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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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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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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辛亥革命 | Xinhai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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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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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창봉기
파일:신해혁명 지도.png
▲ 신해 혁명의 전개도
시기 1911년 (선통 3년) 10월 10일 ~ 1912년 (민국 원년) 2월 12일[1]
장소 중국 대륙
교전 세력 <rowcolor=black> 혁명 세력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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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임시정부
중국 동맹회
후베이 군정부

(수세)

주요 인물
중국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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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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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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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이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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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연합군: 100,000여 명 청나라군: 200,000여 명
피해 사상자: 50,000여 명 사상자: 170,000여 명
결과 혁명 세력의 승리
청나라의 패배 및 멸망
영향 중국의 독립
중화민국 수립
몽골티베트의 독립

1. 개요2. 제1차 혁명
2.1.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과 혁명의 전개2.2.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협상(남북의화)2.3.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3. 제2차 혁명4. 제3차 혁명5. 신해혁명 이후6. 평가
6.1. 중국6.2. 대만6.3. 몽골, 티베트, 위구르6.4. 만주족6.5. 신해혁명과 한국
7. 기타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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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은 갈렸고,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상인들은 여정을 중단했으며 백성들은 황량한 들판으로 내몰렸다. 국체를 하루라도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하루를 더 불안해할 것이다.

(중략)

오늘날 바깥의 대세와 대중의 바람을 살펴 특별히 그에 의거하여 황제의 통치권을 전국에 이양함으로서 공화국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가까이는 혼란을 싫어하고 대치를 열망하는 국내의 민심을 위로하고, 멀리는 옛 성인들이 추구했던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의를 실현할 것이다.
1912년 2월 12일 반포된 선통제의 퇴위조서 일부

중국에서 1911년(신해년)부터 좁게는 1912년[2], 넓게는 1916년까지[3]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말한다.

이 혁명으로 기원전 221년550여 년 동안 분열과 혼란이 이어진 시기를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시황제 이래 2100여 년 이상 중화제국을 다스린 황제전제군주제가 종말을 고하고[4] 중국사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이 세워졌다.

2. 제1차 혁명

좁은 의미로는 제1혁명만을 신해혁명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2, 제3혁명 역시 제1혁명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이를 뭉뚱그려 신해혁명이라고 칭한다.

혁명이 임박했던 1911년 당시 이홍장서태후가 사라진 청나라는 서구 열강이 시시각각 침투해 들어오던 와중에 청나라의 지식층은 황실 사수를 도모하는 수구파,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입헌파, 민주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로 삼분되어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온갖 민족주의 세력, 비밀결사 등이 개입하면서 혼란상은 날로 극심해져만 갔다. 황화강 사건과 같은 사건이 그 예시.

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삼은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5]들을 실망시켰다. 한족은 13명 중 4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만주족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친왕을 빼더라도 7명이 황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문제는 우전부(우체-통신부)대신 성선회(盛宣懷, 성쉬안화이)였다. 이런 와중에 청나라의 지도층은 성선회의 주도로 민영으로 돌아가던 자국의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 그걸 담보로 삼아 열강에게 차관을 얻으려는 짓을 터뜨렸는데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장거리 철도가 제대로 부설되기 시작한 건 청일전쟁 패배 이후다.[6] 중국이 건설한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현 탕산시)에서 석탄산지 서각장[7]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8][9] 또 중국인이 설계하고 공사한 최초의 철도는 첨천우(詹天佑, 잔톈유)가 건설한 베이징에서 장자커우[10]까지 180km의 거리로 이루어진 징장선(경장선)이었으며(1905년~1909년) 징한선(베이징에서 한커우)[11]이 건설된 정도였다. 그 외에는 징푸선(경포선, 베이징에서 난징)과 징펑선(경봉선, 베이징에서 봉천/펑텐까지)이 1912년까지 건설 상태에 있었다.

특히 길이 1,212km의 징한선은 개통 첫해인 1906년에만 350만냥이 넘는 수입을 올리면서 '철도는 돈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철도건설이 활기를 띄었고 신해혁명 발발 직전 청나라의 철도총연장은 9,000km에 이르렀다.[12]

1897년 당시 양쯔강을 지나는 지역에 이익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광저우에서 한커우[13]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월한선[14]을 부설하는 것을 제안했다. 40년간 청을 부국강병 시키려고 진력한 성선회는 이를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철로 부설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면, 청조는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상황에서 1900년 미국 자본(미국합흥회사)을 빌려 철도 국유화를 추진했다. 차관 400만 파운드[15]를 연 5.9%로 30년 동안 갚아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이 잘 된다면 북쪽의 베이징에서 내려오는 징한선(경한선)과 남쪽의 월한선이 이어지면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이 완성되는 것이었겠지만[16] 결론적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기술의 문제였다. 신해혁명이 터진 1911년 당시 월한선 철도는 광저우에서 광둥성을 못 벗어나고 있었으며 후난성 창사와 주저우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구간이 1911년에야 간신히 개통되었고 우한에서 창사를 연결하는 구간의 공사가 지지부진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 역사적으로 월한선은 여러 중단을 거쳐 1916년에 광저우 북쪽 싼수이에서 사오관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1918년에 우한 - 창사 구간이 완성되고 마지막 남은 사오관 - 주저우 구간은 북벌로 국민정부가 들어선 1929년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시작되어 1936년에야 전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중국을 대동맥으로 연결시키겠단 발상은 우한에 양쯔강 철교가 지어지는 1957년에야 완성되었다.

