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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09:46:23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Johann Gustav Droysen
(1808년 7월 6일 ~ 1884년 6월 19일)
1. 개요2. 생애3. 역사관4. 명예5. 참고 문헌

1. 개요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독일의 역사학자이다. 드로이젠은 레오폴트 폰 랑케와 더불어 역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중 하나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2. 생애

드로이젠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참이던 1808년 7월 6일 프로이센 왕국포메른 지역에 자리한 트렙토브(Treptow)에서 태어났다.[1] 슈테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드로이젠은 베를린 대학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아우구스트 뵈크 등으로부터 철학과 문헌학을 공부하였다.

1833년 출간한 첫 작품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Geschichte Alexanders des Großen)을 통해 드로이젠은 당시 랑케의 주도하에 형성되고 있던 역사학계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드로이젠은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그 이후의 시대를 헬레니즘이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었고, 헬레니즘 시대를 퇴폐와 쇠퇴의 시기로 보았던 기존의 관점을 반박하면서 이 시대를 그리스 문명의 팽창 시대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 출판 이후 헬레니즘의 역사(Geschichte des Hellenismus) 3부작을 구성하는 알렉산더 후계자들의 역사(Geschichte der Nachfolger Alexanders, 1836), 헬레니즘 국가 체제 형성의 역사(Geschichte der Bildung des hellinistischen Staatensystems, 1843)에서 구체화되었다. 드로이젠의 헬레니즘의 역사는 현재까지도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역사학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이후 드로이젠은 베를린 대학, 예나 대학, 킬 대학을 거쳐 1859년부터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드로이젠은 정치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는 특히 1848년 혁명 당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의원이었으며, 우파 자유주의적 성향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혁명의 좌절 이후 그는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통일 방식을 열렬하게 지지하였고, 그의 역사 서술 역시 프로이센과 소독일주의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사관을 보루시아 학파(Borussische Schule) 혹은 프로이센 학파(Preussische Schule)라고 하며, 드로이젠은 하인리히 폰 쥐벨,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와 함께 보루시아 학파를 대표하는 역사가였다. 1855년부터 1886년까지 5권에 걸쳐 간행된 미완성 저작인 프로이센 정치사(Geschichte der Preussische Politik)는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무엇보다도 드로이젠은 랑케에 의해 개략적으로 제시되었던 역사학의 이론적 기반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 1857년 강의안으로 처음 출간된 이후 1868년에 정식 출간된 역사학론 강요(Grundriss der Historik)는 역사학의 이론적 체계를 제공한 중요한 텍스트로, 여기서 드로이젠은 자연과학 및 실증주의적인 '설명'의 방식과 대비되는 역사학만의 방법론으로 해석학적인 '이해(Verstehen)'를 제시하였다. 이 저작은 근대 역사학 최초의 방법론적 규범으로서 거듭 출간되었고, 독일 역사학도들의 체계적인 이론 학습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역사학론 강요'는 드로이젠 사후인 1937년 드로이젠의 외손자인 에밀 휘브너에 의해 Historik라는 이름으로 초기 강의안 및 원고를 편집하여 내용을 재구성한 편집본이 다시 출간되었고, 1977년에는 문헌 비평을 거쳐 원본을 고증한 판본이 다시 출간되기도 하였다.

3. 역사관

드로이젠의 역사관은 19세기를 풍미하던 실증주의 철학과의 대결 과정에서 발전했다.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로부터 기원하는 실증주의 철학은 과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적인 법칙 정립을 기본 원리로 여겼고, 실증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국인 헨리 토마스 버클의 '영국 문명사'는 개별 사건의 일반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진보를 이끄는 보편적인 법칙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계몽사상의 단선적인 진보 이념을 비판하면서 출현한, 각 민족의 개체성(Individualität) 및 인류 역사의 각 시대의 고유한 발전(Entwicklung)을 강조하는 역사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랑케를 비롯한 독일 역사가들은 실증주의에 비판적이었다.

