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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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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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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
395~476
신성 로마 제국
962~1806
프랑스 제1제국
1804~1814
프랑스 제2제국
1852~1870
오스트리아 제국
1804~186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67~1918
독일 제국
1871~1918
동로마 제국
395~1453

루스 차르국
1547~1721
러시아 제국
1721~1917
오스만 제국
1453~1922
불가리아 제1제국
919~1018
불가리아 제2제국
1185~1396/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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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로마, 근대 유럽의 황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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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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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년 프리드리히 1세 치하의 최대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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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3] / 962년[4] ~ 18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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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1제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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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위치 <colbgcolor=#fff>중부유럽
수도 로마 (법적 수도)
(제국궁정원, 1497년~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1663년~1806년)
베츨라어 (제국최고재판소, 1689년~1806년)

(중심 도시 문단 참조)
면적 1,100,000km2 (1150년)
현재 국가 [ 펼치기 · 접기 ]
인문환경
언어 공용어 <colbgcolor=#fff,#000> 라틴어
독일어[5]
기타 언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저지 독일어
프랑스어
슬로베니아어
폴란드어
종교 가톨릭 (국교)[6]
구성원 독일인
이탈리아인
옥시타니아인
보헤미아인
슬로베니아인
인구 23,000,000명 (1700년)
29,000,000명 (1800명)
정치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연방군주제[7]
국가원수 황제
왕조 [ 펼치기 · 접기 ]
주요 황제 [ 펼치기 · 접기 ]
경제
통화 탈러, 길더, 그로스첸, 라이히스탈러
언어별 명칭
라틴어 Sacrum Imperium Romanum
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이탈리아어 Sacro Romano Impero
체코어 Svatá říše římská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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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232323,#fff> 바이에른어 <colcolor=#232323,#fff> Heiliges Remisches Reich
팔츠 프랑켄 Hailisch Reemisch Raisch
저지 독일어 Hillig Röömsch Riek
헝가리어 Német-római Birodalom
이디시어 הייליגע רוימישע אימפעריע
슬로베니아어 Sveto rimsko cesarstvo
크로아티아어 Sveto Rimsko Carstvo
프랑스어 Saint-Empire romain
네덜란드어 Heilige Roomse Rijk
폴란드어 Święte Cesarstwo Rzymskie
영어 Holy Roman Empire
중국어 神聖羅馬帝國/神圣罗马帝国[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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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징
2.1. 국호2.2. 깃발2.3. 문장
3. 역사4. 영토
4.1. 제국관구
5. 정치
5.1. 헌법
5.1.1. 기본법
5.2. 제도5.3. 황제5.4. 선제후5.5. 제국의회
5.5.1. 영방의회
5.6. 그 외 세력들
6. 중심 도시
6.1. 황제6.2. 의회6.3. 사법부
7. 관직8. 종교9. 외교
9.1. 프랑스와의 관계
10. 군사11. 인구
11.1. 시대별 도시 규모 순위
12. 영향력13. 평가 및 연구사
13.1. 19세기와 20세기 초의 평가13.2. 20세기 중반 이후의 변화
13.2.1. 오토 브루너의 혁신13.2.2. 중세 제국
13.2.2.1. 텔렌바흐 학파와 게르트 알트호프13.2.2.2. 페터 모라브와 중세 후기 연구
13.2.3. 초기 근대 제국
13.2.3.1. 카를 오트마르 폰 아레틴13.2.3.2. 페터 블리클레13.2.3.3.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13.2.3.4. 게오르크 슈미트13.2.3.5. 바바라 슈톨베르크-릴링어13.2.3.6. 영어권 연구
14. 역대 황제15. 오해와 반박16. 참고 문헌17. 각종 매체
17.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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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62년부터 1806년까지 서유럽중유럽에 존속했던 제국.

한때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었던 게르마니아의 튜튼 부족들과 라인-도나우 유역의 옛 로마인들이 카롤링거 왕조의 영토 분할 상속과 후계 단절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틈타 프랑크족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분리되어 결성한 국가다. 많은 영토의 변동을 겪었지만 오늘날 중부 유럽으로 분류되는 지역의 서쪽 대부분(독일-오스트리아)만큼은 계속해서 영토로 유지하며 962년부터 1806년까지 존속했다.[9]

아예 완전히 새로 건국된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후사가 완전히 끊기고 튜튼인에게 왕위가 넘어가면서 부족 공국 기반의 튜튼 왕국이 결성되었고 그 튜튼 왕국에 튜튼인들이 정복한 옛 로마 제국의 북방 도시권이 결합하면서 최종적으로 튜튼인의 왕을 겸하는 로마인의 왕이 로마의 이름으로 보편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하는 '재건 로마제국'이 선포된 것이다.

이후 튜튼인과 북방 로마인은 상호동화를 통해 독일인이 되었는데 이탈리아, 프로방스, 플랑드르, 보헤미아, 프러시아 등의 외부 제국 영토의 획득이나 상실로 인한 구성민족의 세부 변화나 드라마틱했던 대외영향력 및 황제권의 흥망성쇠와 별개로, 꾸준히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독일인들이었으므로, 서프랑크 왕국을 그대로 계승한 프랑스와 명백히 정체성이 분리되는 국가 독일의 전신이자 역사적 독일의 시작으로 간주된다.[10]

지금이야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는 볼테르의 조롱만이 너무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정통 보편 제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11] 당시에는 '제국의 계승(Translatio imperii)'이라고 해서 기존의 제국이 쇠락하면 새로운 제국이 등장해 그 대를 잇는다는 사상이 있었다.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들어선 새로운 제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황제의 서열은 가톨릭 세계의 모든 국왕들보다 높았고[12] 그 권위는 무시하기 어려웠다.[13]

2. 상징

2.1. 국호

사용 시작 연도 국호
962 ~ Imperium (제국) / Imperium Romanum (로마 제국)
1157 ~ Sacrum Imperium (신성 제국)
1184 ~ Sacrum Imperium Romanum (신성 로마 제국)
1474 ~ Sacrum Imperium Romanum Nationis Germanicae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
'신성' + '로마' + '제국'이라는 으리으리하다못해 거창하기까지 한 국호는 나름 필사적으로 권위를 확립하려 한 황제들의 시도였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 오토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2세 때에는 특별한 국명 없이 단지 제국(Imperium)'이라고 칭했고, 또한 오랫동안 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동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orientalis)이라는 명칭 역시 사용되었다. 주변 프랑스 등지에서도 아직은 자기네들이 독일 왕국을 지칭하는 표현인 동프랑크 왕국, 알레만 왕국[14] 등으로 불렀다.

황제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오토 2세가 이탈리아 원정 중인 982년 로마인의 황제(Romanorum imperator Augustus)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다. 오토 1세손자이자 제국의 세 번째 황제인 오토 3세는 '로마 제국의 부활(renovatio imperii Romanorum)'을 내세우며[15]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과 로마 황제를 칭했다. 하인리히 2세 시대부터는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이탈리아와 구분되는 독일인의 왕(Rex Teutonicorum), 독일 왕국(Regnum Teutonicum)과 같은 명칭도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후 잘리어 왕조 기간 동안 제국을 가리키는 명칭은 '제국'이나 '로마 제국', 혹은 '동프랑크 왕국'이었고, 12세기를 지나면서 당대인들은 제국을 구성하는 영역으로서 동프랑크 왕국을 대체하는 '독일 왕국'이 하인리히 1세를 기점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16]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인데, 프리드리히 1세 시대인 1157년에 먼저 신성 제국(Sacrum Imperium)을, 1184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7]

'신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것은 바로 교황과의 갈등 때문이다. 교황은 황제에 대한 우위를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했고, 1157년에는 아예 제국이 교황의 봉토임을 선언했다. 참다못한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 자체의 종교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국명에 '신성'을 추가했다. 황제가 교황을 통해서 신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신에게 직접 신성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황제와 교황이 동등하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서 일부러 신성을 추가한 것이다. 제국에 붙은 '신성한'이라는 형용사는 세속 권력이 교황의 간섭을 단호하게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풀네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대공위시대부터다. 대공위시대에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그 이전 단계인 로마왕들만이 존재하며 서로 제위를 다퉜다. 이때 대립왕 중 하나였던 홀란트 백작 빌럼이 자신의 권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단어가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이후 15세기 들어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1442년 합스부르크 왕조 때 '독일 민족의 로마 제국'을 사용했다. 하지만 15세기 중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토스카나를 위시한 이탈리아 북서부, 보헤미아, 프랑스 동부(아를 왕국, 브르고뉴 공국 등), 벨기에, 네덜란드 등 비독일어 사용자 영토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었다. 1474년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Sacrum Imperium Romanum Nationis Germanicae)이라는 국호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국호는 1485년부터 프리드리히 3세가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1512년 쾰른 제국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공식 국호로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초기 근대에는 로마-독일 제국(Römisch-deutsches Reich)이라는 칭호도 간간히 나타나는데, 현재 역사학자들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도 Deutsches Reich, 곧 독일국 내지는 독일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약자로는 Heiliges Römisches Reich을 줄인 HRR이 주로 사용되며, 영어권에서는 Holy Roman Empire의 약자인 HRE도 많이 사용된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말 자체가 12세기에야 등장하기에, 중세 제국의 경우 역사학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시대 착오적이라 생각하여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케임브리지 중세사를 보면 알 수 있듯 그냥 중세 제국(medieval empire, mittelalterliche Reich)이나 서방 제국(western empire)이라고 부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또한 1495년 이후 근대 초 제국을 가리키는 말로는 구제국(Alte Reich)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2.2. 깃발

파일:신성 로마 제국 제국기수기.png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1200-1350).svg.png 파일:신성 로마 제국 전쟁기(1200-1350).svg.png
제국기수기(Reichsrennfahne) 제국군기(Reichsfahne) 창기(Wimpel)[18]
가장 먼저 등장한 깃발은 '제국기수기(Reichsrennfahne)'이다. 황제가 친히 통솔하는 제국군이나 제국원수가 사용하던 깃발로, 전투 중인 신성 로마 황제를 식별하기 위해 사용됐다. 야전원수(Feldherr)나 제국기사들도 쓸 수 있었던 검은색-황금색 바탕의 제국돌격기와는 달리 오직 황제만이 전장터에서 쓸 수 있는 깃발이었다. 검은색과 하얀색 바탕에 가운데에 X자로 교차된 2자루의 황실보검(Reichsshwert)가 있는 모습이다.[19]

중세 시대 기사들이 얼굴을 가리는 폐쇄형 투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장에서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문장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제국은 12세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제국기수기에서 착안해 붉은 바탕에 하얀 십자가를 그려넣은 '제국군기(Reichsfahne)'을 고안해냈다. 작센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제국군기는 대천사 미카엘을 상징하며 카롤루스 1세 시대부터 사용되어 하인리히 1세, 오토 1세를 거쳐 제국의 깃발로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학계의 정설은 1100년대 십자군 전쟁 때부터 사용됐다는 쪽이다.

이 깃발은 단순히 황제의 휘장이 아니라 제국의 위엄 그자체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제국 내 영방국가들이 외국 세력과 전쟁을 벌일 때 이 제국군기를 요청하면 황제는 군기를 보내줘야만 했다. 대표적으로 1415년과 1423년 제후국들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을 벌일 당시 황제는 제후국들에게 제국군기를 보내준 적도 있다. 이후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제후국들도 은근슬쩍 제국군기를 쓰기 시작했고, 심지어 스위스덴마크 등의 국가들도 제국군기를 본딴 깃발을 사용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군기의 위상은 점점 추락했다. 노란 바탕에 검은 쌍두독수리가 그려진 황제기의 등장으로 제국군기는 자리를 잃었다. 14세기, 15세기 초반까지도 제국군기가 쓰였지만 1400년대 중반부터는 사실상 없는 존재 취급당했다. 결국 145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가 참관한 채 치러진 폐기식(廢旗式)에서 깃발에 회반죽이 칠해졌고, 제국군기는 공식적으로 사용이 중단됐다. 이후 만이 붉은색과 하얀색의 십자가 상징을 계속 썼지만 이 역시 1689년 빈 포위 이후 사라졌다.[20]
파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14세기).svg.png 파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1400년대).svg.png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1300년대 1400년대 초 1433년 ~ 1806년
황제기(königsfahne)
우리가 흔히 아는 깃발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제기(königsfahne)'다. 프리드리히 1세가 처음 독수리 형태의 깃발을 사용했고[21] 1300년대에 친숙한 노란 바탕에 검은 독수리 모습의 깃발이 등장했다. 1400년대 초에 조금 더 모습이 다듬어지며 독수리가 더 화려해졌다.

하지만 이 황제기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제국군기와 혼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 2개가 되어버린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황제기가 제국군기를 제치고 유일한 황제 상징물로 자리잡았고, 앞서 언급한 1454년 폐기식으로 제국군기의 사용이 중단되며 1400년대부터는 황제기가 유일한 국기로 쓰였다. 특히 황제 지기스문트가 1433년에 기존의 머리 하나인 독수리 대신 쌍두독수리를 도입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1452년 제후들의 황제기 사용을 금하며 오직 황제에게만 사용을 한정했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해체될 때까지 400년 간 쭉 이 깃발을 사용했다.

이 황제기를 창에 매달고 창촉 바로 아래에 붉은 끈을 함께 달면 이게 바로 '제국돌격기(Reichssturrnfahne)'가 된다. 제국돌격기란 신성 로마 제국의 군기로서 십자군 원정 도중 제국 출신들을 식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깃발이다. 기존의 백적색 십자가 돌격기는 점차 이 제국돌격기로 대체된다. 이 제국돌격기를 사용가능한 제국기수(Reichsbannerarnt) 자리는 1336년 뷔르템베르크 백작에게 넘어갔고, 1495년 뷔르템베르크가 공국으로 승격하면서 문장에 이 제국돌격기가 새겨진다.

2.3. 문장

파일:550px-Holy_Roman_Empire_Arms-double_head.svg.png 파일:800px-Leopold_II_Arms-imperial.svg.png 파일:Quaternion_Eagle.svg.png
쌍두독수리 문장 프란츠 2세의 문장 사방수리
제국의 상징문장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로마 제국의 검독수리 아퀼라에서 모티브를 따온 노란 바탕의 검은 쌍두독수리였으며 황제의 문장이 곧 국장이었다. 다만 대를 이어 모습이 변하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통일된 형태의 국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의 문장들을 모두 자신의 문장 안에다가 짜넣었는데, 영토가 시시각각으로 바뀌던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바뀔 때마다 이 문장들이 새로 생기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때문에 황제마다 죄다 문장이 달랐던 것이다.

황제들은 쌍두독수리의 가슴에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의 문장을 그린 방패문을 넣었다. 위의 중간 문장이 바로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인 프란츠 2세의 문장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각각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바르 공국,[22] 부르고뉴 공국을 상징한다. 중간에 있는 작은 방패문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로렌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메디치 가문을 뜻한다. 황제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다스리는 가문과 영지들을 과시했다. 특히 이 분야의 정점인 카를 5세는 보기에 어지러울 정도의 문장을 갖고 있었다.

제국의 비공식적인 상징으로 쓰였던 것이 바로 세 번째 그림의 '사방수리(Quaternionenedler)'다. 제국의 상징인 검은 쌍두독수리 위에 제후국들의 문장이 올라가 있는 모습이다. 1510년 독일의 목판화가 한스 부르크마이어가 처음 제작했고, 그 이래로 제국 내의 영방국가들이 제국을 표현할 때 우회적으로 사용하던 문장이었다. 독수리의 머리에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문장 8개가 바로 일곱 선제후들의 문장이다. 왼쪽부터 각각 트리어 선제후국, 쾰른 선제후국, 마인츠 선제후국, 로마 행정관, 보헤미아 왕국, 팔츠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문장이다. 이 사방수리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 제국수리잔 등 다양한 장식품에 등장하기도 했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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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토

파일:HRR_1400.png
파일:holy-roman-empire-1444-flag-map.webp
1400년 제국의 강역 영지들을 국기로 표시한 그림
제국 성립 당시의 47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고, 1000년 경 인구가 1,130만 명에서 1,270만 명에 달해 송나라, 촐라 제국, 팔라 왕조에 이은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었다. 고대 시절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서쪽 영토가 아무래도 동쪽의 미개척지들에 비해 인구 밀도가 훨씬 높았다. 물론 14세기에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인구가 3분의 1 토막 나버리긴 하지만, 여전히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대국이었다.

