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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五一六 軍事政變 May 16 coup | |
중앙청을 점령하고 있는 반란군 | |
일시 | |
1961년 5월 16일 ([age(1961-05-16)]주년) | |
장소 | |
[[틀:깃발|서울특별시 | ]][[틀:깃발| ]][[대한민국| ]]|
원인 | |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의 국가 권력 찬탈 의도 | |
교전군 | |
<rowcolor=#fff> 진압군 | 반란군 |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군 | 군사혁명위원회 |
지휘관 | |
|
|
전력 | |
대한민국 육군본부 제1야전군 헌병대 수도기계화보병사단 | 제6군관구사령부 제33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 제6군단 포병사령부 5개 대대 제1공수특전단 해병대 제1여단 |
피해 | |
10명 부상[b] | 8명 부상[b] |
결과 | |
무혈 정변 성공 국회 해산 정변 세력의 행정·입법·사법권 완전 장악 | |
영향 | |
제2공화국의 몰락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
당시 대한뉴스 보도[7] |
[clearfix]
1. 개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했다.당시 대한민국 국군에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8]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9]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10]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된다. 박정희 등은 이승만 정부 때 쿠데타를 하려 했으나, 4.19로 무산됐다가 다시 진행한 것이다.
쿠데타 세력은 예비 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1공수특전단[11]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주한미군과 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12]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탈취하여 앞으로 자신들이 조직한 소위 군사혁명위원회가 대한민국의 모든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한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에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13]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군정을 실시했다.
예전에는 이 사건이 군사혁명(보수계), 군사반란(진보계), 군사정변 등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5.16 주체 세력이 정권을 잡고부터 6월 항쟁 이전까지는 5.16 군사혁명으로[14], 민주화 후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으로 "5.16 군사정변"이 공식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김영삼 대통령 5.16쿠데타로 규정, 5.16은 쿠테타.
2. 배경
2.1. 들어가기에 앞서
배경을 요약하면 쉽게 말해 군에 대한 홀대와 박정희 개인의 상황, 사회 혼란상이 겹쳤다는건데, 문제는 이 근거가 후술되어있지만 주관적인 영역의 주장이 많지 딱히 수치적으로 증명되는건 잘 없다. 애초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대립이나 개각은 흔한 일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문제점이 있으면 비판받고 이를 해결하려고 정반합하면서 더 우월하게 갈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당장 그 시절 바로 옆 나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정당들이 치고 박고 싸웠지만 경제성장 잘만 하면서 합법적 방법인 선거로 문제를 해결했지 쿠데타를 기획하진 않았다.게다가 예를 들어 내각 지지율이 떨어져있었기 때문에[15] 군사반란 운운하는 것도 웃긴게, 이런 식의 논리면 지지율 낮은 정부는 언제나 쿠데타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대다수의 민주국가 정권은 그냥 선거로 교체하지 군이 쿠데타를 기획하진 않는다.[16] 일본만 해도 모리 요시로처럼 지지율 5% 이하를 찍는 그야말로 여론조사상으론 대다수의 민심을 잃은 총리도 있었지만, 그건 내각 교체나 선거로 해결할 문제지[17] 쿠데타로 해결하진 않는다. 한마디로 선거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민심을 이반해 군사반란을 정당화하려는 세력의 궤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궤변과 추억보정을 방치하다 보니 역사는 반복되기도 한다.
심지어 안보 불안 운운은 어이가 없는게, 당시 한국은 미군이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후술되어있지만 그 미군은 오히려 해당 군사반란 당시 사회 혼란을 우려하며 진압을 기획했지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2.2. 정치 불안?
1960년의 4.19 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이었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3일 이미 사퇴한 상황이었고,[18] 그 다음 대행 순서는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19]이 1순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20]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허정 내각이 스스로 내걸었던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는 슬로건과 같이 개혁을 급격하고 신속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추진하였고,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하야와 국무위원들의 일괄 사직으로 발생한 정부 공백 상태를 해소하고 개헌과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 임시적으로 구성된 과도 내각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허정 내각은 정치 개혁보다는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 정부에 대항해온 민주당이 처음부터 고수해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 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개헌 후 국회는 스스로 해산했고, 새 헌법에 따른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의석 233석 중 175석을 차지함으로써 전체 의석의 75%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는 세력이 비슷한 구파와 신파가 서로 대립하였고, 그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자기 정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해 8월 국회는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격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의원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파가 합심한 결과였다. 실권은 국무총리가 갖고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3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신파의 지도자 격인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국회에서 단 2표 차이로 인준된다.[21] 구파는 신파와 내각 구성에 있어서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국 결렬되었고, 장면 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다.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구파는 별도 교섭단체를 결성하였다가 끝내 신민당(신민주당)으로 분당하며 완전히 갈라졌다.
