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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19:00

코레타 스콧 킹

<colbgcolor=#332c26><colcolor=#fff> 코레타 스콧 킹
Coretta Scott King
파일:코레타 스콧 킹.jpg
본명 코레타 스콧
Coretta Scott
출생 1927년 4월 27일
미국 앨라배마 하이베르거
사망 2006년 1월 30일 (향년 78세)
멕시코 로사리토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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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링컨 고등학교 (졸업, ~1945)
앤티오크 대학교 (음악, 교육 / B.A., 1946~51)
직업 시민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부모 아버지 오바디어 스콧 (1899~1998)
어머니 베니스 맥머리 스콧 (1904~1996)
배우자 마틴 루터 킹 (1929 ~ 1968 / 1953년 결혼, 1968년 사별)
자녀 2남 2녀
종교 개신교(침례회)

1. 개요2. 생애
2.1. 사망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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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시민사회운동가. 1950년대~1960년대 미국에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펼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아내이다. 남편 사후 37년동안 유지를 이어 인종차별 철폐 운동 및 흑인 여성들의 인권 증진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였다.

2. 생애

1927년 4월 27일 미국 앨라바마 주의 하이베르거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오바디어 스콧은 당시 시에서 자가용을 보유한 첫 흑인이었고, 경찰로 일하다가 퇴직 후 옷가게를 운영하였다. 남북 전쟁 시절부터 농장도 있고 부유했을 것 같지만, 예상 외로 집안 형편이 힘들어져 10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코레타는 음악에 재능을 보여 링컨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1946년, 엔티오크 대학교에 진학해 음악과 교육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952년 초, 그는 23살의 마틴 루터 킹을 만나 교제를 시작했고, 그 다음해인 1953년 6월 18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1954년 남편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되면서 코레타는 남편을 내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코레타는 자신의 꿈이었던 음악을 포기해야 했는데, 이는 훗날 흑인 민권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편의 활동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한 내조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1955년 11월 첫째 딸인 요란다가 태어나고, 1963년까지 2남 2녀를 낳았다. 마틴 루터 킹이 참석하는 시위와 외부활동, 법정까지 모두 동행하며 그의 활동에 함께했다.

1966년 1월, 코레타는 흑인 민권 운동 내 여성의 역할이 제약되어 있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했고 직접 운동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증진할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다. 2년 뒤인 1968년 1월, 워싱턴 D.C.에서 5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한 흑인 민권 집회가 열렸고 코레타는 이 단체의 공동회장 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이 백인우월주의를 맹신하던 제임스 얼 레이에게 암살당하면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1] 장례식에서 코레타는 갓 5살 된 딸 베니스를 안고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 사진은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

결혼 후 15년만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남편의 사망 이후 단순 흑인 민권 운동을 넘어서 인권 증진을 포괄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1970년대부터 여성 인권 증진 운동, 성소수자 인권보호 운동, 환경 운동 등에 나섰다. 또 코레타는 남편의 생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장장 15년의 노력 끝에 1983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마틴 루터 킹의 생일인 1월 15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Martin Luther King Jr.'s Day)로 지정해 공휴일로 만들었다. 레이건이 직접 국가기념일 지정 문서 서명식에 코레타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1974년에는 자신의 장모인 알버타 윌리엄 킹이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에 참여했다. 1986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해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수장인 알란 보색을 만나고, 레이건에게 남아공 내 인종차별 철폐에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청했다. 훗날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자 1990년 다시 한번 남아공을 찾아 만델라를 만났다.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을 선고받자 미국 내에서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마틴 루터 킹 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선정하고 직접 내한하여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러한 인권활동으로 코레타는 간디 상을 수여받았고, 미국 내에서 흑인 인권운동의 대모로 추앙받으며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노령의 나이로 접어든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 코레타가 가장 많이 중점을 둔 활동은 바로 성소수자 인권 증진 활동으로, 1998년과 2000년에 호모포비아를 반대하고 성소수자의 인권 증진을 요청하는 집회 및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1995년 O. J. 심슨 재판 당시 해당 재판 당시에는 인종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2] 76세의 고령이 된 2003년에도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성소수자 협회를 방문해 남편의 링컨 기념관 연설 40주년 행사를 주관하는 등 말년까지 인권활동에 손을 놓지 않았다.

2.1. 사망

파일:코레타 스콧 킹 말년모습.jpg
말년의 모습(2005년)

2005년부터 심장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대외활동이 힘들어졌다. 이 때문에 2005년 마틴 루터킹 기념식 행사에 남편 사후 처음으로 불참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해 1달간 치료를 받다 퇴원하기도 했다. 이듬 해 1월 14일 열린 마틴 루터킹 기념식 행사에 참석한 뒤 멕시코로 건너가 요양에 전념하려고 했으나, 16일 뒤인 1월 30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2105517105_313f6f3646_z.jpg
킹 목사 부부의 묘소

코레타 스콧 킹의 시신은 이튿 날 애틀랜타로 이송되어 장례예배를 치렀고, 잠시 애틀랜타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20일 남편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

그녀가 사망한 후 1년 뒤인 2007년 5월 15일에는 장녀 요란다 킹이, 18년 뒤인 2024년에는 차남 덱스터 킹이 사망하였다. 따라서 2024년 기준 킹 목사의 자녀들 중 생존해있는 사람은 장남 마틴 루터킹 3세, 차녀 베니스 킹이다.

3. 가족관계



[1] 남편이 암살당했던 날 코레타는 장녀인 요란다와 장을 보러 갔었는데, 집에 도착하자 제시 잭슨 목사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려줬다고 한다. 제시 잭슨은 마틴 루터 킹이 피살되던 순간 옆에 함께 있었다.[2] 이후 O. J. 심슨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여전히 이 무죄 판결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 논란이 많지만. (참고로 민사재판에서는 패소해 피해자 유족에게 심슨이 돈을 물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