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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01:25

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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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1.1.1.1. 종친부1.1.1.2. 내명부
1.1.2. 조정
1.1.2.1. 문관1.1.2.2. 무관1.1.2.3. 격치물성청
1.1.3. 참의원
1.1.3.1. 개화당1.1.3.2. 만민공산당1.1.3.3. 자유당
1.1.4. 사법원1.1.5. 명문세족1.1.6. 기타
1.2. 일본
1.2.1. 일본국
1.2.1.1. 황실1.2.1.2. 정부1.2.1.3. 국회
1.2.1.3.1. 애국공당1.2.1.3.2. 입헌정우회1.2.1.3.3. 일본공산당
1.2.1.4. 기타
1.2.2. 홋카이도 공화국
1.3. 대청
1.3.1. 황실1.3.2. 공화정부1.3.3. 자의원
1.3.3.1. 국민당
1.3.3.1.1. 보국회
1.3.3.2. 대공당
1.3.4. 신군
1.3.4.1. 북양군1.3.4.2. 남양군
1.3.5. 중원
1.3.5.1. 신강성1.3.5.2. 대만성1.3.5.3. 기타
1.3.6. 외성
1.3.6.1. 만주1.3.6.2. 몽골1.3.6.3. 티베트
1.4. 류큐1.5. 대남1.6. 시암1.7. 필리핀1.8. 하와이1.9. 인도
2. 유럽
2.1. 프랑스2.2. 러시아
2.2.1. 황실2.2.2. 관료2.2.3. 두마
2.2.3.1. 사회민주노동당2.2.3.2. 입헌당
2.2.4. 기타
2.3. 영국2.4. 독일2.5. 벨기에2.6. 오스만 제국2.7. 이탈리아2.8. 오스트리아-헝가리2.9. 폴란드2.10. 발칸2.11. 기타
3. 아메리카
3.1. 미국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4.2. 트란스발 공화국4.3. 모로코 술탄국
5. 기타

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1.1.1.1. 종친부
1.1.1.2. 내명부

1.1.2. 조정

1.1.2.1. 문관
1.1.2.2. 무관
1.1.2.3. 격치물성청

1.1.3. 참의원

1.1.3.1. 개화당
1.1.3.2. 만민공산당
1.1.3.3. 자유당

1.1.4. 사법원

1.1.5. 명문세족

1.1.6. 기타

1.2. 일본

1.2.1. 일본국

1.2.1.1. 황실
1.2.1.2. 정부
1.2.1.3. 국회
1.2.1.3.1. 애국공당
1.2.1.3.2. 입헌정우회
1.2.1.3.3. 일본공산당
1.2.1.4. 기타

