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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아
1.1. 조선1.2. 일본1.3. 대청1.4. 류큐1.5. 대남1.6. 시암1.7. 필리핀1.8. 하와이1.9. 인도
2. 유럽3. 아메리카3.1. 미국
4. 아프리카5. 기타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 철종 이원범
권신 하옥대감 김좌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계해년에 흥선군, 박규수와 손을 잡고 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세자로 지명하여 안동 김씨의 권세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당시 이미 중증 간경화를 앓고 있었기에 계해년 겨울에 숨을 거두었다. 그래도 말년에 입궁한 귀남과의 우정으로 약간이나마 구원을 받았다. 죽기 전에 팔자에 없던 임금 노릇을 하게 되어 고민하는 귀남에게 "욕심과 체면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소중한 사람들은 잃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는 듣는 이가 없어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강화도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1] 여담으로 이 작품에서는 원범의 첫사랑이라고 구전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양순'이 실재하는 인물이었으며 원범이 용상에 올라 안동 김문과 힘싸움을 벌이는 동안 역병으로 죽었다. 이후 112화에서 원래 역사와 같이 철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군밤 세계관에서는 원 역사보다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을 군주라는 감상이 많다. 세도정치 척결도 흥선군이나 박규수의 도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철종 생전에 이뤄져서 결국 사람을 잘 본 철종의 업적이라 볼 여지도 있고 훌륭한 후계자를 일찍이 알아보고 과감히 택하여 조선 근대화의 기틀을 닦은 군주라는 평가를 들을 가능성이 높다.
- 제27대 국왕 이척(李坧)
항목 참조.
- 왕세자 이은(李垠)
이척의 적장자. 원 역사 영친왕과 동명이인이다. 공부머리가 전부 누이 선경군주에게 가서 썩 명석하지는 못하다. 능청스러운 말을 영 능청스럽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와 판박이다. 언제나 공부하라고 달달 볶는 어머니 몰래 소설책을 읽고 할아버지인 귀남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낙이다.
또한, 순탄하게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은지라 단종 이후 조선 최고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왕이 탄생할 예정이다. 아버지가 명목상 장남은 아니었던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어차피 그 장남은 아버지 이척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도 넘기지 못하고 죽어서 자식이 없던지라 이은 본인은 명실상부 고종의 장손이 맞다. 거기에 이척의 세자시절에 태어난 세자와 세자빈의 적자이기까지 하다. 사실상 단종과 같은 세손(이자 적손 및 장손)-세자(이자 적자 및 장남)-왕이라는 조선 왕조 최강의 정통성이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1.1.1. 종친부
- 안양대군(安陽大君) 이규(李邽)
- 경양대군(慶陽大君) 이영(李坽)
- 흥선대원군 이하응
고종의 친부. 권위적이고 자신의 권력욕을 사직과 전주 이씨 왕실을 위한 것이라고 자기합리화하며 종실의 부흥이 곧 조선의 부흥이라고 생각한다.[2] 장남 이재면의 등과를 청탁하러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 찾아갔다가 모욕을 당한 날, 귀남이 일종의 뇌물로 준비한 군밤을 먹고 부모님께 바치겠다고 없는 손재주로 성심성의껏 이토록 맛있는 밤을 준비했다고 감동한 것을 계기로 작은 아들(사실은 귀남)과 원 역사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주인공 귀남도 '잘은 모르지만 흥선대원군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도 하고 전생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기에 현생의 몸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우호적으로 대한다.
원 역사처럼 섭정 노릇은 못했지만, 만민공산당의 실질적인 영수이자 조선판 국가 헌병대격인 공안서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사실상 정권의 2인자로 수십년간 군림했다. 참고로 아버지 흥선군이 세운 당명을 들은 귀남은 당연히 경악했지만 다들 좋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귀남에게는 공산당이 왜 나쁜지 설명할 능력이 없는지라 바꾸지 못했는데, 얼마 안 가 공산당 내부에서 과격 파벌이 나오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 아들의 선견지명에 재차 놀라게 되나 이후에 어떻게든 해결한 이후로는 흥선군이 류큐로 여행을 갈 때 자신의 부재에도 자기 밑에서 일하는 공산당이나 공안서가 있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직하게 생각한다. 아무튼 일인지하일지언정 만인지상인데다 국운은 창성하고 종실의 권위는 드높아지며, 평생 숙원이었던 경복궁 재건까지(역사보다는 늦은 시점이지만) 눈으로 보아 본인도 만족하였다. 자신의 과오도 감싸주고 믿어주는 아들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워하고 있으며, 후반으로 갈수록 아들에 대한 평가가 점점 믿음직해지는 것도 볼거리. 류큐에 다녀오기 전에는 이렇게 일들이 너무 잘 돌아가다 보니 오히려 살아가는데 권태를 느낄 지경이었다.
이후 1898년에 김병학의 장례식의 조문을 가다가 풍을 맞아 쓰러지는데 그 상황에서도 '자신이 쓰러져서 사람들 이목이 죄다 몰리면 죽은 김병학에게 실례일까?'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지만 의식이 흐려지면서 마음이 약해졌는지 애잔하게 주상이 보고싶다며 유언에 가까운 넋두리를 하는데…. 정작 그런 본인이 침상에서 눈을 떠가지고 주상에게 심려를 끼쳤다며 내심 쑥쓰러워한다. 하지만 노환에 풍까지 맞아 더이상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손에도 힘이 들어가질 않아 잘 하던 난 그리기도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노회한 정치적 감각으로 꾀를 내어 청나라, 일본과의 삼국평화의 안을 마련할 계기를 만들어낸다.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와 생전 마지막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나라를 위하여 서로의 목적을 두고 숱하게 충돌했던 과거의 소소한 앙금을 푼다. 이때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선뜻 호의를 배푸는데 오쿠보가 아무 생각없이 조선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는 이하응의 난 그림을 부탁하는데 상술한 것처럼 이하응은 이미 노환으로 붓 쥐기도 힘든 상황이라 잠시 말문을 잃는다.[3] 이후 오쿠보가 부탁했던 난 그림을 그리던 와중에 김가진, 김옥균과 만나 아들을 부탁한 뒤 계속 난을 그리다가 불현듯, 아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최후의 그림으로 아들이 구워준 군밤을 그린 뒤 오쿠보에게 보내준다. 그리고 그날 밤, 자는듯이 조용히 눈을 감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애타게 아들을 찾았던 원 역사와 달리 아들 녀석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따로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 흥인군 이최응
흥선대원군의 셋째형. 병학 형제의 청탁을 받고 동생을 찾아가 "안동 김문의 여식을 간택해야 종실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였다.
- 완흥군 이재면
흥선대원군의 적장자. 귀남이 명복의 생을 시작했을 때 이미 혼례를 치르고 별채에 머물고 있던 터라 별로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지만 글공부를 어려워하는 귀남을 위해 이야기책을 구해다 주기도 하는 등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186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있다가 1866년에 도승지로 승진했다. 자영과의 결혼을 고민하던 귀남에게 정순왕후 김씨의 야사를 들어 "품성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작중에서는 종친들이 널리 등용되지 않았기에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숭되면서 군호를 받았다.
- 이지용[4]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흥인군 이최응의 양손자이다. 원 역사와 달리 종친 우대 정책이 없었기에 사실상 한량으로 지내다가 경양대군과 함께 조정에서 직접 제작한 실록 기반 역사 활동섭영(영화) '실록영연'의 첫 작품 '조개홍업'을 제작했다. 이 일로 권세 맛을 보고서는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어 이완용이 주도하는 일진회에 가입했다. 원산을 방문한 시데하라 기주로와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그만 주먹질을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기주로에게 직접 사과하라는 명령을 내린 한편, 실록영연에 연산군 역으로 출연하라는 어명을 내렸다.[5] 다만 그 외의 실형을 내리지는 않았는데, 마키노 노부아키 조선주재 일본 대사는 이 일이 자칫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 문제로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서 국법에 따라 처벌하진 말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1.1.1.2. 내명부
-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
효명세자의 정비. 철종이 승하하기 전 흥선군에게 명복의 즉위를 승인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끈질긴 설득에도 귀남이 도무지 후궁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단념하고 관례를 마친 세자의 국혼을 추진하였는데 "장차 축첩을 금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하여 평생 사내를 알지 못하는 궁녀들 이야기를 꺼내며 부디 재고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귀남은 "그럼 궁녀들의 결혼을 허하겠다"며 축첩 금지를 그대로 추진했다.
- 대비 민자영
조선의 왕비. 원 역사의 명성황후. 귀남이 간택 때 던진 질문인 '자신이 군밤 장수의 아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옆에서 같이 고구마라도 구워 팔겠다'라는 명답을 남겨 왕비로 간택되었다.[6] 원 역사의 명성황후처럼 권력욕이 무척 강하다. 본인 왈 "한 번 있는 젊음을 불태워 닿는 데까지 달려나가고 싶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귀남의 변함없는 애정(첩 없음) 및 적당한 수준에서 권력욕을 발휘할 길을 터준 덕분에 성질이 많이 가라앉았으며, 친정 식구들, 특히 민승호와 사이가 갈라진 탓에 결과적으로 원 역사와 달리 여흥 민씨를 끌어들여 패악질을 저지르지도 않게 됐다. 시아버지와의 사이도 양호해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이 죽은 뒤 종실을 뒤에서 받칠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 물론 만만치 않은 권력욕의 화신인 흥선군인데다 중전도 아직 젊은 만큼 권력을 간단하게 내주고 있지는 않으나 천천히 흥선군에게서 정보자산 등을 물려받고 있는 중이다. "(자청한) 일의 산에 파묻혀 있을 것"이라고 류큐로 유람간 대원군이 평했을 정도. 물론 조선국 국제 제정에서도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데 반대하면서 운현궁에 연락하는 등 원 역사처럼 러시아와 같은 제정국가를 원하고 있지만 귀남이 강경하고 대원군도 간신이 나와 종실을 흔드는 것을 방지하는데 동의하면서 실패하기도 하는 등 권력욕은 여전한 것 같다.
엘리노어 마르크스 사건으로 여권 신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자 '감고당 문문(門文)씨'라는 필명으로 몰래 한 신보에 선비들의 고루한 여성관을 규탄하는 논설을 투고하였는데, 귀남에게 딱 걸렸다. 귀남에게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글을 자신이 썼다는 것을 모를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글쎄? 문문은 자영의 성씨 민(閔)을 파자한 것이고 '감고당'은 자영의 생가다.
운현궁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일이 넘어오고 타국의 공사 부인들을 통한 소식을 정리하는 등 많은 격무에 시달린다. 이러다보니 부쩍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도 하고 나이도 40살이나 먹었는데 그냥 만족하고 물러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1898년 시점에서는 나이 들어 눈도 침침하니 공안서 일에서는 손을 떼고 궁내부 일만 맡아 보고 있다. 1901년 기준으로 대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명실상부 왕실의 큰 어른이 되었다. 한때 집안이 어려워 고생한 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둘째며느리인 조별단과 사이가 좋다.
- 왕비 김명숙(金明淑)
조선의 세자빈. 광산 김씨 가문의 방계 집안의 영애이다. 원 역사에서는 여흥 민문의 민태호의 여식이 세자빈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외척의 자리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아는 민태호의 은근한 반대로 다른 사람이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세자와 금슬이 좋은지, 결혼한 지 5년 만에 원손과 군주를 낳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동시에 냉정한 성격으로 자육원에서 배운 지식으로 자식들을 직접 가르치는 손아랫동서 별단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다. 과거 자영이 세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세손에게 "언제고 왕이 될 몸이니 열심히 학문을 닦으라"고 강조한다.
- 선경공주(璿慶公主) 이연(李姸)
이척과 명숙의 장녀. 이은의 누나이다. 모계로 내려오는 공부 머리가 한데 모였는지 총명하여 세손에 버금가는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 여흥부대부인 민씨
고종의 친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본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대원군과 함께 국비로 류큐 관광을 가는 등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김옥균 내각에서 교첩제를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자 정식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 창녕부부인(昌寧府夫人) 조별단
원 역사 이화학당의 2호 입학생. 마포 사는 변변치 못한 집안의 여식이다. 딱 부러진 성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자육원에서 일하면서 때때로 수업을 듣고 있다. 말하자면 자육원의 근로장학생이다. 1889년에 자육원 옆에 위치한 다방 겸 빵집 유월당에서 안양대군과 만났다. 안양대군을 그저 반가의 자제로만 알고 때때로 만나면서 서로 좋은 감정을 키웠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년이 지났을 때 안양대군으로부터 왕족이라는 고백을 들었다. 일부 종친들이 별단의 신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귀남과 총리가 된 김옥균의 도움으로 안양대군 이규와 무사히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 1남 1녀를 낳았다. 시어머니인 자영 역시 가세가 기울어 고생한 기억이 있기에 별단에게 잘해주어 고부관계는 좋은 편이지만 손윗동서이자 세자빈 명숙과는 세자빈의 냉정한 성격 탓에 영 껄끄러운 관계이다.
- 섬라국부인(暹羅國夫人) 발라야 알롱꼰 (=섬라국부인 차씨)
짜끄리 왕조의 옹주. 라마 5세와 후궁 사왕 아타나 사이에서 태어났다.[7] 학구열이 강하고 검소하며 서구 문물과 여권 신장운동에 관심이 많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경양대군이 일부러 라마 5세가 싫어할 만한 군민공치를 주변에 강조하고 다녔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며 1904년에 평양에서 열리는 아주대회에 시암 선수단을 이끌고 나타나 오붓한 시간을 보냈고 기어코 1905년 가을 결혼에 골인했다. 어엿한 왕족이라서 대군의 처인데 부부인이 아니라 국부인을 봉호로 받았다. 경양대군과 함께 그나마 시암과 기후가 비슷한 제주도에 별장 자리를 찾고 있다.
1.1.2. 조정
1.1.2.1. 문관
- 남종삼
원 역사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 불어에 능통하여 을축양요 때 통역을 맡았다. 귀남이 "베르뇌 주교를 기리는 학당을 세우자"고 제안하자 감동하여 눈물을 보였다.
- 신헌
을축양요 때 벨로네를 상대했다. 벨로네가 허튼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정운구에게 소란이 일어나면 데려온 병사들을 단속하면서 문수산성으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프랑스군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 정운구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후 외인들과 교섭한 경험이 있다고 수신사의 정사로 나서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조일 양국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자립국이지 자주국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흘러나가 아이즈 낭인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다.
- 이유원
원 역사에서 영의정을 역임했고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중신. 여기서는 박규수 다음의 통리기무아문 2대 총리대신이 되어 징병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개화 사무를 담당한다. 전임자가 그 환재 대감이다보니 구관이 명관 소리도 듣고, 어째 도맡은 개화 사무가 죄다 군무와 관련된 것이어서 세간에는 대장 총리로 유명하다. 이후 육조와 통리기무아문을 합치는 관제개혁을 제안하고 본인이 그 영의정 겸 총리대신이 되려고 했지만 육조의 견제로 오르지는 못하였다.
- 홍순목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아버지. 아들 홍영식이 일으킨 갑신정변 때문에 음독자살한 원 역사와 달리 여기서는 무탈히 지내고 있다. 조정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립적인 행보를 보여 국제가 선포된 후 이유원 대신 영의정 겸 총리대신이 됐다.
- 장성공(章成公)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
원 역사에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일으킨 그 오페르트다. 홍콩에서 사업을 말아먹고 조선으로 건너와 크게 해먹을 건수를 찾던 중 운산 금광의 존재를 확인한 오페르트는, 영국을 견제할 심산인 주조선 프랑스 공사인 벨로네 공사를 빽으로 삼아 운산 금광 채굴권을 획득, 한 밑천 잡아볼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벨로네 공사의 소개장을 들고 호기롭게 대원군에게 접근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 현대에서 사기당한 기억으로 '큰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접근하는 놈은 사기꾼'이라는 현대인의 상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귀남에게 코가 꿰어 졸지에 등용당하며 조선 역사상 최초의 색목인 당상관이 됐다. 프랑스와 이권을 나눠먹자고 해놓고서 졸지에 프랑스와 영국을 뒤통수 친 모양새가 되었고, 영프 양국으로부터 경계를 받게 된 오페르트는 이제 기댈 구석이 조선밖에 없으니 벗겨 먹을 생각을 포기하고 '이광도감'의 '오배'로서 금광 개발에 전력을 다하게 됐다.
개발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지금은 이광도감이 국영 광업회사라고 할 수 있는 광무총국으로 승격되었으며, 그곳의 사장이 되었고 따로 '오씨양행'이라고 무역회사를 하나 차렸다. 자기 사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계속 사직을 청하고 있으나 번번히 윤허되지 않는 중[8]으로, 결국 수염이 산신령 수염이 될 때까지도 사직하지 못하고 조정 원로가 되어버렸다.[9]
본인 심정이야 어떨지 모르나 대외적으로는 조선에서 성공한 외국인으로 이름이 꽤 알려졌으며, 어쨌든 극동을 본진으로 두고 있다보니 원래 인도 철학 및 드라비다어를 전공하던 동생까지 동아시아 전공으로 반강제로 바꿔놓았다. 1891년경 드레퓌스 사건 즈음 해서 집안이 파리의 랍비 명문가인 드레퓌스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게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오지랖 넓은 조선 곳곳에서 오만가지 걱정을 해주며, 이를 도우라는 뜻에서 조정에서 사직을 시켜버린다.
정작 그 사돈댁은 드레퓌스 대위 집안과는 이름만 같지 전혀 관련없다.[10] 물론 사건 자체가 심각해서 사돈댁에서도 같은 유대인으로서 드레퓌스 대위를 지원해 달라고 오페르트에게 요청했고, 결국 조선 측과 오페르트가 여론전에 가담한다.
여론전과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수사로 드레퓌스 대위가 풀려난 후 테오도르 헤르츨과 나눈 대화에서 "오스만의 부채를 해결해 주기라도 하지 않는 한 우리네들이 팔레스타인에 눌러앉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가 알래스카나 루이지애나처럼 팔레스타인을 당당하게 사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헤르츨이 유대 복지재단을 세우는 계기를 제공했다. 김홍집을 통해 사건 전말을 전해 들은 귀남은 마침 궁방전을 매각하고자 했으나 민간에서 사들일 금력이 부족해 팔지 못했던 상황이니 유대인들에게 그 땅을 빌려주자 제의하고, 농사일에 익숙하던 동유럽 유대인들이 이민을 와 궁방전에서 키부츠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키부츠는 근처의 공산당원들에게 소개되어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는다. 사건이 해결된 후 광무총국 사장 자리에 복직하진 않았으나, 후임을 위해 광무총국 자문직으로 활동한다.
이후 1902년에 마침내 광무총국 자문직도 내려놓고 완전히 야인이 됐다. 이제 운산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지 자기보다 30살 어린 조선인 처를 데리고 동포들이 사는 양주로 내려갔다. 이후 말년에 단군이 사실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11] 1906년 무렵 사망하였다. 최종적으로 품계가 자헌대부(정2품 하계)까지 올라가 장성(章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의대부를 빼면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급의 매우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셈이다.
- 서형순
주프랑스공사. 최익현을 도와 파리 코뮌 구성원들을 조선으로 탈출시켰다.
- 이호준
이완용의 양부. 원 역사처럼 대원군의 사돈으로 겉으로 군자 노릇하면서 상대 비위 맞추기가 장기다. 1876년에 친조선파를 육성하라는 대원군의 명을 받고 주영공사로 부임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규장각 제학을 제수받았다.
- 홍종우
원 역사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것으로 유명한 온건개화파의 일원. 원 역사에서는 명문가 말예로 가정 사정이 좋지 않아 나이를 많이 먹고서야 자비로 프랑스에 유학을 갔는데 여기서는 조선이 수교를 할 때 유학생을 보낸다는 사실을 듣고 20살에 홀로 상경하였고 그걸 기특하게 여긴 귀남이 유학에 포함시켜줘서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된다. 도착하고 얼마 안돼서 프랑스어를 익혀 신문을 김병학에게 번역해주기도 했다. 나중엔 호조정랑에 올라 특허관련 사무를 본다. 이후 최익현 내각에서 호조의 재무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유학가서 배워온 학문으로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인물이다보니 서민경제에도 정통하고 경제이론가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재무관료로 활약중이다. 김홍집 내각에서는 마침내 호조판서 자리에 올랐다. 이후 노벨이 수학이 인류 복지에 도움이 안된다고 노씨권학상에서 수학 부문을 제외한다는 소식을 듣고 빡돌아서 직접 나서 설득했고[12] 수학이 수상 항목이 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전봉준 내각이 출범하면서 퇴직에 성공, 현재 노사학원에서 재무학과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 이용익
원 역사 대한제국의 군부·탁지부대신. 대원군이 부리는 보부상들로 이뤄진 익문사가 공안서로 이어졌는데 보부상 출신인 그도 공안서에 근무하게 되었다. 상업의 재능은 여전해서 은 소동때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팔아 손해를 보지 않았고 관광 붐이 일어날 때 금강산에 여각을 짓기도 하였다. 베델과 함께하는 사업도 진행중이라고. 김가진이 방황하던 시기 잡아서 대원군에게 데려갔던 이력 때문에 김가진의 직속부하 취급 받는 중. 역사에 남은 대로 발도 빠르다. 그래서 공안서 어느 국의 국장에 취임하여 북경에 파견 나갔을 때 신행태보 소리를 들었다. 이재에 밝아 세족들이 사업 경영하는 것 감시에 도통하여 김가진의 추천을 받고 전봉준 내각의 재무참판으로 영전했다. 퇴직한 홍종우가 다시 복귀하는 것을 끝내 거절하여, 김옥균 2기 내각에서는 호조판서로 품계가 올랐다.
- 김가진
김응균의 서자. 대원군이 북벌을 목표로 은밀히 육성하고 있는 무관들과 어울리다 병학, 병국 형제에게 찍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게 됐고 그곳에서 세상을 두고 울분을 토하다가 한 순간 말실수로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민자영이 구축한 정보망에 그 사실이 적발되었고 대원군의 눈에 띄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의 수족이 됐다.
인민의 의지를 따라 조선을 방문했던 레닌과는 묘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레닌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속으로 잘 가다듬으면 난세를 일으키고 마무리 짓는 천하의 효웅이 되든, 후대에 길이 그 가르침 남기는 철인이 되든 할 것이라 평하였다.
원세개를 축출하려다 역으로 함정에 당할 뻔한 후 심기일전하여 대원군과 협의 후 정식으로 공안서의 직책을 맡게 된다. 1894년 정초를 기해 공안서 총관 자리에 오른다.
- 윤태준
주독일공사. 베를린 회담에 참석해 프랑스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조선의 발전을 도왔는지를 세세하게 증언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에게 바둑판을 진상했고, 사교장에서 농반 진반으로 자신이 동방의 고대 비법 침술을 쓸 줄 안다고 자랑했다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황태자비의 부탁을 받고 당시 황태손이었던 빌헬름 2세의 팔에 침을 놓기도 하였다.
- 주시경
국어학자. 국문교정청의 괴짜 신동으로 유명하다. 겨레의 말과 글이 주전공이기에 종종 경화시보에 논설을 투고한다.
- 정병하
원 역사 대한제국의 농상공부 대신. 김홍집 내각의 문교참판이다.
- 이유승
원 역사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아버지. 자유당의 추천을 받아 김홍집 내각의 좌의정 자리를 채웠는데 젊은 날에도 하지 않았던 밤샘을 일흔 가까운 노구로 하다 보니 반년 만에 과로로 쓰러졌다.
- 조민희
원 역사 경술국적의 일원. 좋게 말하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다소 용렬한 외무관료이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처럼 중한 곳에 보내기에는 연륜이나 자질이 한 급쯤 떨어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사로 부임했다.
- 여조현(=여준)
원 역사 독립운동가. 외국 말에 능통하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민영환의 뒤를 이어 영국 공사가 되었다. 사실 본 뜻은 언제고 조선 땅에 훌륭한 학교를 세우는 데 있다.
- 김창암(=김구)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2~4대 주석.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반상의 구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니 반드시 양반이 되어라"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상경하여 같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안인수 댁에서 식객으로 있으면서 고시를 준비한 끝에 당당히 형조 좌랑이 됐다. 안인수댁에서 머무는 동안 또래 안중근과 절친한 사이가 됐다. 이후 김가진의 눈에 띄어 공안서로 부서를 옮기게 됐다.
1.1.2.2. 무관
- 천덕만
천하장안 천덕기의 조카. 실존인물이 아니다. 총각 시절 운현궁 옆골목에서 군밤을 팔던 중 우연찮은 계기[13]로 귀남과 우정을 쌓게 됐고 그가 개똥이가 아니라 조선의 임금 이형이 된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귀남이 궁궐로 입궁한 이후에는 기막히게 군밤을 굽던 귀남이 사라졌으니 손님이 대거 빠져나가서 고생좀 하다가 우연히 즉위한 귀남을 다시 만나서 잠시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14] 이때 가볍게 신세한탄을 하는데 귀남이 어린시절 옛정을 봐서 최한기를 소개시켜 주며 총 쏘는 공부를 하도록 도와줬고, 이후엔 무과에도 급제하며 어엿한 무관으로 전직한다. 그런데 얼마 안가 벌어진 을축양요에 참전하여 실전을 겪으며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후 스승인 최한기의 딸과 결혼했다. 최익현 내각 때 조선군 부령(중령)까지 올랐는데, 구름재댁 시절 같이 효자율 팔던 옛정으로 귀남옹이 아이디어를 빌려줘서 조선군에 군가 도입을 건의한다. 1900년에 전역하여 효자율 굽던 경험을 살려 제과회사를 차렸다. 주력 제품군은 효자율 레시피를 응용한 밤과자. 아라사 땅에서 대박을 쳤다는 이야기는 현실의 초코파이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현대 시점에서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유서깊은 기업이 되었다.
나름 인생의 굴곡을 겪었지만 이래저래 친구를 잘 만나 신세가 편 인물. 하지만 단순히 임금의 어린시절 친구라는 뒷배만 믿고 거들먹 거린게 아니라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발품을 뛰며 노력을 멈추지 않는 올바른 사람됨[15]을 지녔다. 만인지상을 친구로 둔 행운을 지녔음에도 경거망동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 행복한 인생을 쟁취할 수 있었던 셈이다.
- 정운구(鄭雲龜)
원 역사에서 최제우를 체포한 선전관이다. 을축양요 때 문수산 싸움에서 운칠기삼으로 공을 세워 명장으로 소문이 나 무관으로 출세한다. 관제개혁 후에 새로운 병조의 첫 판서로 취임했다. 판서가 될 서열은 아니었지만 실무에 밝다는 평으로 판서가 됐다. 판서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군부의 원로로 존경받는다.
- 한성근
병인양요 문수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른 무관. 을축양요 때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나 정운구를 구했지만, 연줄이 많지 않았기에 그리 영달하지 못하다가 엄익관 교수 자리를 얻었다. 이후 정축년에 공친왕이 난을 일으키자 1만에 달하는 북벌(?) 원정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아사 직전의 난민을 구휼하고 산적 무리를 토벌하는 등 동삼성의 민심을 수습했다.
- 양헌수
병인양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른 무관. 이항로를 모시는 모습으로 첫 등장하였고, 이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앞두고 조선이 평화유지군인 지전보평군을 보내자 지전보평군 부원수가 되어 지전보평군 도원수인 최익현을 보좌했다. 그 뒤 베트남 공사가 된다.
