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일 불가침조약 체결 이전의 국경 분쟁에 대한 내용은 소련-일본 국경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소련-일본 전쟁 | 소일전쟁 日蘇戦争 | Soviet-Japanese War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뤼순 203고지에 오른 소련 해군 해군보병대. | ||
날짜 | 1945년 8월 7일 ~ 9월 2일 | |
장소 |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 사할린, 쿠릴 열도 | |
교전국 | 소련 몽골 인민공화국 | 일본 제국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
지휘관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로디온 말리놉스키 이반 치스차코프 이반 유마셰프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이사 플리예프 막심 푸르카예프 허를러깅 처이발상 | 야마다 오토조 (관동군 총사령관) 장징후이 데므치그돈로브 |
결과 | 소련-몽골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일본 제국의 항복[1] 한반도의 분단 만주국, 몽강국의 멸망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의 소련군정 일본의 다롄 조차지 상실 소련의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합병 | |
병력 | 병력 1,577,225 명 전차/자주포 5,368문 항공기 3,721대 | 병력 일본군 1,092,400명 만주군 20만 명 몽강군 44,000명 |
피해 | 9,726명 전사 19,562명 부상 | 21,389~83,737명 전사 2만~4만 부상 640,276명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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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일본 전쟁(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또는 소련의 대일참전(일본어: ソ聯對日參戰 / ソ連対日参戦[2])이란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과거 일본 제국과 맺었던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945년 8월 9일 일본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공해서 발발한 전쟁을 의미한다.소련은 만주-한반도 방면, 남사할린(가라후토) 방면, 쿠릴 열도(치시마 열도) 방면으로 크게 3개의 전선에서 공세를 전개했다. 이중 주공인 만주-한반도 소련의 선전포고에 맞춰 즉각 개시되었고 남사할린 공세와 쿠릴 공세는 조공으로서 만주 전선의 진척 상황에 맞추어 각각 8월 11일과 8월 18일에 개시되었다.
9월 2일 소련이 미주리함 항복 조인식에 전승국으로 서명하며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승리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군이 쿠릴 열도 최남단에 위치한 하보마이 군도를 최종 점령한 9월 4일에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쟁이 종료되어 전투행위가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탈냉전 시기에 러일관계 개선 차원에서 이 상황을 해소하고 평화조약을 맺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이내 지지부진해졌고 오늘날까지도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3]
2. 얄타 회담
[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1945년 포츠담 회담] 日帝 패망·한반도 분단 함께 가져온 '포츠담 선언'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미국은 소련에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고 소련이 이를 승낙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는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해 일본군을 공격하면 미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으며 대신 소련은 참전 대가로 과거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전으로 빼앗긴 남사할린을 반환받고 전략적 요충지인 쿠릴 열도를 합병하기로 타협했다.[4]
3. 전개
자세한 내용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남사할린 침공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슘슈 섬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4. 이후
자세한 내용은 소련 점령하 만주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사할린 주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극동국제군사재판 문서 참고하십시오.
5. 기타
5.1. 소련의 불가침조약 파기 논란
한편 1941년 4월 일본과 소련이 맺은 5년 유효의 불가침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전후 일본 측에서는 이를 문제삼고 조약을 파기한 소련을 불법참전국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은 독소전 당시 소련이 멸망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 중립을 철저히 지켰고 이에 따라 적국인 미국에서 소련 극동으로 향하는 랜드리스 상선의 통행을 방해하지도 않았는데 소련은 반대로 일본이 위기에 몰리자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을 배신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도 일본인들 사이에서 반러 감정이 상당하며 일본 정부는 여전히 이 당시 빼앗겼던 남쿠릴 열도 4개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5]이러한 일본 측의 주장은 실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활용되었고 연합국 판사들도 소련을 변론해야 했다. 이에 대해서 연합국 판사들은 연합국의 상호동맹이 양국 간 불가침조약에 우선한다는 점, 일본은 소련을 침공한 독일의 추축 동맹이라는 점, 그리고 일본 역시 독소전 개전 당시 자체적으로 소련 침공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내세워 소일불가침조약은 일제의 기만이므로 무효 조약이라고 선언했다. 법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기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진 않았지만 일제가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행한 각종 군사 도발과 아시아에서 저지른 악행들을 고려하면 소련의 불가침조약 파기는 어느 정도 정당하다는 인식도 팽배했다. 때문에 연합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 일본 중립 조약 파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소련은 극동전선에서도 승전국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5.2. 소련군의 한반도 진공과 남북분단
