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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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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을 주도한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에 대한 내용은 마르틴 루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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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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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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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랜들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시어도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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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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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알프레트 프리트
<rowcolor=#cd9f51> 1911 1912 1913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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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아스 아서르 엘리후 루트 앙리 라퐁텐 국제적십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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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얄마르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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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쇼프 난센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G. 도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rowcolor=#cd9f51> 1926 192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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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프랭크 켈로그
<rowcolor=#cd9f51> 1930 193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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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 셰데르블롬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버틀러 노먼 에인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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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카를로스 라마스 로버트 세실
<rowcolor=#cd9f51> 1938 1944 194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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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국제적십자위원회 코델 헐 에밀리 그린 볼치
<rowcolor=#cd9f51> 1946 1947 194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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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모트 퀘이커 봉사협회 존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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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UN기.svg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마셜 유엔난민기구
<rowcolor=#cd9f51> 1957 1958 1959 1960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레스터 피어슨 도미니크 피르 필립 노엘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rowcolor=#cd9f51> 1961 1962 1963 1964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위원회 마틴 루터 킹
<rowcolor=#cd9f51> 1965 1968 1969 1970
파일:유니세프 로고.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 파일:미국 국기.svg
유니세프 르네 카생 국제노동기구 노먼 볼로그
<rowcolor=#cd9f51> 1971 1973 1974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베트남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사토 에이사쿠
<rowcolor=#cd9f51> 1974 1975 1976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숀 맥브라이드 안드레이 사하로프 베티 윌리엄스 메어리드 코리건
<rowcolor=#cd9f51> 1977 1978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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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rowcolor=#cd9f51> 1980 1981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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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포 에스키벨 유엔난민기구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rowcolor=#cd9f51> 1983 1984 1985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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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엘리 비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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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티베트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오스카르 아리아스 유엔 평화유지군 달라이 라마 14세 미하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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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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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금지국제운동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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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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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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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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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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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980년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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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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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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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거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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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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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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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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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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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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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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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지도자들 & 혁명가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80413_400.jpg
시어도어 루스벨트 블라디미르 레닌 마거릿 생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엘리너 루스벨트
아돌프 히틀러 윈스턴 처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다비드 벤구리온 마오쩌둥
마틴 루터 킹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 미하일 고르바초프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 요한 바오로 2세 호찌민 탱크맨
같이 보기: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영웅 & 아이콘 부문 }}}}}}}}}

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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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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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 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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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AOL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널드 레이건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6위 7위 8위 9위 10위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 오프라 윈프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빌리 그레이엄 토머스 제퍼슨 월트 디즈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존 F. 케네디 밥 호프 빌 게이츠 엘리너 루스벨트 랜스 암스트롱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무하마드 알리 로자 파크스 라이트 형제 헨리 포드 닐 암스트롱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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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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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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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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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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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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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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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2c26><colcolor=#fff>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파일:EB5wahEXUAM-40m.jfif.jpg
본명 마이클 킹 주니어[1]
Michael King Jr.
출생 1929년 1월 15일
조지아 주 애틀랜타
사망 1968년 4월 4일 (향년 39세)
테네시 주 멤피스 로레인모텔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 (졸업, ~1944)
모어하우스 칼리지 (사회학 / B.A., 1944~48)
크로저 신학대학교 (신학 / B.Div., 1948~51)
보스턴 대학교 (신학 / Ph.D., 1954~55)
직업 목사, 신학자, 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신체 169cm, 70kg, O형(Rh-)
부모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 (1898~1984)[2]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 (1904~1974)
형제자매 누나 크리스틴 킹 패리스 (1927~2023)
남동생 알프레드 다니엘 윌리엄스 킹 (1930~1969)
배우자 코레타 스콧 킹 (1927~2006 / 1953년 결혼)
자녀 장녀 욜란다 킹 (1955~2007)
장남 마틴 루터 킹 3세 (1957~)
차남 덱스터 킹 (1961~2024)
차녀 버니스 킹 (1963~)
종교 개신교 (침례회)
소속교단 미국 침례회
진보적전국침례교총회(#)[3]
축일 4월 4일(미국 성공회) 4월 5일(대한성공회)
서명 파일:마틴 루터 킹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청년기2.3. 1955년: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 투쟁2.4. 첫 번째 암살 시도2.5. 거듭되는 저항과 투옥, 케네디와의 만남2.6.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2.7. 1964년 민권법 통과 이후: 투쟁의 범위가 확대되다2.8. 베트남 전쟁 반대와 여론 악화2.9. 1968년 혁명2.10. 암살: 검은 새가 날아오르다2.11. 사후: 투쟁은 계속된다2.12. 무덤과 추모 조형물
3. 정치적 사상
3.1. 비폭력주의3.2. 기독교 신앙3.3. 사회주의3.4. 중앙 정치에 대한 견해3.5. 의외의 정치적 견해
4. 평가5. 논란
5.1. 여성 관계5.2. 표절 논란5.3. 공산주의자?
6. 여담7. 창작물에서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명의 자녀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미국목사, 흑인 민권운동가. 미국에서는 약자인 MLK로도 자주 불린다.

오늘날 세대, 성별, 인종, 지역,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든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4]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연설문 표절 의혹, 혼외정사 스캔들 등 사생활의 측면에서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 흑인과 백인을 통합하고 비폭력의 노선을 강조한 킹의 유산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드물다.[5] 2005년 디스커버리 채널의 "가장 존경하는 미국인"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을 그 증거로 들 수 있다.[6]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Martin Luther King Jr. Day)라는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또한 미국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축일은 4월 4일.

2. 생애

2.1. 성장기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7]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마틴이 아니라 마이클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Martin Luther King Sr.)는 아들 못지 않게 큰 업적을 남긴 목회자이자 민권운동가로, 어린 마틴 루터 킹에게 여러 영향을 주었다.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남북전쟁 직후 해방된 노예인 할아버지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두고 어렵게 자랐지만 훌륭한 연설 실력으로 불과 30대의 나이에 애틀랜타 에반에셀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킹의 아버지는 비록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당대 흑인 중에는 꽤나 유복하게 살았지만, 자신이 본래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흑인들을 돕고자 했다. 그는 독일 유학 중 마르틴 루터의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름을 "마이클 킹"에서 "마틴 루터 킹"으로 바꿨는데 어린 킹도 아버지를 따라 이름을 바꾸었다.
파일:마틴 루터 킹 가족사진.jpg
마틴 루터 킹의 가족사진[8]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아들에게 두가지를 가르쳤는데 첫번째는 기독교 신앙이었고 두번째는 흑인의 인권이었다. 마틴 루터 킹은 5살 때부터 성경 구절을 외우고 찬송가를 불렀는데, 찬송가 부르는걸 좋아해서 커서는 주니어 성가대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어려운 성경 구절을 외우게 한 아버지의 교육은 킹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킹은 성경을 통해 영어를 빨리 깨치고 영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사전을 통해 자신의 문장력을 갈고 닦았다. 웅변가 중의 웅변가로 유명한 킹의 명성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조기 성경 교육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흑인 민권에 대해서, 킹은 어릴 적 아버지가 NAACP(전미 유색인종 인권 향상 협회)의 간부와 대화하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피부로 인종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6살 때 옆 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다가 백인 부모가 넌 흑인이니까 백인이랑 놀지마!라고 하며 내쫓은 것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인종차별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날 밤 킹은 부모에게 미국 흑인의 역사와 노예제, 인종차별, 남부의 인종주의적 잔재 등에 대해 배웠고, 그의 말에 따르면 "백인을 평생 미워하기로 작심했다". 킹 시니어는 아들의 분노를 바로잡으며 기독교의 이웃 사랑에 대해 가르쳤다. 하지만 킹의 분노와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킹은 커가면서 때 여러가지 인종 차별을 경험했는데, 한번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하자 백인 주인이 "여기는 흑인들에게 장사 안하니까 정 사고 싶으면 뒷문으로 기어 들어와라"라고 내쫓은 적이 있었다. 정작 백인 아이들은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함께 시내에 갔을 때는 구두 가게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백인 경찰이 시비를 걸면서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도 보았다. 킹의 아버지는 그럴때마다 당당하게 백인에 맞서야한다며 물러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을 차별한 백인에게 사과를 요구했는데, 이는 킹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에 대해 후일 킹은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내 투쟁에 있어 그를 모범으로 삼고자 했다"라고 술회했다.

13살에 그는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저명한 흑인 민권운동가 부커 T. 워싱턴[9]의 이름을 딴 사립 학교로, 애틀랜타에서 유일하게 흑인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학교였다. 킹은 고등학교에서 미국사영문학 과목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웅변으로 여러차례 상을 받았다. 그는 1944년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인종평등에 대한 주제로 일장연설을 해 웅변대회에서 우승했다. 웅변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위협을 받았다. 킹은 분노해 자리를 비키지 않겠다고 했지만 동행하던 그의 선생님은 "악법도 법이니 체포되기 전에 자리를 비키자"라고 설득했다. 킹은 마지못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이날의 기억을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화나는 날"이라고 회상했다.

2.2. 청년기

1944년, 킹은 15살의 나이에 모어하우스 칼리지[10]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킹의 아버지도 다닌 학교로 명망이 높은 신학 학교였다. 그는 학교에 진학하기 전 용돈을 벌기 위해 코네티컷에 있는 담배 농장에서 잠깐 일을 했는데, 이는 킹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을 주었다. 그의 고향인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이 대놓고 2등 시민 취급을 받았지만, 코네티컷과 같은 북부 주에서는 인종차별이 이미 사라져 백인과 흑인이 동등하게 대우 받았던 것. 경찰이 흑인을 아무 이유 없이 체포하거나, 흑인이 백인에게 줄을 양보하는 일도 없었고, 부유한 흑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는걸 백인 노동자들이 부럽게 쳐다보기도 했다. 특히 흑인과 백인이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남부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각자 다른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이다.[11] 또 담배 농장의 백인 노동자들이나 감독은 킹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고 일한만큼 봉급을 주었는데, 킹은 이러한 북부의 "평등"을 믿을 수 없어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사라졌다. 코네티컷에서 애틀랜타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킹은 북부 구간에서는 백인과 같은 좌석에 앉을 수 있었지만 애틀랜타 행 남부 열차로 갈아타자마자 역무원에 의해 흑인 전용칸으로 내몰렸다. 그럼에도 코네티컷에서의 짧은 경험은 킹의 사고를 크게 뒤흔들었다. 이전까지 킹은 기독교의 이웃사랑 사상에 의구심을 품고 백인에게 복수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인과 흑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북부의 모습을 보고 남부에서도 인종 화합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18세에 킹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진학했다. 신학교에서 킹은 학생회장을 맡았으며 백인 여학생과 연애를 하기도 했다. 대학교 3학년 때 킹은 백인 여자친구와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가 백인 여학생과 결혼하면 남부에서 목회자 생활을 하기 힘들만큼 반발이 일어날 것이기에 결혼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1950년대의 남부에서는 여전히 백인과 흑인의 결혼이 불법인 주가 많았다.[12] 사회적인 시선은 더욱 나빴다. 킹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지만, 무척이나 슬퍼했으며 극복하기 어려워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때의 아픈 경험이 킹이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외도 생활을 한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1951년, 크로저 신학교를 졸업한 후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신학 박사 학위를 밟았다. 이때 킹의 연구에는 일부 논란이 있다. 킹의 1955년 박사학위 논문이 표절이라는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후대에 논문을 검수한 일부 학자들은 킹의 박사학위 졸업 논문이 제대로 된 레퍼 없이 무단으로 여러 구절을 배꼈음을 확인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후술.