인터넷에서야 시대별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와 국경을 명확한 선으로 그려놓지만 정작 당시에는 국경 안의 영토라고 해서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게 아니었다. 또한 국경이 겹치는 경우도 많았고 인근 왕국들과 지배권이 혼재된 마을과 도시들이 넘쳐났다. 16세기 이후에 가야 명확한 국경선이 생겨났지 이 이전까지는 국경도 지배권도 뚜렷하지 않았다. 근대 이전까지는 제국의 영토라고 표시된 곳들도 황제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 제국의 중앙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지역이 상당수였다. 제국에 '속해있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봉건관계에 따라 정의됐는데, 이 관계가 대단히 복잡했기에 확실히 국경선을 긋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나마 북쪽의 국경은 상대적으로 명확한 편이었다. 제국에 속한 홀슈타인 공작령과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구분짓는 아이더 강을 자연국경으로 삼았던 덕분이었다. 남동쪽 국경도 꽤 분명했다. 오스트리아와 엔스, 스티리아, 카르니올라, 티롤, 트렌토 주교령을 제국의 남동쪽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이 외의 지방들은 어디까지가 제국에 포함되는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현대 학계는 브란덴부르크포메라니아는 제국에 속해있는 것으로 보지만 튜튼 기사단은 아니라고 본다. 튜튼 기사단이 1226년의 금인 칙서에서 제국의 봉신으로 인정받고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일원이 아니라고 보는 것. 제국은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리보니아를 제국의 영토로 선포했으며, 프러시아 지방에 권리를 주장하며 폴란드가 프러시아를 꿀꺽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대 학계에서 프러시아가 제국 땅이었다고 보는 경우는 없다.

서쪽과 서남쪽은 더더욱 국경을 확정짓기가 어렵다. 네덜란드벨기에 일대가 대표적. 부르고뉴 가문은 1473년 네덜란드 일대를 통일하고 1548년의 부르고뉴 조약을 통해 독자적인 사법권을 얻어내면서 제국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받아냈다. 1568년 시작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때부터 이미 네덜란드는 실질적인 독립국이었지만, 그걸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고나서야의 일이었다. 그러니 이 시기의 네덜란드를 과연 제국땅으로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논란이 있기에 국경을 확정짓기가 어렵다는 것이다.[23]

1500년대 들어서는 메스, 툴루즈, 베르됭 같은 서쪽의 도시들이 점차 제국에서 벗어나 프랑스 왕국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팽창주의적 외교정책을 구사하며 점점 더 많은 제국 영토들을 먹어치웠다. 1681년에 서쪽의 대도시 스트라스부르가 프랑스에게 넘어가자 보다못한 황제가 4만 대군을 소집했지만 하필 그 시점에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지며 탈환에 실패했다. 로렌 일대도 마찬가지다. 1542년의 뉘른베르크 조약으로 이미 반쯤 제국에서 독립된 상태였는데 결국 1766년에 프랑스에게 완전히 먹혔다.

스위스는 영토라고 보기에 애매하다. 스위스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야 완전한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지만 이미 세금을 바치지 않은 것은 1499년 바젤 조약부터의 일로 무려 150년 동안 황제에게 딱히 충성을 바치지도 않았고 제국 정치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물론 스위스가 바젤 조약 때 아예 독립을 선포한 건 아니지만, 황제의 영향력은 스위스에 거의 미치지 못했다.

제국령 이탈리아는 토스카나 대공국,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파르마 공국, 미란돌라 공국 등 수많은 영지와 공국들로 쪼개져 있는 실정이었다. 분명 법적으로는 제국에 속했지만 제국추밀원(Reichshofrat)을 빼면 그 어떠한 정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공국들은 제국관구에도 속하지 않았고 제국헌법의 대상도 아니었다. 황제는 분명 이탈리아 국왕을 겸했지만 이탈리아의 공국들은 황제를 선출할 권한조차 없었다. 황제는 이탈리아의 대귀족들에게 개입하기가 어려웠지만, 반대로 이탈리아의 중소 귀족들은 대귀족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황제의 권위에 의존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1800년대까지 존속했지만 그 중요성이 점차 쇠퇴해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로 전락했다.

4.1. 제국관구

파일:Map_of_the_Imperial_Circles_(1560)-en.svg.png
1560년 당시 제국관구의 지도[24]
원래 신성 로마 제국에는 중앙 행정부나 최고 군사기구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행정을 꾸리자니 제국이 너무 거대했고, 그렇다고 영주들에게 행정을 맡기자니 영지들이 너무 많고 세분화되어 있어서 통일된 정책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행정구역이 바로 제국관구(Reichskreis)다. 제국을 여러 '관구(Kreis/Circle)'로 나누고,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행정과 군사, 치안을 묶어서 책임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는 '제국집행령(Reichsexekutionsordnung)'을 공표하고 관구 내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자는 무력을 써서라도 제국최고재판소(Reichskammergericht)에 회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제국 전체를 6개의 관구로 분할했는데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과 선제후의 영지는 관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12년에 마침내 선제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까지 다 포함시켜서 제국을 총 10개의 관구로 나누었다.[25] 이 행정 체제는 1806년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제국관구의 의무는 크게 7개로 외세와 반군에 맞서 평화를 유지할 것, 제국집행령 집행, 제국대장[26] 관리, 화폐 주조 관리, 관세 감시, 제국최고재판소 판사 선출, 재판소의 판결 집행 등이 있었다.

제국관구의 경우 관구마다 그 권능과 성격이 달랐다.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 브란덴부르크와 같은 대형 영방이 소속된 오스트리아, 부르군트, 바이에른, 오버작센 관구는 사실상 이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원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군소 영방이 많았던 프랑켄과 슈바벤, 니더작센과 라인란트의 세 관구(쿠어라인, 오버라인, 니더라인)는 군소 영방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과 더불어 이들의 독립성과 발언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각 관구는 관구의회(Kreistag)를 개최하여 관구 내의 문제들을 논의하였고, 독자적인 행정 기구를 구축하여 내부의 질서 유지 및 제국최고재판소의 판결을 집행했으며, 관구군(Kreistruppen)을 소집하여 관구 단위로 대외 방어를 수행했다. 슈바벤 관구는 독자적인 상비군을 가질 정도로 발전했고, 프랑켄과 오버라인 관구는 9년 전쟁 당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참가하기도 했다.

관구의회(Kreistag)는 관구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지역의회였다. 관구의회는 비정기적으로 열렸지만 최소 1년 1회 이상 열렸다. 성직 제후, 세속 제후, 수도원장, 백작, 자유도시 이렇게 다섯 신분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1인 1표였고 제국의회와는 달리 신분 단위로 찬반을 정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권한이 제한적이었다. 안건은 다수결로 결정했다.[27] 관구의회는 의원과 공무원, 세관원과 기록 보관원 등 주요 요직에 대한 임명권이 있었다. 의회는 이 인사권을 이용해 한 세력이 관구 내에서 독보적인 패권을 잡을 수 없도록 견제했고 약소 세력들을 보호했다.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24,000명의 제국군 결성을 결의했고, 이 제국군 창설을 위해 관구들마다 각자 병사들을 뽑아 중앙으로 올려보내기로 했다. 이게 바로 관구군(Kreistruppen)이다. 모두 합쳐서 기병 4천, 보병 2만의 규모였고 기병은 1인당 12길더, 보병은 1인당 4길더로 인건비만 한 달에 무려 128,000길더에 달하는 거액이 들었다. 전쟁이 나면 이보다 더 많은 병사를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전쟁시 10개의 관구에서 총 기병 1만 2천명과 보명 2만 8천명을 제공해야했으며 필요시 더 확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관구군에도 한계가 존재했다. 전시에조차 관구군의 지휘권은 일원화되지 못했고, 지역의 이익에 반하는 작전은 아예 불가능했다.

5. 정치

5.1. 헌법

신성 로마 제국은 근대적인 의미의 성문 헌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은 금인 칙서베스트팔렌 조약을 비롯하여 제국의 질서를 규정하는 기본법(Grundgesetz) 역할을 하는 여러 정치적인 문서들을 토대로 관습적으로 확립된 제도 및 정치적 질서를 의미한다.[28]

신성 로마 제국은 구 체제 유럽의 기도하는 자(성직자), 싸우는 자(기사), 일하는 자(평민)로 나누어진 3위계 신분(Stände/Estate)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중세 후기 이후 유럽에서는 각 신분은 법적 능력을 갖춘 단체인 법인(Korporation/Corporation)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받고자 하였는데, 각 신분 조직의 대표가 소집된 것이 바로 신분제 의회(Stände/Estate)이다. 제국을 비롯한 중세 후기와 초기 근대 유럽 각국의 헌법은 군주와 신분제 의회 간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였는데, 이를 신분 국가(Ständestaat)라고도 한다. 신분제 의회는 중세 후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 군주와 함께 정치 운영을 논의하고 재정 확보를 위한 세금 부과에 대한 동의를 비준하는 역할을 하였다.

초기 근대를 기준으로 제국의 헌정 구조는 제국 단위에서는 황제와 제국의회의 참석권을 보유한 제국신분(Reichsstände)의 이원 구조로, 영방 단위에서는 영방 군주(Landesherr)와 영방신분(Landstände)의 이원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제국신분과 영방신분은 각각 제국과 영방의 단계에서 각 신분의 대의체인 제국의회와 영방의회(Landtag)를 형성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군주와 권력의 균형을 이루었다.

대중적으로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제국의 헌정 질서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유명무실한 상태로 남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으나, 현재의 역사가들에게는 제국은 각 영방에 대해 배타적인 주권을 획득해 갔고,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제국과 영방이 서로 주권을 분할 혹은 공유하고 있었다는 관점이 우세하다. 제국의 헌법 질서는 비록 영국과 같은 근대적인 입헌주의로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통치자의 선출, 초기적인 기본권과 법치 개념, 교파의 자유, 연방주의적 질서의 확립과 같은 면모에서 오늘날의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헌법과도 일정 부분 연속성을 가진다. 역사가 빈프리트 슐체는 초기 근대 제국에서 법 질서의 확립에 주목하며, 이를 '갈등의 사법화' 및 법치 전통이 독일사에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5.1.1. 기본법

1,000년에 걸친 제국의 역사 동안 수없이 많은 문서와 협정, 칙령들이 반포되었다. 개중에 제국 헌정 질서의 기반이 되는 기본법으로 간주되는 법령들로는 다음과 같은 문서들을 제시할 수 있다.

5.2.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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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구조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및 제국개혁 이후 제국의 정치적 기관은 크게 사법을 담당하는 제국최고재판소(Reichskammergericht)제국궁정원(Reichshofrat), 입법을 담당하는 제국의회(Reichstag), 행정을 담당하는 제국재상부(Reichshofkanzlei)가 존재했다. 이 기관들은 독자적이거나 황제를 견제하는 세력이라기보다는 법적으로, 실제로 황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제국개혁 시기 설치된 제국관구(Reichskreis)는 관구 단위로 제국의 행정을 보완하는 제국 운영의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

제국최고재판소는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당시 설립된 이후 1527년부터는 슈파이어에 소재하였다가, 9년 전쟁 때 프랑스에 의해 파괴된 후 1689년부터는 베츨라어에 소재했다.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제국 내의 모든 법적 절차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주거의 불가침, 무역의 자유 등의 개념을 제국에 도입했다. 제국 사법부의 또다른 양대산맥이었던 제국궁정원 1498년 설치되어 에 위치했다. 애초에 목적이 황제를 도와 제후들의 입김이 쎈 제국최고재판소를 견제하는 것이었고,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시시건건 충돌했다.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정치적 중요성이 격상된 제국의회는 제국의회 참석권을 가진 제후국인 제국신분이 참여하였고, 선제후단, 제후단, 도시단의 3개 선거인단으로 나뉘어 제국의 입법부 역할을 했다. 16세기 동안 제국의회는 슈파이어, 보름스,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레겐스부르크 등 남부 독일의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1594년부터는 오직 레겐스부르크에서만 개최되었으며, 1663년 이후부터 상설화하여 '영구 제국의회(Immerwährender Reichstag)'가 되었다.

행정부에 해당하는 제국재상부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마인츠 대주교가 공식 직함인 제국대재상(Reichserzkanzler)의 자격으로 대표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합스부르크가의 황제가 임명한 제국부재상(Reichsvizekanzler)이 제국재상부의 운영을 담당했다. 하지만 요제프 1세카를 6세 시대에 합스부르크 황제들이 제국이 아닌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중시하면서 제국재상부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었고, 비합스부르크 황제인 카를 7세와 제국 체제에 냉소적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요제프 2세의 통치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하였다.

5.3.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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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로 대관받는 카롤루스 대제
신성 로마 제국은 중앙집권국가도, 민족국가도 아니었다. 제국은 왕, 공작, 백작, 주교, 대수도원장 등이 다스리는 수백 개의 조그마한 영지들로 나뉘어 있었다.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곳도 분명 존재했지만 제국 전체에 비하면 그 면적이 작은 편이었다. 황제는 제국의 수장이자 최고의 대영주였으며, 적어도 제국 초기에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카롤링거 제왕들의 후계자로 여겼다.

황제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제국의회가 행사에 동의해야 하는 권리(Komitialrechte)로서, 세금 부과, 법률 개정 및 반포, 전쟁 선포 및 평화 협정 같은 핵심적인 권리들이 여기 포함됐다. 두 번째는 선제후나 이해당사자들이 행사에 동의해야 하는 권리(iura caesarea reservatalimitata)로 의회 소집권, 조폐권, 관세권 등이 있었다. 제국의회보다는 권리 행사를 위해 설득해야할 인원이 적었으나 항상 황제 마음대로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은 아니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황제가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iura caesarea reservata)로 법관 임명권, 의회에 안건을 제출할 권한, 귀족 계급을 봉작할 권리, 사생아를 인정할 권리 따위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권한들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제국금지령'[30]을 내릴 권리도 원래 선제후 등 일부의 허락만 있으면 가능했지만, 근대 들어서 제국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으로 변하며 적용 조건이 훨씬 까다롭게 변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와 떼놓을 수 없었던 직위가 바로 로마왕이다. 9세기부터 5명의 공작들이 왕을 선출하기 시작한 이래로, 제국에서는 선제후들이 왕을 선출했다. 이때 제후들이 황제선거에서 왕을 선출한 뒤 로마에서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기 전까지 황제의 지위를 '로마왕'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지 못해서 황제가 아닌 로마왕으로만 남은 군주들도 여럿 있었다.[31] 허나 대공위시대 이후 교황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정치적 혼란이 악화되자 1356년 금인 칙서 이래로는 그냥 교황의 대관 없이도 선거에서 선출되면 바로 황제로 인정받는 것이 명문화된다. 마지막으로 교황에게 대관을 받은 사람은 카를 5세였다. 카를 5세가 국가혼란을 막기 위하여 생전에 황제 선거를 실시해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미리 로마왕 직위를 수여한 이후부터는 사실상의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로 변했다.

황제는 남성이어야 했고 당연히 귀족 출신이어야만 했다. 사실 그 어떤 법에도 황제가 가톨릭이어야 한다고 못박아놓지는 않았으나 제국의 제후들 대부분이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가톨릭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제국 정체성의 일부분이었기에 개신교도가 황제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출신지도 중요했다. 원래 중세까지만 해도 황제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독일 출신이라는 것이 황제에 오르기 위한 필수 자격들 중 하나로 들어갔다.

5.4.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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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선제후들[32]
선제후(Kurfürsten)란 제후들 중에서 로마왕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을 의미하며 '제국의 기둥'이라고 불렸다. 911년 유력한 5명의 제후들이 모여 선거로 콘라트 2세를 선출한 전통을 이어서[33] 제국에 황제선거라는 전통이 자리잡은 이래로 쭉 선제후들이 모여 황제를 선출했던 것이다. 선제후들이 모인 선거인단은 1200년대에 처음 결성됐고 1257년 처음으로 공식화됐다. 1298년부터는 이들을 '선제후'라는 공식 명칭으로 부르며 지위를 확고히 했다.

선제후들의 명단은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 칙서를 통해 정리됐다. 성직 선제후가 3명, 세속 선제후가 4명이었는데, 성직 선제후는 각각 마인츠 선제후국, 쾰른 선제후국, 트리어 선제후국이고 세속 선제후는 각각 보헤미아 왕국,[34]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팔츠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이었다. 이 7명의 선제후들은 1356년부터 1623년까지 무려 3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지고 볶고 싸우기를 반복하며 황제를 선출하는 핵심적인 직위였다.

