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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8 06:59:50

관흔

官昕

1. 개요2. 행적3. 인지도

1. 개요

후백제의 장수.

후백제의 인물들 중에서 견훤, 상귀, 상애와 함께 구체적으로 군공이 확인되는 몇 안 되는 장수 중 하나이다. 이후 고려가 승리하면서 후백제 측 인물들의 행적은 너무 간략하게 기록되었는데다가 고대에 남은 기록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은 판이라...

2. 행적

928년 견훤의 명을 받은 관흔은 양산[1]에 성을 쌓는데 이에 왕건은 왕충을 보내 공격하려 한다. 이에 관흔은 신속하게 군사를 우회하여 대야성을 점령하고 이어 대목군에서 식량을 확보한 후 오어곡(부곡성)에 주둔해 죽령 지방까지 장악한다. 거의 한반도 중부 지방을 가로지르는 신속한 행보를 보인 것만 봐도 관흔의 왕충 유인 및 이로 인해 수비가 빈약해진 남부 지방의 빈틈을 찌르는 작전이 미리 치밀하게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인지도

위에 그의 행적을 보면 대야성을 재탈환하고 이어서 죽령 지방을 장악해 고려군의 진로를 차단한다는 기록만 보자면 후백제 장수들 중 전공이 단연 뛰어나다 할 수 있다. 허나 인지도가 상귀, 상애와 비교해도 매우 딸린다. 후삼국시대에 나름 관심있는 역사학도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렇듯 혁혁한 군공을 세웠음에도 인지도가 이리 적은 건 드라마 태조 왕건의 책임이 크다. 신덕, 애술에게 밀리지만 등장을 하긴 하는 상귀와 달리 관흔은 본 드라마에서 단 한 번이라도 출연이 없을 뿐 더러 언급도 되지 않는다. 태조 왕건에서 후백제군의 용장으로 나오는 인물들은 수달(능창) 같이 견훤과 관련이 있다는 기록이 없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해적이거나[2] 추허조, 최필, 애술 같이 고려군에 잡히거나 항복한 기록밖에 없는, 즉 장수로서 어땠는지 알 수 없는 이들 일색이라 정작 대공을 세운 관흔이 빠진게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1] 현 충북 영동군 양산면[2] '정황상' 친견훤계 해적집단이라고 볼 여지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흔, 상귀처럼 구체적인 전공이 기록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