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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6:21

응답하라 1988/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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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응답하라 1988 로고 화이트.svg
[ 등장인물 ]
||<tablewidth=100%><width=1000><bgcolor=#b9ac75><color=#ffffff><-2>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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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G_성덕선응팔.jpg파일:IMG_응팔최택.png
파일:IMG_김정환응팔.jpg파일:IMG_류동룡환응팔.jpg
파일:rep88_character_SUN.jpg파일:rep88_character_PUPLE.jpg
그 외 등장인물은 등장인물카메오 문서 참고.
[ 관련 문서 ]
||<tablebgcolor=#b9ac75><tablewidth=100%><width=10000> 등장인물 ||<width=20%> 카메오 ||<width=20%> 삽입곡 (노래방 수록 목록) ||<width=20%> 탐구 ||<width=20%> 평가 ||

1. 개요2. 방영 전3. 배경 관련4. 회차별
4.1. 0화4.2. 1화4.3. 2화4.4. 3화4.5. 4화4.6. 5화4.7. 6화4.8. 7화4.9. 8화4.10. 9화4.11. 10화4.12. 11화4.13. 12화4.14. 13화4.15. 14화4.16. 15화4.17. 16화4.18. 17화4.19. 18화4.20. 19화4.21. 20화
5. 관련 문서

1. 개요

tvN 금토 드라마응답하라 1988〉의 탐구를 정리한 문서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2010년대 시점에서 가까운 과거의 시대를 반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시대극이다. 이 과정에서 제작진들은 과거에 유행했던 각종 사회문화적 코드나 아이템을 극중에 되살려 놓았으며, 이것을 찾아내면서 동시에 재현상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도 일종의 2차 창작적인 소소한 재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차피 어떤 작품이든지 재현상의 오류를 완벽하게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영이 잘 된 작품 마저도 소소한 재현상의 오류가 있을 정도.

특히 BGM에 관련하여 오차가 많은데, 극중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듣는' 노래가 아니라 극에 삽입된 '배경음악' BGM의 경우 당연히 1988년 이후에 나온 노래를 써도 재현상의 오류가 아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해당 시대의 노래를 BGM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서 헷갈릴 수 있는데, 심하게 말하면 BGM으로 방탄소년단 노래가 나와도 재현상의 오류와는 상관없는 게 BGM은 제4의 벽 바깥에 있기 때문. 사극에 오케스트라 음악이 나오거나, 월드 앳 워같은 2차 대전 게임에 메탈 음악이 나오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때문에 박보람이 부른 혜화동(혹은 쌍문동)이 나오더라도 재현상의 오류가 아니다. 그러나 작중 배우들이 당시의 유행가가 아닌, 오늘날의 유행가를 부르면 재현상의 오류가 된다. 실제로 작중 내에서 장두석의 부채도사 노래를 성균과 덕선이 불렀는데 부채도사의 등장은 1991년이다. 그렇다고 이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는 게 한국 사극대체역사물(역사소설)에서도 현대적인 표현이나 유행어 같은 게 들어가기도 한다. 유사한 예로 한국의 모 삼국지 만화책에서 병사들이 진짜 사나이를 불렀다.

극중에서 친구들끼리 대화할 때 자주 쓰는 유행어로 '웬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웬일이니', '헐', '대박' 정도의 감탄사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말은 당시의 유행어임은 분명하나 서울의 일부 지역에서만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지방에서는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서울의 경우 들어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로 다양하다. 심지어 당시 서울에 살던 청소년이었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정말 일부만 썼던 모양이다. 웬열~이라는 말은 실제로 사용했다. 서울의 1975~76년생들이 중학교 말~고등학생때 유행했던 언어이니 1971년생인 주인공들의 고등학생 때는 유행초기였을 수 있다.

