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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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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32대 국왕
우왕 | 禑王
출생 1365년 8월 2일[1]
(음력 공민왕 14년 7월 7일)
즉위 1374년 11월 7일[A]
(음력 우왕 즉위년 9월 25일)
사망 1390년 1월 8일[3] (향년 24세)
(음력 1389년, 공양왕 원년 12월 14일)
고려 교주 강릉도 강릉부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제32대 국왕
1374년 11월 7일[A] ~ 1388년 7월 19일[B]
(음력 우왕 즉위년 9월 25일 ~ 우왕 14년 6월 8일)
고려 태상왕
1388년 7월 19일[B] ~ 1389년 12월 10일[7]
(음력 창왕 즉위년 6월 8일 ~ 창왕 원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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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8]
우(禑)
부모 부왕 공민왕
친모 반야, 적모 순정왕후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근비 이씨, 영비 최씨, 선비 왕씨, 현비 안씨, 정비 신씨
자녀 슬하 1남
장남 창왕(昌王, 1380 ~ 1389)
종교 불교
아명 모니노(牟尼奴)
봉호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왕호 우왕(禑王)[9]
별호 여흥왕(驪興王)[10]
전폐왕(前廢王)[11]
}}}}}}}}}

1. 개요2. 생애
2.1. 불안한 태생과 즉위 전2.2. 즉위2.3. 개막장 행보2.4. 무진피화2.5. 제2차 요동정벌2.6. 폐위와 죽음
3. 혈통에 대한 논란: <우창비왕설>
3.1. 발단3.2. 형성3.3. 반박
3.3.1. 조선 시대3.3.2. 현대
3.4. 기타 제설
4. 평가5. 가계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 제32대 군주. 폐위되어 묘호시호가 없다. 는 '우'(禑).

2. 생애

2.1. 불안한 태생과 즉위 전

우왕은 1365년에 부왕 공민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인데, '모니'는 석가모니의 '모니', '노'는 '노비 노(奴)'다. 즉 모니노는 '석가모니의 종'이라는 의미다. 기독교, 특히 천주교로 비유하면 "하느님의 종"과 비슷한 작명법인 셈이다. 당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자주 지어졌다. 비슷한 사례로 우왕의 제3비 의비의 이름도 '석비(釋婢)'로 '석(釋)가모니의 노비(婢)'라는 뜻이며, 요나라 성종의 거란식 이름도 '문수노(文殊奴)', 즉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모니노의 어머니 반야는 아버지 공민왕의 왕후가 아니라 신돈의 시녀였다. 즉, 모니노는 공민왕의 적자가 아닌 사생아다. 그렇기에 그는 출생 이후 한동안 신돈의 집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6살이 된 해인 1371년에 신돈이 숙청당하자 다른 자식이 없던 아버지 공민왕은 그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궁궐로 데려와, 어머니, 즉 모니노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명덕태후에게 그를 맡겼다. 그러면서 공민왕은 모니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이인임에게 밝혔고, 나중에는 경복흥, 염흥방, 백문보(白文寶) 등 재추들에게 이를 공표했다.
<colcolor=#670000> 역대 강릉(江陵)의 부원대군
1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왕만(王卍)
2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왕전(王顓)
3대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왕우(王禑)
이에 따라 모니노는 8살이 된 해인 1373년 7월에 '우(禑)'라는 휘를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봉해졌다. '강녕'은 강릉(江陵)을 변형한 봉호였는데, 이는 할아버지 충숙왕과 아버지 공민왕의 봉호이기도 했다. 아들에게 자신의 왕자 시절 봉호를 그대로 물려준 걸 보아 공민왕이 왕우에게 왕위를 계승시킬 의지가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공민왕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고려 왕실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본래 고려는 정식 혼인관계에서 얻은 자녀만 왕족으로 인정했고, 그 외 궁녀천민 등 폐첩(嬖妾)의 자녀는 혼외자로 취급되어 왕위를 이을 권리가 없었다.[12] 따라서 어머니가 천한 신분인 모니노는 당시 고려 왕실의 관례에 따르면 출가해 소군이 돼야 했지만, 그럼에도 공민왕은 모니노를 후계자로 천명했다.

공민왕의 이러한 행보에 당시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으나, 이후 명덕태후의 행보를 보건대 왕실의 반응은 싸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9월에 공민왕은 강녕부원대군의 생모로 지목된 궁인 한씨(순정왕후 한씨)의 3대조와 외조부를 부원대군으로 추봉해, 한씨의 출신을 사대부 집안으로 포장하기까지 했다. 이후 불과 7일 뒤에 공민왕이 홍륜에게 시해당하자, 명덕태후와 경복흥은 다른 왕족을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인임이 공민왕의 유지를 내세우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그의 눈치를 보던 재추들은 당초 예정대로 강녕부원대군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다. 수렴청정은 명덕태후가 맡았으나 이인임이 사실상 섭정으로 군림했다.