장면 내각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는데, 개각 사유는 비리나 정책 실패 때문이 아니라 신파와 구파 간 정치적 안배 때문이었다. 당시 장면 내각 각료들의 평균 임기는 2개월에 불과했다.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 없었고,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신구파 간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 없었다. 게다가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 자리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4.19 혁명을 통해 한번 들고 일어난 사회 분위기는 1년만에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이승만 대통령 하야 - 허정 과도내각 수립 - 개헌 - 총선 - 장면 내각 수립이라는 엄청난 일들이 1960년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졌는데, 세상이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부분은 정상적으로 세월이 지나면 정권이 안정화된다.[22]
2.3. 민주주의 회복에 의한 사회 혼란?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부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다만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게, 애초에 이승만 정부 시기에도 시위는 많았고 그걸 알게 모르게 탄압하려고 온갖 정치깡패들이 등장했던 것이다.[23]장면 내각 10개월 동안 가두 데모는 총 2,000여건, 데모에 참가한 인원이 100만여명에 달하였다. 매일 평균 7~8건의 데모가 발생한 셈이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고,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으며, 육군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심지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다만 민주국가에서 시위는 당연한거다. 그렇게 반대 시위들이 늘어나면서 사회 여론이 또 다른 사회 여론을 누그러뜨리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게 정상적인 과정인데 그걸 핑계로 쿠데타를 정당화하진 못한다.
사실 시위가 늘어난 것은 당시 급격히 불어난 언론들 덕분도 있었는데, 이승만 정부 붕괴 이후 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탄생한 언론들은 해법 대신 정부와 권력 기관을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0,000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24]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p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p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25][26]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p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p
1961년 3월 초에는 「팔리 보고서」가 등장했다. 팔리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27]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p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p
2.4. 전후 군부 내 인사적체
6·25 발발 당시 95,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25를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000명으로, 그리고 당시에는 70만으로 급팽창한다.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 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해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28] 이런 식으로 미군식 선진 행정 시스템을 겪은 그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행정업무 방식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에게 강한 불만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육군 장교들의 사정을 보면,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즉,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중령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29] 가령,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은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지만 불과 3살 연하의 김종필은 만년 중령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만 기다릴 수 없었던 장면 내각은 경제 개발 계획을 세워 재원의 일부를 국군을 감축하여 조달하려고 했다. 장교들 입장에선 정부 정책에 극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퇴역한 군인에게 직장 자리 봐주거나 우대하던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군인들은 사회상에 비해 비교적 우수한 시스템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박했다. 때문에 부정부패, 물자 횡령이 꽤 행해졌다. 여기에 의외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백선엽-정일권-이형근 군사 파벌의 독식 및 경쟁이라는 내부 상황도 한몫 단단히 했다.
2.5. 박정희 개인의 상황
박정희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백선엽, 원용덕 등 육군 원로들의 옹호와 남로당 간부들에 대한 정보 제공으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했다. 6.25 이전 박정희는 숙군 연루자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화여대생이었던 내연녀 이현란과의 문제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당시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아, 술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고 한다.박정희는 1950년 6월 23일경 박정희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되었다. 다만 당시에 북한이 침공할 것이라는 미군과 국군의 보고서는 전쟁 발발 전부터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상부에서 이런 보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었다.[30]
6.25 전쟁 발발 후 박정희는 포병 소령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무난하게 승진을 거듭했고 군맥을 쌓았다. 준장, 소장까지 차례로 진급했는데, 다만 준장과 소장으로 진급할 때에는, 미국 측이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진급이 순탄치 않았지만 백선엽 장군 등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사히 진급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군 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독보적인 기질 때문이었다. 첫째,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가입 전력이 있었다. 둘째,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4개 소대 병력을 육본에 요청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대통령 면전에서 병력 파병을 거부한다. 이때 육군본부 제2작전참모부장이였던 포병 대령 박정희는 "육군장병들에게 고함"이라는 훈령(217호)을 기초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현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과 사이가 나빴던 것.
