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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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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1.1. 고구려

1.2. 백제

1.3. 신라

1.4. 발해

1.5. 후백제

1.6. 태봉

1.7.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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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조선

1.9. 대한민국

1.10. 북한

2. 중국

2.1. 서주

2.2. 춘추전국시대

2.3. 초한전쟁

2.4. 전한 / 후한

2.5.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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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군대를 지휘하여, 통솔력/지모를 활용한 군재로 각 국가의 창업, 세력 확장, 상대측 대군의 격퇴 등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을 명장으로 기입하였다. 상기 요건을 기준으로 둘 때 각 국가별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볼드체로 표기하였다. 이 기준일 경우 임금이거나 대표적인 권신의 자리에 오른자여야 한다.
이러한 군공을 세움에 있어 소수의 별동대만 지휘해왔거나 (예: 조운, 반장) 개인 일신의 무예/담력 만으로 군세를 이끈 경우는 (예: 여포, 황충 등) 맹장이나 용장으로 기입하는 것이 권장될 것이다.



촉한

2.6. 서진

2.7. 동진, 오호십육국시대

2.8. 남북조시대

2.8.1. 북조

2.8.2. 남조

동진[40]유송양나라

2.9. 수나라

2.10. 당나라

2.11. 오대십국시대

2.12. 북송 / 남송

2.13. 금나라

2.14. 서하

2.15. 명나라

2.16. 청나라

2.17. 태평천국

2.18. 중화민국 북양정부

2.19. 중화민국 국민정부

2.20. 중화인민공화국

3. 일본

3.1. 헤이안 시대

3.2. 가마쿠라 시대

3.3. 센고쿠 시대

3.4. 에도 시대 / 메이지 유신

3.5. 일본 제국

4. 흉노

5. 몽골

5.1. 몽골 제국

5.2. 북원

5.3. 몽골 인민 공화국

6. 선비

7. 돌궐

8. 거란

8.1. 거란국(7세기)

8.2. 요나라

9. 티베트

10. 베트남

11. 태국

12. 인도네시아

13. 아프가니스탄

14. 인도

14.1. 마우리아

14.2. 무굴 제국

14.3. 마라타 제국

15. 파르티아

16. 페르시아(이란)