어쨌든 속어, 은어나 유행어의 경우 나이가 어린 10대~20대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일부러 현대식의 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언급되었으므로 너무 심하게 따질 필요는 없겠다. 너무나 철저하게 당시의 시대상을 따르면 경우에 따라 현 시대의 시청자들이 보기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가 어색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까놓고 말해 사극 등에서 100% 재현하려면 당연 배역들은 단어는 물론 문법 등에서 그 당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이는 현대 시청자들에게 있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즉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느 정도는 오류를 알면서도 무시할수 있다.

2. 방영 전

3. 배경 관련

4. 회차별

4.1. 0화

4.2. 1화

파일:reply1994_Ep01_001.jpg

4.3. 2화

4.4. 3화

파일:K-342.jpg

4.5. 4화

4.6. 5화

4.7. 6화

파일:external/news.hankyung.com/01.10903332.1.jpg 파일:이창호 복도.png
방송된 중국 기사들과 최택. 농심배 세계대회 당시 중국 기사들과 이창호 九단.
파일:j3Vovisl.jpg

4.8. 7화

4.9. 8화

4.10. 9화

파일:jiPbCvih.jpg

4.11. 10화

4.12. 11화

4.13. 12화

4.14. 13화


4.15. 14화

파일:g4lXQ67.jpg

4.16. 15화

4.17. 16화

그래도 접근성이 좋았던 차범근이나 당대 최고의 천재로 꼽혔던 최순호 정도를 언급했다면 김정환이 축빠였음을 무리 없이 전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18. 17화

