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팀이 속한 본선 D조에 대한 내용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D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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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도 일부 경기 개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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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
2002 FIFAワールドカップ 韓国·日本™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 |||||
<nopad> | |||||
<colbgcolor=#32a847> 대회 기간 | 2002년 5월 31일 ~ 2002년 6월 30일 | ||||
개최국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
유치 확정일 | 1996년 5월 31일 | ||||
슬로건 |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 新しい千年、新しい出会い、新しい出発 New millennium, New encounter, New start | ||||
마스코트 | 아토(Ato), 캐즈(Kaz), 니크(nik) | ||||
주제가 | Boom | ||||
공인구 | 피버노바 (Fevernova) | ||||
본선 진출팀 | 32개팀 | ||||
대회 결과 | |||||
우승 | 브라질 (다섯 번째 우승) | ||||
준우승 | 독일 | ||||
3위 | 터키[1] | [2] | |||
4위 | 대한민국[3] | ||||
수상 | |||||
골든볼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올리버 칸 | ||||
골든슈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호나우두 | ||||
야신상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올리버 칸 | ||||
신인상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랜던 도노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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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프랑스 | 2002년 한국·일본 | 2006년 독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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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2년에 열린 17회 FIFA 월드컵. 21세기 새천년에 개막한 첫 번째 월드컵이자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이며 대한민국 최초로 HD로 생중계된 월드컵이기도 하다.[4] 역대 월드컵은 물론 주요 국제 스포츠 대회 중 두 개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동개최한 대회이기도 하다.[5]2002년 5월 31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32개국이 한국과 일본에 각 10개씩 위치한 무려 총 20개 경기장에서 64경기를 치렀다. 이는 양국이 모두 대회 단독 개최를 상정하고 경기장 건설/보수 계획을 세웠는데, 대회가 공동 개최로 결정된 뒤에도 이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는 바람에 결국 역대 가장 많은 경기장에서 치러진 월드컵이 된 것이며 이 때문에 일본 측에서 32개국 진출, 64경기 → 40개국 진출, 96경기로 늘려달라고 FIFA에 강력히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경기장 하나당 고작 서너 경기만 열렸다. 실제로 무려 2,000억을 들여 지은 서울월드컵경기장도 개막식과 개막전을 포함해 고작 세 경기만 열렸다. 그나마 그 세 경기들도 입장권 시스템 오류에 비인기 경기들만 개최되어 만석을 못 채웠다.
보통 FIFA 월드컵은 유럽의 프로축구리그 일정에 맞춰서 6월 중순 ~ 7월 중순에 열리는 경우가 많지만, 대회가 열리는 한국과 일본은 이 시기가 장마철이므로 대회 16강 토너먼트 이후의 경기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 시기를 조금 앞당겼고[6][7], 결국 2002년 5월 31일에 개막하여 2002년 6월 30일에 폐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8]
2002년 6월 한국을 뒤덮었으며, 한국 축구 역사상 최전성기이자 신화로 불린다. 6월 한 달간 한국은 말 그대로 붉은색 물결로 완전히 뒤덮였고, 언론 역시 '스포츠 뉴스' 코너가 아님에도 일제히 월드컵 관련 소식들만 줄곧 보도할 정도였다.[9] 월드컵이 끝난 7월에도 열기가 남아서 월드컵 관련 뉴스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거나 예능에서도 월드컵을 소재로 방송을 많이 했었다. 사실상 당시 한국 국민들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에 힘입어 최초의 16강 진출 정도를 처음에는 기대했었는데, 그 기대를 완전히 넘어서 무려 월드컵 4위를 기록했다.
유명한 붉은 악마 티셔츠는 21년이 지난 2023년 지금도 계속 온라인에서 팔리고 있다. 사실상 붉은 악마 컨셉이 축구에서 한국의 상징이 아예 고정적으로 되어버린 월드컵이기도 하다. 열기가 2002년보다는 약한 편이지만 요즘도 월드컵이 열릴 때가 되면 항상 붉은악마 셔츠를 입고서 맥주를 마시고 응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월드컵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은 2003년부터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물론 심지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아이돌 가수들도 빨간 셔츠를 많이 입었다. 이후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부터는 많이 사그라들어 현재와 비슷해졌다.[10] 사실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이었기에 2002년 열기는 유독 한국인들한테는 각별했다고 볼 수 있다. 2024년 새해가 밝음에 따라 개최 22주년이 되었다.
