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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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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파일:attachment/장 자크 루소/Rousseau.jpg
출생 1712년 6월 28일
제네바 공화국[1]
사망 1778년 7월 2일 (향년 66세)
프랑스 왕국 에름농빌[2]
국적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사상가, 교육학자, 소설가, 작곡가, 철학자
학파 계몽주의[3]
종교 이신론[4]
서명
자연으로 돌아가라.[5]
Retour à l'état de nature.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유명 음악가로서의 성공2.3. 계몽주의를 비판한 계몽주의자2.4. 위대한 업적2.5. 말년
3. 사상
3.1. 인간 불평등 기원론3.2. 에밀3.3. 사회계약론
3.3.1. 일반의지
3.4.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4. 오해
4.1. 루소는 전체주의의 시조인가?4.2. 루소의 사상은 직접민주주의인가?4.3. 루소는 다수결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가?4.4.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의 유포자?
5. 평가 및 영향
5.1. 근현대 교육에 미친 영향
6. 논란
6.1. 어린 시절 변태 행위6.2.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교육학자6.3. 여성 혐오주의자인가
7. 어록8. 저서9. 관련 강의 영상10. 여담

[clearfix]

1. 개요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소설가, 교육학자, 작곡가.[6] 루소는 이성적 문명이 오히려 감성의 퇴보를 불러왔다고 주장하여 '계몽주의를 비판한 계몽주의자'로 불리며,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치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사회계약은 자유평등에 기반해야 하므로 국가의 규칙인 법은 '일반의지'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인민주권론을 주장하여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후 이 사상은 프랑스 대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근현대 민주주의 형성에 거대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고전주의 소설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소설을 개척하여 당대에 어마어마한 유명세를 얻은 최초의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말년에는 자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마저 솔직하게 보여주는 고백록을 써서 근대 자서전의 전형을 구축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교육학적으로는 당시의 강압적인 직업 교육에 맞서, 개인의 독립성을 길러주는 자연주의적 교육을 주장하여 아동교육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인물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712년, 장 자크 루소는 스위스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제네바는 칼뱅파 개신교를 믿는 도시 국가였으며,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토착 상류층과 투표권이 없는 다수의 이주민들 사이에 계층간 대립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투표권이 있는 제네바 시민 계급이었지만 집안은 가난했다. 귀족 출신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산후유증으로 죽었는데, 아내를 사랑했던 루소의 아버지는 어린 루소를 잡고 죽은 아내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고백록』에 나온다. 자신으로 인해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격에 심한 균열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아이작 루소는 10여 년간 어린 루소를 키웠으며, 루소는 어머니가 남긴 모험 소설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의 책을 읽으면서 성장했다.

루소가 10살이었던 1722년, 아버지는 귀족과 다퉜고 이에 당국이 개입하자 아버지는 어린 루소를 버리고 제네바를 떠났다. 어린 루소는 외삼촌에게 맡겨졌는데, 외삼촌은 다시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루소를 랑베르시에 목사에게 맡겼다. 목사와의 생활은 의외로 행복했으나 불과 2년 뒤, 이제 루소가 일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 외삼촌은, 루소를 조각가 아벨 뒤코묑에게 넘겼다. 하지만 루소는 천성적으로 규율과 복종을 강요하는 그 도제 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었고, 게다가 1726년 아버지가 재혼까지 하면서 자신은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728년, 16살이 되었을 때 루소는 자신의 비참한 삶을 더는 참을 수 없었는데, 제네바 시의 야간 통행금지령을 어긴 것을 계기로[7] 외삼촌마저 자신을 더이상 챙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생계가 막막해진 루소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적당한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는 어떤 신부의 소문을 듣고 근처 사르데냐 왕국사보이아[8]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 신부는 루소에게 '개종자들을 도와주는 마음씨 좋은 귀족 부인이 있으니, 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소개장을 써주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찾아간 샹베리에서 루소는 평생을 기억할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남작 부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루소는 16세였고 바랑 부인은 29세로 남편과 별거중이었다.

바랑 부인은 루소를 집사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루소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시켰다. 이를 통해 루소는 많은 책들을 접하면서 견문이 넓어졌다. 루소는 무엇보다도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기뻤다. 루소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인 자신을 거두어 교육까지 시켜준 바랑 부인을 내심 '엄마'로 여기고 있었지만, 바랑 부인은 루소를 단지 남자 집사로 보고 있었고, 급기야 부인은 루소를 애인으로 삼았다. 루소는 그것을 거절할 엄두도 못냈었다. 훗날 그는 『고백록』에서 '그녀와의 관계는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루소는 바랑 부인이 바랬던 집사에 전혀 소질이 없었고 그가 26세였을 때 부인은 다른 집사 겸 남자 애인을 만들면서 루소를 쫓아냈다. 루소는 한동안 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주변을 맴돌다 결국 포기하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2.2. 유명 음악가로서의 성공

그 이후에도 방랑을 지속하던 루소는 파리에 정착하는데 그 계기는 음악이었다. 1742년, 30살이 된 루소는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했다.[9]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아카데미 사람들과 많이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 중 한 명이 또 다른 시골뜨기인 드니 디드로였다. 훗날 위대한 계몽철학자로 평가받는 디드로는 박식하면서도 열정적이고 격렬하게 대화를 하면서 주변을 휘어잡는 스타일이었고, 루소는 정반대로 대화에 서투르고 부끄러워 입을 달싹도 못했지만, 둘은 곧 절친이 되었다. 비슷한 처지였던 콩디야크, 달랑베르도 함께 친해져서 4명은 매주 술자리를 가지며 토론을 펼쳤다. 그들은 유력 가문의 부인이 주최하는 살롱에도 드나들면서 지식과 인맥을 점차 넓혀나갔다. 1743년에는 한 귀부인의 도움을 받아,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채용되어 이탈리아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루소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음악과 문화를 충분히 만끽했지만, 프랑스 대사는 지속적으로 월급을 체납했고 이 때문에 11개월 만에 비서직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루소는 친구들과 부유한 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였다. 그리고 이 시절부터 루소는 호텔의 세탁부였던 테레즈 르바쇠르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했다. 루소와 테레즈 르바쇠르의 관계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인데, 루소는 그녀를 단지 가정부나 성적 보충물[10]로 취급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최고위급 귀족과의 단 둘이 하는 식사에 반려자인 그녀가 한자리를 차지해야 된다고 고집하여, 미천한 가정부와 대등하게 식사를 한다는 것이 분했던 그 귀족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소중한 반려자로 대접하기도 했다. 안그래도 복잡한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든건 루소와 테레즈 르바쇠르 사이에 태어난 5명의 아이들을 모두 다 고아원에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식을 버린 이유는 아버지인 자신이 돈이 없는데 키워봐야 삐뚤어질 것이라는, 핑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루소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때 뒤늦게 아이들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기록이 모두 없어져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루소는 그녀와 남은 생애를 함께 했지만 굳이 다른 여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거부하진 않았고, 테레즈 르바쇠르도 간혹 찾아오는 다른 남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즐겼다.[11]

그러는 와중에도 음악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서 1751년엔 디드로가 편집을 맡은 《백과전서》에 음악 관련 부문을 집필하였고, 1년 뒤엔 단막극 오페라 각본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를 완성했다. 이 짧은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심지어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도 그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루소는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무대공포증이 있었던 루소는 긴장을 이기지 못했고, 관계자에게 아무런 설명없이 알현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관계자와 주변 친구들은 이를 보고 기겁했지만 다행히 별다른 불이익은 없었다. 되리어 《마을의 점쟁이》는 점점 유명해졌고, 루소는 이제 어엿한 한 명의 음악가로서 프랑스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외에도 그의 작품들 중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개신교 찬송가에 《주여 복을 비옵나니(구하노니)》#, 《예수님은 누구신가》#[12] 등이 있다.[13]


루소는 당시 프랑스에서 논란이 되었던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에 뛰어들기도 했다. 부퐁 논쟁은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페르골레시의 오페라인 《마님이 된 하녀》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의 장점을 둘러싸고 벌어진 활발한 논쟁을 일컫는다. 프랑스 음악을 대표했던 라모는 수학적으로 계산된 '화음'이 음악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이탈리아 음악을 옹호하는 루소는 화음이 아닌 단순하고 반복되는 '선율(멜로디)'이 음악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음악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더 호소해야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4]

2.3. 계몽주의를 비판한 계몽주의자

루소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뒤늦게 찾아왔다. 프랑스의 디종시 학술원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의 개선과 고양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학술 논문 대회를 열었는데, 루소는 이 주제를 보자마자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감동을 받아, 순간 "취기와 같은 현기증"에 압도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1750년 루소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학문 예술론》을 발표했고, 그 대회에서 1위로 입선했다. 루소는 《학문 예술론》에서 문명이 많은 이점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문명은 인간에게 파괴적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문명과 이성을 신봉했던 계몽주의의 기본 가설을 내부에서부터 공격한다는 점에서 창의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결점은 어쩌다 있는 예외가 아니라 문명의 장점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다. 문명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이성에 비추어 비교하고 평가함으로써, 개인은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리하여 문명은 안전과 복지를 제공하는 대신에, 개인의 진실된 자유를 질식시킨다는 것이다.

