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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피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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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천안함 · 북한/대남 도발 · 서해수호의 날 ·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 ||
천안함 피격 사건
天安艦 被擊 事件
Sinking of ROKS Cheonan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41205182830.png
발생 일시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발생 위치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인근 해역
교전국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북한|]][[틀:국기|]][[틀:국기|]]
지휘관 및 참모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천안함 부장 김덕원 소령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천안함 주임원사 이창기 원사[1]

[[북한|]][[틀:국기|]][[틀:국기|]] 불명
전력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포항급 초계함 2척[2]

[[북한|]][[틀:국기|]][[틀:국기|]] 연어급 잠수정(추정)
피해 규모
포항급 초계함 1척[3] 격침,
46명 전사·1명 순직[4], 수색작업 중 민간인 9명 사망/실종
불명
1. 개요2. 사고 원인 (공식 발표 기준)
2.1. 다국적 연합정보분석TF에 의해 확인된 사실2.2. 공식 발표 이전의 원인 추론2.3. 북한의 공격 이유 추론
3. 구조 및 인양 과정과 그 전개
3.1. 실종자 수색 및 영결식3.2. 전사자 명단(추서 계급)3.3. 제98금양호 충돌사고 희생자3.4. 천안함의 인양 및 조사
4. 피격 후 경과
4.1. 이명박 정부, 국방부 및 정치권의 대응
4.1.1. 전후 정황 재구성 보도 영상
4.2. 북한의 반응4.3. 각국 정부 및 국제기구의 공식 성명4.4. 인터넷의 동태4.5. 유족 보상금 문제
5. 언론사들의 무리수
5.1. 보수 계열5.2. 진보 계열
6. 이와 관련된 각종 음모론 및 왜곡
6.1. 천안함 프로젝트6.2. 논란에 대한 최원일 천안함 함장의 의견
7. 사후 처리8. 생존 장병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들9. 추모사업/행사10. 사건 이후11. 관련 단체12. 여담13. 같이 보기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천안함 피격 이후
D[dday(2010-03-26)]일
2010년 4월 19일, 희생자 46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천안함 추모 연설[5]
772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두움도
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천안함 피격사건 추모시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中.[6]
2010년 3월 26일 밤 9시 22분 대한민국 백령도 남서쪽 약 1km 지점에서 포항급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초계임무 수행 도중 조선인민군 해군 연어급 잠수정어뢰에 공격당해 선체가 반파되며 침몰한 사건이다.

피격 이후 인근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포항급 초계함인 PCC-778 속초함과 백령도 등지의 참수리급 고속정, 해경 함정에 의해 58명이 현장에서 구조되었으며 46명이 전사[7]하였다.

이후 수색작전 중 3월 30일 한주호 준위잠수병으로 순직했고 4월 3일 천안함 수색을 돕던 쌍끌이 민간어선 98금양호가 상선과 충돌해 2명이 사망하고 7명이 실종되어 직/간접적으로 10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하였다.[8]

천안함은 제1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함선이기도 하며, 실종·사망한 승조원 46명 중에는 제2연평해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던 박경수 중사도 포함되어 있다. 관련 속보당시 MBC 스페셜 도중 MBC 뉴스특보

4월 15일 해저에 있던 천안함의 함미가 인양되었으며 4월 24일에는 함수가 인양되었다.

5월 20일 대한민국 국방부와 대한민국 정부는 침몰 당시 북한과 관계 없다고 발표하였지만 이후 그 원인에 대해 민군합동조사단 및 국제조사단의 조사를 거쳐 '북한 연어급 잠수함의 어뢰 공격'임을 확인하고 북한을 규탄하였다. 당시 북한군의 은밀한 공격이 가능한 북한 잠수정이 남한의 바다에 침투해 그 결과 어뢰 공격을 당해 침몰했다.

2. 사고 원인 (공식 발표 기준)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
국문 영문
보고서 1 (pp.1~143)
보고서 2 (pp.144~289)
보고서 1 (pp.1~141)
보고서 2 (pp.142~223)
보고서 3 (pp.224~313)
파일:채널A 로고(2011-2024).svg 동앵과☆ 뉴스터디
<rowcolor=white> 두 동강 나버린 천안함, 결론은 ‘북한 어뢰’
(2023년 6월 18일 공개분)

2010년 5월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은 가스터빈실 좌현 하단부에서 음향자장복합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어뢰 폭발로 발생된 충격파로 인하여 선체의 용골이 함정 건조 당시와 비교하여 위쪽으로 크게 변형되었고 외판은 급격하게 꺾이고 선체에는 파단된 부분이 있었다.

주갑판은 가스터빈실 내 장비의 정비를 위한 대형 개구부 주위를 중심으로 파단되었고, 좌현측이 위쪽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절단된 가스터빈실 격벽은 크게 훼손되고 변형되었고, 함수, 함미의 선저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꺾여 있었다.

함정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방지해 주는 함안정기에 나타난 강력한 압력 흔적, 선저부분의 수압 및 버블 흔적, 열흔적이 없는 전선의 절단 등은 수중폭발에 의한 강력한 충격파와 버블 효과가 침몰의 원인임을 알려주고 있다.

생존자들은 거의 동시적인 폭발음을 1~2회 들었으며, 충격으로 쓰러진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는 진술과 백령도 해안 초병이 2~3초간 높이 약 100m의 백색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진술 내용 등이 수중폭발로 발생한 물기둥현상과 일치하였다. 또한 사체검안 결과 파편상과 화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골절과 열창 등이 관찰되는 등 충격파 및 버블 효과의 현상과 일치하였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진파와 공중음파를 분석한 결과 지진파는 4개소에서 규모 1.5 정도로 감지되었으며, 공중음파는 11개소에서 1.1초 간격으로 2회 감지되었다. 지진파와 공중음파는 동일 폭발원이었으며, 이것은 수중폭발에 의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의 현상과 일치한다.

몇 차례에 걸친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하면 수심 약 6~9m,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대략 좌현 3미터의 위치에서 총 폭발량 200~300kg 규모의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사단이 백령도 근해 조류를 분석해 본 결과, 어뢰를 활용한 공격에 제한을 받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던 중 합동조사단은 침몰해역에서 어뢰로 확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물로 어뢰의 추진동력부인 프로펠러를 포함한 추진모터와 조종장치 등을 수거하였다.

이 증거물은 북한이 해외로 수출할 목적으로 배포한 어뢰 소개자료의 설계도에 명시된 크기와 형태가 일치하였으며 추진부 뒷부분 안쪽의 "1번"이라는 한글표기는 대한민국의 확보하고 있는 북한의 어뢰 표기방법과도 일치한다.

이상과 같이 침몰 원인이 북한의 어뢰 공격이라는 점은 공식 조사에 참여한 미국·영국·스웨덴·호주 4개국 전문가들이 모두 동의하였다.#

이후 2013년 신영식 KAIST 해양시스템공학전공 초빙교수[9]는 별도의 수중폭발 실험으로 어뢰의 폭발로 인한 버블 진동이 천안함 고유진동수와 맞아 공진을 일으키면서 선체를 절단, 침몰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2.1. 다국적 연합정보분석TF에 의해 확인된 사실

2.2. 공식 발표 이전의 원인 추론

사고 발생 후 3월 29일 미국 국무부에서는 "북한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 국방부 발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한민국의 판단에 맡기겠다. 배 자체 이외의 다른 요인에 대해 미국이 알고 있는 바는 없다"고 대변인을 통해 답변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선체노후화에 따른 피로파괴설이나 외부의 공격, 암초로 인한 좌초 등이 원인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해경이 좌초로 보고 받고 출동했다는 점이나 어뢰의 항주음이 들리지 않았다는 점, 스크류가 휘어진 모양이 후진하면서 휜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 때문에 좌초설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근처 어선들만 해도 뻔히 알고 있을 암초에 해군이 침몰했다는 현실과의 괴리, 그리고 무엇보다 측면 중간 부위가 갈가리 찢어진 채 인양된 선체로 인해[10] 암초설은 후에 완전히 사장되었다.

KBS에서는 사건 발생 초기에 표류하였다는 요지의 뉴스를 내보냈으나 이날 밤 10시 반에 천안함의 함미(동강난 배 뒷부분)가 사고 지점 부근에서 발견되면서 KBS의 보도가 오보로 판명됐다.

침몰 당시 폭발음이 있었고 백령도지진관측소 지진계에도 발파 작업 등에서 발생하는 노이즈 파형이 잡혔다는 점과 절단면의 상황을 보아 폭발로 인한 침몰인 것이 유력해지자 폭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민군연합 수사단의 1차 수사가 끝난 2010년 4월 27일까지도 가능성 수준에서 오갈 뿐, 확정 발표되지 않았다. 절단면 공개 후 일각에선 서해교전과 비슷한 형태로 침몰하였으며, 북한군이 설치형 어뢰나 기뢰로 기습공격했다는 설을 제시하였다.

대한민국 국군6.25 전쟁 당시 북한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뢰가 폭발한 것 혹은 북한군이 설치했던 기뢰가 떠내려온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으나 거의 수십 년이 지난 기뢰가 정상작동할 리도 없을 뿐더러 천안함이 침몰한 지역 부근은 지역어민들의 조업 지역이라 기뢰가 터졌으면 오히려 예전에 터졌어야 한다. 그러나 어뢰설로 점차 의견이 가까워지면서 서해교전과 비슷한 형태의 분쟁사태와는 달리 한국 영해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북한이 공격했다면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거냐?'는 의심으로 인해 어뢰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어뢰나 기뢰에 의한 파괴의 경우을 상정하게되면 TOD (Thermal observation device, 열상관측장비) 화면에서 수온 증가에 의한 신호가 반드시 포착되어야 하는데 공개된 TOD 영상에서는 전혀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환점은 중앙 부분이 완전히 갈갈이 박살나 두동강나 침몰한 천안함이 인양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용접면을 비롯한 접합 부분이 분해되어 배의 침몰을 불러 일으켰다는 피로파괴설은 완전히 사장되었는데, 찢어졌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확연한(특히 안으로 굽어져 외부 충격을 받은 것을 보여주는) 절단면은 피로파괴로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 절단면 사진

절단면의 공개를 비롯한 자료의 축적으로 사고 원인이 정황상 어뢰에 인한 폭발임이 점차 유력해지자 이러한 설들은 대부분 사장되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북한 잠수정의 접근을 허용했음을 뜻하므로 대한민국 국군의 대(對)잠수함전력에 대한 회의가 일기도 했다. 특히 김태영 국방장관이 직접 초계임무를 수행 중이었던 천안함의 소나 상태가 문제가 있었음을 발언한 것은 충격적이었다.[11]

어뢰 침몰을 부정하는 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한편 어뢰설에 대해서 '버블제트어뢰 기술'이라는 떡밥이 끊임없이 던져졌는데 이는 '버블제트 효과'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언론사의 잘못된 발언이며 그나마도 '펄스 효과'의 속칭일 뿐이었다.[14] 이는 어뢰가 목표물에 닿지 않고 그 앞에서 폭발하면 발생하는 효과로 특수 기술과는 전혀 무관하고 무슨 폭탄이든 수중에서 터지면 발생하는 효과다.[15][16] 헌데 보수, 진보 등 성향에 관계 없이 거의 모든 언론이 군사 지식의 부족하여[17] '버블제트 어뢰 기술'이라는 보도를 남발하면서 국민 대다수가 이러한 것이 어뢰의 특정 세부 기술이라며 전혀 틀린 정보를 사실이랍시고 믿었다.[18] 결국 있을리 만무한 '어뢰 고급 기술' 헛소문 때문에 '북한이 그런 기술력이 있느냐'는 논란이 발생하는 등 국방부 발표의 진위 여부가 가열되었고 '미국에서 비밀리에 연구하는 기술', '세계에서 몇개의 국가만이 보유한 기술력'이라며 북한의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는 한국군 vs 북한군의 유구한 전통(?)이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맞춰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가 날뛴 끝에 단속당한 것도 이때. 다만 시일이 지나서는 이것도 과장된 언론보도로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2.3. 북한의 공격 이유 추론

