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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8:18:10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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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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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jpg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1. 개요2. 배경
2.1. 전조2.2. 소련의 동태2.3. 인명 피해2.4. 일본의 종전 묵살
2.4.1. 일본의 포츠담 선언 '묵살'
2.5. 미국 여론
3. 원자폭탄4. 작전 준비 과정
4.1. 원자폭탄 투하 지점4.2. 제509혼성전대(509th Composite Group)4.3. 세계 최초의 핵폭격기, 에놀라 게이4.4. 경고 폭격 논의4.5. 기민한 작전 변경
5. 1차 투하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5.1. 일본의 반응
6. 2차 투하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6.1. 일본의 반응
7. 일본 외의 반응
7.1. 미국
7.1.1. 해롤드 애그뉴
7.2. 한반도7.3. 소련7.4. 그 외
8. 3차 투하 계획 (취소됨) - 1945년 8월 19일9. 종전 후
9.1. 기밀 문서9.2. 복구와 피해자 보상9.3. 일본의 여론9.4. 세계적 여론
10. 한국인 원폭 피해자
10.1.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한국의 시각
11. 논쟁
11.1. 전쟁을 끝낼 수단이었다11.2. 학살의 정당화는 가능한가11.3. 일본이 재앙을 피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11.4. 수정주의적 관점11.5. 일본의 항복에 미친 영향의 여부
11.5.1. 전통주의적 관점(원폭 투하로 항복)11.5.2. 수정주의적 관점(소련군 참전으로 항복)11.5.3. 절충론
12. 기타13. 관련 작품14. 관련 문서1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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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広島·長崎原子爆弾投下) 혹은 일본에의 원자폭탄 투하(日本への原子爆弾投下) 사건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일본 제국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일본 제국의 도시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으로, 현재까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핵무기를 실전에 투입한 사례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이 사건에 대한 윤리적, 법적, 군사적 논란은 오랜 기간 학계에서 양극화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원자폭탄의 사용이 정말로 필요했는지 여부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수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계를 분열시키고 있다.[1]

2. 배경

원래 맨해튼 계획우란프로옉트를 우려하여 이를 선점하고자 미국, 영국 공동계획하에 추진된 것이지 실제로 핵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대의 핵무기는 아직 시험조차 되지 않은 신병기였으므로 잘못 투하하였다가 불발이라도 나면 오히려 추축국에게 기술만 고스란히 넘겨주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기껏해야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트럭(Truk. 현재의 미크로네시아 연방 추크 주) 제도에 투하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을 뿐이었는데 이것도 해상에 투하해야 핵기술 회수와 습득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중일전쟁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 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다. 특히 식민지로 삼고 있던 한반도,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 등을 깔끔히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같은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까지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 가지고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아울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 또한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여 국체 보존과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일방적으로 해 버렸는데 이렇게 되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은 전쟁 지속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마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제국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끈질길 정도로 저항하였고, 이 저항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났다. 이 두 전투에서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곧 있을 몰락 작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써 핵무기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 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그 20억 달러를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로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선거는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앞선 상륙 작전에서 유권자들의 아들들은 죽어나갔고 그 와중에 전쟁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20억 달러나 들여서 완성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쓰지 않았다는 건 당시 유권자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러한 당시 미국 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존 키건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

2.1. 전조

미군은 이미 3년 전에 둘리틀 특공대로 하여금 일본 본토를 타격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결과를 미군은 잊지 않고 자신의 노하우로 삼아 일본 열도를 타격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이 둘리틀 작전으로 얻은 경험으로 미군은 이 작전도 수행하게 되었다.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 당시의 타겟은 도쿄나고야 등이었는데 당시에는 일본 제국에게 '우리는 너네 안방을 부술 수 있다'는 것만 보여주었다.[2] 하지만 일본 제국은 계속 미국에게 기어올랐고 일본 제국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에도 무의미한 발악을 계속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미군은 결국 일본 제국 본토에 유사 이래 최대의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작전의 타겟은 둘리틀 특공대와는 달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결정되었다.

2.2. 소련의 동태

독소전쟁이 끝나 가면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소련 몫도 늘어나니 태평양에서 소련의 영향을 줄이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미국이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이 항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 소련은 한숨 돌린 상태였던 반면 일본 본토의 일본군은 이미 전쟁 수행 능력 태반을 잃어서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곧이어 소련군이 기갑 웨이브를 펼치며 만주, 한반도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고, 안 그래도 태평양 방면으로의 병력 차출로 약화되었던 관동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빠르게 무너져 항복했다. 미국이 두려워한 시나리오는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자신들과 달리 육로로 연결된 소련이 동북아를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놓는 일이었다. 일제의 항복 이후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듯 점령지로 진주하여 한반도에서 마주쳐서 이를 갈라먹고 그걸 기점으로 냉전 상태에 돌입한 것도 '소련보다 빨리 극동에 입성하기 위해 핵을 사용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일본이 항복했을 때 소련은 만주의 관동군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삼팔선 이북의 한반도를 8월 중으로 재빠르게 점령했지만, 당시 미국은 병사 한 명조차 한반도에 없었고 일본 오키나와에 있었으며 9월 중순에야 서울에 입성했다. 결과적으로 소련보다 한 발 늦은 것이다.[3]

2.3. 인명 피해

일본은 승리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다음에도 귀축영미, 1억 총옥쇄라는 말로 국민들을 세뇌시켜 소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일본을 공격하면 상륙 시 너무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임이 불 보듯 뻔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미국 육군부 장관 헨리 스팀슨도 전후에 했다. [4].물론 이는 어느정도 민간에 경각심을 주기위한 발언임을 생각해야 하며, 2차 대전 당시 참모장들은 본토 침공을 하더라도 2만에서 2만 5,000명 사이를 예상했고, 당대 최고 추산은 6만 3,000명, 민간에서 뻥튀기한 수치가 10만이었다. 따라서 해당 발언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전후 사망자가 미군 약 40만과 영국군(인도 등 영연방 포함) 45만 명임을 생각하면 원폭 없이 전쟁이 끝났을 시 미영국군 총합 사망자가 100만 명 정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이는 일본측 피해는 뺀결과이며, 만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된 몰락 작전이 실제로 벌어졌을 경우, 핵탄두 20여 발과 화학탄까지 사용하는 걸 상정한 작전이라 실제로는 일본측 피해가 100만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2.4. 일본의 종전 묵살

원폭 투하 결정의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 일본은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일본 해군은 궤멸 수준을 넘어 구레 군항 공습으로 사실상 강제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5] 일본의 국민들은 매일같이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자원도 없어서[6] 군부에서 준비시키던 본토 결전용 병기라고는 죽창, , 일본도 같은 단순한 냉병기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결호작전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군은 투석기를 포병으로 편제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투석기와 죽창을 만들 나무마저도 바닥난 상태였다.

미국은 일본에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을 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다'는 전쟁사에 드문 관대한 선언을 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이 당시 추축국의 상황을 보자면 1945년 5월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나치 독일이 항복했으며 일본 제국만이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2일이 되자 미국은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기로 결심한다.

말이 본토 결전이지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과는 다르게 본토에서조차 전쟁 속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 독일도 본토 방어전 후반부에는 전력이 후달려서 소년병을 징집하는 등 별 짓을 다 하긴 했지만 적어도 국민돌격대를 창설하여 제식 무기나 노획한 무기와 탄약도 지급했으며 이후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할 당시에도 무장한 시민 대부분은 적어도 칼이나 죽창 같은 냉병기가 아니라 총을 가지고 싸웠고 지휘관들의 역량 역시 일본군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또한 망가진 전차를 포탑만 수리해서 고정포대로 써먹는 등 일본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본 지휘부와 기득권층은 아무튼 오로지 항복할 때 천황제 유지[7]라는 조건을 얻어내겠다며 자국민들을 반자이 돌격카미카제옥쇄 등으로 갈아넣으며 허세를 부려서 조건부 항복을 얻어 내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 이것이 1억 총옥쇄라고도 불리는 결호작전. 이래놓고 정작 미군정이 시작되자 여기에 복종하는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미국은 '도대체 일본인어떻게 된 미친 놈들인가?'라는 식의 연구도 이루어졌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의 명저 국화와 칼이다.

미국은 이내 일본군은 무사도 프로파간다와 그들의 경직된 사회가 윗선에 명령에 의한 죽음을 비극이라기보단 명예롭고 아름답게 여기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일본군 수뇌부는 농담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킬수만 있다면 모든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항복하지 않을 각오였다. 이 부서진다는 위 표현처럼, 수뇌부 입장에서 국민들의 희생은 피해야 할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문화였다.

이 시점에서, 태평양 전쟁은 돈과 힘 싸움이나 전략전술이 아닌, 미국이 일본의 '할복으로 대표되는 자결 문화'를 어떻게 극복하고 전쟁을 효율적으로 이길 것인가의 문화 싸움으로 국면이 바뀌게 된다. 미군과 미국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일본과의 전력차가 압도적이고 결국에는 항복을 받아내겠지만 일본 섬멸의 날까지 자국민들이 계속 희생되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따라서 일본 초토화 작전인 몰락 작전이 고려되긴 했으나 실행되기는 어려웠다.

미국 OSS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8]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이미 압도적인 적 앞에서 무력한 일본군 수뇌부가 자폭공격이 낭만적인 것 처럼 미화하는 건 물론이고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9]'며 자살 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당사자가 거부반응을 보인다 해도 사회적으로 수치를 주고 압박해 차라리 명예를 지키는 죽음으로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든다고 보았다. 결국 국가신토를 모토로 하는 신앙과 전체주의가 결합된 상태의 일본은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을 받아야 항복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 핵 투하를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4.1. 일본의 포츠담 선언 '묵살'

미국은 이미 최후의 수단으로 핵 투하를 결정했음에도 마지막으로 일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할 것을 권고한 것인데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7월 28일 오후 4시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여기서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을 표현만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고 발언했다.

일본어에서 묵살(黙殺, 모쿠사츠)이라는 말은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무시한다(ignore)'는 의미고 또 하나는 '유보한다(no comment)'는 의미다. 정치나 외교의 영역에서 'no comment'는 명시적인 인정 또는 거부의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안이나 문제는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수는 없다, 논평을 삼가겠다는 의미다. 특히 일본어에는 '하라게이(腹芸)'라는 용법이 있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본마음(혼네)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다테마에)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으로서 어떤 사안에 대해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내심을 전달하는 완곡어법 기술을 말한다. 일본 정치에서는 하라게이를 잘 하는 사람, 즉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오히려 뛰어난 정치가로 받아들여졌다.[10] 즉 스즈키 총리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겠다고 발언한 것은 제 딴에는 항복 협상에 응할 용의는 있지만 일본 군부의 입장, 일본 국민들에 대한 정부의 체면 등도 있으므로 직접적으로 수락 또는 거부의 의사를 밝히지는 못하기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이를 잘 알아서 조율해주기를 바란다[11]는 복잡한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며 "거부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 즉 굳이 말하자면 'no comment'의 뜻이었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일본인이 아닌 사람은 그 진의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설령 완곡하게 보류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한들, 이제 그만하고 항복하겠다는 말이 훨씬 더 직관적이었을 것이다. 국가 존폐 위기의 벼랑 끝까지 몰린 상태에서까지 에둘러 말하며 항복 의사가 뚜렷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 군부의 광기를 목격하며 그 광기에 침식된 미 군부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고 결국 눈에 쌍심지를 키게 된다.

심지어 일본의 국영 통신사인 도메이통신은 스즈키 총리의 발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묵살'을 'no comment'로 표현하지 않고 'ignore'(무시하다)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또 라디오 도쿄에서도 역시 'ignore'로 번역하여 보도했다. #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번역 과정에서 잘못 전달되었다는 견해는 미국 NSA 문건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가 이미 항복해 유럽전선이 종결되었고 일본만이 홀로 광기의 전쟁을 이어가는 엄중한 상황에서 노 코멘트니 묵살이니 하는 애매모호한 표현은 미국 정치권, 정부 그리고 군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일본 수뇌부 본인들은 어떤 속마음으로 말을 내뱉었든 간에 당장 오랜 전쟁으로 전 세계가 고통 받아왔고, 이제 그 끝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이 원하는 답변은, 항복 할 거야, 안 할 거야 둘 중 하나였고 하라게이니 뭐니 하는 건 미국으로서는 이해해 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스즈키가 표현을 에둘러 했다 하더라도 앞뒤로 붙은 "선언은 의미가 없다"와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발언이 덧붙은 만큼 ignore 였든 no comment였든 하물며 reject였든 대답을 "NO"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미국 역시 黙殺을 어떻게 번역해야 했는가에 대한 고찰을 했을 뿐이지 스즈키 간타로의 발언을 두고 "(빠른 시일 내에)일본이 항복할 의사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마치 '거부한다' '묵인한다' 정도의 차이로, 그 정도가 어떻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항복의 의미가 없었음은 명확하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막대한 재앙을 국가 간에 다루는 자리에서 함부로 쓸 말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연합국 측 언론은 일본 측이 발표한 'ignore'를 보다 직접적인 거부(reject)라는 표현으로 바꿔 보도했다. 영국 BBC가 "일본이 연합군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Japan formally rejected the Allied ultimatum)"고 보도했고, 7월 30일 뉴욕타임즈가 "일본이 연합국의 항복 촉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Japan Officially Turns down Allied Surrender Ultimatum)"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물론 이는 일본만의 하라게이와 달리 자연스러운 번역의 흐름이다. "항복 요구를 묵살했다"와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비슷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시를 동의로 해석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2.5. 미국 여론

그 당시 미국인들은 일제의 기습 공격에 눈이 뒤집혀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는 1812년 미영전쟁 이후 처음으로 진주만 공습으로 미 본토가 공격당한 것만으로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고 유럽 전선의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세계적으로 종전 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큰 희생을 치르느니 해상 봉쇄를 실시해 그냥 다 굶겨 죽여버리자"는 여론도 해군을 중심으로 매우 강하게 대두되었다. 심지어 마침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라 일본의 모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버리는 전략도 있었다. 이 가운데 해상 봉쇄는 항구에 기뢰를 깔아두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더구나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졌던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강력해서[12] 히로시마에 대한 핵폭격 당시에도 더 치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투하 전에 사이렌을 울려서 시민들이 하늘을 보게 하고서 터뜨려서 폭발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최대한 유도해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겠다고 하거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급 도시를 그대로 완파하지 못한다고 여겨 핵폭탄으로 소방 등의 도시 기능이 마비된 히로시마에 한 번 더 소이탄 폭격을 감행해 다 태워 흔적도 남기지 말자는 각양각색의 의견도 올라왔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이 취소된 건 원자폭탄 피해가 소이탄에 묻히면 원자폭탄의 정치적 상징성이 줄어든다는 다소 기묘한 이유였다. 반대로 정치적 상징성만 빼면 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당시 미국 여론은 위에 인용한 키건의 표현대로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생각에 가득한 상태였다.

3.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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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맨" - 나가사키시(위)
"리틀 보이" - 히로시마시(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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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보이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팻 맨은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2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넘김으로써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는 원리다. 1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다른 쪽 우라늄 덩어리로 발사하여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총류형) 상대적으로 길쭉한 모양을 지닌다. 리틀 보이는 너무나도 원리가 간단하기 때문에 불발의 우려가 거의 없었으며 단 한 번의 실제 폭발 실험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물론 우라늄 235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실제 실험 없이 바로 실전 투입한 이유 중 하나다.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실험한 것은 팻 맨 모델이다. 대신 리틀 보이는 한 마디로 비효율적이며, 폭발력도 아래 설명하는 팻 맨에 비해 낮은 편이다.

팻 맨은 중심부를 비우고 그 속에 중성자원을 넣은 플루토늄 구체를 폭축렌즈를 이용, 모든 방향에서 압축시켜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내폭형).[13] 금속을 누른다고 압축이 될까 싶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직접 쥐어짜는 게 아니라 내부 폭약의 충격파를 이용해 알루미늄에 투사하고, 투사한 충격파를 받은 우라늄-플루토늄 복합 코어와 중성자 점화기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폭발하는 것이다.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주조해낸 플루토늄 239라면 구멍이 송송 난 현무암 같은 조직을 보인다.[14]

이 폭축렌즈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똑같은 압력으로 적절히 플루토늄을 쥐어짜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제작이 매우 어려웠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희대의 천재인 존 폰 노이만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이것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리틀 보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별명이었으며 팻 맨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별명이었다.

4. 작전 준비 과정

4.1. 원자폭탄 투하 지점

원자폭탄 투하 지점에 대한 최초 논의는 1943년 5월에 있었으나, 아직 원자폭탄이 완성된 단계도 아니었으므로 체계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럽 전장보다는 일본에 투하한다는 대전제 정도만 합의되었으며 남태평양의 트럭섬 일본군 기지가 거론되었다.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원자폭탄 완성이 거의 가시권에 들어온 1945년 4월,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원수가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Jr.) 소장에게 원자폭탄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선정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그로브스 소장은 주요 책임자들을 모아 '원자폭탄 목표 선정 위원회'(Target Committee)를 조직하여 '어디를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원회의 멤버 중에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존 폰 노이만 등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목표 선정 위원회는 먼저 선정 기준을 정했다.
  1. 지름 3마일(4.8km) 이상이고 주요 목표물이 있는 도시: 일정한 규모 이상의 큰 도시여야 하고, 순수한 민간인 거주 지역만 폭격한다면 나중에 욕 먹기 딱 좋았으므로 중요한 군사적 표적도 있는 도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뒤에 서술되어 있지만 히로시마에는 육군 2총군 사령부와 많은 병력이 있었다.
  2. 원자폭탄 폭발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 즉 기존에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원자폭탄만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하는지를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3. 1945년 8월까지 폭격을 받을 계획이 없는 곳: 그래서 일본 본토의 각 도시들이 폭격 예정 경고문을 받고 초토화되고 있을 때도 소수의 몇몇 도시들에는 폭격 예정 경고문이 날아가지 않았다고.

그런데 목표 선정 위원회는 자신들의 일이 매우 어려운 업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당시 일본에 "더 이상 폭격할 만한 대상 도시가 거의 없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도쿄를 비롯해서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 좀 그럴 듯한 군사 목표가 있는 일본의 주요 도시는 이미 커티스 르메이제21폭격기사령부 휘하 수백 대의 B-29들이 들이닥쳐 소이탄과 고폭탄을 가리지 않는 공습으로 이미 싹 다 불태워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커티스 르메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이 당시까지 원자폭탄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즉 통상 폭격만으로도 싹 쓸어버릴수 있는데 굳이 요란을 떨어가며 특수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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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 직후의 도쿄[15]

목표 선정 위원회는 필사적으로 일본의 남은 도시중에서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곳을 찾았고, 대상 도시를 다시 AA, A, B의 3개 등급으로 구분했다. 위의 기준에 따라 AA를 교토히로시마, A를 요코하마고쿠라(현 기타큐슈), B를 니가타로 선정했다. 즉, 히로시마는 원래부터 최우선적인 원자폭탄 폭격 목표지였다. 참고로 일본 천황이 거주하는 황거에 원폭을 투하하면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았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목표 선정 위원회에서 '황거는 다른 어떤 목표보다 명성이 높지만 전략적인 가치는 가장 작다'고 일축했다. 그리고 실제로 황거에 투하하면 항복 선언을 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16] 원자폭탄 목표선정 위원회가 최초로 권고한 투하 목표(영문). 교토와 히로시마가 1순위에 올라있고 나가사키는 아직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교토 투하에 대해서 당시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War, 현재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제동을 걸었다. 스팀슨이 필리핀 총독 부임 당시였던 1920년대에 여러 차례 교토를 방문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1893년에 신혼여행을 갔던 도시도 교토였다. 교토 방문을 통해 일본 문화에 감명을 받은 스팀슨은 인류의 문화 유산이자 일본 문화의 정수인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교토를 원폭 투하 명단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인 교토에 원폭을 투하하면 일본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해 전후(戰後) 처리 과정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물론 공식적 입장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였으며, 도쿄 천도 이후에도 일본인들에게 여전히 '정신적 수도'로 남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다. 따라서 교토는 일본의 일개 대도시 1이 아니라 일본의 정체성을 응축한 공간이기 때문에 스팀슨의 이러한 지적은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이 무렵 독일을 분할 점령하며 유럽에서 전후(戰後) 처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戰後)의 정치 영역까지 고려한 스팀슨의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었다. 위에서 황거를 제외했을 때 사용한 근거는, 천황의 생사를 제외하면 교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기도 하다.

물론 스팀슨 장관의 견해에 대해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동의하지 않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뒤이어 원자폭탄까지도 만들어낸 추진력 만렙의 이 젊은 장군은 일본의 전통 문화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정신적 수도'인 교토에 원자폭탄을 한 방 먹여야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표 선정 위원회가 초기 단계에서 교토를 AA 등급으로 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로브스 소장의 위세가 막강하다 하더라도 상대는 전쟁부 장관. 결국 스팀슨의 의견에 동의한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즉 민간인 주거 지역과 "옛/현 수도"는 투하 목표에서 배제하도록 주문하면서 교토가 제외되는 결정에 쐐기가 박혔다.[17]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은 스팀슨 장관에게 있어서 교토를 목표에서 제외 하는 것이 고위층의 개인적 판단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1945년 7월 교토는 제외되었고 대신 나가사키가 새로운 5대 목표지에 추가되었다.[18] 나가사키가 대신 선정된 이유는 상기 기준에 부합하는 큰 도시이며, 일본의 전쟁 수행 시설 중에서도 핵심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와 인근 사세보시에 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진수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요코하마 역시 그동안 재래식 폭격을 많이 받았던 데다 수도 도쿄와 가까웠기 때문에 목표에서 제외되었고 그로브스 소장이 승인하여 트루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한 최종 목표는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의 4개 도시로 정해졌다.

히로시마시가 높은 우선순위를 받은 이유로, 해당 위원회 보고서는 군 창고가 있고, 항구가 있는 점으로 공격의 가치가 높다는 점을 들었다. 도시를 하천이 촘촘이 지나서 소이탄의 효과가 낮은 점, 집중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언덕이 많은 점도 꼽았다. 보고서에는 쓰여있지 않으나, 위의 나가사키와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이 있는 점도 반영되었으리라 본다.

상기의 원자폭탄 목표 선정 논의 과정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이 있다. 히로시마, 고쿠라 등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1차 원폭 투하 목표'였다. 당시에는 원자폭탄을 맞고서도 일본이 항복할지 여부가 미지수였으므로 미국은 원자폭탄을 추가로 만들어내는 대로 계속해서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향후의 원자폭탄 소요를 예측하여 문서로 남긴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1945년 개발 시점에서 3개,[19] 9월에 추가로 3개, 12월까지 매 달 7개를 만들어내어 투하할 계획으로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 제국이 항복하지 않고 총옥쇄를 부르짖으며 버티는 한, 미국은 끝장을 볼 때까지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던 것이다.[20]

4.2. 제509혼성전대(509th Composite Group)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작전은 제509혼성전대에 의해 수행되었다. 제509혼성전대는 1944년 12월 7일 미국 유타주 웬도버 육군 항공기지에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오로지 원자폭탄 투하를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이다. 부대장은 그 유명한 폴 티비츠(Paul W. Tibbets) 육군 대령. 아래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에놀라 게이를 직접 조종하여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바로 그 인물이다.

