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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20:13:54

석달개


파일:태평천국 국기.svg
태평천국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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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태평천국 운동
3.1. 군사 활동3.2. 천경사변3.3. 외로운 원정길3.4. 최후
4. 사생활5. 평가6. 여담


石達開
중국어 간체자: 石達開/石达开
병음: Shí Dákāi, 스다카이
(1831.3.1~1863.6.25)

1. 개요

"다들 고만고만하지만 석달개만은 탄복할 만하다. 그 기략이 실로 깊다."
이수성

태평천국의 지도자로 정식 명칭은 좌군주장익왕(左軍主將翼王). 익왕(翼王)으로 알려졌다.

태평천국 지도자, 장군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사람이자 당대에도, 그리고 후세에도 가장 널리 추앙되는 인물이다.

2. 유년기

석달개는 광시성 구이강 출신 객가인으로 입양된 후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었으며, 지역사회에서 지역 업무를 수행할 때의 관대함, 무재, 그리고 정의로움으로 알려져 있었다. 석달개는 과거에 합격하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

3. 태평천국 운동

1849년 16세의 석달개는 풍운산과 홍수전에 의해 발탁되었고, 태평천국의 지도층에 합류했다. 천재적인 전술과 숙련된 병력 훈련 및 공금에 대한 공정한 행정이 빠르게 부각되어, 석달개는 19세의 나이에 자신의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3.1. 군사 활동

1851년 1월 홍수전과 석달개를 비롯한 태평천국의 수뇌부는 광서성 금전촌에서 20,0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태평천국의 공식적인 출범을 선언했다. 5월, 광서성의 태평군은 강력한 공격을 펼치고 있던 청군에게 쫓기고 있었다. 인의(仁義)의 수문에서 석달개는 300명의 병력으로 잠입 작전을 펼쳐 5,000명의 적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8월 태평군이 영안성을 점령했을 때, 석달개의 신사적인 통치와 공정한 행정으로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은 석달개의 명성에 끌려 자발적으로 태평천국에 합류했다. 10월, 홍수전은 그 당시 20세의 석달개를 익왕(翼王) 성광지왕(聖光之王)에 봉했다.[1] 석달개는 이후 천경을 향한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석달개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태평군을 지휘하며 청군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태평천국과 청나라는 모두 석달개의 선정과 태평천국의 영토마다 울려퍼지는 석달개의 승리를 찬양하는 민요에 대해 기록했다.

천경의 요새화 작업을 하던 중 석달개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성취는 안경역제(安慶易制, 안칭 개혁)였다. 1854년, 석달개는 안경에 도착해서 군사와 민간의 일을 전담하면서 농업을 고무하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상거래를 촉진하고, 효율적이고 투명한 관료제를 위한 현지 인재를 영입하는 자비로운 법질서를 세웠다. 석달개는 심하게 악화된 치안을 회복시키기 위해 민간인들에게 병사들의 횡포를 보고하기를 장려하고 공정하게 처벌했다. 석달개의 행정 몇 달 후 안경은 태평천국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요새화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855년 석달개의 후커우 전투는 가장 극적인 태평천국의 승리 중 하나였다.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 수사(湘軍 水師)는 청군의 정예부대로 여겨졌다. 석달개는 12월에 전쟁터에 도착했고, 태평군이 이미 심각한 패배를 당한 상태에서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석달개는 꼼꼼하게 전투를 계획했는데, 철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적진을 지속적으로 타격할 소형 함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댐으로 청의 군함을 뒤집고 상군을 반으로 쪼갰다. 석달개는 태평천국에 큰 승리를 안겨주는 유연한 공세를 이끌었고, 증국번은 이에 자살을 시도했으며[2] 이후에 석달개를 "태평천국에서 가장 노련하고 강한 자"라고 불렀다.

3.2. 천경사변

1856년, 천경사변으로 알려져 있는 동왕 양수청과 북왕 위창휘 간의 수만 명을 죽이는 내전이 발발했다. 석달개는 학살 소식을 듣고 말리기 위해 천경으로 돌아가지만, 도시에서 도망치도록 강요받고 가족 전체가 위창휘에게 살해당했다. 석달개는 안경으로 탈출하고 반쯤 미친 위창휘에게 대항할 병력을 이끌지만, 청군이 화난을 위협함을 알고 국가를 우선시해 방어를 도우러 군대를 보낸다. 이 행보는 훗날 석달개에게 찬사를 받게 만들었다. 11월, 홍수전은 위창휘의 처형을 명령하고 석달개가 천경으로 돌아와 행정을 지도하기를 요구했다. 석달개는 자신을 경계하는 홍수전의 깊은 의심을 덜기 위해 천경에 질서를 되찾고 태평천국의 무너진 도덕과 공공 지원을 재정비했다. 홍수전은 두 형에게 권력을 맡기고 석달개 행정을 끝냈다. 그 때 석달개는 천경을 떠나거나 또다른 내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3.3. 외로운 원정길

