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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3 21:34:39

영비 최씨


고려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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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태조 ~ 예종 · 의종 ~ 공양왕
왕자 : 국조 ~ 숙종 · 예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인종 · 의종 ~ 공양왕
※ 봉작을 받았거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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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우왕의 제2비
영비 최씨 | 寧妃 崔氏
출생 미상
고려 개경 개성부 최영의 사저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389년 이후 (향년 미상)
고려 개경 사저 추정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영비
1388년 3월 ~ 138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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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본관 동주 최씨
부모 부친 - 철원부원군 최영
(鐵原府院君 崔瑩, 1316 ~ 1388)
적모 - 문화 류씨
(文化 柳氏, ? ~ ?)
친모 - 은씨
(殷氏, ? ~ ?)
배우자 우왕
자녀 없음
관저 영혜부(寧惠府)
작호 영비(寧妃)
}}}}}}}}}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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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의 제2비.[1]

2. 생애

1388년(우왕 14년) 3월에 신아의 딸 정비(正妃), 왕흥의 딸 선비(善妃)와 함께 우왕의 비가 되었다. 처음 최영은 자신의 딸은 아름답지도 않은데다 정실소생도 아니므로 지존의 배필이 되는 것은 불가하다며, 기어이 왕비로 들이겠다면 자신은 출가하겠다며 거절하였으나, 당시 최영의 부하였던 정승가, 안소 등이 설득하여 결국 왕비로 들이게 되었다.

《고려사절요》우왕은 원래 최영의 꼿꼿한 성품을 싫어해서 그의 저택에도 잘 찾지 않았었는데, 영비를 맞이하게 된 뒤부터는 곧잘 최영의 저택으로 행차하곤 했다고 한다.

철령위 설치와 관련해서 우왕최영이 주도하여 요동 정벌을 기획하는 와중에, 개경 내에 사면을 내리고 서해도로 향하는 우왕을 아버지 최영과 함께 3월부터 호종하여, 5월에는 우왕의 부벽루 행차에도 함께 따랐다.

최영 대신 군사를 지휘하게 된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마침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했고, 군사들은 대궐을 포위한 채 우왕에게 영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우왕은 "영비를 내보낸다면 나도 함께 갈 것이다"라며 거절했고 6월 8일, 우왕은 영비명순옹주와 함께 한밤중에 개경을 떠나 강화로 쫓겨갔다가 7월에 여흥을 거쳐 다시 강릉으로 옮겨졌고,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도한 책임을 지고 12월에 유배지 고봉현에서 처형당했다. 우왕도 결국 공양왕 원년(1389년)에 강화로 유배된 아들 창왕과 함께 12월 14일 처형되었다.

이때 과 함께 있던 영비 최씨가 달려가 구하려 하는 것을 강릉의 아전이 그 옷자락을 잡으며 말리자, 큰 소리로 "늙은 놈이 어찌 감히 그 손으로 나를 더럽히느냐!" 하고 고함치며 아전이 잡았던 옷자락을 찢어 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오싹해하였다고 한다.

우왕이 죽은 뒤 "내가 이 꼴이 된 건 모두 내 아버지 때문이다." 라며 10여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하였고, 잘 때는 우왕의 시신을 안고 잤으며 곡식을 얻으면 반드시 깨끗이 쓸어서 제사에 썼다. 이성계는 우왕의 또 다른 왕비로 개경에 남아있던 근비 이씨와 함께 영비 최씨에게도 수신전[守信田] 3백 결[結]을 주었다고 한다.

3. 가족관계

4. 대중매체에서

파일:용의 눈물_영비.jpg
1996년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배우: 미상[6]

[1] 구비삼옹주 중에서도 늦게 왕비가 되었음에도 바로 제2비로 기록된 이유는 고려 왕비들 서열은 책봉순서도 고려하지만 가문의 위상도 고려한 것이다. 이런 점은 태조의 후비들 관계에서도 잘 나타나있다.[守信田] [結] [적모] [친모] [6] 끌어 안은 인물은 창왕이다. 창왕의 모후처럼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근비이며 아무래도 영비가 용의 눈물에 나온 이유는 아마 위화도 회군 기록에서는 우왕의 후비 중에 영비가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근비는 생략하고 대신 영비를 출연시킨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