4.19. 18화

파일:reply1994_Ep07_001.jpg
파일:yFJOR7M.jpg

4.20. 19화


파일:김정환 공군 계급장.png

4.21. 20화

5. 관련 문서



[1] 참고로 도봉구에는 쌍문초등학교만 있다.[2] 응답하라 1997의 배경이 되었던 부산 광안고등학교도 실제로 없었다. 전작들에서도 대학교 이름은 실명 그대로 쓰긴 했지만.[3] 그런데 선덕고는 1990년에 쌍문동의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쌍문동이 아닌 우이동에 있었다.[4] 지금은 남녀공학이다. 학교는 월계동에 있다.[5] 반대로 응답하라 1997의 광안고등학교는 부산광역시가 아닌 서울특별시(영등포공업고등학교)에서 찍었다.[6] 2016년부터 지금의 교명으로 변경[7] 1982년부터 영업중이다. 소방도로 확보 문제로 2019년 7월, 드라마 촬영 당시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2020년부터 바로 뒷건물에서 리모델링한 다른 건물에서 영업중이다.[8] 특히 10회에서 서울대 → 쌍문동 → 올림픽경기장을 1시간 안에 주파하는 장면은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오류.[9] 당시는 서울에서 서울로 하숙은 부유층 아니면 보편적이지 못했다. 쌍문동에서 더 먼 인하대학교도 1~2학년생의 경우는 통학이 일반적이었다.[10] 참고로, 1988년 기준 특별히 더 열악한것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쌍문동에서 서울대학교로 가는 루트는 똑같다. 버스→수유역서울대입구역→버스. 물론 혜화동에서 25번 버스(당시의 노선 도봉구 미아7동(삼양동)-미아리극장-길음시장(서라벌중학교&서라벌고등학교)-삼선교-대학로-종로-서울역-한강로-장승배기-신림동-서울대)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가는 용자도 있긴 했다. 물론 보라네 집이 쫄딱 망해서 반지하에 살고 있으니 기를 쓰고 통학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단, 그 시절에는 고시촌이 없었을 때이고 나름대로 70년대풍 신시가지인 쌍문동보다는 달동네가 많았던 신림동(난곡)이 더 방값이 쌌을 때이니 자취가 더 비용절감일 수는 있다.[11] 단 이건 오류라고 보기 어려운데, 정식명칭은 사법시험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법고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행정고시도 정식 명칭은 5급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이다.[12] 현재 도봉구 쌍문동, 창동, 강북구 수유동, 번동 노원구 월계동 일부에서 쓰인다.[13] 그 이전 모델은 비디오 조작버튼 외에 별도의 VHF 채널을 선택하는 버튼이 전면부터 줄줄이 부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리모콘도 초창기에는 유선 리모콘이었다.[14] CD-ROM처럼 앞에서 밀어 넣는, 비디오 하면 흔히 떠올리는 자동식.[15] 지금은 우리은행 ATM기가 들어서 있다.[16] 쌍문역 근처에는 있지만 소재지가 창동 소속이었다. 지점명은 쌍문역 지점으로, 현 투썸플레이스 창동중앙점 자리에 있었다. 2017년 폐지되어 창동 지점(도봉보건소사거리에 위치한 옛 상업은행 지점)과 합쳤다. 신한은행의 경우 쌍문역 2번 출구 방향에 위치해서 같은 포지션이라고 보면 될 듯.[17]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통합 후 이곳이 쌍문동 지점이 되는 바람에 기존 국민은행 쌍문동 지점(쌍문동이 아닌 수유3동에 위치)은 강북 지점이 되었다. 이 외에도 주택은행 방학동 지점이 국민은행 방학동 지점이 되면서 기존 방학동 지점(방학동이 아닌 쌍문2동에 위치)은 쌍문북 지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2017년 1월 9일 기존 쌍문동 지점이 폐지되고 쌍문북 지점이 쌍문동 지점이 되었다.[18] 당시에는 2조식 세탁기가 많았다. 그리고 짤순이는 한일전기의 탈수전용기 고유 명칭이다.[19] 당시엔 패밀리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20] 이와는 별도로 쌍문동 학생들의 1988년 교복착용율은 생각보다 높다. 도심공동화로 인해 종로구 사대문안의 학교들은 학생이 부족했고 신개발지인 도봉구는 학교가 부족해서 쌍문·방학동 학생들은 종로구 계동의 중앙고등학교, 혜화동의 보성고등학교(1989년 송파구로 이전), 경신고등학교 등으로 통학하는 일이 많았다. 이들 학교들은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나름대로 전통을 강조하는 학교라서 1986년 교복 부활 이후 가장 먼저 교복착용으로 돌아갔다.