이상과 같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임은 명백해졌으나 정작 북한의 공격 동기에 관하여는 여전히 미상이다. 사고 직후부터 현재까지 계속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에 대해서도 특대형 모략극이라고 반발했으며 공식·비공식 매체들에서도 자신들은 천안함 피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북한의 공격 의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북 소식통(북한 전문가, 탈북자 등)의 미확인 정보와 일반인들의 추론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연평해전 보복설
    북한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모두 패배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 북한 내각 중앙부처 책임부원으로 일하다 2012년 탈북한 한 인사는 당시 북한 내에서 정의의 보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으며 이때부터 군 작전국, 정찰총국, 해군사령부 작전처 등이 보복작전을 계획해 왔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 설은 이미 연평해전 후 8년이나 지났고 그간 두 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을 해 온 상태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2. 대청해전 보복설
    천안함 피격 4개월여 전인 2009년 11월 10일에 벌어진 대청해전에서도 북한이 패배하면서 기획된 보복작전이라는 설이 있다. 북한은 세 차례의 서해교전에서 수상함을 이용한 공격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점을 절감하고 이후 기습을 노릴 수 있는 잠수정에 의한 어뢰 공격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대북단체들이 사건 발생 이후 북한의 정보원에게 들었다며 많이 제기한 설이기도 하다. 납북자가족모임에서는 북한군 장교와의 통화에서 들은 내용이라며 김정일이 친히 남포의 서해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보복 명령을 내렸고 이에 김영철·우동측 등이 작전을 짜 실행했다고 주장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도 북한 군인 가족의 증언이라며 북한 서해함대 사령부가 2010년 광명성절에 '대청해전 보복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3월 중순부터 비상대기령을 발령하여 전 장병의 휴가와 외출을 금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시기상 개연성은 높지만 이 역시 대중에 공개된 확증은 없다. 헌데 최원일 함장은 해당 가설을 믿는다. 해당 영상 링크 18:25 부분 참조.
  3. 최고존엄 모욕 보복설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달리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대북지원에 대해 미온적이었고 갖가지 조건을 붙이면서 북한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이에 김정일이 몹시 불쾌해했고 북한 노동당과 군부는 최고존엄이 모욕당했다고 판단하여 군사적 보복을 기획했다는 설이다. 탈북 언론인 강철환은 이런 설을 전하면서 당시 보복작전 기획 당시 전 인민무력부 부장이던 김일철정찰총국장이던 김영철 간에 의견대립이 있었다고도 이야기했다. 이에 의하면 6.25 전쟁 때부터 평생을 해군에서 근무한 김일철은 북한 해군의 열악한 상황과 서해의 악조건 때문에 서해에서 잠수정으로 초계함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영철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경계가 느슨해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키고 결국 천안함 격침까지 성공시켰다고 한다. 이후 김일철2010년 5월 13일에 국방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직위에서 전격 해임되었는데 강철환은 그 이유도 천안함 격침 성공 이후 김정일"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자는 군인 자격이 없다"고 사실상 김일철을 지목해 질책했기 때문으로 전하고 있다.
  4.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용 도발설
    한편으로는 김정일의 보복이 아니라 2009년 정식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기획이었다는 설도 있다. 김정일2008년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더 이상 오래 살기 힘들다는 점을 직감하고 급히 김정은 중심의 후계체제 구축에 들어간다. 하지만 김정은은 아직 한참 어리고 내세울 공적이 없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2010년 천안함 격침과 이후 연평도 포격전과 같은 과감한 대남도발을 연속적으로 주도했다는 이야기이다.
  5. 군부 강경파 독단 도발설
    위와 같이 김정일, 김정은김씨 일가가 직접 지시, 관여한 기습 공격이었다는 설과 달리 북한 군부 강경파의 독단적인 도발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2010년김정일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집무가 어렵고 김정은은 아직 확고한 지지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권력의 공백기였다는 추론에서 출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 강경파가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에서 김정일, 김정은도 모르게 기습 도발을 감행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흑금성으로 잘 알려진 전직 특수공작원 박채서가 사건 이후인 2010년 5월 베이징의 '중국대반점'[19]에서 직접 장성택을 만나 들었다고 한다. 박채서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 군부는 이전부터 중국 인민해방군 선양군구로부터 직접 군사위성 첩보를 제공받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천안함의 위치를 파악하고 매복 기습을 펼쳤다고 한다. 이 설은 중국과 북한 군부 사이의 사전교감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나 장성택은 북한군 지휘계통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다. 북한 체제 속성상 아무리 김정일이 건강이 나쁘다 해도 군부가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이런 일을 함부로 벌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20]장성택은 중국식 개혁개방을 지지하고 북한 군부와는 계속 대립해 왔기에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빠져드는걸 막고자 김정일이 천안함 공격과 무관하다는 거짓 정보를 박채서에게 흘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6. 우발적 교전설
    한편 김씨 일가나 군부 강경파 모두와 무관하게 북한 잠수정이 작전 중에 코너에 몰려 우발적인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것이 적중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백령도 인근 해역은 북한 잠수정들이 종종 드나드는 구역인데 당시 이중 한 척이 은밀히 남측 해역을 침범해 작전하다 어떤 이유에선가 제때 북측 해역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천안함 등에게 꼬리를 잡혔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북한 잠수정은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추적해오는 천안함에 어뢰를 발사했고 이것이 적중하여 천안함이 격침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 또한 천안함이 피격 당시 정확히 무슨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지, 정말 북한 잠수정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는지 밝혀진 바가 없어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설들은 사실 어느 하나만이 정답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또는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과거 연평해전 패전의 굴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명박 정부가 이전 정부들과 달리 북한의 자존심을 긁어대 김정일이 몹시 불쾌해하고 후계자 김정은의 위신을 세워줄 이벤트가 필요했던 와중에 결정적으로 대청해전이 벌어지자 기습적인 보복 공격을 기획했던 것으로도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제공되는 비밀 위성정보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한편 북한 정보에 정통한 주성하 기자가 북한 고위층 탈북자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기사에 따르면 천안함 피격은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지휘로 서해 남포연락소 소속 소형 잠수정이 수행했다고 한다. 남포연락소는 과거 조선로동당 작전부 산하에서 해상 대남 침투 및 복귀 안내, 전투정찰 임무 등을 수행하던 4개 해상 연락소 중 하나였는데 2009년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 기간에 조선로동당 작전부정찰총국의 1국으로 편입되면서 정찰총국 소속이 되었다. 천안함 공격은 대북지원과 관련된 최고존엄 모독, 대청해전 패배 등 북한의 누적된 불만에 대한 여러 보복 작전안 중 하나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천안함이 공격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천안함북방한계선 인근까지 자주 출몰하면서도 음파탐지기 성능이 나빠 잠수정 탐지와 방어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공격 작전에는 소형 잠수정 3척이 각각 작전해역 진출을 선도하는 개척조, 1차 공격을 수행하는 공격조, 퇴각시 엄호 및 1차 공격 실패시 2차 공격을 수행하는 엄호조로 나누어 참여했다고 한다. 실제 작전에서는 개척조를 맡은 잠수정이 고장나서 회항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나머지 2척이 계속 작전을 벌여 공격조에 의한 뇌격이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3. 구조 및 인양 과정과 그 전개

천안함이 피격되고 함장인 최원일 중령은 함장실에 갇혔다.[21] 이 상황에서 부장 김덕원 소령, 작전관 박연수 대위 등 부하 장교들이 함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최원일 함장을 구출했다.[22] 함장실을 빠져나온 함장은 남은 승조원들을 이용해 구출조를 편성해 침몰하지 않고 떠 있던 함수 여러 곳을 수색해 함수에 남아 있던 승조원 59명 중 1명[23]을 제외한 58명을 구출한 후 함 외로 올라와 구조를 기다렸다. 이후 도착한 해경 경비정에 차례로 승함, 함장이 마지막으로 퇴함하면서 이때까지 살아 남아있던 승조원 전원이 구조되었다.

피격당한 부위의 특성 상 장교는 전원 구조되었다. 침몰된 함수는 주로 병과 부사관이 생활하는 곳이었으며 장교가 생활하는 곳은 함장실의 해치가 찌그러진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멀쩡했다.

국방부는 사건 당일부터 실종된 함미(배의 뒷부분)의 위치를 찾기 위해 수색을 펼쳤다, 하지만 그 시도가 실패하여 해경과 지역 어선단의 도움을 요청했고 해경은 사건 다음 날인 27일 소나를 이용, 함미로 추정되는 물체를 식별하여 해군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해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보고를 무시한 채 다음 날인 28일 어선의 음파탐지기에 탐지된 해경이 식별한 것과 동일한 위치에서의 보고를 받고 그제서야 출동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최소 69시간 이내에 함미를 찾아야 한다고 했던 당시 국방부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당연히 언론들은 그 이유를 알고자 했으나, 국방부에서는 해경이 해군 측에 함미좌표를 전달했다는 내용의 사실조차도 증명해 줄 수 없다고 했다.[24]

이는 두고두고 의혹거리가 되었다. 링크

해군 해난구조대, 해군 UDT/SEAL, 육군 특전사중앙 119 특수구조대의 잠수요원들도 수중 수색,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

3.1. 실종자 수색 및 영결식

104명의 승무원 중 58명이 당일 구조되었으나 46명은 그날 구조되지 못했고 떠내려온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

3월 30일에는 실종자들을 끝까지 구하려다 무리한 잠수를 했던 해군 UDT/SEAL 소속 한주호 준위[25]가 결국 잠수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관해 충무무공 대한민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한주호 준위에 대해 훈장 수여 외에 소위로 1계급 특진 제안이 왔는데 여론이 이를 두고 무지한 처사라고 비난한 바 있다. 계급은 분명 소위가 높고 법적으로 같은 위관급 장교의 대우를 받으나, 준사관은 부사관이 신분전환하여 올라가는 자리인 만큼 "부사관의 별"과 같은 위치에 있는 계급이라 소위보다 그 무게가 훨씬 크기 때문.[26] 다만, 전사 및 순직자에 대한 특진에 의한 진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절차적으로 물어보는 것 자체는 맞는다. 이 제안은 유가족들이 사양하여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의 희생정신과 위국헌신 정신은 이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한주호 준위의 사망장소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천안함 함수에서 작업 중 사망한 것이라는 정부 발표의 구체적 자료나 증언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도, 국방부 백서, 함수 구조 책임자였던 권영대 UDT대대장의 증언이 다 달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확한 사고지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었다. 링크 KBS가 보도했던 제3의 부표지점 설에 대해서도 정확한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월 3일, 실종자 46명 중 한 명인 남기훈 상사의 시신이 함미에서 발견되었으며 같은 날 천안함 수색을 돕고 있던 민간어선 금양호가 수색을 마치고 조업지로 되돌아가던 중 인근 해역을 지나던 상선과 충돌하여 침몰, 9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또한 구조기간 중 4월 15일과 17일, 초계임무로 출격한 해군의 링스 헬기가 각각 전남 진도와 서해 소청도 부근에 한 대씩 추락하여 총 3명이 사망[27]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나머지 실종자 44명 중 4월 15일 인양된 천안함의 함미에서 36명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인양 과정은 TV를 통해 전국에 보도되었다.

침몰 29일째인 4월 24일에는 함수가 인양되었으며, 추가로 1명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연돌에서도 1명이 발견되었다.

4월 29일, 평택 2함대사령부와 대전 현충원에서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사망자와 실종자는 모두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시신을 찾지 못한 산화한 용사 6명[28]은 유품을 태워 안장되었다. 해군에서는 전사자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해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렀으며 당시 항구에 정박하던 수많은 함정 승조원들은 대함경례로 최고의 예의를 갖춰서 고인들을 보냈다.

3.2. 전사자 명단(추서 계급)

천안함 46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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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98금양호 충돌사고 희생자

김재후 48세 선장
박연주 49세 기관장
김종평 55세 선원
정봉조 49세 선원
이용상 46세 선원
안상철 41세 선원
람방 누르카효
(Cambang Nurcahyo)
인도네시아
36세 선원
유수프 하에파
(Yusuf Haaefa)
캄보디아
35세 선원
허석희 33세 선원

3.4. 천안함의 인양 및 조사

민군 합동조사단은 한국 10개 전문기관의 전문가 25명과 군 전문가 22명, 국회추천 전문위원 3명, 미국∙호주∙영국∙스웨덴 등 4개국 전문가 24명이 참여하였다.

4월 15일 천안함의 함미가 인양되었고 민군 합동 조사단은 인양 다음 날인 4월 16일에 외부 폭발 가능성이 높다는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4월 24일 함수 인양 결과 오른쪽이 6m 가량 더 유실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민군합동조사단은 수중 비접촉 폭발로 인해 천안함이 침몰하였다는 결론을 발표하였다. #1 #2

4. 피격 후 경과

4.1. 이명박 정부, 국방부 및 정치권의 대응

일부 음모론자들은 보수 정권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사건 발생 이후 "어뢰로 침몰했다고 속단하지 말라"는 주문을 하였으며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진행하라는 발언을 했고 합동 조사 및 어뢰가 발견된 이후에서야 북한 소행이라는 신중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3월 27일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정부와 군은 '북한의 공격에 의한 침몰일 가능성은 적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재 원인 규명이 전혀 안 된 상황에서 이 무슨 경망한 발언인가"라고 비판하면서 "원인 규명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속히 가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침몰의 원인은 오히려 어뢰 공격이나 분실된 기뢰에 접촉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라며 "정부와 군은 어느 가능성이 크다 적다 하는 경망한 추측을 하지 말고 원인 규명에 전력을 다하라. 그리고 하루 속히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3월 30일 김성찬 해군총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백령도에서 직접 보고 받는 자리에서 "어뢰 피격 가능성이 높다"고 분명히 밝혔다.
"내가 배를 만들어 봐서 아는데[30], 파도에도 (배가) 그렇게 부러질 수 있다. 사고 가능성이 있다. 증거 없이 (북한 연계설을) 주장하다가 러시아 등 주변국이 증거를 대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의 기뢰 등도 침몰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지 어느 하나로 몰고 가며 추측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로 말해야 한다."
- 4월 1일 남미지역 특사를 맡은 한나라당 의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

초기부터 대한민국 해군은 어뢰 피격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청와대에서는 파도에 부러졌다는 등 계속하여 어뢰 피격을 부정하였다. 이후 1970년 백령도 기뢰 부설 책임자였던 김모 씨의 자기가 매설한 기뢰가 "한 번 우연히 폭발한 적이 있다"라는 주장이 문서로 청와대로 전달되었다. 이에 김성환 외교안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정정길 대통령실장,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동조하였다.