제2차 세계 대전 막판 소련의 대일전 개입으로 소련군이 38선 이북의 한반도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하면서 한반도 북부가 공산화되었고 뒤이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북한의 수장으로 김일성을 옹립하였는데 이는 뒤이은 한국 전쟁과 현대까지 이어지는 남북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도 머뭇거린 일본 군부의 우유부단함과 스탈린의 개인적인 야욕이 더해져 겨우 독립한 한반도에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었다.5.2.1.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
제1극동전선군 예하 25군이 주공의 좌측방 엄호를 위해 한반도 북부로 진공하여, 일본의 항복 직전에 한반도 일부 지역을 소련군이 점령했다. 일본이 원역사와 달리 8월 중순까지도 항복하지 않았을 경우 과연 소련군이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 북부로 물밀듯이 내려왔을 것인지가 사학계의 논쟁거리이다.여기서 한 가지 고려사항은 1945년 초에 한반도에서 38도 북쪽 지역은 관동군의 관할지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38도 북쪽을 소련이 맡게 된 배경에도 관동군을 소련이 맡게 되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즉,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공한 것은 관동군 섬멸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며, 일본의 항복이 늦어지는 경우 적어도 38도 북쪽 지역을 계속 점령해 나갔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문제는 이 경우 소련군이 계속 남하해서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을지 여부이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은 철저하게 만주 지역의 장악과 관동군 완전 섬멸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한반도로 진공한 소련군은 주력부대의 측방엄호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과연 소련군이 한반도로 초고속으로 진공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포로 약 60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항복 직전 관동군은 아직 대규모 병력이 각지의 요새와 도시에서 철저하게 고립, 저항 중인 상태였고, 소련군은 이들의 섬멸과 함께 뤼순이나 베이징과 같이 보다 더 중요한 지역 진출을 우선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소련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석권하는 것은 미국을 지나치게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미 한반도에선 38도선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분명하게 반대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차후에 이를 무시하고 진격을 할 경우에 미국과의 대립이 조기에 격화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영-미 연합군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것은 신중하게 피했기 때문에 어차피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실제 역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은 대일전 참전 이전에 미국과 합의된 대로, 38선에서 자발적으로 멈추었다. 다만 작전 경과 문서를 보면 초기 계획은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며 함경도와 강원도, 경상도 해안 도시들에서 차례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최종적으로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유일한 변수는 일본이 본토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미국이 일본에서의 전투에 질리는 경우이다. 소련군도 관동군과의 전투 및 중국 주요 지역 점령을 먼저 끝내려고 하고 있었겠지만 만약 미국이 일본 본토 공격 도중 질린 상황이면 고려 대상의 비교적 후순위인 한반도의 무장해제는 소련에 맡겼을 것이고 결국 한반도 전체가 소련에 넘어가 공산화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지 않았을 확률도 높다. 일단 소련군도 독일과의 오랜 전쟁으로 젊은 남성 인구가 동이 날 정도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더 이상의 손실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한국의 보수 논객 조갑제의 홈페이지 조갑제닷컴에서 이 소련군의 만주 공세를 다루면서 일본군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장교가 1천 명만 있었으면 그들이 조선인들을 동원해 미군과 소련군을 한반도에서 다 몰아내고 통일 조국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는데, 당연히 가능성은 제로다. 당장 박정희부터가 만주군 장교였지만, 막상 소련군이 관동군을 항복시키자 만주군 출신 중국인들한테 붙잡혀 10일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나서 혼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조선으로 돌아간 것이 고작이었다. # 또한 이미 2차 대전 말기 일본군 내의 조선인들이 상당수 있었으나 그들은 미군과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갑제닷컴의 내용처럼 만일 진짜로 일본군 내에 조선인 장교들이 많았다면 오히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전범 재판에서 전범으로 분류되어 처벌을 받은 조선인들의 수만 더 늘어나서 국제 사회에서 조선에 대한 여론만 더 부정적으로 흘렀을 것이다.
