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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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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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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입법회 선거: 2021년 홍콩 입법회 선거
홍콩 구의회 선거: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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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특별행정구 제4대 행정장관
캐리 람
林鄭月娥 | Hon. Carrie Lam
GBM GBS JP
파일:캐리 람 행정장관.jpg
<colbgcolor=#ee1c25> 영어 이름 Carrie Lam Cheng Yuet-ngor[1]
중국 이름 林鄭月娥 (람젱윗오, 임정월아)
출생 1957년 5월 13일 ([age(1957-05-13)]세)
영국령 홍콩 완차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 완차이)
재임기간 제4대 행정장관
2017년 7월 1일 ~ 2022년 7월 1일
서명 파일:캐리 람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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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홍콩
]](1957년 5월 13일 - 1990년)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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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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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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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1990년 -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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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중국 홍콩특별행정구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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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중국 홍콩특별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중국 홍콩특별행정구
]](1997년 7월 1일- 현재)
가족 남편: 람시우포(林兆波) (1984 - 현재)
슬하 2남
학력 St. Francis' Canossian College (졸업)
홍콩대학 (사회과학[2] / B.A.)
케임브리지 대학교 울프슨 칼리지 (UDAG[3])
종교 가톨릭(세례명: 가롤라)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약력 초대 홍콩 발전국장
제6대 홍콩 행정장관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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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논란4. 사퇴하지 않은 이유5. 재임 기간6. 퇴임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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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둥어: 林鄭月娥(Lam4-Zing6 Jyut6ngo4, 람젱윗오)
표준중국어: 林郑月娥(Lín-Zhèng Yuè'é, 린정위에어)[4]
한국 한자음: 임정월아(정월아)
영어: Carrie Lam(캐리 )

홍콩의 제4대 행정장관.

홍콩 최악의 행정장관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무색무취하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중국에 과잉충성하는 면모[5]를 보인 행정장관이었으며 이런 과잉충성에 가까운 친중 성향 덕에 2047년까지 일국양제를 유지해야 하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단초를 제공했다.[6]

'람'은 남편의 (姓)으로 본래 성은 쳉(Cheng, 鄭)이다. 1984년에 수학자인 람시우포(Lam Siu-por, 林兆波)와 결혼하여 남편의 성인 람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 전의 성명은 '캐리 쳉(Carrie Cheng)/젱윗오(鄭月娥, 정월아)'이다.

홍콩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아내가 남편의 성을 사용하는데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는 문화가 없는 중화권 일부에도 아내들이 중국식 성명을 표기할 때 자신의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7]

2. 생애

1957년 홍콩섬의 빈민촌이었던 완차이구에서[8] 가난한 중국 본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완차이는 당시 부두가 있는 빈민촌이었고 대부분의 거주민이 항만 노동자들과 매춘부들이였다. 1982년 홍콩의 항만시설이 구룡반도 북부 콰이충으로 옮겨가고 MTR 홍콩섬선이 개통된 후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10년 새 금새 개발되어 홍콩 굴지의 업무+상업지구 부도심이 되었다.

부모는 저장성 저우산 출신이었다.[9] 그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사람들은 책상이 없어서 침대에서 숙제를 해야 했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1등을 놓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으며 동시에 자존심도 강해서 2등이라도 되면 엉엉 울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는 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 면모를 볼 때 믿기 힘들 정도 진보적인 인사였다. 사실 한국에서도 박정희전두환 군사정부와 맞서던 민주화 운동권 출신이 보수 정치인이 되는 예는 흔하니까 이상할 일은 절대 아니다.

대학 졸업 후 홍콩 정부에서 공직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소득층 지원 및 좌파 학생 퇴학철회 요구를 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지만[10]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정치성향이 확 변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 치면 운동권 출신 보수 정치인들과 같은 길을 걸어간 셈이다.

어쨌든 공무원으로 능력이나 평판은 괜찮던 인물이었던지라 빠르게 승진했고 홍콩 반환 후 중국 정부 인사들과 친분을 맺기 시작하여 대표적인 친중파 인사가 되었다.

2007년 발전국장 재임 당시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건축물 퀸스피어[11] 철거를 진두지휘했는데 하얀 셔츠를 입고 철거를 반대하는 수백 명의 시위대 앞에 나서서 퀸스피어의 역사적 가치를 지워버리며 '전사'라는 별명을 얻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발전국장에 취임하기 전 식민지 때 부여된 영국 국적을 포기했다.# 홍콩은 외국 국적자가 정치인, 고위공직자를 할 수 없어서 이런 케이스가 많다.