2.2. 즉위


그렇게 우왕은 가까스로 즉위했지만, 북원나하추심왕을 맡고 있던 왕토크토아부카를 새로운 고려 국왕으로 내세워 다시 고려를 장악하려고 했다. 즉위 직후 맞은 위기였으나, 왕토크토아부카는 국경 근처에서 무력시위만 했을 뿐 국경을 넘어오진 않았다. 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이인임이 북원과의 외교 재개를 추진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중시하던 신진사대부와 갈등을 일으켰고, 이를 빌미로 이인임은 신진사대부를 정계에서 퇴출시키는 데 성공하여, 이인임의 권력 기반만 공고히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즉위 2년차인 1376년의 어느날 밤에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라는 인물이 명덕태후의 거처에 몰래 들이닥쳐, 우왕이 자기 소생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체포된 반야는 그대로 임진강에 던져저서 처형당했으나, 이 사건은 안그래도 불안정한 우왕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을 남기는 일이 되었다.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한 지윤은 이인임과 경복흥을 죽이고 집권하려는 음모를 꾸미면서, 우왕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려 했으나, 도중에 발각되어 결국 1677년에 지윤과 장씨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도리어 서로 껄끄러운 관계였던 명덕태후·경복흥-이인임-최영 세력이 단합하는 계기만 되었던 셈으로, 이인임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정적은 모두 제거되었고, 우왕은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의지할법한 유모마저 잃게 되었다.

1380년에 명덕태후가 죽으면서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13]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게 된다.

왕이라고는 하지만 태생으로 인해 다른 왕족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근본적으로 자신을 지지하지도 않는 허울 뿐인 외척마저 사라진 우왕은 더이상 자신을 지지할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우왕은 이인임으로 하여금 국보(國父)[14] 합하라고 칭하게 하는 한편 국정부터 흉년 구휼 및 북원, 명나라에 대한 외교 등 모든 정사를 맡겼다.

2.3. 개막장 행보

이후 국정을 이인임 등 권문세족과 최영에게 맡긴 채 궁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향락에 빠져 지냈으며 정치에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였다.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 하고 민가에서 말을 타며 백성들이 기르던 소, 닭, 돼지, 염소 등 가축들을 사냥했을 정도로 민폐를 끼쳤으며 말을 달리다가 마음에 드는 예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서 겁탈했다.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우왕은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할아버지 충숙왕(제27대)과 큰아버지 충혜왕(제28대)을 뺨쳤는데, 최영이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꺼내면서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 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 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서는 법도가 없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영
라고 말했다.

우왕의 부인들은 9비 3옹주(九妃三翁主)라고 불리며 유명했는데 그 중 3명의 비와 1명의 옹주 외에는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축출된 후에 폐출되었다. 폐출된 비들은 의비(毅妃), 숙비(淑妃), 안비(安妃), 정비(正妃), 덕비(德妃), 선비(善妃)였다. 3옹주는 명순옹주(明順翁主), 화순옹주(和順翁主), 영선옹주(寧善翁主)를 말하는데 명순옹주만 폐출되지 않았다. 특히 우왕이 즉위했을 때 자기 아버지인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
라 하며 늘 희롱했다고 한다. 우왕은 자주 정비 안씨의 처소에 들렀는데 하루에 2~3차례 가기도 하고,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정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로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 우왕
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왕이 이런 행동들을 보였다고 해도 《고려사》가 우왕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정비 안씨의 일화도 훗날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월산대군 박씨부인 일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우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유모를 잃었고 할머니 명덕태후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의붓어머니가 되는 그녀에게 모성애를 갈구했을 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보면 우왕이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막장 행보는 조선 왕조가 건국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만든 뻥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다만 우왕이 성인이 된 재위 13년까지도 자주 정비 안씨의 처소에 들락거렸다는 부분은 석연치 않기는 하다.

우왕이 집권하던 시기 고려는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골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 집단화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권신들이 맡아서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또한 중국 대륙은 북으로 쫓겨난 북원과 새로 일어난 명나라가 각축을 벌이고 있어 혼란스러웠고, 내정은 이인임 등이 국정을 농단하는 동안 권문세족들이 대토지를 독점하고 백성들을 사노비화했으며 절 등 종교 세력들 역시 대토지를 소유해 신도들을 종으로 부리는 등 갑질의 시대였다. 홍건적 등 외침이 잦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 지방까지 학살,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를 막기 위해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맡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설치하는 한편 진포 해전, 황산 대첩 등 왜구와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 이성계, 최무선의 화포가 맹활약을 펼쳤고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2.4. 무진피화

우왕이 조금 성장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실권을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건강상 문제로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과 임견미 등 신흥 귀족에게 전권을 옮겨주었다. 그들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비었으며 중신인 경복흥은 자포자기로 술독에 빠져서 수수방관만 하다 실각했고, 또다른 중신인 최영은 탄식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했다.

1388년 1월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우왕은 최영에게 전권을 맡기는 동시에 본인도 어느 정도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바로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엄밀히 따지면 영비 최씨는 최영의 서녀였고 최영도 이 때문에 곤란해하며 딸과의 결혼을 반대했었으나 우왕의 고집으로 인해 끝내 혼인이 이루어졌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최영을 중용해서 이인임 일파를 물리치고 최영을 후견인으로 삼았다는 면에서 적어도 당시 우왕의 정치적 감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5. 제2차 요동정벌

이 무렵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승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 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는데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기는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의 일종의 양다리 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를 상실한 뒤였다. 게다가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나라의 관복(익선관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받은 것이 그 예이다.[15] 이전에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나라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1388년 3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
"철령 이북은 우리 땅이니 내놓으라"
라며 강짜를 놓았다(철령위 문제). 명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계속해 긴장이 심화되자 공민왕 때 어렵게 되찾은 땅을 내놓으라는 명나라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으며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16] 이때부터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에게 본격적으로 불만을 품고 일을 벌일 시기를 노렸을 걸로 보인다.