실제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쪼개 점령하고 있을 때에 그들에 반대하는 남한 주민들과 북한 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 출신 조선인 장교들 몇몇이 봉기에 가담해본다 한들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6] 무엇보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조선보다 훨씬 더 많았던 일본 본토에서조차 일본군 장교들이 봉기를 일으켜 미군을 몰아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5.3. 소련의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점령
소련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전역을 침공하여 점령하였고 이들 지역은 소련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는 에도 시대부터 일본령이었던 남쿠릴 열도(일본명 북방영토)에 대한 논쟁으로 불거져 현재까지 러일 양국 사이의 주 갈등인 쿠릴 열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5.3.1. 홋카이도 침공 구상
사실 스탈린은 만주나 한반도보다 홋카이도를 차지하는 것에 더욱 관심이 많았는데 어차피 중국에 반환해야 하는 만주나 위성국으로라도 독립시켜야 하는 한반도와 달리 홋카이도는 칼리닌그라드나 카렐리야, 커즌 선 이동의 구 폴란드령처럼 전리품으로 노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러시아령인 것을 일본이 강탈한 남사할린이나 북방 4도를 제외하면 한때 러시아령이었고 면적이 협소한 쿠릴 열도와 달리 홋카이도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본토였고 면적 또한 육중하기 때문에 스탈린으로서도 더더욱 욕심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홋카이도 북부가 소련의 통제 하에 들어오게 되면 오호츠크 해 전체를 소련의 완전한 내해로 만들 수 있다는 지정학적 이점도 있었는데 부동항이 부족해 제해권에 약점이 있는 소련으로서는 자신들만의 내해가 생긴다는 점은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탈린은 홋카이도 서북부의 루모이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홋카이도를 동서로 횡단, 루모이-쿠시로 선을 경계로 섬을 갈라 북부를 점령할 계획을 모색했다.스탈린은 일본의 항복 선언 바로 다음 날인 8월 16일에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인민의 여론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루모이-쿠시로 선 이북 홋카이도의 소련령 편입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스탈린은 러시아의 연고가 전혀 없는 홋카이도[7] 분할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러일전쟁에 대한 복수 및 독소전에서의 인명피해를 언급했다. 즉, 일본도 러시아 영토였던 사할린을 침범하여 반분한 역사가 있기에 반대로 일본 영토인 홋카이도를 반분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논리와 유럽전선 및 아시아전선 모두 대파시즘 성전이라는 명분 하에 치러진 하나의 전쟁이기에 상대적으로 나치의 피해를 덜 입은 서구가 독일의 절반을 차지했듯 소련 역시 일본 본토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양대 축이었다. 그리고 나치의 동맹이자 러일전쟁의 적국이었던 일본의 본토 일부를 합병함으로써 독소전으로 상처입은 소련 인민들을 회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태평양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소련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트루먼은 일본 본토 4개 섬은 미국의 관할이라는 기존의 협정문을 근거로 스탈린의 요청을 거부하였다.[8] 또한 소련 자체적으로도 남사할린 전선과 슘슈 섬 전투 등에서의 지나친 시간 지연과 예상치 못했던 병력 손실 등이 발생하며 결국 홋카이도 침공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라는 변수를 제외하고 당시 소련 vs 일본을 양자간으로 비교할 때 소련군이 홋카이도를 점령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아주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관동군을 비롯한 북부 전선군이 완전히 무너진 시점에서 홋카이도에는 소총만 가진 알보병 소수, 일부 경찰 병력, 얼마 되지 않는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전투기들, 죽창을 들거나 전쟁에 지친 민간인들만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로로 연결된 한반도와 달리 소련이 정말 손쉽게 홋카이도를 점령할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슘슈 섬 전투만 하더라도 소련군은 정예 일본군도 아닌 군대를 상대로 그 작은 섬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과연 소련이 정말 그보다 훨씬 큰 홋카이도 북부를,[9] 본토 사수에 대한 결의에 찬 일본군을 상대로, 항복 조인식이 열리는 9월 2일 이전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제한된 시간 압박 하에, 제한된 해군 전력만을 통해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다수 존재한다. 일본 못지 않게 소련도 독소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을 겪어 전력이 많이 약화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소련군의 전력 대부분은 육군이었기 때문에 상륙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소련 해군과 해병대의 역량은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실제 쿠릴 상륙전에서도 소련군은 상륙전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해 랜드리스로 빌린 미제 장비를 사용했다. 또한 만주국을 지키는 관동군보다 본토인 홋카이도를 수비하는 본토 일본군의 사기가 더욱 높았을 것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홋카이도 침공의 축소판인 슘슈 섬 전투나 육로로 연결된 남사할린 침공조차 소련은 패잔병들을 상대로 상상 외의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미군, 영국군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일본 입장에서도 슘슈 섬이나 남사할린보다 훨씬 중요한 홋카이도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만주, 남사할린, 쿠릴 열도가 비교적 쉽게 함락당한 이유는 8월 15일 이후 일본 사령부가 항복을 명령하고 일선 지휘관 중 일부를 제하면 대다수가 저항없이 항복했기 때문인데 전쟁이 장기화된다는 가정 하에서는 이들 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이 원역사보다 훨씬 거셌을 것이며 이들 지역보다 더욱 전선에서 먼 홋카이도까지 도달하기에는 더욱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쿠릴 열도의 경우 슘슈 섬 외에도 섬들이 많으며, 특히 파라무시르, 우루프, 이투루프, 쿠나시르 등 오랫동안 저항하기 쉬운 큰 섬들이 널려있기에 소련 역시 미군이 태평양 전쟁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퐁당퐁당으로 하나씩 점령해가며 시간을 허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위키피디아에 기재된 소련의 홋카이도 침공 계획 문서에도 소련 단독으로 홋카이도를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의 분석이 서술되어 있다. 물론 해당 위키 문서에도 결국 소련이 홋카이도 점령에 성공했으리라는 분석도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이 분석 역시 앞서 서술한 '손쉬운 점령'과는 거리가 멀다.
