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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5 13:33:59

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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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1.1.1.1. 종친부1.1.1.2. 내명부
1.1.2. 조정
1.1.2.1. 문관1.1.2.2. 무관1.1.2.3. 격치물성청
1.1.3. 참의원
1.1.3.1. 개화당1.1.3.2. 만민공산당1.1.3.3. 자유당
1.1.4. 사법원1.1.5. 명문세족1.1.6. 기타
1.2. 일본
1.2.1. 일본국
1.2.1.1. 황실1.2.1.2. 정부1.2.1.3. 국회
1.2.1.3.1. 애국공당1.2.1.3.2. 입헌정우회1.2.1.3.3. 일본공산당
1.2.1.4. 기타
1.2.2. 홋카이도 공화국
1.3. 대청
1.3.1. 황실1.3.2. 공화정부1.3.3. 자의원
1.3.3.1. 국민당
1.3.3.1.1. 보국회
1.3.3.2. 대공당
1.3.4. 신군
1.3.4.1. 북양군1.3.4.2. 남양군
1.3.5. 중원
1.3.5.1. 신강성1.3.5.2. 대만성1.3.5.3. 기타
1.3.6. 외성
1.3.6.1. 만주1.3.6.2. 몽골1.3.6.3. 티베트
1.4. 류큐1.5. 대남1.6. 시암1.7. 필리핀1.8. 하와이1.9. 인도
2. 유럽
2.1. 프랑스2.2. 러시아
2.2.1. 황실2.2.2. 관료2.2.3. 두마
2.2.3.1. 사회민주노동당2.2.3.2. 입헌당
2.2.4. 기타
2.3. 영국2.4. 독일2.5. 벨기에2.6. 오스만 제국2.7. 이탈리아2.8. 오스트리아-헝가리2.9. 폴란드2.10. 발칸2.11. 기타
3. 아메리카
3.1. 미국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4.2. 트란스발 공화국4.3. 모로코 술탄국
5. 기타

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1.1.1.1. 종친부
1.1.1.2. 내명부

1.1.2. 조정

1.1.2.1. 문관
1.1.2.2. 무관
1.1.2.3. 격치물성청

1.1.3. 참의원

1.1.3.1. 개화당
1.1.3.2. 만민공산당
1.1.3.3. 자유당

1.1.4. 사법원

1.1.5. 명문세족

1.1.6. 기타

1.2. 일본

1.2.1. 일본국

1.2.1.1. 황실
1.2.1.2. 정부
1.2.1.3. 국회
1.2.1.3.1. 애국공당
1.2.1.3.2. 입헌정우회
1.2.1.3.3. 일본공산당
1.2.1.4. 기타