2. 대회 정보
2.1. 공식 명칭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결승전 관람석의 김대중 대통령과 아키히토 천황 |
본래는 2002 FIFA World Cup Japan/Korea™이 될 예정이었다. 이에 정몽준은 왜 일본이 한국 앞에 오냐며 항의했고 제프 블라터 당시 FIFA 사무총장은 영어 알파벳 순서상 J가 K보다 먼저와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정몽준은 FIFA(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는 프랑스어를 쓴 단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게 먹혀서 프랑스어로는 Corée라고 표기하는 한국이 앞선 Korea/Japan으로 정정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어느 나라에서 어떤 언어를 쓰더라도 개최국이 포함된 대회명을 언급한다면 한일로 표기하도록 결정되었다. 영국 가디언지 기사아카이브[11]
그런데 공식 명칭이 결정된 후에도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한 월드컵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한다. 이 대회의 결승전을 일본에 양보하는 대신 대회 명칭을 Korea/Japan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사전에 일본과 협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회를 앞두고 협약을 위반하며 임의로 Japan을 앞에 두기 시작하는 추태를 보였고 이에 한국은 사전 협의를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몽준이 한일간 협의사항을 언론에 공개했는데 당시 정몽준은 Japan을 앞에 표기하고 싶다면 결승전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MBC 기사아카이브 이에 한 발 물러선 일본은 대회 기간 동안은 되도록 공식 표기인 Korea/Japan을 사용했다. 조직위 외의 일본 매체에서는 대개 대회 공식 브랜드인 FIFA 월드컵으로만 표기하면서 일한 공동개최로 수식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기하였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여전히 일한 월드컵으로 표기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비공식 명칭이며 국제 사회에서는 공식 명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12][13]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공식 TV 오프닝 영상[14] | ||
공식 명칭과는 별개로 일본보다 국가 인지도가 떨어졌던 2010년 무렵까지는 해외에서 Japan/Korea 월드컵이라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본 단독으로 표기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헛된 명분을 얻었을 뿐이고 일본이 실익을 취했다며 비판하는 의견도 존재했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 결승전이 어디서 열렸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그라들었고 201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의 인지도가 크게 상승하여 현재는 해외에서도 한일 월드컵은 무조건 공식 명칭인 KOREA/JAPAN으로 표기한다.[15]
2.2. 주제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공식 음악 아나스타샤 - Boom |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공식 로컬 음악 박정현 & 나얼 & 케미스트리 & 소웰루 - Let's Get Together Now |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공식 입장 음악 반젤리스 - Anthem | ||
2.2.1. 응원가
2.3. 엠블럼
위 사진 왼쪽의 엠블럼이 대회 엠블럼으로, 개최를 3년 앞둔 1999년 6월 1일에 공개되었다. 디자인은 FIFA 월드컵 트로피를 형상화 했으며, 색상은 동양 전통의 오방색이 사용됐다.
이 엠블럼의 도안은 한일 월드컵 이후부터 월드컵을 상징하는 공식 도안으로 몇 번 사용된 바 있었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엠블럼에도 같이 포함되어 나왔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사라졌다. 아마 FIFA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오륜기처럼 월드컵 로고에 일종의 관습적인 상징을 만들려고 하던 시도였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흐지부지 된 듯하다.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월드컵 로고는 월드컵 트로피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 또한 2026 월드컵 로고는 실제 월드컵 트로피가 로고에 들어갔다. 참고로 엠블럼이나 로고는 개최국이 아니라, 개최국의 요청 사항을 참고로해서 FIFA의 마케팅 대행사에서 제작한다.
2.4. 마스코트
'엠블럼' 문단에 첨부된 사진을 참조. 대회 마스코트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단일 마스코트가 아닌 3가지 유형의 마스코트로 만들어졌으며 3D로 제작되었다. 정식 명칭은 아트모(Atmo). 스페릭스(Spheriks)라고 불리는 외계인 종족인 이 마스코트는 코치를 상징하는 아토(Ato)와 2명의 선수를 상징하는 니크(Nik), 캐즈(Kaz)로 이루어져 있다. 공동개최라는 대회 특성상 마스코트도 특정국가의 상징물에서 벗어나 외계인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디자인도 영국의 인터브랜드(Interbrand)에서 맡았다.