- 홍계훈 (=홍재희)
원 역사의 을미사변 때 일본군을 막다가 장렬히 사망한 무장. 엄익관 장교 과정을 마치고 참령(소령)으로 진급한 뒤 무위영에 부임했다. 대원군이 이끄는 북벌 사조직에 참여하였고 정축년에 공친왕이 난을 일으키자 한성근이 이끄는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후 세자의 군 입대 문제가 불거지자 종친은 적어도 참위(소위)는 되어야 하니 이참에 학사장교 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16]
- 한규설
원 역사의 대한제국 참정대신. 동분서주하여 경무서에서 분리된 구급서를 번듯한 관청으로 키워냈다. 덕분에 신묘년 넘어가던 무렵에 일어난 일개 동이 전소한 대형 화재에도 인명은 크게 상하지 않았다.
- 이규원
원 역사 조선 말의 무인. 군부의 숙장으로 통제수사의 통제사다.
- 이민굉(李敏宏)
원 역사 춘생문 사건의 주동자 중 하나. 계급은 정위(대위). 드라이브에 나선 안양대군을 시위하였다. 제 나름대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안양대군이 모는 차와 충돌한 노면전차의 장차수(차장)와 탑승객들을 투옥시켰으나 일이 더 커졌다.[17]
- 노백린
원 역사 대한제국군 출신 독립운동가. 알헤시라스 회담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김홍집의 경호원으로 발탁됐다.
1.1.2.3. 격치물성청
- 변수
원 역사 보빙사의 일원. 갑신정변이 일어나지 않아 무탈하게 공조에서 일하고 있다. 고생하는 안양대군에게 큰 권한에는 큰 야근이 따르는 법이라는 농을 던졌다. 이후 격치물성청이 생기고 퀴리 부부가 합류하면서 그 운영을 맡았는데 사람 좋은 피에르와 일 잘하는 마리와 함께 일하고 안양대군이 직책도 맡아 일도 편하고 앞길도 창창하다고 생각하던 중 걸어다니는 천공개물 테슬라를 떠맡게 되어 달래랴 말리랴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 퀴리 부부
소르본 대학교의 초임교수로 쪼들리며 살다가 안양대군이 던진 공수표에 혹해 갓 태어난 장녀 이렌 퀴리를 데리고 조선에 정착하게 됐다. 부부가 함께 조선의 국립연구소인 격치물성청의 일을 맡고 있다. 또한 안양대군의 과학기술용어 표준화 사업도 돕고 있으며 성균관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다.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1907년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후임으로 원 역사에서 아세톤 대량생산법을 발명한 하임 바이츠만을 추천했다. - 피에르 퀴리
영혼에 전자기적 성질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진령군의 굿판을 참관하여 자기장을 계측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하였다가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기운'이 묻을 수 있으니 관두는 것이 좋겠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 '부정 탄다'를 적당히 포장한 말을 듣고 정말로 신이라도 들렸는지 '관측이 결과를 바꾼다'는 개념을 떠올리고 지금으로서는 해명하기 힘들지만 후대에 도움이 되도록 수식으로 정리해두었다. 1906년, 보도의 포석에 미끄러져 지나가는 자동차에 부딪혔는데 천만다행으로 원 역사와 달리 죽지 않은 대신 다리를 조금 절게 되는데 그쳤다. 정작 본인은 마차였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골때리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이러니 할 따름. - 마리 퀴리 (=마리 스쿼도프스카)
조선이 동맹국인 러시아와 갈등을 빚으면서도 폴로늄이라는 이름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자신을 변호해주자 이에 감동하여 폴로늄에 이어 새로 발견한 원소를 조선의 이름을 붙여 '조소늄'으로 명명했다. 이후 테슬라의 특허 남발과 관련해 정강사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오자 조소늄의 무기화를 용납할 수 없어 직접 경양대군에게 따졌다. 실제로 테슬라의 발상 중에 비슷한 생각이 있어 마리 퀴리의 우려가 맞는 말이었기에 귀남이 테슬라에게 일상물품을 먼저 구상하게끔 하는 제재를 가했다.
- 니콜라 테슬라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인 전기공학자. 조선에서 대선 토론회를 마르코니가 개발한 무선 통신으로 중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J. P. 모건이 워든클리프타워 건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져 봉준을 찾아가 자신이 무선 음성 송수신의 원조라며 후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때 자기 PR이 지나쳐 모택동과 달리 농사 경험이 어지간한 서구 지식인들보다 해박한 봉준에게 지금 조선이 처한 농업 문제 해결 방안이 자신에게 있다며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씨앗을 심는다면 생산량이 증가한다', '자신의 발명품으로 참새 같은 유해조수를 일소할 수 있다' 같은 헛소리를 했다가 쫓겨날 뻔 했으나 이후 그나마 어뢰 등 쓸만한 발명품 설계도를 제시하여 조선의 후원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의 구상 중 조소늄의 무기 활용[18]이 있어 마리 퀴리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귀남으로부터 일상용품부터 구상하라는 뜻으로 전기장판에 대한 의뢰를 받는데 이것저것 기능을 집어넣어 개발예산이 초과되어 홍종우가 예산을 주지 않자 빡돌아서 "그럼 혼자 계산하는 기계 만들어 줄게요!"라 말하며 그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 받기로 했다.
이후 전기장판을 제작해서 귀남에게 올리기 전에 내관이 처음 시험을 해봤는데, 그만 과열로 불이 나 버렸다. 이렇게 된 이유가 웃기는데 테슬라의 해명에 따르면 상식적으로 몸을 통째로 구우려 작정하지 않고서야 그 뜨거운 걸 밤새도록 틀어놓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제작한 게 탈이 나 버린 것. 다만 이런 전기장판 과열로 인한 화재 사고는 현대에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안전사고인 지라 마냥 테슬라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래도 테슬라답게 보료에 가깝게 개조하여 기어코 전기장판을 발명해냈다. 이후 호조가 의뢰한 자산기(테슬라 자동 연산기계) 개발에 들어갔는데 야심껏 진공관과 기타 복잡한 전기의 기법을 총동원한 1호는 시연하던 중 진공관 4개가 동시에 터져버렸고, 전기를 최대한 배제한 2호는 특정 연산을 빠르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여러 용도로 두루 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마지막 3호는 절치부심 끝에 검증된 천공카드를 기반으로 했는데 허먼 홀러리스의 특허를 침해하고 말았다. 그래도 자산기 2호를 토대로 사격통제장치를 발명해냈다.
이후 잘 진행되지 않던 자산기 개발은 내버려두고 라디오나 개량해보라는 귀남의 말을 듣고 새로운 라디오를 개발했으며 이 제품이 이용익의 수완에 힘 입어 큰 인기를 얻자 거기에 빠져 격치물성청에 출근도 잘 안한다고.
이렇게 조선에서 명성을 떨치던 중 국제적으로 이름 알린 세르비아인이라는 것 때문에 혼란하게 돌아가던 동유럽 판국에 얽히게 된다. 본인은 라디오나 신제품 팔아먹을 궁리나 하면서 평소와 같은 언행과 태도로 그를 모셔다 놓은 코치치의 속을 뒤집어 놓지만 결과적으로 과격파들의 선동에 개입해 자해쇼[19]를 벌여 과격파 다수를 구속시키는 대활약을 펼치며 프란츠 대공의 암살을 막아낼 수 있었다.
개변된 역사의 2013년에서 태씨공행의 반도체 기술은 공안서가 도깨비를 잡아다 바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잘 먹고 잘 살다 갔을 확률이 높다. 물론 최후가 씁쓸했던 본래 역사에서도 본인과 관련은 없지만 본인만큼 기인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웬 전기차 회사를 세웠지만.
이래저래 귀남이 일으킨 선의의 나비 효과의 산증인 중 하나로 본인도 이를 알고 있는지 "조선이 아니었다면 늘그막에 쓸쓸하게 살다 굶어죽었을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남겼는데 본래 역사에서 그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얄궂을 따름이다.
- 프리츠 하버
유대계 독일인 화학자. 조선과 독일의 거래로 격치물성청에 합류하여 암모니아 합성 공법을 개발하게 됐다. 딴에 애국한답시고 테슬라와의 대화를 본국에 보내어 중간에 낀 에리히 레더를 괴롭히고 있는 중. 또 염소를 이용한 독가스 개발을 진지하게 추진하려 해서 마리 퀴리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게 귀남의 귀에도 들어가는데 대경하거나 일갈하는 반응 대신 시시하다는 반응[20]과 함께 그보다는 차라리 제충제를 개발하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듣고 DDT를 개발하게 된다. 그런데 DDT라는 게 문서를 읽어봐도 효과 하나는 끝내주는지라, '끔찍해서 전쟁을 할 생각도 들지 않을 무기'는 만들지도 못했는데 '쓰잘데기 없는 벌레 잡는 약' 따위를 뭐에 쓰겠냐던 하버는 그 벌레 잡는 약 때문에 퀴리 부부의 후임으로 찾아온 하임 바이츠만에게 파나마에서 오는 소식을 들었다며 찬사를 받고 어안이 벙벙했고, 퀴리 부부가 프랑스에서 과학단체의 첫 발걸음으로 DDT 보급을 내세운다는 말에 어이가 털렸으며, 조선이 하버의 발명임을 밝힌 덕에 독일에서는 훈장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곤 결국에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 신채호
원 역사 역사학자. 대단히 총명하고 무엇보다 가장 연소하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성균관 과학·공학 박사로 재직 중 대제학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격치물성청에 발령받았다. 과학에는 딜레탕트 수준이지만, 하버가 딴짓하지 않는가 살피라는 명을 충실히 받들어 눈에 불을 켜고 학문을 닦으면서 끝 없는 질문으로 그를 성가시게 만드는 동시에 나름대로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여담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 아닌 나날이 국운이 창성하는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 보인 유교에 대한 적개심이 전혀 없다. 오히려 하버를 설득하면서 유교 고전을 인용할 정도이다.
1.1.3. 참의원
1.1.3.1. 개화당
- 문충공(文忠公) 박규수
- 유홍기
개화당의 서기. 박규수, 오경석과 함께 조선 개화를 위해 오랫동안 움직여 왔다. 초기 개화당 3인방 가운데 모사 역할을 맡았다.
- 박정양
박규수의 먼 친척. 원 역사에선 박규수 밑에서 수학하고 온건 개화파의 일익으로 초대 총리 김홍집 다음의 2대 내각총리도 지낸 인물. 여기서는 재능을 눈여겨본 박규수가 반남 박씨 문중의 사업과 개화당에서의 위치를 뒤이을 후계자로 점찍어 키우고 있다. 거기에 박규수가 책을 낸 이후 한글전용 관련 업무를 주관하는 국문교정청을 만들도록 한 것도 이 사람의 노력. 박규수 사후 반쯤 떠밀려 개화당 대표가 됐다. 제2회 총리대신 추거에서 낙선한 뒤 당 대표 자리를 내려놓고 참의대부 자리만 유지하고 있다.
- 금릉위 박영효
철종의 부마. 국운이 기울었던 시절을 모르는 젊은이라 다소 경솔한 면모가 있다. 원 역사와 달리 종친들이 등용되지 않아 개화당 내각이 들어설 때도 당무만 맡았다. 그러던 와중 별 생각 없이 가문 자랑할 생각으로 '실학'의 계보를 밝히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문중 안팎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나씩 끼어들면서 열성조 이래 경세치용 말한 선비들의 글을 모두 모아 정리하는 일대 대사업이 됐다.
- 김병학
김좌근의 조카. 병국의 형. 귀남이 즉위한 후 개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해외 열강에 사절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에 "조선이 대국 몰래 양이에 사절을 보내려고 한다."라고 밀고했는데 딱 걸려서 멸문지화를 당할 뻔했지만 귀남이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그로 인해 직접 사절에 참가하여 서양 각국을 순방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현실을 알고 친유럽파로 성향이 바뀌었다. 원래 1879년에 죽는데 박규수가 세운 서양식 의원에서 내린 처방에 따라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기 시작해 아직까지 잘 살아있다. 덤으로 바이올린 연주 감상에 재미를 붙였다.북을 반주로 하는 바흐 파르티타이후 1898년 봄에 자는듯 숨을 거두었다. 원 역사보다 19년은 더 산 셈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김병학의 조문을 찾아온 이하응이 갑작스레 풍이 들어 쓰러진 탓에 자신의 장려식이 졸지에 뒷전이 되어버리며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이하응에게 물을 먹고야 만다.
- 김병국
김좌근의 조카. 병학의 동생. 원 역사처럼 형보다 개화에 우호적이다. 경복궁 재건을 주장하다가 꼬여[21] 안동 김씨가 전국의 도로를 맡아 확충하는 건설 재벌로 탈바꿈해가면서 그에 도움이 되는 공조판서등의 관련 실직을 도맡아 하고 있다.정경유착개화당이 부르주아 위주의 정당으로 변모해가자 형 병학과 같이 개화당과 함께 행동한다. 파리 세계박람회에 참여하면서 에펠탑을 보게 되는데, 이를 보면서 "복층건물 건설이 국토가 좁은 조선의 미래"라고 말하며 감탄한다.
- 김병시
원 역사 안동 김문의 마지막 거물 정치인. 집안 위세 대신 스스로 얻는 것으로 현달하고자 하는 자세는 원 역사와 같지만 본작의 김병시는 수구적인 척화파가 아니다. 관제 개편 이후 호조판서를 맡고 있다. 참의원 개화파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든 권력을 혼자 쥐고 흔드는 세도정치에 익숙한 안동 김문의 원로들은 이런 그를 보고 '그릇이 작다'는 평을 남겼다. 제1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 개화당 후보로 나섰으나 최익현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최익현이 내각의 첫 공조판서로 발탁했다.
- 충문공(忠文公) 김옥균
- 서재필
원 역사 독립협회의 창립자. 본작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지 않아 개화당의 당원으로 유유자적 지내고 있다. 석전을 대체할 스포츠로 야구를 밀었으나 장렬히 실패했다. 하와이에서 국왕 친위대와 호놀룰루 총병대가 충돌하는 사건이 터진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허스트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밑밥을 던져줬다. 김옥균 2차 내각에서 예조 자리를 노리다가 아직 경력 부족하다는 평을 들어 그 대신 주영대사로 부임했다.
- 홍영식
홍순목의 아들. 원 역사에서는 개화파로써 한국 우정국 제도를 만들었고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사망한다. 여기서는 갑신정변은 없어서 개화당의 일원으로 지내는 중이다. 안태훈이 차린 정동구락부에 자극을 받아 장동구락부를 만들었다. 김옥균 내각이 출범하면서 병조판서에 임명됐다.
- 어윤중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김홍집, 김윤식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게 된다. 김옥균을 제외한 다른 경연관들처럼 관직생활이 탄탄대로라 최익현 내각에서는 호조판서를 맡았다. 이후로도 계속 호조 일을 도맡아 보면서 동문들 중 가장 강한 업무강도를 감당하는 중이다. 김옥균 내각에서 좌의정으로 영전했다. 1898년 총리대신 추거에서 개화당 후보로 나왔다 낙선하고 김홍집 내각에 우의정으로 복귀한다. 공산당 내각이 들어선 후 드디어 호조 일에서 벗어나 조선 문인답게 자기 이름 딴 문집을 하나 내기 위한 짬을 얻었지만 사세가 여의치 않아 퇴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시(오후 5시~7시)에 하겠다는 조건 하에 바로 정강사로 복귀하였다.
- 김윤식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는다. 최익현 내각에서는 예조판서를, 민태호 내각에서는 이조판서를 맡았다. 김옥균 내각의 개각 때 세대교체 이야기가 나오자 몇 년 쉬겠다며 사임한다. 미국 유학파인 이토와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다른 경연관들이 일에 치여가며 늙어가는 동안 주름은 좀 늘었지만 더 건강해지는 등 유유자적하고 있던 도중, 정강사가 국정 군사안보 싱크탱크가 되면서 이목이 쏠리게 되자 이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은퇴한 정치인 자리 만들어주는 곳이라는 껍데기를 씌우고자 퇴물 정치인 역할을 맡아달라는 총리 김홍집의 요청을 받고 흔쾌히 승낙하여 정강사의 수장이 되었다.
- 윤치호
윤웅렬의 아들. 서재필과 함께 석전을 대체하여 스포츠를 전파하려 했으나 통렬히 실패했다. 그러나 체육활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여, 한강변에 사격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이후 공조 일을 보면서도 틈날 때마다 서원에 운동장을 만들자거나 체육 진흥을 해야 된다며 외치거나 올림픽 참가를 부르짖은 걸 보면 열의는 진심인 듯.
- 조병세
원 역사 대한제국 제9대 내각총리대신. 한성 만국평화회의가 마무리된 이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는 상소를 경화시보에 투고했다.
- 서광범
원 역사 대한제국 법부대신. 김옥균 내각의 형조판서다.
1.1.3.2. 만민공산당
- 오경석
역관 출신의 개화파 중인. 상당한 애처가이자 공처가다. 천덕만의 군밤을 계기로 원 역사보다 이르게 고종과 연을 터서, 용상에 오르기 전 글공부 스승 노릇을 했다. 아이 글공부 가르치는 요령은 명성 자자한 맹공서당(孟孔書堂)에서 배워온 모양. 원래는 박규수 밑에 있었으나 명문거족 출신인 박규수와 중인 출신인 자신의 입장과 위치가 달라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흥선대원군파로 갈라섰다. 그러다가 1874년에 치러진 한성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박규수와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마타도어까지 해가며 옛 동지인 박규수를 공격했지만 결국 낙선하고 만민공산당의 녹사(서기)를 맡는다. 그래도 박규수 말년에는 옛정 생각에 섭섭한 마음 접어둔 채 알던 역관들에게 수소문해 유작 짓는 데 필요한 서양서적들을 모아다 건넸다 하니 어느 정도 화해는 한 셈이다.
원 역사에서 아내를 앗아간 콜레라에 걸려 1879년에 사망하지만, 본작에서는 서양 의술의 도입이 상당히 조기에 이루어져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 없이 1888년 총리대신으로 당선된 최익현의 지명을 받아 형조판서에 오른다. 그리고 영수에서 물러난 최한기의 뒤를 이어 만민공산당의 영수가 됐다. 1898년 기준으로는 영수직을 전봉준에게 넘기고 은퇴한 상태.
- 최한기
원 역사에서 지구전요를 남긴 실학자. 즉위한 귀남의 소개를 받아 천덕만의 스승 비슷한 것이 되었으며 이후 무관이 된 천덕만을 자신의 딸과 이어주면서 장인어른이 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죽을 때까지 어떤 벼슬도 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지만 본작에서는 벨레의 행보에 자극을 받아 한양 남부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였고 당선됐다. 그리고 동문수학하던 대원군의 부탁으로 만민공산당의 영수를 맡게 됐다.
- 오세창
원 역사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오경석의 아들이다. 공산당의 정론지 '익정신보'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원 역사대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대원군이 친 석파란을 모아 관리하는 일도 맡아 보는 중이다.
- 전봉준
문서 참조.
- 엘러노어 마르크스 (=엘러노어 전)
칼 마르크스의 막내딸. 유학 온 전봉준과 눈이 맞아 결혼했다. 봉준에게 배워 조선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22] 아버지 사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정착했다. 조선에 입국한 바로 그날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는 조병갑과 시비가 붙었는데, 말다툼이 격해져 조병갑이 싸대기를 날리기 직전 원펀치로 KO시켰다.[23] 이후 만민공산당에 입당에 활동을 이어가며,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남편 봉준이 추구하는 '제도 내에서의 개혁' 노선을 돕는다. 봉준과 결혼할 당시에도 이미 적지않은 나이였고 그 후로도 만민공산당에서의 여러 정치 활동으로 바빴기에 봉준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다. 실제 역사에는 1898년에 음독 자살했지만, 역사가 달라진 이 세계관에서는 전봉준과 잘 살면서 1900년대에 들어서까지도 유일한 외국인 참의대부가 파리 코뮌 출신 프랑스인이었던 샤를 벨레라는 사실에 독일계 영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해 참의대부 자리를 노려 1908년에 최초의 일명 '참의부인'이 됐다.
- 이상재
원 역사 조선일보 제4대 사장. 박정양의 문객으로 있다가 개화당 돌아가는 모양새에 실망하여 낙향하고서는 자신의 고향 서천군의 참의대부로 뽑혀[24] 역대 최연소 참의대부로 이름을 날린다. 이후 계속 참의대부에 선출되어 1902년에는 국회의장격인 참의원정이 됐다.
- 민태호
원 역사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승호와 달리 공산당에 붙는 쪽을 선택하였다. 영국 공사 등 평범하게 문신 커리어를 이어가다 제1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 만민공산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25] 최익현 내각 출범 이후 원내 1당 배려 차원에서 좌의정으로 발탁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세자 척의 장인이지만 조선이 반쯤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된 본작에서는 외척이 돼도 딱히 좋을 게 없겠다 싶어 나서지 않았다. 선택이 옳았는지 제2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서 개화당 영수 박정양을 누르고 4대 영의정 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조선에 공황이 터지자 이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테니 걱정말고 해결하라며 총리 자리를 내놓는다. 자신은 어차피 팔자에도 없는 총리 자리까지 한 번 올랐으니 만족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전봉준 이전까지 민선 조선 총리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와의 별다른 인연이 없다.[26]
- 안규홍
원 역사 의병장. 조실부모하여 고향 보성에서 갖은 고생하다가 김제까지 흘러들어와 소작농이 됐다. 행동력이 있고 상대가 누구든 능히 자기 뜻을 조리있게 전할 수 있어 땅주인 홍 생원을 비롯해 일대의 여러 자작, 소작하는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 김기범(=김개남)
원 역사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봉준이 소싯적 함께 어울리던 고우(故友)이다. 사람됨이 토호로 만족할 만큼 얌전하지 못하여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공산당에 합류하여 삼남 일대를 붉게 물들이는(?)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작중에서도 자칭하길 '개남장군'이라 하였다. 자본론은 읽지 않았어도 무경칠서와 각종 총기 제원을 달달 외울 정도로 군무에 관심이 많고 비대해진 조선군에 비판적인 입장이라 봉준이 병조판서로 발탁했다. 개화당에서 관직 경험 없는 사람을 기용한다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귀남의 제안으로 열린 조선 최초의 인사청문회에서 6년[27]에 달하는 군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미필 참의대부들을 가뿐히 제압하였다.
- 손병희
원 역사 천도교 제3대 교주. 봉준 개인과는 별 연이 없지만, 충청도 일대 공산당의 강력한 추천으로 전봉준 내각의 외무참판이 되었다.
- 민종식
원 역사 의병장. 만민공산당에 협력하는 여흥 민씨 중 한 명이다. 봉준이 예조판서로 발탁했다.
1.1.3.3. 자유당
- 문정공(文正公) 최익현
- 박은식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화서학원에서 공부할 때 '흥국부도'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팽창주의자 모임 '자강사'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세미나를 열어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마씨잡변'이라는 책을 발표해 가타야마 센과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 고시 준비에 매달리다 한양에서 우연히 만난 황현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황현처럼 산학이 나오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타입이지만 이쪽은 그래도 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현 참의대부 제도의 폐단을 알고 독자 정당을 꾸리고자 고민하던 중 때마침 총리 출마를 결심한 최익현과 만나 실용적 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자유당을 차렸다.
이후 성균관 과정을 마치고 예조에 일하고 있다. 중동 석유 개발을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접촉했을 때 실무진으로 나섰다. 오스만 대표로 나선 타우픽 파샤가 서로 안 것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은 조선을 믿을 수 없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홧김에 고구려와 돌궐의 인연을 말하면서 차라리 청과 조선이 구주보다 오스만과의 인연이 깊다고 말하였다. 타우픽 파샤는 그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와 동행한 젊은 장교인 청년 튀르크당의 지도자 아흐메드 니야지 베이가 돌궐이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캐물었다.
대전쟁이 끝난 이후 최익현 추모 분위기에 힘입어 총리대신에 당선되었다.
- 황현
원 역사에서 매천야록을 남긴 그 황현이다.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징집되어 경흥에서 상사로 복무를 하던 중 녹둔도 영유권 문제로 러시아 제국군과 갈등을 빚었다. 전역하고 나서 유학생 신분으로 영국으로 갔다. 이때 군대에서 독학한 영어 실력으로 스펜서에게 도전장을 내민 전우를 옆에서 도왔다. 이후 노사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청운의 품을 꿈고 상경했건만 고시 과목에 산학이 있고 본인은 수포자라서[28] 거듭 낙방 끝에 나라를 돕는 길이 벼슬 뿐이겠냐며 공부 때려치고 자유당 당직자가 되었다. 참고로 원 역사의 황현은 생원시 복시에서 장원 급제를 했다.
기자조선의 행적을 찾기 위해 민간의 기부를 받아 평양 유물 발굴에 나선다. 몇몇 유물이 나오긴 했으나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자동래가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 사실이 미칠 파급력을 우려해 침묵을 지켰다.
- 유길준
원 역사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집안이 반남 박문과 악연이 많아 개화당에 몸 담고 있기 무엇하여 자유당으로 넘어왔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예조판서에 임명됐다.
- 김홍집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어윤중, 김윤식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게 된다. 서태후가 베이징의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광서제를 데리고 피신하였을 때 김옥균과 함께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김옥균이 월권으로 서태후의 조선파천을 주도하자 이해는 하면서도 계속 근심한다. 귀남과 이 일에 대해 논의하던 와중에 교린삼장의 뜻을 세울 것을 청하게 되었다. 최익현 내각에서 예조에 발탁되었으며 그중 외무를 맡고 있는 외무참판이다. 민태호 내각에서는 예조판서 자리에 오른다.
김옥균 내각에서 단행한 세대교체 겸 개각 때 판서직에서 물러나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하필 드레퓌스 사건과 얽히고 만다. 처음에는 성품대로 이치를 따져 설복시키려 했으나 반유대주의의 광풍에 전혀 효험이 없자 독이 올라[29] "반유대주의는 카이저의 음모다! 여기 독일 간첩단 300명의 명단이 있다!"는 오페르트 명의의 선동 논설을 발표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는다. 이게 단순한 블러핑이면 모를까, 문제는 프랑스 육군이 내사를 해 본 결과, 드레퓌스를 누명 씌운 게 하필이면 정보부 방첩대 헝가리계 프랑스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 군부 입장에서 해당 블러핑이 진실로 받아들여졌다.[30] 그 결과 드레퓌스가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명예를 회복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총리대신 추거에 나서 개화당 후보 어윤중을 꺾고 신임 총리대신이 됐다.
- 이용직
원 역사 대한제국 학부대신. 자유당 참의대부이다. 비록 당적은 다르지만 환등기와 섭영 등등의 기물에 밝은 사람이라 봉준이 공조판서로 발탁했다.
- 김희정(金羲正)
원 역사 구한말 제주 문인. 제주도의 참의대부이다. 작중에서는 최익현이 제주도로 유배를 간 일이 없었기에, 원 역사와 달리 출륙하기 전까지 최익현과 별 다른 인연이 없었다.
- 양기탁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국무령. 자유당에서 촉망받는 인재이다. 나가사키 아주대회 '어(御)' 문세(文勢) 부문 조선 국사(국가대표)로 참가하였는데 차가 고장나 아깝게 옥패를 놓쳤으나, 평양 대회에서는 사람과 차가 하나되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 이승만
원 역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남의 아래에서 '이놈 저놈' 소리 듣기 싫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서책에 몰두하여 고시에 합격하고 학사장교로 임관했다. 그런데 박복하게도 군복을 입자마자 조선군과 북양군이 충돌한 산해관 전투에 참전하게 됐다. 이후 북경에도 입성했는데 그동안 장작림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이후 장작림과 펜팔로 지내며 장작림에게 조선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준다. 자동차의 대중화 소식을 알리며 자신도 한 대 살까 고민하고 있다고 편지에 썼다.[31]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이 취향이고 입맛도 까다로워 다른 조선인들이 맛있게 먹는 작장면을 혹평했다. 전역한 이후 해동일보에 입사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만으로 떠난 이완용의 빈자리를 빠르게 대체하였다. 그리고 출세하기 어려워져 고민이 많은 젊은 식자들을 끌어들여 자유당 안에 교양사라는 단체를 차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꿈꾸는 이완용과 경쟁하고 있다. 이후 평산군 보궐추거에 출마해 30대 초반에 참의대부가 되었다. 그리고 최익현에 맞서 구주를 중재할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아주만이라도 화평 굳건히 지킴으로써 대전쟁이 구주대란으로 그치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귀남옹 역시 원 역사의 이승만을 알기에 이완용을 견제할 방도로 어디 김구나 이승만이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직접 만나진 않았다.
