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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개국 · 대창 · 홍제 |
황룡사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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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Hwangnyongsa |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임해로 64 일원 (구황동) |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 |
면적 | 390,418㎡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건축시기 | 삼국시대, 645년(목탑 준공)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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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룡사지 복원도 |
이름이 같은 절이 은근히 있지만[3] 보통 '황룡사'라고 하면 동궁과 월지 북동쪽인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에 있었던 신라 시대의 대규모 사찰을 가리킨다.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지금은 절터만 남았기 때문에, 문화재청 등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황룡사지(皇龍寺址). 이렇게 터만 남은 자리를 가리키는 접미사처럼 쓰이는 '지'를 땅 지(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터 지(址)이다.
대한민국 전근대 역사상 최대급이었던 80m[4][5] 가량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나 조선에 있었던 목탑들의 높이가 불확실하긴 하지만, 황룡사의 고려 버전에 해당하는 보제사의 목탑은 높이 200척(약 60m)이 넘는 5층 목탑이라 하여 황룡사 9층 목탑보다는 낮았을 것으로 보이며, 흥왕사는 목탑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석탑 및 금탑으로 대신했다.
황룡사 목탑은 고려시대에도 개경의 고려 정치인들의 기행문을 보면 동경(경주시)에 갔을 때 들러보고 높이와 전망에 감탄하는 관광명소였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불교를 국가 정책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조선 이전부터 원래 있던 것 말고는 높은 목탑을 만들지 못했다. 결국 기록상으로는 황룡사 목탑이 지어진 뒤로 대략 1300년이 지나서야 대한민국에서 한진빌딩(82m, 1969년)이 세워져 이 높이를 갱신했다.
황룡사는 신라가 사라진 뒤에도 고려 시대까지 거대한 9층 목탑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황룡사에는 목탑 말고도 작은 쌍탑지가 있다. 황룡사 서편에 있는데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묻혔다. 2중기단을 갖춘 3층 석탑 두 개가 있었고 구황동 제2사지라 불린다.
그러다 1238년 몽골 제국이 침공했을 때(제3차 여몽전쟁) 황룡사도 불탔다.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숨어 본토를 방치한 탓에 가장 후방인 경상도 지역까지 유린당했기 때문인데, 그 뒤로 여태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았다. 1963년에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경주시 황용동 327번지에 있는 황룡사(黃龍寺)는 한자가 다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6]
2. 역사
2.1. 칠처가람지허
삼국유사에서 설명한 칠처가람지허는 다음과 같다.
-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흥륜사(興輪寺)
- 삼천기(三川歧): 영흥사(永興寺)
-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皇龍寺)
- 용궁 북쪽: 분황사(芬皇寺)
- 사천미(沙川尾): 영묘사(靈妙寺)
- 신유림(神遊林): 사천왕사(四天王寺)
- 서청전(婿請田): 담엄사(曇嚴寺)
이 가운데 사찰이 그대로 내려오는 곳은 하나도 없다. 분황사가 조선시대에 건설되었을 따름이다. 일제시대 조사로 흥륜사 터라고 알려진 곳에 1980년대에 다시 절을 지었는데, 그 자리에서 '영묘사'란 글귀가 새겨진 유물이 출토되었기에 오히려 학자들은 영묘사 터가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그 밖의 절터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자리만 남았거나 심지어 대충 추정만 하기도 한다.
'칠처가람지허'라고 기록한 곳들은 모두 불교 도입 이전 신라에서 신성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던 자리였던 듯하다. 즉, 신라 전통종교의 성지를 불교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종교의 성소에 새로운 외래종교의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난 곳이 바로 황룡사와 분황사이다. 사실 황룡사와 분황사는 남북으로 거의 잇달아 있다고 해도 될 만큼 거리가 가깝다. 그런데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 분황사는 용궁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용궁은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있어야 한다. 오늘날 황룡사지의 북쪽에 가면 작은 신라시대 우물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용궁'이라고 추정한다.
옛날 신라 사람들은 그곳에 용이 산다고 믿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아래에서 설명할,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는데 용이 나타나서 절을 지었다는 전설도 아마 여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라인들이 우물에 제사를 지내던 것은 그 밖에도 많은 사례가 전해 내려오는데, 개중에는 인신공양을 한 흔적도 있다. 고대 일본에는 이 우물 제사의 풍습이 전해져서 사람 대신 인형을 공양한 제사를 지낸 흔적이 남아있다. 신라도 통일한 뒤로는 인형을 공양했는데, 신라 말기 사회가 혼란해지며 인신공양 풍습이 다시 부활한 것으로 학계는 본다.
2.2. 황룡사의 건설과 폐사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 제작한 복원 영상 |
14년(서기 553) 봄 2월,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4년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4년
14년(553)에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하였는데, 황용이 그 땅에서 나타났다. 왕은 이를 의아히 여겨 불사(佛事)로 고치게 하고 황룡(黃龍寺)라 이름 지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권 제1 유통1-1 석법운
신라 진흥왕 14년(553) 새로 왕궁을 지으려고 했다. 위치는 서라벌 중심으로 신라왕경을 둘러싸고 있는 동쪽의 명활산(明活山), 서쪽 선도산(仙桃山), 북쪽 금강산(金剛山), 남쪽 남산(南山)의 정상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교차점에 놓이게 하여 왕경의 중심에 위치하도록 했다. 기존의 시가지와 경주 월성 기준으로는 약간 동쪽이었다.해동고승전 권 제1 권 제1 유통1-1 석법운
그런데 궁궐을 짓는 공사 도중 황룡(黃龍)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현대의 조사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 땅은 오랜 옛날에 늪지였다. 이미 포화된 기존 서라벌 시가지 가까운 곳에 넓은 평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늪지를 메우려고 했던 것인데, 삼국사기 미추 이사금 원년(262) 봄 3월, 왕궁(경주 월성)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면, 이미 진흥왕대 이전부터 이 인근에는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용이 사는 곳을 망가뜨리기를 주저하다 결국 내린 결론이, 궁전은 때려치고 대신 용보다 더 초월적인 존재인 부처님을 모시는 장대한 절을 세우는 것이었다.
김영택의 복원 펜화. |
이 때부터 진흥왕은 17년 동안의 공사 끝에 황룡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하지만 창건한 뒤에도 중건 공사는 진흥왕 이후로도 쭉 이어지기 때문에 완공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그 뒤 574년 거대한 불상들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셨다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장육존상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천축의 아육왕 즉, 인도 서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은 정복전쟁에 회의를 느끼다가 불교에 귀의하고 불법을 진흥시켜 역사에 남은 호불(好佛) 군주가 되었다. 아소카 왕이 철 5만 7천 근과 금 3만 푼으로 석가의 삼존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 됨을 깨닫고는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다. 이 배가 바다를 떠돌아 다니다가 수백 년 뒤 신라 땅에 닿았으므로 신라인들이 이 재료와 모형으로 삼존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만 198푼과 철 3만 5007근, 두 협시보살상은 금 1만 1360푼·철 1만 2000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육존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한 재료의 종류와 양 등이 고대사 기록치고는 꽤 세세하게 씐 데다, 장육존상이 있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까지 계속 나오므로, 일단 신라에서 저 시기에 저만한 금속으로 거대한 불상들을 만들었음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 재료를 인도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결정적으로 아소카 대왕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재위한 인물이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인도에서 쇠붙이를 싣고 띄워보낸 배가 무려 800년 넘게 바다를 떠돌다가 6세기 후반 신라 땅에 도착했단 소리를 믿을 수는 없다. 아마도 황룡사에 봉안한 불상에 불교적인 권위를 입히기 위한 픽션이었을 것이다.
이때 만든 삼존불상은 장육존상이란 이름대로 높이가 1장 6척이었다고 하는데, 그 빼어난 조형 때문에 신라삼보, 즉 '신라의 세 가지 보물'로도 꼽혔다고 한다. 장육존상의 높이가 미터법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기준이 되는 척의 길이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다. 보통은 4 - 5 m 사이라고 보지만, 삼국시대에 사용한 고려척이었다고 가정하면 5.7 m도 된다.
아무튼 이 불상들을 모시려 진평왕 6년(584)에 새로운 금당(불상을 안치한, 사찰의 중심건물)을 짓고, 그 뒤 선덕여왕 14년(645)에 승려 자장이 건의하여 그 유명한 9층 목탑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자장의 건의로 건립했다고 설명한다. 삼국유사에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신인(神人)에게 "신라 여왕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주변에서 괴롭히는 것이니, 커다란 탑을 세우라."는 계시를 듣고는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건의했다고 씌었다. 그러나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때는 643년인데, 겨우 2년 지나 645년에 황룡사 목탑을 세웠다고 하기에는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다.