폭격전대가 아니라 혼성전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부대는 B-29를 이용한 폭격뿐만 아니라 원자폭탄과 기타 장비를 수송하기 위한 수송기들도 상당수 보유했고, 무엇보다 원자폭탄을 현지에서 정비하고 조립할 수 있는 해군 인원들과 과학자 그룹들도 명목상으로는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통합비행단 중에는 '1st Air commando Group'이 유명했다. 티니안 현지에서 활동한 이들 과학자들은 따로 '앨버타 프로젝트'(Project Alberta 혹은 Project A)로 불렸다. 196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루이스 앨버레즈도 이 당시에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소장파 과학자로 제509혼성전대으로 보내져 티니안 섬에서 박박 구르고 있었다.[21]

일본 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에 배치된 제509혼성전대의 핵심은 휘하의 제393폭격비행대대(393rd Bombardment Squadron)였다. 이 비행대대는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을 수행할 당시 기준으로 총 15대의 B-29 폭격기를 보유했다. 근데 이 B-29 폭격기들은 그냥 보통의 B-29가 아니라 이른바 "은쟁반 B-29"(Silverplate B-29)라 불린 특별한 모델들이었다. 은쟁반 B-29들은 후미 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무장은 모두 철거하였으며, 가변피치 프로펠러[22], 공기압으로 작동하여 신속하게 개폐할 수 있는 신형 폭탄창, 초대형 폭탄을 장착하기 위한 영국제 G 타입 폭탄투하기 등을 갖추었다. 나중에 "은쟁반"이라는 단어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을 가리키는 암호명으로 발전하였다.

509전대에서 B-29를 다룰 비행요원들도 유럽전선 등에서 충분히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로 채웠다. 부대장이었던 폴 티비츠 대령부터가 이미 미 육군항공대에서 가장 뛰어나고 경력이 많은 B-29 조종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유럽/북아프리카 전선에서 B-17로 43회의 출격을 달성했었다. 그 외의 대원들도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투하 작전에서 에놀라 게이에 탑승한 폭격수 토마스 페러비 소령은 무려 63회, 역시 에놀라 게이에 탑승한 항법사 더치 밴커크 대위는 57회의 전투 비행 기록 보유자였다. 같은 393폭격비행대대 소속의 폭격수 커미트 비헌 대위는 그 폭격 솜씨가 워낙 예술적이라 아예 자신의 탑승기가 'Great Artiste(위대한 예술가)'로 이름 붙었을 정도다.

509전대는 유타주 웬도버 육군 기지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이 훈련은 주로 고도 9,000m 정도의 성층권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 폭탄 투하 직후 60도 경사로 급선회 / 급강하하여 최대 속도로 도주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 투하 방식은 바로 폴 티비츠 대령이 개발한 것인데, 원자폭탄 폭발의 충격파에서 투하 폭격기가 안전하게 이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폭격 후 그냥 수평 비행으로는 절대로 폭발 충격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서 급선회·급강하를 통해 B-29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속도를 내어 폭심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심이었다. 아래 히로시마 리틀 보이 폭격 영상을 보면 이 급선회·급강사 기동이 나타나 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까지도 509전대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투하할 지 잘 모르고 있었다. '원자폭탄'이라는 이름도 몰랐으며, 그냥 무언가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최신의 초대형 폭탄 정도로 알고 있었다. 원자폭탄의 원리와 위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부임 전에 로스 앨러모스에서 핵폭탄과 핵물리에 대해 교육을 철저히 받은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 원자폭탄 개발과 관리를 책임진 파슨스 대령, 그리고 원자폭탄 조립과 관리를 담당한 과학자 그룹 정도 뿐이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부대원들조차 원자폭탄이 뭔지 몰랐다는 것은 맨해튼 계획과 원폭 투하 작전이 얼마나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뒤에 나오지만 대원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히로시마 작전 직전의 최종 브리핑이었으며, '원자폭탄'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히로시마를 향해 출격 비행 중인 에놀라 게이 안에서였다. 일본 폭격 작전을 총지휘하던 커티스 르메이조차 이를 모른 채 이전부터 "왜 상부에선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니가타는 폭격 목표에서 제외시키는 거요?"라고 항의했다.

509전대는 폭격 훈련을 마치고 1945년 5월에 티니안 기지에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509전대가 티니안에 배치될 무렵, 기지 전체에는 509가 전쟁을 끝내려 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한다. 물론 무엇으로 전쟁을 끝내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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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초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 불과 몇 달 전까지 조그마한 일본군 비행장이었고 그 주변은 열대 밀림이던 곳이다. 여담으로 1945년 당시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은 미국 본토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다.

여담으로 509전대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제509폭격비행단(509th Bomb Wing)로 이름을 바꾸어 미합중국 공군으로 이관되어 현재도 존속한다. 휘하에 제393폭격비행대대도 그대로 있다. 미국 미주리 주 화이트맨 공군기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육군항공대 시절의 B-29부터 시작해서 B-47, B-52, FB-111을 운용해 왔고 현재는 B-2를 운용하며 미국의 공중 핵 억지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이다. 2005년 2월부터 에 지속적으로 배치되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분쟁에 대비하기도 하며, 2015년 1월 6일에는 에놀라 게이 파일럿 폴 티비츠의 손자가 제509폭격비행단의 비행단장이 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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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실전 투하 작전 부대인 509전대의 후신 제509폭격비행단의 부대 휘장. 버섯구름이 이 부대의 역사를 말해준다.

4.3. 세계 최초의 핵폭격기, 에놀라 게이

에놀라 게이(ENOLA GAY)[25]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이다. 미 육군 항공대 제509 혼성전대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기체 번호 44-86292. 기체의 심볼은 노즈 아트(Nose Art)로 새겨진 기수의 ENOLA GAY와 수직 미익(꼬리 날개)의 R.[26] 멘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 Mk-1 코드네임 리틀 보이의 모기(母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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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Enola Gay" 일련번호 44-86292,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역 당시의 전형적인 무도장 은빛 기체 형상이다. 다만 에놀라 게이와 복스카는 제509 혼성 전대에서 운용한 이른바 '은쟁반 B-29(Silverplate B-29)'로서, 일반형 B-29와는 차이가 있다. 외견상으로 가장 큰 식별점은 은쟁반 B-29는 기체 후미 총좌를 제외한 모든 터렛 총좌가 제거되어 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하여 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겼다. 이름의 유래는 제509 혼성 전대의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결혼하기 전의 이름)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로 명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사실 폴 티비츠는 부대장이었고 이 기체의 기장은 아니었다. 기존에는 히로시마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 대위를 빼고, 히로시마 작전을 자신이 맡았다는 이야기가 국내에 많이 퍼져 있었으나 이는 최근에 국내에 알려진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부정된다.

폴 티비츠 대령은 제509 혼성 전대를 창설할 때부터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는 자신이 담당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사람이고, 원자폭탄 투하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즉 1945년 8월 4일의 최종 폭격 훈련에서도 원래 기장인 로버트 루이스 대위를 부기장 자리에 앉히고 자신이 직접 기장 자격으로 투하 훈련을 진행함으로써 본인이 원자폭탄 투하 작전에서 비행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27] 애당초 폴 티비츠 대령은 전대 사령관으로서 부대의 B-29 15기를 모두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 물론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는 자신이 실제 폭격을 진행할 것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꽤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 기체는 1945년 8월 5일, 그러니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하루 전까지도 공식적인 기체명이 없었고 노즈아트도 없었다. 그냥 호출부호 '빅터 82'(Victor 82) 로만 불렸다. 그 날 저녁에야 폴 티비츠 대령의 지시로 Victor 82의 기수 부분에 ENOLA GAY라고 마킹을 한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대위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愛機)에 커다랗게 칠해진 '에놀라 게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이런 염병할, '내' 폭격기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라고 불 같이 화를 내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계급이라 이미 에놀라 게이는 폴 티비츠 대령의 비행기가 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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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직전 에놀라 게이 조종석 창문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드는 폴 티비츠 대령(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28]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에놀라 게이는 3일 뒤 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에도 참가했다. 다만 이 때의 임무는 폭격이 아니라 고쿠라 시에 대한 기상정찰이었다.

에놀라 게이는 2번의 원자폭탄 투하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기체 보존이 결정되어 1946년 7월에 미국 애리조나주 데이비스몬산 기지로 이송되었다. 1946년 8월 육군항공대에서 제적되어 스미소니언 박물관 명의가 되었으며, 1953년 12월에 앤드류스 공군 기지에서 해체 보존되었다. 여기서 보존한 이유는 당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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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박물관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전시 중인 에놀라 게이

2003년에 복원이 완전히 완료되어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를 전시한다고 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에놀라 게이 전시 안내문도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최대한 기술적인 사양 및 간략한 설명 위주로 되어 있다.[29]

나가사키에 팻 맨을 날린 비행기의 이름은 '복스카(Bockscar)'로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는데, 정작 이 사람은 원폭 투하를 담당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나가사키 작전 문단을 보면 된다. 이 기체는 현재 오하이오 주에 있는 미 공군 국립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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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게이 앞부분에 쓰여진 '첫 핵폭탄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30]

에놀라 게이의 마지막 생존자는 시어도어 밴 커크(Theodore Van Kirk)로 기체의 항법사였다. 2014년에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4. 경고 폭격 논의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 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라는 의견처럼 효과가 미지수여서 묻혀버렸다. 애초에 미국은 도쿄 대공습을 통해 일본에게 경고했음에도 일본이 무시하자 핵 폭탄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쓴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고공 폭파시켜서 그 위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제정신 박힌 사람에게나 효과가 있는 것이지, 정신이 나가서 반자이 돌격카미카제 공습을 해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갔던 일본에게 효과가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곳을 미리 예고해서 민간인이 대피하게 함으로써 실제 피해는 줄이면서 심리적 효과를 더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혹시 원자폭탄이 불발되면 차후 미국이 하는 모든 제안이 일본 대본영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일본인들이 연합군 포로를 히로시마에 끌어다 놓고 인간 방패로 삼으면 어쩔 거냐는 의견도 나와서 기각되었다. 원래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독일을 폭격하던 당시 목표가 된 도시에 아군 포로가 있음이 확인됐더라도 거리낌 없이 폭격했는데, 아군 포로 희생을 막으려고 폭격을 중단하면 앞서 말했듯이 중요 지점마다 연합국 포로를 데려다 놓아서 인간 방패로 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일단 폭격을 당하는 연합국 포로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유명한 소설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악명 높은 드레스덴에서 아군의 폭격을 당한 경험으로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썼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가 20여 명 정도 있었다. 전후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시체가 남아있는 사람은 단 세 명. 나머지는 말 그대로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에서는 이런 것을 감안해 OSS에서 윤여옥을 보내 포로수용소 위치를 밝히는 작전을 수행한다.

4.5. 기민한 작전 변경

원래 작전상으로 리틀 보이는 기폭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기체에 싣고 이륙하도록 되어있었다. 일단 리틀 보이는 우라늄 기반의 원자폭탄이며, 우라늄이 물에 들어가면 물의 감속재, 반사재로서의 작용으로 인해 임계질량보다 작은 질량으로도 연쇄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리틀 보이는 포신형 폭탄이었으므로 추락 과정에서 포신 내에서 우라늄 발사체가 흘러내려 '자동 조립'될 위험성도 있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추락하게 된다면 임계사고를 막기 위해 폭탄을 분해해 뿔뿔이 흩어놓도록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지시한 사람도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리틀 보이도 4.5톤으로 B-29의 적재 한계인 9톤의 반이나 달할 정도로 매우 무거웠으며, 일본까지의 왕복 비행을 위해 연료를 만재해야 했으므로 이륙 중량을 초과할 정도였다. 또한 주둔지의 지질 때문에 활주로 노면 상태도 엉망이었으므로 이륙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 이륙하다 추락하면 끝장이었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유폭할 경우 해당 비행장과 부대원 전원, 좀 넓게 잡으면 섬 전체가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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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인해 폭탄 관리 담당장교[31] 윌리엄 파슨스(William S. "Deak" Parsons) 미합중국 해군 대령은[32] 이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당초 작전을 변경하여 조립 → 탑재 → 이륙 → 투하 순서를 탑재 → 이륙 → 조립 → 투하 순서로 바꾸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만약 원자폭탄을 탑재한 B-29가 이륙하다 추락하더라도 최소한 원자폭탄이 유폭되는 것은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자폭탄의 조립이 평시에도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이걸 쉴 새 없이 흔들리고 프로펠러의 굉음이 몰아치며 발 딛고 서있기도 어려운 B-29 폭탄창에서 해보겠다는 이야기.

참고로 파슨스 대령은 미 해군에서 손 꼽히는 병기 전문가였으며, 특히 탄도학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파슨스 대령은 저 유명한 VT 신관의 개발 책임자 중 한 명이며,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초기부터 참여했고, 맨해튼 프로젝트 총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파슨스 대령이 상부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았냐면, 그로브스 장군이 원자폭탄 투하 작전 감독을 위해 티니안 기지에 토마스 패럴(Thomas F. Farrell) 육군 준장을 파견하면서 "파슨스를 전사하게 내버려 두지 마. 우리는 그가 필요해!(Don't let Parsons get killed. We need him!)"라고 따로 신신당부를 할 정도로 공밀레였다.

무엇보다 원자폭탄 중 포신형 폭탄인 리틀 보이의 '포신'을 설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원자폭탄 개발에서부터 실제 투하 작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주도한 맨해튼 계획의 핵심 중 핵심인 인물이다. 트리니티 핵실험 때도 직접 B-29에 타고 상공에서 폭발 현장을 관측하고 있었다.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을 만나 리틀 보이에 장착될 우라늄 코어(물론 맥베이 함장은 이게 뭔지 몰랐다)를 적재하도록 하고, 이를 티니안 섬까지 수송하도록 명령을 전달한 것도 파슨스 대령이다.[33]

파슨스 대령은 독단적으로 작전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이 계획을 직속 상관인 토마스 패럴 육군 준장에게 보고하였다. 물론 에놀라 게이를 조종할 폴 티비츠 대령에게도 당연히 알렸다. 패럴 준장은 폭탄을 이런 식으로 조립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한 파슨스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34]
"없습니다. 하지만 온종일이라도 시도해 볼 참 입니다."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그로브스 소장은 깐깐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성격대로, 티니안 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고 처리하도록 지침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슨스 대령은 현지 책임자인 패럴 준장에게는 보고했으나 맨해튼에 있던 그로브스 소장에게는 이를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하단에도 언급되어 있는 '파슨스 대령의 명령불복종 및 무단 작전변경 설'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브스 소장은 나중에 "내가 그때 보고를 받았더라도 그러한 작전 변경을 당연히 승인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파슨스 대령을 두둔했다.

어찌되었든 패럴 준장은 작전 변경을 승인했으며, 파슨스 대령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는 총 11단계나 되는 원자폭탄 조립 과정을 수십 번이나 반복 연습했다. 처음에는 원자폭탄 보관실에서 연습했고, 원자폭탄이 에놀라 게이에 탑재된 이후에는 그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B-29 폭탄창 내부에 들어앉아 원자폭탄 조립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파슨스는 오후 늦게까지 연습을 거듭하다 공구에 손을 다쳐 피를 흘렸다. 이것을 보고 놀란 패럴 장군이 돼지 가죽으로 만든 좋은 장갑이 있다면서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파슨스는 "맨손으로 감을 잡아야 합니다."라며 그것을 거절하고 연습을 계속했다. 이것은 파슨스가 괜히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 밀리터리 계에는 파슨스 대령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무단으로 원자폭탄 조립과 기폭 순서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으나, 이는 일본 측에서 원자폭탄 작전을 비난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 그대로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서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여러 문헌들[35]을 통해 완벽히 부정되었다.[36] 그는 원자폭탄의 현장 책임자로서 상관에게 보고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기민하게 작전을 변경한 것이며, 그의 책임감이 결국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를 완벽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국에 번역된 문헌에는 종종 윌리엄 파슨스 '대위'로 적혀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번역자들이 'captain' 계급이 미국 육군에서는 대위이지만 미국 해군에서는 대령을 의미하는 것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이다. 윌리엄 파슨스는 히로시마 작전 당시 대령이었으며 전후 준장-소장까지 승진했다.

5. 1차 투하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Atomic bombing of Hiroshima
広島市への原子爆弾投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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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hort time ago, An American airplane dropped one bomb on Hiroshima, and destroyed its usefulness to the enemy. That bomb has more power than 20,000 tons of TNT…(중략)
방금 전, 미국 폭격기 한 대가 히로시마에 한 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폭탄은 TNT 2만톤 이상의 당량을 가지고 있으며…
- 해리 S. 트루먼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1944년 2월 당시 35만명)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맨발의 겐>에 표현된 것처럼 호위기들이 옆동네 폭격을 지원하러 기총소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 옆동네 구레도 초토화가 되는 와중에 구레 군항의 보급창이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전쟁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은 위 문단에서 설명된 것처럼 원자폭탄 최우선 폭격 목표로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고, "다른 폭격기는 손 대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던 덕분에 통상 폭격을 안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 사람들은 이런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우습게도 "트루먼 대통령의 어머니가 히로시마에 포로로 갇혀 있으며 이 때문에 히로시마는 살려두라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37]

폴 티비츠 대령은 1945년 8월 4일 대원들을 소집하여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 전 브리핑을 하면서 원자폭탄의 위력과 작전 개요를 공개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원자폭탄 투하는 처음부터 히로시마만을 유일한 목표로 하여 출격한 것은 아니다. 당시 작전에 따르면 제1 폭격 목표는 히로시마, 이어서 고쿠라, 나가사키 순서로 총 3개 도시가 목표였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폭격기가 1차 목표만을 받아 출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전략 폭격은 목표의 기상 문제 등을 고려하여 제2, 제3의 예비 목표를 여럿 받아 출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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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폭격 작전을 브리핑하는 폴 티비츠 대령(오른쪽)과 딕 파슨스 대령(왼쪽). 1945년 8월 4일 오후 4시

작전에 투입된 제509 혼성 전대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의 B-29는 총 7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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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직전 기념 사진을 촬영한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항법사 Theodore J. 'Dutch' Van Kirk 대위, 세번째: 폭격수 Thomas W. Ferebee 소령[41], 네번째: 제509 혼성 전대장이자 이날 작전 기장 Paul W. Tibbets 대령, 다섯번째: (이날만) 부기장 Robert A. Lewis 대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후미 기총수 George R. 'Bob' Caron 중사. 장교들 외에 밥 캐런 중사를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 문서 맨 상단에도 게재되어 있는, '상공에서 직접 촬영한 히로시마 원폭 폭발 장면 사진'이 바로 이 사람이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최종 기념 사진에는 승무원 2명이 빠져있다. 원자폭탄 조립을 보조하는 병기사 Morris R. Jeppson 중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이 작전의 실질적 지휘관인 윌리엄 파슨스 대령이다.

원래 이런 작전일수록 기밀을 유지하면서 출격해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 그로브스 소장은 미국 국민들의 세금이 아낌 없이 들어간 원자폭탄의 위력을 최대한 홍보하기 위해서 티니안 기지에서 에놀라 게이가 출격하는 장면을 보도진에 공개했다.[42] 덕분에 수많은 영화 촬영 기사들과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어 승무원들과 에놀라 게이 기체를 열심히 찍어댔다. 이때의 촬영이 얼마나 요란했는지 어떤 부대원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 시사회 같았다'고 증언했다.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은 이때의 광란을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사자가 격납고 앞 광장으로 걸어 나오거나, 하늘 높이 광선이 뻗쳐오를 줄 알았다."[43] 위의 출격 직전 기념 사진은 바로 이때 찍힌 것이다. 이는 사실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아직까지 티니안 섬에 남아있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고서 본국에 보고할 가능성이 충분했으며, 그렇다면 일본 방공당국에서는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B-29 출격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그냥 가정이 아니라 출격 당사자인 폴 티비츠 대령의 전후 술회에서도 등장한다.

이러한 광란 끝에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놀라 게이는 리틀 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감행한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거웠던 데다가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사실상 이륙 중량 초과였으며, 이 때문에 더 충분한 활주 속도를 얻기 위해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을 시켰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에놀라 게이가 이륙을 안하고 계속 달려나가자 활주로 끝에서 충돌하는 것 아니냐며 숨도 못 쉬었다고. 심지어 에놀라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조차도 티비츠 대령이 이륙을 안하자 자신이 조종간을 당길 뻔했다고 술회했다.

이륙 후 약 10분이 지나 타격대가 순항 고도에 올라서자,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티비츠 대령은 "판사님 일하러 가신다."라는 문장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이것은 파슨스 대령이 에놀라 게이 기내에서 원자폭탄 조립을 시작하겠다는 암호문이었다. 밤새도록 원자폭탄 조립을 반복 연습한 파슨스 대령은 병기사 모리스 젭슨 중사가 손전등을 비춰주고 작업 리스트를 불러주는 가운데 굉음과 진동이 몰아치는 B-29 폭탄창에서 리틀 보이의 조립과 장전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티비츠 대령은 에놀라 게이 기내에서 그들이 싣고 가는 신형 폭탄은 '원자폭탄'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표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 작전에서 대원들이 원자폭탄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들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폭격 1시간 30분 전, 모리스 젭슨 중사는 다시 폭탄창으로 가서 리틀 보이의 마지막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리틀 보이의 안전핀 제거 방법은 전기회로를 차단하는 폭탄 후미의 녹색 플러그 3개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붉은색 플러그 3개를 꽂는 것이었다. 모리스 중사가 나중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독실한 모르몬교 신자였던 그는 붉은색 플러그를 버려서 리틀 보이를 불발로 만들어 버릴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고 한다.[44]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제 리틀 보이는 완전히 활성화되었으며, 모리스 젭슨은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을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으로 기록에 남았다.

이러는 동안 1시간 먼저 출발한 기상관측기 3대는 각자의 목표 도시에 도달했다. 그런데 히로시마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제2 목표 고쿠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명한 하늘은 제3 목표 나가사키뿐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히로시마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B-29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히로시마 상공을 가로지르는 동안 요격기도, 방공포화도 없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기상 상황이 좋으므로 제1 목표에 대한 우선 폭격을 제안하였다. 이 무선 보고를 수신한 에놀라 게이의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폭격 목표 히로시마"를 선언하였다.