이 7개의 선제후는 300년 동안 변하지 않다가 격동의 시절인 30년 전쟁 때 변동이 생긴다. 1623년 페르디난트 2세30년 전쟁 도중 팔츠의 선제후직을 바이에른 선제후국에게 넘겨줬고, 전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1648년 팔츠 선제후국을 부활시키며 7개의 선제후직을 8개로 확대했다. 1692년에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하노버 선제후국을 새로 선제후에 봉하며 선제후를 9명으로 또 늘렸다. 다만 제국의회에서 이를 인정받는 데는 16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후 이 9명의 선제후는 100년간 변하지 않다가, 나폴레옹 전쟁 시절인 1803년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마인츠, 쾰른, 트리어 선제후국이 폐지되고 나폴레옹 입맛대로 선제후들이 우후죽순 난립하면서 혼란이 있었지만, 얼마 못가 제국 자체가 망해버리면서 별 의미는 없어졌다.

제후들 중에서도 최상위 계급이었던 선제후들은 30년 전쟁 이전까지 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판권, 광산 채굴권, 관세 징수권, 화폐 주조권을 틀어쥐었고 영지도 분할당할 염려가 없었으며 황제의 소환에 응하지 않을 권리도 있었다. 심지어 선제후에 대한 반역은 대역죄로 처벌했다. 선제후들은 황제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선거권을 무기로 황제 후보에게 막대한 이권과 영토를 뜯어냈다. 선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사실상 국왕이나 다름없었다. 1680년대 이후 제국의회의 발달로 선제후들의 힘은 약화되었지만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기관들 중 하나였다.

5.5. 제국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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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제국의회는 원래 프랑크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는 국왕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을 불러모으는 일종의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777년 파더보른에서 작센과의 전쟁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첫 제국의회를 열었고, 1356년 금인 칙서가 제국의회를 통해 공표되면서 나름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선제후와 공작들이 궁중에 모여 자기들끼리만 의견을 나누는 궁정 논의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1495년 막시밀리안 1세가 연 보름스 제국의회를 기점으로 제국의회의 중요도가 갑자기 격상됐다.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의 조언자에 불과하던 궁정회의(Hoftag)를 영향력 있는 정치 기관으로서의 제국의회(Reichstag)로 격상했다. 제국의회는 황제와의 협의를 통해 법을 제정하는 제국의 공식적인 입법부가 되었으며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가졌다. 마침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는 란트 평화령, 제국최고재판소 설립, 전쟁세 도입 같은 중대한 법령들이 쏟아져나왔고 이는 제국의회의 중요성과 격을 한층 더 높여주었다.

제국의회는 황제가 정한 의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됐고 황제의 결정을 낭독하는 것으로 끝났다. 제국의회는 1663년까지 약 40~45번 개회했고 그 기간도 천차만별이라 몇 주에서 몇 달까지도 지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열리던 제국의회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인 1663년부터는 아예 상설 기관으로 변모한다. 더이상 의회의 폐회를 선언하지 않고 그냥 그동안 의회가 가장 자주 열렸던 레겐스부르크에서 쭉 머물렀던 것.[35] 허나 이 레겐스부르크 의회는 어디까지 제후들의 대표기관으로 존속했을 뿐, 민주주의적인 기관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의회가 상설적으로 열려있자 제후들이 직접 참석하는 대신 대리인을 대신 파견했다. 이후 1806년까지도 제후가 의회에 직접 참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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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겐스부르크의 제국의사당
제국의회는 크게 3개의 신분으로 나뉘어졌다. 일곱 선제후들의 선제후의회(Kurfürstenrat), 제국 각지의 제후들로 이루어진 제후의회(Fürstenrat)과 제국도시들의 대표로 이루어진 도시의회(Reichstädte)가 바로 그것. 선제후 의회는 마인츠 대주교가 의장을 맡았고 가장 힘이 강력했다. 제후의회는 성직 제후, 세속 제후, 제국백, 제국남[36], 수도원장 등으로 구성됐고 총 100석이었는데 개중 성직 출신이 37명이었고 세속 출신이 63명이었다.[37] 잘츠부르크 대주교나 오스트리아 대공이 번갈아가며 의장을 맡았다. 마지막 도시의회는 51개의 제국도시로 구성됐다. 북부와 중부에 위치한 제국도시들은 라인석, 남부에 위치한 제국도시들은 슈바벤석이라고 하여 회의장에서도 자리를 구분해서 앉았다.

의회는 행정, 사법, 군사, 종교, 전쟁, 세금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의회에서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해선 비효율적일 만큼 기나긴 토의와 자문을 거쳐야만 했다. 황제가 3개의 선거인단 모두와 만장일치를 이루어야만 안건이 통과됐고 하나라도 반대할시 통과되지 못했다.[38] 선제후, 제후, 도시의회 모두가 찬성했더라도 황제가 거부해버리면 통과되지 못했다. 절차가 이랬으니 사소한 안건 하나 처리하는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전문가와 사절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위원회에서 따로 다수결로 약식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로는 제국의회의 의원들이 신교파와 구교파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따로 안건을 처리하는 경우가 흔해졌고, 단순 다수결로 처리하기보다는 양측이 합의해서 처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5.5.1. 영방의회

헌법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독일 역사가 오토 힌체는 1930년 "서구 신분제 헌법의 유형론(Typologie der ständischen Verfassungen des Abendlandes)"이라는 고전적 논문에서 유럽의 신분제 의회를 2원제와 3원제로 구분하는 고전적인 유형론을 제시했다. 힌체에 따르면 2원제는 고위 귀족 및 고위 성직자를 포괄하는 상원과 하급 귀족 및 도시 대표의 하원으로 구성되며, 오래된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카롤루스 제국의 주변부인 잉글랜드,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헝가리에서 발전했고, 잉글랜드를 제외한 이 지역에서는 봉건제의 발전이 미약했다. 한편 카롤루스 제국의 중심부인 프랑스와 독일은 봉건제의 발전과 로마법의 수용이 이루어졌고, 보다 새로운 체제인 성직자-귀족-도시 대표의 3원 체제가 형성되었다.

영방의회[39]의 경우 힌체의 설명대로 3원제가 보편적이긴 하였으나, 각 영방마다 그 형식은 상이하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독일 영방에서 신분제 의회의 대표는 토지를 소유한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봉건 영주로서 토지를 소유한 성직자와 귀족과 더불어 그리고 장원에 속하지 않은 도시의 상공 시민이 별도의 제3 신분을 구성하였다. 바이에른과 헤센, 브라운슈바이크는 이러한 고전적인 3원제가 두드러진 곳이었다. 한편 하급 귀족에 해당하는 제국기사의 대표권이 보장되지 않고 선제후, 제후, 도시의 3원제로 구성된 제국의회에 대해서 힌체는 이를 다소 특수하긴 하지만 상원이 나뉘어진 2원 체제의 연속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종교개혁 이후 메클렌부르크와 베스트팔렌에서는 성직자 계급이 제외된 귀족-도시의 2원 형태가, 황제의 영향력이 강했던 뷔르템베르크와 바덴, 프랑켄에서는 황제 직속의 제국백작(Reichsgraf)과 제국기사(Reichsritter)들이 독립적인 영지를 형성하면서 성직자-도시/관료의 2원 체제가 나타났다. 브란덴부르크와 오스트리아의 경우 고위 귀족과 하위 귀족인 기사 계급이 별도의 대표를 구성하면서 3원 체제의 변종인 4원 체제가 나타났다.

작센과 동프로이센, 보헤미아, 슐레지엔, 라우지츠의 경우 고위 귀족과 성직자가 함께 별도의 대표단을 형성하고, 기사와 도시가 각각 대표단을 형성하는 3원 체제가 형성되었다. 힌체는 이를 카롤루스 제국의 주변부에서 나타난 2원적 요소가 잔존한 3원 구조로 파악하였다.[40]

독일 농민전쟁의 중심지였던 남서부 독일, 특히 슈바벤 및 티롤, 잘츠부르크 등에서는 농민 전쟁 이후 농민 대표의 신분제 의회 참여가 보장되는 영방 대의체(Landschaft)가 발전하였고, 성직자-귀족-도시-농민의 4원제와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뷔르템베르크에서도 하원을 통해 농민 대표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북부 독일에서도 북해 연안의 동프리슬란트와 하델른 등에서 나타났다.

전후의 대표적인 초기 근대사가 페터 블리클레는 남서부 독일 Landschaft의 발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고,[41] 이는 독일 영방의 각론에 대해서 취약점을 가지고 있던 힌체의 유형론을 보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블리클레는 독일 농민전쟁을 농민을 중심으로 한 평민(Gemeiner Mann)이 주도한 '평민 혁명'으로 규정[42]하였고, 전근대 농촌 공동체의 '자유' 개념과 '평민'들의 주체성, 그리고 그들이 역사 속에서 수행한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대형 영방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 군주가 신분제 의회와의 합의 혹은 묵인하에 조세 권한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브란덴부르크와 바이에른, 헤센은 군주가 영방신분의 묵인하에 조세 권한을 확보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 영방의회가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에 이를 달성했다. 다만 흔히 '절대주의'라고 불렸던 이러한 케이스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던 프랑스에서 드러나듯 군주의 지배권은 전혀 '절대적'이지 않았고,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오히려 특권 신분과의 타협 및 양보를 통해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독일 내의 '절대주의'적 영방에서도 영방신분은 기존의 권한을 기본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작센과 뷔르템베르크, 메클렌부르크는 영방 의회가 구제국 해체 이전까지는 물론 19세기까지도 그 영향력을 유지한 사례였다. 뷔르템베르크의 경우 귀족이 배제되면서 농민의 대표성이 확보되는 매우 진보적인 형태의 강력한 의회주의 체제가 발전했다.

5.6. 그 외 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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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 대수도원[43] 베르됭 대수도원[44]
당시 제국에는 선제후와 제후 말고도 수많은 세력들이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수도원장(Reichsprälat)이었다. 대주교나 주교들처럼 성직 제후직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막대한 재산과 영향력으로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제국 수도원장, 제국 서기관, 제국 수녀원장 등이 주를 이루었고 1521년에는 83명의 수도원장들이 있었다. 다만 스위스의 독립과 기타 이유로 수가 점점 줄어 1792년에는 40명까지 줄었다. 대부분의 수도원령은 제국의 남서쪽에 몰려있었고 영지 대부분이 매우 작았다. 게다가 인근 제후들이 수도원 영지를 호시탐탐 노렸기에 늘 불안에 떨어야했다. 수도원장들은 각각 라인 제국대수도원장 위원단, 슈바벤 제국대수도원장 위원단의 형태로 제국의회에서도 투표권이 있었는데, 슈바벤 쪽이 더 입김이 쎘다.

제국백(Reichsgraf)도 있다. 제국의 귀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원래는 황제의 영지 대리인이거나 제후들 대신 땅을 도맡아 관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힘을 얻어 백작의 지위를 얻었던 것. 원래 제국백은 어디까지나 관리인일 뿐으로, 제후들처럼 자신만의 영지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든 제국백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영지를 갖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고 결국 상당수가 그 꿈을 이뤄냈다. 심지어 제국백 가문이 대제후가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뷔르템베르크 왕국도 원래는 제국백 출신이었다. 제국백들의 조그마한 영지들은 제국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1521년 143명의 제국백이 있었고 1792년에도 99명에 달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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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도시 밤베르크의 그림
자유도시(Reichsstädte)는 황제에게 직접 자치권을 수여받은 도시들이다. 제후의 압제를 뿌리치고 자치를 얻어낸 도시들로 함부르크. 뤼베크, 브레멘,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가 대표적이다.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코뮌이 도시를 운영했고 이들은 황제에게만 충성했다. 다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유력 가문이나 귀족들이 다스리는 과두정이나 독재정이 더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인근 제후들의 간섭 때문에 안정적이지도 못했다.[46] 이들은 제국의회의 선거권도 있었으나 모든 도시들이 있는 건 아니었다. 1521년 총 86개의 자유도시들이 있었지만 개중 4분의 3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다. 다만 이들도 발언력이 강하지 못했고 어디까지나 제후들이 결정해놓은 것에 사후검토하는 것에 불과했다.

제국기사(Reichsritterschaft)는 제후가 되기에는 자격이 모자란 중소 귀족들이었다. 개인 봉토를 소유하긴 했는데 제후로 인정받기에는 너무 세력이 약하거나 작아서 제국의원이 되지 못한 소귀족들을 묶어서 '제국기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제국백처럼 온전히 인정받지도 못했고 제국대장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며 다른 대제후를 모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제국기사들은 황제에게 돈을 바치는 대신에 작위와 보호를 받았다. 이들은 개개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기에 일부러 15개의 기사단으로 뭉쳤는데, 이 15개 기사단은1577년 프랑켄 기사단, 슈바벤 기사단, 라인 기사단 이렇게 3개의 대기사단으로 또 통합됐다. 1800년 350여 가문에 달했던 제국기사 계급은 제국의 해체와 함께 사라졌다.

제국마을(Reichshof)자유도시가 될 규모는 아니지만 자치를 누리고 있는 곳들의 명칭이다. 1400년대에 해산된 옛 왕령의 잔재로 농노제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원칙적으로는 인근 제후들에게 간섭받지 않을 권리도 있었다. 물론 자유도시들보다 그 목소리가 확연히 작았고, 제후들에게 종속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국마을들은 종교와 학교 문제만큼은 시민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14세기에는 100여 개에 달하는 제국마을들이 있었지만 갈수록 빚, 제후들의 간섭, 기부와 분할 등등 갖가지 이유로 점점 사라졌다. 1806년에 제국이 망하기 직전에는 거의 남아있는 제국마을이 없다시피했다.

6. 중심 도시

신성 로마 제국에는 수도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상징적으로, 아주 명목상의 의미로서 로마를 수도로 꼽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나라 이름이 왜 신성 '로마' 제국인지 생각해보자. 어찌됐든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적통을 주장했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였기 때문. 하지만 황제가 실제로 로마에 머무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로마가 교황에게 넘어가고 교황과 황제의 충돌이 격화되며 황제는 갈수록 로마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로마에 거주지를 마련하려 시도한 황제는 983년 즉위한 오토 3세였고, 이 이후부터는 황제들도 대관식 때나 잠깐 와서 둘러볼 뿐 영구적인 황궁을 만들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47]

하지만, 제국의 주요 영토는 오늘날의 중부 유럽 쪽이라 공식 수도는 로마라지만 나라 남쪽에 수도가 너무 치우친 형태인지라 제국 초기부터 그냥 황제가 사는 곳이 사실상의 수도처럼 기능했다. 즉, 황제가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그에 따라 수도도 같이 따라다니던 셈이었다. 황제들은 각지의 유력자들을 감시하고 궁정 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마음에 드는 곳 몇 군데를 정해놓고 계속 순회하며 제국을 통치했다. 특정 도시에 공식 황궁이나 의회, 법원 건물을 세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황제가 있는 건물이 곧 황궁이었고, 의원과 판사들은 시 청사나 귀족들의 성을 의사당과 법원으로 사용했다.

다만 황제들이 즐겨 오랫동안 머무르던 장소들은 분명 존재했다. 예를 들어 카롤루스 대제온천 때문에 말년을 아헨에서 보내기를 선호했고 후대의 황제들도 가장 좋아하던 장소들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에 머무를 때는 옛 롬바르디아 군주들의 궁정이 있었던 파비아를 선호했고 부르고뉴에 있을 때는 아를에 머물렀다. 동프랑크 왕국루트비히 2세레겐스부르크프랑크푸르트를 거점으로 삼았으며 이후 카롤루스 왕조의 황제들은 여기서 왔다갔다하며 독일을 다스렸다.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고 들어선 작센 왕조잘리어 왕조의 황제들은 보다 남서쪽에 있는 도시를 더 좋아했다. 레겐스부르크와 프랑크부르크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지만 황제는 슈파이어보름스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 외에도 수많은 도시들이 있었다. 오토 1세는 955년부터 마그데부르크에서 살았고 프리드리히 2세팔레르모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으며 비텔스바흐 왕조는 1328년부터 1347년까지 뮌헨에 머물렀다. 1400년대까지 황제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가서 궁정을 차리고 살았다. 그러다가 1438년 합스부르크 가문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하면서 점차 상황이 달라졌다. 합스부르크가 제위를 독점하기 시작했고,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자신의 본거지인 에 고정된 궁정을 지어 살았다. 잠깐 루돌프 2세 때 1576년부터 1612년까지 프라하에 있었던 걸 제외하면 1550년대부터 약 250년간 이 제국의 수도로 기능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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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프랑크푸르트
고정된 수도는 없더라도 대관식과 황제선거가 열리는 도시들은 관례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962년부터 약 200년 동안은 아헨에서 황제선거와 대관식을 치렀다. 12세기, 특히 13세기 들어서부터는 대관식은 여전히 아헨에서 치렀지만 황제선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했다. 1356년의 금인 칙서에는 아예 이 관행을 명문화했다. 원래 황제 대관식 때는 교황이 직접 관을 씌워주는 것이 관례였고 140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황제들은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직접 대관을 받았다. 하지만 1356년의 금인 칙서로 교황 대관식이 필요없어지고 충돌이 격화되면서 후기에는 거의 치르지 않았다.

