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국 | 폴란드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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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과 폴란드의 외교관계에 대해 다루는 문서.2. 역사
2.1. 전간기
자세한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폴란드 제2공화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수권법 통과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과 폴란드 제2공화국과의 관계는 험악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폴란드에 단치히 자유시, 상부 슐레지엔, 폴란드 회랑 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폴란드에서 이를 거부하면서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서 1925년에는 무역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로 전세계 경제가 무너지면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대두하였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수권법 통과를 기점으로 몰락하였다.
나치 독일은 초기 폴란드와의 외교에서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히틀러는 1934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협상을 하여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과 더불어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성사시켰다. 폴란드에서는 나치 독일의 유화적인 정책을 환영하였고, 나치 독일은 뮌헨 협정을 체결할 때 폴란드가 테셴 지방을 차지하도록 허가해주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단지 침략 야욕을 일시 연기하기 위해 폴란드에 잠시 유화책을 썼을 뿐이었다. 다음해인 1939년, 히틀러는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내며 옛 독일 제국의 영토인 단치히 자유시, 폴란드 회랑, 실롱스크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시작하자 폴란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고, 결사 반대했다 이를 기점으로 나치 독일과 폴란드는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을 5년 만에 파기하고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이후인 1939년 9월 1일 마침내 폴란드를 침공하여 폴란드를 붕괴시키고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 각지에서 난민들이 바르샤바로 밀려들었는데 독일군은 바르샤바에도 폭격을 퍼부었고 바르샤바 각지에서 전기와 전화가 끊기도 배관설비와 하수설비가 고장났다. 히틀러는 바르샤바를 독일 아리아 민족들의 도시로 개조하고 폴란드인들을 바르샤바에서 소거해서 비스와강 근처에 따로 폴란드인 노예들이 거주하는 위성 도시를 건설할 망상까지 세웠다. 이미 독소 폴란드 점령 당시 바르샤바 등의 병원을 집중 폭격한 나치독일군은 폴란드 점령 후 본격적으로 폴란드인들을 바르샤바에서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계획을 실시하였다.독일은 구 프로이센의 폴란드 영토를 나치 독일의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나머지 점령 지역에 폴란드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냉전시대 나치독일의 폴란드인 학살은 축소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심지어 나치독일의 학살 대상이 유대인이나 일부 독립운동가 밖에 없는 것처럼 왜곡하는 사례가 나타나지만 당시 비유대인 폴란드인 역시 나치독일의 계획적인 제노사이드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폴란드 총독부는 폴란드 국립박물관과 폴란드 국립미술관을 파괴하였고 바르샤바의 대학교들은 물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들까지 모조리 폐쇄하였다. 폴란드 각지에서 교과서와 역사책, 외국어 문헌을 압수되었으며, 또한 폴란드의 여러 대도시의 극장들도 처음에는 오페라와 연극 상연이 금지되더니 이후 독일인 전용 시설로 변경되었다. 나치 독일은 코페르니쿠스가 순수한 독일 아리아인종이라고 선전하였으며,[1] 이 외에도 폴란드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대숙청을 실시하였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인들을 저학력 육체 노동계급으로 잔존시킬 생각이었고, 이들 입장에서 폴란드인 지식인은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치 독일은 아우슈비츠 등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였다. 다른 한편 나치 독일 치하에서는 일반 폴란드인들에게도 배급제가 시행되었는데 유대인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턱없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한 사람에게 배급되는 식량은 빵 4.3 킬로그램, 밀가루 400 그램, 고기 400 그램, 커피 75 그램, 달걀 1개였다.[2] 맥주나 포도주, 버터와 치즈는 배급 목록에 없었다. 폴란드는 망명 정부 인사들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후에는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소련의 진주로 나치 독일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