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yến bay 815 của Vietman Airlines
(Chuyến bay số 815 của Vietman Airlines)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97년 9월 3일 |
유형 | 조종사 과실, 악천후 |
발생 위치 | [[캄보디아| ]][[틀:국기| ]][[틀:국기| ]] 프놈펜 국제공항 |
탑승인원 | 승객: 60명 |
승무원: 6명 | |
사망자 | 승객: 59명[1] |
승무원: 6명 | |
생존자 | 승객: 1명 |
부상자 | 승객: 1명 |
기종 | Tu-134 |
항공사 | 베트남항공 |
기체 등록번호 | VN-A120 |
출발지 | [[베트남| ]][[틀:국기| ]][[틀:국기| ]]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 |
도착지 | [[캄보디아| ]][[틀:국기| ]][[틀:국기| ]] 프놈펜 국제공항 |
사고 5개월 전,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고기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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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7년 9월 3일에 베트남항공 815편이 추락한 사고.2. 사고 경위
프놈펜 국제공항에는 VOR/DME 장치가 있었지만 동년 7월에 이미 도난당했다.[2] 이로 인해 조종사들은 5km 떨어져 있는 NDB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악천후 속에서도 육안접근을 위해서 계속 하강시켰다. 설상가상으로 활주로 접근 유도등도 도난당했지만 사고 시점에는 이미 교체되어 정상 작동한다고 보고되었다. NDB의 범위 안에서 조종사는 5,000ft(1,524m)에서 관제탑에 착륙허가를 냈고 관제 측은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2,000ft 더 하강한 뒤 다시 한 번 착륙 허가를 냈지만 조종사들은 활주로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조종사들은 2,000ft(609.6m)까지 하강한 뒤 착륙 허가를 내 보기로 했다. 그 순간 관제 측은 조종사들에게 활주로를 찾았는지 물어봤으나 못 찾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 바람 방향이 바뀌어서 이/착륙 활주로가 23번에서 5번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관제는 23번 활주로에 접근하고 있던 사고기에 반대쪽 5번 활주로로 착륙하라고 했다. 조종사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더 이상의 교신은 없었다.
2분 뒤 사고기가 23번 활주로 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기체는 200ft(61.0m)까지 하강했다. 이 시점에 CVR에는 부기장 호앙 반 딘이 기장 판 반 티우에게 착륙을 포기하자는 말을 한 것이 녹음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장은 좀 더 기다리자고 했고 기체는 100ft(30.5m)까지 하강했다. 하지만 활주로는 보이지 않았고 항공기관사마저도 기장에게 착륙을 포기하자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착륙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4초 뒤 좌익이 야자나무에 부딪혔고 이 때 기체는 활주로상에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요크를 좌측으로 급하게 틀어 베트남 공군의 군사시설 위쪽을 그대로 지나갔다. 좌익이 야자나무에 부딪혀 손상된 것으로 인해 한쪽 엔진이 정지되었고 우익은 집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사고기는 좌측으로 틀어진 채로 논밭에 추락했다.
목격자들은 사고기가 야자나무를 충격한 시점에 화재가 난 것을 봤다고 말했다. 한 목격자는 문이 열려 있었고 승객과 승무원들이 비상구 앞에 몰려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하지만 추락 직후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다. 충돌 속도가 270km/h였다고 하니 그 앞에 서있었더라도 탈출할만큼 몸이 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 유일한 생존자
몇 명의 사람들은 사고 후에도 아직 살아 있었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숨졌다.[3] 결국 태국인 아기(당시 14개월)가 이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로 기록되었다.
4. 사고 여파
당시 한국에서는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도 안되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목숨을 잃은 승객 중에는 전북일보의 당시 35세 신용철 기자도 있었다. 당시 베트남항공 한국 지사에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보상해 줄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4]이 기체에는 원광대학교 소속 의료봉사팀 6명도 탑승해 있었는데 당시 의료봉사팀은 프놈펜 의대와 의료봉사와 자매결연을 맺으러 가던 중이었다. 사고 이후 원광대학교는 의료봉사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사고 날짜인 9월 3일에 '9.3 문화제'를 하고 있다. 또 원광대학교는 의료봉사를 계속하고 있고 프놈펜 의대에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는 쏟아지는 비와 진흙탕이 된 논바닥을 헤치며 구조 작업을 벌였는데 승객들의 지갑이나 전자 제품을 훔치려는 좀도둑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들을 막으며 생존자 확인 작업을 벌여야 했다고 한다.[5] 그 경찰도 추락 4시간만에야 배치된 것이고, 심지어는 배치된 군경과 구조대에서도 빈발했다고. 당시 캄보디아는 폴 포트의 잔혹한 통치에 연이어 수십년간 이어진 캄보디아 내전이 끝난 직후로 매우 피폐해진 상태였다.
5. 유사 사고
[1] 한국인 21명[2] 이 설명 영상의 제목에 '좀도둑 때문에 추락한' 이 붙은 이유가 도난당한 공항장치 때문일 것이다.[3] 생존자 중에는 한국인 탑승객 오성혁(10)군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병원으로 이송 후 치료도중 숨졌다.[4] [베트남 항공기 추락사고]항공사 무성의에 분통…대책 본부 유족 표정(1997.09.05 중앙일보)[5] 베트남 민항기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악천후로 추락(1997.09.03. 뉴스데스크)[6] 이 사고도 815편 사고와 동일하게 조종사 과실이 원인이며 캄보디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또한 두 사고 모두 한국인 탑승객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