1.2.2. 홋카이도 공화국

1.3. 대청

1.3.1. 황실

1.3.2. 공화정부

1.3.3. 자의원

1.3.3.1. 국민당
1.3.3.1.1. 보국회
1.3.3.2. 대공당

1.3.4. 신군

1.3.4.1. 북양군
1.3.4.2. 남양군

1.3.5. 중원

1.3.5.1. 신강성
1.3.5.2. 대만성
1.3.5.3. 기타

1.3.6. 외성

1.3.6.1. 만주
1.3.6.2. 몽골
1.3.6.3. 티베트

1.4. 류큐

1.5. 대남

1.6. 시암

1.7. 필리핀

1.8. 하와이

1.9. 인도

2. 유럽

2.1. 프랑스

2.2. 러시아

2.2.1. 황실

2.2.2. 관료

2.2.3. 두마

2.2.3.1. 사회민주노동당
2.2.3.2. 입헌당

2.2.4. 기타

2.3. 영국

2.4. 독일

2.5. 벨기에

2.6. 오스만 제국

2.7. 이탈리아

2.8. 오스트리아-헝가리

2.9. 폴란드

2.10. 발칸

2.11. 기타

3. 아메리카

3.1. 미국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

4.2. 트란스발 공화국

4.3. 모로코 술탄국

5. 기타



[1] 정조와 헌종은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세손-왕으로 즉위했다. 사도세자와 효명세자가 부왕 재위기에 사망했기 때문. 사도세자는 영조가 죽인 거지만.[2] 원래 현종의 백부 소현세자 사후 계승 서열은 소현세자의 세 아들(경선군, 경완군, 경안군)에게 넘어가야 했지만 인조가 차남 효종-현종 순서로 바꿔버려서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3] 효종-독자(적자) 현종-독자(적자) 숙종. 효종 사후에 태어나서 왕세자-왕밖에 못했다.[4] 영조-차남(서자) 사도세자-차남(적자) 정조. 사도세자가 영조의 아동학대로 미쳐버리고 부왕에게 살해당하지 않았으면 정조도 왕세손-왕세자-왕 순을 거쳐 즉위할 수 있었다.[5] 순조-장남(적자) 효명세자-독자(적자) 헌종. 효명세자가 1830년 연21세에 사망하고, 1834년 순조가 사망하기 때문에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으면 왕세손-왕세자-왕 순을 거쳐서 즉위했을 것이다.[6] 단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서자였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애매한 감이 있다.[7] 훗날 소설의 형식을 빌려 신보에 연재된 회고록 첫 머리에 따르면, 본인 스스로가 위세를 얻어야 가세가 부활한다며 "나는 이제 나 한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라 다짐했다고.[8] 작중에서는 오쿠보가 이하응에게 선사한 가장 큰 일격이라고 서술했다.[9] 이재면의 조부 남연군이 인평대군의 생물학적 후손이지만 사도세자의 양손자라서 이재면은 사도세자의 양고손자다. 따라서 왕의 4대손 자격으로 군호를 받은 것.[10] 영친왕과 작중의 왕세손이 동명이인이라 원 역사처럼 이은용에서 이지용으로 개명했다.[11] 옛날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기 있는 작품에서 인상 깊은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 삶에서 봉변을 겪는 경우가 꽤 있었다.(예를 들자면 70년대 장희빈역을 했던 윤여정이 돌을 맞았다거나 가깝게는 2014년 연민정을 연기한 이유리가 지나가던 행인에게 욕을 먹었다는 일화까지.) 영화가 갓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당시라면 그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12]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때문에 불효하다는 이미지가 생기자 대리 효도 대상이 필요해서 법적인 어머니인 조 대비를 밀어준 것이다.[13] 철종은 전대인 헌종의 7촌 당숙이라 헌종의 조부이자 조 대비의 시아버지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조 대비의 남편 익종(효장세자)과 철종이 법적으로 형제가 되었다.[14] 선조 때 수렴청정 한 게 법적 큰어머니(인종비)인 인성왕후가 아니라 법적 어머니(명종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전례를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인종과 명종은 이복형제고 선조는 명종의 양자다)[15] 장동 김씨는 본작의 고종이 명순대비의 양자인 덕분에 위세가 남아있었고, 풍양 조씨도 원 역사와 달리 처지가 애매해지면서 진지하게 간택을 노리고 있었으며, 여흥 민씨야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권력자로 떠오르던 박규수의 친정인 반남 박씨를 비롯한 여러 가문도 특정 가문 편중이 줄어들어 진지하게 노릴 기회가 생겼다.[16] 삼간택은 형식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재간택에서 뽑힌 거나 다름없었다. 어찌 보면 간택의 원래 의미에 가장 충실한 에피소드였다.[17] 이 시절 고구마는 남부 지방에서만 났으며, 남부 지방에서도 말려서 빻거나 전분을 해서 요리에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18] 수수께끼에 특이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과분한 영예를 얻었다는 평을 들었다.