나가지못하고 죽어버리는 걸로 묘사된다.[11] 실제로도 그랬고 극중에서도 태종은 정종에게 공적으로 상왕이자 사적으로 형님으로서의 예우를 다하지만 딱 한 번 무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때다. 태종이 신덕왕후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보여주는 대목. 그래도 정종은 부왕이 가장 아끼는 초상화였기에 동생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절에 맡기는 걸로 하겠다고 겨우 달랜다.[12]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인 경순공주도 이복오빠에게 친동생들과 남편을 모조리 잃으면서 속세의 뜻을 버리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한다.[13] 신덕왕후에 대한 반감은 이방원뿐만 아니라 다른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매한가지였는지 이들도 이방원을 두려워할지언정 그가 신덕왕후의 아들들과 사위부터 그녀의 뜻을 따르던 대신들까지 참살해도 말리지 않고 수수방관한다.[14] 이때 "무너진 나무 다리보다는 튼튼한 돌다리가 더 좋겠지?"라고 하면서 정릉의 석물들을 헐어다가 광교에 가져다 쓰라고 하자 지켜보던 신하들도 새하얗게 질린 표정을 짓는다. 비단 신하들뿐만 아니라 형 정종과 형수 정안왕후마저 명색에 계모이자 중전이였던 신덕왕후의 무덤을 헐어버리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못한다.[15] 여담으로 신의왕후가 부른 무당과 원경왕후가 부른 무당은 같은 배우가 연기했으며, 극중의 이름도 방울이/방울네로 사실상 동일인물이다.[16] 아마도 조선 왕실 건국 초창기인만큼 나라의 건국에 그만큼 큰 일을 한 한씨 소생들의 업적에 비하여 방석이 갖춘 것이라곤 이성계가 인정했다는 정통성 하나뿐인만큼 공부를 통해 이성계의 치세 때 어떻게든 정사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쌓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17] 심지어 신하들뿐만 아니라 자식 하나 못 보는 일개 궁녀까지 제발 세자 저하를 압박하지 말고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잘 대해주는 것도 국모로서 해야할 일이라고 지적할 정도였지만 신덕왕후는 그런 조언마저 전부 외면했다. 이는 반대로 보면 신덕왕후의 행태가 부모자식 관계에 일자무식인 궁녀가 봐도 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 촬영 당시에 진짜 노루여서 실제로 기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