준비가 다 끝나고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우왕은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선왕(공민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그대와 함께 있지 않겠는가?"
며 청했고[17]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으며,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말았는데, 우왕은 사실 요동 정벌 때 서경까지 나아가 동향을 지켜보았고 최영도 함께 서경에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전군 50,000명이 이성계의 지휘로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빠르게 개경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도중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로서 대응 시간은 더욱 늦어졌다.

2.6. 폐위와 죽음

출전하기 전부터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위화도 회군) 개경을 포위한 후 함락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은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했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킨 후,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데다가 이성계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으려 해도 이방원이 이미 대피시킨지 오래라 실패했다.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명은 우왕의 무리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18] 결국 이 일로 분노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개월만에 폐위당한 뒤 강화도유배보내졌다.
우왕 14년(1388년)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정도전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는 이미 휘하 세력을 잃고 몰락한 이인임을 탄핵하는 한편 사돈의 형[19]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지만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과 정적 조민수의 결사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지만,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우왕은 강화도가 개경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좀 먼 경기도 여주시로 옮겨졌지만, 왕위를 탈환하기 위하여 김저,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곽충보도 불러서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지만 중도에 배신한 곽충보가 이성계한테 밀고했고, 이성계를 죽이기 위해 그의 자택에 간 정득후와 김저마저 모두 현장에서 발각됐다. 결국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고, 김저는 붙잡혀서 순군옥에 수감된 뒤 대간에게 신문을 받았다.

이후 우왕은 강원도 강릉시로 또 옮겨졌고, 이성계와 정몽주 등은 우왕과 창왕을 모두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창왕은 쫓겨날 만한 실정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이성계 세력은 창왕을 쫓아낼 수 있는 명분으로 일전에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주장했던 반야를 꺼내들었다. 반야가 신돈의 여종이었던 만큼, 그 점을 빌미로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주장하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란 뜻.)이 구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왕은 신돈의 아들이므로 그 소생인 창왕 또한 폐위하고 진짜 왕씨를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의 논리가 완성된다. 여기에 우왕 즉위 당시에 명덕태후가 우왕의 즉위를 꺼렸던 점과 우왕 일가에 대한 왕족들의 반대 여론이 높았던 사실이 <폐가입진론>을 확증시켜주는 최적의 정황이 되었다. 결국 창왕마저 폐위되었고, 창왕을 옹립했던 이색과 조민수 또한 실각했다.

이성계 세력의 뜻에 따라 공양왕이 즉위한 뒤 이성계 일파의 일원인 윤소종의 동생인 윤희종과 간관들이 우왕과 창왕 부자 처형을 상소했다. 공양왕이 이를 들어주면서 결국 우왕은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향년 25살의 나이로 처형당했고, 아들 창왕 역시 같은 해에 10살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 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가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고려사》 공양왕 원년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
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20][21]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 쓰는 택리지》 1권, 신정일 저, 166쪽

다음 문단의 내용은 전어도 항목 전설 부분에 서술되었듯이 2006년 기고된 네이버 블로그 글 이외에서는 기록이 확인된 바가 없다. 용 비늘 이야기에서 나아가 이성계 일파가 우왕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지를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검[22][23]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며,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살난 전어도와 금이 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무덤만 있다면 프랑스 제2제정의 나폴레옹 3세처럼 현대 과학으로 생부를 판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덤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고 발견되지도 않았다. 다른 역사의 여러 폐위된 군주들이 일단은 왕 취급은 받는 것과 달리 우왕은 조선 창업 세력에 의해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당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아들 창왕과 함께 역적의 시신으로 간주돼 들판에 그냥 버려졌을 가능성도 상당한 편이다.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있기는 하다.

이 때 위에서 언급된 최영의 서녀인 영비 최씨가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신을 끌어안고 자는 것은 물론 시신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신을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 초의 《고려사》, 《동국통감》 등은 우왕을 '신우'(辛禑)라고 기록하며 정통성을 깎아내렸다. 폐위 후 복위 시도도 좌절되어 시호조차 올려지지 않았는데 이 점은 아들 창왕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폐위되거나 쫓겨난 왕이나 왕자 등이 추존되거나 그렇지 않아도 왕자로서 기초적인 시호라도 받은 것에 비하면 결이 다르게 비참한 것이고, 이런 예는 우왕의 죽음을 제외하면 전무후무한 것이다.[24]

3. 혈통에 대한 논란: <우창비왕설>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 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을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신씨설>'(禑王辛氏說)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건국자 이성계가 해당 명분을 내세우며 공양왕을 옹립했고 최종적으로는 조선을 건국했기에 우왕신씨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당대에 저술된 모든 관찬 역사서에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우왕과 창왕은 왕으로 인정되지 않고 각각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왕의 일대기를 다룬 <세가>가 아니라 반역자의 일대기를 다룬 <반역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기록 모순 등의 이유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일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3.1. 발단

앞서 언급되었듯 우왕은 사생아였고, 우왕을 후계자로 내세운 공민왕의 행보는 어머니인 명덕태후의 지지마저 얻지 못했다. 비록 공민왕이 직접 우왕을 후계자로 공인했고, 우왕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두었으나, 폐가입진을 통해 공양왕을 옹립시킨 장본인이었던 이성계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논점이 되지 못했다. 우왕 시기에 전횡을 일삼았던 권신인 이인임이 처음부터 우왕의 승계를 주장한 사람이었던 것이 도리어 여러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빌미가 된다. 여기에 신돈의 시녀였던 반야가 우왕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사건은 매우 좋은 소재가 되었다.