이 상황을 히로시마의 시각에서 다시 구성해보면 우선 아침 7시, 기상관측 임무를 맡은 B-29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이 고고도에 유유히 떠있는 이 B-29를 목격했다. 공습 경보도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면 그 당시 일본 시민들은 B-29의 폭격은 보통 수백 대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한두 대 출현하는 건 정찰 임무 같은 것이라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일본 군부와 국민들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폴 티비츠 대령이 호위 전투기도 없이 B-29 두세대만 단독으로 보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하는 일종의 기습 작전을 짜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약 1시간 뒤 아침 8시, 히로시마 상공에 다시 3대의 B-29(그레이트 아티스트, 빅터 91, 그리고 에놀라 게이로 구성된 본 타격대)가 나타났다. 다시 공습 경보가 울렸지만 역시 히로시마 시민들은 하늘 높이 떠 있는 B-29들을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아침밥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나중에 히로시마 생존자들의 증언 기록을 보면 "B-29 두 대는 바짝 붙어서 앞서고 있었고(에놀라 게이와 그레이트 아티스트) 그 뒤에 또 한 대가 좀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빅터 91)"고 하여 본 타격대의 포메이션까지도 정확히 기억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에놀라 게이는 최종 투하 직전 목표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티비츠 대령, 파슨스 대령,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눈 아래 펼쳐진 도시가 최종 폭격목표 히로시마임을 차례로 확인 복창하였다. 임무에 참여했던 모든 대원들은 여름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에놀라 게이는 고도 9,300m에서 폭격 항정(Bomb Run)에 돌입했다.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폭격수 토머스 페러비 소령에게 조종 권한을 넘겼다. 노든 폭격조준기 항목에도 있지만, 이 폭격 조준기는 비행기의 자동 조종 장치와 연동되어 있어 폭격 항정 동안에는 폭격수가 기체 조종을 하게 된다.[45]

페러비 소령은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여 리틀 보이 투하 스위치를 눌렀다.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비행일지에 기록한 정확한 투하 시각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5초.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동시에 계측 장치를 투하했으며, 빅터 91은 히로시마 외곽 상공에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선회하고 있었다. 투하 직후 에놀라 게이는 우로,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좌로 급선회,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46]

8시 15분에서 막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빅터 91이 촬영한 폭발 당시 영상[47]

원자폭탄은 측풍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48] 상공에서 폭발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꽤 많이 빗나간 것 같지만, 9,000m가 넘는 성층권에서 투하한 폭탄임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정밀도[49]였으며, 만약 단 한 발의 통상 폭탄이었다면 작전 실패였을 것이나 리틀 보이는 일반적인 폭탄이 아니었다.

우라늄 235 기반 포신형 원자폭탄 리틀 보이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방출 에너지량도 당초 예측대로였다. 다만 구조의 한계로 인해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중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탑재 총 핵물질의 단지 1.7%만이 핵분열에 관여하였다.[50] 측정된 폭발력은 TNT 환산 16kt ± 2kt.[51] 바로 위의 영상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15kt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순수한 흰색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손으로 눈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한다. 인간의 살은 어느 정도 빛을 투과시키는데, 가시광선만 해도 자기 뼈가 보일 정도로 강력했다는 얘기.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열복사로 약 3,000~4,000도가 넘었는데 태양의 표면 온도가 약 6,000도이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스미토모은행이 열기를 기다리며 은행 돌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엄청난 열선을 받으며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은 현재 인영(人影, 사람의 그림자)의 돌이라는 제목이 붙어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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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그림자

한편 폭탄이 터진 직후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방사선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납 맛이었다고.[52]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 맛을 경험했다.

엄청난 빛에 이어진 것은 천지를 울리는 어마어마한 폭발음이었다. 통상적인 폭탄의 폭발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굉음. 종말의 포효였다. 이 때문에 히로시마의 생존자들은 원자폭탄을 '피카 동(ピカ ドン)'이라고 불렀다. 뜻을 번역하자면 '번쩍 쾅'이다. 많은 생존자들의 전후 증언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큰 인상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천지를 울린 폭발음이었다.

뒤이어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340m/s=1,224km/h=음속에 달하는 엄청난 폭풍이 주변 1.6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류가 기록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역사상 최악의 토네이도의 중심 풍속이 불과 134.4m/s였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대도시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거대한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이것은 토네이도의 경우이며 핵폭발의 경우 토네이도보다 에너지가 훨씬 빠르게 소멸되기 때문에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다. 이 범위 안에 있던 건물들은 매우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1발의 폭탄이 도시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그 때가 출근 시간이었기에 효과는 더 컸다. 폭심지에 있었던 생존자 중에 노무라 에이조(野村英三)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당시 47세로 연료배급통제조합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그가 일하던 조합 건물은 폭심지에서 서남쪽으로 불과 170m 떨어져 있었다. 8월 6일은 월요일이었기에 아침 8시에 전 직원 조례가 있었고, 그 후 노무라는 직장 상사가 깜박 잊어버린 서류를 가지러 건물 지하 창고로 내려갔는데, 노무라가 지하 창고로 들어간 직후에 리틀 보이가 폭발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조합 건물에는 직원 37명이 있었으나, 노무라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즉사했거나 병사 혹은 행방불명. 노무라는 원폭 생존자 중에서 폭심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으로 공인되었다. 그는 폭발 직후 폭심지 근처의 상황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가치있는 증언을 남겼다. 당연히 많은 양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기에 고열, 설사, 잇몸 출혈 등 피폭 후유증으로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목숨을 건졌고, 이후 뜻밖에도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노무라가 생존한 연료배급통제조합 건물은 현재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레스트 하우스'로 남아 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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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후의 모습.[54]

충격파에 이어 화재가 들이닥쳤다. 바로 '폭격 후폭풍'의 영향이었다. 도시에 대규모 폭격으로 불길이 일어나면 뜨거워진 대기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이 때문에 아래 쪽에는 부분적인 진공이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그 진공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외곽에서 뚫고 들어오는 찬 공기가 도시 곳곳을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관통하게 되며, 이러한 폭풍은 곳곳의 불씨를 합쳐 대규모 화재로 만들어버린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고 한다.[55]

화재는 히로시마 시내 중심부 11km2를 모두 삼켰다. 히로시마 시 전체는 열로 가득 찼고, 잿빛 대기가 태양마저 가려 사방이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불교지옥도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심판의 날이었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히로시마의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가 되었고, 사방에 널린 죽지 않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며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사람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이 전해져온다.

이 때 원폭 투하 직후의 참상을 찍은 몇 안 되는 사진들이 존재한다. 바로 주고쿠 신문의 사진기자였던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 1913년~2005년)가 폭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유키 다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그것이다. 폭탄이 터진 후 약 3시간 뒤에 찍은 사진들이며, 원폭 폭발 직후를 담은 유일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화상에 의해 부상을 입은 히로시마 여자 상업 학교, 히로시마 제1중학교 학생들이 미유키 다리에 앉거나 서서 경찰에게 식용유로 치료를 받고 있다. 물론 화상에 식용유로 치료가 될 리는 없었고, 단지 통증을 덜어주는 미봉책일 뿐이었다. 사진을 찍은 요시토에 의하면 이 학생들은 온 몸에 화상 물집이 잡혀 있었고, 물집이 터지자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늘어졌다고 한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열기와 열풍으로 인하여 산발이 되어 있고 옷이 찢어져 있으며, 화상을 입은 팔을 치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피폭되었던 부상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56]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 및 좁은 범위 내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유기 생물체가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이 폭격으로 인해 의사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57]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나름대로 해보려 했으나 원자폭탄이 너무나도 효과적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지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 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사선 화상은 DNA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선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며 혈관세포를 파괴하고, 위장관세포를 파괴해 구토설사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니 아무리 먹여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이토록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만에 죽어갔다. 방사선 피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보기만했다. 일부 의사들은 비타민 A을 주사하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 나가더니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죽는 것이었다.[58] 이때 의사들의 경험은 방사선 피폭을 당하면 인체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 이것에 의학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데이터가 되기도 했다.

14만 명의 사망자 중 군인이 20,000명이었다. 2총군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으로선 이 총군 병력의 피해도 심각한 일이었다. 미군의 본토 공격을 앞두고 일본군은 결호작전을 계획하였고, 2개의 총군이 각각 서일본과 동일본 지역을 맡았다. 히로시마의 2총군 사령부 및 산하 병력은 바로 이 서일본 방위 임무를 맡은 부대인데, 이 부대의 사령부가 통째로 소멸한 것이다.[59]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일본인들이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고, 일본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거부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도시의 행정 역시 붕괴되었다. 제18대 히로시마 시장 아와야 센키치(粟屋仙吉)는 즉사했으며, 귀족원 의원인 오오츠카 코레세이(大塚惟精) 역시 불에 타 죽었다. 뿐 만 아니라 히로시마의 상당수 행정 관료들이 사망하면서 행정을 이끌 조직이 전무해져버렸다.

한편 폭발 직후 에놀라 게이는 사력을 다해 도주하고 있었다. 폭발의 반대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기에 최초의 폭발 장면과 버섯구름을 제대로 목격한 이는 B-29 꼬리 맨 뒤쪽에 있던 후미 기총수(Tail Gunner) 밥 캐런 중사 뿐이었다. 그가 찍은 7장의 사진이 히로시마 폭발을 상공에서 촬영한 최초의 것이며, 이 문서 가장 상단에 게재된 사진이 바로 그가 찍은 것이다. 정작 폭발을 계측하라고 보내놨던 그레이트 아티스트에서 찍은 사진은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에 들어서자 폴 티비츠 대령은 다른 대원들도 폭발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에놀라 게이의 비행 방향을 조금 틀었다. 거대한 버섯구름과 그 밑에 통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시를 목격한 대원들은 "이제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 없다.(항법사 밴커크 대위)"라거나 "우리가 티니안에 귀환하기도 전에 일본은 백기를 들 것(부기장 루이스 대위)"이라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나 엄청난 위력과 그것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투하했다는 사실 때문에 굳어버린 대원들도 꽤 있었다. 놀랍게도 윌리엄 파슨스 대령도 그 중 하나였다. 에놀라 게이는 방사능을 띈 버섯구름이 점점 확산되자 관측을 멈추고 다시 전속력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후미 기총수 밥 캐런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후 1시간 반이 경과하여 히로시마에서 무려 667km나 떨어진 지점에서도 버섯구름은 그때까지 보였다고 한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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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을 끝낸 3대의 B-29는 총 14시간의 작전 비행을 마치고 오후 3시경 티니안 기지에 착륙하였다. 그레이트 아티스트와 빅터 91은 환영 행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중간에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에놀라 게이가 티니안에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Carl A. "Tooey" Spaatz) 대장[61]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미리 준비해놓고 활주로에서 기다리다가 티비츠 대령이 에놀라 게이에서 내리자마자 훈장을 수여했다. 티비츠는 훈장 수여를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에 위의 사진에 보이듯이 왼손에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윌리엄 파슨스 대령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의 마지막 업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는 몇 주 전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통해 전달 받은 리틀 보이 우라늄 발사체 인수증 원본에 사용 기록을 추가로 기재하고 서명했다.[62]
The above materials were carried by Parsons, Tibbets & Co. to Hirohito as part of “DOOMSDAY”, leaving Tinian at 051645
상기 물품들은 05시 16분 45초에 티니안에서 출발하여, 파슨스 및 티비츠 등[63]히로히토에게 "최후의 날"의 일부분으로서 배송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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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파슨스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가 서명한 원자폭탄 인수증 원본

5.1. 일본의 반응

이 전례 없는 강력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현실부정이었다. 니고연구의 총책임자이자 일본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화학연구소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박사[64]가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에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현장을 조사하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멘탈붕괴 상태에 빠진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 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 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 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평범한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장 위의 니시나 박사의 히로시마 방문조사에는 정보부서를 담당하는 참모본부 제2부장이던 아리스에 세이조(有末精三) 중장이 동행하고 있었고 그는 니시나 박사로부터 이것이 원자폭탄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대본영은 여전히 그럴 리가 없다고 일관하고 있었다. 군령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는 원자 폭탄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그 수가 적을 것이니 본토 결전 이행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육군 대신 아나미 고레치카의 경우 아예 원자폭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며 원폭 투하 보고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상층부는 현실도피&인지부조화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는 항복과 관련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게 항복 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 협상은 진행 중이었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연히 이런 조건이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이미 연합국과 대일 참전을 약속까지 하고 독일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소련군들을 동아시아 전선으로 이동 배치하고 있던 소련으로서도 대의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원폭 투하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어이 없는 조건을 내거는 강경파가 서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 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의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심지어 8월 9일 회의 중에 2번째 핵이 떨어질 때까지도 일본 지도부는 미국에게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하층부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퍼진 뒤여서 다음 공격 타깃이 어디냐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물론 보도 통제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히로시마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선명한 버섯구름을 목격했고 히로시마의 피난민들을 보았다. 그리고 민간 보도는 통제되었을지언정 군 통신망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 전역의 군 부대 장교들 사이에선 하루만에 히로시마에 무언가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알려졌고 그 폭탄의 종류가 원자탄이라는 것도 금세 전파되었다. 이는 군부에도 대패닉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8월 7일 밤에 오사카에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전투기 파일럿 마커스 맥딜다의 사례가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측에서는 장군이 직접 포로 심문을 진두지휘했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일본도로 목을 치겠다" 라면서 칼끝을 목과 입으로 겨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구한 대답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의 정체, 그리고 그 폭탄의 다음 타깃이었다. 물론, 미국의 부통령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원자폭탄 투하의 극비 계획을 일개 전투기 파일럿이었던 맥딜다가 그런 고급 정보 따위를 알고 있을리는 없었고, 그는 대충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설명한 다음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으로 "다음 타깃은 도쿄교토일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일본의 포로 대우는 끔찍했기 때문에 대답을 안 했다면 언제 살해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별개로 히로시마의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도쿄가 다음 타겟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이 시기에 일본 관동 지방에 뿌려졌던 미군의 삐라다. 정황상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이후-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인 8월 8일 오후에서 9일 오전 정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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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에게 고함!!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이 삐라에 쓰인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주의하여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65]

일본 국민들은 지금 중대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연합군 수뇌부는 삼국공동선언에 의거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제시하여 무익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일본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미국은 현재 몇 명을 희생시킬지 모르는 무서운 원자폭탄을 발명하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자폭탄은 단 한 개만으로도 그 거대한 B-29 폭격기 2천대가 한 번에 투하할 수 있는 수준의 폭탄의 위력에 필적한다. 이 무서운 사실은 여러분은 히로시마에 폭탄 한 개가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익한 전쟁을 지속하려는 군사상의 모든 것들은 무서운 원자폭탄에 의해 파괴된다. 미국은 이 원자폭탄을 여러 개라도 쓸 준비가 되었으며 여러분들이 이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천황 폐하께 청원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미국 대통령은 여러분들에게 요구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신속히 받아들여,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종용하는 바이다. 따라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즉시 무력저항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단호히 원자폭탄을 비롯한 우수한 무기들을 사용하여 이 전쟁신속하고 강제적으로 종결시킬 것이다.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적국에게 핵폭격을 가하면서 해당 지역의 시민들에게 대비 삐라를 뿌렸다는 점에서 그 위압감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뒤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 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띠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 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 대에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6. 2차 투하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Atomic bombing of Nagasaki
長崎市への原子爆弾投下

칼 스파츠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과 커티스 르메이 제21 폭격사령관, 폴 티비츠 제509 혼성비행단장, 파슨스 대령 등 원폭 투하 작전의 핵심 인물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을 성공시킨 후 괌에 모여 다음 작전을 논의했다. 윗 단락에 설명된 바와 같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대외적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바로 다음 원폭 투하 작전을 속행하기로 결정하고 워싱턴 D.C.에도 보고하였다. 당초 계획은 8월 11일 투하를 목표로 했고 앨버타 프로젝트의 과학자들도 이 일정에 맞추어 팻 맨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부터 일본 기상 상황이 안 좋다는 일기예보가 들어오자 티비츠 대령을 위시한 지휘부는 8월 9일까지 일정을 당기라고 명령했다. 앨버타 프로젝트 소속 과학자들도 어디까지나 현역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까라면 까야 했다.

2번째 원폭 투하 작전의 제1 폭격 목표는 고쿠라, 제2 목표가 나가사키였다. 목표가 2개로 줄어든 것은 사흘 전에 히로시마가 지도에서 지워졌기 때문. 따라서 작전에 투입된 B-29는 총 6대로 줄어들었다. 기본적인 작전의 얼개는 히로시마와 거의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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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Bockscar" 일련번호 44-27297,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팻 맨은 폭축형, 내파형 원자폭탄이었으므로 리틀 보이와 달리 B-29가 이륙 중 추락하더라도 유폭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팻 맨은 조립 및 장전을 마친 상태로 복스카에 적재되었다. 다만 앞 단락에서 서술된 안전 장치(초록색/붉은색 플러그)는 리틀 보이와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있었으며, 폭격 직전에 수동으로 해제해야 했다.

급하게 준비를 한 탓이었는지, 두번째 원자폭탄 투하 작전은 시작부터 문제를 드러내었다. 작전 시작 직전의 최종 검사에서 복스카의 예비 연료 펌프가 고장 났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고장으로 약 640갤런(약 2,400리터)의 연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작전 계획대로 일본까지 왕복 비행할 수는 있었지만 매우 빠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펌프를 교체하려면 또 몇 시간이 소요되고, 이미 팻 맨을 탑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티비츠 대령은 그냥 작전 속행을 명령했다.

문제는 계속 이어졌다. 타격대를 구성하는 3대는 심야에 티니안 기지를 이륙한 다음 각자 날아가다가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의 야쿠시마에서 규합을 하기로 했다. 사흘 전 히로시마 작전에서도 에놀라 게이, 그레이트 아티스트, 빅터 91은 일출과 동시에 규합점이었던 이오지마 상공에서 정확히 만나 타격대를 구성하여 히로시마로 향했다. 그런데 8월 9일 작전에서는 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빅 스팅크가 항로와 고도를 잘못 선택하여 규합에 실패하였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당초 계획 고도보다 9,000피트(2,700m) 가량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규합 항로도 야쿠시마 상공에서 당초 계획했던 패턴 비행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68]

전대장인 폴 티비츠 대령은 타격대 규합에 15분 이상을 소요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복스카를 조종하는 척 스위니 소령은 빅 스팅크의 합류를 기다리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무려 40분을 야쿠시마 상공에서 소비하고 말았다. 그동안 목표 기상 보고가 들어왔는데 고쿠라에 진입해있던 에놀라 게이는 아침 안개가 끼어있지만 곧 쾌청해질 것으로 기대, 나가사키에 있던 레진 드래곤 역시 아침 안개가 걸려있고 구름 2/10으로 비교적 쾌청이라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척 스위니 소령은 제1 목표 고쿠라를 폭격하기로 하고, 위대한 예술가만을 대동하여 고쿠라로 향했다.

그런데 복스카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보니 기상 보고와 달리 안개가 계속 끼어있고, 더군다나 전날에 제21 폭격사령부의 B-29 폭격대가 인근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한 여파로 짙은 연기가 끼어있어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69]

복스카는 고쿠라 상공을 3번이나 폭격 항정(bomb run)[70]으로 비행하였으나, 안개와 연기로 결국 육안 목표 확인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무려 50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이 와중에 통신 담당 제이콥 비저 중위(히로시마 폭격 때는 에놀라 게이에 탑승)는 인근에서 일본군 요격기의 활동을 통신 감청하고 경고를 발령했다. 더 이상 고쿠라 상공에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척 스위니 소령은 제2 목표인 나가사키를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그레이트 아티스트와 함께 기수를 돌렸다. 이로써 고쿠라는 2번이나 원자폭탄 폭격 대상지에 올랐음에도 이를 모두 피하는 행운의 도시가 되었다.

약 20분의 비행 후에 복스카는 나가사키 상공에 도달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기상 보고와 달리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연료는 부족해지고 있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척 스위니 소령은 폭탄 담당 애시워스와 상의한 뒤 티비츠 대령의 엄명을 어기고 레이더 조준 폭격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결정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만약 폭탄 투하에 실패하면 기체의 안전과 착륙 중량을 위해서 그 귀중한 원자폭탄을 바다에 버리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고쿠라와 달리 운이 없었다. 순간 구름이 열리면서 나가사키를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맑은 개구부 구역이 드러난 것.

일본 제국 군부는 원자폭탄을 탑재한 복스카가 규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상층부가 소련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습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복스카가 투하한 2번째 핵폭탄이 폭발하였다.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 날 사망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5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이름부터 넓은 섬(広島)일 정도로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산지 지형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1/4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3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피해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71]

그러나 그것은 히로시마에 비해 피해가 줄었다는 것이고, 원자폭탄으로 인한 위력은 나가사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수많은 인원이 단 한 번에 소탕되었다.

우라카미 지구의 산소어뢰 공장은 바로 폭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공장 일대가 궤멸되었다. 우라카미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직자와 신도들은 모두 즉사했으며, 인근에 있던 나가사키 의과대학도 많은 의료진과 환자들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나가사키 역시 연합군 포로들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 네덜란드군 포로들도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나마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잘 방호되고 있었고, 도시의 행정 역시 건재했다. 나가사키 현(당시 이름 나가노 와카마쓰 현)의 지사와 관료들은 전부 지하 방공호에서 회의중이었기에 전멸을 면했다. 나가사키 현 지사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나가사키에도 동일하게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대책을 검토하려 했고, 이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목숨을 살린 신의 한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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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이전, 이후의 모습

한편 타격대의 혼란은 원폭 투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규합에 실패해 가고시마 남쪽에서 헤매고 있던 빅 스팅크는 나가사키 시에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멀리서 관측하고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와서 관측과 촬영을 시작하였다. 한편 복스카는 연료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원래 작전 계획은 비상 상황이 생기면 항로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에 착륙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거기까지도 갈 연료조차 없었다는 것.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는 이에 거리상으로 훨씬 가까왔던 오키나와로 가서 비상 착륙을 하기로 한다. 복스카가 오키나와 욘탄 비행장 상공에 도착했을 때는 단 한 번의 착륙 시도만 가능할 정도의 연료가 남아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오키나와 관제소에서는 복스카의 착륙 요청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복스카는 플레어를 있는 대로 쏘아올리고 그냥 욘탄 비행장에 강행 착륙을 감행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활주로에 접근하다가 엔진 하나가 연료 부족으로 꺼졌고, 착륙 활주하다가 엔진 하나가 더 꺼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추락하거나 착륙하다 다른 비행기와 충돌하지 않고 무사히 착륙한 게 기적이었다.