정변 당시에는 제2야전군사령부(現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집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사단장인 해병소장 김동하 장군과 공모하여 5월 8일에 쿠데타를 진행하기로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박정희가 5월 8일을 쿠데타 날로 잡은 것은 5월 6일에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미국으로 해외 출장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즉, 참모총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거사를 하려고 한 셈.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 중령들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를 제거하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정리하면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기질이 육본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정변을 입에 담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된다. 특히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까지 문제 삼아서,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31]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 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또 박정희는 청년 시절부터 야망이 있었던 듯하다. 제자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 시절 문경의 하숙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를 떡 하니 붙여 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32][33] 박정희는 만주로 가서 만주국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만주에서도 민족 차별은 있었지만, 동양의 서부라 불릴 정도로 혼란한 곳이라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또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갔을 때 일본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소령으로 복직한 후 2.26 사건을 거론하며 가까운 장교들에게 "우리도 이런 식의 군사혁명을 해 보자" 등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정작 2.26은 실패로 끝났다는게 함정이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에게 "우리도 2.26 사건의 우국 장교들처럼 한번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고 한다.
3. 과정
자세한 내용은 5.16 군사정변/과정 문서 참고하십시오.4. 결과 및 반응
자세한 내용은 5.16 군사정변/반응 문서 참고하십시오.5. 평가
자세한 내용은 5.16 군사정변/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군사혁명위원회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0522D, #D2691E 20%, #D2691E 80%, #A0522D); color: #FFF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4cd4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181818; margin:-6px -1px -11px" |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 |||
장도영 ✯✯✯ | ||||
군사혁명위원회 부위원장 | ||||
박정희 ✯✯ | ||||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
김종오 ✯✯✯ | 박임항 ✯✯✯ | 김신 ✯✯✯ | 이성호 ✯✯✯ | |
김성은 ✯✯✯ | 정내혁 ✯✯ | 이주일 ✯✯ | 한신 ✯✯ | |
유양수 ✯✯ | 한웅진 ✯ | 최주종 ✯ | 김용순 ✯ | |
채명신 ✯ | 김진위 ✯ | 김윤근 ✯ | 장경순 ✯ | |
송찬호 ✯ | 문재준 ❁❁❁ | 박치옥 ❁❁❁ | 박기석 ❁❁❁ | |
손창규 ❁❁❁ | 유원식 ❁❁❁ | 정세웅 ❁❁❁ | 오치성 ❁❁❁ | |
박창암 ❁❁❁ | 길재호 ❁❁ | 옥창호 ❁❁ | 박원빈 ❁❁ | |
이석제 ❁❁ | ||||
군사혁명위원회 고문 | ||||
김홍일 ✯✯✯ | 김동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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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주요세력,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
위원장 | 중장 장도영 |
부위원장 | 소장 박정희 |
전방사령관 | 중장 이한림 |
후방사령관 | 중장 최경록 |
경기지구 | 소장 서종철 |
충청지구 | 소장 김계원 |
전라지구 | 소장 김익렬 |
경북강원지구 | 소장 박기병 |
경남지구 | 소장 박현수 |
그러나 국무총리 장면이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을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35]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5월 16일 9시를 기하여 효력을 갖는 포고령 세 개를 군사혁명위원회 이름으로 내놓고 장면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 당한 국방장관 현석호와 연금 당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공군참모총장 김신, 해병대사령관 김성은과 함께 오전 9시경 청와대로 향해 대통령 윤보선에게 계엄령 추인 및 쿠데타 지지를 요구하게 된다.
이후로 공포된 포고령은 다음과 같다.
- 포고 제1호는 군사정권에 대한 민간의 반항을 탄압하고 사회를 통제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채 출국을 시도한 사람, 직장을 이탈했거나 유언비어를 날조 또는 유포한 사람, 옥외집회를 했다고 여겨진 사람, 저녁 7시부터 새벽 5시 사이에 집 밖에 있는 사람은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되어 처벌되도록 하였다. 또한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까지도 계엄군에게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고, 역시 어길 경우 영장 없이 체포된다.
- 포고 제2호는 이른바 금융동결령으로 전국의 금융을 즉각 동결하고 추후 지시에 따르도록 하였다.
- 포고 제3호는 출국 시도를 원천봉쇄하는 데 목적을 두고 하고 있다. 국제선의 운항과 외국 선박의 입출항 자체는 제한하지 않되 모두 군의 검열을 받도록 하였고 국내선 운항과 국내 선박은 모두 중지하여 추후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다. 당시 김포국제공항은 5월 16일 폐쇄되었다가 이튿날 개장되어 17일 13시 10분 폐쇄 후 최초의 운항이 이루어졌다. 포고 제3호는 몇 차례 개정되다가 1961년 7월 8일에 폐기되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36]
- 국내 선박 중 중국 내 연안어선, 정기객선 및 무연탄수송선에 한하여 운행을 허락한다.