1.2.2. 홋카이도 공화국

1.3. 대청

1.3.1. 황실

1.3.2. 공화정부

1.3.3. 자의원

1.3.3.1. 국민당
1.3.3.1.1. 보국회
1.3.3.2. 대공당

1.3.4. 신군

1.3.4.1. 북양군
1.3.4.2. 남양군

1.3.5. 중원

1.3.5.1. 신강성
1.3.5.2. 대만성
1.3.5.3. 기타

1.3.6. 외성

1.3.6.1. 만주
1.3.6.2. 몽골
1.3.6.3. 티베트

1.4. 류큐

1.5. 대남

1.6. 시암

1.7. 필리핀

1.8. 하와이

1.9. 인도

2. 유럽

2.1. 프랑스

2.2. 러시아

2.2.1. 황실

2.2.2. 관료

2.2.3. 두마

2.2.3.1. 사회민주노동당
2.2.3.2. 입헌당

2.2.4. 기타

2.3. 영국

2.4. 독일

2.5. 벨기에

2.6. 오스만 제국

2.7. 이탈리아

2.8. 오스트리아-헝가리

2.9. 폴란드

2.10. 발칸

2.11. 기타

3. 아메리카

3.1. 미국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

4.2. 트란스발 공화국

4.3. 모로코 술탄국

5. 기타


[1] 이에 귀남은 순전히 '호의'로 강화도가 보이는 문수산에 원범의 묘소를 조성하였는데, 이 행동이 을축양요나비 효과를 불러와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2] 훗날 소설의 형식을 빌려 신보에 연재된 회고록 첫 머리에 따르면, 본인 스스로가 위세를 얻어야 가세가 부활한다며 "나는 이제 나 한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라 다짐했다고.[3] 작중에서는 오쿠보가 이하응에게 선사한 가장 큰 일격이라고 서술했다.[4] 영친왕과 작중의 왕세손이 동명이인이라 원 역사처럼 이은용에서 이지용으로 개명했다.[5] 옛날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기있는 작품에서 인상깊은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 삶에서 봉변을 겪는 경우가 꽤 있었으니(예를 들자면 70년대 장희빈역을 했던 윤여정이 돌을 맞았다거나 가깝게는 2014년 연민정을 연기한 이유리가 지나가던 행인에게 욕을 먹었다는 일화까지.) 영화가 갓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당시라면 그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6] 일자무식인 귀남도 '민비는 나쁜 여자'라는 이야기 정도는 들어본 적 있어서 처음에는 꺼렸지만 간택 때 남긴 답변이 맘에 들기도 하고, 본인부터가 빙의라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라 산신령이 서비스로 민비 성격도 좀 고쳐줬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7] 조선 입장에선 근친혼인데, 사왕 아타나는 라마 5세의 부왕인 라마 4세의 후궁의 자식으로 27번째 딸이었다. 즉 라마 5세와는 이복 남매 관계. 다행히 조선에선 해외와 교류를 하면서 외국 왕실들, 특히 유럽 왕실들의 복잡한 혼맥 관계들을 이미 알고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8] 여담으로 실록영연 시리즈에서 황희의 사직 이야기는 대소신료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우려가 있어(…) 생략되었다고 한다.[9] 사실 이광도감 시절이면 모를까, 지금은 진심으로 사직을 바라지는 않는다. 동생 구스타프 왈 "솔직히 형님 즐기고 계시잖습니까."[10] 철자도 다르다. 드레퓌스 대위는 Dreyfus, 랍비 드레퓌스는 Dreyfuss.[11] 원 역사의 오페르트 또한 조선인이 잃어버린 유대의 지파라고 주장했다.[12] 경제 전문가다 보니 업무에 수학을 쓸 일이 많았다.[13] 덕만의 군밤 굽는 모습을 구경하던 귀남이 덕만의 어설픈 손놀림에 아까운 밤이 엉터리로 구워지는 것을 보고 참지를 못해 훈수를 두다가 결국 본인이 직접 구워냈다. 당연하겠지만 그 직후 거짓말같이 손님이 몰려들게 된다.[14] 처음엔 임금이 된 귀남을 보고 기가 죽어서 말이 나오질 않아서 귀남이 주변 관료들과 사관들에게 부탁을 하고 난 뒤에야 편하게 말을 놓…다가 얼마안가 결국 주변 눈치에 쫄려 알아서 높임말을 쓰면서 대화했다. 귀남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대화를 이어나갔다.[15] 이를 방증하는 것이 바로 스승되는 최한기로, 임금의 소개로 천덕만을 제자로 두었지만 후에는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기도 했다. 물론 임금의 어린시절 친구라는 것도 감안했겠지만.[16] 세자나 대군들은 관직에 나갈 일이 없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지만, 의례적으로 성균관에 입학하므로 이론상으로 학사장교 임용이 가능하다. 그걸 노린 것.[17] 대군의 몸이 상하였으니 당연히 누군가 그 허물을 써야 할 것인데, 대군을 탓할 수 없으니 장차수에게 죄주는 구색을 맞추면 상감께서 사면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18] 무려 비행기에 방사능 물질을 싣고 지상에 대량 살포하려 했다.