복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연료를 다시 보급 받고 겨우겨우 티니안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혼란'은 끝까지 계속되었는데,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최초 보도에서 자기가 탑승했던 폭탄 투하한 기체를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보도해버린 것이다. 작전 직전에 비행팀이 서로 교체된 것을 기자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제일 불쌍한 건 자기 이름 붙은 기체 빼앗기고 관측 비행이나 해야 했던 복스카 원래 기장 프레드릭 복스 대위였다.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 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 설계 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 기폭기(베릴륨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 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 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 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3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72] 가능했다.[73] 첫 핵 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6.1. 일본의 반응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걸 드디어 인정했다. 원폭이 히로시마의 1회성 단발 이벤트 형식이 아니게 된 이상 언젠간 핵탄두가 전쟁 내내 폭격을 비껴간 교토에 떨어질 게 사실상 확정이라 여겼으며,[74] 그렇게 황실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에까지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그 순간 일본 제국군은 모든 형태의 명분까지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한다면 국민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본 수뇌부에겐 참혹한 최후만이 기다릴 것이라는 인식이 지휘부 대부분의 머리에 단단히 박히게 된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천황을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옥음 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닥 깔끔하지 않았다.[75] 또 그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고문어체로 작성되어있었다. 옥음방송 문서로. 때문에 이게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76] 그 후 방송요원이 일상 언어(일본어 구어체)로 해석해 재차 방송하여, 마침내 항복 사실이 대중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에 대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청년 장교들이 반발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며 천황이 거주하는 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히로히토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궁성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천황에 대한 군부의 충성이 진실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 외에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살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 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때문에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로도 불린다.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생활을 하던 작가 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항복이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즉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은 것으로, 왜 항복 요구 타전 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77] 이미 1945년 초부터 항복 논의가 오갔음을 상기한다면, 두 원자폭탄은 그러한 결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7. 일본 외의 반응

7.1. 미국

"핵폭탄은 위대한 결정이 아닙니다. 그저 정의의 무기고에 있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해리 S.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
일본에서 나온 작품에는 핵폭탄 투하 소식에 미군 장병들이 죄책감을 갖고 숙연해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78] 나치의 항복 선언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당시의 미군 장병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전쟁을 끝내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각하께 너무 감사했다고 한다. 반자이 돌격이나 카미카제 등 일본군의 미친 짓들을 보며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미군 장병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준 걸 반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79] 무엇보다도 당시 핵무기의 정확한 위력과 방사선에 노출되었을때의 후폭풍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등을 담은 끔찍한 사진들은 검열되었다.[80] 그래서 당연히 미국 본토에서도 딱히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고 가질 이유가 없었다.

또 국민적 인식과 프로파간다 역시 한 몫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그래도 중국과 더불어 동양의 경제대국이라는 인식이었지만 일단 진주만 공습으로 본토가 사전 통보 없이 공격 당한 분노가 큰 데다가 학살, 포로 학살, 반자이 돌격, 카미카제처럼 인명 따윈 장식으로 여기는 일본군만의 미친 짓거리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문화, 동양인 인종차별 역시 적개심의 원인이 되었다.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거리던 유럽 전선 폭격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즉,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이는 폴 티비츠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고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다음 해 티비츠 자신은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터뷰했다. 티비츠는 원폭 투하로 전쟁을 끝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티비츠는 전역 후에 원폭 투하를 흉내내 버섯구름을 재현하는 에어쇼를 벌인 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일본 정부에게 사과를 한 적도 있다. 티비츠는 2007년 심부전증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거나 묘의 비석을 만들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는 일본인들의 시위나 묘소 테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뜻대로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재가 영국 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티비츠를 포함해 조종사 상당수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택한 정당한 수단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0주기를 맞이하여 당시 MBC에서 에놀라 게이를 몰던 조종사(티비츠는 아니었다) 중 하나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나는 전쟁에서 일본에 의해서 죽을 뻔한 수백 만의 연합국 국민들을 구했습니다. 조금도 원폭 투하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원폭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더했을 겁니다."라 언급했다.

이는 당시에는 핵폭탄이 단순히 엄청나게 강한 폭탄으로만 인식되었으며 핵폭탄이 무서운 이유인 방사능 피폭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몰락작전에 핵폭탄을 투하시킨 곳에 병력을 진군시키는 계획이 있었을 정도로 군 상층부조차 피폭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피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 중에서는 반응이 둘로 나뉘었다. 리처드 파인만의 회상에 따르면 대다수는 환호하면서 파티를 열었지만 그 중 몇 명은 구석에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궁상을 떨었으며' 대부분 반전, 반핵 운동의 길로 빠졌다고 나온다. 대표적인 예시가 원폭 실험 후 "이제 우린 다 개새끼들이다."라고 한 케네스 베인브리지나 핵무기 제조를 주도했으면서도 반핵에 힘을 쓴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있다. 파인만은 존 폰 노이만의 영향을 받아 폭탄에 대한 죄책감은 가지지 않았으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일상이 폭탄이 터지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허무함을 느낀 적은 있었다고 밝혔다.

7.1.1. 해롤드 애그뉴

4분 24초부터 나온다.
원폭 개발에 종사한 과학자이며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자 소위 버섯구름이라고 불리는 구름을 직접 촬영한 인물인 해롤드 애그뉴 박사 또한 원폭 투하 60년 후 일본 방송국의 초청으로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을 박람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핵폭탄의 참상을 인정하면서도 핵폭탄이 끔찍하긴해도 2차세계대전처럼 전쟁의 억지력이 된다는 의중을 보이는 가운데 만남이 예정된 일본인 피폭 생존자들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인류에게 사용하지 말아야 했을 원폭 사용과 그 원폭의 위력을 증명해줄 증언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사과를 요구, 통역으로부터 전해들은 애그뉴 박사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저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사과해야 하는 건 저 사람이죠. 저는 사과하지 않아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주만을 잊지 마라." 라고 일갈하며 단호하게 사과를 거부하였다.

핵폭탄이 투하된 원인은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에게 진주만 공습을 벌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 말기에는 추축국의 대표국가 독일마저 미소영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이길 가능성이 없어졌음에도 천황제 유지를 위해 총옥쇄를 운운하며 항복 권고를 거부했던, 일본 제국의 군부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에 나온 원폭 생존자가 그런 부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무작정 애그뉴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애그뉴는 표정이 매우 안 좋아진 것이다.

만약 애그뉴를 만난 원폭 생존자들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먼저 사과했다면, 애그뉴는 의례적인 유감이라도 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원흉이자 당사국인 일본이 다짜고짜 "히로시마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느냐. 죽은 사람들에게 사과하라.", "인류에게 사용하지 말아야 할 원폭을 썼다. 원폭의 위험성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직접 사과해달라."고 망언을 내뱉자, 애그뉴는 더더욱 불쾌한 감정을 보였다.

즉, 저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은 자기 나라가 타국을 아프게 한 것은 전혀 이해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으면서, 타국이 자기들을 아프게 한 것만 이해하고 사과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81] 일본 정부와 군부의 책임이 곧 자신들의 책임은 아니지만 전쟁의 피해자로서 자신들의 피해를 호소하고 싶으면 자신들이 입은 피해뿐 아니라 자국이 일으킨 피해에도 공감할 필요성이 있는데, 일본이 저지른 만행들은 외면한 채 자기들이 입은 피해만 강조하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애그뉴는 원폭 투하 이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많은 동료들을 잃은 사람이고, 원폭 생존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이를 언급했다.

7.2. 한반도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전시에 해외의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폭탄이 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조차 정보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식민지 조선에 상세한 정보가 전달되었을 리가 만무하고,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한 대중들은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대중이 전말을 알게 된 것은 8.15 광복 이후였다.

김구백범일지에도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감상이 드러나 있는데, 광복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국강병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에 있어서도 과학 기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며, 과학 기술에 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강화되었다고 서술했다. 김구는 원자폭탄 투하 이전에도 막내 아들 김신[82]에게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좌우한다'는 말을 했을 만큼 전쟁에 있어 과학 기술의 영향력을 높게 평가했는데, 이런 김구의 사상이 훗날 김구의 후손들이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전통이 생긴 데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조병옥의 경우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골에 요양을 살았던 1942년에 이미 미국에서 원폭을 개발해서 떨어뜨릴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몰래 알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적었으나 이건 그가 회고록에 거짓말을 쓴 것이다. 원폭 개발은 당시 미국에서도 초극비 프로젝트였다. 에놀라 게이 탑승원들조차 히로시마로 출격하는 B-29 기내에서 '원자폭탄'이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을 정도의 극비 작전인데 조선의 시골 마을에 살던 조병옥이 원자폭탄 계획을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해리 S. 트루먼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부랴부랴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원폭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원래 회고록이라는 게 그 특성상 과장과 윤색이 많으니 적당히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

7.3. 소련

"그 다음 날 나는 영국의 총리와 스탈린 대원수에게 핵실험의 성공을 알려주었다. (중략) 스탈린은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했지만,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함이 확실했다."
"The next day I told the Prime Minsiter of Great Britain and Generalissimo Stalin that the explosion had been a success...Premier Stalin smiled and thanked me for reporting the explosion to him, but I'm sure he did not understand its significance."
- 해리 S. 트루먼,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은 이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소련 간첩 클라우스 푹스를 통해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83] 그러나 그런 소련도 핵무기의 완성 시기와 실전 사용 여부는 모르고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탈린은 그야말로 격노했다. 각료들과 원폭 투하에 대해 얘기하면서 스탈린은 명색이 동맹국인데 자신들에겐 투하에 대해 말 한 마디 제대로 안했다며 서방 연합국들이 자신들을 협박한 거나 다를 바 없다며 격분한 모습을 보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소련의 정부지 프라우다에선 이 소식을 전면이 아니라 신문 중간에 단신으로 짧게 처리하는 등 정보 통제를 가했으나, 모스크바 주재 미국 특파원에 따르면 그 소식이 알려진 후 며칠 동안 모스크바 시내에선 온통 원폭 이야기만 시민들이 말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물론 스탈린처럼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서방 연합국이 원폭을 선점함으로서 독소전쟁으로 얻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는 반응들이 많았다고 한다.[84]

이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좀 복잡하다. 분명 소련군의 대일전선 참전 기간은 일주일 안팎으로 대단히 짧고 극동에서는 미국보다 그 공로가 매우 적은 건 사실이나 소련의 일본 공격 준비가 양과 질에서 대단히 우수했고, 그 준비 기간이 독일의 항복 직후부터 면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코 하루 이틀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에게 일본으로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고, 참전 시점까지 못을 박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에서 수십만의 병력과 수만대의 장비를 지구 반대편의 동아시아 전선까지 가져왔고, 참전 약속일의 마지막 날에 전격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이 준비한 노력만큼 이미 잡병이 된 수십만 일본 관동군은 대부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장해제했다.

다만 원폭 투하로 자극 받은 스탈린은 극동의 바실렙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만주 작전의 조기 실행을 명령한 것은 사실이며, 작전 기획시 당초의 공격 실행 예상 시점은 45년 8월 중순이었다가 8월 15일 이후로 단축되고, 최종적으로 8월 9일 0시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자칫 일본 제국이 빨리 항복해버리면 일본, 나아가 후방인 태평양을 미국이 단독으로 장악할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7.4. 그 외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에선 축복의 불꽃이라고 대단히 기뻐했다. 4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중국계 사람들이 학살 당하며 인세지옥을 겪었기 때문이다.

1994년 개최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원폭에서 완전히 회생한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상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타국(아시아) 선수들과 스탭들의 공식 일정 중 관광차 원폭 희생자 위령 기념물에 가는 일정이 있어서 마찰을 겪었다.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일본인 가이드의 말에 "지들이 전쟁을 일으켜 놓고 누굴 기리라는 거야!"라면서 타국 선수들과 스탭들이 발끈해서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졌다. 엄연히 본인들이 전쟁 가해자이고 원폭이 떨어진 인과관계를 생각하면, 피해국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기리라고 하는 것은 배려심이 부족한 행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2005년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셈 박물관의 개막식에 '원폭을 운운하며 피해자 그룹에 참가하려다가 박물관 측에서 나치라는 비난을 들었다'라는 이야기가 웹에 퍼져 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현지 신문(Ynetnews)에서 보도된 외교부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원수가 초대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85] '원폭을 홀로코스트에 비견할까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루머이며, 단지 일본은 홀로코스트 해방에 기여한 국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딱히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 즉, '피해자 드립'이나 '나치 비난' 등의 사실은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북한의 '세계력사' 같은 교과서에서는 2012년 기준 이 사건이 짤막하게 언급이 되지만 일본인의 피해만 부각된다. 미군이 전쟁을 끝내는 데 기여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주장을 하냐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외국 조직의 일원이었기에 소련의 도움으로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 부대를 만들고, 그 부대로 일본군을 공격해서 8.15 광복이 되었다고 세뇌시키기 위함이다.

8. 3차 투하 계획 (취소됨) - 1945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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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절대 항복하지 않고 옥쇄와 자살 공격으로 저항하는 모습에 미국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일본을 확실한 방법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정답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최대 15개까지 준비해 놓고 일본을 타격할 계획이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하루 뒤인 8월 10일,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조지 C. 마셜 장군에게 '다음 폭탄'이 예상보다 빨리 준비될 것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로스 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24시간 내내 3번째 원자폭탄 제조에 몰두했다.[86] 또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오키나와에 원자폭탄을 조립할 수 있는 시설을 건설해야 한다고 긴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87] 8월 13일에는 전쟁부장관 스팀슨은 속히 티니안에 핵 물질의 선적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즉,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3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할 능력도 있었고 그럴 의지도 충분했던 것이었다.

3번째 원자폭탄 투하 후보지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1945년 8월 14일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통보하고 이튿날인 8월 15일에 천황이 옥음방송을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됨에 따라 3번째 원자폭탄 투하 계획은 취소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항복하면 모든 걸 전부 불문에 붙이지만 계속 버티면 단 1방으로 도시 전체를 없애버리는 괴폭탄을 투하하겠다"라는 말에 처음에는 "웃기고 있네. 그런 폭탄이 세상에 어디 있냐?"라고 일축했다가 히로시마가 지도상에서 삭제를 당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똑같은 말을 하자 일본이 이번에는 긴가민가 하면서 뭉기적거렸다. 그러자 미국은 또 항복을 안 하고 개기는 걸로 인식해서 나가사키를 지도상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제서야 일본은 그런 무시무시한 폭탄이 진짜였다는 것을 깨닫고 항복한 것이다.

9. 종전 후

9.1. 기밀 문서

도쿄신문주니치신문이 미국의 원폭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 공문서 중 당시 기밀 자료였던 '글로브스 문서'를 분석한 결과 3번째 원폭 투하 계획을 확인했다고 2018년 8월 10일자로 보도했다.[88] 하지만 이런 3번째 원자폭탄 투하 계획은 곧 중단되었는데, 당시 미국 정부 관계자의 일기 등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본 뒤에 더 이상의 원자폭탄 투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3번째 원폭 투하 계획'은 곧바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美, 히로시마·나가사키 이어 3번째 원폭 日 투하 계획했었다." 그리고 그 3번째 투하 장소는 고쿠라와 니가타 중 하나였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의 핵 투하 의지가 변함 없었더라면 저 두 도시 중 한 곳은 역시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쿠라는 원폭 투하 위험을 3번이나 피한 운 좋은 도시로 남게 되었다.[89] 해당 도시는 주변에 바다와 인접해 있는데 만일 이때 정말로 떨어졌다면 태평양 쪽에 피해가 미쳤긴 했겠지만 훗날 캐슬 브라보 실험에서 증명되었듯 수중 폭발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해수가 방사능으로 오염되긴 해도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레슬리 그로브스 미 육군 공병 중장은 1945년 8월 10일에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 8월 17일 또는 19일에 1발, 9월과 10월에 각각 1발 등 이 외에 10발을 더 투하해 총 15발을 투하하자고 조지 마셜 미군 원수에게 제안했다. 물론 조지 마셜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져야 원자폭탄을 추가로 투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내렸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로 리틀 보이는 모든 핵무기의 위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새로 나온 핵폭탄의 위력을 언급할 때 '히로시마의 몇 배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놈은 16킬로톤(kt). TNT 16,000톤을 동시에 터뜨려야 발생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자세한 것은 원자폭탄/위력 항목으로. 핵폭탄 실험이나 화산 폭발, 지진 등 대규모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공 또는 자연적 사건에 비공식적이지만 아예 몇 히로시마라는 단위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통상 TNT 15 킬로톤(kt), 63 테라줄(TJ)을 기준으로 한다.

9.2. 복구와 피해자 보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방사선 피폭은 반감기가 길지 않았다.[90] 그래서 1950년대에는 도시 기능을 거의 복구한다. 방사선 피폭에 대해 참고할 만한 기사. #

2020년 7월 29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내린 일명 방사능이 섞인 일명 '검은 비'에 의해 건강상의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시와 히로시마현이 피폭자 건강 수첩의 신청을 거부한 것은 위법이라며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히로시마 지방 법원이 1심에서 피해자들의 승소를 인정했다. # 하지만 후생노동성은 이에 항소를 하였다. # 2021년 7월 14일. 2심에도 1심과 같이 인정 받았다. # 그 뒤로 정부는 3심을 포기하기로 했다. #

2024년 9월. 나가사키도 이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9.3. 일본의 여론

현대 일본인들에게 원폭 투하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역사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역사 인식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즉, 그것이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지지만 자주 피해자 인식으로도 이어진다.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순수해야 하며, 그러한 원동력이 역사적 반성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1996년 12월, 히로시마 원폭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전쟁에 관련된 것이 문화유산으로 한번도 등록되지 않았다는데 이미 등록된 것(아우슈비츠)이 있는 이상 히로시마가 등록되는 것은 마땅하다"'며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은 일본의 전쟁 책임 때문에 문화유산 등록에 반대의사를 표해 묘한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91][92]

1997년 미국의 `임계치 이하' 지하핵실험에 대해 3일 2차대전 당시 원폭 피해도시인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시장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중국이 우려를 표명했다. 히라오카 다카시 히로시마 시장은 "미국은 (이번 실험 목적이) 핵무기 안전성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려는 강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우리는 이같은 실험이 핵무기 개발경쟁을 다시 재연시킬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이토 잇초 나가사키 시장은 "유감보다 강한 분노를 느낀다"면서 "이번 실험이 핵실험 금지를 위한 국민들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미국에 강하게 항의할 것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 대변인인 가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장관은 이에 대한 논평을 거부,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반핵단체들은 이날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그밖의 다른 주요 도시에서 집회를 갖고 미국의 지하핵실험을 비난했다. 한편 지난 1995, 96년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던 중국은 이날 우려를 표명했지만 직설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93]

현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내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워진다. 히로시마의 경우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해서 강한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94] 1999년 히로시마에서는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과 히노마루(일본 국기) 달기를 거부하여 교사와 교장의 충돌 끝에 교장이 자살한 사례가 있었으며, 나가사키는 시장이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거론한 이후로 히로히토의 분노를 사서 극우 성향의 야쿠자들에 의해 2명의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끝내 사망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전쟁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져 일본의 피해를 입은 주변국에 대한 반성 기류도 그나마 다른 지역보다 뚜렷하다.[95]

그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70주년을 맞아 2015년 NHK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절반 가까운 일본인이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인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NHK가 6월 하순 20세 이상 남녀 1천여명을 상대로 실시해 3일 결과를 공개한 이번 조사에서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것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답이 49%로 집계됐다. 직접 피해지인 히로시마(43%)와 나가사키(46%)에서 집계된 같은 응답의 비율보다 전국 합계치가 높게 나타났다. 반면, 원폭투하가 '어쩔 수 없었다'는 응답은 40%로 집계됐다. 히로시마에서는 44%로, '용서할 수 없다'는 답보다 1% 포인트 높게 나타났고, 나가사키에서는 41%로 집계됐다. 또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1945년 8월 9일)에 원폭이 투하된 날짜를 아는지에 대한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비율이 둘다 70% 정도에 달했다고 NHK는 전했다. 히로시마 피폭일을 아는 사람 비율은 30%, 나가사키 피폭일을 아는 사람은 26%였다. 일본인 49% "美원폭투하 용서못해"…40% "부득이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해 미국에 단 한 차례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日, 종전 후 美에 원폭투하 항의 한 번 안했다>.

9.4. 세계적 여론

태평양 전쟁이 원폭 투하로 끝났지만, 여지껏 보지 못했던 엄청난 위력과 전쟁 말부터 암암리에 시작된 냉전의 대두로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그리고 인류 멸망에 대한 위기감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인식은 전후의 냉전과 탈핵 운동, 반전 운동, 히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96]

원자폭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가 산출된 실질적인 사건인 만큼 원폭의 부작용과 그 공포에 대해 실질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는 만화 맨발의 겐(전 10권)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뒤에서 훈도시를 늘어뜨린 줄 알고 자세히 봤더니 원폭으로 인한 고열에 등가죽 살이 녹아 늘어난 것이었고, 팔의 살도 늘어진 게 땅에 끌리기에 하박을 들고 걷는다거나, 입고 있는 옷이 타면서 옷의 무늬가 고열로 살가죽에 아예 녹아 인쇄되어 버린다거나[97], 폭풍으로 깨진 유리창이 온 몸에 박히고 그 살가죽에 멍이 들어 온몸이 시퍼렇게 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원폭의 사용을 반대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 버렸을 것이다.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나중에 나치 독일은 핵 개발에 거의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일단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독일이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이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참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무기가 사용되는 것에는 반대했다.[98]

위키리크스의 정보에 따르면 2009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해 이 원폭 투하에 대해 일본 국민에게 사과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논의였지만 이 원폭 투하를 잘못된 것으로 미국이 인정하면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일본에 대해 벌인 모든 자위 행위와 공격 행위에 대해 미국이 사과해야 한다는 위험한 결론으로 흐를 수 있다는 이유로 결국 그만두었다. 즉, 미국이 일본에 사과하면 미국의 태평양 전쟁 수행에 부정적인 인식이 덧씌워질 수도 있었다. 이후 2016년에 방문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실제로 2016년 5월 27일, G7 이세시마 서밋을 위해 방일한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투하 장소를 방문하여 연설을 가졌다. 연설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무고하게 희생 당한 민간인들[99]을 위로하고 앞으로도 핵 사용을 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내용이었다.

2007년 1차 아베 내각 당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일본 방위상이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과 관련,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져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나의 정리된 생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다."[100]라고 말했다가 일본 내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사임한 적이 있었다. 일 규마 방위상, 전격 사임.

추가로 2007년 조지 부시 정부 시절 미국 행정부의 핵비확산 담당 특사인 로버트 조지프 전 국무차관이 미 국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라며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더 희생될지 몰랐던 전쟁을 끝낸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발언한 적도 있었다.[101][102]원자탄(原子彈) 이 발언 때문에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원폭 논란으로 외교적 마찰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日, 美와 원폭 논란으로 마찰 조짐.

2013년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의 이른바 '침략 망언'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사설과 함께 버지니아주에 거주하는 60대 일본인의 '과거사 반성' 독자 투고문을 게재했다. 글쓴이는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는 일본인이 원자폭탄의 희생자라는 사실만 배웠지, 원폭을 초래한 전쟁의 핵심 가해자라는 사실은 배우지 못했는데 미국에 살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접해 보니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면서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링크.

