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5%; min-height: 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word-break: 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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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폰 바이어 | 앙리 무아상 | 에두아르트 부흐너 | 어니스트 러더퍼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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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오스트발트 | 오토 발라흐 | 마리 퀴리 | 빅토르 그리냐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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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히거 | 앨런 맥더미드 | 시라카와 히데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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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렌 졸리오퀴리 Irène Joliot-Curie | |
본명 | 이렌 퀴리 Irène Curie |
국적 | [[프랑스|]] 프랑스 제4공화국 |
출생 | 1897년 9월 12일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사망 | 1956년 3월 17일 (향년 58세) |
프랑스 제4공화국 파리 | |
직업 | 물리학자 |
모교 | 파리 대학교 |
가족 | 아버지 피에르 퀴리 어머니 마리 퀴리 여동생 이브 퀴리 |
배우자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1926년 결혼) |
자녀 | 엘렌 랑주뱅졸리오 피에르 졸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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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마리 퀴리, 피에르 퀴리의 장녀이다. 결혼 전 이름은 이렌 퀴리 (Irène Curie).2. 생애
이렌 퀴리는 마리의 제자 및 퀴리 일가의 추종자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결혼했는데 프레데리크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퀴리라는 성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자신의 성 졸리오에 퀴리를 이어 붙이도록 했다. 결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35년에 인공 방사성 원소의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탔다.[1] 그녀는 핵분열 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는데, 검출된 원소들이 핵분열 생성물이 아니라 초우라늄원소라고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2번째 노벨상을 놓치고 말았다.[2]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 오토 프리슈[3]로 구성된 베를린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자 땅을 쳤다고. 이를 통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렌이 활동한 파리 연구팀과는 달리 베를린팀은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이 각각 방사화학 및 분석화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는 핵분열 후 검출한 원소의 화학 분석에 도움이 되었다. 이를 다룬 한국물리학회 사이트의 연재글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그녀와 남편은 프랑스에 남았으며, 퀴리 연구소에서 종전까지 머물렀다. 이 연구소에는 나치 관계자들도 드나들었지만, 나치는 연구소 지하에 레지스탕스의 무기고가 있다는 사실을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단 한 순간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한 것처럼 이렌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여러 번 입후보했지만, 그때마다 떨어졌다.[4] 그러나 이렌은 포기하지 않았으며, 여성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했다.
1946년 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인해 폴로늄이 이렌의 몸에 침투하여, 그녀는 이로 인한 건강 악화에 이어 백혈병에 걸렸고, 1956년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프레데리크와의 슬하에 딸인 엘렌 (Hélène Joliot-Curie, Hélène Langevin-Joliot) 과 아들인 피에르 (Pierre Joliot-Curie, Pierre Joliot)를 두었으며 (나이 순), 두 사람 모두 집안의 전통대로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엘렌은 파리 대학교 핵물리학과의 교수이자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센터 (CNRS) 의 연구 디렉터이다. 위에서도 나온 그녀의 남편 미셸 랑주뱅[5]도 핵물리학자이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브 랑주뱅은 천체물리학자이다. 피에르 졸리오는 광합성의 산소발생 및 전자전달계 연구를 혁신하여 생물에너지론(bioenergetics)를 개척한 생물물리학자(biophysicist)[6] 이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받은 CNRS 소속 과학자이다. 피에르의 아내인 앤 졸리오도 생물 물리학자로 많은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1] 최초의 모녀 수상. 마찬가지로 부자 수상도 있는데 바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보어다. 둘 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여담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피에르 퀴리 역시 아내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부녀 수상이기도 하다.[2] 참고로, 엔리코 페르미도 같은 실수를 했다.[3]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4] 당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여성의 회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계에 성차별이 만연했기 때문.[5] 재미있는 게, 이 사람의 할아버지인 폴 랑주뱅은 마리 퀴리와 불륜 의혹이 있던 그 사람이다. 참고로 폴 랑주뱅은 그 불륜 스캔들 이후에도 이렌 퀴리의 지도 교수를 맡았고, 마리를 비롯한 퀴리 가문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6] 당시 광합성 연구는 물리학의 주요 분야였다 - 제임스 프랑크, 유진 라비노비치 등 유명 물리학자들도 광합성 연구에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