[21] 이 스타일의 교복은 2000년대 후반 이후의 디자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감색 블레이저에 짙은 회색 바지 조합의 교복이 처음 국내에 등장한건 1980년 3월 경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교복부활이 빨랐던 부산 4학군(동래학군) 지역에서는 1988년 당시 기준으로도 흔한 형태였으며, 이미 1986년 교복부활 직후에 부산예술고등학교의 사례처럼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의 교복을 도입한 학교 역시도 아예 없지는 않았고, 심지어 1980년대 초반에도 그러한 학교가 일부 존재 했었다.[22] 컴보이도 1989년에 정발했다.[23] 당시 수입된 홍콩영화들이 대부분 대만 수출용 북경어 더빙판이었기 때문이다.[24] 극중 성동일은 상고졸업후 6급 입사한 은행원인데, 6급 입사자들은 정년때 과장까지 가는 게 대부분이었다.[25] 1988년 당시 대학 등록금 88만원은 사립대학에서 가장 비싼 이공계열 1학년 기준이며, 그나마도 88만원이면 비싼 편이다. 실제로 1988년까지는 대학 등록금이 규제되어 있었으며, 1989년부터 등록금 자율화가 시작되어서 몇몇 사립대학들이 등록금을 많이 올렸으나 대부분 원상복귀했다. 1988년 기준 문과 계열 사립대학은 80만원선, 이과는 90만원선이다. 서울대 등록금 45만원 또한 공대 기준이다.[26] 사범대라면 이야기가 또 다른 게 서울대학교를 위시한 국립 사범대는 1989학번까지 입학금 수업료 면제였으므로 기성회비만 30만원 남짓 납부했다.[27] 그런데 5화에 검은 종이를 감아놓은 듯한 어설픈 맥콜 패트병 재현품이 나왔다.[28] 국제시장의 경우, 거의 현재의 HD제작 방송급으로 글자 크기가 작은데, 이렇게 되면 당시의 표준이던 14인치 브라운관으로 띄울 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아진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미국 방송도 이 정도의 해상도는 구현하지 못했다. 640X480 해상도의 VGA가 갓 나왔던 시절. 참고로 VHS의 주사선은 불과 250라인 정도였다.[29] 대표적으로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하철체'를 생각하면 된다. 특히 부산지하철은 진짜 80년대 그대로의 디자인. 다만, 코레일은 2003년부터 코레일체로 CI를 죄다 변경해서 논외.[30] 옛날 금속활자 인쇄본에서 보듯 한자는 네모 틀이 기본이다. 그리고 같은 지면에 좀 더 많은 글자를 우겨넣을 수 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공출이 더 심해지면서 당국이 활자의 가로 폭을 극단적으로 줄여버리라고 했을 정도.[31] 다만, 작중에선 "반갑구만 반가워요"라고 하지만 실제 이 코너에서 장두석조금산이 하던 대사는 "반갑구만 반갑십니더"의 빈도도 높다.[32] 다른 경기도 아니고 올림픽 3대 빅이벤트(남자 축구 결승, 육상 100m 달리기 결승, 마라톤) 중 하나인 남자 100m 결승전에서 터진 대사건이었기 때문에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벤 존슨이 당시로서는 듣보잡 국가였던 대한민국의 도핑테스트 능력을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친 꼴이다.[33] 당대에는 소니가 패권을 먹고 있었지만 후지의 경우 후지논 계열 렌즈의 성능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뉴턴 같은 과학 잡지에서 별도로 다룰 정도였다.[34] 다만 당시에 KBS 1TV도 광고를 하긴 했지만 광고수익은 MBC가 더 많았다고.[35] 당대에도 TV수신료가 월 2,500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36] 당시 서울 지역 일부 학생들은 학생동원 및 1988 서울 올림픽 기간 중 임시휴업을 했기 때문에, 폐막 이후부터 겨울방학에 걸쳐서 대단히 빡센 보충수업을 받아야 했다. 법정 수업일수 이수 때문.[37] 이는 나중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 나온다. 그야말로 온갖 권리를 다 위반한 정책.[38] 1988년이면 삼호 • 우성아파트 등 서초동의 오래된 아파트들도 대치동 아파트보다는 한수 위로 대접받던 시대다.[39] 녜웨이핑 九단은 스승인 조훈현 九단의 88년 1회 응씨배 결승 상대로 유명.[40] 단색이 아니라 흰색과 모자이크처럼 오묘하게 조합된 연녹색이다.[41] 그 유명한 달리기 장면에서 경부선 육교 위로 달리는 부분인데,당시 부울경 지역에선 거의 보기 힘들었던 가공전차선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42]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혹은 흰색 '코레일체' 폰트가 사용되는 신 CI[43] 차량상부에 냉방공조기가 없고 하부에 냉방장치가 있는 냉방방식[44] 드라마 화면에는 110회라고 표기돼 있지만 KBS가 2020년 공개한 실제 영상을 보면 267회라고 나온다. 