1954년, 킹은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하는 기쁨도 있었다. 코레타 스콧과 마틴 루터 킹은 슬하에 4명의 자식을 두었다. 1년 후에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비뉴 침례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웅변술로 지역의 흑인들에게 명성을 얻었다. 이것이 킹의 인생에 엄청난 파고를 몰고 올줄은 킹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2.3. 1955년: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 투쟁

1955년 12월 1일, 시내 백화점에서 제봉사로 일하는 로자 파크스라는 여성은 퇴근길에 버스 앞좌석에 앉았다. 당시 앨라배마 주 법에 따르면 흑인은 앞좌석에 앉을 수 없었으며, 뒷좌석에 앉더라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의무가 있었다. 버스 운전사는 파크스에게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기라 했지만 파크스는 이를 거부했다. 얼마 후 경찰이 출동해 파크스를 "버스 앞좌석에 앉은 죄"로 체포했다. 이 소식은 앨라배마 주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겨우 버스 앞좌석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일하는 시민을 체포한 것에 흑인 사회는 술렁였고, 몽고메리 지역을 중심으로 흑인 인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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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과 로자 파크스
마틴 루터 킹은 몽고메리에서 영향력이 있던 흑인 목사로 이 시위를 이끌 책임을 지게 되었다. 킹은 목사였지만 동시에 NAACP 조직과 연을 맺었고, 로자 파크스 역시 이 조직의 소속으로 흑인 인권 향상에 관심을 가지던 인물이었다. 킹은 총대를 매고 앨라배마 주 정부와 버스회사에 문제 시정을 요구하는 대표로 나섰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을 설교하며 절대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대신 버스 탑승을 거부하며 버스 회사의 무릎을 꿇리자고 설득했다. 이 설교는 불과 20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는 흑인들을 열광시켰으며 며칠 후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킹을 지목해 "약점을 찾으라"라고 지시할 정도로 파장을 일으켰다. 비록 모든 흑인들이 그의 비폭력 사상에 동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버스 탑승을 거부하자는 킹의 대의에 동참하지 않는 흑인은 보기 드물었다. 381일이나 지속된 흑인들의 "버스 탑승 거부 시위"는 지역 버스회사에 엄청난 재정적 타격을 입혔으며, 결국 앨라배마 대법원은 버스 내 인종 분리를 철폐하며 백기를 들었다.

물론 이 비폭력 시위가 언제나 "비폭력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인들이 폭력을 동원해 킹을 주저앉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킹의 집에 파이프 폭탄이 배달되는가 하면[13], 40km 속도 단속 구간에서 차를 45km로 몰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앨라배마 주 정부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킹의 명성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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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LC 지도부와 함께 행진하고 있는 킹 목사
킹의 명성이 한 없이 높아지자 킹은 남부에서 만연한 백인 우월주의를 무너트리고 흑인과 백인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고자 했다. 비록 전미유색인종 인권향상 협회(NAACP)가 있었지만 이 조직은 너무 광범위했기 때문에 남부 목회자들이 연합하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했다. 이에 킹은 1957년 자신의 동료인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 목사, 조셉 로리(Joseph Lowery) 목사와 함께 남부 기독교 목회자 협회(SCLC)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킹이 암살될 때까지 남부에서 인종평등을 추구하는 중심 축이 되었다.

또 킹은 다른 조직과도 평화로운 공존을 물색했는데, 제임스 파머(James Palmer) 의장이 이끄는 인종평등 협의회(CORE)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CORE은 버스 내 인종차별을 다른 주에서도 철폐하기 위한 "자유의 기수" 혹은 "프리덤 라이더"(Freedom Rider) 시위를 개최해 킹의 지지를 받았고, 이는 앨라배마 뿐 아니라 많은 남부 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국적으로 버스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퇴치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정치인들은 킹을 의식하고 있었다. 1955년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로 학교 내 분리가 금지된 것까지 더해 195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의 제1관심사는 남부 인종차별의 종식이 되었다. 1956년, J. 윌리엄 풀브라이트[14],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의 주도로 남부를 지역구로 둔 상원의원은 인종 분리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남부 서한"에 집단 서명하기까지 했다.[15]

1957년 의회는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흑인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을 발의했다. 1957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57)은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요구하던 흑인 폭행 방지, 투표권 보장, 공정한 주거권 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남부의 여러 백인 상원의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킹의 고향인 조지아 주의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주니어는 이 법의 가장 강한 반대자였으며, 그의 리더십에 따르던 남부 상원의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법을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인 린든 B. 존슨 상원의원은 원래 법안의 의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조항을 포함시켜 남부 상원의원들이 만족할만한 수정안을 재발의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킹은 1957년 민권법이 무력화되는 모습을 보며 주류 정치권에 크게 실망하였다.

2.4. 첫 번째 암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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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받고 있는 킹(왼쪽)과 이졸라 커리(오른쪽)
1958년 9월 20일 할렘에 있는 블룸스타인 백화점에서 킹은 자신의 책인 자유를 향한 대행진(Stride Toward Freedom)을 홍보하기 위한 책 사인회를 하고 있었다. 1916년생인 이졸라 커리(Izola Ware Curry)라는 흑인 여성이 서명 중인 마틴 루터 킹에게 다가가 "당신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입니까?"라고 물었고 킹은 흔쾌히 "그렇습니다."라고 답변했었고 흑인 여성이 자신을 암살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킹은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그 어떤 방어적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고 자리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졸라 커리는 킹에게 "5년 동안 널 찾고 있었다."라고 말한 후 종이칼[16][17]로 그의 가슴을 찔렀으나, 간신히 칼날이 대동맥을 비껴갔고 몇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킹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18]

이졸라 커리는 범행 동기에 대해 마틴 루터 킹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해서 그를 찔렀다고 진술했으나 이졸라 커리는 편집증정신분열증을 앓고 IQ가 70밖에 안 되는 등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였고 경찰은 킹이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근거없는 망상임이 밝혀졌다. 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공격한 이 여성을 용서했고 "그녀가 자유롭고 건설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위해 사려깊은 사람들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희망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 사회의 모든 흑인들이 그러하듯. 암살 미수범이였던 이졸라 커리 역시 상당히 불우한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조지아 주의 아드리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7학년때 중퇴하고 21살의 나이에 제임스 커리라는 남성과 결혼했으나 6개월만에 이혼을 했고, 가정부로 취업을 하기위해 위해 뉴욕으로 이주해왔으나 당시 흑인이라는 이유로 취업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킹의 용서에도 이졸라 커리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범행 이후 정신병력이 있는 범죄자를 형을 복역하는 동안 수감하고 치료하는 Matteawan 주립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가 뉴욕 퀸스 자메이카에 있는 요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자신이 죽이려던 킹 목사가 죽은지 약 반세기가 지난 2015년 3월 7일,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5. 거듭되는 저항과 투옥, 케네디와의 만남

1958년의 암살 시도에 더해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위협이 거세졌지만 킹은 굴하지 않았고, SCLC 조직을 키우는데 1950년대 후반의 대부분을 바쳤다. 1959년 그는 5년간의 앨라배마 활동을 정리하고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재직했던 애틀랜타 에버니저 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하게 된다. 당시 조지아 주지사인 어니스트 밴디버(Ernest Vandiver)는 킹의 조지아 이사에 심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는 "킹이 있는 곳마다 폭력과 폭동, 범죄가 일어난다"며 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고, 킹을 감시하려는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시도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가 조지아 주로 이사한지 얼마 안가, 킹은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소한 혐의로 또다시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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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농성을 하다가 체포되는 마틴 루터 킹
1960년, 흑인 투쟁은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싯인 시위(Sit-in) 혹은 "연좌농성"이라고 하는데, CORE의 대학생 조직이 주도했고 킹도 동참했다. 이 시위의 방법은 간단했다. 흑인에게 주문 받기를 거부하는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받을 때까지 테이블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백인 식당 주인들은 격분해 흑인을 폭행하고 경찰은 시위자들을 체포했는데, 간단한 시위 방법과 그에 대비해 매우 격렬한 인종주의자들의 반응 때문에 대학생들에게 특히 인기있는 투쟁 방식이었다. 킹은 1960년 10월 연좌농성에 지지를 보내고자 애틀랜타에서 가장 큰 백화점의 푸드코너에서 직접 연좌농성을 벌였고, 경찰은 킹을 포함한 모두를 체포했다. 조지아 주 경찰은 킹을 제외한 시위자들을 조기 석방했지만, 킹만큼은 4개월의 강제노역형을 받았는데 이는 명백히 킹을 겨냥한 조치였다. 사실상 다가오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지 말라고 판결을 내린 셈이었다.

킹은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와 닉슨이 모두 인종문제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케네디 진영에서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존 F. 케네디는 인종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동생이자 선거 전략가인 로버트 F. 케네디는 흑인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케네디의 매부이자 후일 부통령 후보로도 나서는 사전트 슈라이버도 흑인의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 둘은 존 F. 케네디에게 개인적으로 요청해 킹의 석방을 요구하자고 나섰고, 존 F. 케네디는 조지아 주지사에게 직통 전화를 걸어 킹을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또 사전트 슈라이버와 로버트 케네디는 킹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유감을 표했다. 킹은 케네디의 압력으로 불과 이틀만에 석방되었다. 킹은 케네디의 호의에 일부 의심을 품었지만 일단 감사를 표했고, 아버지와 함께 공개적으로 케네디를 지지하였다. 킹의 영향으로 흑인들은 압도적으로 케네디에 투표했으며[19] 케네디는 불과 0.1% 차이로 닉슨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사실상 킹이 대선 판세에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1960년 대선으로 성립된 케네디 행정부에서 로버트 F.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발탁되는데, 그는 존 에드거 후버의 인종주의적 행보에 제동을 걸고 민권을 위한 여러 조치를 세워 킹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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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케네디, 린든 존슨과 함께 선 마틴 루터 킹
반면 리처드 닉슨은 본래 킹과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고, 킹 본인부터 공화당 성향에 가까웠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20] 닉슨은 백인들이 자신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고 생각해 도움을 주기를 거절했다.[21] 킹은 닉슨과 공화당에게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고 1960년대 이후로 계속 민주당을 지지하게 된다.