미국 내에서 원폭 투하 건에 대해서는 전후 세대M세대 간의 시각차가 상당히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10. 한국인 원폭 피해자

파일:Korean_Hibakusha_Cenotaphs_in_Hiroshima_Peace_Park.jpg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내 왼 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있는 나의 왼손
김승진의 '새끼손가락'[10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안타까운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우선적으로 강제동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히로시마 총 인구 약 42만명 중 20만명이 피폭, 9~16만명이 수개월 내에 사망했다. 히로시마 인구 중 약 14만명(3분의 1정도)은 조선인이었으며 피폭자는 5만, 그중 약 3만명이 사망, 생존2만명 중 1만 5천은 광복 후 귀국, 5천명은 일본에 잔류하였다고 한다. 현재 피폭자 후손 등을 모두 합친 히로시마 피폭자 총 집계 74만여명 중 10만명 정도가 한국인이라고 한다.[105]

거기다가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아 피해가 막심했다. 생존자 박남주 할머니의 증언으로는 히로시마 재일동포들은 현지 일본인들은 달리, 피폭을 당하고도 폭심지로부터 2㎞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가족들도 그곳에서 광복을 맞이했다고 한다. #

해당 사례는 1979년 4월 7일 KBS-TV의 'KBS 무대'란 단막극 프로에서 방영된 <희망>[106]재일교포 소설가 홍가이의 작품 <히바쿠샤>에서 다뤄졌고, 이 소설은 1989년 광복절 당시 KBS1 2부작 특집 드라마 <영주의 증명>으로 영상화됐으며 여러 차례 연극화되기도 했다. 나카자와 케이지 화백의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나온다.

물론 일본에도 비양심적인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고, 사람다운 사람도 있기는 했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

그러고도 일제는 하시마 섬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조선인들이 원폭이 터진 나가사키에 강제로 다시 끌려가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되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다. 이들은 심지어 아무런 방호복 없이 맨몸으로 사역을 당했는데,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은 오래지 않아 피폭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당시 피해자들에 따르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피가 계속 분출했다.[107]

유명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꼽는다면,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도 이 투하로 인한 피폭으로 사망했고,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유명인인 장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전신 화상을 입었고 제대로 치료도 못해 12살 나이로 사망했다.[108] #
(원폭 때) 밤처럼 깜깜하고, 덥고, 냄새가... 사람 타는 냄새?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 고함을 지르면서 이 강[109]에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렇게 이쁜 우리 누나... 하루 정도밖에 못 살았어요. 아프다, 덥다... 아츠히(暑ひ/暑い)[110][111]? 덥다(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하루 정도 울면서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자기 딸이 죽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장훈.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 출연 당시 소회.
장영준은 원폭 투하 3일 후 부친을 찾아 나가사키시로 왔다가 폭심지 근처를 지나면서 피폭당했고, 2009년 1월에 수첩교부를 신청했지만 나가사키시가 "증인이 없다." 라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안타깝게도 장영준은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17일에 사망했다. 2012년 9월 18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나가사키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장영준 씨에게 원폭 수첩을 교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나가사키 시에서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또 거부하자 2016년 9월 27일에 한국인 2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

경상남도 합천군에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과 평화의 집이 있는데, 원폭 당시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한국인 중 피폭된 60%의 사람들이 합천 출신이라고 한다. 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참고로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홈페이지도 있다. 링크.

원폭 투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원폭 피해자임에도 "나는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라는 견해를 밝힌 사람도 있고,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현재까지 살아있는 생존자는 2,600여명이며, 일본 정부는 2015년까지도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후 1974년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의 소송 끝에 일본인 피해자에게만 이루어졌던 무료 전액 치료를 한국 정부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당시 피해자들에게 일본 외 타국 어디에 있든지 진료비를 지원 받는 걸로 재판이 마무리 되었다. 2016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2017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미 피해자의 대다수가 사망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실질적인 피해 보상이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식들도 '원폭 피해 2세 환우'가 되어 진상 규명과 의료지원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활동가 김형률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 결성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계속된 투쟁을 해왔다. 2세의 경우 투하 당시 태아 상태가 아니면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다.

2021년 10월에 추진된 지 30년 만에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들어섰다. #

2023년,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기시다 후미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공식 참배하였다.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이 북미에서 바벤하이머 밈이 유행하자 일본인들이 매우 격양된 반응을 보였는데, 그중에 트위터의 한 일본인이 원자폭탄의 피해자로 한국인 등 다른 아시아인들도 있다고 주장하자, "왜 한국인들이 그곳에 있었을까?"라는 여러 나라 사람들의 반박이 달리기도 했다.#

10.1.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한국의 시각

한국에서는 이들을 일본의 식민 통치로 인한 희생자로 인식한다. 다만 강제 징용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비하면 언론에 거론되는 빈도가 극히 드물다. 1980~90년대만 해도 지상파 같은 영향력 있는 매체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다루었지만 교과서에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 당시에도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인지하는 사람은 우연히 TV나 서적, 신문 기사에서 이를 접한 사람들이나 교사, 해당 분야 전문가로만 한정되었다.

2017년 창원에서 열린 원폭 피해자 심포지엄에서 오은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달리 그간 소홀히 다루어졌으며 사회적·역사적 망각이라 할 만큼 무지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나 이와 관련된 논쟁은 그간 크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며 "이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민족주의적 이슈로 떠오른 것과 대조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링크.

이 심포지엄에서 오은정 교수가 지적한 것은 "원폭은 해방을 가져왔고 피폭의 경험은 독립에 수반되는 여러 나쁜 부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문제를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1965년 한일수교 협상에서 해결하지 못한 미해결 과제로 보고 있다. 링크. 한편 이 문제를 법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어디까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 범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2011년 헌법재판소에서는 정부가 일제강점기의 원자폭탄 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 피해자들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링크.
헌재는 결정문에서 "불법적인 강제징용과 징병에 이어 피폭을 당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배상청구권은 헌법상 보장된 재산권일 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침해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국제정세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외교행위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소모적인 법적 논쟁 가능성이나 외교관계의 불편이라는 불분명한 사유를 들어 중대한 >기본권 침해에 직면한 원폭 피해자들의 구제를 외면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당시 반대 의견(각하 의견)을 개진한 재판관도 3명이 있었다. 이강국·민형기·이동흡 재판관은 "원폭 피해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생각하면 국가적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헌법과 법률의 규정과 법리해석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정부에 외교적 문제 해결을 강제할 수는 없다"며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참고로 헌법재판소는 총 9명의 헌법재판관으로 구성되며, 위헌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재판관 6명의 찬성이 필요하다. 즉 6명 찬성, 3명 반대라는 것은 위헌 선언을 위한 정족수 한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것이며, 만약 1명만 더 반대 의견에 섰더라면 해당 위헌 결정은 나올수 없었다. 그만큼 쟁점이 첨예한 사안이었다는 얘기다. 즉, 원폭 피해자들의 절박한 심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일본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 주도록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가해국이었던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이상, 현실적인 해결책은 요원한 상황이다.[112]

11. 논쟁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된 첫번째이자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을 과격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굴복시켜야 할 필요성이랑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시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확률도 있었으므로 원폭 투하를 어쩔 수가 없는 결정이었다고 주장하며 긍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반대로 민간인들을 핵무기로 대량 학살한 것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일이며 이것이 추축국의 학살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게 무엇이냐며 원폭 투하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11.1. 전쟁을 끝낼 수단이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113]

1945년 8월 시점에서 미국 정부는 이 방법 말고는 일본의 항복을 빠르게 받아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까지 일본은 조건부 항복을 고집하며 무조건 항복을 거부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아래에서 주장하는 일본이 내세운 항복 조건은 2차대전 이전 영토유지, 천황제 유지, 전범 자국에서 처벌 등등 휴전 내지는 무승부와 같은 조건이라서 연합군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미 연합군은 독일과의 휴전 협정에서 무조건 항복만을 강요했고 그 외 일체의 협상을 거부했다.[114] 그때 당시 미국 여론은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일본이 원폭을 맞고도 계속 저항할 경우 예정된 몰락 작전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하기 꺼릴 수밖에 없었고, 또한 만주 작전이 유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소련이 참전한다고 100만이 넘는 일본 관동군이 1주일만에 깨질 것이라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몰락 작전이 실행되어 전쟁은 장기화되고 일본의 사상자는 훨씬 늘어났을 공산이 컸고 아예 일본 열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거나 일본인들이 진짜 뿌리째 뽑혔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 내 몰락 작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미군이 도쿄 대공습을 비롯하여 일본 본토에 무차별 공습을 가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 작전을 시행하기 이전에 커티스 르메이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몰락 작전이 시행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 역량을 무력화하라"였다.[115]

실제로 트루먼이 핵 투하를 결정한 건 일본의 항복 논의가 3건에 불과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정보는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울트라 특수도청팀이 도청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외무재상이 주소 일본 대사에게 "우리는 소련에 무조건 항복 같은 중재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 투하와 전후(殿後) 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 오키나와,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이 패배를 전제로 전부 죽을때까지 저항하다가 죽는 광기를 보여주며 미군의 피해도 커지면서 몰락작전 실행시 미국이 일제의 파르티잔을 대비해 병력을 증강시켰고 또 하나는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은 가장 가까운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116] 실제로도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117]

현실적으로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광복을 앞당겼으면 앞당겼지 그 반대의 효과는 없었다. 따라서 만약 원폭 투하 대신 일본 본토 결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늦게 항복했다면 일본 역시 미국·소련에 의해 분단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118]

2차 대전으로 한정해도 영국 대공습이나 드레스덴 폭격, 도쿄 대공습은 일상적인 전투 행위였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만 별도의 학살로 볼 이유는 없다. 도시가 거의 소멸되었고, 압도적인 민간인 피해를 발생했다는 점에서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없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기회도 안 주고 느닷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도 아니다. 포츠담 선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미 사이판 전투의 결과로 일본의 본토가 B-29의 폭격 범위에 들어왔고, 45년 상반기엔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굵직한 폭격 세례들이 날아왔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고 연합국의 요구에 비협조적으로 일관한 것은 바로 일본이다. 결국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본 군부의 고집으로 원자폭탄을 피할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 제국은 분명히 악의 제국이었다. 일제는 731 부대, 난징 대학살 등 나치에 버금가는 전쟁범죄를 저지르며 극동에서 많은 전쟁 피해자들을 야기했다. 또한 일본이 항복했던 그 순간에도 일본은 여전히 중국, 조선,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같은 주요 인구 밀집 지역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만행과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점령지에서 민간인 수십만 명이 달마다 일제의 폭정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만약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민간인들보다 훨씬 많은 아시아인들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119] 이렇게 극악한 제국의 만행들은 원자폭탄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중단될 수 있었다.

11.2. 학살의 정당화는 가능한가

1945년 일본 제국이 항복한 진짜 이유[120]
If we'd lost the war, we'd all have been prosecuted as war criminals.

만약 우리전쟁에서 졌다면, 우리 모두는 전쟁범죄로 기소당했을 것이다.
- 커티스 르메이[출처]
국제법상 학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쟁범죄이다. 특히 집단학살 당한 대상이 군인조차 아닌 "민간인"이라면 어떠한 논리를 들고 와서 주장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애당초 국제법상 정당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조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 수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대량으로 죽는 학살이 발생했는데도 미국이 전쟁범죄에 대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은 것은 단지 미국이 승전한 연합국의 일원이라서 기소를 당하지도 않고 재판을 받지도 않은 것 뿐이지 정당한 학살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122]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전쟁 지도층이 아닌 민간인들이었다. 물론 일본 군국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조선인들을 차별했고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모든 일본인들이 전쟁 광신자는 아니었는데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의 아버지와 같이[123] 반전 운동을 하고 조선인 차별과 학살에도 반대한 양심 있고 선한 시민들도 당연히 있었으나 이들 역시 원폭의 피해자가 된 것은 매한가지였다. 원폭 투하 지점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는 무관한 어린이들도 살았으며, 거기다 일제강점기 당시 내지로 끌려오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상당했다. 심지어는 연합국 포로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에 찬성한다고 해서 민간인들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며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원폭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 원폭을 쓰지 않아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이다. 굳이 도시 한가운데에 떨어뜨릴 것 없이 도쿄만과 같이 근처 해상에 우선 투하해 무력 시위를 벌여도 일본의 투쟁 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했을 것이고, 그래도 항복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저항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투하해도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 그러나 미국이라고 이런 생각을 안 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카미카제, 반자이 어택, 자국민 학살, 집단자결 등을 일삼고 전쟁 전 식민지 유지 따위를 외치는 정신 나간 일본 수뇌부한테 전혀 먹히지 않을 거라 판단한 미국 수뇌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실제로 첫 번째 원자폭탄을 맞고도 현실부정한 일본 상층부의 행태를 보면 경고 폭격마저 "신이 지켜주는 일본" 따위의 프로파간다로 써먹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폭 투하 전에도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찬성한 건 아닌데, 이때 반대하던 고위 장성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체스터 니미츠 원수 등도 있었다.[124]

당시 핵폭탄 투하를 승인한 트루먼 대통령도 깊은 후회를 하였는데, "한 나라 지도자들의 외고집 때문에 인구 전체를 없애야 하는 일이 생긴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라며 "앞으론 원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리처드 러셀 민주당 상원의원에게 쓴 서한이 2015년 8월에 공개됐다.[125] 세계 대전 종전 70년 만에 공개된 서한이다. 관련 기사.

그리고 혹자는 상륙전을 펼쳤으면 미군 측에 끔직한 피해가 야기될 것이라고 하여 투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미 당시 미군의 전략폭격으로 일본군에겐 전쟁 수행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126] 같은 섬임에도 면적이 커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기동할 수 있었던 뉴기니필리핀에선 미군이 일본군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이로 말미암아 비슷한 환경인 일본 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127] 원폭 투하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에 피로를 느끼던 미국 여론과 트루먼이 민주당 지지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빨리 전쟁을 끝내려고 해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하기를 꺼렸던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신무기 실험도 할 겸[128] 투하한 것에 가깝다.

다만 일본의 전쟁 역량이 이미 고갈되어서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중국 본토와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일본군은 아직 팔팔했다. 이는 여전히 일본군에게 연합국 포로나 점령지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할 역량은 충분히 있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도 수탈과 학살로 인한 점령지의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했고, 상술했듯이 미군이 상륙하면 모든 연합국 포로들을 학살한다는 명령까지 내려둔 상황이었다. 즉,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 몰락 작전을 최대한 신속하게 끝낸다 한들 무고한 희생자가 대규모로 생기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었다.[129] 그 희생자가 일본의 민간인인가 아시아의 민간인 및 연합국 포로들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철학, 도덕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리 직접적으로 희생자가 줄었다 하더라도,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핵 폭격을 해서 비교적 소수의 희생으로 끝낸다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극단적 공리주의적인 논리도 있지만,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이 핵공격이 진정으로 피해자를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원자폭탄으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서구권에서도 원자폭탄을 2번이나 투하해 민간인들의 엄청난 희생을 자아낸 것이 이러한 학살이 과연 정당했는가에 대해 심심치 않게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지만, 어떠한 핑계와 변명을 붙이고 쉬쉬하려고 해도 명백하게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기 때문이다.

11.3. 일본이 재앙을 피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다만 민간인 학살 논란과 별개로 폭주하던 일본 정부가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다. 일본은 핵을 맞지 않을 기회가 표면적으로만 보아도 최소 2번 이상 있었고, 히로시마에 핵이 떨어진 뒤에라도 발 빠르게 항복했으면 나가사키 핵 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구 일본군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본토 결전과 같은 망상에 젖어 있었다. 심지어 민간인을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전선에 내모는, 옥쇄 작전이라는 정신나간 계획까지 세우고 있을 정도였다.

우선 연합군은 핵무기의 실전 배치에 회의적이었다. 핵무기는 극비 계획이어서 연합군 장성이라 하더라도 그 실체를 모두가 알았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맨해튼 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와중에도 계획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시간과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중도 포기했다. 미국에서도 맨해튼 계획은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였는데, 맨해튼 계획은 '나치핵폭탄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고 보니 나치에게 핵폭탄 같은 건 없었고, 당시 과학자들에게 핵분열을 다루는 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데다, 미국의 최대 적이었던 나치가 원자폭탄 개발 전에 무너지면서 맨해튼 계획 역시 좌초 위기에 이른다. 게다가 이미 일본의 승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서 이 때 일본이 전쟁을 그만 두고 항복했더라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핵무기 개발의 당위성도 당장에 사라진다. 미국은 승전국이지만 GDP의 40% 정도를 전쟁에 쏟아부으면서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빠졌고, 옛날의 전쟁들과는 달리 패전국들이 잿더미가 되어 그들에게서 자원을 강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었으며, 자력으로 무너진 경제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당시에는 그저 공상과학 같은 핵무기에 매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의 패색은 점차 짙어졌고, 1945년 3월 이후부터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일본 열도 전역이 불바다가 되었고 수십만 민간인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미 일본에겐 승전은커녕 유리한 협상의 고지조차도 당연히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6월 9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일본이 제안한 평화 조건은 당시 일본이 현실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시 일본의 상황으로는 천황제 유지만을 외치는 것도 한참 모자랄 판에 군의 완전한 해체 및 전범 재판을 하거나 전쟁 전 일본의 식민지, 즉 조선, 대만, 태평양 군도, 심지어 만주국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이 전쟁 중에 점령한 영토들을 반환하겠다고 결정하기는 했지만 필리핀을 포함한 상당수의 점령지들이 연합군 손에 돌아왔다는 걸 감안하면 씨알도 안 먹힐 궤변이었다.[130]

자력으로 전황을 타개하는 것도 불가능한 데다, 연합군의 많은 자원을 소모시키던 추축국의 리더인 독일마저 항복한지라 시간을 끌며 유리한 상황이 오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동서 양면에서 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 이미 전쟁 전에 세웠던 절대국방권을 사수하며 독일의 승리에 편승한다는 계획도 박살난 지 오래였으며 오히려 독일 패망 이후 유럽 전선에 배치된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이젠 일본 열도 방면으로 집중될 것은 자명했다. 따라서 시간을 번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했으며 차라리 무리한 전쟁을 그만 두고 협상책을 찾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광기에 찬 군부는 여전히 전쟁을 지속했고, 전쟁은 이후로도 거의 1년 가까이 더 지속되었다. 만약 여기서 전쟁을 그만 두었더라면 더 이상의 도시 공습과 핵폭격, 그리고 쿠릴 열도의 상실은 없었을 것이다.

1945년 5월이 되면 일본 이외의 모든 추축국이 전부 항복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장은 이젠 태평양 일대로 좁혀졌다. 선악을 떠나서 일본 제국이 눈치가 빨랐다면 나치 독일이 항복하게 될 때 그냥 같이 항복해서 나치에 묻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8월까지 대일 중립이었던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영 등 서방 연합국도 유럽 우선 원칙[131]에 따라 가장 중점적으로 조지려는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탈리아와 같이 나치 독일 등 뒤에 숨어서 비교적 묻어갈 수 있었다.[132] 그런데 일본 제국은 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 좋은 기회만 잡았더라면 핵폭격은 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일본이 전쟁 수행 의지를 보이자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다. 연합군은 식민지 포기, 무장 해제, 전범 처벌만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후의 경제 제재도 논의에 없었고, 재무장 제한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었다. 이는 독일에 제시한 항복 조건에 비하면 엄청나게 너그러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조건 제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고,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아예 '선언을 묵살한다'며 애매한 표현과 함께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라며 항복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연합군은 이 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의 파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만약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면 역시 핵폭격은 없었다.

포츠담 선언과 독일의 항복 조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포츠담 선언은 이미 항복한 독일에 비해 향후 일본에 대한 처벌이 상당히 너그러울 것임을 암시했는데 이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비롯한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전후 독일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일본의 피해는 새발의 피였는데 전후 양국의 처우 차이는 다음과 같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군부는 1억 총옥쇄 같은 망상에 빠져서 전국민 옥쇄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이때라도 항복했다면 최소한 나가사키 핵 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는 2차 핵폭격이었다. 결국 일본은 추가적인 핵 폭격을 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핵 무기가 기존에 존재했던 무기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기술적, 정치적 위력의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가 그에 따른 파급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맞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이 전세가 기운 전쟁을 무리하게 고집하면서 공습이나 가미카제 특공으로 인한 자국민의 무의미한 개죽음을 강요했고, 결국 핵이라는 더 크고 참혹한 피해를 막을 기회를 스스로 외면했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140] 핵폭탄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고 해도 일본이 패전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는데 무리하게 항전하다가 박살난것이 그 본질이다.

정리하자면 핵폭격에 희생당한 무고한 민간인[141]은 핵폭격의 피해자이지만, 일본 군부는 핵폭격의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국민에게 핵폭탄이 떨어지게끔 유도한 또 다른 가해자라고 볼 수 있다.

11.4. 수정주의적 관점

당시 미국은 일본에게 있어 천황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실제로 전후 군정에서도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차피 천황제를 보존할 것이었다면 왜 천황제를 보존해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수정주의 관점에 따르면, 원자폭탄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소련 견제와, 전후 미국의 위상을 고려하여 전쟁이 충격적이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으로 종결되어 신화적인 서사시를 만들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였다. 즉, 정치적 상징성, 직설적으로 말해서 위력과시 힘자랑이 목적이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이 전쟁을 그만두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순순히 항복해버리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천황제 수호를 부르짖던 일본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일본이 항복을 거부했다며 원자폭탄을 사용할 명분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원자폭탄을 투하할 도시는 사전에 이미 지정되어서 그 도시들에는 폭격도 안 하고 일부러 남겨두고 있었다.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트리니티 실험으로 성공한 원자폭탄 실험을 공개하여 경고하는 방법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끝났다는 장엄한 정치적 상징성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념과는 달리 원자폭탄이 일본의 항복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142] 미국에 의하여 위력이 과장되어 홍보되었으며, 실제로는 소련의 참전과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일본의 항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수정주의 학계는 해석한다.