[19] 원래 여흥 민씨를 하고 싶었는데 상술한 이미지대로라면 여흥 민씨가 외척이 되었다고 바로 나대기는 힘들고, 여흥 민씨가 어그로를 끈 틈에 대원군과 개화파가 세력을 확장시켜 개혁을 이어가는데 용이했기 때문. 이 때문에 원 역사와 달리 여흥 민씨 세도가 일어나지 않았다.[20] 정종(1357년생)-정안왕후(1355년생), 태종(1367년생)-원경왕후(1365년생), 세종(1397년생)-소헌왕후(1395년생), 의경세자(1438년생)-소혜왕후(1437년생), 예종(1450년생)-장순왕후&안순왕후(1445년생), 인종(1515년생)-인성왕후(1514년생), 소현세자(1612년생)-민회빈 강씨(1611년생), 효종(1619년 7월 3일생)-인선왕후(1619년 1월 30일생), 경종(1688년생)-단의왕후(1686년생), 영조(1694년생)-정성왕후(1693년생), 효장세자(1719년생)-효순왕후(1715년생), 효명세자(1809년 9월 18일생)-신정왕후 조씨(1809년 1월 9일생), 순종(1874년생)-순명효황후(1872년생)[21] 반면 흥선대원군은 불교 신자다. 흥선대원군은 서로의 신앙에 충실하자며 존중해준다고.[22] 조선 입장에선 근친혼인데 사왕 아타나는 라마 5세의 부왕인 라마 4세의 후궁의 자식으로 27번째 딸이었다. 즉 라마 5세와는 이복 남매 관계. 다행히 조선에선 해외와 교류를 하면서 외국 왕실들, 특히 유럽 왕실들의 복잡한 혼맥 관계들을 이미 알고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23] 여담으로 실록영연 시리즈에서 황희의 사직 이야기는 대소신료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우려가 있어(…) 생략되었다고 한다.[24] 사실 이광도감 시절이면 모를까, 지금은 진심으로 사직을 바라지는 않는다. 동생 구스타프 왈 "솔직히 형님 즐기고 계시잖습니까."[25] 철자도 다르다. 드레퓌스 대위는 Dreyfus, 랍비 드레퓌스는 Dreyfuss.[26] 원 역사의 오페르트 또한 조선인이 잃어버린 유대의 지파라고 주장했다.[27] 경제 전문가다 보니 업무에 수학을 쓸 일이 많았다.[28] 덕만의 군밤 굽는 모습을 구경하던 귀남이 덕만의 어설픈 손놀림에 아까운 밤이 엉터리로 구워지는 것을 보고 참지를 못해 훈수를 두다가 결국 본인이 직접 구워냈다. 당연하겠지만 그 직후 거짓말같이 손님이 몰려들게 된다.[29] 처음엔 임금이 된 귀남을 보고 기가 죽어서 말이 나오질 않아서 귀남이 주변 관료들과 사관들에게 부탁을 하고 난 뒤에야 편하게 말을 놓…다가 얼마 안 가 결국 주변 눈치에 쫄려 알아서 높임말을 쓰면서 대화했다. 귀남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대화를 이어나갔다.[30] 이를 방증하는 것이 바로 스승되는 최한기로, 임금의 소개로 천덕만을 제자로 두었지만 후에는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기도 했다. 물론 임금의 어린시절 친구라는 것도 감안했겠지만.[31] 세자나 대군들은 관직에 나갈 일이 없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지만, 의례적으로 성균관에 입학하므로 이론상으로 학사장교 임용이 가능하다. 그걸 노린 것.[32] 대군의 몸이 상하였으니 당연히 누군가 그 허물을 써야 할 것인데, 대군을 탓할 수 없으니 장차수에게 죄주는 구색을 맞추면 상감께서 사면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33] 황당해 보이지만 실제로 19세기 후반에는 오컬트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 과학자들이 호기심에 연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고증오류는 아니다.[34] 군밤 세계관에서는 1930년대 핵개발 이후 2차대전과 냉전 없이 과학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붉은 여왕 효과로 폴란드의 과학 기술도 원 역사보다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가 독립 이후 별다른 전쟁을 겪지 않고 평탄하게 살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35] 무려 비행기에 방사능 물질을 싣고 지상에 대량 살포하려 했다.[36] 본인이 개발한 전기충격기를 내장한 호신용 지팡이로 연단에 난입한 사람을 제압하고 시선을 끌어모아 제품 선전을 포함한 도발적인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뒤 본인에게도 전기충격기를 갖다 대어 자해공갈을 시전했다.[37] 그 와중에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대륙의 기상에 익숙해진 탓인지 발칸 반도를 전부 합쳐봐야 청나라의 성(省) 하나밖에 안 되는데 그 안에서 갈갈이 찢어져서 싸우면 자기 장사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압권이다. 조선과 청나라 모두 종교에 대해 세속주의적이고 중국어의 방언 차이가 발칸 소국들의 언어 차이보다 더 크다는 걸 고려하면 당연한(?) 반응일지도.[38] 원 역사의 하버는 독일에 대한 애국심이 강해서 조선의 스카우트로 올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 조선에서 대규모 유대인 농부 집단이 형성되었고 오페르트처럼 유대인도 고위직에 기용된다고 유럽에 알려진 걸 고려하면 독일 정부에서 나름 고려해서 보낸 모양이다.