뭐 이거야 전쟁과 혼란으로 어쩔 수 없다 치고 두 번째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런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간 자본으로 실시하는 철도 부설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 1903년 당시 사천성(쓰촨) 총독이었던 석량(錫良, 시량)은 횡선인 쓰촨-한커우(천한선) 철도를 부설하려고 외채가 아닌 민간자본에 의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는데 이것을 청 조정에서는 "철로간명장정"으로 철로의 민간부설을 허락하였다.[17] 그리고 1905년 서태후의 총신 장지동은 후베이, 후난, 광저우의 삼성의 신상회의(상공회의)를 소집하여 월한철도 부설권을 회수하였다. 미국합흥공사에 쿨하게 675만 달러까지 돌려주면서 상인의 주도로 (일부는 관청과 합작하여) 대량의 민간철도가 부설되었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중국의 유지, 유한계급들의 돈만을 모은 게 아니라 배우나 거지들의 푼돈까지 모인 말 그대로 "민족 자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선회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철도를 오히려 망치는 것이었다. 그의 원칙은 "철도는 국력. 그러므로 지분 분할보다는 차관. 차관이라면 내자(민족자본)보다는 외자(外資)."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투자 회수가 길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철도 산업이 국영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민간주도로 넘어간 뒤 중국의 철도는 더더욱 티스푼 공사가 된 것이다(학자 이스트먼이나 스펜스의 지적).[18]

그는 장지동을 설득하여 민간 부설권을 회수해 1909년 독일, 영국, 프랑스 은행의 돈 550만 파운드를 빌려 호광(지금의 후난과 후베이 지방) 철도 차관 계약을 실현했다. 물론 민간의 반대는 심각했고 결국 장지동은 마음 고생 속에 사망했으나, 성선회는 이런 반대에도 철도 국유화의 의지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 차에 그가 새 내각의 우선부대신으로 오른 것이었다. 그는 1911년 5월 민영화된 월한선과 천한선 전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조정에 주청하고 조정은 그를 받아들여 직예, 호광 총독을 거친 단푸(단방)를 내려보내 일을 처리하게 했다.[19]

그러나 갑자기 언제 돌려줄지 모르는 국가 보증(공채)만을 남기고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이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을 대신한 이 공채들은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보상하기로 되어 있었다.[20] 여기에 더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4국 은행단에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에 상환하기로 하면서 담보로 쓰촨, 광둥, 후난, 후베이의 염세와 이금, 탄광까지 걸어 버렸으니 민중들에겐 국유화가 되려 철도를 외세에 팔아먹는 꼴로 인식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지역(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의 철도 공사는 중단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성선회의 아이디어는 분명 실리적인 측면은 있었을지언정 당시 민심 이반으로 인기가 없고 집행능력이 떨어지는 청나라 중앙 정부의 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차관 역시 30년~40년 동안 외세에게 충분히 갚을 수 있냐는 예측이 그렇게 투명하지만은 않았다.[21] 성선회는 제대로 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부가 함부로 실력행사를 하였을 때 맞닥뜨리는 반발의 가장 나쁜 예였던 것이다.[22] (참고 문헌)

2.1.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과 혁명의 전개

결국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국유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보로운동회'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으며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도 잇달았다. 특히 성선회를 찢어죽이자는 분위기는 쓰촨성에서 매우 강했는데[23] 기어이 9월 7일에는 보로운동 수뇌부가 체포되었고, 이에 쓰촨성에서 일어난 10만명이 넘는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졌다(성도혈안). 용명검 등이 만든 "수전보水转报"[24]로 성도혈안 소식이 삽시간에 보로 동지군의 봉기로 이어졌고, 9월 말 사천 영현에서 첫 봉기가 성공하였다. 이어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성도(청두)가 마비되면서 사태는 쓰촨성만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25]

결국 이를 제압하기 위한 청의 군대(후베이의 신군)가 민중 봉기의 거점인 쓰촨성으로 투입되었고 이로서 후베이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에는 군대가 비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을 얻은 우창의 혁명파는 정부군의 파병을 구실로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우창의 8사단 공병 제8대대의 부사관과 사병들이 시작하여 보병, 포병, 사관생도가 가세했다. 혁명군은 총독 서징의 도주로 당일 우창을 점령했으며, 민주공화정을 골자로 하는 군사정부 수립을 선언했다.[26] 이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에 신해혁명이라 일컫는다.
신해혁명의 전개 과정

혁명파의 신정부 수립은 청조의 불만이 머리끝까지 쌓여있던 당시 상황에 따라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혁명의 이념은 10월 22일 후난성과 섬서성을 시작으로 불과 1개월여 만에 중국 전토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쑨원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쑨원은 이름만 빌려 줬을 뿐이고 몸은 혁명 자금을 모으러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었다. 또 중국은 당시 각 성이 산발적으로 혁명을 진행했는데, 많은 성이 혁명파가 장악하기보다는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던 입헌파가 주도하여 성들을 접수하였다. 우한 봉기 자체도 신군의 군벌들이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되는 등 기존세력과의 연대가 많았다.