이러한 참모들의 의견을 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국무총리 등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들은 기뢰폭파설 쪽으로 기울어 졌다. 이 때문에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이 넘도록 해군의 어뢰 피격설은 부정되었고, 청와대에서는 기체피로설과 기뢰폭파설만 슬슬 흘렸다. 당시 합참 전비태세검열차장이었던 오병흥 장군에 따르면 당시 남북한은 정상회담을 위해 접촉하고 있어 청와대에서 어뢰설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오병흥 장군이 조사 후 어뢰 공격이라는 보고를 하자, 국방장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정치적 고려가 있을 수 있으니 어디에도 그 보고서를 주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

4월 2일 김태영 국방장관은 국회 대정부 질의 답변에서 천안함 침몰 원인을 “기뢰와 어뢰 중 어뢰 가능성이 실질적”이라고 밝히는 등 북한에 의한 어뢰공격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

4월 6일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이런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재 없이 1개 부대의 사령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북한 내부 상황을 감안할 때 김 위원장의 승인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과 다른 분석이다. 원 국정원장은 “우리가 독수리 훈련을 진행중인 상황에서 북한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북한 해군과 군 사령부 사이에 긴밀한 교신이 있었을 것 아니냐”는 송영길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체크한 바로는 특이동향이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의 정보교류에서도 특이동향이 없는 것으로 나왔다”고 답했다. 국정원장의 이런 발언은 국정원이 천안함 침몰 사건에 북한이 직접 연계됐다고 추론할 만한 합리적 증거가 없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

4월 8일 국회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매일 아리송한 새로운 말이 나오고 있다”면서 “군과 국방부, 한나라당은 북한의 소행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청와대와 국정원, 미국은 ‘북한의 소행으로 볼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누구의 소행이고,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할 때”라고 말했다. #

4월 20일 이명박 대통령은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등 여야 3당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 오찬회동 자리에서 천안함 침몰에 대한 북한 연루설과 관련해 "북한 개입도 물증이 나와야 하니 여야 정치권도 조금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국민의 안보 불안이 매우 심각하다"면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다. '튼튼한 국방 물샐 틈 없는 안보'라고 이야기했는데 3차례나 해전 있었던 곳이다. 북한대청해전 이후 보복을 공언해왔는데 초계함이 두동강 나는 무방비상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위기대응과 보고체계가 혼란스럽고 지연된 것을 국민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즉각적인 반격출동태세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부족했다. 북한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는 발언이나 내부 원인에서 침몰 가능성을 찾은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국가안보태세에 대해 국민 불안이 많다. 사고시간부터 해군, 해경 진술에 차이가 있고 국민 입장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고 유언비어도 있다"면서 "정부가 책임지고 진상규명하고 대통령도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2021년 6월 중앙일보의 단독 보도에 따르면 천안함의 폭침 징후가 나타났어도 군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

2010년 4월 15일 천안함의 함미가 인양되었으며 24일에는 함수가 인양되었다. 1차 현장 조사 결과 내부 폭발 가능성과 피로 파괴는 가능성이 없음이 확인 되었다. 가능성은 외부의 요인. 즉 기뢰나 어뢰냐는 것뿐이었다. 군은 처음부터 북한의 소행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후 어선에 의해 북한의 어뢰 추진체가 발견되고 5월 20일 민.군 합동조사반은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공격"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4일 천안함 피격사건을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간주하고 이후 남북관계가 바뀔 것임을 예고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북한 선박의 남한 해역에서의 해상교통로 이용 및 남북교류를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다.(5.24 조치)

5월 20일 유시민 경기지사 후보,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송영길 인천시장 후보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등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투표일을 얼마 앞두고 천안함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겠다고 한다. 이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선거개입을 하겠다는 것으로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반발했다. #

5월 21일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에서 “북한의 소행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맨 먼저 말한 곳은 청와대와 국정원”이라고 지적하면서 “북한의 소행이라면 북한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지만 아직도 국민은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며 미국9.11 테러 때 초당적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3년간 조사를 해서 백서를 발간한 점을 거론하면서 “왜 하필이면 (선거를 앞둔) 이때 이렇게 서두르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

조사 결과 발표 이후 재조사 요구가 이어졌으며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5월 26일 한국진보연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37개 진보 시민단체들은 정부에 천안함 사건 전면 재조사와 ‘북풍’ 여론몰이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으며,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 조사위원은 한 강연에서 스모킹건이었던 어뢰속 한글 1번 표식에 대해 “북 어뢰에 쓰인 1번은 우리가 쓴 거 같다”고 주장했다. # #

김태영 국방장관은 2010년 5월 4일 "경계근무 중이던 우리 함정이 기습받았다는 데 대해 안보 태세의 허점을 드러냈고 소중한 전우가 희생됐다는 점에서 통렬히 반성하는 의미로 천안함 피격 사건이 있었던 3월 26일을 '국군 치욕의 날'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감옥에 수감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천안함 용사들을 찾아 추모해 왔다. 수감 당시에는 청와대에서 함께 일했던 참모진들에게 대신해서 참배를 해 달라는 당부를 했고 실제로 이명박 정부 인사들의 참배가 매년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사면 이후 첫 공식 일정도 2023년 3월 2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천안함46용사의 묘역을 찾는 것으로 하였다. # 이러한 행보를 보아 천안함 추모 만큼은 매년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4.1.1. 전후 정황 재구성 보도 영상

천안함 생존자의 증언 (1/2, 28분 42초) - PD수첩, 2021.06.15
천안함 생존자의 증언 (2/2, 20분 11초) - PD수첩, 2021.06.15

4.2. 북한의 반응

한편 북한 최고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는 대변인 성명을 발표해 남한의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를 '날조극'이라고 주장하면서 국방위 검열단을 남한에 파견하겠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방송이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주장은 1.21 사태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도 자신들이 아니라며 주장했던 사실로 보아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 10월 15일 김정남김정일에게 이 사건으로 항의를 했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북한의 무리한 화폐계획을 실패한 김정은의 지휘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김정일은 이에 대해 그냥 묵인하고 있었다고.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연어급 잠수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어뢰에 손글씨로 된 '1번' 표기 대신 기계로 인쇄한 '호'라는 표기를 하며 어뢰 설계도면 책자를 배포한 적이 없고 다국적 TF 참여국가가 친미국가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2004년 촬영된 구글어스 사진과 특정 중동 국가에서의 북한이 수출한 130t급 잠수함에서의 중어뢰 운용 실례, 북한의 무역회사에서 작성해 제3국에 제공한 어뢰설계도가 포함된 무기소개 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고 다국적 TF 참여국가 중 하나인 스웨덴은 중립국이라고 반박하였다. #

한편 북한 정찰총국이 2010년 천안함을 공격하기 직전 대한민국 기상청 홈페이지에 300여 회 접속해 '전문가용 일기도'를 집중 열람한 사실이 통일부 문건을 통해 밝혀졌다. 관련 기사 이 주장은 2015년 3월에 나왔다가 출처 등이 확실치 않아 무시되었는데관련 기사 통일부가 2011년 작성한 문서를 통해 내용이 확인되었다. 본 건에 대해 통일부에서는 '특별히 확인해 드릴 사항이 없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관련 기사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9238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272223425
북한은 2011년 이명박 정부가 자금을 제공하면서 정상회담을 추진하며 동시에 천안함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정부는 "외교적 결례”, “상식 이하"라고 북한을 비판했다.

4.3. 각국 정부 및 국제기구의 공식 성명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 국제사회는 많은 관심을 보였고 조사결과가 발표된 후 조사 참여국인 미국을 시작으로 20일과 21일에 걸쳐 15개국이 북한을 비난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에도 각국의 반응이 이어졌다.

4.4. 인터넷의 동태

다음 아고라에선 2009년 군납비리를 밝혀 화제를 모았던 김영수 소령의 사칭범이 천안함 피격 사건은 군의 내부비리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다가 검거되었다.[32]

디시인사이드에선 이 사건에 대한 글이 해전 갤러리와 밀리터리 내무반 갤러리에 가장 많이 올라왔는데 그 중 원래부터 정전이 종종 있던 해전 갤러리는 유동닉들이 점령해 버려 사실상 코갤 멀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복구되었다.

한편 전사자 명단이 발표될 당시 디시인사이드 철도 갤러리의 고정닉인 '신분당선㈜'이 천안함 침몰 때 사망한 장철희 일병[33]으로 밝혀지자 디시인사이드, 특히 고인이 활동하던 철도 갤러리는 충격에 빠졌다.

이는 철도 갤러리로 국한되지 않고 그가 활동하던 다른 철도 동호회[34]도 마찬가지였다. 철갤의 추모글 그리고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0년 4월 29일 고인의 철도에 대한 열정을 기리는 측면에서 장철희 수병을 한국철도공사 명예사원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묘비 앞에는 한국철도공사 사원증이 걸리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iN에서는 연일 뉴스에서 산화(散花)[35]자라는 표현이 나온 것을 화학의 산화(酸化)로 착각해 시신이 녹아 없어졌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부류들이 나타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형이 해군에 지원했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질문이 올라와 성지로 등록되는 일이 있었다.#[36]

4.5. 유족 보상금 문제

천안함 장병들의 전사 후 장병들의 유족들에게 보상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관련 법의 허점을 이용하면서 일부 유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첫번째 피해자는 신선준 상사의 가족들. 신 상사는 어린 시절 친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아버지 신국현 씨와 누나 신선영 씨와 셋이서 살아 왔는데 국가에서 전사자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자 28년간 종적을 감춘 친어머니가 나타나 보상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신 상사의 친모는 다른 남자와 재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고 고인의 마지막 순간에도 현장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고인의 묘소에 화환만 떡하니 놓고 가 버린 뒤 돈을 달라고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0년 7월 9일에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자세하게 드러났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온 신선영 씨는 신 상사의 묘소에 놓여진 화한을 보고는 "어떻게 이렇게 이름까지 써서 갖다놓을 생각을 하냐"고 분개하며 그 자리에서 화한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또한 본인이 떳떳하다면 오늘 이 자리에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죽은 동생은 몰라도 자신은 친모를 용서할 마음이 죽어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신 상사 친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기 동생 한번도 못 봐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돈을 달라는 거냐며 따졌다. 이후 신국현 씨는 "자식 버리고 도망가놓고 이제 와서 무슨 돈을 달라는 거냐"며 어이없어했고 신선영 씨는 "지나가는 개는 줄수 있어도 그 여자한테는 못주겠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도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하지만 현행법으로는 친어머니의 권리 행사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 법이 보상금의 배분을 직계로 설정해 놨을 뿐 실질적인 양육 문제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 친모는 3억 원을 받고 50~60평대 아파트에서 새로 꾸린 가정과 살고 있다.

두번째는 정범구 병장. 위와는 정 반대로 어린 아들과 아내를 버리고 나갔던 생면부지의 친부가 보상금을 몰래 수령해 간 것이었다. 이렇게 문제가 불거지면서 법안을 고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나 끝내 법 개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으로, 구하라 사망 사건 이후에야 법 개정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 어찌어찌 구하라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이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공무원(군경, 소방관, 교사 등 포함)뿐으로, 사기업 종사자나 자영업자 등은 여전히 버리고 떠나 연 끊은 부모라도 절반을 받아갈 권리를 줘야만 한다.

다만 민간 기부금의 경우 2010년 9월 15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국민정서를 고려하여 위의 두 사람에게 국민성금을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두 사건 모두 유족 측이 분노해서 소송을 걸었다. 어려서 전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린 전사자 친모가 보상금을 요구한 건의 경우는, 법원의 조정을 통해 친모가 보상금의 절반인 약 1억 5000만 원만을 받고 매달 나오는 군인 연금은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는 양육비를 청구하는 소송을 걸었다는데 재판 결과에 따라 보상금을 모두 토해내거나 그 이상 뱉어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5. 언론사들의 무리수

이 기간 동안 언론의 논리는 합리적인 비판보다는 진영논리에 입각해 전형적인 음모론이나 확인되지 않은 허위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서 논조 이전에 언론들의 수준 자체를 의심케 하였다.

5.1. 보수 계열

이 사건에서 보수 계열 언론사들은 대체적으로 북한 어뢰설을 전면수용하였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조선일보, 뉴데일리 등이 특히 이런 경향이 강했다. 몇몇 언론은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북한 어뢰설은 사실로 밝혀졌다.