문화유산기술연구소의 복원도. 황룡사가 건재하던 당시의 모습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
일단 874년 보수공사가 있은 뒤 작성된 <황룡사 찰주본기>에도 자장 스님의 건의로 건설되었다고 기록되었다. 2007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건축물에 사용된 목재 수종의 변천> 논문에 의하면 고려 이전 삼국시대의 건축물들은 소나무보다 참나무속 나무로 거의 만들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한국 건축의 대표목재라 함은 조선시대 이미지에 매몰된 것이다. 소나무보다 성장속도가 훨씬 빠른 참나무 숲이 고대 한반도에 무성했다면, 목재를 구하기가 조선시대 궁궐 스타일로 금강송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황룡사 창건(553년)부터 9층 목탑 완공(645년)까지 걸린 시간이 93년이다. 신라삼보는 9층 목탑과 장육존상,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진평왕의 천사옥대인데 황룡사는 그 두 가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목탑은 백제에서 불러온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가 주도했다. 아비지는 생몰년은 미상, 백제의 장인(匠人)으로 목탑 중건을 기술적으로 총괄하였다. 이름은 '아비(阿非)'이며 '지(知)'는 이름 뒤에 붙은 삼국시대의 존칭이다. 신라에서 백제에 보물과 비단을 주고 건탑(建塔) 기술자를 요청하였는데 아비지가 발탁되었다고 한다. 이 아비지와 신라의 김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백제는 바로 직전에 미륵사 목탑 건립 경험이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륵사 목탑 역시 황룡사와 같은 9층 목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백제인 아비지의 기술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승려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수십알을 황룡사 목탑의 기둥에 봉안하였다. 원래 100개를 가져와서 황룡사탑의 기둥과 통도사, 태화사에 나눠서 안치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아홉 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이다. 당시 주변국에게 위협받던 신라의 불안한 국제정세를 불교 신앙으로 결집을 도모해 극복하겠다는 목적은 훗날 고려의 팔만대장경 간행과 비슷한 성격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1층은 왜국(倭),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 이를 구한(九韓)이라고 한다.
이 9층 중 5층의 응유는 신라가 백제를 낮추어 부른 말인 듯하다. 鷹(매 응)에 遊(놀 유) 자로, 난세에 매를 날리며 한가하게 노는데 정신 팔린 백제인들을 조롱하는 의미이다. 백제는 응준(鷹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응준과 응유(鷹遊)는 뜻이 통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4층 탁라는 제주도, 9층 예맥은 고구려를 뜻한다.
아니나 다를까, 삼국유사에는
"아비지가 신라 선덕여왕의 청에 응하여 신라에 가서 탑의 심주(心柱: 목탑의 중심기둥)을 세우던 날 밤에, 본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꾼 뒤 그가 탑 역사에서 손을 떼려 하였더니 문득 천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어둑한 속에 한 노승이 금전문(金殿門: 금당의 문)에서 나와 심주를 세우고 이내 간 데 없었다. 결국 아비지는 맘을 고쳐먹고(포기하고)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
…라는 슬픈 전설이 있다. 심지어 '아비지가 탑을 완공한 뒤에, 백제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이 이야기를 반영, 9층탑 낙성식에서 신하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아비지가 진상을 깨닫고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아비지를 뒤쫓아 온 그의 아내가 이 사실을 깨닫고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이야기를 삽입했다.
다만 이 5층 응유와 9층 예맥이 백제와 고구려가 아니고, 이 탑의 아홉 국가는 모두 한반도 바깥 세력이지 고구려와 백제는 없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굳이 백제나 고구려(고려)가 아닌 응유와 예맥이라고 썼는데, 응유는 백제의 별칭으로 대체로 비정되긴 한다. 제왕운기에서는 백제의 이름 중 하나로 응준(鷹準)을 거론하고 있는데, 응유와 연결되는 표현으로 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정황상 응유는 백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썼는지 100% 확실히 알 수 없다. 삼한일통까지 이어지는 동질의식 때문에 주변 9국 중 백제나 고구려가 없을거라는 그런 추측이다. 그러면 백제 장인을 초빙해 건설한 부분이 조금 더 매끄럽게 설명될 수 있지만, 한편으론 신라인들이 언제쯤부터 삼국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자체가 워낙에 가설이 많다. 한편으론 삼국통일 의식이 통일(정복)을 일단 하고 난 뒤에 고백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그제서야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는 백제와 신라가 자주 싸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종교를 통해서 우호적 제스처의 일환으로 백제 장인을 초청했다는 시각도 있다. 삼국이 서로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불교라는 종교적 가치는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유독 승려가 여러 나라를 오가며 여행, 유학하기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승려가 스파이나 정보통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현대 남북한도 사이가 나쁘고 교류가 막혀있지만, 개성시의 유적지를 공동으로 발굴하거나 스포츠의 A매치 같은 비정치적 문화교류는 허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과 같다.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실제 같은 소나무 그림으로 새들을 학살했다는 동물학대의 현장이 황룡사 금당의 벽이다. 금당 뒤에는 강당이 있는데, 이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설한 곳이다. 그리고 신라의 왕들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와서 고승이 주최하는 백고좌강회에 참석하여 기도하였다. 즉 황룡사는 신라와 신라 불교계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절이었다. 황룡사엔 삼층석탑 두 기가 더 있었어서 황룡사지 3층 석탑이라 불리지만 별로 유명하진 않다.
목탑과 금당, 장육존상은 통일신라를 거쳐 신라가 멸망한 뒤로도 경주[8]의 랜드마크로 줄곧 남아 있었다. 고려시대 여러 문인들이 경주에 방문해 남긴 시와 기행문에서 황룡사 9층목탑이 곧잘 등장하고, 고려사에서는 경주 출신이자 무신정권 실권자였던 이의민의 아버지 이선이 어느 날, 어린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고 이에 "의민이 훗날 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대의 9층 목탑은 광종때에 낙뢰가 떨어져 불타 사라졌다. 나중에 현종이 조유궁을 헐어 나온 목재를 이용하여 다시 목탑을 재건하여 다시 복구했다.
몽골군에 의하여 불타는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목탑의 상상도 |
여몽전쟁당시 몽골군에 의하여 훼손된 황룡사 상상도 | 여몽전쟁으로 인하여 방화로 무너지는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
그러다가 끝내 고려 고종 25년(1238), 고려-몽골 전쟁의 와중에 불타고 그 뒤로 다시는 짓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에 저술된 <동경잡기>에는 "오직 장륙상만이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오늘날엔 그것마저도 볼 수 없다.
1976년 황룡사지 발굴 때 장육존상 머리의 나발(螺髮)이 네 개 달린 파편인 듯한 것이 발견되었다. 나발은 불상의 머리카락 부분의 일부로 자세히 보면 한 가닥씩 묘사한 게 아니라 소라 모양으로 꼬여 수백 개가 달린 모양이다. 장육존상이 거대한 불상이었던 만큼 나발도 그에 비례해서 상당히 큰데, 이 유물이 정말 장육존상의 나발이 맞다면 신라삼보 중 유일하게 일부분이라도 현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발 파편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고,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출토 나발로 추정복원한 장육존상의 머리가 전시되고 있다.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불두 파편 문서 참조.
목탑이 중건된 뒤 "경덕왕 13년(754)에 구리 49만 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황룡사 대종을 종루에 달았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 현존하는 전통종 가운데 가장 큰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 근이므로, 성덕대왕신종의 네배나 된다. 이것도 결국 몽골이 침입했을 때 없어진 듯하다. 경주 대종천은 이 종을 떼어 가져가던 몽골군이 종을 빠뜨린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 전설은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느 마을 주민의 제보를 기초로 한 것인데, 1997년 해군에서 감포 앞바다 쪽을 조사를 해 보았으나 결국 발견되지는 않았고 허황된 전설로 결론내었다. 그러나 화재로 종이 녹은 흔적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가져갔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2010년대에 경주시 근처의 바다에서 2 m가 넘는 종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 기사 끝내 찾지 못했다.
2.3. 황룡사가 다시 중건되지 못한 까닭
원래 목조 건축은 불타버렸으면 다시 짓는 경우가 많다.[9] 대표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근성을 느끼게 하는 백담사도 불타면 다시 짓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동아시아 고건축물들은 목재로 짓는다는 특징과 변변한 화재진압기구가 없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전쟁이 많았던 고대국가에는 이게 특히 심했다.[10] 또한 아무래도 목조 건축이기에 비같은 물에도 취약해서 오래 보존되긴 어렵다. 그래서 고대 국가의 궁궐 같은 것들은 거의 다 목조 건축이라 오늘날에는 터만 남았다.[11]고대 중세에는 피뢰침이 없었고, 피뢰침이 발명되려면 18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그 이전의 건축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높은 곳에 위치했거나, 성당과 같은 큰 건물일 경우 벼락을 맞고 불타거나 훼손되기 일쑤였다.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도 낙뢰로 화재가 일어나 통째로 소실된 적이 있었다. 호류지, 도지 등 고대시대 목탑이 많이 남은 일본도 여러 차례 중건한 사례가 많다. 황룡사 목탑의 높이는 약 80m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당연히 벼락의 위험에 쉽게 노출됐을 것이다. 만약 황룡사 목탑을 언젠가 다시 세운다면 피뢰침뿐만 아니라 항공법에 따라 항공장애등도 탑 끝부분 첨탑과 중간지점인 40m 지점에 설치해야 한다.