[39] 사실 귀남은 이 말을 처음 전달받았을 때 전황을 바꿀 무기라는 소개를 듣고 자기 기억을 되짚으며 "진짜 원자폭탄이 나오려나 보다"하고 기대했다가 막상 듣고 보니 겨우 독가스라는 생각에 시큰둥하게 받았다.[40] 사실 본작 조선의 유교도 시대의 변화와 타국 유교 사상과의 교류로 상당한 변화를 거쳐서 흔히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성리학은 아니다.[41] 유럽의 궁궐 사진을 찍어와서 이 풍경대로 만들자고 했는데, 병국은 당연히 경복궁을 저렇게 휘황찬란하게 지어서 흥선대원군한테 환심을 사려는 작정이었지만, 귀남은 '이 사진처럼 도로도 싹 다 정리하고, 도시도 뜯어고치고 화룡점정으로 궁궐을 짓자'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졸지에 전국 규모의 토목공사를 하게 됐다. 무르려고 해도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큰 뜻을 몰라뵈고 궁궐 짓는데 돈낭비나 한다고 비난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하러 오는지라 그럴수도 없는 상황.[42] 특히 한국어 욕에 대해서는 한국어에 능숙해지기 전에도 마스터해 버렸다. 전봉준 왈, 조선에 가더라도 남이랑 싸울 때 그 사람의 모든 조상들을 끌어들여 욕할 수 있는 경지라고.[43] 이때 나오는 구절은 "여권(女權, 여성 권리) 말하기에 앞서 여권(女拳, 여인 주먹)이 먼저 나서게 된 셈이었다."[44] 이상재의 고향은 정확히는 한산군으로 원 역사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서천군이 되었다. 본작에서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고 언급되었기에 한산군이 서천군에 합쳐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합쳐지지 않았더라도 평소 인연이 있던 고향 이웃동네에서 출마했다거나, 아니면 한산군이 인구가 적어 서천군 선거구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45] 낙선했다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개화당 후보 김병시의 낙선이었기에 목표는 이룬 셈이다.[46] 역대 총리대신들을 살펴보면 최익현은 그 파리 코뮌 사건에 개입해 분쟁이 원 역사보다 커지는 것을 막아내며 프랑스에서도 무슈 최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고 김옥균은 프랑스 그랑제콜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김홍집 역시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근무하며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경력이 있다. 그러다 영국 유학파 출신인 전봉준이 총리가 되면서 프랑스와 연이 없는 유일한 총리라는 칭호도 내려놓게 되었다.[47]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 중에서 선발할 때 뽑혀 계급이 참위에까지 이르렀다.[48] 그래도 산가지로 셈하기는 쉽다는 것을 봐서 방정식 등의 대수학 쪽은 괜찮은 듯한데, 기하학만 나오면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49] 김옥균이 평소 자신의 고지식한 부분을 비웃던 것을 의식한 면도 있다.[50] 이 사실이 유출된다면 '간첩을 막아야 할 방첩대에까지 간첩이 있다면 프랑스 군부는 간첩 투성이다!'라는 주장이 통하게 된다.[51] 원 역사에서 이승만은 운전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강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시속 140km로 과속을 하다가 경찰에게 걸려 추격전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52] 이승만은 조선 평산도호부 출신이며, 북한에서는 봉천군이지만 이북 5도 기준으로는 평산군이다.[53] 1895년 당시에는 임시정부와 1공화국 당시의 주요 인물 상당수가 어린애거나 태어나지도 않았다.[54] 귀남이 싫어하는 매국노의 대명사+일본+공산당 세 가지가 모두 엮였으니 기겁할 수밖에….[55] 전생에서 나라 팔아먹은 대역죄인이었던 완용에게 좋은 감정이 조금도 없는 귀남이 옥균에게 곧바로 이완용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작 완용은 저나 저의 아버지가 대원군이나 상감에게 누를 끼친 적이 없으므로 옥균이 처음부터 자신을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56]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김좌근 직계는 장동 김씨가 토목 재벌로 전환될 당시 배제되어 영락한 파벌이다. 철종 말기 흥선대원군 라인을 타서 계해환국에서 살아남은 파벌이 고종 대에 재벌로 전환되었기 때문. 따라서 재벌파 쪽에서는 자신들이 쳐낸 김좌근을 옹호할 이유가 없다.[57] 개화파 이전에 유학자인 박규수야 자기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에는 산신령이 존재하므로 진짜 박지원의 혼령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58] 이 때 귀남은 "중궁의 오라버니란 사람이 중전의 마음을 후벼파다니, 그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라며 보기 드물게 분노한다.