2012년 행정장관이 된 렁춘잉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렁춘잉 재임 시기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가 발생했을 때는 정무서장이었다.

2017년 행정장관 선거[12]에서 1,194표 중 777표럭키세븐[13](66.81%)를 얻어 당선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친중파에 속하지만 2022년 판데믹 대응과 시위 촉발 등의 계속된 실정으로 중국 눈 밖에 나버려서 결국 존 리가 단독출마로 무난히 행정장관이 되는 꼴을 보게 되었고 본인은 임기가 끝난 뒤 퇴임하고 소시민으로 조용히 살고 있는데 단단히 시진핑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영국령 홍콩 시절의 총독과 현재 홍콩 특별행정구의 행정장관을 포함한 홍콩 최초의 여성 수반이며 대만 차이잉원 총통에 이은 중화권 두 번째 여성 수반이기도 하다.

3. 논란

그녀가 당선된 2017년 선거가 홍콩 시민이 직선제로의 전환을 원했으나 무산된 상태에서 치러졌다는 점, 그녀가 2014년 이후 강경 친중파 노선을 추구한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범 민주파들에게는 그야말로 만고역적으로 여겨지지만[14] 일반 홍콩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는 입장이다.

민의에 의해 선출된 사람은 아니지만 어차피 주권국가도 아닌 홍콩에서 될 사람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중국공산당은 철저하게 친중 행보를 이어간 그녀를 매우 호의적으로 여겼다.

재밌는 점은 그녀는 강경 친중파 노선을 추구했지만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이전까지 민주파 정치인들과의 교류가 컸고 2000년대 초반에는 민주파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많이 펼쳤던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취임식에는 홍콩 반환 20주년을 기념하여 시진핑이 중국/홍콩의 국가원수 자격으로 방문했다.[15] 단순 자리 차이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시진핑이 상석[16]에 앉는 구도에서도 갑을관계가 보인다는 관측이 있다.연합뉴스 일부 언론들은 과거 중국의 천자와 분봉왕 등 제후의 관계에 비교하기도 했다.

인사도 16명 중 15명이 친중파이며 유일하게 친중파가 아닌 인물은 노동·복지국장(장관격)에 지명된 민주당 창립 멤버 로치퀑(羅致光) 홍콩대 부교수였다.#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해 79일 만에 해산시켰고 1,000명에 달하는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때는 정무사장이었고 행정장관은 렁춘잉이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대가 100만이 넘은데도 불구하고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을 강행하겠다고 하였다.[17] 해당 시위를 '조직적 폭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소위 '어머니론'이라고 불리는 발언을 했는데 시위대의 요구에 대해 "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 아이의 버릇이 나빠진다"며 마지막 총독이었던 크리스 패튼 경 뒷목 잡을 소리를 하였다. 시민의 공복이어야 할 행정장관이 시위대를 버릇없는 아이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해 홍콩시민들의 강한 비난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지배-피지배 관계였던 식민지 시절 외국인 총독조차 이런 시건방진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게 개그(...)였다. 이에 홍콩 시민들은 林鄭唔係我老母(람쳉[18](캐리 람)은 우리 엄마 아님!!)라는 재치있는 구호로 맞섰다.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확산되던 와중에 본인의 연봉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는 민주파뿐만 아니라 친중파에서도 강력하게 반발했는데 입법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봉 삭감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콩 국가보안법 논란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발언도 하였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재확산을 이유로 입법회 선거도 1년 연기되어 남은 1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으나 기존 입법회 의원들의 임기를 1년 연장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어차피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민주파 의원들이 이미 완전 와해되었기 때문에 입법회 선거를 두고 씨름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행보들 때문에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준 명예 회원 지위에 대한 재검토에 나서자 스스로 포기했다.#

2020년 9월 1일에는 급기야 홍콩의 삼권분립 체제를 부정하면서 중국을 치켜세우는 발언을 하였다. 홍콩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삼권분립 관련 부분이 삭제된 것이 논란이 되자 이에 대해 입장을 밝히면서 "홍콩이 누리는 고도의 자치는 완전한 자치가 아니며, 행정권과 입법권, 사법권 역시 중앙정부와 분리돼 행사할 수 없다."는 중국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 읊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백신 구매에 있어서도 굳이 논란이 큰 중국 시노백CoronaVac을 선택한 이유도 홍콩인의 건강이 아니라 중국의 이익을 선택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본인은 강력하게 부정하면서 과학적 근거 바탕으로 한 결정이라고 강조했다.[19]# 물론 실제로는 코미나티주 화이자 백신을 대거 구입해 맞췄으며 시노백은 주로 노인들이 맞았지만 중국 때문인지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등 타 서방 백신은 구매조차 안 했다.

