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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2:18:36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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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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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6·8대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Franz Conrad von Hötzendorf
파일:Franz Conrad von Hötzendorf(oil painting).jpg
이름 Franz Xaver Josef Graf Conrad von Hötzendorf
프란츠 크사버 요제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1]

Franz Conrad-Hötzendorf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2]
출생 1852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 제국 펜칭
사망 1925년 8월 25일 (향년 72세)
독일국 뷔르템베르크 자유 인민공화국 바트메르겐트하임
묘소 히칭 묘지
재임기간 제6대 참모총장
1906년 ~ 1911년
제8대 참모총장
1912년 ~ 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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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부모 아버지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3]
어머니 바바라 퀴블러[4]
형제 여동생 바바라 "베티"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5]
배우자 빌헬미네 레 베아우[6]
자녀 장남 쿠르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7]
차남 에르빈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8]
삼남 헤르베르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9]
사남 에곤 프란츠 아우구스트 율리우스 카를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10]
학력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 (졸업)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k.u.k. Kriegsschule) (졸업)
군사 경력
복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1871년 ~ 1918년
최종 계급 제국원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직위 제1보병연대장
제11보병사단참모장
제93보병여단장
제1보병연대장
제55보병여단장
제8보병사단장
제6·8대 육군 총참모장
남티롤집단군사령관
주요 서훈 백엽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 지휘관십자(Kommandeurkreuz des Militär-Maria Theresien-Ordens)
}}}}}}}}}
1. 개요2. 생애
2.1. 가계도2.2. 어린시절2.3. 군인의 길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시절
2.4.1. 참모총장이 되기까지2.4.2. 특징2.4.3. 사라예보 사건2.4.4. 제1차 세계 대전
2.4.4.1. 동부전선2.4.4.2. 세르비아 침공2.4.4.3. 갈리치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2.4.4.3.1. 크라시니크 전투2.4.4.3.2. 코마루프 전투2.4.4.3.3. 라바-루스카 전투 (1914년 9월 3일)2.4.4.3.4. 갈리치아 전투의 결과
2.4.4.4. 고를리체-타르누프 선의 돌파2.4.4.5. 이탈리아 전선으로 양면전쟁에 직면2.4.4.6. 세르비아 분할2.4.4.7. 트렌티노 공세2.4.4.8. 브루실로프 공세2.4.4.9. 루마니아 전선2.4.4.10. 참모총장에서 야전사령관으로2.4.4.11. 카포레토 전투2.4.4.12. 개인적 비극과 사상적 전환2.4.4.13. 제국의 붕괴와 무력한 은퇴
2.5. 말년과 죽음
3. 평가
3.1. 지휘 스타일과 성격3.2. 사상과 한계3.3. 전쟁에서의 성과와 한계3.4. 책임 회피와 정당화3.5. 역사적 의의3.6. 그를 비판하는 인물들
4. 가족 관계5. 기타6. 저술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인이자 제국원수[11].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전투 교리에 대한 교보를 저술하여 대외적으로 명성을 쌓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눈에 띄어 육군 참모총장에 올라 군의 최정점에 올랐다. 그는 타국에 배타적인 입장이었으며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발칸반도를 복속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내각과 함께 세르비아 침공을 주도하고, 동부전선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총괄 지휘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군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전체적인 대전략을 그리는 능력이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후술할 이유로 평가는 극과 극이다.

2. 생애

2.1. 가계도

콘라트의 집안은 대대로 모라비아브륀에서 군인공무원을 업으로 삼았었다. 콘라트의 증조부 프란츠 안톤 콘라트(Franz Anton Conrad, 1738 ~ 1827)는 모라비아와 슐레지엔의 지방 회계검사원이었다. 프란츠 안톤 콘라트는 50년동안 합스부르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815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츠 1세로부터 세습기사 작위를 부여받았고, 세습 귀족이 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국 출신이었던 아내 요제파 폰 회첸도르프(Josefa von Hötzendorf, 1739 ~ 1798)[12]의 성을 합쳐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로 성씨를 정하였다. 콘라트의 조부 요제프 오이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Josef Eugen Conrad von Hötzendorf, 1768 ~ 1837)는 모라비아 잘름(Salm) 가문의 재산 관리자였다. 오이겐의 아내 바바라 포스타베크(Barbara Postavek)는 콘라트의 조상 중에서 유일한 비(非) 독일인으로, 체코계 가문 출신이었다. 프란츠 안톤 콘라트의 손자이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의 아버지인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 1793 ~ 1878)는 20세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용기병연대 소속 중위라이프치히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1817년부터 헝가리와 갈리치아 일대에서 후사르로 복무하였는데, 30년동안 복무를 했지만 중령에서 더이상 진급을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빈에서 헝가리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때 크사버가 폭동을 진압하던 중 낙마를 하여 골반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으며, 결국 최종 계급 후사르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퇴역 장교가 된 크사버는 제국의 수도 의 제14구역인 펜칭(Penzing)에 정착하였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크사버보다 32살이나 어렸던 바바라 퀴블러(Barbara Kübler, 1825 ~ 1915)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 후 크사버 부부는 1년이 지나서 첫 자식을 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이었다.

2.2. 어린시절

콘라트는 소싯적 화가였던 외할아버지 요하네스 퀴블러(Johannes Kübler)[13]에게 2년 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손자도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지 콘라트의 어머니인 바바라는 아들이 화가로서의 길을 걷길 원했다. 그래서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콘라트는 어릴 적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자연을 관찰하는 게 좋았던 콘라트의 취미는 나비 수집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종교, 즉 가톨릭에 대해서는 무심했으며, 그보다 자연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4] 다만 콘라트의 아버지인 크사버는 사냥을 즐겨 하였었는데, 이런 아버지와 다르게 콘라트는 사냥을 싫어하였다.[15]

2.3. 군인의 길

크사버는 자기 집안이 대대로 그래왔던 것처럼 아들 역시 군대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6][17] 그리하여 콘라트는 빈에 있는 장크트안나 초등학교를 다니던중에 11살의 나이에 유년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였는데, 바로 합격하여 아주 어린 나이에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18]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교사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과학선생 카를 무를레(Carl Murle)이었다. 그의 학교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워낙 혹독한 스타르타식 교육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왔던 콘라트랑은 맞지 않았다.[19] 15살이 되던 해인 1867년, 콘라트는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유년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20]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콘라트는 이곳에서 사회진화론을 처음으로 접하고 배우게 되었다. 콘라트는 사회진화론에 점차 깊은 관심을 보였고, 얼마 안가 사회진화론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이후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콘라트는 동기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4년 후, 콘라트는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19살의 나이에 오스만 제국과 인접한 국경에 주둔 중인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야전 경보병 연대 제 11 보병대대 소속 소위로 임관하였다. 1874년이 되면서 젊은 참모장교를 양성하는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2년 동안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졸업한 후, 커셔에 있는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후사르 연대 제6기병여단 소속 중위로 진급, 참모장교로 임명된다.

1878년, 콘라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콘라트가 세습기사 직위를 이어받는다. 1879년, 제4보병사단 소속 일반참모로 배치되어 보스니아 전선에도 참여하였고, 1년후 대위로 진급하였다. 제47보병사단으로 소속을 옮기고 달마티아 전역에 참여했다. 1883년 렘베르크의 제11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승진되었고 거기서 야전훈련 개혁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886년 공병차감인 제국군 대령 아우구스트 폰 레 베아우(August von Le Beau)의 딸 빌헬미네 레 베아우(Wilhelmine le Beau, 1860 ~ 1905)와 결혼하여 다시 으로 돌아온다. 콘라트는 빌마[21]와의 사이에서 쿠르트(Kurt, 1887 ~ 1918)[22], 에르빈(Erwin, 1888 ~ 1965)[23], 헤르베르트(Herbert, 1891 ~ 1915)[24], 에곤(Egon, 1896 ~ 1974)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모두 아버지를 따라 나중에 장교가 되었다.

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시절

2.4.1. 참모총장이 되기까지

1887년 소령으로 승진한 콘라트는 에 소재한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전술에 관련하여 장교들을 교육하였다. 그는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및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얻은 전술적 경험들을 가르쳤다. 또한 전술에 관한 교과서 ("Zum Studium der Taktik")를 저술했다. 콘라트는 전쟁대학의 장교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있는 편이었다. 교수로서도 훌륭했는지 실제로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대다수가 후에 고위 장교가 되었다. 콘라트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중령으로 진급했다. 복귀를 요청받은 콘라트는 1892년 제93보병여단의 대대장이 되었다. 1년 후 대령으로 진급한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콘라트는 참모장교 지망생 평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유망한 장교들을 선별하였다. 이후 제국 및 왕립 "카이저" 제1보병연대를 4년간 지휘, 1899년 봄, 콘라트는 트로파우에서 트리에스트로 전보되어 제55보병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5월, 그는 여단장에 걸맞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47세였던걸 생각하면 상당한 고속 승진인 셈.

트리에스트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대의 상업 도시였고, 콘라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고위 인사들과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콘라트는 휘하 부대를 위한 훈련장 확보에 주력했고, 바소비차 인근에 부지를 마련했다. 1900년 1월, 그의 저서 "보병의 전투훈련(Die Gefechtsausbildung der Infanterie)"의 초고가 완성되어 의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그해 여름,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제28보병사단 훈련에서 콘라트가 이끄는 제55여단은 사단 내 다른 부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참관한 페르디난트 대공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후 1901년, 트리에스트에서 발생한 이탈리아계 항만 노동자들이 봉기하자 콘라트는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콘라트는 이탈리아 민족주의 세력을 경계하게 되었고, 점차 이탈리아 왕국과의 동맹 관계에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왕국트렌티노트리에스트의 영유권 주장은 무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03년 9월, 콘라트는 티롤인스브루크에 주둔한 제8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사단은 오이겐 대공이 지휘하는 제14군단의 일부였으며, 헤르만 쾨베시 소장이 지휘하는 제15보병여단과 1905년부터 빅토어 단클 소장이 지휘한 제16보병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트리에스트와는 달리 거의 전적으로 독일계 주민들로 구성된 알프스 산악 도시 인스브루크는 인구가 약 4만 명에 불과했다. 이곳에는 14군단과 제8보병사단, 제15보병여단의 본부가 위치해 있었는데, 오이겐 대공이 최고 장교, 콘라트가 두 번째, 쾨베시 여단장이 세 번째였다. 쾨베시는 콘라트보다 먼저 티롤에서 복무하여 지역 사정에 밝았기에 그의 경험을 활용하며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트리에스트에서와 달리 최고위직이 아니었던 콘라트는 사교적 의무의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콘라트는 티롤 지역을 시찰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확산을 목격하게 되었다. 동맹이지만 언제든지 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티롤 방어를 위해서 콘라트는 국경을 보안하기 위한 작전으로 산악 요새를 건설하고, 병력 증강을 건의,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산악부대(K.k Gebirgstruppe)[25]를 창설하였다. 1904년, 티롤의 제8보병사단장으로서 콘라트는 12년 만의 첫 훈장인 레오폴트 훈장 기사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상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황제 기동훈련(Kaisermanöver)에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이 참가하여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오픈카를 타고 저녁에 방문하여 콘라트와 참모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다음날 춥고 험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동훈련을 참관한 뒤 콘라트의 부대에 대해 '인정의 말'을 전했다. 이는 단순한 격려를 넘어 이후 콘라트를 참모총장으로 발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처음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은 15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 제2카이저예거(Kaiserjäger)연대에서 각 4개 대대, 제14연대(상오스트리아)와 제102연대(보헤미아)에서 각 3개 대대, 제3카이저예거에서 1개 대대가 그것이었다. 민족 구성은 독일계가 54%, 이탈리아계가 24%, 체코계가 19%였다. 1904년부터 1906년 사이 부대는 20개 대대로 증강되었는데, 제3카이저예거연대의 나머지 대대들과 제2, 제12 보헤미아 야전예거대대가 추가되었고, 제102보병연대가 제88보병연대로 교체되는 등 변화가 있었다. 콘라트는 알펜페라인(Alpenverein)[26]에 가입하여 여가 시간에 등산을 하며 티롤 지역의 지형을 연구했다. 이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군사적 목적을 겸한 것이었으며, 은퇴할 때까지 이 협회 회원자격을 유지했다. 그의 노력으로 1906년에는 두 개의 란데스슈첸(Landesschützen) 연대가 알파인 부대로 지정되어 특수장비를 받게 되었고, 이탈리아와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남티롤 요새 강화 계획도 추진했다. 그러던 와중, 1905년 초 콘라트의 부인 빌마가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고, 4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함께 인스브루크의 팔크슈트라세(Falkstrasse) 18번지로 이사한지 고작 1년이 지난 때였다. 빌마의 죽음은 콘라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후 그의 성격은 크게 변화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다윈주의적 세계관이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스트레스로 인한 복통이 심해 위암을 의심했으나 군의관이자 빈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알로이스 피크(Alois Pick) 박사의 진단 결과 '신경성 복통'으로 판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콘라트는 더욱 엄격한 생활 방식을 따르게 되어 커피와 차도 마시지 않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는 음식만 섭취하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를 시작했다. 사별 후 몇 달 동안 콘라트는 일에 몰두하고자 했고, 기동훈련 준비가 다소간의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시기 가족도 크게 변화했는데, 맏아들 쿠르트는 1904년 가을 무렵에 비너노이슈타트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둘째 에르빈은 1905년에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셋째 헤르베르트는 여전히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05년 이후 장교단 내에서 부상한 소수의 젊은 장교들에게 콘라트는 늙어보이고 더 이상 첨단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수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군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장군으로 남아있었고, 이런 점에서 그를 능가하는 고위 장교들, 특히 1905년 75세가 된 참모총장 포병대장과는 크게 대조를 이뤘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 군 총사령부에 파견되어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 휘하에서 참관한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중령은 콘라트보다 12살 어리고 기수는 13기나 차이나는 한참 후배였으나, 이후 콘라트의 전술 철학을 비판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만주에서의 전장 현실에 기반한 전술이 35년이나 지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기반한 것보다 현대전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참호전, 야간 공격, 경기관총과 같은 기술적 혁신을 포함한 새로운 전장의 모습을 제시했다. 1908년 그의 저서 《전투(Die Schlacht)》가 출간되자 20여 년 전 콘라트가 그랬던 것처럼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콘라트는 참모총장으로서 이 책의 출간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치체리치의 전술 실험을 용인했다. 이는 자신의 견해와 다르더라도 군 내 토론을 위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콘라트는 오히려 치체리치가 만주에서 관찰한 것들이 자신의 견해를 입증한다고 보았다. 러일전쟁은 최초로 연속된 확장 전선에서 치러진 전쟁이었고, 이는 전통적인 측면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치체리치는 이를 바탕으로 보병의 정면 공격이 지배하는 미래 전쟁을 예측했다. 일본은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격을 지속함으로써 승리했다. 양측이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전례 없는 화력을 퍼부었음에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보다 백병전으로 인한 사상자 비율이 두 배나 높았다는 점은 러시아 참호에 대한 일본군의 최후 공격에서 백병전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치체리치도 콘라트처럼 여전히 "정신적 우월성", "공격 정신", "최초 전투의 중요성"을 믿었다. 콘라트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분석을 반영하듯, 치체리치는 러시아가 초기에 방어적 태세를 취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콘라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 대표적인 혁신주의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러일전쟁치체리치 같은 도전자가 등장했지만, 콘라트의 인기와 영향력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1905년 황제 기동훈련에서의 활약은 콘라트가 곧 제국의 군사 수장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제8보병사단이 2년 연속으로 황제 기동훈련에 참가하는 이례적인 상황이었던 1905년 훈련은 남티롤의 논탈 계곡(Nontal)에서 실시되었다. 이 훈련에서는 남쪽에서 "적군"인 이탈리아군이 티롤로 공격해오는 상황을 가정했다. 콘라트의 사단은 처음 이틀 동안은 이탈리아 침략군을, 셋째 날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방어군을 연출했는데,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에서 콘라트는 공격적인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여기에는 콘라트 휘하에서 그를 능력 있게 보좌한 쾨베시단클 소장의 지휘도 한 몫을 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참관자들은 특히 보병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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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육군 원수 콘라트

장차 제국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신의 핵심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열중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콘라트는 제격 인사였다. 콘라트는 곧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만든 그림자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 현대적인 전투 훈련 방식으로 제국군을 개혁하려는 콘라트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눈여겨보았고, 그를 총참모장으로 만들기 위해 프리드리히 폰 벡 장군의 해임을 위해서 황제에게 4년 동안 총참모장 교체를 요구했다. 마침내 벡은 해임되었고 그해 10월 말, 콘라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안으로 참모총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콘라트는 자신의 경험 부족을 이유로 사양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강력한 추천으로 결국 1906년 11월 18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승인을 받아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제 콘라트에게 육군, 해군 및 예비군의 전시 배치에 대한 작전상의 권한이 생긴 것이다. 군부에서 그의 명목상 상관은 1914년까지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였고 그의 사후에는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이었으며 그들의 휘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군부의 지도자는 콘라트였다. 1907년에는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08년 11월 15일에 마침내 콘라트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고, 1910년에는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2.4.2. 특징

콘라트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군인으로서의 그의 신념은 매우 호전적이며 혁신적이었다. 직접적인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론과 전술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였으며, 보병 전술들을 저술한 군사 출판물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군의 현대화를 위한, 헌신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운동가였다. 특히 사회진화론 사상에 푹 빠진 콘라트는 그 사상에 입각하여 삶은 "끊임없는 생존 투쟁"으로 구성되어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공격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어 형태라 보았다. 따라서 이 때 갖추게 된 군사적 가치관을 정리하자면, 공격적인 결단력과 목적 있는 추진력, 불굴의 의지를 이해하는 "행동주의"가 되어 "공격은 최선의 방어"로 직결되는 것이 콘라트의 제국주의적 정치 강령이었다. 때문에 콘라트는 그의 보수적인 정치관과는 별개로 장교를 등용할 때에는 나이, 직위, 계급을 가리지 않는 혁신적이고 평등한 모습도 보였다.