그야말로 철도 국영화로 시작된 나비 효과였다. 성선회는 독일 제국 화물선을 타고 혁명가들이 망명하던 일본 제국 고베로 망명해 버렸으며 청조는 그를 삭탈관직하고 영원히 재기용하지 않겠다는 말로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개별 성들이 도미노처럼 탈퇴하자, 11월 말 경에는 청조의 남쪽 14개 성이 독립 상태가 되었다(순서대로 호북, 호남, 섬서, 강서, 산서[27], 운남[28], 상하이, 절강, 강소, 안휘, 광서[29], 광동[30], 복건, 사천[31]) 각 성은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2.2.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협상(남북의화)

청나라 정부가 이를 관망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닌지라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하는 한편 군사적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급히 도움의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북양신군은 중국 최정예 군사조직으로서 청나라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실제로 산둥성을 복원해 내기도 했다.[32] 그러나 10월 27일 흠차대신, 11월 1일에는 경친왕의 사임으로 총리대신까지 오른 위안스카이조차 상황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한커우를 점령한 진압군은 편제가 완전히 확충되지 않으면 양쯔강 이남으로 도하하는건 무리라고 대놓고 명령을 거부했으며 새롭게 편제된 진압군조차 혁명군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이에 청조는 11월 3일 급조한 의회제의 실시와 황제의 권한 축소, 황족의 총리직 금지 등을 다룬 입헌 개헌안인 《신조 19조》를 내세웠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결국 청나라는 망국의 길로 가게 되었다.

게다가 양쯔강의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이 이 지역이 신해혁명으로 전장의 한복판에 놓이자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선하기 시작했다. 12월 2일 영국 공사관이 있던 한커우에 모인 각 성의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으며 이것으로 혁명군의 남부와 북양군벌의 북부의 화해, 즉 남북의화(南北議和)가 성립되었다.[33] 12월 5일 각 성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청 왕조 타도와 공화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의화강요》(議和綱要)가 통과되었다.

혁명의 근원지 우한과 중국동맹회의 본거지인 상하이의 정치적 경쟁 속에 상하이가 승리를 거두어 결국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난징에서 세워졌다. 또한 중국 동맹회의 수장으로서 혁명파중 가장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던 쑨원은 그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급속한 정국 급변으로 12월 21일 영국령 홍콩으로 귀국해 연말인 12월 29일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선출되고 다음 해인 1912년을 중화민국 원년으로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다. 결국 쑨원이 중화민국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서 막후 협상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의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기로 합의하면서 협상은 재개된다.

이런 막후 협상을 하게 된 원인은 현실적으로 '오합지졸인 혁명군 세력으로는 북양군벌을 건드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혁명군은 갑자기 우후죽순격으로 제멋대로 등장했고 서로 연계가 잘 안 되었으며 탄약과 필수물자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도인 북경과 거리가 먼 지역은 쉽사리 독립 선포를 달성했지만 가깝거나 요충지인 지역[34]은 아직 남아있는 청군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청조를 무너트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11월이 되자 청조와 혁명군은 후베이에서 부딪치기 시작한다. 한커우까지 북상했던 혁명군은 한강(汉江, 한수) 이남의 한양(汉阳)으로 남하했고 심지어 한양까지 뺏겨 다시 장강 이남인 우창까지 도주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진압군조차 피해가 커서 편제가 확충되지 않으면 양쯔강 이남 도하는 무리라고 선언했고 재정, 군사적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위안스카이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내전의 장기화를 각오하던가 협상을 해야만했다. 청조에 미련이 없던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는 모두 청조만 없애자는데 동의했고 곧바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2.3.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한편 청나라의 멸망은 베이징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1월 중 프랑스 혁명루이 16세까지 운운하며 청나라 공화정 수용을 요구했다. 이미 황실 근위대조차 공화정 수용을 요구하는등 청조의 운명은 이미 다해하고 있었다. 몇몇 황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돤치루이를 필두로 공화정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벌이며 입헌파였던 군주입헌유지회의 만주족 청년 장교 양필(良弼, 량비)을 살해했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 푸웨이가 선통제의 숙부에게 군 병력 상황을 묻자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라는 답변이나 나오던[35] 청나라였기 때문에 결국 어전회의에서 공화정은 수용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36] 북양군벌이 자금성을 장악했다. 다음 날 쑨원은 총통에서 물러났으며 3월 10일에는 위안스카이가 신정부 2대 임시 대총통에 정식 취임해 청나라의 멸망을 확정지었다.

쑨원 측은 위안스카이에게 신정부 수반을 위임하는 대가로 난징 천도와 민주공화정제라는 합의를 얻어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아래 내용대로 전부 폐기당했다. 즉, 이 협상은 비록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이후 반세기 가까이 중국을 격렬한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불씨로 작용했다.

신해혁명 당시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봉기에 가담한 동아시아인들이 많다.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ex: 우치다 료헤이, 기타 잇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아시아주의'를 주창해 왔기 때문에 중국 혁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 한국인들 중에도 신해혁명에 가담한 인물이 있었는데 예관 신규식과 범재 김규흥, 유동열 등이 있다. #

3. 제2차 혁명

청나라의 멸망이 이루어졌지만 그건 결국 높으신 분들의 혁명일 뿐, 민중의 의사와는 무관했던 중국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청나라 황실의 빈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군사력을 이용해 철권 통치를 행사했고 신념을 꺾지 않는 기존의 혁명파는 불순분자로 취급되어 북양군벌에게 쫓기게 되었다.

1차 혁명 이후,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와 대립각을 세운 입헌파와 열강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 막대한 자금을 수혈받았고 1912년 8월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1913년 3월에는 암살자를 보내어 당시 국민당 이사장 대리이며 실질적으로 국민당을 영도하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쑹자오런 암살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어 국회의 반대에도 선후대차관 사건을 강행하여 국민당으로 하여금 대대적 어그로를 끌어모았다. 급기야 위안스카이에게 대적하기 위한 토원군이 조직되어 결사 항전에 돌입해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무력 충돌에 들어갔으나 단 2개월도 가지 못해 진압당했다.