이 마스코트의 문제는 인기가 정말로 없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이름부터가 일본풍이었고 캐릭터 설정도 "외계인들이 태평양에 떨어졌는데 태풍을 타고 올라와서 한국과 일본에 상륙했다"는 식이어서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다.[24] 1988 서울 올림픽의 호돌이나 2018 평창 동계올림픽/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의 수호랑과 반다비는 캐릭터 인형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꽤 성공적이었는데, 2002 월드컵의 마스코트는 과연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고 캐릭터 인형이 있더라도 거의 땡처리 판매 신세였다. 그나마 대회 주관방송사이던 KBS가 월드컵 중계 오프닝, 엔딩, 중간 삽입 징글(전번전/후반전 텔롭 나오는 부분 등)에 꾸준히 써줬을 뿐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의 호돌이나 1993 대전 엑스포 당시 꿈돌이의 사례처럼, 마스코트를 이용한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 제목은 스페릭스. 애니메이션은 TV판과 극장판을 모두 만들었다. TV판은 대회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국내에서도 투니버스와 KBS 2TV를 통하여 방영되었다. 작품 자체는 아동용으로 그냥저냥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는 듯하지만 마스코트 자체가 워낙에 인기가 없었던지라 대중적으로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대회가 끝난 뒤에는 잊혀졌다.
사실 한국에선 진돗개랑 삽살개를 한국 측 마스코트로 정해야 한다고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진도군에선 '진돗개를 2002년 월드컵 마스코트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자체로 마스코트 도안까지 만들어 크게 홍보전을 펼쳤으며. 한국삽살개보존회에서는 '독도 지킴이 삽살개'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월드컵 마스코트 지정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역시 별로 호응은 얻지 못했다.
2024년 7월에 서울월드컵경기장 지하에 이 마스코트가 발견되었다: "Things you find in the bowels of Seoul World Cup Stadium." 2024년의 사람들은 20여년 전 유물을 보고, 디아블로 4편의 영상 '세 명이 오리라(By three they come)' 및 소환사의 협곡에 서식하는 직스, 헤카림, 피즈를 떠올렸다.
2.5. 공인구
월드컵 공인구로는 피버노바가 사용되었다. 열정(Fever)과 신성(Nova, 新星)의 합성어로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닌 제3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전 대회의 공인구가 트리콜로(프랑스어), 탱고(아르헨티나→스페인어) 등으로 1970년 멕시코대회 때 텔스타가 쓰인 이후로 매우 오랜만에 개최국 언어가 아닌 언어가 쓰였다. 자세한 내용은 FIFA 월드컵/공인구 항목 참조.
여러 면에서 과도기적 공(球)이다. 특유의 무늬는 사라진 새로운 디자인의 공이지만, 32조각 구성은 그대로이기 때문.
무게는 약 450g 내외이며, 기존의 축구공과는 다른 화려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이후로 계속 비슷한 디자인에 변주를 줘 오다가 오랜만에 완전히 갈아엎고 새 디자인을 적용한 사례. 한일월드컵이 특정 국가 하나가 아닌 두 국가의 공동개최라는 사정상 무국적인 디자인을 지향했기 때문에 딱히 동아시아적인 색채를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으로, 흰색 바탕에 터빈엔진을 본뜬 황금색 삼각형 바람개비와 붉은색 불꽃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 디자인적인 면에서 상당한 화젯거리였으며 타 대회 공인구와는 다르게 일반인들도 꽤나 관심을 가졌었고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잡지 만화에도 등장하고[25] 당시 10대 학생들이 갖고 놀던 축구공 대부분이 피버노바였을 정도로 인기였으며, 비슷하게 생긴 복제품도 많았다.[26] 이는 현재에도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인 12만원~ 비싸게는 16만원 전후라는 엄청난 고가를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축구공들과는 다른 독특한 탄성을 느낄 수 있는 첨단 축구공이었다. 제작사인 아디다스에서도 이 공의 특징으로 탄력과 탄성을 강조하였다. 돌덩이같던 싸구려 낫소공이나 차던 2002년 월드컵 당시 학생이던 세대에게는 굉장히 물렁함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탄성을 보이는 피버노바에 놀라곤 했던 것이 추억거리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처럼 바람이 빠진 듯 물렁한 공인데 슛을 때리면 잘만 날아다니는 공이라 "혹시 외계인을 갈아넣어 만들었냐?"란 농담도 당시 인터넷에서 간간이 보이기도 했다.
