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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조제프 프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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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동
Proudhon
<colbgcolor=black> 본명 <colbgcolor=white,#191919>피에르조제프 프루동[2]
Pierre-Joseph Proudhon
출생 1809년 1월 15일
프랑스 제1제국 브장송
사망 1865년 1월 19일 (향년 56세)
프랑스 제2제국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학파 아나키즘, 초기 사회주의
직업 철학자, 식자공, 작가, 정치인, 언론인
서명
파일:피에르조제프 프루동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저술활동과 정치2.3. 말년
3. 사상
3.1. 사유 재산 비판3.2. 아나키즘3.3. 인민 은행3.4. 연방정부
4. 카를 마르크스와의 비교5. 어록6. 저서7. 여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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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루동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3]
미하일 바쿠닌
프랑스아나키스트 철학자.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아나키(anarchy)는 "지배자가 없는" 혹은 "권위에 반대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아나르키아(anarkhia)에서 파생된 말로, 국가의 권위, 고용주의 권위 등 기존 서열적 제도의 모든 외적 권위를 거부하는 개념이다. 1840년 프루동은 이 말을 자신의 사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소유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과 공동 노동의 성과'이므로 그 소유를 이용하여 재산을 불리는 '고리대금', '지대', '임대료'는 도둑질과 같다고 주장하여 당대 부르주아지를 경악하게 했다. 이른바 '소유는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사적소유는 '개인의 노동을 위해 필요한 생산수단일 경우'[4]만 제외하고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프루동은 노동자들의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인민은행이 신용대부를 통해 상업과 공업에서 노동조합협동조합들의 결성을 지원하면 점진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렇게 인민은행이 일단 활성화되면 자본가들도 자금을 위탁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의 자연적인 노동단위가 되는 노동조합과 그 조합들이 수평적인 연방관계를 맺는 것에 있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수직적인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데에 있었다. 프루동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혁명(폭력)을 주장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독립된 세력으로 진입할 것을 강조했다. 무정부주의자면서도 정부의 국회의원으로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두고, 스스로를 '역설의 인간'이라 자랑스레 외쳤다.

2. 생애

2.1. 초년기

프루동은 브장송 왼편 바탕(Battant) 37번 가에서 1809년 2월 15일에 아버지 클로드-프랑수아 프루동과 어머니 카트린 시모넹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조장을 만들고 선술집을 운영했는데 프루동이 6살 되던 해에 대기근으로 인한 식량난으로 파산했고, 그 후 가족은 브장송에서 20km 떨어진 뷔르질의 외할머니 농장을 일구며 먹고살았다. 유년 시절 프루동은 부모님을 도와 소를 치고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만족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장남인 프루동이 시골의 불안정한 생활보다 더 나은 삶의 기회를 가지길 원했고, 아들을 브장송 시의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모자를 쓰거나 구두를 신지도 못했고, 교과서가 없어서 매번 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라틴어를 사전도 없이 배웠고 모르는 단어는 수업이 끝난 뒤에 빈칸을 채워넣었다. 돈이 부족한 아버지는 술통을 만들어 농사일을 보충해야 했고, 휴일마다 프루동은 술통에 테를 두를 나뭇가지를 자르러 숲으로 갔다.

중등학교 졸업 후, 브장송의 인쇄소에서 식자공으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하였다. 한 번은 팔랑스테르 공동체[5]를 최초로 구상한 샤를 푸리에가 자신의 대표작 《산업과 사회의 신세계》을 인쇄소에 맡겼는데 프루동은 이 책을 교정하고 인쇄를 감독하면서 푸리에와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2.2. 저술활동과 정치