끝내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초대 정식 대총통에 등극했고 국민당이 난당으로 몰려 해산당했으며 1914년 1월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벌어지면서 제2혁명은 완전히 실패하고 중국의 민주주의도 사실상 종언을 고하였다.

4. 제3차 혁명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였지만 그는 노망이라도 났는지 대총통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는 제 손으로 엎어 버린 황제 체제를 다시 되살리는 반동 시도였다.[37]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일본 제국의 막대한 군사력과 재력을 탐내고 있었으며 일본 또한 협상국으로서 산동의 독일 제국군 축출을 명분으로 중국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위안스카이 정권의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쌍방의 이해가 일치하여 결국 1915년 5월 이른바 중국판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가 체결되었다. 이 합의를 훗날 1차 대전이 종전된 1919년 일본이 승전국 지위를 이용해 베르사유 조약으로 서구 사회로부터 정식 인증시킴으로서 중국 인민들의 분노가 대폭발해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아무튼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일본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확보한 위안스카이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자작극인 황제 추대 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1916년을 기하여 황제에 등극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21개조 조약 체결로 분개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결과가 되었고 이미 1915년 12월 25일 운남에서 차이어량치차오가 일으킨 봉기를 시작으로 1916년 2월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역으로 위안스카이에 대한 격렬한 반발 폭동이 잇따랐다. 이때 차이어는 자신의 휘하 운남군을 호국군으로 개명하고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제3혁명을 다른 이름으로 호국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조약을 끝맺은 일본은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심지어 위안스카이가 믿었던 서구 열강들조차 등을 돌리던 가운데 버틸 재간이 없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83일만인 1916년 3월 23일 즉위 선언을 취소하였고 6월 6일 급사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황제 체제를 종식시킨 혁명은 바로 이 제3혁명으로, 1차 혁명 발발로부터 채 5년도 되지 않은 사이 이렇게 중국은 송두리째 뿌리부터 뒤집혔다.

5. 신해혁명 이후

황제 선언으로 대륙에서 전국적인 어그로를 끌어모았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퇴위로부터 3개월여 만인 1916년 6월 6일 환갑조차 맞지 못한 채 화병으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276년이나 버텨온 청나라를 단숨에 무너뜨렸던 주인공치고는 너무나도 쓸쓸한 최후였다.

위안스카이의 사후 그의 기반 조직이었던 북양군벌은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베이징을 중심으로 자기네들끼리 땅 따먹기에 돌입한다. 여기에 그간 위안스카이 밑에서 숨 죽이고 지내던 지방의 군벌들까지 대거 발호했는데 이 절호의 찬스를 이용해 먹으려는 일본 제국까지 가세하면서 중국 대륙은 그야말로 헬게이트로 돌입했다. 자세한 것은 군벌 문서 참고.

제2혁명의 좌절 이후 일본 제국에 망명 중이던 쑨원은 기존 국민당의 후신인 중국혁명당을 창설했고 1919년 5.4 운동에 편승해 다시 중국국민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대군벌시대가 도래하면서 혁명의 투사 쑨원은 지방 군벌에 빌붙어 이리저리 떠도는 식객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런 와중에도 소련과의 대타협으로 1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는 등 노구를 아끼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춘 뒤 본격적인 군벌 진압, 즉 북벌을 추진하게 되었지만 1925년 쑨원은 간암으로 결국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쑨원이 남긴 마지막 유언은 '평화, 투쟁, 중국을 구하라'.

6. 평가

파일:중국 우한 쑨원.jpg

1911년 무창봉기 기념관. 쑨원 동상 뒤의 건물은 원래 호북 자의국[38] 청사였다가 이후 임시 혁명정부 청사로 쓰였다.

6.1. 중국

신해혁명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데 2011년에는 신해혁명&중화민국 성립 100주년 기념 영화도 개봉했다. # 성룡이 주연이며 본 항목의 제1혁명까지 다룬다. 대한민국에선 2012년 3월 15일 개봉되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신해혁명의 혁명성을 강조하며 농민을 주력군으로 한 인민과 반동 집단과의 투쟁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신해혁명은 농민투쟁의 소산이고 이것이 혁명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해혁명을 중국 현대사의 시발점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런 견해가 오랫동안 통설로 자리잡아 왔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신해혁명은 자산계급의 혁명에 불과하며 진정한 의미로 반제국주의적, 반봉건적 혁명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부정적 견해가 다수다. 신해혁명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반대하는 명확한 강령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열강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기층 민중을 광범하게 동원하지 못했으며 혁명을 끝까지 이끌고 갈 강력한 혁명정당을 형성치 못한 것 등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위안스카이를 수장으로 하는 북양군벌의 수립이 그 후과(결과)로 나타났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동북 3성(만주)의 포기를 전제로 일본과 밀약을 맺었고, 소련의 야욕을 간파하지 못한 채 중국을 팔아넘겼다는 식의 극단적인 평마저 내놓기도 한다. 다만 그들은 혁명의 구체적인 진행 경과를 비판하는 것이지, 청조 타도 자체는 필수적인 사건이라고 서술하며 긍정한다. 리쩌허우에 따르면 20세기 초 중국 좌익들은 청조와 그 체제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파괴를 주장하며 량치차오를 반동수구 부르주아라고 비판했다. 애초에 신해혁명의 주요 이념 중 하나가 레닌의 민족자결주의였는데, 그것이 만주족 지배자에 대항하는 중국인들이라는 서사를 촉진했다. 애초에 좌익민족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었던 5.4 운동만 봐도 철저히 신해혁명의 후속을 자처하고 있다.