다만 그의 성향상 군사 계획을 내각과 황실에 상세히 공유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각을 구성했던 제국의회에서는 콘라트를 위시한 군부에 대한 간섭이 일체 존재하지 않았고,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조차도 콘라트가 하는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가끔씩 황제가 콘라트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기는 했었지만, 모든 군사적인 결정은 결국 참모총장인 콘라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콘라트는 소위 황제의 (Falken des Kaisers)라고 일컬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립적인 성향은 내각과 황실에 그치지않고, 일반참모부 작전실에서도 발휘되었다. 콘라트의 부관들이 매일 그에게 보고를 해야 할 만큼 부하들과는 업무 면에서 함께 부지런했지만, 정작 작전을 구상 할 때는 부관들과 함께 구상하기보다 스스로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때문에 콘라트의 수많은 연구와 제안이 그의 손에서 외부의 검토없이 쏟아져 나왔다.[27]

모든 중요한 업무들이 한 사람에게 쏠리게 된 배경으로는 콘라트가 군부에서 작전술의 지식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점을 손꼽을 수 있다. 당시 고전 군사학의 전술 및 역사에 대한 책을 저술했던 콘라트는 당대 유럽 전역의 동향을 연구하여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전술들의 본질을 파악해서 자기만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하였다. 그 결과, 콘라트는 장교들 사이에서 비현실적이고 웅대한 계획을 가진 대전략의 귀재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의 전투 교리는 기동력이 잘 훈련된 보병의 중요성과 모험적이며 항상 공격적인 작전 개념을 강조하였는데, 단 한번의 대규모 전술 기동을 통하여 신속하고 전면적인 측면 공격으로 적을 패배시켜 몇 주만에 평화협상을 이끌어 낼수 있는 대규모 포위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작전은 공세 작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하고 기동적인 전투가 우선이었다. 콘라트의 강점은 독창성, 결단력, 사명감과 더불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이었다. 콘라트는 자신이 가진 강점들을 발휘하여 일반참모부를 지휘하였는데, 연병장에서의 사열이나 제식훈련과 같은 전술적으로 의미없는 방법보다는 군인으로서의 기질과 도덕을 기르고 실용적이고 자유롭게 훈련하여 병력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다만 콘라트의 약점은 몇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간과했다는 것이었다. 비포장 도로에서의 기동성과, 지형과 기후를 무시했으며 보급과 수송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관총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기도 하였다. 대국적인 전략을 짜놓는다고 해도 이를 구현할 전술과,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서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총력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던 콘라트로서는 공세 말고는 한단계 더 높은 전술을 생각치 못한 것이었다.

긍정적으로 볼 점이 있다면 콘라트가 지향하는 사상은 당시만 해도 현대적인 유럽 군사 사상과 일치하였다. 수세기에 걸친 황실 보존을 우선시하는 전시계획 즉,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며 방어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략적 풍토에서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정세를 보면 이탈리아 왕국은 트렌티노 및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고, 동시에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면서 발칸반도를 먹으려는 야욕을 펼치고 있었던 상황에서 콘라트는 제국을 현대적인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으며, 외교적으로 균형을 만들기보다는 군사적인 행동을 통해 오스만이 가지고 있는 발칸반도를 제국이 먼저 차지함으로써 내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러시아, 이탈리아와의 경쟁에서 슬라브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남부 슬라브를 합스부르크 제국이 통합함으로써 군주제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이중제국이 삼중제국으로 대체되기를 원하였다. 더 많은 슬라브인들을 제국의 지배하에 두면서 헝가리를 견제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1909년부터 콘라트는 세르비아를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었으며, 발칸 동맹이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청산하고 나면 제국에 복속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콘라트는 제국이 다른 열강들에 비해 낙후되어 있는 군대를 개선하기 위해 군비를 대거 증가시키고 현대적인 재무장을 주장했으며, 이탈리아, 세르비아와의 예방전쟁을 계속 요구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음에도 외무대신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백작(Alois Leopold Johann Baptist Graf Lexa von Aehrenthal)과 헝가리 의회의 반대로 콘라트의 개혁 및 예방전쟁 시도는 좌절되었다. 폰 에렌탈도 반세르비아 성향인지라 콘라트와 마찬가지로 발칸반도에 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길 원했지만, 당시 동맹이었던 이탈리아와의 관계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는 것을 우려하였다. 콘라트는 폰 에렌탈이 자기의 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평화적인 정책을 원한다고 느꼈다. 따라서 온건파와의 정치적 갈등이 더욱 커져가는 와중에 폰 라이닝하우스 백작 부인과의 불륜 스캔들로 추문이 일어나기도 했다.[28] 이를 견디지 못한 콘라트는 1911년, 참모총장을 사임하였다. 또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당초 콘라트가 참모총장에 선임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콘라트를 육군 개혁의 적임자로 생각해서 지지했기 때문이었지, 군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는 두 사람이 차이를 보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군을 국내 질서 유지의 도구로 보았다면, 콘라트는 전쟁 수행 능력 강화에 방점을 뒀기 때문이었다. 즉, 평화에 대한 강력한 소신을 가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있어서 호전적인 콘라트는 애초에 서로 맞지 않지않는 셈이었다. 거기다 더해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는 엄격한 가톨릭 신자인 반면, 콘라트는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리고 사냥을 매우 좋아하였던 황태자와 달리, 콘라트는 사냥을 매우 싫어하였다. 서로 상극이었던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29]

사임 후 1년간은 육군총감으로 임용되었는데, 그와 갈등을 빚었던 폰 에렌탈이 1912년, 평소 앓던 지병의 악화로 외무대신직을 사임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이 외무성 장관직에 앉는다.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반세르비아 인사였던 그를 다시 재기용하였다. 참모총장 콘라트는 이탈리아세르비아의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목격하여 그들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양국과의 예방전쟁 개시를 내각에 열심히 촉구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잠재적인 적국인 러시아, 세르비아, 이탈리아에 대한 상세한 작전 계획을 개발했었다. 특히 1913년과 1914년 이 시기에 두 차례 걸쳐 전개된 발칸 전쟁의 결과로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와 군사력이 증가했다. 보스니아 병합에 격렬히 반발했던 세르비아가 정작 이제와선 보스니아에 눈독을 들이자 이 꼴을 보다못한 콘라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세르비아를 침공해야 한다고 25번이나 주장했다.

콘라트는 동부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하여 두 가지 전쟁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가 중립을 유지하면 제국의 주력군을 세르비아에 집중시켜서 공격을 하겠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그를 대비해 예비대를 미리 러시아 전선에 보내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인사는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카를 폰 슈튀르크 제국수상, 재무대신 레온 폰 빌린스키, 전쟁대신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남작이었다.

2.4.3. 사라예보 사건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아내와 함께 암살당했다. 사건 당시 아그람역에 있던 콘라트는 레멘 보병대장으로부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소식을 전달받았다. 콘라트는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장례식 다음날인 7월 5일, 쇤브룬 궁전에 방문하여 황실에 알현하였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조카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사라예보의 보안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에게 분노할 거라 예상했으나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독일제국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과 지원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성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 1876-1937)을 베를린에 보냈고, 베를린에서 돌아온 호요스는 7월 7일까지 으로 돌아와 제국의회에서 브리핑을 했다.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대신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대신, 레온 폰 빌린스키 재무대신, 카를 폰 슈튀르크 수상과 티서 이슈트반 수상이 제국의회에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콘라트,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콘라트와 카일러는 가능한 군사 작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호출되었기에 그 외에는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콘라트의 전쟁 의지는 발칸 전쟁때부터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슈튀르크 총리와 빌린스키에게 진즉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전쟁 여론은 시간 문제였다. 더불어 베르히톨트도 찬동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왕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콘라트는 황위 계승자가 암살 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즉각적인 전쟁을 원하였다. 무력을 써서라도 당장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료 장군이었던 크로바틴은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오직 티서 수상만이 망설이고 있었다.
이것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남부 슬라브인, 체코인[30],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사라예보 사건 발발 질후인 다음날,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이것을 구실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의 몰락을 진정 바라고 있었으며, 세르비아를 몹시 싫어했다. 이는 세르비아가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비공식적 통치권을 의당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반체제 세르비아인들을 유인하는 자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유화 노선을 채택해 온 페르디난트 대공마저 사라졌으니, 콘라트의 전쟁 불가피론은 제국의회를 휘어잡았다.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 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정확한 수사 후에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고, 베르히톨트 또한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하기를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1914년 7월 당시 유럽의 다른 참모총장들과는 달리 콘라트는 내각 각료들에게 자신의 전쟁 계획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콘라트는 제국과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러시아 제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각료들은 1913년 5월과 10월의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결의를 보였다. 슈튀르크빌린스키는 국내 사정상 압도적인 전력을 과감히 사용하는 것 이외의 사항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조치를 장기적으로 애매하게 했다가는 제국 경제에 원치 않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며,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분쇄되지 않는 한 유지하기 힘들것이라고 봤다.

호요스가 베를린으로 떠났던 2주간의 기간 동안 당시 많은 부대들은 콘라트가 농촌 지역의 군대가 연례 기동 전에 수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특별 여름 휴가를 미리 승인해 준 상태였었는데, 다시 곧바로 복귀를 명령하면 수확에 영향을 미칠것이고 제국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할 의도가 있다는 의혹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7월 22일, 23일은 에서 영국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실의 단호한 결심은 전쟁의 촉구가 아닌 지연이 되어버렸다.

콘라트는 추수 휴가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16개 군단 중 7개 군단인 제3군단(그라츠, 제4군단(부다페스트), 제4군단(포조니), 제6군단(커셔), 제7군단(테메슈바르, 제13군단(아그람), 제14군단(인스브루크)은 즉각 동원 명령에 응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추수가 일찍 끝나지 않는 한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 통첩은 본래 날짜보다 며칠 이상 앞서서 보낼 수가 없던 것이다.[31]

7월 7일, 회의에서 콘라트는 각료들을 위한 전쟁 계획을 검토했다. 다시, 그는 계획 B(세르비아에 대한 발칸 전쟁)에 집중했고 계획 R(러시아)을 단순한 우발 사태로 취급했다. 7월 8일 콘라트는 베르히톨트, 호요스 및 기타 주요 외무성 관리들을 만나 베르히톨트로부터 7월 22일 이전 "추수 후에만 최후통첩을 전달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면서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주변국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크로바틴과 함께 휴가를 떠날 것을 제안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콘라트는 7월 19일, 베르히톨트의 집에서 극비리에 모임을 가졌다. 카일러 해군소장과 함께 그는 유명한 10개 조항의 초안을 작성할 때 제국의회 구성원에 합류했다. 7월 23일, 최후 통첩이 발송되기 몇 시간 전, 콘라트는 베르히톨트를 만나 일단 동원하면 돌이킬 수 없다며 그들의 이전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동원 중 만약 세르비아가 항복한다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자 콘라트는 세르비아한테 제국이 동원을 일으키게 만든 책임을 비용으로 물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만약 동맹을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두려워해서는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은 알베르토 폴리오 중장(Alberto Pollio, 1852-1914)으로 그는 평소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참모총장과 콘라트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폴리오는 콘라트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이탈리아 장군이었다. 그랬기에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생각했으나 폴리오가 사라예보 사건 3일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탈리아의 동맹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이미 낙관론자들을 제외하면 제국 내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에 충실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가 제국의 최후 통첩을 거부한 날,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군의 참모총장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Радомир Путник / Radomir Putnik)[32]의 운명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 푸트니크는 당일 오스트리아의 바트 글리헨베르크에 휴가를 와 있었는데, 자신의 나라가 곧 그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의회가 베오그라드에 최후 통첩을 보낸 후 푸트니크는 휴가를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갈아타던 중 경찰에 체포됐다. 다음날 베르히톨트는 그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호요스를 콘라트에게 보냈는데 콘라트는 푸트니크를 곧바로 풀어주기 결정한 것이었다. 베르히톨트는 푸트니크에게 베오그라드행 특별 열차를 제공해주었다. 당시 콘라트의 친구 요제프 레들리히(Josef Redlich, 1869-1936)조차도 이러한 콘라트의 행보를 "거짓된 기사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결정은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일치했다.

콘라트는 개인적인 요인에 따라 몰트케와 폴리오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보지 않았고, 1차 세계 대전 중에 적 지도자의 자질이나 능력을 자신의 전략 요소로 고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가진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을 통해 풀어보자면 콘라트에게 전쟁은 보다 더 광범위한 세력들의 충돌로 이루어지는 것 뿐, 그 세력에 속한 개인(심지어 전시 참모총장으로서 자신도 포함)은 다소 미미한 역할을 수행 한다는 걸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콘라트는 전쟁을 빨리 시작하고 싶어 안달복달했었다. 7월 25일 저녁,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발칸 전쟁을 위한 계획 B의 실행을 승인했다. 그러나 황제의 서명을 얻어낸 것이 무색하게도, 막상 전쟁이 터지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오헝제국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콘라트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베르히톨트가 콘라트에게 선전포고를 언제 해야 될지 질문했을 때, 콘라트는 동원이 완료되고, 군사 작전이 준비가 되는 8월 12일에 선전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국군은 2주 정도 지나야 작전할 준비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베르히톨트는 외교 상황의 급박함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동원령이 발령될 경우 16만이었던 병력을 최대 330만까지 증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력의 쇠퇴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인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절감해 왔기에 단지 병력만 늘린다고 전력이 대폭 증가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장비 수준도 높지 않았다. 그나마 당시 열강들의 제국의 제식 소총 열풍에 덩달아 만든 만리허 소총만이 자랑할 만한 무기였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비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25퍼센트 수준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질적 수준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10년 전 러일전쟁에서 망신을 당하고 덩치만 큰 약체라고 조롱받던 러시아조차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볼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도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러시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천명했을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었으므로 까딱하다간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강을 자부하는 독일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개시 직전에 16개 군단중에 일단 애초에 계획했던 병력의 60퍼센트 수준인 200만을 7개 군단으로 서둘러 편성할 수 있었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침공에 50만, 북동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100만, 그리고 중앙에 예비대로 50만을 할당했다. 우선 목표인 세르비아에 집중하지 못한 모양새 같았지만, 50만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오히려 작전의 성패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얼마나 막을 수 있냐에 달려 있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문제는 12개 언어[33]로 공표된 포고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병력의 60퍼센트 정도가 슬라브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이 세르비아나 러시아와 싸울 때 얼마나 충성심을 발휘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실제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의 병력인데, 이들도 평소에 제국의 지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서 전투력이 미지수였다.[34][35]

팔켄하인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의 병력 동원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감안할 때 8월 말까지는 제국군이 러시아 제국군에 대해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사이에 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6][37][38]

콘라트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를 원했다. 북동쪽 국경에서에 러시아군 마주하기 전에 신속히 세르비아를 침공해서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여기서 독일이 러시아를 압박만 해준다면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개입하기 어려울것이고 제국이 손쉽게 세르비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는 독일 제국의 슐리펜 계획의 속행을 의미하였다. 제국의회는 세르비아 침공이 러시아와의 전쟁과 유럽에서의 전면전을 의미할지라도 지지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확실해지자 콘라트는 지난 며칠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플랜 B는 취소되어야 했고 플랜 R이 실시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는 제한적이 되었다. 문제는 콘라트가 절반의 병력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39]

7월 31일, 러시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양면 전쟁을 예상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나머지 8개 군단(AStaffel)을 활성화하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황제의 명령으로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와 최고사령부(Armeeoberkommando, 이하 A.O.K.)가 개설되었다. AOK의 총사령관에는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이가 좋은 점을 고려하여 프리드리히 대공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영지인 테셴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대공은 명목상의 지휘관이었고 실질적인 지휘관은 총참모장인 콘라트였다.[40] 제국의회는 해산되었고, 전시동안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은 군법에 따라야 했고, 육군총사령부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콘라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서가 가능한 한 많은 평시 특권을 유지하면서 정부 기능을 유지했던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에는 총독인 포티오레크가 있었기 때문에 콘라트의 권한이 적게 닿았지만 명목상 AOK의 통제 하에 있을 뿐, 나머지 전시 자원동원은 콘라트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

2.4.4. 제1차 세계 대전

2.4.4.1. 동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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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콘라트 브리핑하던 모습[41]

육군총사령부의 총괄 지휘관인 콘라트는 6개의 을 편성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콘라트는 동부전선에 있는 프셰미실 요새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전에 미리 가족들과 마지막 휴가를 떠났었다. 그 후, 폐질환으로 요양 중인 장남 쿠르트를 제외한 콘라트의 아들들은 장교로서 일찍이 전선으로 이동했다. 차남 에르빈은 제10기병연대로, 막내 에곤은 18살이었는데,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가기 보다 셋째 형인 헤르베르트가 복무 중인 제15기병연대에 지원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42] 89세였던 노모 바바라의 집을 방문하여 출발 전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8월 15일 아침, 콘라트는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황제와의 접견을 하기 위해서 쇤브룬 궁전을 찾아갔다. 모임이 끝날 무렵 노쇠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손을 잡고 감정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So Gott will, wird alles gut gehen, aber selbst wenn es schlecht gehen sollte, werde ich durchhalten."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만, 설령 잘못되더라도, 나는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8월 15일, 콘라트는 프리드리히 대공카를 대공을 대동하여 나머지 육군 총사령부의 참모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이틀 만에 프셰미실 요새에 도착하였다.
2.4.4.2. 세르비아 침공
7월 29일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함들이 도나우강을 타고 올라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했고,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제6군은 사바강과 드리나강을 도하할 준비를 했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군은 45만 명의 병력과 엉성한 훈련을 받은 몬테네그로인 보조병들만을 갖추고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군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는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세르비아 병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팔 각오를 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불가리아 왕국에 이르는 450마일에 달하는 국경선을 지켜야 했던 푸트니크는 휘하의 3개 군을 세르비아 중부 지역에 배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불가리아 왕국 어느 쪽이 침공해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병력을 배치했다. 푸트니크는 소수의 병력으로 주요 하천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가 오헝군의 주요 도하 지점을 포착한 후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 전략을 집중해 제국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짰다. 푸트니크가 정확하게 오헝군의 주공 방향을 예측한 덕분에 오헝 제국군이 실제로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왔을 때 세르비아군은 이를 맞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반면, 포티오레크의 전략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동포 슬라브인 세르비아군과 싸울 의욕도 없었다. 당시 군기가 해이해져 있던 제국군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제2군도 투입할 생각이었지만, 당시 제2군은 세르비아 공격을 위해 발칸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시점에서 콘라트는 제2군이 세르비아 전선으로 빠짐으로써 갈리치아 일대가 취약해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7월 30일, 콘라트는 다시 제2군을 갈리치아로 되돌리라고 명령했지만, 철도 이용량의 폭주로 인해 제2군의 복귀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2군이 삼보르(Sambor) 동쪽의 방어선에 자리를 잡은 것은 8월 25일이 되어서였다.