[59] 나라에 필요한 것이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게 하겠다고 직접 나섰는데 예상되는 막대한 수익의 떡고물을 바라던 민씨 일족은 참여시키지 않았다.[60] 원 역사에서도 있었던 톈진에서 서양 선교사와 상인에게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뜬소문을 빌미로 일으킨 폭동.[61] 기정진의 "외필"을 반박하는 "외필변"과 이항로의 "화서아언"에 반박하는 "화서아언의의"[62] 정확하게 말하면 필제는 징집된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종인 충군(充軍)에 처해진 것이다.[63] 실제 역사에서 예비군 제도가 도입되고 당시 전 장병의 군생활을 6개월이나 연장시킨 1.21 사태의 주범인 김신조가 술집 화장실에서 소변 보다 그 당시 군생활 한 사람한테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물론 전후사정이 어떻든 김신조를 때린 건 엄연한 폭행 범죄라 백 번 양보하더라도 군생활 한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한 잘못이고, 김신조는 대한민국에 나름 잘 적응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긴 하지만.[64] 그리고 이 설화는 대역갤에서 더더욱 와전되어 귀남이 벼루를 던진 게 질화로를 던진 걸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아예 귀남옹이 필제 질화로에 던졌다로까지 이야기가 커졌다. 아예 군밤 굽는 질화로에서 태워지는 땔감 취급을 받기도 한다.[65] 진령군(眞靈君)을 그대로 직역한 칭호다.[66] 원 역사와 달리 여러 차례 절과 속세를 오가며 방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계를 더 빨리 받았다. 원 역사에서 유천이 수계를 받은 것은 1905년이다.[67] 아주대회에 출전할 때 '어떻게 백정 출신이 감히 출전할 수 있는가?'라는 비방이 나오기도 했지만, 귀남이 "그런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빼다가 일본에게 지기라도 하면 늬들이 책임질래?"라고 말하자 쑥 들어갔다.[68] 실제로 김정일은 영화 같은 문화산업 쪽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사람을 납치해다(…) 영화도 만들고 세계 곳곳에서 긁어모은 영화필름도 소장하고 있었다.[69] 원 역사의 김형직이 만주 지린성에서 무면허 한약방 하다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했고, 19세기 후반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개척한다고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했음을 고려하면 김형직 대에 만주에 갔다가 김일성 대에 연해주로 재이주했을 수도 있다.[70] 명목상으로는 신분제를 정리하여 공사노비를 모두 해방하고 서얼차별을 철폐하기는 했으나, 아직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 서자가 많고 서자가 집안일 돕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어 딱히 흉보는 사람은 없었다.[71] 원 역사에서도 메이지 덴노로부터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황태자 교육 담당으로 임명된다.[72] 당시 일본 천황 등의 육성은 최대한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던 전통 때문인 걸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은 2차대전 패전 이전까지 유지되었으며 패전 이후에는 미성년 황족에 한해서 미성년 황족의 육성 보도를 금기시하는 걸로 대폭 축소되었다. 실제로 현 나루히토 덴노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2014년 4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입학식에서 입을 열었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기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제법 놀라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혹은 자신의 아들을 우둔하다고 여겨 말 실수를 걱정한 메이지 덴노의 특별 지시일 수도 있다.[73] 다만 일본에서도 토지개혁을 했다는 언급이 있기에 농지 상당수는 농민들에게 팔아서 어느 정도 줄기는 했을 듯하다.[74] 원 역사에서도 기도 다카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래"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상당히 노회한 인물이었다.