21살에 식자공 장인 증명서를 따고, 1년 뒤엔 브장송 북서쪽 작은 도시 그레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잘 맞지 않았는지 근 한 달 동안만 있었다. 이후 스위스의 중소 출판사에서 반 년간 일했지만 이번엔 스위스 당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추방당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브장송 아카데미'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 소르본 대학, 콜라주 드 프랑스 등에서 공개 강의를 들으며 언어학철학을 공부했다. 장학금이 있었지만 학업 내내 가난에 시달렸다. 이러는 와중 그는 대표작 《소유란 무엇인가?》를 발표한다. 프루동은 여기서, '생산수단'은 공동 노동으로 이루어온 사회의 공동 유산이기에 노동자들도 사회의 생산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지만, 사적소유를 인정하면 사실상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이고 앞선 동등한 권리에서 노동자를 배제시키기 때문에 공정(justice)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책으로 인해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가 더 전투적으로 쓴 책 《가진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를 출판했을 때는 검사에게 책을 압수당하고 재판까지 받았다. 다행히 배심원들이 프루동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운이 좋게도 무죄로 풀려났다. 연이은 소송으로 그는 점점 가난해졌으나,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1843년 34살 때, 친구로부터 리옹의 한 운송 회사의 비서직을 제안받았다. 당시 리옹은 프랑스 산업 혁명의 핵심 도시로 대규모 기계 산업단지들로 인해 지저분하고 빈민들이 들끓었는데, 이런 까닭인지 리옹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장 빈민들 사이에서 프루동의 책은 유명했었다. 그는 운송 회사의 일을 수행하면서 남는 시간에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에 자신의 소유 이론을 발전시켜야 된다고 느꼈다. 그는 이 시기 메모에서, 생산품을 교환하고 함께 노동하는 경제조합을 조직하여 그 '조합'이 모든 산업 중심지들을 포괄하는 네트워크가 되기를 꿈꿨다. 1844년엔 파리에서 미하일 바쿠닌카를 마르크스 등을 만났다. 당시 25살의 마르크스는 프루동에게 사회주의자로서 함께 협력하자고 제안했으나, 프루동은 마르크스에게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혁명적인 행동을 주장해선 안됩니다"라고 타일렀다. 폭력으로 부를 빼앗으면 소유는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갈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폭력은 그들 자본가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기에, 프루동은 그것을 "천천히 불태우는 쪽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까기 시작한다. 2년 뒤, 프루동은 《경제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을 출판했는데, 마르크스는 이를 비꼬아서 《철학의 빈곤》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했다.[6]

1847년 옷 레이스를 손질하는 가게의 막내딸 유프라지 피에가르(Euphrasie Piégard)를 만나 청혼했고, 1847년에는 《인민 (Le Peuple)》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편집자이자 언론인이 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잡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곤 벨기에로 피신했다. 그러나 곧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었고, 1851년 감옥에서 《19세기 혁명의 일반 이념》을 쓰고 1년 뒤 1852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생트펠라지에서 유프라지와 결혼했으며 《어느 혁명가의 고백》과 《인민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이 책으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858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였으며 이때 레프 톨스토이를 만났다. 1862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연방주의의 원리》를 썼고, 투표거부운동을 펼치는 등 각종 정치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2.3. 말년

1864년부턴 천식에 시달렸고 점점 악화되면서 더 이상 펜을 쥘 힘도 없었다. 그 해 마지막 12월에는 팔다리가 부어 거의 잠을 잘 수 없었고, 1865년 1월 19일 새벽 2시, 프루동은 아내 유프라지와 친구 아마데 랑글루아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 죽기 전, 원한다면 가톨릭 신부를 부르겠다고 하자 프루동은 거부했다. 그리고 아내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에게 고해할래."

프루동이 죽었다는 소식은 파리의 민주 진영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장례식엔 이젠 나이를 먹어버린 노련한 혁명가 친구들, 그와 다투고 비난했던 정치인과 자유주의 언론인들도 있었지만, 근처 거리에선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6천명의 이름없는 노동자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행렬이 파시의 공동묘지[7]로 막 출발하려 할 때,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북소리가 들리면서 군대가 행진해 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출동한 것으로 착각하곤 간격을 좁히며 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 부대를 지휘하던 대령은 아무것도 몰랐고 그의 부대는 다만 복귀하는 중이라고 해명했다. 대령은 진로를 바꿀 수 없으니, 그의 부대가 계속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그의 부대는 군중 사이를 통과했다. 그 때 갑자기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받들어 총!" 대령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았고 북소리는 장례식 행진을 연주했다. 6천명의 군중들은 모두 모자를 벗었고, 부대는 '받들어 총' 자세로 고인의 집 앞을 행진해 갔다. 그 뒤로 거대한 추모 행렬이 뒤따랐다.[8]