드라마에 표기된 회차 숫자는 CG로 덮은 것이다.[45] 실제 당시에 발매된 해적판을 가져온 것으로 보기에는 종이 질, 인쇄 및 제본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46] 심지어 시티헌터의 경우는 없는 연재본을 만들어서 완결판을 내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단행본 1권에 드래곤볼 반, 시티헌터 반이 섞여서 편집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묶어서 다른 제목으로 바꿔서 대량유통 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닥터슬럼프를 드래곤 볼 2라고 하는 식이다.[47] 화학과 수학. 동룡이 말하기를 전공이 수학이었다고 한다.[48] 참고로 배우인 유재명은 실제로 생명공학과 출신이고 생물 교사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49] 김민정이 아역 시절에 나온 그 광고 맞다.[50] 그런데 이 당시에는 PD의 요청에 의해 까라면 까는 경우가 흔했다. 최연제나 박정운도 후속곡과 히트곡을 같이 부르던 케이스다. 이 관행을 90년대 들어와 박살낸 게 바로 신해철-서태지 라인이다.[51] 이덕화가 1990년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조용필이 병문안을 갔는데 병원에서 "야 괜찮냐?"라고 물어보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고 한다.[52] 사실 지금도 쌍문역은 쌍문동이 아니라 창동에 있다. (정확히는 쌍문동과 창동의 경계선으로, 역무실이 창동에 위치.)[53] 명인전 결승 1국에서 박준형 初단에게 패배. 그러나 初단이 타이틀전(명인전) 결승까지 올라왔다는 건 상당한 괴물신인이란 뜻이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상금 1위를 차지하던 탑 프로기사가 신인한테 졌으니 본인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 게다가 당시 중계내용을 보면 '신인한테 유독 약하다'는 최택의 징크스가 언급된다. 최택은 이 점을 자신의 한계로 느낀 듯.[54] 1987년 MBC 뉴스데스크 삽입광고에는 1983년 제작된 삼양라면 골드 광고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아침시간대에 가끔 나오는 장수돌침대 광고는 2015년 기준 근 10년이 넘은 물건이다.[55] 타이틀 시퀀스 후 본방 전에 광고 나올 때에 화면 우상단에 프로그램 정보가 박혀있는 것.[56] 김정봉이 김성균에게 "아버지, 지금 7번에 코스비 가족 할 시간입니다."라고 말한 시각이 오전 10시 15분에서 20분 사이다.[57] 다만, 성보라가 총학 활동과 서총련 활동을 같이 하는 식으로 개인플레이를 하고 있다면 별 상관 없기는 하다.[58] 5회 초반에 날아온 신문 쪼가리의 기사가 전두환 은거 소식인데, 이게 11월 말의 이야기다.[59] 운동권 계파에 관해서는 NLPDR 항목이나 CNP 논쟁 문서 참조.[60] 4공~5공 헌법은 간선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국민이 표를 행사하여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었다. 특히 4공 헌법(일명 유신헌법)은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뽑는 구조였고, 5공 헌법은 선거인단이 뽑는 간선제를 채택.[61] 박세길 저서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등지에서 같은 논조가 나온다.[62] 학생운동이 쇠퇴한 건 여러 원인이 지적되고 있는데, 대외적으로는 1996년 김영삼 정부의 한총련 불법화+관계자 수배크리로 인한 핍박과 1997년 외환위기 외에도 내부적으로도 조직의 수직계열화나 내부 모순 등이 곪아터지며 안팎으로 무너졌다. 또한 전작에서 생략된 연세대 사태는 이러한 운동권 퇴조 경향에 불을 붙이는 데에 매우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63] 없습니다, 많습니다 등[64] 실존인물이지만 1988년엔 만 8세였다.[65] 조치훈의 라이벌이자 휠체어 대국으로 유명했던 그 바둑기사.[66] 한국에서 굳이 한글로 써도 되는 곳에 한자를 사용하는 딱 그 정도의 맥락이다.[67] 다만, 1980년대 말은 카페가 성행을 이루었고, 일일찻집 또는 일일카페가 유행처럼 번졌었다. (성노을의 일일찻집 에피소드 참고) 압구정동에도 카페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시절이다.[68] 하지만 유니클로도 로데오거리 상권의 침체의 영향으로 2017년에 폐점하였다.[69] 출시사: 대우전자. 상영시간: 108분[70] 스페인어로서는 최초다.[71] 최초의 컵라면은 1화에서 교실에서 점심을 먹을 때 류동룡이 옆 친구에게서 뺏어먹는 장면이 있다. 1972년 출시하였고 가격은 50원이었다.