- 취항 선박은 출어전과 입항 후 해지구계엄사령부에 신고하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 포고 제4호는 군사정변 발발 후 행정, 입법, 사법 등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포고령으로 5월 16일 오후 5시를 넘어 뒤늦게 발표되었으며 총 여섯 개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르면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월 16일 오전 7시를 기하여 장면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모두 인수하여 국가기구를 모두 집행하고 장면을 포함한 내각 인사 모두를 체포한다. 한편, 참의원, 민의원 및 지방의회 등 입법기관은 단기 4294년(서기 1961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모두 해산되고 정당을 포함해 사회단체 등의 모든 정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 포고 제5호는 제2호에 관련한 첫째 지시로서 예금 인출을 일일 1회 최대 10만환, 월 최대 50만환으로 제한해 허가하는 금융 동결 완화 조치다.
- 포고 제6호 전국의 물가를 1961년 5월 16일 현재 수준에서 동결하고 매점매석 행위를 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해 버리겠다는 물가억제령이다.
- 포고 제7호는 각 지구의 계엄사무소장이 관내 외국군과 대공사관의 식량과 재산을 보호하라는 명이다.
- 포고 제8호는 제2호에 대한 두 번째 지시로서 군사비 관련 금융 동결을 모두 해제하는 것이다.
- 포고 제10호는 제1호 이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체포, 구금, 수색에 관하여 법원의 영장 없이 이를 집행할 수 있고 또한 군사재판에서 관장한다는 내용이다.
- 포고 제11호는 사법부와 검찰은 지시에 따르라는 내용이다.
- 포고 제12호는 장면 내각이 추진하고 있는 국토건설사업은 민족적 과업이므로 계획, 소요 자금 등은 모두 예정대로 집행할 것이며 관련 종사자들의 신분은 보장할 테니 일에 충실하라는 내용이다.
- 포고 제14호는 제2호에 대한 개정 및 제5호 폐지령으로 예금 인출은 월 천만원 이하로 변경하고, 외국과 관련된 거래, 인건비, 건당 5백만 원 이하 사업비에 관련된 재정 지출에 대한 동결만 해체하겠다는 것이다.
- 이어 15호는 더 상세하게 금융 동결을 완화하였다. 제16호는 제3호에 대한 완화조치다.
이외 나머지도 이곳에 잘 정리되어 있다.
7. 기타
- 수도권 북쪽의 경기도 김포시 최전방을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여단[37] 병력 1,500명을 쿠데타를 위해 서울로 빼돌렸다. 이렇게 전방 부대를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하는 행위는 이후 12.12 군사반란 때 제9보병사단 29연대에 의해 다시 일어난다.
- 박정희가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정희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하러 간 전속부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상당히 풍겼다고 한다.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3공화국 5.16 군사정변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박정희 외 1명이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정변 지휘부들은 박정희가 안 보인다며 당황하다가 술에 취한 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찾아서 데려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5.16 정변 당일 정명환을 필두로 한 진압군을 박정희가 직접 말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술을 한두 잔 했을 수는 있어도 몇몇 증언처럼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술에 만취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38] 단순히 한두 잔 정도는 아니고 술 냄새가 풍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더라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 게, 박정희는 술이 상당히 셌다. 훗날 박정희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만난 자리에서 육영수 여사와 태국 외무장관이 기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서 좌중의 불안한 시선을 받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연설까지 마친 일화가 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명백히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 술에 취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물론 이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근처에 없었기 때문에 근거로는 의미가 없다. 해당 시점에서 김종필은 이미 이전에 강제전역 당한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병력도 무기도 직급도 없어서 쿠데타 당시 박정희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대신 혁명공약 인쇄한다고 인쇄공들을 재촉하고 있었으며, 이건 김종필 스스로 인정한 내용이다.[39]
- 차지철과 전두환은 이 쿠데타에 대위 계급으로 가담(?)했으며[40] 쿠데타가 성공한 후 공을 인정받아 소령은 거의 생략하다시피할 정도로 짧게 진급한 후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차지철은 그렇게 중령으로 제대한 후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은 계속 군대에 남아 소장까지 진급한 이후 박정희의 이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질러 박정희와 똑같이 권좌에 오르게 된다.[41]
- 훗날 박정희의 심복이자,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5.16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 김재규는 준장 계급으로 국방부 총무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5.16 정변 직후 반혁명 분자로 몰렸으나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대의 정치 중립을 매우 강조한 이종찬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고 그 영향을 받아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김구의 차남 김신이 정변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고 정변에 참여했다. 참고로 김신은 이승만에 대한 원한도 하늘을 찔렀던 모양. 자기 아버지를 죽인 배후가 이승만이라는 음모론이 지금까지도 떠돌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 5.16 군사반란을 미화, 찬양하는 '5.16 군사혁명 행진곡'이라는 노래가 존재한다.#
- 몇 달이 지나고 일본에서 이 정변에 자극받은 일부 자위대원들이 삼무사건이라는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적발당하고 말았다. 본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인 "황제가 없는 8월"이 제작되었다.
