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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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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교인평화회의
*군종장교가 존재하는 종단

1. 개요2. 규모
2.1. 교세 현황2.2. 교세 통계
3. 역사
3.1. 교회의 시작(조선 후기)3.2. 일제강점기3.3. 8.15 광복 후3.4. 군사정권 시절
3.4.1. 군사정권 시대의 야합 주장3.4.2. 군사정권 시대의 야합 반론
3.5. 6.10 민주 항쟁3.6. 2000년대
3.6.1.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추진 반대
3.7. 2020년대
3.7.1. 감염병에 의한 전국적 대면 전례 중단3.7.2. 청년 신자 수 감소
4.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도 전래5.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전례
5.1. 한국 천주교 전례력5.2. 한국 천주교의 대략적인 미사 거행 풍경5.3. 매일미사
6. 한국 가톨릭 교회의 특성 및 고유성
6.1. 신학적 특성
6.1.1.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영성6.1.2.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
6.1.2.1.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가 왜 쟁점이 될까?6.1.2.2. 개신교 내의 일치가 선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6.1.3. 기타 신학적 특성
6.2. 사회 교리 관련6.3. 문화적 특성
6.3.1. 위령 기도(연도)6.3.2. 제사 문화6.3.3. 교적제도
6.4. 기타6.5. 각종 일반화에 대한 반론
7. 사회적 인식8. 사건 사고9. 납세와 재정 관련 정보
9.1. 납세
9.1.1. 한국 천주교회의 소득세 납세 약사(略史)
9.2. 재무제표와 수지 내역
10. 교구11. 교육 기관
11.1. 초등학교11.2. 중학교11.3. 고등학교11.4. 전문대학11.5. 종합대학11.6.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가톨릭 교회 또는 한국 천주교(韓國天主敎)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하 서울관구, 대구관구, 광주관구 및 군종교구로 이루어진 지역 가톨릭 교회이다. 한국은 전교 지역으로 분류되어 교황청 주교부가 아닌 복음화부 관할로 지정되어 있다. (공식사이트)

한국 천주교에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조항으로 한국 교회의 교회법 보완 규정이 있다.

2. 규모

한국 내에서 개신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일이 적지만, 교단을 기준으로 하면 가톨릭이 가장 신자가 많은 그리스도교 교단이 된다. 개신교는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 수많은 교파로 갈리고, 한 교파 안에서도 여러 교단이 존재하는 반면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 교단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현상이다.

한국의 장로회 교인 수가 650만 정도이기 때문에 2023년 기준으로 약 600만인 가톨릭이 제일 신자가 많은 교단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으나, 한국에선 장로회라고 다 같은 장로회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장로회 계열'일 뿐, 장로회에도 세부적으로 여러 교단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파별 신자 수를 구별할 때, 교단까지 고려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단일한 종파/교파/교단인 천주교에 비해 300개 이상의 분파로 나뉜 개신교의 교파별 신자 수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것이 사실. 크게만 나눠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250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 250만,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이 50만으로 갈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신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미국조차 가장 큰 교파는 약 6천 8백만의 신자를 보유한 가톨릭이며, 그 다음이 약 1천 6백만의 신자를 보유한 남침례교회다.

2.1. 교세 현황

2014년 5월 7일 발표된 '교회 통계 연감 2012'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는 약 531만 명에 달했다. 2023년 통계에 의하면 약 597만명. 한국 천주교회는 사순, 대림 시기 판공성사를 6회 이상 안 본 신자는 성당에 안 나오는 신자인 냉담자로 분류하되 일단 통계에 표시한다. 한국의 신자 수는 전 세계에서 47번째, 아시아에서는 5번째로 많은 숫자다. # 단순한 신자 숫자로는 필리핀이나 인도 등에 밀려 아시아에서 5번째가 되지만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1] 대한민국의 가톨릭 교세가 가장 강력하다.

파일:2022_청소년판_5_우리국토의인문환경_페이지_01_페이지_1.jpg

지역적으로 수도권에서 신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대체로 비슷하다.

물론 비율이 낮아도 대구광역시와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광주광역시 등 대도시는 인구 자체가 많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는 적지 않아 신자가 꽤 많다.

수도권에서는 과천시, 성남시 및 고양시 등 1기 신도시 지역을 비롯한 중산층, 중상류층 밀집 지역에 주로 신자가 많다. 서해5도나 강화도 등 부속도서들이 가톨릭 강세인 인천광역시에 가톨릭이 많다.

인천의 최북단 섬인 백령도는 섬 주민들의 과반수가 현재도 가톨릭 신자이다. 대한민국 해병대6여단 군종 신부는 지역 유지일 정도이다. 1960년대에는 백령도 주민의 95%가 백령성당 신자일 정도로 교세가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1959년 백령성당 초대 주임 사제로 부임한 미국 출신 부영발 에드워드(미국명 에드워드 모펫) 신부의 영향 때문이었다. 부영발 신부는 그가 가진 막강한 영향력을 앞세워 6.25 전쟁으로 초토화된 백령도의 환경을 바꾼 은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에서도 소문난 부잣집의 아들이었던 부영발 신부는 집안의 재력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죽마고우의 힘을 빌려 백령도에 막대한 원조를 끌어왔다고 한다. 그 당시 부 신부에게 원조를 허락한 친구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라고 한다.

인천 본토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가톨릭이 인천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국제성모병원을 갖고 있다. 애당초 그리스도교 자체가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해안지대에 주로 전해졌고 내륙은 전파가 늦었다. 인천은 개신교와 성공회[2] 등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의 교세 또한 매우 강한 지역이라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도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주로 믿는다. 차이나타운 한가운데에 가톨릭 성당과 2개의 개신교 중국인 교회가 있을 정도이다.[3]

서울특별시의 강남3구(강남구, 송파구, 서초구)와 강동구, 용산구, 양천구 등의 부유층 지역과 고소득층 지역이 가톨릭 비율이 가장 높다. 사실 이런 경향은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비호남권 출신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지역도 교세가 버금가며, 호남권 비율이 높은 동작구, 노원구, 구로구, 금천구, 은평구, 관악구도 가톨릭 비율이 그리스도교 종파 가운데 1위이다. (서울 전지역 1위) 인천에서도 전방인 옹진군과 강화군를 비롯해 구도심과 연수구 등 부촌 지역에서도 단연 1위, 서울 통근자들이 많은 부평구, 계양구도 가톨릭 비율이 높다.

경기도에서도 수원시를 비롯해 부천시, 고양시, 용인시 등의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다. 강원도도 원주시를 비롯한 영서 지방과 최전방 지역에서 교세가 강하다. 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고향인 충청남도의 내포 지역은 예부터 가톨릭 비율이 높았다. 대전광역시에서는 구도심의 비율이 높고, 충청북도에서는 청주시에서 비율이 높다.

경상도는 타 지역에 비해서 불모지인데, 지리적으로 가장 내륙이며 워낙 불교 강세 지역이라 압도적으로 불교 신자 수가 많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 등의 대도시와 경상남도는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강세이며, 경상북도에서는 개신교보다 약간 밀린다.

부산에는 경상도에서 몇 안되는 가톨릭 사립학교지산고등학교, 성모여자고등학교, 데레사여자고등학교가 있다(학교법인 성모학원).

경상도 중 대구광역시가 가톨릭 강세 지역이며, 구미시, 김천시, 영주시, 그리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는 칠곡군에도 가톨릭이 제법 많다. 포항시와 경주시에서의 신자 비율도 적지 않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구도심과 인구가 많은 지역, 낙동강 벨트에도 가톨릭이 꽤 되고, 창원시, 김해시, 양산시, 포항시, 경주시도 가톨릭 비율이 꽤 된다.

전라도는 개신교가 강세이지만 가톨릭 또한 사정이 괜찮은 편이다. 광주광역시에는 가톨릭 사립학교법인인 살레시오회(남자수도회)와 살레시오수녀학원(여자수도회)이 있을 정도.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살레시오초등학교, 살레시오여자중학교, 살레시오여자고등학교(이상 수녀학원), 살레시오중학교, 살레시오고등학교(이상 남자수도회)까지 5군데나 된다.

제주도에서는 가톨릭의 힘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바로 신축민란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 비중은 개신교보단 약간 높은 수준에 그친다. 이곳의 개신교 신자 비중이 낮은 이유는 당연히 4.3 사건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제주도는 그리스도교(기독교=가톨릭+개신교)신자 비율이 적고 불교가 우세하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선 신축민란에 대해 유감과 사죄를 표했고 2016년 '신축 화해의 길'을 만들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6년에 나온 2015년 종교 통계를 보면 다시 100만 명 감소했다. 최근 들어 천주교 신자의 실제 미사 참례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냉담자 수는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층에선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다. 통계에 따르면 분명히 교적상의 신자는 500만 명인데, 미사 참석률은 더 내려가서 19% 내외이다. 이로써 현재 한국 천주교 내 실질적 신앙활동 인구가 100만명 미만으로 본다. 사실상 기성종교가 몰락해 가는 흐름을 천주교도 피할 수 없는 상황, 아니 가장 큰 타격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중이다.

2021년 한국갤럽 조사 결과 한국 내 천주교 신자는 6%이다. (불교 16%, 개신교 17%, 무종교 60%)[4] 종교 현황 종교에 대한 인식

2.2. 교세 통계

신자 수[5]
전체 국민 비율 %
조사 연도 종교 없음 불교 개신교 가톨릭 기타
1985 57.4 19.9 16 4.6 2.1
1995 49.3 23.2 19.7 6.6 1.2
2005 46.9 22.8 18.3 10.9 1
2015 56.1 15.5 19.7 7.9 0.8

2023년 기준, 가톨릭 신자는 약 600만 여명으로 추산.[6]

가톨릭교회가 신자 1명당 얼마씩에 신자 수 곱해서 매매할 일도 없거니와, 선거철만 되면 공직 선거 후보자들 불러다가 세력 과시하지도 않으니, 굳이 신자 수를 부풀려 교세가 크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려 할 유인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발표한 가장 최근 통계는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3>이며, 이에 따르면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전국 16개 교구가 집계한 신자 수는 597만명으로 남한 전체 인구의 1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문제는 통계의 주석에도 명시되어 있다시피 세례성사 기록과 교적을 근거로 집계된 수치이므로 응답자가 스스로 응답하는 방식으로 조사된 정부(통계청) 발표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신자로 집계된 전체가 모두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조 지표로 주일 미사 참례율(19.5%), 판공성사 참여율 (부활 31.7%, 성탄 30.1%) 등을 함께 발표한다.

한편 통계청에서 실시한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신자 수는 389만여 명으로 추산되어 이전 조사인 2005년에 비해 급감했으며, 인구 대비 신자 비율도 2005년 10.9%에서 2015년에는 7.9%로 급락하여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점검해 볼 사항은 가톨릭교회 통계와 통계청 발표 통계 수치 사이의 괴리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2015년 통계 발표 이전까지만 해도 신자 통계의 경우 가톨릭교회에서 발표하는 수치보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신자 수가 더 많아 이례적인 사례였기 때문에 더 관심이 된다. (이의 이유로는 상위 문서인 가톨릭의 6번 항목 가톨릭 신자의 6대 의무에 자세히 서술된 바와 같이 관면혼과 유아세례를 들 수 있으며, 교회에서 발표하는 신자 통계에 냉담자를 제외시킨다는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근거는 아래 자세히 설명된다.)

한 가지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 통계 집계 방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는 2010년까지만 해도 전수조사였다. 즉 통계조사원이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해당 가구 구성원이 직접 문항에 응답[7]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2015년 조사에서는 등록센서스 방식이 도입되면서 표본으로 선정된 전국 20%의 가구를 대상으로만 방문조사가 이루어지고 행정 자료 등을 이용한 추계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 것도 이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신자 수가 많건 적건 줄었을 경우도 문제가 있지만, 사실 한국 천주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더 큰 골치거리는 앞에서도 나온 20%도 안 되는 주일 미사 참례율과 30% 수준인 판공성사 비율이다. 냉담자 (혹은 판공성사는 보지만 주일미사는 거르는 경우) 문제를 개인의 믿음이 약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가톨릭교회는 이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외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다만 이는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고민하고 해결할 문제이니 밖에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정부 통계와 교회 통계 괴리의 원인 분석은 담당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고, 앞에서도 썼듯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자 수 절대 수치 자체는 그 중요성에서 우선순위가 밀리고, 신자 수가 많으니 좋은 종교라고 자랑질할 일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1980년대 이후 천주교 신자가 급증한 것에 크게 반색할 일도, 최근 신자 수 정체(또는 감소) 현상에 위협을 느낄 일도 아니라고 본다.