[72] 현재의 안성탕면쯤 되는 위치에 있는 보급형 라면. 안성탕면처럼 건더기/분말스프 일체형이었다.[73] 이게 뭐 대단한건가 싶을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80~90년도였다는걸 감안하자. 저 당시엔 영어를 잘하면 고급 스펙 내지 지식인 취급을 받았던 시대였으며, 인터넷의 발달과 PC의 보급률이 절망 수준이었기에 정보습득의 벽이 매우 높았던데다 그 자료라는것들도 후루꾸야매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아마 지금으로 따지자면 한글자막이 없이 미드를 봐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것과 비슷한 셈이다. 물론, 공부 빼고 모든 것에 취미를 붙이던 김정봉인지라 단순히 저 노래를 질리도록 들어서 외웠을 확률이 더 높지만...[74] 정운찬 전 총리처럼 다른 사람들이 본인에게 어느 대학을 다니냐고 묻자, "당연히 서울대지, 다른 대학을 다닐 데가 있습니까?" 라고 자뻑하면서 대답한 일화를 생각하면 된다.[75]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병원의 마크를 잘 보면, 서울대학교 실제 마크를 조금 손본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월계수 틀 내에 책이 펼쳐져 있는 파란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76] 이렇게 처리한 이유는 간접광고 문제 때문이다. TV광고가 허용되어 있는 대학과는 달리, 의료기관의료법에 따라 TV광고가 아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병원이 주 무대로 등장하는 응사도 이 문제 때문에 병원 이름을 바꿔서 언급하고 병원 전경샷도 이름 일부를 가로등이 가리는 구도로 촬영했다.[77] 옆집 문이 열리고 "아빠!" 하면서 아이와 아내가 마중 나온다.[78] 당시기 전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국내 비디오 출시사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워너 브라더스 - SKC, 파라마운트 / 유니버설 픽처스 - UIP코리아(CIC), 20세기 폭스 / 콜럼비아 - 대우전자(세신영상), 디즈니(터치스톤, 할리우드 등) - 삼성물산(드림박스)[79] 이 사이에는 KBS 제1라디오KBS 라디오서울(현 SBS 러브FM) 주파수이다.[80] 당시 MBC의 중파송신소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었다.[81] 실제로 13화에서 정환이네 집에 220V용 다리미가 등장했다.[82] 서천군 장항읍에는 규모가 좀 있는 도시에서나 볼 법한 창선동1가라는 행정구역이 있었다. 지금은 창선1리로 개칭.[83] 서울시내에서 접근하기 쉬운 도선사조계사, 길상사 등을 공양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누구나 식사를 할 수 있다. 물론, 공짜라고 생각하지 말고 쌀이나 소액의 돈을 보시하는 것이 마음도 가볍고 좋다.[84] 일부 사찰 등에서 실비로 돈을 받기도 하는데, 불교계 내에서도 말이 많다. 특히나 조계종은 탁발 금지이기 때문에 신도나 절이 알아서 서로 잘 해야 하는데, 돈 얘기로 얽히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85] 류동룡을 잡으러 갔다올 때 김정환의 푸념 "보라 누나는 차에 거북이 넣고 다닌대냐?"가 바로 그 증거.[86] 실질적으로 강남에서 강북, 특히 성북•강북•중랑•노원•도봉 등 서울 동북지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강다리를 건넌 뒤 강변북로를 타다 동부간선도로로 갈아타서 올라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현재 형태의 동부간선도로가 개통된 것은 1993년이다.[87] 당시만 해도 대천시와 보령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해수욕장이 있던 곳은 구 대천시였다. 시군 통합은 1995년 1월 1일.[88]아산시[89] 비하인드 영상 속 꽃지해변이 보이는 표지판이 있었다[90] 현재는 그 자리에 서라벌중학교와 우이동 푸르지오 아파트가 있다. 참고로 서라벌중은 1998년에 돈암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91] 위에서 찾아볼 수 있듯, 노원구는 1988년 1월에 이미 다른 구로 분리됨[92] 2010년대부터는 전국노래자랑에 고등학생도 많이 나왔지만 1980~1990년대에는 20~30대가 대부분 나왔지만 고등학생은 나오지 못했다. 19세 출연자는 자퇴생 및 빠른 생일이거나 만 나이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되며 18세 출연자까지는 거의 드물었다.[93] 특히 지금의 서울 지하철 5호선 마곡역 주변이 더욱 두드러졌다. 