물론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극좌적 의견은 사장된지 오래다. 신해혁명은 기본적으로 안팎의 패망 위기를 극복하려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국민적 각성 위에서 성취된 까닭에 이후에 전개된 모든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신해혁명은 당시의 변혁보다 이후의 역사 전개에 주목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1919년5.4 운동은 신해혁명의 후속 혁명 성격을 띠고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전개된 중국 및 아시아 민중의 반제투쟁 역시 신해혁명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천조인 청나라의 멸망과 황제라는 자리의 부정, 공화정 체제는 많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일례로 이상주의자로 유명한 이시와라 간지는 1911년 제 65보병연대가 강제병합한 조선에 진주군으로 배치되어 춘천에 주둔하던 시절 신해혁명 소식을 듣자 부하들에게 그 의의를 설명하고 부하들과 함께 "지나 혁명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남겼다.[39]

특별행정구홍콩마카오에서도 신해혁명을 성대히 기념한다.

6.2. 대만

신해혁명의 주인공인 중화민국 자신의 건국기념일이지만, 2000년대부터 외성인에 기반한 범람연맹(친중화민국)이 계속 집권에 실패하고, 범록연맹(대만독립파)이 득세하면서 달라지고 있다.

국민당 일당독재 시기, 외성인의 주류가 되던 시기의 연구는 이데올로기적이든, 문화적인 이유에서든 신해혁명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이른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사실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기엔 당장 쑨원부터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 그것도 중농 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는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 화교, 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장기적 역사적 의미는 인정하되 당장의 단기적 사건 자체의 전개로만 보면 신해혁명은 참 산발적으로 일어난 엉성한 혁명이었다. 대다수의 혁명이 그렇긴 하지만 신해혁명은 특히 그랬다. 이 점에서 볼 때 신해혁명은 국민적 각성이나 민중의 열망이 진전시킨 혁명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하지만 필연적으로 일어난 권력의 이동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청나라 말기부터 자라난 지방에 자리를 잡은 신사 세력에게 황제의 권력이 넘어왔고 청나라의 개혁들이 조정 자체가 의도하지 않은 경제의 근대화와 지방 분권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당장 위에 길게 서술한 철도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만의 진관타오 교수나 일본의 학계에서 지지하는 견해다. #

하지만 타이완 민족주의가 중심이 되는 범록연맹측은 위의 견해를 중국국민당 중심의 사관이라고 비판한다. 타이완 독립운동이 성장하면서 국가의 기원을 신해혁명이 아니라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는 타이완 민주화운동에서 찾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신해혁명은 역사적 유산일 뿐, 대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40] 하지만 화독은 신해혁명 역시 중요하게 여길 때가 많다. 타이완 독립여론이 극에 달했던 천수이볜 시기조차 쌍십절은 매년 치루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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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해혁명이 대만 땅과 직접적인 관계는 적지만 이를 기념하는 대만의 국경일인 쌍십절은 그냥 현존 국가 체제의 기념일로써 여길 때도 많다. 위의 이미지처럼 10월 10일이라는 날짜를 그냥 대만 탄생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글에 台灣生日로 이미지 검색하면 비슷한 이미지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영어로는 ROC happy birthday라고 쓰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이 Taiwan birthday라고 써 버리기도 한다. 반면 XX주년으로 표기할 때는 거의 대부분 중화민국 1XX주년이라고 쓰는데 대만의 기념일처럼 여겨 그냥 대만 생일 1XX주년으로 쓰는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전반적으로 대만에서 이 날은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날보다 중화민국 혹은 대만의 건국일처럼 여기는 경향이 크다.

타이베이의 도로명으로 신하이루(辛亥路)가 있고 이 길에 있는 MRT역은 신하이역이다.

6.3. 몽골, 티베트, 위구르

신해혁명을 전후로 몽골, 티베트, 등 소수민족들 역시 청나라 붕괴 직후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41] 이들 분리 독립주의자들은 신해혁명으로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위구르를 결속시켜 놓았던 만주 제국 청나라가 멸망하였으므로 마땅히 한족(중화민국)과 마찬가지처럼 자립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외몽골 부족들이 중심이 된 세력은 중화민국으로부터 자치를 인정받다가 1920년대 소련의 도움을 받아 몽골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다만 청조 초기부터 만주족과 행동을 함께 하여 청나라 치세 내내 왕공족 대접[42]을 받은 내몽골 부족들은 외몽골과는 달리 이런 독립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고 1930년대 일본은 만주국처럼 이 내몽골 부족들을 중국과 분리시키려고 몽강자치연합정부를 세웠으나 2차 대전 이후 다시 붕괴되어 만주처럼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1930년대 위구르족은 범튀르크주의와 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을 선포하고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중화민국에 복속한 후이족 군벌에게 토벌되고 독립은 좌절되었다. 2차 대전 말기에는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에 반발해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세웠으나 주석 부르한 샤히디가 새로 새워진 중화인민공화국에 복속할 것을 결정하여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다시 편입되었다.

1912년 이후 중화민국으로부터 자치를 묵인받은 티베트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는 독립국을 천명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중국측은 내부사정으로 방치했던 티베트를 군사적으로 위협했고, 결과적으로 달라이 라마 등의 지도부는 이에 굴복해 시짱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합병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도움을 받은 외몽골만 소련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승인을 받아 독립에 성공했다.