1960년 대선에서 흑인들이 케네디의 당선에 공헌했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자, 주류 정치권에서 킹에 대해 호의적인 의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는 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록펠러는 부유한 공화당원이었음에도 부자들이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야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킹의 흑인 민권을 위한 투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그에게 보석금을 제공했다. 1961년 킹이 올버니에서의 투쟁으로 체포되었을 때, 록펠러는 킹의 개인 비서를 데리고 맨해튼 록펠러 센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자신의 리무진 트렁크를 열고 달러화가 가득 든 돈가방을 보여주며 킹의 석방 보석금으로 쓰고 남은 돈은 남부에서 흑인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양껏 써달라고 부탁했다. 킹은 록펠러의 조치에 감사를 표하고 "록펠러 같은 주지사가 남부에 4명만 있었어도 진작에 흑인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저명한 복음주의 목사 빌리 그레이엄도 보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킹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가 구속되었을 때마다 남부 주지사와 법집행자들을 설득해 킹이 석방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노동계에서는 월터 루터(Walter Reuther) UAW 조합장이 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다. 비록 조지아 주가 식당에서의 인종 차별을 철폐하긴 했지만, 이를 점심시간대에 한정하는 합의안을 내면서 흑인 사회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SCLC 내에서도 킹의 투쟁 방법이 실제로 흑인 민권에 도움이 되냐는 비판론이 청년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일부 흑인들은 당시 한창 떠오르던 말콤 엑스의 과격 투쟁론에 동감하기도 했다. 1964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흑인의 71%는 킹의 투쟁론에 동감했지만, 21%는 그의 투쟁론이 너무 물렀으며 폭력혁명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22] 이들은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을 외치던 말콤 엑스의 과격 사상에 감화되었으며 백인과의 화해를 부르짖는 킹을 인종 배신자로 공격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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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23]
다른 한편으로 킹의 명성이 높아지며 주류 정치권에서 킹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비례해 커졌다. 존 F. 케네디는 킹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의 조언에 따라 킹을 자주 만났지만 한편으로는 로버트 케네디에게 "킹을 만나는건 마치 카를 마르크스가 일주일에 한번씩 백악관에 찾아오는 기분"이라고 했다. 린든 B. 존슨 부통령은 킹을 과격 공산주의자에 위선적인 목사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로버트 케네디마저 킹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는데, 킹의 부인이 사회주의 관련 단체와 연관되어있고 킹이 민주적 사회주의자라는 점을 들어 킹이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1963년 11월부터 케네디 형제의 동의를 얻어 킹을 도감청하기 시작했다.[24]

이러한 킹의 어려움은 1963년 행진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다.

2.6.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2년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의 당선자는 극렬 인종차별주의자 조지 월리스였다. 그는 무려 9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당연히 흑인들이 투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정도 수치를 얻은 것이었다. 그는 취임식에서 "나는 제퍼슨 데이비스가 선 이곳에서 나의 국민들께 자랑스레 맹세합니다. 남부연합의 요람이자 위대한 앵글로색슨 남부의 심장인 이곳 앨라배마에서 우리는 조상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북소리를 울려야합니다. (...) 그리고 저는 말합니다, 인종분리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Segregation now, segregation tomorrow, segregation forever)."라고 선언하며 대놓고 인종주의를 정당화했다. 이것은 그나마 잠잠해졌던 민권투쟁이 다시 격화될것임을 예고하였다.

월리스가 취임한지 3달도 지나지 않아, SCLC와 킹은 앨라배마에서 월리스 주지사의 인종주의에 반대하기 위한 행진을 기획했다. 앨라배마 주의 주도인 버밍햄에서 행진이 이루어졌고 청소년과 어린이들도 대거 참석했다. 당시 버밍햄의 치안담당자는 유진 "불" 코너(Eugene "Bull" Connor)였는데, 다혈질적이고 고압적인 성향으로 유명했고 당연히 인종주의자였다. 그는 어린이, 청소년도 가리지 않고 모두 무력 진압하라고 지시했고 버밍햄 경찰은 사냥개와 물대포를 동원해 어린이 시위자를 폭행하며 체포했다. 이는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월리스 주지사와 불 코너 서장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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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자를 물대포로 진압하고 있는 버밍햄 경찰
킹과 SCLC도 위험한 시위에 어린이를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불 코너가 옷을 벗고 전국적인 반발에 직면한 월리스 주지사가 일부 인종차별 조치를 철회하는 등 효과는 확실했다. 자신감을 얻은 킹은 1963년 8월 워싱턴 D.C.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행진"을 기획했다.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행진은 킹이 주도했지만 "Big Six"라 불리는 다른 흑인 민권운동 리더들도 참여했다. 상술한 CORE의 제임스 파머 의장, NAACP의 로이 윌킨스(Roy Wilkins) 의장, 전국 도시민 협회(NUL)의 휘트니 영(Whitney Young) 회장, 침대차 짐꾼 형제단(BSCP)의 필립 랜돌프(Philip Randolph) 단장,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SNCC)의 존 루이스 회장이 그들이었다. 미국 사회당베이어드 러스틴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양심적인 백인들도 행진 주최를 도왔다. 반면 말콤 엑스는 행진 참여를 거부했다. 그는 킹의 행진을 "워싱턴의 희극"이라고 비난했으며, 그가 속해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회원의 참석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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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행진을 기획한 "빅 식스"[25]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킹의 행진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는 킹을 지지했지만, 한편으로 통제되지 않은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고, 또 흑인들이 워싱턴 기념탑이나 링컨 기념관에 노상방뇨를 하지 않을까 걱정해 워싱턴 D.C. 경관들에게 임시 화장실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은 상대적으로 킹과 행진에 더 우호적이었다.

행진 참석자들은 고용차별 근절, 최저임금 지급, 공립학교 차별 철폐, 인종차별적 경찰 채용 금지 등의 목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핵심은 킹의 짧은 연설이었다. 킹은 17분 분량의 연설을 했는데, 처음에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킹이 대본을 벗어나 즉흥연설을 한 순간부터 환호가 터져나왔다. 훗날 모든 역사책에 실려 역사상 최고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그 부분으로, 흔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로 불린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의 벗들이여, - 어제와 오늘 우리가 고난과 마주할 지라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내린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솟아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제가 남부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는 신념입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개척하여 희망의 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나라의 이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을 형제애로 가득 찬 심포니(교향곡)로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념이 있기에,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며,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으며 우리가 언젠가 자유로워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모든 마을, 모든 부락으로부터, 모든 주와 도시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우리는 더 빨리 그 날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태인이건 비유태인이건,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그 날 말입니다.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우려와 달리 시위는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으며, 킹의 명성은 이보다 더 높아질 수 없었다. 킹의 투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3년 8월 행진 이후에도 메인, 뉴욕, 앨라배마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흑인들의 열악한 실태를 파악하고 흑인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행진을 기획한 것이다. 킹은 이 과정에서 몇차례나 체포되며 구금되었지만, 주류 정치권은 민권을 통과시켜야한다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그 다음 해 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7. 1964년 민권법 통과 이후: 투쟁의 범위가 확대되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많은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킹도 케네디의 죽음에 슬퍼했지만, 이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다. 케네디가 추진하던 민권법이 존슨에게 넘어온 것이었다. 린든 존슨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인종주의자였고 킹을 극도로 혐오하였지만, 철두철미한 전략가였고 흑인이 얼마나 민주당에게 이득이 되는 유권자 집단인지는 1960년 대선을 통해 똑똑히 알게 된 상태였다. 그는 "깜둥이들이 앞으로 200년간 민주당을 찍게 만들것"이라며 민권 법안 통과를 밀어 붙였다.[26] 존슨은 케네디에 비해 훨씬 강한 인물이었고 특히 오랜 기간의 원내 활동,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의 사적인 친분을 통해 국회의원들의 약점과 스캔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권법 통과를 주저하는 상원의원들을 협박했고, 그렇게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이 압도적인 격차로 통과되었다.[27] 킹의 투쟁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해의 대선에서 "인종 평등"을 업적으로 내세운 존슨은 61%를 득표해 인종 문제에 관해 남부 주에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배리 골드워터 후보[28]를 압도적으로 꺾고 당선되었다. 이로서 민심의 향방은 명확해졌다. 이후 존슨은 1965년 투표권법, 1968년 공정주택법 등을 통과시키며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찬란한 인종평등 정책을 추진시켰다. 그럼에도 마틴 루터 킹은 여기에서 그만둘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었다.

민권법의 통과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남부에서나 북부에서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동안 킹은 인종분리를 철폐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고, 부차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이나 투표권 등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실상은 인종통합만이 해결책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주거 문제였다. 북부의 대도시에서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철폐되었음에도 공인중개사들은 무의식적으로 흑인과 백인에게 다른 주택을 제공했고, 경제적인 사정이 나쁜 흑인들은 다 쓰러져가는 빈민굴에서밖에 살 수 없었다. 뉴욕, 시카고, 뉴어크, 볼티모어와 같은 북부 대도시에서 흑인들만이 몰려사는 "흑인 게토"가 세워졌고 이들은 마약, 매춘, 범죄의 굴레에 빠졌다. 더 심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킹은 교육의 평등을 부르짖었지만, 정작 북부에서도 흑인들이 같은 지역에만 몰려살다보니 흑인 밀집지역의 공립학교(게토)와 백인 밀집지역(교외)의 사립학교로 학군이 나뉘어져 흑백 분리가 전혀 시정되지 못한 모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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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의 마틴 루터 킹
킹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1차원적인 분리 철폐 운동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구조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말콤 엑스와도 손을 잡고자 했다.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말콤 엑스를 향해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의견을 냈고, 말콤 엑스도 적대적인 감정을 접고 킹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비록 1965년 말콤 엑스가 암살당하며 둘의 해빙기는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킹은 말콤 엑스의 사상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아 흑인들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들을 수선해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흑인의 혁명은 흑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 그 이상입니다. 오늘날의 미국은 인종차별, 빈곤, 군국주의, 물질주의 등 서로 연관된 모든 체제의 결함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 구조에 깊이 뿌리내린 폐혜를 폭로합시다. 이것은 표현적인 결함이 아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결함을 드러내며 사회 자체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우리가 제기해야할 실질적인 문젯거리임을 시사합니다.
마틴 루터 킹
1966년 시카고 개방형 주택 운동은 이러한 킹의 사상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운동이다. 킹은 제한적으로 북부 지역에서 민권 운동을 전개한 적은 있지만, 주 활동은 남부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1966년 킹은 시카고의 빈민가로 직접 이주해 그의 동료인 랠프 애버내시 목사와 함께 도시 게토에 거주하는 흑인들이 공정한 주거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투쟁하였다. 그는 공인중개사들의 인종차별 중단을 요구하고, 흑인들이 좋은 주택에 거주할 수 있도록 경제적 평등이 보장되어야한다는 주제의 행진을 여러차례 기획했다. 이를 위해 북부의 민권조직인 지역사회 조직 조정 협의회(CCCO)와 협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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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행진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1968년, 킹은 시카고에서의 경험을 확대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는 미국 흑인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베트남 전쟁 지출 확대를 중단하고 이를 흑인 빈곤을 위한 복지 자금으로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흑인을 위한 기본소득을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보편적 기본소득(UBI)를 향한 논의 중 하나로 여겨진다.[29] 그의 사상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를수록 점차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그는 "자본주의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그 역할을 다했다"라고 주장했으며, 미국 사회의 체계적인 결함을 "인종주의, 빈곤함, 군국주의, 물질주의"로 규정하였다. 또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은 후 그의 반자본주의적 주장에는 동감을 표하기도 했다.[30]