- 이완용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원 역사처럼 거창한 이상이나 도의를 추구하지 않는 철저한 보신주의자다.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로 너무나 악명이 자자해서 소학교도 못 마친 귀남도 그 대역죄인의 이름 석 자 잘 알고 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규장각 직각으로 일했다. 딱히 나라 팔아먹을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름 들었을 때 식겁했던 귀남이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바로 쳐내겠다고 경계했고 적어도 이완용 뜻대로 되지 못하게 한다.
김옥균의 부탁을 받고 만민공산당이 개최한 인터내셔널 대회에 방청객으로 참가해 분란의 씨앗을 뿌렸는데 큰 효과는 없었다. 이후 '이완용'이 '일본인'이 대거 참가한 '공산당 대회'에 참석한 것에 기겁한[32] 귀남이 무슨 이유로 그런 곳에 참석했냐고 직접 추궁하자 곧바로 김옥균이 시킨 짓이라고 불어버렸다. 그 결과 옥균이 주도하는 개화당과 척을 지게 됐다.[33] 자평하기를 복수심을 품지는 않았지만 출세욕은 여전하여 자유당의 줄을 잡아 출세할 생각으로 안인수를 꾀어 명문세족들의 부정부패를 해동일보를 통해 기사화했다. 이후로도 해동일보를 통해 개화당 하는 일에 종종 딴지를 거는 모양.
안동 김문이 출자한 조일동차회사가 대만에서 원주민들을 속여서 그들의 땅을 빼앗고, 이를 원주민 대표인 와단 셰츠가 해동일보에 알리자 이완용은 이를 이용해서 김옥균을 공격하려 한 번 과감하게 모험을 해보려 한다. 이 때 김옥균과 개화당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에 대해 이완용은 '결국은 힘없는 토인들을 겁박하여 저들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짓'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현실의 이완용의 행적과 비교하면 대단한 아이러니. 하지만 모험엔 위험이 따르는 법인데 그 이름 석 자 들으면 태산만큼 위험을 만들어내고도 남을 사람이 궐문 안에 계셨으니 이 때도 이완용 좋은 꼴 못 보게 딴지를 걸어버리며 일이 꼬여 조일동차회사와 대만 원주민들 사이를 중재하여 토지를 매매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이 나온 표현이 팔지 못할 것을 팔게 하는 데는 그만한 인재가 없다.(…)
1906년, 간신히 일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와 해동일보에 일궈둔 터전을 뒤흔드는 이승만의 교양사에 대항하기 위해 저처럼 처세에 밝으면서도 현명한 이들을 모아 일진회를 차려 총리대신 추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독일의 의뢰를 받아 반식민주의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그 뜻은 좋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이완용이라 못 믿겠다는 귀남의 함정수사에 딱 걸려서 총리대신 추거를 포기하고 정말로 순수한 의미의 반식민주의 운동가가 됐다.
- 송병준
원 역사 정미칠적의 일원. 무관으로 오래 봉직하여 별다른 공 없이 참장(소장)으로 전역했다. 군복 벗은 뒤 혹시 참의원에 자리 없는가 엿보다 이완용이 창설한 일진회에 가입했다.
1.1.4. 사법원
- 고능선
원 역사 조선 말의 성리학자. 사법원 초기부터 일을 거들었던 중진 판사다. 재수 없게 안양대군과 김치진의 소송전을 배당받아 마음고생을 했다.
- 이준
원 역사 헤이그 특사의 일원. 한성부 서헌에서 심사(검사)로 근무하고 있다.
- 함태영
원 역사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한성부 서헌에서 심사(검사)로 근무하고 있다.
1.1.5. 명문세족
- 안동 김씨
- 김좌근
하옥대감. 안동 김문의 수장이었으나 귀남의 효자율이 불러온 나비 효과 때문에 고종이 즉위하기도 전에 권세를 잃고 만다. 그나마 대원군의 근왕파가 독주하는 것을 견제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박규수의 배려로 패가망신은 면했지만, 이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원 역사보다 3년 빠른 1866년에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죽고 나서도 이완용이 주도한 명문 벌열 공격에 시범타로 걸려서 그 유명한 나주 합하 일화가 까발려지는 등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 생전은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의 김문 내부에서도 김좌근은 욕 먹어도 싸다는 분위기라 딱히 두둔하는 사람도 없기에 더더욱 비참할 따름이다. - 김병기
김좌근의 양아들. 안동 김문의 실세였지만 문중 내 정치싸움에서 재빨리 흥선대원군 라인으로 갈아탄 병학, 병국 형제에게 패배하여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 김병학
- 김병국
- 김병시
- 김옥균
- 김가진
- 여흥 민씨
- 민승호
자영의 의붓오빠. 어떻게든 대원군을 실각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지만 항상 실패하는 허당이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잔챙이라 대원군이 견제할 필요가 없어 원 역사와 달리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귀남과 자영의 첫 자식이 사망하자 대원군이 서양 무당을 데려와서 아이가 죽은 것이란 식으로 소문을 퍼뜨렸는데 정작 양의를 직접 부른 귀남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려[35] 바짝 엎드리게 되고 대원군에게 끌려가 어용 신문을 만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올 땐 동삼성에 진출한 조선인들을 감독하라는 지시를 받고 변발을 해야 하나, 가짜 천주교인이 되어야 하나 고민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후 세자 척, 순친왕 자이펑, 태자 하루노미야 요시히토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언급이 되는데 천재일우 기회를 걷어차 영영 장동 김문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며 지금도 은근히 원망을 받는다고 한다. - 민태호
- 민영환
원 역사 대한제국의 내부·학부·군부·탁지부 대신. 사람됨과 자질을 알아본 민태호의 강력 추천으로 젊은 나이에 주영공사에 부임했다. 무엇을 말하든 고지식하게 공사를 구분하여 사귀기 다소 어려운 편이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공산당 총리인 민태호의 친인척이고 전-마르크스 부부와도 교분이 있어 조지 버나드 쇼 등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곰살맞게 군다. 막상 민영환 본인은 귀국한 이후 사회주의자로 오인 받을까 봐 이러한 관심을 꺼린다. 공사 임기 만료후 귀국하여 함흥에 하버법을 이용한 비료 공장을 세운다.[36]
1.1.6. 기타
- 천하장안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에 어울렸던 중인 신분의 4인방. 각자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이라고 부른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하지 못하는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수족으로 쓰이다가 1898년 기준으로 모두 천수를 누리고 갔다. - 천덕기: 천덕만의 숙부. 중인이다. 그런데 장사나 손재주 부리는 일에 영 재주가 없어 천하장안에서 주먹질을 담당하게 됐다. 싸움 솜씨는 어지간한지 주먹 한 번 휘두르면 사람이 두셋씩 나가떨어진다.
- 하일평: 일명 족제비. 도성 색주가를 꽉 잡고 있다. 도성 안의 소문이라면 익문사만큼이나 훤히 알고 있다.
- 장천동: 재간꾼. 구름재댁이 운현궁이 되면서 어엿한 문객이 되었다. 천하장안 중에서 가장 장수하여 이해조가 무치춘일기를 쓸때 도움을 줬다.
- 안동수: 바람잡이. 사람 마음을 잘 읽는다. 그래서 대원군을 대신하여 익문사를 지휘했다.
- 화서학원
- 문경공(文敬公) 이항로
산림의 거두. 최익현의 스승. 귀남이 즉위한 후 대원군의 부탁을 받고 조정에 출사하여 동부승지가 됐다. 위정척사파로 활동한 원역사처럼 서양과의 개화에 반발하는 척화파로 '개화소'의 신법에 거세게 반발했으나 귀남이 직접 불러 "밤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밤이 아니고서야 전부 잘 구우면 맛있다. 지금 조선의 상황은 집에 노모가 계신데 포대자루에 밤이 몇 톨 안 남은 것과 같다. 맛있게 구워서 양껏 드시게 해 드려야지 이런 건 이렇고 저런 건 저렇다고 빼내 두어 톨만 바칠 수 있겠느냐."는 귀남식(?) 흑묘백묘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자신을 벌하거나 정치적 희생물로 삼지 않고 진지하게 설득하려는 그 태도에서 정학을 경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고 감화되었다.
하지만 본인이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별개라 개화의 흐름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정학의 도를 지킬 수 있는 제자 최익현에게 뒷일을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후에 제자들이 호를 딴 화서학원을 세운다. 귀남이 내탕을 털어 현판 사액을 해주려 했으나 어필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제자들이 극구 사양하고 제수만 받기로 한다. 그의 문하생들이 훨씬 현달한 덕분에 원역사보다 십수년 앞서 문경공(文敬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 김평묵
최익현의 사형. 명석하다는 소리를 못 듣지만 우직하면서도 마음씨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최익현이 출사한 이후 화서학파의 좌장이 되었다. 개화 초기 그토록 열심히 힘써 배웠건만 선비가 필요 없는 세상이 왔다고 좌절하였으나 안동 김문의 후원을 받아 세운 화서학원을 운영하고 제헌 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했다. - 유인석
최익현의 후배. 화서학원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명전법이 시행되면서 처분한 전답값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철저한 복고주의자였던 원 역사와 달리 젊었을 때부터 개화의 물결을 바라보고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여러 모로 개방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신촌향약 문제로 문중 어르신들이 집결했을 때는 우리도 백성들에게 양보할 거는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최영조(崔永朝) & 최영학(崔永學)
최익현의 장남과 차남. 화서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있다. 둘 다 흥국부도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아버지 속을 썩였다. 이후 영조는 화서학원의 교수가 되었다. - 이경응
원 역사 의병장. 화서학원에서 유인석의 태서통사(서양사통사)를 수강했다. 제1회 전국 추거를 앞두고 유인석에게 어느 당을 찍을지 여쭈었는데 정말로 듣고 싶다면 박사 과정까지 밟으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고시 노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학원으로 돌아와 유인석 밑에서 박사 노릇하게 됐다. 이후 화서학원에 새로운 학과 종횡학(국제정치학)이 생기면서 조교수에서 교수로 바로 올라섰다. - 안창호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 젊은 시절 평양의 기전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보면서 정말로 조선을 조선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심하게 되면서 동서고금 역사를 공부하다가 화서학원에 입학하여 이경응의 첫 제자가 됐다.
- 노사학원
- 기정진
원 역사 노사학파의 시초. 원 역사에선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참의대부로 추천되어 도성으로 상경한다. 나중엔 톈진 교안[37]의 후처리를 위해 텐진에 의회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참의대부 제도가 조광조의 현량과에서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는 제도라고 높이 평가하는 중. 사후에 제자들이 호를 딴 노사학원을 세운다. - 전우
원 역사에서 조선의 마지막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 원 역사처럼 이항로와 기정진의 논설을 모두 비판하는 논설[38]로 졸지에 양쪽 제자들한테 찍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영국에 도피성으로 유학와서 존(John)으로 불리다가 스펜서와 토머스 헉슬리 등 당대 다윈의 추종자들과의 논쟁과 토론에 참여했다. 이후 진화론의 사문난적 프랜시스 골턴과의 공개 토론회에서 2승 1무를 기록하였다. 이때 활약으로 청나라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떨치게 됐다. 조선에 귀국한 이후 1889년에 최익현의 부탁을 받고 곡부에서 열리게 된 국제 유교 학술대회의 운영 총책을 맡게 됐다. 대원군이 떠난 뒤에는 노사학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이용해 여민강학을 내세우며 한양에 강당을 세웠다.
- 한주학원
- 천도교
- 최제우
동학의 교조. 원 역사에서는 혹세무민의 잡교로 탄압받아 나이 41세에 순교하였으나 본작에서는 사람 목을 쌓아올려야만 살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하는게 옳다는 신념을 가진 귀남이 개화 초기 문호 개방과 함께 서학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동학이 어엿한 종교로 인정을 받아 자유로운 포교활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전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은 유교, 천오백년 이상 한반도에 뿌리내린 불교나 서양이라는 뒷배가 있는 천주교와 달리 신흥종교인 동학은 딱히 내세울 것이 없어 국내 교세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신도들을 찾아 조선인들이 속속 정착하고 있는 만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간판을 천도교로 바꿨다. - 최시형
원 역사 동학의 제2대 교주. 연해주 대접주 구실을 하고 있다. 연해주에서 러시아 관료들이 조선인 거주권을 제한하는 등의 강경책을 펴려 하자 조선인들이 단체로 격쟁을 일으키는데 이때 최시형이 그 대표 자격으로 글을 올렸다. - 이필제
원 역사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킨 그 이필제다. 국뽕에 취해 북벌의 때가 왔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청국 공사관을 뒤집어 엎어 조청간 외교분쟁을 일으키는 대형사고를 쳤다. 심지어 직후 붙잡혀 의금부로 투옥되어 귀남에게 친국을 받는 와중에도 천하의 무도한 자들을 정벌해야 한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놔 6.25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PTSD가 있던 귀남을 분노케 하였다. 귀남은 "역시 사내는 군대를 가야 전쟁 무서운 줄 알고 사람이 된다."라고 확신하고 군포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던 조선에 징병제를 도입한다. 필제 역시 징집되어 갖은 욕을 다 먹어가며 길림성에서 뺑이 쳤다.[39] 전역하고 나서도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길림성에서 살고 있다. 천도교에 입교하면서 이름도 바꿨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필제가 귀남에게 갈굼당한 일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터라 징집된 장병들의 원망이 날로 커지고 있다.[40] 심지어 한 번 실수로 대대손손 세상 사람들 욕을 먹는다는 '신미년 필제 같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거기에 격노한 주상이 필제에게 벼루를 던졌다고 카더라는 설화도 탄생했다.[41] 경양대군도 철 없을 때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귀남에게 질문할 정도.
- 장승업
조선 후기의 화가. 오경석을 부탁을 받고 익정신보에 박규수를 공격하는 만평을 실었다. 이후 1874년에 오경석의 갑질에 분노해 술 마시고 홧김에 뜻이 통하는 이들을 모아 신보도중(신문노조)을 결성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도중 결성 붐이 일었고 그 소식을 뒤늦게 들은 귀남과 흥선군이 경악했다. 그 직후 흥선군이 소요를 억제하려 보낸 익문사 및 천하장안과 충돌하면서 한양에서 한바탕 난리 법석이 나게 만들 뻔 했으나, 귀남이 어명을 내려 도중을 존중할 것을 지시하면서 도중은 왕명으로서 간접적으로나마 설립 허가를 얻었고, 익문사도 불미스러운 유혈사태로 번질 뻔한 일을 잘 무마하고 공안서로 간판을 바꿔 단다. 그런데 영혼이 자유로운 장승업은 막상 소요가 길어지니 지루하다며 슬쩍 뒤로 빠졌다.
- 진령군
원 역사에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은 무당. 본작에서는 주영공사로 부임한 이호준이 영국 귀부인들 사이에서 심령주의가 유행한다는 것을 알고 요샛말로 표현하면 민간 외교관으로 써먹기 위해 유학생으로 데려와 사교계에 풀어놓았다. 동양의 신비라고 하면 껌뻑 죽는 사람 한가득이라 이런저런 잔재주를 사용해 '신령의 참 주인(Mistress of Spirits)'[42]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귀부인들의 강령회에 단골 손님이다. 독일의 황태자비 빅토리아도 황태자의 수술 문제로 상담을 청할 정도이다. 영국에서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를 제자로 들여 오컬트 단체 황금개벽회를 세웠다. 알레이스터는 스승이 사기라는 걸 반쯤 직감하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배울 게 있지 않을까 해서 계속 붙어 있는 중. 그 뒤로도 영국에 머물고 있으며 외국의 과학자를 조선에 데려가고자 하는 안양대군을 만나 치올코프스키와 퀴리 부부에 대해 알려준다. 작중 서술을 보면 그냥 흔하디 흔한 사기꾼 무당인 듯하나, 무속인의 직감 같은 무언가가 있는지 은근히 맞는 예언을 하거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일이 꽤 많다.
- 순흥 안씨
조선이 개화하면서 나타난 신흥 재벌가다. 기존의 문벌들이 문중의 재산을 털어 재계에 뛰어들어 재벌가가 되었는데 신흥 재벌들은 이러한 명문세족들과 재력에서 맞먹음에도 명문세족들이 인정하지 않자 그들과 사이가 나쁘다. 이중 대표격이 안인수의 가문이다. - 안인수(安仁壽)
안중근의 조부. 한미한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재주가 좋아 싸전을 경영하며 틈틈이 땅을 사들여 족히 천석꾼 소리 들은 법하게 되었고 명전법이 시행되고 나서는 곳간 헐어 고을의 환심을 두루 사 해주의 참의대부가 되었다. 이후 시류를 읽고 이런저런 기물의 작은 부속 따위를 만드는 공방을 차렸는데 꽤 성황을 이루어 도성에서 세도가 우두머리들 다음 가는 부를 쌓았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 거족들에게 대우받을 수는 없었고, 김병학의 회갑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욕을 본 이래로 거족들이 하는 일이라면 우선 팔 걷어붙이고 훼방부터 놓고 있다. 1898년 시점에선 고인인데 신흥 재벌들의 영수답게 서양식 장례를 치른 듯. - 안태훈(安泰勳)
안인수의 셋째 아들. 안중근의 부친. 원 역사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 유학이 좌절되어 은거했다가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본작에서는 안인수의 의지로 과거 대신 해외 유학을 다녀오고 사업 감각을 기르고 있다. 안인수가 신흥 재벌이라 명문가들이 무리에 끼워주지 않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사상을 전파시키기 위해 정동에 건물 하나를 세내어 조선 최초의 클럽 정동구락부를 차렸다. - 안중근
원 역사의 독립운동가. 조선의 신흥 재벌가의 대명사 순흥 안문의 장손이다. 한창 사춘기라 서원을 빠지고 윤치호가 운영하고 있는 실탄사격장에 가서 총을 쏘곤 한다. 할아버지인 안인수가 개화당, 즉 명문세족들을 증오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다. 1900년 나카사키 아주대회에 조선국 사격 대표로 참가하여 당당히 옥패를 차지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이토 히로부미가 메달을 달아줬는데 도중에 이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을 호소하며 잠깐 식이 중단되는 헤프닝이 있었다.
- 조병갑
원 역사에서 고부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 인천 부두에서 세곡을 옮기는 운송업을 하면서 나름 벌어먹고 살고 있으며 그 성격 어디 안 간다고 꽤 유명한 망나니로 인천 부두 인부들 사이에서 그 악명이 자자했다. 그러던 차 막 조선에 입국한 엘러노어 마르크스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조선 토박이 못지않은 현란한 욕지거리를 듣고 욕을 주고받다 손찌검을 하려는 찰나 엘러노어가 먼저 날린 주먹에 맞아 인천 부두 한복판에서 아낙에게 얻어맞고 널부러지는 개망신을 당했다. 조선에서도 엘러노어의 아버지 카를 마르크스가 유럽의 큰 선비로 유명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과 통교할 때 그의 저서인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이 일찌감치 조선에 들어와 참의원의 3대 정당 중 하나인 만민공산당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고, 참의원의 만민공산당 뒤에는 만인지상인 주상전하의 아버지,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이 있고 엘레노어의 남편 전봉준은 흥선군과 직접적인 인맥이 있다. 흥선군이 공안서의 수장임은 알 사람은 알고 있어 따지자면 이항로나 이진상 급으로 권위도 있고 거기다 조선 왕실과 연줄 닿아 있어 인맥도 만만치 않은 인물의 여식에게 함부로 치근덕거리다 얻어맞은 것과 진배가 없어 법적 조치는 무슨, 어디가서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 윤희순
원 역사의 독립운동가. 유인석의 조카며느리. 유인석이 차린 정미소를 대신 운영하고 있다. 제1회 참의대부 추거 때 정 뽑을 당이 없으면 여학을 널리 세운다는 공산당이나 뽑아달라 부탁한다.
- 홍범도
원 역사의 의병장. 징병된 장병들이 조선 팔도의 호랑이 씨를 말려 연해주 일대에서 포수 생활을 하고 있다.
- 권재형(=권중현)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궐석인 공조 상공참판을 대신하여 기무회의에 들어온 참의다. 영국의 동맹인 일본과 짜고 가짜 분쟁을 벌여 동맹인 프랑스와 러시아에게서 경제개발 오개년 계획 추진 자금을 얻어오자고 제안한다. 우발적 교전으로 독도 주변에서의 분쟁이 규모가 커지자 덜컥 겁을 먹고 사실 이 계책은 이토가 사적으로 제의한 것이라고 자백한다. 이것만이면 모르겠으나, 공안서 뒷조사로 이토에게 돈 받은 것도 걸린 모양이니 사실상 관직 생활은 다 한 셈이고 이후 사직한다.
- 한유천(=한용운)
원 역사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아직 계를 받지 못한 화계사의 불목하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1895년에 가출하여 절간에 들었다. 이왕 가출한 거 세상을 더 보고 싶어 서울 근처 삼각산의 화계사를 택하였다. 1899년 겨울에 수계하여 사미가 아니게 됐다.[43] 조정에서 조선의 승려들에게 같은 불문의 사람으로서 몽골 활불의 진의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응해야 한다고 동료 승려들을 설득했다.
- 이채연
원 역사 한성전기회사 사장. 작중에서는 한성전차영운국의 국장(사장)이다. 치부하여 문벌 반열에 들어보고자 가산을 처분하고 상경하여, 야심차게 전차의 업에 뛰어들었다.
- 김치진(金致鎭)
원 역사의 조선말 상인. 작중에서는 한성전차영운국의 장차수(차장)다. 본디 선비인데 무인년 은소동 때 재산을 탕진하여 어찌어찌 하다가 장차수 노릇을 하게 됐다. 달려오는 안양대군의 차를 피하지 않아 한양에서 전차와 자동차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내고, 다행히 안양대군이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왕족인 귀하신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투옥당했다. 이에 대군의 잘못이 더 크다며 한양 판심청에 소장을 넣었다. 이후 안양대군이 진솔하게 사과하면서 배상하겠다고 하자 소를 취하했다.
- 이해조
원 역사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대원군의 의뢰를 받고 '무치춘일기'를 썼다.
- 김형직
김일성의 아버지. 1898년 기준으로 양과자 사달라고 칭얼대는 5세 아이에 불과하며 하늘 같은 나랏님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저의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음은 당연히 모르고 있다.
- 이학찬(李學贊)
원 역사 형평사의 설립자. 백정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아예 축산업으로 성공하여 누구도 백정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44] 나가사키 아주대회에 조선 검도 대표로 출전하여 분투했으나 옥패를 놓쳤다. 조선에 귀국한 이후 안문의 후원을 받아 진주에서 '육식당'이라는 돼지고기만 취급하는 프랜차이즈 축산업체를 차렸다.
- 경허
원 역사 조선말 승려. 조정에서 불법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젭춘담바 후툭투 8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학식 있는 승려를 선발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에는 화계사 모임에서 멋모르고 나섰다가 망신을 당하느니 겸허하게 부족함을 시인하고 후일을 기약함이 사리에 맞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같은 불문의 사람으로서 몽골 활불이 조선국의 불교도들이 겪은 아픔을 겪지 않게 조언해야 한다는 한용운의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해 열하로 가서 교의에 따라 나라를 세우면, 그 나라의 운이 쇠할 때 교문도 쇠할 수밖에 없는 이치를 말하고, 독립하였을 때 몽골이 번영치 못한다면 중생의 마음이 불법에서 떠날 것이라고 넌지시 경고하며 독립보다 자립을 추구하라고 젭춘담바의 제자 담딘수렌을 설득했다.
- 박승직
원 역사 두산그룹의 창립자. 자신의 호를 딴 '매헌규방보국'을 차려 원 역사보다 14년 빨리 박가분을 출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녹화회에서 박가분의 위험성을 일찍 발견하여 황급히 대체품을 개발하고 있다.
- 최현식
원 역사 제11대 경주 최부자. 자유당의 굳건한 지지자다. 최익현에게 수정애체를 선물했다.
- 심의석
원 역사 조선말 건축가. 집안 어른들 따라 강남 유람 갔다가 상해에서 양관과 맞닥뜨리고서 개안하여 벼슬길 제쳐두고 건축에 입문하였다. 한양 명문 사이에서 조선국에서 처음으로 '건축가' 이름 부끄럽지 않다고 명성이 높다. 옥균의 의뢰를 받고 관악산 자락에 공연장 '세악당'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했다.
- 고사훈
원 역사 구한말 제주 의병장. 노사학원에서 학명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산 진흥에 힘쓰고 있다.
- 홍매화(洪梅花)
원 역사 제주 심방청(민간 무속 조직체)의 마지막 도황수(수장). 성산 바닷가 평범한 집 여식으로 조실부모하여 어린 나이에 심방(무당)이 되었다. 사실 제대로 된 심방이 아니라 견습의 견습에 불과하지만, 야심이 넘쳐 같은 무당인 진령군처럼 한탕 건져 금의환향할 생각으로 제주도 공산당 사람들 꼬드겨 유학길에 올라 그렇게 꿈풀이가 용하다는 오스트리아 서생 프로이트의 제자 겸 비서가 되었다. 그 꿈풀이 방법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많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어 계속 프로이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선 김귀남 옹과 몸이 바뀐 이명복에게 프로이트로부터 사사한 무의식 관련 지식을 설명하는 '소싯적 오지리국에서 수학한' 무당으로 등장.
- 최남
원 역사 일제강점기 상인. 이용익이 라디오 사업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업하자고 찾아가 외판을 맡게 됐다.
- 조소앙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제5대 의장. 귀남의 연설을 듣고 창의군에 합류해 최익현을 보좌하고 있다.
- 김규식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외무부장. 귀남의 연설을 듣고 창의군에 합류했다. 옥균이 개화당으로 오도록 최대한 포섭할 생각이다.
- 김귀남(=이명복)
역사 뒤바뀐 조선에서 태어난 김귀남. 10살 때 이명복, 즉 원래대로라면 이 세계의 고종이 되었을 개똥이의 혼이 들어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명복의 몸에 들어간 진짜 귀남과는 달리 전생의 기억만 뚜렷하고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은 완전히 잊어버려 부모 얼굴도 못알아보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하여 어찌어찌 영험한 무당에게 가서 상담을 받았는데, 그 무당이 바로 빈에서 정신분석학을 배운 홍매화라서 귀남(명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무의식적으로 그 공백을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있던 고종대왕 일대기로 메꾼 것이라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진단을 내렸다. 본인은 실제 이명복이었으므로 기억이 너무 생생한 까닭에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했으나, 나이를 먹고 학교에서 고종대왕의 업적을 배우면서 자신이 이렇게 훌륭한 임금님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어렸을 때 받은 상담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
이후 2013년까지 정정하게 살면서 (저 혼자만) 효자율 제과, 육월당에 필적한다고 자부하는 제과국을 운영하며 저의 욕심만큼은 아니어도 적잖이 치부하였고 부부 금슬 좋지 못하지만 자손도 여럿 봤다. 본래 성격이 어디 안가는지라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성격이라서 효자율 제과 따라잡겠다고 욕심 부렸다가 큰 곤경에 처해 거의 강제로 총명한 둘째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하였지만, 말년에 고종대왕 컬렉션을 모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 김정일
원 역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최악의 독재자였던 원 역사와 달리 분단될 일은 물론 나라 망할 일도 없던 조선에서 자기 적성을 살려(?)[45] 영화 감독으로 대성했다. 2013년 기준으로 고인이다. 대표작은 '우주 불가사리'. 개화기 초 연해주를 배경으로 조선인 이주민 일가가 빚는 인간 드라마를 담은 고사리를 유작으로 남겼다.