이러한 관행은 무려 300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독점하며 뒤엎어졌다. 페르디난트 1세가 1531년에 아헨에서 마지막 로마왕 대관식을 치르고 158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른 이후부터는 대관식과 선거 모두 프랑크푸르트에서만 치러졌다. 가끔씩 더 이동이 편리한 레겐스부르크아우크스부르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제국이 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대관식, 선거 장소는 프랑크푸르트였다.

6.1. 황제

목적 도시
거처 아헨 (794년 ~)
여러 제2거처들
뮌헨 (1328년 ~ 1347년, 1744년 ~ 1745년)
프라하 (1355년 ~ 1437년, 1576년 ~ 1611년)
(1438년 ~ 1576년, 1611년 ~ 1740년, 1745년 ~ 1806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742년 ~ 1744년)
대관식 대체로 로마 (교황 대관식)[49]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선출황제 대관식)[50]
아헨 (로마왕 대관식)[51]
황제선거[52] 대체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53]

6.2.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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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연도 ||장소 ||주재 ||주제 ||
754년 키에르지 피피누스 3세 피핀의 기증[54]
777년 파더보른 카롤루스 대제 색슨족들의 땅에서 열린 첫 의회. 비두킨트 공작은 참석하지 않았다.
782년 바트립슈프링에 카롤루스 대제 색슨족의 영토를 독일 백작들에게 분할
788년 잉겔하임암라인 카롤루스 대제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 작위 박탈
799년 파더보른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의 승인을 받아 황제로 등극
806년 디덴호펜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왕조의 3분할
817년 아헨
826년 ? 소르브인들의 초대
829년 보름스
831년 아헨
835년 디덴호펜 루도비쿠스 1세
838년 슈파이어 루도비쿠스 1세
872년 포르히하임 루도비쿠스 2세
874년 포르히하임 루도비쿠스 2세 상속의 대한 논의와 규정
887년 트레부르
889년 포르히하임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892년 포르히하임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대슬라브 전쟁 준비
896년 포르히하임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903년 포르히하임 루트비히 4세 반란을 일으킨 바벤베르크의 아델하이드 처형
907년 포르히하임 루트비히 4세 마자르족의 공격에 대한 소집
911년 포르히하임 콘라트 1세 선출
914년 포르히하임 콘라트 1세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에 전쟁 선포
919년 프리츨라어
926년 보름스 하인리히 1세
952년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레히 강의 목초지 오토 1세
961년 포르히하임 오토 1세
967년 라벤나 오토 2세
972년 크베들린부르크 오토 1세의 아들과 동로마 황녀의 결혼 축하
976년 레겐스부르크
978년 도르트문트 오토 2세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
983년 베로나 오토 3세 선출
985년 ?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제위 분쟁 종결
993년 도르트문트 오토 3세
1018년 니즈메겐 하인리히 2세 블라르딩겐 전투 준비
1030년 민덴 콘라트 2세
1066년 트레부르
1076년 보름스 하인리히 4세
1077년 아우크스부르크
1098년 마인츠 하인리히 4세
1105년 잉겔하임암라인 하인리히 4세
1119년 트레부르 하인리히 4세
1122년 보름스 하인리히 5세
1126년 슈파이어 하인리히 5세
1146년 슈파이어 콘라트 3세 제2차 십자군 원정 참여 결정
1147년 프랑크푸르트 콘라트 3세
1152년 도르트문트/메르제부르크 프리드리히 1세
1154년 고슬라어
1157년 브장송 프리드리히 1세
1158년 피아첸차 인근 프리드리히 1세
1165년 뷔르츠부르크 프리드리히 1세
1168년 밤베르크 프리드리히 1세 / 하인리히 6세
1178년 슈파이어 프리드리히 1세
1180년 겔른하우젠 프리드리히 1세 / 하인리히 6세 베스트팔렌 공국쾰른 대주교에 수여
1181년 에어푸르트 하인리히 6세 하인리히 사자공 추방
1188년 마인츠 하인리히 6세
1190년 슈베비슈할 하인리히 6세 하 로렌 공국 폐지
1193년 슈파이어 |하인리히 6세 리처드 1세의 재판
1196년 프랑크푸르트 하인리히 6세
1205년 슈파이어 필리프 폰 슈바벤
1213년 슈파이어 프리드리히 2세 1208년 밤베르크에서 살해당한 프리드리히의 숙부 필리프 폰 슈바벤을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
1235년 마인츠 프리드리히 2세
1273년 슈파이어 루돌프 1세
1287년 뷔르츠부르크 나사우 백작 아돌프
1309년 슈파이어 하인리히 7세
1338년 프랑크푸르트
1379년 프랑크푸르트
1356년 뉘른베르크 카를 4세 금인칙서
1384년 슈파이어
1389년 헤프 바츨라프 4세 헤프 조약
1414년 슈파이어 지기스문트
1444년 슈파이어 프리드리히 3세
1487년 슈파이어 프리드리히 3세
1487년 뉘른베르크 프리드리히 3세
1488년 에슬링겐 프리드리히 3세 슈바벤 동맹 결성
1495년 보름스 막시밀리안 1세 제국개혁, 슈바벤 전쟁 특별세
1496/97년 린다우
1497/98년 프라이부르크
1500년 아우크스부르크
1505년 쾰른 란츠후트 계승 전쟁 종전 중재
1507년 콘스탄츠
1512년 트리어/쾰른 10개의 제국관구 설치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
1521년 보름스 카를 5세 보름스 회의, 마르틴 루터 파문, 보름스 칙령
1522년 뉘른베르크
1522/23년 뉘른베르크
1524년 뉘른베르크
1526년 슈파이어 슈파이어 회의, 보름스 칙령 보류
1529년 슈파이어 슈파이어 회의, 보름스 칙령 재개, 재침례파 처벌 선고(Wiedertäufermandat)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2년 레겐스부르크 페르디난트 1세 카롤리나 법전 반포
1541년 레겐스부르크
1542년 슈파이어
1542년 뉘른베르크
1543년 뉘른베르크
1544년 슈파이어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임시협정
1550/51년 아우크스부르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556/57년 레겐스부르크
1559년 아우크스부르크
1566년 아우크스부르크
1567년 레겐스부르크
1570년 슈파이어 군제 개혁
1576년 레겐스부르크
1582년 아우크스부르크
1594년 레겐스부르크
1597/98년 레겐스부르크
1603년 레겐스부르크
1608년 레겐스부르크
1613년 레겐스부르크
1640/41년 레겐스부르크
1653/54년 레겐스부르크 페르디난트 3세 마지막 제국폐회결의(Jüngster Reichsabschied / recessus imperii novissimus)
1663년-1806년 이후로 레겐스부르크 시청에서 영구적으로 회의를 가짐

6.3. 사법부

목적 도시
제국최고재판소 프랑크푸르트 (1495년 ~ 1497년)
보름스 (1497년 ~ 1502년, 1509년 ~ 1520년)[55]
아우크스부르크 (1504년 ~ 1509년)
뉘른베르크 (1520년 ~ 1524년)
에슬링겐 (1524년 ~ 1526년)
슈파이어 (1511년, 1527년 ~ 1689년)[56]
베츨라어 (1689년 ~ 1806년)
제국궁정원 (1497년 ~ 1806년)

7.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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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의 대관식 궁정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관직들은 메로빙거 왕조프랑크 왕국에서 유래했다. 이걸 '궁정직(Hofamt)'라고 해서 원래는 왕실의 잡무를 처리하는 관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에게만 한정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명예직으로 발전했다. 가장 대표적인 궁정직에는 재무감, 원수, 지배장, 집사장이 있었고 나중에 대재상이 여기에 5번째로 추가됐다.

궁정직의 명칭과 실제 업무는 거의 상관이 없으며 귀족들을 위한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 재무감(Kämmerer)은 원래 왕의 개인시종으로, 왕의 신뢰를 받아야만 임명될 수 있었던 자리로 재정과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원수(Marschall)는 왕의 마굿간과 군마를 관리하던 관직이었다. 그러나 기사와 기병대가 점점 증가함에 따라 나중에는 군대 지휘관이 되었다. 지배장(Truchsess)은 왕의 식탁을 전담하던 자리였는데 나중에는 궁정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격상됐다. 집사장(Mundschenk)[57]은 제후가 마시는 포도주와 음료를 책임지던 자리로 프랑크 왕국 이후부터는 황실 포도원 전체를 관리했다.[58]

궁정직은 제국 초창기만 하더라도 그런대로 제국의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전담했지만, 10세기 경부터는 오직 최고위 귀족들만 오를 수 있는 직위가 되었다. 원래의 술 따르기, 마굿간을 관리하기 등 잡무를 처리하던 역할은 아예 사라지고 거대한 권력이 따르는 명예스러운 자리가 되었던 것. 중세 중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중요한 궁정직들은 선제후들이 채갔다. 이 선제후들이 가져간 궁정직들을 '고위직(Erzämt)'라고 부른다. 반면 이보다 권세가 낮은 궁정직들은 하급 귀족들에게 수여되어 세습되기도 했는데, 이건 '세습직(Erbamt)'라고 한다.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된 궁정직이 고위직과 그보다 격이 낮은 세습직으로 갈라진 것이다.

고위직은 오직 선제후나 그에 준하는 대귀족들만 오를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자 궁중직들 중 최상위 직위였다. 기존의 잡다구레한 업무들은 죄다 사라지고 명예직이 되었지만, 이 고위직들에게 딱 하나 남은 기존 업무가 있었으니 바로 로마왕 대관식에서 황제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대관식에서 황제의 시중을 드는 것은 가문에 남을 명예였댜.
파일:800px-Armoiries_archi-sénéchal_du_Saint-Empire.svg.png 파일:Armoiries_archi-maréchal_du_Saint-Empire.svg.png 파일:Armoiries_archi-chambellan_du_Saint-Empire_(simple).svg.png 파일:Erzschatzmeister.png
고위지배장 고위원수 고위재무감 고위재화감
3명의 성직 선제후와 4명의 세속 선제후들 모두 여러 개의 고위직들을 나눠 가졌다. 마인츠 대주교는 '게르마니아 관할 대주교', 쾰른 대주교는 '이탈리아 관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는 '갈리아 관할 대주교' 자리를 차지했다. 팔츠 선제후는 고위지배장을, 작센 선제후는 고위원수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고위재무감을, 보헤미아 국왕은 고위집사장을 하나씩 맡았다. 그 외에도 고위수렵감(Erzjägermeister)은 차지했지만 선제후는 되지 못한 마이센 변경백, 고위기수(Reichsbannerträgers)를 차지한 뷔르템베르크 공작이 있었다.[59]

선제후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여부에 따라 고위직을 뺏기거나 새로 얻기도 했다. 예를 들어 팔츠 선제후가 1623년 황제에게 반기를 들자 황제는 팔츠 선제후가 갖고 있던 고위지배장을 박탈하고 황제파에 서있던 바이에른 공작에게 양도했다. 팔츠 선제후는 대신 30년 전쟁이 끝나고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고위재화감' 자리를 새로 얻었다. 170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바이에른이 잠시 고위지배장 직위를 박탈당하며 팔츠에게 돌아갔지만, 1714년에 다시 바이에른에게 반환됐다. 이후 1777년 팔츠 계열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바이에른을 차지하며 고위지배장 자리다툼은 종결된다.

궁정직에는 고위직 말고도 '세습직'도 있었다. 고위직에 비하면 아무래도 명예나 권력이 떨어지지만 나름 굉장히 명예로운 자리였고 귀족들은 감지덕지하며 대대로 세습했다. 세습원수, 세습재무감, 세습재화감, 세습집사장, 세습기수, 세습지배장, 세습취사장, 세습수렵감, 세습종마감, 세습수위관 등 다양한 세습직들이 있었다. 격이 고위직에 미치지는 못했고 수도 고위직보다 훨씬 많았다.

이 세습직을 맡은 귀족들은 로마왕 대관식에서 황제를 시중들었다. 세습원수는 대관식에서 양 옆으로 귀리를 실은 말을 타고선 황실보검을 운반했다. 세습재무감은 제국홀과 물주전자를 들었으며 천으로 황제의 손을 닦아주었다. 세습집사장은 포도주가 담긴 은잔을 황제에게 전달했고 세습지배장은 제국보주를 전달했다. 대관식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관식 만찬에서 구운 돼지고기 한 조각을 황제에게 바치는 것 역시 세습지배장의 몫이었다. 세습기수는 제국기와 제국기수기를 운반했고, 세습재화감은 황제관을 운반했다.

8.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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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 대관식이 치러지던 아헨 대성당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동로마의 정교회처럼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였다. 오히려 동로마의 경우 나라의 중심이 되는 국교라는 입장일 뿐이지만,[60] 신성 로마 제국은 애초에 나라의 시작부터가 교황이 (서)로마 황제관을 준 것이 계기이며, 심지어 이 당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가 위조임이 발각되어서 교황이 없으면 신성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예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톨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가톨릭교회가 우위인 관계였다. 현대인의 시각이야 어떻든, 당시 서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이며, 동방의 정교회 제국인 동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서방의 가톨릭 제국이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전까지 가톨릭은 제국의 유일한 공인 종교였으며 특히 황제들은 단 한 번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그만큼 가톨릭은 제국에게 중요한 의미였으며 가톨릭은 곧 나라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등장은 이런 제국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1555년 루터파가 공인되었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더 엄격한 칼뱅파마저도 공인됐다. 하지만 이 2개의 개신교 종파를 제외한 재침례파, 아르미니우스주의 같은 나머지 개신교 종파들은 얄짤없이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의 종교가 곧 영방의 공식 종교라고 선포했다. 즉 영지에 살고 있는 신민들이 무슨 교파를 믿고 있든말든 상관없이, 제후가 다른 교파를 믿고 있다면 곧 그 영지의 공식 종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후와 신민들의 교파가 같았다면 별 논란이 없었지만 다른 경우에는 극심한 혼란을 초래했다. 애초에 30년 전쟁도 바로 이러한 대립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보헤미아 국민들은 개신교를 믿었는데 국왕은 가톨릭을 강요했기 때문 . 결국 30년 전쟁이 끝나고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1624년 1월 1일'에 그 영지가 믿었던 종교를 그 영지의 종교로 삼는다고 밝혔다. 이 이후로 제후와 신민 사이의 교파 차에 의한 갈등은 어느 정도 일단락됐다.

이론상으로는 가톨릭 제후 아래의 개신교 신민들은 모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잇었으며 개신교 제후 아래의 가톨릭 신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영지의 공식 종파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당과 공공장소에서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 개인 예배당이나 사적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이론적으로는 믿는 종파의 차이로 차별을 받는 일은 없어야했고, 자의반 타의반이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구적인 분열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다만 그렇다고 차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제국은 해체될 때까지 종교 갈등에 시달렸고 권력자들은 제 사익을 위해 종교를 빌미삼아 수많은 갈등을 일으켰다.[61]

온 유럽에서 탄압받던 유대인들도 제국에 소수 존재하긴 했다. 허나 어디에서 그랬듯 이들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황제는 이들을 보호할 권리와 조세권을 내세우며 유대인 보호에 나섰지만 썩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소수의 유대계 자본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차별을 일상적으로 받으며 좋지 못한 삶을 살았다. 종교 갈등이 터지면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모두 얻어터지는 쪽도 이쪽이라, 제1차 십자군 원정이나 1500년대의 종교전쟁 때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9.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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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격돌한 이탈리아 전쟁[62]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제국 최대의 라이벌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였으며 그 국제적 위상, 국력도 제국에 전혀 밀리지 않는 유럽 대륙의 양대 패권국이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1,000년에 걸친 신성 로마 제국의 존속 기간 거의 대부분 동안 황제의 최대 라이벌이자 적국이었다.