뉴데일리에서는 북한의 장교를 통해 김정은이 천안함 침몰을 직접 지휘했다는 발언을 담은 기사를 내보냈으나 근거는 전혀 없는 기사였다. 이와 비슷한 기사로는 김정남이 김정일에게 왜 그런 일을 벌였냐고 항의를 했다는 기사가 있으나 기사에 스스로 <이날 방송(KBS)은 김정남의 측근이라고 주장한 사람의 신원을 밝히지 않아 발언의 진위 여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라고 쓸 정도로 자신들도 사실인지는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을 기사로 내보냈다. 다만 사실 여부를 떠나 김정은의 후계 체제 공적 쌓기를 위해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전이 벌어졌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강화된 초계임무를 수행 중이던 링스 헬기가 각각 15일 17일에 추락하자 뉴데일리는 ZM-87 등의 레이저 무기를 사용해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ZM-87은 적의 광학장비나 인명의 시력을 멀게 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레이저 무기로, 이걸 맞는다고 기체 비행기능이나 계기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니다.[37] 이것에 맞았으면 조종사나 부조종사, 혹은 둘 모두가 시력을 잃거나 일시적인 시력 마비 증세를 보여야 했을 터이나 그런 것은 없었다.[38] 참고로 1997년에 실제로 러시아 상선에서 자신들을 추적하던 캐나다군 헬리콥터에 레이저 공격을 가한 일이 있는데, 조종사는 바로 시력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했고 레이저 공격을 받은 것을 알았으며 시력을 잃었음에도 한쪽 눈이 멀쩡했던 부조종사와 함께 비행해서 기지로 되돌아갔다.

5.2. 진보 계열

이 사건에서 진보 계열 언론사들은 하나같이 사건에 대해 북한 어뢰설을 애써 부정하고 맹목적으로 북한 감싸주기에 급급 했고 특히 그 중에서도 미디어오늘, 한겨레, 오마이뉴스프레시안이 특히 이런 경향이 강했다. 아래에서 다루듯 어뢰설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논리를 펼치는 모습을 보였으며 부분적으로 북한 측의 성명을 근거 자료로 삼기도 했다. 게다가 이들은 천안함 함장 처벌 같은 망발을 서슴없이 일삼는다. 이 언론들이 핵심적인 반박 근거로 언급하는 것은 '고온에도 지워지지 않은 1번 표기', '흡착된 산화알루미늄의 문제'가 있다. 이러한 보도는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의 충격이 한창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2011년에는 진보 신문들이 '1주기 특집'으로 많이 인용했으며 2012년에는 나는 꼼수다에서 언급되면서 다시 재탕되었다.

2012년판
2011년판(1) 2011년판(2)
2010년판
반박자료(1) 반박자료(2) 반박자료(3)

조금 간략화해서 첨언하자면 수중 폭발의 경우 높은 온도는 폭발점 외부로 방출되기 어렵고 작은 질량의 고속파편 역시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주된 공격수단은 대기 중에서보다 강력한 충격파뿐. 또한 그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구글링해도 그리 자료[39]가 없다. 자료 신빙성에 심히 의심이 가는 부분. 또한 '물속에서 음파는 공기 중에서보다 속도가 느려진다'는 주장과 달리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물속의 음속이 공기 중에서보다 4배 정도 빠르다. 물론 중간의 교란 가능성 때문에 음파의 유실은 훨씬 많으므로 이걸 얘기한 걸 수도 있긴 하다.

미디어오늘의 경우 당시 격렬비열도에 있었던 이지스함이 왜 잠수함을 탐지하지 못했냐고 하면서 공중과 해상을 감시하는 레이더와 물속을 감시하는 소나도 구분하지 못하는 배경지식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고 이런 지식을 기반으로 영문 질문글을 미국록히드 마틴의 언론담당 직원에게 보냈다. 미디어오늘은 공개적 질의 글을 보냈다고 했지만 편지 내용은 그냥 리포터 한 명이(즉 미디어오늘의 공개적인 질의가 아닌) 록히드 마틴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보는 수준의, 그것도 레이다가 왜 어뢰를 감지 못 하는지를 물어보는 수준이었으니... 쉽게 풀이하자면 관제탑에서 산속에서 기동 중인 장갑차를 찾으라는 꼴이나 마찬가지인데 제대로 답장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한겨레는 '러시아 조사단의 보고서'를 가져와서 자기들만의 주장을 펼쳤는데 이 때문에 2011년 붉은 멍게 소동과 같은 큰 파장이 일으켰다. 그러나 이 보고서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에 신뢰성은 전혀 없다.

경향신문 등에서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어뢰의 조개와 흡착물의 사진을 제시하면서 어뢰가 상당히 오랫동안 바닷속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뉴스로 내보냈다. 기사 그러나 국방부는 곧 생물 조가비가 아니라 부서진 조개껍데기(2.5cm×2.5cm)로 확인되었고 어뢰가 폭발 후 해저면에 있던 조개껍데기 조각이 조류 등의 영향으로 스크류 구멍 속에 들어간 것으로 판단되며 흡착물은 조류의 영향이거나 동시에 들어가면서 붙을 수 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공개된 조개껍데기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부서진 파편이었다. #

한편 시간이 지나 사건 1주년이 가까웠던 2011년 3월 24일, 오마이뉴스에서는 1번 어뢰에서 발견된 붉은 물질이 동해안에 서식하는 붉은 멍게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 국방부가 국립수산연구소 등에 의뢰하여 해당 물질을 조사한 결과 붉은 멍게는커녕 생물체조차 아닌 것으로 파악되어, 오마이뉴스는 사과보도를 내었다.

6. 이와 관련된 각종 음모론 및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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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천안함 프로젝트

부러진 화살 영화판을 감독했던 정지영 감독은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는데,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민·군 합동조사단의 결론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라 논란이 되었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2013년 4월 27일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으며 군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검토했다고 30일 발표했다. 군 당국 입장에선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일방의 주장만 담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가처분 신청은 법원에서 기각되었는데, 영화가 주장하는 바가 옳다는 것은 전혀 아니고 그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내려진 것에 불과했다. 이후 상세 내용은 천안함 프로젝트 참고.

세계인권의 날 기념으로 2013년 12월 10일부터 12월 31일까지 무료 공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곰TV다음 영화, 네이버 N스토어 등을 통해 무료 공개되었다.

6.2. 논란에 대한 최원일 천안함 함장의 의견

최원일 대령은 2021년 2월 28일 퇴역 직후 여러 언론을 통해 논란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전역 후 그는 "그 사건으로 나는 46인의 사랑하는 부하들을 잃었다. 함장으로서 유가족들과 전우들에게 무한한 책임을 느꼈다. 어떠한 설명도 변명같이 느껴질 것 같아 긴 세월 꾹 참아왔다. 먼저 간 46인의 전우와 유가족, 생존한 전우들의 명예를 위해 도저히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러한 결심에 닿기까지, 긴 세월 동안 무엇이 문제인지 몇 번이고 곱씹었다."고 했다. #
"사건 초기 정부와 군의 대응이 가장 큰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북한과 정상회담을 논의하고 있던 청와대는 북한의 공격 가능성이 매우 낮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데, 배는 쉽게 부러질 수 있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 장관은 청와대의 눈치를 봤고, 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눈치를 봤다. 결국 그 누구도 북한의 공격 가능성을 주장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 정권은 천안함 사건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가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정쟁의 대상이 되니 당시 정권에서는 선거 일주일 전인 5월 20일, 급히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5·24 대북 제재’조치를 했다.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러니 반대 진영에서는 더욱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안함 피격사건 11주기를 맞아.[40]] 세계일보. 2021.03.25.
최 전 함장은 “천안함 사건 이후 청와대의 첫 반응이 북한의 공격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배를 만들어 봐서 아는데 배가 생각보다 쉽게 부러질 수 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처음 이렇게 시작을 하니 국방부장관은 청와대 눈치를 보고 참모총장은 장관 눈치를 보면서 누구도 북한 공격 가능성을 주장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 전 함장은 사건이 왜곡된 것은 결국 ‘정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심스럽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당시 이같은 청와대 반응에 대해 “(2008년 7월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격이 벌어지고 남북 경색국면이 이어져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맞아 찾아온 북한 조문단과 막후 접촉을 해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한 것으로 안다”며 “그러다 보니 북한의 공격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권이 천안함 사건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고 의심한다. 천안함을 선거에 활용한 것이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10년 6월2일 지방선거가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정쟁의 대상이 되니 당시 정권에서는 서둘러서 5월20일 (민·군 합동조사단)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5·24’ 조치를 했다. 선거 일주일 전에 이런 행동은 의도가 뻔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반대 진영에서는 (조사 결과를) 인정 못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정권도 보수·진보도 아닌 천안함 생존장병 편이다” 한겨레. 2021.03.21.
“이명박 정부는 지지율을 만회하고자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했는데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니 함정 자체 사고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다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섣불리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당시 야당은 믿을 수 없다고 반발하다 보니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정쟁의 대상이 됐다. 이게 지금까지 이어 온 것이다.”

“정쟁에 천안함 생존 장병마저 방치… 軍 ‘졸다가 당했다’ 교육 참담” 서울신문. 2021.03.26.

그 외 최원일 함장은 다음과 같은 의견도 밝혔다.
“보수 진영은 나를 이용하려고 했고 진보 진영은 외면했다. 천안함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젊은 생존장병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 진보가 어루만져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보수라면 천안함을 이용하지 말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예산을 들여 국방력을 강화하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정치권과 언론이) 3월(서해수호의 날)이면 생존장병들을 데리고 사진을 찍다가 4월이 되면 시큰둥한다. 현충일에 잠깐 반짝하고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된다. 이러니 대원들이 지치고 누군가 손을 내밀어도 선뜻 잡지 못하는 것이다."

“유공자 인정도 그동안 계속 잘 안 되고 있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다만 조금 더 전향적으로 검토해서 천안함 생존장병들을 모두 유공자로 등록해주면 좋겠다. 실제 트라우마가 심각해 숨어지내는 대원들은 연락조차 잘 안 된다. 사건 후유증이 심각해 상태가 안 좋을수록 오히려 유공자 신청을 못 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 국가가 먼저 나서는 것이 바로 보훈이고 안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군인이 공무상 질병 또는 부상으로 장애 상태가 되어 퇴직할 때 지급하는 상이연금의 문제도 지적했다. 천안함 생존자들은 전역을 할 때 상이연금 제도에 대한 안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최 전 함장은 “상이연금 제도가 있다는 것을 지난해(2020년)에야 알았다. 생존장병 7명이 신청을 했는데 결과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과거 2년 치를 소급해서 주고 어떤 사람은 아예 소급을 안 해줬다. 형평성에도 안 맞아 보인다”고 꼬집었다. 2018년 <한겨레> 보도로 ‘천안함 46용사’ 중 문영욱 중사가 직계가족의 신청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등록에서 누락됐다는 사실이 8년 만에 드러난 것은 천안함 사건을 정치적으로만 바라본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얼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최 전 함장은 “문 중사의 유공자 누락은 국가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나라를 지키다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에게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3월 넷째주 금요일 열리는 서해수호의날 행사 역시 정치의 장이 아닌 추념과 기억의 날이 되길 바랐다. 최 전 함장은 “서해수호의날은 유족들과 생존한 장병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날 아닌가. 그런데 늘 이곳에 참석한 정치인들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정쟁의 대상이 된다. 지난해에도 생존장병들은 맨 뒤 구석자리에 앉아야 했고 헌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선거를 앞둔 이번 행사 역시 각자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정쟁의 대상으로 삼을지 진심으로 46용사를 추념하는 자리로 만들 지 지켜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전역을 앞두고 몇몇 보수단체에서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최 전 함장은 이런 제의을 모두 거절했다. “나는 정권의 편도, 보수나 진보의 편도 아니다. 유족과 생존장병의 편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진보건 보수건 천안함을 기억해주고 유족을 어루만져주는 누구와도 소통을 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정권도 보수·진보도 아닌 천안함 생존장병 편이다”(2021.03.21.)

그리고 그는 군의 냉대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군내 천안함 생존장병에 대한 대우가 참혹했다. 해군에서조차 한동안 우리를 회피했다.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배에 같이 있는 것을 보면 재수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현역과 예비역들은 심증만으로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사실인 양 말을 전하고 다녔다. 심지어 모 사령관은 천안함이 실패한 전장이며 살아 돌아온 천안함 장병들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존장병들의 상처는 곪고 덧났다. 함정은 공동운명체이며 승조원들은 한 배를 탄 가족이자 전우다. 우리의 희생으로 국가의 안보가 더욱 굳건해지고 군이 더 강해지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원한다."