4. 사퇴하지 않은 이유

그녀가 사퇴했다간 그 소식이 본토에 전해질 것이고 본토 중국인들이 이에 영향을 받아서 천안문 6.4 항쟁 같은 반정부 시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철저한 시진핑의 수하로 공산당에 충성을 바친 그녀를 본토에서 자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친중파의 전례없는 몰락에도 중국공산당은 그녀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인 독립국에서는 이 정도로 선거 패배를 당했다면 당연히 사죄 내지 사퇴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간선제에 중국의 일부로 중국 본토의 강력한 간섭을 받는 홍콩 행정장관직의 특성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튼 2022년 재선에 출마하지 못하고 존 리에게 행정장관직을 넘겨줬으니까 좀 다른 형식으로 중국 정부에 의해 짤린 셈이다. 초대 행정장관 둥젠화도 비슷한 과정으로 짤렸고[20] 다시는 공식석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처지다.[21]

5. 재임 기간

취임식에서 국가안전법(보안법) 제정을 주도할 방침임을 천명하고 나서서 홍콩에서 우려가 커졌다.#

홍콩의 부동산 대책 일환으로 72조 원에 달하는 인공섬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2019년 6월에 촉발된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장기화되고 200만 명이 거리로 나서면서 통제 가능한 수준을 넘어 레임덕에 들어섰다는 게 전반적인 관측이었다. 본인과 중국 정부 측에서는 시민들과 서구의 압력에 굴복한 모양새를 보이기 싫은 모양인지 퇴임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지만 그와 별개로 정국 장악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사퇴하려고 했으나 중국에게 거부당했다고 한다.# 혼란을 수습하고 그만두라고 하는 걸 보면 행정장관 교체가 가시화되는 것 같았다.#[22] 나중에 24분간 녹취록에서 위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즉각 사퇴설 부인 기자회견을 했다.#

본토와 홍콩 정부에서 숨은 친중파 표를 확인하고 시위대에 대한 반격을 기획했던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외려 친중파가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대패를 당하면서 한 번 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심지어 2003년 국가보안법 파동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파일:1576938407734.jpg

2019년 12월 20일 마카오 반환 20주년 기념식에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과 그녀의 남편 람시우포[23]가 참가하였다. 호얏셍 마카오 행정장관, 왕이 중국 외무장관과 같이 캐리 람 행정장관 부부도 나란히 섰다. 그런데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카오 반환 기념식에서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축사 시간 동안 람시우포는 눈을 내리깔고 박수도 치지 않았다. 캐리 람의 남편이 대놓고 시진핑의 통제에 항의한다는 뜻을 보인 것 같은 모습이었고 하필 이게 중국 중앙 텔레비전 생방송 도중이었던지라 중화권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사 람시우포는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에도 부인에 대해서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다"라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24]

2020년 3월 3일 빈과일보를 통해 홍콩 정부 내부 보고서가 폭로되었는데 코로나19 사태가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건제파 내각 지지율에 큰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홍콩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로 캐리 람 내각이 위기를 겪었는데 2020년 홍콩 입법회 선거를 앞두고 이런 보고서가 등장하자 홍콩 야당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기사

4월 22일부로 개각을 단행하였다.#

2020년 6월 30일 UN 인권이사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UN 인권이사회 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는 과정에서 홍콩 국가보안법을 지지하며, 미국의 대 홍콩 특별지위 박탈이 전혀 두렵지 않다, 중국과 협력하면 잘 될 것이라고 항변했다. 기사

2020년 8월 7일(미국시간) 미국 정부에서 그녀를 포함한 크리스 탕, 스티븐 로 전현직 홍콩 경찰청장, 테레사 쳉 법무장관, 존 리 보안장관 등 친중파 홍콩 요인들에 대한 제재 조치를 발효하였다. 제재 대상에 오른 인물들은 영구적으로 미국 입국 금지되고 이들이 미국에 보유하거나 미국 은행에 맡긴 자산들에 대한 동결 조치가 들어간다. 기사 중국 관영 언론들은 미국의 제재 조치를 비난했다. 기사