이처럼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거대함 때문에 갖은 수난을 당했고, 결국 여러 번 다시 지어야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4년(674)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금당)을 무너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목탑의 수난사를 자세하게 적는다면, 처음 지어진 뒤로 53년째 되던 해, 즉 효소왕 6년(698)에 벼락에 맞았지만 피해는 미약했고, 성덕왕 17년(718)엔 지진으로 비가 샐 정도로 피해가 생겨 1년 반 정도 보수공사를 했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나면서 문성왕(839~856) 대에 동북쪽으로 탑이 크게 기운 상태에서 경문왕 8년(868)에 벼락을 맞아 다시 보수공사를 했다.
그로부터 다시 82년 뒤인 고려 광종 5년(954)엔 벼락으로 목탑 자체가 소멸, 결국 신라 창건기의 목탑은 지어진 지 300년을 좀 넘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여요전쟁도 있고 해서 바로 복구되지는 못했고, 60여 년이 지나 고려 현종 3년(1012)에 다시 재건을 시작했다. 이 목탑을 재건하기 위해서 경주에 있던 이궁인, 조유궁을 모두 헐어서 지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져 있다. 현종의 할머니가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 신성왕후 김씨로, 현종 본인이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받았다는 사실이 재건 결정에 영향을 준 듯하다. 이 공사는 9년 만에 완료했고 이 뒤에도 정종 2년(1035), 헌종 1년(1095)에 보수공사를 했다. 마지막 보수공사가 끝난 지 142년 뒤 고종 25년(1238) 몽골의 3차 침입으로 최종적으로 소실되어 그 뒤에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황룡사 목탑에 보관되었던 찰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9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큰 보수공사가 이루어 진 것만 따져도 다섯 번이나 되고, 한 번 소실되어 다시 재건된 경우도 있으니 시간과 재력 그리고 의지만 있다면 다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여몽전쟁 뒤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고, 그리고 대대적인 왜구 침입으로 인한 혼란스런 시대상황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불탔어도 미처 재건을 못하던 시기였다. 하물며 고려가 건국된 뒤로 쇠락한 지방 도시였을 뿐인 경주의 큰 사찰을 복원할 여지는 없었다. 거기에 신라 때부터 왜구가 창궐하던 경주 인근은 고려말 왜구의 준동에 쉽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어서 유교적 왕도정치를 내걸고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불교 자체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 건축의 큰 방향 역시 실용적이고 검소한 분위기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러한 거대한 불교 건축물의 중건을 국가적인 역사로 삼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고려시대를 잘 넘긴 다른 지방의 규모가 큰 여러 절들도 조선시대 500년을 거치며 하나하나 사라지거나 크게 축소되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던 남아있는 거대 사찰들 역시 유지되고 재건될 수는 없었다. 근성의 백담사는 산중에 있는 중소사찰이었기에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형사찰들은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명맥이 끊어진다.
- 흥왕사: 한국 역사상 면적이 가장 넓었던 사찰인 흥왕사는 건물의 규모는 2,800칸 수준이었으며, 면적은 너비 800 m, 길이 400 m로 32만㎡에 이르렀는데, 이는 고려 정궁인 만월대 본궐의 1.25배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이다. (참고로 후원 부분을 제외한 고종 시기 경복궁 면적에는 70% 크기). 크기도 크기지만, 화려하기도 해서 경내에는 은 427근으로 안을, 금 144근으로 겉을 장식한 매우 화려한 금탑이 있었다.
- 보제사: 개경에 장대한 5층 목탑을 가지고 있었던 광통 보제사 개경 도심 한복판에 있었던 거찰로서 규모가 장대해서 건물만도 1천여 채에 연못이 2개, 우물이 9개나 있었다. 5층 목탑의 높이는 60 m 남짓이었다.
- 회암사: 조선왕사라고도 불렸던 회암사 같은 다른 거대사찰들은 모두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파괴된 뒤 명맥이 끊겨버렸다. 회암사는 불교를 숭상했던 문정왕후가 비호하여 일시적으로 번창되었지만, 그녀가 죽은 뒤 유생들이 파괴해버렸다. 이중 회암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태조 이성계의 비호 아래 무학대사가 거주했고 나중에 태조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난 뒤로 말년에 기거해서 사실상 왕실원찰이었으며, 오히려 조선 건국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유생들의 방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 불국사: 황룡사와 같이 경주에 있는 불국사도 규모 면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거대한 대형 사찰이었지만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방화로 한번 소실되었다가 이후 조선 후기에 대웅전을 중건하는 등 복원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끝내 쇠락하여 어느 순간 폐사가 되어 버렸는데 이 때 무너지기 직전과 같은 모습이 구한말 흑백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황룡사가 줄곧 남아있었다 한들, 이 시점에서 퇴락한 지방의 일개 거찰에 불과한 황룡사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다. [12]
3. 발굴과 연구 성과
참고로 항공사진 우중간에 있는 작은 숲 같은 곳이 모전석탑으로 유명한 분황사 위치이다. 한눈에 봐도 규모 차이가 확연하다.[13]
3.1. 황룡사지의 정리와 도굴
황룡사가 있었던 터인 황룡사지는 폐사된 뒤 거의 천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폐허가 되어, 민가 약 100여 동이 조성되었다. 100여 년 전 황룡사의 모습을 담은 유리건판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전국에 있는 한국 유적을 답사했는데, 1930년에는 황룡사를 조사한 뒤 가람 배치를 1탑 1금당식이라고 잘못 추정하였다. 황룡사가 백제의 아비지가 건설에 참여한 백제 양식의 사찰로 보고는 호류사, 시텐노지처럼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계 사찰의 가람배치를 따라 1탑 1금당식이라고 속단한 듯하다.광복을 맞고 다시 시간이 흘러 1960년대 초, 한국 고고학자들은 황룡사 터에 민가가 들어서고 주민들이 밭을 일구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이를 걱정하여 정부에 대책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민가들을 사들여 모두 헐어내었다. 이 때문에 황룡사 목탑지 한가운데 있던 거대한 심초석[14]과 그 위를 덮은 큰 장방형 뚜껑돌이 드러났다. 민가가 있던 시절에는 심초석과 뚜껑돌이 담장의 일부분이었는데 이것이 다 나온 것.
민가 철거야 좋았지만, 이는 도굴꾼들이 작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없어진 것과도 같았다. 그동안은 주민들이 있으니 몰래 작업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젠 목격자가 될 사람이 없는 텅 빈 벌판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탑이라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15]가 있어야 한다. 하물며 신라 제1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9층 탑이라면? 도굴꾼들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도 전에 심초석의 뚜껑돌을 들어올리고는 심초석 내 사리공에 있는 사리장엄구 일체를 훔쳐갔다. 학자들 입장에선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게 된 격. 30톤짜리 장방형 심초석 뚜껑돌을 기계 정비에 쓰이는 잭으로 살짝 들어 가져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탑이 있었을 텐데 심초석 안을 들여다보았다니, 심주를 옮기는 방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 도난 사건 직후 황수영 교수는 당시 유명하던 골동품업자에게 어떤 사리구 감정을 의뢰받았는데, 그것이 아마도 도굴된 황룡사의 바로 그 사리구였으리라 회고하였다.
그 뒤로 황룡사 목탑의 사리구는 영영 못 찾는 줄 알았다. 그런데 2년이 지나 1966년 9월, 그 도굴꾼들이 불국사 석가탑도 털다가 미수로 그치고 붙잡혔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직 수위가 있었다. 경찰이 여죄를 추궁하던 중에 황룡사도 털었다는 정황을 알아내어 황룡사 사리구를 회수하였다. 이 사건에는 재벌도 연루되었다고 한다. 가야금관 도굴 사주 의혹이 있던 재벌이고, 고미술품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려놓은 대한민국 원톱 재벌이란 소문. 실제로 창업주 이병철의 형이 석가탑을 털려다 실패한 도굴단으로부터 도굴한 장물을 취득한 혐의로 구속된 전과가 있었다.
다만 되찾은 것은 사리구 중 사리와 사리함을 제외한 사리장엄구로, 사리와 사리함은 지금도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리장엄구과 그 안의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아무튼 사리구 중에는 작은 사리 그릇과 네모난 청동 소함이 있었고, 사면으로 이루어진 사리 외함, 내함이 있었다. 금제합, 명문판 염주, 청동방함, 은합 등. 그러나 끝내 사리병과 사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사리 그릇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청동 소함이 감싸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금동팔각사리탑도 사리구 안에 함께 있었다. 특히 사리 내함은 부식이 심해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지만, 기록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황룡사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사리 내함의 3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중건과 수리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를 적었는데, 바로 여기에 9층 목탑의 높이와 수리 내력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찰주본기
9층탑은 절반 이상의 높이가 7보(42자), 그 이하가 30보 3자(183자)이다. 총 225자다.