- 이 사건 발생 3일 전인 1961년 5월 13일에 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때 당선된 의원들은 취임한 지 12시간 만에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 자격이 박탈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엔 4번의 좌절[42] 끝에 강원도 인제군에서 당선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43] 이것도 어찌 보면 악연이다.
-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과 그들의 조력자였던 곽영주 등의 친 자유당 경찰 세력은 복역 중 5.16 정변 소식을 듣고, "아싸! 민주정권이 물러났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 세상이다!"라며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4일 후에 자신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이후 사형을 선고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래는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게 끌려 다니며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의 화랑동지회. 결국, 갑종장교 출신에 대학 나온 인재라고 살려준 유지광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된다.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그리고 혁명재판 문서를 참고.
<colbgcolor=#536349> 이후 이정재의 모습 |
* 5.16이 군사반란으로 규정된 것은 민주화가 이뤄진 문민정부 때부터이다. 역사바로세우기를 천명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6월 3일 기자간담회에서 5.16을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다. 김영삼 대통령 5.16쿠데타로 규정, 5.16은 쿠테타.
*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도 썰전에서 5.16은 쿠데타라고 분명히 말했다. 심지어 자기 군 복무 시절에 터진 12.12 군사반란 당시엔 '군인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논문을 쓰며 군인 신분임에도 12.12는 쿠데타라고 대놓고 말했다가 치도곤을 치를 뻔하기도 했다고. 사실 보수 인사 중에서도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5.16을 쿠데타라고 비교적 쉽사리 인정하는 반면, 권위주의 보수 계열에선 우상화의 영향인지 쿠데타나 군사정변이란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후술된 김현웅 법무부장관 말처럼 교과서에는 군사정변이라고 기술되어있다. 애초에 군사정변이란 표현도 박정희 추종자들 눈치를 봐 그나마 약하게 표현한거지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이랑 차이점이 없다.
* 묘하게도 51.6년 후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51.6%[44]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탄핵당한다.
* 1999년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마지막 회에 악역들이 몰락하는 사건으로 비춰진다. 이 정변을 통해 적폐를 척결한다는 모습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김춘삼과 아는 사이였던 어리버리한 중대장은 혁명재판부의 검찰로 출세했다고 좋아라 한다. 이게 미화 논란이 있어서인지 나중에 케이블에서 재방송을 할 때는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이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찰들과 이정재 등을 잡아가는 장면을 삭제해서 방영했다. 또한 동사의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도 39화에 5.16 군사정변이 비춰지는데 군사혁명위원회가 서울을 장악하는 과정 그리고 두 기업인을 포함한 부정축재로 지목된 기업인, 정치인들을 조사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2000년대 초 방영한 야인시대 2부에서도 다뤄지는데 아무래도 김두한이 박정희 세력이랑 척을 지다 치도곤을 당해서인지 크게 긍정적으로 그려지진 않았다.[45]
*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 발 친위 쿠데타 시도인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 이뤄졌지만 22대 국회의 빠른 대처로 계엄이 효력을 잃자, 바이든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를 지탄하는데 착각해 이시기 대통령인 윤보선이 튀어나오는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바이든 안티들이 하는 치매 드립을 풍자한 것.#
8. 관련 문서
8.1. 쿠데타 세력[46]
- 강상욱
- 구자춘
- 길재호
- 김동하
- 김신
- 김용순
- 김윤근
- 김인화
김재규[47]- 김재춘
김정덕- 김제민
- 김종필
- 김진위
- 김형욱
- 류승원
- 문성태
- 문재준
- 박기석
- 박원빈
- 박임항
- 박정희
- 박종규
- 박치옥
- 백태하
- 석정선
- 신윤창
- 오정근
- 오치성
- 유원식
윤보선[48]- 윤필용
- 이광선[49]
- 이낙선
- 이석제
- 이영근
- 이주일
- 이희성
- 장경순
장도영[50]- 전두환 - 당시 육군 대위로 서울대 문리대에 ROTC 교관으로 파견 나가 있다가 5·16 정변을 맞았다. 5월 17일 아침 그는 육군본부로 찾아가 정변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과 면담을 청하고, 5·16 정변의 주체가 원용덕과 백선엽의 빽으로 인해 뒷배경이 엄청 탄탄한 데다가 젊은 장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박정희임을 안 뒤 육사 생도들의 5·16 정변 지지 시가행진을 제안했다. 쿠데타에 반대하던 강영훈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을 구금시킨 후 5월 18일 아침 전두환의 설득을 빙자한 강압을 받은 육사 생도 800여 명이 동대문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벌인 시가행진은 그때까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부 국민과 외국인들의 시각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대가로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그는 군인으로 남겠다며 거절했다.