미국이 원폭 투하를 서둘렀던 세 가지 이유, 실제 목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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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결정의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한다. 즉, 항복의 조건을 얻으려 했던 일본 측의 대부분의 노력은 그때까지도 중립이었던 소련 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스탈린은 일본 측의 메시지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길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스탈린이 전후에 아시아라는 전리품 획득에 참여하려는 목적으로, 태평양 전쟁 참전이 가능해질 때까지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지연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일본의 교신을 감청하여 그 내용을 해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정계에 강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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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역사가들은 일본 정부가 1945년 6월 20일에 히로히토 일왕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참의관 회의에서 최종 항복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항복 선언을 방해한 요인들에는 연합국들과의 의사소통 수단 부재, 연합국 측의 불확실한 요구 사항, 예상되는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반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들은 군사참의관 회의의 마무리로 이어졌다. 일본 내에서 오고 간 통신 내용에 접근할 수 있었던 미국 정부는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7월 13일에 도청된 일본의 최고위급 외교 전문의 요약본은 이른바 <마법 요약본 Magic summary>이라 불리는데, 스팀슨과 트루먼은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그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아. "현재의 전쟁이 호전적인 모든 열강들의 백성들에게 더욱 큰 재난과 희생을 매일 초래하는 사실을 잊지 않고 계시는 천황 폐하께서는 전쟁이 즉시 종료되기를 충심으로 바라신다." 또 다른 예로 포츠담 회담이 열리고 있던 7월 17일에 미해군의 첩보 보고서가 트루먼과 스팀슨에게 전달되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공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공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했으며, 일본의 남아 있는 유일한 관심사는 "국민의 자존심과 패배의 융화"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야심을 구조할 최선의 방안 모색"에 있었음을 분병히 밝혔다. 이 날은 앨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날이며, 트루먼이 제509혼성비행대의 출격 명령을 승인하기 일주일 전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전쟁을 끝내려는 일본의 절박한 외교적 노력을 스팀슨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퍼≫지에 기고한 그의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글에서 그는,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최후통첩을 일본이 불합리하게 거부함으로써 미국의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스팀슨은 이렇게 썼다. "7월 28일에 일본 총리 스즈키가 포츠담 최후통첩을 '공개할 가치가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포츠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스팀슨은 일본의 이러한 회답 때문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어 단어인 '모쿠사츠(默殺)'를 오만한 거절로 해석한 것은 오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모쿠사츠'를 '노 코멘트(No Comment)'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아마 일본은 시간을 벌어 보려는 속셈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스팀슨의 설명은 그의 회고록 ≪전시와 평시에 현역으로 복무하며 On Active Service in Peace and War≫에서 더욱 미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 회고록은 공개적으로 번디와 함께 쓴 것으로, ≪하퍼≫지에 그의 글이 게재되고 1년 뒤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스팀슨은 일본이 봄과 여름에 여러 차례 평화협상을 타진한 목적을 강조한다. 즉, 일본은 '무조건 항복'의 정확한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하려고 평화협상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설명으로 판단해 보면, 스팀슨은 무조건 항복 요구를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조정하길 원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6월 19일에 개최된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의 합동회의에서 국무장관 대리 조지프 C. 그루는 '무조건성'으로 부터의 후퇴를 촉구했다.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은 그의 사후에 공개된 일기에서 이 회의의 토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항복 조건' : 일본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항복 조건을 요구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특히 그들 나름의 정부 형태와 종교기관을 허용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어떤 조치를 매우 가까운 장래에 취하자는 그루의 제안을 스팀슨이 가장 강력하게 동의한다··· 스팀슨과 그루 두 사람 모두 이러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만약 효과를 거두려면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루 국무장관 대리는 대통령이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에 대해 스팀슨 장관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다르다고 말했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무솔리니가 살해된 이후, 일본 정계의 일차적 관심사는 일왕의 운명이었다. 일본인들에게 그는 신과 같은 존재였고, 그에게 위해를 가한다거나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히로히토가 최후까지 싸우길 원했던 광적인 사무라이 집단에 둘러싸여 그들에게 휘둘린 불운한 지도자였다는 것이 최근 미국에서 나오는 평가이긴 하지만, 그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군부 엘리트들조차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살'을 거부한 가운데, 아키히토 일왕의 항복 이후로 일본 군부 강경파의 부재가 입증되었으므로 그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견해를 과장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45년에 도청을 통해서 미국의 고위 관리들은 일본 외교관들이 일왕의 지위가 존중되고 보장되길 원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7월 13일에 미국의 관리들은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가 종전을 절박하게 원하던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에게 보낸 암호 전문을 해독했다. 그 전문은 "'무조건 항복'이 평화의 유일한 걸림돌"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6월 19일 회의에서 위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도, 스팀슨은 마셜 장군에게 전쟁 목적을 규정하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의 포기를 제안했었다. 이에 반대하여 6월 9일에 작성된 메모에 마셜은 이렇게 썼다. "이 시점에서 일탈하면 우리의 바뀐 목적에 관한 바람직스럽지 못한 수준의 의문과 의혹이 발생할 것입니다." 대신에 마셜은 "우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관한 논의를 중단하고, 패배와 무장해제의 견지에서 우리의 진정한 목표 규정에 착수"하자고 제안했다. 스팀슨은 회고록에서 그 자신이 "일왕에 대한 특별 보장이 포츠담 최후통첩에 포함되길 희망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밝힌다. 사실 스팀슨은 일본 왕실의 존속을 보장하는 표현이 포함된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포츠담에서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는 스팀슨뿐만이 아니었다. 무조건 항복 요구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을 지지했던 또 다른 사람은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 처칠은 무조건 항복 요구가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반대하면서,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군사적 체면을 유지하고 국가 존립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촉구했다. 트루먼은 처칠의 주장을 '퉁명스럽게' 일축했다.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면서 도덕적인 경계를 이미 넘어섰고, 이제는 도덕적인 진정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트루먼의 주장이었다. 트루먼은 일본군에게는 "진주만 공격 이후로는 그 어떤 군사적 명예도 없다"고 말했다.

처칠의 실용적인 견해는 반영되지 않았고, 스팀슨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스팀슨이 작성한 포츠담 선언문 초안은 심하게 수정되었다. 트루먼은 '현재의 왕조'유지를 규정한 스팀슨의 문구를 직접 삭제했는데, 이것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대한 행위들 중 하나였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어구는 선언문의 마지막 구절에 당당하게 등장했으며 이는 왕실의 완전한 굴복을 전망하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강조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 일왕과 관련된 표현을 떠올리면서 트루먼은 신임 국무장관 제임스 F. 번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시 작성된 최후통첩에는 '현재의 왕조'를 존중한다는 표현을 대체하여 번스가 작성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포함되었다. "일본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했던 자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

... 6월 30일에 번스는 국무장관에 임명되었고, 7월경에 그는 원자폭탄을 일본과 연관지은 것만큼 소련과 연관지어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가 무조건 항복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자폭탄이 현실이 되자 번스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포츠담 회담은 7월 15일에 개최되었다. 그 다음날 암호명 '트리니티' 작전으로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있었다. 스팀슨은 번스에게 원자폭탄 사용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번스는 대통령을 들먹이며 스팀슨의 요청을 무시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은 신임 국무장관 번스에게는 일본을 용서해 주는 일보다 더 중요했다. 일본은 어제의 골칫거리였던 반면 소련은 내일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그 점이 포츠담 회담의 성격을 규정했다.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모든 평화협상안을 거부했으며 일왕 문제에 대해서 유연함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일본을 완전히 절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포츠담 선언 이틀 전에 트루먼이 이미 일본 도시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명령을 승인했다는 사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
그 해에 스팀슨은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자신이 ≪하퍼≫지에서 지적하지 못했던 사항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역사는 미국이 (일왕에 대한) 입장 발표를 연기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켰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스팀슨의 고백보다 훨씬 놀라운 어떤 사실을 무시했는데, 그것은 심지어 원자폭탄 2개조차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날인 8월 10일 오전 7시 33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최고 통치기구인 어전회의(御前会議)로부터 모스 부호로 구성된 암호 메시지를 접수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에서 발표된 공동 선언문의 취지가 최고통치자로서의 천황 폐하의 특권들을 손상시키는 그 어떤 요구와도 타협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그 선언문에 열거되어 있는 조건들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다."

트루먼은 오전 9시에 전시내각을 소집하여,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일본 측의 메시지가 분명한 조건을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포츠담 선언의 수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어보았다. 당연히 국무장관 번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일본 측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측의 제안을 수락하면 미국이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번스는 "포츠담 선언의 완전성과 엄정함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이 미국에 쏟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이 지지했던 완전성과 엄정함이었다. 그러한 비판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만약 미국이 일본 왕실의 존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일본이 그것을 원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알려지기 몇 주 전에, 심지어 몇 달 전에 미국 정부가 그러한 조건을 제안하지 않았던 이유와 관련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번스는 이 점에 대해서도 민감했다. 왜냐하면 번스가 스팀슨이 작성한 포츠담 선언문 초안을 수정하자고 트루먼에게 촉구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번스는 줄곧 일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해진 고통의 규모를 그날 아침에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트루먼의 조언자들은 그 시점에서 무조건 항복 요구를 철회하면 원자폭탄 사용의 '불가피한' 정당성이 상당히 훼손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 번스, 스팀슨 등등의 인물들이 곧바로 원자폭탄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결국 일본의 항복 제안에 대하여 미국은 항복 조건이 유효한 배경을 확대하면서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 문제를 교묘하게 처리했다. 미국은 포츠담에서 트루먼과 번스가 삭제했던 표현과 사실상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 미국의 회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항복 조건들을 이행하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며, 일왕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귀속될 것이다···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 정부의 최종 형태는 일본 국민의 자유의사로 확정될 것이다." 히로히토 자신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조차도 여기에 복종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생각보다는 완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전쟁이 끝났다.

묘한 점은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일본군 병사들의 전투를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일왕의 권위를 통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 일본군 병사들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일왕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연합군 측은 히로히토를 그 자리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연합군 측은 미주리호 선상에서 거행된 항복 조인식에 참석하는 치욕을 면해 줌으로써 그의 역할을 존중했다. 이처럼 계산된 아량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더라면, 분명 일본과의 전쟁이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왜 미국이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라는 뻔한 질문이 제기된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러한 질문들과 씨름했지만, 수정주의자들의 거두인 가르 엘페로비츠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 문제를 다룬 사람은 없었다. 그의 1965년 저서인 ≪핵의 외교: 히로시마와 포츠담 Atomic Diplomacy: Hiroshima and Potsdam≫은 원자폭탄이 일본보다는 소련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 후에 발간된 ≪원자폭탄 사용 결정 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은 기밀이 해제된 문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 책에서 엘페로비츠는 트루먼이 원자폭탄과 관련된 첫 회의에 참석한 4월 25일에 이미, 그로브스 장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러시아 정세’에 끼칠 원자폭탄의 영향이 중요한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일본을 침공함으로써 관심을 딴 데로 돌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 독일의 위협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위협도 1945년 여름 무렵에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번스와 트루먼이 항복의 조건을 분명히 하길 거부하면서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을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포츠담 선언이 무조건성의 표현으로 회귀함으로써 구체화된 그러한 무관심은 원자폭탄 사용의 가장 큰 목적이 일본과의 전쟁 종식이 아니라 소련과의 예상되는 갈등 양상을 통제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로 제압하려고 했던 대상이 히로히토 일왕이 아니라 소련의 수상 스탈린이었다면 어떨까? 원자폭탄 투하가 추축국 일본을 향한 마지막 일격이 아니라 크렘린을 겨냥한 첫 번째 일격이었다면, 다시 말해 동유럽을 향한 소련의 명확한 영토 구상을 실행하지 말라는 경고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과 정치에서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요인으로 구성된 해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원자폭탄은 마지막 일격인 동시에 첫 번째 일격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역사학자 바턴 번스타인은 원자폭탄 투하 목적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대한 압력 행사였다고 주장한다. 2005년에 일본의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는 일본의 자체 문헌들에 의존하여 ≪암투: 스탈린, 트루먼과 일본의 항복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하세가와는 트루먼이 원자폭탄을 사용한 목적은 (임박했던) 일본의 항복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강요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복잡한 역사 분석을 익힌다고 해서 트루먼이 기만적이라거나 불필요한 원자폭탄 공격 명령을 내릴 만큼 냉혹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신속한 항복을 이끌어 내려던 의도와 소련에 대한 위협 의도의 혼동을 목격하는 것은, 트루먼 자신이 발견한 상황의 끔찍한 복잡성을 인정하는 셈일 뿐이다. 기만적인 것은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 트루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제기한 도덕 및 군사적 명쾌함과 단순함에 대한 주장이다.
...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원자폭탄이 소련에 대한 위협을 실행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그러한 결론 -스팀슨의 불만 섞인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과시하는 듯이 맥을 못 추게 만든”- 에 이미 도달했든 아니든, 일본을 상대로 그러한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트루먼과 그의 측근들은 원자폭탄이 전후 세계에서 미국에 커다란 영향력을 부여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와 같은 무제한적인 영향력은 떨쳐 버리기 힘든 환상이었고, (...) 전후 미국의 탁월함을 공고화하는 목표가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 결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할지라도,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전망이 일본의 항복 의사를 수용하려는 모든 욕구를 눌러 버린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원폭 투하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원자폭탄의 비할 바 없는 치명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수십만 명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도가 어떠했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정확하게 일본뿐만 아니라-일본이 주요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세계를 향한 이중 목적의 과시였다.
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88~101p
껄끄러운 사실들의 예로 원자폭탄에 대한 미국 정부 자체의 전후 평가가 있다. 이 평가에서 미국 정부는 전략폭격연구소의 보고서에 기술된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 그리고 1945년 11월 1일 이전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러시아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일본 본토 침공이 계획되거나 기도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다.”

Summary Report(Pacifir War), Unites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July 1, 1946
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108p

11.5. 일본의 항복에 미친 영향의 여부

11.5.1. 전통주의적 관점(원폭 투하로 항복)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의 원폭 투하를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143]

반면에 소련은 오직 일본을 겨냥해서 내려왔고, 사실상 1주일 남기고 다급하게 내려왔다. 거기다가 일본 측도 이미 관동군이 일본군 내에서 최약체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144] 이미 이전에 사이판 전투오키나와에서 관동군의 최정예가 궤멸되었음에도 일본은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껍데기만 남은 만주의 관동군이 무너졌다고 항복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원폭보다 소련의 참전이 일본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서 간과하는 것이, 애초에 일본 군부가 마지막으로 소련에 희망을 건 이유가 미국의 융단 폭격과 원폭 투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의 강화를 중재해 줄 카드로 소련을 생각했고 이 구상이 완전히 좌절된 계기는 소련의 참전이지만 그 정도로 일본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국가는 어디까지나 미국이지 소련이 아니다. 히로히토조차 항복 선언에서 미국의 원자탄을 항복을 결정한 요인으로 발언했지 소련의 만주, 사할린 공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145]

기존 공습의 피해가 더 컸으니 일본 군부는 핵무기에 대해 충격받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절치 않다. 충격의 정도는 단순히 인명피해 수치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다.[146] 그 이전에는 수많은 전투기들이 출격해 수 시간 동안 폭격해야 겨우 입은 피해를 핵무기는 단 1번에 일으킬 수 있었기에 충격의 정도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단순히 도쿄 대공습의 피해가 더 컸으니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은 별로 충격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또한 자국의 본토가 공습과 원폭으로 파괴되고 본토의 천황의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 그깟 식민지인 만주에서의 공세가 일본에게 더 골칫거리였을 리 만무하다. 일본 군부에게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일본 본토였지 식민지나 괴뢰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폭은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소련군은 본토에서 떨어진 만주에서의 일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의 지분이 아예 0인 건 아닐지라도 소련이 미국보다 일본 항복에 있어서 공로가 더 크다는 주장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들을 통해 2차 대전 전체가 미국의 공로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 그러한 대중적인 관점에 대한 반발과 그동안 묻혀 있던 독소전쟁 등의 재발굴로 소련의 업적이 재평가되며 미국의 역할이 평가절하 당하는 수정주의적 견해가 역덕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147]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실제 소련이 막대한 기여를 한 유럽 전선뿐 아니라 고작 일주일 참전한 태평양 전선에까지 확대되어 일각에서는 '원자탄은 그 이전의 도쿄 대공습 등과 비슷한 일반적인 사건이었고 실제적인 항복 요인은 소련에 있다'라는 식의 주장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태평양 전쟁 내내 연합국에 비협조적으로 일관했으며, '4년간 일본을 항복시키지 못한 미국과 달리 일주일만에 소련이 일본을 항복시켰다'는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도 설득력이 낮다. 일본은 미 해군의 군함인 미주리 호에서 항복 조인식을 했으며 당연히 미국의 이름이 연합국의 최상단에 올랐다. 대일 전선에서의 소련의 공로는 미국은 물론 중국, 영국, 영연방보다도 후순위이다.

11.5.2. 수정주의적 관점(소련군 참전으로 항복)

소련군이 태평양전쟁을 주도했다는 것은 명백히 무리한 주장이며, 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주장하지도 않는 내용이다. 수정주의적 관점은 일본이 항복 결정을 내린 과정에서 어떠한 원인이 가장 결정적이었나를 논의한다.

수정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전통주의적 관점이 가지는 문제점은, 지나치게 군사적인 내용에만 치중하고, 외교 전략적인 관점을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당시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고,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가 가까워지자, 소련의 중재하에 무조건 항복보다는 괜찮은 협상조건으로 항복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의 참전이 이뤄지자, 이런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련군의 군사적 위협보다는, 연합국과 중재해주리라는 마지막 기대가 배신당했다는 점이 가장 큰 항복의 원인이라고 수정주의자들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군사력으로 일본 본토에 상륙할 능력이 없다는 반박은,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논리적 오류에 해당할 수 있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을 근거로 일본이 핵폭탄을 맞고 항복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옥음방송은 일본의 항복을 연합국의 민간인 살상에 책임을 돌리며 정당화하려는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강하며, 실제 일본의 의사결정 과정을 들여다보려면 그러한 대외적으로 공개된 표현보다는, 일본 수뇌부 내부에서의 의견교환 과정을 보아야 하며, 어전회의와 일본 외교 전문들과 같은 자료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만약 프로파간다적이고 정신승리적인 옥음방송을 사실 근거라고 한다면, 일본이 영미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 조차도 사실로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쇼와 천황의 잔학한 폭탄에 대한 언급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일본의 피해자 행세의 원조격이라고 볼 수 있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다면, 왜 원폭투하 이전에 60여개의 도시가 소이탄 폭격에 불에 탔을 때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은 이유를 전통적 관점은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일본의 항복과정을 보여주는 일본 내부 어전회의 문서에 의하면, 일본은 소련이 대일전쟁에 뛰어들어 협상의 희망이 좌절되자 곧바로 위원회를 열고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즉,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기 이전에 이미 항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 히로시마에 뭔가 강력한 폭탄이 떨어진 것은 같기는 한데, 그것이 과연 정말 원자폭탄인지를 명확히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원자폭탄이라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나중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항복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하게 바뀐 변수는 소련군의 참전으로 중재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라고 수정주의적 관점은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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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해석의 첫 번째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간단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 육군 공군이 8월 6일에 핵무기로 히로시마를 폭격하고, 사흘 후에 다른 핵무기로 나가사키를 폭격하고, 그 다음날 일본인들은 항복하겠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 미국 신문들이 "태평양의 평화: 우리의 폭탄이 해냈다!"와 같은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을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에서 히로시마 이야기가 전해질 때, 폭격 당일인 8월 6일이 이야기의 절정으로 작용합니다.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그 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폭탄을 만들기로 한 결정, 로스앨러모스에서의 비밀 연구, 인상적인 첫 번째 실험, 히로시마에서의 최후의 정점. 즉, 폭탄에 대한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폭탄 이야기의 맥락에서 일본의 항복 결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폭탄 이야기"로 캐스팅한 것은 이미 폭탄의 역할이 중심적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8월 둘째 주에 가장 중요한 날은 8월 6일이 아니라 8월 9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전쟁 중 처음으로 최고 위원회가 무조건적인 항복을 논의하기 위해 만난 날이었습니다. 최고 위원회는 1945년에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내각의 한 종류인 정부의 6명의 최고 구성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 날 이전에는 항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이 요구하던 무조건적인 항복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쓰라린 약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유럽에서 전쟁 범죄 재판을 소집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신성하다고 믿었던 천황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그들이 천황을 제거하고 정부의 형태를 완전히 바꿨다면 어땠을까요? 비록 상황이 1945년 여름에 좋지 않았지만,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전통, 신념, 또는 삶의 방식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8월 9일까지. 그들이 그렇게 갑자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꾸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14년의 전쟁 후에 처음으로 항복을 심각하게 논의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나가사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최고위원회가 항복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이미 시작한 후인 8월 9일 늦은 아침에 일어났고, 최고위원회가 교착 상태에서 휴회하고 전체 내각이 소집되어 논의를 시작한 후인 이른 오후에서야 일본 지도자들에게 폭격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시기만 놓고 보면 나가사키가 그들의 항복 동기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히로시마 역시도 좋은 후보는 아닙니다. 회의로부터 74시간이나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종류의 위기가 대응하는데 3일이나 걸린답니까? 위기의 특징은 임박한 재난 의식과 지금 당장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압도적인 열망입니다. 히로시마가 위기를 촉발했음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이나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느꼈을까요?
...
누군가는 어쩌면 늦장이 완전히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폭격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핵무기라는 것을 몰랐고, 그런 무기가 미칠 수 있는 끔찍한 영향을 이해했을 때 자연스럽게 항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설명은 실제 증거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먼저 히로시마 지사는 히로시마가 폭격을 받은 당일 도쿄에 히로시마 공격으로 약 3분의 1의 인구가 사망했고 도시의 2/3가 파괴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정보는 이후 며칠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폭격의 최종 결과인 결과는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첫날 공격의 결과를 대략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조사한 육군 팀에 의해 작성된 예비 보고서, 즉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려준 보고서는 8월 10일까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항복 결정이 이미 내려진 후에야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비록 그들의 구두 보고서가 8월 8일에 (군에) 전달되었지만, 폭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틀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항복 결정은 히로시마의 충격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일본군은 적어도 핵무기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일본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몇 군인들은 일기에서 히로시마를 파괴한 핵무기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아나미 고레치카 전쟁장관은 8월 7일 밤 일본 핵무기 프로그램의 수장과 협의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핵무기에 대해 몰랐다는 생각은 맞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타이밍에 관한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눈에 띄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8월 8일, 토고 시게노리 외무상은 스즈키 칸타로 총리를 찾아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논의하기 위해 최고 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지만, 내각 구성원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 위기는 하루하루 커지지 않다가 8월 9일 마침내 만개했습니다. 일본 지도자들이 항복을 결정한 것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충격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은, 8월 8일 원폭 투하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고려했었는데,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가, 갑자기 바로 다음날에 항복을 논의하려고 만났다는 사실을 마주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일종의 집단적인 정신 분열증에 걸렸거나, 다른 사건이 진짜 항복을 논의하기 위한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
히로시마 이전 3주 동안 26개 도시가 미 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중 8개, 즉 거의 3분의 1이 히로시마와 같거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945년 여름 일본에 68개 도시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히로시마 폭격을 일본 항복의 원인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질문은 만약 한 도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항복했다면, 그 66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왜 항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본의 지도자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때문에 항복하려 한다면, 그들이 전반적으로 도시의 폭격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도시의 공격이 항복을 압박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쿄의 폭격 이틀 후, 은퇴한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는 당시 일본 고위 관료들 사이에 팽배했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시데하라는 "국민들이 매일 폭격을 당하는 것에 점차 익숙해질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단결과 결의는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십만 명의 비전투원이 죽거나, 부상을 입거나, 굶더라도, 수백만 개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도" 외교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시데하라는 온건주의자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 수뇌부에서 마찬가지의 태도였습니다. 수뇌부에서는 소련이 중립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은 논의했지만, 도시 폭격의 영향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기록을 보면, 도시 폭격은 1945년 5월에 있었던 한 차례와 8월 9일 밤에 있었던 광범위한 논의 중에 있었던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최고 수뇌부 논의 중에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증거들을 보면, 일본의 지도자들이 도시 폭격이 전쟁 수행에 관련된 다른 긴급한 문제들에 비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을 경우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8월 13일, 아나미 장군은 원폭 투하가 일본이 수개월 동안 참아왔던 소이탄 폭격만큼 위협적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소이탄 폭격만큼 나쁘지 않았고,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것들을 깊이 논의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어떻게 항복을 강요할 수 있었을까요?