1857년, 석달개는 천경을 떠나며 백성들에게 태평천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달라는 시를 쓰고,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따라오도록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석달개를 따라가고 이로인해 태평천국에 얼마나 피해가 왔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석달개의 부관이었던 이수성은 '석달개가 수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태평천국에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에 반박하는 약간의 사료가 있는데, 석달개는 천경에서 작은 병력만을 빼내 왔고 청나라의 기록에서는 석달개의 행렬이 통징강을 하루 만에 건널 정도로 작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경을 떠났을 때도, 석달개는 태평천국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홍수전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태평천국의 여러 지휘관들이 전투를 치를 때 병력을 보내 주었다. 석달개는 홍수전이 자신의 지휘권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때까지 천경으로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다. 원정의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석달개에게 합류했다. 석달개는 6년 동안 중국 중부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청군과 맞섰다. 오늘날까지 석달개에 관한 많은 전설들이 그가 지나갔던 지역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이 천경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몇몇 석달개의 장교들은 태평천국을 뒤엎도록 부추겼지만 석달개는 번번이 거부했다. 결국 병력의 일부는 석달개와 떨어져 천경으로 돌아갔다.

원정 중 석달개군은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성을 오갔다. 1862년 12월 석달개군은 청군의 막강한 포화를 따돌리며 금사강을 건넜다. 그들은 다두의 둑들을 건너 청두에 가려고 계획했다. 석달개의 수하 중 하나는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석달개와 주력군이 도착했을 때는 갑자기 폭우가 내려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몇 번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보급까지 떨어졌다. 청군은 며칠 간격으로 추격하고 있었다.

석달개가 건너려다 실패한 교량은 노정교(瀘定橋, 루딩교)라고 하는데, 수십년 뒤 중국공산당대장정 때의 가장 극적인 교전이 이 곳에서 벌어졌다. 석달개와는 달리 공산군은 도하에 성공했다.

3.4. 최후

1863년 6월 13일, 석달개는 청군과 협상해 부하를 살리려고 투항했다. 석달개는 3명의 수하와 함께 태평천국의 옷을 입고 청군에게 두려움 없이 말했다. 석달개는 심문받고 투옥되었으며, 6월 25일 능지형에 처해져 온 몸이 천천히 발라졌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종 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한 번도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석달개의 의연한 죽음을 본 관군들조차 석달개를 진정한 대장부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사망 당시 석달개의 나이는 32세였고, 부하를 살리려고 투항했던 그의 뜻과 달리 수하 6,000명 중 2,000명이 처형되었다.

4. 사생활

석달개의 사생활은 모든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중 가장 품격이 있었다.[3] 석달개의 집은 가장 소박했고 자신의 집을 건축할 때 백성들의 집을 허물기를 거부했다. 태평천국의 풍습은 지도자들이 많은 을 거느리는 것을 요구했지만 석달개는 부인 황씨만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바쳐진 미녀들을 돌려보냈다. 석달개가 가진 첩들은 상관들이 하사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녀들과 여군 장교들은 자유롭게 석달개의 집을 나가고 들어올 수 있었는데, 다른 왕들의 처소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4] 젊었을 때, 석달개의 전 아내였던 웅씨는 석달개가 태평천국에 합류하자 임신한 채 석달개를 떠났고, 웅씨의 재혼 후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석달개의 이모에게로 돌려보내졌고, 석달개의 살아있는 유일한 자식이었다.

5. 평가

약관 19세의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한 태평천국 최고의 명장이었고, 통치력 또한 매우 뛰어났다. 태평천국 지도자들 중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석달개가 쓴 시들은 다 바위에 새겨넣을 정도로 후일 우대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석달개가 몸담았던 태평천국은 그 자체가 문제투성이인 희대의 광신적 종교집단이었던 것이 문제였고 석달개가 너무 젊었다는게 문제였다. 과거 낙방하고 정신 나간 자칭 하느님 아들 겸 예수 동생 천왕, 자기 말 안 들으면 하느님 불러서 수시로 모욕과 협박을 일삼는 깡패 지도자 동왕, 멍청하게 죽은 자칭 예수 분신 서왕, 대포 한 방이 가마에 맞았다고 시민 전체를 닥치는 대로 몰살시키는 정신병자 남왕, 수틀리면 다 죽이는 미친 놈 북왕이 석달개의 윗전에 있었고, 끝내 자기 병력까지 쪼개서 나라를 살리려 했던 석달개는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6. 여담


[1] 태평천국 역대 최연소 왕.[2] 죽지는 않았다. 그런데 증국번 본인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던지 주변 사람들한테 자신이 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이 부하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큰 망신을 당했다.[3] 다른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곡물 사재기를 일삼고 수십 명의 첩을 거느리며 방탕하게 생활하였다.[4] 태평천국의 여군은 말이 좋아서 군인이지, 일부가 지도층의 성노리개가 되는 일이 빈번했고, 한 번 들어가면 첩이나 노리개가 되어 도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5] 석달개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두 수가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