이는 더욱 향상된 특수 기포강화 플라스틱[27]을 사용해서 공이 특히나 가벼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골키퍼들이 뜬 공을 처리할 때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28]
2.6. 경기장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경기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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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대구 | 부산 | 인천 | 울산 | ||
서울월드컵경기장 (63,961명) | 대구월드컵경기장 (68,014명) |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55,982명) | 인천문학경기장 (52,179명) | 울산문수축구경기장 (43,550명) | ||
수원 | 광주 | 전주 | 서귀포 | 대전 | ||
수원월드컵경기장 (43,188명) | 광주월드컵경기장 (42,880명) | 전주월드컵경기장 (42,391명) | 제주월드컵경기장 (42,256명) | 대전월드컵경기장 (40,407명) | ||
오사카 | 미야기 | |||||
요코하마 국제 종합경기장 (72,327명) |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63,000명) | 시즈오카 스타디움 에코파 (50,600명) | 오사카 나가이 스타디움 (50,000명) | 미야기 스타디움 (49,000명) | ||
오이타 | 니가타 | 고베 | 삿포로 | |||
오이타 스포츠공원 종합경기장 (43,000명) | 니가타 스타디움 (42,300명) | 이바라키현립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 (42,000명) | 고베 윙 스타디움 (42,000명) | 삿포로 돔 (42,000명) | ||
◀ 1998 | 2006 ▶ |
역대 월드컵 중 가장 많은 경기장(20개)에서 열린 월드컵이다.
보통의 다른 대회들은 10개 내외의 경기장을 활용했지만, 최초의 공동개최인 데다 한일 양국이 내친김에 축구 인프라를 리셋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 안배라든가 한일 간의 국민감정 등 여러 변수들이 골고루 합쳐진 결과 양국에서 각 10개씩의 경기장을 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별리그 3경기밖에 유치하지 못한 경기장도 제법 있었다.
또한 인프라의 신축에 집중하다 보니, 한국은 유일의 전용구장으로서 대회 유치에 일익을 담당했던 포항 스틸야드가 유치전에서 탈락하는가 하면[29] 일본의 경우에는 도요타 스타디움과 같이 월드컵을 노리고 아예 새로 지은 경기장이 쓰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 20개의 경기장 기록은 3개국 공동개최인 2026 FIFA 월드컵[30]에서도 깨지지 않아서,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장을 활용한 2002년의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이다.