전략적 중요성

만약 일본인들이 도시 폭격이나 히로시마 원폭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면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소비에트 연방.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전략적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고 있던 전쟁이 거의 끝물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나빴습니다. (...) 일본 정부의 가장 강경파들 조차도 전쟁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계속할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최선의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국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전쟁 범죄 재판을 피하고, 그들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며, 그들이 정복한 영토의 일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
그들은 항복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두 가지 전략적인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외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1941년 4월 소련과 5년간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고 1946년에 만료됩니다. 주로 민간 지도자들로 구성된 토고 시게노리 외무상이 이끄는 단체는, 스탈린이 한편으로는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사이에서 화해를 중재하기를 희망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비록 이 계획의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나름 그럴듯한 전략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영향력과 힘의 증가는 러시아의 영향력과 영향력의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항복 조건이 미국에 너무 유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련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계획은 군사적인 것이었고, 육군대신 고레치카 아나미가 이끄는 찬성자 대부분은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국 육군 지상군을 이용하여, 미군이 침공할 때 많은 사상자를 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미국이 더 나은 항복 조건을 제시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전략 또한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무조건적인 항복에 깊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군 내부에서도, 본토 침공에서 상당한 사상자가 나올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고위 지휘부의 전략이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초래한 것이 히로시마 폭격인지, 소련의 침공과 선전포고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이 두 가지 사건이 전략적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8월 6일 히로시마가 폭격을 당한 후에도 두 가지 옵션 모두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스탈린에게 중재를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치러 많은 미군 사상자를 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 히로시마 폭격은 일본의 전략적 옵션 중 어느 것도 포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선전포고와 만주와 사할린 섬 침공의 영향은 사뭇 달랐습니다.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자 스탈린은 더 이상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는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련의 움직임으로 외교적 선택은 사라졌습니다. 군사적 상황에 미치는 영향도 똑같이 극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최정예 부대 대부분은 본토의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일본의 군대는 미국의 첫 번째 침공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규슈 섬이 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주에서 한때 자랑스러웠던 관동군은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최정예 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과거의 허울만 남은 종이호랑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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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향에서 침략한 강대국에 대해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수는 있어도, 두 방향에서 공격하는 두 강대국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군사적 천재성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소련의 침공은 외교 전략을 무효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군부의 결정적인 전투 전략을 무효화시켰습니다. 단번에 일본의 모든 선택권이 사라졌습니다. 소련의 침공은 전략적으로 결정적이었고, 일본의 선택권을 모두 박탈했고, 히로시마의 폭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선전포고로 인해 작전 수행에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한 계산도 바뀌었습니다. 일본 정보기관은 미군이 몇 달 동안 침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소련군은 불과 10일 안에 일본에 적절한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소련의 침공은 전쟁을 끝내는 결정을 매우 민감하게 내렸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지도자들은 몇 달 전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1945년 6월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들은 소련의 참전이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 가와베는 같은 회의에서, "소련과의 우리 관계에서 절대적인 평화 유지는 전쟁의 지속을 위해 필수적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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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이야기

이러한 세 가지 강력한 반대 의견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적인 관점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고, 특히 미국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보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히로시마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이 일본과 미국 모두에게 얼마나 정서적으로 편리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관점은 사실이기 때문에 지속성을 가질 수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감정적으로 만족스럽기 때문에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후 히로시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일본의 지도자들이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왔습니다.

천황의 입장이 되어 보세요. 당신은 방금 당신의 나라를 처참한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경제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당신의 도시의 80퍼센트가 폭격을 받고 불탔습니다. 육군은 잇단 패배로 엉망이 되었습니다. 해군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항구에 갇혀있었습니다. 굶주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쟁은 한마디로 재앙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당신의 국민들에게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항복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것을 하겠습니까? 당신은 실패를 인정하겠습니까? 당신은 스펙터클하게 계산을 잘못했고, 실수를 반복했으며,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성명서를 내십시오. 아니면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놀라운 과학적 돌파구에 그 손실의 책임을 돌리고 싶습니까? 전쟁의 패배를 원폭 탓으로 돌리면서 단번에 전쟁의 모든 실수와 오판을 씻어냈습니다. 폭탄은 전쟁에서 패배한 완벽한 이유였습니다. 비난을 나눌 필요도 없고, 심문 법정도 열리지 않습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폭탄은 일본 지도자들의 비난을 빗겨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배를 원폭에게 돌린 것은 다른 세 가지 정치적 목적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첫째, 천황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적의 예상치 못한 기적의 무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다면 천황제는 일본 내에서 지지를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국제적인 동정심에 호소했습니다. 일본은 침략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특히 피정복 민족에 대한 잔혹성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 수단으로 부당하게 폭격을 당한 일본을 피해국으로 재추방할 수 있다는 것은 일본 군부가 해온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일들을 상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원폭 투하에 주목하는 것은 일본을 좀 더 동정적인 시각으로 그리게 하고 가혹한 처벌에 대한 요구를 비껴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폭탄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의 미국인 승리자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미국의 점령은 1952년까지 공식적으로 일본에서 끝나지 않았고, 그 기간 동안 미국은 일본 사회를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바꾸거나 리메이크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점령 초기 동안, 많은 일본 관리들은 미국인들이 천황제를 폐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걱정을 했습니다. 일본의 많은 최고 정부 관리들은 전쟁 범죄 재판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일본이 항복했을 때 유럽에서는 이미 독일의 지도자들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일본 역사학자 아사다 사다오는 많은 전후 인터뷰에서 "일본 관리들은 분명히 미국인 질문자들을 기쁘게 하고 싶어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인들이 폭탄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고 싶었다면, 왜 그들을 실망시켰을까요?

종전을 원폭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여러모로 일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었지만, 미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폭탄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미국의 외교적 영향력이 증대될 것이며, 미국의 안보가 강화될 것입니다.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20억 달러는 헛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소련의 참전이 일본을 항복하게 만든 것이었다면, 소련은 4년 만에 미국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었고, 소련의 군사력과 소련의 외교적 영향력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냉전이 진행되고 난 후, 소련의 참전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에게 원조와 위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The Bomb Didn’t Beat Japan. Stalin Did., foreignpolicy

수정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원폭 투하가 일본 항복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일본 지도부의 패전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 부각하려는 목적과, 미국의 국력 과시 목적이 서로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일본을 쓰러뜨린 건 ‘원폭’이었나?
일본을 패배시킨 건, 원자폭탄이 아닌 스탈린이었다

11.5.3. 절충론

절충론적 시각은 원폭의 영향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주의와 소련의 역할만을 과장하는 수정주의 대신 상술한 두 사건 모두 일본의 항복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한다.

절충론자들에 따르면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은 서로 뒤엉킨 사건일 뿐만 아니라 거의 동시간대에 발생하여 두 사건의 영향을 무자르듯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148] 실제로 원인과 결과가 1:1로 대칭되지 않고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면 원자폭탄이라는 미증유의 무기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어 도시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일본 군부가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나가사키 2차 원폭 투하와 소련의 선전포고가 함께 발생했다. 정치적/사회적으로는 일본 시민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결사항전을 외치는 것이 원폭으로 인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소련을 통한 연합국과의 협상 시나리오가 불가능해졌다.

일본의 정치결정권을 지닌 어전회의 참가자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폭 투하 이전부터 항복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항복을 주장한 자들도 있었으며,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 이후 항복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개인조차 두 사건 모두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149] 따라서 일본 정부/군부 내에서도 사람에 따라 항복을 결정한 원인이 모두 달랐다.

이러한 이유로 절충론자들에 따르면, 특정 사건 하나가 절대적인 요인이라기보단 두 사건 모두 일본의 항복 결정에 동시에 영향을 미쳤으며 해당 논쟁은 상호복합적인 인간사의 특성을 무시한 단견에서 발생했을 뿐이다.

12. 기타

파일:aafef42e53a7fb1eb375471abed96718.jpg
* 우스갯소리로, 인터넷에서는 '일본 역대 최고기온'의 순위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날짜를 1위, 2위로 기록하기도 한다.