루소가 명성을 얻자 1754년 루소의 고향인 제네바에서 루소를 초청하였다. 루소는 기꺼이 제네바로 돌아갔는데, 당시에는 오직 칼뱅파 개신교도만이 제네바의 시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루소는 다시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이때쯤에 디종시 학술원이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이는 자연법으로 정당화되는 것인가"라는 주제로 논문 대회를 또 열었는데, 이에 대한 루소의 답변이 그 유명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사회를 이루지 않고 홀로 살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자연인은 삶이 비록 야만적이며 수명이 짧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물론 자연 상태의 인간도 때때로 다른 사람과 마주쳤고, 본능에 따라 짝을 짓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그 일은 단지 우연한 만남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아이를 기르고 돌보지만 여기서도 관계는 어린 것들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자마자 곧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농업과 산업은 그 필요에 따라 발달했으며, 이에 따라 노동이 필요해졌고 사유재산이 도입됐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해지면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수립되었고 다수가 소수에게 종속되기 시작했다. 즉, 자연 상태에서 선량했던 인간은,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를 이루면서 노예제도와 빈곤 등의 불평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15]

1755년 루소는 자신의 논문을 당시 저명한 문필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에게 보냈다. 볼테르는 책을 읽고는 분노에 떨면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여백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의 철학을 보라." [16] 부자였던 볼테르는 '사유 재산으로 인해 불평등이 생긴다'는 루소의 주장이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화가 난 볼테르는 루소에게 바로 편지를 써서, "인류에 반대하는 새 책"에 감사한다고 말하고는, "불행히도 나는 네발로 기어 다니는 습관을 포기했다"며 비꼬았다.[17] 인간 이성을 통해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볼테르 및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문명이 도리어 인간을 옥죄인다는 루소의 사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루소와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서로의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상대를 비판했고, 루소는 결국 그의 가장 중요한 친구였던 계몽철학자 디드로와도 멀어졌다. 또한 볼테르와도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면서 사이는 더더욱 틀어지게 된다. 1755년 포르투갈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 특히 당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모였던 수만명의 신실한 사람들이 죽자, 볼테르는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다고 하지만 대지진을 막지 않은 신"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냈는데, 신을 믿는 루소가 볼 때 잘못이 있는 쪽은 그곳에 문명을 건설한 인간이었지 대지진을 일으킨 신이 아니었다.

루소의 주장에 화가 난 볼테르는 자신을 해명하고 루소를 비꼬는 편지를 자신이 아는 수많은 저명인사들에게 뿌렸다. 이에 루소와 볼테르의 사이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후로 둘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매번 반대의견을 내면서 부딪쳤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은 제네바 연극 금지 법률에 대한 것이다. 당시 금욕적인 청교도 제도를 따르고 있던 제네바는 연극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극작가이기도 한 볼테르는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해제하기 위한 전방위적 노력을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에 루소는 1758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에서 볼테르에 반대하며,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찬성한다. 당시 연극은 상류층만이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축제를 더 권장해야 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볼테르는 분노했고, 루소는 주류 계몽철학자들과 아예 갈라서게 된다.

2.4. 위대한 업적

이후 루소는 공작 가문의 후원을 업고, 저술에만 몰두했다. 마침내 1761년, 루소는 편지 형식의 연애 소설 《신 엘로이즈》를 발표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신 엘로이즈》에서 루소는 육체적 사랑을 선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열기를 진정시키면서 열광적이기보다는 애수 어린 분위기를 만들어냈는데, 이런 낭만적인 방식의 소설은 그 당시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소설은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서 말 그대로 "세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루소는 일약 스타로 올라선다. 무수히 많은 팬레터를 받았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당시에 그 영향력과 유명세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이 소설을 계기로 유럽의 소설은 한순간에 고전주의 양식에서 낭만주의 양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다음해인 1762년, 50살의 루소는 이후 세계를 뒤흔들 문제의 저작 둘을 연달아 내놓는데, 교육학 저서인 《에밀》과 정치철학서인 《사회계약론》이 바로 그것이다.

《에밀》에서 그는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자연성을 잃지 않은 인간, 곧 자유로운 자연인을 길러내고자 하는 교육론을 펼친다. 당시 교육은 고분고분한 사회 구성원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고 존 로크가 그랬듯 권위주의적 방식의 훈육을 강조했다.[18] 하지만 루소에게 있어서 아이들이 권위를 두려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마음에 들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행위를 선택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렇기에 교육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때때로 시간을 충분히 소비하는 것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19] 즉, 루소는 《에밀》에서 기존의 교사 중심의 전통적 교육관을 거부하고, 어린이의 흥미와 개성, 경험을 중시하는 아동 중심적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전개한다.

《사회계약론》에서 그는, 어떤 사회든 불평등과 착취가 생기기 때문에 개인에게 진정한 자유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회 속의 개인은 타인에게 복종당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정한 규칙을 내가 따를 때, 그 자신은 규칙을 따르지만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그 사회 전체의 공공선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여 '법과 규칙'을 정할 수 있다면,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과 규칙에 따르더라도 그것이 그 자신이 만든 규칙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는 착상이었다. 이때 평등은 중요한데, 만약 모든 개인의 의견이 '평등'하게 반영되지 않고, 어떤 특정 개인의 의견을 더 중요시 여긴다면, 그렇게 정한 규칙은 더 이상 나머지 개인들에게 '자신이 정한 규칙'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전체의 공공선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투표다. 투표를 통해 개인 의지들의 공통 부분인 일반의지가 드러나고, 이러한 일반의지에 따라서 그 사회의 법과 규칙을 결정해야 '내가 정한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루소는 주장했다.[20] 이는 권력의 정당성이 소수의 귀족이나 부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있다는 인민주권설[21]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후 이러한 생각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혁명사상으로 연결이 되어 루소 사후에 프랑스 혁명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이후 루소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에밀》에는 루소 고유의 자연 종교 원리가 담겨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의 비위를 상하게 했으며, 《사회계약론》에서는 '기독교가 이승에서의 짧은 삶을 별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결속에 부적당하다'고 주장하여,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사상을 옹호한 《산에서 쓴 편지》에서는 한술 더 떠서,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정부와 사법부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집회를 강력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이런 민주주의 사상을 퍼뜨리고 있는 루소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체포하기 위해 영장을 발부했다. 제네바 정부 역시 《사회계약론》과 《에밀》에 판매금지를 내리는 동시에 체포 명령을 내렸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루소는 프로이센 왕국으로 도피하였는데, 다행히 프리드리히 대왕은 루소를 보호하여 뇌샤텔[22]의 모티에 마을에 살도록 허락하였다.

2.5. 말년

뇌샤텔의 모티에에서 3년간 망명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종교계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기어코 루소를 종교법정에 세웠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루소를 보호하자[23], 현지 목사는 루소를 개인적으로 쫓아낼 계획을 세웠고 지역 주민들을 선동해서 루소의 집에 돌을 던졌다. 루소는 공포에 질려 잠시 근처 비엔 호수의 생피에르 섬으로 몸을 피신했다. 그는 그 섬에서 느꼈던 고독을 너무나도 좋아했고 앞으로도 평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경험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민주주의가 퍼져 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베른 통치 기관은 결국 루소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루소는 영국으로 망명을 결정했다.

영국에서는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데이비드 흄이 돌봐주었으며 생활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흄이 루소를 영국으로 데리고 온 것은 그의 공명심이 컸다. 흄은 "유럽의 왕과 군주들의 절반이 보낸 초대를 거절하고 내 보호 아래 들어온 유명한 루소"를 보면서 스스로를 뿌듯하게 생각했다. 반면 루소는 영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점 고립되었고,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인 편지도 흄이 검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24] 의심에 사로잡혔다. 흄은 외교관이었는데 영국 정부를 위해서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25] 게다가 흄은 루소와 다투게 되자, 루소와 자신 사이에 오간 모든 편지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책으로 출간했는데, 루소는 흄이 자신을 해치려고 영국에 불러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볼테르와 계몽주의자들은 신나서 이 이야기를 사방에 퍼날랐고 루소를 지원하는 협력자와 친구들도 점차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루소는 완전히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그는 1767년 영국을 떠나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프랑스에서 예전에 그에게 내려졌던 체포 명령은 아직 유효했지만, 힘을 잃은 노인에 불과한 루소를 당국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가 순교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명예를 잃어버린 루소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공원을 산책하고 극장에 가고 체스를 두거나 식물 채집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즐겼다. 1768년에는 그 동안 자신을 꾸준히 지지해줬던 테레즈 르바쇠르와 20년 만에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걱정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지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는 영국에서부터 집필한 자서전 《고백록》을 1769년에 완성했고, 1776년에는 《루소, 장 자크를 재판한다》를 발표하고, 그 해 말에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기 시작했다. 다 자신에 대한 얘기였다. 하지만 마지막 책은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1778년 7월 2일 파리 교외의 에름농빌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점심 무렵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는 사망한 이후 11년 뒤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고 1794년 그의 유해는 팡테옹으로 옮겨져서 볼테르와 나란히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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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테옹에 묻혀있는 루소의 무덤

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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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이성'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췄지만,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감성'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독립된 인간은 소박한 '자기 보존의 욕구'와 타인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했다. 하지만 이성의 힘으로 사회가 만들어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생존은 쉬워진 반면에 감성은 점차 타락한다. 즉,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경쟁이 생기고 경쟁은 시기와 질투 등의 '이기심'을 유발하여, 인간의 감성은 더 이상 순수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를 버리고 다시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인간은 자연주의적이고 시민적인 교육을 통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감성을 최대한 지키면서도 타인에 대한 상호존중의 마음을 발달시키고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게끔 해야 된다는 것이 루소의 대략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루소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 지점, 즉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의 동정심에서 발전한, 관용적인 시민의식을 가진 인간들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고자 한다는 데서 시작한다.[26]