결국 《고려사》에는 우왕은 신돈과 반야 사이의 소생이며, 신돈과 이인임 때문에 공민왕이 그릇된 판단을 하였고, 궁인 한씨를 우왕의 거짓 생모로 내세웠다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반야 사건이 있었음에도, 우왕의 혈통이 왕씨가 아니라는 의혹이나 주장은 정작 우왕 재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3.2. 형성

우왕의 혈통을 문제삼는 최초의 기록은 우왕 치세가 아닌 창왕 치세에 등장한다. 기록상으로 볼 때 처음으로 우왕의 혈통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창왕 1년(1389) 9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였다. 《고려사》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윤승순(尹承順)과 권근(權近)이 명나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예부(禮部)가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왔다. 홍무(洪武) 22년(창왕 원년, 1389) 8월 초 여드레에 본부(本部: 예부)의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 등의 관리가 봉천문(奉天門)에서 다음과 같은 황제의 분부를 받았기에 그대로 전달합니다. "고려 국내가 다사다난한 판에 배신(陪臣)된 자들 가운데 충신과 역적이 마구 뒤섞여 있으니 그 하는 일들이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씨(王氏)가 시해를 당하고난 이후 후손이 끊어지는 바람에 뒤에 다른 성(異姓)이 왕씨를 가탁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또한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켜나갈 좋은 규범이 아니다. 옛날에는 임금의 악행이 너무 심해 그 때문에 임금을 시해한 역적도 있었으니,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소행이지만, 또한 그 가운데는 어진 정치를 폄으로써 하늘의 뜻을 돌이키고 백성들을 평안히 만든 경우도 있었다. (중략)"
《고려사》 권 137 <열전> 50 신우 5

여기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명나라 예부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바로
'왕씨가 아닌 다른 성(異姓)이 왕위에 올랐다.'
는 구절이었다. 당시 창왕은 이색·권근 등의 권유에 따라 직접 명나라에 친조하려 했는데, 이는 이성계 일파와 대립했던 이색 등의 기득권층이 창왕을 명나라에 직접 보내 입조하게 하는 등의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그 입지를 다져서 이성계 일파의 사전 개혁 시도를 견제하고자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창왕의 모친인 이씨(李氏)가 나이 어린 아들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을 염려한 까닭에 이는 무산되었고, 다만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데 그쳤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정작 창왕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받아온 답서에 이러한 구절이 있었으니, 직접 명나라에 다녀오며 문서를 가져온 권근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권근은 <예부 자문>을 도중에 사사로이 열어봤다가 그 내용을 보고는 먼저 우왕의 장인이자 권문세족으로 대표적인 사전개혁반대파였던 이림에게 먼저 보이고 난 후에야 도당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2개월이 지난 창왕 1년(1389) 11월에 결국 큰 사건이 터졌다. 이때 김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한 것이다. 정득후는 자결하고 김저만이 살아남았는데, 사로잡힌 김저는 우왕 복위 사건에 변안열·이림·우현보·우인열·왕안덕·우홍수 등이 연루되었다고 자백했다. 이 일로 인하여 변안열은 공양왕 즉위 이후 유배를 가게 되었고[25], 이성계는 우왕을 강릉부로 옮기는 한편 창왕은 폐위시켜 서인으로 삼아 강화부로 보내버렸으며, 곧 이어서 고려 왕실의 종친이었던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런데 당시 대간들이 올린 상소에서는 사건이 터진 지 2개월이 지난 후에야 권근이 <예부 자문>을 열어본 사건을 문제삼았다.
이인임이 권세를 잡고 총애를 굳게 하려고 신돈의 아들 신우를 현릉(玄陵: 공민왕)과 동침했던 궁인(宮人)이 낳은 아들이라고 속여 왕위에 올린 후 그의 집안 동생 이림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 후 조민수가 이색과 공모하여 신우의 아들 신창을 왕위에 올리고 변안열ㆍ이림ㆍ이귀생ㆍ정지(鄭地)ㆍ우인열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元庠) 등이 또한 시중 이성계를 해치고 우리 왕씨의 종사를 끊으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종사의 신령 덕분에 흉악한 계략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만약 변안열의 계략이 실행되도록 놓아두었다면 시중 이성계가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왕씨의 종친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 전하의 즉위도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바로 천자께서 말씀하신 반역에 해당될 것입니다. (중략) 권근(權近)은 천자가 다시 왕씨를 왕위에 올리라는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사사로이 열어보고 밀지의 내용을 미리 안 후 도당(都堂)에 보고하지도 않고 먼저 이림에게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천자를 속이고 왕씨를 저버렸으며 다른 성붙이에 빌붙어 아부하며 몰래 모반을 꾀한 것으로, 조종에 지은 죄가 또한 큽니다.
《고려사》 권 116 <열전> 29 이림

당시 대간들이 말하는 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성계 일파는 우왕 복위 사건과 <예부 자문> 사건을 모두 반역과 연결지어서 이미 처형당한 변안열 외에도 이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전 개혁에 반대하던 이들로, 이성계 일파의 주된 정적들이었다.