한편 신자가 판공성사를 6회 이상 보지 않으면 교적이 본당에서 교구청으로 이관된다. 판공성사표는 발급되지 않지만, 여전히 신자 통계에는 포함된다. 또 냉담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고해성사를 통해 신앙생활을 재개할 의사를 보이면 교적은 바로 본당으로 돌아온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2021년 종교 현황 조사[8]에 따르면 천주교는 인구 전체의 6%가 신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비율에서는 19~29세 3%, 50대 6%, 60대 이상 8%로 타종교와 비슷하게 교인의 노령화가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젊은 층인 19~29세, 30대에서 불교와 함께 개신교에 크게 뒤떨어지는 수치를 기록했다. 지역별 비율을 봤을 때는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강세인 경상도에서 신자 비율이 크게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수도권과 호남에 몰려있는 모습을 보인다.

3. 역사

역사적인 관점에서 한반도에 가톨릭이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이 어렵다. 다만 임진왜란고니시 유키나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등이 조선 땅에 왔었으며, 또한 이 와중에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에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기본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일본군을 위해 잠깐 조선 땅을 밟은 것이라 크게 전파되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발자국만 찍고 간 셈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베이징에서 아담 샬 신부와 교제한 적이 있었다. 천주교만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천문학 등의 다양한 서적을 서학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였으며, 귀국하면서 중국인 신부들을 같이 데려가기로 했으나 소현세자가 70일 만에 급사하는 바람에 전파의 기회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갖고 온 서적과 물건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보다 앞서 광해군 시절인 1610년에는 대문장가 허균이 청나라에 갔다가 기도문의 일종인 <제 12장>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천주교 관련 서적으로는 최초로 여겨지고 있으며, 1614년에는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류몽인이 쓴 어우야담에 이탈리아인 신부 마테오 리치와 그의 저서 천주실의를 소개하기도 했었다. 그 뒤 이이명, 홍대용, 서호수 등이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나 홍대용은 학문의 입장에서 다소 비판적인 견지를 하고 있었으며, 서호수는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아무 소득도 없이 귀국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조선에 가톨릭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성호 이익안정복에 의해서였다. 이익은 본인이 천주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학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안정복도 이후의 홍대용처럼 다소 비판적인 견지를 가지기도 했으나 천주교 자체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이들의 집안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생겼으며, 영조 시대인 1750년대에는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국내 가톨릭 교회의 시작은 후술할 이승훈 베드로가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1784년으로 보고 있다. 지난 1984년 교황으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목적이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및 천주교 서울대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이었던 만큼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의도 광장에서 천주교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모시는 시성식을 주례했는데 그 자리에서 요한 바오로 2세"1784년에 여러분들의 조상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완전히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유일한 공동체로서 독특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위에 설명하는 것보다 5년 정도 앞선 1779년을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소재 천진암은 남인 계열 유학자 정약용, 이벽, 이승훈 등이 1779년부터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었던,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으로, 이곳에 건설되고 있는 천진암 대성당은 이들이 모임을 시작한 지 300주년이 되는 207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2016년에는 교황 요한 22세고려 충숙왕에게 1333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바티칸에서 발견되었으나,# 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충숙왕 문서 참조.

3.1. 교회의 시작(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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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방 신앙집회', 김태, 1984, 명동대성당.
조선에서의 천주교는 특이하게도 외국인 선교사의 노력으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학문으로 배우고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파되었다. 이는 가톨릭 역사상 전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다. 이는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서 천주교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모시는 시성식을 주례하며 "1784년에 여러분들의 조상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완전히 일반 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유일한 공동체로서 독특합니다"라고 언급한 점으로도 증명된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앙보다는 서학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학문으로 들어왔다. 가톨릭이 이처럼 독특하게 조선에 전파된 이유는 실학과 관련이 있다. 당시 성리학에 한계를 느낀 몇몇 조선 실학자(선비)들이 서양 학문을 배워오는 과정에서 가톨릭도 전해졌기 때문. 정확히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西學)'으로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 이벽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에게 처음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에 들여온 책이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칠극 등이 였고, 조선에선 그가 한문으로 지은 것을 언문(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즉 초기에는 서학(서양의 학문)으로서 몇몇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던 것. 때문에 이 시기에는 천주교가 아닌 천주학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천주학 연구모임을 지금은 명례방 공동체라고 부른다. 역관 김범우 토마스가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내주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 집터를 매입하여 세운 건물이 다름 아닌 현재의 명동성당이다. 하지만 모여서 서적을 읽고 천주학에 대한 연구/토론을 거치면서 교리를 습득하고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생겨났다. 정식으로 사제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교인들 사이에서 임의로 주교신부를 선출해 성사를 치르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통해서 신앙활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교회법상 허용되지 않는데[9], 초기 신자들도 이를 나중에야 알게 되어 부랴부랴 베이징 교구에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여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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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 해설서, 성경직해(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된 역사상의 인물들은 정조 1년인 1777년에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권철신 암브로시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와 권철신의 매부인 이벽 세례자 요한, 그리고 유명한 정약용 사도 요한과 정약전 안드레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3형제가 있다. 특히 권철신은 40여 차례에 걸쳐 충남 예산군의 홍유환과 연락하여 천주교 전파에 대해 논의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을 보였고 이 덕분에 남인 계열 인물에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1784년 2월경(음력 1월) 최초의 영세자, 즉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10] 인정받은 이승훈 베드로는 베이징까지 가서 프랑스 예수회 소속이던 장 조제프 드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신자도 세례를 줄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임종이 가까운 환자처럼 급박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되며, 이마저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영세자의 상태가 호전된 뒤에 반드시 충분한 보충 교리를 받고 사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세례성사 참조. 즉 당시 조선의 특수한 상황에서 행한 것. 이후 베이징 교구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조선에 몰래 들어와 전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가톨릭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1831년 9월 9일에는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되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이 성리학을 위시로 한 유교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고, 이에 따라 충돌과 박해가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익과 안정복을 시작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영조 34년인 1758년에 결국 천주교에 대한 제재령이 내려졌는데, 천주교 자체에 대한 금지라기 보다는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제재를 했기 때문에 박해라고 보기는 어려운 편이다.

가톨릭은 조선에 들어온 후 크게 4번, 즉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11], 1866년 병인박해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았다. 물론 크게 피바람이 분 것만 4번이었다는 이야기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박해와 처형들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가 혹독했는데 이때만 최소 8,000여 명~최대 20,000여 명이 순교했을 거라 추정될 정도로 조선의 박해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다만 가톨릭 신자라도 주교나 신부 급이 아닌 이상 평신도는 말만으로도 배교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권고했다. 예를 들어, 사또가 "네가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말만 한다면 살려주겠다" 라고 여러번 기회를 주는 식으로. 이는 단순한 형식주의나 온건책이 아니라 분명히 배교의 효과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침을 세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정조가 '거짓으로라도 배교하겠다고 말한 순간 10년 공부(신앙)가 햇빛을 받아 녹아내린 얼음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 전향이나 인지부조화 문서에도 나오듯이, 아무리 형식적이고 거짓으로 한다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부정하는 행동 자체 만으로도 그 신념에는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데. 이는 신앙도 마찬가지 였다. 특히 가톨릭 신자와 사제들 모두 신체적인 고문과 처형으로만 일관하던 도쿠가와 막부도 배교자들[12]의 조언을 받아들어서 무작정 고문을 가하기보다 후미에를 포함한 정신적인 압박으로 배교로 유도하고 그래도 정 안될 때 사형으로 전환했던 걸 보면, 조선 조정에 가톨릭에 대해서 정확하게 조언할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통찰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순교를 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사제들도 "원할 경우 처벌하지 않고 단순히 추방만 하겠다"고 조정에서 권고했으나, 이 역시 거절하고 순교를 택했다.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로서,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난 1785년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2년 후 순교했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명례방'의 장소를 제공한 중인(中人)이었다.[13] 정약용 등은 양반이라서 가벼운 문초 후 방면되었지만, 만만한 중인이라는 이유로 시범케이스로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후반이니, 조선 조정의 박해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01년 이전 박해의 성격은 순전히 종교 박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우선 조선왕조 시대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종교라는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시점에서 종교임을 부정하는 현대의 유교와는 달리, 과거의 유교는 '진정한 종교는 유교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유교에서 쓰이던 것과는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인데,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을 종교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불교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로서의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에 쓰이는 서양 단어 religion의 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며 말 그대로 학문이라는 개념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처럼 종교라는 개념이 없는데 종교의 자유, 국교, 종교탄압 같은 개념을 적용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남인에 대한 정치적 견제 및 (조정이 해석하기에는) 혹세무민의 사학에 대한 대응이라 봐야할 것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적어도 정조 시절에는 불교의 일부 종파라고 조정이 여겼으며, 당시에는 그냥 세상이 어지러우니 생겨난 사학 중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태워 버리는 진산 사건이 일어나고, 대규모의 박해인 신유박해가 터진다. 그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박해는 더더욱 심해진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에는 아이와 여인들도 있다. 또한 백서 사건 이전에는 박해가 가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병인박해와 비교하면 소규모로 보일 뿐이지 신유박해는 당시로서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박해였다. 상식적으로 남녀노소 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300명을 죽인 사건을 소규모 박해라 부르진 않는다. 황사영 사건이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이런 루머가 퍼진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이 백서에 적은 '프랑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는 내용이 명백한 간첩행위 및 반역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적당히 장형이나 귀양으로 끝났을 법한 사안도 얄쨜없이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서는 조선을 일컬어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땅', 심지어 "순교하러 가는 곳"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살벌함을 짐작할 만하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는 중국, 조선 등으로 파견되는 성직자를 전담하여 관리했는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처형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제2대 조선대목구장),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등이 조선 최초의 프랑스인 순교자로서 유명하다. 이중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사하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