3.1.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는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사회라는 인간관계가 없는 원시 자연 상태의 인간을 가설적으로 구성하고, 2부에서는 그런 자연 상태의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불평등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다. 원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 간의 교류도 없이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미개인이었기 때문에 일도 언어도 집도 전쟁도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동료 인간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고 반대로 해칠 욕구도 없었다. 그의 욕망은 자신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았다. 먹을 것, 여자, 그리고 휴식은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경험하는 행복이었다. 반면 고통, 배고픔은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불행이었다. 허영심도 배려도 존중도 경멸도 몰랐고 소유와 정의에 대한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보존(Amour de soi-même; 자기애)을 위협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주 위험한 다툼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그런 자연인에게는 단지 자연적 충동과 감정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개념으로 설명하기 이전의 한 순수한 인간이 가지는 감정일테다. 루소가 관찰해봤을 때 순수한 인간이 가진 그 선천적인 감정은 동정심이었다. 어떤 맹수가 한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어 치명적인 이빨로 아이의 연약한 사지를 으스러뜨리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찢는 것을 목격한다면, 개인적인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 사건의 목격자의 마음은 얼마나 끔찍한 동요를 느끼겠는가. 실신한 어머니와 죽어가는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그는 그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큰 비통함을 느끼겠는가. 자신의 적에게 잔인한 폭군마저도 극장에서는 불우한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며 눈물을 흘린다. 사실 관대랄지 관용이랄지 인간애랄지 하는 것들이 약자와 죄인, 혹은 인간 일반에 기울이는 동정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친절뿐만 아니라 우정까지도 잘 생각해 보면 특정한 대상에 쏟는 변함없는 동정심의 결과인 것이다. 동정심은 자신의 동료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선천적인 혐오감에서 발생하여,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서 보게 하는 자연적인 감정이다.[27]

한편 인류는 수많은 세월 동안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환경을 개선해 나가면서 자연 상태를 조금씩 벗어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자연스럽게 어떤 상관관계에 대한 관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은 도구와 기술을 발달시키고 협력과 약속에 대한 관념을 얻었으며,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가 결성되면서 남녀는 분업을 하였다. 그리고 일정한 장소를 머물게 된 인간들은 언어를 발전시키면서 서로 다른 가족과 빈번한 교류를 하였고, 이는 다른 대상들을 바라보고 비교하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관념과 감정이 연속해서 일어남에 따라 인류는 점점 온순해지고 관계는 확대되며 긴밀해졌지만, 그럴수록 인간관계에서 선호가 생기고 이에 따라 허영심과 경멸, 수치심과 선망의 관념이 생겨났다. 이에 사람들은 저마다 배려를 받을 권리를 주장했고 예의범절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의 인류는 자유롭고 건전하게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독립적인 교류에서 오는 즐거움을 변함없이 누렸다. 그러나 혼자서 두 사람분의 양식을 가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소유에 대한 관념이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면서 평등은 사라지게 된다.

야금술과 농업의 발명이 그와 같은 변화를 야기한 두 가지 기술이었다. 철을 녹이고 벼리는 기술은 대량 경작에 필요한 농업 도구를 만들었고, 대량 경작은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다. 토지의 경작은 그 땅의 점유로 이어지고 땅의 장기적인 점유는 그 땅을 소유한다는 관념을 형성시켰다.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의 재능은 동등하지 않아서 더 강한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했으며, 더 솜씨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솜씨를 더 잘 이용하면서, 자연적 불평등은 그 차이가 점점 더 벌어졌다. 이로써 누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가 뚜렷해졌고, 타인과의 비교가 적나라하게 이루어졌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는 열의를 가졌지만 그런 자연적 재능이 없는 사람은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자 했고, 그는 토지의 수확물을 일부 나눠주면서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같은 인간들에게 그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려고 애썼다. 요컨대 소유를 비교하는 은밀한 질투심은, 타인의 희생 위에서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는 음흉한 욕망을 기어코 불러일으키고야 만 것이다. 그 질투심은 더욱 안전하게 활동하기 위해 흔히 친절이라는 가면을 쓰는 만큼 더욱더 위험하다. 이 모든 해악은 소유가 낳은 첫 번째 결과이며 막 생겨나는 사회적 불평등의 불가분의 동반자였다.

그 결과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서 먹을 것을 구하거나 아니면 약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각자의 성격에 따라 지배와 예속, 폭력과 약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는데, 정작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야 된다는 논리 자체는 도리어 보다 더 강한 힘에 의해 빼앗기는 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부자는 항상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부자는 마침내 필요에 의해 다급해져 이제까지 인간의 정신 속에 들어온 적이 없는 가장 신중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외부의 적을 핑계로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같이 복종해야 하는 소유에 대한 정의와 평화에 관한 규칙을 제정했던 것이다. 이 사회의 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하여 자연적 자유를 파괴해버렸고 소유와 불평등의 법칙을 영구히 고착화시켰으며, 교활한 횡령을 확정적 권리로 만들어 몇몇 야심가를 위해 인류 전체를 노동의 굴레에 예속시켰다. 이렇게 한때 소박한 자기 보존의 욕구와 순수한 동정심을 가졌던 인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빼앗기고 오히려 복종이 명예로운 것으로 치장되어, 이제 타인의 평판 속에서만 그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비참한(misérable) 존재가 되어버렸다.

3.2. 에밀

『에밀』은 '자연인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루소는 순수한 자연인으로 태어난 아이가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사회의 이기심에 물들지 않고 자유롭고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유년에서 성년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마다 필요한 교육을 해서,[28] 아이가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타인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양심'과 '이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루소는 가상의 인물 '에밀'을 교육시키는 소설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을 총 5단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3.3. 사회계약론

3.3.1. 일반의지

따라서 사회계약에서 그것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사회계약이 다음의 말로 환원됨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각자는 공동으로, 자신의 인격과 모든 힘을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의 최고 지도 아래 둔다. 그리고 우리는 단체로서, 각 구성원을 전체의 분리 불가능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그 즉시 이 회합행위는 각 계약자의 개별적인 인격이 있던 자리에, 집회의 투표수와 동수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가상단체를 생산하며, 이 단체는 이와 같은 회합행위로부터 통일성, 공적 자아moi, 그리고 생명과 의지를 부여받는다. 이렇게 나머지 모든 인격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이 공적 인격personne publique은, 예전에 도시국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공화국 또는 정치체라는 이름을 가진다. 구성원들은 이 공적 인격이 수동적일 땐 국가로, 능동적일 땐 주권자로, 그리고 그것을 동류들과 비교할 땐 권력이라고 불린다. 회합원들은, 집단으로서는 인민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지칭될 땐 주권의 권한에 참여하는 자로서는 시민으로, 국가의 법에 종속된 자로서는 신민으로 불린다.[30]
『사회계약론』
자연 상태에서 내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즉 '자연적 자유'를 누렸던 개인은, 개인의 힘을 넘어서는 장애물들을 극복하고자 다수의 결합된 힘을 필요로 하고, 각각은 상호간에 자유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러한 힘을 가진 정치체를 구성한다. 이 계약에서 강자의 권리를 말하거나 노예제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계약에서 한쪽 당사자에게는 절대적 권한을 규정하고 다른 쪽 당사자에게는 한없는 복종을 규정하는 것은 모순되고 헛된 합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가 되려면, 구성원 전체의 힘을 움직이는 정당성을, 소수의 선택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선택에 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결정한 '공동체의 선택'을 루소는 일반의지라 부른다.

여기서 일반의지는 가상 인격으로서 일종의 '공적 인격'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이익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그 생각들이 모여, 공적인 선택을 결정하는 가상의 인격인 것이다. 즉, 공적인 선택을 하기 위하여 각자가 시민으로서 공익에 대한 소신을 밝힐 때 그 공동체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1] (투표의 중요성) 이때 각 개인들의 의견은 일반의지에 동등한 비중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동등하지 않으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복종하는 꼴이 되고,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계약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리의 평등) 그러므로 각 개인이 일반의지에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권리, 즉 동등한 자격으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사회계약의 제일 우선되는 권리로서 주권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러한 일반의지가 어떤 공적인 선택을 할 때, 그것은 "양도될 수 없고, 분할될 수 없으며, 특정인에 의해 대표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한편, 일반의지의 행사는 다음과 같이 인민과 정부 사이에서 '법'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1. 인민들의 일반의지(≒투표)로 공동체 전체의 규칙인 법을 만듬. (일반의지 - 입법)
  2. 정부는 위탁받은 법을 그대로 시행하여 인민들의 인격과 재산을 지킴. (정부의 의지 - 행정[32])

즉, 인민의 '일반의지'가 규칙(법)을 만들고, 그 규칙(법)을 '정부'가 위탁받아 구성원 전체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라는 것. 인민은 '자기가 정한 규칙을 자기가 따르는 것'이므로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개인은 투표를 통해 전체의 부분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전체의 의사에 반영하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선택의 자유를 루소는 '시민적 자유'라고 부른다.

여기서 주권(일반의지)과 정부는 아주 다른 것이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좋은 나라인 경우에, 일반의지라는 주권은 입법에만 해당되고, 정부는 그렇게 정한 법을 위탁받아 시행해주는 일(행정)만 담당한다. 그러나 정부가 법을 넘어서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려고 하면, 최초의 사회계약도 깨지는 셈이기 때문에, 이제 일반의지도 그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생기게 된다. 즉, 정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법'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때, 인민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집회를 하고 정부에 저항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투표를 통해 '현재 정부형태'와 '현재 행정을 담당하는 자'들을 정당하게 바꿀 수 있다.