[75] 사실 이 정한론과 전쟁을 혐오하는 것은 일본 고위층에 만연하게 자리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물론이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도 정한론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작중 설명으로 유추해 보면 정한론을 계속 밀기에는 조선이 크게 성장하기도 했거니와, 일본이 조선을 의식하며 성장하다 보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선의 혐전 성향마저도 닮아버린 것으로 보인다.[76] 그 때문인지 작중에서도 총명한 지재로 대청의 홍복이라는 말이 사분지일은 맞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77] 작중에선 '온양온천을 가장 즐겨 찾은 임금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퍽 냉소적인 말이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유가 있다. 온양온천을 즐겨 찾은 임금 중에는 현종이 있는데, 현종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효종인선왕후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 당시에 청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황태후가 조선으로 쫓겨나듯이 오면서 상황이 역전되어버렸으니 역사를 안다면 이런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78] 명성황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서에 여성이 남더라도 대개 이름은 무슨 부인 혹은 태후로만 남아 있어 이 행정이라는 이름도 유력한 설에 불과하다. 만주족은 성 대신 이름을 실생활에서 주로 사용하기에, 서태후에게 있어서도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을 것이다.[79] 원 역사에서는 '일본변정고'였다.[80] '천하흥망 필부유책(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 문장의 뜻은 좋은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명말청초에 오랑캐 천자를 모실 수 없다고 은거한 유학자 고염무다.[81] 한양 88식 소총류장군 소총으로 유명한 한양병공창이 이 사람의 작품이다.[82] 원 역사에서는 광저우로 갔다.[83] 원 역사에서는 연방제는 중국을 분열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본작에서는 상황이 이래저래 다르다 보니 아주 이상한 건 아니다.[84] 1866년생이라 1895년 을미정난 당시 29세밖에 되지 않았다.[85] 대공당의 대공(大公)이 군밤 세계관에서 민족주의를 뜻하는 말이라서 민족주의 정당으로 추정되기 때문.[86] 이때 이런 놈들이 호걸이라면 자신과 스승인 증국번 같은 사람은 천존이겠다며 혀를 찼다.(…)[87] 원세개가 의도적으로 의화단을 이용해서 반조선 여론을 형성했을 때 김가진이 여기에 휘말려 김가진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골치 아프기 직전에 때마침 청나라에 전봉준 내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그쪽으로 가서 도와달라 요청했다. 전봉준 내외가 청나라에 있던 이유는 서태후가 이홍장 견제 차원에서 초빙한 것이었다.[88] 원 역사에선 삼조공화, 즉 3번 공화정을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임이 흥미롭다. 선통제 퇴위를 강요하며 한 번,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며 한 번, 복벽에 나선 장훈을 토벌하며 한 번. 이렇게 3번이다.[89] 왕사진은 북양의 용, 단기서는 북양의 호랑이[90] 원 역사에서는 마신이와 알던 사이인지 확실하진 않다.[91] 결국은 지방 명사들과 매일매일 연회하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동철홍보대사[92] 모이창이 처음 작중에 나왔을 땐 아직 미출생.[93] 국공합작에 반발한 대공당을 원역사의 국민당 우파로 본다면 국민당 좌파의 수장이 되긴 한다.[94] 광서제보다 12살 어리다.[95] 두 눈, 두 콧구멍, 입, 두 귀의 칠공과 항문과 요도를 더한 구규를 의미한다.[96] 위약금은 공친왕이 대신 납부했다.[97] 이름은 코치 초조이고 웨카타는 직위 이름이다.[98] 쁘릿사당이 청국 신임 공사에게 삼국유사라는 책에 옛 아유타야와 이름 비슷한 나라가 나오더라 일러준 것을 전해 듣고 꾀를 낸 것이다. 안그래도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인간 허황옥의 실존 여부도 교차검증이 안 되는 판에, 아유타야는 9세기에 이주해 온 타이인이 14세기에나 세운 나라이므로 학술적으로야 순 억지 주장이지만,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혼담을 넣는 핑계로 사용했으니 사실여부야 아무래도 좋은 것.[99] 여기에 리잘 본인 의사는 단 1도 감안되지 않았다.[100] 소설상에선 리볼버로 쏴 죽인거라고 언급되어 있다.[101] 당시 대공황의 여파가 오래가서 UN 체제가 붕괴되기 직전이었는데, 핵개발 성공으로 UN에 명확한 억제력이 생겼고 IMF와 평화유지군 같은 체제가 개발되면서 2차대전과 냉전 없이 세계 평화가 이어졌다.[102] 원 역사의 병인양요가 1년 일찍 터진 일.