[19] 본인이 개발한 전기충격기를 내장한 호신용 지팡이로 연단에 난입한 사람을 제압하고 시선을 끌어모아 제품 선전을 포함한 도발적인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뒤 본인에게도 전기충격기를 갖다 대어 자해공갈을 시전했다.[20] 사실 귀남은 이 말을 처음 전달받았을 때 전황을 바꿀 무기라는 소개를 듣고 자기 기억을 되짚으며 "진짜 원자폭탄이 나올려나 보다"하고 기대했다가 막상 듣고보니 겨우 독가스라는 생각에 시큰둥하게 받았다.[21] 유럽의 궁궐 사진을 찍어와서 이 풍경대로 만들자고 했는데, 병국은 당연히 경복궁을 저렇게 휘황찬란하게 지어서 흥선대원군한테 환심을 사려는 작정이었지만, 귀남은 '이 사진처럼 도로도 싹 다 정리하고, 도시도 뜯어고치고 화룡점정으로 궁궐을 짓자'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졸지에 전국 규모의 토목공사를 하게 됐다. 무르려고 해도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큰 뜻을 몰라뵈고 궁궐 짓는데 돈낭비나 한다고 비난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하러 오는지라 그럴수도 없는 상황.[22] 특히 한국어 욕에 대해서는 한국어에 능숙해지기 전에도 마스터해 버렸다. 전봉준 왈, 조선에 가더라도 남이랑 싸울 때 그 사람의 모든 조상들을 끌어들여 욕할 수 있는 경지라고.[23] 이때 나오는 구절은 "여권(女權, 여성 권리) 말하기에 앞서 여권(女拳, 여인 주먹)이 먼저 나서게 된 셈이었다."[24] 이상재의 고향은 정확히는 한산군으로 원 역사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서천군이 되었다. 본작에서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고 언급되었기에 한산군이 서천군에 합쳐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합쳐지지 않았더라도 평소 인연이 있던 고향 이웃동네에서 출마했다거나, 아니면 한산군이 인구가 적어 서천군 선거구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25] 낙선했다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개화당 후보 김병시의 낙선이었기에 목표는 이룬 셈이다.[26] 역대 총리대신들을 살펴보면 최익현은 그 파리 코뮌 사건에 개입해 분쟁이 원 역사보다 커지는 것을 막아내며 프랑스에서도 무슈 최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고 김옥균은 프랑스 그랑제콜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김홍집 역시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근무하며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경력이 있다. 그러다 영국 유학파 출신인 전봉준이 총리가 되면서 프랑스와 연이 없는 유일한 총리라는 칭호도 내려놓게 되었다.[27]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 중에서 선발할 때 뽑혀 계급이 참위에까지 이르렀다.[28] 그래도 산가지로 셈하기는 쉽다는 것을 봐서 방정식 등의 대수학 쪽은 괜찮은 듯한데, 기하학만 나오면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29] 김옥균이 평소 자신의 고지식한 부분을 비웃던 것을 의식한 면도 있다.[30] 이 사실이 유출된다면 '간첩을 막아야 할 방첩대에까지 간첩이 있다면 프랑스 군부는 간첩 투성이다!'라는 주장이 통하게 된다.[31] 원 역사에서 이승만은 운전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강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시속 140km로 과속을 하다가 경찰에게 걸려 추격전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32] 귀남이 싫어하는 매국노의 대명사+일본+공산당 세 가지가 모두 엮였으니 기겁할 수밖에….[33] 전생에서 나라 팔아먹은 대역죄인이었던 완용에게 좋은 감정이 조금도 없는 귀남이 옥균에게 곧바로 이완용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작 완용은 저나 저의 아버지가 대원군이나 상감에게 누를 끼친 적이 없으므로 옥균이 처음부터 자신을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34] 개화파 이전에 유학자인 박규수야 자기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에는 산신령이 존재하므로 진짜 박지원의 혼령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35] 이 때 귀남은 "중궁의 오라버니란 사람이 중전의 마음을 후벼파다니, 그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라며 보기 드물게 분노한다.[36] 나라에 필요한 것이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게 하겠다고 직접 나섰는데 예상되는 막대한 수익의 떡고물을 바라던 민씨 일족은 참여시키지 않았다.