3.2. 본격적인 발굴
이후 1969년에 1차례 소규모 발굴 시도가 있었지만, 충분하지는 못했다. 결국 문화재연구소가 출범한 뒤인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황룡사의 가람배치와 4만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황룡사가 일제강점기의 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절이었으며, 금당이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는 사실이나 회랑이 이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참고로 발굴 당시 황룡사에서 출토된 기와가 발굴사무소 옆에 가득 쌓여져 있었는데. 관광객들이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황룡사의 사리구가 있던 심초석은 원래 발굴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주변에서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발굴단은 435 × 300 cm, 무게 28톤에 달하는 거대한 심초석을 들어 옮겨야 했다. 이를 위해 당시 한국에 세 대밖에 없는 대한통운 포항지점 소속의 100 t급 크레인을 동원해야 했다. 심초석이 있던 자리 아래에서는 금동 귀걸이나 청동 거울이 나왔다. 아마도 어떤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심초석의 남쪽에서 인골을 담은 항아리 등의 다른 유물을 발견했다. 발굴된 인골은 자장율사의 유해란 추측도 있었지만, 결국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참고로 인터넷에는 심초석 안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함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 잘못된 기사에 의한 정보로 인한 것이다. 그 때 발굴단이 기자를 만나서 항의했다는데, 그때 기자가 했던 말이 걸작이다. "기사 내용 20%만 맞으면 되는 겁니다." 황룡사 발굴 단장이었던 조유전의 저서 "발굴 이야기"에 나온 이야기로 상당히 세세한 이야기가 있다.
한편, 발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도 황룡사 복원에 관심을 기울였고, 1979년 1월에는 황룡사 발굴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는 목탑에 미련이 있었는지 콘크리트로 목탑만을 복원하는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는데, 발굴단은
1979년 이례적인 방문이 또 있었는데, 당시 삼성그룹의 회장이었던 이병철이 연락도 없이 방문했던 것. 그리고 단지 황룡사 터의 크기만을 물어보고는 발굴단에게 당시 돈으로 3만 원을 선물하고는 떠났다고 한다. 정확히 왜 그러한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소 이병철이 고미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경주 이씨 출신이란 점을 고려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님 상기한 도굴건에 관련되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미안해서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2018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던 황룡사/감은사 발굴 사리를 대한불교조계종이 받아 불국사로 이운했다.관련 기사 황룡사 사리도 5과가 있다는데, 심초석 뚜껑돌을 들어올린 그 도굴꾼들이 훔쳐간 사리인지, 혹은 황룡사의 다른 데서 발굴된 사리인지는 불명.
황룡사 금당 치미. (높이 186cm) 출처
유물로는 높이 20.1cm 금동불입상과 높이 8.3cm 금동보살 불두(佛頭) 등이 있고, 측면에 용을 새긴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도 중요한 유물이다. 높이 186cm, 폭 105cm에 이르는 거대한 치미(망새 기와)도 대표적인 발굴 유물. 이 치미란 것은 전통 목건물의 지붕 양 끝에 올라가는 장식용 특수기와로, 건물의 크기에 맞게 만들기에 황룡사 금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 가장 큰 치미는 평양의 안학궁터에서 나왔으며 무려 2m가 넘는다고 한다. 하긴, 명색이 궁궐인데 사찰 건물보다 작으면 체면이… 백제도 황룡사에 맞먹는 규모의 미륵사가 있었다.
발굴된 기와의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 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려 배치한 것은 그 유례를 살펴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2020년에는 신라시대 최대의 사찰이던 경주 황룡사터 남쪽에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대규모 ‘광장’이 존재했다는 조사 성과가 정리되어 발표되었다. 이 광장은 담장과 함께 황룡사에서 동궁 및 월지 방향으로 500m 가량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동궁 및 월지(서쪽)와 명활산성(동쪽)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의 존재도 확인됐다. [단독] 1400년 전 경주판 '광화문 광장' 황룡사 앞에서 찾았다… 7,600평 규모, 월지까지 이어져
4. 가람
황룡사의 담장 안의 규모는 동서 288m, 남북 281m로 면적은 8만 928 ㎡로 불국사의 여덟 배 정도 된다. 가람 배치[16]는 1탑식 가람배치[17]에서 시작하여 1탑 3금당식으로 변하였음이 밝혀졌다. 쉽게 이야기 하면 목탑 하나에 부처가 있는 건물을 세 개를 배치했다는 것.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독립된 특이한 형태다.가람배치.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이 일렬로 있으며 점차 넓어지는 형태에, 좌우에 동서 금당이 위치하고 있다. 참고로 남문은 이 배치도에 없으니 찾아봐야 헛수고다. (칸은 전통 건축의 기본 단위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공간이 1칸이다.)
황룡사가 서 있던 시절이었다면 중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가면 먼저 중앙의 9층목탑과 양 옆에 있는 종루와 경루가 보일 것이다. 종루는 황룡사 대종을 달아놓았던 누각으로 황룡사종의 크기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49만 7,000근의 구리를 녹여 만들었고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의 4배 규모였던 만큼 종루의 위용도 상당했을 것이다. 경루는 불경을 보관하는 누각이다. 한편 9층목탑 뒤로는 좌우로 길쭉한 구조인 금당 건물의 좌우가 일부 보이고, 그 옆에 각각 동서 금당이 보일 것이다. 금당 뒤에는 강당과 승려들의 생활 공간인 승방이 있다.
4.1. 중문
정면 5칸 23.52 m, 측면 2칸 14.2 m였다고 추정한다. 중앙부의 3칸은 출입을 위한 대문을 달았고, 양쪽의 좁은 협칸에는 금강역사상을 놓다고 추측한다.이후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에 다시 한번 개축된 흔적이 발견 되었으며, 이때부터는 본래 측면이 2칸이었던 것을 4칸으로 늘려서 개축하게 된다. 다만 칸수만 늘어났을 뿐 측면의 길이가 크게 넓어진 수준은 아니다.
2017년경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연구지식포털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다양한 안이 제시되었고 현재 안은 동궁과 월지 출토 부재와 현존 자료를 바탕으로 홑처마에 중층으로 구성하였다. 2019년경 증강 현실로 구현되었다. 하앙 구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주간포를 사용하였다는 점이 복기할 만한 점이다.
4.2. 황룡사 금당과 강당
황룡사의 중심 건물은 9층 목탑이 아니라 정면 9칸 측면 4칸[18]의 거대한 중앙 금당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이 크고 아름다운 고대건축의 대명사격으로 유명하다보니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황룡사 금당도 상당히 규모가 컸다. 지금도 남아있는 182 cm의 거대한 황룡사 금당 치미가 이 건물 지붕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 치미를 통해 그 크기에 대해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학계에서 황룡사 금당 치미를 토대로 건물을 디지털 복원한 모습. 왼쪽은 경복궁 근정전, 오른쪽이 황룡사 금당이다.사진 출처 : 네이버 역사카페 부흥 - 안학궁&황룡사 vs 근정전 크기 비교
금당의 구조는 정면 51.7 m 측면 26.7 m에 1384 ㎡(419평) 면적인 이중기단 위에 배치했으며, 주변 한 칸의 툇간(차양칸)은 아래 기단 위에 놓여져 있다. 툇간을 포함하면 정면 11에 측면 6칸이며 안에는 장륙삼존불상이 있었다. 이 불두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불두 파편을 통해 상당히 거대한 불상이 안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오히려 사찰의 중심건물이었기 때문에 목탑보다는 이쪽이 더 빨리 지어지고 더욱 중요시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 쪽에는 동, 서금당이 있었는데, 서금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19]에 이중기단, 툇간이 달린 형식으로 추정된다. 서금당과 동금당에서는 불단이나 대좌가 발견된 적이 없다. 불상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불상을 그린 그림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모형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동금당은 이보다 커서 정면 9칸에 측면 6칸이었으며 이중기단에 차양칸 역시 있었지만, 후대에 정면 7칸 측면 4칸에 기단도 단층으로 축소가 되었다. 균형을 위해 축소했을 수도 있다.
중앙의 금당 뒤에는 강당이 있다. 창건시 강당은 정면 10칸 측면 4칸 규모였지만, 고려시대에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축소된다. 고려시대 유구에선 왼쪽 네 번째 칸에서 석재로 짠 네모난 틀이 발견되는데, 고승이 강연을 하던 고좌로 추정된다. 유구에선 남쪽 편에서만 고좌가 발견되지만 다른 사찰의 강당 유구를 보았을 때 북쪽에도 고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말한대로 여러 고승의 강연과 왕에 얽힌 이야기 때문에 역사적인 중요성은 금당보다도 더 높다고도 할 수 있다.