8월 1일,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8월 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양면전쟁을 공식화했는데, 전반적으로 전략적 상황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암울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탈리아 왕국루마니아 왕국은 여전히 중립이었다. 레들리히는 8월 첫째 주에 콘라트가 확실히 절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8월 4일 레들리히는 이를 회상할 때 에서 콘라트을 만났을 당시 콘라트의 상태가 차분하게 좋았다고 말했다. 동원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진행되고 있었다. 펼쳐진 철도 문제는 실망스러웠지만 수백 대의 기관차가 하루마다 평균적으로 7,000명의 병력과 보급품을 전선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독일계, 헝가리계, 슬라브계 가릴것없이 남성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앞다투어 입대를 하였고, 이는 진정으로 콘라트를 놀라게했다.

8월 12일, 세르비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9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세르비아군은 자다르 전투에서 오헝 제국군을 공격개시선으로 밀어내버리면서 퇴각하는 오헝군을 쫓아 보스니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헝 제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도 결의에 찬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9월 7일, 포티오레크는 다시 한 번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너무 멀리 진출해 나온 세르비아군을 보스니아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세르비아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세르비아군은 11월 29일, 어쩔 수 없이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내주고 퇴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질서정연하게 남서부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끝마친 푸트니크는 콜루바라강에서 반격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페타르 1세는 소총과 50발의 실탄을 지니고 최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독기 어린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제국군은 다시 한 번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12월 15일 무렵, 세르비아군 정찰대가 다시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입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세 번째 침공 역시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콜루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27만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133문의 야포까지 잃었으며 거듭된 졸전의 책임자였던 포티오레크는 결국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국군은 전황이 급박해진 동부전선에 주의를 돌리면서 세르비아 전선은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다. 1915년 여름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는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이상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큰 문제가 동부전선에 도사리고 있었다.
2.4.4.3. 갈리치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2.4.4.3.1. 크라시니크 전투
1914년 8월 23일,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 사이의 첫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콘라트의 전략은 명확했다. 러시아 제국군루블린-브레스트-리토프스크 방향으로 밀어내고, 이를 독일 제국군의 공세와 연계하여 폴란드의 전선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콘라트의 계획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 사이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인 크라시니크(Kraśnik) 전투에서 빅토어 단클 기병대장을 위시한 제1군은 10.5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의 강력한 전력으로 러시아 제4군을 상대했다. 루블린 방향으로 적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적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쪽으로 밀어내며, 동시에 독일 제국군의 시들체(Siedlce) 방향 작전과 연계하여 폴란드 왕국의 불리한 전선 돌출부를 바로잡아야 했다. 제1군은 3개의 주요 공격집단으로 편성되었는데, 좌익에는 카를 폰 키르히바흐의 제1군단, 중앙에는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의 제5군단, 우익에는 제10군단이 배치되었으며 각 군단은 2-3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산강 선에 집중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은 8월 20일부터 갈리치아 북부 국경을 넘어 전진했다. 오헝군의 공세에서 좌익은 비스와강 동안으로 보호받았고, 서안의 산도미에시에서는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트 기병대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집단군이 동시에 전진하며 서쪽에서 지원해야 했다. 동시에 동쪽 측면에서는 모리츠 아우펜베르크을 위시한 제4군이 빅토어 단클의 진격에 동반하여 공세를 지원했다.

전투 시작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러시아 제국군에 비해 수적 우위와 더 나은 전략적 출발점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은 10.5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러시아 제4군은 6.5개 보병사단과 3.5개 기병사단에 불과했고, 깊이 있는 방어진지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다. 콘라트의 지시에 따라, 쿠머 집단군을 비스와강 서안에서 신속히 이동시켜 공격 작전을 강화했는데, 이는 러시아 남서부 전선 참모총장 미하일 알렉세예프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8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개전 단계에서 제1군은 3개 방향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좌익에서는 안나폴(Annopol) 방향으로, 중앙에서는 야누프-크라시니크(Janów-Kraśnik) 도로축선을 따라, 우익에서는 프라멘카 방향으로 진격했다. 단클 장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블린 방향으로의 돌파를 시도했다. 러시아군 참모총장 미하일 알렉세예프 장군은 더 뒤에 있던 파벨 아다모비치 폰 플레흐베(Pavel Adamovich von Plehve)의 제5군을 제4군의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8월 23일에서 24일까지의 돌파 단계에서는 중앙의 제5군단이 주공을 맡아 전면 공격을 감행했다. 제33사단이 정면을 돌파하고 제14사단이 측면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좌익에서는 카를 폰 키르히바흐의 지휘 아래 아돌프 폰 브루더만의 제1군단 제3기병사단이 제5사단, 제46사단과 함께 안나폴 동쪽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중앙에서는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의 제5군단이 야누프(Janów)를 지나 비스트르지스타(Bystrzyca) 강을 따라 북진, 러시아의 제14군단과 제16군단을 격퇴했다. 또한 단클의 우익에서는 제10군단이 8월 22일 제2사단, 제24사단, 제45사단을 이끌고 전투 없이 타네프(Tanew) 강을 건너 북쪽의 비엘고라이로 향했고, 러시아 근위군단과의 전투에서 폴리흐나-투로빈(Polichna-Turbin) 선에서 비아와(Biała)강까지 도달했다. 8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5사단과 제46사단이 크라시니크에 진입했고, 비스와강 쪽으로의 서방 엄호는 이제 제12사단이 맡았다. 24일과 25일, 제1군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계속하여 좌익을 포위를 위해 전진시켰고, 패배한 우익을 적시에 후츠바(Huczwa) 강 뒤로 철수시켰다. 8월 25일부터 27일까지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전선 재정비와 포위망 형성을 위한 좌익 기동, 우익의 전략적 후퇴, 그리고 전과 확대를 위한 추격작전이 전개되었다.

크라시니크 전투는 서부전선을 지배하게 될 참호전과도 다르고, 대개 더 큰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는 동부전선의 전투 양상과도 달랐다. 어느 군대도 장기 방어를 위한 진지를 구축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았다. 대신 전투는 더 기동성 있게 진행되었고, 양측이 총 5.5개 기병사단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기병 전투가 포함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성공으로 북부 갈리치아로의 러시아 침공은 일단 저지되었고, 열세에 있던 러시아군 사령관 살차(Salza) 남작은 전투 중에 에베르트(Evert)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크라시니크 전투는 렘베르크 전투와 연관된 갈리치아 대전선을 따라 일련의 추가 충돌을 촉발했다. 8월 27일에 전투가 다시 격화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단과 제5군단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8월 30일까지 빅토어 단클은 요제푸프(Józefów)에서 비스와강을 건넌 레무스 폰 보이르슈 지휘 하의 슐레지엔 향토방위군단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
2.4.4.3.2. 코마루프 전투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크라시니크 전투 사흘 뒤 벌어진 코마루프(Komarów) 전투에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고, 이 전투는 브루더만에게 있어서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우펜베르크의 제4군이 파벨 아다모비치 폰 플레흐베(Pavel Adamovich von Plehve) 지휘 하의 러시아 제국군 제5군을 맞아 헬름 방향으로의 돌파를 시도했으나, 루돌프 폰 브루더만의 제3군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선봉대가 공격해올 때까지 그 뒤에 러시아 본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날 브루더만은 군단 간의 작전 조율이나 포병 사격 계획도 없이 2개 보병 군단으로 무모한 반격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큰 타격을 입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제3군은 러시아의 주력이 북쪽에서 제1군과 제4군에 의해 저지될 것이라 믿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러시아군은 오히려 제3군 정면에 주력을 집중했다. 포모르자니 지역의 제12군단은 삼면에서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8월 27일, 콘라트는 초기 공세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제3군에게 그닐라 리파(Gnila Lipa)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사실상의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의 추격이 시작되자 콘라트는 제2군의 제7군단 소속 제34사단을 그닐라 리파에 급파했으나, 증원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쾨베시의 제12군단은 브제자니(Brzezany)에서 러시아 제8군에게 대패했고, 간신히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도 제4군은 선전했다. 이전 전투로 이미 약화된 플레베의 우익을 상대로 1914년 9월 1일까지 전술적 승리를 거두며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다. 그러나 러시아군 전체를 포위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8월 25일부터 제4군은 세 개 군단(셰무아의 제2군단, 보로예비치의 제6군단, 프리델의 제9군단)으로 자모시치-토마쇼프 선을 향해 진격했고, 제17군단이 제6군단 뒤를 따랐다. 우익에서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14군단이 라바-루스카에서 북진을 시도했다. 동쪽으로의 우익을 비트만 중장의 기병군단이 엄호했고, 이들은 렘베르크 지역을 동쪽으로 러시아 제3군의 전진에 대비해 방어하던 제3군 사령관인 루돌프 폰 브루더만과 연락을 유지했다. 전투 초기에 러시아 제국군 제5군은 7.5개 사단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 6개 사단은 다음 날에야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8월 26일, 모리스 아우펜베르크의 좌익 공격이 시작되어 러시아군을 자모시치에서 격퇴했다. 크라시니크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로 러시아 제5군에게 40%의 사상자를 내고 2만 명의 포로와 100문의 포를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둔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승리는 오히려 불필요한 전투에서 거둔 승리였다. 이 승리로 단클아우펜베르크는 각각 "크라시니크의 단클"과 "코마루프의 아우펜베르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단클은 콘라트의 오른팔이었고, 아우펜베르크는 콘라트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승리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클의 제1군은 10월 이반고로드 전투에서 패배했고, 11월 말에는 니다(Nida)강과 필리차(Pilica)강 뒤 크라쿠프 북부 전초기지까지 밀려나고 말았다.[43]

중앙의 제6군단은 타르나바트카에서 러시아 제19군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8월 27일, 새로운 러시아군의 개입이 시작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4군의 우익이 위협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6군단과 제17군단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8월 28일, 좌익에서 제25사단이 자모시치를 점령했지만, 중앙에서 제15사단이 티쇼프체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에 패배했다.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포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9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술적 승리가 완성되었고 러시아군은 부크강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그닐라-리파 전투에서의 제3군 패배로 이 승리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26,000명의 손실(포로 10,000명 포함)과 156문의 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4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승리였지만, 동시에 발생한 그니라 리파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전체적인 전황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이렇게 크라시니크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 등, 오헝이 승리한 전투도 더러 있었고 패배한 전투도 많았지만 현대 군사 문헌은 1914년 당시의 오헝군의 동부전선을 갈리치아 전투라는 명칭으로 통합하고 있는 실정이다.
2.4.4.3.3. 라바-루스카 전투 (1914년 9월 3일)
9월 1일, 갈리치아 전선의 상황은 급변했다. 렘베르크로 후퇴하는 군대를 지켜본 콘라트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베레시차(Wereszyca) 방어선에서 군대를 재편성하여 반격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코마루프 전투의 전술적인 승리로 북부 전선의 러시아군이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콘라트는 토마쇼프(Tomášov) 근처에서 제4군 주력을 빼내는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세르비아에서 급히 철도로 이동해 온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과 합쳐 렘베르크 동쪽에 150개 대대, 828문의 포를 배치하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쾨베시 보병대장의 제12군단도 제2군에 편입시켜 루비엔-코마르노-루드키(Lubień—Komárno—Rudki) 전선을 보강했다.

그러나 9월 2일 콜로메아(Kolomea) 전투에서 또 다시 패배를 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제12군단은 러시아군의 수적 우세와 강력한 화력으로 인해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쾨베시는 후퇴하는 부대들을 위해 스비르즈(Swirz)강 구간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전반적인 전황 악화로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중요한 방어 책임을 맡았던 제12군단이 무너지자 제3군은 렘베르크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9월 3일, 라바-루스카(Rava-Ruska)에서 시작된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재앙이 되었다. 렘베르크는 제4군과 제2군의 중심축이었는데, 콘라트는 렘베르크로 두 방향에서 집결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원투 펀치 전략을 구상했다. 북쪽에서는 코마루프 전투에서 수모를 겪은 파벨 아다모비치 폰 플레흐베(Pavel Adamovich von Plehve)가, 동쪽에서는 브루더만의 수적 열세인 제3군을 거의 궤멸시킨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스키(Nikolai Vladimirovich Russky)가 진격하며 압박해오는 상황이었다. 콘라트는 즐로타 리파(Zlota Lipa)와 그닐라 리파(Gnila Lipa)에서의 패전으로 폴란드에서의 전역이 위태로워지자, 콘라트는 제4군과 제2군의 일부 병력으로 루스키를 동부 갈리치아에서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콘라트와 그의 참모들은 치명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코마루프에서 패배한 플레흐베가 이렇게 빨리 전력을 회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콘라트가 루스키를 공격하자마자, 플레흐베는 국경을 넘어 제4군의 후방으로 신속하게 진군했다. 첫 공격은 루스키와 맞서도록 보낸 부대가 너무 약해 실패로 끝났고, 콘라트는 제4군 전체를 동원해 플레흐베와 맞서게 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러시아 제5군이 바르샤바 방어를 위해 배치되었던 신설 제11군의 병력으로 증강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콘라트의 동기이자 제4군 사령관인 아우펜베르크는 군의 방향 전환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9월 첫 주 중반, 재배치 중이던 그의 선발 사단들에 플레흐베의 결연한 군대가 돌진해 들어왔다. 콘라트가 모든 사단에 적과 맞서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그닐라 리파에서 큰 손실을 입은 쾨베시 장군의 제12군단 엄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6일간의 전투"로 알려진 라바-루스카 전투는 제국과 콘라트에게 역사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콘라트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졌고, 렘베르크와 라바-루스카에서의 참패가 알려지면서 그의 지도자로서의 명성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는 콘라트가 뛰어난 전략가였음에도 실전에서의 즉흥적 대응에는 취약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나중에 콘라트는 육군 총사령부의 장교들에게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만약 죽지않고 총사령관이 되었다면, 갈리치아 전장에서의 실패로 자신을 총살했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9월 5일, 콘라트는 재편성된 제4군으로 제3군의 공세를 막아보려 했고, 에베르트 장군도 루블린 남부에서 강력한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끈질긴 추격과 압박은 계속되었다. 9월 6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오헝 최고사령부와 콘라트는 마침내 렘베르크 포기를 결정하고 프셰미실 요새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이미 전력이 바닥난 오헝군은 계속해서 밀려났다. 9월 7일에는 그로데크(Gródek) 시가 함락되었고, 에베르트의 반격으로 단클마저 후퇴를 강요당했다. 9월 8일, 전투는 베레시차(Wereszyca)강을 따라 약 100km에 걸쳐 확대되었고, 렘베르크 북쪽 50km 지점의 라바-루스카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제2차 렘베르크 전투마저 패배하면서 오헝군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렘베르크는 9월 11일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도 산강 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44]
2.4.4.3.4. 갈리치아 전투의 결과
이 전투는 갈리치아 전역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갈리치아의 수도이자 핵심 도시였던 렘베르크의 상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치명타였다. 약 3주간의 연전연패로 32만 명의 사상자를 낸 오헝군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후퇴해야 했고, 갈리치아의 대부분을 잃었다. 더구나 아우펜베르크의 제4군과 보로예비치의 제3군은 북서쪽과 남동쪽에서의 협공 위협에 시달렸다. 독일 제국군에 요청한 추가 지원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콘라트는 마지막 승부수로 지친 제3군을 베레시차 진지에서 다시 공격에 투입했다. 또한 렘베르크 전투의 실패로 루돌프 폰 브루더만은 제3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이 제3군을 이어받았다. 아우펜베르크렘베르크-라바루스카 전투에서의 늦은 대응으로 해임 위기에 처했다. 콘라트는 오랜 친구인 아우펜베르크[45]의 해임을 극도로 꺼렸지만, 프리드리히 대공의 압박으로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 전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갈리치아 전투는 제국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은 독일 제국군의 지원 필요성을 제기했고, 팔켄하인도 이에 동의했다. 9월 16일, 독일 제국군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9군을 창설했다. 이틀 후 제9군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콘라트와 작전 논의를 했으나, 콘라트는 제국군의 독일군 예속을 거부했다. 9월 29일, 독일 제9군은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이반고로드 사이의 비스와강 상류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박을 줄여 제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독일군에 점차 종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하튼 갈리치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투들은 제국군의 결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은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선을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팔켄하인은 그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가능하면 서부전선의 독일군 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달성하기를 원했다. 9월 16일 독일 제국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9군을 창설하였다.[46] 이틀 후, 제9군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향후 작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콘라트와 회동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제국군을 독일 제국군의 지휘하에 편입시킨다는 제안을 거부했고, 루덴도르프도 굳이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다. 제국군은 재정비를 하기 위한 여유가 필요하며 이러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제9군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차피 콘라트와 만나러 가기 전에 이미 적절한 명령들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9월 29일, 독일 제9군은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와 이반고로드(Ivangorod)[47] 사이의 비스와강 상류로 밀어내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독일 제국군의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독일 제국군 전선으로 병력을 집중시키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10월 4일, 전면에 있는 러시아군이 단순한 견제 부대임을 파악하고 산(San)강으로 진격하여 10월 9일에는 고립된 프셰미실 요새의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군의 저항이 격화되면서 제국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말았다. 독일 제9군 좌익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면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다. 독일이 받는 압박을 줄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에 나서줘야만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공세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렇다면 최소한 마켄젠을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북쪽으로 급파해달라는 루덴도르프의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였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방침을 옹호했다. 하지만 타협책으로 제국군이 독일의 근위예비군단이 맡은 이반고로드 전선을 인수하자, 그 병력을 북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포위당하는 사태를 피하려던 루덴도르프는 마켄젠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보다는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공세에 혼자 힘으로 알아서 대처해야 했다. 결국 제국군 제1군도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10월 말, 러시아군의 보급 물자가 다 떨어지면서 제1차 바르샤바 전투는 끝이 났다. 독일군은 초반에 얻은 이득을 모두 잃어버렸고, 제국군은 더 많은 영토를 상실했으며, 프셰미실은 다시 한 번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은 베를린 공세를 시도했지만 좌절되었고, 이에 대하 반동으로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제국군을 쳐서 독일군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칼을 꽂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마켄젠을 지원하기 위해 콘라트가 11월 18일부터 크라카우에서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치와 크라카우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예상외로 강하게 저항하면서 제국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하거나 비스와강 선으로 쫓아낸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제국군이 공격을 위해 전력을 북방에 집중하자 상대적으로 크라카우 동쪽 전선에 대한 방비는 크게 약화되었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대한 수비를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의 제3군 소속 11개 사단과 크라카우 남쪽에서 급하게 편성된 몇 개 사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급편된 이들 부대들의 전력이 시원치 않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자마자 병력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고,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의 대평원 지대 부근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군은 광대한 전선에 배치된 대규모 부대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또다른 공세에 나섰는데, 크라카우를 공격하는 동시에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서 계속 압박을 가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크라카우 지원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스와강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에 배치된 콘라트의 4개 군은 이미 전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또 브루실로프가 거의 헝가리까지 밀고 들어옴에 따라 이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장부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콘라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이 지휘하는 제4군의 일부 부대와 완편된 독일군 1개 사단을 크라카우로부터 남쪽으로 파견하여 제3군의 좌익을 보강했다.