- 정래혁
- 정명환
- 정봉욱 - 당시 1군 사령부의 포병부 소속이었으나, 쿠데타 발발 후 곧바로 기갑부대를 끌고와 1군 사령부 cp실로 포구를 겨냥하여 배치시켜 이한림 장군을 압박하였다. 쿠데타 전날 부관과 부대에서 함께 취침하면서 부관에게 "그레샴의 법칙이 뭔지 알아?"라고 물어보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통해 다음날 일어날 쿠데타의 정체성을 평가하는 듯한 대화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본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중좌였으나 평소 김일성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으로 귀순한 뒤 조선인민군의 진지 위치를 알려줘서 기습작전을 감행해 승리에 일조했다.[51] 한국전쟁 후에는 1966년에 대한민국 육군 제7보병사단의 사단장과 육군훈련소장, 육군3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7사단장 시절 조선인민군 시절 후배 장교들이 조선인민군 사단장으로 재직해 있었는데, 야간에 북한군 병력이 비무장지대로 침투하자 포격으로 격퇴하고, 직접 GP를 찾아 후배들을 향해 확성기를 틀어놓고 “□사단장 ○○○, 연대장 XXX, 이 간나새끼들 나 알지? 너그들 한번만 더 그렇게 놀면 대갈통 날려버리갔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고 한다.
- 정세웅
- 정세윤
- 정오경
- 조남철
- 차규헌 - 나중에 12·12 군사반란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전두환과 함께 2관왕을 달성한다. 게다가 차규헌은 육사 8기생.
- 차지철 - 공수특전단 대위 신분으로 가담해 쿠데타가 성공하자 중령으로 특진 후 제대하고 이후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뛰어든다.
- 채명신
- 최용관
- 최주종
- 허순오
- 한웅진
- 홍종철
8.2. 정부 인사
8.3. 기타
[a] 한강 인도교 교전 지휘[2] 김종필은 1960년에 정군 운운하다가 항명 파동에 걸려서 중령 계급으로 강제 예편된다. 5.16 이후에 중령 계급으로 복귀한다.[a] [4] 대한민국 제 11,12대 대통령[b] 한강 인도교에서 진압군 측 헌병대와 반란군 측 해병대의 교전으로 부상[b] [7] 3분 8초경 왼쪽에 박정희가 보인다. 1962년부터 연도를 서력기원으로 세기 시작했으니 당시엔 단기 4294년(서기 1961년)이었다.[8] 여수·순천 10.19 사건 직후 남조선로동당 비밀당원 신분이 들통나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전력에 이어서 정군 운동의 배후로 지목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예편 압력을 받아왔다. 장도영이 도움을 주어 당장의 예편은 면하고 한직인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지만 1961년 1월 대한민국 육군본부 개인보안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결국 1961년 5월 말에 강제 예편 조치 예정이었다.[9] 2인자 김종필도 정군 운동으로 1961년 2월 예편 당했다.[10] 대부분은 영관급 장교였다. 정부 수립 초기였기에 1기생은 절반 가량이 입대 5년 만에 별을 달았다. 그러나 그보다 4년 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조차 배출하지 못했고, 선배들이 아직 은퇴하지 않았기에 대령 승진자도 1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11] 현재의 육군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5.16 당시에는 여단이 아니라 대령이 부대장인 "단"급 부대였다.[12] 심지어 주한미군은 그냥 자기들이 진압하겠다고 대통령 윤보선에게 건의하기도 한다. 이게 먹히기만 했어도 쿠데타는 쉽게 진압되었을거고 한국은 쿠데타 성공이 없는 근현대사를 맞이했을 것이다.[13] 쉽게 말해 자기가 쿠데타로 날려버린 인사를 보여주기용 바지사장으로 세웠다. 당연하지만 얼마 안가 장도영은 박정희 세력에 숙청당해 미국으로 쫓겨난다.[14] 5차 개헌 이후 대한민국 제4공화국 유신 헌법까지는 헌법 전문에 혁명으로 명시돼있었다. 이후 제5공화국 헌법 때는 4.19와 5.16이 둘 다 빠졌으나, 4.19는 제6공화국 헌법에 다시 추가되었다.[15] 이것도 구체적인 수치나 출처가 드물어 왈가왈부가 많다. 애초에 그러다가도 지지율 올라가는게 정치기도 하고.[16] 더 황당한건 지지율 20%도 안나오는 대통령이 21세기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한다. 심지어 이때도 '민생 치안 공황' 운운했다.[17] 선거는 쿠데타 따위로 피 보지 말라고 피 흘려가며 이룬 제도기도 하다.[18] 부정선거에 따른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은 임기 시작이 8월 15일이었으니 권한 승계의 자격이 없었다. 