이때 제거된 변안열은 비록 사전 개혁에 반대하던 인물이었으나,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 말기의 혼란기에 무장으로 활약하여 군공을 쌓았을 뿐 아니라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했던 일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이림 또한 우왕의 장인이었기에 이성계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정적이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모두 죽거나 실각했다. 이성계는 당시에 터진 사건들을 기회로 삼아 정적들을 한꺼번에 제거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우왕과 창왕 등은 신씨의 자손이므로 모두 폐해야 마땅하다는 주장, 즉 '<폐가입진론>'이 나왔다. 근거는 명나라에서 보내온 <예부 자문>에 실려있던
왕씨가 아닌 다른 성으로 왕이 되었다.
는 구절이었다. 이는 곧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연이어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아닌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
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세웠다. 이후 공양왕 즉위와 조선 건국은 <폐가입진>을 주요 명분으로 했기에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은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렸다. 조선시대에 이 시기를 기록한 《태조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했는데,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 그 중에서도 <반역 열전>에 기록하는 등 조선 정부는 멸망할 때까지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다.
신우(辛禑)의 어릴 적 이름은 모니노(牟尼奴)로, 신돈(辛旽)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의 소생인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당초 반야가 임신해 만삭이 되자 신돈이 자기 친구인 승려 능우(能禑)의 모친 집으로 보내 해산하게 했는데 능우의 모친이 맡아 길렀으나 돌도 못 채우고 아이가 죽어버렸다. 신돈의 책망을 겁낸 능우가 죽은 아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아이를 찾다가 이웃집 대졸(隊卒)의 아이를 몰래 훔쳐내 다른 곳에 숨겨두고는 신돈(辛旽)에게, 아이가 병이 났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서 기르겠노라고 청해서 신돈의 허락을 받았다. 그로부터 한 해 뒤 신돈이 자기 집으로 데려와 기르면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횡(金鋐)이 뇌물로 바친 노비 금장(金莊)을 유모로 삼으니 반야도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을 까마득히 몰랐다."

공민왕(恭愍王)이 후사를 두지 못했음을 늘 걱정하다가 하루는 평복차림으로 몰래 대궐을 나와 신돈의 집에 갔더니, 신돈이 그 아이를 가리키며, "전하께서는 이 아이를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으소서."라고 말했다. 왕이 곁눈질하고 그냥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심 허락했다. 신돈이 몰래 그 한 패거리인 오일악(吳一鶚)을 시켜, "부디 관음보살의 제자인 신돈의 소생 모니노가 이 나라에서 복록과 수를 누리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글을 지어 낙산사(洛山寺) 관음(觀音)에게 치성을 드리게 했다.

신돈이 수원(水原: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에 유배되자 왕은 근신(近臣)들에게 "과거 내가 신돈의 집에 가서 그 집 여종을 가까이 해 아들을 낳았으니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하고 당부했다. 신돈이 사형당한 후 왕이 모니노를 명덕태후전(明德太后殿)으로 데려다 놓고서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원자(元子)가 있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소."라고 말하고는, "신돈의 집에 예쁜 여자가 있었는데 아들을 낳을 수 있다기에 가까이 해서 이 아이를 얻었던 게요."라고 설명했다.
《고려사》 권133 <열전>46 신우 1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인데,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소생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반야가 낳은 아이는 죽고 다른 아이를 훔쳐다 길렀는데, 공민왕이 자기 아들이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왕이 훙(薨)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그를 죽였다. 참람하게 왕위를 차지한 기간이 14년이다.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

3.3. 반박

3.3.1. 조선 시대

이성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에 찬동했던 무리들은 <우창비왕설>과 <폐가입진론>을 따랐고, 이성계에 반대했던 무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말선초부터 병자호란까지 여태 있었던 이야기들을 숙종 ~ 정조 즈음에 한데 모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동야승》(大東野乘) 가운데 《상촌잡록》(象村雜錄)에 이르기를,
원천석(元天錫)은 고려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벼슬하지 않고 원주(原州)에 살면서 목은(牧隱)과 그 밖에 여러 노인들과 서로 오갔다. 그의 유고(遺稿) 속에서 후세에 알지 못하는 당시의 사적을 직필(直筆)로 기록해 놓은 것이 있으니,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다.

안정복도 창왕이 즉위한 뒤 경연에서 윤소종이 창왕에게
"상왕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는 총명이 학문으로 향하셨으나..."
하는 부분을 들어, 우왕이 폐위되었는데 상왕이라고 불린 점을 볼 때 우왕이 신씨라는 설에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왕씨임이 틀림없다는 의견을 《동사강목》에서 제기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한참 지난 18세기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왕이 누구의 아들이냐는 문제를 떠나서, 공민왕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라고 말한 이상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시황진원제의 선례를 들어 정말 신돈의 피라고 해도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만큼 <세가>에 넣는 것이 맞는데 <열전>, 그것도 <반역 열전>에 넣은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하고 나서 우왕을 궁궐로 들여 지켰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밖에 없긴 하지만 왕이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해 낳은 내 아들이다."

라고 굳게 자신의 아들로 믿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후궁 한씨의 양자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게다가 죽기 얼마 전에는 후계자로서 공식적으로 교육하는 등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26]

또한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작제건[27] 설화와 함께 우왕이 죽으며
"나를 신씨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후손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용의) 비늘이 있는데 와서 보아라"
고 말했는데 참관하던 사람이 봤더니 말한 그대로였기에 이상하게 여긴다며 우회적으로 <우왕비왕설>을 거짓으로 여겼다.