17. 필리핀

18. 티무르 제국

19. 셀주크 제국

20. 아랍

20.1. 정통 칼리파 시대

20.2. 우마이야 왕조

20.3. 압바스 왕조

20.4. 파티마 왕조

20.5. 아이유브 왕조

20.6. 맘루크 왕조

21. 호라즘 왕조

22. 이스라엘



[1] 이름이 아니라 직책. 흔히들 양만춘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이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명나라 대의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의 저자 웅대목이 지은 것으로 실제 이름은 알려진 바가 없다.[2] 일시적으로 한강유역을 되찾았다.[3] 고려 태조이나 장수로서 실적을 보인 건 태봉의 장수 시절이기에 여기 서술. 수군을 잘 다뤄 후백제의 나주를 점령했으며 그 전공으로 젊은 나이에 2인자의 자리에 올랐다.[4] 조선 태조이나 장수로서 능력을 보인 건 고려의 장수이던 시절이기에 고려 항목에 서술.[5] 삼포왜란 당시 방어사로 왜적을 대파한 인물로, 『중종실록(中宗實錄)』「황형 졸기」에서 “황형은 무예에 능하고 책략(策略)이 많아서 훌륭한 장수의 재목이었다."라고 하였다.[6]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였다.[7] 한국사를 통틀어 최고 반열에 올라가는 명장이며, 조선시대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전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적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해 공략하는 탁월한 전술 운용과, 철저한 정보 수집을 통한 사전 준비 강구 등 뛰어난 군사적 능력. 이를 토대로 이뤄낸 빛나는 전공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엄정한 군율 유지와 실전적인 훈련을 통해 비관적 태도가 만연하던 당시 휘하 장병들의 군기를 확립했다. 전투에서는 직접 몸소 솔선수범하며 장병들을 독려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역량도 최고 수준이었고, 올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일평생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삶을 살았으며, 자신 휘하의 부하들과 백성들은 말단 병졸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챙기고 보살폈고, 권력욕이나 출세욕 등 개인적 영달에 관한 욕심도 없어 자신의 전공을 부하에게 돌리기도 하는 등 개인으로서의 인품까지 훌륭했다. 또한 국왕을 위시한 조정의 의심과 핍박으로 파직되어 고초를 겪고 복직해서도, 후임자의 실책으로 인해 전력의 대부분은 상실되었고 오랜 전시상황에 따른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려 본인의 심신 역시 지치고 피로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기적같은 성과를 이룩해낸 철인적 면모까지. 그야말로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명장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다.[8] 이순신은 단순히 한국사를 넘어서 세계사에서도 위대한 해군 제독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로,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해군 제독 가운데 이순신만한 평가를 받는 제독은 해군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테미스토클레스와, 미힐 더라위터르, 호레이쇼 넬슨 정도 뿐으로 극소수에 불과하며,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던 2차 대전기 영국군/미군의 장군들도 이순신의 이름과 거북선은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에서는 다소 동양 해전을 과소평가하는 묘사가 있지만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서 싸웠다며 라이벌 기믹까지 달아 주면서 추켜세운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일본 해군도 수백년 전에 패배한 적이 있었다며 일본 해군과의 싸움 도중 이순신을 언급하기도 하였다.[9] 을묘왜변 당시 활약하였으며 을묘왜변에서부터 임진왜란 사이의 조선 수군의 전술 변화를 주도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조방장[91]으로 활약하였다. 이순신의 수군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10] 이괄의 난 당시 도원수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했다.[11]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의 관민들을 이끌고 용골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병장[12] 이괄의 난의 진압에 참여하고 정묘호란 당시 벌어진 안주성 전투에서 전사[13] 심양으로 밀고 올라가자는 임경업의 황당한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 때문에 폄하되기도 했던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 손꼽히게 뛰어난 장수이다. 