강당의 양 옆에는 부속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총 2번의 큰 개축이 있었는데 가장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승방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 중이다. 이후 승방의 가운데를 잘라내고 강당이 들어섬으로써 강당 양옆에 단일 건물로 다시 세워지는데 용도가 불명확하다. 최종적으로 고려시대엔 이 단일 건물이 여러 개의 건물로 잘라지는데 역시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통일신라시기까진 동, 서회랑 자리에 동, 서승방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강당 양옆 단일 건물 역시 승방으로 사용되었다가[20], 동, 서 승방이 회랑으로 바뀌면서 양옆 부속건물 역시 승방이 아닌 다른 용도로 전환되어 건물이 여러 개로 나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복원안을 보면 주로 중층 형태의 금당이 대부분이었는데 여태까지 나온 황룡사 복원 계획에 보면 단층 형태 금당 복원안이 제시된다. 좀 더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다. 관련 포럼에서도 단층, 중층 문제에 이렇다할 답을 못 내리고 논쟁이 있었다.
현재까지 나온 복원안은 대표적으로 김동현의 복원안을 토대로 1995년 작성된 황룡사 복원정비 기본계획과,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복원안을 토대로 작성된 황룡사 건물복원 기초연구[21]가 있다. 전자는 중층 복원안을, 후자는 단층 복원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2023년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황룡사 중금당 고증연구'에선 이중첨의 단층 구조가 더욱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황룡사 중금당과 비슷한 규모의 대형 불전 건축물에서 중층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평면 규모만으로는 황룡사 중금당이 중층이었으리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또한 황룡사 중금당과 같은 규모의 건축물에선 단층으로도 충분히 장육삼존불상을 수용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2] 세 번째는 목탑과의 비례 문제인데, 이는 선후관계가 틀렸다. 황룡사 중금당의 건립은 목탑의 완공보다 약 60년 일렀으며, 창건 당시 황룡사의 가람은 흔히 알려진 황룡사의 가람배치와 달랐다. 따라서 황룡사 중금당이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목탑과의 비례 관계를 고려해 높이가 설정되었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마지막으로 김동현의 안은 퇴보 위에 기둥을 세워 중층을 구축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런 구조가 처음 확인되는 중국의 진사 성모전은 황룡사 중금당보다 약 520년 늦게 지어져 시차가 너무 크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와 별개로 두 가지 복원안 모두 외진에도 벽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실제 유구 조사 결과 내진에만 벽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최종 복원안에선 외진의 벽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장륙삼존불상의 크기가 이름 그대로 1장 6척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컸다면 중층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불두 파편의 크기로 추정했을 때 장륙삼존불상의 머리 크기는 대략 2m로 추정되는데, 장륙삼존불상의 높이가 이름 그대로 1장 6척, 즉 대략 5.7m라면 불상이 3등신에 불과하다. 금산사 미륵전의 장륙상과 같은 비례를 생각한다면 장륙삼존불상의 높이는 10m가 넘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불좌대석의 높이와 광배까지 생각한다면 전체 높이는 10m를 훌쩍 넘었을 것이므로 단층 건축물로는 수용하기 어렵다.[23]
4.3. 황룡사 9층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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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보 중 하나로, 대부분 황룡사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9층 목탑이다. 상술하였듯 주변국 구한(九韓)의 신라 침략을 막으려는 염원을 담은 탑으로 전해진다. 각 층마다 특정 주변국에 대응하는데 제1층은 왜(倭[24]), 제2층은 중화(中華, 당나라), 제3층은 오월(吳越, 남중국), 제4층은 탁라(托羅, 탐라 오늘날의 제주도), 제5층은 응유(鷹遊, 백제),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여진), 제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의 침략을 막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사의 수많은 건축물 중 가장 거대했고 세계구급으로도 최대 규모급을 자랑했던 전근대 시대 목조 건축물이었던만큼, 오늘날까지 존재했다면 마땅히 한국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 몽골군의 고려 침략 당시 몽골군들이 황룡사 9층 목탑을 원형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은 한 변이 28.5m인 기단 위에 목탑 1층 외진주열 한 변이 22.4m에 이르렀다. 약 500㎡(150평 규모)정도의 거대한 1층 바닥 면적을 봐도 압도적인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탑의 기초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단은 작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붉은 색의 진흙을 다지는 식으로 2m 높이를 조성하였다. 심초석 1개와 초석 64개로 정면 7칸 측면 7칸 건물을 올렸다.
이 목탑의 높이야말로 이 황룡사 최대의 떡밥이라 이견이 분분하다. 왜냐면 신라의 길이를 재는 단위가 황룡사에 대해 기록한 시기와 황룡사 중건 당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칸 길이로 기록된 225척을 조영(造營)[25] 당시의 길이 단위(척수)인 고(구)려척[26]으로 계산하면 81m 정도가 되는데, 이는 높게 잡으면 현대식 빌딩 약 20층 높이를 넘는 셈이다. 하지만 황룡사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함의 탑지(塔誌)가 기록된 당시, 즉 경문왕 재위 시기인 873년에는 당나라의 척수인 당척(唐尺)을 썼는데, 이것으로 계산하면 약 53.45m, 상륜부(上輪部)[27]까지 더하면 약 66.70m 정도가 된다. 롯데월드 자이로드롭의 높이가 70m임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목조 건축물치고는 상당히 높다.
다시 말해 찰주본기가 조영 당시의 기록이고 이 기록이 '225척'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찰주본기는 조영보다 후대의 기록이고 이 시기에 널리 쓰인 단위는 조영 당시의 단위와 다르다. 그러므로 과연 탑의 높이를 기록 당시로부터 200년 전에 통용되던 고려척으로 기록한 것인지, 기록 당시의 당척으로 기록한 것인지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고려척 기준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찰주본기의 높이가 기록된 내용이, 중수를 다룬 부분이 아니라 건탑의 연혁을 설명하는 부분에 실려 있다는 점,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과 찰주본기에 인용된 사중기의 내용이 동일한 점. 고로 찰주본기를 썼을 때는 건립 초기의 225척이란 기록을 그저 베껴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양식적으로도 고려척이었을 때 탑 자체의 비례가 잘 맞을 뿐 아니라 황룡사 가람 자체도 규칙적인 비례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수를 했어도 높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황룡사 목탑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큰 걸로만 따져도 세 번 정도 새롭게 다시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1차, 대대적인 중수로 모습이 크게 바뀌었을 2차, 고려시대에 송척을 기준으로 새롭게 지어진 3차 정도인데, 중수를 거치는 와중에 기본적인 양식을 유지했을 수도 있지만 높이를 비롯하여 여러 부분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못한다.
다만 고려 시대 송척 기준으로 세워진 3차 목탑의 경우 자잘한 중수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구조적으로 상당히 취약하고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양식도 상당히 바뀌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까닭에선지 오늘날의 목탑 복원 계획에서도 고려 시대의 양식은 일찌감치 논외가 되었다. 물론 고건축에서 심초석의 주칸 길이[28]와 상부 건축물 높이를 서로 다른 단위로 다룬다는 건 상식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높이 역시 고려척 기준의 기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긴 하다. 그러나 고려척으로 조영된 줄 알았던 건축물들이 당척으로 건립됐다는 사실로 밝혀진 다른 사례도 있어서 여러 모로 복잡한 문제다.
지금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인 중국 잉셴 불궁사 5층 목탑의 높이가 67m 정도며 일본 토지의 목탑이 55m, 지금은 사라진 백제 미륵사의 목탑이 55~60m 수준, 역시 사라진 고려 최대였던 보제사 목탑이 60m 정도임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황룡사 목탑도 60m 정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청암리 사지 목탑이 약 80m 높이로 추정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면서 신라 역시 경쟁심에 탑을 높게 건축했을 가능성도 있다.