킹의 사회적 활동은 옹호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킹을 시셈하던 일부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킹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욕심을 가지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냐"며 비난했고[31], 백인들의 반응은 말할 것이 없었다. 많은 백인들은 킹의 인종분리 반대를 지지했지만, 그것을 넘어서 구조적 빈곤 등을 지적하는 행보가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되어있거나 정치적 야심이 담긴 행보라고 확신했다. 1966년 시카고 투쟁은 킹에 대한 백인들의 적대감을 보여주었다. 킹 목사와 애버내시 목사는 배울만큼 배운 시카고의 중산층들이 정작 남부 백인우월주의자들보다도 킹에게 더 적대적이라는 사실에 놀랐는데, 누가 창가에서 벽돌을 던져 킹이 다치기도 했다. 킹은 행진에 반발하는 백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에게 경호를 요청해야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도 킹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해 존 에드거 후버에게 강력한 감시를 지시했다.[32]

2.8. 베트남 전쟁 반대와 여론 악화

그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에서 극에 달했다. 킹은 1963년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베트남 파병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대의에는 동의할 수 있었고[33]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감히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낼 수 없었다. 1966년부터 전황이 악화되자, 킹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감은 더 심화되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흑인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막대한 돈이 무의미하게 군비로 돌아간다는 점도 킹이 베트남 전쟁에 격하게 반대하게 만들었다.

1967년, 킹은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킹은 베트남 전쟁을 린든 B. 존슨과 미군의 "군국주의적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식민지를 잃기 싫어하는 구 제국주의 국가가 제3세계 국가를 수탈하려는 또다른 시도라고 칭했다. 그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무고한 어린이 수백만을 살해했고 북베트남의 토지개혁을 방해함으로서 베트남을 수탈하고자 하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만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남베트남의 인권 상황에도 관심이 많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비록 킹의 종교인 기독교를 밀어주긴 했지만[34], 킹은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불교를 박해하는 남베트남 정부에 반감을 가졌으며, 틱꽝득의 소신공양을 칭찬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틱낫한 스님과 교류하며 남베트남 불교도와 미국의 기독교도가 평화의 연대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고, 틱낫한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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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서 행진하는 마틴 루터 킹
킹의 베트남 전쟁 반대는 "실수"처럼 비추어졌다. 1967년~1968년에는 비록 베트남 전쟁을 지긋지긋해하는 여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잘못이라고 말하는건 다수의 의견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국인 40%는 존슨의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으며, 베트남에서 미군이 즉시 철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비중은 겨우 20%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지지부진한건 인정했지만, 차마 미국이 부당하게 북베트남을 공격했다거나 전쟁범죄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못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의 월남전 반대가 "그의 사회적 운동의 진정성을 약화시켰고, 그의 대의, 그의 나라, 그의 국민을 향한 킹의 설득력을 반감시켰다"라고 지적했다. 킹을 지지했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킹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공산주의의 편에 섰다며 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많은 노동조합, 언론사, 주류 정치가들이 킹과 거리를 멀리했다.

여론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킹에 대한 미국인들의 호감도는 45%, 비호감도는 46%였다. 하지만 1968년 해리스의 여론조사에서 킹에 대한 지지도는 20%대로 폭락한 반면, 그를 지지하지 않거나 혐오한다는 의견은 무려 75%에 달했다.

당시 제기된 가장 많은 비판은 세가지였는데, 첫번째는 그가 북베트남 정부와 공산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를 격려하며 폭동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세번째는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은 아무 연관이 없는데 자신의 명성을 악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일부러 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킹은 이에 대해 "나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을 억지로 연대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민권운동의 열기가 평화운동에 스며들어 더 큰 힘을 실어주길 바랍니다. 평등이라는 도덕적 명령과 세계 형제애의 도덕적 명령은 같은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참여하는 사람이든 궁극적으로 두 운동이 정의를 위한 선임을 알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2.9. 1968년 혁명

1968년은 킹의 마지막 해이자 미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한해로 지목되는 해이다. 미국 전역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로 뒤덮였고 흑인들은 진정한 경제적 평등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켰다. 킹은 무척이나 난처한 입장에 처했는데, 그는 성난 흑인들을 잠재우고 그의 비폭력 투쟁을 외칠 의무감을 떠안았고 또 한편으로는 베트남 평화운동과 민권 운동에 반발하는 대다수의 백인 중산층들에 맞서야했다. 킹을 싫어하는 인종주의자들은 그가 어떻게 비폭력 운동가냐고 반문했다. 킹을 지지하는 대학생과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면서 킹이 "비폭력"을 주창하는건 위선이라고 공격했다. 킹에 대한 여론은 1968년 최악으로 치달았고, 대다수의 백인들은 킹이 1968년의 혁명을 배후에서 지휘한 과격 공산혁명가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심지어 SCLC의 동료 민권운동가들조차, "킹의 백인 사이에서의 인식이 너무 나빠져 그를 전면에 내세울 수 없게 되었음"을 결론짓기도 했을 정도였다.

킹이 1968년 혁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은 명확했다. 그는 68혁명의 대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그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폭동을 일으키는 흑인이나 대학생들의 히피 운동에는 결단코 반대했다. 그는 "폭력은 결코 안된다"라며 비폭력적으로만 혁명이 일어나야한다고 강조했다. 마약을 피우고 저항문화에 심취한 대학생들을 향해서는 "현실의 문제에 직면해야한다. 평화만을 외쳐서는 사회가 변하지 않는데 현실을 도피하고 쾌락에 탐닉하고 있다"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미국의 분위기는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킹의 호소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1968년 2월부터 킹의 주요 관심사는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1968년 미국 대선 앞두고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3선을 선언하고, 리처드 닉슨도 재출마를 시사한 상태였다. 한편 킹을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인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는 존슨과 닉슨 모두를 "백인을 배반한 인종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제3지대 후보로 출마를 시사해 남부 백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일부 백인 평화운동가들은 킹이 대선에 출마해야한다고 설득했다. 존슨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가인 앨러드 로웬스타인(Allard K. Lowenstein)이나 1928년 미국 대선의 사회당 후보였던 노먼 토머스는 킹을 지지한 대표적인 인사였는데, 그가 민주당의 대선 예비후보로 출마해 존슨의 3선을 좌절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킹은 주류정치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존슨, 닉슨, 월리스 모두에 반대했고 대선 출마도 단칼에 거절했다. 그가 대선에 출마한다면, 그의 "정치적 야심"을 공격하던 많은 사람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968년 3월 뉴햄프셔 경선에서 존슨이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해 3선을 포기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유진 매카시가 부상했을 때도 킹은 매카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로버트 F. 케네디에 일부 희망을 걸었다.

킹은 그의 마지막 나날들을 로버트 F. 케네디와의 연대에 보냈다. 그는 로버트 케네디 공개 지지를 고민하고 있었고, 암살 직전의 마지막 녹취록에서 "오로지 로버트 케네디만이 인종 갈등과 베트남 전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로버트 케네디가 린든 B. 존슨의 정치적 공작을 이겨낼 수 없으며 결국 존슨의 지지를 받는 휴버트 험프리에 밀려 민주당 후보로 지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35] 전반적으로 그의 관심은 1968년 대선에서 흑인을 대변하는 대선 후보를 지지하고, 흑인이 처한 실질적인 문제를 어떻게 주류 정치권에 호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으로 기울었다.

2.10. 암살: 검은 새가 날아오르다

Blackbird singing in the dead of night
깊은 밤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검은 새여
Take these broken wings and learn to fly
망가진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워봐요
All your life
당신 생애 내내
You were only waiting for this moment to arise
이 날아오르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비틀즈의 노래 Blackbird[36]
미국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미국이 필요로하는 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폭력과 불법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지혜, 연민이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품을 수 있는 우리 속의 정의감입니다.
(...)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겪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폭력이나 불법, 무질서가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백인과 흑인은 함께 살기를 원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길 원하며,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정의를 원합니다. 오래 전 그리스 시인이 쓴 글, 즉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온화하게 하는 것에 헌신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밤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위해 기도합시다.
로버트 F. 케네디의 마틴 루터 킹 추도 연설문
1968년 3월 마틴 루터 킹은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환경미화원들의 인권 개선을 위한 행진을 기획하였다. 멤피스의 흑인 환경미화원들은 보호법도, 최저임금도, 안전수당도 없이 일하고 있었으며 한달 전 환경미화원 두 명이 쓰레기 압축 트럭에서 끔찍하게 죽는 사고가 일어나며 흑인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킹은 4월 3일 흑인 노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I've Been to the Mountaintop(나는 높은 산 꼭대기에 다녀왔다)" 로 시작하는 짧은 연설을 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만 합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좀 더 단단한 각오로 굳세게 일어서도록 합시다. 좀더 확고한 신념을 갖고 힘차게 전진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조국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찬 행진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는 조국을 좀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앞에는 무섭고 어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약속의 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염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염원이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높은 산 꼭대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저는 굽어보았습니다. '약속의 땅'이 제 눈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37] 하지만 여러분은 오늘 저녁 분명히 알아두셔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것을.