3.3.2. 현대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도 <우창비왕설>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어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정설이다.[28] 우창비왕설을 주장하는 《고려사》, 《태조실록》에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으나, 그것을 언급하기에 앞서

라고 적어 놓았으며, 《고려사》 신우 열전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모두 조선시대 때 쓰인 기록이며, 《순종실록》이 일본의 검수를 받았듯이 《고려사》의 바탕이 된 《고려실록》 또한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잡고 난 뒤에 쓰였다.[29] 그런데도 확정적인 근거는 없고 누가 그렇다고 하더라 하면서 소문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왕이 신돈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로 명나라 예부에서 보낸 국서에
'왕씨가 아닌 다른 성(異姓)이 왕위에 올랐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는 점인데, 정작 명나라 측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명나라의 《태조 고황제 실록》에는 당시 홍무제가 고려 사신들을 접견하면서 답서에 언급된 것과 흡사한 이야기를 말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성씨가 고려의 왕위에 올랐다는 따위 내용은 전혀 없다.
고려국(高麗國)에는 사고가 많고 신하들은 충성스러운 자와 역적된 자가 섞여있으니 하는 것이 모두 좋은 계책은 아니다. 왕을 폐하고 세움을 마음대로 하니, 삼한이 지켜야 할 길이 아니다. 저들이 그 임금을 가두어 놓고, 와서는 동자(童子, 고려 창왕)의 입조를 청하니 이는 반드시 음모가 있는 것이며 믿을 것이 못된다.

너희가 정말로 역적된 행위를 계속 일삼는다면, 모두가 이어서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를 것이니, 인륜(人倫)이 없어지고 예의(禮義)를 잃을 것이다. 너희 예부(禮部: 고려 예부상서 이원명)는 그것을 고려에 타일러 동자로 하여금 반드시 와서 입조하게 하지 말 것이다.

과연 그 나라에 현명한 신하가 있어 군신(君臣)의 구분을 명확히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안정케 한다면 , 비록 수세토록 와서 조공하지 않더라도 책망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해를 연이어 조공하더라도 어찌 유익할 수 있겠는가?
《태조 고황제 실록》 권286 홍무 22년(1389) 8월

홍무제
"고려의 신하들 중에서도 충성스러운 자들뿐 아니라 역심을 품은 자들이 있어 마음대로 왕을 폐하고 세우는데, 얼마전에는 우왕을 폐위시켜 감금하더니 이번에는 아직 나이 어린 창왕을 입조하게 하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
고 강하게 책망했다. 이성계 일파가 명나라에서 보내온 <예부 자문>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 데 악용하려고 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홍무제는 영 딴판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만일 정말로 명나라 조정에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생각하여 책망하려 했다면 홍무제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그런 언급은 정작 명나라 측의 기록에는 전혀 없다. 이를 보면 본래 명나라에서 보낸 <예부 자문>에 '다른 성씨로 왕을 삼았다.'고 책망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이성계 측이 사람을 부려 <예부 자문>이 도당에 닿기 전에 내용을 고쳐놓고는 권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할 때 내세운 명분은 우왕의 실정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었다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직후에 우왕을 폐위할 당시, 이를 주장하는 편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창왕을 폐위한 후에야 <폐가입진론>을 내세운 것은 실제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한편 우왕이 아들 창왕에게 양위하며 올린 표문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제가 어릴 때 부친인 공민왕 왕전(王顓)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오로지 조모 홍씨(洪氏)의 가르침에 의지할 뿐이었는데 다시 불행히도 조모마저 별세했습니다. 그러자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인 최영(崔瑩)이란 자가 저에게 매와 사냥개를 바쳐 사냥판을 벌이도록 꾀고 아예 서연(書筵)을 작파해 버리는 바람에 저는 들어서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략)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5
당시 우왕은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면서 스스로를 공민왕의 아들이라 밝혔는데, 우왕이 표문을 쓸 때 그 내용에 이성계 일파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정말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었다면, 이성계 일파가 우왕이 스스로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칭하게 놔둘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가정하면 기록들을 대조 및 비교해볼 때 많은 모순이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국 사학계에서는 <우왕신씨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3.4. 기타 제설

현재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냐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공민왕의 아들일 것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요즘처럼 DNA 검사라도 하지 않고서야 당대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완벽한 입증 및 반박이 불가능했다. 우왕의 유골을 찾을 수도 없는 마당에 이젠 영영 밝힐 방법도 없다. <우창비왕설>에 의한 <폐가입진론>에는 명확한 물증이 없으며 둘 다 왕씨가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왕이 유달리 혈통 면에서 트집이 잡힐 만한 약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왕자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이 되었다. 물론 자라면서 외모가 왕과 빼다박았다든지, 그 외에 각종 유전적으로 동일한 특성이 나타나면 대체로 해결이 되었지만 재수없이 외탁이라도 해버리면 답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의혹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도록 왕과 결혼한 여자는 궁 안에만 박아두고, 궁 안에 남자 구실 할 수 있는 남자는 왕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대규모 스캔들이 터지지 않고서야 왕비나 후궁이 낳은 아들은 무조건 왕의 아들이니까. 그러나 우왕은 공민왕이 밖에서 데려온 아들이므로 그러한 안전장치가 없는 사생아다. 하다못해 조선의 제21대 영조도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일지언정 일단 후궁이 된 뒤에 낳은 둘째라서 아버지가 숙종인 것은 분명했다. 우왕은 영조만큼도 안되는 혈통 증거력을 가진 셈이다.

