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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4 15:12:08

왕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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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본관은 개성 왕씨다.

2. 생애

1383년 9월, 우왕이 전공판서를 지냈던 왕흥의 집에 행차해 그의 딸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 딸과 변현과의 결혼이 예정된 날 하루 전이었다. 왕흥은 우왕이 딸을 빼앗을 마음이 있음을 눈치챘는지 아직 사위를 맞을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고, 우왕은 "이놈이 날 기만하려 드느냐?"[1]며 화를 냈다. 다음날 왕흥은 우왕으로부터 딸을 결혼시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이를 어기면 처자식에게도 죄가 미칠 것이라고 협박을 들었다. 노골적으로 대신의 딸을 취하려는 우왕을 향해 문하시중 조민수 등이 반대의 뜻을 표했으나 우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왕흥은 같은 날 저녁 왕이 행차할 것을 대비해 집을 비우고 딸을 피신시켰으나 우왕이 다시 한 번 화를 내니 어쩔 수 없이 왕의 명령을 따랐다. 왕흥의 딸은 1385년 2월 4일에 우왕과 결혼하게 됐다. 우왕은 이 날 왕흥의 집에서 하루 묵었는데, 이후 매일같이 왕흥의 집에서 자고 갔다. 우왕이 다른 비들의 전에 방문했다거나, 시장에서 닭과 개를 쏘거나, 술에 취해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기록 뒤에 왕흥의 집으로 갔다는 기록이 많다. 1387년 8월, 우왕의 측근이 된 왕흥은 마찬가지로 딸을 납비한 신아(申雅)와 함께 동지밀직사사에 임명됐다. 이 해 12월 왕흥의 생일에 우왕이 직접 행차해 말 한 필을 하사했다. 1388년 1월 왕흥은 지문하사로 승진했고, 3월에 딸은 선비(善妃)로 책봉됐다.

위화도 회군 이후 창왕이 즉위하자 우왕의 왕비와 후궁들 대부분이 본인의 집으로 돌려보내졌는데, 선비와 신아의 딸 정비 신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돌려보내진 여성들의 아버지들은 먼 곳으로 유배됐다. 낭사 허응 등의 상소에 따르면 왕흥과 신아 등의 죄목은 '위조(僞朝)에 재임하며 총애받는 딸에 기대어 법을 훼손하고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2]이었다. 왕흥은 이어서 공양왕이 즉위한 뒤 1391년 5월에 다시 청주(淸州)로 유배됐다.

여말선초에 왕흥의 관직은 재상직인 평리에까지 이르렀다. 왕흥은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딸을 유만수의 아들 유은지와 재혼시켰다. 1398년 유만수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하자 왕흥은 사위 유은지와 그 동생 유연지를 숨겨줬다. 1399년 문하부에서 이를 알고 왕흥과 유만수의 두 아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정종은 세 사람을 용서했다. 같은 달 정월 초하루에 백관이 궐문 밖에 서있는데 혼자 말을 타고 지나쳐 궐문으로 가는 실수를 범했는데, 문하부가 또 왕흥을 탄핵했으나 정종은 왕흥을 개성에 안치하도록 했다.

정확한 사망년을 알 수 없지만 1401년에는 이미 죽었으며 관직은 상의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왕흥의 집은 터가 좋았는지 1401년 4월 태종이 왕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갈대로 만든 발을 친 일이 있다. 동년 7월에는 개성에 궁궐을 짓기 위해 여흥부원군 민제가 왕흥의 집을 사서 바쳤고 태종은 그 주위 민가를 사들이기도 했다.

3. 가족관계


개성 왕씨 족보에 의하면 아버지는 왕복명, 형은 왕미다. 아버지가 왕복명인 것은 고려사를 통해서 확인이 되는데, 형이 왕미인 것은 확인이 불가능하다.[4] 왕미는 1365년생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왕흥에게 1385년에 혼인이 가능한 딸이 있으려면[5] 왕흥은 늦어도 1330년대생이 되어야 하므로, 왕미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1] 小竪欺我耶?[2] 常在僞朝, 憑恃女寵, 毁法亂紀, 悉皆流竄.[3] 김승구(金承矩)의 딸[4] 왕흥과 왕미가 형제인 것 자체는 맞다. 두 사람이 형제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사에서 왕흥이 왕복명이 아들인 것이 확인되고, 사시방목에서 왕미가 왕복명의 아들인 것이 확인된다.[5] 원래 선비 왕씨의 혼인 상대였던 변현의 생년은 알 수 없으나, 그의 동생인 변이가 1360년생이므로 1350년대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