[103] 그 와중에 출정하기 직전 "프랑스는 패배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104] 원 역사에서는 도리어 묵살당하고 재판에 회부됐지만, 이 작품에서는 김홍집의 카이저 선동으로 여론이 드레퓌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105] 본작에서 스탈린이 체포되기는 했지만 이건 불온사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출판사의 허락 없이 해적판으로 번역해서 퍼뜨렸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된 거다.[106] 가까운 친척인 빌헬름 2세가 의회 정치로 '재미를 본 것'도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107] 원 역사에서는 1929년에 일어났지만, 본작에서는 1차대전이 1910~1912년으로 1914~1918년에 일어났던 원 역사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대공황도 더 빨리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1920년대 초중반이었을 듯.[108]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남편이다.[109] 원 역사처럼 여기에서도 아무르 강 북쪽 땅을 청에게서 뜯어낸 아이훈 조약의 공로로 아무르스키 백작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110] 사실 선을 긋는 힘을 얻어 그 선을 움직여버릴 계획이라 선을 넘지 않는 개혁을 꿈꾸는 건 맞다.[111] 여담으로 김가진과 마우재 장기로 알려진 체스를 두는데 몇 번이나 김가진이 패배하여 한 수만 물려달라고 부탁함에도 거절한다. 그래서 김가진이 레닌에게 그렇게 마음 못되게 쓰다간 대머리가 된다고 일침을 날렸다.[112] 원 역사에서도 일린이라는 가명을 쓴 적이 있다. 당대 혁명가들은 가명을 여러 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일린도 그중 하나였는데, 일린은 주로 제정기 출판과 관련된 가명이었다.[113] 원래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고 원 역사에서는 이 무렵 불온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소설에서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불온 세력을 드러내 놓고 탄압하지는 않기 때문에, 레닌도 가명을 쓸 뿐 활동 자체는 공공연히 하고 있으며 유배 가지도 않았다.[114] 여담으로 이때 한창 탈모가 진행중이라 혹시 동양 민간요법 중 탈모 치료법이 있나 물어보는 추신을 2번이나 적었다가 지운다. 김가진의 저주가 실행되었다[115] 원 역사의 스탈린이 조조보다 훨씬 잔혹해서 명군 소리를 못 듣지만 시대가 스탈린을 필요로 했음을 고려하면 정말 적절한 평가.[116] 원 역사처럼 불온 서적이라서 체포된 게 아니라, 정식으로 허락받은 정파지는 맞는데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된 거라 은근 코미디.[117] 2013년 시점의 소련 언급을 보면 스탈린이 원 역사만큼 과격한 행보를 보이지 않은 건 확실해 보인다. 소련이 무난하게 경제 성장을 해서 동유럽과 유라시아 일대에서 경제 블록을 형성해 세계 3위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언급되기 때문.(1위는 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블록, 2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 블록이다)[118] 원 역사에서는 1906년에 단 한 표 차이로 노벨상을 놓치고 1907년에 사망했으니, 바뀐 역사의 덕을 톡톡히 본 셈.[119] 원 역사에서는 수단에서 마흐디 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수단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일었지만 글래드스턴 정부는 트랜스발에서 철수하는 등 문제가 커질 것 같은 식민지에서 발을 빼는 정책을 시행중이라 무시하다가 결국 여론에 떠밀려 수단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죽었다.[120] 맨발로 작두 타는 진령군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121] 사실 처칠의 행동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닌 게, 당시 드레드노트 전함은 영국에서도 고작 10대 정도밖에 없어서 카이저마리네와 처절하게 싸우는 상황에서 영국이 평시 상태의 나라에 3대나 넘기는 건 누구라도 꺼릴 상황이었다. 삼국 모두 중립국인 건 덤. 그렇다고 원 역사처럼 배째라 하기에는 동양 삼국 모두 상당히 강하다 보니 정상적으로 양해를 구한 것이다.[122] 이때 미대에 낙방한 자신을 비롯한 몇몇 낙제자들이 실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서양 화풍과 적성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자신의 그림이 공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히틀러가 대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원 역사보다 독기가 훨씬 덜했던 건 이미 자신의 그림이 어느 정도 인정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123] 다만 정말 조금 읽는 수준에 그쳐서 진지를 이동해서 지도상에 표시된 위치가 달라졌다는 말을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라고 어설프게 통역했다.