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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의 관계.2. 역사적 관계
2.1.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합스부르크 가문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이 16세기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로 넘어가면서 양국은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과 상속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던 상황이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서거한 이후 1573년 이래 국왕을 선거로 뽑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국왕 선거를 할 때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자들을 폴란드 국왕 후보로 출마시켰으나, 폴란드 세임이 바보도 아니고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자들을 뽑아서 나라를 오스트리아에 갖다바칠 이유는 없었다. 결국 1587년에는 막시밀리안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으나, 1588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비치나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격파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2.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합스부르크 제국
다시는 폴란드가 반복치 않을 실수다.
그제고슈 미할스키, 2005~2007년 주 튀르키예 폴란드 대사#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 이후 100년도 못 되어서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걸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짚어낸 것.
그제고슈 미할스키, 2005~2007년 주 튀르키예 폴란드 대사#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 이후 100년도 못 되어서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걸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짚어낸 것.
오스트리아는 독일,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시킨 나라라서 폴란드와 사이가 좋지 않다. 폴란드 분할은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 포문을 연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였다. 1769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왕국의 세페시(Szepes) 지역[1]에 있던 폴란드의 월경지를 무단으로 합병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1772년 8월 오스트리아 대공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3국이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으로 쳐들어와 협정에서 정한 대로 각자의 몫을 챙기기 시작했다. 폴란드 분할 결과 오스트리아는 차토르와 아우슈비츠, 소폴란드 일부[2]와 갈리치아 일대를 차지했다.
2.3.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독일 및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탄압을 덜 받았다. 프로이센 왕국령,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는 종파도 다른데다가 억압적인 동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였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고 빈 체제가 들어서면서 폴란드의 분할이 공고화되었는데 프로테스탄트가 주류인 프로이센이나 정교회가 주류인 러시아에 비해서 오스트리아 치하의 폴란드인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적어도 가톨릭 신앙만큼은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치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문화적, 정치적 차원에서 폴란드인의 광범위한 자치가 보장되긴 했고,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령 크라쿠프(크라카우), 리비우는 러시아, 독일령 폴란드에서 망명온 논객들이 주도한 폴란드 민족주의의 기반 지역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쯤 되면 분할국 3국 사이 폴란드인들은 농민,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그나마 산업화가 되어있는 러시아령 바르샤바, 독일령 포즈난 일대로 대거 이주하는 반면 지식인, 전통 지주층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오스트리아령 리비우, 크라쿠프로 이주하는 경향을 띈다.다만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3]이 프로이센이나 러시아령 폴란드보다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인들 간에 아예 갈등이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46년의 갈리치아 학살 사건이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과 근대국가 수립의 열망이 고조되어감에 따라 혁명이 터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도 특히 폴란드인 귀족과 식자층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고, 1846년에는 갈리치아 지방의 중심도시인 크라쿠프에서 반합스부르크 봉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갈리치아 지방은 연이은 흉작과 기아로 고통을 받았고 소작농과 폴란드 귀족 간에 분위기가 몹시 험악한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지역에서 폴란드 소작농들은 상류층이 일으킨 민족주의 봉기를 외면해버리고 오히려 봉기를 일으킨 귀족, 지주, 지식인 등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넘겨버리거나 포상금을 받고 학살하기도 했다. 타르누프(Tarnów) 인근에서만 2천명에 가까운 폴란드 봉기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를 점령한 이후, 현지 가톨릭 인구를 늘리되 슬라브족들의 반독일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 폴란드인들을 보스니아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유사 사례로 오스트리아에서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중심도시 렘베르크에 체코인 관료들을 상당수 파견, 정착시켰던 사례가 있다.
2.4. 20세기
3국에 분할되어 있던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해체되고 1차대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는 과정에서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생제르맹 조약 문서 참조. 전간기의 폴란드 제2공화국은 과거사 문제로 오스트리아 측과 제한적인 외교 관계만을 유지하였다.2차대전 이후 폴란드에는 제2세계 진영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들어서서 오스트리아와 대치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1999년 폴란드의 NATO 가입이 이뤄졌다.
2.5. 21세기
2004년 폴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으로 양국 관계는 협력관계로 돌아섰다. 양국간의 교류, 협력이 활발하다.오늘날 오스트리아 내 폴란드계 주민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조상이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본토로 이주해온 경우다. 반대로 구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지역이었던 폴란드의 크라쿠프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이주해온 오스트리아인들의 후손들이 소수 거주하고 있다.
2.5.1. 반독감정 공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가 아무리 서로 사이가 안 좋아도 반독감정에 있어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국가들로 폴란드와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일 정도다.3. 관련 문서
- 오스트리아/외교
- 폴란드/외교
- 유럽연합
- 오스트리아/역사
- 폴란드/역사
- 커피 클럽[4]
- 오스트리아/경제
- 폴란드/경제
- 오스트리아/문화
- 폴란드/문화
- 오스트리아인 / 폴란드인
- 독일어 / 폴란드어 / 천주교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