중세 초기부터 이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은 중유럽과 서유럽의 수많은 영지와 봉토들을 두고 경쟁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특히 부유한 부르고뉴 지방을 두고 양측이 격돌하는 경우가 잦았고 둘은 견원지간처럼 서로 으르렁댔다.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황제와 교황 사이에서 충돌한 서임권 분쟁에서도 프랑스는 교황 편을 들었다. 프랑스는 교황을 아비뇽으로 데려와 자기 입맛대로 휘두르며 황제의 위상을 약화시키려 시도했으며 시시건건 제국에게 딴지를 걸었다. 특히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영국을 꺾고 국력을 키움에 따라 완벽한 라이벌 구도가 잡혔다.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는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온갖 이유로 충돌을 거듭했다.[63]

프랑스와 제국의 충돌은 1618년 벌어진 30년 전쟁으로 정점을 찍었다. 프랑스는 전쟁 내내 반제국파들을 원조했고, 전쟁 후반에는 아예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도 하에 직접 참전해서 제국 전역을 유린했다.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제국은 어쩔 수 없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승인하며 반쯤 사망했고, 반대로 승전국인 프랑스는 그 기세가 승천했다. 그럼에도 제국과 프랑스는 계속 대립 관계를 이어가다가 18세기 중반 동맹의 역전7년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을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서로 같은 편이 된다. 800년간 이어진 대립에서 벗어나 동맹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몇 십년간 제국과 프랑스는 동맹 관계로 남았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 동맹도 무너졌다. 군주제였던 합스부르크 황가는 프랑스 공화주의를 혐오했고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시킨 것 때문에 둘 사이는 최악이었다. 제국은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깨졌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 이후부터는 정말 일방적으로 털려나갔다. 프랑스는 제국의 최대 적국이었으며 나폴레옹이 프란츠 2세를 협박하면서 황제 퇴위를 종용했기에 결국 제국이 해체되는 결정적인 이유도 프랑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딱히 나쁘지 않았다. 제국의 최대 적국인 프랑스와 사이가 안좋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북방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에 진저리치는 것도 마찬가지였기 때문. 제국은 중세 내내 영국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허나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이후, 영국이 빠르게 개신교로 개종하자 이 관계에도 균열이 갔다. 가톨릭 황제는 종종 영국을 개신교도 촌놈이라 부르며 경멸했고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제국민들 상당수는 영국에 호의적이었으며, 특히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영국과 손을 잡는 경우도 많았다.[64] 제국 말기에는 7년 전쟁동맹의 역전으로 영국과 동맹을 끊었으나,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부터는 다시 손을 잡고 멸망할 때까지 동맹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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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 제2차 빈 공방전
제국 서쪽의 적으로 프랑스 왕국이 있었다면 동쪽의 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래로 오스만 제국은 언제나 제국의 가장 위협적인 적수들 중 하나였다. 같은 종교를 공유한 프랑스와는 달리,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은 아예 논외의 존재였다.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재위 기간 내내 오스만과 전쟁을 벌이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고 오스만 제국은 2차례나 제국의 수도인 빈을 포위하며 제국을 위협했다. 특히 제국은 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하려는 오스만에 맞선 최전선의 방파제였고, 둘 사이는 도저히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쉴레이만 대제는 제국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아 당시 황제였던 카를 5세를 '그 스페인 왕자'라고 부르며 조롱한 걸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와는 관계가 애매했다. 이탈리아 북부는 명목상으로 제국의 영토였으며 황제는 언제나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등 부유한 북이탈리아 도시들을 장악하길 원했다. 반대로 북이탈리아 도시들은 황제의 영향력을 떨쳐내기 위해 서로 똘똘 뭉쳐 저항했고 사실상의 독립과 자치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이탈리아 중간에 떡하니 위치한 교황령의 존재 때문에 이탈리아 통제에 더 애를 먹었다. 교황은 제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뒤틀며 제국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했고 이탈리아는 황제의 통치 하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남유럽의 또다른 강대국인 스페인과는 별 충돌이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애초에 같은 가톨릭일 뿐더러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아 크게 충돌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특히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위를 상속받은 이래로 스페인에 제국과 같은 압스부르고 왕조가 들어섰고, 제국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30년 전쟁에 제국의 편에 서서 원군을 보내준 것도 스페인이었다. 물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며 관계는 악화되지만 나폴레옹 전쟁 때는 잠시 동맹을 맺기도 했다.

의외로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존재를 인지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딱히 별다른 외교적 교류는 없었지만... 빈의 제국정부는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된 직후 미국에 무역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황제 요제프 2세가 미국을 승인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정식 외교 관계도 수립되지 못했다. 그러나 1797년 프로이센 왕국과 국교를 수립했고 같은 해에 황제 프란츠 2세트리에스테에 미국 영사관 건립을 승인했다. 물론 국가 차원의 승인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황제 개인이 미국의 존재를 인정했던 것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 미국이 서로 국교를 맺은 적은 없고, 제국의 영방국가들 차원에서 몇몇이 미국과 국교를 맺긴 했다.

9.1. 프랑스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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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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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구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는 추정할 뿐이며 그마저도 정확하지는 않다. 중앙행정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제국이었다보니 제대로된 인구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 그래도 학자들이 추정해보니 카롤루스 대제 시절에 인구가 약 2,0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유럽의 인구는 점진적으로 증가했지만, 흑사병의 창궐과 제국 영토의 축소로 인해 1618년에도 인구가 그대로 2,000만 명이었다. 게다가 30년 전쟁으로 인구가 대량 감소하면서 100년 후인 1750년까지도 제국의 인구는 여전히 2,0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1800년 멸망하기 직전 제국의 인구는 약 2,800만 명 언저리였다.

1600년대 초 기준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535만 명(개중 보헤미아 왕국이 300만명), 작센 선제후국은 120만 명, 바이에른 공국은 80만 명, 팔츠 선제후국은 60만 명,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35만 명, 마인츠 선제후국, 쾰른 선제후국, 트리어 선제후국 3개를 모두 합쳐서 약 30~40만 명 정도 됐다.

제국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 역시 제국 내에 막대한 신민을 거느렸다. 압스부르고 가문은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다음으로 많은 신민들을 보유했는데, 1600년대 초 부르고뉴밀라노 공국에 사는 300만 명이 넘는 제국민들이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소속이었다.

1700년 당시의 제국에는 2,000만 명이 살았는데 개중 500만 명이 이탈리아 왕국에 살았다. 1800년에는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도 약 2,800만~2,9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한다. 개중 1,260만명은 오스트리아인들과 프러시아인들이었다.

17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중부 유럽은 약 1,900만~2,000만명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특히, 당시 중부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50,000명)이자[65] 경제적•지성적 중심지(빈 대학교, 1365년 설립)였던 과, 정치적(1582년 황제 루돌프 2세의 거주지)•문화/예술적•지성적 중심지(프라하 대학교, 1348년 설립)였던 프라하, 상업적 교차로인 쾰른 (인구 40,000명) 등을 수용해, 유럽의 핵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1700년대에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보헤미아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합해서 인구가 약 2,800만 명 정도였다. 65개의 성직 제후, 수도원 등 성직 권력이 제국 전체 토지의 14%와 전체 인구의 12%를 보유했다. 45개의 제후국들이 80%의 토지와 80%의 인구를 보유했다. 60개의 제국백이 3%의 토지와 3.5%의 인구를 보유했다. 60개의 자유도시들이 1%의 토지와 3.5%의 인구를 보유했다. 수백여개의 제국기사들은 남은 2%의 토지와 1%의 인구를 보유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를 연구하는 독일 역사가들은 보통 1871년과 1914년의 독일 인구를 이용해 제국의 인구를 역산한다. 1870년대 독일 국경을 기준으로 계산한 추정치에 따르면 제국의 인구는 1600년경 약 1,500만 명 ~ 1,700만 명 언저리였고 30년 전쟁을 거치며 1650년에 1,000만 ~ 1,300만 명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라 제국의 인구를 조금 더 높게 잡는 사람들도 있다. 30년 전쟁 이후 인구 2천만에서 1600만 명 정도로 감소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1800년 제국의 인구에는 큰 이견이 없어서 약 2,800~2,900만 명 정도라고 한다.[66]

11.1. 시대별 도시 규모 순위

목적 도시
1050년 레겐스부르크 40,000명. 로마 35,000명. 마인츠 30,000명. 슈파이어 25,000명. 쾰른 21,000명. 트리어 20,000명. 보름스 20,000명. 리옹 20,000명. 베로나 20,000명. 메츠 16,000명. 피렌체 15,000명.
1300년~1350년 밀라노 120,000명. 피렌체 110,000명. 제노바 90,000명. 프라하 77,000명. 쾰른 60,000명. 마르세유 40,000명. 베로나 40,000명. 파도바 35,000명. 에르푸르트 32,000명. 메츠 32,000명. 레겐스부르크 30,000명. 슈파이어 25,000명. 마인츠 24,000명. 아헨 21,000명. 마그데부르크 20,000명. 뉘른베르크 20,000명. 20,000명. 단치히 20,000명. 스트라스부르 20,000명. 보름스 20,000명. 뤼베크 15,000명.
1500년 밀라노 100,000명. 제노바 70,000명. 프라하 70,000명. 피렌체 50,000명. 쾰른 45,000명. 앤트워프 40,000명. 크레모나 40,000명. 뉘른베르크 38,000명. 아우크스부르크 30,000명. 만토바 28,000명. 뤼베크 25,000명. 브레슬라우 25,000명. 레겐스부르크 22,000명. 아우크스부르크 20,000명. 20,000명. 스트라스부르 20,000명. 파르마 19,000명. 마그데부르크 18,000명. 모데나 18,000명. 파비아 16,000명. 울름 16,000명. 함부르크 15,000명
1600년 밀라노 150,000명. 프라하 100,000명. 50,000명. 아우크스부르크 45,000명. 쾰른 40,000명. 뉘른베르크 40,000명. 함부르크 40,000명. 마그데부르크 40,000명. 브레슬라우 40,000명. 스트라스부르 25,000명. 뤼베크 23,000명. 울름 21,000명. 레겐스부르크 20,000명. 프랑크푸르트 20,000명. 뮌헨 20,000명.

12. 영향력

라틴 제국의 정식 국호인 '로마니아 제국('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로마 땅'의 제국)' 및 황제의 직함(임페라토르 로마노움, 로마 황제), 이탈리아인이 제작한 요안니스 8세 메달의 문구('로마인들의 왕이자 황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제국을 정식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 다만 신성 로마 황제는 교황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라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코무네의 폭도들처럼 동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황제 역시 로마 황제라고 본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옛 서로마 제국의 강역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국력은 옛 로마 제국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다보니 구 서로마 영토에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사실 국력 문제를 넘어서 이걸 인정해버리면 자기들의 지위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 헛소리로 치부하는 게 당연하지만 말이다.

제위는 교황이 인정한 것이었던 만큼 제국 그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국제적인 공식석상에서는 황제와 선제후를 상석에 앉히는 등 나름대로 예우는 해주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식의 이론을 펼쳐서 황제의 영향력이 자국으로 침투하는 것은 철저히 배제했다.[67]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국가들의 개김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런 무리한 발언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자연스럽게 황제 본인과 실질적인 봉건계약이 맺어져 있는 독일과 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서로마) 교황의 위엄이 닿지 않는 정교회 문화권에선 이 나라를 로마 제국의 후예로조차 보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서쪽에서 '서방인의 황제', 또는 '프랑크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까지는 인정하였으나 '로마인의 황제'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나라는 당연히 '로마'라고 불렸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를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대 로마 제국에서 단절없이 쭉 이어져 내려온 동로마 제국과 몇 백 년 후에 갑툭튀해서 로마 제국의 후예(심지어 로마 제국이 아직 동반부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를 자칭하는 "프랑크 족이 세운 왕국" 간의 정통성 차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봐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따라서 정교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신성 로마 제국이 '새로운 제국'일 수는 있어도 '로마 제국'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황제'였으니 의전서열은 다른 서유럽 왕들보다 위에 있었다. 16세기에 이반 4세루스 차르국이 서유럽과 교류를 시작했을때도 의전에서 1등급 대우를 받은 유럽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또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라클리오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한 편지, 경전 쿠란의 여러 챕터들 중 하나인 '로마장'의 존재, 룸 술탄국이라는 국명,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파르티아사산 왕조의 지배 시절부터 수백년 간 자신들과 투닥거린 동로마 제국을 당연히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신성 로마 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 다만 십자군을 비롯한 서유럽인을 '프랑크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볼때 '프랑크'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68]

13. 평가 및 연구사

13.1. 19세기와 20세기 초의 평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1806년 제국 멸망 이후 레오폴트 폰 랑케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등을 중심으로 성립된 '근대 역사학'과, 19세기의 지배적 조류였던 민족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랑케와 드로이젠은 근대 초기까지의 도덕적, 수사학적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근대적 과학으로서 역사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당대를 휩쓸었던 민족주의의 광풍에는 그들도 빗겨갈 수 없었다. 19세기 역사가들은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추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국민 국가의 체제를 정당화하고자 했고, 신성 로마 제국 역시 전적으로 근대 국민 국가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이에 따라 강력한 황제들의 시대로 여겨졌던 중세 제국은 독일 민족의 위대한 기원으로 여겨진 반면, 19세기의 역사적 과제였던 국민 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던 초기 근대 제국에 대한 평가는 극히 부정적이었다. 19세기 독일 중세사 서술을 대표하는 빌헬름 폰 기제브레히트의 독일 황제 시대의 역사(Geschichte der deutschen Kaiserzeit, 1855-1886) 역시 이러한 낭만화된 중세 제국에 대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특히나 드로이젠은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을 주도하여, 1848년 혁명의 좌절 이후 하인리히 폰 쥐벨,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등과 같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적, 보수적 역사가들과 함께 보루시아학파(Borussische Schule) 혹은 프로이센학파라고 하는 프로이센 중심적인 독일사 서술 경향을 발전시켰다.[69] 1857년 창간된 학술지 프로이센 연보(Preußische Jahrbücher)를 중심으로 발전한 보루시아 학파는 소독일주의적 독일 통일 해법을 지지하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역사적 '소명'을 강조하였고, 자연스레 프로이센의 전통을 예찬하였다. 1855년부터 1886년까지 출간된 드로이젠의 프로이센 정치사(Geschichte der preußischen Politik), 1879년부터 1894년까지 쓰여진 트라이치케의 미완성작인 19세기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im neunzehnten Jahrhundert)는 이러한 역사 서술의 정점이었다.

또한 프로이센학파의 쥐벨은 1859년 한 강연에서 기제브레히트가 중세 황제들의 이탈리아 정책을 독일 민족의 이상을 실현한 것으로 파악한 것을 비판하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를 비롯한 슈타우펜 왕조의 황제들이 독일을 등한시하면서 이탈리아에만 집중한 것은 독일 민족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비국가적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쥐벨의 주장에 대해 라인란트 지역의 파더보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가톨릭 역사가 율리우스 폰 피커는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민족 국가가 아닌 크리스트교 보편 제국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이로부터 발발한 쥐벨-피커 논쟁(Sybel-Ficker-Streit)은 신성 로마 제국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일 통일 당시 소독일주의대독일주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싸움이기도 했다. 쥐벨은 프로이센 중심적인 개신교 민족주의 관점에서 중세 제국을 근대 국민 국가를 기준으로 평가하였고, 제국이 국민 국가로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이는 결국 당시 독일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적 국민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반면 피커는 중세 제국을 오스트리아 중심적인 가톨릭 보편주의 관점에서 중세 제국을 크리스트교 보편 군주제로 이해하였고, 여기에는 한편으로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대독일주의적이고 연방주의적인 통일안을 지지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후 현실 정치적으로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소독일주의 통일 방안이 관철되면서 성립된 독일 제국에서는 쥐벨이 주도하는 보루시아 학파의 역사 서술이 주류를 이루었고,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서도 근대 국민 국가를 기준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우세했다. 게오르크 폰 벨로브(Georg von Below, 1858-1927)의 중세 독일 국가(Der deutsche Staat des Mittelalters, 1914)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데, 벨로브는 중세 제국을 근대 국가와 동일시했다.