6.4. 만주족

원래 만주족은 팔기군에 소속되었다는 의미에서 기인(旗人)이라고 불리며 청나라 시절에는 귀족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특권을 보장받았다. 예를 들어 중앙관료의 수는 만한동수로 구성되었는데, 만주족의 인구는 한족의 인구의 1/100도 안되었기 때문에 이는 만주족에게 엄청난 특혜를 베푼 것이다.

하지만 입관 이후부터 만주족은 계속 한족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갔고, 사실상 청 제국을 통치하는 지배계층의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 입관 이후 역대 청나라 황제에게조차 모어는 베이징 지역 중국어였고, 만주어는 제1외국어로서 7살때부터 별도로 교욱받을 수준이었다.[43]

20세기 전후 민족주의적 담론을 타고 성장한 여론 때문에 신해혁명 당시 만주족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여럿 보고되기는 했지만 동시기부터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만한차별정책을 공식적으로 철폐하고 일원화된 사회에 동화시키고자했고, 18세기부터 민족으로서의 만주족은 거의 의미가 없어질정도로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사실 만주족 절대다수는 조용히 살던 대로 살아갔다. 사실 만주기인조차 관직을 얻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다수가 직업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청나라 황실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44]

6.5. 신해혁명과 한국

비록 조선왕조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몇몇 대한제국 유민들이 한 일이지만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 예관 신규식, 범재 김규흥, 춘교 유동열 등 몇몇 조선인들이 신해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들이 신해혁명에 가담한 동기는 북벌론과 무관하게 중국에서 전제군주정을 타파하고 민주공화정을 세워 그 여파로 조선의 독립에 지원을 얻기 위함이었다. 쑨원을 따르던 대부분 조선인도 쑨원이 내세운 민권주의에 공감해 동참한 것이며,이들이 모두 북벌론의 기반이 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진 유생이나 조선왕조의 부흥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던 독립운동가였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중국 왕조가 한족 왕조인지 이민족 왕조인지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셈이다.[45]

개화기 이후로 점차 흐려지던 사대 의식이나 화이론은 신해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신해혁명을 계기로 기존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천하 질서 의식이 완전히 소멸하면서 한국에게 더 이상 중국은 '천하의 질서의 중심'이 아닌 하나의 외국으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조선을 강점한 일본에 맞설만한 유일한 이웃나라였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혁명에 동참한 독립투사들이 많았으며, 이는 1940년대까지 이어진다.

참고로 일제를 피해 만주로 피한 후 이때까지 살아있었던 조선의 위정척사파의 거두중 한 명이었던 유인석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다시 한족 위주의 중화질서가 회복되는 것에 기대를 품었지만 신해혁명이 수천년을 유지해온 유교 중심·중화적 군주제의 종말 그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신해혁명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위안스카이 등 신해혁명의 관계자들과 서한을 주고 받으면서 이들이 다시 유교·중화적 군주제로 돌아설 것을 촉구했으나 위안스카이를 빼면 성과가 없었기에 낙담하고 만다.

7. 기타

"중국 인명의 표기는 ‘1911년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해서, 과거인은 우리식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음을 따라 표기하되 처음에 한해 한자를 괄호 속에 병기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인대만인중국어 인명을 표기할 때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지, 아니면 중국어 독음을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하 질서 의식이 소멸하면서 중국과 중국어를 하나의 외국, 외국어로 여기게 되었고 신해혁명으로 들어선 중화민국부터 중국 전토에 통용될 중국어의 '표준어'를 정리,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때를 기준으로 한국 한자음과 중국어 독음을 분리해서 볼 이유가 된다는 것.

그렇다보니 이 시대에 걸려 있는 인물들은 호칭이 여러가지로 혼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손문/쑨원, 원세개/위안스카이, 강유위/캉유웨이, 양계초/량치차오, 장개석/장제스, 모택동/마오쩌둥, 등소평/덩샤오핑 등. 대체적으로 신해혁명 이후까지 살아 있으면 원음 표기를 사용하는 편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애매한 기준인 만큼 완벽하게 지켜지진 않고 있는 편이다.[예_만주어이름][47]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된 교과서나 수험서 등에서 가끔 조선책략의 저자를 한자음인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이 아닌 중국식 독음인 황쭌셴으로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신해혁명으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후에도 중국인, 대만인 연예인 중 조미, 유역비, 등려군, 왕대륙, 우기 등 한국식 한자음으로 불리는 사람과, 탕웨이, 장쯔이, 판빙빙, 쯔위 등 중국식 원음대로 불리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리고 같은 중국계라도 홍콩인, 마카오인의 인명은 성룡, 주윤발, 유덕화처럼 한국 한자음으로 읽거나 알란 탐, 글로리아 입, 캐리 람, 조슈아 웡, 리카싱, 페르난두 추이영어식, 포르투갈어식, 광동어식 이름으로 혼합해서 부르는 경향이 매우 크다. 심지어 명청사학자들이 명청교체기강건성세를 다룬 책에서 인명을 현대 표준중국어 독음으로 표기한 사례도 있다.[예]

이에 대해선 논란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중국어 한글 표기 논쟁 문서를 참고하는 걸 추천한다.

