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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갈문왕

김구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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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의 갈문왕
구도 갈문왕 | 仇道 葛文王
본관 경주 김씨
구도(仇道)
부친 김욱보
배우자 술례부인 박씨
가계 아들 김미추, 김말구
딸 옥모부인
호칭 구도 갈문왕(仇道 葛文王)
군사경력
참전 소문국 정복
모산성 전투
구양 전투
와산 전투

1. 개요2. 생애
2.1. 실제 기년 문제2.2. 실제 계보 문제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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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의 5세손으로, 신라 최초의 김씨 국왕인 제13대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 그리고 조분 이사금의 외조부. 김구도, 혹은 구도 갈문왕.

아버지는 각간 욱보(郁輔) 또는 욱부(郁部)이며, 아내는 이칠 갈문왕(伊柒葛文王)의 딸 술례부인(述禮夫人)이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이라는 딸이 있었고 옥모부인은 석씨 족단의 골정(骨正)과 혼인해 외손자 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을 두었다. 아들로는 미추 이사금과 미추의 동생 말구(末仇)[1]가 있었으며 아들 또는 손자로 실성 마립간의 아버지 대서지(大西知)가 있었다 한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대서지가 아들보다 손자일 가능성을 높게 본다.

2. 생애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파진찬이 됐고 이때부터 커리어를 시작해 제9대 벌휴 이사금 때 장군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벌휴 이사금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185년에 군주에 임명돼 지금의 의성군으로 추정되는 소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했고, 188년에 백제의 공격을 모산성에서 방어, 189년에는 백제군에게 반격해 격파했다. 그러나 190년에 백제의 기습공격에 패배해 부곡성주로 좌천됐다.

아들 미추가 먼 훗날 왕이 된 후 갈문왕으로 추증됐다.

구도의 딸은 조분 이사금의 어머니 옥모부인이고, 구도의 아들들은 미추 이사금과 말구(末仇)인데 말구의 아들이 내물 마립간이다. 정작 본인은 신라 왕에 오르진 못했지만 여러모로 김씨 왕계의 중요한 축이었던 인물.

2.1. 실제 기년 문제

고고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구도를 포함한 김씨 족단은 원래 충주 금릉동 출신이었다가 백제에게 4세기 초반에 멸망하자 신라로 이주한 인물이라, 구도의 활동 시기는 4세기 초반에서 올라가지 않는다.

따라서 벌휴 시절에 장군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벌휴는 흘해의 5대조(벌휴-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이기 때문에 3세기 중후반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고학적으로 신라에 석씨 족단이 처음 출몰한 시기와 일치하는 인물로 구도 갈문왕이 신라에 활동한 지 반세기는 더 전이다. 4세기에 활동한 석씨 임금은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 유례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이기 때문에 이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아달라 이사금도 실제로는 4세기 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되기 때문에, 구도 갈문왕은 실제로는 4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술례부인 박씨의 손자인 내물이 태어난 시기(330~340년대생)를 감안하면 구도는 금릉동에서 왕족으로 태어났다가 백제에게 나라가 망하자 신라로 이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구도가 금릉동에서 신라로 이주한 뒤 신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이칠 갈문왕의 딸 술례부인 박씨와 혼인하여 미추와 말구를 가졌고, 이후 4세기 초중반에 신라의 장군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술례부인의 차남으로 추정되는 말구의 아들 내물이 330~340년대생, 전처의 친손자로 추정되는 실성이 350년대생으로 추정되기에 미추는 310~320년대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미추가 누나 옥모부인의 손녀인 광명부인과 혼인하긴 했지만, 광명부인은 장녀 보반부인이 아들들을 낳은 시기(380년대~393년)와 차녀 아류부인의 딸 차로부인이 내물의 장남 눌지 마립간과 혼인한 시기(410년대)를 고려하면 미추와 비슷한 나이가 아니라 딸뻘(340년대생)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미추의 사위가 된 내물, 실성도 마찬가지로 보반부인, 아류부인과 비슷한 나이가 아니라 딸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옥모부인과 미추는 2대 차이가 아니라 1대 차이인데 미추가 1대 아래인 광명부인과 혼인해서 '누나의 손녀'와 결혼한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아달라 이사금이 4세기 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여겨지며, 술례부인의 장남 미추가 주로 활동한 시기가 4세기 중반임이 정설이기 때문에 구도의 정확한 나이는 불명이나 당시 기준으로 제법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구도의 후손인 신라 김씨 왕조가 근친혼 누적이 적을 때는 60대 이상 산 경우가 많은데 근친혼 누적이 심해질수록 수명이 깎이는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감안하면 구도가 장수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대에 금릉동에서 전처와의 사이에서 옥모부인과 대서지의 아버지를, 신라로 이주한 뒤 후처 술례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40대에 미추와 말구를 낳았고 60~70대 정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2.2. 실제 계보 문제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골정과 혼인하고, 미추 이사금의 처 광명부인조분 이사금과 아이혜부인의 차녀이자 명원부인의 여동생인 건 사실일 가능성이 떨어진다.