2.6.1. 개최도시 선정 및 주 경기장 문제
본 대회를 전후로 열린 1998년, 2006년 월드컵은 프랑스와 독일인만큼 거의 모든 경기장이 재활용, 리모델링이었다. 하지만 2002년의 경우, 축구 인프라가 열악한 한국에선 유치신청 단계에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재활용하려고 했었다.그러나 잠실이 FIFA 규정에 맞게 개보수하려면 주 경기장 신축비용에 절반인 1천억원정도가 소요되거나 경우에 따라 신축비용을 능가할 가능성이 정부에서 제기됐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드컵조직위를 비롯해 대한축구협회는 서울에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주장했지만 서울시는 신축 돔구장에서 월드컵을 주장해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조직위를 비롯한 축구계는 월드컵 이후에 야구장으로 사용할게 뻔한 뚝섬돔구장을 당연히 반대 할 수밖에 없었고 정부에서는 주 경기장 도시로 인천과 수원을 검토하자 월드컵 개최도시에서 서울이 제외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서울시는 결국 서울에 축구전용구장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98년 1월 재정분담을 어느정도할지 결정까지 됐지만, IMF 외환위기 여파로 경기장 신축에 부정적인 여론이 차츰 표면화되었고, 이는 곧 서울특별시에 축구전용구장을 굳이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서울 전용구장의 대안으로 서울종합운동장 리모델링, 인천문학경기장 증축 축구전용구장화 등등 별의별 안이 나왔지만 결국에는 1998년 5월 6일 김종필 전 총리 서리의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상암동 주경기장 신축안을 확정하였다.[31]잠실 리모델링 안은 상암신축 비용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금액이 나온데다가 FIFA 실사단 평가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아 폐기되었고,[32] 문학경기장의 경우는 "주 경기장이 수도에 없는 게 말이 되느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던 데다가 축구전용 구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은 관중석 수 미달로 주 경기장 후보군에서 제외, 돔 구장 신축 안은 뚝섬 돔 경기장 건으로 안 좋은 야구계의 여론, 그리고 신축 약속을 안 지킨 서울시에 대한 부정적 여론으로 인해 실현될 가능성이 적었다. 다만 대구, 부산, 인천은 각각 전국체전, 아시안게임, 유니버시아드로 건설이 이미 확정된 경기장이었다. 그러나 인천 문학 경기장은 착공이 늦어져서 역설적으로 전국체전에 활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한국의 인프라가 열악해서 생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도 축구인프라는 한국 못지않게(어쩌면 더 심하게) 열악해서 아예 축구인프라를 싹 갈아엎을 심산으로 월드컵을 유치한 것이었다. 다만 일본에서 한국처럼 인프라 신축(특히 수도권 주경기장)을 두고 서울특별시처럼 큰 잡음이 없었던 것은 도쿄가 초장부터 월드컵 유치를 포기한 탓이었다. 1960년대에 지은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은 개조로도 FIFA 기준을 맞출 수 없고[33], 도쿄도 내에 월드컵경기장을 지을 방도도 없었기 때문에 도쿄는 일찌감치 월드컵 대열에서 이탈하고 자연스럽게 요코하마가 월드컵 주경기장 지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34] 만약 도쿄국립경기장이 잠실처럼 FIFA 기준을 맞출 방도가 있었다면 이쪽이야말로 막 버블이 꺼지고 있던 시기라 엄청난 논쟁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이슈가 되었던 곳이 전주시였다. 이 곳은 종합운동장이 수용인원이 3만 명도 안 되는 데다 당시에는 조명시설조차 없었음에도 개조해서 월드컵을 개최하겠다는 만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안이 원체 턱도 없다 보니 결국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신축하게 된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은 실사단 점수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았으나 지역 안배 문제로 포항이 탈락[35]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져가게 되었다.
일본도 그리 좋은 사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기존 구장을 많이 활용한 편. 다만 일본 역시 월드컵 유치 시점에 운영되고 있던 경기장은 오사카 나가이 및 가시마 스타디움 2개뿐이었다. 양국에 10개씩 모두 20개의 구장에서 경기를 진행했다.[36]
2.6.2. 입지 및 교통
기존에 월드컵을 개최한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경우 시가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형 축구전용구장들을 개수하여 개최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한국, 일본 모두 뒤늦게 대도시에 경기장을 신축한 경우가 많은데다 양국 모두 토지 매입 비용이 높은 국가들에 속해 상당수의 경기장들이 도시 외곽에 위치하게 되어 접근성이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 서울특별시와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의 경우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거나(부산광역시) 적어도 시가지 경계 지역의 교통 요지[37]라는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원시, 광주광역시는 당시로서는 시가지 외곽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기존 시가지와 무리없이 교통 연계가 가능했던 정도. 물론 지금은 도시 개발이 진행되어 두 경기장 모두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경기장이 되어버렸다. 문제가 제대로 터진 건 서귀포, 전주시,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의 5개 도시였는데, 이 중 대전광역시와 대구광역시의 경우 대전 1호선, 대구 2호선의 연계 계획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으나, 중간에 터진 IMF 사태 때문에 개통이 월드컵 이후로 미뤄져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게 되었다. 울산광역시, 전주시의 경우 고속도로와 가까이 위치해 선수단이 이동하는 데엔 문제가 없긴 했으나 기존 시가지와 너무 동떨어진 위치에 있다. 서귀포의 경우는 타당성 조사에서도 최하위를 받은 만큼 매우 접근성이 떨어진다.