절의 총 면적은 미륵사가 더 넓지만, 건축물의 규모에서는 여러 모로 황룡사가 미륵사보다 더 웅장했다. 유물도 보면 황룡사의 치미가 미륵사의 치미보다 훨씬 크고 고구려 정궁 치미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이례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탑이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황룡사 목탑의 높이를 81m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견이 좀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81m라고 한다. 아래 황룡사탑을 본뜬 것으로 여겨지는 부조나 청동소탑들의 비례를 생각한다면 81m가 비례에 맞기 때문이다. 제시된 여러 복원안을 봐도 60m 높이었다면 탑이 층간 높이도 납작해지고 윗층으로 갈수록 급격히 축소되어야 해서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표시된 것이 황룡사 9층 목탑. 1위는 영녕사 목탑이다. 참고로 이 도표에는 당시 연구가 덜 끝났던 목탑들은 죄다 빠져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 중국이나 일본의 신빙성이 낮은 탑들까지[29] 모두 사실로 친다면, 황룡사 9층 목탑이 전근대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30], 위 사진의 1번 중국 뤄양의 영녕사 목탑은 타워 크레인도 철근 콘크리트 공법도 없는 전근대의 건축기술 수준으론 건설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규모임에도 남은 터는 황룡사 9층 목탑보다 작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516년 지어 20년도 안된 534년에 화재로 사라져서 더 의구심이 남는 대목. 하여튼 기록과 유구가 확실하고 구조상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목탑인 것으로 한정한다면 황룡사 목탑이 전근대 역사상 최대 높이의 목탑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 역시 현재는 소실되어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목탑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참고로 가끔 이런 거대한 규모 때문에 현대 기술로는 복원도 할 수 없는 오버 테크놀러지인 것처럼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하지 않는 까닭은 고증 문제와 예산 문제 같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서 지지부진한 것일 뿐 81m짜리 목조 불탑을 만드는 것은 현대기술로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4.3.1. 외형
사진 오른쪽에는 7층 탑이, 왼쪽에는 9층 탑이 새겨져 있다. 이중 9층탑은 황룡사 9층목탑으로 추정된다. |
경주 남산 탑골에 신라시대 새겨진 부조로 추정되는 대한민국의 보물 201호 마애조상군이 있는데, 이곳에 신라시대 당시의 황룡사 9층 목탑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조가 있다. 이를 새기기 위해 참조할 만한 실제 9층목탑은 황룡사가 원신라 영역에서는 유일하기 때문에 자연히 남산에서 저쪽에 보이는 황룡사를 보고 새겼으리란 추정이다. 이 곳은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신인사(神印寺)가 위치해 있던 장소. 신라시대 탑의 기본적 모습과 장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자료.
2011년 발견된 신라시대 대구 마애암각군에도 9층탑의 부조가 있는데 역시 황룡사 9층 목탑을 표현했다고 추정된다. 다만 옥개석을 올린 석탑의 형상에 가깝다는 것이 차이점.
고려 광종 시기에 만들어진 불일사 석탑에서 출토된 9층 청동탑도 눈여겨 볼만 하다. 황룡사 9층목탑이 벼락을 맞아 한 차례 소실된 것이 945년이고 불일사는 951년에 만들어져 시기 차이가 얼마 나지 않고, 왕건의 혼인동맹 정책으로 경순왕이 광종의 매형으로 개경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명순성왕후를 위해 세운 불일사를 세울 때 경순왕 부부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정황상 이 9층탑이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양을 본떴을 가능성은 높다. 실제로 이 청동탑과 황룡사 찰주본기에 기록된[31] 목탑의 비율이 어느 정도 들어맞음을 보면 황룡사가 실제 모델일 가능성도 높다.
4.4. 종루와 경루
남회랑을 제외하고는 중문에서 가장 가까운 단일 건축물들로, 좌측에 경루를, 우측에 종루를 지었다. 각각 정면 5칸, 측면 5칸을 가진 정사각형의 건축물이며, 경루는 경전을 보관하는 용도의 건축물이었고, 종루는 상당히 거대한 크기를 지녔던 것으로 잘 알려진 황룡사 대종을 달기위한 건축물이었다. 한 동안의 복원도에서는 단층으로 자주 그려졌지만, 발굴조사 이후 통일신라대 까지 중층이었던 것을 고려시대에 단층으로 개축한 흔적이 발견되어, 이후에는 중층건물로 자주 그려진다. 특히 경루는 고려시대까지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사찰이라는 특성상 상당히 중요도 높은 경전들이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몽고의 침략으로 불탈때 전부 같이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5. 관련 문학
5.1. 김극기의 시
고려 시대 문인 김극기가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서 느낀 감상을 쓴 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ruby(層梯繚繞欲飛空, ruby=층 제 요 요 욕 비 공)]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ruby(萬水千山一望通, ruby=만 수 천 산 일 망 통)]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네
[ruby(身出盧敖登降外, ruby=신 출 노 오 등 강 외)] 내 몸은 노오가 오르내린 바깥에 나왔고[32]
[ruby(眼呑竪亥去來中, ruby=안 탄 수 해 거 래 중)] 내 눈은 수해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33]
[ruby(星槎影落檐前雨, ruby=성 사 영 락 첨 전 우)] 성사의 그림자는 처마 앞에 비처럼 떨어지고[34]
[ruby(月桂香飄檻下風, ruby=월 계 향 표 함 하 풍)] 월계수 향기는 난간 밑 바람에 나부끼네
[ruby(俯視東都何限戶, ruby=부 시 동 도 하 한 호)] 굽어보니 동도(東都)에 수없이 많은 집들
[ruby(蜂窠蟻穴轉溟濛, ruby=봉 과 의 혈 전 명 몽)]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ruby(萬水千山一望通, ruby=만 수 천 산 일 망 통)]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네
[ruby(身出盧敖登降外, ruby=신 출 노 오 등 강 외)] 내 몸은 노오가 오르내린 바깥에 나왔고[32]
[ruby(眼呑竪亥去來中, ruby=안 탄 수 해 거 래 중)] 내 눈은 수해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33]
[ruby(星槎影落檐前雨, ruby=성 사 영 락 첨 전 우)] 성사의 그림자는 처마 앞에 비처럼 떨어지고[34]
[ruby(月桂香飄檻下風, ruby=월 계 향 표 함 하 풍)] 월계수 향기는 난간 밑 바람에 나부끼네
[ruby(俯視東都何限戶, ruby=부 시 동 도 하 한 호)] 굽어보니 동도(東都)에 수없이 많은 집들
[ruby(蜂窠蟻穴轉溟濛, ruby=봉 과 의 혈 전 명 몽)]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층계로 된 사다리, 그러므로 황룡사 9층 목탑이 층을 가진 누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시이다. 또한 사다리의 배치에 관해서도 어느정도 추정할 수 있게 만든다. 실제로 황룡사지에서는 남쪽에서 계단이 세 개소, 북동서에서 한 개소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목탑에 처마가 있었으며, 난간이 탑신에서 돌출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5.2. 등황룡탑
고려 중기의 승려 혜심이 황룡사 목탑에 올라서 쓴 등황룡탑(登皇龍塔).[ruby(一層看了一層看, ruby=일 층 간 료 일 층 간)] 한 층 보기를 마치고 또 한 층 보면서
[ruby(步步登高望漸寬, ruby=보 보 등 고 망 점 관)]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ruby(地面坦然平似削, ruby=지 면 탄 연 평 사 삭)] 지면은 깎은 듯 평평한데
[ruby(殘民破戶平堪觀, ruby=잔 민 파 호 평 감 관)]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ruby(步步登高望漸寬, ruby=보 보 등 고 망 점 관)]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ruby(地面坦然平似削, ruby=지 면 탄 연 평 사 삭)] 지면은 깎은 듯 평평한데
[ruby(殘民破戶平堪觀, ruby=잔 민 파 호 평 감 관)]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역시 누각이란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층 한층 올라갈 수 있는 적층구조임도 알 수 있다. 혜심(1178~1234)은 고려 고종 때 인물인데, 이 시기 경주는 이미 쇠락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6. 복원 논란
황룡사 복원을 두고는 각종 이해단체가 개입하는 와중에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대립하는 실정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건축사학계에서는 이미 복원사업이 순탄하게 이루지리라 상정한 상태에서 수십 년 전부터 연구를 진행했을 정도로 복원에 긍정적이지만, 고고학계에서는 유구 파괴 우려 등을 이유로 오래 전부터 복원에 반대한다. 이에 후자의 의견에 찬성하며 디지털 복원이 최선이라는 의견과, 단기적으로 디지털 복원 + 장기적으로는 실물 복원 투트랙 방식을 주장하는 의견들 역시 병립한다.고증에 관해서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7세기 중국, 일본의 실물건축과 고구려 고분 등을 통하여 황룡사의 양식을 재구할 수 있다는 주장과 무리라는 주장이 서로 다툰다.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 당시까지 동아시아 건축문화는 한중일 모두 대동소이하기에 얼마 남지 않는 실물건축, 청동탑, 고분벽화 등으로도 건축구조나 단청 문양 등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긴 해도 어느 정도 이론이 정립되었고, 심지어 파편만 남은 장륙삼불상의 양식도 연구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황룡사 금당 내부 불화처럼 세세한 부분은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영원히 알 수 없으니, 이러한 세부사항은 상상에 맡겨야 한다는 크나큰 문제점이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점은 사진자료, 설계도가 남아있는 근대 건축을 복원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한편 이번 2020년 12월에 발효되는 신라왕경특별법은 황룡사 실물 복원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황룡사를 성공적으로 복원함을 미리 상정하였으나, 복원에 관해서 보수적인 유네스코는 2019년 동궁과 월지를 필두로 한 경주시 복원사업에 반대하며 황룡사 복원 사업에 제동을 걸었다.