13. 관련 작품

14. 관련 문서

1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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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ociety for Historians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미국외교역사학회) 공식 저널인 Diplomatic History(SJR Impact Factor가 최근 연속된 3년간 Q3 이상으로 분류한 나무위키:기본방침/토론 관리 방침 학술적 유의미성의 입증상 학술적 유의미성이 입증되는 저널)의 Recent Literature on Truman's Atomic Bomb Decision: A Search for Middle Ground 논문에서 인용. 나무위키:기본방침/토론 관리 방침 근거 신뢰성 순위상 제3순위 토론 근거 자료.[2] 하지만 이 작전은 1회성 작전이었고 그 특성상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일본을 두들길 수 있게 된 것은 그보다 더 뒷날의 일이고 저 시점에서 아직 일본은 이렇다할 큰 패전을 겪지 않았으니(미드웨이 해전도 시간상으로 둘리틀 공습 이후다.) 항복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3] 일제의 항복 무렵 미국은 어떻게든 수도 서울을 확보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서울을 포함한 남쪽 지역은 미국이, 북쪽 지역은 소련이 관할하는 것을 소련에 제안했고 39선 이북 시나리오도 고려하던 스탈린은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4] 1946년 7월에 발표된 미국과 일본 공중전 결과에 대한 공식 보고서인 '미국의 전략 폭격 조사(strategic bombing survey)'는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침공을 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이 항복했을 것이라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헨리 스팀슨은 '일본을 침공하였더라면 희생되었을 100만 명에서 150만 명의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폭탄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5] 이 공습으로 인해 사실상 일본 해군이 이 당시 아직까지 기동 가능한 군함 및 함선은 거의 대파되거나 사용 불능이 되어버린 상태나 마찬가지여서 강제 해체란 말이 지나치다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6] 도쿄 대공습으로 말미암아 공업 생산력도 상실했고 이후로도 공습은 일상화된지라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7] 당대 용어로는 '국체호지(國體護持)'라고 하였다. 천황=국가라는 이야기이다. 전후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했으나 천황은 전쟁 후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끌려가서 인간 선언을 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이후 일본에서 천황이란 유럽 왕실과 마찬가지로 한낱 연예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법적 형식상으로나마 국왕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어느 정도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는 데다 사문화되었지만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도 있어 정치에도 일부 관여하기도 하는 등 권한 행사가 가능한 영국을 포함한 유럽 왕실과는 달리 일본 황실은 일일이 행보를 제한받으며 최종 결재권은 커녕 거부권도 형식적으로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본국의 상징',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일 뿐이다.[8] CIA가 공개한 보고서 원문 링크.[9] 이게 빈말이 아닌 것이 당시 일본군 군가 중 하나인 도키노사쿠라, 즉 동기의 벚꽃의 가사가 이런 내용이다.[10] 여담으로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그 중에서도 하라게이의 명수로 알려졌다.[11] 하지만 애초에 일본 제국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상황에서 그 피해국인 연합국한테 알아서 조율해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으로 보면 무책임함이자 뻔뻔함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스즈키 간타로가 말한 '묵살'이 어떤 뜻으로 해석되든 간에 당시 일본 제국 수뇌부가 연합국의 입장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12] 행정명령 9066호만 봐도 알 수 있고, 윌리엄 홀시 재독은 과달카날에서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를 외쳤다.[13] 원자폭탄 연구 초기에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포신형 폭탄도 연구하였으나 개발이 매우 어려워 중단되었다. 이 폭탄의 이름은 'THIN MAN'이었다.[14] 파일:external/www.planetdeadly.com/plutonium.jpg 이렇게 생겼다.[15] 고폭탄소이탄을 조합한 통상 폭격만으로도 이러한 싹쓸이 폭격 효과는 충분히 거둘 수 있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원자폭탄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16] 출처: 목표 선정 위원회 회의록, "The Emperor's palace in Tokyo has a greater fame than any other target but is of least strategic value." 황거는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장소이긴 하지만, 군사적 가치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17] 그러나 첫번째 투하지를 병사들과 수병들밖에 없는 곳으로 제한하겠다던 트루먼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원폭이 제일 먼저 투하된 히로시마는 공업도시였으므로 사상자 절대 다수가 민간인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폭격 목표로 정한 이상 민간인의 희생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18] 맨해튼 계획 전체를 통틀어 그로브스 소장이 자기 고집을 꺾은 정말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뒤에 서술되지만 나가사키는 목표 선정부터 시작해서 실제 폭격 작전에서도 2차 목표였음에도 불운의 연속으로 결국 원폭을 맞게 된다.[19] 트리니티 실험, 히로시마 투하, 나가사키 투하에 각각 사용되었다.[20] 스티븐 워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황금가지, 2005, pp. 171.~172.[21] 루이스 앨버레즈 또한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다. 미 육군 중령 계급을 받아 활동했다.[22] 은쟁반 B-29들은 이 가변피치 프로펠러 덕분에 마치 '스포츠카를 주차시키듯' 자체 후진으로 바로 주기할 수 있었다. 스티븐 워커, 앞의 책, p. 118. 현대의 제트 전투기들조차도 자체 후진은 불가능하며 토잉카로 밀어주어 주기해야 한다.[23]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p. 117~118.[24] 다만 2018년에 불명예 제대하였다.[25] 동성애자를 뜻하는 그 게이와 철자가 같은데 애초에 gay라는 단어는 '명랑한', '즐거운'이라는 의미였기에 에놀라 게이라는 이름은 동성애자와는 상관이 없다.[26] 원래 393 폭격비행대대의 수직 미익 심벌은 동그라미 안의 화살표였다. 원자폭탄 투하 작전을 앞두고 일본군을 교란하기 위해 수직 미익 심벌을 바꾼 것이 동그라미 안의 R 표식이다.[27]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218.[28] 사진을 잘 보면 몇 시간 전 부랴부랴 페인트 칠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29] 그러나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가보면 B-29 에놀라 게이 밑에 나카지마 겟코 같은 일본의 기체들을 모아서 전시한다. 누가 보아도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이다.[30] 2022년 8월 첫 공개된 사진.[31] 작전의 전체 지휘는 제509 혼성 전대의 티비츠 대령이 했지만, 실제 폭탄의 관리는 그의 소관이었다.[32] 1922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생으로 바로 하이먼 리코버 제독과 동기이며, 초급 장교 시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 경력을 해군 병기장교로서 종사해 VT신관 개발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33] 여담으로 이때 파슨스 대령은 맥베이 함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1) 티니안 섬까지 최고 속도로 달릴 것 2) 화물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 것 3) 배가 침몰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화물부터 구할 것(함장을 포함해 전 승무원의 생명보다 화물이 우선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설도 있음) 4) 당신이 항해 일자를 단축할수록 이 전쟁도 단축됨.[34]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p. 236~237.[35] 원자폭탄 만들기(사이언스 북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황금가지),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뿌리와 이파리) 등에 나온다.[36] 아마도 최고책임자인 그로브스 소장에게 직접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러한 낭설의 원인이 아닐까 추정된다.[37]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181. 트루먼 대통령의 모친(마사 앨런 영 트루먼)은 히로시마에서 10,500km 떨어진 미국 미주리 주 그랜뷰에 살고 있었다. 참고로 트루먼 대통령의 모친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1947년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난다.[38] 일례로 바로 후술할 나가사키 핵 폭격이 출격직후 정찰팀이 제1목표였던 고쿠라가 기상상태가 나쁜걸 확인하고, 현장에서 제2 예비목표인 나가사키로 변경한 경우다[39] 원래 제393 폭격비행대대의 호출부호는 빅터였으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작전에서는 보안을 위해서 임시로 dimple(보조개)이라는 단어로 호출부호를 변경했다. 본 문서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초 호출부호 빅터로 통일하여 서술한다.[40] The Great Artiste(위대한 예술가)는 509 혼성전대 393 폭격비행대대에서 에놀라 게이, 스트레이트 플러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기체 중 하나였다. 이러한 기체명이 붙은 이유는 이 B-29의 폭격수였던 Kermit Beahan 대위의 2가지 솜씨가 그야말로 예술이라서. 하나는 노든 폭격조준기 다루는 솜씨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작전 계획에는 1차 원폭 투하는 에놀라 게이, 2차 원폭 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후술하는 것처럼 1차 원폭 투하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폭발 관측/계측 임무를 맡으면서 온갖 장비를 덕지덕지 설치해놓았는데, 불과 며칠 뒤 2차 작전을 하려다 보니 이들 장비를 떼어내서 다시 다른 기체에 설치하는 것이 너무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결국 위대한 예술가를 조종하던 척 스위니 대위 팀만 '복스카(BocksCar)'로 옮겨가고, 복스카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복스 대위 팀이 위대한 예술가로 옮겨와서 2차 원폭 투하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결국 2차 원폭 투하의 영광은 복스카 기체가 가져가고 위대한 예술가는 사람들이 거의 모르게 되었다. 미국 미주리 주 화이트맨 공군 기지에는 The Great Artiste 노즈아트를 그린 B-29가 전시되어 있으나, 이 기체는 노즈아트만 그려넣은 다른 기체이다. 진짜 The Great Artiste는 1948년에 훈련하다가 착륙 도중 크게 부서졌고, 결국 1949년에 스크랩 처리 되었다.[41] 본디 폭격수는 부사관이 배치되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높은 장교가 배치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폭탄이 단 한 방으로 나라를 멸망시키는 수준이기 때문이다.[42] 생중계는 당연히 아니었고, 나중에 원폭 투하 성공 이후에 홍보 뉴스에 쓰기 위함이었다.[43]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270.[44]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300.[45] 유럽전선 전략 폭격을 그린 영화 멤피스 벨에도 B-17 폭격수가 조종을 넘겨 받아 폭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46] 앞에서 설명되어 있는 급강하 급선회 회피 기동이다. 투하와 동시에 충격파와 방사선 피해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47] 다만 폭탄창을 닫고 우측으로 회피하는 영상은 그레이트 아티스트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48] '시마 가오루'라는 의사가 1933년 개업했다. 하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1945년 8월 폐업했으며 이후 1948년 같은 자리에서 병원 건물을 다시 올려 재개업했다. 병원장인 시마 가오루 박사는 1977년 사망했다.[49] 이 정도의 폭격 오차는 대량의 폭탄을 일거에 투하해서 목표물 일대를 덮는 방식의 통상 폭격이라면 당연히 대성공의 범주에 들어간다.[50] 유명한 군사 소설가 톰 클랜시의 소설 '공포의 총합'(베카의 전사들)을 보면,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핵폭탄 제조를 돕는 독일인 프롬 박사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를 가리켜 "그건 대부분의 핵물질을 낭비해 버린 것이었지"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51] 출처 : The Atomic Heritage Foundation, "The Bomb-Little Boy", 2007.[52] 당연히 방사선은 무색, 무취, 무맛이다. 이들이 느낀 맛은 방사선이 혀의 미뢰를 교란해서 생긴 착각이다.[53] 원폭돔과는 달리 외부는 말끔하게 복원한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지지대를 세워 폭격 당시 모습 그대로를 알 수 있도록 남겨두었다.[54] 사진 한가운데 T자형 다리가 바로 폭격 조준점 아이오이 다리이다. 뜻은 상생(相生)의 다리. 다리 남쪽 삼각형 지형에 있던 모든 건물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원폭 폭발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곳은 히로시마 평화공원이 되어 있다. 다리 동쪽에 원폭돔(당시 상업전시관)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바로 옆의 직사각형 지형에서 평화공원 쪽 삼거리에 가까운 곳이 폭심지이다.[55] 도시 외곽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와 불씨가 만나 거대한 화재선풍을 일으키는 이러한 현상은 잇시키 토키히코(一色登希彦)의 만화 '일본침몰'에서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56]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는 참상에 질려 차마 시신들의 사진을 찍지 못했고, 부상자들의 사진만 간신히 찍을 수 있었다. 24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을 넣고 나왔지만 찍은 건 7장의 사진뿐이었고, 그 중에서 5장만이 남았다. 그 스스로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충격에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고. 요시토에 의하면 사진을 찍은 '미유키 다리' 양 옆으로 시신들이 쌓여 있었고, 폭심지에서 200m 떨어진 카미야초에 세워진 전차 안에는 벌거벗은 시신들이 15구가 넘게 누워 있었다. 그 외에도 그 날 본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가 찍은 사진 속에서 부상자로 등장하는 츠보이 스나오 역시 눈알이 빠져 흔들거리는 여자아이, 수족을 잃은 부상자들, 흘러나온 내장을 주워 담는 남자, 미유키 다리 너머 강 속의 수 많은 시신들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57] 전후 미 전략폭격조사단의 조사 결과.[58]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9월 5일자 1면 머리기사의 일부다. '원자병(Atomic Plague)', 부제는 '나는 세계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기사를 쓴다.' 호주 출신 윌프레드 버체트(1911~1983년)는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에 들어간 최초의 서방 기자로, 당시 히로시마는 자신들이 왜 폭격을 맞았는지는 잊고 그저 백인이라면 무조건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어리석은 증오에 맞서며 원자병의 참상을 폭로했다.[59] 조선 왕족 출신인 2총군 교육참모 이우 중좌를 포함하여 사령부 기간요원들도 거의 사망했고, 그날 늦게 출근했던 제2총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는 목숨을 건졌다. 8월 14일, 히로히토는 당시 일본 국내에 있던 비황족 출신 원수 3명을 모두 소환하여 항복 여부에 대한 조언을 받는데,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와 달리 원폭 투하를 몸소 체감한 덕인지 하타만이 항복에 찬성하는 진언을 올렸다. 다른 2명은 히로시마를 보고서도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60] 히로시마에서 667km 거리면 서쪽으로는 대략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개성시, 동쪽으로는 요코하마시 동쪽 끝단의 항구 지역이나 도쿄도 스기나미구, 세타가야구 정도에 해당하는 거리인데 무려 이 정도의 거리에서도 버섯구름이 보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만 보고 무턱대고 '그럼 인천이나 도쿄에 있던 사람들은 버섯구름이 보였겠네?'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같은 거리라고 해도 B-29의 승무원들은 고도가 수천 미터 이상 되는 고공에서 비행하며 본 것인데다가 히로시마와 폭격기 사이에 수백 km 이상 아무것도 없는(즉 지형적 장애물이 없는) 망망대해였기 때문에 관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인천이나 도쿄에 있던 사람들은 히로시마와의 사이에 지형에 따른 장애물이 있는데다가 높은 상공도 아니라 그냥 지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버섯구름이 보이지 않았다.[61] 이전에 유럽전략공군사령관이었으며, 태평양전략공군이 창설되면서 유럽에서 넘어왔다. 후일 초대 미국공군참모총장이 되는 인물.[62]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385.[63] 센스 넘치게도 마치 택배를 배송한 것처럼 적었다.[64] 애초에 니고연구라는 명칭부터가 박사의 성씨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닐스 보어의 제자이기도 했다.[65] 이 문장만 존댓말로 되어 있다.[66] 그들은 헌팅 솜씨를 놓고도 치열하게 겨루는 사이였다.[67] 이 기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인데, 맨해튼 계획이 알려지기도 전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상당부분 원자폭탄 실체를 밝혀나가던 유능한 기자였다. 맨해튼 계획의 수장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이 기자를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계획 내부로 끌어들여서 아예 맨해튼 계획 홍보를 맡겨버렸다. 윌리엄 로렌스 기자는 원자폭탄의 성공/실패 등등 각각의 상황에 대비하여 수십 개의 보도 자료를 미리 준비했다.[68] 이때의 타격대 규합 실패는 사실 거의 미스테리에 가깝다. 나름 맹훈련을 거듭했던 509 혼성전대의 승무원들이 이런 초보적인 고도/항로를 잘못 잡는 실수를, 그것도 원자폭탄 실 투하 작전이라는 중대한 작전에서 저질렀다는 것은 뭐라 이유를 대기조차 어렵다.[69] 당시 고쿠라 상공을 덮고 있던 이 연기에 대해서는 2014년에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히로시마 폭격 이후 "B-29 한두 대가 날아오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특수폭탄 폭격이다."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고쿠라에는 제철소와 무기 공장 등도 있어서 "다음은 우리 차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8월 9일 아침 소규모의 B-29들이 고쿠라로 접근한다는 얘기를 들은 야하타 제철소에서 직원들이 드럼통에 대량의 콜타르를 태워서 연기를 발생시켜 시야를 가렸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원자폭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원자폭탄 막는데도 써먹은 것이다. 관련 일본 기사.[70] 폭격 항로와 고도를 잡고 폭격수가 조종 권한을 인계 받아 노든 폭격 조준기로 목표를 찾으면서 비행하는 것을 말한다.[71] 구글 지도로 보는 폭심지와 주위 지형.[72] 플루토늄 코어가 24시간 교대근무를 해도 본토에서 13일쯤에 제작 완료될 예정이었고, 코어를 제외한 부분은 이미 티니안에 배달되어있던 상태였으나 그걸 조립하는 시간까지 합해서 작전 투입은 19~20일쯤에나 가능하다는 예상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73] 여담으로 이 3번째 폭탄에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지다가 종전으로 안 쓰이게 된 플루토늄 코어는 이후에 실험용으로 쓰이다가 2번의 사고(해리 K. 더그힐란 2세 피폭 사건, 루이스 슬로틴 피폭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그 후에 별칭 데몬 코어라는 별칭을 받았다). 이후 오퍼레이션 크로스로드의 찰리 실험에 쓰일 예정이었다가 찰리 실험이 취소된 후 다른 코어에 쓰이기 위해서 분해되는 것으로 최후를 맞았다.[74] 다만 하술하듯 실제 3번째 투하 예정지는 고쿠라였고, 트루먼과 스팀슨의 주장으로 인해 교토는 작전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일본 군부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게다가 교토 또한 엄연히 후보에 올랐던만큼 이들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다.[75] 이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여느 날들처럼 조용했다. 다음날 재방송이 나온 후에야 전국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요란했다고.[76] 당시 방송을 들었던 어느정도 일본어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고사하고, 같이 있던 일본인들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 해 멀뚱멀뚱했다고 한다.[77] 교전도 교전이지만, 항복 당일까지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이 계속되었다. 가장 어이 없는 게 아키타인데, 항복 전날인 8월 14일 늦은 밤부터 항복 당일인 8월 15일 아침까지 100기가 넘는 B-29의 공습을 받아 2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다.[78] 장병들보다는 원자탄의 개발자인 오펜하이머 등 과학자들 일부가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하며 장병들은 엄청난 위력 폭탄 2발로 일제를 항복시키고 평화가 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79] 농담이 아니라 정말 전선에서 환경적 배경으로 보나, 적군들의 특성으로 보나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들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 이탈리아 등과 싸운 미군들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더욱 괴로워했다. 물론 서부 전선에서의 미군들도 큰 고통을 받았지만 그만큼 태평양 전쟁 전선이 지옥 같았다는 뜻.[80] 히로시마 원폭의 생존자이자 반전성향 일본인 만화가 나카자와 케이지가 그린 맨발의 겐에서 미군은 원폭의 위력 조사 및 사람들에게 이상증세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보내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일부를 데리고 가서 신체검사만 한 이후 협조 보상으로 껌이나 식량들을 쥐어주고 보내주거나 길가에 널부러진 희생자 시체에서 온전한 내장등의 표본들을 수집해 갔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일본 민중들이 보고서 양키들은 역시 귀축이라며 학을 뗐다고 한다.[81] 다만 저들이 원폭에 직접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방송국은 저러한 일방적인 입장만을 내보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82] 대한민국 공군 창설 멤버이자 제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김신의 6.25 시절 복무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빨간 마후라다.[83] 이걸 모르는 트루먼 대통령이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자신들이 일본을 항복시킬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며 넌지시 미국의 힘을 과시하자 그걸 일본에 잘 쓰길 바란다고 에둘러 답변했다.[84] 1945(20세기를 뒤흔든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에서 발췌.[85] 주 이스라엘 일본 대사관의 직원들은 초청되었다.[86]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내파형 원자폭탄'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팻 맨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단 한 발만 생산하지 않고 여러 개의 파생형까지 합쳐 100발 이상 생산했었다.[87] 이 항목 윗 부분에 서술되어 있듯 르메이는 원자폭탄에 회의적이었으나 히로시마 폭격의 결과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88] 실제로 몰락 작전이 시행되었다면 첫 상륙인 1945년 11월 1일에 앞서 최대 7발의 대규모 핵폭격이 있을 예정이었다.[89] 그러나 고쿠라(現 기타큐슈) 주민들은 고쿠라가 운 좋게 원폭을 맞지 않았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편이다. 고쿠라 대신 원폭을 얻어맞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에 대한 고인드립이 될 수 있기 때문.[90] 여기에 원폭 투하 이후 찾아온 8월 태풍 2개(루스, 수잔), 9월 태풍 2개(우르술라, 아이다), 10월 태풍 1개(루이스)가 서일본을 강타한 것도 방사성 오염 물질 청소에 제법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태풍 피해는 만만치 않았지만 어차피 원폭으로 주요 시설들은 모조리 날아간 상태라 생각만큼 큰 피해가 발생하지도 않았고, 폭풍으로 방사성 잔해를 날려버린 후 폭우로 방사성 먼지를 상당량 씻어내는 일을 사람 대신 이루어낸 것이니 태풍 피해는 그야말로 가뭄 속의 단비로 여겨졌다.[91] 일 원폭돔 세계문화유산 지정, 미국 중국 반성없이 피해강조 우려 한겨레[92] 일 원폭돔과 전쟁범죄 동아일보[93] 日원폭 피해도시 등 반핵단체, 미국 핵실험 강력 항의 1997 연합뉴스[94] 미국이 잘못해서 다 죽었다는 식의 피해의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본 군정이 전황을 읽지 못하고 항복을 빨리 결정하지 않은 탓에 애꿎은 우리가 피해를 봤다는 의미.[95]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를 이유로 국가지원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타 지역의 일본인들은 이를 '원폭산업'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96] 겨우 4.4톤/4.6톤짜리, 크기도 겨우 방 한 칸 정도밖에 안 되는 폭탄 두 발에 도시 두 개가 완전히 기능을 정지하고 수 십 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 셀 수도 없이 많은 방사능 피폭, PTSD 등의 육체, 정신적인 피해자를 낳았다. 일본이 아무리 그럴 만한 짓을 했다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완전히 별개로 이런 무시무시한 물건이 잘못하면 언젠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터질 수도 있다는 공포는 전 세계인을 떨게 하기 충분했다.[97]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사했다. 반대로 검은색 혹은 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옷이 그대로 피부에 들러붙어 버렸다. 이는 검은색은 빛을 흡수하여 검게 보이고 흰색은 빛을 반사해 희게 보이기 때문이다.[98] 강력한 무기는 그 자체로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냉전의 핵무기 개발이 대표적인 예이며 미국소련은 서로 핵전력에 있어 상대방의 것보다 더욱 강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그 경쟁으로 태어난 대표적인 폭탄이 차르 봄바.[99] 피해의 대다수를 차지한 일본인은 물론, 그 다음으로 많았던 한국인을 비롯해 당시 일본에 있다가 참변을 당했던 외국인들도 언급하였다.[100] 日 방위상 "美 원폭투하 어쩔 수 없었다".[101] "원폭투하로 수백만 추가희생 막아".[102] 사실 진행될 뻔한 몰락 작전의 스케일을 감안하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다. 진짜 100만 명의 연합군이 총공세를 벌여 문자 그대로 일본을 작정하고 철저히 몰락시키기 위해 계획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배를 뛰어넘는 최대규모 상륙작전이기 때문. 그러나 몰락 작전의 인지도는 일반 시민들에게 낮기도 하며, 핵비확산 특사였기에 논란이 된 것이다.[103] 이상의 세 여론조사의 결과는 다음 기사에서 인용했다.#[104] KBS2 주말연속극 달빛가족 수록곡으로, 원폭 참사 희생자들을 다루는 곡이다. 1회에서 등장했다.[105] 히로시마시 공식 사이트참고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상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조사결과 기재 사항참고2을 참고한 값[106] 박수복 작가와 이유황 PD의 작품으로, 배우 나시찬과 김난영이 주연을 맡았다. 원래 1978년 가을에 방영하려 했으나 유신 치하에 10대 총선 시기라 방송사의 자체 심의로 불방됐다. 이듬해 서독 ZDF 푸트라에서 특별상을 받고서야 방영됐다.[107] 하시마 강제노동 피해자 고 최장섭씨는 나가사키 원폭 복구 작업 중 너무 배가 고파서 당시 땅에 버려진 곡식을 볶아 먹었다가 피부와 몸에 이상 반응이 오며 피폭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원폭이 없었다면 그 지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인터뷰하였다.[108] 또한 장훈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도 단 2명뿐인 사례다. 나머지 하나는 전 롯데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109] 히로시마 겐코 강. 장훈 가족은 강 바로 옆의 조그마한 집에서 살았다.[110] 덥다, 뜨겁다의 일본어. 문맥상 '뜨겁다'라고 하고 싶었던 듯.[111] 앞은 역사적 표기법, 뒤는 현대 표기법.[112] 우리나라는 주변국(주로 일본)과 과거사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이러한 현실적 외교 쟁점을 국내법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법학계 및 법조 실무계의 오랜 논란거리이다. 당장 일본 종군위안부 혹은 징용 문제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도 이러한 관점에서 첨예한 대립의 대상이 되고 있다.[113] 미국 보수 유튜브 PragerU의 영상으로, 아래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주류 언론이 아닌 강경 우파 유튜브라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114] 연합군이 일본에 비교적 자비로웠던 이유는 일본을 점령한 뒤 향후 냉전 구도에서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만 정말로 일본에 전후(戰後) 냉전 구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길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딱히 연합군이 일본에 자비로웠다고 보기도 어려웠던 데다가, 전후(戰後) 처리만 봐도 일본에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권을 막아낼 교두보 역할을 목적으로 한 뒤처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폭 투하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 작전을 구상했고, 일본에 요구한 내용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항복이었으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일본이 내건 전쟁 전에 보유했던 식민지 유지는 물론 결국 허용해주는 천황제 유지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또한 전후(戰後) 일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재벌들 및 전통 귀족인 화족 계층을 모조리 해체했고, '동양의 스위스' 운운하며 근대적 농업 국가로 개편하려 했던 미국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냉전 구도에서 공산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에 요구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이 지금의 공업화와 산업화로 재도약한 계기는 전후 베를린 봉쇄로 대표되는 냉전의 급진전과 뒤이은 6.25 전쟁 특수성 때문이었으며, 6.25 전쟁은 스탈린조차도 김일성의 생떼를 48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급작스러운 변수였다. 6.25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은 지금의 스위스처럼 근대적 농업 국가의 형태로 재개편된 채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6.25 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국은 역코스 정책을 통해 전후 일본 경제의 부흥에 힘썼으며, 뒤이어 중국의 공산화 및 극동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를 확신하기는 힘들다.[115]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116] 물론 중일 전쟁이나 임팔 작전과 같이 미국을 제외한 연합군도 일본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 무대는 당연히 바다였고 일본과의 해전은 99% 이상 미국과의 해전이었다. 당연히 미국으로서도 미국이 한창 싸울 때는 불가침 조약 운운하며 도움 하나 주지도 않더니, 다 조져놓으니까 뒤늦게 와서 자기 지분을 떼 가려고 하는 소련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117] 그 대신 소련은 만주 작전을 계기로 만주까지 진출하였고, 그 과정에서 청진과 같은 한반도 북부 일부 지역까지도 진출하여 무장 해제를 담당했다. 반면 미국은 일본을 완전히 점령하고 뒤늦게 한반도에 상륙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분할하였고, 이는 현대 남북분단의 계기가 되었다. 즉, 추축국이었던 일본 대신 엉뚱한 한반도가 분단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단국 신세가 되었던 독일의 패망에 있어선 소련의 지분이 컸지만 미국영국 등 서방 연합국의 지분 역시 무시하기 어려웠기에 서방 연합군도 독일에서 자신들의 몫을 많이 챙겼다. 반면 일본의 패망에는 미국이 절대적이었기에 미군 장병들의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소련이 일본에 숟가락을 얹는 것은 트루먼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육로로 연결된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막을 방도가 없었기에 미국이 부랴부랴 38선을 제시했다.[118] 참고로 한반도의 경우 소련이 만주 작전을 펼치며 남하하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원 시나리오대로 분단되거나 아예 전역이 공산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19] 일례로 일본군의 쌀 수탈로 인해 1944년 10월에서 1945년까지 100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아사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731부대에 끔찍한 인체실험들을 명령했고, 사로잡은 연합군 포로들을 다 죽일 계획까지 짰는데 자신들의 전쟁범죄가 밝혀질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연합국이 상륙을 개시하자마자 모든 연합국 포로들을 독가스, 폭탄, 참수, 수장 등의 극악한 방법으로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120]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영상으로, 미국의 원폭 투하는 불필요한 재앙이었으며, 일본의 항복을 이끈 주요한 요인도 아니었다는 논조를 띄고 있다.[출처] Don't let the victors define morality – Hiroshima was always indefensible - Kenan Malik. 로버트 맥나마라가 인터뷰 도중 커티스 르메이가 이 말을 했었다고 밝혔다.[122] 이것도 사실 모를 일이다. 패전국인 독일 공군 장교들도 민간인 폭격으로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당장 커티스 르메이 이상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소이탄을 신나게 뿌린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도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로 기소될뻔하면 했지 민간인을 폭격한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123] 겐의 일가족은 모두 케이지의 가족을 따왔으며, 특히 겐은 케이지의 오너 캐릭터이다.[124] 일설과 다르게 맥아더와 그의 극동 사령부는 한국전쟁에서도 핵무기 신중론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의지를 적극 피력한 고위인사는 일본 핵 투하에 서명한 트루먼 대통령과 본토 군 사령부였다.[125] 트루먼 역시 분명 원폭에 민간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고, 본인도 최종 서명권자로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대한 트루먼의 일기에는 그가 폭탄의 정치적 의미를 아주 분명히 인지했고, 일본도 항복하기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126] 민간인에게도 죽창과 책상으로 만든 화승총을 쥐어주면서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맞서 싸우라고 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열악함과 미군의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미군 사상자가 꽤 많이 나왔던 건 어디까지나 주 전장이 정글로 가득 찬 조그만 섬이었는데 우회로가 없었기에 일본군의 방어선을 정면 돌파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여기서도 정글을 이용한 베트콩의 게릴라전으로 미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127] 영토가 가늘고 길쭉한 모양이라 체감이 안 되지만, 일본의 본토인 4개섬(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국토 면적은 오늘날의 독일과 맞먹는다.[128] 애초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은 한두 푼이 아니다. 그렇기에 핵무기의 위력을 미국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컸을 것이다.[129] 이론적으로 몰락 작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모든 전선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킨다는 방법이 있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점령지 규모를 보면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엄청난 군사적 희생 역시 예상되었다. 실제로 장제스도 중국의 완전 해방이 1947년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130] Frank, Richard B. (1999). Downfall: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Empire. New York: Penguin.[131] 미국과 영국은 1941년 12월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시점에 최대한 많은 자원을 일본이 아닌 독일 방향에 쓴다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미국 입장에선 감정적으로는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이 독일보다 더욱 싫었지만 산업 역량을 비롯한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에서 일본의 3배였고 국제 정치의 중심인 유럽을 석권하던 독일을 훨씬 위협적인 적으로 인지했다.[132] 물론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데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일본 제국도 여러 가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아예 없었던 일처럼 묻어가기란 불가능했다. 단지 그럼에도 전쟁의 파급력과 역학적 중요성이 압도적이었던 독일에 비해서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맞고 실제로 전후 처리 역시 그러했다.[133] 단, 방계 황족의 경우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황적이탈을 통해 일반인 신분으로 격하되었고, 이들을 구황족이라 한다.[134] 물론 지자체나 각종 부처는 실질적으로 독일인들이 맡았으나 이는 미영불소의 감독 하였다.[135] 심지어 가라후토조차 1905년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뺏은 식민지였고 종전 직전인 1943년에 가서야 본토와 같은 내지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실질적으로 뺏긴 본토(내지)는 고작 치시마 열도 정도이다. 게다가 치시마조차도 17세기 이후에야 일본인이 진출한 지역이다.[136] 다만 독일의 경우 1차 대전 이후 식민지가 없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37] 한편 독일의 서부 지역에서도 영토 손실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은 피해 보상이라는 명목 하에 국경 일부 지역을 뜯어갔으며 이는 미국의 압력 하에 일부를 제외하면 1950년대에 반환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논란거리였던 Saargebiet 지역보호령으로 삼아 이 지역을 완전히 자국에 귀속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실패했고, 1957년 서독에 반환되었다. 다만 이런 잣대로 보면 일본도 자르 보호령과 비슷한 처지였던 국토로 류큐 열도와 오가사와라 제도가 존재하며, 이들 지역 역시 전후 오랫동안 미군의 통치를 받았다. 류큐 열도 북단은 각각 1952년, 1953년에 이르게 일본에 복귀했으며 오가사와라 제도와 류큐 열도 남단은 1968년, 1972년에 각각 일본으로 반환되었다.[138] 이런 일이 발생한 건 독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나치의 만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대인을 떠올리지만, 600만 명 정도가 사망한 유대인에 비해 소련의 인명 피해는 군인만 1천만 명 전후,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무려 2,000~2,700만에 육박했다. 이렇다 보니 영미 연합군은 베를린 점령 당시 일부러 군대를 멈추고 소련이 가장 먼저 입성하도록 배려해줄 정도였다. 오죽하면 '우리가 소련에 한 것의 1/10만 소련이 우리한테 해도 우린 다 죽는다'라는 독일인의 말이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엄청난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굴라그에 끌려가며 매우 고생할 각오를 해야 했다. 5월 8일 주코프가 서명한 이 항복 조건은 일부 독일군이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로 전쟁 말기 독일 본토 방어전에서 특히 동부전선의 독일군들이 해당되는 부분이었으나 서부전선의 경우에도 예를 들면 전쟁 초기 동부에 있다 서부로 전속되어 싸운 자들과 전쟁 중 히틀러에게 찍혀서 예편되어 전쟁 말기에 지방에서 은신했던 일부 장성, 원수들도 소련이 수배하는 인물이었다면 넘겨지곤 했다. 물론 소련군에게 인계된 독일군의 각급 포로의 숫자는 결코 적진 않았으나 모두가 넘겨진 건 아니었다. 소련에서 특별히 수배하는 인물이 아니거나, 연합군의 직권으로 서방의 포로가 되었을 땐 종전 후 1948년까지 석방될 수 있었다.[139] 물론 일본 역시 독일이 소련과 동유럽에서 그러했듯 중국과 동남아에서 어마어마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특히 중화민국의 사상자는 최대 피해국 소련의 80%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의 국력은 현실적으로 소련에 미치지 못했고 독일 본토의 절반을 접수한 소련과 달리 중화민국은 여전히 중국 본토에서 전쟁을 치를 뿐 일본 본토에는 진입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바로 국공내전에 접어든 터라 국민당도 공산당도 패전국 일본의 전후 문제 처리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어서 이를 미국에 맡겼다.[140] 사실 저 고집의 실체도 지도부의 구질구질한 권력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행태였음으로 절대 옹호가 될수 없는짓이다.[141] 이 중에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다.[142] 애초에 도쿄 대공습 피해가 훨씬 컸다.[143] 여기서 고려할 점은 일본의 관동군은 이미 정예병이 아닌 잡병 수준이고, 일본이 진정으로 자랑하던 해군을 소탕한 것이 미국이다.[144] 당시 일본의 전선은 이미 10개에 육박했고, 관동군은 더 이상 예전의 관동군이 아니었다. 모든 정예관동군 사단들은 본토 방위와 남방 작전으로 빠진 상태였다. 1945년 6월달 자체 사찰에서 대본영은 이미 전체 관동군과 지나 파견군 180만 명이 미군 7개 사단보다도 약하다고 평가했다.[145] 소련의 일본 방면 3대 공세 중 하나인 쿠릴 공세는 무려 옥음방송 이후에야 개시되었다.[146] 인명피해 수치와 충격의 정도는 항상 정비례하지 않는다. 일례로 홀로코스트의 경우에도 인명피해 규모보다 공장식 학살이라는 전무후무한 잔혹성으로 세계인들에게 더욱 충격을 주었다. 단순 인명피해만 따질거면 2차 대전 기간 소련(2,600만)과 중국(2,200만)이 입은 피해가 홀로코스트(600만)보다 훨씬 더 컸다.[147] 냉전 시대만 하더라도 소련이 서방세계의 적국이었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미디어에서는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을 축소하고 서부전선을 더욱 강조했다. 탈냉전 후 소련이 나치 독일과 싸우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는 사실이 서구 일반인들이 알게 되면서 과거 소련의 역할 축소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련의 역할을 더욱 부각하는 여론이 우세하다.[148] 실제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먼저 이루어지고 사흘 후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같은 날에 발생했다.[149] 원폭 투하나 소련 참전 중 하나만 있었다면 항복을 거부했을 사람이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자 항복에 찬성하는 것은 인간사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꼭 제3의 악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두 악재의 합이 그 사람의 임계치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150] 원폭 개발자 중 한 명이며 당시 애놀라 게이의 파일럿 중 한 명이자 히로시마 버섯구름 사진을 직접 찍은 인물이다.[151] 당시 원폭뿐 아니라 일본 극우 측에서 맞불 식으로 꺼내든 나치 관련 논란도 있어 이것도 소속사 측이 입장을 발표했다.[152] 후에 미국으로 귀화했지만 당시에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이야 토네이도가 없다시피 해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대기과학 분야에서 토네이도 및 뇌우로 인한 돌풍 연구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153] 핵연구>원자로>핵폭탄 트리. 각각 500일, 총합 1500일이 소요된다. 덤으로 원자로 건설과 핵폭탄 생산 시간도 추가로 걸리고 빨리 연구한다 해도 시간 패널티가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