- 리옹 김문
안느장을 중시조로 하는 안동 김문의 방계. 안느장부터 조선계 프랑스인이라서 대대로 국적 가리지 않고 통혼함을 저들만의 가풍으로 여긴다. 김옥균 사후 본처 소생과의 유산분쟁 끝에 그의 사재 상당 부분을 물려받는 대가로 동철과 조일동차공사 등 문중 사업에서는 모두 손을 뗐다. 그 이후 대대로 조선의 근현대사를 궁구하며 옥균과 고종대왕, 그 외 개화당 사람들과 옥균의 사형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것을 가업으로 삼았다. 개중 몇몇 후손들은 대황란(대공황) 때 동영(영화) 사업에 뛰어들어 대성하였다. 이후 대공황이 끝나고 귀남이 제과국 차릴 무렵에 본가와 마침내 화해했다. - 안느장 푸아송-킴(=김안장)
김옥균의 사생아. 실존인물이 아니다. 옥균이 프랑스 유학생 시절 리옹 여행 갔을 때 맺었던 인연의 소산으로 푸아송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코레' 출신의 귀공자 '킴'이었다는 것 정도만 알면서 살다가 프랑스 언론에서 '코리아의 총리 무슈 킴'하는 것을 보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옥균을 찾아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더니, 옥균이 이야기가 자신의 기억과 일치한다며 아들로 인정했다. 외가에 빚이 많았기에 그 후 옥균의 비서로 일하게 됐다.[46] 일처리가 똑부러지는 데다 자기 생각을 윗사람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것도 딱 옥균과 판박이라 김옥균도 정말 자기 아들답다고 생각 중이다. 1901년에 미국계 조선인과 결혼했다. - 엘렌 푸아송-킴 (=김애련)
안느장의 손녀. 다시 말해서 김옥균의 증손녀. 아멜리아의 고모이기도 하다. - 아멜리아 푸아송-킴 (=김미란)
안느장의 증손녀. 사실상 고종대왕 전문 박물관이 된 온양별궁에서 일한다. 50대 혼혈 여성으로 이목구비 뚜렷하고 살갗은 갈색에 체구도 훤칠하다.
- 이원철
원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이공계 박사. 비원 핵실험에 참가했다.
1.2. 일본
1.2.1. 일본국
1.2.1.1. 황실
- 메이지 덴노
일본 제122대 천황. '대일본연방'의 통치와 통합의 상징이다. '양복 입은 쇼군' 요시노부의 애국공당 내각과 영 불편한 사이다. 원 역사대로 1912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 다이쇼 덴노
일본 제123대 천황. 황태자 시절 아버지의 반대로 구미를 방문하지 못했던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의 세자 이척, 동삼성의 총독 순친왕 자이펑과 함께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이는 본인보다 많지만 성품이 비슷한 척과 금방 친해졌다. 이후 메이지 덴노가 원 역사대로 사망하자 새로운 천황으로 즉위했다. 자국을 찾은 친구(척)의 아버지(고종)를 만나뵙겠다는 걸 막는 궁내부와 내각을 상대로 인간선언을 하였다.
이렇게 써놓으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괴악하게 진행되었다. 계속되는 반대에 다이쇼 덴노가 열받은 나머지 "천황도 사람이야 사람! 만나고픈 사람 만나서 하고픈 이야길 하겠다는데, 그것마저도 못하는 겐가?"라고 내질러 버린 것. 이후 대공황이 일어나자 전국민을 대상으로 다만 한 인간일 뿐인 자신과 함께 다 같이 시련을 이겨내자는 옥음방송을 직접 내보내는 등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대공황 극복과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 다케히토 친왕
일본의 친왕. 아리스가와노미야 10대 당주. 황태자 교육담당[47]으로서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 요시히토 황태자의 곁을 지켰다. 이척이 요시히토에게 살갑게 굴면서 대화를 하려고 하는 행위를 제재[48]하려고 했으나 이를 이척이 무시했기에 결국에는 유럽의 일반 대중들 앞에서 그러한 것을 자제하는 선에서 해결봐야만 했다.
1.2.1.2. 정부
- 오쿠보 도시미치
원 역사 유신삼걸의 일원. 류큐를 복속시키는 데 실패한 사이고가 실의에 빠져 낙향한 이후 내무경에 취임했다. 서남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원 역사처럼 벌건 대낮에 낭인들 칼에 맞고 죽는 일은 없었지만, 그 대신 요시노부가 이끄는 옛 좌막파에게 시달리며 개혁을 추진해야 했다. 하지만 영일동맹을 계기로 신식무기들을 속속 들여오고 있고 산업 또한 조선을 따라잡았기에 만족하고 1대 총선거를 계기로 은퇴했다. 자신의 뒤를 차지한 이가 바로 옛 쇼군 요시노부라서 쓴웃음을 지었지만, 정권 이양을 거부하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1907년 숨을 거두었다. 향년 76세. 원 역사보다 29년 더 살았다. 동일본 지역에서 인정해 주는 몇 안 되는 서일본 사람이라고.
- 가쓰 가이슈
원 역사에서 막부의 중역이었으나 보신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여 에도성 무혈 개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도 웅번에서도 조심스러운 존중을 보이는 거물인데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꼬여버린 자주국 자립국 문제를 해결하라며 막부에서 주조선초대공사로 보내버렸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 역사 일본 제국 제3·9대 총리. 이토의 일본책략 계획에 가담했다가 망하자 이토를 팔아넘겼다. 원 역사에서 일본 육군의 창설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인데 여기서는 해군 육성을 조슈 번이 맡게 되면서 일본 해군의 아버지가 되게 생겼다.
조일동맹이 파기되면서 입헌정우회 주도로 육군 육성에 들어갔고 이 또한 야마가타가 맡게 될 듯하다. 원 역사와 달리 국수주의에 심취할 일이 없어 '황군의 무적 정신력' 따위는 헛소리로 여긴다.
- 이노우에 가오루
원 역사 일본 제국 제5대 외무대신. 이토 히토부미와 절친한 사이다. 조선에서 수신사를 파견했을 때 길잡이를 자처했다. 이후 가쓰 가이슈 다음의 주조선 일본 공사로 부임한다. 조선 공사라 하면 공사들 중에서도 특히 윗줄이지만 중앙 정계에서 밀려 아쉬워하고 있다. 이토의 부탁으로 예조판서 김윤식과 연결해준다.
- 미우라 고로
원 역사에서 을미사변을 주도한 주 조선 공사. 여기서도 주 조선 공사로 부임왔다가 3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귀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본도를 바쳤는데 일제강점기의 기억이 있던 귀남이 정중히 거절했다. 60만 대군을 보유한 조선이 한 이런 거절을 확대해석한 일본 정부측이 즉시 교체해버려 귀국한다.
- 이와쿠라 도모사다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유명한 이와쿠라 도모미의 셋째 아들. 미우라의 후임으로 조선에 공사로 부임한다. 귀남의 직설적 화법을 이해하지 못해 강국 조선의 본심이 무언지 고민하는 중.
- 시데하라 기주로
원 역사 일본제국 제44대 총리. 주조선 일본영사이다. 하버법을 얻기 위해 민영환에게 로비를 하러 원산에 갔다가 우연히 이완용 일행과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왜 나에게는 성의를 보이지 않냐는 이지용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 마키노 노부아키
원 역사 일본제국 문부·농상무·외무대신. 주조선 일본대사이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
원 역사 일본제국 제35대 총리. '일본이 조선을 따라잡지 못함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이유로 입건된 고토쿠 슈스이를 메이지 덴노의 심기를 생각해 기소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증거가 부족해서 무혐의 처분했다.
1.2.1.3. 국회
1.2.1.3.1. 애국공당
- 도쿠가와 요시노부
에도 막부 제15대 쇼군. 덴노에게 조적으로 찍혀 맥없이 항복했던 원 역사와 달리 여기서는 조선에서 파견한 수신사가 불러온 나비 효과로 인해 보신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막부를 해체하고 쇼군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동국(현재의 동일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국회가 설치된 지금은 옛 쇼군이 대정봉환의 큰 뜻을 짓밟으려 한다는 경계심을 살까봐 민권운동 세력을 포섭하여 창당한 애국공당의 일개 평의원으로서 신정부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다수결로 재집권하기 위해서 군권(君權)과 민권을 함께 높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애국공당 인사들의 진언을 통해 헌법이 얼마나 중한지 깨닫고 저의 뜻을 관철시켜 '대일본연방 헌법' 1장 1조를 현 일본국 헌법 1장 1조와 비슷한 "대일본연방은 일본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을 통치와 통합의 상징으로 삼는다."로 만들었다.
1897년 제1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애국공당이 신승하여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대정봉환 이후 딱 30년만에 다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복귀한 것인지라 팬덤에서는 에도 막부 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에서 30년을 기다린 것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49]
- 다나카 쇼조
원 역사 일본 제국 도치기현의 중의원. 아시오 광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덴노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당한 원 역사와 달리 이르게 발전한 민주주의와 공산당의 도움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
- 하라 다카시
원 역사 일본 제국 제19대 내각총리대신. 원 역사에서는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했지만, 작중에서는 동일본 무가 출신이라 애국공당에 입당했다. 요시노부의 뒤를 이을 인재로 촉망받고 있다.
1.2.1.3.2. 입헌정우회
- 이토 히로부미
원 역사 일본 제국의 초대 총리. 사이고가 낙향하고 기도가 병으로 쓰러지자 약삭빠르게 그 빈 자리를 노려 신정부의 2인자 자리를 얻어냈다. 그런데 요시노부를 무너뜨릴 계략으로 조선책략을 냈다가 이등박문 그 이름 네 글자와 악명을 똑똑히 기억하는 귀남이 그놈 나쁜 놈 아니냐며 이토 좋은 꼴 볼 수 없게끔 일본이 함부로 조선을 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조일동맹을 맺음으로서 역으로 당해 권력을 잃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와이에서 일어났던 유혈 사건을 두고 허스트와 퓰리처가 황화론 공방을 주고 받았을 때 경서와 칼이라는 칼럼을 투고하여 동북아 전문가로 입지를 다졌다. 이때 얻은 명성과 영일동맹을 이끌어낸 공으로 정계 복귀에 성공했다. 일본이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선의 선의(?)에 물들어 과거 조선책략 때와는 다르게 정한론이나 전쟁을 그저 골치 아픈 것으로 여기고 있다.[50] 이후 아주대회에서 와병 중인 오쿠보 도시미치를 대신해 시상식을 진행했는데 안중근이 우승한 사격 종목 시상식에서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시상식이 급히 종료되는 개그신이 나왔다. 1907년에 조선과 친밀히 지내다가 추격은커녕 중원보다도 밀리게 될 것이라는 은근한 위기의식을 널리 퍼뜨려 마침내 총리직에 올랐다.
원역사처럼 정한론과 같은 제국주의를 주장하지 않았기에 하얼빈 의거가 일어나지 않아 수명이 늘어나서 1913년 총리직을 가쓰라에게 넘기고 일본을 방문한 고종 내외를 접견하였다.
- 가쓰라 다로
원 역사 일본 제국 제11·13·15대 총리. 군부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장 입헌정우회에 입당하여 노쇠한 이토의 파벌을 그대로 삼키고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이후 '현인신'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 지방의 옛 다이묘들을 억누르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지만, 막 즉위한 다이쇼 덴노가 천황도 사람이라고 스스로 그 위엄을 내려놓아 실패하고 만다.
1.2.1.3.3. 일본공산당
- 사이온지 긴모치
원 역사 일본 제국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류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파리 코뮌 사람들이 쓴 공산당 선언을 읽고 일본에 일본공산당을 세운다. 전봉준이 연 인터내셔널에서 일본 쪽 상황을 알리는 등 활동을 꾸준히 하는 듯하다. 이후 대전쟁 종전 협상에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새롭게 생길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자리를 일본에게 양보한 조선을 위해 동아시아 국제기구를 만들고 거기 상석을 조선에게 양보하자는 안을 떠올렸다.
- 가타야마 센
원 역사 일본 사회주의자. 원 역사에서는 활자공을 하며 모은 돈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여기서는 동국과 서국 사이에 어정쩡한 쿠니 출신이라 일본이 아닌 조선을 유학지로 선택하고 인천의 경일학당(리세 베르뇌)에서 수학하면서 공산주의에 감화되고 전봉준과 사형사제관계가 된다. 이후 정통 마르크스 이론을 설파하다가 대원군에게 끌려가 어떻게 맑스의 이론만이 옳고 동방의 이론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지적받아, 일단 조선식 공산주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언론계에 투신한 긴모치를 대신하여 일본공산당의 실질적인 총책을 맡고 있다.
- 고토쿠 슈스이
원 역사 일본 아나키즘 공산주의자. '일본이 조선을 따라잡지 못함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음해성 짙은 고발을 당했는데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받았다.
1.2.1.4. 기타
- 다카스기 신사쿠
조슈 번의 유신지사. 일본에 들어오는 조선 인삼의 물량이 늘어 원 역사보다 조금 더 살았다. 조선에서 수신사를 파견했을 때 동지들에게 막부가 아니라 조정이 조선의 상대로 나서면 일본과 조선이 서로 같은 급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 수신사를 에도로 올려보낼 것을 제안했다. 신사쿠는 꿈에도 몰랐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보신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
- 기도 다카요시
원 역사 유신삼걸의 일원. 원 역사대로 사이고가 낙향할 무렵 쓰러져 병환으로 사망했다.
- 사이고 다카모리
원 역사 유신삼걸의 일원. 대만 점령과 류큐 병합을 꾀하였으나 조선의 개입으로 둘 다 실패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낙향한 뒤 병환으로 사망한다.
-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을 주장한 일본의 사상가. 유영복 국제사법재판에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국학자들이 청나라에서 열린 유학 만방대회에 참여하자 국학자들이 일본의 명예에 누를 끼칠 것 같아 그에 대항해 참여한다.
- 나카에 조민
원 역사에서 일본에 루소를 소개한 자유주의 사상가. 원 역사에선 기인으로 유명해서 나카에 조민 기행담이 발간되었을 정도인데 여기서는 유학 만방대회에 속으로는 감격했으면서 겉으로는 성현 집안에 내려오는 가주를 맛보려 왔다는 핑계를 대고 참석한다.
- 다나카 지가쿠
원 역사 국수주의 종교운동가. 일련종의 신도로 팔굉일우의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다. 아주대회가 끝난 뒤 귀국하려는 옥균에게 접근하여 지금 천하가 평온을 얻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잠시의 소강에 불과하며 언젠가 구미 나라들 사이에서 큰 전쟁이 발발할 것이이므로 그때 신력을 드러내어 천하 만방을 정법에 귀의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시와라 간지
원 역사 일본제국군 장군. 육군대학을 다니는 도중 방일한 귀남의 연설을 듣고 평화는 물질이 다하는 순간 깨질수밖에 없다고 현실성을 지적했다. 하지만 귀남이 반론하기 전에 무타구치 렌야가 끼어들어 정신론을 설파하였고 그 자리에서 자존심이 상해 이후로 무타구치와 군 내에서 대결하게 된다. 결국 성격이 모나서 무타구치에게 밀렸다.
- 무타구치 렌야
원 역사 일본제국군 장군. 이시와라 간지의 지적을, 동아시아의 물질에 의한 평화는 물질이 없더라도 정신력으로 유지 가능하다는 정신론을 주장했다. 이시와라와는 군 내에서 대결했는데 결국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 건 무능하지만 성격은 좋았던 무타구치였다.
1.2.2. 홋카이도 공화국
- 에노모토 다케아키
원 역사 에조 공화국 초대 총재(대통령). 가이슈를 대신하여 육군총재직을 차지한 야미오카 텟슈를 설득하여 에도성 사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보신 전쟁이 원 역사와 달리 교토 공경들의 중재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요시노부가 의회가 설치되면 피를 보지 않고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다고 여겨 신정부와 타협하자 이에 반발하여 하급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건너가 에조 공화국을 건국했다. 처음에는 욱하여 독립 운운하였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자치권을 얻는 데 만족했다. 이 과정에서 국명을 홋카이도 공화국으로 바꾸었고 대선을 치러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 사이토 하지메
신센구미 3번대 대장. 무사도를 잇겠다며 신센구미를 떠난 뒤 북해도 공화국에 정착하여 자신의 검술과 다른 이들 기술 이것저것을 섞어 검 1자루와 권총 1자루를 사용하는 '일도일포류'를 개창했다. 이후 문하생들로 보안업체, 그러니까 용병단을 꾸려서 명성을 떨치던 중에 조선의 중매로 하와이로 넘어가 칼라카우아 국왕의 친위대 노릇을 하게 됐다. 그런데 수상 깁슨이 왕명을 잘못 전달하여 백인 지주들의 무장단체 호놀룰루 소총대 대원 네 명을 직접 처단했다.
1.3. 대청
1.3.1. 황실
- 광서제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애신각라 재첨)
청나라 제11대 황제. 원 역사에서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등용하여 변법자강운동을 실시했지만 서태후가 주도한 수구 만인 세력의 쿠데타로 유폐되고 결국 암살당한 비운의 황제다.[51] 막 용상에 올랐을 때는 연소하여 그 이후에는 이홍장이 정권을 잡아 저를 부르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없어 그저 서책을 벗삼고 있었는데 강남에서 끝도 없이 올라오는 절절한 상소문을 보게 됐다. 그 글에 자신에게 간청하는 글귀 들어있는 것이 진심은 아니요, 그저 겸양하기 위한 뜻임을 모르지 않았건만, 그럼에도 울컥하는 마음에 드는 것은 금할 수 없어 비밀리에 조선국으로부터 신하를 설득(?)하는 방법을 배워 이홍장을 직접 설복시키고 의회 설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친정에 나섰다.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이후 1889년에 중국 대륙을 넘보는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음모에 대항하기 위하여 표현의 자유 인정과 시장 전면 개방을 뜻한 '백가쟁명 백문제개'의 윤음을 내렸다. 이러한 행보가 쌓여 중국의 젊은 황제가 조선의 조언이라면 가볍게 흘려듣지 않는다는 소문이 북경 외교가에 파다하다. 서태후가 자금성을 나가게 되어 원 역사와 다르게 자금성 내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되었다. 손덕명과 원세개를 측근으로 끌어들였으며 이로 인해 이홍장은 사직하였고 독살 미수 자작극을 벌인 서태후는 사실상 광서제 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급격한 변법으로 민심이 흔들렸고 이에 변법을 늦추려고 하지만 권력을 잃을까 걱정하던 원세개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금성에 유폐당했다.
이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깊이 고민한 끝에 청은 천조이며 앞으로도 천조여야 한다는 조바심과 그 편벽된 마음이 문제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원세개가 산해관에서 조선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한 북양삼걸들을 포섭하여 자의원을 소집한 뒤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군정으로서의 변법을 포기하고 황권을 모두 공화정부에 위임할 것이며 선양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따르겠다고 약조했다. 그리고 일체의 허명을 혁파한다는 명분으로 수 천년 이어져 온 천조질서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북양삼걸을 대동한 채 산해관에 나타나 북양군은 앞으로 공화정부의 명을 받들라 지시하고 원세개의 직첩을 회수한 뒤 조선은 더 이상 청의 번국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1905년, 공친왕이 훙하자 직접 조문하고 충(忠)을 시호로 내렸다.
1912년, 최익현이 세상을 떠나자 조서를 보냈다.
1913년, 북경을 방문한 귀남 부부를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지금의 평온을 만들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 황후 타타라씨
원 역사의 각순황귀비 타타라씨. 서태후가 궁내정치를 포기하여 밀당 끝에 광서제의 정비가 될 수 있었다. 원 역사처럼 서구 문물에 관심이 많아 기술자들을 불러 섭영술을 배우기도 했다. 1905년에 마침내 태자를 낳았다.
- 황태자
황제 자이티얀과 황후 타타라씨의 외동아들. 푸이와 동년배다. 실존인물이 아니기 때문인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부(溥)'자 항렬이기 때문에 '아이신기오로 푸X'일 것이다. 조선의 상왕이 된 귀남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2013년 기준으로 청의 황제가 이 황태자의 아들이다. 아무래도 상당히 장수한 모양이다.
- 자희태후 예허나라 힝전 (=엽혁나랍 행정)
원 역사 청말의 황후, 황태후, 섭정. 서태후로 유명하다. 권력욕은 여전한데 원 역사에서 의화단 운동으로 대표되는 반서구파를 지원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장지동의 말에 넘어가 청 황실의 막대한 부를 쏟아부어 '동아철도회사', 일명 '동철'의 최대 주주가 되며 개화에 동참한다.개화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동철이 장차 거대한 권력이 될 것이라는 말에 넘어갔다당시 댓글에서는 이것만 해도 중화 중흥의 주역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난리가 났다.
공친왕이 일으킨 정변을 이홍장과 그의 회군이 막아내긴 했지만 군사력이 집중된 이홍장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결국 불만을 품고 베이징에 1700년대부터 존재하던 러시아정교회 성당으로 피신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일이 꼬여 조선으로 쫓겨나듯이 와야 했고 현재 조선 왕궁에 거주중. 대신 쫓겨나면서도 동철 지분은 챙겨와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고 실제로 조선왕이 자신에게 붙여준 김옥균을 이용해서 동철 대주주로서의 업무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업무를 위해 한양보다 감시가 적은 온양으로 내려오기까지 한다. 대외적인 이유로는 병 치료를 위한 온양온천 이용. 김홍집이 처음 서태후에게 망명을 권유할 때도 이 온양온천을 언급한다.[52]
그러다가 1888년에 옥균의 조언을 받아들여 가지고 있는 동철 지분 절반을 독일에게 넘겨주고 얻은 화포와 군함을 가지고 북경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이어 북양군을 견제하고자 그 화포와 군함을 이홍장과 대립하는 장지동에게 넘겨주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황권에 기댄 권세를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원군이나 도쿠가와 요시노부처럼 민심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권력을 누리려 한다. 흠정당과 국민당 내 반서태후 세력을 제거하려 자작극을 벌였으나 이를 광서제에게 들켰고 이로 인해 광서제가 천하를 우롱했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칠 수 있게 되어 광서제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이름값으로 공화정부의 초대 총통이 되었다. 사서에 제 이름 '예허나라 힝전'을 제대로 남길 수 있게 된 것에 감격하여 자신이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53]
- 순친왕 아이신기오로 이후완 (=애신각라 혁현)
광서제의 친부. 공친왕의 동생. 재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천하의 대국을 바라봄은 공친왕만 못하고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서태후만 못하다는 소릴 듣는다. 원 역사대로 1891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 경군왕 아이신기오로 이쾅 (=애신각라 혁광)
원 역사의 청나라 초대 내각총리대신. 병으로 사망한 순친왕 이후완을 대신하여 자의원의 총재를 맡고 있다.
- 종군왕 아이신기오로 자이타오 (=애신각라 재도)
광서제의 막냇동생. 공무하느라 아들 푸이를 기르느라 정신이 없는 순친왕 자이펑을 대신해서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3.2. 공화정부
- 서세창 (=쉬스창)
원 역사 북양정부 제2대 대총통. 공화정부의 예부상서로 발탁됐다. 높은 사람이 가야 체통이 산다는 이유로 졸지에 내몰려 아주대회 논의과정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서예가 마땅히 종목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 당소의 (=탕사오이)
원 역사 북양정부 초대 국무총리. 대청 주조선공사이다.
- 장작림 (=장쭤린)
원 역사 봉천군벌의 수장. 갓 약관 넘은 청년 시절부터 출세할 생각으로 조선말을 익혔을 정도로 나름대로 야심이 있다. 고작 농장 경비하는 일로 청춘 보내기를 원치 않아 북양군이 조선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철도를 끊으려 들 때 이를 막고자 만들어진 '보로의군(保路義軍)' 부대를 하나 꾸렸다. 이후 조정에서 은자를 나누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군을 따라 북경에 입성하여 연줄 하나쯤 만들어볼 요량으로 군영 안팎을 드나들며 두루 사귀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 참위. 싱거운 음식을 좋아해 혹평한 이승만과 달리 작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이후 자기 손으로 북양군을 산산히 쪼갠 이홍장의 눈에 띄어 젊은 나이에 신임 총통 장지동의 경호직을 맡게 됐다. 그 뒤 저의 은인 이홍장이 특별히 높이 세운 장지동을 위하는 마음 반절, 자신이 이처럼 위세 높은 사람이라 우길 때 근거로 삼을 마음 반절로 속 없는 젊은이 행세로 말동무를 자처하고 있다. 대전쟁이 발발하자 만주의 옛 팔기 자제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철도 인근을 경비하고 있다.
이후 시베리아 출병으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호걸이라면 어려운 곳에서 시작해야한다는 원 역사의 호탕함을 보여주며 기울어가던 흠정당에 입당, 결국 총통직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인기로 버티던 흠정당은 그의 사후 공중분해되어 5당 16파 시대가 열리고 만다.
- 육징상 (=루렁샹)
원 역사 북양정부 제2대 국무총리. 대전쟁 종전 협상에 청국 대표로 참석했다.
1.3.3. 자의원
- 잠춘훤 (=천춘쉬안)
원 역사 호법정부의 수석총재. 광서성 의원으로 조정과 서태후 양쪽에 바른말을 해 밉보였지만 북양군의 쿠데타 덕분에(?) 자의원이 사실상 문을 닫아 그 자리를 지켰다. 다시 자의원을 소집한 광서제에게 변법공자들의 급진적인 개혁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북양군이 중앙에 존재하는 이상 언로는 열리되 열리지 않은 것과 같다며 남양군과 마찬가지로 분할하여 각 성에 흩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장훈 (=장쉰)
원 역사 청나라 소조정의 섭정. 무(武) 외에 별다른 재주가 없지만 유영복이 관심을 피하기 위해 마구 인재를 천거한 덕에 눈에 띄어 잠춘훤과 함께 광서성 의원이 되었다. 자의원을 직접 소집한 광서제가 그대들이 요구하면 선양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자 기겁하여 즉시 부복하였다.
1.3.3.1. 국민당
- 고홍명
원 역사 청말 문인. 중국인-포르투갈인 혼혈이다. 혈기왕성한 24살 때 유영복을 찾아가 흑기군의 모사가 됐다. 유영복이 흑기군을 해산하고 나서도 그의 측근으로 활약하고 있다. 광서제가 의회를 설치하자 과도한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유영복을 대신하여 국민당의 의원이 됐다.
- 강유위 (=캉유웨이)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사상가. 인과 예를 버리지 않으면서 분란 없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하고 있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조선변정고'[54]라는 책을 냈는데 의회 설치를 주장하며 인용한 구절이 문제가 되어 투옥당했다.[55] 이후 광서제가 친정을 선포하며 사면했다. 조선의 제의로 곡부에서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가 개최되자 거기에서 원 역사보다 공자개제고를 일찍 선보여 파란을 일으켰다. 자의원이 설치되자 국민당에 입당하여 자의원의 의원이 됐다. 제자들이 결성한 보국회에 치여 뒷방 늙은이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광서제가 다시 자의원을 소집하자 자의국을 활성화하여 각 성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면 모두가 변법의 참뜻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공자개제고로 노벨 유학상을 받았고 그 후광을 바탕으로 차기 총통이 되기 위해 강남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 장지동
원 역사에서 양광총독, 호광총독으로 양무운동의 대표인물. 원 역사에서는 외세를 배격하긴 했지만 부국강병을 내세우고 철도, 병기창[56] 등을 통한 근대화를 지향했는데 여기서도 서태후를 설득하여 동철에 투자하게 만들었고 조선의 은 소동 때 기술자와 바꾼 은으로 한양병공창을 만들었다. 현재는 남양대신을 맡아 강남 지방의 최고 권력자. 서태후가 가진 동철 지분 절반을 처분하여 독일로부터 받은 각종 병기와 함선을 건네받아 북양군에 꿇리지 않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홍장에 비해 의회제도에 우호적이다. 남양대신이기에 사실상 강남 세력이 주축인 국민당의 후원자다. 공화정부 출범 이후 벼슬을 내려놓고 국민당의 자문으로 합류했다. 이후 이홍장의 마지막 부탁을 받고 공화정부 총통직을 수락했다.