2021년 기준 중국 공산당 창당 100년에 맞추어 NHK에서 기존 95년판 다큐를 다시 새로운 영상을 교체·추가 하여 중국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방영하였는데 시간 순서상 신해혁명에 대해서도 간략히 다루고 있다
[navertv(65952071)]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20부 - 중국 · "혁명"의 피와 눈물中[49][50]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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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차 혁명 포함시 1915년[2] 제1혁명만을 일컬을 때[3] 제1, 2, 3혁명을 모두 일컬을 때[4] 황제가 아닌 그냥 천자까지 포함시키면 기원전 1046년경에 건국된 주나라, 천자 칭호 탄생 이전의 군주까지 포함하면 기원전 1600년 경에 건국된 상나라, 아니면 더 나아가서 실존 여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역사 문헌에서 최초의 세습 왕조로 기록된 기원전 2070년경에 세워진 하나라 시대부터 포함한다. 하나라 시대까지 포함시키면 중국의 군주제는 무려 4천여 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다는 소리.[5] 특히 청나라의 일부 전향적 조치에 기대하고 입헌내각운동을 벌이던 입헌파.[6] 서태후가 이화원 중건과 회갑연 등에 사용한 예산은 명목상 해군예산이었지만 이중에는 텐진에서 산해관, 펑텐을 거쳐 지린까지 부설하려던 철도 건설비도 포함되어있었고 (이때만 해도 해군아문에서 철도 부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무산되는 바람에 청나라는 한반도로의 대규모 병력 전개에 애를 먹어 청일전쟁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분석이 있다. 참고로 청나라가 철도 부설하려고 뤼순에서 생산했던 6000 톤의 레일은 결국 청일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넘어갔다.[7] 현 탕산시 펑난구 펑난진(丰南镇). 2004년에 인펑진(银丰镇)과 통합되어 펑난진이 되었다.[8] 이후 이것이 톈진까지 이어진다.[9] 개통일인 1881년 6월 9일은 조지 스티븐슨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날을 개통식으로 삼은건 이홍장의 결정이었다.[10] 몽골어로는 칼간. 만리장성과 이어져 있는 도시기도 하다.[11] 현재의 징광철도의 장강 이북 구간에 해당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에는 베이징이 베이핑(北平)으로 개칭되면서 이 노선도 핑한선으로 불렸다.[12] 이 중 41%는 외국이 부설한 것이다.[13] 한구(漢口). 후베이성의 중심 도시로, 지금의 우한 북부[14] 粤漢線. 광저우 지방이 "" 지방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15] 이후 4,000만 달러, 약 800만 파운드로 불어난다.[16] 지금의 우한을 중간으로 삼는 이유는 후베이의 중심을 거대한 양쯔강이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한선은 우한 북부인 한커우까지 내려오고 월한선은 우한 남부인 우창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월한선이 개통된 후에는 한동안 두 노선을 페리로 연계하다가, 1957년에 두 철도가 다리로 연결되면서 비로소 두 철도가 하나의 노선으로 통합되어 현재의 징광철도가 되었다.[17] 그 전해 이루어진 "공사법"으로 주식회사란 아이디어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18]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당시 기준으로 보면 동양보다 서양이 기술력에서 절대우위였다. 즉 철도를 빨리 건설하려면 당연히 혼자서 건설하는 것보다는 서구 열강의 기술력을 받아 건설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철도에 들어간 자본이 전부 내자라면 서구 열강이 뭐가 아쉬워서 철도 건설하는데 기술력을 제공해 주겠는가? 성선회의 생각대로 차관이든 외자든 어쨌든 서구 열강이 여기에 투자한게 있다면 서구 열강도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자기들 기술력을 조금이라도 제공해 주면서까지 건설하게 해 줬을 것이다.[19] 조금 뒤의 일이지만 혁명 와중에 단푸는 청나라 신군에게 살해되었다.[20] 정확히 말하면 월한선은 민간이 투자한 자금의 60%만을 돌려주고 40%를 공채로 하였다. 그 40%의 배당금(이자)은 없으며 완공 후 이익이 난 뒤에야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겠다는 것이다. 천한선은 한 술 더 떠 이미 들어간 돈이 많아 돈을 돌려주진 않고 5년 이후부터 1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백성(물론 정확히는 지역 세력이지만) 삥을 뜯은 셈.[21] 이 차관은 이후 북벌로 수립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채무 승계를 거부하고, 채권자들도 상환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아 상환 요구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증발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청나라 채권 문서 참고.[22] 더욱이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앞서 말했듯 보상 방식이 너무나 엉망이었다는 거다. 어쨌든 보상만은 쩔어주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그거라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도 나왔겠지만 월한선은 당장 돌려받을 수 있는 자금은 투자액의 60% 수준에 나머지 40%는 당장 돌려받을 수 없으며 거기서 이익을 기대할 수도 없다. 천한선은 당장 아무 자금도 돌려받을 수 없으며 역시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니 어느 누가 좋아할까? 이는 설령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맞먹는 강대국이었다고 쳐도 발생할 문제다. 물론 진짜 그랬다면 이런 문제가 생겼을 리도 없었겠지만.[23] 사실 쓰촨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保路運動)에 호의적이어서 조정에도 천한선의 민영화를 제안했으나 성선회의 거부와 강경진압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이풍은 혁명 후 붙잡혀 참수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E8%B5%B5%E5%B0%94%E4%B8%B0.jpg[24] 강에 띄운 유동나무 목판. 