즉, 미국의 엄포가 없었더라도 대륙 방면에서와 같이 소련군이 쉽게 홋카이도를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괜히 주코프를 비롯한 소련의 백전노장 장성들이 이 계획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반면 홋카이도 정복이 비교적 수월했을 것이라는 반론 역시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은 미군의 상륙을 대비해 혼슈, 규슈 등 남부 지역에 대한 방비에 초점을 맞추어 홋카이도 내 병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 및 오가사와라 제도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주요 병력을 일본 남부에 배치한 상황이었고 소련과의 중립조약을 나름 신뢰했기에 북방 방어선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소련 해군의 역량만으로 노르망디에 버금가는 거대한 상륙작전을 동반해야 했기에 남사할린이나 쿠릴에서 벌어진 소규모 상륙작전처럼 신속히 진행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일본 해군이 미군에 의해 거의 전멸되었고 본토의 육군 전력 대다수 역시 남일본 지역에 집중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말그대로 해군력 자체가 부재하다시피했던 소련 해군의 역량으로 그 큰 홋카이도를 단숨에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임무였다.
결론적으로 사학계의 중론은 소련의 홋카이도 정복 가능성은 일본의 항복 시기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며 몰락작전이 장기화되었다면 소련이 자체적으로 해군력을 증강할 시간도 벌충하고 제아무리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트루먼이라도 대소 상륙장비 지원을 중지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결국 소련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홋카이도를 정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본이 몰락작전 수행 직전, 혹은 몰락작전 초창기에 항복했다면 그 무렵까지는 소련의 해군력 증강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므로 소련의 홋카이도 정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몰락작전이 장기화될 정도로 일본군의 항전 의지가 거셌다면 미군이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에서 마주한 수준의 저항을 소련군 역시 만주, 남사할린, 쿠릴 열도에서 마주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남하 속도 역시 원역사보다 훨씬 더 지연되었을 것이기에 원역사와 같은 소련군의 고속 남하를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고 후방인 홋카이도 역시 당분간은 안전했을 것이다.[10]
5.4. 그 외 논란
- 초중전차 관련 논란
소련군이 노획한 무기 가운데 쿠마급 경순양함의 140mm 포를 장착한 정체불명의 거대한 전차 사진을 두고 "일본군이 초중전차를 배치했다" 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100식 전차의 프로토타입인 2604식으로 추정되는 물건이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지만, 읽을만한 전과나 기록이 없어 잔고장이 많은 엔진 때문에 고정 토치카로 쓰이다가 노획되었으리라 추정할 뿐, 실제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11]
- 쿠겔판처 관련 논란
만주에서 웬 둥근 물건을 소련군이 노획했다. 이 물건에 대해서는 아직 비밀이 많다. 독일에서 왔다고 알려진 이 물건은 "더는 볼 것이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분해하면 안 된다"라는 조건하에 쿠빈카 전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에 공개하는 전시품도 아니고 그냥 "소장품 37번" 이름으로 수장고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T-34 관련 논란
전투 중에 일본군이 소련 측 T-34를 노획했다.[12] 탈취한 그 전투에서 몇 시간 안 되어 바로 털렸지만 소련군이 문서로 몆줄 남길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잠시였지만 T-34가 당대 일본 최고의 기갑장비가 된 셈이다.