일반적으로 반야가 우왕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선 반야가 만삭일 때 신돈이 친구인 승려 능우(能禑)의 모친의 집으로 보냈고 반야는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돌이 되기 전 아이가 죽어, 능우가 죽은 아이와 닮은 아이를 몰래 데려와 기르다가 신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현대의 사학계엔 우왕의 생모가 반야라는 것도 거짓이고, 실제 생모는 순정왕후 한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능우라는 인물이 순정왕후 한씨의 친척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우왕이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왕은 순정왕후 한씨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저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평가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나 윤색이 심하게 가해졌을 가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라고는 할 수 없다.[30] 소년기의 비정상적 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주는 듯 했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끝내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일단 부왕을 시해한 홍륜을 벌하겠답시고 홍사우 같은 고려 말에 손꼽히던 무장도 함께 연좌제로 묶어 처형해버렸고, 거기다 홍사우 처형에 앞장섰던 최인철을 아꼈으나, 최인철이 왜구를 무찌르지도 않았음에도 거짓 보고를 해버리는 바람에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아 태형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사실 홍사우를 죽인 것은 어린 우왕이 아니라 우왕을 휘둘렀던 권문세도가들이었지만 우왕이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신흥 무인들의 분노가 이때부터 하늘을 찔러버렸다.[31][32] 더욱이 홍건적을 격퇴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같은 무인들이 선왕 공민왕 때 줄줄이 숙청되었는데 이때까지도 그들을 복권시키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공양왕 때 가서야 이들을 복권시켰고, 조선 왕조에서는 이들을 《열전록》에 올렸으며 특히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오히려 고려 왕조보다 조선 왕조에서 더 추모했을 정도였다.[33]

주색에만 몰두한 채 임금으로서 해야 할 기초적인 일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과, 이후의 여러 정치적 패착들로 인하여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어린 아들까지 비참한 최후[34]로 몰고갔다는 점에서 모진 비판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요동 정벌 시도만이라도 없었으면 고려의 멸망을 실제보다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했던 우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 왕조의 운명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5. 가계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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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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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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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우왕) (신창(창왕)) }}}}}}}}}}}}