제국군은 이런 움직임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브루실로프가 제국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8일, 제국군 제3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의 핵심 통로들을 점령하자 브루실로프의 헝가리 진격은 다시 한 번 좌절되고 말았다.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보기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 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먼저 때려눕히자는 주장을 힘을 잃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그 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선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5년 1월 1일, 팔켄하인은 베를린에서 콘라트 및 루덴도르프와 회동했다. 1주일 후 빌헬름 2세베트만홀베크의 압력에 팔켄하인은 마지못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사단 몇 개를 카르파티아 산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다는 데 동의했다. 한편,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전략적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기 어려우니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공격하여 확실하게 패배시키고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참전을 유도하자는 것과, 주적은 독일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력 낭비라며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결과는 독일 전선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프셰미실 공방전 당시 10만 명 이상의 제국군이 프셰미실 요새에 틀어박혀 있었다. 공성을 시작한 러시아 제국군은 반년 가까이 지나도록 요새를 함락하지 못하였다.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콘라트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가할 경우 비스와강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판단하에 양측 모두 카르파티아 산맥 동부지역에 대한 동계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산악 지형에서 동계 공세를 펼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들은 고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파른 산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산들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고개들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쓸 만한 도로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고개들조차 겨울에는 대부분 눈으로 막혀 버리기 일쑤였고, 날씨가 풀릴 때는 진창을 이루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공격을 고집한 콘라트에 의해 그 해 겨울, 수천 명이나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의 험한 산속에서 동장군의 무자비한 손길에 죽음을 당해야 했다.[48]

1월 23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은 프셰미실 요새 구원을 위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브루실로프의 제8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하자, 구원군은 제풀에 지쳐 1월 26일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이 중지되자, 브루실로프는 바로 반격에 나서면서 보로예비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 이어진 3주간의 전투에서 제3군은 전체 병력 10만여 명 가운데 6만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월 27일, 콘라트의 두 번째 공세 역시 제한된 성과만을 거둔 채 끝이 났지만, 러시아군을 드네스트르강 동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셰미실 요새의 구출 시도를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다가온 상황이었기에, 콘라트는 요새 사령관 헤르만 쿠스마네크에게 더 이상의 구원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결국 3월 22일, 프셰미실 요새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고, 헤르만 쿠스마네크을 포함한 10만 여명의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다시 한 번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러시아군이 평야지대에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것에 대비해 부다페스트 사이의 도나우강 선의 방어진지를 강화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포탄이 고갈되어 버리면서 러시아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고, 독일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선은 다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누적된 피해로 인해 이제 제국군에는 제대로 훈련된 일반 장교들과 부사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49] 물론 러시아군도 별반 사정이 좋을 것은 없었지만, 그대로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야망이 마침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2.4.4.4. 고를리체-타르누프 선의 돌파
팔켄하인도 이제 동부전선에 더 많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프셰미실 요새 상실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이탈리아루마니아는 영토 양보를 요구하며 전쟁 참여를 압박했다.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러시아군을 격파해 이들을 견제하기로 결정했다. 4월 9일, 두 사람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8개 사단을 비밀리에 차출하여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팔켄하인은 이들을 마켄젠 휘하의 제11군으로 편성해 고를리체 서쪽에 배치했다. 콘라트는 마켄젠에게 제국군 제3군과 제4군의 지휘권도 넘겨주어, 22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의 대규모 집단군을 구성했다. 마켄젠 집단군은 고를리체를 돌파하고 러시아군을 남북에서 협공하는데 성공했다.

5월 25일 이탈리아가 참전했으나 당장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콘라트와 마켄젠은 6월 12일 공세를 재개해 렘베르크를 탈환했다. 이어진 제3차 바르샤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15개 사단이 전멸하고 20개 이상의 사단이 전력을 상실하는 등 타넨베르크보다 큰 타격을 입었다. 1915년 5-7월의 승리로 폴란드 돌출부가 제거되어 전선이 800마일로 단축되었다. 러시아군은 160만의 병력을 잃었다. 이 공로로 콘라트는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팔켄하인-콘라트 콤비의 러시아군 무력화 계획은 표면적으로 성공한 듯 보였다. 가을이 되어 비가 내리자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병력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엄청났다. 카르파티아 전투에서 80만 명, 1915년 여름 전투에서 1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선 유지는 독일군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독일 제국군 OHL이 사실상 제국군을 지휘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호엔촐레른 가문에 종속되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심각한 식량난이었다. 갈리치아 곡창지대 상실, 농촌 인력 부족에 더해 협상국의 해상 봉쇄까지 겹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의 순무의 겨울보다 더 이른 1914년 10월부터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콘라트는 9월 로브노(Rovno) 공세로 마지막 독자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사실상 붕괴에 직면하게 되었다.
2.4.4.5. 이탈리아 전선으로 양면전쟁에 직면
파일:부대를 시찰하는 회첸도르프.png
부대를 시찰하는 회첸도르프
1915년 5월 24일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에 가담,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참전하게 된다. 그런 이탈리아와 맞서기 위해 콘라트는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는데, 황제프리드리히 대공은 콘라트에게 과연 이탈리아에 대한 공세를 위해 동부전선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콘라트는 1915년 7월부터 갈리치아와 부코비나 전선에 거의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5년에 해낸 반격의 대성공으로 러시아 제국이 당분간은 공세를 취할 여력이 없을 것이고 러시아군이 잇다른 전쟁으로 전력이 약화되었기에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4군만으로도 러시아를 막아낼수 있을거라 확신하여 동부전선쪽 병력을 보강할 필요가 없다며 이를 황제에게 보장하는 오판을 했기 때문이었다.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계속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제국군은 1915년에서 191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간 동안 수십여 겹의 철조망과 삼중사중으로 구축된 참호선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을 뿐이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은 린징겐 집단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카를 폰 플란처발틴 기병대장이 이끄는 제7군 외에 독일 남부군[50]이었다. 1916년 3월 이래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동부전선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이 독일군에게 종속되는 듯한 모양새를 좋아하지 않은 콘라트는 이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 무렵까지는 독일-오헝 제국군 간에 단일 지휘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은 186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련한 조약에 따라 인위적으로 그어진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국경지대의 산맥 일대를 자국 영토로 확보하여 이탈리아의 침공에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동시에 또 마음만 먹으면 산꼭대기에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원지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든 간에 공세를 벌이려면 험준한 산악지대를 기어 올라가야 했으며, 국경선의 형태 역시 이탈리아군이 직면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은 거대한 S자 형태로, 트렌티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돌출부가 이탈리아로 깊숙히 파고 들어오고, 이탈리아의 우디네 돌출부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뻗쳐 있는 형상이었다. 두 돌출부 중 잠재적으로 이탈리아에 더 위협이 되는 것은 트렌티노 돌출부였다. 그러나 이곳은 도로와 철도 사정이 열악해서 제대로 된 군사 작전을 벌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제국군 지휘관들도 이 지역에서 어떻게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스위스 국경지대에서 아드리아해까지 400마일 길이로 형성된 아탈리아 전선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트렌티노와 알프스 산맥, 그리고 이손초강 전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약 30마일 길이의 전선은 그래도 좀 덜 험한 언덕지대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거의 전 전선이 험한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에게 빼앗긴 베네치아 지방을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콘라트가 전선에 투입할 수 있던 병력은 당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국경지대에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건설하면서 후방 지역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고정방어시설을 구축함에 따라 향후 이탈리아 전선은 주로 정적인 진지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철도망은 국경 지대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별다른 지선이 건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이 트렌티노에서 공세를 나섰을 때 공격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방어진지를 지키고 있는 20개 사단을 상대로 3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개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전쟁 준비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전 전선에서 공세에 나서면서 제국군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탈리아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손초강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영토 내의 여러 거점들을 점령했다. 이후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양측의 전선이 안정되면서 계속해서 벌어질 소모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6월 23일, 여러 차례 벌어질 소모전 가운데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51]

1915년 말까지 이탈리아군은 이손초강 전선에서 4차례에 전투를 벌이며 전략 요충지인 고리치아를 점령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고리치아 마을은 강력한 제국군 교부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여러 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국군은 공격해오는 이탈리아군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한 제국군 방어진지에 병력을 연거푸 투입하면서 공격을 퍼부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전투의 규모 자체도 대단해서 제2차 이손초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제국군 129개 대대에 대항해 260개 대대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난공불락의 방어진지에서 버티고 있던 제국군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16만 1,000명을 제국군은 14만 7,000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겨울이 닥치면서 전투의 열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2.4.4.6. 세르비아 분할
1915년 12월, 숙원이었던 세르비아 정복이 현실화되자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불가리아 왕국세르비아제2차 발칸 전쟁 이후 차지했던 마케도니아 전역의 반환을 요구했다.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을 위한 통행로 확보가 주목적이었기에 이를 수락했고, 모라바(Поморавље) 능선을 경계로 세르비아를 분할했다. 1916년 1월 1일, 콘라트는 베오그라드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크로아티아 출신의 요한 폰 잘리스제비스 장군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어 1월 7일 열린 합동 장관 회의에서는 제국의 미래와 직결된 중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세르비아의 제국 편입 여부였다. 티서 총리는 세르비아 침공 당시 세르비아를 합병하지 않기로 한 헝가리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 제국 내 슬라브계 인구 증가로 인한 헝가리의 입지 약화를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콘라트는 티서를 편협하다고 맹비난하며, 제국의 발칸 지배력 강화를 위해서는 세르비아 합병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 세르비아 합병을 단행했다. 이 결정은 제국 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향후 제국의 안정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2.4.4.7. 트렌티노 공세
1916년 초, 독일 제국은 제국군 주력을 동부전선에서 철수시켜 서부전선에 투입하길 원했으나, 콘라트는 다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취약점을 포착한 그는 트렌티노 아시아고 고원에서 결정적 공세를 감행, 이탈리아 북부 평원을 장악하려 했다. 3월,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의 5차 공세가 실패하자 콘라트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40만 병력을 동원해 아시아고 방면을 공격하면 이손초 전선의 압박을 줄일 수 있고, 나아가 베네치아베로나를 점령해 이탈리아군을 포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팔켄하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쾨베시 제3군을 비롯한 발칸과 동부전선의 정예부대와 중포를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했다. 5월 15일 시작된 공세에서 제국군은 2,000문의 야포로 이탈리아군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산악지형에서는 포격이 눈사태와 산사태를 유발해 이탈리아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으로 진격이 지연되는 사이,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부대의 지연전으로 이탈리아 본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6월 4일, 핵심 철도까지 20마일 남짓한 거리까지 진출했으나 제국군의 기세가 꺾였고, 이탈리아군의 반격으로 원위치로 후퇴했다. 이 실패는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동부전선이 약화된 틈을 타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었고, 이탈리아군은 8월 고리치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겨울이 되어서야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2.4.4.8. 브루실로프 공세
브루실로프는 러시아군의 주력이 공세를 개시할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기회를 발견했다. 콘라트가 이탈리아 전선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동부전선에서 빼내면서 생긴 거대한 공백이었다. 게다가 초반 전투에서 제국군의 맹공에 대패한 이탈리아군이 황급히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미 자신의 군을 다른 러시아군보다 월등한 수준으로 준비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다른 러시아군의 준비가 미흡했음에도 브루실로프에게 단독 공세를 제안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6월 4일 새벽 4시 30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 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브루실로프는 기존 전술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꾸준한 항공정찰로 적의 참호선 취약점을 미리 파악했고, 남부는 정오까지, 북부는 12시 30분까지 정확한 포격을 집중했다. 포격이 멈추자마자 러시아 보병이 제국군 참호로 돌진했고, 저녁 무렵에는 공격 지역의 모든 참호선을 장악했다. 제국군은 예비 병력을 제대로 투입하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위기를 직감한 콘라트는 즉시 트렌티노 공세를 중단하고 팔켄하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3개 사단을 차출했지만,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을 모두 동부로 이동해야만 추가 지원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았다.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는 5개 사단을 급파하면서 제4군 사령관 교체도 요구했다. 6월 8일, 팔켄하인은 린징엔 휘하에 5개 사단을 코벨 근처에 집중시켰다. 플란처발틴의 제7군은 프루트강으로 후퇴했고, 부코비나의 수도 체르노비츠 북쪽의 교두보만을 겨우 지키고 있었다. 그마저도 6월 19일에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고, 이틀 후 세레트강으로 퇴각해야 했다. 6월 23일까지 제국군의 포로만 20만 4천 명에 달했다.

브루실로프는 공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철도 교통의 요충지인 코벨 탈환에 전력을 기울였다. 러시아는 동원 가능한 병력은 충분했으나, 산업화의 미비로 철도망이 부실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철도를 통해 대규모 증원을 할 경우 불리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7월 24일 시작된 코벨 전투는 2주 만에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러시아군이 2배의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급히 차출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쳤다. 특히 독일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브루실로프의 특기인 정밀 포격과 충격부대 운용이 불가능해진 것이 결정타였다.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러시아군이 쥐고 있었으나, 코벨 전투의 패배로 초기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더구나 베르됭 전투가 7월에 종료되면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방어로 전환하고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쏟아부었다. 러시아군은 6월 4일 이후 100km나 진격했으나, 전선이 돌출부를 형성하며 오히려 후퇴를 강요받았다. 페트로그라드 지휘부는 북부전선의 예비전력을 투입하며 공세를 독려했으나, 낙후된 철도망으로 인해 효과적인 병력 재배치가 불가능했다.
7월 26일, 팔켄하인은 테셴의 프리드리히 대공 사령부를 방문해 동부전선 통합 사령부 설치를 요구했다. 다음날 베트만홀베크,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와 콘라트의 회의 끝에 힌덴부르크동부전선 최고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독일의 지원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던 콘라트는 이에 반발했으나, 결국 지휘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 남부군과 제7군은 카를 대공과 AOK 통제 하에 두는 조건을 관철시켰다.

8월 7일, 러시아군은 다시 한 번 코벨 점령을 시도했으나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혔다. 브루실로프는 더 이상의 공세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이틀 만에 작전을 중단했다. 그는 계속해서 상부를 설득해 9월 20일 마침내 공세를 완전히 종료했다. 동부전선만 놓고 보면 브루실로프 공세는 러시아의 대성공이었다. 전선을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밀어내 안전한 방어선을 확보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협상국 참전까지 이끌어냈다. 이 공세의 영향으로 독일은 8월 29일 에리히 폰 팔켄하인 대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 힌덴부르크는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병참장군으로 발탁했다. 기존 전술의 틀을 깬 브루실로프의 혁신적인 작전은 빛났지만, 러시아가 치른 대가 또한 엄청났다. 5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40만 명의 전선군 예비병력 중 4분의 3이 소모되었다. 브루실로프 본인은 온갖 훈장과 페트로그라드 궁정의 축하를 받았으나, 막대한 인명 손실에 비해 전략적 목표 달성이 미흡했다고 자평했다. 결과적으로 이 공세의 과도한 인적 손실은 러시아 혁명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8월 12일까지의 전과를 보면 동맹군에서는 장교 8,255명과 병사 37만 153명이 포로가 되었다.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합하면 동맹군은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만 5천 제곱마일의 영토를 잃었다.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한 이후 10개 사단을 추가로 잃은 제국군은 브루실로프 공세로 동부전선이 초토화되었고, 이후 콘라트는 독일 제국에 의해 점차 전선에서 소외되어갔다.
2.4.4.9. 루마니아 전선
평소에 루마니아 왕국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것은 바로 트란실바니아였다. 루마니아는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힘이 한계에 달했으니 트란실바니아를 탈취할 기회가 왔다고 보고 8월 27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부전선에 참전한다. 모든 루마니아군 사단들이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해 들어갔다. 당시 트란실바니아에는 극소수의 제국군만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는 며칠 만에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한 후 도브루자의 방어를 강화할 심산이었다.