역사주의적 이념을 공유하고 있던 드로이젠 역시 실증주의 역사 서술에 비판적이었고, 실증주의에 대항하여 역사학만의 고유한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드로이젠은 자연과 인간은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관찰 방법 역시 달라야 하며, 자연과학의 방법으로는 설명(Erklären)을, 역사학의 방법으로는 이해(Verstehen)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드로이젠은 이해의 방법론으로 슐라이어마허, 훔볼트, 뵈크, 랑케로부터 유래하는 독일의 해석학(Hermeneutik)을 도입했다.

드로이젠 이전에 랑케 역시 역사 연구의 방법으로 낭만주의 해석학의 '감정이입(Einfühlung)', 즉 대상에 대한 공감을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랑케의 역사관에는 역사 연구를 과거 사실 속에 숨겨진 신의 신성한 비밀 문자를 찾는 것이라 파악한 것에서 드러나듯 신학적, 미학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드로이젠은 랑케의 신학적 역사관으로부터 탈피하여 역사학의 방법론으로 사료의 경험적 '탐구'와 해석학적 '이해'를 결합시킨 탐구적 이해(forschend zu verstehen)을 제시함으로써 이해의 개념적 전제를 체계화하였다. 이로써 드로이젠은 역사학과 해석학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고, 독일 역사학은 해석학 전통을 기반으로 발전해 나갔다.

드로이젠의 역사관은 인간을 전면에 내세운 인륜 세계(sittliche Welt) 개념을 핵심으로 한다. 드로이젠의 '인륜'은 결국 인간의 의지를 의미하며, 인륜 세계는 인간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 인륜적 힘(sittliche Mächte)이 관통하고 있는 세계이다. 인륜적 힘은 자연적 공동체(가족, 이웃, 종족, 민족), 이념적 공동체(언어, 예술, 학문, 종교), 현실적 공동체(사회, 경제, 법, 권력)의 세 가지 '인륜적 공동체'의 형태로 표현된다. 드로이젠은 인간이 인륜적 힘을 바탕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로써 역사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즉 드로이젠에게 있어 역사는 스스로 상승해 가는 '인륜 세계의 운동'이었다. 드로이젠은 이러한 상호 작용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별하는 요소라고 보았고, 역사학의 탐구 대상을 '인간'으로 제시하면서 역사학을 인간학의 차원에서 자리매김했다. 드로이젠이 정초한 역사학만의 고유한 방법론은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다.

드로이젠의 주관성에 대한 인식 역시 '인륜 세계'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드로이젠에 따르면 인륜적 힘은 역사가가 과거를 인식하는 매개이다. 역사가라는 인간이 과거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모두 인륜적 힘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륜적 힘을 바탕으로 하는 인륜 세계는 역사가가 과거를 인식하는 데 있어 선험적인 인식의 범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드로이젠은 역사가가 자아를 소거하고 사료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끔 하라고 말한 랑케와 다르게 사료가 스스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역사가의 서술에 의해 말해질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드로이젠은 역사 서술이 역사가의 정치적 견해나 세계관이 강하게 반영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객관적 역사 서술을 강조한 랑케와 다르게 역사 서술에 역사가 개인의 주관과 관점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2]

드로이젠에게 인륜 세계는 역사 연구의 대상이기도 했고, 이로부터 드로이젠은 역사 발전에서 위대한 개인과 국가를 강조하는 역사관을 전개하였다. 드로이젠은 역사 연구의 과제를 인륜적 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라 보았고, 이는 자연스럽게 인륜적 힘을 이끄는 역사상의 위인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또한 드로이젠은 세 가지 인륜적 공동체 중에서도 현실적 공동체, 특히 '권력'을 가장 중시했고, 권력을 국가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매개라고 파악하였다.[3]

4. 명예

5. 참고 문헌



[1] 현재는 폴란드령이다.[2] 드로이젠은 랑케의 객관성 추구에 대해 '환관적 객관성'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3] 이는 역사를 인간의 자유 의지의 확장과 확인 과정으로 보면서 그 정점에 국가를 두었던 헤겔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드로이젠은 랑케와 마찬가지로 역사학을 경험적인 과학으로 정립하고자 하였기에, 헤겔이 역사를 사변적인 철학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에는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