- 모택동 (=마오쩌둥)
원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아버지가 장사 일대의 문인들과 어쩌다 교류를 트게 되어 그 인연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고종 탄생 100주년(1952년)엔 조선에 방문하기도 하였고 대공당의 장개석과는 몇십년에 걸쳐 정적이었다고 한다. 귀남은 전생에서 기억하던 공산당 수괴들이 나라를 어지럽힐 것을 걱정하며 공안서에 모택동과 김일성이라는 자들이 나오면 조심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역사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혹은 전달할 때 전생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꿈에서 신인이 나타났다'는 핑계로 전달해 설득력이 부족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조선에 의해 해를 입지도 않고 공산당과도 연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1.3.3.1.1. 보국회
- 손덕명 (=쑨원)
원 역사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초대 임시 대총통. 동생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형 손덕창의 억지 때문에 하와이 유학을 강제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통적인 중국적 삶에 만족하지 못해 가출하여 홍콩을 경유해 인천으로 왔다.[57] 현재 경일학당에서 의학을 배우고 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일학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하와이 유학생 하쿠올레의 부탁을 받고 통역자로 나섰으나 영어에 유창한그리고 고시 낙방으로 시간이 남아도는황현이 중간에 끼어들어 큰 활약은 없었다.
의회가 설치되자 곧바로 귀국하여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유영복을 대신해서 자의원 의원이 된 고홍명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다. 국민당 내에서 보국회라는 청년 조직을 이끌고 있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광서제가 변법의 뜻을 밝히자 원세개와 함께 광서제의 측근이 된다. 그리고 소위 변법공자들과 함께 변법을 밀어붙였으나 강남에서 역풍이 불고 북양군이 자기들이 가진 힘에 취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선군의 활약과 광서제의 성단으로 혼란을 간신히 수습한 이후 천하대세가 분구필합 합구필분이라면 미국의 예를 본떠 천하를 합치지도 갈라놓지도 않고 금만 간 채로 묶어두면 된다는 생각으로 연방제를 도입했다.[58] 창의군에 합류해 오랜만에 등장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국민당의 이념으로 삼민주의를 내세웠는데 그 내용이 원 역사의 민족, 민권, 민생이 아니라 중민, 교민, 부민이다.
- 양계초 (=량치차오)
강유위의 제자. 손덕명이 이끄는 보국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손덕명이 광서제를 따르기로 하자 그를 따라 광서제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변법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할 말은 하고 보는 성격이며 보다 온건한 변법을 추구한다. 군비 늘리는 태세가 무서운 조선을 경계하고 있다.
- 구구갑
강유위의 제자. 이른바 변법공자의 일원으로 그 중에서 말석이다.
1.3.3.2. 대공당
- 송교인 (=쑹자오런)
원 역사 중화민국의 혁명가. 덕명이 추진한 국공합작에 불만을 품고 국민당을 탈당하고 자기 계파를 모아 대공당을 차렸다.
- 장개석 (=장제스)
원 역사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초대 총통. 인천, 상해, 천진 등을 오가며 서양 학문을 익혔다. 고종 탄생 100주년(1952년)엔 조선에 방문하기도 하였고 국민당의 모택동과는 몇십년에 걸쳐 정적이었다고.
1.3.4. 신군
1.3.4.1. 북양군
- 이홍장
원 역사에서 청말의 북양대신으로 양무운동의 핵심. 여기서는 서태후가 개화에 동참하게 되면서 원 역사에서 서태후의 물밑 지원을 받는 반 개화 청류파의 견제를 받았던 것과 달리 서태후와 손을 잡게 된다.
서태후 편에서 공친왕의 정변을 막아내며 단독으로 집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남아있던 청류파를 솎아내기도 했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만주인 고관들과 서태후의 조선파천 과정에서 친러 만인 정권이 들어서며 살짝 밀린 상태. 대신 북양함대에 대한 지원은 끊기지 않아 강력한 군권은 유지중이다. 국제적인 위상이 날로 상승하고 있는 조선을 경계하고 있으며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 설치 등 기존 중국의 전제군주정을 위협하는 요소는 일절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국 의회의 문이 열리자 서태후의 국민당에 대항하여 국론일치를 외치는 흠정당을 차렸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광서제가 원세개를 측근으로 삼아 그에게 북양대신직을 내리면서 하직하게 된다. 이후 유럽을 순방하면서 외유를 즐기던 차에 북양군이 일으킨 난을 조선군이 진압하였고 광서제가 모든 권력을 공화정부에 위임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귀국하여 '자칭' 북양삼걸을 복날 개 잡듯 줘팬 후(…)[59] 변법공자들을 찾아가 무슨 생각으로 북양군을 사실상 해산하고 연방제를 도입했냐고 따져물었다. 그 자리에서 이들에게 나름의 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적어도 대계가 바탕에 있으니 무언가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이후 자기 여생을 불태우며 북양군의 문제 일으킨 자들을 산산이 쪼개고 이들 빈자리를 능력 있는 다른 성의 젊은이들로 채워넣는 대규모 사업을 진행했고 장지동에게 차기 총통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 뒤 원 역사보다 1년 빠른 1900년에 사망하였다.
- 마건충
이홍장의 막료. 원 역사와 달리 유학 경험은 없지만 그 능력은 여전하다. 장수나 책사는 아니되 군대에 꼭 필요한 참모다.
- 원세개 (=위안스카이)
원 역사 북양정부 초대 대총통. 이홍장의 부관으로 일하다가 의회 설치가 확정되자 눈에 띄는 북양군 대신 의화단을 이용해 여론몰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타고난 모략가 기질을 발휘하여 반 조선 여론을 형성하였지만, 청국 입장에서도 충분히 수용할만한 정책에도 태클을 걸어 이홍장으로부터 적당히 하라는 꾸중을 들었다.
이홍장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두텁게 하기 위해 의화단을 통해 국민당을 겁박하여 세를 누르려 했지만 전봉준의 계략(?)[60]으로 의화단의 구호 ‘양이를 몰아내자!’가 ‘일을 달라! 땅을 달라!’라는 조선식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의화단의 트란스발 공화국 진출에 본의 아니게 말려든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손덕명과 함께 광서제에게 발탁되어 북양대신이 되었다. 그리고 변법에 대한 반발을 총칼로 억누르고 있는 데 아이러니한 게 이러한 반발 세력이 지주 세력이라 이들과 교역하던 조선인들이 난데없는 공황에 빠진 게 함정.
아무튼 신식무기를 앞세워 남양군의 군권을 회수하고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몽골 왕공들을 진압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과정에서 북양군의 힘에 취해 조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강남 기기창에 손을 뻗었다. 이에 조선이 경고하고 만주 동삼성 지역까지 중립을 선언하자 오히려 더욱 폭주하여 광세제를 자금성에 사실상 유폐하고 계엄을 선포하였다.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끽해야 3만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저지른 행동인데 이에 조선은 총동원령을 내려 60만 대군을 소집하고 그중 절반인 30만에 달하는 병력들이 수 차례에 걸쳐서 압록강을 도하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뒤에 최익현과 만나서 북양군 위신이 걸린 강남 기기창의 지분은 돌려줄 수 없으니 순순히 청나라의 이권 또는 동삼성 등의 영토를 받고 떨어지거나, 아니면 배째라는 식으로 나와서 대놓고 자신이 한간임을 인증했다. 이후 결국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산해관의 병력을 조선군의 참호선에 돌격시키려다 북경에서 빠져나온 광서제에게 파면되고 이후 종적을 감췄다.
회차가 거듭될 수록 안좋은 방향으로 재평가를 받는 중인데 빌헬름 2세, 라스푸틴, 서태후,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 같은 현실에서 악명을 떨친 이들 중 상당수가 선의의 나비 효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원세개만은 갱생되지 않고 악역으로서 등장이 끝났기 때문. 결국 완결이 될 때 까지도 등장하지 못해 선의로 가득 차고 그 히틀러도 고쳐 쓰는 작중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갱생하지 못한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그 결과 팬덤에서는 트루 한간으로 추앙받아 일종의 밈이 되었다.
- 단기서 (=돤치루이)
원 역사 북양삼걸의 일원. 저들 영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북양군의 젊은 군관들과는 달리 여전히 대청의 부흥을 꿈꾼다.[61] 그리고 조선을 얕잡아보는 다른 군관들과 달리 지금 조선의 왕은 송양공이 아니라 진문공에 가깝다고 평하였다. 그래서 풍국장과 자주 충돌한다.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난 몽골 왕공들을 소탕하여 북양군 첫 실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마지막까지 재고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결국 북양군의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이후 조선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자 곧바로 원세개 뒤통수 때릴 궁리를 하는(…) 풍국장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고 광서제가 산해관으로 향했을 때 풍국장과 동행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엔 귀국한 이홍장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 풍국장 (=펑궈장)
원 역사 북양삼걸의 일원. 조정이 대청이 되었든 대탁이 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출세만 생각하는 야심가. 그래서 나름대로 조정에 충성하는 단기서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단기서의 승전보에 몸이 달아올라 전공을 세울 생각으로 원세개에게 조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기창을 압수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조선이 격분하자 아예 군무는 군부인 우리가 잘 안다며 이 기회에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선동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이 30만임을 알게 되고 원세개가 광서제의 감시를 맡기자 바로 갈아탈 준비를 한다. 원 역사의 별명이 북양의 개였는데[62] 여기서는 자기의 비굴함을 포장하기 위한 말로 썼다. 단기서, 왕사진과 마찬가지로 귀국한 이홍장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 왕사진 (=왕스전)
원 역사 북양삼걸의 일원. 조용히 할 일을 하는 이로 군관들 중에서는 명망이 높다. 조선이 북양군에게 경고장을 던졌을 때 보국회 학사들 말처럼 변법 속도를 늦추자고 제안하였다. 이후 원세개의 난이 진압당하고 이홍장이 귀국했을 때 다른 북양삼걸과 함께 주먹찜질을 당했다.
- 조곤 (=차오쿤)
원 역사 북양정부 제3대 대총통. 요양과 심양 사이에 조선군의 진격을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원세개의 명을 받고 산해관을 넘었으나 기껏해야 3만이 최대일 거라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30만 대군이 몰려오는 것에 겁을 먹어 사기충천한 채 천자에게 지부상소를 하러 몰려온 조선군과 싸운다면 참패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총 한 발 쏘지 않고 물러났다.
1.3.4.2. 남양군
- 장패륜
장지동의 막료. 원래 청류파의 일원이었으나 원 역사와 달리 세를 굳히기도 전에 이홍장의 모함으로 파벌이 풍비박산 나 장지동 아래로 들어갔다.
1.3.5. 중원
1.3.5.1. 신강성
- 야쿱 벡
원 역사대로 난을 일으켰으나 공친왕과 좌종당에게 진압당한다.
1.3.5.2. 대만성
- 와단 셰츠(瓦旦 燮促)
대만 원주민. 아타얄족에 속하는 다바오 부족의 우두머리이다. 원 역사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본 세력에 저항하였다. 작중에서는 장뇌, 찻잎을 키우겠다고 다바오 부족의 땅을 침범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 해동일보에 저들 사연을 보냈다.
1.3.5.3. 기타
- 장문상(張汶祥)
조선에 파견된 마신이와 공친왕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던 한인. 마신이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63] 원 역사처럼 마신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원군이 뿌려놓은 정보망에 걸려 청으로 압송된다.
- 왕기얀 충허
삼구통상대신 재임 시절 조선의 도움으로 천진 교안을 수습한 이후 모창희에 이어 조선에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었다. 원 역사에선 야쿱 벡의 난 이후 러시아와의 리바디아 조약을 잘못 맺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조정에 대량의 상납금을 내고 풀려났는데 여기서는 조선에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어 비슷하게 호구잡히고는 있지만 마음은 편안한 상태다.
- 모창희
마신이의 후임으로 온 흠차치리조선사무대신. 부임한 지 3달 정도 지났을 때 이필제가 주도한 모화관 습격으로 곤욕을 치렀다. 속으로야 수모를 겪게 만든 자들 머리통이 저자 높이 걸리기를 바랐지만, 모창희가 처신을 얼마나 잘못했으면 선량한 나라 조선에서 저런 봉변을 당하냐고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여 적당히 사건을 묻고 넘어갔다.
- 좌종당
신강에서 공친왕과 함께 야쿱 벡의 난을 진압하였으나 공친왕이 동삼성으로 유배아닌 유배를 당하자 공을 세웠음에도 실각한다.
- 이홍조
청류파의 우두머리. 이홍장이 자신이 벌인 마신이 암살 사주를 덮어씌워 처리한다.
- 유영복
청나라의 군인. 흑기군의 우두머리. 청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에게 원 역사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 하필 양총을 사용한 탓에 청이 배후로 몰려 지원을 끊고 공개적으로는 비적 무리로 토벌해야 한다는 선언을 내며 진퇴양난에 빠져 공명정대한 판결을 조건으로 투항한 후 국제사법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동철에 채용되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중국 시골의 미신적인 사람들에게 철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일[64]을 하며 느긋하게 지내고 있다. 딱히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종 부추기러 오는 인간들이 있어서 곤란해하는 중. 서태후가 국민당을 세우자 강유위와 함께 국민당의 인재로 언급된다. 의원으로 추대되었지만 이에 부담을 느끼고 대리로 측근인 고홍명을 보낸다.
1.3.6. 외성
1.3.6.1. 만주
- 공충친왕 아이신기오로 이힌 (=애신각라 혁흔)
원 역사에서 종친을 대표하여 이홍장 등과 함께 동치중흥을 이끈 함풍제의 이복동생. 국제 인식은 정확하나 실무능력이 떨어진다. 서구 열강에게 디저트로 전락한 청나라의 현실을 못 본 척 시간만 보내는 조정에 회의를 느끼던 중 새로운 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문공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서태후의 빠른 피신과 서구의 선진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서 진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란이 성공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때 조선의 중재로 반란의 명목상 시발점이 된 마신이 암살 미수 사건의 책임을 이홍장과 이름이 비슷한 이홍조에게 떠넘겨 이홍조와 청류파를 반역죄로 숙청하고 정당한 명분으로 천조를 지키기 위한 거병이라며 명분을 만들어내 목숨을 건져 청의 발흥지라고 할 수 있는 동삼성, 즉 만주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사실상 만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청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중원에서 쫓겨난 만주족의 나라가 필요할 때가 올테니 지금 만주에서 기반을 다지는 것도 썩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후 만주가 생각보다 빠르게 발전하여 때때로 대청의 부흥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동삼성만 떼어 독립해 칸 노릇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현 황제이자 조카인 광서제가 친정과 신정을 선포하자 그가 청을 다시 세우는 걸 도와 청사에 남기를 원하고 있다. 동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정적 서태후와 거리두기를 한 덕분에 스트레스가 덜해서 원 역사보다 7년 더 오래 살았다. 역사처럼 충 시호를 받아 공친왕에서 공충친왕이 되었다.
- 순친왕 아이신기오로 자이펑 (=애신각라 재풍)
순친왕 이후완의 5남. 광서제의 이복동생.[67] 원 역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아버지다. 공친왕이 병으로 쓰러지자 광서제가 드물게 목소리를 내어 차기 동삼성 총독으로 임명했다. 원 역사에선 의화단의 난에서 독일 외교관이 죽은 사건의 사과를 위해 독일에 갔었는데 여기서는 광서제가 서양과의 연줄을 만들어 놓기 위하여 조선의 세자, 일본의 황태자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 장례식에 보내게 되었다.
- 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샨키 (=애신각라 선기)
원 역사 이쾅 내각의 민정대신. 마지막 숙친왕. 동삼성은 용흥지지로서 결코 대청에 거스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자치권 확대를 바라는 만족 청년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저들 시조 먼터무가 실지로 조선 태조와 인연이 있다면서 조선에서 제작하는 활동섭영(영화) '조개홍업'에 등장하는 이지란 역으로 자기 장남을 캐스팅할 생각 없냐고 넌지시 물었다가 이번에 등장하면 그 다음 만주 사람 나올 때도 나와야 한다고 말을 듣고 단념했다.
- 마신이
공친왕의 심복. 1866년에 흠차치리조선사무대신, 즉 주조선청국공사로 파견되었다. 누구 하나 내치지 않고 나아가는 귀남의 리더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홍장의 사주를 받은 장문상의 권총탄에 세 발을 맞았으나 장문상이 양식 권총에 익숙하지 않아 총알이 급소를 맞추진 못했던 점과, 원 역사와 달리 인천에 있는 양의들의 발 빠른 조치로 목숨을 건졌다. 다만 무릎에 한 발이 박혔던 탓에 무릎만은 완전히 치유하지 못해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공친왕을 따라 동삼성에 정착하여 사실상 재상 노릇을 했다. 후일 양의가 거의 죽다시피 한 마신이를 살려낸 이야기가 구전되며 칠공구규(七孔九竅)[68]에서 피를 토하던 것을 양약 한 첩으로 낫게 한 것으로 부풀려져 양의학도를 양성하는 베르뇌 학당(경일학당)은 조선으로 유학을 온 청나라 유생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 장유재(張有財)
장작림의 아버지. 정축년 북벌 때 영모개라는 도적의 산채가 있는 곳을 조선군에게 말해주었다가 해코지 당할 뻔했지만 때마침 조선군이 들이닥쳐 영모개의 무리를 토벌함에 따라 변을 피했다.
- 구스타프 솔로몬 오페르트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동생. 본래 전공은 인도학이었는데 저의 형 때문에 어쩌다 지천명도 넘긴 나이에 동아시아 불교학자가 되었다. 옥균의 의뢰를 받고 막고굴 발굴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발견한 대규모 불교 문화재를 당초 계약대로 조선에 넘기는 대신, 동삼성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신설된 봉천대학교의 석좌교수 자리를 얻어냈다.[69] 이후 유학 배운 조선의 서자들이 어설프게 알고 떠들다가 독실한 불교 신자인 만주 사람들과 주먹다짐까지 하는 일이 적잖이 발생하자 더 이상 싸움이 나지 않도록 티베트 불교의 교리와 역사를 정리해서 널리 퍼트렸다.
- 옌창 (=음창)
원 역사 이쾅 내각의 육군대신. 정백기 만인으로 여기서는 주조선청국공사대리로 처음 등장. 귀국한 이후 자신의 뜻을 펼쳐 보고자 벼슬을 버리고 동삼성으로 내려와 이른바 '만주나(만주땅) 소조정'에 합류했다. 마신이가 천수를 다하고, 공친왕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자연스럽게 동삼성 내정을 손에 넣었다. 이후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 순친왕 자이펑을 끌어들여 몽골과의 연계를 통한 자치권 획득을 획책했다.
1.3.6.2. 몽골
- 젭춘담바 후툭투 8세
원 역사의 복드 칸. 이홍장이 몽골족의 자치권을 훼손하는 번부 폐지 정책을 추진하자 이를 계기로 주권 회복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몽고 왕공들이 중앙에서 밀어붙이는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칼을 들었을 때 끝까지 말렸다. 그러나 내몽골 왕공족들은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북양군의 조선제 맥심 기관총에 쓸려나갔다. 이후 1900년에 동삼성의 만주족 젊은이들과 손을 잡고 초원 유목민들의 불심을 자극하여 몽골 독립 여론 조성에 나섰는데 경허의 "불법으로 나라를 세우면, 나라가 쇠할 때 불법도 쇠할 것이다. 불문에 위엄을 빌어 청국에서 떨어져 나오되 완전히 떠남이 아니라 형제나 이웃처럼 지내기를 원한다 하면 여러 백성들간의 우의가 오래 이어질 것이며, 경국하는 법도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이를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 바로 독립하기 보다는 일단 청나라의 틀 안에서 힘과 목소리를 길러 자립해야 한다는 법문을 몽골 전역에 내렸다.
- 자 라마 (=담비잔찬)
원 역사 19세기 말 몽골의 칼미크인 군벌. 오이라트의 지도자 아무르사나의 환생을 자처한다. 아주대회 승마 경기에 난입하여 청의 카간이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하였으니 몽골 또한 따로 나라를 세우기에 마땅하다고 외쳤다.
- 하이산
원 역사 외몽골 독립운동가. 동삼성 자치권 획득을 바라는 만족 젊은이들과 짜고 자 라마에게 아주대회에 난입해 초원의 독립을 부르짖으라고 사주했다.
- 담딘수렌
원 역사 복드 칸국의 외무부 차관. 젭춘담바 후툭투 8세의 세속 제자이다. 젭춘담바 후툭투의 명을 받고 열하로 가서 경허와 회담을 가졌다. 열하에서 교의에 따라 나라를 세우면 나라의 운이 쇠할 때 교문도 쇠할 수밖에 없고 과연 몽골이 홀로 설 때 어디에도 의탁하지 않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경허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1.3.6.3. 티베트
- 달라이 라마 13세
아직 나이가 어려 집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티베트 독립을 꿈꾸고 있다.
- 악왕룁샹 (=아그반 도르지예프)
달라이 라마 13세의 스승. 부랴트인이다. 이홍장이 번부 폐지 정책을 추진하였을 때 공친왕에게 티베트의 자치권을 회수하려고 한다면 '너희 칸'이 아니라 러시아 차르에게 붙겠다고 넌지시 경고했다. 이후 이홍장이 실각하고 광서제가 친정에 나섬에 따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급격한 토지개혁으로 인해 민심이 요동치자 강남의 실권자 장지동을 찾아가 청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1.4. 류큐
- 쇼타이
류큐 왕국 제2 쇼씨 왕조 제19대 왕. 원 역사에서는 류큐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지만, 코치웨카타의 활약으로 독립국의 군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신정부가 류큐 병합을 시도하였을 때 체념하여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주권을 회복한 뒤에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조선과 일본에 공사를 파견하고 류큐의 새로운 먹거리 산업 육성을 꾀하는 등 진지한 태도로 국정에 임하고 있다.
- 코치웨카타 초조 (=쇼 토쿠코)[70]
원 역사에서 중국으로 밀항해 청 조정에 류큐 왕국 독립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한 인물이다. 본작에서는 조선으로 건너가 귀남의 지지를 이끌어내 류큐 독립 보장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후 초대 주조선 류큐 공사로 부임하여 비지니스 외교에 열중하고 있다.
- 린 세이코 (=나시로 슌보)
원 역사에서 코치웨카타 초조와 함께 류큐 왕국 독립을 위해 힘쓴 인물. 원 역사에서는 류큐 병합이 확정된 후 자살했으나, 작중에서는 류큐 왕국의 독립이 유지되어 멀쩡히 잘 살아있다. 아주대회 논의 과정에 참석해 가라테도 종목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 대남
- 성태제
원 역사 대남 제10대 황제. 대남의 독립이 앞당겨져서 원 역사와 달리 제위를 지키고 있다. 세자에게 양위하고 대남을 방문한 귀남과 깍듯한 자세로 국정을 논하였다.
- 완생공(=응우옌신꿍)
원 역사의 호찌민. 인천부에서 공부하다가 창의군에 합류하여 프랑스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1.6. 시암
- 라마 5세 (=쭐랄롱꼰)
짜끄리 왕조의 제5대 국왕. 맥심 기관총을 조금 헐한 값에 들여올 궁리를 하던 차에 조선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하여 국채를 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금 일부를 국채 매입으로 대신하여 조선제 기관총과 연발소총을 사들였다. 개인적으로는 무려 500년 동안 불법을 탄압한 조선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장차 천하 대세가 어그러질 때를 대비하여 의지할 곳을 얻기 위해 혼기 찬 옹주 발라야 알롱꼰을 경양대군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 가야 수로왕과 결혼한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이 바로 아유타야 왕국이니 삼한과 시암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는 참신한(?) 주장을 하였다.[71] 조선이 임금의 나라일뿐 아니라 백성의 나라라며 자유주의를 내세우자 결혼 제안을 한 것을 후회했지만, 먼저 제안한 입장에서 무를수도 없어 결혼이 성사되었다.
- 쁘릿사당
짜끄리 왕조의 왕족. 라마 5세의 조카. 다른 종친들과 더불어 조선국 국제를 본떠 군민공치, 즉 입헌군주정을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가 라마 5세의 노여움을 사 본래 통교 계획도 없었던 조선국 공사로 부임하게 됐다. 조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돌아가보았자 저 맞아줄 이 없음을 아는지 이런저런 공을 세웠지만 무려 13년 동안 조선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 머물면서 우연히 알게 된 삼국유사에 나온 아유타국 이야기를 청국 신임 공사에게 꺼냈다가 그걸 들은 라마 5세의 꾀로 짜끄리 왕조와 조선간에 정략혼이 논의되는 나비 효과가 발생했다.
1.7. 필리핀
- 호세 리잘
원 역사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조선이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면서 여러 아시아 국가에 초대장을 보내자 필리핀 대표단을 칭하며 인천에 발을 디뎠다. 이후 한성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임시정부를 구성한 카티푸난 중진들의 추대로[72] 부통령 겸 외무장관으로 선출되었고 회의에 참가한 국가의 면면을 보고 주눅이 들어 회의에 직접 참가하기 보다는 회의 후에 개인적으로 열강의 대표들을 만나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선의 배려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거기다 회의에서 형식적이나마 발언권도 얻을 수 있었고 협약에도 필리핀의 이름을 넣은데다 결정적으로 독일이 새로운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등 상당히 많은 소득을 얻었기에 이후 김옥균에게 조선은 신사의 나라라며 감사를 표했다. 그 뒤 독일의 지원과 관련해서 안드레스 보니파치오와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충돌하자 그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조선에 오게 된다. 이후 돌아왔을 때는 조선 전 총리인 김옥균과 미국에서 온 극동위원회 대표인 윌리엄 태프트, 아서 맥아더, 러프 레인저 대표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대동하고 와서 쿠데타를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원 역사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현실적인 문제를 근거로 당분간 독일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로 인해 아기날도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무력 진압을 시도했지만, 호세 리잘이 조선을 끌어들이고 또 조선이 미국을 끌어들여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 에밀리오 아기날도
원 역사 필리핀 공화국 초대 대통령. 임시정부 출범 이후 필리핀이 즉시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당연히 대통령이자 독일의 후원을 지지하는 안드레스 보니파치오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미국이 필리핀의 새로운 후원자로 나서자 다시 식민지로 전락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여 총을 내려놓았다.
1.8. 하와이
- 칼라카우아
하와이 왕국 제7대 국왕. 섬에 백인이 너무 많으니 황인을 일꾼으로 데려다 써서 견제해볼 요량으로 아시아를 순방하던 중 조선에 들려 대원군의 회갑연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후 원 역사대로 백인 무장단체 '호놀룰루 소총대'가 참정권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자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입헌군주제는 좋은 것이라는 귀남의 설득에 생각을 바꿔 선제적으로 유색인종의 참정권까지 보장하는 개헌을 추진하여 백인들을 견제하기로 하였고 조선의 중매로 하와이로 대거 넘어온 사이토 하지메 휘하 일도일포류 문하생들로 호놀룰루 소총대에게 꿇리지 않는 친위대를 구성했다.
- 월터 깁슨
칼라카우아의 총신. 실존인물이다. 호놀룰루 소총대가 무엄한 생각을 품지 않게 '경고'하라는 왕명에서 실수로 '경고'를 빼놓고 번역하는 바람에 일도일포류 문하생들이 호놀룰루 소총대 몇을 살해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73]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제임스 하쿠올레(James Harbottle Hakuole)
경일학당의 하와이 유학생. 실존인물이다. 최익현에게 하와이가 돌아가는 사정을 설명해준다.