루마니아군은 9월 6일까지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지만, 동맹군은 신속하게 반격에 나섰다. 베르됭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힌덴부르크에게 총사령관직을 넘겨준 팔켄하인이 제9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콘라트는 명목상 최고 지휘관이었지만, 독일의 제9군 사령부가 실질적으로 전선을 도맡았다. 그래도 콘라트가 짜놓은 전략을 독일이 따르면서 루마니아의 침공을 저지하고 역으로 루마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루마니아의 식량과 목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전을 차지한다는 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내 전선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정작 승리는 사령부나 군대의 위신을 되살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일이 큰 수혜를 입게 되었다. 콘라트에게 설상가상으로 이 전선에서 복무하던 맏아들 쿠르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았던 쿠르트는 세 번째로 복귀해서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였는데 동일한 폐 질환이 재발하는 바람에 후방으로 이송해야했다. 의 군 병원에서 처음 치료를 받았으나, 의사들의 판단으로는 전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안전하게 치료하기에는 그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결국 콘라트는 중립국이자 휴양지로 유명한 스위스의 아로자(Arosa)로 쿠르트를 보내 요양하도록 조치했다.

루마니아 전쟁 기간 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시 대비책의 일환으로 카를 대공에게 콘라트의 대안 후보를 제안해달라고 요청했다. 카를 대공은 전쟁 중 성과를 냈던 장성들을 위주로 후보군을 검토했는데, 오이겐 대공, 그의 참모장 알프레트 크라우스, 제14보병사단장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제6군단장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유능한 인재들이었음에도 콘라트의 지위에 걸맞은 인물은 없었다. 독일이 콘라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헬름 2세는 이미 콘라트를 프로이센 보병 의례 연대장으로 임명했고, 장차 원수(Generalfeldmarschall)의 지위도 수여하겠다고 했다. 콘라트는 팔켄하인,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를 대공이손초 전투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황제에게 콘라트를 해임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대신 AOK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총사령관을 프리드리히 대공에서 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하여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2.4.4.10. 참모총장에서 야전사령관으로
11월 17일, 콘라트는 쇤브룬 궁전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마지막 알현을 가졌다. 황제는 평소와 같은 관심으로 전황 보고를 경청했으나 한 번 졸기도 했고 전보다 훨씬 약해진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항상처럼 친절했으며, 입장과 퇴장 시 모두 일어나 맞이하고 배웅하며 악수를 나눴다. 나흘 후인 11월 21일 황제가 서거했다. 콘라트는 황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노황제의 서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11월 25일, 새 황제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k.u.k. Generalfeldmarschall)로 진급시켰다. 이는 비(非)합스부르크 가(家) 군인으로서는 47년만이며, 현역 군인으로서는 57년만의 첫 승진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카를 1세는 콘라트의 권한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12월 2일 프리드리히 대공을 총사령관 대리로 강등시키고 직접 총사령관이 되었다.

새해가 되자 육군 최고 사령부(A.O.K.)를 테셴에서 바덴바이빈으로 옮겼는데, 이는 황제가 총사령관으로서 사령부를 통치하기에 편리한 위치였다. 콘라트는 독일 최고사령부가 있는 플레스 성(Schloss Pleß)과의 거리를 이유로 반대했다. 콘라트가 독일에 대한 종속을 '필연'으로 받아들인 반면, 카를 1세는 군의 독자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새 본부에서는 여성의 존재가 금지되어 콘라트는 두 번째 부인 지나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52] 이는 "자유사상가" 참모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같은 보수적인 국가의 고위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1917년 1월 22일,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독일 제국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인의 참여를 지지하는 장관들과 뜻을 같이했다. 그는 이미 1916년 8월부터 이 작전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 결정이 미국의 중립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진화론 관점에서 그는 '앵글로색슨' 강대국인 미국이 전쟁에서 영국동맹국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콘라트는 미국을 이미 삼국 협상의 침묵하는 동반자로 보았고, 실제로도 식량과 보급품의 공급자로서 이미 전쟁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장군들과 제독들처럼 미군이 1918년 이전에 서부전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콘라트의 의견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사령관 안톤 하우스 대제독의 의견과 일치했으나, 카를 1세와 부리안의 후계자인 외무장관 오토카어 체르닌 백작만이 새로운 정책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 콘라트는 카를 대공에 대해 '그는 내가 큰 기쁨으로 모실 군주'라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보다 훨씬 더 마음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17년 초 첫 몇 주 동안 콘라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년 반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수행을 지휘했고, 프란츠 요제프 1세프리드리히 대공만이 그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독일 최고사령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29세의 젊은 황제가 실제로 군사적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거의 매일 카를 1세와 다투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덴바이빈의 새 본부로 이전한 후 콘라트는 지나를 단 두 번 만날 수 있었는데,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2월 말의 방문은 그녀의 38번째 생일과 겹쳤다. 방문 몇 시간 후 프리드리히 대공이 찾아와 카를 1세남티롤 공세의 실패를 이유로 콘라트를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교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황제는 콘라트가 티롤의 제10군과 제11군으로 구성된 집단군[53]의 사령관으로서 현역에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콘라트는 처음에는 은퇴를 요청하려 했다. 지나는 모든 전선에서 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지금 은퇴한다면 이후 발생할 일들로 인해 그의 명성이 손상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콘라트도 이에 동의했다. 다음 날인 2월 28일 그는 카를 1세를 만나 은퇴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제복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떼어 콘라트에게 수여하며 설득했고, 이후 콘라트는 숙소로 돌아가 필수품만 챙겨 지나와 함께 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황제의 군사비서실장 페르디난트 폰 마르테러(Ferdinand von Marterer) 남작이 콘라트의 자크인가세(Jacquin-Gasse) 아파트를 방문해 군집단 사령관직을 수락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전달했다. 콘라트는 전날 황제와의 대화를 언급했으나, 마르테러는 이것이 직접적인 명령이므로 따라야 한다고 했다. 콘라트가 서면 명령을 요구하자 마르테러는 바덴바이빈으로 돌아가 이를 준비했다. 그 동안 콘라트는 극도로 격앙된 상태였고 지나와 몇몇 친한 친구들이 그를 위로했다. 황제에 대한 불복종도 고려했으나, 파울 슐츠(Paul Schulz)와 전 부관 프란츠 푸츠(Franz Putz)의 조언으로 결국 군집단 사령관직을 수락했고, 이는 지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3월 1일에 콘라트는 참모총장에서 해임되었다. 3월 2일,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콘라트 군집단 원수(Heeresgruppe Feldmarschall Conrad)로 임명하였고 공식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하였다. 콘라트는 중간에 1년동안 육군 감찰관에 있었던 시절을 제외하고 1906년부터 1917년까지 총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참모총장에 재직했었다. 1906년에는 별다른 열의 없이 그 자리에 앉았고, 6년 후에는 마지못해 돌아왔다. 콘라트는 전략가가 아닌 전술가로 명성을 얻었고,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선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본부에서 펜대나 굴려야 했던 참모 업무에 대해선 애정과 열정이 거의 없었다. 1914년 러시아 전선에서의 첫 패배와 그의 셋째 아들 헤르베르트의 죽음으로 그는 망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에 패배한 후 신경쇠약을 겪고 직위를 잃은 그의 동맹 몰트케와는 달리 콘라트는 계속 복무했다.

다만 콘라트가 참모총장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군대를 지배했고, 결과적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군대는 콘라트의 군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여전히 그의 사상에 깊이 물든 사람들의 손에 있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와 1890년부터 1892년까지의 기수 중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생도들 중 49명이 1917년과 1918년 사이에는 소장 이상의 장성이 되어있었고, 부대 사령관이나 참모부에서 콘라트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 수많은 장교들도 여전히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옛 군주가 살아있는 동안 콘라트는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서 직위를 유지했으며,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에 그가 당면한 임무를 수행할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프리드리히 대공이 계속해서 그의 판단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54]

콘라트의 후임으로는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로 결정되었다. 콘라트는 아르츠에 대해 부대 사령관으로서는 좋은 인물로 고려는 했었지만 참모총장으로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츠도 콘라트가 누렸던 권한을 누릴 수 없을 것이었다. 참모총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광범위한 인사개편이 이루어졌다. 콘라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트만(Rudolf Kundmann, 1869-1934)과 나머지 부관들을 포함하여 일반참모의 많은 부하들이 직위를 잃었다. 특히 여기에는 콘라트가 AOK의 부사령관이자 자신의 후계자로 간주했던 요제프 메츠거 소장[55]도 포함되어 있었다.

콘라트의 해임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그의 친구 슐츠는 '이 불쌍하고 불운한 국가와 그 모든 국민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고, 체르닌 외무장관은 '공동 작업'이 끝난 것을 유감스러워하며 자신이 해임에 관여했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에서는 치타 황후가 콘라트를 개인적으로 싫어했거나 그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겨 해임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콘라트 자신은 지타 황후와 가톨릭 교회, 그리고 외교관들, 장군들, 궁정의 여러 적들을 탓했다. AOK 주재 독일 연락장교였던 아우구스트 폰 크라몬(August von Cramon) 장군은 전선이 비교적 조용하고 큰 패배 직후가 아닌 시점에서의 시기를 봤을 때 콘라트의 해임은 군사적 이유보다는 '개인적' 이유가 더 컸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독일 장군 한스 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대한 평가에서 콘라트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그는 군대가 '비합리적으로' 사용되었고, 지휘가 너무 '체계적'이며 하급 장교들의 주도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특히 병력이 전투를 위한 훈련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해임 이유는 콘라트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카를 1세는 1918년 4월 식스투스 사건으로 드러났듯이, 1917년 동안 자신의 처남인 부르봉-파르마의 식스투스(Sixtus of Bourbon-Parma) 왕자를 협상국과의 개인 특사로 이용하여 독일 제국과의 동맹을 깨고 전쟁에서 이탈하려 했다. 카를은 전쟁의 부담으로 다민족 제국이 내부 붕괴를 겪기 전에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916년 여름의 패배 이후 콘라트는 더 이상 이중제국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독일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독일이 승리하거나 싸움을 멈추기로 결정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체념했다. 자국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참모총장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35년 후, 콘라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오스카어 레겔레(Oskar Regele, 1890-1969)는 그의 해임을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를 해임한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 당시의 '여론'을 판단하기 어렵기에, 이 결정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맥아더처럼 콘라트도 자신의 총사령관과 지내기 어려웠고 주요 정치인들의 신뢰를 잃었다. 또한 그는 전쟁에 반대하게 된 지식인들, 특히 군 내부의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같은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에드워드 팀스(Edward Timms, 1937-2018)가 지적했듯이, 크라우스는 전쟁 전부터 《Die Fackel》에서 콘라트를 풍자했다. '인류의 마지막 날들'과 다른 전시 저작들에서 크라우스는 장교 계급의 허세를 보여주는 전형으로 허구의 인물이 아닌 콘라트를 직접 사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크라우스와 다른 문인들이 콘라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콘라트는 훈장, 메달, 허례허식을 거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비록 이 '종말론적 풍자가'와 그의 동료들은 참모총장과는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활동했지만, 그들은 같은 지적 전통에서 형성된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했다. 콘라트는 단지 다른 이들의 비관주의를 입증하게 될 전쟁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줬을 뿐이었고, 영향력 있는 문화계 인사들보다 군사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맥아더처럼, 콘라트도 의심스러운 지휘 결정들을 내렸고,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나 대다수 민간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지 않았다.

국내 전선에서는 많은 영예가 그의 몰락을 완화시켜주었다. 1917년 3월에만 해도 그는 빈 공과대학의 공학 박사 학위, 브륀의 프란츠-요제프-도이체 대학의 공학 박사 학위, 프라하 독일대학의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는 이전에 체르노비츠 대학 법학부와 인스브루크 대학 의과대학에서 받은 명예학위에 더해진 것이었다. 빈 공과대학의 총장이었던 막스 밤베르거(Max Bamberger, 1861-1927) 교수는 콘라트가 야전 전신과 전화, '모든 구경의 포', 항공기, 철도 개선 등 기술 발전을 장려한 공로를 치하했다. 카를 1세는 이후 콘라트에게 은군사봉사훈장과 오스트리아 상원의원 종신직을 수여했다. 1917년 후반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단의 총장이 되었고 두 번째 금군사봉사훈장을 받았다.

1917년 3월 11일, 콘라트는 이전 사령관이었던 오이겐 대공을 대신해 새로운 보직을 맡게 되었고, 집단군 사령부는 보첸에 위치하였다. 3일 후 그는 편안한 숙소를 마련했다. 콘라트는 AOK에서 벗어나 '음모의 둥지, 비겁함과 아첨꾼들에게서 벗어나게 되어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새 임지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는 제4카이저예거연대를 시찰하기 위해 폭설 속을 썰매를 타고 전선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아첨하고 기어오르려는 아부꾼들이 아닌' 진짜 군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고, 전선을 자주 둘러보았다. 뤼디거 조이터 폰 뢰첸(Rüdiger Seutter von Lötzen, 1873-1940)은 AOK에서 함께했던 유일한 참모장교로서 그의 새로운 참모진에 합류했다. 콘라트 집단군은 제10군과 제11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0군사령관으로는 전쟁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제국상급대장이, 제11군사령관으로는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보병대장이 맡았고 둘다 콘라트의 지휘를 받았다. 그의 오래된 심복인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이 제10군 소속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들어오게 되었다. 참모장 쿤트만도 제1군단사령관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합류하였다. 또한 차남 에르빈이 티롤에 주둔하고 장남 쿠르트가 스위스 근처에서 요양하는 것은 콘라트의 심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티롤에서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에곤과 연락이 끊긴 일이었다.

봄이 시작되면서 콘라트가 남티롤 방면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이탈리아 왕국군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증오와 공격적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다음 주요 공세가 이손초강이 아닌 알프스에서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다. 콘라트는 티롤에서 이탈리아군을 공격하기 위한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카를 1세의 AOK는 오히려 이탈리아 전선에서 병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점진적으로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1에 달하는 병력이 보로예비치 집단군을 보강하기 위해 실제 다음 공격이 시작될 이손초강으로 파견되었다. 콘라트는 자신이 실제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탈리아군의 주의를 티롤 쪽으로 끌어두는 카를 황제의 정교한 전략적 기만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낙담하였다.

다행히 1917년 3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비교적 여유가 생겼고, 이를 통해 일부 부대를 이손초강과 트렌티노 전선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군의 사기는 이미 크게 저하되어 있었고, 특히 비(非) 독일계 병사들은 전쟁 지속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8월, 카를 1세빌헬름 2세에게 동부전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대들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동부에서의 전투가 줄어들면서 합스부르크 사단의 수가 이탈리아 전선의 3배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카를 1세는 독일의 지원을 중포병으로만 제한하고 자체적인 공세를 계획했으나, 독일 최고사령부는 이탈리아군에 승리를 거두며 체면을 세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질 것을 우려했다. 작전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힌덴부르크팔켄하인의 뒤를 이어 독일군 참모총장이 된 루덴도르프는 중포병 외에도 7개 보병사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부대에는 에르빈 롬멜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56]

1917년 여름, 콘라트의 축소된 집단군이 수행한 가장 큰 전투는 방어전이었다. 6월 9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몬테 오르티가라(Monte Ortigara) 전투에서 그의 43개 대대는 165개 대대 규모의 이탈리아 제6군 공격을 저지하고 23,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를 제외하면 콘라트는 이손초에서 벌어진 10차 전투(5월-6월)와 11차 전투(8월-9월) 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7월에 러시아 임시정부가 동부 갈리치아에서 이른바 '케렌스키 공세'를 개시했으나, 초기 침투 규모는 전년도의 '브루실로프 공세'에 미치지 못했고, 제국군의 반격으로 러시아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2.4.4.11. 카포레토 전투
1917년 10월 24일, 오토 폰 벨로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14군이 이손초강 상류의 카포레토(현재 슬로베니아의 코바리드) 마을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 '독일' 제14군은 실제로는 15개 사단 중 9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단이었고, 이때 에르빈 롬멜 소위도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벨로의 공격 계획은 콘라트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콘라트는 1908년 참모부 전적지 답사 당시 카포레토 북쪽 7마일의 플리츠(보비츠)와 남쪽 8마일의 톨메인(톨민) 사이 구간에서 이손초강을 돌파하는 공격 계획을 구상한 바 있었다. 1917년 1월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와의 마지막 회동에서 이 계획을 다시 제안했으나, 독일군은 카를 1세가 이탈리아 공세를 요청할 때까지 이를 보류해두었다.