3. 사상

3.1. 사유 재산 비판

"재산[9]이란 도둑질이다."[10]
《소유란 무엇인가?》[11]
프루동은 '사유재산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일체의 부는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이것이 누적되어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재산과 땅이 자신의 것이라는 근거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기 때문인데, 아버지는 그 재산을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인 즉, 거슬러 올라가면 그 재산은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불로소득일 따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세습으로 얻은 재산은 불로소득이라는 것.) 따라서 이 불로소득으로 생활하는 귀족과 부르주아는 그만큼의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 생산물을 '도둑질'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늘날 노동자는 개인적이 아닌 집단적으로 노동하며, 이 집단적 노동은 개별적 노동의 생산물의 합계보다 더 많은 생산물을 산출한다. 이는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그 사회의 생산수단(토지, 지식, 기계, 전문인력, 분업체계) 덕분이다. 이 '생산수단'은 공동 노동으로 이루어온 사회의 공동 유산임으로, 이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더 많은 생산물을 산출하는 자는 그것이 사회가 산출한 생산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고용주는 개별적인 노동의 성과에 대해서만 그 개개인의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집단적 노동을 통해 생긴 전체의 여유분(집합력)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나 그가 속한 사회에게 전혀 지불하지 않는데, '사회의 생산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이 곧 자본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즉, 자본가는 과거로부터 축척된 경험과 공동 노동의 성과를 착취하는 셈이다. 따라서 사회의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함으로서 그 이익을 얻는 '이자'나 '지대', '임대료' 등은, 그 사회의 집합력을 수탈하는 불로소득에 해당되므로 그러한 사적소유는 도둑질과 같다고 주장하였다.[12]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 인권 선언문이 '재산권'에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부여한 것을 비판했다. 프랑스 혁명은 원리의 혁명이어야 했었는데 정작 프랑스 인권 선언문은 그 원리를 바꾸지 않았다. 특권을 가진 귀족들은 없어졌으나,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부르주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유 재산이 신성불가침한 권리가 됨에 따라 그들의 부유한 생활이 그 자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이제 정당한 것이 되었고, 반면 재산이 없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면서 그들의 빚을 그 자식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는 혁명 전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노동자가 노동하고픈 의지가 있더라도 그들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가에게 생산수단을 빌릴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자본의 힘을 강화시키면서 자본가의 권력을 증대시켰고 이에 따라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자유'와 '평등'이 위협받게 되었다. '자유'와 '평등'이 프랑스 혁명의 다른 주된 이념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사유재산권은 그 본성상 신성불가침한 영역에서 내려와야 된다고 프루동은 주장했다.

다만 프루동은 공산주의자들처럼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사는 집이나 작업장, 생산도구, 일할 수 있는 토지 등 사람이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 가져야 하는 기본 노동생산조건으로서의 소유를 인정했다. 즉, 어떤 소유가 거주지와 토지, 일하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통제할 권리인 '점유(possession)'일 경우에 해당된다면 그는 그 소유에 대해 아무런 적의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임대료 착취, 고리대금업 등 타인을 착취, 지배할 권력으로서의 소유[13]가 된다면 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프루동이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 이유도 그들이 이 '점유'마저 파괴하려 한다는 점에 있었다. 프루동은 이런 '점유(소유:possession)'가 자유와 해방에 반드시 필요한 근본 원리라고 여겼다.

3.2. 아나키즘

프루동은 스스로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명명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다. 그의 바람대로 미하일 바쿠닌표트르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그를 ‘아나키즘의 아버지’로 부르며 추앙했고, 많은 사상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프루동은 아나키즘에 관한 구체적 이론을 정립하고, 그 실천적 행동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였으며, 아나키와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였다. 이 두 용어는 프랑스혁명 당시에도 사용되고 있었으나 오늘날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아나키와 아나키즘이란 의미로 이 두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그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이가 바로 프루동이다.

프루동은 교회, 종교 및 독재와 같은 모든 유형의 절대적 권위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공공이익이나 사회정의를 이유로 개인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루동에 따르면, 개인과 사회는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권력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는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을 유발시킨다. 따라서 강제적인 지배와 통치가 사라진 사회만이 진정한 조화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즉 "주인이나 주권자가 부재한 통치형태"를 프루동은 '아나키'라고 보았다. 인간을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통치제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프루동의 생각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떠올려 보면, 경찰도 관리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나서서 돕는다. 주민들 사이에는 내 것, 네 것이 없다. 이곳에 국가가 자리를 잡으면 사람들 사이의 도타운 정은 금세 사라진다. 옆집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도, 이웃이 주제넘게 나설 문제가 아니라며 고개를 돌려 버릴지 모른다. 국민의 곤란함을 돌보는 것은 정부의 일이라며 말이다. 강도가 나타나면 경찰관이 나서서 처리해야 한다며 정부에 떠밀어 버린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생각도 당연히 희미해진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정작 나에게 해 주는 것은 별로 없다. 나라가 없다면 이웃끼리 다 알아서 할 일들을, 그들은 생색을 내면서 할 뿐이다. 또한 국가는 위기가 닥치면 국민에게 재산과 목숨을 내놓으라며 닦달해 댄다. 나라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예전처럼 오순도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되지 않을까? 아나키스트들은 '협동과 공생에 기초한 소규모 자연 공동체'를 꿈꾼다.

