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沈田子(383년 ~ 418년 3월 7일)
동진의 장수로 자는 경광(敬光). 심약이 편찬한 『송서』 「자서」에서 행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심약의 큰할아버지이다.
2. 생애
오흥군(吳興郡) 무강현(武康縣) 출신으로 심목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399년 손은의 난 당시 심목부가 같은 집안 사람인 심예(沈預)에게 고발되어 처형되었지만, 심목부의 아들들은 겨우 살아남았다. 뒤에 손은을 토벌하던 형 심림자가 상관인 유유에게 요청하여 심림자 형제의 집안을 모두 경구(京口)로 옮기고 각자 저택을 내렸다. 심전자는 유유가 환현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영도현오등후(營道縣五等侯)에 봉해졌으며, 심림자와 함께 심예를 죽여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409년, 남연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맹용부와 함께 선봉을 맡았다. 이 전투에서 맹용부가 전사했으나 심전자는 살아남아 남연 정벌에 공을 세웠다.
410년, 유유가 남연을 정벌한 틈을 노린 노순이 진격을 개시했다. 심전자는 건위장군 손처와 함께 유유의 명을 받아 해도를 따라 광주를 습격하여 건무장군이 더해졌다. 또한 노순의 부하인 서도복이 시흥으로 퇴각하자 유번과 함께 서도복을 토벌하였다. 한편 손처가 노순에게 포위되자, 심전자는 군대를 이끌고 광주로 출병한 뒤 창오(蒼梧), 울림(鬱林), 영포(寧浦) 등지에서 노순을 격파했다. 손처가 병으로 죽은 뒤 도적들이 봉기하여 성곽을 부수고 관리를 죽이자, 심전자는 곧바로 토벌에 나서서 10일 만에 이들을 평정했고 저유지가 광주 자사로 부임한 뒤 건강으로 복귀했다.
심전자는 태위부 참군, 진무장군, 회릉내사를 역임하고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로장군(征虜將軍) 유의부의 참군이 되었고 장군과 내사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412년, 유유가 유의를 토벌할 때 종군했다. 415년,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별군을 거느려 종군했고 정로부 참군, 진무장군, 부풍태수로 제수되었다.
416년, 유유가 후진 정벌을 추진할 때 종군했다. 417년, 심전자는 부홍지와 함께 무관(武關)에 입성한 뒤 청니에 주둔했다. 후진의 요홍은 심전자가 배후를 습격할 것을 염려해서 먼저 심전자를 친 다음 유유를 치려고 했다. 심전자는 의병(疑兵)으로 요홍의 주의를 끌면서 자신은 수백 명을 이끌고 요홍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부홍지의 반대도 뿌리치면서 공격을 추진한 결과 큰 성과를 세웠다.
후진이 멸망한 뒤, 유유가 문창전에서 연회를 열 때 심전자와 유유 사이에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
유유: 함양이 평정된 것은 경의 공이다.
심전자: 함양이 평정된 것은 실로 성략(聖略)에 의한 것이자 무신들이 충절을 바친 것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겠습니까?
심전자: 함양이 평정된 것은 실로 성략(聖略)에 의한 것이자 무신들이 충절을 바친 것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겠습니까?
심전자는 함양시평2군태수로 제수되었다. 하지만 이때 심전자는 자신의 공이 왕진악보다 크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심전자는 한때 유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진악은 집안이 관중에 있으니, 그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치통감》
《자치통감》
하지만 유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심전자의 이야기를 일축하였다.
너희들의 문무관 장사들과 정예 1만 명을 남겨라. 왕진악이 만약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자멸했을 것이니, 더는 말하지 마라.
《자치통감》
《자치통감》
이 밖에도 유유는 심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회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수 한 마리가 여우 떼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열 명 남짓 되는 경들이 어찌 왕진악을 두려워하느냐![1]
《자치통감》
《자치통감》
한편 동진에서 유목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소식을 접한 유유는 서둘러 유의진을 장안에 남기고 심전자와 왕진악에게 유의진을 보좌할 것을 명했다. 이때 동진 군중에서는 왕진악이 남쪽 사람들을 죽이고 유의진을 돌려보낸 뒤 관중에 할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왕진악을 불신했던 심전자는 부홍지와 함께 유유의 군령을 빙자하여 왕진악을 주살하고 힘을 합쳐 혁련발발을 물리치고 관중을 안정시킨 뒤 남쪽으로 돌아가 유유에게 사죄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심전자는 회의를 명목으로 왕진악을 불러냈고, 이때 같은 집안 사람인 심경인(沈敬仁)이 왕진악과 가족들을 죽였다. 하지만 심전자도 결국 장사 왕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3. 사후
사후 관중은 북하의 혁련발발에게 함락되었다. 원래 심전자는 관중을 함락시킨 공으로 상을 받아야 했지만 독단적으로 왕진악을 죽인 일로 인해 심전자에 대한 논공행상은 중단되었다. 유유는 심전자가 갑자기 광기를 일으켰다며 심전자를 추궁하지 못했다고 표문에서 밝혔다. 심전자는 아들이 없어서 심림자가 2남인 심량(沈亮)을 후사로 삼았다.한편 유유는 자신있게 추진했던 북벌이 유목지의 죽음과 더불어 왕진악과 심전자의 갈등으로 인해 실패하자, 점점 불안이 엄습했다. 결국 유유는 "창명(昌明) 이후에는 두 황제가 있다"는 참언을 날조했고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이 커져갔다.
[1] 북벌군의 핵심인 왕진악을 종회에 비유했는데 왕진악이 반기를 들 조짐이 보이면 왕진악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