다만 일반의지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을 분리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개인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사익을 챙기는 투표를 한다면, 공익을 향한 모두의 마음인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아무 쓸모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중우정치의 위험성) 그래서 루소는 "시민들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 풍습, 관습,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인지도 검토한다. 하지만 인간의 종교(또는 기독교),[33] 시민종교,[34] 사제의 종교[35]는 모두 일반의지를 고취시키는데 부적절하며,[36] 좋은 시민이나 충직한 신민이 되기 위한 '순수한 자기고백'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고백을 루소는 '사회성의 신조sentiments de sociabilité'라고 부른다. 우리는 진심으로 법과 정의를 사랑하고 필요한 경우 의무를 위해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내용이 담긴 신조는 단순해야 하고 분명하게 진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관용적이어야 한다고 루소는 강조한다.

3.4.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좋은 날씨가 나를 이끌 때면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직 식탁에 앉아 있는데도 나는 거기서 빠져나와 혼자 배에 몸을 싣고, 물결이 잔잔할 때는 호수 한가운데로 저어 가고는 했다. 그러고는 호수 한복판에 이르러 배 안에서 다리를 길게 쭉 뻗고 누워서 시선은 하늘을 향한 채, 물결에 따라 천천히 배가 떠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는 했다. 때로는 여러 시간 잡다하지만 감미로운 수많은 몽상들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확실하게 한정되거나 일정한 대상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이 삶의 기쁨들이라고 부르는 것 중 내가 가장 달콤하다고 생각했었던 모든 것보다도 백배나 더 나은 것이었다. 종종 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게 되면, 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만 했다. 어떤 때는 호수 한복판까지 나가는 대신에 섬의 푸르른 연안을 따라 배를 저어가는 것을 즐기고는 했는데, 그 맑은 물과 시원한 녹음에 이끌려 종종 거기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중략)

호수가 잔잔하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을 때면 나는 오후 동안 섬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에서 식물을 채집하거나, 가장 경치가 좋고 한적한 곳에 앉아 나 좋을 대로 마음껏 몽상을 하거나, 때로는 대지나 작은 언덕 위에 앉아 호수와 그 기슭의 멋지고 매혹적인 경치를 둘러보고는 했다. 저녁이 가까워져오면, 나는 섬의 정상에서 내려와 호숫가 모래밭에 숨겨진 안식처로 가서 즐거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물결의 소리와 수면의 출렁임이 나의 감각을 안정시켜주고 나의 영혼으로부터 모든 다른 동요를 쫓아내버려 감미로운 몽상 속으로 빠져들도록 했으며, 그런 몽상에 빠져 있다 보면 종종 나도 모르는 사이 불시에 밤이 찾아오고는 했다. 호수의 밀물과 썰물, 연속적이면서도 간간이 더 커지는 그 소리는 쉴 새 없이 나의 귀와 눈을 자극함으로써 몽상이 내 안에서 꺼버린 내면의 움직임을 대신해주었으며, 나로 하여금 생각하는 수고로움 없이 즐겁게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 충분했다. 가끔 이 세상 사물의 무상함에 대한 희미하고 짧은 성찰이 떠오르고는 했으며, 호수의 수면은 나에게 그 무상함의 이미지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인상들은 곧 호수의 연속적 움직임이 지닌 단조로움 속으로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 단조로움은 나를 달래주었고, 내 영혼의 아무런 적극적인 협력 없이도 나를 몰두하게 만드는 바람에 시간과 정해진 신호에 재촉을 받고서도 그로부터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중략)

지상에서 만물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나의 변함 없는 정지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며, 외부의 사물들에 집착하는 우리의 감정들도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지나가고 변화한다. 감정들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거나 뒤따라오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상기시키거나 종종 전혀 있을 수 없는 미래를 예고한다. 그것들에는 마음을 붙일 만큼 견고한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기쁨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지속성 있는 행복에 대해서는, 나는 과연 누군가가 그것을 맛보았을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맛보는 가장 강렬한 즐거움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나는 이 순간이 항상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한순간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불안하고 공허한 상태로 놔두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있던 뭔가를 애석해하거나 앞으로 올 뭔가를 바라게 만드는 순간적인 상태를 어떻게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행복이란 것이, 영혼이 온전히 쉴 수 있으며 과거를 회상할 필요도 없고 미래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스스로의 온 존재를 집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견고한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 상태라면, 현재가 그 지속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것이 연속되고 있다는 흔적도 없이, 또한 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 말고는 그 어떤 결핍이나 향유, 기쁨이나 고통, 욕망이나 두려움의 느낌도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라면, 그리고 그런 느낌만이 영혼을 온전히 가득 채울 수 있는 상태라면,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지속되는 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행복은 삶의 기쁨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불완전하고 빈약하고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혼이 가득 채워야 할 필요를 느끼는 그 어떤 공허함도 영혼 속에 남겨두지 않는 충분하고 완벽하고 충만한 행복이다. 그런 상태야말로 내가 생피에르 섬에서 물결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대로 놓아둔 배 안에 누워서, 물결이 출렁이는 호숫가나 아름다운 강가나 자갈 위로 물이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서, 나의 고독한 몽상들에 잠기어 처해 있곤 했던 상태이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즐기는 것일까? 자기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존재일 뿐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한, 사람은 마치 신처럼 스스로 족하다. 모든 다른 감정이 없어져버린 그런 존재감은 그 자체로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소중한 감정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그 감미로움을 혼탁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온갖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인상을 멀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고 기분 좋은 것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끊임없는 정념에 동요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거의 모른다. 또한 아주 짧은 동안 불완전하게밖에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어렴풋하고 불명료한 생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런 감미로운 황홀경을 갈망하여, 항상 되살아나는 그들의 욕구가 의무로 부과하는 활동적인 삶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다섯 번째 산책 [37]
솔직한 자기 고백과 자유 추구, 개인 내면의 감성을 중시하면서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이 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프랑스 문학이 낳은 불후의 산문시로 일컬어지며,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인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위고, 르콩트드릴은 물론 괴테, 실러와 같은 독일 작가들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 중 「다섯 번째 산책」은 가장 유명한 부분으로, 루소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스위스 생피에르 섬에서의 일상생활을 회상한다. 루소가 말하는 "문명에서 벗어난 자연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으며, 글 자체도 워낙 좋아서 한 번쯤은 읽어볼만 하다.

4. 오해

4.1. 루소는 전체주의의 시조인가?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루즈벨트처칠로크의 후예, 히틀러는 루소의 후예"라고 말한다. 로크는 →고전적 자유주의→근현대 영미권 정치학→루즈벨트와 처칠로 이어지고, 루소는 →칸트헤겔→전체주의→히틀러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루소는 전체주의의 시조라는 것이다. 러셀은 루소가 설파한 '일반의지론'이 근현대적 의미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정립하여 중우정치의 위협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각 회합원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 전체로 완전히 양도된다", "이것은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양도여서, 최대로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며 어떤 회합원도 요구거리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추상적인 권리'인 일반의지에 복종하라는 말이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특정한 정치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만약 루소의 주장이 정치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이었으면, 정부에 반대하는 집회[38]를 왜 루소가 강력하게 주장하겠는가? 물론 정부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면 그 법을 따르겠지만, 정부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지 못하면 집회에서의 투표를 통해 정부 자체를 바꿔라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며, (심지어 그 집회가 상설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부가 개인의 모든 자유를 통제하려고 하는 전체주의와 상반된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루소는 『에밀』의 사회교육에 관련해서, 청년기(15~20세)에 '동정심'을 먼저 강조하고 이후에 성년기(20세 이후)에서 '시민의식'을 말함으로써, 둘 사이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39] 루소의 정치철학도 이렇게 '동정심에서 발전한 시민의식'으로 살펴본다면 그런 시민의식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나 다른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전체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류인 인간이 고통 겪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선천적인 혐오감에서 발생하여,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서 보게 하는 보편적이고 인류애적 감정이 바로 루소가 말하는 동정심이기도 하고,[40] 그러한 인류애적 감정에 기반해 그 고통을 함께 극복하고자 협력하는 '전체의 힘'은, 부분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부분(개인)의 '자발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41]

사실 러셀의 주장은 한동안 영미철학자들 사이에 무비판적으로 전승되면서 루소에 대한 고질적인 편견을 만드는데 일조했으나, 최근 수십년간 루소전공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반박되어오면서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긴 하다. 학자들에 따르면, 루소는 근대의 전체주의에 기여했다는 비난을 받아 왔지만, 루소가 전체주의만큼 혐오스러워한 것은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루소가 살아 있었을 때 루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전체주의의 반대 방향, 즉 아나키즘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았고, 잘해야 '괴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루소가 목적한 바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있지 않다. 루소가 의도한 것은 근대의 경찰국가가 자행하는 감독과 사상 통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고, 대신에 그는 '공동체의 선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상상했었다. 그는 인민들의 분리된 자아를 일종의 집단적 자아로 승화시키면서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할 동기를 부여하려고 했을 뿐이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말하려는 건 결코 아니었다. 루소는 동시대 인물 중 그 누구보다도 개인의 자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이었다.[42]

4.2. 루소의 사상은 직접민주주의인가?