중세 제국 연구가 중세 황제들의 강력한 권력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제국의 쇠퇴기로 여겨졌던 대공위시대 이후 제국의 역사는 연구 관심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특히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제국은 완전히 껍데기만 남은 유명무실한 것으로 이해되면서 중세 이후 독일사는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프로이센 및 각 영방의 역사와 같은 개별 주제들에 대한 연구만 이루어졌고, 제국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강력한''절대주의'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분열된 독일 민족을 구원한다는 현재까지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프로이센 중심적인 독일사 내러티브는 바로 19세기 프로이센 민족주의 역사학의 산물이었다.

피커의 입장을 계승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성향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프로이센 중심적 역사관에 이견을 제기한 소수 세력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대표하는 하인리히 폰 스르비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적으로 보는 전독일적 역사관을 제시하였고[70],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제를 중심으로 한 신성 로마 제국을 그 기원으로 보고자 했다. 이는 결국 프로이센 중심적 역사관의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 중심적 역사관이기도 했다.

13.2. 20세기 중반 이후의 변화

13.2.1. 오토 브루너의 혁신

1939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역사가 오토 브루너의 저작 영방과 통치(Land und Herrschaft)는 제국을 근대 국민 국가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연구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개시한 문제작으로, 그동안의 독일 역사학에서 팽배했던 국가 중심적, 근대 중심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71]

브루너는 공적 영역을 관할하는 국가와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의 분리를 전제하는 '분리적 사고(Trennungsdenken)'는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시민 사회의 산물이며, 벨로브를 비롯한 19세기 역사학자와 법학자들이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중세 독일사를 이해하고자 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브루너는 중세사를 근대의 언어가 아닌 중세 사료에 사용된 언어를 중심으로 재구축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세 후기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등 남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영방(Land)의 형성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브루너 이전의 중세사가들은 중세 후기 독일의 영방을 황제의 권력이 분할된 것으로 이해했다. 반면 브루너는 영방의 기원을 좀 더 원초적으로 접근했다. 브루너는 우선 중세의 정치 질서를 공적인 국가 권력과 사적인 시민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근대 국가와 다르게 이러한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통합적인 지배 형태를 가리키는 Herrschaft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세 후기 영방 군주권(Landesherrschaft)의 기원을 고대 게르만의 가부장 지배(Hausherrschaft)에서 찾는데, 그 핵심은 가부장의 구성원에 대한 보호(Schutz)와 구성원의 가부장에 대한 충성(Treue)이라는 상호 의무 관계에 있다고 파악한다. 브루너는 중세 장원제(Grundherrschaft)와 영방 군주권(Landesherrschaft)는 이러한 가부장적 유대 관계와 상호성이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영방 군주(Landesherr)와 영방 공동체(Landgemeinde)의 관계는 협력적이고 평화적이다. 이는 중세 후기 독일 영방 제후들의 성장을 황제와의 갈등이라는 '위로부터의' 차원이 아닌, 개인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아래로부터의' 차원에서 접근하였다고 할 수 있다.

브루너는 사상적으로 오토 폰 기르케로 대표되는 독일 법학계의 게르마니스텐 학파[72]카를 슈미트를 비롯한 독일 보수주의의 반근대주의적 성향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브루너는 근대 자유주의 시민 사회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전근대 유럽의 귀족적인 농촌 질서에 강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근대 자유주의를 비난하며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이념을 내세운 나치의 성향과 일치하는 바가 있었고, '영방과 통치'의 초기판에는 Volk를 비롯한 나치의 언어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사회를 현대인의 개념과 언어가 아니라 당대의 언어를 바탕으로 현재와의 이질성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 브루너의 지적은 현재까지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브루너의 주요 관심사는 제국 그 자체라기보다는 귀족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의 농촌 공동체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너의 연구는 근대 국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근대 통치의 인격적이고 협력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중세 헌법사의 사회사적인 설명 방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으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루너는 초기 근대로 시야를 넓혔는데, 17세기 오스트리아 지방 귀족인 볼프 헬름하르트 폰 호베르크(Wolf Helmhardt von Hohberg, 1612-1688)의 전기를 다룬 귀족적 농촌생활과 유럽 정신(Adeliges Landleben und europäische Geist, 1949)은 전후 초기 근대사 연구의 시초격이 되는 저작이기도 하다.[73][74]

13.2.2. 중세 제국

13.2.2.1. 텔렌바흐 학파와 게르트 알트호프
여기에 이어서 1945년 이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게르트 텔렌바흐(Gerd Tellenbach, 1903-1999)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프로소포그래피(Prosopography)' 연구는 중세 제국에 대한 관점 변화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따. 프로소포그래피란 특정 집단에 속한 인물들을 목록화하는 역사 연구 방식인데, 텔렌바흐와 그의 제자들은 중세 제국의 귀족 집단의 프로소포그래피 연구를 바탕으로 귀족층 내부의 관계에 주목했다. 이들의 프로소포그래피에 기초한 사회사적 연구는 중세 제국의 귀족들이 혈연, 혼인, 후원 등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음을 밝혔고, 이러한 인적 관계 속에서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즉 이는 중세 제국의 지배층이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세 제국의 정치를 제후들 간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묘사하였던 고전적인 견해는 근본적인 도전에 처하게 되었다.

텔렌바흐의 제자인 하겐 켈러(Hagen Keller, 1937-)와 텔렌바흐의 제자 카를 슈미트(Karl Schmid, 1923-1993)의 제자인 게르트 알트호프(Gerd Althoff, 1943-)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중세 제국의 정치 질서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켈러와 알트호프는 오토 왕조 시대를 주로 다루면서 이들의 통치가 고대의 primus inter pares(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귀족들과의 합의와 협력이 중요하였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세의 갈등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위기 상황이었다. 켈러와 알트호프는 중세 사회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중세 사회의 갈등 해결에 있어 상징적 커뮤니케이션(Symbolische Kommunikation)의 중요성을 부각하였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몸짓이나 발화, 특정한 행동, 의례와 같은 비언어적 행위를 매개로 한 소통의 형태를 의미하는데, 켈러와 알트호프는 체계적이고 문서화된 법적 규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중세 사회에서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통한 권력의 시각적 '수행(Performance)'이 질서 유지와 갈등 해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특히 알트호프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 중에서도 '의식(Ritual)'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중세 제국의 정치에 있어 선서나 서약, 복종(deditio), 연회, 대관식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의식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탐구하였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자극을 받아 베른트 슈나이트뮐러(Bernd Schneidmüller, 1954-)는 중세 제국의 정치 질서를 합의 통치(Konsensuale Herrschaft)로 개념화하였는데, 이는 현 시점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여겨진다.
13.2.2.2. 페터 모라브와 중세 후기 연구
또다른 중요한 자극은 1970년대에 페터 모라브(Peter Moraw, 1935-2013)와 폴커 프레스(Volker Press, 1939-1993)가 제국사와 독일사(각 영방)를 분리하여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어졌다. 모라브와 프레스는 기존의 제도 및 행정 중심의 헌법사 연구에 사회사적 접근을 결합하여 제국과 영방의 발전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제국사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들은 제국의 중심에 황제를 두고, 황제와 영방 제후들 간의 인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제국의 정치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다.

또한 모라브는 근대 초기와 더불어 소외된 시기였던 14~15세기의 중세 후기를 재조명하는 데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모라브는 중세 후기를 단순히 '쇠퇴', 혹은 '위기'로 규정하던 기존의 관점을 비판하고, 이 시기가 중세 전성기의 발전을 보존하여 결실을 맺은 시기이자 근대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전환기라고 규정하였다. 모라브는 프로소포그래피 방법론을 수용하면서 '헌법사의 사회사적 전환'을 추구했는데, 그는 중세 후기 제국의 정치 질서를 황제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인적 관계의 네트워크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중세 후기 제국의 공간적 구조를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 관계의 측면에서 접근하면서서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에어푸르트 등을 중심으로 한 남부 독일을 '왕과 가까운(Königsnah)' 지역으로, 경쟁 왕조와 선제후의 영토를 '왕과 먼(Königsfern)' 지역으로 개념화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1985년 출간된 모라브의 개방형 헌법에서 구조적 공고화까지 1250-1490(Von offener Verfassung zu gestalteter Verdichtung 1250-1490)는 현재까지도 표준적인 중세 후기 개관으로 여겨지는 저작으로, 여기서 모라브는 중세 후기 독일사를 제국의 헌법 구조가 완성되는 구조적 공고화(Gestaltete Verdichtung)의 시기라고 파악했다. 이는 특히 프리드리히 3세[75] 시대를 거치며 한편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권력이 확립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회를 중심으로 한 제국신분(Reichsstände)이 대두하면서 황제와 제국신분 간의 제도화된 이원 체제(institutionalisierter Dualismus)가 확립되는 것을 의미했다. 1495년 보름스 궁정 회의로부터 제국의회가 발전한 것은 그 결실이었다.

13.2.3. 초기 근대 제국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게르하르트 외스트라이히를 중심으로 초기 근대가 독립적인 시대 영역으로 부각되면서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초기 근대 제국에 대한 관점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뮌헨 대학교에 재직하던 가톨릭 자유주의 역사 서술의 거장 프란츠 슈나벨[76]의 제자들(하인리히 루츠, 카를 오트마르 폰 아레틴, 프리드리히 헤르만 슈베르트, 폴커 프레스)과 본 대학교의 막스 브라우바흐와 그의 제자인 콘라트 레프겐을 비롯한 바이에른과 라인란트의 역사가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구제국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한 1세대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연구를 기점으로 약점으로만 여겨졌던 제국의 분열은 연방주의, 다원성, 다중심성의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부터 점차 초기 근대 제국을 독자적인 정치적 단위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점차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치의 파국을 겪은 새로운 세대의 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은 더이상 제국을 근대 국민 국가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제국의 질서가 당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국의회를 비롯하여 제국관구, 제국최고재판소, 제국궁정원과 같은 제국의 제도들이 심층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제국관구는 특히 슈바벤과 프랑켄, 라인란트와 같은 대규모 영방 국가가 부재했고 황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던 지역에서 자체 회의 기구 및 제도를 기반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부각되었다.[77] 제국최고재판소과 제국궁정원 역시 제후들 뿐만 아니라 각 영방의 주민들이 제후의 폭정에 대해 그들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기관으로서의 중요성이 조명되었고, 이는 빈프리트 슐체가 강조하였듯이 제국에 갈등의 사법화 및 법치의 전통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과도한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제국은 탈민족적 대안으로도 조명되기 시작했다. 또한 유럽 연합의 성립과 같은 정치적 변화는 국민 국가를 역사의 종착점으로 여겨왔던 기존의 관점에 변화를 가져왔고, 페터 클라우스 하르트만을 비롯한 몇몇 역사가들은 유럽 연합의 상당한 부분이 신성 로마 제국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국의 방어 체계는 NATO와 유사하며, 제국의회 및 제국관구, 제국최고재판소과 같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도들과 유럽 연합의 유럽 의회, 유럽 사법 재판소와 같은 제도들 간에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였다.
13.2.3.1. 카를 오트마르 폰 아레틴
카를 오트마르 폰 아레틴은 초기 근대 제국의 재평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사가였다. 1967년 출간된 그의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 신성 로마 제국 1776-1806: 제국헌법과 국가주권(Heiliges Römisches Reich 1776-1806: Reichsverfassung und Staatssouveränität)은 제국 최말기만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구제국을 독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 첫 시도였다. 아레틴이 구제국을 연구하려고 하자 스승인 슈나벨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그의 학문적 경력을 차단하려고 하였고, 레오 유스트라는 역사가는 그의 관점이 터무니없다고 보면서 교수자격논문 지도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레틴은 방대한 사료 작업을 통해 구제국의 헌법 및 제도가 안정적인 법적 질서를 형성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유럽의 권력 균형 및 평화를 유지하는 질서이자 제국 내부의 정치적, 교파적 권력 균형을 유지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중요한 정치 체제로 기능하였음을 강조했다. 1990년대에 출간된 아레틴의 구제국 1648-1806(Das alte Reich 1648-1806) 3부작[78]은 이러한 논의를 종합한 저작으로, 초기 근대 제국 연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아레틴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제국의 헌법 질서를 황제를 중심으로 한 계서적인 봉건적 질서로 이해한다. 그는 레오폴트 1세의 시대를 전면적으로 재조명하면서, 레오폴트 1세가 오스만 제국루이 14세의 프랑스라는 양방향의 위협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대처하면서 성직 제후와 군소 영방의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켰고, 이로써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계서적이면서도 연방적인 질서를 보존하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레오폴트 1세의 후계자인 요제프 1세카를 6세 시대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국제 무대에서 제국의 이익이 아닌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우선시하는 강대국 정치(Großmachtpolitik)를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제국 헌법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작센(폴란드), 하노버(영국), 헤센-카셀과 포어포메른(스웨덴), 홀슈타인과 올덴부르크(덴마크) 등 독일 제후들이 다른 주권 국가의 군주로 등극하면서 제국의 계서적 질서는 더욱 흔들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대적 국가 주권을 추구하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의 등장은 결정적이었다. 바이에른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프로이센 전통에 부정적이었던 아레틴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요제프 2세에게는 그보다도 더 비판적이었다. 아레틴은 요제프 2세가 제국 헌법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황제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 제국의 결정적인 몰락 원인이라고 보았다. 특히 오스트리아 내의 주교령을 축소하고 '세속화'하는 조치는 황제와 성직 제후들과의 연합을 파괴함으로써 레오폴트 1세가 구축한 성직 제후와 군소 영방을 기반으로 하는 황제의 권력 기반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13.2.3.2. 페터 블리클레
한편 전후 초기 근대 사회사 연구를 대표하는 페터 블리클레는 브루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전근대 구유럽 사회를 대단히 이상적으로 파악하면서도, 귀족에 초점을 맞춘 브루너와 달리 특히 오버슈바벤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독일 농촌 공동체의 자율성에 주목하였다. 블리클레는 이들을 당대의 용어이기도 한 '평민(Gemeiner Mann)'으로 제시하는데, 그는 구제국의 영방 대의체(Landschaften im alten Reich, 1973)에서 16세기 이후 남서부 독일을 중심으로 농민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신분제 의회의 유형인 '영방 대의체(Landschaft)'가 나타났음을 조명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독일 농민전쟁들을 '평민 혁명'으로 규정한 1525년의 혁명(Die Revolution von 1525, 1975)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Landschaft의 형성에 있어 독일 농민전쟁의 여파를 강조했다. 즉 독일 농민전쟁은 귀족들에게 진압당하였지만, 그 중심지였던 남서부 독일의 정치 지형은 농민들의 정치적 대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측면에서 독일 농민전쟁을 평민 혁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그는 공동체 종교개혁(Gemeindereformation, 1985)이라는 중요한 저작에서 종교개혁의 확산 과정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이론들은 초기 근대 독일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블리클레의 이론은 공동체주의(Kommunalismus)라고 하는데, 이는 초기 근대 유럽의 정치와 사회에서 도시와 농촌의 공동체가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한다. 블리클레는 주로 스위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국가 형성에 있어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힘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접근은 막스 베버오토 힌체로 대표되는 위로부터의(Top-Down) 국가 형성론에 대하여 아래로부터의(Bottom-Up) 국가 형성론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13.2.3.3.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
한편 1990년대 이후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게오르크 슈미트는 제국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해석을 주도했다.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의 제국을 보는 관점은 우선 30년 전쟁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1992년 출간한 개설서인 30년 전쟁(Der dreißigjährige Krieg)에서 30년 전쟁을 기존의 지배적인 견해인 종교 전쟁으로서의 성격을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고 유럽 국가 간의 국가 건설 전쟁(Staatenbildungskrieg)으로 해석했다. 이는 이미 16세기 네덜란드와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던 1) 전통적인 유럽의 보편 군주제 이념 아래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을 중심으로 통합된 유럽과 2) 개별 국가를 바탕으로 한 다원적 유럽이라는 상반된 국가 건설 개념 간의 충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합스부르크 보편 군주제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보편주의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 프랑스와 스웨덴의 도전 역시 포함된다.