위 제재로 신용카드 사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2020년 11월 28일 영국 가디언지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제재로 인하여 은행 계좌를 사용할 수 없어 현금을 집에 쌓아 두었다고 하며 급여도 현금으로 받는다고 전해졌다. 한편으로는 '부당하게'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음에도 자신은 공직에 몸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의 연봉은 521만 홍콩 달러로, 2020년 11월 29일 환율 1 홍콩달러 당 142.57원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742,789,700(7억 4,278만 9,700)원이나 된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받는 정치 지도자 중 하나였다. #

선거제 개편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

6. 퇴임

2019년 8월 쯤 기업가들과 함께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경제와 관련된 비공개 회의를 주최했다. 기업가 중에 누군가 회의 중에 캐리 람의 발언을 녹음하고 공개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내용인즉 '사태는 장기화될 것이고, 나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크게 사과하고 사퇴하고 싶다'였다.기사

2019년 10월 23일 중국이 그녀를 경질할 것이라는 뉴스가 파이낸셜 타임즈를 통해 나왔다. 기사 홍콩 행정장관 대행으로 추정된 2명에 대해서도 분석 기사가 나왔다.

2022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고 그대로 퇴임했다. 중국 정부가 연임을 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중국 정부의 눈 밖에 나 버려서 선택지가 없었다. 중국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동의, 허가 없이 멋대로 중국 본토와의 관문을 닫은 그녀를 완전히 싫어하게 되었으며[25] 특히 시위대에 굴복해 중국과의 관문을 막았다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후 중국 국경 통관 재개에 대해 일절 응하지 않았으며 응해도 이런저런 핑계로 어깃장 놓고 좌절시키고 해외 출입국도 못 하게 하여 홍콩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짜증을 주었다.

홍콩인들과 외국인들 모두 그녀가 무능하고 무색무취하며 할 줄 아는 일은 없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역대 최악의 행정장관이었다고 평가하며 그녀의 재임 시기를 홍콩의 암흑시대로 표현하기도 한다.[26]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버림받아 정계에서 아웃되었다.