"영국 인민은 오직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의회 구성원을 선출하는 동안만 자유롭다. 선출이 끝나면 그 즉시 인민은 노예이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루소의 말은 직접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말로 유명하다. 다만 루소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루소는 인민의 '대표'를 원하지 않지만 '간사[43]commissaires(지도자 or 입법자)'는 허용한다. 게다가 루소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지도자의 명령은 주권자가 자유롭게 반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한에서 일반의지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경우 보편적 침묵으로부터 인민의 동의를 추정해야 한다."[44], "침묵은 암묵적 동의로 추정되며, 법을 폐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주권자는 법을 끊임없이 비준하는 것으로 가정된다."[45] 즉 지도자의 명령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으며, 인민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집회에 나설 때서야, 인민들은 그 자신의 정부를 바꾸기 위해서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직접 민주주의적 집회에 대해 많은 분량을 들어 설명하면서 집회가 법적으로 상설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루소에게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은, 최초의 계약을 구성할 때 또는 타락한 정부나 법을 전복시킬 때 같이, 지금으로 치면 특수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루소의 사상을 단순히 '직접 민주주의'라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다.

또한 루소는 '주권(=일반의지≒투표권)'과 '정부'를 구분하면서, 포괄적인 법의 제정(입법)은 '주권'이 하게 하고, 개별적인 법의 적용(행정[46])은 '정부'가 하게 한다. 이는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야 성립한다. 즉, 정상적인 상황에서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는 '주권'에만 관련된 것이지, 정부(행정)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입법권에서 인민이 대표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나, 행정권에서는 인민은 대표될 수 있고 대표되어야 한다." [47] 실제로 루소는 〈산에서 쓴 편지〉에서 "이제 국가(=주권[48])와 정부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정부 가운데 가장 좋은 정부는 귀족정부이며, 주권 가운데 가장 나쁜 주권은 귀족주권입니다."[49]라고 말했다. 여기서 루소가 말하는 '귀족정'이란 소수로 구성된 정부를 뜻하고, '민주정'은 인민 모두로 구성된 정부를 뜻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정의 경우, 인민 전체가 정부의 구성원이 되면 서로가 서로의 재판관이 되므로 그런 정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부는 복잡한 공무를 수행하고 그런 일은 똑똑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소수로 구성된 귀족정이 가장 알맞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주권(≒투표권)은 반대이다. '최초'의 사회계약에서 모두가 기꺼이 합의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계약은, 구성원 각각이 전체의 부분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일반의지에 반영할 수 있는 권리, 즉 주권이 있을 때야 성립할 수 있으므로, 사회계약의 원리에 따라서 자신의 '시민적 자유(선택)'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주권은 '민주주권(인민주권)'이 되고, 사회계약의 원리를 무시한 채 소수의 특권만을 강조하는 주권인 '귀족주권' [50]은 가장 나쁜 주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즉 정부나 법관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결을 내린다면, 최초의 사회계약이 깨진 셈이므로 그 타락한 정부와 법을 전복시키기 위해, 그러한 정부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가 적용된다. 즉, 정부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꼴이 되므로,(상호 복종은 평등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평등이 깨지면 상호복종도 깨지므로) 그들은 '법을 위탁받은 사람'이 아니라 법 위의 특권층이 되고, 인민들은 직접민주주의적 집회를 통해 그러한 정부를 갈아엎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루소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입법과 행정(사법 포함)을 구분한다. 로크와 다른 점은 입법 과정에 일반의지인민주권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51] 즉, 루소의 직접 민주주의는 입법에만 적용된다. (반면에 고대 아테네에서는 입법 뿐만이 아니라 행정과 사법까지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를 통해서 결정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투표에서 져서 사형당했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이 모든 법을 일일이 정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루소에 따르면, 입법에 있어서 보통의 경우에 인민들은 간사(지도자 or 입법자)의 명령에 따른다. 인민들은 침묵함으로써 암묵적 동의를 하는 것이다.[52] 이는 인민들이 정부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때(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쌓였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가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루소는 그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를 통해서 '자의적으로 법을 행사하는 그 정부'의 구성원을 바꾸어 정부를 쇄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로크의 경우, 모든 사람은 법을 지켜야 한다. 심지어 통치자조차도 말이다. 그래서 로크에 따르면, 정부가 법에 근거하지 않고 비합법적으로 행동한다면, 시민들은 법을 지키지 않은 그 정부를 무력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다.)

4.3. 루소는 다수결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가?

루소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최초의 사회계약을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나면, 그 이후의 공동체의 선택은 계약 자체의 결과로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나와 반대되는 의견이 우세하다면, 그것은 내가 일반의지로 여겼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이것은 일반의지의 모든 특징이 어쨌든 '다수성'에 있음을 보여준다.[53]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의 공적 심의가 언제나 똑같이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원하지만,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인민은 부패하는 법은 없어도 자주 속긴 한다." [54] 여기서 루소는 전체의지와 일반의지를 구별한다.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오직 공익에 대한 의사를 말하는 것이지만, 전체의지는 사익에 몰두하는 개별의지의 합일 뿐이다.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면서 뻔뻔하게 공공선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자신을 치장한다면,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결속이 느슨해지고 국가가 약화되기 시작하여, 공익을 추구하는 일반의지는 결국 사익을 추구하는 전체의지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각 개인들의 마음 속에서 공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투표에서의 다수결'은 일반의지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의지는 언제나 바르지만, 일반의지를 인도하는 판단이 언제나 밝은 것은 아니다. 인민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야 하고, 때로는 보아야만 하는 방식으로 보게 해야 한다. 인민이 찾고 있는 바른 길을 보여 주어야 하고, 개별의지의 유혹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보게 해야 하고, 쉽게 인지되는 현재 이득의 유혹과 숨겨져 있는 먼 해악의 위험을 저울질해 주어야 한다." [55] 즉, 투표에 있어서 눈앞의 사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미래의 공익까지 추구하게끔 '공중의 계몽'을 해줄 안내자(입법자)가 필요하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의 제일 마지막 장에서 정치종교를 고려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56]에서이다. 하지만 루소는 국가를 신으로 삼아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시민종교religion du citoyen'의 경우, "배타적이고 폭정을 행하는 종교가 됨으로써 유혈을 즐기는 불관용적인 인민을 만든다"는 점에서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인민은 살인과 학살만을 열망하고, 누구라도 그들의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죽이면서 그 자신은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민은 다른 모든 인민과의 자연적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런 상태는 그들 자신의 안전에 매우 해롭다." [57] 그래서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 의식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관용이어야 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이러한 부분은 루소가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조심했다는 근거가 됨에 충분하다. 그러나 러셀은 이러한 루소의 주장을 거꾸로 받아들이고 그를 전체주의로 몰아감으로써, 루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키우는데 큰역할을 했다.

4.4.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의 유포자?

Finally I recalled the stopgap solution of a great princess who was told that the peasants had no bread, and who responded: "Let them eat brioche.
최종적으로 나는 빵이 없다는 농부들의 말에 대한 고귀한 공주의 임시 방편-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이자!-에 대해 떠올렸다.
ㅡ 장자크 루소, 참회록(1978년 출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고백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좀 있는데, 이 글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리키는 것이란 주장은 애초에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장자크 루소는 1766년 회고록을 쓰면서 1740년에 있었던 일화를 떠올린다는 식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슨 정치적 비판을 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술 마시려고 빵을 찾다가 문득 저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브리오슈를 안주로 술마셨다는 이야기. 심지어 회고록을 쓴 시점 기준으로 봐도 1755년에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의 나이는 이 때 12살이고, 프랑스에 시집가기로 결정한 건 1770년으로 책이 나오고도 4년 뒤이다. 그래서 일각에선 루소가 염두에 둔 '고귀한 공주'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하는데, 어차피 고증을 살린 이야기가 아니므로 누구라도 알 바는 아니다. 정작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 샬로트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사치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후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생활에서 꽤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빈민들의 삶에도 신경을 썼다니 대혁명 시기에 붙은 나쁜 이미지가 현재까지 내려온 영향도 있다고 볼 수 있다.

5. 평가 및 영향

루소의 사상이 이후의 사회에 준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통해 나타낸 그의 민권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며, 훗날 로베스피에르 등의 혁명가에게 영향을 주었다.[58] 루소가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방식의 글쓰기는 낭만주의 문학의 서막을 열었으며, 괴테실러 등에게 이래저래 영향을 주었다. 또한 개신교 신학과 문장 양식에 끼친 영향도 크다. 18세기에 이전까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는데, 루소의 이성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글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이를 참조했었다.[59]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선구로 일컬어지고 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신 엘로이즈》의 영향을 받았다. 그 밖에 애인 사이에 생긴 5명의 아이를 차례차례 버렸다고 고백한 자서전인 《고백록》이 있다.(...)