물론 이기붕 역시 4.19의 풍파에 벗어날 수 없었고,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4월 28일 아들의 총격에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19] 당시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 제도가 폐지되고 대신 외무부장관이 내각 서열 1위로서 수석국무위원을 당연직으로 겸직하여 이 수석국무위원이 국무총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현행 헌법과 법령에서는 대통령 궐위시 국무총리, 부총리, 기타 국무위원 순으로 대행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부총리가 없고 수석국무위원이 국무총리 대신이었다. 다만 허정 수석국무위원은 개헌 후 헌법 부칙에 의하여 국무총리에 자동 취임했다.[20]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에 국무총리까지 전부 하야하여 2순위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승계하는 상황으로, 과도 내각으로 불린다.[21]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00820000104[22] 여담으로 박정희는 딱히 장면 내각을 상대로 쿠데타를 하려던게 아니라 이승만 정권 시기부터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었다.#[23] 엄밀히 따지면 이승만은 군사독재보단 그나마 덜한 문민독재자긴 했다.[24] 다만 장면 내각은 비율로 따지기엔 기간이 너무 짧긴 하다.[25] 박근혜의 최저 지지율이 4%였다.[26] 당시 여론조사 출처 필요. 또 상기했듯 애초에 지지율 낮으면 높이려는 노력 역시 정치고,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대다수의 민주정권은 합법적인 선거로 퇴진시킨다.[27] 비슷한 사태로 보고한 것이 바로 군사 쿠데타였다. 다만 당시 이러한 의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혼란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 판단한 주한대사의 보고서도 있는 등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는 상태였다. 즉, 주관적 의견 중 하나로 보면 될듯.[28] 1953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 미국 민간 유학생이 7백 명이 좀 못되는데, 미국으로 유학간 장교들은 1천에 육박한다.[29] 왜 하필 8기였냐면, 8기의 육사 입교 시기가 1949~50년 경으로, 육사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던 시절인 데다 미군정의 종식과 주한미군의 잠정 철수로 정부가 장교와 부사관의 TO를 대폭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4년제 실시 이전 기수 중에는 8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인사적체에 불만을 가졌던 건 9, 10기도 마찬가지였으나 9, 10기는 한국전쟁 중에 긴급하게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선발한 기수라서 인원 자체도 많지 않았고 다수가 전사했다. 다음 기수인 11기는 육사가 4년제로 개편되면서 처음으로 선발한 기수였기 때문에 임관년도부터도 차이가 많이 나서 인사적체 운운할 짬밥도 아니었다.[30] 한편 김종필은 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31] 현재와 같이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은 대장 진급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할 참모직 중에서 최고의 요직이었다. 당시 실질적으로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행사하던 육본의 위상은 지금보다도 훨씬 컸으며, 그 중 참모총장의 지휘에 따라 실질적으로 예하 부대를 작전 통제하는 작전참모부장은 핵심 중 핵심이었다. 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신군부의 5.17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가 장악한 육본 수뇌부의 불법적인 군 동원 및 배치명령을 실질적으로 수행 통제한 게 바로 작전참모부장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느닷없이 후방 사령부의 부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곤두박질친 셈이다.[32]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셨다.”(이낙선 비망록, 1962)[33] 다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박정희는 나폴레옹 언급은 잘 안하고 참군인 이순신을 많이 강조했다. 정작 이순신은 반란은커녕 백의종군 당하고도 조선에 충성했지만 넘어가자.[34] 하지만 이 작전은 장면 전 총리가 도주하면서 실패한다.[35] 현재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으로 이전.