[37] 원 역사에서도 있었던 톈진에서 서양 선교사와 상인에게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뜬소문을 빌미로 일으킨 폭동.[38] 기정진의 "외필"을 반박하는 "외필변"과 이항로의 "화서아언"에 반박하는 "화서아언의의"[39] 정확하게 말하면 필제는 징집된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종인 충군(充軍)에 처해진 것이다.[40] 실제 역사에서 예비군 제도가 도입되고 당시 전 장병의 군생활을 6개월이나 연장시킨 1.21 사태의 주범인 김신조가 술집 화장실에서 소변 보다 그 당시 군생활 한 사람한테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물론 전후사정이 어떻든 김신조를 때린 건 엄연한 폭행 범죄라 백 번 양보하더라도 군생활 한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한 잘못이고, 김신조는 대한민국에 나름 잘 적응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긴 하지만.[41] 그리고 이 설화는 대역갤에서 더더욱 와전되어 귀남이 벼루를 던진 게 질화로를 던진 걸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아예 귀남옹이 필제 질화로에 던졌다로까지 이야기가 커졌다. 아예 군밤 굽는 질화로에서 태워지는 땔감 취급을 받기도 한다.[42] 진령군(眞靈君)을 그대로 직역한 칭호다.[43] 원 역사와 달리 여러 차례 절과 속세를 오가며 방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계를 더 빨리 받았다. 원 역사에서 유천이 수계를 받은 것은 1905년이다.[44] 아주대회에 출전할 때 '어떻게 백정 출신이 감히 출전할 수 있는가?'라는 비방이 나오기도 했지만, 귀남이 "그런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빼다가 일본에게 지기라도 하면 늬들이 책임질래?"라고 말하자 쑥 들어갔다.[45] 실제로 김정일은 영화 같은 문화산업 쪽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사람을 납치해다(…) 영화도 만들고 세계 곳곳에서 긁어모은 영화필름도 소장하고 있었다.[46] 명목상으로는 신분제를 정리하여 공사노비를 모두 해방하고 서얼차별을 철폐하기는 했으나, 아직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 서자가 많고 서자가 집안일 돕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어 딱히 흉보는 사람은 없었다.[47] 원 역사에서도 메이지 덴노로부터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황태자 교육 담당으로 임명된다.[48] 당시 일본 천황 등의 육성은 최대한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던 전통 때문인 걸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은 2차대전 패전 이전까지 유지되었으며 패전 이후에는 미성년 황족에 한해서 미성년 황족의 육성 보도를 금기시하는 걸로 대폭 축소되었다. 실제로 현 나루히토 덴노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2014년 4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입학식에서 입을 열었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기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제법 놀라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혹은 자신의 아들을 우둔하다고 여겨 말 실수를 걱정한 메이지 덴노의 특별 지시일 수도 있다.[49] 원 역사에서도 기도 다카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래"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상당히 노회한 인물이었다.[50] 사실 이 정한론과 전쟁을 혐오하는 것은 일본 고위층에 만연하게 자리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물론이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도 정한론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작중 설명으로 유추해 보면 정한론을 계속 밀기에는 조선이 크게 성장하기도 했거니와, 일본이 조선을 의식하며 성장하다 보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선의 혐전 성향마저도 닮아버린 것으로 보인다.[51] 그 때문인지 작중에서도 총명한 지재로 대청의 홍복이라는 말이 사분지일은 맞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52] 작중에선 '온양온천을 가장 즐겨 찾은 임금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퍽 냉소적인 말이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유가 있다. 