성선설을 주장해 윤리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윤리 시간에 순자의 성악설을 토머스 홉스, 고자의 성무선악설은 존 로크에 비견하듯이. 맹자의 성선설과 루소의 철학을 비견한다. 다만 루소철학과 맹자의 성선설은 성선만 같고, 이에 대한 관점과 결론은 상이하니 주의하자. 루소는 인간이 문명 국가를 만들기 이전인 자연 상태에서는 선했고 모두가 평등했지만,[60]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악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이 재산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공동체에 양도한다면 진정한 자유와 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루소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라서 계몽주의자로 엮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 자연권의 강조 등을 통해 이성의 진보만을 믿던 계몽주의와는 궤를 달리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위에도 언급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교육학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전환을 이룩하게 하여 아동중심 자유교육, 생활중심 교육, 노작주의 교육 등 19세기부터 교육학을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교육사조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도 기존의 고전주의 문학에서 19세기를 이끄는 낭만주의 문학 사조로의 변화를 이끈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그의 철학적 바탕이 ‘평등’과 ‘자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낮게 보았던 당시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저서 《에밀》 5편에서 "여성에게는 주권이 없으니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다"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만인평등 사상을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한 모순이었지만, 당시 루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을 평등한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소의 저서 《에밀》은 최초의 페미니즘 도서로 알려진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도 엄청나게 공격을 받는다. 다만 루소의 다른 저작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치켜세워주는 내용도 있으며, 루소가 원래 여기서는 여자를 비하하고 저기서는 남자를 비하해서 상호 비하를 통해 평등적 사유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에드먼드 버크도 루소의 사상을 비판했는데 그의 자연론적 사상을 보면서 "그렇게 평등하다던 원시시대에 왜 인간이 후에 스스로 정부를 만들고 국가를 만드는가?"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의 책에서 원시 시대의 인간은 혼자서 자기보존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놓이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버크는 이후 루소전문가들에게 두고두고 틀렸다고 지적받게 되지만, 버크의 말은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해져서 루소를 공격하는 말의 대표로 종종 쓰이곤 한다.

5.1. 근현대 교육에 미친 영향

『에밀』은 루소가 자신의 저서 중 가장 뛰어나고 중요하다고 여겼던 작품이다. 그러나 "20년의 성찰과 3년의 작업"을 치르게 했던 이 작품은 출간 당시부터 파리 고등법원으로부터 분서령을 받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루소의 책은 더 유명해졌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맥이천(J.A. McEachern)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762년에서 1800년에 이르기까지 『에밀』은 해적판과 번역본을 포함해서, 약 60여 판이 출판됐다. 이에 따라 『에밀』에서 소개된 방법대로 아이들을 키우려는 시도도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전류와 자기장의 관계를 나타내는 '앙페르의 법칙'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앙페르와 베네수엘라의 독립 혁명 지도자 볼리바르 등도 루소의 저서에서 쓰인 대로 키워진 사례이다.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16세도 언젠가 높은 신분에서 추락할 경우를 대비해서 기술을 가르치라는 루소의 조언대로 아이때 열쇠공 훈련을 받기도 했었다.

또한 후대의 많은 인물들이 『에밀』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로 유명한데, 딱 두 번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이 루소의 저서 《에밀》을 읽다가 놓친 것.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빼먹었은 것이라고 한다. 괴테는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호메로스를, 그리고 머리에는 언제나 『에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또한 자신의 진중 문고에 『에밀』을 꼭 챙겨 다녔다고 한다.

『에밀』은 서구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교육사가 보이드는 『에밀』의 교육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한다. "『에밀』은 18세기의 교육적 저작 중에서 비길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끼친 영향으로 판단한다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교육적 저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프레빌이나 드블레 같은 교육자는 『에밀』의 영향을 받아 역사책이나 산수책을 새롭게 만들어냈고, 또 다른 교육자들은 루소의 교육관에 동조하면서 무엇보다 어린이를 교육 활동의 중심에 두는 교육을 시도하려고 노력하였다. 바제도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자연 학습, 체육, 수공 교육 등 실제적 활동을 학교 교과에 도입했다. 또한 체벌과 언어 학습에서 기계적인 암기 방식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1774년에 데사우(Dessau)라는 곳에 설립한 '모범 학교(Philanthropinum)'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공공의 이익 증진,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애국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실험 학교이다.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에밀』을 읽고 감동하여 '왕좌에 있으나 초가에 있으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신념으로 어린이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지능, 신체, 도덕의 조화로운 발달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는데, 무엇보다 그는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어린이들이 공동으로 학습할 때야말로 공감과 신뢰에 기초한 아름다운 인간애가 나타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민중 역시 교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신인문주의 교육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뢰벨은 페스탈로치와의 만남을 통해 루소의 교육철학에 공감하여 자신의 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그는 억압적인 교육 방식을 물리치고 어린이가 놀이와 노작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독립적이고 협력적인 사회 주체로 성장하기를 원했다. 프뢰벨은 초등학교에 취학하지 전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일생을 바쳤으며, 그가 만든 '킨더가르텐'은 오늘날의 '유치원'에 실천적 골격을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진보적 교육 운동의 대표자 존 듀이도 루소의 교육철학에 엄청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전통적 지식관이나 학교관을 비판하면서 다양한 실험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 교육의 주된 목적은 민주사회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은 주로 『학교와 사회』, 『민주주의와 교육』에 나타나 있는데, 그에 따르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므로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을써 창조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사회 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20세기의 모든 교육 개혁가들에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클라파레드를 비롯해, 페레, 프레네, 일리치, 섬머일 학교의 닐 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을 고민한 모든 사람은 루소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사유에 루소가 이룩한 성과를 인정한다.

6. 논란

6.1. 어린 시절 변태 행위

루소는 8살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61] 랑베르시에 목사와 그의 누이 밑에서 2년 동안 산다. 이 때 루소는 대수롭지 않은 잘못을 저질렀고 서른 살의 랑베르시에 양에게 볼기를 맞았는데, 루소는 그 고통 속에서 일종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게 그 유명한 '볼기 맞기' 사건이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지배적인 애인에게 무릎을 꿇고 그녀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달콤한 즐거움이었다."라고 말한다. 이 일화는 현대에 들어와 많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마조히즘적 태도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이며 이를 자신의 자서전에 솔직히 적어놓은 것은 일종의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여, 장 콕토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장 자크의 엉덩이는 프로이트의 떠오르는 태양인가?" [62]

루소가 16살 토리노에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 있는 우물 근처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노출시킨 적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루소가 음부노출증이라고 나오는데, 정확히는 엉덩이를 딱 한번 노출한 것이고,[63] 그것도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이 지나친 장난을 친 것이지, 다 큰 성인으로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6.2.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교육학자

루소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논란은, 테레즈 르바쇠르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 5명 모두를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루소는 교육학의 명저인 『에밀』의 저자였기 때문에 살아있을 당시에도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볼테르가 집요하게 이 약점을 공격했다.[64]

다만 당시에는 그런 행동을 파리의 사분의 일 이상이 하였고,[65]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 달랑베르도 귀족 출신 어머니에게 버려진 후, 나중에 아버지에 의해 적당한 가정에 들여보내졌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루소도 그럴 작정으로 고아원에 맡겼다가 10년이 지난 후 자신의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찾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부유한 계급의 여자들도 종종 임신 마지막 몇 주 기간에는 파리를 떠나 여행하는 척하면서 아기를 고아원에 맡겼는데, 파리의 고아원에는 대략 1년에 6천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물론 당시에 고아원에 맡긴다는 것은 아기의 죽음을 의미했을 정도로 고아원이 열악했던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 사실을 알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그만이 알겠지만,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분명한 그의 잘못이겠지만, 그는 고백록에서 '나중에 찾아 보았다'는 말로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66]

또한 볼테르가 비판했듯이, 루소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는 볼 수 없다. 루소는 『에밀』을 쓰고나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잘못을 저지른 이후에 그에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에밀』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개인적으로 서신을 교환했던 지인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직 나에게는 책을 써서 속죄를 해야 하는 오래된 죄가 있습니다. 대중은 그 후에 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 [67] 여하튼 훗날 루소가 이 잘못에 대해 후회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 후회가 루소로 하여금 『에밀』을 쓰도록 고무하는 데 일조했다.[68]

6.3. 여성 혐오주의자인가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792년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자신의 책에서 루소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그가 우리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국왕이든, 노예이든, 학자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저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조차도 우리와 똑같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 단 하나 여성은 예외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루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는 울스턴크래프트가 보기에 '이런 식'으로 루소가 말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진짜 루소가 한 말로 둔갑된 것이다.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까지 들먹이면서 기어코 여성을 깍아내리고 '인권'이 없다고 명확하게 말하는 점이 이상하게 보인다. 물론 루소는 『에밀』에서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순종적이고 온순하게 교육받아야 되며, 가정에 충실해야 된다'거나 '여성은 시민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충분히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다. 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루소가 남성에게만 독립성을 부여하고 여성을 남성 의존적인 존재로 격하시켰으며, 성 역할 분담론을 통해 남성만이 시민으로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여성은 가정 내에서 부인과 어머니의 역할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여성의 종속을 용인하고 조장한 가부장적인 성차별주의자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루소가 말을 저렇게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을 저렇게 하지 않았다면,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는 것일테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소의 작품들이 나올 당시의 정기간행물이나 서간집을 분석해 보면 루소에 대한 공격은 이른바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나왔고, 루소가 거둔 성공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갖는 남성들 덕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 동안 제 3신분의 여성들이 사회적인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쓴 팸플릿의 내용을 보면 여성의 지위에 대한 루소의 사상이 여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이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반동적으로 보이는 루소의 여성론이 어떻게 그 당시에는 해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따라서 여성에 대한 루소의 이런저런 단편적인 담론을 가지고 루소를 여성혐오자라고 단정지어 판단하는 것은 유익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루소의 여성론은 18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전반적인 사상적 맥락 내에 위치시켜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온전한 의미가 드러난다.