- 일본: 아무래도 철도교통이 활성화 된 나라고, 당시 기준으로 한국과 인프라 격차가 어마어마한 나라여서 접근성은 나은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경기장 대부분은 비싼 지가로 인해 한국보다도 더한 외곽지역에 있는 점이 컸다. 요코하마같이 신칸센 역과 인접한 극강의 접근성을 갖춘 곳도 있고, 사이타마나 삿포로, 이바라키, 오사카, 시즈오카 등은 철도역 하나씩은 다 달고 있긴 했으나 그 와중에 오이타, 미야기 경기장은 접근성이 떨어진다.
2.6.3. 사후 활용
- 한국: 2002년 월드컵 이후 경기장은 지었으나, 홈 클럽이 없던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는 경기장 활용 목적으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을 비롯해 수천억 원을 들여 지자체에 축구장을 건설한 지역장들은 지자체가 축구단 만들어서 쓰면 되지라는 발상을 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도시 중 연고 팀이 없던 지역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축구단들이 생겨난다.
지역 | 경기장 | 홈팀 | 창단 | 창단 방식 | 비고 |
서울특별시 | 서울월드컵경기장 | FC 서울 | 2004년 | 안양 LG 치타스의 연고 이전. | |
대구광역시 | 대구스타디움 | 대구 FC | 2003년 | 시민 구단 창단. | 2019년 DGB대구은행파크로 이전. |
인천광역시 | 인천문학경기장 | 인천 유나이티드 FC | 2003년 | 시민 구단 창단. | 2012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이전. |
광주광역시 | 광주월드컵경기장 | 광주 상무 | 2003년 | 국군체육부대 소속 축구단. | 2011년 상주로 연고지 이전. |
광주 FC | 2011년 | 시민 구단 창단. | 2020년 광주축구전용구장으로 이전. | ||
제주특별자치도 | 제주월드컵경기장 | 제주 유나이티드 FC | 2006년 | 부천 SK의 연고이전. |
- 축구뿐만 아니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아시안 게임, 인천문학경기장은 전국체전, 대구스타디움은 하계 유니버시아드와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 광주월드컵경기장은 하계 유니버시아드 유치등등 월드컵 후에도 많은 스포츠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축구전용구장들도 모두 프로구단들이 입주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장 활용이 아주 안 된것은 아니지만 애초 목표로 내걸었던 흑자 경영은 주변 개발이 잘 이뤄져 상업시설의 활성화에 성공한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역시 주변지역이 대규모 택지지구 및 공원으로 개발된 광주월드컵경기장 정도를 빼면 사실상 실패한 것에 가깝다. 현재 운영권은 인천문학경기장을 빼면[38] 모두 지자체라, 대부분 지자체 조세수입을 축내고 있다. 그렇다고 기업에 운영권을 넘길 수도 없다. 경기장은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되어서 중과세 대상이 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소유하기보다는 임차하는 게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먹힌다.
- 일본: 대부분의 연고 J리그 구단이 월드컵 경기장과 기존 경기장을 공용하는 형태다. J리그가 복수 홈 경기장을 유지하는 이유 중에는 기존 경기장이 시립 또는 모기업 소유이고 월드컵 경기장이 현립이어서 양측의 이해가 엇갈리는 탓이 크다. 이 때문에 매 경기 3만 명 이상 가볍게 동원하는 우라와조차 2009년까지는 매년 한두 경기쯤은 기존 고마바 스타디움(21,500명 수용)을 사용했다. 반면 미야기나 시즈오카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뜬금없이 박혀있는 입지 탓에, 거꾸로 기존 경기장을 기본으로 연간 1~3경기 정도를 소화하고 있다. 시즈오카는 주빌로 이와타와 시미즈 S펄스의 중간 지점에 있다 보니 이들이 붙는 시즈오카 더비를 유치하다가, 지금은 그조차 없이 원정팬 많이 오는 우라와 경기만 치르고 있다. 미야기는 2011년부터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 경기장 명칭은 월드컵 당시 사용된 명칭.