[36] 5월 23일 개정 5월 19일 개정[37] 현재는 해병대 제2사단[38] 특히 박정희가 만취했다고 회고한 박치옥 같은 경우는 초기에 정변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반혁명 혐의로 숙청된 인물이라서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39] 김종필은 자신이 5.16을 계획했으며, 박정희에게 실행을 제안했다고 해서 5.16의 주역을 자처하지만, 실행단계에서는 참여하진 않았다는 것도 인정했다.[40] 전두환은 직접 가담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 다만 쿠데타 성공 이후 장교들 이끌고 지지 가두 시위를 벌이긴 했다.[41] 전두환과 차지철이 당시 말년 대위였다는 주장은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 최갑석 장군에 따르면 1960년대 당시의 진급 적체때에 8년차 중위, 14년차 대위가 속출했다고하고, 정작 전두환의 출신인 육사11기는 소위 3개월, 중위 1년, 대위 2~3년 근무후 상위 계급으로 초고속 진급해서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전두환의 경우 1958년 대위로 진급하고 1961년 군사정변 당시까지 대위였으므로 다른 육사11기 동기생보다는 조금 늦어졌다고 볼수 있을지 몰라도 말년 대위라고 볼 수는 없다. 차지철의 경우는 1954년 임관이지만 육사 출신도 아니므로 군사정변 당시 임관 8년차 대위로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다. 다만, 차지철, 전두환 둘다 소령으로의 진급은 1년만에 이루어졌다. 현지 임과 출신 최갑석 장군의 회고록.[42] 세 번 낙선, 한 번은 방해 공작으로 등록도 하지 못했다.[43] 사족으로, 이후 김대중이 방황하던 시기 이희호랑 연을 맺게 주선해준 것이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겸 사회운동가 이태영이었다.[44] 소숫점 둘째자리까지 계산하면 51.55%. 반올림하면 51.6%이다.[45] 물론 야인시대나 영웅시대나 같은 작가가 써서 독재자 쉴드 논란이 있긴 하다.[46] 정변세력 대부분이 육사8기에 영관급 장교였다. (육사5기들이 동조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들은 육사8기다.) 이는 79년 일어난 12·12 때에 중장만 3명에, 소장·준장까지 합치면 대략 10여 명 정도에 이른다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일단 12·12 때에 하나회 반란군들이 주력으로 동원부대가 공수여단만 3개이고, (당시 서울 인근에 있는 공수여단이 총 4곳인데, 그중에 3곳) 수경사의 병력에 핵심인 30경비단과 33경비단으로 만 단위에 이른다. (저녁부터 새벽 시간이지만 대통령 유고 상황에 제주를 제외한 전국 계엄이었기에 비상체계를 생각하면 부대 내 모든 가용병력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5·16은 일어나고 나서 계엄을 시행한 것으로 병력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47] 흔히들 5·16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다. 5·16 쿠데타 당시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재직 중으로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받았으나 부정 사실이 없어 곧 풀려났다.[48] 당시 대통령으로 내각책임제에서 얼굴마담이지만, 국군통수권자였기에 얼마 안 되는 군사정변 병력을 진압하고자 하였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한림 장군이 뒤늦게 군사정변을 알고 진압하고자 한 것을 막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대통령 윤보선이었다. 또한 위의 경과 과정을 보면 결과론적으로 대통령인 윤보선의 위치에는 변화가 없으며, 오히려 권위가 더 신장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희의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민주당 신파의 장면 내각에 권한을 이양받았다. 물론 62년 3월에 윤보선이 하야했기에 이후에 권력 투쟁에서 밀렸다고도 할 수 있으나, 5·16 초반에는 국군통수권자로서 군인들이 일으킨 정변에서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이었다.)[49] 당시 헌병차감으로 박정희가 6관구에 나타나기 전에 김재춘, 오치성 등을 체포하러 6관구에 나타났지만 김재춘의 말빨에 밀려 쿠데타군에 가담했다.[50]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5·16이 일어날 것에 대한 첩보를 알고 있었고, 과정이 진행되면서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을 뿐 동조했었다.[51] 안타깝게도 상부에서 이를 삐라에 담아 선전하는 바람에 일가족이 처형당했다고 한다.[52] 정변 직후 정변 세력 보호를 목적으로 창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