프루동이 사용한 ‘아나키’란 표현은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위한 논거로서 자연법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즉, 그의 ‘아나키’ 개념에는 사회의 내부에는 균형의 자연법이 기능하고 있어서, 정부가 법적 강제력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특권적 사유재산'이 없는 세상의 시민들은 알아서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에 따라 프루동은, ‘권위를 질서의 적’으로 규정하고, ‘권위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공격하고 거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프루동은 추종자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고, 어떤 종류의 조직도 만들지 않았다.[14]

3.3. 인민 은행

그는 노동자들이 지대와 이자, 고리대금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호주의적 교환 은행(인민 은행)을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민 은행(the People's Bank)의 구상으로 이어진다.

프루동은 회원인 노동자들이 상호적으로 서로를 보호하는 경제 조직을 구상했다. 여기서 신용대부는 더 이상 금융가나 국가가 조정하는 사안으로 다루어지지 않아야 하며, 노동자들이 기꺼이 조직하려 할 상호원조에 의지한다. 이 신용대부는 부족하거나 과잉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고, 그 대부 규모는 그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맞먹어야 한다. 또한 고리대금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제 생산품이 통화로 사용될 것이다. 아니면, 무료 신용대부의 경우처럼 이 체계는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의 생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교환권, 생산성을 기준으로 각 노동자에게 분배되는 교환권의 사용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4. 연방정부

"다양한 자유체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영어로 ‘자치정부’(self-government)로 불리는 체제를 아나키 혹은 개별정부로 지칭하고자 한다. 일련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아나키한 정부(gouvernment anarchique)란 표현은 불가능하고, 또 이는 부조리한 이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언어(용어)를 재구성하면, 정치적으로 아나키(anarchie)의 개념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또 긍정적이다."
《연방의 원리》
프루동은 《연방의 원리》에서 유럽이 통치가 없는 정부, 즉, 경찰, 권력, 판사, 군대 등이 없는 정부들의 연합체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연방은 사회의 가장 단순한 단위에서 시작된다. 행정기관은 지역을 기초로 하고 가능한 인민들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 이 기초단위를 넘어서는 연방 조직은 행정기관보다는 점점 더 지역 조직들 사이의 협력 기관이 된다. 따라서 국가 자체는 지역들의 연방이 될 것이고, 유럽은 가장 작은 지방의 이해관계가 가장 큰 지방의 이해관계와 동등하게 표현될 연방들의 연방이 될 것이다.

무정부를 말했던 프루동이 말년에 연방정부를 주장했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현실 정치가였고 언론인이었기에, 무정부는 말그대로 '이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루동은 그런 이상이 달성되기 위해 "수세기가 지나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그 방향을 따라야 하고, 끊임없이 그 목표에 다가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카를 마르크스와의 비교

여러모로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점이 많다.

5. 어록

"만일 '노예제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면, 나는 한 마디로 '살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내 말의 의미는 금방 이해될 것이다. 한 인간에게서 그의 사상과 의지, 인성을 빼앗는 권력이 생사여탈의 권력이다. 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그를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함에 있어 그 이상의 논증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마찬가지로 '도둑질'이라고 답하면 안 될까?"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사람들이 소유가 왜 도둑질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같다고 예를 들면서 한 말.
"지금 생산자란 어떤 사람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생산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모든 것!"
『인민의 대표』 첫 호 1면 상단의 구호.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것이다."
1848년 혁명기에 의회에서 활동하면서..[21]
"정부기관 아래, 정치 제도의 그늘 속에서 정치인들과 사제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회는 천천하고 조용히 자신을 유기적으로 생산하며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고 활력과 자율성을 표현한다."
《19세기 혁명의 일반이념》

6. 저서

※ 프루동의 책들 중 평범하고 일시적인 가치를 가지는 책이 있다는 것은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적어도 아래 여섯 권의 책은 아나키스트의 경전이 될 가능성을 가진 책으로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소유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ropriété? #
<colbgcolor=#fff,#1f2023> 1840년
《어느 혁명가의 고백》
Confessions d'un révolutionnaire
1849년
《혁명의 일반 이념》[22]
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1851년
《혁명과 교회에서의 정의》[23]
De la justice dans la Révolution et dans l'Église
1858년
《연방주의의 원리》
Du Principe fédératif
1863년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
De la capacié politique des classes ouvriêres
1865년

이 중에서도 《혁명의 일반 이념》은 작업장과 코뮌부터 종교와 국가, 전 세계까지 사회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아나키스트 사상을 세부적으로 설계했다. 이 책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위대한 두 저작, 《상호부조론》《빵의 쟁취》와 필적할 만한 고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에는 아직 번역된 것이 없다.