여기에 더해 부르크하르트는 신성 로마 제국에 있어 30년 전쟁은 독일의 헌법 전쟁이라고 본다. 그는 16세기 제국개혁 이후 완성된 제국 헌법 및 제도의 갈등 조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30년 전쟁 전야에 제국 내 교파 갈등은 제국 헌법의 갈등 조정 능력을 바탕으로 해결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고 본다. 전쟁을 초래한 핵심 원인은 보헤미아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였는데, 그 사고의 원인은 앞서 말한 국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이는 결국 제국 내에서의 보편주의와 다원주의를 둘러싼 국가 건설 전쟁으로 이어졌고, 제국 헌법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부르크하르트는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을 매우 중요시하며, 이를 유럽과 독일의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본다. 부르크하르트는 먼저 유럽적 차원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보편 군주 이념을 대신해 주권 국가의 시대가 성립되는 장기적인 과정의 시작점이라고 보았다. 한편으로 부르크하르트는 독일적 차원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16세기 완성되었던 황제와 제국신분 간의 이중적 균형 관계를 제도화한 제국 헌법을 복원하면서 보편주의와 다원주의의 타협을 달성하였다고 보았고, 이는 독일 최초의 성문 헌법이자 '통합적 국가 헌법(Gesamtstaatsverfassung)'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부르크하르트는 1663년 레겐스부르크 영구 제국의회의 성립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며, 이로부터 제국은 유럽 최초의 의회제 헌법을 구축하였고 타협과 합의에 의한 정치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파악하였다.

부르크하르트는 결국 제국을 근대 국가가 아니라고 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 역사가들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제국을 근대 국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부르크하르트는 오토 힌체로 대표되는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고전적인 위로부터의 관점에 의한 전쟁-국가 테제를 반대하며, 그의 '국가 건설 전쟁' 테제는 초기 근대 국가의 불완전한 측면이 전쟁을 유발한다는, 아래로부터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극과 극의 반응을 낳았고,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13.2.3.4. 게오르크 슈미트
폴커 프레스의 제자인 예나 대학교의 역사가 게오르크 슈미트는 1999년 출간한 구제국사 개관인 구제국의 역사 1495-1806(Geschichte des alten Reiches 1495-1806)에서 제국의 근대 국가로서의 측면을 부르크하르트보다 더 발전시켜서 제시하였다. 슈미트의 저작은 현재까지도 구제국사 연구에 있어 가장 문제적인 저작으로 평가되며, 매우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슈미트는 여기서 구제국이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등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복합 국가(Composite State)’로서의 성격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상보적 제국-국가(Komplementärer Reichs-Staat)라는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제국은 내부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제국관구는 지역 단위의 협력과 방위를 담당하고, 각 영방은 국내 자원 동원에 필요한 행정적 지원과 사회 규율, 신민 통제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제국을 구성하는 각 요소인 제국-관구-영방이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면서 초기 근대 국가로서의 성격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상보적 제국-국가 이론과 더불어, 슈미트의 중요한 공로는 근대 초 독일에서 발전하였던 원초적인 형태의 민족 감정을 부각했다는 데 있다. 슈미트는 특히 종교개혁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연구 경향을 반영하여 소책자와 문학, 전단지와 같은 헌법사 논의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러면서 여기서 나타나는 다양한 애국주의적 수사들을 조명하고, 근대 초 독일에서 초기적인 형태의 민족의식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밝혔다.

슈미트는 이러한 초기적 민족 의식의 근원을 독일의 자유(Deutsche Freiheit) 개념에서 찾았다. 독일의 자유 개념은 15세기 이후 독일 인문주의자들이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재발견하면서 로마 시대의 게르만족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자신들의 자유를 주장한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한편으로 독일 제후들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 카를 5세에 대항해 독일의 자유 개념을 빌려와 '신분의 자유(Ständische Libertät)'를 주장하였다. 슈미트는 신분의 자유 역시 단순히 제국신분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카를 5세 및 페르디난트 2세와 같은 전제적인 황제들에게 저항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제국 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라고 보았다.

슈미트에 따르면 독일의 자유 개념에 기반한 민족 의식이 발전하는 데는 종교개혁이 결정적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제국 전역에서 특히 개신교도들을 중심으로 카를 5세와 교황의 전제적 정치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겨졌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교파를 뛰어넘은 통합적인 민족 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30년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는 전 국가 차원에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는데, 여기서 독일의 자유 개념은 신분의 자유를 넘어서 전 제국 시민의 자유로 확장되었고, 이는 신분의 자유 개념이 발전시킨 제국 헌법의 수호와 연결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루이 14세가 이끄는 프랑스의 위협은 다시 한번 민족 감정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슈미트는 구제국을 자유라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종의 공화국이자, 초기 근대 독일 민족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슈미트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서독 시기 비판적 역사가들이 발전시켰던 존더베크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며, 나치즘의 영향으로 극히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독일의 민족 의식의 기원을 해방적 가치인 자유에서부터 찾음으로서 이를 '정상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 국가에 대한 관점이 점차 변화하고 있던 199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국가성을 다른 차원에서 조명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초기 근대 제국에 현재의 개념과 가치를 투사하는, 이미 브루너에 의해 격렬하게 비판된 시도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슈미트의 주장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고,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우선 페터 블리클레는 슈미트의 저작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다소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독일 전통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슈미트의 저작은 블리클레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반면 국가 건설 과정에 있어 종교개혁 이후 국가의 각 교파 교회에 대한 지배 강화 및 이를 통한 사회 규율의 확대를 의미하는 '교파화(Konfessionalisierung)' 과정을 개념화했던 볼프강 라인하르트하인츠 쉴링은 슈미트의 견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고, 각각 '신(新) 이층 지배 체제(neuartiges zweistöckiges Herrschaftssystem)', '부분 근대화 제국 체제(teilmodernisiertes Reichssystem)'와 같은 개념을 제시하며 슈미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라인하르트는 슈미트가 통일의 희열감에 도취되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라인하르트와 쉴링은 고전적인 관점에서 위로부터의 국가 건설 과정을 중시한 역사가들이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제국은 전혀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 아레틴 역시 제국의 본질은 봉건적 질서에 있다고 보면서 슈미트의 관점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슈미트의 관점은 대단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 광범위한 후속 연구를 촉발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근대 초 독일 민족 감정에 대한 연구들이었다. 2000년대 동안 마르틴 브레데(Martin Wrede, 1969-)[79], 카스파르 히르쉬(Caspar Hirschi, 1975-)[80], 알렉산더 슈미트(Alexander Schmidt, 1975-)[81]와 같은 역사가들이 근대 초 독일 민족 의식에 대한 연구를 잇달아 출판하면서 슈미트의 관점을 뒷받침하였다.
13.2.3.5. 바바라 슈톨베르크-릴링어
부르크하르트와 슈미트가 발전시킨 구제국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바바라 슈톨베르크-릴링어로부터 제기되었다. 슈톨베르크-릴링어는 아레틴과 유사하게 제국을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체계로 파악하며, 초기 근대 제국을 근대 국가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슈미트식의 해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슈톨베르크-릴링어는 브루너 이후 전근대 헌법사 연구의 주요동향이었던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회사적 경향에 더하여, 정치 행위 자체를 '문화'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정치의 문화사' 경향을 개척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징'을 생산하는 존재로, 사회를 생산된 상징을 해석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고 파악하는 사회학과 인류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치적 행위 역시 사회적 행위이자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제도란 반복을 거쳐 영속화된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불과하다.

이러한 헌법사의 '문화적' 접근은 법과 제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던 전통적인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헌법사 연구는 법률과 제도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법과 제도를 객관적인 실체이자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는 온전한 규범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 접근에 따르면 법과 제도 역시 인간 행위의 산물이자 커뮤니케이션 과정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행위에 불과하며, 제도와 실제 현실 간에는 명백한 간극이 존재한다. 사회사적 연구가 개인과 개인 간의 실제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규범과 현실의 간극을 조명하였다면, 문화적 접근은 커뮤니케이션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특히 초기 근대 제국을 봉건적, 전근대적 질서로 이해했던 슈톨베르크-릴링어는 구제국의 정치 질서를 헌법과 제도가 아니라 뮌스터 대학의 동료였던 켈러와 알트호프가 그랬듯이 상징적 커뮤니케이션과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고자 했다. 즉 봉건 질서로서 구제국의 정치 질서는 여전히 관습법적, 개인적, 대면적 요소가 지배하고 있었고, 중세와 마찬가지로 의식으로 대표되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커뮤니케이션 행위로 권력이 표현, 수행되는 과정이 질서 유지에 있어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황제 선출과 대관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가 이루어졌던 제국의회는 근대 의회주의의 선구자가 아닌, 의식에 의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 행위이자 '제도적 허구'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슈톨베르크-릴링어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과 대면 문화를 기반으로 한 전근대적 질서는 근대적인 서면 문화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파악한다. 제후들이 직접 참석하지 않고 대사를 파견하게 된 레겐스부르크 영구 제국의회의 성립은 제국 헌법을 유지하던 상징 언어의 중지를 의미했고, 이로부터 제국 헌법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봉건적 질서에 냉소적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과 요제프 2세를 기점으로 제국의 의례와 상징 언어는 더욱 유명무실하게 여겨졌고, 18세기 '제국의 위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2008년 출간한 슈톨베르크-릴링어의 황제의 낡은 옷(Des Kaisers alte Kleider)은 초기 근대 제국 헌법사의 '문화적' 접근을 집대성한 중요한 저작으로, 현 시점에서 초기 근대 제국을 다룬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슈톨베르크-릴링어가 주도하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 및 '정치의 문화사' 연구 경향은 현 시점에서 정치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82]

한편으로 슈톨베르크-릴링어는 자신의 작업이 대안적인 헌법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라 밝히고 있으며, 초기 근대 제국에 대한 그의 관점은 법과 평화를 유지하는 안정적인 질서, 레오폴트 1세 시대 제국의 부활과 같은 아레틴을 비롯한 1세대 연구자들의 관점들을 거의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조아킴 웨일리와 같은 연구자들은 제국사를 쇠퇴의 내러티브로만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트라이치케와 같은 19세기식 관점의 재현이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83]
13.2.3.6. 영어권 연구
아레틴과 슈미트, 슈톨베르크-릴링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구제국사 연구에 중요한 자극을 가했고, 이는 많은 후속 연구를 촉발했다. 이를 이어받아, 영어권에서도 점차 근대 초기 독일사에 대한 연구 관심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팀 블래닝(Tim C.W. Blanning, 1942-)과 로버트 J.W. 에반스(Robert J.W. Evans, 1943-), 조아킴 웨일리(Joachim Whaely, 1954-), 피터 H. 윌슨(Peter H. Wilson, 1963-)은 이를 대표하는 역사가들인데, 웨일리에 의하면 냉전 시대까지만 해도 완전한 불모지였던 초기 근대 독일사는 2010년대 시점에 이르러 하나의 붐과 같은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어권에서 초기 근대 제국사를 다룬 선구적인 저작으로는 우선 맥 워커(Mack Walker, 1929-2021)의 독일의 고향(German Home Towns: Community, State, and General Estate, 1648–1871, 1971)을 들 수 있는데, 워커는 제국 헌법이 군소 영방을 강력한 영방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로버트 J.W. 에반스는 16세기를 전후한 합스부르크 왕조에 초점을 맞추면서 무능한 황제로만 여겨졌던 루돌프 2세 시대의 문화적 발전을 조명하고[84], 제국의 재평가에도 의견을 같이하였다.[85]

특히 웨일리가 2011년 출간한 두 권 분량의 개관인 독일과 신성 로마 제국 1493-1806(Germany and the Holy Empire 1493-1806)는 현 시점에서 근대 초 독일사와 제국사를 통합적으로 서술한 표준 저작으로 평가되며, 근대 초 독일사를 입문하는 데 있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웨일리는 기본적으로 슈미트의 관점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는데, 그는 초기 근대 제국사를 제국의 독일화 과정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미 30년 전쟁에 대한 표준 저작을 출간하였던 피터 H. 윌슨은 2016년 중세 제국과 근대 초 제국을 통합적으로 개괄한 유럽의 심장(Heart of Europe)을 출간했다. 윌슨은 기존의 관점을 절충적으로 종합하는 데 있어 탁월한 역사가로, 아레틴과 슈미트의 관점을 절충적으로 수용하면서 제국의 천 년 역사를 종합적으로 그려냈다. 제국의 역사를 독일사의 관점에서 파악한 웨일리와 다르게, 윌슨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제국의 유럽적 차원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14.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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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해와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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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참고 문헌

17. 각종 매체

당연하게도 중세를 다루는 역사·전쟁 비디오 게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력이다. 많은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짧은 이름들에 비해 너무 긴 국호 때문에 "독일"로 불리거나 "신롬, 신로제, 롬" 같은 약칭으로 지칭된다, 영어로는 "HRE"로 줄여서 칭하며, 우스갯소리로 짝퉁 로마란 뜻으로 "짭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86] 이것과 관련된 대표적인 어록이 바로 ‘신성하지도 로마도 아닌 제국’이다.

국명에 '신성'이 붙은 게 왠지 간지를 더해줘서 그런지 판타지물에서 신성 ○○ 제국이 주구장창 나오는데, 단연 신성 로마 제국의 명칭의 영향이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신성 그리핀 제국, 워해머 판타지의 주인공 팩션인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4에서 카롤루스 대제를 지도자로 하여 등장했다. 말 그대로 방어에 유리한 특성인 방어적과 정복전 및 영토 확장에 유리한 제국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병 유닛은 물론 근접 유닛을 상대로도 전투력 보너스를 받는 란츠크네흐트를 고유 유닛, 일반적인 법원보다 도시의 유지비를 더욱 크게 줄여주는 시청사를 고유 건물로 가지고 있다. 즉 최대한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잘 맞는다. 이 밖에도 문명 3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를 지도자로 하는 오스트리아 문명이 나온 적이 있으며, 문명 5에 나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문명도 신성로마제국과 관련이 있고 문명 5와 6의 독일 문명 고유 건물/지구인 한자도 신성로마제국 시절에 있었던 것이다. 또 문명 6 독일 문명의 지도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다.

근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전략 게임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특유의 메커니즘이 잘 구현되어 있다. 실제 역사처럼 유명무실한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유저의 선택에 따라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열강이 될 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Europa Universalis IV/신성 로마 제국 항목 참조