[1] 음력 1365년 7월 7일. 조선 제3대 군주 태종의 비 원경왕후보다 4일 먼저 태어났다. 태어나기 4달전인 3월 8일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했다.[A] 율리우스력 10월 30일[3] 율리우스력 1389년 12월 31일[A] [B] 율리우스력 7월 11일[B] [7] 율리우스력 12월 2일[8] 우왕이 왕씨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것(<우창비왕설>이라고 한다)은 조선 건국 세력의 주요 명분이었으므로,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영산 신씨로 간주되어 '신우'로 지칭되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신우'라고 써놨다. 조선이 멸망하고 우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신(辛)씨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하나, 이는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의 왜곡이라는 것이 현대 한국 학계의 정설이다. 두산백과한국어 위키백과에도 우왕의 본명을 '왕우'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아들인 창왕도 마찬가지이다.[9] '우왕'은 후대에 붙여진 왕호로, 이름인 '우'에다 '왕'을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딱 두 번 쓰인 사례를 제외하면 그냥 '신우'로 불렸다.[10] 폐위 후 여흥으로 귀양가 있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여흥왕'(驪興王)이라 불렸다.[11] 아들인 창왕은 '후폐왕'(後廢王)이라고도 한다.[12] 조선시대에는 민간의 서얼 차별은 고려시대보다 일부분 더 강화되었지만, 국왕의 친자식에 한해서는 서얼도 왕자로 대접받으며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서자도 없으면 얼자가 계승권을 받는 계승법으로 바뀌었다.[13] 명덕태후의 친정 남양 홍씨김용의 난으로 홍언박이 죽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태풍 때문에 빠져 죽으며, 공민왕 시해로 죽어 나가고, 이인임 일파에 밀려났다가 이인임 일파가 숙청당할 때 염흥방과 인척이라서 죽어 나가는 등 많이 죽었다.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의 증대고모가 명덕태후였다. 홍륜과 홍관은 국왕인 동시에 할아버지뻘인 친척을 살해한 것이다.[14] '부'(父)-'아비 부'라고 읽지만 위인을 높여부르는 경우 '보'라고 읽는다. 공자의 영어 이름이 confu인 것 역시 공자를 '공보'라고 부르는데서 유래한다.[15] 회흘 (위구르) 출신으로 공민왕 때 온 학사인 설송의 아들 설장수가 사신으로 다녀왔다. 4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훗날 위화도 회군 이후 창왕 폐위와 조선 건국에 동의하며 영달을 누렸다.[16]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창왕 시기에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회군 당시엔 이성계에 동조해서 같이 회군한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이성계의 <4불가론>이 사대주의라며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시 고려의 상황이나 이성계의 <4불가론>의 내용들을 보면 신흥 강대국에 허리를 굽히는 비굴한 태도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요동 정벌을 하겠다면 무더운 여름이 아니라 병량을 확보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한 가을로 잡자고 건의한 것도 묵살됐다.[17] 최영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러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을 때 우왕의 아버지 공민왕이 홍륜 일당에게 시해당했다.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우왕으로서는 최영이 곁에 없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18] 드라마 <정도전> 제28회에도 나오는데 방영 당시 몇몇 시청자들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지적했다가 엄연히 《고려사》에 기재된 정사였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도전>에서는 미리 대비하던 이성계에게 역관광당하고, <태종 이방원>에서는 하필 이성계가 군영에 가 있어서 도모하지 못하자 그의 가족이라도 노렸으나 그곳에 있던 조영무를 포함한 가별초와 싸우다 이방원과 조영규가 오면서 중과부적으로 실패하는 걸로 나온다.[19] 공양왕 왕요의 동생인 정양군이 이성계의 7남 무안대군의 장인이었다.[20] 이 야사와 연결되는 설화로 <작제건 설화>가 있다.[21]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용 비늘 이야기를 채용했다.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좀 더 현실적이고 극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을 인두로 지져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살당한다.[22] 아버지 이자춘이 조상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나온 것을 이성계에게 물려준 검[23] 조선 국왕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칼, 즉 전어도(傳御刀)로 알려진 그 검이다. 태종 이방원이 제작한 복제품이 실유물로 남아 있는데 150cm짜리 괴물검이다.[24] 창왕 폐위 후 망국의 군주가 되었으나 조선으로부터 시호는 받은 공양왕, 폐위 후 끝끝내 왕으로 추존된 단종이나 반정으로 쫓겨나서도 군호라도 있었던 연산군, 마찬가지로 군호가 있음은 물론 훗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혜종이라는 (사적으로 내린 시호인) 사시까지 올려준 광해군, 그리고 사후 세자로 복권되고 심지어 대한제국 시대에 황제로까지 추존된 사도세자는 물론, 다른 후계 정권에서 정식 시호라도 내린 청나라 선통제, 제위 선양 후 왕호를 받고, 살아생전 황제로서의 대우라도 유지되었던 후한 헌제조환 등과는 결이 다르게 우왕 부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다만 공양왕의 경우는 이성계 일파가 옹립한 왕이라는 사실 때문에, 왕위를 부정하자니 조선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25] 이후 공양왕 1년(1389)에 처형되었다.[26] 일반적으로 노국공주가 죽은 뒤 공민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돈을 기용해서 개혁을 추진하고, 오히려 신돈을 몰아낸 사람이 공민왕이다. 또 자제위도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근위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27] 고려의 시조인 태조 왕건의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28]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합집, 1990년 인용[29] 고려실록은 이미 무신정권 때 권력에 영향을 받은 바 있다.[30] 우리역사넷[31] 사실 되려 우왕은 홍사우를 아꼈다.[32] 그러나 홍륜 등이 처벌당할 때 당시 우왕은 고작 9살이었다. 자신을 옹립해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 충신들이라고 해도 본인의 나이상, 거기다가 선왕이 피살당했다는 초유의 사태를 감안하면 그들의 영향력이 커다란 건 어쩔 수 없는데 지지세력이 하필이면 국가의 안녕보다 자신의 안녕이 더 우선인 권문세족이었다. 그렇다고 우왕에게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을 충분한 시간이 있었냐면 하필 정식으로 '우'라는 이름을 얻고 강령부원대군이라는 정식 칭호를 얻은 것도 아버지가 죽기 1년 전의 일이었다. 애초에 우왕은 고려 역사에서 정말 유일무이하다시피 선왕의 아들이 맞냐는 식의 말까지 나온 사람인데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키웠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즉 9살이라는 나이도 문제였고 9살의 나이임에도 그 나이가 맞냐는 능력을 보여주기에도 좋지 못했다. 쉽게 말해 평범한 9살짜리가 왕이 된인 셈이다. 이런 어린이에게 권문세족들을 제어 못했느니 하는게 넌센스다.[33] 물론 선왕의 일을 아들 대에서 엎기에 쉽지 않다는 정치적인 입장은 있긴 하다. 예시를 들어 심온의 경우 평소 처신은 못했지만 적어도 죽음의 계기가 된 사건에는 연루되지 않아서 처신만 못했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데도 세종은 죽을 때까지 그를 사면하지 않았고 결국 세종의 아들인 문종 대에 이르러서야 심온은 사면될 수 있었다. 세종도 이 정도인데 세자에 책봉된 적도 없고 신돈의 자식이 아니냐는 불미스러운 말도 도는데 이인임의 공민왕이 생전에 내 아들이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위태롭게 왕위에 오른 우왕이 과연 아버지의 결정을 뒤집는다는 선택을 쉽게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왕이 실권을 쥔 기간은 재위기간에 비해 매우 짧았고. 세종도 심온은 몰라도 심온의 가족들은 복권해줬지만 그마저도 심온을 숙청한 태종이 죽은 뒤의 일이다.[34] 당시 창왕의 나이는 10살로, 우리가 흔히 비운의 소년 왕으로 알고 있었던 그 단종보다도 훨씬 어리다. 심지어 처형 방식도 드라마에서 흔히 보여지는 사사가 아닌 참수형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고려사》에는 총명했다고 전해지는데, 부왕의 무리수만 없었더라면 어쩌면 훌륭한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35] 우왕의 어머니의 이름이 불교적 색채가 강한 반야라는 점, 반야의 소유주인 신돈의 어머니가 본래 옥천사의 노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니노와 석비라는 이름은 모두 절에 부속된 노비인 자신의 가계 배경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36] 기철의 당여이자 요심(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 지역의 관리였던 김바얀 또한 통제원의 승려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37] 그녀가 축출될 때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던 염흥방, 임견미 등은 무진피화로 주살되었으나, 염흥방의 매제(재혼)였던 정희계는 한때 숙비의 자형(언니는 숙비 축출 당시 처형된 상태)이었던 이유로 처형을 면한 것을 보면 무진피화 당시 그녀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다. 뭐가 됐든 1388년 2월에 현비, 화순옹주, 명순옹주가, 1388년 3월에 영비, 정비, 선비가 입궁하면서 실권을 상실한다.[38] 왕비: 의비, 숙비, 안비, 정비, 선비, 덕비 / 장인: 강인유(안비), 최천검(숙비), 조영길(덕비), 신아(정비), 왕흥(선비), 오충좌[39] 참고로 이 칼에는 피가 이미 묻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악공 두 명이 이미 칼에 베인채로 죽어있다.[40] 쉽게 말하자면 왕의 용돈이라고 보면 된다.[41]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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