10월 24일의 공격은 이탈리아 전선에 20마일 너비의 돌파구를 만들어냈고,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거의 완전한 붕괴 직전까지 갔다. 공세는 2주 동안 계속되어 11월 7일 피아베강에 도달했고, 이때서야 이탈리아군영국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맹국은 7만 명의 사상자(전사, 부상, 포로)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전사자 4만 명, 부상자 3만 명, 포로 29만 4천 명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또한 3천 문의 야포, 3천 정의 기관총, 2천 문의 박격포와 막대한 양의 탄약 및 장비를 잃었다. 이렇게 카포레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향후 11개월 동안 거의 독일군의 도움없이 피아베 방어선을 지켰고,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는 11월 30일부터 벨로의 독일군 부대들을 서부전선 증원을 위해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혼란을 이용하기 위해 콘라트는 11월 9일 티롤에서 자체 공세를 개시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루덴도르프보로예비치에게 피아베 전선의 병력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콘라트의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12월 5일까지 콘라트군은 바사노(Bassano)에서 12마일 거리까지 전진했고, 1916년 5-6월 트렌티노 공세 당시 마지막으로 점령했던 몬테 멜레타(Monte Meletta)도 재탈환했다.
2.4.4.12. 개인적 비극과 사상적 전환
그 해 말까지 러시아루마니아는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이후 카를 1세가 제국의회를 다시 소집하자, 콘라트는 큰 관심을 가지고 양원의 절차를 지켜보았다. 특히 그는 자신과 전 테셴 AOK의 기록을 비판한 레온 폰 빌린스키 전 재무장관의 상원 연설에 날카롭게 반응했다.[57] 빌린스키는 특히 콘라트의 전략적 판단과 전시 지휘를 강하게 비판했다. 콘라트는 귀족의 일원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 현재 전선에 있어 직접 의회에 참석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전보로 공식 반박을 보냈다. 그는 구 AOK의 유산으로 러시아군의 붕괴와 "폴란드의 해방"을 들었으며, 이는 모두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달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8년 초, 개인적인 큰 비극이 콘라트의 우울함을 더욱 깊게 했다. 스위스 아로자에서 요양 중이던 장남 쿠르트의 수행원들은 그가 "심한 향수병"을 앓고 있으며 봄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고 보고했다. 쿠르트의 상태는 사망 5일 전 악화되었으나, 의사들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콘라트에게 알리지 않았다. 1918년 1월 10일, 그의 31번째 생일에 쿠르트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3일 후 을 방문하고 보첸으로 돌아온 콘라트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콘라트는 그의 유해를 빌마와 콘라트의 아버지, 그리고 누이 베티가 안식하고 있는 의 히칭 묘지로 이송하도록 조치했으며, 1월 18일 장례식을 위해 보첸을 오가는 야간 열차를 탔다. 콘라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쿠르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 소식이 무섭게 나를 놀라게 했다"고 고백했다. 이 충격은 3년 전 자신이 지휘하는 작전에서 전사했던 삼남 헤르베르트의 죽음만큼이나 컸다. 헤르베르트는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고 둘은 좋은 부자관계였다. 그가 죽은 후 콘라트는 그를 끔찍하게 그리워했고, 아무에게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과 고통을 느꼈다.

대조적으로, 콘라트와 쿠르트의 관계는 장남이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이후 계속 폭풍이 몰아쳤다. 물론 사이가 결코 소원해진 적은 없었지만, 전쟁 중 요양 기간에 쿠르트가 작성한 개인적인 회고록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해하거나 감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결국 쿠르트는 부자 간의 의견 차이를 진정으로 화해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콘라트는 지나에게만 이러한 깊은 감정들을 털어놓았을 뿐, 자신의 아들들과는 이런 개인적인 감정을 결코 나누지 않았다. 쿠르트의 죽음 이후, 콘라트의 사회진화론적 수사는 더욱 종말론적이 되었고, 1916년의 패배 이후 그가 채택한 독일 민족주의 정서는 더욱 강화되었다. 1918년 2월, 전직 참모 장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콘라트는 전쟁을 "독일의 존재를 위한 투쟁"이라고 묘사했다. 콘라트는 또한 오스트리아의 독일 국민 연합(Deutschnationalen Verein)과도 관계를 맺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9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국원수들 중 유일하게 콘라트만이 이러한 대독일주의적 감정을 표현했다.

주재 바이에른 대사 하인리히 폰 투허 남작(Baron Heinrich von Tucher, 1853-1925)은 1914년 러시아 전선에서의 첫 패배 이후 콘라트를 테셴에서 방문했을 때, '엄격한 체제'와 '독일과의 긴밀한 연합(Anschluss)'만이 오스트리아를 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1866년 이후 프로이센의 지배 하에서 바이에른이 이룬 '놀라운 진보'를 예로 들며, 이는 '프로이센과의 연합이 바이에른의 자율성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콘라트는 특히 오스트리아를 바이에른과 비교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체코 민족주의의 위협과 1916년 여름의 패배들로 그는 독일과의 더 긴밀한 '연계(Angliederung)'가 '필연'이며 제국 내 '슬라브계 요소'의 권력 장악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이 '체코 군대의 태도'와 체코 국민들의 전반적인 反 합스부르크 정서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다고 보았으며, 프란츠 요제프 1세 사후 체코 민족주의자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이라 예측했다.

독일과의 연계는 헝가리의 독립이나 더 큰 자치권, 그리고 '공동군의 분할'을 의미했다. 이는 콘라트로 하여금 이중 제국의 붕괴를 피할 수 없다고 보게 만들었고, 그는 이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이는 다국적 이익 공동체(Interessenstaat)로서의 이중 군주제 실행 가능성에 대한 그의 전쟁 전 믿음이 크게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때 콘라트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die großdeutsche Irredenta)을 자신이 증오하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Irredentismo italiano)들과 동일하게 가혹한 용어로 비판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더 긴밀한 연합을 맺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루덴도르프와의 우호적 관계로도 이어졌는데, 이 관계는 전후까지 지속되었다. 루덴도르프는 1919년 가을 콘라트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 독일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이는 둘이 공유하게 된 대독일주의적 관점을 반영했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非기독교적 세계관을 공유했으며, 특히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토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대와 사회가 보여준 엄격한 규율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첸에서 그는 러시아의 소식을 면밀히 관찰했고, 볼셰비키 혁명과 1918년 3월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동방의 시대적 사건들'이라 불렀다. 이 평화조약으로 러시아루마니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했고, 콘라트는 이를 보며 유럽이 이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종말과 함께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이후 콘라트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물결이 서방을 덮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했고, 적어도 한번은 지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열광을 꾸짖기도 했다.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한 콘라트의 현대주의적 세계관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르디난트 대공, 알로이스 폰 에렌탈 등 진정한 보수주의자들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중요했던 종교 문제에 있어, 콘라트는 신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신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군인의 의무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십계명에 나오는 구절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군인으로서 나는 그를 죽여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를 전체적으로 위선이라고 본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생존을 위한 투쟁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완화시키기 위한 규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전통에 대한 그의 공공연한 경멸에서부터 귀족들의 대표적인 취미인 사냥을 싫어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인적 신념들은 그가 참모총장이라는 내부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외부자로 남아있게 만들었다.
2.4.4.13. 제국의 붕괴와 무력한 은퇴
1918년 4월 이른바 '식스투스 사건'으로 카를 1세의 비밀 평화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은 지금까지 가장 큰 균열을 경험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충격적인 폭로를 한 후, 합스부르크 황제는 그 소식을 부인했고 빌헬름 2세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카를 1세는 콘라트를 바덴으로 소환하여 자문을 구했다. 콘라트는 황제의 부인에 대해 진실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황제의 입장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분리 평화를 추구하는 동기를 이해한다고 표명했다. 독일과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두 제국의 운명은 이제 연결되었고 모든 차이를 넘어서 '함께 진행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 달 카를 1세가 스파에서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독일은 동맹국 간의 구속력 있는 군사 협정과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또 다른 공세를 요구함으로써 카를 1세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5월 12일 카를 1세는 예비 군사 협정에 서명했고, 다소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공세에도 동의했다. 전선에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1900년생 젊은이들의 징병을 승인했다. 콘라트와 대부분의 장군들은 새로운 공세의 전망을 환영했고, 새로 징집되는 병사들 대부분이 17세 소년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고 1918년 3월에 시작된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세가 성공적으로 보이면서, 남부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콘라트는 1916년 실패한 트렌티노 공세의 기본 계획을 다시 제안했다. 당시 알프스 돌출부에서 아드리아해로의 진출이 날씨와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 때문에 실패했었지만, 이번에는 여름에 콘라트가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하지만 보로예비치카를 1세에게 다른 조언을 했다. 독일이 협상국과 휴전에 동의할 날을 대비해 평화 회담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세가 필요하다면 피아베강을 건너 이탈리아군 본대와 맞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카를 1세와 그의 참모들은 가용 병력을 양쪽에 나누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콘라트는 25개 보병사단을 요청했으나 17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만을 배정받았다. 그나마 포병 지원도 보로예비치의 2,500문에 비해 훨씬 적었다. 게다가 AOK가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을 스위스 국경 근처 티롤 전선 서쪽 끝의 예비 공격에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병력은 더욱 분산되었다. 메츠거는 토날레(Tonale) 고개를 통해 롬바르디아로 진격하기로 했으나, 이 잘못 구상된 작전은 시작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6월 15일 콘라트와 보로예비치피아베강 전선에서 1차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군대는 보급과 물자가 형편없는 상황에 대부분의 부대는 적절한 포병 지원 없이 공세를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군은 첫날 성공을 거두었다. 콘라트 집단군은 비첸차 (Vicenza) 지역에서 트렌티노 고원능선을 따라 양면공격을 시작했다. 반면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피아베강 지역을 따라 총공격을 가했다. 보로예비치 집단군이 피아베강을 가로질러 돌진하여 15마일 너비의 적 전선에 구멍을 뚫는 처음 몇 시간 동안 콘라트는 알프스 산맥에 자리를 잡았고, 1만 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콘라트의 진격은 곧 이탈리아군, 영국군, 프랑스군 부대를 상대로 좌절되어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2가 다시 그들의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증원군이 균열을 봉쇄하는 사이 동쪽의 보로예비치 집단군의 침투는 겨우 5마일의 깊이에 도달했다.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선제포격과 촘촘한 방어선 대응하였다. 결국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교두보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다음 날 보로예비치의 두 번째 싸움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실패했으며, 강둑에 약간의 교두보를 만든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만명이라는 대량의 전사자를 포함해 1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결국, 6월 19일, 아르만도 디아츠는 이탈리아군에게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격을 명령해 강둑의 교두보를 탈환하면서 그 다음 날인 6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피아베강 도하 철수가 명령되면서 전체 공세가 포기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큰 도박은 또다른 재앙으로 끝났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군대는 전사자, 부상자, 포로 모두 합쳐 15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중 거의 절반인 7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8만 4천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공세의 실패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려 더 이상의 공격 작전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런 패배를 당했음에도 다행히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진격하지 않았고,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이탈리아군과 반격에 맞서 간신히 원래의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는 겪은 손실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었고, 더구나 6월 25일 카를 1세힌덴부르크의 명령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대를 서부전선 증원을 위해 이동시키는데 동의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는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7월 15일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전세가 기울어진 뒤였다. 콘라트의 차남 에르빈도 같은 사단의 참모장교로 복무했고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끝마쳤다.

실패한 공세의 책임을 물어 카를 1세는 희생양을 찾았다. 제국의회가 7월 16일 재개될 예정이었고, 정부는 실패한 공세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콘라트의 이전 공세들마저 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든 카를 1세 자신의 AOK가 비난받아 마땅했음에도, 그는 콘라트나 보로예비치 둘 중 하나를 해임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제국을 보존하려는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카를 1세는 정치인들의 불만족과 남슬라브인들의 충성심 상실을 우려해 보로예비치의 해임을 꺼려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폰 마르테러(Ferdinand von Marterer) 장군의 조언에 따라 콘라트의 해임을 결정했다.

7월 11일 콘라트는 수도로 소환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3일 후 카를 1세 북쪽 에카르트사우 궁(Schloss Eckartsau)의 관저에서 직접 이 소식을 전했다. 이 마지막 만남에서 콘라트는 암울한 군사 상황을 평가하며 '군대는 방어 진지를 지킬 것이지만, 더 이상의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의 해임은 다음 날인 7월 15일 월요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카를 1세의 공식 발표문은 마치 콘라트가 이 조치를 주도한 것처럼, '은퇴에 대한 당신의 거듭된 요청을 수락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콘라트를 해임하면서 카를 1세는 그에게 근위대 총사령관이라는 의례적인 직책을 제안했다. 백작도 1906년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 이 직책을 받았었다. 콘라트에게는 이 명예직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거절을 고려했으나, 지나와 전화 통화 후 그녀의 조언에 따라 수락했다. 이후 보첸으로 돌아가 크로바틴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곧이어 카를 1세의 편지로 세습 백작 작위가 수여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는데, 이는 오히려 콘라트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저널리스트 카를 프리드리히 노바크(Karl Friedrich Nowak)에게 이러한 것들에 '절대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다'고 말했고, 자신이 '은퇴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해임당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근위대 총사령관으로서 콘라트는 형식적으로는 전쟁 종료 시까지 현역으로 남아있었다. 티롤 지휘권에서 해임된 직후 그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 이후 1918년 1월 18일 아들 쿠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한 하루를 제외하고는 계속 임무 수행 중이었다는 점을 들어 4개월의 휴가를 신청했다. 카를 1세는 11월 15일까지 어떠한 임무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를 승인했고, 그 기간 동안 콘라트의 오랜 친구 단클이 임시 근위대 총사령관직을 수행했다.

7월 중순 콘라트는 아내와 함께 보젠을 떠나 에서 며칠을 보낸 후, 예전에 거주했던 필라흐(Villach)에서 은둔했다.[58] 9월 초, 서쪽의 베르됭에서 복무중이던 메츠거는 독일군의 빈약한 무기와 지친 상태가 1915년 당시의 '카르파티아의 겨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기시킨다며 독일 제국의 붕괴를 예언하는 편지를 보냈다. 콘라트를 방문하는 사람은 친인척과 가까운 지인들뿐이었는데, 여기에는 사별한 아내의 동생이자 제55보병사단장인 아우렐 폰 레 베아우(Aurel von Le Beau, 1866-1922)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를 1세가 주최한 무도회에서 콘라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무공훈장, 2급 무공훈장, 제국의회 상원 종신회원권과 야전원수 지휘봉을 받았지만, 필라흐로 돌아온 후 이를 '코미디'라며 일축했다.

9월 20일, 콘라트 부부는 지나의 어머니가 있는 트리에스트를 방문했다. 6주 동안 아드리아해에서 수영을 하거나, 지나와 산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에 콘라트는 아름다운 아드리아해의 해변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10월 24일 이탈리아 전선제국군이 무너지자 북쪽으로 가는 도로와 철도는 후퇴하는 군대, 탈영병들, 난민들로 혼잡을 이뤘다. 10월 29일 콘라트는 트리에스트를 떠나 장모와 작별을 고했고, 아내와 함께 20시간을 기다린 끝에 10월 30일 으로 돌아왔다. 11월 4일, 이탈리아 왕국군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무너진 트리에스트를 점령했다.[59] 그리고 그 날에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임시 국민 의회는 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 레너가 초안 헌법을 채택했다. 2주 동안 제국 정부는 점차 붕괴되어 새로운 공화국에 권력을 이양했다. 한편, 콘라트와 지나는 혼란 속에서도 완전히 은둔하며 살았다. 전쟁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콘라트의 관심은 이제 그의 살아남은 두 아들들에게 돌아갔다. 1918년 10월 초,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메츠거 휘하에서 복무 중이던 차남 에르빈과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 중이던 막내 아들 에곤이었다. 다행히 두 아들들은 제국의 붕괴 이후 무사히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8년 여름, 유럽의 옛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고, 콘라트에게 중요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함께 사라져갔다. 콘라트는 현대적 군사주의와 전통에 대한 경멸로 처음에는 권력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공격성은 전쟁을 촉발시켰고 결국 자신이 쇄신하려 했던 군대와 제국 모두를 파괴했다.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인물들 중 상당수는 최후의 붕괴를 목격하기 전에 사망했다. 1918년 2월에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4월에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 10월에는 화가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와 에곤 실레가 세상을 떠났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암살자가 前 총리 티서 이슈트반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이는 그의 나라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기 며칠 전이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 빅토르 아들러는 그의 당이 승리의 순간을 맞이하여 합스부르크 군주제를 대체할 오스트리아 정부 수립을 돕고 있을 때 죽었다. 아들러는 1852년 콘라트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1918년 11월 11일 콘라트의 생일에 사망했다. 1918년 7월 해임 이후 콘라트 역시 때때로 죽음이 그처럼 자신을 방문해주기를 바랐겠지만, 그는 최후의 붕괴를 목격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1월 중순, 근위대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맡아야 할 때쯤에는 이미 황제도, 군대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없었다. 그의 공식 퇴역은 카를 1세가 퇴위한 지 3주 후인 1918년 12월 1일자로 기록되었다.

2.5. 말년과 죽음

10월 30일 의 남부역에 도착했을 때 푸츠가 플랫폼에서 콘라트 부부를 맞이했다. 2일 후 이탈리아 왕국군트리에스테를 점령하자, 지역 민족주의자들이 콘라트를 찾아 지나의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18년 11월, 콘라트는 출생지와 현재 거주지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화국 시민권을 선택했다. 공화국이 모든 귀족 작위를 폐지하면서 그의 세습 백작 작위는 4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콘라트의 이름도 기존의 귀족식 이름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Count Franz Conrad von Hotzendorf)"이 아닌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Franz Conrad-Hotzendorf)"가 되었다.

