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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8:16:34

쑨리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ROC_Commanding_General_of_Army_Flag.svg.png
대만 육군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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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제7대 육군총사령
孫立人
쑨리런(손입인) | Sun Li-jen
파일:쑨리런 장군.jpg
<colbgcolor=#007b00><colcolor=#FFF> 출생 1900년 12월 8일
청나라 안후이성 루저우부
사망 1990년 11월 19일 (향년 89세)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중시
학력 칭화대학 (졸업)
퍼듀대학교 (토목공학 / 학사)
버지니아 군사대학 (자유전공 / 문학사)
경력 혁명실천연구원 교육위원회 부주임
최종 당적
군사 경력
임관 버지니아 군사대학
복무 중화민국 육군
1928년 ~ 1955년
최종 계급 2급상장 (중화민국 육군)
최종 보직 총통부 참군장
주요 보직 난징중앙당무학교 학생대대장
헌경교도총대 제2대대장
육해공군총사령부 시위총대 부총대장[1]
재무부 세무경찰총단 특과병단장
재무부 세무경찰총단 제4보병단장
재무부 세무경찰총단 제2지대장
재무부 염무총국 집사총대장
재무부 염무총국 세경총대장
제38사단장
만달레이위수사령관
제1군단 부군단장
창춘경비사령관
둥베이보안사령부 부사령관
육군부사령
육군총사령
타이완방위사령관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in_Wang_and_Sun.jpg
코끼리 린왕과 함께[2]

대만의 군인.

2. 생애

안후이성 사람으로 1923년 베이징의 칭화대학 공대를 졸업한 뒤 미국 퍼듀 대학교에 유학하여 1925년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미국 버지니아 군사학교에서 수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으며 미국 유학 경험의 군 장교로 미국의 지원에 의한 중화민국 군사 현대화에 공헌한 인물이다.

1928년부터 난징 중앙정치학교에서 재직하였고 육군 전투부대 장교로 근무하였다. 1937년 일본군과의 상하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기도 했으나 회복 후 이듬해 육군 장교에 복귀하였고 현지 각 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1945년에 육군 소장, 1948년에 육군 중장에 진급하였다. 중일전쟁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육군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2차대전 당시 국민혁명군(중화민국군)은 공격력도 낮았고 장비도 열약하고 지휘체계도 부족했다고 한다.[3] 당시 미국 지원으로 장비와 훈련 등을 갖춘 쑨리런 장군 산하의 X군(X-Force)만이 1944년 버마 전투에서 좋은 성과를 남겼다고 한다.[4]

1950년에는 중화민국군 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그가 CIA와 획책하여 쿠데타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특무를 운영하던 장징궈에 찍혔다. 1955년에 소련에서 교육받은 장징궈가 정치장교 스타일의 군 감시 체계를 도입한 것에 쑨리런이 반발하자, 장징궈는 쑨리런의 부하를 체포해 고문하여 쑨리런이 중국공산당과 작당해 쿠데타와 대만 독립을 획책한다는 거짓 자백을 얻어낸다. 이로 인해 쑨리런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연금되었다. 그는 30년간 가택연금되었다가 장징궈가 죽고 난 1988년에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 1990년양안관계가 어느정도 개선이 되자 중국 대륙으로 편지를 작성해서 부치기도 했다.

1990년에 89세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쑨리런 쿠데타 모의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져 2001년에 누명임이 공식 확인되었고, 2011년에 마잉주 총통이 쑨리런 쿠데타 누명에 대해 유족에게 사과하였다.

비록 국민당 출신이었고 국부천대 이후 대만에서 살긴 했지만[5] 버마 전선에서 맹활약을 한 명장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말년에 억울하게 장제스에게 찍혀서 연금생활을 한 탓에 말년에 연금이 해제되자 민주진보당 인사들도 쑨리런의 입에서 장제스에 대한 험담이 나올 걸 기대하면서 쑨리런을 종종 찾아갔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쑨리런은 상관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3. 여담



[1] 현재 대한민국 국군과 굳이 비교하자면, 육해공군총사령부를 지원하며 지키는 부대로 계룡대 근무지원단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2] 린왕이라는 코끼리는 코끼리의 평균 수명인 6~70세를 넘어 무려 85년을 산 장수 코끼리였다[3] 오죽하면 당시 국민혁명군엔 3명 중 1명만 총을 보급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국민혁명군은 머릿수만 많은 허접한 군대였다. 물론 1937년부터 시작된 만큼 전쟁의 장기화와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그나마 있던 공업화된 도심들을 모조리 잃고 연합국의 원조도 형편없었던 걸로 감안해야 하지만.[4] 장 로페츠 et al.제 2차 세계대전 인포그래픽.레드리버.2021.pp.74[5] 이 쪽은 기존의 국민당 인사들과 다르게 국부천대 이전부터 대만으로 파병나간 상태였다.[6] 1차 세계대전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장이 느린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