천안함 피격사건 11주기를 맞아(2021.03.25.)
군대 안에서의 일관된 냉대도 생존장병들을 벼랑으로 더 몰았다. “함장이 죽었어야 너희들이 보상 받았다”, “졸다가 당했다”, “살아 온 애들은 창피할 줄 알아야 한다”, “최원일은 숨어다닌다”….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58명이 들어야 했던 말들이다. 최 전 함장은 아직도 천안함 직후 한 장군의 말을 잊지 못한다. 그는 최 전 함장에게 “너희 때문에 우리 부서가 매일 야근한다. (제2연평해전 때) 참수리 357함은 (생존장병에게) 배 청소도 시켰다. 너희는 다행일 줄 알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지 1년 반이 지난 2011년 12월 발령받은 경상남도 진해 해군교육사령부에서 그는 늘 식당 구석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등 뒤로는 “천안함 애들 때문에 골프도 못 치고 힘들다”, “술도 제대로 못 먹고 이게 뭐냐”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최 전 함장은 “함장이었던 나마저도 외면받고 살았는데 대원들은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정권도 보수·진보도 아닌 천안함 생존장병 편이다”(2021.03.21.)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최광수씨(사건 당시 해군 병장)는 “보수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진보는 외면했다”고 말했다. 최원일 함장은 여러번 극단적인 생각을 했지만 스스로가 증거라고 생각해 “살아남아야 한다”며 삶의 의지를 다잡았다고 한다. 그는 “폭침을 믿고 안 믿고는 더이상 정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면 한다. 안보만 생각하고 어떻게 나라를 더 잘 지킬 수 있을 지를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천안함 장병들에 대한 모욕은 되풀이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그리고 최원일 함장은 논란과 관련해 기고문을 통해 군에 몇가지 해명을 요구하면서 2010년 작성된 천안함 백서와 각종 교훈집은 당시 비밀로 분류된 내용과 상급 부대의 잘못이 다 누락됐다면서 국방부와 합참, 해군은 천안함 피격 사건을 자세히 정리해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태가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를 반문하며, 생존 장병들이 지난 11년간 궁금해했던 내용을 국방부와 합참 및 해군에 당시 함장이 대표해서 10가지만 질문한다.

첫째, 당시 천안함의 장비로 적(敵) 잠수정과 어뢰 탐지가 가능했는가? 둘째, 혹시 탐지됐다면 결과가 달라졌겠는가? 셋째, 당시 대잠(對潛) 위협에 대한 정식 경고가 있었는가? 넷째, 대잠 위협이 있었다면 왜 경계등급을 상향 조정하지 않고, 천안함 경비구역과 기동로 변경 조치를 하지 않았는가? 다섯째, 대잠 위협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함장이 경비구역을 이탈하지 않고 변경을 건의하지 않은 것이 진정 함장의 범죄인가?(당시 형사입건 혐의) 여섯째, 대잠 위협 정보도 없고, 기동로도 짧은데 잠수정을 피해 고속 회피기동하지 않은 것도 함장의 범죄인가?(당시 형사입건 혐의) 일곱째, 평상 상태의 경비 중에 전투 배치를 하는가? 여덟째, 당시 내가 해경정에 구조된 직후에 나와 통화했으면서 왜 국회에서 다른 장교와 했다고 했는가?(2010. 4. 30 국회 국방위 제289회 3차 회의록) 아홉째, 당시 국방부는 왜 함장의 어뢰 추정 보고를 외면하고 함정 자체 사고 가능성부터 조사했는가? 끝으로, 함장이 직접 보고하지 않고 통신장이 해서 제대로 된 보고가 아니라면 선배 장교들은 함장 시절 상황보고 때 통신을 통해 하지 않고 매번 직접 보고했는가?

국방부와 군 당국이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이 아래와 같은 해군 사기 저하와 국민 분열이라는 또 다른 폐해가 드러났다.

우선, 진실은 멀어지고 음모론만 무성해졌으며 국민은 갈라졌다. 그리고 일부 동료 군인조차 천안함 생존 장병들을 회피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해군의 사기와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또한, 같은 배를 탔는데 전사자는 영웅, 생존자는 죄인이 됐다. 끝으로, 해군 대잠 능력 발전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천안함이 북한 어뢰 기습으로 인해 폭파된 원인을 대잠 능력에서 찾지 않고, 엉뚱하게도 배에 탄 사람들이 태만했다는 식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문점에 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논란은 계속되고,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의 상처는 더 깊어갈 것이다. 2010년에 작성된 천안함 백서와 각종 교훈집은 당시 비밀로 분류된 내용과 상급 부대의 잘못은 다 누락됐다. 국방부와 합참, 해군은 정확히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포함, 천안함 피격 사건을 자세히 정리해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청와대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대한 성역 없는 조사를 통해 잘못이 밝혀지면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에게 사과하고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국민께 밝혀야 한다.

당시 힘든 상황을 함께 아파하며 두 손 마주 잡고 말없이 울어준 육·해·공군 선후배들과 걱정하고 격려해 준 국민께 감사드린다.

<기고>천안함 음모론과 軍을 향한 10가지 질문. 문화일보. 2021.04.09.

7. 사후 처리

피격 2달 후 정부는 북한에 대해 5.24 조치를 발표하였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이 사건은 대한민국 해군의 체질을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본래 한국 해군은 빠듯한 예산 사정으로 인해 대잠전에 대한 투자를 등한시했는데 이 사고 이후 해군은 그야말로 눈을 뒤집고 대잠전에 대대적으로 투자해버렸다.

먼저 포항급 초계함의 후기형 15척에 대해 최소 생존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레이더와 소나에 일부 개량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개량소나와 TACM을 통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을 사전 탐지하고 신규 대수상레이더를 탑재하여 잠수정의 잠망경을 미리 발견할 수 있게 개선했다고 한다. 참조링크 1, 참조링크 2 즉, 대잠 공격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최소 잠수정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해 회피할 수 있게 하여 생존성을 높인 것. 다만 잠수정 타격 수단이 없는 걸 봐서는 해군 수뇌부는 인천급이 건조되는 대로 속속 퇴역할 운명인 낡은 배에 따로 예산을 마련해 돈 쏟아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41] 장기 예산책정이란 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해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2010년 시점에서 인천급을 다수 보유했어야 했지만 IMF로 인해 FF-2000사업이 미뤄지면서...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군의 대잠전력은 환골탈태한 수준이 되었다. 현재 인천급 호위함 batch-1 사업과 batch-2(대구급) 사업은 종료되어 전함이 일선에 배치되었고 batch-3(충남급)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잠 전력 강화의 일환으로 신규 대잠 헬기를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1차로 와일드캣 8대의 도입을 완료하였고, 2차로 좀 더 대형 헬기인 MH-60R 시호크 12대를 도입할 예정이다. 또 신규 대잠초계기인 P-8 포세이돈의 도입이 확정되어 2022년부터 배치가 시작된다. 신규 구축함인 정조대왕급 구축함KDDX는 현 대잠전의 최신 트렌드에 뒤지지 않는 고사양의 대잠 체계가 배치되며 기존 구축함의 대잠 소나 또한 개량 중에 있다. 취약한 대잠전 성능을 보이는 포항급울산급도 2020년대가 도래하자 퇴역해 세계 각국으로 공여되고 있고 이제 대잠전에 취약한 한국 해군이라는 말은 옛 말이 되었다.

국방부는 장성 1명을 중징계 처리하였고 9명(징계유예 1명 포함)은 경징계 처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9명의 경징계자 중 함장인 최원일 중령은 징계유예를 받았다. 관련 기사 이후 최종적으로 장성 1명에게 중징계가, 5명의 지휘관과 장교들에게 경징계가 확정됐다. 관련 기사

한편 전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은 사건 직후 보직 해임됐고, 8개월 뒤 징계유예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전방 전투부대에 배치되지 못하였으며 비(非)전투 임무만 수행했다. 그는 진급심사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2021년 중령 연령정년으로(53세) 끝내 명예 진급 뒤 대령으로 전역하게 됐다. 조선일보, 한국일보[42] 생존 장병들도 대부분 PTSD에 시달리고 있으며 절반은 자살 충동이 든 적이 있다고 답했다.

8. 생존 장병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들

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 - “패잔병” “조용히 혼자 죽어”…군대조차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2018년 한겨레)

위에 최원일 함장의 의견 문단에도 나왔지만 정작 군은 천안함 생존장병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었다. 몰지각한 악플러들이나 일개 음모론자들도 아니고 대한민국 해군 자체가 여지껏 반쯤 공식적으로 천안함 생존 장병들을 낙인찍어 왔고 생존자들은 차별과 2차 가해를 당해 왔다. 대잠전이 불가능한 천안함을 대잠 초계에 투입시켜 놓고 천안함 폭침 사건이라는 대사건을 만들어 놓은 군 수뇌부는 반성은커녕 공식 교육 시간에 승조원들의 안이한 태도 때문에 피격을 당했다며 승조원들을 비하하고 천안함 생존자 2명이 있는 자리에서 교육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천안함 생존자들은 수치스러워해야 한다고 모욕까지 하며 생존 장병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도대체 왜 살아 돌아왔냐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서해 수호의 날을 만들고 3월이면 전사자들을 46용사라고 부르며 기념식을 열지만 그때뿐이다. 후술하겠지만 음모론을 부채질한 것은 군 스스로의 책임도 있으며, 정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모론에 대해서 생존자들을 방패막이로 삼고 회피하는 추태를 보여줬다.

생존 장병들은 군 내부가 바깥보다 더 지옥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은 격침당한 배에 탔던 사람이라고 불길하다며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사건 이후 다른 배로 전출을 간 생존 장병들끼리 서로 의지했더니 “야, 재수 없으니까 둘이 떨어져 다녀.”라는 막말을 들은 사람도 있다. (정주현 당시 하사 증언) 군조차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충격에 결국 그는 군인을 그만뒀다.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는 말을 들은 사람도 있다. 사건 6개월 뒤 “바다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 라고 고통을 토로하는 생존 장병에게 매일 얼굴 보던 선임에게서 돌아온 것은 위로는커녕 “이 새끼야, 죽으려면 스크루 쪽에 가서 곱게 죽어.”라는 과연 사람인지 악마인지 의심스러운 폭언이었다는 것이다. 스크루에 사람 몸이 갈리면 산산조각이 난다. 즉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래. 죽어 버려라. 시신 수습하기도 귀찮으니까 스크루를 향해 뛰어들어라."라는 뜻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동료를 말리지는 못할망정... (함은혁 당시 하사 증언)

최원일 함장에 대한 비난도 내부적으로 상당했다고 한다. 한 생존 장병은 사건 이후 전출을 간 발령지에서 상사로부터 “함장이 죽었어야 니들이 보상금을 받는데, 걔가 살아 있어서 니들이 못 받는 거다.”라는 말을 대놓고 들었다고. 오죽했으면 최 함장 본인은 사건 이후 11년이 지난 2021년에 “내가 (배와 함께) 죽었다면 (천안함 사건 자체를) 사고로 처리해 버렸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외에도 해군 내에서 “패잔병”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 책임을 돌리는 말을 들은 사람, 위 사례처럼 동료들이 고통을 무시했다는 사람 등 차별과 막말을 들은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군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기를 원했지만 ‘관심병사로 분류될 것 같아서’ 또는 '진료 시간을 따로 주지 않아서' 받지 못한 사람, 어찌어찌 받아도 군의관으로부터 고통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들은 사람, 엄살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고 느낀 사람이 대부분이다. 정신과 군의관을 믿을 수 있었다는 장병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군은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는커녕 생존 장병에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를 타라는 지시를 하거나, 천안함을 청소하라고 명령하거나, 전사자의 유품을 찾으라고 하거나, 심지어 전우의 시신 신원 확인을 시키기까지 했다. 치아 감식이나 DNA 검사로 충분히 신원 확인을 할 수 있고 혹시 잘못 판정할 가능성 때문에 육안 검시에는 법적 효력이 없는데도 말이다.[43]

사건 단 2주 뒤인 2010년 4월 7일, 생존장병들은 환자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을 했는데 여기에서도 그들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다. 생존장병들은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전날 밤에서야 일방적으로 통보받아 알았고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충분한 준비 없이 말해야 했다. 이 사실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지만 이 이후로는 오래토록 그들이 세상에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복장에 대해서도 군에서 처음에는 군복을 입으라고 했다가 갑자기 환자복으로 바꿔 입으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44] 이유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이 없었다. 결국 욕먹은 것은 생존장병들의 몫이었다. 여러 언론은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두고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군인이 환자복을 입고 언론에 나왔다'고 비난했다.