오늘 저녁 저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의 눈은 오로지 다시 이 땅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따름입니다.[38]
1968년 4월 4일 킹은 오랜 친구인 애버내시 목사와 함께 로레인 모텔 306호에 머물고 있었다. 오후 6시, 그는 시카고에서 민권운동을 이끌고 있던 젊은 흑인 목사 제시 잭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제시 잭슨은 킹의 시카고 주택 투쟁의 유산을 이어받은 킹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킹은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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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의 생전 모습이 찍힌 마지막 사진[39]
오후 6시 1분, 레밍턴 모델 760에서 발사된 총알이 킹의 뺨을 관통했다. 총알은 척추뼈를 부러트리고 경정맥과 동맥을 절단한 후 어깨에 박혔다. 킹은 즉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제시 잭슨의 품에 안겼다. 킹의 측근 중 하나인 앤드루 영 목사가 달려와 킹의 맥박을 확인했다. 킹은 아직 살아있었고, 즉시 인근의 성 요셉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의사들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내부 출혈이 너무 심해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결국 총격 한시간만인 오후 7시 5분 킹은 사망했다. 향년 39세.

킹을 살해한 사람은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인 것으로 드러났다. 제임스 얼 레이는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인종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전에도 주유소나 가게 등에서 도둑질을 한 혐의로 교도소를 3번이나 복역한 범죄자였고, 세 번째 범죄를 저지르고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는데 1967년에 탈옥한 상태였다. 이후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도망생활을 하다가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서 가명으로 레밍턴 모델 760 소총.30-06 스프링필드 총알 20발, 망원조준경을 구입했다. 그리고 4월 2일 테네시 주 멤피스로 와서 마틴 루터 킹이 투숙하는 로레인 모텔 맞은편의 셋방을 빌렸다.

제임스 얼 레이는 킹 목사를 살해한 후 총을 버리고 도주했고, 애틀랜타를 들러서 캐나다 토론토로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서 가명으로 가짜 캐나다 여권을 구해서 영국으로 도망쳤고, 영국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로 도망치려다가 가짜 여권이 발각되어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추방된 얼 레이는 FBI에 체포되어 99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 1977년에 탈옥을 또 감행했지만 3일 만에 붙잡혔다. 형은 100년으로 늘어났고, 1998년 4월 23일에 교도소에서 지병인 C형 간염으로 인한 합병증이 악화되어 콜롬비아 주에 위치한 내슈빌 기념 병원에서 70세로 사망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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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피격 사실을 알리는 뉴욕 타임스의 1면
킹의 사망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흑인들에게는 특히 큰 슬픔이었다. 킹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국의 100여개 대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대도시는 2곳이었는데, 뉴욕인디애나폴리스였다. 뉴욕에서는 존 린지 시장이 할렘을 찾아 킹을 추모하고 백인우월주의자를 비난하는 연설을 해 흑인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소요사태가 일찍이 진정되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로버트 F. 케네디가 즉흥연설을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많다. 로버트 F. 케네디는 형의 암살 이후 자신이 겪은 슬픔을 회상하며 킹의 비폭력 사상이 가지는 의의를 상기시키고 그의 유산을 위해 계속 싸우자고 흑인들을 북돋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에 감화된 흑인들은 자진해 시위를 해산했다.

하지만 백인에 대한 흑인의 증오는 몇 연설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등 흑인의 비중이 높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흑인에 의한 약탈, 방화가 일어났다. 백인들의 경우 반응이 엇갈렸다. 백인들의 반응은 크게 3가지였는데, 첫번째는 분노, 두번째는 슬픔, 세번째는 "킹의 죽음은 그가 자초한 것"이라는 킹에 대한 비판론이었다.

킹의 장례식은 4월 9일 치러졌다. 총 30만명의 미국인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장례식 중 하나였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백인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 비난을 받았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자신 대신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참석하게 하였다. 공화당의 대권주자였던 리처드 닉슨은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지만 흑인들에게 욕만 먹었고, 일부 흑인은 닉슨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이 장례식에 참석한 백인 중 유일하게 비난이 아닌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로버트 케네디 역시 두달 후 암살당해 흑인들을 또다시 슬프게 했다.

2.11. 사후: 투쟁은 계속된다

킹의 사후 흑인 민권운동가와 그 지지자들은 분열되었다. 랠프 애버내시 목사와 제임스 파머 CORE 의장은 킹의 비폭력 운동의 의의를 언급하며 비폭력 운동이 계속되어야하고, 흑인에 의한 폭동은 옳지 않다며 진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를 잃은 흑인 민권운동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킹의 조직인 SCLC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지도자를 잃고 표류하며 크게 분열되었고, 특히 랠프 애버내시 목사와 제시 잭슨 목사 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제시 잭슨은 킹과 달리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았고, 실력양성론도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잭슨은 1970년 SCLC 지도부와의 갈등 끝에 SCLC를 탈퇴, Rainbow/Push 조직을 창단했다. 1970년대 이후 흑인민권의 중심축 역시 SCLC에서 Rainbow/Push로 옮겨갔고, 이들은 흑인 정치인과 기업인을 다수 배출하며 흑인 민권을 일부 개선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킹의 후계자들은 정치권에 진출해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킹의 보좌관이었던 앤드루 영 목사는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와 친근한 관계를 쌓았는데, 이후 카터에 의해 UN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후일 애틀랜타 시장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애틀랜타 시장으로 애틀랜타의 인종갈등을 해소하고 대기업 본사를 유치해 애틀랜타 역대 최고의 시장이라는 평도 받았다. 다만 한국인, 유대인, 아랍인 등을 향한 혐오 발언으로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킹과 함께 1963년 워싱턴에서 행진한 SNCC의 리더 존 루이스는 민주당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2020년 8월 사망할때까지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며 모든 흑인 하원의원 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죽기 직전에는 트럼프를 비판하고 조 바이든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제시 잭슨 목사는 해럴드 워싱턴 시카고 시장 등 흑인 정치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1984년과 1988년 흑인 정치계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해 꽤나 선전했다. 198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의 기조연설[41]은 킹의 연설만큼이나 훌륭했다는 평을 받는다.

로버트 F. 케네디는 킹의 유산을 잇는다는 명목을 세우며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했으나, 킹이 살해된지 딱 2달만인 6월 4일 팔레스타인 이민자에게 암살당하며 대통령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흑인에게 90~95%의 표를 받을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킹의 사망 2달만에 로버트 케네디마저 사망하자 많은 흑인들은 "우리에게 잘해주려는 사람들은 다 죽는다"라며 절망에 빠졌다. 1968년 대선에서는 흑인 민권정책의 지속을 주장한 휴버트 험프리가 아닌, 흑인 폭동을 막겠다며 보수적인 수사를 차용한 리처드 닉슨이 승리했는데, 이것은 일시적으로 흑인 민권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킹의 사후, 제시 잭슨과 같은 그의 후계자들이 정계에 나서 흑인 민권을 위해 계속 싸우고 흑인들의 사회 진출도 가속화되면서 197~80년대 킹의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1983년, 미국 상하원은 "마틴 루터 킹의 날"을 제정하고자 시도했다. 처음에는 미국인의 48%에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에 반대했지만, 연말에 이 수치는 30%대로 떨어졌다. 남부의 많은 상원의원들이 마틴 루터 킹의 날을 제정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킹을 칭찬하는 말을 남겼다. 민주당의 상원 원내대표인 로버트 버드가 대표적이었다. 로버트 버드는 한때 KKK단의 열성 단원으로 흑인 인종차별을 신념으로 굳게 견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의 날을 제정하면서 자료를 찾아보고, 킹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되면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때부터 흑인의 인권을 상원에서 가장 강하게 지지하는 상원의원으로 거듭났다.[42] 상원은 78 대 22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마틴 루터 킹의 날"을 통과시켰다.

가장 극적인 것은 앨라배마 주의 변화였는데, 앨라배마 주는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에 소극적이었지만 결국은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E. 리의 생일을 같이 기리는 합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마틴 루터 킹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날" 법안에 서명한 앨라배마 주지사는 바로 조지 월리스였다. 월리스는 1972년 총격 사건 때 자신을 수술한 의사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인종차별의 반대자로 돌아섰고, 마틴 루터 킹의 업적을 옹호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남겨 미국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렇게 킹의 유산은 그의 사후 30년동안 서서히 재평가되었고,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거듭났다.

2.12. 무덤과 추모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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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목사의 무덤은 2006년 1월 30일에 향년 79세로 타계한 부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와 함께 안장된 합장 석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43] 왼쪽 부분에 있는 그의 석관에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마지막 문장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의 끝을 조금 바꾼 "마침내 제가 자유로워졌나이다!" 가,[44] 오른쪽에 있는 부인의 석관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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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2일 킹 목사 추모 조형물이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서 일반에 공개되었고, 개장식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제시 잭슨 목사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흑인 명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조형물의 시안이 공개되었을 때는 조각상의 자세가 너무 위압적이라는 지적이 나왔으며, 조각에 착수했을 때는 흑인을 하얀 돌로 조각하는 게 타당한지를 놓고 일부가 갑론을박을 벌인 적이 있다.

3. 정치적 사상

3.1. 비폭력주의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한 세계 평화는 터무니없지도, 달성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수단을 통해 평화를 달성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새로 시작해야합니다. 비폭력은 좋은 출발점입니다. 비폭력을 믿는 우리는 폭력과 증오의 목소리 속에서도 이성과 이해의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체계를 구축하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은 그의 비폭력 사상으로 유명하다. 그는 흑인의 인권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비폭력적인 저항을 통한 백인과 흑인의 화해라고 생각했으며, 말콤 엑스로 대표되는 폭력적 저항론에는 거부감을 표했다.

그는 처음부터 비폭력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백인에게 복수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 때에는 KKK단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 폭탄테러도 당하면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폭력 사상을 배우면서 다시는 총을 소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며, 1968년 사망할때까지 극소수의 경호원을 대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설령 그것이 정당방위일지라도 최대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의 비폭력 사상은 여러 정치적 사상과 종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기본적인 근간은 기독교의 이웃사랑이었다. 그는 비폭력 사상을 견지하기 이전에도 백인과 흑인이 조화롭게 살아가야하며, 무작정 복수를 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종주의자들을 감화시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이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킹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퀘이커교도들의 비폭력 사상이 초기 간디의 비폭력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사회주의자이자 퀘이커교도인 베이어드 러스틴의 영향력이 컸다. 러스틴은 비록 후일 킹과의 정치적 사상이 달라져 결별하게 되지만 킹의 사회주의 비폭력 투쟁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킹이 간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며, 후일 간디의 인도에서의 투쟁을 자세하게 연구하면서 간디를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는 1964년 노벨평화상 수여식에서 간디의 업적을 언급하며 그를 자신의 가장 큰 스승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라인홀드 니부어, 월터 라우션부시(Rauschenbusch),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킹은 소로의 시민 불복종론을 끊임 없이 언급했는데, 1955년 몽고메리 버스 탑승 거부 운동 때에도 소로의 불복종 운동에 대해 설교하며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혁명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는 폭력이 결국 또다른 폭력을 불러 다인종 사회인 미국을 갈등의 폐허로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말콤 엑스는 폭력 투쟁을 통해 아예 흑인만의 국가 혹은 자치주를 만들자는 주장으로도 나아갔지만, 킹은 그러한 주장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비폭력을 통해 흑인, 백인, 원주민, 아시아인, 멕시코인 등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에서만 흑인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주장은 당시 흑인들 대부분에게 공감을 받았는데, 비록 흑인들은 인종차별을 지긋지긋해했지만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떨어져나와 불확실한 흑인만의 나라나 자치주를 만드는 것은 경제적인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일부 극단적인 반-인종차별주의자에게는 폭력투쟁론이 공감대를 얻기도 했지만, 직장을 가지고 매일을 살아가는 대다수 흑인들에게는 킹의 평화투쟁론이 실질적인 경제적 지위 향상과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경력 후반에 들어서는 자신의 비폭력 투쟁이 실질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으나, 결국 폭력투쟁론으로 전향하지 않았으며, 비폭력을 전제로 대신 베트남 전쟁 반대, 공정 주거권 보장, 최저임금 인상 등 흑인을 향한 미국의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을 철폐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투쟁 방향을 확대하였다.