그는 이후 합스부르크 출신 장교들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주선하기 위해 설립된 자조 단체인 '전문 장교 협회(Berufsgagistenosenschaft)'의 창설을 지지했다. 또한 오스카어 자이스(Oskar Zeiss)[60] 대령이 이끄는 퇴역 군인 단체 "전면 전사 연합"(Frontkampfervereinigung)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독일에 있는 그의 동료들 중 일부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때, 콘라트는 정치 생활에 대한 열망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살아남은 아들들인 에르빈과 에곤은 상업학교(Handelsakademie)에 등록하여 사업 경력을 위한 재교육을 받았다.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대인스브루크를 점령했다. 콘라트 부부가 그곳으로 이사했을 때 군대는 여전히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비대의 장교들은 티롤러 호프(Tiroler Hof)에 살았다. 이탈리아 장교들은 콘라트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싫어한다는 평판을 분명히 하면서도 장교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이탈리아의 정책" 자체가 콘라트의 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의 문화, 이탈리아 사람들, 그리고 그들 나라의 자연미에 대해 가장 큰 감탄을 했다.[61]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콘라트 부부는 인스브루크 시내의 티롤러 호프 호텔에서 지냈다. 공화국이 전직 장성들에게 지급하는 연금이 빈약했고, 지나가 이혼 정산금으로 받은 한스 폰 라이닝하우스(Hans von Reininghaus)의 호텔 체인 주식 12만 크로네가 무가치해지며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모든 오스트리아인들처럼 전후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의 영향을 받았다. 호텔 아파트는 "두 개의 작은 방"이었지만 알프스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지나는 생애 처음으로 요리를 배워 식사를 준비했고, 콘라트는 설거지를 도왔다. 그는 인스브루크 대학 교수들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로마 철학자들에 대해 토론했고, 음악을 사랑했는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불의 마법(Feuerzauber)"을 좋아했다.

이후 콘라트는 인스브루크에 머물면서 노년을 보냈다. 그의 전쟁에 대한 견해는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원제와 민족 문제 해결 실패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지나의 회고에 따르면, 콘라트는 오스트리아독일과의 합병을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62] 그는 "나는 자유주의적 사고와 순수하게 독일 지향적인 군주 하의 군주제를 지지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일 지향성을 엄격히 유지하는 공화국을 선호한다"고 말했다.[6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체 전사자 수는 150만 명, 부상자는 190만 명, 포로는 120만 명에 달했다. 말년에 콘라트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에르빈은 콘라트의 쿠르트가 죽은 이후 사실상의 장남이었지만 37세의 그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64] 그의 개인적인 서류들은 지나에게 상속될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에는 막내 에곤의 아들인 그의 첫째 손자 프란츠에게 상속되기로 정하였다. 에곤은 손자 프란츠의 아버지로서 상속대리인을 맡았다. 콘라트의 사적 서신은 모두 에곤에게 갔고 이를 자유롭게 출판하거나 폐기하는 것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콘라트의 개인 소지품, 칼, 그리고 다른 군사 기념품들은 그의 손자 프란츠에게 남겨졌다. 콘라트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줄 작은 기념품들을 선택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들 중에는 보좌관 루돌프 쿤트만과 조이터, 편집 보좌관 프리드리히 플라처(Friedrich Platzer), 저널리스트 카를 프리드리히 노바크, 그리고 리처드 폰 스턴(Richard von Stern)이 포함되었다. 그는 장례식을 간략하고 바로 그저 간단한 묘비만을 요청했다. 그는 지나가 나중에 죽으면 자기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는 1921년 4월 17일 리콜라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회고록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지나에 따르면 이는 "우리가 굶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제적 이유였다. 리콜라 출판사는 인스브루크에 사무실을 제공했고, 콘라트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집필했다. 전 참모본부 장교인 프리드리히 플라처와 카를 자우스너(Karl Zausner)가 보조원으로 일했다. 첫 번째 권은 1906년부터 1909년의 시기를 다룬 676페이지로 1921년 10월에 출간되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472페이지의 두 번째 권은 1922년에, 1912년부터 1914년 6월까지를 다룬 815페이지의 세 번째 권은 1923년 초에 출간되었다. 956페이지 분량의 4권은 사라예보 암살부터 1914년 9월까지의 3개월을 다루었다. 여기서 콘라트는 독일마른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이미 동맹국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독일에서 논란이 되어 일부는 책을 보이콧했다. 한 달 뒤인 1924년 1월에 그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고, 그럼에도 1914년 10월부터 12월까지의 기간을 다룬 1007페이지 분량의 5권을 집필했다. 회고록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참모본부에서는 각 권을 완역했다.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에 콘라트의 막내 아들 에곤과 그의 부인 칸디다 "칸다" 폰 블라제코비치(Candida "Canda" von Blažeković) 부부는 콘라트에게 뜻깊은 선물을 주었는데, 바로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난 손자 프란츠였다. 이는 그들이 11개월 전에 콘라트에게 첫 손녀 엘리자베트를 선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콘라트는 회고록 작업을 중단하고, 대신 자신의 초기 경력, 즉 1878년부터 1882년에 이르는 보스니아 시기의 일기와 회고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원고는 베를린의 문화-정치출판사(Verlag für Kulturpolitik)에 판매되었다. 1925년 1월,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1924년 가을까지 완성하려 했던 계획을 1년 이상의 병으로 인해 이룰 수 없었다고 밝혔고, 또다시 안슐루스에 대한 호소를 포함시켰다. 실제로 담낭 질환을 지병으로 앓았던 콘라트는 1월 이후로 심각한 병세를 보였고, 1925년 8월 23일에는 폐 질환으로 쓰러졌다. 8월 24일 저녁에 콘라트는 지나와 도미노를 즐기고 몇 통의 편지를 구술했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의사가 숟가락으로 커피를 먹여주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습니다 - 제 인생에서 저는 항상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원했죠"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 결국 5번째 회고록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925년 8월 25일 정오독일 바트 메르겐트하임(Bad Mergentheim)의 병원에서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틀 후, 8월 27일 목요일 아침에 의 주요 신문사들은 그의 죽음을 호외로 냈고, 콘라트의 부고 소식을 접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그를 친애하는 동지였다며 애도하였다. 막내아들 에곤이 가족을 대표하여 아버지의 유해를 가지고 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파사우 국경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은 콘라트의 유해를 오스트리아 육군 의장대에게 넘겼다. 그곳에서 둘째형 에르빈이 에곤과 합류하여 아버지와 함께 으로 향했다. 기차는 린츠, 엔스(Enns), 멜크(Melk), 장크트푈텐에 한번씩 정차하여 지역 수비대의 장교와 병사들이 콘라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할 수 있었다. 8월 27일 오후, 기차는 마침내 종점 지역인 빈 베스트반호프 역(Wien Westbahnhof railway station)에 도착하였다. 역에는 공화국의 내각 장관들과 군 상층부 인사들, 그리고 크로바틴단클을 비롯한 콘라트의 옛 동료 장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은 9월 2일의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주관 아래 국장(Staatsbegräbnis)[65]으로 치러졌고 100,000명 이상의 조문객이 참석했다. 콘라트의 유해는 그가 사랑했던 삼남 헤르베르트가 묻혀있는 히칭 묘지(Hietzinger Friedhof)에 안장되었다. 1918년 말, 콘라트는 혼란 속에서도 헤르베르트의 유해를 이장하는 일을 주선했다. 1915년 공세로 렘베르크 인근의 헤르베르트의 묘지가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통제 하에 들어오자,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에게 헤르베르트가 3년 전에 졸업한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 부지 내에 그의 유해를 다시 묻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제국의 붕괴로 사관학교의 미래가 불확실해지자 계획을 변경하여 결국 비너노이슈타트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 묘지(Akademie-Friedhof)에 안장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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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는 동맹국 진영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대전 전체 인물들을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앙리 구로

콘라트와 같이 복무했던 전 동료 장성들에게 있어서 콘라트는 천재였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그의 추종자들은 콘라트를 사부아 공자 외젠에 비견된다고 자부하였다. 그의 공격적인 전투 교리는 군부 내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종전 후에도 세간에서는 그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에 헌신하여 적과 맞선 훌륭한 영웅이라고 인식했을 정도였다.

3.1. 지휘 스타일과 성격

콘라트는 매우 독특한 업무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참모부 작전실에서도 부관들과 함께 작전을 구상하기보다는 혼자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부관들은 매일 그에게 보고를 해야 했지만, 콘라트는 그들의 의견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조성이 부족했던지라 남들을 믿지 못했던 콘라트는 제국군의 모든 작전 계획들을 본인의 검토 및 승인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독일 제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다소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콘라트는 군부 내에서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다. 전쟁 대학 교수 시절 그에게 배운 49명의 장교들이 1917년에는 장성이 되어 있었고, 이들은 콘라트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군부의 고위직에서 그를 지지했다. 부하들과의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엄격하면서도 공정했으며, 나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장교들을 등용했다.[66]

3.2. 사상과 한계

콘라트의 세계관은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한 현대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이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르디난트 대공, 알로이스 폰 에렌탈과 같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군사 사상은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루드비히 굼플로비치(Ludwig Gumplowicz)와 구스타프 라첸호퍼(Gustav Ratzenhofer)와 같은 오스트리아의 선구적 사회학자들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는 인류의 발전이 초기의 '무리'에서 후기의 민족과 국가로 이어지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은 민족국가들과 소수 민족들은 생존을 위해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동맹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정당화했다. 그는 이중제국을 "순수한 민족적 이해관계가 아닌 일반적 이해관계를 통해 결합된 다언어 이익공동체(polyglot Interessenstaat)"로 보았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이 지구상의 모든 사건의 기본 원칙이라는 인식이 정책 결정의 유일한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기초"라고 주장했다. 그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달리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 아닌 "정치의 대체물"로 보았는데, 이는 대 몰트케 장군이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과 같은 저명한 군사 인물들과 공유한 견해였다. 그는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조건을 조성한 뒤에는 군인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콘라트는 전략가가 아닌 전술가로서의 전문성을 가졌기에, 대전략 분야에서는 쇼펜하우어다윈의 개념에서 가져온 그의 광범위한 세계관에 의존했다. 군대나 개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들도 냉혹한 생존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전장에서 방어적 자세가 결국 패배로 이어진다는 이유로 공격을 강조했던 것처럼, 국가도 국제 무대에서 주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필연적인 쇠퇴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먼저 이탈리아에 대한, 그 다음으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두 나라 모두에 대한 예방전쟁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콘라트는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한번은 콘라트가 다른 사람들을 너무 쉽게 신뢰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대공 자신의 회의적인 본능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부족은 1906년 이후 그가 순수하게 군사적인 세계를 벗어났을 때 더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민간 지도자들과 같은 상위 권력자들을 다루는 데 실패했고, 이는 그의 부하이거나 그에게 의존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둔 성공만큼이나 주목할 만했다.

3.3. 전쟁에서의 성과와 한계

콘라트가 짜놓은 전쟁 계획은 종종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실패를 거둔 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군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투에 나선 반면, 제국군은 무분별하게 패주할 뿐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그의 공세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실수의 결과는 전쟁 첫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그의 군대는 독일 제국군의 막대한 지원을 통한 전투에서만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점차 전쟁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67] 그가 참모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대부분의 주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68] 연달은 패배로 궤멸되어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대국적인 식견 자체는 인정을 받았다. 무척 뛰어난 전략적 식견에 비해서 실제 공적은 매우 뒤떨어졌던 셈인데, 사실 이는 약체화되고 불안 요소가 산재했던 제국군 전체의 상황 때문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짜놓은 공세 계획 등을 독일에게 넘길 뿐이었다. 비아냥받는 콘라트의 대공세 계획은 무의미하지도 않았던 것이, 팔켄하인의 소모전략의 경우도 결국 나중에 가서야 팔켄하인이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고 뒤늦게 대공세에 나서게 되었을 정도였다. 다만 뛰어난 군사전략적 식견과는 별개로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전략적 식견이 뒤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가 겪은 어려움들이 꼭 그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러한 문제들이 내포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콘라트는 결국 전쟁을 강행했고, 그 결과로 제국전쟁의 수렁텅이로 빠뜨린 점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3.4. 책임 회피와 정당화

콘라트는 제국의 패망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부터 1918년 사이 동원한 800만 명의 군인 중 150만 명이 전사하고, 190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20만 명이 포로가 된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재앙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방식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1918년 11월 제국 붕괴의 원인을 이원론과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실패로 돌렸으며, 페르디난트 대공과 함께 주장했던 "삼중제국" 개념(크로아티아가 지배하는 남슬라브를 포함한 제국의 세분화)을 채택하지 않은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또한 개전 초반 신속한 공세가 실패한 이유를 독일 제국의 군사적 지원 부족 탓으로 돌렸다. 그는 수년간의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이중전선에 대한 군의 준비와 지원이 부족했던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에도 자신은 단순한 '군사 전문가'일 뿐 어떠한 정치적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더욱이 그의 사회진화론적 사상은 이러한 책임 회피의 근거가 되었는데, 그는 전쟁의 결과를 단순히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이기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치부하며 개인의 책임을 부정했다. 한편, 콘라트는 이 전쟁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렀다. 콘라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 어린 시절 부모의 과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자신 또한 자식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 장성들이 겪었던 것[69]처럼 콘라트 또한 자식들을 잃은 큰 슬픔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장남 쿠르트가 복무 중에 과로로 인해 병을 얻었고, 스위스에서 요양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콘라트가 무척이나 예뻐했던 삼남 헤르베르트는 동부전선에서 전사했고, 막내 에곤은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그나마 차남인 에르빈만이 몸 성하게 전역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네 자녀 모두가 현역으로 복무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이를 전쟁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았다. 이는 그가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부각시키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전 초기 공세에 나섰던 6개의 가운데,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5개의 은 전부 실패를 겪었다. 참모총장이었던 콘라트가 직접 편성하고 인사 배치를 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마땅히 경질되어야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군부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강력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갈리치아 전투 당시 큰 실책을 저질러 패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제3군 사령관 루돌프 폰 브루더만을 비롯하여, 제4군 사령관 모리츠 폰 아우펜베르크, 제5군 사령관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 제6군 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등 이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책임을 돌리며 콘라트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다만 친구인 아우펜베르크까지 해임하는 것은 망설였으나, 독일 제국군프리드리히 대공의 압박으로 콘라트는 결국 아우펜베르크의 해임까지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갈리치아 전투에서위 패배를 시작으로 프셰미실 상실, 그리고 신속한 세르비아 점령까지 좌절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주요 임무들이 하나같이 대실패했다는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콘라트는 초기 공세의 실패에 대해서 독일의 지원 부족을 핑계로 대긴 했으나,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아남아 총사령관이 되었다면 자신을 총살했을 것이라며 이미 상황을 인지한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는 말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의 책임 회피에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초기 공세를 제외하고서 패배를 겪은 다른 전투들을 봤을 때, 콘라트가 온전히 책임을 지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의문 부호가 붙는다. 물론 초기에는 러시아 제국군에 밀려 패배를 겪었다지만, 콘라트를 신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는 참모총장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콘라트가 다시 기회를 노리며 복수의 칼을 간 끝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오히려 러시아 제국에게 초기에 당했던 굴욕을 배로 돌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동부전선에서 이탈하는게 확실시 되었고, 발칸반도불가리아의 참전과 자신의 제자 쾨베시의 활약으로 마침내 정복을 달성하면서 남은 적은 자신들에게 겁없이 선전포고한 이탈리아뿐이었다. 따라서 콘라트는 이 건방진 이탈리아에게 최후의 응징을 가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었다. 그러나 러시아러일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콘라트가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는 존재였고, 그들이 브루실로프 공세에 사활을 건 순간 콘라트에게는 만회의 가능성 자체가 날라가게 되었다. 분명 콘라트의 전략에는 도박성이 다소 있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구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콘라트가 상대하는 적들이 죄다 예측에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작계가 전부 꼬여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수습하나 싶었지만, 결국 브루실로프 공세가 콘라트의 명예를 영원히 실추시키게 되었고, 이는 콘라트가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3.5. 역사적 의의

콘라트는 당대 명성을 날리던 전략가였으나 현대 총력전에 대한 경험은 일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가 끝까지 중임될 수 있었던 것은, 어차피 동시대 제국 군부의 주요 장성들도 총력전에 대한 경험이 없는건 피차일반이었고, 전략적 이해도면에서는 이들 중 콘라트가 그나마 제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70] 콘라트는 전술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무척 뛰어났고, 군대의 기동성과 수송, 항공전의 기계화에 대한 그의 이해는 그를 군사 분야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독일 제국군의 육군 참모총장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콘라트에 대해 "대담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제국군 자체가 약점이어서 제국군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슬픈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콘라트의 군사적 재능과 그가 처했던 제국의 구조적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 평가로 볼 수 있다.

소련원수이자 이론가인 보리스 샤포시니코프는 1927년에 출간한 군사 교리 서적 《군대의 두뇌(Мозг армии)》를 통해 콘라트를 이상적인 참모총장의 모델로 평가했다. 샤포시니코프는 콘라트가 진정한 팀워크를 구축하고, 부하들의 주도성을 장려하며, 권한을 기꺼이 위임하는 등 "통합적" 참모본부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개인적 자질면에서도 콘라트를 나폴레옹에 비견하며 그의 대담성과 강인한 성격, 독립성, 워커홀릭적인 성향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샤포시니코프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 따라 전쟁에서의 개인 영웅주의는 거부하고 집단적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1]

영국의 유명 군사 역사학자시릴 펄스(Cyril Falls)[72]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1959년에 출간한 The Great War에 따르면 콘라트는 분명 전쟁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략가이며, 독일 제국군이 성공을 거둔 동부전선 공세 작전의 대부분은 콘라트의 작전에 근거했다면서 그의 계획은 훌륭하게 구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군인이자 군사학자인 리델 하트 역시 콘라트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의 열의를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 콘라트는 유럽에서 제일 전쟁에 열성적이었다."라는 평을 남겼다. 현대에 그를 연구한 인물로는 미국의 역사가 새뮤얼 R. 윌리엄슨(Samuel R. Williamson)[73]등이 있으며 콘라트를 아마도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 모든 유럽의 군사 지도자들 중 가장 교활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3.6. 그를 비판하는 인물들

반면,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오스트로마르크시즘(Austromarxism)[74]의 창시자 오토 바우어(Otto Bauer)[75]는 콘라트를 단순한 전쟁광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쟁 발발의 주범으로 고려되는 유럽 전역의 5~6명을 꼽는다면 그 중 한 명은 확실히 콘라트 원수일 것이다."
1925년 8월 25일, 콘라트의 장례식에서

하지만 이러한 바우어의 논평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콘라트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그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일의 군사학자 군터 에리히 로텐베르크(Gunther Erich Rothenberg)[76]는 앞서 서술했듯 지형과 기후를 무시하고 보급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은 점, 기관총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 그리고 국가체급만으로 전력을 확인하는 오판으로 기껏 짜놓은 전략에 자국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그를 비판하였다.