온양온천을 즐겨 찾은 임금 중에는 현종이 있는데, 현종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효종인선왕후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 당시에 청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황태후가 조선으로 쫓겨나듯이 오면서 상황이 역전되어버렸으니 역사를 안다면 이런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53] 명성황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서에 여성이 남더라도 대개 이름은 무슨 부인 혹은 태후로만 남아 있어 이 행정이라는 이름도 유력한 설에 불과하다. 만주족은 성 대신 이름을 실생활에서 주로 사용하기에, 서태후에게 있어서도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을 것이다.[54] 원 역사에서는 '일본변정고'였다.[55] '천하흥망 필부유책(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 문장의 뜻은 좋은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명말청초에 오랑캐 천자를 모실 수 없다고 은거한 유학자 고염무다.[56] 한양 88식 소총류장군 소총으로 유명한 한양병공창이 이 사람의 작품이다.[57] 원 역사에서는 광저우로 갔다.[58] 원 역사에서는 연방제는 중국을 분열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했다.(…)[59] 이때 이런 놈들이 호걸이라면 자신과 스승인 증국번 같은 사람은 천존이겠다며 혀를 찼다.(…)[60] 원세개가 의도적으로 의화단을 이용해서 반조선 여론을 형성했을 때 김가진이 여기에 휘말려 김가진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골치 아프기 직전에 때마침 청나라에 전봉준 내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그쪽으로 가서 도와달라 요청했다. 전봉준 내외가 청나라에 있던 이유는 서태후가 이홍장 견제 차원에서 초빙한 것이었다.[61] 원 역사에선 삼조공화, 즉 3번 공화정을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임이 흥미롭다. 선통제 퇴위를 강요하며 한 번,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며 한 번, 복벽에 나선 장훈을 토벌하며 한 번. 이렇게 3번이다.[62] 왕사진은 북양의 용, 단기서는 북양의 호랑이[63] 원 역사에서는 마신이와 알던 사이인지 확실하진 않다.[64] 결국은 지방 명사들과 매일매일 연회하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동철홍보대사[65] 모이창이 처음 작중에 나왔을 땐 아직 미출생.[66] 국공합작에 반발한 대공당을 원역사의 국민당 우파로 본다면 국민당 좌파의 수장이 되긴 한다.[67] 광서제보다 12살 어리다.[68] 두 눈, 두 콧구멍, 입, 두 귀의 칠공과 항문과 요도를 더한 구규를 의미한다.[69] 위약금은 공친왕이 대신 납부했다.[70] 이름은 코치 초조이고 웨카타는 직위 이름이다.[71] 쁘릿사당이 청국 신임 공사에게 삼국유사라는 책에 옛 아유타야와 이름 비슷한 나라가 나오더라 일러준 것을 전해 듣고 꾀를 낸 것이다. 안그래도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인간 허황옥의 실존 여부도 교차검증이 안 되는 판에, 아유타야는 9세기에 이주해 온 타이인이 14세기에나 세운 나라이므로 학술적으로야 순 억지 주장이지만,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혼담을 넣는 핑계로 사용했으니 사실여부야 아무래도 좋은 것.[72] 여기에 리잘 본인 의사는 단 1도 감안되지 않았다.[73] 소설상에선 리볼버로 쏴 죽인거라고 언급되어 있다.[74] 원 역사의 병인양요가 1년 일찍 터진 일.[75] 그 와중에 출정하기 직전 "프랑스는 패배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76] 원 역사에서는 도리어 묵살당하고 재판에 회부됐지만, 이 작품에서는 김홍집의 카이저 선동으로 여론이 드레퓌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77] 원 역사보다 5년 더 살았다.[78] 가까운 친척인 빌헬름 2세가 의회 정치로 '재미를 본 것'도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79]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남편이다.[80] 원 역사처럼 여기에서도 아무르 강 북쪽 땅을 청에게서 뜯어낸 아이훈 조약의 공로로 아무르스키 백작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81] 사실 선을 긋는 힘을 얻어 그 선을 움직여버릴 계획이라 선을 넘지 않는 개혁을 꿈꾸는 건 맞다.[82] 여담으로 김가진과 마우재 장기로 알려진 체스를 두는데 몇 번이나 김가진이 패배하여 한 수만 물려달라고 부탁함에도 거절한다. 