1996년 3월 이 역이 준공되었지만 이로 인해 12년간이나 방치되어 오다가 이 역 남쪽 수명산파크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으로 2008년 6월부터 여객 취급을 시작했다.[94] 물론 비디오로 봤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타이틀에 들어가는 수파(로고)가 너무나도 방송국스러운 캘리그래피. 당시 타이틀 화면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당시 만화영화 VHS출시본은 조악한 그래픽 폰트가 99%.[95]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5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 1970년대 후반부터 이 세대가 서서히 성인으로 등장하던 시기였음.[96] 프렌치 키스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1995년도 맥라이언 주연 영화가 개봉된 이후였다.[97] 당시 아파트는 1988년 12월 입주 시작.[98] 특히 독일어, 프랑스어 등 유럽계 제2외국어. 오죽하면 임용대상자들을 6개월간 동양계 제2외국어 교육을 시켜서 해당과목으로 발령을 내려 했을까? 물론, 이는 비사범계나 사립대 사범대 일문과, 중문과 학생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99] 이렇게 임용적체가 되어 발령이 나지 못한 1980년대 학번 인원들은 자동임용이 위헌판결을 받게 되자, 자동으로 임용을 할 수 없어진 관계로 임용시험을 봐야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3저호황에 의해 취업이 매우 잘 되던 시기라서, 귀찮은 임용시험보다는 대기업 입사를 택했다.[100] 극장에 갈 시간과 돈 대신 해적판 비디오를 빌려서 보는 게 경제적인[101] 심지어 해외에서 복제판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는 국내 극장에서 캠코더로 찍은 소위 '캠판'이 나돌기도 했다.[102] 백 투더 퓨처는 흥행에 실패하지 않았다. 개봉관 기준 34만명을 끌어들여 87년 국내 영화 흥행순위 4위를 기록했다. 물론 개봉 당시 미국의 인기를 감안하면 높다고 볼 수 없지만.[103] 다만 질것 같지 않던 상황에서 이변이 일어난 경기라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가 나왔을 때는 패배 위주로 쓰는 경우도 있다. 가령 브라질 충격의 1:7 패배.[104] 실제로 여기서는 대종상 최다수상작을 헤드라인으로 뽑지 않고 "친구, 대종상 전 부문 탈락"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팔리는 헤드라인의 정석'으로 회자되는 듯.[105] 방학동과 가까운 쌍문2, 4동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정의여자중학교가 있기 때문에 여학생이 굳이 방학중학교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 반면 쌍문2, 4동에 사는 남학생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방학중학교나 창동중학교로 배정되는 일이 많았다. 거리상으로는 창북중학교(당시는 남중)가 가깝지만 이 때 창북중학교는 쌍문동에 사는 학생들은 받지 않았다. 1990년 선덕중학교가 이전하고 1992년 백운중학교가 개교하면서 남학생들의 장거리 통학이 많이 줄었다.[106] 도심공동화로 인해 도심학교가 특히 이랬다. 종로구 계동의 중앙중학교나 혜화동의 동성중학교 등은 종로구 학생들보다 도봉구(현 강북구) 미아동, 수유동 학생들이 더 많은 경우도 다반사였다.[107] 가상매체에서 비슷한 사례가 매직키드 마수리에서 친구의 보증을 서준 이슬이 아빠가 은행으로부터 통장이 압류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혼자서 고뇌하던 중 친구가 대출금의 일부를 상환하여 통장 압류가 풀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연히 주채무자가 대출금의 일부를 상환하여 보증인의 통장 압류가 풀리는 일 또한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108] 프레임 끝이 고리모양이라 날개 울에 그냥 끼우기만 하면 되었다.[109] 다만, 제1회 응씨배 결승은 1989년에 치러졌으므로, 이쪽을 의미한다면 가능하다. 기사 참조[110] 오히려 요즘보다 1980년대에 한물 간, 또는 덜 유명한 해외 가수들의 공연이 더 많았다. 1981년의 둘리스, 82년의 놀란스(둘 다 국제적으로는 덜 유명했지만 한국에서는 유명했다), YMCA로 유명한 빌리지 피플도 1983년 한국을 찾았다. 1987년도에도 유로댄스(터치 바이 터치의 조이, 스페인의 데이비드 라임) 등 여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가수들이 자주 내한했다.[111] 대학 재학생에 한해 허용되었다. 