3.2. 기독교 신앙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 믿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는 즐거움을 얻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1956년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설교 中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킹은 시민권 운동보다는 성경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았는데, 시민권 운동을 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 정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한 설교에서 "나는 흑인 민권운동가가 되기 이전에는 복음을 설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첫번째 부르심이었고 지금도 제 가장 큰 결심입니다. 제가 시민권 분야에서 하는 모든 일은 그 부르심의 부차적인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의 봉사의 의무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는 것 이외에는 인생에 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1964년 노벨평화상 수여식을 비롯해 여러 연설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종평등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민권 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빼놓는다면 설명되기 어려울만큼 킹은 기독교 자체를 근간으로 자신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문자주의적 접근 방식에 반대했고, 요나기를 비롯한 성경의 일부 부분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라고 믿었다. 또 자신의 교파인 개신교 침례회를 떠나 가톨릭, 불교 등 여러 종교와 "평화"라는 가치 아래에 단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베트남의 승려인 틱낫한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3.3. 사회주의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마틴 루터 킹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칭한 인물이었다. 물론 공개적으로는 한번도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당시 미국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심했고, 킹 본인도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고 있었기에 사회주의자임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민주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여럿 남겼고, 인생의 말년에는 아예 민주적 사회주의만이 미국을 변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상충되며, 오히려 사회주의가 기독교에 더 걸맞은 사상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미국의 정신을 갉아먹는 요소로 "군국주의와 물질주의"를 들었으며, 군국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 물질만능주의가 자본주의라는 큰 층위에서 모두 묶여 상호작용하는 동일한 시스템이라고 설교했다. 킹은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는 무한한 물질만능주의와 도금주의를 부추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치품에 탐닉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다른 나라를 침탈하고 빈자를 더 가난하게,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는 이웃을 돕고, 모두를 평등한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말년으로 갈수록 킹은 사회주의에 우호적으로 되었는데,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고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비록 마르크스의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을 비판하긴 했지만 그의 사회 분석 중 일부는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그의 인생 전부나 마찬가지였는데,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는 유물론을 추구하며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관념론을 거부하고 윤리적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점" 또한 비판했다. 킹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는데, 마르크스는 그런 사랑이나 정신은 결국 , 경제 등 물질적인 토대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을 제시했다. 킹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너무 비관적이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기에 궁극적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상이라고 비판하였다.

소련, 북베트남의 공산당 정부에도 반대했다. 그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모두에게 박해받던 불교도를 위해 기도했다. 소련 공산당과는 서로 혐오하던 사이였다. 소련 공산당은 킹의 비폭력 사상이 미국을 분열시키는 대신 통합시켜 냉전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며, 장기적으로는 자국의 정교회, 이슬람 신자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소련 공산당은 킹이 사망하자 축배를 들며 기뻐할 정도로 킹을 미워했다.

3.4. 중앙 정치에 대한 견해

흑인은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우선 민주당은 남부 민주당원의 변덕에 굴복해 흑인을 배신했습니다. 다음으로 공화당은 반동적인 우익 북부 공화당원의 노골적인 위선에 굴복해 흑인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의 연합은 민권 분야의 모든 법안과 진보적 입법을 향한 모든 움직임을 좌절시켰습니다.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성명서 中
일반적으로 킹은 공화당원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아니라는 설도 있다#. 킹의 좌파적인 정치 성향을 감안하면 그가 공화당원인 것에 의문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남부의 상황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다. 1960년대 말까지 남부는 그야말로 민주당의 독재 체제였고, 킹의 고향인 조지아나 앨라배마 주 등지에서 민주당 소속 후보는 출마만 하면 95%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오늘날 진보의 전라남도, 보수의 경상북도보다도 더한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셈. 공화당원들은 대놓고 "북부에서 건너와 남부를 망치려는 첩자"나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후예들"이라고 비하당하는 일이 잦았다. 백인들의 억압으로 투표조차 할 수 없었던 흑인들은 백인 민주당의 반발심으로 공화당에 입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킹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전국 정치에서는 언제나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는 "태어나서 공화당 후보를 대선 후보로 지지한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1920년대 공화당의 우경화로 공화당이 흑인 민권에 관심을 버렸고, 반대로 민주당은 뉴딜 정책 등 실질적으로 흑인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또 해리 S. 트루먼과 같이 흑인에게 잘 대해준 민주당 대통령도 나오고 있었기에 킹이 민주당을 대선에서 지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서도 흑인 민권에 관심이 있었던 일부 양심적인 공화당원은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록펠러 공화당원들과는 관계가 나름 좋았다. 그는 1968년 대선을 앞두고 사석에서 넬슨 록펠러, 조지 W. 롬니, 찰스 H. 퍼시[45]을 "훌륭한 대통령감"이라며 칭찬했다.

전반적으로 정치 혐오자였으며, 모든 중앙 정치인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 트루먼, 린든 존슨, 넬슨 록펠러, 로버트 케네디 등 흑인 민권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한 여러 정치인들에게는 감사를 표하긴 했지만, 결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똑같은 세력이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68년 죽기 직전에는 대선 출마도 제의받았지만, 중앙정치에 완전히 환멸감을 느끼고 있던 킹은 제안을 거절하며 불쾌감까지 드러냈다.

1955년 몽고메리 보이콧과 이후의 SCLC에서의 활동을 거치면서, 킹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가 커짐을 인지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킹은 자신의 아버지나 상대 후보에 대한 반대 등을 통해 사실상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하였다.

1956년 대선에서는 애들레이 E. 스티븐슨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모두 민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60년 대선에도 이 스텐스를 유지했지만, 케네디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나자 아버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케네디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1964년에도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에 절대로 투표해서는 안된다며 존슨을 사실상 공개 지지했다. 1968년에는 존슨, 험프리, 닉슨, 월리스 등 거의 모든 대권주자에 대한 지지를 거절했지만 로버트 F. 케네디와 가까이 지내며 사실상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

3.5. 의외의 정치적 견해

죽은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고, 보수적인 남부의 기독교 목사였던만큼 킹이 모든 문제에서 진보적인 견해를 표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부 사안에 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례로 그는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이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가 헌신적인 아내이자 주부로 남기를 바랬는데,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 일화를 토대로 킹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의 LBGT에 대한 견해는 복잡했다. 그는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성애의 방법으로 단정짓고 동성애를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론도 존재한다. 코레타 스콧 킹은 킹의 암살 후 그가 동성애를 결국 받아들였을 것이라 주장했고, 자신도 평생 LGBT 권익 운동가로 활동했다. 킹의 가까운 동료이자 동성애자였던 베이어드 러스틴은 사망하기 직전 킹을 회고하는 글에서 "그가 동성애에 대해 일부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가 동성애자이든 아니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차별도 하지 않았다"라며 킹을 변호하였다.

기독교 시오니스트였으며 시오니즘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다고 한다.[46] 민권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킹 목사가 시오니즘을 지지한다니까 의아해할수도 있는데 시오니즘도 여러 갈래의 분파가 존재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를 사민주의 세력이 주도해서 건국했었고, 이 때문에 1977년 총선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노동당이 장기집권해왔기 때문이었으며, 이 때문에 서양의 세속적 진보 정치인들도 시오니즘을 유럽 제국주의와 봉건적 이슬람 왕국들에 맞서는 좌익 내셔널리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47][48] 물론 1960년대에는 이집트리비아, 시리아, 북예멘. 이라크 등에서 아랍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고, 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도 아랍사회주의가 주류였지만 이들은 서양에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가족계획 정책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만약 외계인들이 지구에 방문한다면 우리가 인구 과잉이라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계획 정책에 예산을 적게 쓰는 것을 보고는, 자기 행성으로 돌아가서 이 행성은 미래가 어둡고 불확실한 정신나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보고할 것이다."[49]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인구 과잉 문제는 현대의 페스트에 비견될 만큼 심각한 문제라 평하기도 했다.

다만 이건 시대상을 감안해야된다. 마틴 루터 킹이 활동하던 시대의 미국은 베이비붐 시대 후반기에 해당되었으며, 미국의 출산율이 1명대 후반~2명대 초반수준으로 떨어지는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미국의 출산율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에 급속히 증가해서 1947년부터 1964년까지는 합게출산율이 3명을 초과하였고, 인구증가율은 연 1.5%로 상당히 높았기때문애 인구증가 목적으로 이민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 국가들도 다자녀 가정이 많았던지라 인구증가율이 어느정도 나왔던 시대로 아동과 청소년 인구가 많았기때문에 학교시설 부족로 인한 학급과밀, 교사와 베이비 시터 부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졌다. 현재 저출산으로 골머리를 앓는 동아시아 국가들도 일찌감찌 애를 2~3명 낳는 수준이었던 일본을 빼면 다들 자녀 다섯은 기본으로 낳던 시절이라 연 인구증가율이 2~3%대를 기록할 정도로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하면 예측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지만 출산율이 심각하게 떨어질줄 몰랐던 당대에는 그런 얘기를 하는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던것이었다.