일부에서의 의심(생존장병들 귀까지 들어갔다)과 달리 군은 생존장병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장서서 의심을 풀려고 하지도 않았다. 악플은 말할 것도 없고 음모론자들이 내는 기사나 유튜브 방송에 대해서도 군에서는 사건 이후 10년이 넘게 지나도록 단 한 번도 고소한 적이 없다. 생존장병들이 군에 왜 온갖 억측과 음모론에 대응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럴 가치가 없다’고만 답할 뿐이었다. 생존장병들을 방패막이로 세우고 군은 그들 뒤에 숨은 것이다. #

정말이지 생존장병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멸시 아니면 거짓말쟁이 취급이었다. 한마디로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 그나마 북한이 한 짓이라고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는 '경계 실패한 패잔병'이라며 치였다. 군조차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최원일 함장 본인은 피격 발생 몇주 전부터 북한 해군의 이상 동향을 감지하고 해군 수뇌부에 후퇴를 요청하였으나 정작 해군 수뇌부는 최원일 함장의 요청을 전부 묵살하였던 것이다.[45] 영상 링크 그리고는 정말 피격당하자 최원일 함장한테 전부 짬처리하고 해군 수뇌부는 나몰라라.[46]

북한 소행이라는 걸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겐 또 '양심선언 해라, 진실을 말해라'고 치였다. 당시 민주당 정치인들은 전술한 바와 같은 국방부의 만행들로부터 피해자들을 감싸주거나 국방부를 비판하는 행동을 보이긴 커녕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북한 공격설을 부정하는 뉘앙스를 보이기도 했다. 후술할 문재인 정부의 천안함 재조사 논란, 조상호 천안함 망언 논란,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회 이래경 임명 논란, 권칠승의 천안함 함장 막말 논란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

경제적 어려움도 그들을 괴롭혔다. 2018년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전역한 생존장병 중 40%가 연 소득 2천만 원(심하게는 1천만 원) 미만의 저소득층으로 어렵게 살고 있고 무직자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생존장병 58명 중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13명뿐이다. 현역 군인은 국가유공자 대상이 아니라는 걸 감안해 2021년 시점까지도 복무 중인 직업군인 24명과 아예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전체 신청자 24명 중 13명만 인정된 것이니까, 인정률이 겨우 절반 정도인 셈이다. 그 중 7명이 문재인 정부에서 인정된 사람들이다. 사건이 발생한 해가 2010년, 문재인 정부 출범이 2017년이니까 사건 이후 최소 7년 이상 방치되었다는 뜻이다. PTSD는 좀처럼 상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PTSD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판례는 생각보다 최근에야 나왔다. 그나마 신체 부상이 심각한 경우만 6급이고, 나머지는 겨우 인정되고도 가장 낮은 7급을 받았다. 유공자로 인정되지 않은 경우 그 어떤 보상금도 취업 지원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해 아무것도 못 받은데다 현재도 PTSD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돈에 쪼들렸는데 그러자 돈이 없어서 정신과 치료도 적잖은 돈이 들다 보니 제대로 못 받고, 그러자 치료 기록이 없어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못해 유공자 심사에서 떨어지고, 그러자 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해... 무한 반복. 이런 엉망진창의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 증언과 사례들의 출처인 ‘천안함 생존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조사’를 진행한 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과학)는 “정신과 치료의 문제는 생존 장병들이 놓인 환경과 함께 봐야 한다. 군에서 이들은 패잔병 취급을 당했고, 동료·전우들이 전사한 천안함을 청소하는 등 사실상 ‘트라우마’를 키우는 명령을 받았다. 정신과 치료가 부족한 수준을 넘어,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연구는 여러 사정상 정식 보고서로 나오지는 못했고, 대신 이후 보완을 거쳐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최원일 함장은 이 책을 극찬했다.

9. 추모사업/행사

사건 후인 2010년 4월 11일, 17일, 18일 세 차례 KBS1 특별생방송 <천안함의 영웅들, 당신을 기억합니다>를 통해 전국적으로 총 22억원 가량의 국민성금이 모아져 9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천안함 46용사 선양재단 발기위원회'를 구성, 12월에 '천안함재단'으로 정식 출범되었다. 2011년 3월 26일, 전국 각지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 1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다.

공식행사는 2011년 3월 26일 토요일 오전 10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서울광장, 서울역 등지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인터넷 역시 네이버 사이버분향소해군 사이버 추모관에서 천안함 46용사와 한주호 준위 및 금양호 실종, 사망선원을 추모했다. 또한 전국의 초, 중, 고등학교에서도 천안함 1주년 관련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사건 2주년인 2012년 3월 26일에도 국립현충원에서 천안함 침몰 사태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을 추도하는 행사가 열렸으며 이후에도 다른 지방이나 주한 미군에서도 관련 행사가 이어졌다. 국방부에서는 순직장병들을 위한 추모곡을 벅스에서 무료로 공개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일정 때문에 추모 행사에 불참했다.

사건 3주년인 2013년 3월 26일에도 추도 행사가 열렸다. 한편으론 이 시기에 남북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던 터라 이 사건이 더욱 주목받고 관심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사건 4주년인 2014년 3월 26일 추도 행사가 열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정상 불참했다.



사건 5주년인 2015년 3월 26일 추도 행사가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추도식에 참석했다.



사건 6주년인 2016년 3월 1일에서 26일 천안함 자매결연도시인 천안시에서 추도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2016년부터는 서해 수호의 날을 지정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제1회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사건 7주년인 2017년 3월 26일 제2회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황교안 국무총리가 참석했다.[47]

사건 8주년인 2018년 3월 26일 제3회 서해수호의 날에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 아랍에미리트 순방 일정과 겹쳐 일정상 불참했다. 그동안 추모식에 참석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4일 전에 구속되어 참석하지 못했다.[48]

사건 9주년인 2019년 3월 24일 제4회 서해 수호의 날 행사가 대전현충원에서 열렸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다른 일정[49]을 이유로 추모행사에 불참했고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했다.

승조원들의 10주기 추모식이 있던 2020년 제5회 서해수호의 날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3년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천안함 유가족과 생존 장병, 정경두 국방부장관 주관으로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이승도 해병대사령관, 이병규 국가보훈처 차장, 손정목 천안함재단 이사장 등 150여 명만 참석하는 소규모로 치러졌다. 예년보다 행사가 축소된 것은 당시 전 세계를 덮치던 신종 전염병인 코로나19 때문. 유튜브 라이브도 진행되지 않았다. # 이날 천안함 전사자 민평기 상사의 모친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천안함 피격사건이 누구 소행인지 말좀 해달라"고 요청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 소행이라는게 정부의 입장이며, 이는 변함없다."고 답했다.#[50][51]

2020년 6월 6일 현충일 기념식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렸는데 처음에 코로나19 방역 문제를 이유로 제2연평해전 유족과 천안함 유족이 초청받지 못했다. 천안함 유족 등 50여 명은 매년 추념식 때마다 정부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이번 현충일 추념식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규모가 축소돼 초청받지 못하게 됐다. 추념식에는 독립유공자 및 코로나19 희생자 가족 등이 참석한다”는 취지의 우편물을 받았고 유족들은 이에 불만을 표하면서[52] 논란이 커지자 보훈처는 유가족 등에게 연락해 “행사 담당 실무자가 바뀌어 실수가 있었다”며 천안함,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 도발 유가족 및 생존자 7명을 뒤늦게 초청키로 했다. 이에 충분히 초청할 수 있었으면서도 "코로나"를 핑계로 의도적으로 초청하지 않았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행사 중에 리처드 용재 오닐이 천안함 묘역에서 추모곡을 연주하였다.

2021년 제6회 서해수호의 날문재인 대통령은 작년에 이어 재차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강한 안보로 반드시 항구적 평화를 이뤄낼 것”이라면서 “확고한 대비태세로 영웅들의 희생을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 동안 순직자 처리됐던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전사자 처리 문제 해소와 유족 가산제도 등의 보훈 강화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보훈으로 애국의 가치가 국민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려 정치적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10.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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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안함 피격사건의 11문단; 사건 그 이후;에 적용되는 합의안
  • 교과서 기재에 관한 비판/논란등은 근거에 기반한 사실관계[53]에 의한 서술을 할것[근거라함은]
  • 교과서 서술 내용 중 천안함 피격 사건과는 직접 관계없는 부분에 대한 보도 및 논란(이를 테면 촛불집회의 분량에 대한 논란) 및 관련 내용, 평가는 해당 문단에 기재하지 않는다.
  • 근거로 든 보도 및 자료에 교과서 기재 내용 중 천안함 사건 관련 내용 이외의 다른 사건도 포함된 경우, 천안함 사건 기재 내용 및 비판만을 분리하여 기재해야한다.
  • 천안함 사건/침몰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를 천안함 사건의 왜곡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즉 북한의 소행을 숨기려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서술을 하지 않는다.]
  • 다만 도발주체를 명시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이러한 명칭 사용이 비판받는 경우, 비판을 한 주체[55]와 비판 대상, 그리고 비판 내용에 대해 서술한다.
  • 지학사의 참고서와 같이 사건/침몰 표기를 넘어 원인 미상의 폭발 등으로 침몰했다.와 같이 도발주체를 명시하지 않은 것 이상으로 북한에 의한 피격이 아님(왜곡)을 명확히 참고서/교과서 본문 내에서 밝히고 있음이 인정된다면 해당 서술은 천안함 피격 사건해당 문단이 아닌 천안함 피격 사건/왜곡문서에 기재한다.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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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8일, 사건 이후 천안함 후속조치로 서해에서 잠수함 침입방지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있었다. 훈련하는 것에 관하여 중국 정부는 훈련 이전부터 크게 반발하였다. 급기야 중국 외교관이 한국을 지칭하며 "미국만 없었으면 한국은 진작에 손봤을 나라"라는 모욕적인 막말을 하였고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의 천안함 외교전 과정에도 중국은 “한번의 불행이 또 한번의 불행을 부를 수 있다. 한국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라 하는가 하면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한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이해와 협력 없이는 일보도 내디디기 힘들 것”이라고 하며 몹시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2011년 3월 25일, 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나기 꼭 하루 전날에 경기 평택의 해군 부두에 정박한 1200t급 영주함에서 기관총 기증식이 열렸다. 사건 당일 순직한 민평기 상사의 모친 윤청자 여사가 아들의 사망보험금 1억원 전액과 기타 898만8000원, 총 1억 898만8000원을 해군에 기탁하며 죽은 아들 대신 이 돈으로 무기를 사서 적으로부터 군인과 나라를 지켜달라고 청하자 해군은 이 뜻을 받아들여 K6 중기관총 18정을 구입해 '3·26 기관총'으로 명명한 뒤 영주함을 포함한 초계함 9척에 이를 두 정씩을 장착하는 기증식을 열고 윤청자 여사 부부를 초대한 것. 기증식 당일에도 아들의 순직에 대해 자랑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윤청자 여사가, 정작 자신이 기증한 아들 대신 나라를 지킬 기관총을 보자 오열하며 기관총을 부여잡고 우는 모습이 많은 국민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관련 기사

2011년, 전임 조대현 헌법재판관 후임으로 당시 민주당 추천으로 조용환 후보자가 지명되었는데,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천안함 침몰이 폭침이라는 것을 확신하냐는 국회의원의 질의를 받았고 "북한이 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발표를 신뢰한다"고 하면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이라는 표현을 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답변했다.[56] 이에 대해 국가관이 의심된다는 의견이 있었고 해를 넘겨서까지 임명동의안이 처리되지 못해 결국 2012년 2월 최초로 임명동의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57]는 "법관이 확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지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조용환 후보자의 발언을 이해하는 방향의 칼럼을 썼다. 민주당은 이후 김이수 사법연수원장을 지명했다.

북한 소행이라는 유력한 증거인 소위 '1번 어뢰'의 1번 글자가 부식되어 사라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부식을 막기 위한 후처리를 해야 했지만, 조작설 등이 제기되고 있고 그에 따라 명예훼손 재판 등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관련 증거자료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는 것이 국방부의 변.

같은 해 6월, 천안호 침몰사건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지혜롭게 넘어야 할 산"이라며 북한의 사과를 받아내려 했으나, 북측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을 사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않느냐고 못박았다고 한다. 그러자 돈봉투까지 제시하며 "제발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세상에 내놓자고 하면서 우리 측에서 "제발 좀 양보해 달라'고 애걸했다"고 주장했다. 곧 이어 우리 정부는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진의를 왜곡한 일방적 주장으로 일일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며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남북관계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해서는 북한이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라면서 "북한은 지금이라도 책임있는 자세를 갖고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

2016년 6월 6일자 SBS 8 뉴스에서 해군 내부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해 "경계에 실패해 치욕을 당한 사례"로 언급되었고 이후에도 군에 남아 있던 생존 장병들이 미묘한 불이익을 당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

기존 동해의 북한 잠수함 전력이 서해로 이동했다는 첩보는 90년대 후반에 이미 접수된 적이 있다.[58] 그러나 당시 해군과 국방부, 정부가 한창 진행중이던 구축함 교체 사업(KDX)과 잠수함 확보 사업(KSS) 등에 국방개혁 2020의 한정된 자원을 투입한 결과 70년대 대잠전 능력을 가진 천안함이 1선에서 뛰게 되는 상황이 생기게 된 것이다.[59]해군과 국방부의 전력계획 실패로 인한 전투 불능 상황을 해군의 일부에 불과한 천안함 승조원들의 무능으로 덮으려는 언론 플레이일 뿐이다. 이 건에서 해군은 묘한 데서 역시 황군의 적통을 이어받고 있다. '야마토 정신력 대신 단군 정신으로 무장한 한국 해군은 인간 가청영역 밖의 어뢰 항주음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이 때문에 천안함 음모론에서 나오는, 위의 한겨레의 패잔병 운운과 같은 주장과 맞물려서 해군을 비판하는 의견도 나왔다. 군부가 자신들의 실패를 덮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음모론을 더욱 부채질하게 만드는 짓을 행했다는 것.