17.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

국명과 역사적 위상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모티브로 삼은 창작물 속 가상국가들이 많다. 다만 이름만 따온 것들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1] 신성 로마 황제들은 자신의 문장에 출신 가문이나 통치하는 지역의 문장들을 짜넣었기 때문에 문장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유의 통일된 국장은 없었다. 해당 문장은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의 대형 문장(Greater Coat of Arms)이다. 맨 위에 거대하게 그려진 왕관이 바로 황권의 상징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이다.[2] Quaternion Eagle. 1510년 독일의 목판화가 한스 부르크마이어가 처음 고안했다. 제국의 상징인 쌍두수리 위에 제국 영방국가들의 문장들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이후 영방국가들이 제국을 표현할 때 우회적으로 사용하던 대표문장이었다. 가장 격이 높은 선제후의 문장들은 쌍두수리 머리에 가까운 쪽에 배치되어 있다.[3]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 기준. 오토 1세에 이르기까지 제위 단절이 있었고, 제국으로 보기에는 느슨한 형태였기에 아직까지 소수 의견에 그친다. 다만 룩셈부르크 왕조 이래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신성 로마 황제들은 카롤루스 대제를 독일의 초대 왕이자 제국의 초대 황제로 인식해왔다. 오토 1세 이전에 '카를'을 제호로 쓴 카롤루스 대제를 1세로 보고 그의 후계인 카롤루스 왕조에서 2세와 3세까지 배출했기 때문에 오토 1세 이후 카를을 제호로 쓴 카를 4세카를 5세가 각각 카를 1세나 카를 2세라고 불리지 않고 4세와 5세가 되는 것이다.[4] 오토 1세의 대관 기준. 일반적인 교과과정에서는 대부분 본격적인 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된 962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나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 SAT, AT 교재에도 962년으로 서술한다.[5] 이전부터 실질적 공용어였으나 1784년 요제프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변경되었다.[6] 지방 제후 차원에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루터교회가 허용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칼뱅파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제국 차원의 국교는 언제나 가톨릭이었으며, 가톨릭은 국교 정도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7]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사실상 국가연합.[발음] shénshèng luómǎdìguó[9] 물론 1804년에 이미 나폴레옹에 의해 공중분해될 위기에 놓여 오스트리아 제국이 따로 분리 및 결성되지만 아무튼 정식으로 해체된 것은 1806년이다.[10] 엄밀히는 오스트리아의 시조이기도 하나,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의 오스트리아인들에게는 그냥 오스트리아 제국 이전에 제국의 정통성을 갖고있던 나라 정도로 인식된다.[11]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법통을 그대로 이었다거나 동질한 정치체라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계승(Translatio imperii)'이란 '세상의 패권을 쥐고 있던 제국이 무너지면 새로운 보편 제국이 등장해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개념으로 로마의 작가 베르길리우스도 언급할 정도로 유서가 깊은 사상이다.[12] 이 관계를 '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 Primus inter pares)'라고 부른다. 옛 로마의 황제들이 쓰던 용어기도 하다.[13]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받은 이래로 '황제'라는 타이틀은 매우 강력하고 영예로운 칭호가 되어서, 어떻게든 황제가 되고 싶었던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는 1519년 황제선거에 뛰어들어 황제가 되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카를 5세가 2톤에 달하는 금을 뿌리며 선제후들을 회유하면서 무산되었지만, 그만큼 황제라는 칭호는 무시못할 전통과 권위를 가진 자리였다.[14] Alemani에서 유래하는 단어. 원류로는 알자스, 로렌, 스위스 등에서 분포한 고지대 게르만족의 연맹체를 뜻하고, 프랑스, 스페인 등의 라틴 문화권에선 그대로 "독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현대 프랑스어로 독일은 Allemagne) 사실 저 말이 쓰일 당시의 프랑스는 라틴 문화권의 국가라기보다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당시 저지대 독일에서 그나마 문명화된 쪽이 프랑크였고 그 북쪽의 작센(색슨)은 이제 막 기독교를 받아들이거나 정복하는 도중인 상태였다. 고로 "프랑크를 제외한 문명화된 게르만"의 통칭은 그 나머지인 '알레마니=독일'이 된다.[15] 이는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지는 '영원한 로마(Roma Aeterna)' 이념에서 연결되는 것으로, 유럽인들에게 보편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일종의 이념이었다. 중세인들은 로마 제국의 부활(renovatio)을 꿈꾸었고, 오토 3세는 이를 자신의 친정 기간 동안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며 이탈리아 정책에 주력했다.[16] 독일 왕국 개념이 퍼지는 데에는 하인리히 4세그레고리오 7세의 서임권 투쟁 기간 동안 그레고리오 7세가 황제의 권한은 독일 내로 제한하려는 의도로 '독일인의 왕' 호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17] 기존에는 1254년 대공위시대 때 대립왕 중 한 명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빌럼)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명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 1184년에 처음 사용된 것이 밝혀졌다.[18] 제국군기가 창기로 사용될 때의 변형된 모습이다.[19] 후일 1692년 레오폴트 1세는 제국기수기의 사용권을 작센 선제후국에게 넘겨줬다. 그래서 작센 선제후의 국기와 문장을 보면 이 제국기수기의 모습이 들어가 있는 걸 볼 수 있다.[20] 그 외에 한자 동맹에 소속된 도시들도 이 붉은색과 하얀색을 사용했다. 한자 동맹에 소속된 함선들은 붉고 하얀 삼각기를 달아 소속을 알렸고, 때문에 아직도 과거 한자 동맹 소속이었던 함부르크브레멘은 시기(市旗)가 붉은색과 하얀색 구성이다.[21] 이 이전까지는 대천사 미카엘이 그려진 국기를 사용했다.[22] 로트링겐(Lothringen) 지역에 위치했던 영지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공동통치를 받다가 1766년 프랑스에게 완전히 합병되었다.[23] 특히 벨기에 일대는 1714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로 들어갔다.[24] 부르군트 관구
라인강 하류-베스트팔렌 관구
선제후 라인 관구
라인강 상류 관구
니더작센 관구
오버작센 관구
프랑켄 관구
슈바벤 관구
바이에른 관구
오스트리아 관구
비관구 지역
[25]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의 6개 관구에 오스트리아 관구, 부르군트 관구, 선제후 라인 관구를 추가하고 기존 작센 관구를 니더작센 관구와 오버작센 관구로 나누어서 총 10개가 된 것이다.[26] Reichsmatrikel. 각 제후국들의 군대와 재정상태를 기록한 문서로 제국은 이 기록을 토대로 전쟁 발발시 각 제후국에서 징발할 병사와 세금을 작성했다. 당연히 매우 중요한 문서였고 이 제국대장 관리는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27] 하지만 이 다수결 원칙 때문에 반대파는 자신이 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구의회에서 의결된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강제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아서 관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28] 이러한 불문 헌법 체계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 바로 대헌장, 권리 장전 등을 바탕으로 하는 영국 헌법인데, 영국 헌법은 권리 장전에서 전체 국민과 그 대표인 의회와의 협약을 규정함으로써 최초의 근대 입헌주의로 나아갔다는 차이가 있다.[29] 제국군헌법은 레오폴트 1세 시대인 1681년에 선포된 제국방위령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30] Reichsacht. 제국금지령의 대상이 된 사람은 즉시 제국 내 모든 권리와 재산을 상실하고 법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었다. 그야말로 황제판 파문.[31] 북이탈리아의 도시들과 다투거나 교황과 사이가 안좋다거나, 경쟁자들과 전쟁을 하는 중이라 대관식을 치를 겨를이 없었던 등 교황 대관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다양했다.[32] 왼쪽에서부터 쾰른 선제후국, 마인츠 선제후국, 트리어 선제후국, 팔츠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보헤미아 왕국 순서다.[33] 이는 게르만족이 추장을 선출하는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여전히 게르만의 전통이 짙게 배어있던 중세 게르만 부족장들이 자기들이 해왔던 대로 황제를 선출한 것이다.[34] 보헤미아 왕국은 선제후들 중에서도 독특했다. 후스 전쟁 이후로 보헤미아는 제국 내부에는 거의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황제선거 때만 참석했다.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영지이자 해체 직전 합스부르크 가문이 직접 보유하고 있던 유일한 작위였다.[35] 의회는 폐회를 해야만 종료됐다. 하지만 1663년 이래로 폐회는 진행하지 않았고 이는 즉 의회가 닫히지 않고 계속 운영되고 있다는 의미였다.[36] Freiherr. 황제 직속의 백작들인 제국백과 마찬가지로 황제 직속의 남작들이었다.[37] 제후들은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었으나, 제국백이나 수도원장들은 단체의 합의를 통해서 단체 차원에서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라인 제국대수도원장 위원단, 슈바벤 제국대수도원장 위원단이 1표씩을 행사할 수 있었고 니더라인-베스트팔렌 제국백작위원단, 슈바벤 제국백작위원단, 프랑켄 제국백작위원단, 베테라우 제국백작위원단이 1표씩을 행사할 수 있었다.[38] 다만 3개의 선거인단 내부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닌 과반으로 통과의 찬반을 정했다.[39] 제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제후국들을 영방국가라고 부른다. 제국에 제국의회가 있었듯이 영방국가에도 각자 '영방의회'가 있었다. 이 영방의회에서는 제후들의 봉신, 교회 등이 제후의 권력을 견제했다. 제후들이 제국의회에서 황제를 견제했듯이 제후의 신하들이 영방의회에서 제후를 견제한 것이다.[40] 보헤미아의 경우 독일 봉건제의 영향으로 폴란드, 헝가리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고 본다.[41] Landschaft im alten Reich(1973)[42] Revolution von 1525(1975)[43] 슈바벤 제국대수도원장 위원단의 중심지였다.[44] 라인 제국대수도원장 위원단의 중심지였다.[45] 수 자체는 줄었지만 그렇게 많이 줄어든 건 아니고 오히려 다른 귀족위들에 비해 선방한 것이다. 제국 후반부로 갈수록 귀천상혼과 대 끊김으로 인해 귀족들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반면 황제들이 제국백 칭호를 평민들에게 뿌리면서 제국백의 수는 그렇게 많이 줄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작위를 얻은 제국백들은 어디까지나 명예직일 뿐 실권이나 영토는 없었다.[46] 실제로 중세 이래로 자유도시들의 수는 계속 줄었다. 1521년에 86개의 자유도시들이 있던 것에 반해 1792년에는 51개 밖에 없었다.[47] 그나마도 1176년 베네치아 조약으로 교황령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자 아예 나라 밖에 수도가 있는 꼴이 됐다. 신성 로마 제국은 존속 기간 대부분 동안 로마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48]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독점은 1550년대보다 한참 이른 140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됐지만, 막시밀리안 1세인스부르크를 더 좋아했고 카를 5세는 그냥 정해진 수도 없이 떠돌아다녔다.[49] 교황이 직접 황제의 관을 씌워주던 대관식으로 1400년대 이후부터는 잘 안했다. 항상 로마에서 한 것은 아니고 루도비쿠스 1세는 816년 랭스에서, 람베르토 1세는 892년 라벤나에서, 오토 3세는 996년 몬차에서, 카를 5세는 1530년 볼로냐에서 교황 대관을 받았다.[50] 막시밀리안 1세부터.[51] 오토 1세 ~ 페르디난트 1세[52] 1273년부터 1792년까지.[53] 아우크스부르크, 렌스, 쾰른, 레겐스부르크에서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54] 피핀의 기증이란 프랑크 국왕 피핀이 자신의 왕위 계승을 교황 자카리아에게서 승인을 받고, 그 보답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를 도와 754년 이탈리아에 원정해 롬바르드 국왕을 몰아내고 라벤나 지방을 평정하여 그 땅을 교황에게 바친 것을 의미한다.[55] 1502년부터 1504년까지 막시밀리안 1세의 명으로 잠시 레겐스부르크에 본부와 직원들을 두긴 했는데 업무를 보진 않았다.[56] 1555년 여름에 전염병을 피해 잠시 에슬링겐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곧 다시 되돌아왔다.[57] 영어로는 Cup bearer라고 한다. 성경에는 '술관원'이라고 표기했다.[58] 이 외에도 같은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져나온 프랑스에는 왕의 식탁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식품감(Brotmeister)가 있었는데 파리의 제빵길드를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59] 하지만 1692년 하노버가 새로운 선제후로 임명되며 고위기수를 빼앗아가면서 뷔르템베르크는 자연스레 고위기수직을 상실했다. 이후 하노버는 제국기수의 상징인 제국기수기를 사용할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뷔르템베르크가 항의하자 대신 제국돌격기를 사용할 권리를 내주었다.[60] 로마는 나라가 훨씬 먼저부터 있었고 그리스도교 국교화는 그 훨씬 뒤였다.[61] 가톨릭 제후가 개신교 제후를 무조건 배척한 것도 아니고 가톨릭 제후를 무조건 도와준 것도 아니다. 30년 전쟁만 봐도 가톨릭이던 프랑스가 개신교 스웨덴을 도와 가톨릭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위정자들은 훨씬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들에게 종교는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62] 해당 그림은 1551년부터 1559년까지 진행된 제8차 이탈리아 전쟁의 마르치아노 전투다. 유명한 화가 조르조 바사리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그린 르네상스 걸작인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잃어버린 작품 <앙기에리 전투> 위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설이 있어서 오히려 그쪽으로 더 유명하다.[63] 합스부르크와 발루아 왕조 사이에서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이 대표적이다.[64] 간단히 말해서 제국의 영국을 향한 외교정책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프랑스라는 공동의 적 아래 견제와 협력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복잡한 관계였다. 영국 특유의 실용적인 외교 정책도 동맹이 성립되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65] 북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등 빈보다 인구가 많은 도시가 소수있었다.[66] 실레시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등 합스부르크 영지에 900만, 프로이센 국민 400만, 나머지가 1,400~1,500만 명 정도였다.[67] 특히 프랑스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과 맞먹거나 더 강했고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꿀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이러한 논리는 서유럽의 지배적인 체제였던 봉건제 시스템에선 당연한 논리였다. 자세한 건 봉건제 문서 참고.[68] 12세기 말, 3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죽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를 두고 이슬람 역사가들은 '독일인의 왕'이라 불렀고, 16세기에 카를 5세-페르디난트 1세 형제와 싸운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 조약을 맺는 자리에서 페르디난트 1세를 가리켜 로마 황제가 아닌 '독일인의 왕'이라고 불렀다. 오스만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황제라고 불러준 때는 1606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일명 '장기 터키 전쟁'을 끝내고 나서였고 이것도 그냥 황제였지 로마 황제는 아니었다. 이슬람 진영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을 그저 '독일인들의 나라' 정도로 여겼다.[69] 보루시아는 프로이센의 라틴어 명칭이다.[70] 스르비크는 열성적인 나치 지지자였고, 이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합리화를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71] 역사가 라인하르트 블랭크너(Reinhard Blänkner)는 포콕의 '마키아벨리안 모멘트'에서 따온 '브루너 모멘트'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이다.[72] 독일법에 있어 게르만 관습법의 영향을 강조하는 전통으로, 기르케의 단체(Genossenschaft) 개념은 공동체 형성에 있어 개인과 개인 간의 자발적인 결사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브루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73] 전후 브루너는 중세와 초기 근대를 아울러 '구유럽(Alteuropa)'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초기 근대 유럽 사회를 중세의 귀족적, 농촌적 측면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구유럽 사회의 특징를 19세기 민속학자 빌헬름 하인리히 릴에게서 가져온 '전일적 공동체(Das ganze Ha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는데, 이는 Haus(집)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전전부터 브루너가 보여 주었던 전근대 농촌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향수를 보여 준다.[74] 특히 근대적 개념을 바탕으로 중세를 이해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한 브루너의 아이디어는 라인하르트 코젤레크의 개념사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루너는 개념사 사전의 공동 편집자 중 하나였으며, 말안장시대(Sattelzeit) 개념을 고안하기도 했다. 코젤레크 역시 브루너와 보수주의적이고 근대 비판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75] 프리드리히 3세는 1980년대부터 사료가 대대적으로 정비되면서 기존의 무기력한 황제에서 평가가 크게 수정되었으다.[76] 19세기 전반기 독일사를 서술한 고전을 남겼다.[77] 슈바벤 관구의 경우 자체적인 상비군을 가질 정도로 조직화되었다.[78] 1권 Föderalistische oder hierarchische Ordnung 1648-1684(1993), 2권 Kaisertradition und österreichischer Großmachtpolitik 1684-1745(1997), 3권 Das Reich und der österreichisch-preußische Dualismus 1745-1806(1997), 4권은 색인이다.[79] Das Reich und seine Feinde. Politische Feindbilder in der reichspatriotischen Publizistik zwischen Westfälischem Frieden und Siebenjährigem Krieg(2004)[80] Wettkampf der Nationen. Konstruktionen einer deutschen Ehrgemeinschaft an der Wende vom Mittelalter zur Neuzeit(2005), The Origins of Nationalism: An Alternative History from Ancient Rome to Early Modern Germany(2012)[81] Vaterlandsliebe und Religionskonflikt. Politische Diskurse im Alten Reich 1555–1648(2007)[82] 슈톨베르크-릴링어는 이 책과 2017년 출간한 마리아 테레지아 전기로 독일 역사가상, 라이프치히 도서전상, 프로이트상을 비롯한 독일 내 주요 학술상과 도서상을 석권했으며, 이미 2005년에 독일의 가장 중요한 학술상인 라이프니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외에도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아카데미와 오스트리아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 등 많은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며 현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초기 근대 역사가 중 하나로 여겨진다.[83] 현 시점의 연구 경향은 제국의 전근대적 성격을 강조하는 슈톨베르크-릴링어와 근대적 성격을 강조하는 슈미트의 양 극단의 중간 지점을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84] Rudolf II and his World. A Study in Intellectual History, 1576–1612(1973)[85] The Making of the Habsburg Monarchy, 1550–1700.(1979)[86] 이는 동양적인 정통성 관념이 뿌리깊게 박힌 국내 역덕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인데, 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인들에게 보편 제국으로서 '로마'는 하나의 '이념'이었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부활(renovatio imperii romanorum), 제권 전이(translatio imperii)와 같은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당대인들에게 있어 로마의 정통성(?)이 어디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당대 서유럽인들은 카를 대제와 오토 대제의 대관 이후 로마 제국이 부활되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단의 4번 항목을 참조할 것.[87] 이름만 따온 케이스. 애초에 여기는 기원이 영국 왕실이다.[88] 지배계층인 황가와 6개의 공국 가문들이 전신인 팰컨 제국 시절부터 중첩적인 근친혼을 맺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이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89] 작중에서는 친독 부역자 출신 세르게이 타보리츠키가 세운 국가로 통일 문구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명언인 "세상이 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