병인박해 기간 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벤 곳이라는 잠두(蠶頭)봉은 그 뒤로 머리를 자르던 산이라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6년 한국 천주교에서 사들여 성지로 조성하게 되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건너다 보면 철교 북단 동쪽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바위산이 있고, 바위산 정상에 성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다. 아담하게 조성한 야외공원과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서 구경할 만하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프랑스가 적대국이 아니게 되어 천주교가 간첩 및 반역행위가 아니게 되었고, 프랑스 측의 요구로 가톨릭을 선교할 수 있게 됨으로써 포교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박해 때 싸그리 다 죽었고, 개항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교난을 겪으면서 진통을 겪는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양반-상놈 체계가 잘만 유지되었음을 상기하자. 국가에서 탄압 해제를 선언했다고 해도, 깡촌에서는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 주민들이 구타, 약탈, 강간,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이렇게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박해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또한 프랑스 등 유럽에서의 전교 지원 또한 미미하여 미국을 앞세운 개신교에 세력이 밀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혹독한 박해를 겪고도 자생하여 교회를 유지[14]시킨 역사는 바티칸 등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박해당한 신자들은 복자성인의 대열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여의도광장에서 당시 순교자들 중 103명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시성한 것도 이러한 평가가 배경에 깔린 것이다. 복자나 성인으로 추대되려면 교황청에 의해 한명 한명 지루할 정도로 철저한 심사를 거쳐 추려 낸다는 점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103명은 아주 굉장한 숫자다. 또한 한꺼번에 시복/시성된 숫자로서도 가톨릭 역사상 최대이며, 시성식 장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는 것 가톨릭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 가톨릭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 (즉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을 했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01년 박해의 원인이 된 황사영 백서 사건은 지금도 말이 많다. 이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 정약용 본인에게는 조카사위였다. 이 백서 사건 덕에 이루어진 가톨릭 박해로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참수로 순교하고, 세례는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정약전, 정약용까지 18년씩이나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것도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고작 2천 명도 안 되었음에도 그 난리가 났던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 병력이 침략하면 조선은 임진왜란급 전란에 시달렸을 것이다. 물론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유럽 각지와 멀리 아이티를 비롯한 곳에서 싸움을 벌이느라 조선에 이 많은 병력을 보낼 형편은 못 되었지만, 병인양요 급의 파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황사영 백서는 의금부 관리들이 보고서를 올린 뒤 백서를 문서궤에 넣어 보관하기에 앞서 한 부 베껴두어 세상에 전하게 되면서 내용이 「벽위편」이나 「동린록」과 같은 척사관계 기록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손에 들어와 1860년대,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제5대 조선대목구장. 병인박해 때 순교, 1868년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가 조선 가톨릭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작성할 때에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들이 병인박해와 같이 이 사본의 내용을 들먹이면서 병인양요의 명분이 되었으니 기어코 조선에 전란을 가져오게 했다. 약 1천여 명의 사상자 및 규장각 서고를 비롯한 무수한 문화재를 프랑스가 약탈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당시 실권자인 벽파들이 천주교 박해에 크나큰 명분으로 삼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의 당시 실권자이자 시파인 김조순은 "천주교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은 민심을 요란하게 만든다"고 보류했는데,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들이 "천주쟁이들이 크나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김조순에게 거듭 간청하다가 이 백서 사건이 드러나면서 제대로 기회를 잡았다. 결국 온건책을 쓰던 김조순도 백서 사건을 전해듣고 충격과 공포에 빠져 결국 강경책을 쓰게 한다. 결국 황사영은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나아가 지방 유생들 등 '가톨릭은 양놈 군대의 침략을 권유하는 사교'라는 전국적인 인식이 퍼져 가톨릭 혐오에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로 인해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도 천주교회에서는 황사영의 이러한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굿뉴스 홈페이지 가톨릭대사전에는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다른 수치스런 역사로는 100년 후 벌어진 1901년 신축민란이다. 제주도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주축으로 행패가 워낙 심했기에 제주도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제주도 내 가톨릭인 300여 명을 살해할 정도로 그만큼 반감도 장난 아닌 걸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재수 문서 참조. 100년 가까이 묻힌 이 사건은 1999년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잠깐이나마 알려졌다. 당시 이 영화를 "반가톨릭 영화로 봐야 하는가?"라는 등의 논란이 가톨릭 내에서 있었다고. 제작비 40억원으로 만들어 5억원 남짓 벌어들이는데 그친 흥행 실패 말고도 평도 매우 나쁜 작품으로 괜히 묻힌 게 아니니 찾아서 볼 필요는 없다. 그 외에도 개화기 시절의 외국인 신부라는 특권을 남용하여 조선 관청에 난입하여 죄수를 탈옥시키고 주민들을 폭행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신부들이 대놓고 천주교 신자를 옹호하는 등, 구한말의 천주교는 매우 안 좋은 쪽으로 기록을 계속 남겼다. 그러나 201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 등 551명을 추가로 시복시성하겠다고 나섰는데, 여기에 황사영과 신축민란 때 사망한 교인 중 24명이 포함되어 있어 비판을 받았다.[15] 이에 대한 천주교계 내부에서의 반발까지 거셌는지, 결국 황사영과 신축민란 때 죽은 교인 중에 누구에 대해서도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천주교계에서 신축민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반성하는 데에 비해서 황사영에 대해서는 상당히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동학도 교리 때문에 천주교의 이단 중 하나라고 유교 지배층들에게 탄압받은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참고로 2014년 8월 16일에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을 했고,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2차 시복시성(133명),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81명), 총 214명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황사영(본인), 황심 신축민란으로 숨진 사람(1명), 한국전쟁 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단, 김건순, 김한빈, 정약용, 정약전, 이재수, 안중근 등은 없다.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현재 기초자료 수집 단계에 불과하며 앞으로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특히 신학적 측면에서 유교와 천주교의 화해, 더 폭넓은 신앙적 시야가 필요한 연구가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수난사,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자발적인 신앙의 수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의 이런 독특한 천주교 역사에 대해 언급했다.# 심지어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6세는 이 사실을 접하고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당시 비오 6세는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서 프랑스에 끌려가기까지 하는 등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조선의 이 기쁜 소식은 얼마 없는 위안거리였다고 한다. 크리스트교 교리 자체로 비유하면, 성경에서 나오듯이 (마태복음 18장 12~14절) 성직자와 신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마치 목동이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조선 천주교는 미처 찾지도 않던 양떼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온 격이다.

3.2. 일제강점기

국가에 대하여 애국적 행동을 함은 천주 엄금하신 죄악이라는 이유로 적국의 손에 잡힌 군사가 만고 중에 죽을지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켰으면 이는 국가의 충신임은 물론 천주대전에도 훌륭한 순교자가 될 수 있다.
1941년, 경향잡지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체제순응적 종교가 그랬듯 진정한 복지부동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친일 반민족 행위를 보여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이는 정치적인 일이니 막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 신사참배 자체가 교황청에 의해 허용된 것은 1936년의 일인데, 교황청이 허용하지 않던 시기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밀고하는 등, 추악함의 절정을 보여주었다.[16]

외국인 신부들이 개별적으로 조선인을 도와준 사례가 종종 있긴 했지만[17], 어디까지나 외국인(서양인)으로서의 개인적 영향력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민족운동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국가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며 경고를 주거나 대놓고 징계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아들을 신부로 키우려 했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교회 차원에서 애써 외면했던 사실도 었었다. 1972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하게 봉헌되는 등,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자체는 예전부터 많이 이루어졌지만, 교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건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이 거의 대부분 서양인들이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아예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으며, 8.15 광복 후에도 한동안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그저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18]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 천주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제사 문제로 박해를 당한 영향으로 인한 조선말 왕정에 대한 앙금도 있겠지만 이는 너무나도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포기한 처사였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의 가톨릭을 친일적이라면서 비판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것은 신민회 105인 사건이다. 제8대 경성대목구장이자 가톨릭의 지도자이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일가족과 가깝게 지냈으며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나, 그 때문에 2개월간 명령 불족종으로 미사 집전을 금지당한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후술할 정보를 알게 되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 야고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을 눈길을 헤치고 가서 일본군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하여 이것이 105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19] 아래의 사건사고 문단 참조.

3.1 운동 또한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던 종교계가 주도한 독립운동이라 민족대표 33인이 전원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이 중 천도교와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었고 불교[20] 역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참가했지만 천주교는 단 1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가장 큰 원인은 제10대 서울대목구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등장 전에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격인 경성-서울대목구장이 외국인이어서 민족운동보다는 교회의 교세 유지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 노기남은 진작에 창씨개명을 한 주교였다. '오카모토 가네하루'. 1940년 조직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취임사에서도 종교보국 무언복종을 강조한 일제에 협력한 종교인이었다.

참고로 1942년 장로교가 애국기 헌납 기성회를 통해 전투기 1대 값을 바치고(조선장로호), 감리교가 1944년 전투기 3대 값을 바칠 때(감리교단호) 가톨릭은 미영격멸 비행기 200대 헌납운동을 전개해 248대분인 2,481만원을 일제에 헌납했다.

이는 당시 풍전등화와 같던 교회의 운명을 보존하려는 교황청의 노력과 맥락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당시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는 회칙을 반포한 교황 비오 11세나, 표면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비밀리에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을 구제하려 노력한 교황 비오 12세의 행동과도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보여준 이러한 친일행각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고, 이때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후 군사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에서 천주교가 종교계에서는 가장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철저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정교분리)이긴 했다. 다만 교회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군국주의 국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문제였다. 몇몇 교구에는 아예 본당에 일본 헌병이 들어와 사제들에게 "입대하세요. 주님의 뜻입니다." 따위 소리까지 당당하게 지껄였다고 할 정도였다.

위의 이유 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 정부가 탄압을 했던 병인박해 등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탄압을 가했던 나라를 굳이 독립시킬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도 간도지방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했던 의민단 등 평신도 차원에서의 독립운동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며 발표한 담화에서 교회 지도부의 일제강점기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했다.#

3.3. 8.15 광복 후

북쪽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옴에 따라 간도의 연길교구[21]함흥교구, 평양교구의 신자, 수도자, 사제들은 모진 고난을 받았고 심지어 만주의 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은 독일인 수도자들도 있다. 이때 함경남도 원산시에 있던 덕원자치수도원은 남쪽으로 내려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수도원을 다시 재건한다.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런 박해가 더욱 극심해져서, 인민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성직자[22]와 신자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빈번했다(각 교구에서 발간한 교구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마을 단위로 이념이 갈라져서 서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처럼, 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교우촌)은 인민군에 협조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박해를 받고, 국군이 진주해 오자 신자들이 이에 보복을 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한다.

8.15 광복6.25 전쟁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 구호단체가 한국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면서, 상대적으로 개신교의 교세보다 뒤쳐지게 된다. 물론 상대적이란 것이지, 가톨릭 신자 수도 꾸준하게 늘었다. 이승만과 미국 덕에 한국 개신교 교세가 급격하게 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가톨릭교회에서도 자체 판단하기로는 1907년 개신교 평양대부흥 이후 교세가 역전된 걸로 자체 판단하고 있다. 가톨릭 인터넷 굿 뉴스

2009년 12월 28일,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북한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하여 순교한 덕원자치수도원장 신상원 보나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를 비롯한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연길교구의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재판이 열렸다.# 이 외에도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를 비롯한 평양교구 순교자 81위에 대한 시복시성도 추진되고 있다.#

이 당시 천주교는 현대의 보수 개신교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반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에 거주하던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로 1/3 가량이 공산당에 반대하여 처형되었고, 1/3 가량이 공산당 정권에 협력하여 조그련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으며, 나머지 1/3이 남쪽으로 내려 와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국 개신교 내의 반공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가톨릭 상황을 보면, 평양교구장 주교를 포함하여 교구 소속 사제단 전원이 한 사람 예외 없이 한국전쟁을 전후로 모두 처형당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전쟁 직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 반공 심리가 퍼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또한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와 가톨릭교회가 양립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보루로서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운동에 더욱 힘쓰자. 물론 우리는 국민으로서 또는 직장의 일원으로 그 외 또 여러 부분으로 이 국민운동에 벌써 많은 부담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반공의 최후전사로 자인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표시하자.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 가톨릭시보 1949년 11월 10일자 社告
나는 이같이 부르짖고 싶다. “볼셰비키 공산주의는 내 자신의 적이요, 전 조선 가톨릭 20만 신도의 적이며 이 강산 3천만 동포의 적이며 더한층 전 세계 기독교의, 아니 이 우주 창조 후 아담으로부터 조물주이신 천주를 믿는 전 인류의 무덤과 저의 영혼의 적인 것이다. 옛날 네로 황제는 로마를 불살랐지만 공산주의는 전 세계의 침략자며 전 세계에 불을 놓아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20세기의 네로이며 지상의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전 인류를 그 감언이설로 속여 유혹하고저 하는 20세기의 뱀인 것이다. 공산주의적 볼세비키는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에 대한 극도로 철저한, 즉 다만 이론적이 아니고 실천적 선전포고를 의미한다. 저들은 어떠한 신학적 비판적 神論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전투적 反神主義를 의미하는 것이다. 암흑의 권력이며 천주를 저주하는 마귀가 천주께 항전했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천주께 의탁하며 그 보호를 믿고 이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 윤공희 <가톨릭청년>(1947.11)에 기고한 <볼세비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

3.4. 군사정권 시절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박해를 받았던 구한말과 저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친일행위를 벌이기도 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4.19 혁명 전까지 극렬 보수 반공적인 모습을 보이던 한국 천주교가 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은 군사독재 시절로 평가된다.[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24], 천주교는 과거보다 더 민중 친화적이면서 사제들의 사회운동 참여도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 정교분리를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톨릭 쪽이 정치 권력의 눈치를 덜 볼 수 있게 되었고, 군사독재 아래에서 탄압을 받는 민주주의, 인권을 거론하며 정부와 큰 대립각을 세운 점이 한국사회에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교회와 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초는 1971년 12월 24일 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전국으로 생방송되던[25] 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강론 도중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결코 유익한 일입니까?"라며 돌직구를 날린 것으로 본다. 격분한 박정희 대통령이 KBS에 전화를 걸어 방송 중단을 지시했고 성탄 미사 생중계는 중단됐다.[26] 아무리 서슬 퍼렇던 시절이라도 차마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진 추기경을 직접 건드리지는 못했는지 교황청에 김수환 추기경의 직위해제를 요구했지만 될 리가 있나. 교황청은 이런 협박을 쿨하게 무시한 다음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고 한다.[27]

당시 군사정권과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대표적으로 유신헌법 체제인 1974년 당시 원주교구지학순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었던 사건,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을 선교회와 외국 언론을 통해 세계에 폭로한 것을 빌미로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가 강제퇴거당한 사건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안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의구현사제단도 이때부터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박정희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공개적인 갈등을 빚었지만 가톨릭 자체에 대한 태도는 의외로 호의적이었으며 최소한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차녀 근혜를 가톨릭 미션스쿨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보냈으며 종교를 가졌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훗날 소개된 적까지 있다.[28][29]

전두환 정권에서는 박정희 정권보다는 직접적 대립은 적었던 것 같지만 오히려 군사정권의 막장성은 전보다 더 심해진 모습을 보이게 되고 교회는 더 큰 대립각을 세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방한 당시 첫 공식 행사로 광주광역시를 방문했으며, 미사 집전을 위해 무등경기장으로 가는 경로로 금남로와 전남도청[30]을 거치도록 강력히 요구해 관철시켰던 점과 아래의 저 명언이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을 정부 관계자들이 추기경에게 협박하던 상황에서 나온 것을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시위 주동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피신하고 있던 명동성당으로의 공권력 투입이 임박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남겼던 말은 역사적 명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31]
"제가 하는 말을 정부 당국에 전해주십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4. 6월 민주항쟁(상)',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사회 전체가 군사정권 아래 숨죽이고 있던 시절, 그와 여러 사제들의 용기 있는 언행이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서 말한 자발적인 신앙 전래, 박해 수난사와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 중 하나다.