이 밖에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이라며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 《빈곤의 철학》 1권 2권이 있다.

7. 여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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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65년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초상화[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3] 원문 Proudhon is the master of us all. 프루동은 프랑스인이고 바쿠닌이 러시아인인데, 둘다 아닌 영어로 써 있는게 이상한데, 출처가 캐나다인 작가(영어사용자)라서 그렇다. 이건 바쿠닌이 직접 쓴 글이 아니고, 캐나다와 영국에서 활동한 아나키즘 작가 겸 언론인이었던 조지 우드콕(캐나다에서 출생만 하고 아기때 가족이 영국에 이주해서 40여년간 살다가 중년에 다시 캐나다로 이주하여 정착)이 썼던 프루동 평전에 나오는 말이다.(물론 19세기 프루동, 바쿠닌만큼은 아니지만, 우드콕도 20세기 아나키즘 활동가 중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즉 조지 우드콕이 평전을 쓰려고 조사하다보니 바쿠닌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조사했다는 것인데, 막상 그냥 했었다고만 나오지 언제 어디서 그 말을 했다고 조사했는지 출처는 나오지 않으며, 우드콕은 바쿠닌이 죽고 나서 태어난 20세기 사람이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냥 우드콕의 책이 계속 인용되고 있다.[4] 프루동은 이를 '점유(possession)'라고 불렀다.[5] 샤를 푸리에가 제안한 자급자족적 유토피아 공동체로, 남녀 각각 810명씩 총 1,620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상부상조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6] 요점은 프루동의 주장이 과학적 변증법과 거리가 먼 사변적인 철학에 불과하며 이상주의적이라는 것인데, 프루동은 마르크스의 책을 단지 어린 작가의 치기어리고 부적절한 비방으로 보았다.[7] 지금은 몽파르나스 묘지(Cimetière du Montparnasse)로 불린다. 근처에 에펠 탑팡테옹이 있는 파리 중심가에 위치하며, 클로드 모네, 클로드 드뷔시, 기 드 모파상, 샤를 보들레르,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의 유명 명사들이 묻혀있다.[8] "이 얘기는 전설이 아니라, 프루동의 가족과 르프랑세 같은 전기 작가도 증명하는 실제 사건이다."라고 《프루동 평전》 p.498에 나온다.[9] possession에 해당하지 않는 property를 의미한다.[10] La propriété, c'est le vol.[11] 그는 재산(private property)을 비판했지만 점유(또는 소유:Possession)를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원상 《재산이란 무엇인가?》(-책의 영문 번역명:《What is property?》-)로 번역하는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12] 단, 프루동은 사람이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 가져야 되는 기본적인 노동생산조건으로서의 생산수단일 경우, 그 사적소유는 인정하였다. 반면, 앞선 생시몽이나 푸리에는 모든 사적소유를 부정하고 모든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를 주장하였고, 다만 그 생산물에 대한 분배는 '노동에 따른 분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적소유를 부정하고 모든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를 주장하면서도, 그 생산물에 대한 분배는 '필요의 욕망에 따른 분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이 '정말로 필요'로 한 것에는 절대적 한계가 정해져 있으며, 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루동, 생시몽, 푸리에가 작은 공동체들의 연대를 말했던 것과는 달리,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를 관리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국가가 적극적으로 그 '필요에 따른 분배'를 강제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13] 더이상 possession이 아닌 property가 된다면[14] 다만 프루동의 아나키즘은 후대에 많은 변형을 겪었다. 후대로 갈수록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은 혁명적 성격을 띄는 아나키즘으로 변했고 노동조합의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나 그에 비해 덜 조직적이더라고 결국은 혁명적 투쟁을 중시하는 아나르코 코뮌주의같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으로 변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라는 명분으로 우익 단체 악세옹프랑세즈 아래로 들어가 최초의 파시즘 우익 단체인 '프루동 서클'을 결성했다.[15]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프루동을 폄하한 적은 별로 없고, 오히려 높게 평가했다. 마르크스는 애초에 성향 자체가 독설가에 삐딱이라서 자기가 빚을 진 선배 사상가, 혁명가들도 일단 삐딱하게 지보다 더 머리 떨어지는 양반들이라 까고 봤고, 반대로 마르크스가 깐 사람들은 애초에 마감독촉 없인 글쓰기도 귀찮아했고 게으른 편이었던 마르크스가 시간이랑 공들여 반박하고 깔 만큼 나름 업적이 있는 사람들이라 봐야한다. 