2016년 6월 7일 천안함 생존자 정주현 중사가 그동안 받은 차별대우를 인터뷰한 기사가 나왔다. #

2016년 10월 국감 도중엔 천안함 재단이 재단 운영을 제대로 하지 않아 유족들이 해체를 요구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는 게 언론에 보도되었다.(중앙일보) 그 내용은 가관인데, 천안함을 추모해야 하는 재단 이사장과 간부진이 천안함 침몰 해역 부근의 골프장에서 놀고 이사장의 자서전을 재단 돈으로 사서 군부대에 기증했다가 유족들이 항의하자 그제서야 반환받았다. 참고로 추모와는 관련 없는 그런 개인적 유용에 들어간 돈은 2000만 원이지만, 실질적으로 재단이 중점을 둬야하는 추모 관련 비용은 연간 ₩27,000,000. 이것만으로도 유족들로서는 기가 찰 만한 상황에 다른 의혹까지 대두되었다. 한 언론사 사장에게 재단 돈으로 시가 297만 원에 달하는 황금 열쇠를 선물하고 그 사장은 낙하산으로 재단 고문에 위촉된 것. 이런 사례들에다 국가보훈처의 자체감사 요구도 이행하지 않으니 재단 운영이 불투명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고, 그렇기에 유족들로선 해체까지 요구하게 된 것이다. 단, 천안함 추모 재단은 해군과는 무관한 곳이다.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 국군 전 장병들의 증명사진 촬영 양식이 바뀌었다. 기존에는 신병부사관후보생의 경우 (남성 기준)삭발한 상태에서 훈련피복으로 쓰는 재활용전투복을 입은 첫 사진을 개인이 다른 사진을 별도로 찍어 제출해 교체하지 않으면 전역 시까지 그대로 썼고, 장교들만 임관 직전에 사관생도사관후보생 시절의 사진이 아닌 두발을 어느 정도 품위 있게 정리한 상태에서 정복을 착용하고 찍은 사진을 추가로 촬영해 지급하는 부당한 차별을 했으나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 수병과 부사관의 경우 삭발한 머리를 가리도록 착모한 상태에서 각 군에서 신분별로 기본 지급하는 최상위 피복[60]을 입고 배경으로 태극기와 각 군기를 좌우로 놓은 사진을 (장교 포함)각 양성과정 수료 전 재촬영해 이를 기본 인사서류 등의 사진으로 활용하도록 바뀌었으며, 기존 복무 장병들도 이와 같은 형태로 재촬영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천안함 피격사건 직후 전사한 수병들과 하~중사들의 사진이 대부분 이렇게 민간에 내보내기 곤란한 사진들이었기에 해군본부에서 급히 정복과 정모, 기류들을 합성해 영정을 만들었던 것이 계기였는데,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자 일부의 영정이 이런 양성과정에서 찍힌 단정하지 못한 사진들이라 욕먹었던 경험을 상기했던 것이다.

한편 2018년 3월 KBS 추적 60분에서 천안함 관련 의혹들을 보도했으나 예전에 이미 반박당한 의혹들의 재탕이었다. 그리고 천안함 생존장병 중 한 사람인 전준영 씨는 이러한 추적 60분의 보도 행태에 대해 "생존 장병들의 증언은 듣기 싫은가"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 # 한편 좌초설을 밀었던 신상철은 2018년 3월 29일에 재차 천안함은 좌초된 것임을 강조하는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같은 날 국방부는 당시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신뢰하고 있다며 재차 북한의 어뢰 공격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 #, # 그 뒤를 이어 2018년 3월 30일 조선일보에서는 '합동조사단의 결과를 뒤집으려 하면서도 새로운 증거나 팩트도 하나 없이, 이미 2010년에 대거 논파되었던 기존의 괴담만 재탕했다'며 비판하는 보도를 내었으며#, 같은 일자의 지면에 '이럴 거면 공영방송이란 간판이나 내려라'라는 신랄한 사설까지 내었다. # 그리고 2018년 3월 31일에는 28일에 재차 방송된 의혹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소명하는 대한민국 해군의 소명자료가 페이스북 공식계정에 올라왔다. #

국방TV에서는 본게임 34회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 8주년을 맞아 천안함에 관해 다루었다.



2018년 8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한 일과 관련해 중국 군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

태영호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태영호는 이 사건의 내막을 잘 모른다고 했다.

2019년 정경두 국방장관이 kbs 신년기획 '한반도 미래를 묻다'란 프로그램에 참석하여 우리는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고 결국 사과했다. 이후 3월 20일 대정부 질문에서 '서해수호의 날' 규정에 대해 "서해상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불미스런 남북 간 충돌들, 천안함을 포함해 여러 날짜가 있기 때문에 다 합쳐서 추모하는 날"이라고 밝혀 다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2019년 6월, 천안함 예비역 전우회장인 전준영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정부는 보훈은 해주지 않으면서 호국만 바란다."면서 울먹였다고 하는데, 이에 국가보훈처에서 보도자료를 내어 반박하기도 하였다.

6월 4일, 청와대는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에 천안함 유족들을 초청하였는데, 그 자리에 놓여있던 팜플렛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찍은 사진을 담은 것이었다. # 원래부터 있던 물건으로서 최근 행사에서 늘 배부되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북한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행사의 특성을 생각하면 참석자들을 세심하게 배려하여 차라리 치워두고 아무것도 놓아두지 않는 편이 나았다.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20년 1월 22일 신임 국방홍보원장으로 천안함 음모론을 주장한 과거가 있는 박창식 전 한겨레신문사 매거진랩사업단장이 임명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천안함 전우회 전준영 예비역 회장이 국방부 정문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으며, 이휴 그는 설연휴를 앞두고 유가족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임을 인정하였다. 천안함 관련 입장문 게재도 약속하였으나 본 계정이 아닌 급조한 페이스북 계정에 해당 입장문을 올려 논란이 되고있다.

국방부가 202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10주년을 맞아 평택 2함대에서 열린 46용사 추모 행사의 자체 촬영 영상을 언론에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가 기자들 항의에 영상을 내놨다. 애초에 예정된 국방 TV 생중계 그것도 당일에 갑자기 취소했으며, 생중계 취소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도 국방TV 대변인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했다. [취재파일] 중계도 취소 천안함 10주기…대통령으로 빛난 서해수호의 날, 천안함 10주기 추모식 생중계 돌연 취소···軍 "실무자 실수", 천안함 10년 알리기 싫었나, 국방부 생중계 돌연 취소

한편 이날 정경두 국방장관은 건조 중이던 대구급 호위함이나 충남급 호위함 중 한 척을 천안함으로 명명할 것이라 말하며 천안함의 부활을 공식화했다. #

이후 2021년 3월 26일 '제6회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옛 천안함 함장이었던 최원일 예비역 대령과 유족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2023년 진수 예정인 대구급 호위함 7번함의 함명이 '천안함'으로 명명됐다고 밝히며 공식적으로 천안함이 부활했음을 알렸다. #

2023년 5월 19일, 대구급 호위함 7번함 천안함이 취역하여 천안함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다.[61] 취역식 날 최원일 예비역 대령을 비롯한 유족들이 참석하였다. ## 대구급 호위함 7번함 천안함의 함장은 과거 천안함의 함장 최원일 예비역 대령의 부하이자 과거 천안함에서 작전관(대위)으로 복무했던 박연수 중령이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20일 ‘천안함피격사건 가짜뉴스’ 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서 이상희 하사 아버지인 이성우 유족회장이 말하길 유가족들은 수명이 심각하게 단축되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 중에 암 투병으로 50∼6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사람이 4명이나 되고, 암 투병중에 있는 사람이 2명이다. 위 '생존장병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들' 문단에서 서술한 천안함에 대한 나쁜 인식은 산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가족에게도 크나큰 상처를 주었고, 상당수 유족들이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딱히 가족들을 도와줄 만한 방법이 없고, 생존 장병들은 극심한 트라우마와 함께 전사한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대부분이 PTSD 증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푸대접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군의 날 75주년 기념 행사에서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이 패싱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전엔 늘 초대받았는데, 이때는 최원일 함장만 전날 새벽에 초대 문자를 받고 생존 장병이자 전우회장 전준영은 당일에 사정을 설명한 후에 겨우 참석할수 있었다. 게다가 행사 도중에도 유독 천안함 유공 장병 이야기만 빠졌다. 또 현충일 행사 이후 유공자증을 받을 때 화면에는 대놓고 '좌초'라고 적혀서 나오는 등, 보수 정부조차 폭침을 부정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최원일 함장은 보수 정부의 이런 행태에 대해 '말로만 도와주는 척'이라고 비꼬았다.

10.1. 문재인 정부의 천안함 재조사 논란

군인 여러분,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저희처럼 버림받습니다. 그래도 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천안함 유족회의 글 #

2021년 3월 말,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서 천안함 피격 원인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파장이 일었다.

이번 조사는 '천안함 좌초설'을 지속 제기한 전 민군합동조사단 위원 신상철의 진정에 의해 시작되었다. 신 씨는 온라인매체 서프라이즈 대표 출신으로, 천안함 피격 뒤 민주당 추천으로 민군합동조사단에 합류한 바 있다. 그리고 2020년 9월 7일 천안함 대원의 사망 원인을 밝혀 달라는 진정을 냈고, 위원회는 사전 조사를 거쳐 같은 해 12월 14일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그리고 위원회는 그해 12월 조사를 하겠다고 국방부에 통보했는데, 국방부는 이런 사실을 전달받고도 관련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3개월 넘게 함구한 채 당사자인 유가족이나 생존 장병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사자 유족과 천안함 생존장병들 사이에서는 민·군 합동조사 결과를 뒤집으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천안함 46용사 유족회, 천안함생존자전우회, 천안함재단은 재조사 결정에 대한 규탄 성명을 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조사 결정 철회 및 사과 ▶대통령과 정부가 입장을 밝히고, 북한의 사과 및 유감 표명을 받아내는 등 명예 회복 ▶명예훼손 재발 방지 대책 강구를 요구했다.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전우회장인 전준영은 규명위의 천안함 관련 조사 소식을 접한 뒤 "나라가 미쳤다. 46명 사망 원인을 다시 밝힌단다"며 "몸에 휘발유 뿌리고 청와대 앞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천안함 함장이었던 최원일 예비역 대령도 페이스북에서 "대통령 직속 기관이 음모론자의 진정을 받아들여 진상조사를 결정했다는데, 위원회를 방문해 대통령이 말한 '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다'에 반대되는 결정을 한 이유를 듣고 강력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논란과 반발이 거세지자,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4월 2일 회의를 긴급 소집했고, 진정 사건을 각하했다. 위원회는 진정인이 목격자 또는 목격자에게 전해들은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17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각하했다. 그런데 과거에 조사 개시 결정문 역시 같은 조항을 들며 각하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기재해 논란이 되었다. 같은 위원회에서 같은 법으로 다른 결정을 한 것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을 한 것이다.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천안함 침몰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87쪽 분량의 진정서가 접수된 뒤 안건명에서 ‘천안함'을 빼고 ‘○○○ 외 45명 사건’으로 바꿔 재조사를 의결했던 것으로 4일 나타났다. [단독] ‘천안함’ 쏙 빼고 ‘○○○ 외 45인 사건’으로 재조사 의결했다

국민의힘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재조사 결정이 사전 조사를 거친 적법한 절차였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고 주장했다. 위원회 내부에서 조사 불가로 결정하고 통지했는데 누군가가 개입해 조사개시로 결정을 뒤집었으며, 법령에 따라 각하된 진정사건을 재조사하려면 진정인의 이의신청 절차가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진정인의 공식적인 이의신청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

2021년 6월 11일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는 "천안함 유족 및 생존장병 간담회"를 개최하고 이러한 부분에 대해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하였다. 다만 최원일 함장은 '천안함을 정쟁으로 만들지 마라'고 비판했으며#, 전준영 전우회장도 "보수 정권도 반성해야 한다"며 보수에게도 쓴소리를 했다. 국가유공자가 된 생존장병이 이명박근혜 정권 내내 6명, 문재인 정부 때 유공자가 된 사람이 두 정권을 합친 것보다 많은 7명(당시 기준)으로 오히려 보수 정부가 자신들에게 관심 없고 문재인 정부가 더 많이 인정해주었다고 말이다. #간담회 풀영상

10.2. 조상호 천안함 망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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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정해욱 천안함 모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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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정치권의 왜곡 및 인식 논란

11. 관련 단체

12. 여담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한국학자이자 반북 성향으로 알려진 브라이언 마이어스 교수는 천안함 피격 사건에 있어서 남한에서의 분노가 상당히 약했다고 비판하였다.[62] 그에 따르면 소위 한국인들이 '외세'라고 느끼는 미국/일본과 관련된 광우병 논란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현재 대한민국 체제를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심지어 대한민국 군인들을 죽여대는 북한의 전쟁범죄 만행에 대해서는 '같은 혈족의 동포'와의 다툼 정도로 여겨 상응하는 분노를 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이어스에 따르면 이것은 남한이 애국주의와 건전한 국가정신 함양 부족에서 나타나는 불건전한 현상이며, 민족주의(race-based nationalism)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남한이 안보 불감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가슴 깊이 사랑하는 국가정신 함양이 필요하며, 시대착오적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비평했다. ###

이 사건 당시 천안함의 작전관이었던 박연수 대위는 2024년 중령이 되었으며 신형 천안함의 함장이 되었다. 최원일 함장을 박연수 함장이 계승한 셈이다. #

사건 직후 제2함대사령부에 대형 텐트가 여러 채 세워졌다. 해군 측에 따르면, 이는 외부 방문객들의 대기실을 만들기 위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합동분향소 설치로 오해한 유족들이 텐트를 부쉈고, 해군은 부서진 텐트들을 그대로 놔뒀다.