한스 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맹렬한 평가를 발표했는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붕괴에 대한 콘라트의 책임을 정확히 파악했다. 제국군의 군사와 장비는 일반적으로 좋은 수준이었지만, "비이성적인" 가차없는 공격은 전쟁 초기에 일찍 정예병력을 날려버렸고, 전투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예비 병력을 전선에 급히 투입해야 했다. 그리고 예비역 장교들의 리더십이 쓸데없이 너무 "체계적"이었으며 하급 장교들에게는 너무 적은 주도권을 보여줬다는 점을 들어서 콘라트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콘라트가 일찍이 제국군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할 계획을 세운 황제밑에서 복무하기에도 기질적으로 적합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도, 콘라트가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평화를 추구했던 카를 1세에게 전쟁이 좋든 나쁘든 계속 지속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당대 지식인들도 콘라트를 조롱하였는데,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같은 경우, 콘라트를 전형적인 장군 캐릭터로 표현하였다.

이런 면모 때문에 후대에는 이론상으로는 위대한 전략가였지만 실제 전장에선 완벽한 실패자였던 탁상위 명장의 전형으로 평가 받는다.

4. 가족 관계

콘라트 개인으로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쉽게 우울해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가족을 사랑하였다. 다만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콘라트는 맏아들인 쿠르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었는데, 쿠르트는 그런 아버지를 어려워 했었다. 쿠르트가 15살이었을 때 아버지의 모교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3과목에서 낙제를 받아 1년을 유급해야 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쿠르트는 낙담했었다. 하지만 쿠르트는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대에 짓눌려 무너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청소년기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해서 긴장 관계에 있었고, 결국 서로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쿠르트는 1918년 1월 10일, 31번째 생일에 폐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외에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인 3남 헤르베르트는 어릴때부터 승마에 재능이 있었다. 기수로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헤르베르트는 아버지의 교육을 순조롭게 헤쳐나간 착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콘라트가 3남을 제일 좋아하였다.[77] 막내인 에곤은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잘 쳤었다고 한다.[78] 차남 에르빈은 전쟁 중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37세의 나이에 자신과 같은 나이의 스웨덴 출신 이혼녀 그레타 단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콘라트의 아버지가 본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콘라트는 자식들도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자식들은 학교, 숙제, 집안일 등 일상 생활에서 콘라트의 군인 규율에 묶여 있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 시대의 아버지치고는 체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화가 나면 자식들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안겨주며 집안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였다. 그래서 자식들은 학교 성적이 떨어졌을 경우 아버지가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콘라트의 아내인 빌헬미네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어머니긴 했지만 남편의 엄격한 교육 방식을 지지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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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힌덴부르크와의 선전용 포스터도 있다.

콘라트는 군인 집안 출신으로 1910년에 남작(Freiherr) 작위를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수여받았으며 1918년에 카를 1세에게 백작(Graf)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설립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신분제를 폐지하여 이름에서 폰(von)이나 추(zu)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때부터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Franz Conrad-Hötzendorf)가 되었다. 사실상 콘라트의 성에 회첸도르프가 붙은 기간은 1년도 안된다.

브루실로프 공세의 지휘관이자 콘라트를 완벽하게 나락으로 빠뜨린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는 1살 차이인데, 둘 다 향년 72세에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

후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Hugo Conrad von Hötzendorf)[79]라는 오시예크 출신의 크로아티아인 화가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던 프라뇨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Franjo Conrad von Hötzendorf)[80][81]브륀에서온 귀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프라뇨는 소싯적에 을 거쳐서 오시예크에 정착해 미술 사립 학교를 차렸다고 하는데, 콘라트의 조부인 오이겐과 성이 같고 둘 다 귀족이라는 점, 동향인 점, 비슷한 나이대임을 미루어볼 때 오이겐과 친척인게 확실하며 프라뇨의 손윗형제 내지는 사촌으로 추정된다. 만약 오이겐과 프라뇨가 친형제라면 후고는 콘라트의 당숙임이 틀림없다. 화가 친척을 둔 게 집안 내력인지 재밌게도 콘라트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6. 저술

7. 대중매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회첸도르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법령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귀족 접두어가 철폐된 뒤 개명한 이름.[3] 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4] Barbara Kübler[5] Barbara "Betti" Conrad von Hötzendorf[6] Wilhelmine le Beau[7] Kurt Graf Conrad von Hötzendorf[8] Erwin Graf Conrad von Hötzendorf[9] Herbert Conrad von Hötzendorf[10] Egon Franz August Julius Karl, Graf Conrad von Hötzendorf[11]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12] 콘라트의 증조모[13] 또는 요제프(Josef)[14] 이는 콘라트가 나중에 사회진화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토대가 된다. 어릴 적 콘라트가 겪은 경험들은 그의 가치관에 영향을 크게 끼쳤고, 후에 종교적 믿음보다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성격이 형성되고 말았다.[15] 당시 19세기 유럽에서의 사냥은 지금으로 치면 골프와 같은 취미로, 남자들의 인맥을 형성하고 우정을 결속시키는 활동이었다. 즉, 콘라트는 시대에 맞지 않는 부류인 셈. 사냥을 좋아하지 않던 콘라트는 이후 사회적 상호 작용에 제한을 두게 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아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16] 특히 크사버는 1848년 혁명 이후 헝가리를 혐오하게 되었다. 조국이 둘로 나뉘어진 것도 모자라 그 혁명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제대해야 했기 때문.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콘라트 또한 반헝가리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17] 바바라는 혁명 당시 심각한 부상을 당한 남편을 목격했고,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한 아들도 걱정하였다. 특히 말을 탔다가 다칠까봐 불안하여 콘라트가 기병이 되는 것을 말렸다. 하지만 아들은 장성하고 나서 훌륭한 기수가 되었기에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수십 년 후 콘라트가 장군이 되었을 때, 바바라는 노모(老母)가 되어서도 콘라트가 새 말을 살 때마다 여전히 걱정했었다고 한다.[18] 입학하고 나서 아들을 그리워한 바바라는 남편 크사버를 설득해서 임시로 아들이 입학한 학교 근처로 이사하여 아들을 자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사관 후보생들은 일요일에만 외출할 수 있었기에 아들을 보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19] 콘라트와 동기였던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루프는 콘라트의 부모가 그를 애지중지했다고 회상했다.[20] 세계 최초의 사관학교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문 사관학교였다.[21] 빌헬미네의 애칭[22] 동부전선에서 과도한 업무로 인해 스위스에서 과로사[23] 동부전선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24] 동부전선에서 전사[25] 오스트리아 란트베어 산하에 편제된 티롤 후백국의 향토방위군. 1906년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던 콘라트의 주도로 티롤을 방위하는 란데스슈첸 산악보병대대들과 각종 향토예비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만든 산악전 전문 부대이다. 주적인 이탈리아 왕국군 산악전 부대인 알피니 산악연대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26] 산악인 클럽[27] 그 결과로 세르비아 침공 당시 콘라트의 결정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콘라트의 계획에는 분명, 제국군의 역량이 따라가는 게 전제 조건이었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현실성이 결핍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군부에서 대단히 신뢰를 받던 존재였다. 따라서 제국군 내에서는 콘라트가 명령하는 대로 수행될 것이 분명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은 콘라트가 제국군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능한 전술가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독일군 참모총장의 명령에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으려 했던 콘라트의 성격은 해당 전역에서 안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28] 당시 콘라트는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다. 불륜 상대였던 폰 라이닝하우스 백작부인은 32세로 콘라트보다 27살이나 어렸었다.[29] 다만 헝가리의 입지를 약화시켜 오스트리아-보헤미아, 헝가리, 남슬라브라는 3개의 세력이 균형을 이뤄 제국을 지탱시킨다는 생각은 서로 공통되었다.[30] 다만 체코의 경우 처음에는 딱히 독립 여론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을 더 원했다.(물론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분리독립을 원하는 측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1차 대전에서 오헝 제국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고 제국이 패망하자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31] 여기서 군의 상태를 확인했음에 불구하고, 전쟁을 강행하려 한 콘라트의 무모함이 드러난다.[32] 생몰년도: 1847년 ~ 1917년[33]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이디시어, 슬로바키아어,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세르보크로아트어(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루신어, 루마니아어.[34]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콘라트와 소 몰트케가 서로 간간히 서신을 보낼 뿐이었다. 그 후 콘라트의 주장으로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35] 독일 제국군 육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36] 그러나 러시아도 독일보다 약체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치려는 목적으로 바르샤바 돌출부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방과 측면을 칠 계획이었다.[37]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의견이 갈렸다. 콘라트는 항상 공세(der Offensive)로 일관하길 원했으나, 팔켄하인은 소모 전략(Ermattungsstrategie or Zermürbungsstrategie)으로서 전쟁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콘라트는 오히려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섬멸 계획(Vernichtungsplän)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양면전쟁에서의 우선순위도 논쟁거리였다. 개전때부터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켰음에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38] 게다가 콘라트는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도 8개 육군 군단을 배치해야만 했다. 세르비아쪽에 배치한 부대는 구경 120mm가 넘는 중포(重砲)를 오늘날 1개 포병연대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40여문만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군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제국군은 허우대만 큰 약골이었다. 이는 콘라트가 야포를 과소평가했던 탓이 크다.[39] 수송 담당관인 에밀 라첸호퍼 소령(Emil Ratzenhofer)은 콘라트에게 세르비아 전선에서 전투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병력을 실으면 8월 23일 이전에 갈리치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8월 23일에 러시아군이 도착했지만 제국군은 약속보다 16일 늦게 갈리치아에 병력이 도착했다. 심지어 나머지 부대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철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수송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40] 둘은 지휘관에서 짤리기 전 2년 반 동안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콘라트의 회고록에 따르면 "2년 반의 전쟁 기간 동안 함께 일했음에도 작은 기념품 하나 받은 적이 없고, 내가 중병을 앓았을 때도 안부를 물어본 적이 없다"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공이 공적인 관계에는 충실했으나 사적인 친분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한다.[41] 옆에 있는 사람은 콘라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트만(Rudolf Kundmann)이다.[42] 헤르베르트는 이미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43] 그래도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거둔 승리 하나로 단클은 1917년에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남작 작위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아우펜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1915년 4월 25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칙령에 따라 모리츠는 남작의 지위로 올라갔다.[44] 개인적 측면에서 이 전투는 당시 소장이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경력에서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러시아 제4군에 배속된 친위 울란 여단을 이끌었다. 만네르헤임은 이 전투에서의 지휘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고, 갈리치아 전투 과정에서 많은 추가 전투에 참여했다.[45] 두사람은 끝까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유지했다. 이는 당시 군 고위층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보통 실각한 장성들은 서로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50년이 넘는 우정이 군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변치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46] 원래 제9군의 사령관은 리하르트 폰 슈베르트(Richard von Schubert) 포병대장이었으나, 오헝군의 지휘를 받기 싫었던 독일군은 오헝군의 장성 계급중에 제국상급대장이 없다는 걸 이용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을 제9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꼼수를 썼다. 오헝군에는 없는 계급이지만 명목상 병과대장보다는 한단계 높은 직급이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동맹군의 지휘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허나 오헝군도 얼마안가 제국상급대장 계급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47] 오늘날의 데블린(Deblin)[48] 물론 프셰미실 요새가 위험한 상황이라 구원군을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49] 특히 프셰미실 요새 함락이 치명타였다.[50] 이름은 독일 남부군이고 지휘관도 독일인이지만, 부대 구성원의 대다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다.[51] 이후 11차례에 걸쳐 지속적인 소모전이 벌어지면서 전력을 모두 소모한 이탈리아군은 빈사지경에 빠지게 되었다.[52] 이 규칙이 카를 1세의 아내인 독실한 가톨릭 신자 치타 황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치타는 이혼자와의 재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지나 역시 치타를 싫어했다.[53] 이 부대는 이후 콘라트 군집단(Heeresgruppe Conrad) 혹은 요제프 대공 군집단(Heeresgruppe Erzherzog Joseph)으로 불렸다[54] 카를 1세의 참모총장 해임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콘라트는 31개월 동안 조국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는 각국의 최장수 참모총장들인 이탈리아의 루이지 카도르나(30개월), 프랑스조제프 조프르(28개월 반), 독일파울 폰 힌덴부르크보다 긴 기간이었다.[55] 그의 군사적 능력이 매우 유능한 것을 비롯해서 콘라트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콘라트(AOK)와 팔켄하인(OHL) 간의 분쟁을 중간에서 자주 조정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 휘하의 장교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일 장성들이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후에 메츠거는 카포레토 전투에서 제1보병사단을 지휘한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십자훈장을 받으며 대외적으로도 유능한 부대 사령관임을 입증했다.[56] 롬멜 소위는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제12차 이손초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57] 빌린스키는 1912부터 14년 시기 콘라트의 "전쟁당" 핵심 멤버였으나,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 입장에서 벗어났다.[58] 한편 콘라트는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들의 편지만 받았는데 그중 9월 초, 서쪽의 베르됭에서 복무중이던 메츠거는 독일에 대해 그들의 빈약한 무기와 지친 상태를 보고서는 1915년 당시의 "카르파티아의 겨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기시켰다며 독일 제국의 붕괴를 예언하는 편지를 썼다.[59] 11월 4일,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무너진 트리에스트를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다.[60] 콘라트가 제1보병연대장으로 트로파우에서 행복한 군생활을 보냈던 당시에 콘라트의 부관이었다.[61] 지나는 나중에 많은 인스브루크 사람들이 이탈리아 점령군과 교제하는 부부의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밝혔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콘라트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콘라트는 사령관에서 해임된 지 1주년이 되는 날,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와의 외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복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가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확실히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탈리아와의 전쟁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콘라트는 1907년에 그가 옹호했던 예방전쟁이 이루어졌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전속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고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 패배의 여파로 러시아세르비아 사태에 개입할 여력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고, 세르비아 침공이 임박했던 1914년에도 그는 러시아의 개입을 확실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정말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콘라트를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도자들은 보스니아 위기 때처럼 독일의 압력이 러시아를 저지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콘라트는 산책할 때 마을 사람들과 주변 시골의 농부들과 매일 접촉했다. 그는 그들의 인사에 겸손하고 태도로 맞인사하면서 종종 수다를 떨거나 팬들을 사로잡았다.[62] 이는 나치 독일로 인해 실현되었다.[63] 그렇기 때문에 콘라트가 설사 죽지 않고 나치 독일에 의해 오스트리아 병합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살아있었어도, 실제 역사속 콘라트의 행보를 미루어 봤을 때 자유주의적 흐름과 반대로 움직이는 나치즘에 대해선 동조 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을 갖게 만든다.[64] 에르빈은 자기와 동갑인 스웨덴 출신의 이혼녀 그레타 단(Greta Dahn)과 결혼했다.[65] 공화국 정부의 첫 국장이었다.[66] 대표적인 예로는 가톨릭이 대다수인 군부에서 유일하게 개신교 신자로 복무한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가 있다.[67] 사실 이것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68] 특히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로 인해 제국은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지고 만다.[69]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카를 폰 플란처발틴, 자무엘 폰 허저이 등의 자식들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신임 장교로 임관하여 참전했다가 전투중에 목숨을 잃었다.[70] 또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끝까지 믿고 군사 업무를 일임한 것도 있다. 비록 참모총장은 카를 1세가 즉위하고 나서 해임되었지만, 카를 1세는 콘라트를 그대로 예편시키지 않고 피아베강 전투 때까지 콘라트 본인만의 군을 이끌수 있게 해주었다.[71] 다만 걸러 들어야 할 것이, 이는 샤포시니코프의 일방적인 평가일 뿐이었고, 앞서 서술했듯 실제 콘라트의 지휘 스타일을 보면 팀워크라는 단어가 콘라트와는 거리가 제일 멀었다. 왜냐하면 콘라트는 작전을 구상할 때 부관들과 함께하기보다 보통 혼자서 구상하는 것을 선호했고, 모든 제안이 외부 검토 없이 그의 손에서만 나왔다. 게다가 그의 성격은 "사포"처럼 거칠어 장관들의 반감을 샀고, 황제조차 그의 불필요한 전쟁 주장에 지쳐갔다. 물론 콘라트에게는 독창성과 결단력, 침착함이라는 강점이 있었고 전략적 구상도 뛰어났으나, 이를 실제 전술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기동성, 지형, 기후, 보급, 무기의 잠재력 등 현실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특히 총력전 경험이 없던 그는 공세 외의 전술을 생각하지 못했고, 이러한 독선적 성향이 종종 작전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72] 생몰년도: 1888년 ~ 1971년[73] 생몰년도: 1935년 ~[74]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절충을 주장한 사상.[75] 생몰년도: 1881년 ~ 1938년[76] 생몰년도: 1923년 ~ 2004년[77] 그랬기에 훗날 헤르베르트가 동부전선에서 23세의 나이로 전사했을 당시엔 콘라트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78] 훗날 에곤은 결혼해서 한해 동안에만 자식을 2명 낳았는데, 1924년 1월 10일에 태어난 딸에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12월 25일에 태어난 아들에겐 프란츠라고 이름을 지어주며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다. 자식들도 장성하여 에곤 또한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되었다.[79] 생몰년도: 1806년 ~ 1869년[80] 생몰년도: 1770년 ~ 1841년[81] 프라뇨의 독일식 이름이 프란츠이기 때문에 콘라트와 동명이인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