이렇게만 보면 가톨릭이 진보적인 종교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가톨릭 문서에도 있다시피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종교다. 타 종교에 관용적인 자세와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모습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들과 각 나라 주교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3.4.1. 군사정권 시대의 야합 주장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부터 전두환, 신군부 시절까지 당시 야당의 거두였던 김대중이 가톨릭 신자였으며, 장면부터 시작해서 가톨릭교회는 대체적으로 정치인에게 매우 관대했다.[32] 게다가 김대중만 그런게 아니라 이효상같이 정부 인사들도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 김기춘도 천주교 신자였다.

이는 위에 언급된 노기남 대주교를 필두로 하는 주교들은 될 수 있으면 일제강점기에 그랬던 것처럼 정부랑 충돌을 피하려고 했고, 오히려 같은 이권을 얻으려고 친정권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이효상은 대구 가톨릭계의 거물이었고,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의 뒤를 봐줬으며, 실제로 그는 교황청 대십자기사훈장을 받고, 그의 차남인 이문희는 신부로 서품된 지 7년 만에 주교로 서품됐으며, 나중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으로 착좌한다. 일부에서는 이는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염수정 추기경 같은 경우 보좌주교가 되는데 근 30년이 걸렸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유래없이 초고속으로 주교서품을 받았다는 강우일 주교는 사제서품 이후 주교가 되는 데 11년이 걸렸다. 게다가 이문희 주교가 주교품을 받을 시절인 1972년에는 한국에서 주교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 더 엄청난 일이었다. 이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혹은 교황청의 지지 혹은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괜히 박정희가 육영수와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딸인 박근혜가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계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다닌 게 아니다. "가톨릭 재단 소속이였던 경향신문은?" 이럴 수도 있으나 경향신문은 가톨릭 신자인 장면 사도 요한을 밀어주다가 이승만에게 찍혀서 정간 먹고 이후에는 1962년 이준구 사장이 서울대교구로부터 신문사를 사실상 인수함으로써 군사정권 때는 천주교랑 별 상관 없는 언론이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제5공화국 출범 시기 국보위에 참여한 이력도 존재한다.

다만 이거와 별개로 뒤로는 전두환 시절에도 밀월관계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언론 통폐합을 할 때 1도 1신문사 원칙을 내세워 당시 교구 소속으로 가톨릭계 신문사인 매일신문에 당시 영남 구독율 1위인 영남일보를 합병시켜줘서 현재 매일신문이 경북지역의 제1신문사가 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 실제로 매일신문은 해당 항목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논조가 굉장히 보수적이다. 지금은 물론 매일신문은 사기업에 매각된 상태다.

3.4.2. 군사정권 시대의 야합 반론

이문희 주교가 이효상의 아들이기에 야합이라는 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평가이다. 한국 가톨릭에는 '이효상의 아들' 이문희 주교도 있지만, 동시에 '장면의 아들' 장익 주교도 있으며, 이효상과 장면은 정치적으로 정반대 진영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즉 이문희 주교의 케이스는 장익 주교의 경우처럼 거물급 평신도의 아들이 주교가 되었다고 이해해야지,[33] 박정희 정권의 산물이라 볼 순 없다.

이문희 주교가 사제품을 받은 시점과 주교품을 받은 시점의 차이인 7년은 실제로도 다른 주교와 비교해볼 때 제법 짧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교가 된 나이로 따져본다면 당시 한국의 다른 주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아래의 목록은 만 40세 전에 주교품을 받은 한국인 주교들 명단이다. 우측의 나이는 주교수품 당시의 나이이며, 그 옆에 기재된 기간은 사제수품과 주교수품 시점간의 기간이다.한국 천주교에서 봉직했던 외국인 주교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40세 미만의 나이에 주교품을 받은 주교 수는 더 많아진다.이렇듯, 조선대목구 설정 때부터 이문희 신부가 주교로 서품될 당시까지의 기준으로는 만 35~40세에 주교품을 받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제수품 후 불과 7년만에 주교품을 받은 것은, 달리 생각하면 사제품을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늦게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위에 언급된 주교들의 주교 수품 나이에서 평사제로 지냈던 기간을 빼보면 사제품을 받은 나이가 지금 기준으로 보기엔 아득히 빠른 나이다.[34] 실제로 이문희 대주교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후 신학교에 들어간 요즘 말로 '늦깎이'였다.

더군다나 위 주장에서는 1986년에 주교품을 받은 강우일 베드로 주교의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유례없이 초고속으로 주교서품을 받았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미 위에 언급된 홍용호 주교, 정진석 주교, 나길모 주교의 사례가 있으므로, '유례없이 초고속으로'라는 말은 이미 사실 관계가 잘못되었다. 또, 현대에는 사제들의 수가 늘어나고 평균 수명도 늘었기에 1970년대까지의 상황과 다르다. 그러므로 염수정 추기경을 가리켜 '보좌주교가 되는데 근 30년이 걸렸고'라고 하며 이것을 이문희 대주교의 사례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1972년에는 한국에서 주교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 더 엄청난 일이었다. 이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혹은 교황청의 지지 혹은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라는 말도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먼저, 당시에는 주교의 수를 따지기 전에 사제의 수부터 지금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다. 그런데 이문희 신부는 그 와중에 경북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까지 마친 인물로, 지금 기준으로도 엘리트에 해당하며 당대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이문희 주교를 가리켜 엄청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런 인물에게 주교품을 주는 것이 마치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뉘앙스로 '더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더군다나 한국천주교회나 교황청이 '묵인'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의 주교들과 교황 대사와 교황청(당시 교황은 바오로 6세)은 그정도로 호구가 아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당시가 6.25 전쟁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원래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려면 신랑-신부 중 최소한 한 명은 천주교 신자여야 하지만(박정희는 무종교였고 육영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전쟁 중이라 마땅한 장소가 없으니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 매일신문은 현재는 대구대교구에서 매각하여 완전히 가톨릭과 연관이 끊어진 세속의 신문사가 되었으나, 대구대교구가 지분을 소유했을 당시에도 교구가 오너로 있는 세속언론에 불과했다. 지역 세속언론에 그 지역 민심이 반영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실제 논조도 교구의 소유였음에도 정치적 보수주의보다는 TK의 지역 이권을 대변하는 것에 훨씬 가까웠다.

분명히 말하자면, 한국 가톨릭은 박정희 정권을 한국의 정부로 인정했다.[35] 또한 이효상을 비롯하여 친박정희 성향의 인물들이 존재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실상 박정희가 주교들에게 받아먹은 것은 대한민국 정부로 인정받은 것 정도가 끝이었으며, 주교들과 박정희의 관계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으로 가톨릭계 농민운동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건넜고, 장면 총리는 5.16 이후에도 여전히 가톨릭의 거물 평신도로 활동했으며, 장면-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계 정당의 가톨릭 평신도들은 주교들과의 긴밀한 인맥을 가지고 박정희를 견제했다.

3.5. 6.10 민주 항쟁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70~80년대에 시국관련 발언을 자주 해서인지 주변에서 정치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고 했다. 정작 본인은 그때마다 "성직자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한탄했다고 한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었던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 "아~ 이젠 목소리 높여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참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문민정부가 가져다 준 여유).

더군다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시위대 탄압에 항의하여 함께 단식투쟁하던 신부들에게도 "난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목자가 사목현장을 오랫동안 비워두고 무슨 일에 몰두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사목자의 본분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것이다. 그 본분에 소홀하면서까지 정신을 빼앗길 만한 일은 사목자에게 없다. 과거 전주교구 신부들이 유신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을 때도 이같은 논리로 농성을 중단시켰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참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과 노동운동).[36]

특히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가 같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교인데도 너무 비교되는 모습 때문에 가톨릭보다 보수 개신교가 까이는 경우도 늘었고, 보수 개신교인들도 "진정한 믿음을 찾으련다" 며 자기 교단에 등을 돌리고 가톨릭이나 진보 개신교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초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이 썩었다는 이유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을 감안하면 웃기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과정에서 보여준 소박한 모습,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등의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많이들 받았고, 이때 극단적 반기독교 세력과 반가톨릭 성향의 보수 개신교인이 인터넷에 교황을 함부로 까는 글을 올렸다가 지탄을 받기도 했다.

3.6. 2000년대

신규 유입 신자 수가 우리나라 종교 중 가장 많다. 2위는 불교. 개신교의 몇몇 관습에 실망한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옮겨가는 요인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개신교가 14만 명 감소한 데 비해 가톨릭이 200만 명 이상 증가했다. 이는 10년 동안 70% 이상 증가한 수치인데, 새로운 종교인을 거의 가톨릭이 흡수한 셈이다. 과거의 경향과는 달리 무종교인의 입교 빈도가 점점 줄어드리라 예상되므로 가톨릭의 성장세는 다소 완만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를 반박하기라도 한 듯 2009년 12월에는 인구 대비 신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10%를 돌파했다. 사실 반기독교 여론에서 가톨릭은 빠지는 경우가 많아 반감도 없었고[37] 1984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 방한과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후 반짝 가톨릭 열풍이 불기도 했다.

2012년 5월 10일,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사임 신청을 교황청이 수락했다. 후임 서울대교구장으로 염수정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가 임명되어 6월 25일에 착좌했다. 2014년 2월 22일에는 서울대교구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 추기경이 탄생한다.

2014년 8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4박 5일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1984년과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후 역대 세 번째 교황 방한 사례다.

차별금지법 입법화 자체에 적극 반대하는 한국 주류 보수 개신교와 다르게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차별금지법 입법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나 수원교구에서 낸 입장문을 보면 "사회적 소수자의 보호라는 기본 입법취지에는 공감하나, 차별금지법이 낙태나 동성결혼의 합법화 근거로 악용되지 않도록 예의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6.1.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추진 반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가 2015년 3월 19일 성명을 통해 정부의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추진 정책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정평위는 성명에서 역사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국민 과반수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며 추진하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이 "가톨릭 사회교리가 근간으로 제시하는 보조성의 원리 및 민주주의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평위는 또한 국정화로 인해 한국사 교과서 내용에 있어서 특정 정파의 정치적 목적과의 관련성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자율성은 학문 발전의 전제이며, 학문의 발전은 사회 발전의 토대이다. 역사의 서술 역시 학문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들의 양심에 의해 독립적으로 기술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천주교 주교회의 정평위 “국정교과서 반대”

3.7. 2020년대

3.7.1. 감염병에 의한 전국적 대면 전례 중단

2020년 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대규모 전염 사례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는 물론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환자가 나오면서 1784년 한반도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1886년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후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미사와 각종 회합 등 가톨릭의 일상 대면 활동이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과거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이나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때에는 성당의 성수대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방역 대책을 내놓았지만 미사 자체를 중단시킨 것은 초유의 일이다.