- 한국의 경우 실질적으로 모든 경기장이 '○○ 월드컵 경기장'으로 통칭되었으나 모두 정식 명칭이었던 건 아니다.
- 일본 경기장들의 법적 정식 명칭은 '또 따로 있다'. 매우 복잡하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정규 애칭'을 기재.
국가 | 도시 | 경기장 | 수용인원 | 전용구장 |
대한민국 | 서울특별시 마포구 | 서울월드컵경기장 | 63,961명 | ○ |
대구광역시 수성구 | 대구월드컵경기장[39] | 68,014명 | × | |
부산광역시 연제구 |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 55,982명 | × | |
인천광역시 남구 | 인천문학경기장[40] | 52,179명 | × |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문수축구경기장 | 43,550명 | ○ |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월드컵경기장[41] | 43,188명 | ○ | |
광주광역시 서구 | 광주월드컵경기장[42] | 42,880명[43] | × |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 전주월드컵경기장 | 42,391명 | ○ | |
제주도 서귀포시 | 제주월드컵경기장[44] | 42,256명[45] | ○ | |
대전광역시 유성구 | 대전월드컵경기장 | 40,407명 | ○ | |
일본 |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코호쿠 구 | 요코하마 국제 종합경기장[46] | 72,327명 | × |
사이타마 현 사이타마 시 미도리 구 |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 63,000명 | ○ | |
시즈오카 현 후쿠로이(袋井) 시 | 시즈오카 스타디움 에코파[47] | 50,600명 | × | |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 구 | 오사카 나가이 스타디움[48] | 50,000명 | × | |
미야기 현 미야기 군 리후(利府) 정 | 미야기 스타디움 | 49,000명 | × | |
오이타 현 오이타 시 | 오이타 스타디움 | 43,000명 | × | |
니가타 현 니가타 시 주오 구 | 니가타 스타디움[49] | 42,300명 | × | |
이바라키 현 카시마 시 | 이바라키현립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 | 42,000명 | ○ | |
효고 현 고베 시 효고 구 | 고베 윙 스타디움[50] | 42,000명[51] | ○ | |
홋카이도 삿포로 시 토요히라 구 | 삿포로 돔 | 42,000명 | △[52] |
일본의 수도 도쿄가 없는데, 도쿄는 당시 국립경기장의 노후화 및 시설 부족[53]으로 신규 경기장이 필요했기에 재정 및 혼잡 등을 사유로 입후보하지 않았을뿐더러 애초에 유치 신청을 했을 때도 후보로 꼽히지 않았다. 그래도 요코하마·사이타마·이바라키 경기장은 도쿄 근교 도시들로, 도쿄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모두 신축 경기장임에도 종합 운동장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국제대회 행사 유치와 경기장 활용 등의 이유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종합운동장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3. 유치 과정
한국 유치위원회 로고 | 일본 유치위원회 로고 |
월드컵은 그동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번갈아 가면서 개최됐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다른 대륙에도 개최권을 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난 곳에서 월드컵을 개최할 국력과 축구에 대한 관심과 그에 걸맞은 실력이 있는 국가는 아시아 지역의 한국과 일본밖에 없었다.[54][55] 따라서 2002년 월드컵은 사실상 아시아 쪽의 한일 양국 중 한 곳에서 개최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아시아의 자존심이 되고 싶었던 한국과 아시아 최고를 외쳤던 일본 사이에 치열한 개최 경쟁이 벌어졌다.
양국의 개최 경쟁은 FIFA의 주도권을 둘러싼 유럽과 남미의 경쟁 구도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아프리카 축구계의 갈짓자 행보, FIFA 주도권과 차기 후계구도를 둘러싼 브라질 출신의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과 스웨덴 출신 레나르트 요한손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장의 대립, 전통적으로 남미의 경쟁자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자존심 경쟁 등이 맞물리면서 복잡하게 전개가 되었다. 개최지 선정 투표 권한을 가진 24인의 FIFA 집행위원회는 절반으로 쪼개졌고, 전통적으로 일본과 친밀한 관계였던 브라질이 일본 쪽에 서고 축구 황제 펠레까지 내세워 공개적으로 일본을 지지하자, 경쟁자인 아르헨티나는 펠레의 라이벌이자 앙숙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내세워 자동적으로 한국 편을 들면서 결국 '한국+아르헨티나+UEFA' 對 '일본+브라질+FIFA' 구도가 형성되었다.