성도의 젖줄 금강에 수백판이 떠내려가며 성도혈안을 쓰촨성 전역에 알렸다.[25] 실제 쓰촨성이 신해혁명군에 합류한 것은 11월 20일경이다.[26] 원래는 추석10월 16일에 봉기하려고 했는데 한커우 러시아 조계에서 화약 폭발 사고로 계획이 모두 들통나 앞당긴 것이다. 쌍십절의 계기다.[27] 그 유명한 군벌 옌시산의 동네. 이때 이미 옌시산은 산시성 도독으로 정권을 잡았고 이것이 그의 독립주의(산서성 먼로주의)의 시작이다.[28]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별도로 중구 봉기를 일으켰다.[29] 루룽팅이 여기서 봉기해 부도독이 되었다.[30] 후한민천중밍이 주도했다.[31] 11월 초까지 대부분 봉기한 성과 달리 군사적인 충돌로 독립이 제일 늦었다. 11월 27일.[32] 순무로 도독으로 추대된 쑨바오치가 다시 위안스카이와 결탁했다. 이런 산동의 예처럼 많은 지역들이 지역 군벌(최소한 군 지휘관)과의 동맹으로 독립에 성공한 곳이 많아 위안스카이가 마음을 먹으면 회복은 식은 죽 먹기였다.[33] 또 이 날 난징이 함락되었다.[34] 경한선이 이어진 즈리(직예)와 허난(하남) 등. 후베이(호북)으로 바로 군대가 남하를 할 수 있던 것도 바로 이런 철도 지역은 모두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5] 재풍의 동생들인 재순과 재도는 둘 다 서구 유학을 다녀와 해군대신과 기병대의 전력인 양황기몽고도통을 해먹었지만 이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 결국 푸웨이는 복벽 의지를 관철하여 만주국 건국을 본 후 사망했지만 재순은 신해혁명 후 평생 조용히 살았고 재도는 정사복벽에 꼽사리끼며 정계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훗날 인민해방군의 정치장교와 정협 위원을 역임하고 경극이나 즐기며 잘 먹고 잘 살다 갔다.[36] 선통제는 청나라 멸망 후에도 중화민국의 예우 덕에 핍궁사건 전까지 청나라 소조정의 황제로 삶을 이어갔다.[37] 사실 신해혁명 이후 만주에 망명 중이엇던 조선의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유인석과 여러차례 서한을 주고받았고, 유인석은 주고 받은 서한을 초고로 해 존화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반서구적 반동적 성향의 우주문답을 저술했다.[38] 호북성 지방의회[39] <세계최종전쟁론> 국역본의 보론, '인간 이시와라 간지' 중[40] 사실 정말 막나가는 정도의 극단주의자가 아니면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조차 지금 당장의 중화민국은 인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경일으로서의 위상은 인정하는 편이다.[41] 당시 몽골 왕공들과 티베트 승려들은 청나라를 만주 제국으로 보았지, 중국 왕조로 보지 않았다.[42] 내몽골 부족장들의 관작은 황자와 마찬가지로 친왕 이었으며 대대로 청나라 공주들과 결혼했다.[43]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가 아예 만주어를 거의 구사못하는건 이 때문이다. 동화가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그냥 쓸 일이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44] 모든 만주족들은 원칙상 병사인데 병사로서 받는 생활비가 청나라 건국 이래로 거의 인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45] 물론 조상들이 명나라와는 임진왜란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좋은 인연이 강했던 반면 청나라와는 제대로 된 좋은 인연이 사실상 없다시피하고 악연만 있었으니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조선인 유학자들의 입장에 비하면 덜했을 뿐이다.[예_만주어이름] 공친왕 혁흔, 순친왕 혁현, 재풍, 경친왕 혁광, 재진 같은 인물은 어찌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은 한인이 아니라 만주인, 그것도 청조의 황족이었는데 이들 청조 황족들은 과거에 강희제의 아들, 즉 옹정제의 형제 항렬부터 이름이 한족과 비슷한 형태로 돌림자를 쓰며 지어진 점,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신해혁명까지 이르는 격동의 시대에 만주인의 정체성을 강조할 여유조차 잃어 가며 조정에서 한어 단독 사용이 허가된 후에는 자식들에게 만주어를 가르치는 것조차 사치일 뿐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여느 한족들과 마찬가지로 신해혁명기를 기준으로 독음을 달리하여 읽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만주족이니 한족들과 구분하려 든다면 신해혁명 시기 생존여부를 불문하고 이힌, 이후완, 자이펑, 이쾅, 자이전으로 읽을 수도 있다.(표기를 보면 알 수 있듯 한어와 만어 발음 표기가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덤으로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씨를 그리 자주 쓰지는 않았다지만 굳이 이들 이름 앞에 붙인다면 이 표기 또한 한어 발음을 따와서 '아이신줴뤄'라 표기해야 할 테지만 의외로 이쪽은 시대 불문하고 '아이신기오로' 또는 '애신각라'라고 쓰면 썼지 아이신줴뤄라 표기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래저래 만주인들의 이름 표기에서 신해혁명시 생존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지침의 일관성은 더욱 사라진다.[47] 특히 모택동, 장개석, 등소평 같이 신해혁명 이후뿐 아니라 1945년 이후 현대에도 걸쳐있고 중국의 지도자였던 인물들은 21세기에도 한국 한자음이 가끔 가다 언급되기도 한다.[예] 조너선 스펜스의 저서 <강희제>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저서 <옹정제> 번역판을 출간한 이산출판사는 편집장의 고집인지 중국사의 인명을 시대를 불문하고 모조리 녠겅야오, 어우양슈(이쪽은 청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이다!) 같은 현대 표준중국어 한글 표기법으로 통일하였다. 구범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에서는 인명은 신해혁명 전후로 구분하였으나 지명을 전부 중국어 독음으로 표기하느라 산하이관 등의 표기가 나온다.[49] 2021년 8월 14일 방송[50]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에 맞춰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중국의 "혁명"의 피와 눈물의 역사를 기록 보관소에 저장된 발굴 영상으로 시간순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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