집중 발병 지역인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경북 중남부)와 천주교 안동교구(경북 북부)는 물론 전국 최대 규모의 교구인 천주교 서울대교구도 "2020년 2월 26일부터 3월 10일까지 신자들과 함께 바치는 미사를 중단하겠다."라고 선언했고, 미사 중단 조치를 하지 않았던 마산교구, 원주교구, 제주교구까지도 2월 26일 "국가적 재난 극복에 동참하겠다."라면서 미사 중단 조치를 내렸으며, 결국 전국 모든 성당에서 2020년 2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추가 연기로 미사가 거행되지 않게 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이같은 조치는 다른 종교와 비교해 통일적이고 빠른 대처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천주교는 교계 제도가 굳건히 작동하고 주교들이 모여 현안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라는 집합체가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일사불란한 통제가 가능하다. 쉽게 말해 전국의 주교들이 주교회의에 모여 미사 중단을 결의하고 교구장 서한으로 각 본당에 "신자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를 거행하지 말라."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얄짤없이 이에 따라야 한다. 사제들은 교계 제도에 따라 교구장 주교의 지시에 순명해야 한다는 서원을 했기 때문이다.

2020년 2월 26일부터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순 시기가 시작되지만, 예년 사순 시기에 늘 했던 미사나 십자가의 길과 같은 일상적 예식마저도 당분간 성당에서 할 수 없었다. 특히 가톨릭 전례주년 중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내는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도 일반 신자들의 접근을 통제한 가운데 주교좌성당이나 교구청에서 사제단 일부만 모여 미사를 거행했고, 각 지역의 본당들은 사제 혼자 미사를 집전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파스카 성삼일 전례는 가톨릭평화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가톨릭평화방송에서는 매년 성삼일 전례가 생중계됐지만, 2020년은 정부 차원에서도 온라인이나 TV를 통한 종교행사 참여를 권장했고, 전국 대부분의 교구가 평화방송 전례 중계 시청을 통해 대신 기도할 것을 권장했기 때문에, 전례 생중계의 의미는 다른 해와 다소 달랐다. 대부분의 교구가 4월 6일 성주간 월요일부터 미사 재개를 검토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기한을 4월 19일까지 연장하면서 결국 공동체 미사 거행 무기한 연기라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우리나라는 물론 교황이 있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등 세계 대부분의 가톨릭 성당에서도 똑같이 겪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톨릭에서도 코로나19 환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확진자 수를 보여주면서 코로나19 대처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좋은 이미지로 각인됐다.

3.7.2. 청년 신자 수 감소

한국 교구들의 많은 공동체에서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쳐 신자 수가 계속 줄었다고 말한다. 교계 언론사나 일반 언론사들도 이를 자주 보도한다.이러한 현상은 사제성소나 수도성소 감소로도 이어진다.어느 누구도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러므로 해결책은 이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몇 가지 감안해야 할 점만 열거하고자 한다.

첫째, 애당초 대한민국의 연령별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2」에 의하면 20-24세와 25-29세인 신자 수는 각각 228,004명과 385,706명으로 나타났으며, 60-64세와 65-69세는 각각 579,473명과 520,053명으로 나타났다. 20-29세 신자 수가 60-69세 신자 수의 절반 수준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주민등록인구 대비 신자 연령별 비율은 20-24세와 25-29세에서 각각 7.8%와 11.1%이며, 60-64세와 65-69세에서 각각 13.7%와 16.3%이다. 60대의 천주교 신자들 중 30세 이후에 세례받은 신자도 있음을 고려하면 이 비율 차이가 유의미한 정도로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 청년층이 신앙 생활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인구 감소에 따라 청년 천주교 신자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숫자의 감소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결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대신 청년 사목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 2020년대의 신자 수가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예전 신자 수가 너무 늘었던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1980년대는 가톨릭 청년 단체가 굉장히 활성화되었던 정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 여파는 90년대 말까지 이어졌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는 교구나 수도회의 성직자/수도자가 제법 배출된 요인 중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2020년대의 청년 신자 수가 '그때에 비해 줄었다.' 혹은 '그때의 청년 신자 수가 정상이고 그걸 기준으로 볼 때 지금은 줄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까? '그때의 청년 신자 수가 원래 생겼어야 하는 신자 수보다 훨씬 늘어났다고 볼 수는 없을까?'라고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가 지금보다는 덜 발전했던 시기에 종교는 그 부족함을 채워줬으며, 한국 천주교도 그중 하나였다. 자연히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1950년대 후반에 한국 천주교가 구호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다보니 '밀가루 신자'[38]가 생겨난 현상과 비슷하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 입교하여 신심 깊은 신자가 된 이들도 많았지만, 급격히 증가한 그 신자 수에 '거품'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신자 수가 급격히 늘었던 그때를 기준으로 삼아서 '지금은 줄었다.'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처럼 천천히 발전하는 것이 본래의 수순이고 그때가 특별했던 것이다.'라고도 바라봐야 한다.

셋째, 청년 신자가 왜 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다. 청년 신자가 줄어서 걱정이고,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지는 많이 고민하지만 거기에 '왜'가 빠져 있다. 이 고찰에는 '청년이란 무엇이며, 그 범위는 어떻게 되는가?'와 '청년 자신들을 위하기보다는 단지 교회의 이득을 위해 (봉사할 사람이 없으니, 혹은 그럴 듯한 통계 자료를 만들기 위해) 청년을 부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포함된다. 이 문제는 『요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이었던 "사람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났느뇨?"-"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를 청년 사목에 맞게 풀이하면, "청년들이 (1)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2) 자신의 영혼을 구한다."라고 쓸 수 있다. 지금의 청년 사목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은 이러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

4.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도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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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전례

5.1. 한국 천주교 전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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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한국 천주교의 대략적인 미사 거행 풍경

5.3. 매일미사

월간 발간되는 〈매일미사〉(1,500원(小), 2,000원(大))[42] 또는 구글 플레이스토어애플의 앱 스토어의 앱에는 그날 미사의 고유 기도와 독서/복음, 그리고 미사 통상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에서 따오거나 '미사 독서 목록(Ordo lectionum missae, 1981년)'에 의한 것이다. 덕분에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에 참례하러 갈 때 성경을 들고 가는 일이 거의 없다. 해외에서는 신자용 미사 전례서를 따로 발매하기 때문에 매월 1,000원짜리 책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사실 해외의 이러한 방식을 더 적절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고상하게 제본된 단행본 미사 전례서에 비해 '매일미사' 갱지제본은 고상한 제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가톨릭만 봐도 신자용 미사 경본을 매월도 아닌 1년에 한 번씩만 갱지와 페이퍼백 제본으로 발행하는 것을 보면 ‘고상한 제본’이란 말의 의미가 폭넓게 해석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성경에 ‘거룩할 성(聖)’이란 한자를 붙일 수 있는 것은 고상하게 제본되었다거나 값비싼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내용에 구원의 길이 있고 생명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아무렇게나 계획해서 허접하게 만들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종이에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싼 종이에 적힌 것이나 갱지에 적힌 것이나 똑같은 성경을 담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자. 다만 교황청에서 "성경은 고상하게 제본하라"고 했으니 추기경을 포함한 사제들은 그걸 따를 뿐이다. 따라서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요에 의해 변형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일부 개인들의 일탈적인 행태가 아니라 주교회의 결정 사항인 만큼 이를 쟁점으로 부각시켜 논쟁을 할 만큼 중요한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43]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매일미사가 사제와 수도자를 막론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책이지만, 2010년대부터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용 앱도 무료로 나와서 미사 때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예배 때마다 각자 성경을 주섬주섬 꺼내서 목사가 부르는 구절을 찾는 개신교 신자들은 이를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 이걸 비난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44] 물론 앞서 언급했듯 매일미사를 쓰는 것에 대해 한국 천주교 내부에서도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는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고민하고 토론할 문제이지,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비난 받을 문제는 아니다.

이런 상황인지라 천주교 신자들이 주일미사 갈 때 성경을 지참하지 않고, 일상 생활 중에 성경 무슨 서 몇 장 몇 절 하는 식의 대화를 하지 않다 보니, 신자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 있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는 신문 방송에 광고만 하지 않았을 뿐, 교황청의 2013년 신앙의 해 선포 휠씬 이전부터 성경 매일 읽기와 필사를 권장해 왔다. 천주교 미사의 말씀 전례가 3년 단위로 돌아가는데 3년간 매일미사만 열심히 읽어도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대부분 읽게 되니[45], 천주교 신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근거조차 없는 비난에 불과하다.

이걸 두고 가톨릭이 옛날에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 읽는 것을 금했다며 헛소문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차피 1~200년 전만 해도 일반 평신도들은 대다수가 문맹이어서 성경을 못 읽는 게 문제였지, 가톨릭에서 성경을 못 읽게 금지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의무교육을 받고 있으며, 더 배우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대학까지 쉽게 진학하고[46], 제지술ㆍ인쇄술ㆍ출판ㆍ유통 등이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함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적절한 가격의 책들을 파는 서점이 즐비한 오늘날의 세상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꿈 같은 이야기였다.[47]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해 까막눈인 대다수의 일반 신자들이, 어떻게 성경을 사서 읽고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 읽기, 공부, 필사 등이 널리 권장되는 것은, 다 발전된 사회상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진짜로 집에 성경 한 권 없이 매일미사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가 한국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을 겉으로만 보면 집에 성경 하나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들이 미사갈 때 매일미사를 들고 가는 것은 성경 구절을 일일이 찾을 필요가 없어서 간편하고, 성경보다 작고 가볍기 때문이지 성경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세례성사를 받을 때 주변에서 성경과 묵주를 축하의 의미로 주기 때문에, 세례 받은 신자가 성경을 소장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또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나오는 성경 구절들은 그날 생각나는 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전례력에 의해 미사 독서에 미리 정해져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미사 중에 그 날의 독서와 복음 이외 성경 구절에 대한 얘기가 나올 여지가 없어서 굳이 두꺼운 신구약 합본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게 제일 크다. 물론 피정이나 사순 시기/대림 시기 특강에 오는 신자들 가운데 성경을 지참하는 숫자가 적어 피정이나 특강 때는 "성경을 지참해야 한다"고 수시로 얘기하지만, 이 또한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독려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지, 외부로부터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거의 모든 예비신자가 들어야 하는 예비신자 교리 중에서는, "수저 1벌로 집안 식구 모두가 식사하지 않듯, 칫솔 하나로 집안 식구 모두가 양치하지 않고 각 개인이 수저 1벌, 칫솔 하나를 쓰듯, 각 가정에 1권이 아니라 각 개인이 성경을 가져야 한다."나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자주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와 같은 비유를 들며 성경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이로 인해 부모님이나 대부·모가 세례성사 받을 때 선물로 주는 경우가 보통이다. 아니면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받은 현금이나 성물방 쿠폰으로 성물을 사면서 같이 성경을 산다.[48]

이렇게 배경이 다른 상황을 놓고 자기들 기준에 맞지 않으니 틀린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무위키가 백과사전도 아니고, 편향적인 서술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기가 본 것,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험비판론적 사고나 일부 현상을 전체의 경향이라고 오판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6. 한국 가톨릭 교회의 특성 및 고유성

6.1. 신학적 특성

6.1.1.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영성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1953년 10월 30일 창설된 한국 최초의 자생(방인) 남자 수도회이다. 현재는 남자성직수도회 외에도 제 3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 등을 두고 있다.
이 수도회는 그들만의 특유한 영성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성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고유한 요소를 띠고있는 것은 확실하다.

수도회의 영성은 점성(點性), 침묵(沈默), 대월(對越)로 면형 무아(麵形 無我)를 통해서 일상의 삶을 봉헌하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데 있다고 설명된다.
면형무아에서 면형이란 빵으로 체화하하신 성체를 뜻하며, 무아란 그 성체와 일치가 되어 자기가 사라지는 경지를 말한다. 이는 '점성정신'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무(無)를 닮은 존재로서 점(點)을 내세운 것이다.
이외에도 침묵과 대월을 설명는 과정에서, 자기부정, 침묵십계, 완덕오계, 대월상제 등, 상당히 여러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단순한 수도회의 영성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심오하고 체계적인 철학을 갖추고 있다.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사이트를 직접 첨부한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영성

참고로 이 수도회는 유튜브 채널도 가지고 있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BJBS 복자방송 BMC

6.1.2.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

가톨릭 개종자의 개신교 세례 인정 여부에 대해서 영미권 가톨릭보다도 사실상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서구권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부터 웬만한 경우 개신교 출신 개종자[49]의 개신교 세례를 인정한다. 반면에 한국 천주교는 2012년까지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2년에 주교회의에서 세례증명서, 세례사진 등의 입증 증거가 있으면 개신교 세례도 인정하기로 결정했지만참고, 이 결의는 일선 사목 현장에서는 사실상 무시된다. 주교회의 직원이나 교구청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출신 회심자(가톨릭 개종자)들은 정식 영세나 정식 영세에 준하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다 참고기사. 만일 입교자가 재세례 문제를 들어 꺼림직해한다면[50] 입교자의 요청대로 보충세례만 주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다른 예비자와 같이 정식으로 세례성사를 받을 것을 강력히 권유한다.