- 조지프 나와히 (=이오세파 카호오루히 나와히오칼라니오푸우)
원 역사 하와이 왕국의 외무장관. 하와이도 아시아에 속한다고 주장하려는 의도로 아주대회 논의 과정에 참석하여 마땅히 조정 종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 인도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원 역사의 마하트마 간디. 트란스발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중 이완용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깊은 감동을 받아 더 이상 우리 땅, 우리 겨례의 운명을 남에게 맡겨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전쟁이 발발하고 인도에도 징집령이 내려지자 대규모 불복종 운동을 펼쳤다.
- 자와할랄 네루
원 역사의 인도 공화국 초대 총리. 간디와 함께 대전쟁 종전협상에 참가했다.
-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원 역사의 인도 공화국 초대 법무부 장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억압할 수 있게끔 하는 모든 종류의 기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이른바 문화 대혁명 운동을 이끌어 인도 내외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 유럽
2.1. 프랑스
- 파리 외방전교회
-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장경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 병인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이다. 본작에서는 원 역사보다 1년 먼저 발생한 병인양요(엄밀하게 말하면 을축양요) 때 프랑스 극동 함대 선발대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귀남의 제안에 따라 그를 기리는 경일학당 ─ 뤼세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가 인천에 설립된다. - 펠릭스 클레르 리델(이복명)
원 역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베르뇌의 명을 받고 상경하여 대원군과 밀담을 나누었다. 을축양요 때 베르뇌 주교가 실수라고 하지만 조국 프랑스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허망해 한다. 이에 귀남이 베르뇌를 기려 경일학당을 세우자 감동한다.
- 앙리 드 벨로네(Henri de Bellonet)
프랑스의 외교관. 을축양요[74]가 원 역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면서[75] 출세 코스에서 밀려나 졸지에 최초의 주조선 프랑스 공사가 됐다. 을축양요에서 있었던 사건사고를 어떻게든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조선에 거의 평등한 조약을 맺어주어 프랑스의 국익을 해쳤고 십 년 가까이 눌러앉아 있어야 했던 등 한탄이 많았지만 간신히 복귀. 이후 국제정세가 조금 더 명분에 신경쓰는 방향이 되자 '준문명국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을 장점으로 삼아 '극동 문제는 극동 전문가에게!'를 주장한 끝에 외교부 장관에 오른다.새옹지마후에 극동 문제보다는 러시아 문제가 더 중요해지면서 교체됐다.
1895년 조선이 북양군을 상대로 보여준 위용 덕에 그의 초장기 투자가 옳았음이 증명되어 프랑스 외교가에서 과장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유라시아 동맹'의 기초를 닦은 위인으로 등극했다. 1896년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생각으로 노구를 이끌고 한성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여 필리핀의 새로운 후원자를 자처한 독일을 은근히 견제했다. 여담으로 간만에 율란 맛이나 보러 오라는 귀남의 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원 역사에서 병인양요를 주도했던 프랑스 제국 극동 함대의 제독. 본작에서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벨로네가 주도한 조선 정벌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문수산성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후 이제라도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자고 벨로네에게 압력을 넣었다.
- 작은 파리(Petit Paris)
최익현의 인도로 조선에 망명 온 파리 코뮌 구성원들과 그 가족들이 꾸린 일종의 난민촌이다. 몇 년 뒤 프랑스 정국이 안정되자 대부분 프랑스로 돌아간다. 베를린 회담 때 조선, 프랑스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정고문단으로 알려진다. - 샤를 벨레
작은 파리의 주민. 조선 땅으로 피난 온 코뮌 사람들 중 최연장자다. 원 역사에서는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객사했다. 1873년에 치러진 참의대부 선거에 자서전에 쓸 에피소드나 하나 만들 생각으로 입후보하였는데 노인 공경 정신 투철한 한양 서부 주민들이 표를 몰아주어 당선됐다. 이를 가지고 조선에서는 장동 김씨에 이어 파리 백씨의 시대가 열린다는 농담이 돌았다고. - 루이즈 미셸
작은 파리의 주민. 원 역사에서는 코뮌이 무너지고 누벨칼레도니로 유배를 갔다. 교묘한 말발로 명성황후를 꼬여내 마포나루에 고아원 겸 여학교를 새로 세운다.
- 쥘 그레비
원 역사 제4대 프랑스 대통령. 조선 탓에 식민지 경영에서 프랑스의 국익이 줄어들자 이를 어떻게 보충할까 하다가 "우리가 줄었으니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 경영 수익도 줄여주자"는, "나만 당할 수 없지!"라는 발상으로 외교정책을 진행한다.
- 에멜 플루랑스
러시아와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벨로네 백작 후임 외교부 장관이 된다. 조선에게는 누명을 쓸 뻔한 코뮌 사람들을 도와주어 고마움을 느낀다. 러시아와 함께 조선에 동맹을 제의한다.
- 사디 카르노
원 역사 제5대 프랑스 대통령. 원 역사에선 반체제세력 탄압을 빌미로 이탈리아계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당했지만 여기서는 반체제세력을 양지로 끌어내어 내분을 조장하는게 기본 탄압 방식이 되어 살아남았다. 파나마 운하 회사의 파산 과정에서 정치권에 뇌물이 오간 파나마 스캔들에서 뇌물을 받지 않아 명성이 높아졌지만 주변 인물들이 잘려나간 타이밍에 터진 드레퓌스 사건으로 고생했다.
- 알프레드 드레퓌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김홍집과 오페르트의 대활약 덕분에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른 반 년만에 대위 계급장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퇴역당할 때마저 '프랑스 만세!'를 외친 것이 언론의 주목을 받아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 오귀스트 메르시에
프랑스 전쟁부 장관. 김홍집이 주도한 선동과 날조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여론이 군부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자 은밀히 내사를 진행하였고, 진범이 방첩대 소속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불어닥칠 역풍을 우려하였으나 내사를 맡았던 피카르 중령이 회유가 통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이라 결국 대국민담화를 통해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하마터면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할 뻔 했으나 피카르 중령을 이용해 기사회생은 물론이요 특유의 정치력으로 눈에 거슬렸던 생시르 사관학교 파벌을 대거 쳐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을미년 만주출병 때 조선군의 동원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전쟁대학 교관 페르디낭 포슈를 통해 신속한 동원령으로 소집한 대규모 병력을 집단으로 운용해, 신속한 공세로 적의 전쟁수행 의지 자체를 공격하는 군사교리를 창안하였고 '살아 숨쉬는 프랑스 국민의 전의로써 적을 굴복시킨다'고 하여 이를 엘랑 비탈이라고 명명했다.
- 조르주 피카르
원 역사 클레망소 내각의 전쟁부 장관. 원 역사대로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걸 알아내고 메르시에 장관을 설득하여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76] 그러나 그 대가로 군부에게 찍혀 튀니지 현지인 연대 연대장으로 좌천됐고, 대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야 튀니지와 세네갈 현지인들로 구성된 제4혼성 티라이외르 연대장으로 프랑스에 돌아올 수 있었다.
- 빅토르 콜랭 드 프랑시
프랑스의 외교관. 원 역사처럼 주조선 프랑스 공사로 부임했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아 베베르와 잘 통하는 사이다.
- 가스통 랭드르(Gaston Raindre)
프랑스의 외교관. 신임 주조선 프랑스 공사이다. 조선에서 제작한 사극 영화 '조개홍업'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 레몽 푸앵카레
원 역사 제10대 프랑스 대통령. 카이저 빌헬름의 키예프 정부 지지로 인해 전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를 논의하기 위해 휘하 내각과 함께 등장한다. 클레망소 총리 등이 이참에 알자스 로렌을 되찾아오자고 주장하자 군통수권자는 자신이라며 진정시키지만 독일이 프랑스 국경에 더 가깝게 군을 주둔시키자 어쩔 수 없이 동원령을 발동한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의 작가. 옥균이 남해 별장에 칩거할 때쯤에 본인이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비행기 몰기 좋은 조선에 정착하여 수상기 우편배달부가 됐다.
2.2. 러시아
2.2.1. 황실
- 알렉산드르 3세
러시아 제국 제13대 차르.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인민의 의지가 조선에서 내부분열로 와해된 것을 보고 일단 양지로 유도한 다음 서로 싸움 붙이는 방식으로 자유주의를 억제하고 있다. 원 역사대로 열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 제14대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조선의 총선 개최를 실수라고 생각하는 등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선량하다고 할 수 있는 성품이지만 결단력이 없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공식이 앞당겨져 원 역사보다 1년 빨리 극동을 방문한다. 실론, 자바, 싱가포르, 남중국을 거쳐 일본에 갔던 원 역사와 달리 중간에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 조선에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많다고 걱정했으나 딱히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반러감정이 약해 오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일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을 때 연해주가 조선인 이민자들에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특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다가 천도교가 주도한 단체 읍소에 마음이 동해 운터베르거 군정장관에게 온건책을 시행할 것을 지시했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열차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아버지의 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전당대회를 여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사회주의 운동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의 자비를 바라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마치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십만 백성이 자신을 연호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건의를 올린 것에 진심으로 감동하여 전 러시아인의 어버이로서 그들이 요구한 헌법 제정과 두마(의회) 설치를 전격 수용하였다.[78] 이러한 유연한 대처 덕분에 이 시위에서 원 역사와 달리 단 1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반동세력의 친위쿠데타로 적백내전이 발생하자 양군을 중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막았지만 이로 인해 결국 대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혈우병을 이겨내고 장성한 황태자 알렉세이가 급사하자 실의에 빠져 장녀 올가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칩거에 들어갔다.
-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니콜라이 2세의 장녀. 급사한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를 대신하여 황위를 이었다.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아들. 혈우병을 이겨내고 기적적으로 장성하여 혼담까지 오가는 상황에서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니콜라이 2세의 매부.[79] 동생과 톨스토이에게 영합하지 않은 반동파 몇몇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신변을 확보하였으나, 라디오 방송을 사용한 볼셰비키의 반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심을 얻는 데 실패하자 국경군을 움직이기 위해 차르 일가를 데리고 도주하여 '키예프 정부'를 꾸렸다.
-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동생. 형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1세의 손자. 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개혁의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그 저변에 있는 볼셰비키의 영향력에 거부감을 느껴 알렉산드르 대공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2.2.2. 관료
- 예프게니 카를로비치 뷰초프
러시아의 외교관. 뷰초프 가는 조상이 스웨덴 출신인 외교명문가였다. 주조선러시아공사대리. 원 역사에서는 일본 하코다테에서 업무 역량을 쌓지만 본작에서는 조선의 개항이 앞당겨져 한양으로 오게 됐다. 조선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 노비세습제를 폐지하는 걸 본 고르차코프 공작에 의해 연해주로 보내진다.
- 카를 폰 슈트루베 (=슈트루베 남작)
러시아의 외교관. 러시아령 에스토니아 타르투 출신의 발트 독일인. 원 역사에서는 뷰초프처럼 일본에 먼저 파견된 외교관이고 그 후 파견된 미국에서 다기 컬렉션과 워싱턴의 문화계 중요 인물로 유명했다. 뷰초프의 후임으로 조선에 왔는데 여기서도 찻잔과 도자기를 모으는 게 취미라서 조선 도자기로 컬렉션을 만드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던 중 녹둔도 분쟁이 터져 마음 고생을 했다.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무라비요프 백작)[80]
블라디보스토크의 최대 후원자. 원 역사에서 동시베리아 총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러시아 역사와 전통의 공갈외교로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이끌어냈으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조선 농민들의 개척 러시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고르차코프 (=고르차코프 공작)
원 역사처럼 19세기 말의 러시아의 외무장관. 차르의 제일가는 일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이그나티예프 백작)
원 역사에서 그레이트 게임 관련 사무를 담당한 외교관. 히바와 부하라를 합병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르차코프의 후임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조선의 꾀에 번번히 당하는 중. 정확히는 매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것이다. 작중에서 조선이 뭔가 할 때마다 러시아의 국익을 침해하려는 음흉한 속셈이라고 생각하는데, 적중률이 거의 0%에 가깝다.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러시아의 외교관. 청에 공사로 파견된 이그나티예프의 부하로 조선에 친러파 육성을 명 받고 조선에 왔다. 원 역사에서처럼 조선과 조선 문화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 대원군에게 석파란을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면모도 보인다. 나중엔 슈트루베 남작의 후임으로 조선에 부임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 제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김홍집에게 조선은 더 이상 중립국으로 놔두기는 너무 커졌다고 말하며 유럽국과 손을 잡는 편이 좋을 거라고 충고한다. 1894년에 다시 조선에 공사로 파견되었다.
- 아르투르 폰 모렌하임 (=모렌하임 남작)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조선에 조러불동맹을 제의한다.
- 파벨 시몬 운터베르거 (=파벨 표도로비치 운터베르거)
니콜라이 2세의 연해주 방문 당시 군정장관으로서 사실상 조선인에게 종속된 연해주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니콜라이 2세에게 정해진 길이 아닌 조선인 구역으로 가길 권유하여 연해주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고발한다. 그 뒤 니콜라이 2세에게 강경 대처를 권유했지만 천도교를 앞세운 조선인들이 관청 앞으로 몰려와 읍소하자 우유부단한 니콜라이 2세가 주저하다 온건책을 지시하면서 계획이 실패하게 된다.
-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원 역사 러시아 제국 초대 총리. 자영농 육성을 통한 내수시장 활성화를 꾀하던 차에 농촌 개혁을 부르짖는 《불씨(Iskra)》를 읽고 볼셰비키가 조선의 공산당처럼 선을 넘지 않는 체제 개혁을 꿈꾼다고 착각하여[81] 레닌을 따로 불러 머리 굳은 지주들을 압박할 여론몰이를 부탁했다. 이때 레닌에게 잠재적 동조자라고 건네준 명단에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이후 본인의 예상을 초월한 볼셰비키 돌풍에 당황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했으나 확실한 성과를 내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탄압할 명분이 없어 "조선의 속담대로 호랑이를 키웠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반동세력의 테러로 라스푸틴의 목숨이 위협받은 상황에서도 사회민주노동당이 선을 지키는 것을 보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판단, 두마의 권한 확대를 꾀하였으나 이를 배신이라고 판단한 반동세력의 폭탄 테러로 원 역사보다 6년 빨리 사망했다.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파트킨
군인. 두마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블라디미르 수호믈리노프를 제치고 스톨리핀 내각의 전쟁성 장관이 됐다.
2.2.3. 두마
2.2.3.1. 사회민주노동당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원 역사의 블라디미르 레닌. 어린 나이에 원 역사보다 늦게 터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여 당국의 추격을 피해 동지들과 함께 조선으로 도주했다. 도주 과정에서 직면한 냉엄한 현실에 과연 혁명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인민의 의지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하나에 알아서 쪼개지는 동안 자의반 타의반으로 혼자 공안서를 상대했다. 이 과정에서 김가진과 묘한 우정을 쌓았다.[82] 인민의 의지가 사실상 와해된 이후에는 6개월 동안 봉준 부부 밑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혁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어서, 폭력에만 맡겨둘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러시아로 귀국한 이후 "일린"이라는 가명으로 '노동자농민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83] 1898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차 대회에 참가했는데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 농민들까지 포용하여야 하고 교회의 개혁적 요소들과도 임시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일린 노선'을 주장하면서 정교회 신부 가폰의 입당을 지지하여 겔판드, 마르토프 무리에게 쫓겨났다. 이에 뚜렷한 공감대가 없는 저치들이 합심한 것에 모종의 힘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이왕 분열이 공식화된 김에 차별화를 도모하기 위해 봉준에게 편지를 보내 가르침을 구했다.[84]
이후 은밀히 마르토프 무리를 지원한 독일이 계획대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조선의 앞잡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불씨(Iskra)》를 창간, 창간호에서 노동자들을 포섭해 파업이나 투쟁을 벌이려는 계획은 당내 '소수파(멘셰비키)'의 독단에 불과하며, 러시아의 벗 조선과 긴밀한 연을 맺고 있는 것은 자신이 이끄는 '다수파(볼셰비키)'지 소수파가 아니므로 독일이 일말의 진실에 9할의 거짓을 섞은 무고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러시아의 개혁은 '마르크스-전 노선'에 의해 담보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안 그래도 자영농 육성을 꾀하던 비테의 부탁을 받고 농촌 개혁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런데 농촌에서 시작된 개혁 여론이 니콜라이 2세가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약속할 정도로 커져서 자신을 기용한 비테를 비롯한 반동 세력의 반감을 크게 사고 만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조선으로 향하게 되고 스승인 봉준에게 하소연하기에 이른다. 이후 조선의 물밑 도움 덕분에 비테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영러협상의 초안을 가지고 화려하게 귀국하였고 이듬해 사회민주노동당의 영수로서 두마에 당당히 입성했다.
대전쟁에서 키예프 정부를 항복시키면서 소련을 건국하고 원 역사와 달리 적백내전으로 폐허가 되지 않은 소련을 강대국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지병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
러시아 정교회 사제, 혁명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고 방황하던 중,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주교의 추천을 받아 신학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도시 빈민의 참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레닌의 '노동자농민계급해방투쟁연맹'에 끼게 됐다. 원 역사대로 오흐라나의 정보원이지만, 태생적으로 속내를 도저히 감추지 못해 이미 레닌에게 그 사실을 들켰다. 그런데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교회 사제'인, 그러니까 체제의 편인 교회의 사람을 모임에 끼어줄 수 있는가를 두고 마르토프와 레닌이 논쟁을 벌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부에 갈등이 발생했다.
-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원 역사의 러시아 제국 제3대 총리. 일린(레닌)과 합심하여 마을 한둘을 정해 농지개혁정책을 실험하고 있다. 작중 일린이 과장한 평가에 의하면 농업생산성이 5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를 발전시킨다는 데 있어서 뜻을 함께할 뿐 그 발전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일린과 공적인 교류 외의 친교는 삼가고 있다. 그래도 정치에는 재주가 없는 자신에게 일린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어 사회민주노동당과 교류를 이어가는 중이다. 입헌당이 출범한 이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고는 있지만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의 총애를 받고 있어 사회민주노동당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비테 사후 두마의 강력한 '간언' 덕에 재무장관직을 이어받았다.
-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
원 역사의 이오시프 스탈린. 볼셰비키의 정파지 《불씨(Iskra)》를 무단번역하여 조지아 티플리스에서 대량으로 유포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죄목이 가벼워 금방 석방됐다. 이후 정식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반동세력이 라스푸틴을 습격하자 네바 강 다리 아래에 널브러져 있던 그를 찾아 데려온다.[85]
현재 반동세력으로 전락한 오흐라나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체카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내전을 반대하는 일부 볼셰비키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건의하나 조선이 수를 꺼낼 것이라 생각한 레닌에 의해 반려된다.
-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원 역사의 레프 트로츠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젊은 중진이다. 개혁을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을 확실히 억누를 필요를 느끼고 있다. 내전과 대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차관 대행으로 뽑혀 전쟁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아 놀라워하는 중.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여성 혁명가. 귀족 출신이라 귀족들이 사회민주노동당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원 역사의 괴승 라스푸틴. 남들 현혹시키는 재주가 탁월한 사람 어디에 없을까 고민하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진들 앞에 돌연 나타나 "너희 탕아들의 죄가 크고도 무겁다, 지금이라도 회개하라"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일린의 설득이 통했는지 콜론타이에게 반했는지 사민노동당에 합류하여 원 역사대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의 혈우병 증세를 완화시킨 뒤 차르 일가 근처를 맴돌면서 두마를 설치한 니콜라이 2세의 성단을 찬양하며 볼셰비키들이 선량한 백성의 뜻을 차르가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대해 강조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반동파의 테러로 죽을 뻔했지만 주가슈빌리의 발빠른 구조로 목숨을 건졌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번에야말로 뭔가 달라져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랏일 맡을 만한 교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 펠릭스 예드문도비치 제르진스키
원 역사 체카의 설립자. 폴란드인으로 작중에서는 체카의 일원으로 스탈린 밑에서 일하고 있다.
2.2.3.2. 입헌당
- 파벨 니콜라예비치 밀류코프
원 역사 러시아 공화국 외무장관. 자유주의자. 대전쟁이 발발하자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 연립내각의 장관 대행으로 선출됐다.
-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지안코
원 역사 러시아 제국 제5대 두마 의장. 온건보수주의자.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 언제나 엉뚱하면서도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을 고르는 조선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전봉준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영지로 초청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봉준의 조언을 듣고 용기를 얻어 모든 사랑이 깃들 수 있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실천을 해볼 생각으로 입헌당에 입당하였다. 대전쟁이 발발하자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 연립내각의 총리 대행으로 취임했다.
-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원 역사 러시아 임시정부 제2대 총리. 대전쟁이 발발하자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 연립내각의 장관 대행으로 선출됐다.
2.2.4. 기타
- 인민의 의지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인민주의 테러조직. 원 역사에서는 러시아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차르를 암살한 그 다음해 와해되었지만 본작에서는 일부 인원이 조선으로 도주하여 함경도 원산에 정착했다. 그런데 도주 과정에서 직면한 냉엄한 현실과 정치범들에게 해명 기회를 준 조선 정부의 질문 "당신들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로 인해 대대적 내부 노선투쟁이 일어나 사실상 조직이 붕괴한다. 그리고 러시아 당국은 이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불온세력들을 양지로 끌어올린 뒤 적극적으로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대 불온세력 정책을 바꿨다. 이 정책은 점점 러시아 서쪽으로도 퍼져가는데, 물론 조선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
-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니셰프스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저자 및 나로드니키주의 사상가로 레닌이 존경하던 인물이다. 조선의 헌법이 자유주의란 말을 듣고 시베리아의 유형지를 탈출하여 조선 땅 원산으로 왔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적잖은 인민의 의지 당원들이 조선 땅에 합류했는데 귀남이 제시한 "당신들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말려들어 내부노선 투쟁이 일어나 사실상 조직이 붕괴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는다.
-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
원 역사 러시아의 로켓 과학자. 안양대군이 과학 인재를 초빙하고자 진령군을 찾았을 때 목록에 있던 사람이다. 고향을 사랑하여 조선에 오라는 초청은 거절했지만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키려는 꿈은 품고 있어서 조선에 자신이 생각한 설계도와 이론을 제공할 테니 테스트 해 보고 결과만 알려달라는 역제안을 했는데 비행기와 비행선같은 몇 가지 제안의 실현 가능성을 알고 있던 귀남의 눈에 들어 제안이 받아들여진다. 라이트 형제가 그의 좀 더 현대적인 비행기 설계를 테스트해 봤지만 기술 수준 부족으로 실패한 모양.
-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
화학자. 주기율표를 창안한 공로로 1898년에 노씨권학상을 수상하였다. 성의 없는 답례만 표하는 다른 유럽 과학자들과 달리 명륜당에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86] 조선 국왕이 미래 기술을 매우 중히 여긴다고 들어 자신의 꿈 중 하나였던 미래의 유망산업인 석유산업의 발전을 노려보고자 서한에 앞으로 석유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무정부주의자. 원 역사대로 고국에서 쫓겨나 영국에 정착했다. 전우가 스펜서, 헉슬리와 힘을 합쳐 우생학을 논박하는 토론회를 연 이후 조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양주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꾸린 농협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 때려잡자는 모임에 찾아가려 하니 도와줄 수 있겠냐는 조선의 세자 척의 황당한 요청에 응하여 폭력행위는 결코 무정부주의의 본뜻이 아니며 간과할 수 없는 악행이므로 양심이 넘지 않는 한에서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서한을 빌헬름 2세에게 보내 명성을 얻었다. 이에 정부에 협조하는 행위 그 자체를 반대하는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이 반발하자 안 그래도 조국 러시아에서 두 젊은이 스톨리핀과 일린(레닌)이 앞장서서 농지개혁을 외치며 성과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고 있던 터라 "실천이 없으면 남을 설득할 수 없다."면서 아예 자신의 사상을 생디칼리즘으로 재정의했다. 그리고 귀남이 제안한 대동도(다이토 제도) 구아노 광업 사업에 참여하여 국제 신디컬리즘 협회를 꾸렸다. 귀족 출신이라 육체노동은 못하겠다고 영국에 남아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중.
- 블라디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푸리쉬케비치
원 역사 러시아 제국 말기의 반동주의 정치인. 오흐라나 국장과 함께 라스푸틴 암살을 모의했다.
-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원 역사 고려인 록 가수. 에필로그에서 짤막하게 언급되었다. 안타깝게 요절한 원 역사와 달리 2013년까지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귀남의 비서가 '빅토르 초이'는 예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중국적인 것으로 보인다.
2.3. 영국
- 에드워드 7세
대영제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초대 국왕. 왕세자 시절 조선의 '그랜드 프린스 안양'이 자신처럼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안양대군이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왔다.
- 해리 파크스
영국의 외교관. 공사대리. 조선의 개항이 빨리 일어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원 역사와 달리 조선으로 발령됐다. 나중엔 주 선양 영사로 파견되어 동삼성총독 공친왕과의 협상을 담당한다.
-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가장 위대한 평민이라는 별명과 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으로 유명한 영국의 총리. 시종일관 도덕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조선에게 호감을 느끼고, 조선 유학생들이 결성한 반침략 연대를 후원하기도 했다. 물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만큼 대놓고 내각의 의론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2기 내각 출범을 전후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다. 고든이 수단에서 전사하지 않아 원 역사보다 오래 집권하고 있다. 이후 1886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을 밀어붙여 기어코 통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자유당 내부에 균열이 발생하여 내각불신임 표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자치법 통과로 얻은 아일랜드계 표심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석패하여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
제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여 대영제국을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영국의 총리. 원 역사처럼 글래드스턴의 정적이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을 미끼로 던졌는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비 백작의 폭로로 반전 여론이 높아져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를 채권단이 강제하는 방향으로 동방문제를 매듭지었다.
- 15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탠리 (=더비 백작)
원 역사처럼 디즈레일리 2기 내각의 외무장관. 원 역사에서도 디즈레일리와 성향이 맞지 않아 결국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는데 여기서는 디즈레일리와 달리 고립주의자로 반침략 연대의 활약을 보고 이때다 싶어 영국와 러시아의 밀약을 언론에 폭로하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다. 본작에서는 조선의 기묘한 헌법에 흥미가 동해 조선을 방문하였다.
- 3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솔즈베리 후작)
원 역사처럼 디즈레일리 다음의 보수당 영수. 더비 백작의 후임 외무장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찰스 고든이 수단으로 보내지지 않았고 그 결과였던 글래드스턴 정부 붕괴가 일어나지 않아 아직 총리가 되진 못한 채로 야당 당수를 하고 있다. 이후 1886년에 아일랜드 자치법 통과로 자유당이 분열하자 내각불신임 카드를 던졌고 표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글래드스턴이 사퇴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10년 넘게 별 탈 없이 집권하였으나 1902년 베네수엘라 사태를 계기로 영독동맹의 균열이 가시화되면서 외교의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 어니스트 베델
원 역사의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아버지 토마스가 요코하마에 더해 인천을 사업 무대로 선정하여 원 역사보다 15년 빨리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선에서 운송업이 히트칠 거라고 생각하여 인천에서 지게 배달꾼으로 일을 시작해, 어느덧 자신의 이름을 딴 '배달상회'를 창립하였다.
- 조지프 체임벌린
정치가. 네빌 체임벌린의 아버지. 자유당이 쪼개지고 나서 원 역사보다 빨리 솔즈베리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일하게 됐다. 조선이 북양군에 대항하여 30만을 투입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평화와 도덕을 설파한 극동의 은자가 알고보니 극동의 프로이센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솔즈베리 후작이 사퇴한 이후 외교 참사는 전부 보수당 잘못이라며 아서 벨푸어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식민지 경영 합리화와 확장을 동시에 이룩할 방책이 자신에게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자유당 헨리 캠벨배너먼을 꺾고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성급한 관세 정책 때문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쳤고 공약으로 내걸었던 영불협상 또한 진전이 없어 결국 정해진 패배의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유당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영러협상을 승인하였다.