4. 평가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아이콘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인지도와 평가도 높고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미국 내 흑인들의 인권 향상의 역사는 이 사람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공존과 통합, 모든 인종의 평등을 주장하는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적 가치의 실현을 부르짖은 점과 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비폭력 인권 운동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점이 킹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이상론만 설파하고 다니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인권 운동을 이끎으로서 연방 대법원의 흑인/백인 버스 좌석 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 사건에도 으뜸가는 활약을 펼치고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등 현실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인종차별 폐지 관련 운동 외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면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종차별 외 다른 인권문제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행적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말콤 엑스와 가장 큰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비폭력 운동이라는 수단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권 운동가라는 이름으로 킹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는 반면 엑스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킹의 핵심 주장이자 그의 사상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은 '흑인과 백인, 둘은 어느 하나 우월한 인종이 아니라 평등하며 따라서 평등하게 대우받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였지만 급진적 성향의 엑스는 킹이 백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그의 인권운동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엑스 외의 과격파 흑인들 역시 킹의 온건적 인권운동을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여론과 별개로 당시 흑인들 사이에서 킹의 사상이 더 큰 지지를 받았고 많은 흑인들이 킹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며 그에게 동조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또한 말년에는 말콤 엑스의 영향을 받아서 적극적인 투표권 운동과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지적하는 등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킹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Martin Luther King, Jr. Day)"을 통해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려지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데이는 미국의 연방 공휴일로, 킹의 생일 즈음으로 설정해서 1월 셋째 월요일이다. 이름 그대로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한 날로 처음 공휴일 지정된 1986년에는 기념일 며칠전 레이건 대통령이 킹 목사의 미망인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있었다. 개인의 탄생일이 국가 공휴일이 된 것은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일반인의 생일이 공휴일이 된 것으로는 최초라고 한다.

5. 논란

5.1. 여성 관계

킹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FBI에서는 그의 약점을 캐내다가[50] 난잡한 성생활에 관한 증거를 발견했다. 이에 관해 킹 목사의 친구였던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는 그의 자서전에서 킹 목사가 여자에 약하다고 했지만 후에 이것이 외설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인 것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 목사의 인생을 저술했던 데이비드 개로(David Garrow)는 킹이 매일 만나는 여자들에 관해 기술하면서 이들과의 섹스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FBI는 이것을 이용해 킹에게 민권운동을 멈추라는 익명의 협박 편지까지 보냈다. 게다가 FBI는 킹에게 자살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FBI는 신문기자들에게 킹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대해 폭로하는 기사를 내라고 했지만 모든 신문기자들이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후버야말로 치졸하게 남의 약점이나 캔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한다. 킹의 위상이 워낙에 어마어마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FBI가 캐낸 이 정보는 명백히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협박과 도청 등의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은 둘째치고, 목적부터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킹을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였으므로 이를 좋게 본 기자는 없었다. 킹의 여자 관계가 개인적인 흠결은 될 수 있을지언정 법적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킹 목사의 사생활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그것과는 별개로 FBI의 불법 행위는 마찬가지로 크게 비판한다. 결국 이 정보는 극비에 부치고 National Archives에 2027년까지 보관해 두기로 했다.[51]

킹의 여성 관계가 난잡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디까지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매체에서 표현하는 것만큼 심각한건 아니고, 위인전에서 표현하는 것만큼 사소한건 아니었다는게 현재의 평가. 따라서 제대로 된 킹의 여성관계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 많은 자료가 공개된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5.2. 표절 논란

그 외 1990년 시어도어 파파스라는 연구자가 킹이 자신이 가르친 학생의 논문을 표절하여 박사논문 3분의 1 이상을 베꼈다는 사실[52]을 발견했다. 이에 대해 킹의 박사학위가 취소되느냐 마냐에 대해 1990년대에 사회적 논쟁이 있었는데, 보스턴 대학교에서는 학위를 취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유는 1950년대 당시에 레퍼 없는 인용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분위기가 일부 있었고, 또 설령 일부 문장이 표절이더라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킹의 연구 실적을 악화시킬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1955년 당시 그의 논문을 심사한 교수도 "킹의 논문이 일부 표절인 것은 사실이나, 당시의 관행으로 용납되는 수준이며, 또 그가 남부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민권운동에도 참여하며 제대로 인용 표시를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킹을 변호하였다.

또 연설에 있어 제대로 인용 표시를 안했다는 논란도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연설의 감동적인 결말 부분 역시 아치볼드 케어리라는 흑인 목사가 1950년대에 한 연설과 상당부분 비슷하다. 다만, 케어리 목사의 연설 역시 기존에 있었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흑인 교회에서는 노래나 다른 연설에서 일부를 따오는 것이 관례적이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연설가들이 다른 인물의 명연설에서 부분을 발췌하기도 한다. 논문과 달리 연설에서는 어떤 부분이 어떤 사람의 내용을 인용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법이고, 즉흥연설을 즐겨했던 킹이 표절을 의식했을리도 없다. 따라서 표절을 근거로 킹의 웅변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것이며 미국 내에서도 극우파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

5.3. 공산주의자?

FBI에서 킹과 미국 공산당 내의 연계활동에 대해 특히 경계했다. 이유는 저명한 뉴욕 변호사이자 킹 목사의 조언자였던 스탠리 리바이슨(Stanley Levison)이 미국 공산당과 연계 되어있다는 것과 킹 목사의 다른 동지였던 헌터 피츠 오델(Hunter Pitts O'Dell) 이 미국 공산당의 반미활동협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s)에 충성을 맹세한 것에 대해 연관이 되어 있다는 혐의가 있었다.

하지만 1979년 FBI는 증거불충분으로 킹 목사와 반미활동협회 간의 연계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킹 목사도 공산당과의 협의를 부인했지만 당시 FBI 의장이었던 후버는 루터 킹 목사의 부인을 믿지 않았고 킹 목사도 이에 반발해 후버를 비난했다고 한다. 게다가 소련 해체 이후에 나온 문건에서도 킹과 공산당의 연계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련이 킹의 죽음에 기뻐한 사실만이 공개되면서 현재는 극우 세력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음모론으로 전락한 상태이다.

킹 본인은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지나친 반공주의를 비판했지만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기독교적, 인권적 관점에서 크게 비판했다. 애초에 사회주의랑 기독교는 어느정도 양립이 가능해도 정통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얼핏 비슷해보여도 엄연히 다른 것이다.

6. 여담

“Nobody has spoken to crowds bigger than me... If you look at Martin Luther King, when he did his speech, his great speech, and you look at ours, same real estate, same everything, same number of people. If not, we had more. When you look at the exact same picture and everything’s the same… you look at it and you look at the picture of his crowd, my crowd – we actually had more people."
"그 누구도 저보다 더 큰 군중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틴 루터 킹을 본다면, 그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했을 때, 그의 훌륭한 연설,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의, 같은 땅, 같은 모든 것, 같은 수의 사람들을 보세요. 보지 않았다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정확히 같은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이 똑같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그의 군중, 저의 군중의 사진을 보면, 우리는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말 # #
그러나 영국의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보도에 따르면 킹 목사의 1963년 연설에는 약 25만 명이 모였으며, 1월 6일 사건을 조사하는 하원 선정 위원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53,000명이 워싱턴에 모였다고 추정한다."라고 보도하면서 트럼프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마틴 루터 킹의 차녀 버니스 킹은 트럼프의 주장에 대해 "절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틀린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는 일을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