반대로 한국 개신교의 보수교단(예장합동)에서도 가톨릭 영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주교를 형제교회가 아닌 아예 다른 종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51] 참고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입교하는 것은 개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편교회로의 일치"라고 칭한다. 이는 한국 천주교가 적어도 '원리원칙상'으로는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를 다른 종교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한국 천주교가 일선상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띠게 데에는, 한국의 개신교의 주류가 반가톨릭 보수주의파이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결과라는 얘기도 있다.
6.1.2.1. 개신교 세례 인정 문제가 왜 쟁점이 될까?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단 집단이 베푼 세례를 인정해온 사례가 있고, 재세례론, 재세례파를 단호히 정죄해온 역사가 있는 것 만큼, 재세례(재영세) 문제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 것이 원론이다. 물로써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신학적으로 그 유효성이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전자가 얼마나 반가톨릭 성향을 갖고 있는지와 세례예식에서 도유를 사용했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서구권 가톨릭 신자들에게 질문하면 "재세례(정식 영세)는 결코 없다"는 강경한 답변이 되돌아오는 것이고, "왜 성삼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를 어딜 감히 지역 교회가 함부로 판단하냐"며 타박을 받기도 한다.

가톨릭 외에서도, 성공회 신자들도 한국 천주교의 이러한 행태에 심히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세례의 유효성이 입증되면 웬만하면 교리교육 수료 후 첫 고해성사와 일치예식을 치르고, 상당히 의심스러운 경우에만 조건부 세례[52](보충 세례)를 베푸는 식이어야지, 무작정 정식 영세를 베푸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보편 교회법 제869조 2항에서는 중대한 의심이 있을 경우에만 조건부 세례를 베풀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웬만하면 개신교 세례를 인정하라는 뉘앙스인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 신학과 보편 교회법 규정만 보면 한국 천주교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법에는 보편 교회법 말고도 개별(지역) 교회법이라는 것도 있다.[53] 전 세계 각지에 다양한 사목 환경이 존재하여 보편 교회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기에 지역교회가 예외규정을 마련하는 유연성을 두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는 한국 개신교의 세례집전의 형식이 워낙 중구난방[54]이라는 점을 심히 문제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지역교회법인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55]제59조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세례가 중대히 의심스럽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에서는 개신교 세례가 잘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교회법은 사도좌의 인가를 받은 것이라 한국 개신교의 세례가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교황청이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개신교 세례도 조건이 충족되면 인정해주기로 한 2012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결정도 개신교 세례의 인정의 여지를 만든 것일 뿐이지 지역교회법만큼의 구속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최근 예장합동 총회에서 가톨릭을 이단 차원을 넘어선 이교(異敎), 그러니까 비(非)그리스도교로 지정하자는 논의가 강하게 나오는 상황인 만큼 한국 내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반목이 심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천주교는 개신교에 대한 교도권 차원의 공격을 자제해오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반가톨릭 성향의 보수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가톨릭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신칭의 신학관의 극단화로 기본적인 세례 형식마저도 파괴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 천주교가 특별히 문제시해온 것도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활발한 서구권과 다르게 한국은 제2의 공동번역성서 편찬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일 정도로 교회 일치 운동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씁쓸한 대목으로 볼 수 있다.
6.1.2.2. 개신교 내의 일치가 선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개신교는 고사하고 개신교의 일부 교파일 뿐인 장로회 안에서도 기장이니 예장이니 갈라진 것이 현실이고 개신교 내에서 이단 사이비 논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개신교 세례를 왜 인정하지 않는지 문제 삼는 게 과연 타당한가도 생각해 볼 일이다.

6.1.3. 기타 신학적 특성

타 종교와의 공존과 평화로운 관계를 중시한다. 이는 동성애 문제에서와 같이, 타 종교인 역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엄한 인간이고 피조물이므로, 그들을 사랑과 친절로서 대하고 그들의 신앙을 함부로 모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주시는 것이므로, 함부로 타 종교인의 천국행 지옥행 여부를 판단하며 저주하지 않는다. 남에 대해 함부로 판단 또는 정죄하는 것은 성경에서도 금지하는 것이며,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의 대상이 되는 죄악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가 타 종교의 신이나 교리까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예수 그리스도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교리를 절대 포기한 적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6.2. 사회 교리 관련

6.3. 문화적 특성

6.3.1. 위령 기도(연도)

위령 기도는 가톨릭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바치는 기도문이다.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기도 내용은 다른 나라 가톨릭 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만 존재하는 관습은 그 위령 기도를 민요풍[56]의 가락에 얹어서 노래한다는 것이다.

특유의 음율은 19세기 조선의 천주교 박해시대 때 박해를 피하기 위해 위장으로 사용된 것이 고착화 된 것이다.

아직까지 꽤나 남아있는 전통이지만, 자기 주변의 천주교인이 상을 당해 연도가 행해지는 그 장소, 그 시간 때에 있어보지 않은 이상 사실상 경험할 일이 없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조차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걸 잘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한국 천주교식 위령 기도(연도)의 예시https://www.youtube.com/watch?v=IrpUqcISj28

더 자세한 내용은 연도 문서 참고.

6.3.2. 제사 문화

가톨릭의 '문화' 항목, 그리고 제사/종교별 입장의 '천주교' 항목 참조.

위에서 언급했듯 비오 12세 이후로 신주 사용 불가 등의 일부 조건이 붙는다는 전제하에 제사가 허용된 상태이다.

6.3.3. 교적제도

교적 자체는 다른 나라 가톨릭이나 성공회 등 기타 주교제 교단에도 있는 개념이지만, 유독 한국 가톨릭은 교적 관리가 철두철미하기로 알려져 있다. 이사를 갈 경우 호적처럼 '교적'이라는 것이 있어서 교적을 옮기도록 되어 있다. (물론 권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거리가 애매한 등의 경우 그냥 원래 다니던 성당을 다니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주소에 따라 다녀야 할 성당이 자동적으로 정해진다. 세속 지자체의 행정동과 비슷하게, 본당별로 관할 사목구역이 정해져 있다.[57] 때문에 원래 소속이 아닌 성당에서 하는 공적 행위는 원칙적으로 불가다. 예를 들어 판공성사를 다른 성당서 보더라도 인정은 하나, 성사표(성사 신고서)는 원 소속 성당(본당)에 내야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일반 신자들은 혼인 미사장례 미사 같은 큰 일이 아니면 대성당 근처에 살지 않는 한 대성당에 갈 일이 없다.

물론 판공성사 신고 등을 제외하면 사정이 생기거나 여행이나 출장 등으로 일시적으로 타지역에 갔을 때 그 지역 성당에서 주일 미사나 신앙 생활을 하는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곳에 있는 성당이든 같은 가톨릭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철만 되면 주보나 『매일미사』에 주요 휴가지 근처에 있는 성당 목록이 실릴 정도다.

6.4. 기타

6.5. 각종 일반화에 대한 반론

한국의 천주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노력 차원에서 신학적 성향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지만, 그에 내포된 위험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570만여 명, 정부 통계 대로라면 400만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의 성향을 하나의 범주(category) 안에 규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과연 타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 개개인을 혈액형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피를 수혈 받았을 경우 생명에까지 지장을 받을 수 있기에 범주를 나누어 어느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몇 백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공유하는 속성은 단 하나, 종교가 같다는 점 외에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 각 개인의 경제 상황이 다르고, 교육 수준이 다르며, 정치적으로도 성향이 다를 수 있고 전제국가가 아닌 이상 다른 것이 정상인 것이다. 또 한 개인의 신학적 성향을 규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각 사안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서는 진보인 사람이 안보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일 수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각 개인의 성향을 산술평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취합하여 ‘한국 천주교는 이런 성향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지, 또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 한국 천주교회를 이해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만약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유아방이 '격리만'을 위한 목적이었다면, 제단 방향으로는 유리로 하고 나머지는 벽을 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유아방은 의자 없이 좌식 구조로 되어 있어, 신발 벗고 들어가 앉는 방식이다. 이는 갓난쟁이들과 함께 온 (조)부모들이 미사 시간 내내 안거나 업고 있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고, 아기를 의자에 내려 놓았다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배려의 목적도 있기 때문인 것이다.

또 대개 만 3~4살이 되어 어린이집에도 다니고 의사소통이 될 정도로 성장하면, 유아방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는 바로 제단에서 제일 가까운 첫 줄을 차지하고는, 유아방에서 보낸 기간보다 휠씬 오랜 시간 동안 신부님의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사정이 이러한데,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는커녕 자신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나이에 유아방에 내팽겨쳐졌다는 상처가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청소년기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된다는 희한한 상상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대략 난감하기 그지 없다.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지시에 따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라면 모를까, 아무 때나 울고 빽빽 소리 지르며, 기저귀에 대소변을 누고, 젖을 먹는 아기를 데리고 어떻게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겠는가?? 부모로서도 불편하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민폐이다. 유아방을 부정적으로 취급하며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미사 중에 아기가 악을 쓰며 울어도 참아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서구권 성당에는 유아방이 많지 않고 한국에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유아방이 '오직 한국에만 있는' 문화는 아니다. 해외에도 1950년대 이후로 지은 성당에는 Cry room이라고 하는, 어린 아기와 부모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경우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해외 가톨릭에서도 '아이를 통제하기 힘든 부모들에게 좋은 해결책이며 배려다'라는 주장과 '교회가 아이를 낳으라고는 하면서 아이 울음 소리는 듣기 싫어서 격리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상반된 주장이 공존한다.(관련 기사) 해외 성당들은 지어진 지 워낙 오래되어 이런 공간 자체가 잘 없어서 이런 문제가 덜 드러날 뿐이다.

한국 천주교회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들을 은폐하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한국 천주교회에도 문제가 많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감추기보다 드러낼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더 빨리, 확실하게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자명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전례적 성향을 파악하는데 있어 장궤 문제와 입영성체 관행 등의 나열이 나름의 의미 갖는 부분도 있겠지만, 사실 그리 간단히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자칫 자의적 기준에 의한 재단이 되어 가톨릭교회를 새로 알고자 하는 제3자에게 왜곡되고 그릇된 정보를 줄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7. 사회적 인식

한국에서는 같은 그리스도교 계열인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천주교)이 타종교인들(일반 비종교인 포함)에게 좋은 시선으로 비쳐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외부 입장에서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통계조사 결과도 약간의 네이버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한국 천주교인들의 특성이 개신교처럼 '교회를 여기저기 널리 보급하자'라기보다는 '신앙인끼리 조용히 종교생활 하겠다' 내지는, '신앙인으로써 참된 모습을 보이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이 가톨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얻게 되면 선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경향이 더 강한 몫도 작용한다.

일부 어린이들이나 청소년, 혹은 성인들도 가끔씩 가톨릭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례명, 성호 긋기, 미사보, 사제복 등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들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일례로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강동원이,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김남길수단을 입고 나오는 사기적인 비주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해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늘었다.[66]

대부분의 가톨릭의 성향상 상명하달식 중앙집권제를 채택하여 성당이나 신부가 독단적으로 사건을 벌이는 경우가 비교적 적은 편이고,[67] 신부 입장에서도 교구에서 안정적인 월급을 지급받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라 횡령 따위의 금전적 비리를 벌일 여지가 적다.[68] 간혹 여론에 비추는 교황의 모습도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장면이 찍히는 등, 시스템이나 신부와 신자가 노출되는 상황이 개신교에 비해 여러 문제를 일으킬 유인에서 자유로운 이점이 있다.