루소의 이론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홀로 독립적이며 자기 충족적 삶을 살았고, 양성의 차이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날 수도 없었다. 양성의 차이는 현실적 조건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지금과 다른 현실적 조건이 나타난다면 양성의 차이 혹은 양성의 불평등은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현실적 조건'이라고 루소는 생각했고, 그런 이유에서 루소는 여성에게 시민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루소에게 시민으로서의 의무 혹은 자격은 공동체를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임무와 불가분의 것인데, 공동체의 시민이 지켜야 할 의무들 중 가장 중요한 의무인 군인으로 복무한다는 것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생각도 못하는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루소는 당시 현실적 한계로서 역할분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즉, 루소의 논리에 따르면, 만약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제관계가 만들어진다면 이러한 역할분담론은 필요없게 돼서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었다. 심지어 루소는 현재의 타락한 사회에서 여성이 군복무를 포함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이 박탈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이라고 생각했었다.[69]

물론, 루소의 여성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여성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그 시대의 편견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소피의 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에밀』 5권의 발언은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여성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루소는 성역할분담론을 통해 "여성이 남성을 지배할 것"이라고도 말하기 때문에, 단순히 성역할분담론이 여성비하에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그 시대 인식과 상황의 현실적인 한계를 보여준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보팅이 말하듯이, 루소가 가족 구성원들 모두에 대한 근본적 자존감에 대해 존중할 것을 주장하고, 시민의 교육자로서 어머니에게 힘을 실어 주고, 무엇보다도 육체적 자유와 도덕적 자율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 체계를 예고하고, 결혼은 가족과 계급에 기초한 합의보다는 사랑과 자유 선택에 기초하여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7. 어록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계약론』
법은 항상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롭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해롭다.
『사회계약론』
잉글랜드 국민들은 그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은 오직 의원을 선출하는 기간 동안만 자유롭다.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사회계약론』
한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이야."라고 말할 생각을 해내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제 창시자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한 포기의 풀이 싱싱하게 자라려면 따스한 햇볕이 필요하듯이 한 인간이 건전하게 성장하려면 칭찬이라는 햇살이 필요하다.
『에밀』
오류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지다.
『에밀』 [70]
자신감은 영혼을 키운다.
『에밀』 [71]
가장 많이 산 사람은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많이 느낀 사람이다.
『에밀』 [72]
악센트는 언어의 영혼이다. 그것은 느낌과 진실을 모두 제공한다.
『에밀』 [73]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74]
자유로운 인민은 복종은 하지만 예종되지는 않으며, 지도자는 두지만 주인은 두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민은 오직 법에만 복종하며, 다른 사람에게 예속하도록 강제될 수 없는데, 이것은 법의 힘 때문이다.
『산에서 쓴 편지』

8.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학문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colbgcolor=#fff,#1f2023> 1750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à d'Alembert sur les spectacles
1758년
신 엘로이즈
Nouvelle Héloïse
1761년
에밀
Émile
1762년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
산에서 쓴 편지
Lettres écrites de la montagne
1764년
고백록
Les Confessions
1782년[75]
대화: 루소가 장 자크를 판단하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
1780년[76]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
[77]
루소를 대표하는 철학서로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이 있다.[78] 『에밀』도 교육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소설 형식의 교육학 책이다. 루소에 따르면, 3개의 책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문제[79]를 제기하고, 『에밀』에서 그에 대한 해답으로 '교육'을 제시한다. 『사회계약론』은 그러한 '교육'의 가장 마지막 단계로, 개인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역할을 배우고 '시민적 자유'를 얻는 단계이다. 따라서 루소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려면, 이 3개의 책을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을 『에밀』로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루소의 해답은 결국 교육이라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소가 말하는 교육은 역설적이게도 '교육을 덜하는 것(소극적 교육)'에 있다는 것이 재밌는 포인트다. 보통의 교육은 획일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루소의 교육은 오히려 그러한 획일성을 배척하고 자신만의 감성의 보존을 중시한다는 데서 차이점이 있다. 즉, 이론을 통한 '이성의 교육'보다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한 '감성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 루소의 교육관이다.

루소에 대한 대부분의 책들이 한국에 원전 번역되어 있는 상태며, 그 중 『사회계약론』은 매년 번역되어 나올 정도로 번역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루소의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민주주의를 옹호한 『산에서 쓴 편지』를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한길사에서 나온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에서, 원전 번역으로 『산에서 쓴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루소의 자서전인 『고백록』이 이해하기 힘들다면, 루소전공자로 학계에 유명한 리오 담로시가 쓴 전기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를 읽는게 편하다.