황룡사의 복원에 관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부딫히기에, 기존에 하던 건축사학적, 고고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복원 자체에 대한 철학적 논의 역시 필요할 것이다.
6.1. 관련 연구
황룡사를 발굴한 뒤로, 여러 연구자들이 9층 목탑에 대해 각기 다른 복원안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것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장기인 : <황룡사 9층목탑 복원공사> 삼성건축설계사무소, 1976
-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35]: <韓の建築文化> 藝艸堂, 1976)
- 김정수·박일남 : <황룡사 9층목탑의 형태 추정에 관한 연구-문화재와 작도법을 중심으로> 건축 제25권 제102호, 대한건축학회, 1981
- 김동현 : <皇龍寺の建築計劃に關する硏究> 동경대학 박사학위논문, 1992
- 김인호 : 연대 미상
- 권종남[36] : <황룡사 9층탑> 미술문화, 2006
- 북한 : 조선력사박물관 소장 복원 모형
각종 복원 안들.
- 다음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있는 장기인의 도면으로 보인다. 위에 나와있는 장기인의 안과 유사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좀 차이가 있다.도면1
- 다음은 아마도 위의 안을 바탕으로 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도면이다. 위에서 말했던 콘크리트 복원 계획의 도면이 이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기를 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도면2
물론 이러한 연구들은 기존의 자료와 목탑을 참고했지만 사실 결코 역사 속의 9층 목탑의 모습과 같다는 확증은 없다. 다만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 것을 뽑은 것일 뿐이다. 잠정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90년대에 나왔던 김동현의 안이다.
김동현의 안이 채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후지시마 등 다른 연구자들의 안은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5층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을 기초로 해서 9층 목탑을 '연속 구조'[37]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김동현의 안은 '적층 구조'였기 때문이다.
팔상전은 조선시대 건축이라 신라시대의 황룡사와는 시간 차이가 상당히 크므로 연속 구조 방식이 맞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 일본의 고대 목탑은 그와 대비되는 적층 구조이다, 한 층씩 단절된 기둥을 쌓아서 만들어진다.
또한 연속 구조 방식은 구조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황룡사 9층목탑에 관한 기록에서 '탑이 기울어져 수십 년을 버텼다'는 기록과 상충된다. 또 연속구조방식은 체감률이 높아 탑이 윗층으로 갈수록 심하게 줄어들기 때문에다소 모양이 빈약해보이는 약점이 있다.
이러한 김동현의 안을 바탕으로, 2000년 들어서 권종남이 좀 더 상세한 안을 내놓았다. (권종남은 2006년에 작고하였으며, 그 동안의 연구를 모아 <황룡사 구층탑>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권종남은 백제시대의 구조 방식인 하앙[38]과 귀틀[39] 등을 추가하여 더욱 합리적인 구조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더욱 세부적인 층간 연결방법이 설계되었으며, 중국 응현에 있는 불궁사 목탑처럼 내부에 암층(숨겨진 층)이 존재할 필요 없이 명쾌한 구조를 확립했다.
권종남의 안
본 문서의 맨 위에 있는 복원도는 김동현의 안을 기반으로 한 모형으로 보이며, 단청 등의 세부적인 장식 요소 등은 확정되지 않았다. 목탑의 복원 계획은 당초 권종남의 안을 바탕으로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하앙구조는 삭제되었고 김동현의 안과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살짝 차이가 있는 한국전통문화대의 복원안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문의결과 목탑 복원안은 아직 확정이 아니고 좀 더 의견 수렴과 연구가 필요하며 목탑 복원 모형의 실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문화재청의 답변과 관련 인터뷰가 있었다.
경주의 <신라 왕궁 영상관>에서 2013년부터 상영하기 시작한 영상에 등장한 황룡사의 모습. 여기에서는 남문과 주변 건물이 추가로 복원되어 있다. 여담으로 이 영상에 등장하는 남문은 기존에 알려졌던 것과 달리 정면 5칸이고, 동서의 종각은 중층으로 달라져 있다. 금당의 1층은 벽이 없이 개방된 모습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점이 단청 등과 더불어 학술적 연구 결과가 달라져 변한 것인지는 의문...
다만 대중을 위한 CG 영상이라 정확한 고증대로가 아니라 일단 크고 웅장하게를 모토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40] 남문은 다섯 칸이 최신 연구를 반영한 형태이나, 금당처럼 중층인지 단층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고 두 가지 복원안 모두 존재한다. 그 중에서 크고 아름다운 형태인(어차피 CG니깐) 중층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서의 종각은 한 건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으로 추정. 초석도 다르고 규모도 살짝 다르다. 초기에는 중층의 종각이 당시의 흐름이었고, 발굴결과 고려시대에 단층으로 개수된 흔적이 보인다. 현재 황룡사 복원 사업은 모든 권역이 완비되고 가장 융성했던 통일신라 경문왕 대의 황룡사를 모델로 하기 때문에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황룡사 금당이 단층/중층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기에 복원 포럼에서도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평면 규모의 비교를 통한 비례체계 적용시 중문과 금당은 중층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평면 크기를 보아 중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2013년 중문 연구 중 자문회의에서 자문위원 대부분이 중층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6.2. 복원 계획
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으로 대표되는 정부와 관할 지자체인 경주시는 황룡사 복원사업을 포함한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개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약 2035년 정도를 목표로 황룡사를 복원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 월성 복원 요청이나 월정교 복원 등도 이에 따른 것. 복원된다면 경주시 관광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대체적으로는 경주시의 새로운 볼거리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찬성 의견이 많으나, 다만 황룡사 복원을 위한 자료가 구체적인 것은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리수라는 의견 역시 많다. 복원할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남기는 것이 문화재를 가장 잘 복원하는 것이니 복원해봐야 의미가 없다란 의견. 복원을 해도 다른 곳에다가 해야 한다는 의견. 연구도 제대로 안 하고 섣불리 복원하지 말라는 의견. 복원해봐야 높이 등을 빼면 거의 상상이니 사실상 복원이 아니라 중건이다라는 의견 정도로 좁혀질 수 있다. 한국에서는 복원이냐 중건이냐 단어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이지만, 영문으로 발표된 관련 자료에서는 대부분 Reconstruction을 쓴다고 한다. 사실상 대외적으로는 중건이라고 선전하는 것. 현재로써는 혼란의 극. 아무튼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2018년 복원 계획에 의하면, 1차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복원이 쉬운 중문 및 남회랑만을 복원 대상으로 삼고, 기타 목탑, 금당 및 강당은 기초만을 다진 뒤 디지털 복원을 하여 건물복원은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잡았다.
경주시 세계문화엑스포 공원 안의 경주타워가 황룡사 9층탑의 실루엣을 재현하고 있다. 정확히는 남산에 남아 있는 탑의 형태를 차용해 만든 것.
최종복원안이 확정되어 공개된 목탑 상륜부 1/20 모형.
최종복원안에 따른 1/20 단면 모형.
고려되었던 다섯 안 중에서 결국 김동현의 안으로 확정되었다. 문화재청의 답변에 따르면 권종남 교수의 안은 우선 개인 논문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신라의 요청으로 백제 장인인 아비지가 건설에 참여한 목탑이지만, 현재까지 남은 신라양식의 건축물에서 하앙구조를 찾아볼 수 없고, 하앙은 그저 추녀결구를 받치는 구조지 전체적인 뼈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 요점이다.
참고로 한국 고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봉정사 극락전이고, 그나마 고려시대 건물이다. 신라시대 당대 목조 건축물이 단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드는 설명으로는 모자라 보인다. 또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백제 장인이 조영에 참여한 여러 일본의 목탑들은 거의 다 하앙공포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물론 황룡사는 분명히 층이 있는 건축물이었던 차이점이 있지만, 엄연히 실물 목탑, 심지어 찰편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앙 공포를 삭제한 것은 논란 거리다.