흘해 이사금일본서기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320년에 태어났으며, 학계에서도 흘해는 4세기 초반에 태어난 것이 맞다고 여긴다. 흘해는 모계로는 혁거세의 9대손인데, 역산하면 흘해의 9대조모는 140년대~150년대에 태어났음을 추정 가능하다. 2세기 후반에 혁거세 거서간이 사로국을 건국했음을 고려하면 흘해가 혁거세의 9대손인 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골정과 흘해의 사이가 4대(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나 난다. 골정의 딸은 4촌[3] 내해 이사금과 혼인했고, 골정의 딸의 딸인 아이혜부인은 골정의 장남으로 5촌/3촌인 조분 이사금과 혼인했으며, 아이혜부인의 장녀 명원부인은 내해의 차남으로 6촌/3촌인 석우로와 혼인하여 흘해를 낳았다. 따라서 흘해의 4대조인 골정은 3세기 중후반(230~240년대생 추정)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미추가 옥모부인의 손녀와 혼인한 건 사실로 보이는데, 구도의 딸인 옥모부인이 3세기 중후반 인물인 골정과 혼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례부인 박씨가 내해의 어머니 내례부인과 지마의 딸 내례부인으로 둘임을 고려하면, 골정의 부인 옥모부인은 구도의 딸 옥모부인과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다.

사서에서 골정&옥모부인-조분-광명부인&미추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구도의 딸 옥모부인은 4세기 초반 석씨 왕족과 혼인했고, 옥모부인의 친손녀인 광명부인 석씨와 미추가 혼인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미추의 생년(310~320년대생)이 흘해(320년생)와 가까운 것을 고려하면 구도의 딸 옥모부인은 명원부인과 같은 세대로 보이며, 조분의 직계이면서 명원부인과 동세대라면 부인이 불명인 조분의 아들이자 기림 이사금의 아버지인 걸숙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구도의 딸 옥모부인의 남편이 걸숙일 경우 광명부인은 '누나의 친손녀'임이 강조되는 걸 고려하면 사서에서 처자식이 아예 기록되지 않았으며 12년의 재위기간 내내 기록이 매우 부실한 기림 이사금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금릉동의 마지막 왕이었는지 왕족의 일원에 지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금릉동의 건국자인 성한왕의 4대손인 건 사실로 보인다. 금릉동에 마한 소국이 건국된 시기는 3세기 초중반으로 여겨지는데, 구도는 270~28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기에 4대조인 성한왕이 190~200년대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성한왕은 246년 8월 이후에 일어난 기리영 전투의 여파로 서북한에서 금릉동에 이주해 건국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경우 성한왕이 나이가 제법 많았을 때 건국했다 가정하면 된다.

다만 이 경우 구도는 성한왕의 후손은 맞지만 왕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구도는 후손들이 탁부에 속했던 것을 보아 구도가 술례부인 박씨와 혼인하며 탁부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4세기 초반 금릉동에서 사로국으로 이주한 김씨 족단은 한기부라는 독자적인 부를 세웠고 한기부 수장 보제, 4세기 초중반 활동한 파사 이사금의 장인 허루 갈문왕, 4세기 중반 지마 이사금의 장인 마제 갈문왕 등이 '한기부의 족장'이자 '갈문왕'으로 나온다. 특히 보제는 4세기 극초반으로 추정되는 시기 금관국의 건국자 수로왕이 사로국에 방문하자 혼자 하급 사무관을 보내 연회를 파토냈고, 이에 분노한 수로왕이 자객을 보내 보제를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3세기 중후반에 금관국을 건국해 수십 년간 재위하며 당시 한반도 제국(諸國)에서 사로국보다 높은 국제적 위상을 누리던 금관국의 건국자에게 보이는 태도로는 너무 비정상적이다.