특히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 당시 개신교의 여러 대형교회에서 집합 예배를 강행하다가 집단 감염 전파의 원인이 되고, 2월 말에 개신교의 사이비종파인 신천지와 6개월 후 8월에 사랑제일교회가 코로나19 전파의 주요원인 중 하나가 된 일과 대비해여 천주교는 236년 만에 대한민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로 자발적인 성당 미사 중단을 선언하고[69][70] 전국 모든 교구가 자발적 격리를 실시하여 이미지가 더 호의적으로 굳어진 부분도 있다.

8. 사건 사고

다만 그러한 인식과는 별개로 가톨릭이 불미스러운 사건사고에서 자유로운 것은 당연히 아니다. 수도회 소속 사제들은 상대적으로 활로가 넓으며 건전한 내부 비판도 가능하기 때문에 숨통이 트여 있는 편이지만,[71][72] 사제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교구사제들은 그럴 활로가 거의 없다. 중앙집권적 구조상 교구사제들은 교구와 교구장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며[73] 이 때문에 내부에서의 비판도 사실상 금기시되고 있어 중앙에서 잘못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해도 항명할 방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아 개신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있다.

8.1. 황사영 백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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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신축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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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일본 총독 암살 계획 밀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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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마리아의 구원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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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대구 희망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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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생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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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천주교 수원교구 사제 성폭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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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워마드 성체 훼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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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박주환 신부 대통령 전용기 추락 기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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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이태원 압사 사고 희생자 명단 무단 공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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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납세와 재정 관련 정보

9.1. 납세

가톨릭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대한성공회와 더불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몇 안 되는 교단 중 하나이다. 가톨릭과 재림교회의 납세는 꽤 오래 된 일이다. 대한성공회가 납세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로 비교적 최근일이다. 한국 가톨릭은 2006년 회계법인에 의뢰하여 스스로 외부감사를 받은 뒤 그 결과를 언론에 뿌리기도 했다. 이는 대한민국 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신자들이 낸 헌금교무금 등도 모두 종교기부금으로 처리하여 소득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처음엔 교무금만 하더니 어느새 주일 헌금까지. 각 교구별로 원천징수해서 납부한다는 듯. 그리고 성직자들도 개개인마다 국민연금을 납부하고 있다.

다만 신자 입장에서 소득공제를 받기는 껄끄러운 편인데, 절차가 까다로운 게 아니라 믿음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헌금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하느님께 온전히, 그리고 본인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인데, 거기에서 세속적인 소득공제 등등을 받자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면서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이 부분은 괜히 위키 등으로 부정확하게 정보를 얻지말고, 찜찜하면 신부나 수도자와 상담하는게 좋을 것이다.

1994년 이후 3곳을 제외한, 모든 교구에서 성직자들이 소득세를 낸다. 안 내는 3곳은 과세표준에 미달하는 영세한 교구들인데 제주교구, 평양교구, 함흥교구이다. 제주교구는 사람이 적다보니 영세하고, 나머지 2곳인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는 북한이다.

군종교구는 1994년 결정 전에도 성직자들이 (장교니까) 당연히 소득세를 납부하고 있었다. 참고 수도회 소속 수도자들은 소임에 따라 과세 여부가 달라진다. 사회복지시설이나 병원, 학교, 출판사 등 기관에 파견된 수도자들은 소속기관의 급여 체계에 따라 근로 소득세를 내고 있지만, 본당에서 활동하는 수도자들은 면세점 이하의 생활비를 받고 있어 과세 대상에서 제외됐다. 참고

어쨌든 이런 일로 인해 외부에서는 한국 가톨릭의 행보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

9.1.1. 한국 천주교회의 소득세 납세 약사(略史)


신부 소득세 납부 확정/천주교 주교회의 발표
좀 더 낮은 자세로 살자

9.2. 재무제표와 수지 내역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 살림을 투명하게 신자들에게 알리겠다는 뜻에서 2007년부터 매년 교구청 재무제표를 공개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016년 6월 공개한 서울대교구 2015년도 재무제표를 보면, 2015년 12월 말 현재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교구청)의 자산은 7,066억 원이다. 2014년보다 336억 원 늘어났다. 자산 대부분은 토지와 건물로 5,653억 원 규모이며[74], 부채는 63억 원으로 2014년보다 25억 늘었다.

서울대교구 산하 각 본당들은 분기별로 자금 수지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10. 교구

가톨릭 교회의 교구의 영역은 대한민국으로 치면 광역자치단체 급에 해당한다. 그렇게 본다면 본당 관할구역은 가리키는 사목구는 읍면동인 셈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가톨릭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교구의 최고 책임자인 교구장 주교는 광역자치단체인 특별시/광역시 시장 또는 도의 지사급의 영향력을 가진다.

한국 천주교의 교구 현황은 다음과 같다.
파일:대한민국 천주교 상징.svg 한국천주교 교구
서울관구 서울 · 인천 · 수원 · 의정부 · 춘천 · 원주 · 대전 · 평양 · 함흥
대구관구 대구 · 부산 · 안동 · 마산 · 청주
광주관구 광주 · 전주 · 제주
교황청 직속 군종 · 덕원자치수도원
밑줄: 대교구
※ 위 첨자: 침묵의 교회
파일:가톨릭_교구_대한민국전도.png
한국 천주교에는 지역 기반 교구 17개와 교황청 직속의 면속구 한 개와 군종교구 한 개가 존재한다. 면속구와 군종교구를 제외한 17개 교구는 세 관구에 나뉘어 속한다. 관구는 하나 이상의 교구들이 하나의 대교구를 중심으로 뭉쳐 지역교회로서의 연대를 이루는 것으로 중심 대교구의 대주교가 관구장을 겸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는 서울관구 관구장 주교를 겸하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에 정식 교계제도가 확립된 것은 1962년이다. 그 전에는 임시 성격으로 '대목구(Apostolic Vicarate)' 체제가 설정되어 있었다. 대목구장들은 사실 관할 대목구의 주교가 아니라 명의주교로 주교품을 받은 후 실질적인 대목구 관할 업무를 맡았다.

덕원자치수도원구, 평양교구, 함흥교구, 서울대교구 황해감목대리구, 의정부교구 일부(개성본당 및 관할 공소), 춘천교구 일부(평강본당, 포내본당, 이천본당 및 관할 공소)는 북한 치하로 넘어가 침묵의 교회라 하여 현재 실질적으로 관할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아래 취소선으로 표시한다.

일부 교구의 관할구역은 법원 관할지역과 똑같다. 광주관구는 아예 광주고등법원 관할구역이라 할 수 있으며, 수원교구의 성남대리구와 안양대리구는 아예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관할구역과 동일하다. 대전교구도 이 지역 자체가 대전지방법원 관할구역이다. 이 외의 지역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

관구는 충청도를 제외하면 전부 같은 관구가 관할 중이다. 충청도는 충남권과 충북 제천시, 단양군은 서울관구가 관할 중이고, 충북 대부분 지역은 대구관구가 관할 중이다. 충청도의 생활권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한 셈.[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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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육 기관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산하 고등교육기관에 '가톨릭'을 명시하여 가톨릭계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가톨릭계 고등교육기관은 가톨릭 신자가 다수 입학하며 타 대학교에 비해 타종교 신자의 비율이 약간 낮다. 현재 가톨릭계 고등교육기관 중에서 교명에 '가톨릭'이 붙지 않은 학교는 서강대학교 뿐이다. 하지만 가톨릭계 미션스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교명에 가톨릭이 붙어있는 대학교들을 모두 가톨릭대학교의 분교로 착각하며 신학대학이 모두 개설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게다가 인지도가 높던 학교가 이러한 교명 일원화 정책 때문에 인지도가 낮아져버리는 단점도 있었다. (효성여자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그래서 예수회 계열인 서강대학교는 교명을 개명하지 않을 거라는 관측이 많다.

포교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는 특성상 채플도 원하는 학생만 수강할 수 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닌 학생들도 알음알음 진학한다. 타종교 신자인 학생들도 타종교 동아리를 활발하게 개설하는 편이다.

11.1. 초등학교

11.2. 중학교

11.3. 고등학교

11.4. 전문대학

11.5. 종합대학

대한민국 가톨릭 산하 고등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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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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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8f8f,#704242>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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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가톨릭대학교 앰블럼.svg 가톨릭대학교
파일:목포가톨릭대학교 UI.svg 목포가톨릭대학교 수원교구
신대
파일:수원가톨릭대학교 UI.svg 수원가톨릭대학교
대구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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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구가톨릭대학교 엠블럼.svg 대구가톨릭대학교
안동교구 파일:가톨릭상지대학교 UI.svg 가톨릭상지대학교[전문]
대전교구
신대
파일:대전가톨릭대학교 엠블럼.svg 대전가톨릭대학교
인천교구 파일:가톨릭관동대학교 로고.svg 가톨릭관동대학교[2]
부산교구 파일:부산가톨릭대학교 심볼.svg 부산가톨릭대학교
신대
파일:인천가톨릭대학교 UI.svg 인천가톨릭대학교
<colbgcolor=#bc8f8f,#704242> 예수회
한국관구
신대
[3] 파일:서강대학교 로고.svg 서강대학교
청주교구 파일:가톨릭꽃동네대학교 엠블럼.svg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신대
: 천주교의 신부를 양성하는 신학과 설치

[전문] 전문대학. 다른 교육기관은 대학.[2] 본교는 춘천교구 관할 지역에 위치한다.[3] 예수회 신부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
}}}}}}}}} ||