-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영국의 오컬티스트. 아버지를 여의고 한창 방황할 적에 진령군을 만나 제자가 됐다. 진령군에게 배워 조선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사실 어렴풋이 진령군이 사짜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지만, 그간의 '정'과 그래도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88]으로 여전히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알프스를 등정하다가 아이거 산의 산신령을 보았다고 한다.사실 에이와스라 카더라사실 급성 고산병이 와 헛것을 봤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거나 그때 본 노인의 인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관하고 있다. 물론 귀남의 사례에서 보이듯 이 군밤 세계관은 산신령이 실존하는 세계관이다 보니 실제로 알프스 산신령을 봤을 지도 모를 일이다.
- 조지 버나드 쇼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회주의자. 전-마르크스 부부와 교분이 있어 민태호의 추천으로 영국 공사로 부임한 민영환을 가깝게 여긴다. 아일랜드 자치법이 원 역사보다 20년도 넘게 일찍 제정된 이후 런던과 더블린을 오가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원 역사 영국 제52대 총리. 자유당의 중진으로 조선이 런던에 세운 탕평구락부(콩코르디아 클럽)의 단골이다. 조선이 제시한 영러협상 초안으로 체임벌린을 압박하여 다음 총리직을 약속받았다.
- 윈스턴 처칠
원 역사 영국 제61·63대 총리. 체임벌린의 관세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후에 조청일 3국이 드레드노트급 군함 공동구매를 진행하자 조선이 중립 이상의 관계를 선포하지 않으면 함선 양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1910년 대전쟁이 시작되자 전시내각의 해군장관이 됐는데 그 비범한 전략적 식견이 어디가지 않아 헬리골란트 해전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그리고 한 번의 해전에서 가용한 전함의 수가 줄어든 것에 충격을 받아 최대한 정중하게 조청일과 남미 여러 나라에 넘길 예정이었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꿀꺽했다.
- 허버트 조지 웰스
원 역사 소설가. 여기서는 귀남이 우주전쟁을 라디오 드라마화 하는걸 제안하여 받아들였고 테슬라가 개발한 라디오로 직접 들어보기도 하였다. 공군 전대간의 전쟁인 <공중 전쟁>도 라디오 드라마화 하려고 각색한 극본을 조선에서 받았는데 전후 인간 정신과 물질이 공히 피폐화되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스토리에 감명을 받아 누가 그런 상상을 했는지 궁금하던 차 조선 국왕이 직접 제안한 말이라는 것을 듣고 어떻게 그런 상상을 했는지 질의하기도 했다.[89]
- 존 로널드 루엘 톨킨
반지의 제왕의 작가. 젊은 나이에 징집되어 베르됭 방면에 '땜질 병력'으로 투입됐다. 그리고 토굴에 가까운 참호에서 문득 이런 구절을 떠올렸다. '땅에 난 구멍 속에, 호빗이 살고 있다.'
-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물리학자. 헬리골란드 해전에서 대패한 영국 해군이 과학과 관련된 모든 인재를 연구인력으로 차출한 덕분에 원 역사와 달리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하지 않았다.
2.4. 독일
- 프리드리히 3세
독일 제국 제2대 카이저. 권위적인 아버지,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아들과 달리 선량한 자유주의자다. 암을 방치하여 돌연 사망한 원 역사와 달리 후두 전체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하여 수명이 늘었지만 벙어리가 됐다.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신이 죽고 자기 아들이든 비스마르크의 후임이든 누구도 독일의 앞날을 마음대로 망가뜨릴 수 없도록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강행하여 나라의 제도를 바꾸었다. 그럼에도 빌헬름 2세가 제국주의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자 하나의 카이저,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국민을 통해 카이저 개인이 아닌 독일인 전체가 원해야만 국가를 움직이도록 빌헬름 2세에게 가르침을 내린 뒤 1892년 안락사를 택한다.
- 빌헬름 2세
독일 제국 제3대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어렸을 때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가 자신의 팔을 고친답시고 주독일 조선 공사 윤태준에게 부탁하여 침을 맞았는데 효과가 없어 조선에 반감을 가지게 됐다. 안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가 소위 '선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구축한 세계 질서와 (빌헬름 입장에서) 거기에 기생해서 이득을 보고 있는 조선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 역사처럼 공자가 유럽을 침공하는 악몽까지 꾸어 황화론을 신봉한다. 태자 시절 아버지에게 속히 다른 강대국들이 깃발을 꽂지 않은 백지의 땅에 호엔촐레른의 독수리를 박아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동맹인 영국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여론을 선동했지만, 조선의 개입으로 거하게 실패했다. 이때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국정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콧대 높은 융커들과 헛바람 든 자유주의자들을 제멋대로 움직일 자신이 없었기에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심취한 삼류 정객들을 그러모아 의회에서 세계 정책을 지지해 줄 '독일민족당'을 꾸렸는데 품격 없고 뻔히 속이 보이는 인간들 뿐이라 영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그래도 직접 의회정치나 대중들 선동하는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언행 드러내기 전 한 번 쯤은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또한 육해군 예산 편성 과정을 직접 챙기게 되면서 군부가 준비하는 슐리펜 계획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게 됐다. 팬덤에서 요약하기를 '나 혼자 전쟁하자고 되는 게 아니라 의회를 설득해야 하니 이리저리 설명을 들어봤는데, 나부터가 설득이 안되네?'
1895년, 드레퓌스 사건 때 난데없이 프랑스 내부의 반유대주의를 선동한다는 누명을 썼다.
1901년,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참가한 뒤 귀국하여 브레멘을 순방하다가 정신이상자 요한-디트리히 바일란트에게 습격 당해 뺨이 살짝 찢어졌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이를 빌미로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아나키즘 단체를 규탄하는 회담을 개최했다. 그런데 조선의 세자 이척의 '선의'로 일부 온건파 아나키스트들의 협조를 얻는 선에서 회담이 끝났다.
1906년, 영러협상이 진행되면서 독일의 고립이 가시화되자 독일인의 생활공간을 제외한 식민제국 자진 해체라는 승부수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모로코 위기 때 삼국협상과 대등한 협상력을 보였다. 적백내전이 터지자 키예프 정부 지지를 선언하며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생각보다 피해가 커지고 창의단의 개입으로 염전 사상이 퍼지며 압박에 시달리던 중 때마침 티푸스로 쓰러진 최익현에게 병문안을 빙자한 불만 토로를 하러 왔다가 최익현 최후의 유세를 듣고 어느 정도 감화되어 라임나무 클럽을 찾아가 자신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위할테니 세계에 평화를 확립할 방안을 모색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제국 초대 수상. 작중 조선에서는 '덕국 정승 비수막'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 철도사업을 훼방을 놓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조선의 '선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이런저런 나비 효과 때문에 프랑스가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일보 직전이라 말년에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3세를 도와 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하지만 외교와 달리 내정에는 범재에 가까워 시행착오를 겪었고, 결국 이런 자유주의적 개혁이 보수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반발을 불러 원 역사보다 조금 늦은 1892년 은퇴하게 된다. 원 역사대로 1898년에 사망한다.
- 카를 마르크스
원 역사와 같이 영국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파리 코뮌이 최익현과 뒤낭의 중재로 항복하자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조선의 만민공산당 놀음에 기함하고 있다.파리 코뮌 사람들은 수염 난 프로이센놈이 기함할 걸 즐겼다하지만 본인에게 직접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전봉준은 살림에 도움도 되고 심심함도 풀 겸 거두어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후 전봉준이 자신의 막내딸과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사망한다. 작중 조선에서는 구주 땅의 이름난 선비로 알려져 있으며 공자, 맹자처럼 '마자(馬子)'라고 불리기도 한다.
- 오토 뵈켈
원 역사 독일의 국수주의, 반유대주의 정치가. 정치적 친위세력이 필요했던 빌헬름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세계 정책을 적극 찬동하는 독일민족당을 차렸다. 사람들 선동하는 데 재주가 있지만, 천박하고 욕심이 많다. 그렇지만 빌헬름 2세의 불독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조선이 정파를 초월한 정치인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라임나무 클럽'을 세우자 거기에 참가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참여했는데, 세계정책이 요구하는 예산이 지나친 감이 있다는 비판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본인 왈 "지갑 열리기 전 애국심과 열린 뒤 애국심이 다르더라."
- 베른하르트 폰 뷜로
독일 제국 제4대 수상. 원 역사대로 빌헬름 2세 비위 맞추기의 달인이다. 영국 없이도 독일 홀로 양면전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육군과 로열 네이비를 앞지르기 위해 건함 예산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해군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다.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독일 제국 해군대신. 제국의 군인답게 내각의 허가없이 독자적으로 조선에 사격통제장치 구입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데 조선이 사격통제장치를 넘길만한 명분이 필요하다며 평화를 위해 쓰일 기술을 공유하자고 역으로 제안하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서 뵐로우를 찾아갔다.
- 에리히 레더
원 역사 크릭스마리네 원수. 주조선 독일공사관 주재무관이다. 원세개가 난을 일으켰을 때 놀라운 군사력을 보여준 조선을 경계하여 소위로 임관하였을 때부터 아시아 관련 소식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꾸준히 정독하곤 하였지만, 도덕과 실리 중 무엇이 조선의 진의인지 알 수 없어 의문만 깊어지고 있다.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민주주의의 창시자. 선황 프리드리히 3세의 개혁 덕분에 맘놓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큰맘 먹고 '마르크스-전 노선'과의 타협을 선언했으며 조선이 세운 '라임나무 클럽'에서 알게 된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세계정책'이 과도한 예산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小 몰트케)
헬무트 폰 몰트케의 조카. 경쟁자였던 한스 베셀러가 빌헬름 2세가 예전과 달리 슐리펜 계획을 영 마뜩잖게 여기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폭한 덕분에 신임 참모총장이 됐다. 그러나 제 나름대로 수정한 슐리펜 계획 역시 빌헬름 2세 입장에서는 거기서 거기라 여러모로 곤란한 입장이다. 이후 수정된 몰트케 계획은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계획으로 수십만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심대한 충격을 받아 신경쇠약으로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 로자 룩셈부르크
원 역사 독일 제국의 공산주의자.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터지고 빌헬름이 전쟁을 준비하자 이에 반대하면서 전쟁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베른슈타인 등과 대립했다. 이후 창의단의 활약으로 종전의 기미가 보이자 정부 측에 진압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비폭력 집회를 열어 카이저를 압박했다.
- 에리히 폰 팔켄하인
원 역사 독일 제국 제5대 참모총장. 자신의 이름을 딴 계획으로 수십만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물러난 몰트케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 역사 독일 제국 제6대 참모총장·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 전세의 불리함을 이유로 파직당한 팔켄하인의 후임으로 기용됐다. 철저한 방어보다 공격으로 소모전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르덴 방면에 전력을 투입하여 프랑스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염전 사상이 퍼지고 비폭력 집회가 잇다르자 단호하게 진압하겠다고 했다가 빌헬름 2세에게 군내 티푸스나 잘 관리하라는 핀잔을 들었다.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원 역사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사민당 내에서 가장 우파에 속한다는 이유로 독일제국 거국내각의 대표로 선출되어 대전쟁 종전 협상에 나섰다.
- 아돌프 히틀러
원 역사 나치 독일의 퓌러. 미대에 낙방하고 비엔나에서 무위도식하던 중 박물관에서 동양화를 보고 심심풀이로 모작을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잘 팔려서 이쪽으로 데뷔할까 생각도 할 무렵 대전쟁이 터지자 엉뚱하게도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리라 믿고 독일로 건너가 자원 입대했다. 원 역사에선 다민족군인 오헝군에 입대하기 싫어서 독일군에 자원입대한 것인데, 이 세계의 히틀러는 민족차별의식 그런 거 없고 단순히 영감 때문에 당장 전쟁 시작한 독일군에 입대한 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참전이 확정된 걸 알고서 "좀 기다려서 오헝군에 입대해도 됐겠다, 괜히 독일군으로 왔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작중 서술에서도 "그것도 딱히 정상은 아니다"고 딴지를 거는 것이 소소한 개그. 이후 프랑스어를 조금 읽을 줄 안다[90]고 창의군을 이끌고 유럽에 도착한 최익현의 통역병이 되었는데, 마침 전선에서 목탄으로 그린 동양화를 최익현에게 보여주고 품평을 부탁하였다가 최익현에게 "더 정진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상당히 에둘러서 표현한 평을 받았다. 철종 때부터 선비로 살아오면서 서화에 도가 튼 최익현 입장에서는 영 눈에 차지 않는 그림 이였겠지만 통역병으로 자원하며 수고해주고 참혹한 전장에서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는 서양 청년에게 차마 쓴 소리를 할 수 없어 그렇게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그걸 듣고 동양의 유명인사가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 주었으며 이제 전쟁이 끝나면 유명해질 일만 남았다고 몽상 섞인 기대를 품게 된다.
그 후엔 전쟁에 대한 열의는 가시고 종전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계속 서부전선에 복무하던 중, 루덴도르프 공세에 따른 공격 명령을 보고 이딴 공세 명령 따르느니 다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고[91] 공세명령을 강행하려는 대대장에게 내가 직접 저쪽 가서 싸우고 싶냐고 물어본다며 무인지대를 건너가 프랑스군[92]에게 우리는 더이상 싸우기 싫은데 그쪽은 어떠냐고 당당하게 말하며 서부전선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상호 암묵적 항명의 주도자 중 한 명이 된다.[93] 결국 항명죄로 영창에 가긴 했지만 영창 안에서도 본래 역사에서 보여준 선동가 기질을 십분 발휘한 대사자후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성토하며 독일군 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역하고 나서 자신감을 가득 품고서 뮌헨과 베를린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지만 여전히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무슈 최에게 칭찬을 받은 자신의 그림이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곰곰히 생각한 결과 전쟁을 조장하고 평화에 반대하는 사악한 자들이 똘똘 뭉쳐서 반전의 기수로 나선 자신을 탄압하는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여 때마침 베를린을 방문한 귀남에게 자신이 친 난초를 출사표 삼아 선물하고 정계에 투신했다. 그 후 독일평화주의노동자연맹을 결성, 사회주의의 독주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보수파 내에서 비교적 온건한 쪽에 들었던 세력들의 지지를 한데 모아 국민자유인민당(Nationalliberale Volkspartei)나포당을 창당하고 마침내 독일의 수상이 됐다. 비록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 당 중진의 비리와 부패 문제 때문에 그리 오래 집권하지는 못하여 인지도는 낮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 식민지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불안에 휩싸였던 프랑스와 영국을 다독이며 한데 묶어 취약했던 유럽 내 협력체제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단순 망상증을 넘어 진심으로 평화주의에 심취했던 히틀러는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국제돌격대(International Stormtroopers)라는 NGO를 꾸려 세계를 누비면서 재해 구호활동을 하였다.
원 역사에서 그를 독재자로 이끌고 파멸로 몰고 간 비정상적인 망상증은 여전했으나 조선이 유럽에 퍼트렸던 선의의 나비효과가 망상증의 방향을 인종차별과 전체주의가 아닌 평화주의로 틀어버리며 본래 역사와 완전히 다르게 세계평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진 위인으로 기록되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여러모로 작중 조선의 선의의 큰 수혜자.
2.5. 벨기에
- 레오폴드 2세
제2대 벨기에 국왕. 그 유명한 손목왕이다. 콩고 자유국을 '자신의' 나라라고 부르며 착취할 생각밖에 없었지만 명분과 도의를 무기 삼아 마구 휘두르며 영국이고 일본이고 마구 내정간섭을 해대는 조선과 그걸 이용해먹기로 작정한 프랑스, 회의장에서 전모를 파악하고는 곧바로 프랑스를 도와주려는 영국 등에 의하여 콩고를 가졌음에도 프랑스가 조선에 했던 것[94]처럼 식민지 운영에 문명개화를 지원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버리자 자기 돈을 뺏긴다며 펄펄 뛰었다. 게다가 이걸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의도적으로) 비문명국의 개화를 지원하기 위해서 사비를 털고 나선 훌륭한 왕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려서 조금이라도 수탈하려는 낌새가 보이는 순간 전 유럽의 비웃음과 견제를 받을 판이라 정부 재정까지 총동원하여 콩고 근대화에 힘쓰고 있다. 결국 콩고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쏟아부어지면서 벨기에에서는 콩고를 자국의 예산을 집어삼키는 어둠의 심연이라고 분통을 터트렸고 이 상황이 너무나 억울했는지 말년에는 차라리 독일과 손을 잡자는 이야기를 해서 내각을 놀라게 하였다.
- 알베르 1세
제3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조카. 서부전선이 알자스-로렌에서 시작되어 벨기에 강간은 피했지만, 이대로라면 독일이나 프랑스 어느 한 쪽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길을 열라고 요구할 것이 명백하여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콩고에 손을 벌렸는데 은인의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자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무시 못할 병력이 모였다.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원 역사 벨기에의 총리. 한성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모든 예산을 빨아들이는 어둠의 심연 콩고 때문에 벨기에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웠다며, 문명화의 정의를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내릴 것을 요구했다.
2.6. 오스만 제국
- 압뒬하미트 2세
오스만 제국의 제34대 파디샤. 공공부채관리국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굴욕이라고 여겨 그 단초를 마련한 조선을 싫어한다.
- 칼루스트 굴벤키안
원 역사 아르메니아계 영국인 석유재벌. 작중에서는 1896년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일어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을 떠나지 않았다. 현재의 이라크와 쿠웨이트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석유가 있다는 걸 알고 개발을 위한 투자를 받기 위해 조선과 접촉해서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을 이끌어냈다. 오스만 제국이 반대하여 큰 지뢰를 밟은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
- 휘세인 테브픽 파샤
오스만 제국의 재무장관. 중동에 있는 유전을 공동개발하자는 조선의 제안을 귀국을 믿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조선 측에서 다른 열강을 끌어들이는 한편, 오스만 측에도 석유가 나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함께 공동개발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자 이슬람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담으로 그 와중에 박은식에게 조선과 오스만은 고구려와 돌궐 시절에도 인연이 있었다는 형제의 나라 드립을 듣고 벙찌기도 하였다. 거기다 자신을 따라온 수행 장교[95]가 이 말을 듣고 박은식에게 접근해 꼬치꼬치 캐물었기에 이에 대한 나비 효과가 예상된다.
-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
원 역사 청년 튀르크당의 핵심인물. 범튀르크주의에 심취한 젊은 중령으로 반란을 일으킨 발칸 자치령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루멜리아 접경지대에 파견되었다. 파디샤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급진 개혁을 지지해 줄 여론을 조성하고자 하미디예 경기병대를 일부러 사지에 밀어넣었다. 그 결과 하미디예 경기병대 700명 중 500명이 사망하고 200명만 살아 돌아왔다. 이는 예상했던 피해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였지만, 당초 계획대로 이 모든 책임을 압뒬하미트 2세에게 돌리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 무스타파 케말 파샤
원 역사의 초대 튀르키예 대통령. 청년 튀르크당의 쿠데타에 대한 반쿠데타 시도를 저지하여 내분에 빠진 개혁파의 신임을 얻었다. 발칸 전선에서 세르비아-그리스 연합군의 테살로니카 공세를 독일군의 알자스 로렌 방어전 전훈을 활용하여 막아내면서 비록 패배하긴 하였지만 상대에게도 많은 손실을 강요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오스만이 유럽의 병자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그 이상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세속화와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전복시키고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이 유지할 수 없는 영토를 소련식으로 '독립'시키고 유지가 가능한 지역, 예컨대 레반트와 모술 등은 철저히 장악했다. 그 후 와하브파를 후원하는 사우드 가문과 앙숙인 하심 가문과 합심하여 종교적으로 세속주의를 정당화하였고,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일대를 유대 복지재단에게 판매하였다.
2.7. 이탈리아
- 움베르토 1세
이탈리아 왕국 제2대 국왕. 원 역사와 달리 가에타노 브레시의 암살 모의가 사전에 적발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후 대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결국 얻은 것 하나 없이 전쟁이 끝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 굴리엘모 마르코니
원 역사 이탈리아의 발명가. 무선 전신을 실용화한 공로로 1896년에 노씨권학상을 수상했다. 성의 없는 답례만 표하던 다른 국외 수상자들과 달리 권학상 수상을 크게 기뻐하며 수상식에서 직접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했다.
2.8. 오스트리아-헝가리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 소싯적 '동양 트리오' 국가들을 모두 여행한 바 있다. 청나라처럼 여러 민족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치를 보장할 방도를 찾고 있다. 외무장관 고우초프스키 공작과 빈의 시장 카를 뤼거를 끌어들여 조선에게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제한해 달라는 제의를 전달하였다. 이후 원 역사대로 사라예보에 방문해 흑수단의 마수에 걸려들 뻔 하지만 한 발 앞서 방문한 테슬라의 자해공갈 쇼로 과격파의 다수가 구속되고 코치치를 만나 본인의 실수[96]를 인지하고 공적으로 사과해 큰 사고없이 넘어갔다.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반체제세력을 양지로 끄집어내 분열시키는 방책이 조선에서 유럽으로 널리 퍼지면서 원 역사와 달리 무정부주의자의 습격으로 사망하지 않았다.
- 테오도르 헤르츨
원 역사 이스라엘의 국부. 오페르트의 말을 듣고 미국이 루이지애나와 알래스카를 사들인 것처럼 자금을 모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구매하기로 결심하고 유대복지재단을 원 역사보다 빨리 출범시켰다.
- 카를 뤼거
빈의 시장.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정서를 조장하는 포퓰리스트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오토 뵈켈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협력하게 되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꿈풀이(?) 배우겠다고 조선에서 빈까지 온 제주도 심방(무당) 홍매화를 제자 겸 비서로 받아들였다. 제자와 인간 심리 깊숙한 성적 암시에 대한 만담 겸 디스를 나누는 티키타카가 일품. 빈의 시장 카를 뤼거가 조성한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에 정교수 임용이 계속 실패하여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차에 홍매화의 조언을 듣고 조선 공사관 기금 일부를 빌려 교육청장에게 유대인 공직임용 제한을 완화해달라고 청탁했다.
- 아게노어 마리아 고우호프스키 공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 갈리치아 출신의 폴란드계 오스트리아인이다. 새로 제국의 주인 대열에 낀 헝가리인들을 견제하고 폴란드인들의 세력 구축을 꾀하고 있어 여러 민족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치를 보장할 방도를 모색하는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협력하여 오스트리아 대합중국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97]
2.9. 폴란드
-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
원 역사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을 폴란드까지 아우르는 대연방국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묵인하에 독립군을 조직하였고, 대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이끌고 독일, 오스트리아의 예상보다 빠르게 러시아령 폴란드를 접수했다.
- 레흐 카친스키
원 역사 제4대 폴란드 대통령. 파란공산당(폴란드 공산당)의 영수이자 파란국 총통(폴란드 대통령)으로 원 역사와 달리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지 않아[98] 2013년에 인공위성 '스크워도프스카'[99] 발사에 도움을 준 조선국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2.10. 발칸
- 페타르 코치치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인 문필가. 원 역사와 달리 1901년까지도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신세인 보스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꿈꾼다. 언제고 보스니아 민족이 완전히 독립하면 참고할 만한 바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국제 신디컬리즘 협회에 참가했다. 국제 신디컬리즘 협회가 해산된 이후 한 사람의 세르비아인으로서 세르비아가 새로운 압제자가 되어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어 보스니아를 공존과 협력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을 방문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세르비아인 테슬라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테슬라와 함께 움직이면서 그의 까칠한 성격과 언동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반발하는 과격파를 몰아세우기 위해 자해쇼를 벌이는 것을 보며 상당히 심적으로 고생하게 된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프란츠 대공의 암살을 막아내 발칸의 혼란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 카롤 1세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군주. 오스만과 발칸 제국(諸國)의 주종관계가 원 역사보다 오래 지속되어 루마니아 국왕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발칸 공동 경제권 건설을 위해 불가리아나 세르비아를 끌어들일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압뒬하미트 2세가 석유기구 가입을 요구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스테판 스탐볼로프와 손잡고 독립을 선포, 국명을 루마니아로 고쳤다. 독립에 성공한 이후 불가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 스테판 스탐볼로프
불가리아 대공국의 총리. 베를린 회의 방향이 원 역사와 다르게 진행되면서 페르디난트 대공과 갈등을 빚지 않아 암살당하는 일 없이 장기집권하고 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발칸에서의 영향권을 두고 긴밀히 공조할 계획임을 밝히자 다른 발칸 공국과 자치령을 끌어들여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한 이후 콘스탄티노플 수복을 외치는 여론을 억누르느라 애를 먹고 있다.
- 사프베트 베그 바샤기치
보슈냐크인 문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이왕 독립한 김에 제대로 보슈냐크인도, 크로아티아인도, 세르비아인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코치치와 뜻을 같이하고 있으나 세르비아인이 아니라서 통합을 말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상황이다.
2.11. 기타
- 알프레드 노벨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사업가. 제물포가 동아시아 다이너마이트 거래의 허브로 성장하자 시장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조선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오페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물포에 생산 공장을 차리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유럽 언론으로부터 전쟁상인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던 터라 군용 판매는 허락할 수 없다고 나왔다. 이에 귀남이 어차피 생길 노벨상 지금 만들자는 생각으로 노벨에게 조선과 공동으로 출자해 기금을 만들고 이 기금에서 출연하여 매년 전 인류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한 우수한 학술적 성과에 대해 표창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의 양심과 회사의 명성을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제안을 받아들였고 일명 노씨재단이 창설된다. 본래 역사와 달리 조선의 협력이 있던 만큼 원 역사에서는 없었던 유학부문의 상이 새로이 생겼다. 또한 노벨수학상은 노벨이 수학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들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홍종우가 발끈해서 나선 탓에 노씨산학상이 생겨났다.
- 앙리 뒤낭
스위스인.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창시자.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최익현과 우정을 나누어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101] 파리 코뮌 사람들이 귀국할 때 유럽에 돌아간들 호구할 방도가 없어 따라가지 못하고 한양에 남아 적십자사 대표 겸 교사 노릇을 하다가 1896년 시점엔 나이가 나이라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고 있다. 본인의 이상과 유럽 각국의 현실의 충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아시아의 이름없는 나라가 본인의 이상에 공감하고 지원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을미정난이 일어나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의 군사규모에 경악해 본인이 생각하던 평화와 도리를 사랑하던 나라가 아니라며 실망하는 반응을 보여 잠시 최익현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후 조선이 중국을 정복해 이권을 울궈내지 않거나, 아주 대회에서 비롯된 평화 회담을 주최한 덕분에 어찌저찌 잘 해결된 모양이다. 실제로 평화 회담 당시 뒤낭 등이 그 의도에 찬성하는 쪽이었다는 서술이 나온 적도 있고, 최익현과 별다른 문제 없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나온 걸 보면 더더욱. 사후 유럽 전역에 대전쟁이 일어나자 최익현을 선두로 일어난 창의단이 적십자기를 들고 각 전역에 인도적 지원을 수행했는데 뒤낭 본인은 저승에서 이를 보고 흡족했을 것이다.
- 알폰소 13세
스페인 제18대 국왕. 대전쟁 중 모로코를 침략했다가 도리어 크게 패하여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결과 전쟁이 끝나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자리에서 쫓겨나고 왕정 자체가 무너졌다.
3. 아메리카
3.1. 미국
- 율리시스 S. 그랜트
제18대 미국 대통령. 퇴임하고 세계일주를 하던 중 조선을 방문하여 동양풍 물씬 느껴지는 궁궐의 풍치를 찬탄하였다.