7. 관련 문서



[1] 홍콩식 이름이기 때문에 Carrie가 영어, Yuet-ngor가 광동어 이름이며 Cheng은 결혼 전 성씨이고 Lam이 결혼 후 남편의 성이다.[2] 2학년 무렵에 학과를 바꿨다.[3] 학부 고급 디플로마[4] 한어병음 규정 가운데 쌍성(雙姓, 두 성을 붙어서 만들어진 복성)은 두 성 사이에 하이픈(-)을 붙인다는 규정이 있어서 성을 Lín-Zhèng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5]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초래한 송환법만 해도 캐리 람이 중국에 대한 과잉충성을 하다 생긴 참극이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 하다가 일을 키운 캐리 람을 중국이 곱게 안 봐서 결국 재선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판데믹 초기 중국 국경을 중국 정부의 허락도 없이 닫았다가 이에 앙심을 품은 중국이 중국 본토와 홍콩 간 통관 논의에 처음엔 대답조차 안 했고 이후 논의하다가 이런저런 핑계로 엎어 버렸다. 이때 중국을 드나들어야 하는 홍콩 교민들은 희망고문에 지쳐 버렸으며 결국 2022년에 버틸 수 없어서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대거 내려가 버렸다.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내려온 한인들은 캐리 람 하면 이를 간다.[6] 이것 때문에 홍콩의 민주주의 지지파들은 캐리 람을 한국의 이완용에 버금가는 매국노 취급하고 있다.[7] 한국 페미니즘 진영에서 주장하는 부모 성 함께 쓰기를 적용한 경우와 겉모습은 비슷해도 취지와 결론은 정반대인데 자녀가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게 아니라 아내가 남편 성을 함께 쓰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의 성을 쓰고 자녀들도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이를 관부성(冠夫姓)이라고 하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이 관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대만이나 홍콩에서는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8] 현재 완차이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중심업무지구지만 저 시절에는 빈민가였다. 완차이가 개발된 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직후 환락가가 사라지고 홍콩 지하철MTR 홍콩섬선이 개통된 후의 일이다. 이 때를 전후로 센트럴 플라자 등 고층빌딩이 대거 생겼다.[9] 홍콩광동어를 쓰는 지역이며 행정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문화적/지리적으로는 광둥성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저우산은 저장성에 속한 곳으로 광둥성과는 관련이 없는 지역이지만 중국 공산화 이후 많은 중국인들이 대만과 함께 홍콩으로 피난왔고 홍콩은 다민족/다문화를 표방하는 지역이다. 홍콩 토착인인 광동인과 함께 상하이인, 객가인, 호키엔인, 차오저우인, 하이난인 등 수많은 남중국인들이 많은 수를 차지한다. 홍콩에는 광동인이라고 할지라도 홍콩 토박이가 아니라 주변 광둥성 지역인 광저우, 포산, 후이저우 등이나 마카오 등에서 태어나 이주한 사람들이 많다.[10] 이때 캐리 람과 친하게 지냈던 운동권 학생들 중 일부는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민주파에 합류했고 반대로 캐리 람은 중국 정부와 관계를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이를 통해 행정장관까지 되면서 서로 척을 지는 관계가 되었다(...).[11] 빅토리아 항에 있었으며 영국 왕/여왕과 홍콩 총독이 홍콩에 방문할 때 이용한 부두다. 홍콩 반환식을 마치고 찰스 3세크리스토퍼 패튼 총독 가족이 영국으로 돌아갈 때도 이 부두를 이용했다.[12] 간접 선거로 사실상 요식행위일 뿐이다.[13] 재밌는게 7은 광동어 발음으로 cat1이라고 읽는데 성조를 달리하면 영 좋지 않은 곳과 관련 있는 욕이 된다. 결국 777의 광동어 발음 '찻찻찻'은 갓갓갓에 해당하는 욕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고보니 갓갓갓도 광동어 발음처럼 들린다[14] 람의 경쟁자였던 존 창(짱춘와)은 중국 정부의 신임을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한 후 민주파와 홍콩 독립운동의 지지를 얻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2022년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한 핀테크 스타트업에 합류해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싱가포르로 반쯤 기반을 옮겨 버렸으며 정치를 아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15] 일국양제이므로 홍콩의 형식상 국가원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정장관이다.[16] 위쪽 중앙 자리에 앉았다.[17] 현재도 시진핑 정권에 반대하는 책을 쓴 홍콩인들이 중국 공안부 요원에게 납치당해 중국 본토에서 징역을 살고 있는 사건이 있는데 이 법이 개정되면 홍콩에서 시진핑을 비판했다가 합법적으로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갈 수 있다는 것으로 홍콩의 정치적인 자치권이 사실상 종결된다는 의미이다.[18] 관부성과 본래 성을 붙여 부른다.[19] 홍콩에서는 화이자사의 코미나티주 백신을 다량 보유했다. 실제로 홍콩인들 대부분은 화이자 백신을 맞았는데 화이자는 중국 백신이 아닌 미국 기업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아서였다.[20] 다만 퉁치화는 재선 이후 사퇴한 케이스로 어차피 재출마가 불가능한 상태였다.[21] 렁춘잉도 재선을 안 했지만 현재 활발히 정계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22] 비슷한 사례로 초대 행정장관 퉁치화도 국가안전법 제정을 시도하려다 홍콩 시민들에게 털려서 결국 도널드 창에게 행정장관을 물려줬다. 당시 사퇴설을 일축하면서 시위대와 대립했지만 결국 시민들에게 항복했다. 이때 본인은 건강상의 사유라는 변명을 했지만 홍콩에서는 국가안전법 제정에 실패하고 사태 수습을 제대로 못 한 게 중앙정부에 찍혀서 레임덕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후임 행정장관직은 도널드 창이 이어받았다. 캐리 람도 퉁치화와 비슷한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부와 캐리 람은 사퇴설을 일축했지만 현실은 중앙정부에서 행정장관의 후임을 물색하고 시기를 적절히 노려 교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23] 수학자이고 영국 국적을 가진 영국인이다.[24] 람시우포는 은퇴하기 전까지 거의 20년 동안 홍콩에서 가장 반중 성향이 강한 홍콩중문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은퇴한 후에는 아예 홍콩을 떠나 영국에 정착했다.[25] 2019년 시위 촉발로 이미 불신임 조짐이 보였으나 시위를 먼저 진압해야 해서 일단 쉴드는 쳐 줬다. 이 상황에서 불신임 마일리지를 누적한 일이 판데믹 초기대응이었다.[26] 민주파의 씨를 말린 초강경 친중파 존 리 신임 행정장관도 정치적으로만 욕먹지 경제적으로는 유능한 면모를 보이며 과도한 방역조치를 여럿 해제하고 해외 출입국도 여는 등 적어도 암흑시대에서는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캐리 람 시대는 판데믹과 시위로 경제도 죽어 버리고 인재는 모두 떠나며 좌절과 짜증만 남고 연달은 시위로 혼란만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