그래서 김가진이 레닌에게 그렇게 마음 못되게 쓰다간 대머리가 된다고 일침을 날렸다.[83] 원래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고 원 역사에서는 이 무렵 불온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소설에서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불온세력을 드러내놓고 탄압하지는 않기 때문에, 레닌도 가명을 쓸 뿐 활동 자체는 공공연히 하고 있으며 유배가지도 않았다.[84] 여담으로 이때 한창 탈모가 진행중이라 혹시 동양 민간요법 중 탈모 치료법이 있나 물어보는 추신을 2번이나 적었다가 지운다. 김가진의 저주가 실행되었다[85] 라스푸틴을 찾은 과정이 가관인데, 자신이라면 정적을 처리한 뒤 시체를 대략 그 쯤 되는 장소에 버렸을 거라고[86] 원 역사에서는 1906년에 단 한 표 차이로 노벨상을 놓치고 1907년에 사망했으니, 바뀐 역사의 덕을 톡톡히 본 셈.[87] 원 역사에서는 수단에서 마흐디 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수단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일었지만 글래드스턴 정부는 트랜스발에서 철수하는 등 문제가 커질 것 같은 식민지에서 발을 빼는 정책을 시행중이라 무시하다가 결국 여론에 떠밀려 수단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죽었다.[88] 맨발로 작두 타는 진령군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89]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보았소."[90] 다만 정말 조금 읽는 수준에 그쳐서 진지를 이동해서 지도상에 표시된 위치가 달라졌다는 말을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라고 어설프게 통역했다.[91] 히틀러 본인만 이런 건 아니고 소속 소대 소대장과 하사도 명령서를 보고 한마음으로 옘병을 시전한 뒤 하사는 대대장에게 이거 하면 안된다고 사정사정하기도 했다.[92] 이때 창의단을 보조하던 업무 때문에 정말로 프랑스군 중 하나가 히틀러를 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카이저 콧수염보다 인중 주변에만 깔끔하게 남기는게 어울리겠다는 소소한 평가는 덤.[93]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 항명의 시작은 자신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작중 시점에선 히틀러가 앞장선 것은 맞으나 항명이 서부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지라 히틀러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다.[94] 사실과 약간 다르긴 하나 조선이나 프랑스 모두 이를 알고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95] 많은 이들이 아타튀르크나 엔베르 파샤로 예상했으나, 청년 튀르크당의 지도자였던 아흐메드 니야지 베이였다.[96] 방문당일이 세르비아출신 성인의 축일과 겹쳐서 민족 전통을 자극한 상황이었다.[97] 원 역사에서 1차 대전 도중 러시아령 폴란드가 동맹국 손에 들어오자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이중제국에서 폴란드를 넣은 삼중제국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했었다.[98]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카친스키가 카틴 학살 70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한 사고이기 때문에 카틴 학살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일어날 이유가 없다.[99] 퀴리 부인의 원래 성이다.[100] 요르요스 왕자의 친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9세가 니콜라이 2세의 외할아버지이고, 요르요스 왕자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니콜라이 2세의 증조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다. 즉 4촌이자 6촌 사이인 것.[101] 본인은 신경쓰지 않았으나 최익현보다 6살 많아서 최익현은 칼같이 형으로 불렀다.[102] 옥균이 시어도어보다 7살 많다.[103] 원 역사에서는 이때 이홍장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설립한 톈진의 개평광무국으로 갔다.[104] 형 윌버가 고향에 남자는 동생 오빌을 설득했다.[105] 무함마드 5세의 백부이다.[106] 헌데 작중 언급을 보면 다른 산의 산신령들과 군밤을 나눠먹기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군밤왕 세계의 지리산에도 산신령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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