일반적으로 외부에서 이주해 나라를 세운 경우 선주민과 혼인해 태어난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구도가 성한왕의 4대손이라면 성한왕이 금릉동에 이주하기 전에 태어났다는 뜻이 된다. 구도의 후손인 신라 김씨 왕조가 한기부 김씨와 이상할 정도로 계보가 괴리된 양상을 보이는 걸 감안하면 한기부 김씨가 금릉동 왕조의 직계고, 구도는 금릉동 시절 성한왕의 후손으로서 방계 취급을 받던 일족의 후손이 출세해서 입장이 역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기타

현대 고고학계에서 김씨 족단은 사실 3세기 중반 충주 금릉동에 친목지국 성향 마한 소국을 세웠다가[4] 3세기 후반부터 백제와 충돌, 금릉동 마한 소국은 목지국 잔여 세력으로 백제와 싸우다 4세기 초반에 다른 충북 마한 소국들과 함께 멸망, 서라벌로 이주한 뒤 4세기 중반에 미추 이사금이 서라벌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5]

충주 일대가 아예 진한 소속이었거나 진한 맹주국이었다는 추측은 최근 고고학 발굴로 부정되지만, 영남 진한 거수국들과 청주, 충주, 괴산 등 충북 마한 거수국들이 아주 일찍부터 고고학적으로 서로 밀접한 교류를 한 건 사실로 드러난다. 충남 마한 소국들이 3세기 후반에 백제에게 죄다 털리고 4세기 초반에 전북 김제까지 남하하는 상황에서 4세기 초반까지 충북 마한 소국들이 버틸 수 있던 건 진한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금릉동이 백제에게 멸망한 뒤 신라로 이주해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3세기 후반부터 신라와 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기년이 엉터리인 삼국사기 초기 기사에서 충북 일대에서 신라와 백제가 충돌했다는 기사도 실제로는 김씨 족단이 금릉동 시절 백제와 싸운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청당동 목지국 본가는 끝까지 백제와 맞선 대가로 세력 자체가 공중분해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고[6] 다른 충북 소국들도 기록이 없는데다 고고학적으로는 백제의 철저한 보복으로 뿌리까지 뽑힌 사례들이 꽤 여럿 발견되고 있다. 만만찮은 세력을 갖고 백제와 백 년 넘게 줄다리기하면서 간을 본 침미다례도 정작 초토화된 거수국의 사례는 둘 뿐(송지면 군곡리 신미국, 신월리 ?국)인 걸로 보면 백제가 충북 일대에 유독 악감정이 많았거나 충북 일대에서 백제에게 저항이 심했다는 증거다. 이런 식의 전면적인 물리적 세력 제거가 기록까지 잘 남은 사례가 바로 하필이면 다름아닌 서라벌 기습인 걸 고려해보면, 백제의 친목지국 세력에 대한 보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씨 족단이 미리 사로국의 박씨, 석씨와 혼맥을 구축한 게 전화위복이 된 셈. 훗날 김씨가 옛 목지국 친위 세력들의 강역인 충주, 보은 일대에서 정예병을 양성하여 그 정예병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것, 그리고 거꾸로 후삼국시대 때는 충주를 제외한 그 지역이 후백제에게 넘어가서 서라벌을 함락하여 신라의 영토 국가로서 생명을 끝장낸 대신, 김씨 왕가는 복원한 병력 양성 지역이 된 걸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하다.


[1]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다. 291년(유례 이사금 8년) 1월에 이벌찬에 임명됐으며 인품이 곧고 충성스럽고 지략이 있어 유례 이사금이 자주 조언을 구했다.[2] 삼국유사에서 박제상의 처 치술부인이 실성의 딸로 나오는데, 치술부인은 어머니가 기록에 없으며 제상은 360~370년대생으로 추정된다. 350년대생인 실성의 사위가 맞다면 치술부인은 아류부인의 딸이 아니라 실성의 전처의 딸일 가능성이 더 높다.[3] 골정의 남동생 이매와 내례부인 박씨의 아들. 내례부인 박씨는 4세기 중반 지마 이사금의 딸이자 아달라 이사금의 왕후인 내례부인 박씨와 동명이인으로 추정된다.[4] 그래도 충북 일대의 웬만한 마한 소국들과 규모에서 꿇리지 않았다고 한다.[5] 신라가 기년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신라 상대는 왕족 계보는 정확한 편이나, 고고학적으로 2세기 후반에 건국된 사로국 역사를 기원전 1세기까지 소급하다 보니 연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6] 다만 백제에 일찍부터 협조한 청당동 목지국의 분가인 천안 용원리 세력은 백제의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고 용원리를 떠나는데, 이들이 대성팔족의 목라씨이자 현대의 나주 임씨라는 가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