7. 창작물에서

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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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5살이던 1934년에 개명한 것이다. 관련 자료.[2] 본명은 마이클 킹 (Michael King).[3] 출처1 출처2('History' 문단)[4] 2011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흑인의 100%, 백인의 93%가 그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심지어 보수주의자 사이에서도 그를 존경한다는 여론이 85%가 넘었다. 즉, 사실상 극우를 제외한 모든 우파 성향의 미국인들이 마틴 루터 킹을 존경한다는 것. 이렇게 모든 미국인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인물은 드문데,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존 F. 케네디,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등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5] 일부는 마틴 루터 킹의 사생활을 공격하며 그를 위선자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일부 백인 우월주의자를 제외하면 감히 킹의 사생활을 넘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업적까지 비하하는 목소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조적으로 말콤 엑스의 경우 사생활은 흠잡을데가 없지만, 그의 정치사상이 급진적이고 폭력적이라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기여는 그 평가가 양분되어있다.[6] 게다가, 해당 여론조사는 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 치러진 조사인데다 보수/애국주의 편향 논란까지 있어 미국 현지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로널드 레이건에이브러햄 링컨을 앞서고, 조지 W. 부시가 6위를 차지한건 너무 심하게 보수 편향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런 조사에서도 킹이 3위를 기록했다는 것은 얼마나 미국인들이 정치 성향에 상관 없이 킹을 존경하는지를 보여준다.[7] 과거 속의 까마득한 인물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현재도 생존하고 있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최근까지 살아있었던 헨리 키신저 전 국가안보보좌관 등보다도 생일이 늦다! 단지 킹이 요절해서 그렇지.[8] 맨 앞부터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의 아들인 킹 3세, 그의 아버지인 킹 시니어이다.[9] 킹 이전에 가장 유명했던 흑인 민권운동가 중 하나로, 공화당의 고위정치가, 백인 사업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주류 정치권과 재계에서 흑인의 권익을 넓히고자 노력했다. 그의 고향인 조지아 주 터스키기에 기술학교를 설립해 취업의 어려움을 겪던 흑인들에게 직업 교육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모로 실력양성론자인 셈인데, W. E. B. 두보이스와 같은 강경 투쟁론자들에게는 인종차별의 구조적인 면을 무시한다며 비판의 대상도 되었고 특히 공화당 정치가들과 유착 관계를 가져 후대의 흑인 민권운동가들에게는 "아첨꾼" "배신자" 등의 비난을 받았다. 다만 현대에는 그의 공적도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으며 흑인 보수주의, 블랙 캐피탈리즘의 원형으로 꼽히며 재평가되기도 한다.[10] 대학교와는 약간 개념이 다르다. 대학교 진학 이전에 다니는 학교 개념인데 한국과 미국의 학제 시스템이 약간 달라서 착각할 수 있다.[11] 당시 남부 교회는 아예 흑인의 교회 출석을 금지하거나, 출석을 허용하더라도 의자 대신 복도에 쭈그려 앉게 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국 1870년대 남부 흑인들은 독자적인 흑인 교회와 교파를 창단해 교회에서의 인종 분리가 이루어졌고, 이후에는 남부의 많은 주에서 법으로 흑인이 백인과 같은 교회에 다닐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12] 1965년 연방 대법원의 러빙 대 버지니아(Loving v. Virginia) 판결로 인종간 결혼을 불법으로 만드는 주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그 이전까지는 다수의 주에서 흑백 결혼이 불법이었다. 심지어 일부 남부 주에서는 2010년대까지도 흑백 결혼 금지 조항이 문자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기까지 했다.[13] 다행히 킹 집의 대문만 박살나는 선에서 그쳤는데, 분노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하자 킹이 나서서 차분히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때 출동한 백인 경찰의 회고에 따르면 킹이 군중을 말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경찰 모두가 성난 흑인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14]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의 그 사람 맞다. 내치에서는 인종주의를 옹호한 극우파였지만 정작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68혁명 때 학생 시위대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적 행보를 보여 여러모로 당대 남부의 복잡한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5] 여기에 서명하지 않은 남부 상원의원은 단 세명 뿐이었는데, 텍사스의 린든 B. 존슨(원내대표라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서명하지 않음), 테네시의 에스테스 키포버, 테네시의 앨버트 고어 시니어가 그들이다.[16] Letter opener. 종이로 만든 칼이 아니라 편지 등 종이로 된 우편물이나 포장지를 개봉하는데 쓰이는 칼이다.[17] 킹이 도망을 치거나 칼이 명치를 찌르지 못 하고 빗맞췄을 경우를 대비했는지 착용하고 있던 브래지어안에 장전 된 Galesi-Brescia Brevetto 5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18] 킹의 사후 출간된 자서전에서 킹의 치료를 담당했던 메이너드 박사의 증언이 서술되어 있었는데, "칼날 끝이 대동맥에 닿았고 대동맥을 빼내기 위해 가슴 전체를 열어야 했습니다. 당신(마틴 루터 킹)이 수술을 하는 동안 재채기를 했다면 당신의 대동맥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고 당신은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19] 흑인 중 68%가 케네디에, 32%가 닉슨에 투표했다.[20] 민권운동 지지자이자, 공화당원인 재키 로빈슨이 직접 닉슨과 만나 청원했지만 닉슨은 매몰차게 성명 발표를 거절했다.[21] 이 외에도 닉슨은 흑인 민권 문제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의 부통령 후보인 헨리 캐벗 로지가 할렘가 유세에서 흑인 장관을 임명하겠다고 공약하자 닉슨이 직접 나서 그런 공약은 사전에 합의된 적이 없다며 물먹인 적도 있었다.[22] 8%의 흑인들은 킹의 투쟁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대체로 부유한 흑인들이었는데, 킹이 공산주의자이며 계급투쟁으로 자신들을 몰아내려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23] 스파이크 리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킹과 엑스가 악수하는 사진이 나온다.[24] 로버트 케네디가 어째서 킹에 대한 도청을 허가했는지는 역사적으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버가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한 케네디 형제를 협박하며 킹 도청을 허가하도록 압박했다는게 사실상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진다. 극단적으로는 후버가 로버트에게 직접 그와 마릴린 먼로가 숨을 헐떡이는 도청 파일을 들려주며 킹에 대한 도감청을 허가하라고 협박했다는 음모론까지 있다. 마찬가지로 성생활이 꽤 문란했던 마틴 루터 킹은 동방상련의 감정이라도 느낀건지, 순순히 로버트 케네디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가 "어쩔 수 없이" 도청을 허가한 점을 이해해야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25] 왼쪽부터 존 루이스, 휘트니 영, 필립 랜돌프, 마틴 루터 킹, 제임스 파머, 로이 윌킨스.[26] 존슨의 말대로, 1964년 이후 흑인들은 80%가 넘는 압도적인 투표율로 민주당을 밀어주고 있다. 가장 최근의 대선인 2020년 대선에서도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흑인 표의 89%를 득표했을 정도.[27] 스트롬 서먼드, 로버트 버드 등 남부 상원의원들은 필리버스터를 시도하며 발악했지만 그 전에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시킬만한 표가 모이며 이들의 발악은 무위로 돌아간다.[28] 재밌게도 존슨과는 정 반대의 성향이었던 인물이다. 골드워터는 NAACP 애리조나 지부의 창립 발기인이었을만큼 개인적으로는 인종평등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방 정부가 주의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우파 자유지상주의 사상을 믿었고, 그 논리로 연방 민권법에 반대했다. 당연하지만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흑인 민권운동가들에게는 씨알도 안먹히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고, 킹은 앞장서서 존슨을 지지하며 골드워터를 거부해야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 결과 골드워터는 흑인 사이에서 겨우 6%(...)만을 득표하는 굴욕을 당했고, 존슨은 흑인 표의 94%를 획득했다.[29]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닉슨은 선별적 기본소득인 가족지원계획(FAP)을 추진했고, 상대 후보자인 조지 맥거번은 연간 1,000달러의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두 계획 모두 보수파의 반발을 사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2020년대까지 기본소득 논의는 중단된다.[30] 그러나 킹은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는데, "종교는 인민의 아편" 등의 반기독교/유물론 사상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 소련, 중국의 인권탄압을 비판하고 소련의 탄압받는 정교회 성직자들과 연대를 시도하기도 했다.[31] 킹의 정적 뿐 아니라 옛 동료들도 그를 비판했는데, 가령 그의 사회주의 사상에 영감을 준 좌파 운동가 베이어드 러스틴은 킹의 사회운동이 너무 광범위해서 실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킹과 결별했다.[32] 린든 존슨은 킹을 사적으로 매우 싫어했는데, 그를 주체할 수 없는 극렬 공산주의자이자 위선적인 간음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존 에드거 후버가 감청한 마틴 루터 킹의 혼외정사 테이프를 들으며 박장대소하기도 했다.[33] 킹의 입장에서 북베트남은 기독교도들을 탄압하는 공산국가였기에 전혀 연대의 대상이 아니었다.[34] 다만 응오딘지엠은 가톨릭교도였고 킹은 침례교도였다는 차이점이 있다.[35] 그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때문이긴 했지만 민주당 경선은 결국 그의 예측과 똑같이 되었다. 그리고 험프리마저도 리처드 닉슨에 패했다.[36] 마틴 루터 킹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37] 출애굽기모세도 '약속의 땅' 가나안 에 들어가지 못했다. 매우 상징적인 발언. 그리고 마치 유대 신화의 40년의 방황을 재현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루터 킹 사후 40년 뒤인 2008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 당시 루터와 함께 했던 상당수 인사들도 살아서 이 사건을 보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38]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 미국의 군가이자 찬송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39] 킹의 왼쪽에 서있는 사람이 제시 잭슨이다. 오른쪽은 킹의 보좌관인 앤드루 영 목사.[40] 사망 후 그의 동생인 제리 레이가 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취급으로 인해 미국 땅에 매장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CNN에서 말했고, 화장되어 아일랜드에 뿌려졌다.[41] "Keep Hope Alive"라는 연설인데 민주당의 전당대회 연설 중 1976년 버바라 조던의 연설과 더불어 가장 감동적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특히 "미국 국기의 색은 빨강, 하양, 파랑이지만 미국인의 색은 하양, 검정, 노랑, 홍색, 갈색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똑같이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와 "마이클 두카키스의 선조는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고, 저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하지만 무슨 배를 타고 왔든 우리는 지금 같은 미국이라는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라는 부분은 지금도 회자된다.[42] 로버트 버드는 2008년 대선 때 버락 오바마를 가장 처음 지지한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43] 장례 직후에는 현재의 위치가 아닌 애틀랜타의 사우스뷰 묘지에서 묻혀있었으나, 1980년에 생가 부근에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고, 2006년에 아내와 함께 합장되면서 비석이 다시 한 번 교체된 것이라고 한다.합장 이전에 현재의 위치에 갓 이장된 당시의 무덤[44] 이 묘비명은 사우스뷰 묘지에 안장된 당시부터 현재의 위치에 이장된 1980년 이후에도 현재까지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새겨져 있다.[45] 일리노이 상원의원[46] Sundquist, Eric J. (2005). Strangers in the land: Blacks, Jews, post-Holocaust Americ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47] 하지만 현실은 건국의 주체가 된 노동시오니즘 지지자 측도 기존 토착민이나 유럽계가 아닌 유대인들에 대해선 인종차별적이였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자기네들을 지지하는 무슬림들에게 떡고물을 좀 주는 편이었다는것과 당시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의 주체가 된 세력이 아랍 사회주의 계열인 파타가 주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면 좌파 VS 좌파 구도가 나왔다는것 정도였다는것이다.[48] 재미있는것은 이 당시 미국 우파 진영도 이스라엘을 지지하는데에 있어서는 한 뜻이었다는것이다. 단적으로 우익 지식인이었던 아인 랜드도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이 노동장 장기집권 국가였음에도 아랍인들을 비하하면서 이스라엘을 적극 지지하였다.[49] 외계인 이야기가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말이 나온 1960년대는 UFO 목격담이 시도 때도 없이 보고될 만큼 사람들이 외계인에 관심이 많던 시절이었다.[50] FBI의 흑역사를 다루는 작품에는 항상 나오는 이야기다. SBS에서 더빙 방연한 후버 관련 전기 영화에서는 후버와 부하들의 대사로 킹 목사의 신음소리 언급이 나온다. KBS에서 방영한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외화에서 느글느글한 원로 FBI 요원이 자기가 회의를 느꼈을 때가 킹 목사 침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을 때라고 할 정도였다.[51] 마틴 루터 킹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케네디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치부들은 대부분 2027년을 한도로 해서 아카이브에 넣었다.[52] 심지어 그 학생이 실수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베꼈다.[53] 언론 기사나 교과서 등에서는 ‘마틴 루서 킹’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지만 나무위키는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표기법을 우선하며,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적으로 준수하지 않음.[54] 비슷한 예로 슈퍼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빌런 렉스 루터도 원래는 렉스 루서라고 읽어야 한다.[55]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문에 존슨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로버트 케네디를 지원하며 존슨을 견제하고 민주당을 개혁하고자 했다.[56] 그냥 차별 문제로 나가려던게 아니라 브로드웨이쇼를 의뢰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 배우의 전공도 그쪽.[57]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사회 비판을 둘러 말하려고 SF장르로 간 것이었다. 등장인물을 문제삼자면 우후라 말고도 그 사람들이 거품 물만한 게 수두룩하다. 주조종사인 히카루 술루는 동양인임에도 선장-부선장-기관장 다음의 지휘서열이 4위라서 선장과 부선장이 행성으로 내려가고 기관장이 동력문제로 자리를 비우면 자주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이소룡이 그린호넷에서 조연인 카이토로 출연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는 걸 생각하자.[58] 정확히는 흑인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59] Sundquist, Eric J. (2005). Strangers in the land: Blacks, Jews, post-Holocaust Americ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60] 하지만 현실은 건국의 주체가 된 노동시오니즘 지지자 측도 기존 토착민이나 유럽계가 아닌 유대인들에 대해선 인종차별적이였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자기네들을 지지하는 무슬림들에게 떡고물을 좀 주는 편이었다는것과 당시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의 주체가 된 세력이 아랍 사회주의 계열인 파타가 주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면 좌파 VS 좌파 구도가 나왔다는것 정도였다는것이다.[61] 외계인 이야기가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말이 나온 1960년대는 UFO 목격담이 시도 때도 없이 보고될 만큼 사람들이 외계인에 관심이 많던 시절이었다.[62] 전쟁 없는 노예해방으로 북미 흑인들의 대다수가 중산층이 된 반면, 북미가 계속 영국 치하에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은 빈곤층 육체노동자 신세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존 F. 케네디는 정치인이 되지도 못하고 자유의 아들들에 가입했다.[스포일러] 2020년 밴쿠버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이 에피소드는 휴이의 꿈이자 상상이었다.[64] 정확히는 흑인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