13. 같이 보기

14. 둘러보기

국가애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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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25일(日) - 2010년 04월 29일(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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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2019년 5월 29일
27 25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
51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
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년 3월 31일
22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2014년 12월 1일
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
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
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12월 13일
22 제1인성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
46 천안함 피격 사건
[ 20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
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
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9월 11일
2,996 28 9.11 테러
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
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
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
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
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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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격 당시 전사, 준위 추서.[2] 천안함, 속초함.[3] 천안함.[4] 한주호 준위, 구조작전 중 순직.[5]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매년 개인적으로 천안함 용사 묘역에 가서 참배를 했으며 심지어 2018년 구속 이후에도 구치소에서 측근을 통해 추모글을 남겼다.#[6] 전문은 해당 문서 참고.[7] 이 중 6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하여 인정사망 처리되었다. 특히 당시 가스터빈실에서 작업중이던 인원들이 많이 실종되었다.[8] 여담이지만 한주호 준위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98금양호 사망/실종자들은 초기에는 국가유공자는커녕 의사자로도 지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의 영결식을 할 때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나마 이후 보국포장이 주어지고 2012년에 법이 개정되어 이들도 의사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9] 미군 해군대학원 특훈교수 출신으로, 수중폭발, 탑재 전자장비의 충격 내구성 검증, 충격 및 진동문제 해결 등의 전문가이다.[10] 즉 배가 옆으로 가는 괴상황이 아닌 이상 암초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11] 다만 소나라는 것이 음향 탐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보니 음향을 전달하는 해저의 상황과 배의 자체 소음에 의해서까지도 많은 장애를 받을 수 있다. 즉 원래부터 옵저버 디텍팅하듯이 쫙 뜨는 무엇은 될 수 없다는 것(이건 레이더도 조건에 따라 마찬가지. 다만 공중에는 해저보다 장애물이 될 만한 것이 적다보니 확률이 훨씬 높을 뿐이다.). 물론 국방부장관의 시인은 장비 교체 및 기술 개량이 꾸준하지 못했음을 말하므로 이러한 변명이 책임을 면제시켜 주지는 못하지만.[12] 잠수함 주변에서 터지면서 침수를 유발해 침몰시키거나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것이 목적이므로.[13] 애초에 할 명목도 일절 없다. 우방국인 두 나라가 어딜 미쳤다고 연합 해군의 주요 전력 중 하나인 초계함을 필요없다며 자침시키면서 부하들까지 희생시키겠는가?[14]국방부에서는 '버블제트 효과'로 지칭하였다.[15] 심지어 어뢰 및 기뢰가 아닌 육상 폭탄으로도 가능하고 아예 군용 무기가 아닌 민간인이 얼추 만든 싸제 폭탄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수중에서 무슨 폭탄이든 터지면 발생하는게 버블제트.[16] 간단히 설명하면 물속에서 폭탄 터지면 당연히 물이 온데 밀려나고 사방에 분출된다. 그게 버블제트다. 이 정도마저 이해가 불가능 하다면 이해력은 고사하고 아예 한국어에 미숙한 외국인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17] 이쯤되면 '군사'지식 이 아니라 과학 지식 부족이다.[18] '화염식 라이터', '바퀴식 자동차', '엔진식 비행기' 같은 꼴이다(...).[19] 단순한 식당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곳은 중국을 방문한 외국 정상들도 주로 묵을 정도로 베이징에서 손꼽히는 대형 호화호텔이다.[20] 북한 군부의 독단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쿠데타도 얼마든지 모의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애초에 이런 가능성을 틀어막고자 조선로동당은 군부에 대한 철저한 감시체계를 구축해놨다.[21] 충격으로 여러 격실의 해치가 뒤틀려 열리지 않아 이후 구출조들도 해치를 부숴가며 수색해야 했다.[22] 함장이 혼자 살려고 먼저 탈출했다는 허튼 소리가 나오기도 하는데 부하들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큰일이 생겼을 때 함장이 보이지 않으면 그들은 구출 1순위로 함장을 먼저 찾게 마련이다.[23] 보수부사관 박성균 하사로, 수색 당시 침수된 구획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해 인양 후 수습됐다.[24] 이 때문에 천안함 유가족이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자신들과 똑같다고 말했다. 즉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침공 허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가 재난 대처도 보여주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세월호 사건을 다루면서 천안함 유가족을 만나서 이야기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다. 천안함과 세월호는 직접적인 원인은 다르지만 간접적인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본다면 꽤 유사하다.[25] 한주호 준위는 청해부대 소속으로 소말리아 해적 퇴치까지 다녀온 베테랑이었으며 정년이 끝나서 전역까지 겨우 2년을 남긴 상태였던지라 주위를 더 안타깝게 하였다.[26] 어느 정도냐면, 군단급 이상 장군들도 준사관들에게는 상호 존대를 한다. 나이로 보나, 짬으로 보나, 대선배격이기 때문에 당연한 셈.[27] 전원 15일 추락 기체로, 조종사 두 명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조작사 1명은 찾지 못했다. 17일에 추락한 기체는 조종사 및 조작사 총원이 구조됐고 기체도 회수했다.[28] 이창기 원사, 최한권 상사, 박경수 중사, 장진선 하사, 강태민 일병, 정태준 이병.[29] 이후 아들은 용인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여담으로 국가보훈처를 통해 사실상 병역면제가 가능하다.[30] 이명박은 정치 입문 전 현대건설흙수저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지금 현대그룹 조선업은 HD현대중공업에서 하지만 정주영 회장 생전에는 계열 분리 전이라 조선도 현대건설에서 했다.[31] 주한미군에는 잠수함 전력이 없다. 괌 기지에 기항하는 미 해군 7함대 소속 잠수함이 가장 가까이 있는 미군 잠수함인데... 상식적으로 말이 될까. 더군다나 위성 사진으로 북한의 잠수함 동태까지 완벽히 파악되는 판에 미국만 예외일 수 있을까? 한반도에 있는 미 해군은 진해에 있는 미 해군보급단으로 휘하에 잠수함은커녕 배 자체가 없다.[32] 사칭범은 해군 예비역이긴 했으나 제2함대 헌병 출신이었다.[33] 특진계급[34] 비록 그가 철도 갤러리에서 주로 활동하긴 했으나 바이트레인에서도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글이 공지로 올라왔다.[35]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침.[36] 다만 이는 오해였고 형은 살아있다고 한다.[37] 잘 하면 무기 조준 장치나 야시경을 태울 수는 있겠으나 비행에 관련하는 계기는 광학장비에 연결되어있지 않으니.[38] 링스 한 대는 기상이 악화된 상태에서 계기 이상으로 구축함 위에 착륙을 포기, 다른 한 대도 기상 악화로 인한 추락으로 추정된다. 추락한 두 대의 헬기는 각각 소청도 남쪽 23.5km, 전남 진도 14.5km에서 추락했다.[39] 30년 경력의 대 잠수함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이 검색해 봐도 2003년에 크루즈 미사일 관련 계약 하나 따냈다는 거 외에 정보가 없다.[40] 뉴스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원래는 11주기가 아니라 11주년이라고 해야 바르다. 꼭 주기를 쓰겠다면 '천안함 용사 11주기' 같은 식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41] 확실히 얼마 쓰지 못할 배에 한정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해당 함정을 대체하는 후속함의 건조 예산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기에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물론 배에 타고 있는 장병의 목숨 또한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해군과 국방부, 정부에서도 최대한 신규 호위함의 건조를 앞당기려 하고 있다.[42] 사건 이후 해군 내부에서 상징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를 다시 일선에서 근무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을 다시 보낼 수 없다는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43] 한국 사회는 현재까지도 PTSD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미국 등 영미권 국가에서는 전쟁에 참전하거나 작전에 투입되었던 군인들의 심리적 치료를 지원하는 여러 단체와 서비스가 마련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2000년대 초반까지는 PTSD라는 개념 자체도 인식되지 못했지만, 대구 지하철 참사를 통해 PTSD라는 질환이 처음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조금씩 대책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44]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군복을 입은 사람은 최원일 함장이었는데, 모든 소지품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버린 상황이라 옷이고 뭐고 없던 상황이었지만 그의 몫으로 이미 군복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소름끼치게도 '최원일'이라는 이름표까지 이미 박힌 채로.[45] 심지어 해군 최상급자인 해군참모총장 부터 최원일 함장의 요청을 묵살하니 예하 사령부 에서는 전혀 속수무책.[46] 그리고 당시 최원일 함장의 요청을 전부 묵살한 장본인인 해참총장 정옥근 대장은 군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똥별이다.[47] 이명박 전 대통령이 3월 23일 대전현충원을 방문해 참배하였다. 이 전 대통령은 방명록에 '여러분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통일의 그날까지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라고 글을 남기며 추모하였다.[48] 대신 측근이 추모식에 참석했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페이스북은 변호인단이 이 전 대통령 접견실과정에서 받아 비서실에 전달해 직원이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49] 전국경제투어 일곱 번째 일정으로 대구광역시를 방문했다.[50] 참고로 민평기 상사의 모친은 보상금으로 들어온 돈 전액을 해군에 기부했고 해군은 그 돈으로 기관총을 구매하여 "3.26 기관총"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장면을 두고 문재인 지지자들 중에 "모친의 신상을 낱낱이 밝혀서 엄벌해야 한다"는 둥의 과격한 주장을 일삼는 사람이 있었다.[51]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판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으나 추모화환을 보냈으며, 이재오 전 의원 등도 참석했다.[52] 전사자 김경수 상사의 부인 윤미연 씨는 “정부가 북한 눈치를 보는 것으로밖에 생각이 안 든다”며 “국가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대우를 받고 참석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이들을 생각해 참석한다”며 “딸과 아들이 성인이 됐는데 뭘 보고 배우겠나”라고도 했다. 전준영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 전우회장은 “이런 조치는 3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 사건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술한 민평기 상사의 모친 윤청자 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질문했던 것과 같은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는 주장이다. 윤 씨는 이날 급히 마련된 7명의 추념식 참석자 명단에서 빠졌다. #[53] 육하원칙에 의거한[근거라함은] 제도권 언론의 보도와 그 이상의 순위를 인정받는 자료를 의미한다. 근거의 순위와 제도권 언론사의 범위에 대해서는 토론관리방침의 # 근거 자료 제시부분을 참고[55] 가령 언론사 또는 학자, 사건 관련인 등[56] 질문자는 당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57] 조국 사태 때 논란이 된 그 교수가 맞다.[58] 사실 북한이 잠수함 전력으로 도발하기 시작한 것은 역으로 울산급, 포항급, 참수리급 덕택에 더이상 해상으로 도발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59] 한국 해군은 98년 IMF 사태의 여파로 제때 구축함을 확보하지 못해 2000년대 초까지 기어링급 구축함을 운용할 정도로 열악하였다. 즉, 노후 구축함을 대체할 신형 구축함의 확보가 절실했다. 하지만 울산급과 포항급, 참수리급으로 해상 침투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면서 구축함 확보 사업을 진행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현재 확보한 구축함과 잠수함 전력 덕택에 북한의 잠수함, 수상함, 항공기 등의 전력에 해군이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고, 북한의 도발을 해상발사 장거리 순항미사일로 억제할 수 있었으며, 탄도탄 탐지 자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당시 해군이 대잠에 소홀한 것은 당연이 비판받아야 하나, 현재 북한이 대공, 대잠, 대함, 탄도탄 등 다양한 방면으로 도발을 하는 것에 비춰 볼때 다목적 구축함과 잠수함 등의 확보는 필수 불가결했다.[60] 부사관은 정복, 병은 해군의 경우 정복, 공군과 해병대는 근무복, 육군은 전투복. 다만 육군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 육군본부 이상급 부대의 경우는 근무복[61] 2대 천안함의 함명을 계승한 3대 천안함[62] 천안함 음모론 등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