11.6. 기타



[1] 대한민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홍콩, 마카오 등. 이 중에 북한과 중국은 침묵의 교회이며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만, 일본, 홍콩에서도 가톨릭은 아웃사이더 종교쯤으로 분류된다. 마카오가 그나마 가톨릭이 주요 종교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조차도 대한민국의 교세에 비하면 한참 약하다.[2] 강화군이 대표적인 성공회 강세 지역이다.[3] 그리스도인 신자가 많은 중화권으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가 있다.[4] 다만 정부에서 조사한 것이 아니라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내 천주교 신자 수가 11%라는 조사결과도 있다.[5]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종교 관련 조사를 표본조사로 했다.[6]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2016 한국 천주교회 통계' 공식 발표에 의하면 2016년 12월 31일 기준 한국 천주교 신자는 574만 1,949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인구의 10.9%에 해당한다. 기사[7] 2010년부터는 가구 구성원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조사 항목에 응답하는 온라인 방식 추가[8]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208[9] 단순히 허용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성사를 모독하는 독성죄로 그 자체만으로도 파문에 이르는 큰 문제이다. 하지만 선교사가 파견된 적도 없는 나라의 신자들이 그걸 알 턱이 없었으므로, 당시 교황청에서는 이를 고려해 경고 조치를 주는 것에 그쳤다. 훗날 이 사례는 한국은 선교사 없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로 기록되게 되었다.[10] 사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신자에 대한 재인식 등으로 인해 '최초의 신자'라는 호칭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오타 줄리아 사례처럼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을 보이지는 못했기에 공식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 이승훈 베드로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정되지 않는다.[11] 이때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12] 특히 신부인 크리스토방 페헤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도 있었다.[13] 김범우 토마스의 집은 명례방으로 불렀고, 시간이 흘러서 이 곳은 명동성당이 된다.[14]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을 받아들인 일본만 해도 황사영 백서 사건과 유사하게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고, 가혹한 박해를 받은 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이다. 카쿠레키리시탄 문서 참조.[15] 참고로 개신교에서도 조선인들을 죽인 무장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조선에서 효수된 미국인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를 순교했다며 '토마스 교회'를 세우고 찬양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선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16] 다만,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옹호할 여지가 없지는 않다. 일본 신사참배는 중국식 제사와 함께 교리적으로 논의되던 사항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종교적 지향점 없이 전통적이거나 국가적 의례 등의 이유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관점이 강해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신자가 중국식 제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황청의 관점도 어느날 갑자기 바뀐 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천주교회의 관점을 교황청이 옳다고 보증을 서준 것에 가깝다. 즉 정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종교 본연의 입장에서 보다면, 중국식 제사를 허용한다면 일본식 신사참배도 허용하여야 했다.[17]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카미유 부이용 신부(한국명 임가밀로), 앙투안 공베르 신부(한국명 공안국) 등[18] 제8대 조선→경성대목구장.[19] 여기에 대해 니콜라 빌렘 신부가 고해성사를 누설한 것이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는 1차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TV 드라마 상의 고증오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니콜라 빌렘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20] 당시 한국 불교 또한 주류는 가톨릭과 다름바 없는 친일 일색이었고, 일본 불교로 흡수될 운명을 앞두고 있었다.[21] 연길교구는 조선인 신자가 많다는 특성상 조선관구에 속해 있었다.[22] 주임신부는 본당을 지키고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라는 교구의 방침 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23] 한국 천주교가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66년에 일어난 강화 심도직물 사건이다. 인천교구나길모 주교는 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교회는 자유민주주의를 긍정하기 시작했으며,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촉구했다.[25] 1990년대 초반까지 성탄절 종교 행사는 전국에 생중계되곤 했다. 12월 24일 밤 명동성당의 성탄 미사나 12월 25일 낮 영락교회의 성탄 예배가 대표적이다.[26] 그리고 미사를 생중계하던 프로듀서 등 방송국 관계자들은 남산 관광을 했다고 한다.[27] 훗날 6월 항쟁 당시의 태도를 보면, 김수환 추기경 본인 또한 이 일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28] 또한 박정희 본인이 육영수와 2번째 결혼식을 치른 곳은 다름아닌 대구 계산성당이다. 다만 박정희와 육영수 모두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 결혼 당시 한국전쟁 중이었고 대구시내에 적절한 결혼식장을 찾지 못해 계산성당에서 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29]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종교라고 하나 성심여자중학교 재학 중에 세례성사를 받기는 했고(세례명 율리아나) 불교에서는 수계를 받은 적은 있다. 또 개신교 신학대학원에도 다녔고, 이슬람 사원에도 기웃거렸다.[30] 당시 광주전남 지역 신자들은 미사 참례를 위해 대부분 무등경기장에 모여 있었던 만큼 금남로와 광주도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해준 인파는 천주교와는 관계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31] 그런데 명언인 것과는 별개로 어투는 굉장히 담담하고 차분했다고 전해진다. 마치 '일요일 몇 시에 성당에서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수준이었다고...[32] 교세의 확장에 매우 유리한게 사실이다.[33] 그리고 이효상은 정치를 하기 훨씬 전인 일제 강점기때도 이미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의 전신) 편집부장으로 활동한 거물급 평신도였다. 박정희의 후광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이효상 본인 자체가 대구대교구의 유명인사였고, 더 나아가 지역의 유력인사였던 것. 쉽게 말해서 장면이랑 비슷한데 정반대 진영 사람이라 이해하면 된다.[34] 2024년 기준으로 가톨릭 신학교는 학부 4년 + 대학원 3년 = 총 7년을 다녀야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신학생들은 늦깎이로 들어와서 병역을 이미 해결했거나 신체적 문제로 면제받지 않은 한 도중에 현역병이나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7년에다 군휴학 2년을 포함해 최소 9년이 걸리게 된다. 20살에 수능 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해도 29살이 되어야 사제품을 받는다는 뜻이다.[35]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5.16 쿠데타의 명분 없음을 비판하지, 박정희 정부를 한국 정부 계보에서 제외하진 않는다.[36] 참고로 이때 노조도 대규모 병크를 터트렸다. 명동성당 안에 쓰레기 방치하는걸 넘어 성탄구유에 오줌을 싸갈기는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신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37] 실제로 인터넷에서 허구한 날 동네북으로 까이는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은 비리나 말썽이 거의 없어 여론이 우호적인 편이었다.[38]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8. 교장신부 시절과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39] 성시간 때 장궤틀 대신 푹신한 방석을 나눠주며 거기서 무릎을 꿇기도 한다.[40] 제주교구 내 성당은 성찬 전례 때 무릎을 꿇기 때문에 대부분 성당에 장궤틀을 갖추고 있다.[41] 성가대가 있는 본당이라 하더라도 성가대가 편제된 교중미사, 중고등부 미사, 청년미사만 노래로 하고, 성가대가 편제되지 않은 오후 성인미사, 토요일 저녁미사 등은 입당, 봉헌, 영성체, 파견 때만 성가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42] 2024년 기준. 온라인 성물방이나 서점에서 사면 2~300원 할인받아 구매할 수 있다.[43] 지금이야 매일미사를 갱지로 만드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지, 성경용지나 사전용지로 만들었다면 "한달 쓰고 버릴 것에 너무 많은 지출을 하게 만든다"는 지적도 분명히 나왔을 것이다.[44] 하지만 요즘 개신교 교회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보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성경책을 들고 오는 걸 권장한다.[45] 사실 신앙심 충분하고 성경에 관심 좀 있으면 내용을 달달 외우지는 못해도 대충 어느 서가 뭐에 대해 이야기하고, 복음서에 따라 어떤 내용이 빠지고 어떤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는지는 알고 있다.[46] 물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명문대', '사립대'에 부자들과 비슷한 노력을 해서 진학하는 것에는 애로사항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지 대학 졸업이 목적이라면 길이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은 34~37만원 내외로, 한 달에 10만원도 채 안 하는 금액이다. 정말로 돈이 없어 대학 '학위'를 못 받는 세상은 적어도 한국과 같은 선진국에선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47] 광복 직후 한국의 문맹 비율은 78%에 달했고, 아직도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들 중에는 한글을 몰라 뒤늦게라도 공부하는 분들이 있다.[48] 만약 신자인데 이 얘기를 처음 듣는다면, 예비신자 교리 시간에 졸거나 딴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49] 천주교에서는 공식적으로 개종이라는 표현보다는 교회로의 (재)일치라는 용어를 사용[50] 성공회나 해외 가톨릭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주제이지만, 한국 천주교 주류는 그 문제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51] 2015년 예장합동 총회는 가톨릭의 세례성사를 인정하지 않고, 합동 교단의 교회로 가톨릭 출신 개종자가 입교할 경우 세례를 다시 받도록 했다.[52] "그대가 받았던 세례가 유효하지 않다면, 나는 아무개 (세례명)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세례를 베풉니다."[53] 일반적으로 (보편) 교회법이라고 하는 것은, 라틴전례교회에 적용되는 것으로, 동방 가톨릭에 적용되는 별도의 교회법도 존재한다.[54] 한국에는 개신교 계열의 이단(가톨릭 신학 기준에서의 이단이 아닌, 주류 개신교 기준에서의 이단) 종파가 많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에서 '종교 박물관인 한국의 현실상'이라는 언급은 이러한 것을 의식했을 여지가 있다.[55] 이름과 다르게 단순한 지침서가 아니라 한국 지역교회법으로 역할한다.[56] 본 문서가 천주교에 관한 것임을 배려해 민요라고 상기했으나, 불교유교의 염불/정근/독경의 운율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 후술하듯 위장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당연한 방식의 수렴이다.[57] 사실 사목구 관할구역을 따지는 것도 주임신부의 성향을 약간 타는데, 너그러운 신부는 자신의 관할지역이 아닌 인접지역에 거주지를 둔 경우라 해도 묵인해주는 반면에, FM을 고집하는 신부는 자신의 본당 신자가 타 사목구로 이사를 가거나 가만히 있었는데도 더 가까운 곳에 새로 성당이나 사목구가 만들어지면 얄짤없이 교적을 그 본당으로 재배치를 시킨다.[58] 보통 이 나이대까지는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미사에 참석하며 아이가 유치원에 갈 즈음이 되면 주일학교 유치부에 가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59] 마태오 복음 19장 14절에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정작 이 대목에서 예수에게 오던 아이들을 내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었고 예수는 오히려 "왜 아이들을 내치느냐."라며 제자들을 꾸짖었다.[60] 이단단체인 마리아의 구원방주에서는 ‘찬미 성모님’이라고도 인사한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닌데, 자세한 내용은 마리아의 구원방주 항목 참고.[61] 가톨릭교회에서는 적어도 1년에 1번 고해성사를 볼 것을 권장하고 있으며, 지역교회법에 따라 한국에서는 2회를 의무로 하고 있다. 1년에 2번만 대죄를 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시회 구성원으로 살면 인간관계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일, 성적 타락 그 이외에 셀 수도 없이 많이 죄를 짓는다. 물론 진짜로 2번만 하는 것은 모령성체의 위험이 있는 멍청한 생각이므로 1달에 1번은 하는 것이 권장되며 못 해도 최소 분기별 1회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62] 신학교 과정 최소 7년에 군복무 기간 2년을 합해 총 9년을 보내야 한다. 거기에 추가로 유학이나 연수라도 가면 10년은 우스워진다.[63] 특히 개신교의 경우 종파가 너무 많이 갈리기 때문에, 목사 안수 기준에 일관성이 없다. 심지어 목사가 아닌 상태에서도 무작정 목회를 4년만 하면 목사고시 없이 목사 자격이 주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다.[64] 관할 구역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기에 성당은 난립할 수가 없고, 십자가에 네온사인도 딱히 붙이지 않는다. 십자가를 비추는 구도로 조명을 달아 놓으면 그나마 많이 신경쓴 축에 들어간다.[65] 천주교에서도 과거에는 아침 6시, 정오, 오후 6시 등 하루 3차례 성당 종을 쳐서 기도 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1991년 「소음·진동규제법」(현 「소음·진동관리법」)이 제정된 후에는 법령상의 제한으로 주택가의 성당들은 타종을 하지 않으며 아예 현대에 건립한 성당들은 종탑을 만들지 않거나 종 없는 종탑만 만들기도 한다. 다만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 혜화동 성당 등 네임드급 성당에 가면 종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고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도 매일 이 시간이 되면 9번 타종한다.[66] 참고로 강동원김남길은 실제로는 무종교인이다. 다만 강동원은 부모님이 가톨릭이었다고는 한다.[67] 사고를 치면 곧바로 면직 등의 징계가 내려진다.[68] 월급 자체는 140~200만원 사이로 대단한 수준은 아니나 주거와 노후문제,의료비 등에서 자유로운데다가 당연히 독신이므로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금액은 여타 직장인보다 많다고 봐도 된다.[69] 물론 미사 봉헌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미사를 봉헌하되, 평신도들의 참여를 금하는 방식이었다. 평신도는 대송으로서 (전례의 형식을 갖춘) 공소 예식을 봉헌할 수 있다.[70] 여러 정부기관에서 예배중단 등을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미사참례와 각종 모임 금지와 대송을 바치는 것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개신교의 경우는 대한성공회 등에서 비대면 감사성찬례를 자발적으로 시행했다. 불교의 경우에도 조계종에서 자발적으로 모든 사찰을 폐쇄시켰다.(이것도 많은 스님들이 모이는 포살 법회를 보류하고 재가자 및 신규 출가자들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뜻이다.)[71] 수도회 사제들의 각종 현안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장을 해도 교구 사제들과는 달리 제재나 경고를 받지는 않는다. 수도회는 는 교구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교구/교구장이 수도회 사제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불가능하며, 수도회는 청빈에 입각하여 자급자족을 하는 특성상 교구에 비하면 성향도 개혁적이다.[72] 대신 수도원 전체와 직결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빠스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73] 아예 사제서품식에서 대놓고 무조건적인 순명을 요구받는다.[74] 자산항목 중 토지로의 편중은 전 세계의 가톨릭 교구, 심지어 교황청의 자산 동향에서도 나타나는 특성으로, 대부분 성당과 학교, 병원이나 문화재로 보존되는 성지 등이다. 즉 환매성이 (교회 조직 자체가 쫄딱 망해서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는 이상) 하나도 없는 땅이라는 뜻.[75] 실제로 전라도와 경상도는 남북도끼리 생활권이 거의 별개지만, 충청도는 대도시인 대전, 청주, 세종, 천안, 아산 등이 거의 한자리에 몰려 있다. 거리상으로만 봐도 교구청과 해당 교구의 대교구청과의 거리가 있는데, 대전은 대구가 조금 더 가깝고, 청주는 서울이 조금 더 가깝다.차라리 대전을 충북이 가져갔으면 나았다 그럼 충남 지역은 천안교구가 될텐데 천안은 명백히 수도권 생활권이니[76] 중·고등학교 과정의 신학교를 소신학교, 대학·대학원 과정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라 한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연세 지긋하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 중에는, 중·고등학교까지도 소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다. 중·고등학교 모두 소신학교를 졸업한 분도 있고, 일반 중학교 졸업 후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에 진학한 분도 있다.[77] 이로서 한국 가톨릭에서 소신학교는 사라졌다. 대신 교구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만들어, 대신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남학생들 및 남자 청년들을 관리한다. 2010년대부터 동성고등학교에서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