본격 서울대생이 과외로 수십만 원을 벌게 된 시점이다.[112] 장충동 본점의 태극당과 이름만 같은지, 계열인지는 불분명.[113] 애당초 성신여대입구역 상권의 시작이 여대생들이 아닌 수도권 전철 4호선 개통 직후 혜화•삼선•돈암 지역 중•고교를 다니게 되는 성북•도봉•노원구 학생들의 10대 위주 공간이다. (노원역, 수유역 상권 생기기 이전이다.)[114] 이 그룹의 멤버 중 한 명인 김성애의 아들이 타이거JK이다.[115] 종종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슈스케에 나온 적도 있고, 히든싱어 게스트로도 나왔고, 게임중독법 반대 플래시몹에 초청되어 Baba Yetu를 부르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116] 스타킹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이때 게스트로 출연했던 혜리가 나중에 결혼식 축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한 인연도 있다.[117] 김성근 감독이 맡던 시절의 OB의 전력은 우승은 1번 정도 더 할 수 있던 전력이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84년의 저주기 게임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 할 수도 있었다.[118]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삼성 라이온즈가 4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며 타이기록을 작성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삼성은 4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이었고 해태는 한국시리즈 한정 4년 연속 우승이었다.[119] 뉴스에도 나오지만 7개 구단 중에서 최하위인 7위를 했다. 사실 1988년까지 삼미-청보-태평양장명부의 괴물 같은 활약을 등에 업은 1983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위권에 머물렀던 만년 약체였다. 이때의 순위 추이를 보면 6위-3위-6위-6위-6위-7위-7위. 7년의 시즌에서 꼴찌만 5번 했다.[120] 사실, 이 시절에 박진영과 현진영은 전국구급의 춤 실력으로 이름 좀 날렸었다. 그리고, 박진영유세윤의 프로젝트 그룹 UV의 '이태원 프리덤' 뮤직비디오에서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의 춤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121] 참고로 2기 지하철(5~8호선)에서는 아직도 이 사람의 녹음을 쓰고 있다가 현재는 개정.[122] 인쇄오류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달력을 그 전해에 만들어서 휴일이 갑자기 바뀌는 경우에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신정연휴가 하루로 축소될 때도 당시 달력에는 2일까지 휴일로 되어 있었다. 당장 최근인 2013년에도 한글날이 공휴일로 복귀하였는데도 휴일로 나와 있지 않은 달력이 많았다.[123] 과거에는 주민등록상 출생연도가 실제 출생년도와 다른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경제적인 여건뿐만 아니라 의료기술과 시설 역시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생아의 생존율이 높지 않아, 1~3년 정도 키워보고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제서야 출생신고를 하는 일이 많았다.[124] 동두천에 있는 단관 영화관. 극 중 피카디리극장으로 나온다.[125] 물론, 전인화와 9살의 나이차 때문에 그랬던 것일 뿐 인기가 많이 없어서가 아니었다.[126] T-50이 운용중인 것은 3훈비가 아닌 52시험비행대대이고 T-50을 훈련기로 운용중인 비행단은 광주의 1비이다. 게다가 T-50의 경우 애초에 해당 시기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127] 이른바 저시안성 계급장으로, 육해공군 모두 이전부터 변경을 추진해 왔으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128] 1992년 12월 군번인 공군 의장대 병 468기의 사진을 보면 ‘야상' 위에 흰색 계급장을 달았다. 파일:external/www.kafi.net/afhonorguard_468.jpg 군복/한국군/공군 참고.[129] 신도시 개발이 착수되기 전까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풍경은 판교IC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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