문화재청의 답변에 따르면 하앙 방식은 일본의 5층 목탑처럼 규모가 작을 경우에나 되며 황룡사처럼 클 경우에는 구조가 미끄러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음 지적하였다. 다만 복원 계획안을 보았을 때 구조 해석에 있어서 여러 방안과 양식의 구조 해석을 통해 현재 형태의 복원안이 마련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41]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윤관석 의원의 감사에 따르면 현재 복원모형을 제작중인 한국전통문화대의 경우 예정보다 4년이나 지난 시점에서도 모형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기관 대행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서 수의계약이 불가능한 산학협력단이 진행한 결과 내부 직원에게 하청을 주고, 그마저도 완성을 하지 못해 외부업체에 하도급을 줬다는 모양. 일단 감사 결과를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2016년 11월, 경주역사문화관이 개장되면서 1/10 모형 또한 공개되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복원 사업을 유네스코가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함에 따라 해당 사업이 중단된 가운데, "황룡사 복원사업도 불가능하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
하지만 이것 역시 2020년 경주시 복원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다시 시동이 걸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경주시에 대한 문의 결과와 현재 신라왕경 특별법 추진 자료를 분석해보면, 당국 역시 황룡사 복원(중건)에 있어 고증 문제를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의 입장에서도 황룡사를 그저 빈 터로만 남겨두고 잔디관리나 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는 당장 경주시의 관광자원을 늘려 어둡기만 한 경주시의 경제에 기여토록 하는 게 중요하며, 이를 위해 기존의 반발을 의식해 급진적 복원계획에서 선형을 수정해 점진적 복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현재 황룡사 복원은 초반 단계인 고증 연구와 발굴 탐색, AR복원에 머물러있다. 현재 중문과 남측 회랑을 AR로 복원하였으며 20년대 중반까지 금당과 내부 불상, 9층목탑의 AR복원 계획을 명시했다. 하지만 경주시와 정부는 여전히 황룡사의 실물 복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AR복원으로 잠정 확정된 복원안들에 대해 국민들의 사회적 공감대를 얻으면 실물 복원을 추진하는 것으로 초장기 로드맵을 구상했다.
7. 기타
- 고려시대 저서 보한집에 따르면 황룡사엔 우화문(雨花門)이란 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 미국의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에서는 한국의 불가사의로 나왔지만, 모양새는 복원도와 전혀 닮지 않았다.
- 경주 보문관광단지에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을 본 뜬 9층 건물이 지어졌다. 정확하게는 동국산업그룹 소유의 연수원 기능을 맡은 '중도타워(오른쪽 건물)'라고 한다. 완공된 뒤에는 2015년 10월 18일에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로 기존에 있었던 '경주타워(왼쪽 건물)'와 결혼식을 올렸다.기사
- 단체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지 주차장을 만드는 등 여러가지 보완이 이뤄졌다. 혹은 황룡사 복원공사의 초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못보고 지나치지만, 황룡사 서편에는 작은 절터가 존재한다. 쌍탑가람을 지닌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석탑지에는 인왕상이 조각된 기단부가 남아있다. 절의 이름은 알 수 없다.
8. 같이보기
-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 경주타워
- 김용춘
- 보제사
- 아비지
- 진흥왕
- 황룡사 금당 치미
- 황룡사 금동반가사유상 머리
- 황룡사 금은제 사리항아리
-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불두 파편
- 황룡사 청동거울
- 황룡사 활석 남근석
- 흥왕사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인천광역시 드림파크야생화단지 바로 옆의 황룡사 등[4] 60m 후반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5] 여기에서는 80m로 나온다. #[6]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7] 유현준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거대 건축물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권위와 자본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며, 피라미드에서부터 현대의 부르즈 할리파에 이르기까지 거대 건축물들은 해당 건축물의 "건축주"가 자신의 권력과 자본을 위치에너지로 치환시킨 결정체이다. 삼국시대 말기 정릉사, 미륵사, 제석사, 금강사, 정림사, 백양사 등 거대 사찰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이유는 삼국이 본격적으로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기 서로의 권위와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까닭 또한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황룡사를 거대하게 축조한 시기가 하필 통일 이전 신라의 최전성기였던 진흥왕인 사실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8] 당시에는 동경(東京)으로 개칭[9] 목재건물인 조선왕조의 경복궁도 현재 복원 중이긴 하다.[10] 침략군이 지나가면서 일부러 불을 지른다. 이렇게 하면 영토를 확장했을때 자신들도 사용을 못하고 민심도 안좋아지겠지만 적이 탈환해도 사용을 못 하고 적이 전쟁보다 복구에 힘을 쓴다. 이로써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줄 수 있고 다시 침략하기 쉽다.[11] 예컨대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조차도 지금 온전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경희궁은 거의 해체된 상태다.[12] 오늘날에 와서 중건했다 하더라도 대한불교조계종이 중건할 경우 불국사 또는 통도사의 말사, 또는 다른 종단의 주도 아래 새로 창건하는 수준으로 중건, 중건된 사찰의 기능도 사회복지 및 청년불자 교육 집중 등의 과거 황룡사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하는 사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1세기나 22세기에 와서 중건될 경우, 아무래도 현 황룡사지는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어 황룡사지에 중건하는게 불가능하므로, 아예 경주 시내의 다른 곳으로 가고, 도심 포교 등을 명목으로 현대식 빌딩 등에 입주하는 식으로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현대식 빌딩 등에 입주하는 조건으로 종단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지을 수 있는 상태다.[13] 물론 분황사 발굴조사 결과 과거의 분황사는 지금의 영역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14] 건물의 중심 기둥(심주)을 받치던 돌[15]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함을 포함한 유물군[16] 절의 건물 배치[17] 탑 하나에 금당 하나[18] 외진이 9×4이며 내진이 7×2, 초석은 총 44개[19] 3칸이라는 자료도 있다[20] 2012년 황룡사 복원안에서는 통일신라시기 강당 양옆 단일 건물을 승방으로 보고 있다.[21] 이 복원안이 경주역사문화관에 제시되어 있다.[22] 중금당에 놓인 장육삼존불상은 건물의 가운데에 놓였으므로 장육삼존불상 위로는 보가 지나지 않고, 그 옆 협시불 위로 보가 지나갔을 것이다. 이때 장육삼존불상의 높이를 이름대로 1장 6척으로 계산하고, 여기에 불좌대석 높이와 광배까지 고려해도 그 높이는 10m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협시불은 장육삼존불상보다는 낮았을 것이므로 보의 높이는 대략 10m 이상이면 문제가 없는데, 황룡사 중금당과 같은 규모의 건축물에선 단층으로도 충분한 높이를 확보할 수 있다.[23] 그러나 초석의 크기 차이를 고려하고 김동현 안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퇴보 위에 기둥을 세우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온칸물림을 하게 되는데 이러면 체감비가 어색한 문제가 발생한다.[24] 황룡사가 지어지던 시대의 일본은 왜였다.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것은 황룡사가 지어지고 수십년 후 다이호 율령 반포 때부터.[25] 건물을 완공.[26] 동위척(東魏尺)[27] 피뢰침처럼 생긴 금속으로 된 장식 부분.[28] 이건 고려척 기준[29] 목탑 항목에 있듯 일본에도 100m가 넘는 목탑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신빙성 논란 때문인지 일단은 빠져있다.[30] 사실 세계까지 갈 것도 없이 당대 고구려의 금강사나 제석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목탑들은 거의 분명하게 황룡사 9층탑보다 컸을 가능성이 높다.[31] 상륜부의 비율이나 기단길이:목탑높이의 비율 등[32] 노오(盧敖)는 진나라 때 박사 벼슬을 지냈던 인물로, 신선을 만나러 북해로 갔다가 스스로 신선이 되었다 전해진다. 김극기는 본인이 노오처럼 신선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고 비유한 것이다.[33] 수해(竪亥)는 하나라 우왕을 섬긴 신하로, 지리를 조사해 오라는 우왕의 명에 따라 오른손에 산가지를 한 움큼 들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5억 10만 9,800보를 달렸다고 전해진다.[34] 성사(星槎)는 국외로 항해하는 사신이 타는 선박을 뜻하며, 한나라의 장건이 뗏목을 타고 바다를 끝없이 항해한 끝에 천상의 은하에 이르러 견우와 직녀를 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를 강조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35] 일제강점기 때 활동했던 건축학자로, 당시 조선의 건축물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연구했다. 일제강점기의 손꼽히는 한국 건축 전문가였다. 경주 시가지에 대한 연구 등으로 이름이 높지만, 황룡사 터를 1탑 1금당식으로 잘못 추측한 것으로 한국 학자들에게 꽤 비판받기도 했다. 본인도 자신의 책들에서 과오였다고 인정. 한국 건축에 대한 강한 옹호를 보여주는 학자이지만, 그 시기의 학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문장 사이 사이로 보이는 한국 민족에 대한 편견이 조금 엿보인다. 저서 <韓の建築文化> 등은 번역되어 국내에도 출판. 대단히 오래 살았다. (1899-2002)[36] 2003년에 작고하였으며 2006년에 그간 연구를 모아 <황룡사 9층탑>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 나온 자료들은 대부분 그의 책에서 나온 것들.[37] 탑 전체를 큰 기둥들이 관통하여 지탱[38] 서까래 밑에 아래로 향하는 보를 추가로 사용하는 구조.[39] 통나무집처럼 목재를 쌓아 만드는 방법[40] 다만 크고 웅장하게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황룡사는 신라 왕궁을 짓기 위해 만들어지던 건물을 절로 바꾼 것이라 크기 또한 왕궁에 버금갔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41] 다만 황룡사 9층 목탑건설에 정말로 백제계 장인이 참여했는지에 관련해서도 의문점이 많은편이다. 자세한건 아비지 문서 참조[42] 고려사 최응 열전에 따르면 제1수도 개경엔 7층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