-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제22·24대 대통령. 원 역사대로 식민지 개발이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신문에 프랑스가 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들어 콩고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퍼붓고 있는 벨기에를 예로 들며 식민정책의 불합리함을 강조하는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다. 칼라카우아 국왕에게 "미국은 하와이에 구대륙의 폭군들이나 할 만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 윌리엄 매킨리
미국 제25대 대통령. 식민지는 세금 낭비라고 치를 떠는 민주당에 맞서 원 역사보다 유화적인 대외확장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원 역사에서 매킨리를 암살한 레온 촐고스가 다이토 제도로 떠나 죽지 않고 2번째 임기도 무사히 마쳤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원 역사 미국 제26대 대통령. 미서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원 역사보다 오래 해군부 차관보로 지내던 중 "자유롭고 아름다운 미국은 마땅히 다른 나라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옥균의 인터뷰를 보고 필리핀에 문명의 터전을 닦는 것은 미국의 의무고 그 명예로운 일의 선두에는 마땅히 자신이 서야 한다는 본래 역사의 관종 기질이 도져 의용대 러프 '레인저'를 이끌고 태평양을 건넜다. 이 과정에서 자신처럼 주인공 노릇하기 좋아하는 옥균에게 호감을 느껴 일방적으로 '김 형'이라고 불렀다.[102] 이후 "조선에 오면 같이 사냥하자"는 옥균의 빈말에 혹해 정말로 함경남도 갑산군에 와서 곰 사냥을 간다. 이때 한국에도 회색곰같이 큰 곰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이미 해수구제사업이 진행된 한반도에는 대부분 반달곰 같이 불곰같은 큰 곰에 비하면 작은 곰들만이 서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테디 베어 미담이 조선에서 탄생했다. 원역사와 다르게 늙은 곰이 아니라 새끼 곰 상대로 나왔다. 필리핀 사정이 얼추 정리된 이후 아시아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대선에 출마하여 원 역사와 달리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물러난 매킨리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됐다. 그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 창의단이 활약하는 소식을 보고 저 깃발을 드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고 여전한 과시욕을 드러냈고 이후 태프트를 보내서 미국 나름의 선의 겸 유럽에 빚을 지우기 위한 태프트 플랜을 시동한다.
- 루시우스 푸트
미국의 외교관. 1880년대 무렵 주조선미국공사. 아직 그 급을 따지면 이류와 삼류 사이의 애매한 나라에서 파견한 자신을 곰살맞게 대해주는 귀남에게 고마움과 정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식 먼로 독트린을 꿈꾸는 귀남에게 탁 터놓고 "조선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미국이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허스트의 창업주. 하와이 사건을 계기로 황인 혐오를 자극하는 기사를 쏟아내 재미를 보던 중 기사 청탁하러 온 서재필과 대화를 나눈 것을 퓰리처의 부하 기자들이 침소봉대하여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황색언론 허스트의 창업주답게, 서재필이 건넨 진심 어린 조언을 제멋대로 곡해해서 정치적 올바름을 짜넣은 찌라시 기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퓰리처가 반대로 곤욕을 치르는 중.
- 샌포드 돌
원 역사에서는 하와이 공화국을 건설하여 대통령이 되었지만, 작중에서는 하와이 사건으로 4명의 호놀룰루 소총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남옹의 선의와 조선과 일본에 적잖은 투자를 한 미국 본토 사업가들의 미적지근함으로 인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본인은 쿠데타까지 생각했지만 이미 인명 피해를 입은 안전위원회(Safety Committee)가 주저하면서 그것마저도 실패한다.
- 존 피어폰트 모건
하이럼 맥심에게 조선에서의 전구 특허권을 뺏긴 에디슨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가자 자신은 에디슨 회사의 투자자지 에디슨의 후원자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에디슨에게 다른 얼치기들이 선수 치기 전에 빨리 조선과 교섭하여 다른 발명품의 특허권이라도 인정받으라고 말한다.
- 허버트 후버
원 역사 미국 제31대 대통령.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호주의 영국계 광산기업에서 일하다가 경영진과 마찰을 빚고 광무총국으로 이직했다.[103] 나이가 25살에 불과하지만, 운산에 오자마자 수력발전을 건의하는 등 그 지재가 뛰어나 광무총국 덕대직에 부임했다. 운산 광산에서 발생한 광독을 은근슬쩍 덮으려고 했다가 적발되어 탄핵 당할 뻔했지만, 그 능력을 아깝게 여긴 귀남이 '소양'이라는 아호를 내려주고 덕대 일 대신 충주와 춘천 두 고을을 흐르는 강에 큰 방죽 세우는 일을 맡겼다.
- 존 헤이
원 역사 미국 제37대 국무장관. 특사로 파견된 옥균에게 미국은 필리핀 문제에 개입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원 역사 미국 제27대 대통령. 아시아의 발전과 자유의 확산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꾸려진 '극동위원회'의 민정 담당관으로서 시어도어의 폭주를 제지하기 위해 필리핀에 부임했다. 결과적으로 필리핀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시어도어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됐다. 이후 재임에 성공한 시어도어가 전쟁성 장관으로 발탁했다. 조선의 창의단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시어도어와 함께 창의단 활동에 합류해 자금 지원을 통한 전후 복구를 지원해주는 명분으로 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자는 태프트 플랜을 짜서 유럽에 본격적으로 개입한다.
- 라이트 형제
공기역학에 관해 조언을 얻고자 스미소니언 재단의 새뮤얼 랭글리 박사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조선 정부가 동력비행 분야의 발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찾아오면 누구든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줄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길로 태평양을 건너 양주에서 플라이어 1호 개발을 시작했다.[104] 도중에 비행기 개발이 추거를 앞둔 정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 마음 고생을 했지만, 원 역사보다 3년 빠른 1900년에 귀남이 참관한 자리에서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 이후 융비총국과 협력하여 전투기 개발에 나섰다.
- 존 브라우닝
총기 발명가. 벨기에에서 일하다 콩고 개발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 때문에 나라 사정이 어려워져 일자리를 잃었다. 이후 새로운 직장을 찾다가 융비총국에 입사하여 자장방총(반자동소총) 개발에 들어갔다.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
- 공고 루테테
원 역사 19세기 말 콩고 무장 독립운동가. 벨기에군에 붙잡혀 처형당한 원 역사와 달리 진정한 콩고의 아버지로 거듭난 레오폴드 2세의 적극적인 투자에 힘입어 현지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됐다. 그래서 알베르 2세가 대전쟁의 전화로부터 벨기에를 지키기 위해 콩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기꺼이 자원병으로 나섰다.
4.2. 트란스발 공화국
- 파울 크뤼거
원 역사 트란스발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 니콜라스 스미트
원 역사 트란스발 공화국의 3대 부통령.
- 피트 주베르
원 역사 트란스발 공화국의 2대 부통령.
4.3. 모로코 술탄국
- 압델아지즈
모로코의 술탄.[105] 형의 반란으로 퇴위한 원 역사와 달리 독일의 투자와 지원에 힘입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로코 위기 또한 독일의 개입으로 무사히 넘겼다. 이후 대전쟁이 일어나자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대가로 아브드 엘-크림을 끌어들여 스페인군을 격퇴하였다.
- 아브드 엘-크림
원 역사 리프 공화국의 지도자.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약속한 압델아지즈의 말을 믿고 동포들과 함께 대전쟁에 참전하여 스페인군을 격퇴하였다.
5. 기타
- 북악산 산신령
말 그대로 북악산의 산신령. 현대에서는 중절모에 코트를 입은 노신사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다닌다.
귀남의 군밤 포장마차의 오랜 단골로 비류와 온조가 강 건너온 이래로 가장 맛있는 군밤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본인 말로는 북악산 산신령을 지낸 지 천 년 정도 됐다고 하며 귀남에게 자신이 산신령이라는 사실을 숨긴 적 없지만 귀남은 당연히 늙은이 허풍이라 생각하고 적당히 대꾸하며 지냈다. 2020년 초 여느때처럼 그의 군밤을 사먹으면서 옆 동네에서 웬 어린놈이 원 없이 군밤을 먹는 것이 소원이랍시고 비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 하던 중, 그간 군밤 맛나게 먹은 값으로 귀남과 그 어린놈, 즉 구름재댁 개똥이의 영혼을 서로 바꾸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귀남이 빙의한 고종의 본래 천명이 다했을 날에 다시 귀남을 찾아오는데 귀남의 선의로 역사가 개변되며 본래의 천명을 뒤틀어 놓은 탓에 수명이 더 늘어났음을 알려주고 귀남의 나비 효과로 바뀐 현대 시점의 세상을 직접 안내해서 보여준다.
같은 장르의 대역소설인 대통령 각하 만세에 등장하는 지리산 산신령[106]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과거로 보내는 역할을 맡지만 그 결과는 극과 극을 달리게 되었다. 대역갤에선 지리산 산신령보단 사람 보는 눈이 훨씬 좋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래서 대역갤 크로스오버물이나 2차 창작에서 지리산 산신령은 천벌을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집어넣기도 한다.
[1] 이에 귀남은 순전히 '호의'로 강화도가 보이는 문수산에 원범의 묘소를 조성하였는데, 이 행동이 을축양요 때 나비 효과를 불러와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2] 훗날 소설의 형식을 빌려 신보에 연재된 회고록 첫 머리에 따르면, 본인 스스로가 위세를 얻어야 가세가 부활한다며 "나는 이제 나 한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라 다짐했다고.[3] 작중에서는 오쿠보가 이하응에게 선사한 가장 큰 일격이라고 서술했다.[4] 영친왕과 작중의 왕세손이 동명이인이라 원 역사처럼 이은용에서 이지용으로 개명했다.[5] 옛날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기있는 작품에서 인상깊은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 삶에서 봉변을 겪는 경우가 꽤 있었으니(예를 들자면 70년대 장희빈역을 했던 윤여정이 돌을 맞았다거나 가깝게는 2014년 연민정을 연기한 이유리가 지나가던 행인에게 욕을 먹었다는 일화까지.) 영화가 갓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당시라면 그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6] 일자무식인 귀남도 '민비는 나쁜 여자'라는 이야기 정도는 들어본 적 있어서 처음에는 꺼렸지만 간택 때 남긴 답변이 맘에 들기도 하고, 본인부터가 빙의라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라 산신령이 서비스로 민비 성격도 좀 고쳐줬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7] 조선 입장에선 근친혼인데, 사왕 아타나는 라마 5세의 부왕인 라마 4세의 후궁의 자식으로 27번째 딸이었다. 즉 라마 5세와는 이복 남매 관계. 다행히 조선에선 해외와 교류를 하면서 외국 왕실들, 특히 유럽 왕실들의 복잡한 혼맥 관계들을 이미 알고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8] 여담으로 실록영연 시리즈에서 황희의 사직 이야기는 대소신료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우려가 있어(…) 생략되었다고 한다.[9] 사실 이광도감 시절이면 모를까, 지금은 진심으로 사직을 바라지는 않는다. 동생 구스타프 왈 "솔직히 형님 즐기고 계시잖습니까."[10] 철자도 다르다. 드레퓌스 대위는 Dreyfus, 랍비 드레퓌스는 Dreyfuss.[11] 원 역사의 오페르트 또한 조선인이 잃어버린 유대의 지파라고 주장했다.[12] 경제 전문가다 보니 업무에 수학을 쓸 일이 많았다.[13] 덕만의 군밤 굽는 모습을 구경하던 귀남이 덕만의 어설픈 손놀림에 아까운 밤이 엉터리로 구워지는 것을 보고 참지를 못해 훈수를 두다가 결국 본인이 직접 구워냈다. 당연하겠지만 그 직후 거짓말같이 손님이 몰려들게 된다.[14] 처음엔 임금이 된 귀남을 보고 기가 죽어서 말이 나오질 않아서 귀남이 주변 관료들과 사관들에게 부탁을 하고 난 뒤에야 편하게 말을 놓…다가 얼마안가 결국 주변 눈치에 쫄려 알아서 높임말을 쓰면서 대화했다. 귀남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대화를 이어나갔다.[15] 이를 방증하는 것이 바로 스승되는 최한기로, 임금의 소개로 천덕만을 제자로 두었지만 후에는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기도 했다. 물론 임금의 어린시절 친구라는 것도 감안했겠지만.[16] 세자나 대군들은 관직에 나갈 일이 없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지만, 의례적으로 성균관에 입학하므로 이론상으로 학사장교 임용이 가능하다. 그걸 노린 것.[17] 대군의 몸이 상하였으니 당연히 누군가 그 허물을 써야 할 것인데, 대군을 탓할 수 없으니 장차수에게 죄주는 구색을 맞추면 상감께서 사면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18] 무려 비행기에 방사능 물질을 싣고 지상에 대량 살포하려 했다.[19] 본인이 개발한 전기충격기를 내장한 호신용 지팡이로 연단에 난입한 사람을 제압하고 시선을 끌어모아 제품 선전을 포함한 도발적인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뒤 본인에게도 전기충격기를 갖다 대어 자해공갈을 시전했다.[20] 사실 귀남은 이 말을 처음 전달받았을 때 전황을 바꿀 무기라는 소개를 듣고 자기 기억을 되짚으며 "진짜 원자폭탄이 나올려나 보다"하고 기대했다가 막상 듣고보니 겨우 독가스라는 생각에 시큰둥하게 받았다.[21] 유럽의 궁궐 사진을 찍어와서 이 풍경대로 만들자고 했는데, 병국은 당연히 경복궁을 저렇게 휘황찬란하게 지어서 흥선대원군한테 환심을 사려는 작정이었지만, 귀남은 '이 사진처럼 도로도 싹 다 정리하고, 도시도 뜯어고치고 화룡점정으로 궁궐을 짓자'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졸지에 전국 규모의 토목공사를 하게 됐다. 무르려고 해도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큰 뜻을 몰라뵈고 궁궐 짓는데 돈낭비나 한다고 비난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하러 오는지라 그럴수도 없는 상황.[22] 특히 한국어 욕에 대해서는 한국어에 능숙해지기 전에도 마스터해 버렸다. 전봉준 왈, 조선에 가더라도 남이랑 싸울 때 그 사람의 모든 조상들을 끌어들여 욕할 수 있는 경지라고.[23] 이때 나오는 구절은 "여권(女權, 여성 권리) 말하기에 앞서 여권(女拳, 여인 주먹)이 먼저 나서게 된 셈이었다."[24] 이상재의 고향은 정확히는 한산군으로 원 역사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서천군이 되었다. 본작에서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고 언급되었기에 한산군이 서천군에 합쳐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합쳐지지 않았더라도 평소 인연이 있던 고향 이웃동네에서 출마했다거나, 아니면 한산군이 인구가 적어 서천군 선거구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25] 낙선했다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개화당 후보 김병시의 낙선이었기에 목표는 이룬 셈이다.[26] 역대 총리대신들을 살펴보면 최익현은 그 파리 코뮌 사건에 개입해 분쟁이 원 역사보다 커지는 것을 막아내며 프랑스에서도 무슈 최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고 김옥균은 프랑스 그랑제콜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김홍집 역시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근무하며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경력이 있다. 그러다 영국 유학파 출신인 전봉준이 총리가 되면서 프랑스와 연이 없는 유일한 총리라는 칭호도 내려놓게 되었다.[27]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 중에서 선발할 때 뽑혀 계급이 참위에까지 이르렀다.[28] 그래도 산가지로 셈하기는 쉽다는 것을 봐서 방정식 등의 대수학 쪽은 괜찮은 듯한데, 기하학만 나오면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29] 김옥균이 평소 자신의 고지식한 부분을 비웃던 것을 의식한 면도 있다.[30] 이 사실이 유출된다면 '간첩을 막아야 할 방첩대에까지 간첩이 있다면 프랑스 군부는 간첩 투성이다!'라는 주장이 통하게 된다.[31] 원 역사에서 이승만은 운전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강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시속 140km로 과속을 하다가 경찰에게 걸려 추격전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32] 귀남이 싫어하는 매국노의 대명사+일본+공산당 세 가지가 모두 엮였으니 기겁할 수밖에….[33] 전생에서 나라 팔아먹은 대역죄인이었던 완용에게 좋은 감정이 조금도 없는 귀남이 옥균에게 곧바로 이완용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작 완용은 저나 저의 아버지가 대원군이나 상감에게 누를 끼친 적이 없으므로 옥균이 처음부터 자신을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34] 개화파 이전에 유학자인 박규수야 자기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에는 산신령이 존재하므로 진짜 박지원의 혼령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35] 이 때 귀남은 "중궁의 오라버니란 사람이 중전의 마음을 후벼파다니, 그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라며 보기 드물게 분노한다.[36] 나라에 필요한 것이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게 하겠다고 직접 나섰는데 예상되는 막대한 수익의 떡고물을 바라던 민씨 일족은 참여시키지 않았다.[37] 원 역사에서도 있었던 톈진에서 서양 선교사와 상인에게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뜬소문을 빌미로 일으킨 폭동.[38] 기정진의 "외필"을 반박하는 "외필변"과 이항로의 "화서아언"에 반박하는 "화서아언의의"[39] 정확하게 말하면 필제는 징집된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종인 충군(充軍)에 처해진 것이다.[40] 실제 역사에서 예비군 제도가 도입되고 당시 전 장병의 군생활을 6개월이나 연장시킨 1.21 사태의 주범인 김신조가 술집 화장실에서 소변 보다 그 당시 군생활 한 사람한테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물론 전후사정이 어떻든 김신조를 때린 건 엄연한 폭행 범죄라 백 번 양보하더라도 군생활 한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한 잘못이고, 김신조는 대한민국에 나름 잘 적응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긴 하지만.[41] 그리고 이 설화는 대역갤에서 더더욱 와전되어 귀남이 벼루를 던진 게 질화로를 던진 걸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아예 귀남옹이 필제를 질화로에 던졌다로까지 이야기가 커졌다. 아예 군밤 굽는 질화로에서 태워지는 땔감 취급을 받기도 한다.[42] 진령군(眞靈君)을 그대로 직역한 칭호다.[43] 원 역사와 달리 여러 차례 절과 속세를 오가며 방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계를 더 빨리 받았다. 원 역사에서 유천이 수계를 받은 것은 1905년이다.[44] 아주대회에 출전할 때 '어떻게 백정 출신이 감히 출전할 수 있는가?'라는 비방이 나오기도 했지만, 귀남이 "그런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빼다가 일본에게 지기라도 하면 늬들이 책임질래?"라고 말하자 쑥 들어갔다.[45] 실제로 김정일은 영화 같은 문화산업 쪽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사람을 납치해다(…) 영화도 만들고 세계 곳곳에서 긁어모은 영화필름도 소장하고 있었다.[46] 명목상으로는 신분제를 정리하여 공사노비를 모두 해방하고 서얼차별을 철폐하기는 했으나, 아직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 서자가 많고 서자가 집안일 돕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어 딱히 흉보는 사람은 없었다.[47] 원 역사에서도 메이지 덴노로부터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황태자 교육 담당으로 임명된다.[48] 당시 일본 천황 등의 육성은 최대한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던 전통 때문인 걸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은 2차대전 패전 이전까지 유지되었으며 패전 이후에는 미성년 황족에 한해서 미성년 황족의 육성 보도를 금기시하는 걸로 대폭 축소되었다. 실제로 현 나루히토 덴노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2014년 4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입학식에서 입을 열었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기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제법 놀라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혹은 자신의 아들을 우둔하다고 여겨 말 실수를 걱정한 메이지 덴노의 특별 지시일 수도 있다.[49] 원 역사에서도 기도 다카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래"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상당히 노회한 인물이었다.[50] 사실 이 정한론과 전쟁을 혐오하는 것은 일본 고위층에 만연하게 자리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물론이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도 정한론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작중 설명으로 유추해 보면 정한론을 계속 밀기에는 조선이 크게 성장하기도 했거니와, 일본이 조선을 의식하며 성장하다 보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선의 혐전 성향마저도 닮아버린 것으로 보인다.[51] 그 때문인지 작중에서도 총명한 지재로 대청의 홍복이라는 말이 사분지일은 맞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52] 작중에선 '온양온천을 가장 즐겨 찾은 임금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퍽 냉소적인 말이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유가 있다. 온양온천을 즐겨 찾은 임금 중에는 현종이 있는데, 현종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효종과 인선왕후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 당시에 청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황태후가 조선으로 쫓겨나듯이 오면서 상황이 역전되어버렸으니 역사를 안다면 이런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53] 명성황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서에 여성이 남더라도 대개 이름은 무슨 부인 혹은 태후로만 남아 있어 이 행정이라는 이름도 유력한 설에 불과하다. 만주족은 성 대신 이름을 실생활에서 주로 사용하기에, 서태후에게 있어서도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을 것이다.[54] 원 역사에서는 '일본변정고'였다.[55] '천하흥망 필부유책(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 문장의 뜻은 좋은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명말청초에 오랑캐 천자를 모실 수 없다고 은거한 유학자 고염무다.[56] 한양 88식 소총과 류장군 소총으로 유명한 한양병공창이 이 사람의 작품이다.[57] 원 역사에서는 광저우로 갔다.[58] 원 역사에서는 연방제는 중국을 분열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했다.(…)[59] 이때 이런 놈들이 호걸이라면 자신과 스승인 증국번 같은 사람은 천존이겠다며 혀를 찼다.(…)[60] 원세개가 의도적으로 의화단을 이용해서 반조선 여론을 형성했을 때 김가진이 여기에 휘말려 김가진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골치 아프기 직전에 때마침 청나라에 전봉준 내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그쪽으로 가서 도와달라 요청했다. 전봉준 내외가 청나라에 있던 이유는 서태후가 이홍장 견제 차원에서 초빙한 것이었다.[61] 원 역사에선 삼조공화, 즉 3번 공화정을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임이 흥미롭다. 선통제 퇴위를 강요하며 한 번,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며 한 번, 복벽에 나선 장훈을 토벌하며 한 번. 이렇게 3번이다.[62] 왕사진은 북양의 용, 단기서는 북양의 호랑이[63] 원 역사에서는 마신이와 알던 사이인지 확실하진 않다.[64] 결국은 지방 명사들과 매일매일 연회하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동철홍보대사[65] 모이창이 처음 작중에 나왔을 땐 아직 미출생.[66] 국공합작에 반발한 대공당을 원역사의 국민당 우파로 본다면 국민당 좌파의 수장이 되긴 한다.[67] 광서제보다 12살 어리다.[68] 두 눈, 두 콧구멍, 입, 두 귀의 칠공과 항문과 요도를 더한 구규를 의미한다.[69] 위약금은 공친왕이 대신 납부했다.[70] 이름은 코치 초조이고 웨카타는 직위 이름이다.[71] 쁘릿사당이 청국 신임 공사에게 삼국유사라는 책에 옛 아유타야와 이름 비슷한 나라가 나오더라 일러준 것을 전해 듣고 꾀를 낸 것이다. 안그래도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인간 허황옥의 실존 여부도 교차검증이 안 되는 판에, 아유타야는 9세기에 이주해 온 타이인이 14세기에나 세운 나라이므로 학술적으로야 순 억지 주장이지만,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혼담을 넣는 핑계로 사용했으니 사실여부야 아무래도 좋은 것.[72] 여기에 리잘 본인 의사는 단 1도 감안되지 않았다.[73] 소설상에선 리볼버로 쏴 죽인거라고 언급되어 있다.[74] 원 역사의 병인양요가 1년 일찍 터진 일.[75] 그 와중에 출정하기 직전 "프랑스는 패배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76] 원 역사에서는 도리어 묵살당하고 재판에 회부됐지만, 이 작품에서는 김홍집의 카이저 선동으로 여론이 드레퓌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77] 원 역사보다 5년 더 살았다.[78] 가까운 친척인 빌헬름 2세가 의회 정치로 '재미를 본 것'도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79]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남편이다.[80] 원 역사처럼 여기에서도 아무르 강 북쪽 땅을 청에게서 뜯어낸 아이훈 조약의 공로로 아무르스키 백작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81] 사실 선을 긋는 힘을 얻어 그 선을 움직여버릴 계획이라 선을 넘지 않는 개혁을 꿈꾸는 건 맞다.[82] 여담으로 김가진과 마우재 장기로 알려진 체스를 두는데 몇 번이나 김가진이 패배하여 한 수만 물려달라고 부탁함에도 거절한다. 그래서 김가진이 레닌에게 그렇게 마음 못되게 쓰다간 대머리가 된다고 일침을 날렸다.[83] 원래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고 원 역사에서는 이 무렵 불온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소설에서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불온세력을 드러내놓고 탄압하지는 않기 때문에, 레닌도 가명을 쓸 뿐 활동 자체는 공공연히 하고 있으며 유배가지도 않았다.[84] 여담으로 이때 한창 탈모가 진행중이라 혹시 동양 민간요법 중 탈모 치료법이 있나 물어보는 추신을 2번이나 적었다가 지운다. 김가진의 저주가 실행되었다[85] 라스푸틴을 찾은 과정이 가관인데, 자신이라면 정적을 처리한 뒤 시체를 대략 그 쯤 되는 장소에 버렸을 거라고[86] 원 역사에서는 1906년에 단 한 표 차이로 노벨상을 놓치고 1907년에 사망했으니, 바뀐 역사의 덕을 톡톡히 본 셈.[87] 원 역사에서는 수단에서 마흐디 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수단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일었지만 글래드스턴 정부는 트랜스발에서 철수하는 등 문제가 커질 것 같은 식민지에서 발을 빼는 정책을 시행중이라 무시하다가 결국 여론에 떠밀려 수단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죽었다.[88] 맨발로 작두 타는 진령군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89]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보았소."[90] 다만 정말 조금 읽는 수준에 그쳐서 진지를 이동해서 지도상에 표시된 위치가 달라졌다는 말을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라고 어설프게 통역했다.[91] 히틀러 본인만 이런 건 아니고 소속 소대 소대장과 하사도 명령서를 보고 한마음으로 옘병을 시전한 뒤 하사는 대대장에게 이거 하면 안된다고 사정사정하기도 했다.[92] 이때 창의단을 보조하던 업무 때문에 정말로 프랑스군 중 하나가 히틀러를 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카이저 콧수염보다 인중 주변에만 깔끔하게 남기는게 어울리겠다는 소소한 평가는 덤.[93]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 항명의 시작은 자신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작중 시점에선 히틀러가 앞장선 것은 맞으나 항명이 서부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지라 히틀러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다.[94] 사실과 약간 다르긴 하나 조선이나 프랑스 모두 이를 알고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95] 많은 이들이 아타튀르크나 엔베르 파샤로 예상했으나, 청년 튀르크당의 지도자였던 아흐메드 니야지 베이였다.[96] 방문당일이 세르비아출신 성인의 축일과 겹쳐서 민족 전통을 자극한 상황이었다.[97] 원 역사에서 1차 대전 도중 러시아령 폴란드가 동맹국 손에 들어오자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이중제국에서 폴란드를 넣은 삼중제국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했었다.[98]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카친스키가 카틴 학살 70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한 사고이기 때문에 카틴 학살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일어날 이유가 없다.[99] 퀴리 부인의 원래 성이다.[100] 요르요스 왕자의 친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9세가 니콜라이 2세의 외할아버지이고, 요르요스 왕자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니콜라이 2세의 증조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다. 즉 4촌이자 6촌 사이인 것.[101] 본인은 신경쓰지 않았으나 최익현보다 6살 많아서 최익현은 칼같이 형으로 불렀다.[102] 옥균이 시어도어보다 7살 많다.[103] 원 역사에서는 이때 이홍장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설립한 톈진의 개평광무국으로 갔다.[104] 형 윌버가 고향에 남자는 동생 오빌을 설득했다.[105] 무함마드 5세의 백부이다.[106] 헌데 작중 언급을 보면 다른 산의 산신령들과 군밤을 나눠먹기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군밤왕 세계의 지리산에도 산신령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