[124] 히틀러 본인만 이런 건 아니고 소속 소대 소대장과 하사도 명령서를 보고 한마음으로 옘병을 시전하며 생각 없는 별들을 욕한 뒤 하사는 대대장에게 이거 하면 안된다고 사정사정하기도 했다.[125] 이때 창의단을 보조하던 업무 때문에 정말로 프랑스군 중 하나가 히틀러를 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카이저 콧수염보다 인중 주변에만 깔끔하게 남기는게 어울리겠다는 소소한 평가는 덤.[126]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 항명의 시작은 자신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작중 시점에선 히틀러가 앞장선 것은 맞으나 항명이 서부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지라 히틀러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다.[127] 사실과 약간 다르긴 하나 조선이나 프랑스 모두 이를 알고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128] 많은 이들이 아타튀르크나 엔베르 파샤로 예상했으나, 청년 튀르크당의 지도자였던 아흐메드 니야지 베이였다.[129] 방문 당일이 세르비아 출신 성인의 축일과 겹쳐서 민족 전통을 자극한 상황이었다.[130]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916년에 사망했다.[131] 원 역사에서 1차 대전 도중 러시아령 폴란드가 동맹국 손에 들어오자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이중제국에서 폴란드를 넣은 삼중제국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했었다.[132]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카친스키가 카틴 학살 70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한 사고이기 때문에 카틴 학살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일어날 이유가 없다.[133] 퀴리 부인의 원래 성이다.[134] 요르요스 왕자의 친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9세가 니콜라이 2세의 외할아버지이고, 요르요스 왕자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니콜라이 2세의 증조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다. 즉 4촌이자 6촌 사이인 것.[135] 본인은 신경쓰지 않았으나 최익현보다 6살 많아서 최익현은 칼같이 형으로 불렀다.[136] 김옥균이 시어도어보다 7살 많다.[137] 매킨리를 암살한 사람이 본작에서는 생디칼리슴에 관심을 가져서 다이토 제도로 간 덕분에 얼떨결에 살아남았다.[138] 매킨리가 임기를 끝까지 이행했기 때문에 시어도어의 임기가 밀렸으므로 원 역사의 시어도어 2기~태프트 임기가 된다. 즉 시어도어 2선이 끝나기 전에 대전쟁이 끝난 것.[139] 소련은 유럽이 아니라고(...) 배제되어 독자적인 경제 블록을 갖고 있으며, 영국도 대공황 이후 자체 영연방 경제 블록을 창설해서 EU 블록에 속하지 않는다.[140] 이 때문에 UN 체제가 붕괴될 뻔했다가 UN 직속 핵실험이 성공하고 평화유지군과 IMF의 창설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141] 원 역사에서는 이때 이홍장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설립한 톈진의 개평광무국으로 갔다.[142] 하버가 특별히 악랄한 성격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당시 미국의 노동환경과 노동자 대우가 워낙 시궁창이다 보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시 미국은 지나친 저임금 때문에 조금만 올려달라 요청해도 빨갱이 타령하며 경찰과 군대가 기관총으로(!) 진압하던 강도 귀족 시절이라, 미국처럼 생각했다 일 난 것.[143] 형 윌버가 고향에 남자는 동생 오빌을 설득했다.[144] 정확히는 조선의 핵개발 연구가 UN 설립 이후 UN 산하로 넘어갔다.[145] 그린피스가 이미 방사성 낙진의 위험성을 밝혀낸 이후였기 때문에 남극해의 절도 한복판에서 연구했다. 당시에는 대황란(대공황)으로 인해 UN 체제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이었는데, 핵개발을 통해 UN의 억제력이 강화되면서 2차대전과 냉전이 일어나지 않고 세계평화가 유지되었다고.[146] 무함마드 5세의 백부이다.[147] 헌데 작중 언급을 보면 다른 산의 산신령들과 군밤을 나눠먹기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군밤왕 세계의 지리산에도 산신령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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