- 원자탄 관련 논란
니고연구 문서 참조.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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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더불어 양대 원인으로 지목받는다. 일본 천황이 직접 연설에서 소련의 침공을 항복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소련이 참전한 이상 전쟁은 제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내용이다. #[2] 일본에서는 대소방어전(対ソ防衛戦)이라고도 부른다.[3] 이는 1950년 일어난 6.25 전쟁과도 유사한 상태이다. 다만 본 문서의 소일 전쟁은 소련이 명백히 승리했으나, 6.25 전쟁은 그런 결과마저도 애매하며 분단국가의 특성으로 서로를 국가로도 인정하지 않아 더욱 애매한 상태이다.[4] 실제 연합국 문서에서도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표현이 다른데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빼앗긴 남사할린과 달리 쿠릴 열도는 남부의 경우 1855년, 북부의 경우 1875년에 일본이 평화적으로 차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사할린은 대만 섬과 비슷한 ‘반환 대상’ 혹은 ‘수복 대상’이었지만 쿠릴 열도는 칼리닌그라드와 비슷한 ‘인도 대상’ 혹은 ‘할양 대상’이었다. 참고로 1855년에 일본이 점유한 쿠릴 열도 남부가 현 쿠릴 열도 분쟁의 대상이다.[5] 상술했듯 이 당시 일본이 소련에 빼앗긴 영토로는 남쿠릴 열도뿐 아니라 북쿠릴 열도, 남사할린도 있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기에 현재 일본이 쿠릴 열도의 일부로 해석하지 않는 남쿠릴 열도에 대해서만 영유권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남사할린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통해 빼앗은 땅을 다시 빼앗긴 것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반환 명분이 전혀 없다.[6] 오히려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 백선엽이나 김종원 같은 일본군 장교 출신 조선인들은 미군한테 철저하게 협조적이었고, 대구 사건이나 제주 4.3 사건 같은 반미 봉기들도 그들에 의해 철저히 진압당했다.[7] 사할린은 러시아가 17세기부터 진출한 섬이고 1855년부터 1875년까지 일본과 공동영유, 1875년부터 1905년까지 단독점유한 역사가 있기에 소련의 역사적 연고가 강한 섬이었다. 쿠릴 열도의 경우 북쿠릴 지역은 1875년까지 러시아가 지배한 경험이 있고 남쿠릴 지역은 1855년 국경 획정 이전까지 러시아가 영유권을 명목상으로 주장한 바 있었기에 약한 명분이나마 가지고 있었다. 반면 홋카이도는 15세기에 일본 세력이 처음 진출하였고 18세기 즈음에는 에도 막부가 홋카이도 해안선 전역에 영향력을 확실히 굳힌 영토였다. 제정 러시아 역시 홋카이도를 일본령으로 자연스레 인식하였고 1869년 일본 제국의 홋카이도 병탄도 막부 고토 규합의 연장선으로 보았기에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홋카이도는 러시아의 역사적 연고가 전혀 없는 일본 고유의 본토이다.[8] 미국은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는 대신 스탈린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기존에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약속한 소련의 가라후토 및 치시마 열도 점령은 묵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 에도 시대부터 일본이 점유하던 남쿠릴 열도 4개 섬 역시 소련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것이 소련-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한 배경이다.[9] 홋카이도 본섬의 면적은 78,470㎢로 현 대한민국 면적의 약 80%이다.[10] 현재 홋카이도가 일본 본토의 최북단이자 대러 접경 지역이기 때문에 착각하기 쉬우나 1945년 당시 일본의 최북단은 남사할린과 캄차카 이남의 북쿠릴 열도였으며 홋카이도는 대소전선에서 비교적 후방이었다. 어디까지나 전후 일본이 카라후토와 치시마 일대를 상실해서 홋카이도가 대러 최전방이 된 것이지 당시에는 홋카이도가 위태위태한 최전선이 아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1] 함포를 지상차량에 올린다는 것이 무식한 시도는 아니다. 소련 또한 프로젝트 7형 구축함을 비롯한 소형함들에 즐겨 올렸던 130mm 함포를 가져다 전차에 올려 SU-100Y 자주포를 만들었고 시제품이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되었지만, 이 전차와 마찬가지로 자세한 전과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이후의 소련 중전차들에 영향을 미쳐 이 함포를 개량한 제대로 된 전차포를 탑재하는 계기가 되었다.[12] 소련군 문서에 의하면 방법은 대전차 자폭조랑 비슷하게 전차에 접근하여 가스 살포 후 승무원들을 강제 퇴거시킨뒤 직접 들어가 포탑을 돌려 소련군에게 사격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