특히 거의 조선군의 참패로 도배되었던 병자호란에서 유일무이하게 김화 전투에서 조선군의 대승을 이끌었다.[14]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화운동에 모두 참여하여 하술할 백선엽과 달리 정통성 측면에서도 전혀 흠 잡을 곳이 없다.[15]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나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켜냈다.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백선엽의 위상이 셀프 영웅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소련 시절 기밀자료 등을 토대로 셀프 영웅화는 극단적인 주장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16] 북한의 방호산과 같이 6.25전쟁 당시 사단급 지휘관 중에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장군. 40대에 사망하여, 100살 가까이 살면서 활발한 활동을 한 백선엽보다 덜 알려져있지만, 6.25 참전 장군들이 대부분 살아있던 1980년대 선정된 6.25전쟁 4대 영웅 중 김홍일과 함께 한국군 장성 2명 중 1명으로 뽑혔다.[17] 6.25 전쟁 당시 초반 전시 상황에서 적화통일을 눈앞에 둘 정도까지 무시무시한 전공을 세우며 대한민국 국군에 그 악명을 널리 떨쳤다.[18] 이념과는 상관없이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측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받는다. 전쟁 이후 그의 능력을 견제한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다.[19] 역시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20] 태공망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인물. 오랫동안 무신(武神)으로 숭상받았던 뛰어난 전략가다.[21] 전파목[22]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병법가[23] 손자병법 집필자. 후대에 미친 군사학적 영향으로는 춘추전국시대를 넘어 아시아의 대다수 무장들보다 앞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명장이자 전략가이다.[24] 전성기의 제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넣은 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명장[25] 기전[26] 오자병법 집필자[27]파목[28] 기전파[29] 중국사 명장의 대명사.[30]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무력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전투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패왕.[31] 초한지 때문에 군사적 능력이 형편 없다고 오해받는 경우가 상당히 많지만, 사실 초한전쟁 내내 항우와 직접 맞싸움을 했으며 사실상 한신을 제외하고는 휘하 장수들 중 군재로 이길 자가 없던 백전노장이었다.[32] 진나라 조정만 멀쩡 했다면 모든 반란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던 진나라 최후의 명장.[33] 유격전의 명수로 필요할 때마다 항우의 숨통을 죄어온 노익장.[34] 한신과 팽월만이 걱정이었고 황제도 늙어서 싸움을 싫어하고 오지 못하니 내가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본인이 언급할 정도로 한신이나 한고제, 팽월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전한의 장군들을 모두 능가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35] 한신이 군사를 이끌어 이기는 사령관으로써의 명장이라면 이 쪽은 항상 용감하게 나가서 싸운 용장.[36] 비록 흉노 원정 때 패하고 붙잡혔다지만 병사 수천 명으로 흉노족 기병 수만 명을 수차례 격퇴시킨 점을 볼 때 명장으로서 자질은 충분했다. 단지 보급이 제때 오질 못해 더 이상 싸우지 못했을 뿐이다.[37] 만인지적, 관장지용이라 불린 전진의 명장.[38] 전연의 명장이자 명재상, 모용수의 형. 염민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사서에 공인된 무패 장수이기도 하다.[39] 전진의 명장이자 명재상.[40] 동진이라고 적혀있지만 동진을 무너트린 유송의 창업군주 유유와 그가 만든 유송의 창업을 보지 못하고 동진 시기에 죽은 유유의 부하 명장 둘이라 동진의 명장이 아니라 동진 시기의 명장이라고 봐야한다.[41] 유유의 부하로 북벌에 공을 세운 세 장군 중 한 명이다. 선봉에 서서 후진군을 쳐부수고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왕진악을 싫어하던 또 다른 유송의 명장 심전자에게 잡혀서 허무하게 사망하였다.[42] 유유의 부하로 북벌에 공을 세운 세 장군 중 한 명이다. 고작 1,000명의 병력으로 수만명의 후진요홍군을 쳐부수고 10,000명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원래부터 왕진악을 싫어하던 심전자는 양 진영간의 내분이 터지자 왕진악을 죽였고 심전자 역시 왕진악의 친척 왕수에게 죽임을 당했다.