9. 관련 강의 영상

열린연단 강의 -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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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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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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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스위스 제네바[2]프랑스 오드프랑스 우아즈 에흐므농빌르[3] 루소는 인간이 행복하자고 이성적으로 만들어논 각종 사회규범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면서 반계몽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그를 기존 계몽주의자들과 구분해서 후기-계몽주의나 심지어 반계몽주의라고 분류하기도 한다.[4] 초년기에는 가톨릭이었다가 훗날 개신교로 개종한다. 보통은 루소의 종교관을 이신론으로 보긴 하는데, 『에밀』의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 고백〉에서 신을 믿지만 신학적 교리에는 얽메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굳이 이신론이라 해야할 지 애매하긴 하다. 성경과 교회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루소가 말하는 신은 볼테르의 이신론처럼 "복잡한 시계 장치로서의 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소는 기독교의 교리와 기적(계시)을 믿지 않았지만, 믿고 의지할 감정적 대상으로서의 절대자는 믿었다. 그는 자신이 영혼 밑바닥까지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지금으로 치면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개신교를 믿었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거꾸로 루소의 영향을 받아서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된 것이지만..) 물론 이 정도만 하더라도 루소가 살았던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되었지만 말이다.[5] 자연 상태에서 지녔던 인간의 순수한 감성으로 되돌아가라는 뜻이지,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거나 사회를 버리고 자연인으로 살아가라는 뜻은 아님에 주의.[6]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어가 사용되었고, 성년이 되기 전에 제네바를 떠나서 대부분의 활동을 프랑스에서 했으므로 프랑스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7] 밤늦게 왔다가 도시의 성문이 닫혀서 못 들어가게 되었다.[8] 이탈리아어로 사보이아라 부르는 사부아는 현재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에 속하나 이탈리아 통일 이전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르데냐 왕국의 영토이자, 사르데냐 왕국의 왕실인 사보이아 가문의 발원지였다.[9] 악보를 숫자로 표기하는 형식이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경우에는 편할지 몰라도 악기 연주자들 한테는 불편하다고 까였다. 무엇보다 옛날에 똑같은 방법을 먼저 발표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까였다고.[10] 루소는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는 상대나 행위를 '보충물'로 보았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277.)[11] 테레즈가 지혜의 비결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무모한 젊은이 보즈웰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았고, 크랜스턴이 엄격하게 지적하듯이 그의 엄마뻘이 될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두 사람은 일정이 지체되어 배를 기다리면서 일주일 넘게 함께 있었는데, 보즈웰은 일기에서 그들이 도버에 도착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진술한다. "어제 아침 아주 일찍 침대에 가서 한 번 했다. 모두 합해서 열세 번이다." (중략)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후에 테레즈가 루소에게 간통 사실을 말했다는 것인데, 훨씬 전에 역마차 안에서 고프쿠르를 다루었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자신이 정숙하게 유혹에 저항한 것으로 꾸몄을 것이 뻔하다. 보즈웰은 그들의 짧은 정사를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약속을 지켰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582~583)[12] 나중에 Church Praise Revolution이 이 곡을 바탕으로 오진 예수를 만들었다.[13]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로 유명한 선율도 《마을의 점쟁이》 8장에 나오는 선율이다. #[14] 그 후 15년 뒤, 1768년에 쓴 《음악사전 Dictionnaire de musique》에서도 루소는 프랑스 풍의 바로크 음악을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평한다.[15] 이는 비슷한 시기에 저술했던 『백과전서』의 《정치 경제론 De l’économie politique》을 통해서도 거듭 설명된다.[16]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351.[17] 물론, 볼테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인류 역사를 걸쳐 인간이 사회적이지 않았던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루소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소는 "더는 존재하지 않고 어쩌면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아마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렇지만 우리의 현재 불합리한 상태를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서 가정"하는 것으로서의 자연 상태를 말했던 것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가져다 준다. 만약 사회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정해보자는 것이었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352~353)[18] "정말 자기 아이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하며 아이들이 부모들의 의지에 완전히 따르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식이 어린 시절을 지나서 부모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면 아이가 복종할 수 있고 자신이 누구의 손 안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자마자 아버지로서 권위를 확실히 세우도록 하십시오." (John Locke 저, James L. Axtell 편집, 『존 로크의 교육에 대한 저술들(The Educational Writings of John Lock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8, p.325.)[19] "여기서 감히 내가 전체 교육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유용한 규칙을 제시해도 될는지? 그것은 시간을 절약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소비하라는 것이다." ㅡ 『에밀』[20] 다만 일반의지의 개념대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 전체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며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우리는 우리의 법이 그 일반의지라는 이상형에 근접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뿐이다.[21] 여기서 인민은 people(peuple)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민이라는 단어에 아직 부정적 뉘앙스가 남아있어서 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민주권이라는 용어보다 people주권 또는 실질적 국민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주권개념에 대비되는 것으로는 국민주권, 즉 nation주권 또는 형식적 국민주권이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주권 문서를 참고할 것.[22] 오늘날 스위스의 칸톤. 1708~1806, 1814~1856의 기간 동안 뇌샤텔 지방은 프로이센 왕국동군연합 관계였다.[23] "뇌샤텔 최고 행정법원은 문제가 종결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가 자신이 루소를 보호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라면서 분노에 찬 전갈을 보냈고 루소도 논쟁적 화제로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560)[24] 중요한 문제 하나는 루소의 편지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중략) 편지의 밀랍 봉인이 종종 누군가 훼손했다가 서툴게 다시 봉인한 것처럼 보였다. 흄의 전기 작가는 '터무니 없는 비난'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테오도르 트롱솅의 아들 루이 프랑수아는 공교롭게도 런던에서 흄과 같은 건물에 살았는데, 그는 놀랍게도 흄이 루소의 경비를 절감하려고 그에게 온 모든 편지를 개봉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편지들은 모두 발송인에게 돌려보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흄이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북스럽게 인정했던 것처럼 "나 자신의 경비를 들여 가며 우체국에서 직원들의 호기심과 경솔함으로부터 그의 편지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더욱 친절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이러한 사소한 정황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서 진실로 부끄럽습니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593~594)[25] 흄은 경력을 지켜야만 하는 외교관이었고 영국 정부는 《산으로부터의 편지》에 담긴 선동적인 정견에 놀랐음이 틀림없다. 프랑스 당국 역시 흄이 루소를 비공식적 감시 상태에 두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국 국왕이 제안한 연금은 루소를 조용히 만들려는 추가적인 방법으로 볼 수도 있었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601)[26] 루소는 스스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말한 『에밀』에서, 사회관계의 교육을 설명하면서 청년기(15~20세)에 '동정심'을 먼저 강조하고 이후에야 성년기(20세 이후)에서 '시민의식'을 강조한다. 따라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의 '동정심'이, 사회 관계를 이루면서 관용적 '시민의식'의 감정으로 발전해나간다는 것이 루소의 정치철학이지, 무턱대고 일반의지를 내세워 개인은 다수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루소의 정치철학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루소를 너무 《사회계약론》에 국한해서 살펴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말하듯이 '이기적 사익의 교집합이 공익이고 그런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라, 자신과 동류인 인간이 누구나 다 고통에 가슴 아파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공통된 비참함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으로 결집시킬 수 있게 하는 '동정심'에서 비롯된 도덕적 개인들이 추구하는 공익이, 바로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인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정립했다는 측면에서 '사회계약의 권리' 그 자체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계약 이면에 전제되어 있는 감정, 즉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의 동정심에 기반한 관용적인 시민의식'을 말하지 않고서 루소의 정치철학을 논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시민의식은 교육을 통해 길러지므로, 루소가 자신의 교육학 저서인 『에밀』을 중요시한 것도 이런 까닭이 있어서이다. 루소는 일찍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사회계약론》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 바가 있으며, 특히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책으로, 둘 사이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심지어 루소는 《사회계약론》 내에서도 "시민들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 풍습, 관습,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치종교를 고려함에 있어서 '시민종교'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사회성의 신조'는 관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인간 불평등 기원론』, 파주,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5, p.66~68 요약.[28] 동시대의 강압적인 교육관과 비교해 보면, 루소의 교육관은 사실 불필요한 교육을 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깝다.[29]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복종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남녀는 상호 복종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다만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남성 의존적인 존재로만 제한시킨 것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른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30]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25~26. (강조(볼드체)는 원문에서의 강조 그대로.)[31] 투표는 그러한 일반의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표=일반의지'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일반의지는 각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2] 행정에는 '사법'이 포함된다.[33]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종교 (religion de l'homme)'는, 루소가 『에밀』에서 말하는 '자연종교'와 동일한 것이다.[34] 루소가 말하는 시민종교란, 나라 자체가 종교적 대상이 되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신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교는 사람들을 속여서 맹신하게 만들고, 배타적이고 폭정을 행하는 종교가 됨으로써 유혈을 즐기는 불관용적인 인민을 만든다는 점에서 나쁘다. 그 결과 인민은 살인과 학살만을 열망하고, 누구라도 그들의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죽이면서 그 자신은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인민은 다른 모든 인민과의 자연적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런 상태는 그들 자신의 안전에 매우 해롭다.(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164~165.)[35] 한 나라에 두 입법, 두 지도자, 두 조국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을 모순적인 의무에 종속시켜, 그들이 독신자인 동시에 시민이 될 수 없도록 막는다. 라마의 종교, 일본인들의 종교, 로마 기독교가 그렇다.[36] "정치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세 가지 종교는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다."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165.)[37] 장 자크 루소 저, 조명애 역,『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서울, 은행나무, 2014, p.110~116.[38] 루소는 《산에서 쓴 편지》에서 민주주의와 집회의 자유를 옹호한다.[39] 루소의 교육철학과 정치철학을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책으로, 둘 사이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은 학술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루소는 스스로 두 책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고, 《에밀》에서 시민의식을 설명할 때 루소는 직접 《사회계약론》을 요약해 넣기도 했다.[40] 루소의 사상은 동정심이라는 인류애적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서 타 공동체에 폭력을 저지르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는 『사회계약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루소는 다른 공동체의 인민들을 고통에 빠지게 만든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시민 종교'를 비판하며, 그렇기에 시민의식에 '관용'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41] 물론, 여기서 '폭력을 막기 위한 강요(외부의 폭력에 대한 자기 보존을 위해 요구되는 강요)'는 부분적으로 정당화된다. 소위 루소가 말하는 "강제로 자유롭게 한다"는 것도 여기에 속함.[42]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502 요약.[43] 일을 맡아 주선하고 처리하는 사람.[44]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36.[4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111.[46] 행정에는 사법도 포함한다.[4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118.[48] 루소의 정의에 따르면 '국가=주권'이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구성원들은 이 공적 인격이 수동적일 땐 국가로, 능동적일 땐 주권자로, 그리고 그것을 동류들과 비교할 땐 권력이라고 불린다."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25~26.)[49] 장 자크 루소 저, 김중현 역,『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파주, 한길사, 2007, p.373.[50] 여기서 귀족주권이란, 엘리트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말한다.[51] 곧 인민이 '법'을 만드는 주체. 입법의 주체라는 뜻이며 입법할 수 있는 투표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 그 법이 잘못된 법이라고 인민 다수가 동의만 한다면 (고지식하게 그 법을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은 인민들에 의해 바꾸어져야 하는 것이다.[52] 단, 루소는 나쁜 정부는 공포를 통해 인민들의 침묵을 조장하기도 한다면서, 인민의 침묵이 어떤 경우에서는 암묵적 동의가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53]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131~132.[54]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39.[5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52.[56] 일반의지가 잘 드러나는 투표를 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공익을 향한 시민의식이 사람들 각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 도덕적인 시민 의식이 있어야, 사람들이 투표에서 공익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 후마니타스, 2018, p.165.[58] 로베스피에르는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 루소와 카토, 키케로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고,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 한다.[59] 예를 들어 해가 뜨면서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모습을 보면 구름이 흩어지듯이 의심이 없어지며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식이었다.[60] 루소가 설명한 이러한 상태를 ‘고상한 야만인’이라고 부르는데, 루소가 생각했던 것은 석기 시대의 원시인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의 스파르타인이나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의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은 삶이었다.[61] 어머니는 루소가 태어나자마자 산후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62]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54~56.[63] 루소는 낯선 사람들에게 궁둥이를 드러내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 있는 우물 근처에서 진짜로 그렇게 했다. "그녀들이 보았던 것은 외설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들의 눈에 그것을 과시하면서 내가 느낀 어리석은 쾌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반응이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웃는 여자들과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루소는 도망갔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101~102)[64] 직접적인 비판은 아니지만 빅토르 위고레 미제라블 4권에서도 이 내용이 언급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장 자크 루소는 이보다 더 한 일도 했다"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때 간접적으로 나온다.[65] 옛날 샹베리에서는 신생아의 사분의 일이, 파리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그렇게 버려졌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282)[66] 사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경제적 여력이 안 돼서 당시로서는 '흔한 일'을 행했던 것이지만, 루소는 『고백록』에서 이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하지 못했고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에 보냈던 것은 자유로운 교육의 일환"이라고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므로서 욕을 먹는 케이스가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루소가 『에밀』을 쓴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보통사람과 다를바 없는 가난한 천재의 굴욕적인 변명'에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많아서, 루소를 평가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부분이긴 하다.[67]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476[68] "진실이 무엇이었든 훗날 루소가 후회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 후회는 그가 에밀을 쓰도록 고무하는 데 일조했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286)[69] 이용철, 「루소의 여성론」,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68집, 2019, pp.141-191, p.143-183 요약.[70] "Le seul moyen d'éviter l'erreur est l'ignorance."[71] "La confiance élève l'âme."[72] "L'homme qui a le plus vécu n'est pas celui qui a compté le plus d'années, mais celui qui a le plus senti la vie."[73] "L'accent est l'âme du discours, il lui donne le sentiment et la vérité."[74] "Faire un homme heureux, c'est mériter de l'être."[75] 1766년부터 집필을 시작했고 1769년에 거의 완성했지만, 생전에 출간하지는 않았고 루소 사후에 전반부는 1782년, 후반부는 1789년에 출간되었다.[76] 1776년에 완성했지만 생전에 출간은 하지 않았고, 다만 원고를 노트르담 대성당에 놓아두려다가 실패한다.[77] 1776년부터 집필을 시작했지만 1778년에 루소가 뇌출혈로 사망함으로써 미완성으로 남는다.[78] 학자들은 『학문 예술론』을 제1논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제2논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둘의 내용과 맥락이 비슷하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더 구체적이고 영향력이 높기 때문에, 학자가 아니라면 보통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만 읽어도 루소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79] 문명으로 인해 인간은 이기적이게 되고, 그러한 이기심은 인간의 '자유'를 좀 먹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