이 와중 프루동도 그렇고, 훗날 1차 인터내셔널에서 대판 머리 쥐뜯고 세계 사회주의권 역사상 첫번째 대규모 흑적결렬을 초래한 바쿠닌을 포함해 아나키스트 계열은 마르크스가 평소엔 목소리치며 싸우고, 그러면서도 아나키스트 사상가, 혁명가들의 기여는 인정하고, 때론 협력하기도 하는 평생의 애증의 관계이자 라이벌이었다.[16] 『프루동 평전』 p.29[17] 그 뒤의 구절: "프루동은 모순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무쌍함을 다룰 유일한 방식이라며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프루동의 이 말은 진정 살아 있는 사유가 그 변화의 힘을 계속 지니고 있을 때에만 옳다."[18] 개량주의(reformism): 사회를 혁명으로 단숨에 바꾸기보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결함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사회사상, 운동.[19] 후대에도 이러한 의회공화제에 가담하는 개량주의자들이 나왔으며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의 정당활동 참가등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지속된 국가의 정당해산등의 억압, 의회에 참가한 아나키스트들의 변질(대표적인 것이 CNT의 개량주의적 지도부들의 스페인 제2공화국 지지)등을 통해 개량주의적 노선은 사실상의 변질되었고 이후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식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심지어 아나키스트 코뮌주의자, 또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등으로 각각 흩어져 흡수되고, 다른 일부는 노동자의 곁에서 비권위주의적 아나키즘ㅡ 즉, '프루동주의 상호주의자'의 이념을 지켜나갔다.[20] 아나코-평화주의나 레프 톨스토이와 같은 류의 기독교 아나키즘류가 이러한 비폭력적, 비권위주의적 아나키즘 분류로 자리잡았다.[21] 프루동을 비판하는 자들은 프루동의 사상이 반-정치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으로 열심히 활동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스스로를 '역설의 인간'이라고 불렀는데, 무정부라는 목표를 정부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그의 실천에서도 그러한 점들을 살펴볼 수 있다.[22] 원제는 "19세기 혁명의 일반 이념"이다.[23] 간단하게 《정의론 (De la justic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4] 남녀간에는 사랑, 정념, 습관의 유대 등, 원하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으나 진실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동료를 이루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별의 차이는 종의 차이에 의해 동물들 사이에 생기는 것과 같은 자연적 차이를 낳는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 여성 해방이라 불리는 것에 갈채를 보내기는커녕, 이러한 극단적이 일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여성을 가두어 버릴 것이다. - 소유란 무엇인가[25] 『Mil neuf cent. Revue d'histoire intellectuelle (Cahiers Georges Sorel)』 p.51~86, "Le Cercle Proudhon ou l'impossible synthèse"[26] 협동조합주의를 의미한다. 이는 조르주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과 악시옹 프랑세즈의 국민통합주의, 그리고 프루동의 협동조합체제를 섞은 일종의 괴이한 혼종체제다.[27] 왜곡의 주된 방식은 프루동의 글을 '선택적 읽기'하는 것이었다.(a selective reading of anarchist theorist Pierre-Joseph Proudhon) 프루동은 종교를 까면서 반기독교주의적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중 반기독교주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반유대주의만 받아들이다던가 해서 그의 사상을 교묘히 바꿨고 이를 자신들의 체제에 추가하였다. 특히 프루동의 국가의 폐지와 지방자치적 연방제를 국가의 폐지라는 것을 없애고 "지방자치"만을 남겨놓고 이를 위한 초월적 존재의 군주국가 선언은 대표적인 노골적 왜곡사례로 봐도 무방하다.[28] Democracy is an easy mark for this new party, and it finds its chief delight in pounding the philosopher of democracy, Rousseau. Now, nobody ever pounded Rousseau as effectively as Proudhon did, and in that fact the Cercle Proudhon finds its excuse. But it is not to be inferred that, because Proudhon destroyed Rousseau's theory of the social contract, he did not believe in the advisability of a social contract, or would uphold a monarchy in exacting an oath of allegiance (Proudhon and Royalism, 1914).[29] 『프루동 평전』 p.377~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