[43] 유유장안을 점령한 후 장안에 남지 않고 다시 원래 수도인 건강(건업에서 바뀐 이름)으로 돌아갔고, 장안에 자신의 차남인 12살의 유의진과 심전자와 왕진악을 남겼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왕진악과 심전자가 같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인사였는데 둘의 갈등을 조정해야할 유의진은 12살의 개초딩을 넘은 막장이었고 중재할 능력은 없었다. 결국 사이가 안좋던 명장 둘의 갈등은 서로의 목숨을 앗아갔다. 심전자를 죽인 왕진악의 친척 왕수는 유의진에게 죽었고, 명장 둘이 없어진 관중지역과 장안은 북하혁련발발에게 바로 점령당했다.[44] 유유의 부하로 북벌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심전자왕진악이 죽은 후 오랫동안 유송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명장이었고 공을 많이 세웠으나 그를 시기한 권신들의 모함으로 사망하였다. "어찌하여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무느냐"라는 말을 죽기 전에 남겼을 정도로 자타공인 유송의 대들보같은 존재였다. 단도제가 죽자 그의 유언에 부합하게 유송은 수시로 북위의 침략을 받게 된다.[45] 종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주역[46] 북벌북위의 수도 낙양까지 탈환한 양나라 최고의 명장[47] 양대안을 상대로 종리성을 지킨 명장[48] 북위에서 양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떨친 명장으로 후경의 난으로 양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젊었을 적의 곡률광을 패배시키기도 하였다.[49] 후경의 난을 종식시킨 인물로 효원제 사후에 진패선과 함께 보정대신을 맡았다.[50] 을지문덕에게 완전히 털린 그 장수 맞다(...).[51] 사실상 수나라 최후의 명장으로 행보가 진나라의 장한과 상당히 흡사하다.[52] 백제 시절에도 명장이었으나 당나라로 넘어와서 포텐이 제대로 폭발했다. 특히 토번 전선에서 그야말로 맹활약하며 토번군이 그가 떴다하면 두려워했다고 언급될 정도.[53] 성당 시기 명장으로, 토번과 돌궐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돌궐 제2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를룩, 발실밀, 회흘을 초유하였고 자신도 막북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뒤, 카를룩, 발실밀, 회흘이 돌궐에 난을 일으키자 자신도 돌궐을 공격함으로써 돌궐 제2제국 멸망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이임보의 모함에 걸려 한직으로 좌천되고, 그 후임 자리는 가서한이 이어받는다. 의외로 인맥이 대단하였는데, 튀르기시 출신의 가서한, 거란족 출신의 이광필, 고구려 출신의 왕사례를 휘하로 두었고, 이들 셋은 안사의 난 진압에 참전했다.[54] 제2차 양양 공방전에서 이증백의 밑에서 몽골군과 싸웠고 백하 전투 및 면류관 전투에서 동문위를 격파했고 몽골군을 막아냈다. 악주 전투에서는 장승과 여문신이 난전 중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략으로 몽골군의 공언휘를 주살하는 등 맹활약한다. 그러나 양양 함락 뒤인 1275년 원나라의 군대가 남하하자, 그가 지키던 강릉은 외부의 지원이 없게 되어 원에 항복한다.[55] 전공 과장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긴 하나 뛰어난 명장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56] 악비, 한세충등 명장들과 금나라의 공세를 막아내고 금나라군을 대파시킨 명장이다.[57] 북한과 북송의 명장으로, 거란족의 에 대항한 명장이었다.[58] 양업의 아들로, 송태종 시기의 인물로 거란을 방비하였다. 일명 양육랑.[59] 악비의 부장으로 무명을 떨쳤다.[60] 곽규와 함께 서하 전선에서 활동한 양대의 명장이었다.[61] 범중엄의 밑에서 경력을 쌓았고 임복과 갈회민 군대의 패배를 예측해 그게 현실이 되자 지병자로 칭송받았다. 이후에는 호북 일대의 만족을 토벌했으며, 1067년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해 많은 피해를 입히자[92] 수주를 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송 신종의 조서를 은닉하는 등 이에 반대했고 수주는 북송의 영토로 남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베트남 리 왕조가 전쟁을 일으키자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용맹을 떨치나, 풍토병으로 인해 잃은 병사의 수가 많아 면직된다.[62]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방비했다.[63] 북송 시기 항금명장.[64] 범중엄과 같이 서하의 20만 대군으로 부터 북송을 지켜냈다.[65] 남송 초기 항금명장이다.[66] 맹공의 수하 장수로서 경력을 시작하였고, 양회 지역에서 이단을 막아내었으며, 양양 공방전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한다. 이후 남송 조정이 원에 투항하자 남송 황실의 사신을 원과 한패로 간주하였고, 문천상을 원의 간첩으로 의심하였다. 이후 하귀가 회서 지역을 바치고 투항하지만, 이정지는 강재와 함께 양주 지역에서 원의 군대와 장렬한 투쟁을 벌이다 결국 부장의 배신으로 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혀 처형된다.[67] 맹공의 부친이다. 정강의 변 이후 반세기가 흘러 항에 대한 관심이 쏠리면서 당대 3대 항금명장 중 하나였다.[68] 맹종정과 똑같이 당대 3대 항금명장 중 하나였다.[69] 맹종정, 호재흥과 같이 당대 3대 항금명장 중 하나였다. 가섭의 아들이 훗날 중국사에서 유명한 남송 말기의 권신이자 재상으로 될 가사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70] 양양 공방전에서 5년이나 원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71] 소흥화의 이후에도 금의 정세를 염탐했고 해릉양왕 시기 금군이 남하하자 산동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다.[72] 하지만 얼마못가 남송은 멸망한다.[73] 애산 전투에서 패하고 얼마안가 오파령 근처 바다에서 태풍이 발생해 배가 전복되어 익사한다.[74] 남송 중기 명장으로, 1206년 한탁주개희북벌 당시 금군을 농락한 명장이었다.[75] 송 신종 시기 평융책을 올려 유용가 부족을 귀순시킨 뒤, 북송 정권이 하황을 수복하는 데 기여했다.[76] 구법당이 토번에 넘겨준 하황 일대를 수복했다.[77] 몽송전쟁 시기 양평관에서 왕세현이 이끄는 몽골군과 맞서나 중과부적으로 패사한다.[78] 조규의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여문덕과 두고, 하귀와 함께 양회 전선에서 몽골군을 막아낸 이후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아 몽골군을 방어한다.[79] 아골타의 이복 동생이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그의 맹활약으로 9성을 반환받을 수 있었다.[80] 알새와 함께 고려와의 전쟁에 종군하였으며 고영창의 대발해를 멸망시켰다.[81] 아골타와 함께 금나라를 건국한 주역으로, 종한의 업적은 아골타와 비견되거나 같다고 한다. 그의 동상은 아골타 옆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후 금 진왕으로 추시 되었다.[82] 아골타의 차남. 종한과 함께 북송을 멸망시켰다.[83] 아골타의 5남.[84] 태평천국 운동 진압을 계기로, 청나라 육군과 해군 등을 근대화 시킨 인물이다. 이른바 북양군을 만든 인물. 하지만 청일전쟁에서는 무능한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85] 반란의 실패 이유도 전투에서 져서가 아닌, 장쭤린의 책략과 그가 들여온 일본의 지원 때문이었다.[86] 히데요시는 직계 부하였고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종속된 다이묘였다. 다만 이마가와 가와는 달리 간섭은 했어도 독립성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다건 도쿠가와건 주위에 적이 워낙 많아서 손해보는 장사도 아니었다.[87]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신겐과는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운 적이 없다. 사실상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맡겨놓고 오다 자신은 이마가와, 사이토, 아사이, 아사쿠라, 미요시 등과 대립했기 때문. 물론 정치적으로 신겐과 대립한 적은 많이 있었다.[88] 물론 그렇다고 오다가 옥타비아누스처럼 군사적으로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수로 용감히 싸우는 것보다는 적보다 풍부한 물량으로 싸우는 방식이었던 것. 실제로 명장의 대표 조건 중 하나가 자신이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보다 많은 물량을 만들어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나간 노부나가는 충분히 명장이라 할만하다.[89] 사실 그가 이오지마 전투를 계획한 이유는 미국이 일본 본토까지 가는 데 부담을 주기 위한 마지막 걸림돌로 이오지마를 설정하고, 이오지마에서 엄청난 고전을 하면 미군이 일본 본토까지 가는 것은 포기할 것이라고 여겨서인데, 미국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 어려우리라고 판단한 것까지는 맞았는데 미국은 "그럼 상륙하지 말고 쓸어버릴 방도를 찾아보자!"라며 일본에 2개의 태양을 더 띄웠다(...)[90] 아키야마 요시후루 육군대장의 친동생이며 쓰시마 해전 당시 승리의 주역으로 연합함대 작전 담당 선임참모 겸 제1함대 선임참모, 러일전쟁 후 해군 군무국장 등 요직을 역임한 후 중병으로 인해 해군중장으로 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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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참모장[92] 그 이전 충악이 외명산 부락을 항복시킨 뒤 수주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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