1989년 일본이 첫 월드컵 아시아 개최를 목표로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은 1994년에야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하고[56] 1995년에 일본과 함께 FIFA 월드컵 개최 제안서를 제출한다. 제안서를 제출한 국가가 두 나라밖에 없었으므로 유치 경쟁은 굉장히 치열해졌다. 펠레와 브라질이 오랜 우방[57]인 일본이 개최하기를 원하자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는 그저 브라질이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한국 편을 들었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를 내세워 2002년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1995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보카 주니어스 초청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에 출전시켰다. 그 경기는 마라도나가 1994년 미국 월드컵, 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첫 번째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시축을 하고, 마라도나, 그리고 당시 방한한 카를로스 메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기념 촬영을 하였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한국의 허정무에게 맞은 게 있고 이걸 끝까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외의 행보였다.
펠레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출신인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 역시 일본의 단독 개최를 지지하였다. 당시 아벨란제 회장은 아예 한국은 전쟁 위기가 있으니 일본이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매해 휴가를 일본에서 보낸다고 자랑하는 등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우세가 기정 사실이었지만, 월드컵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나라는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부족하다[58]는 한국의 주장이 대두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단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미 4차례나 본선에 진출한 경력이 있었으며(1954, 1986, 1990, 1994) 불과 2년 전에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독일 등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상당한 선전을 펼쳤던 덕분에, '월드컵에 한 번도 못 나가본 나라는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한국의 주장이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도 차츰 먹히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 대세론에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와중에, FIFA 고위 관계자들이 관전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한국이 시종일관 일본을 몰아붙인 끝에 2:1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어 우승컵을 들었고,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미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다. 브라질이 일본에 붙자 이런 브라질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우루과이가 한국에 붙었고, 이에 아르헨티나와 원수지간인 칠레는 일본에 붙었으며, 칠레와 사이가 나쁜 페루·볼리비아는 칠레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에 붙었다.[59] 그러자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와 페루와 적대관계인 에콰도르가 일본에 붙는 등 남미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 한국 지지: 아르헨티나·우루과이·페루·볼리비아
- 일본 지지: 브라질·칠레·파라과이·에콰도르
- 중립: 베네수엘라·콜롬비아
게다가 FIFA의 개혁을 주장하던 레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필두로 유럽 측 FIFA 집행위원들이 아벨란제 회장을 견제하기 위해[61] 한일 공동 개최를 강력히 주장하고 여기에 그동안 부동표였던 아프리카 측 FIFA 집행위원들까지 유럽 측 FIFA 집행위원들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열렬히 한국의 단독 개최를 주장했던 정몽준 또한 FIFA 집행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면 공동 개최에 찬성한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또 한 번 급격히 반전되었다.[62] 게다가 아벨란제의 최측근으로 확고한 일본 지지자인 기예르모 카네도 부회장이 건강 악화로 개최지 결정 투표에 불참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본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때문에 아벨란제 회장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최지 결정 이틀 전에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공동 개최 의향을 타진했는데, 사실 당시 분위기는 표 대결로 가면 일본이 불리했다.[63]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공동 개최를 수용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결정이었고 결국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공동 개최를 수용했다. 물론 한국은 이미 공동 개최를 사실상 승인한 상태였다.
결국 FIFA는 양국의 경쟁 관계를 고려하여, 한쪽이 월드컵을 개최하면 다른 한쪽은 엄청난 좌절감에 빠질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행위원 만장일치로 1996년 5월 31일에 FIFA 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를 선언하였다.[64]
일본 처지에서 단독 개최 실패는 유치단의 전략 판단 실수가 부른 참극이었다. 같은 대륙에 두 후보지가 나오는 실수를 범한 피파와,[65] 일본을 지지한 아벨란제의 삽질, 그리고 그런 아벨란제만을 믿고 유치 전략을 편 일본의 삽질 때문에 한국보다 개최 준비에 앞섰으면서도 결국 공동 개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당시까지 월드컵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는 명분상의 약점도 일본 입장에서 치명적인 비수였다.[66] 그럼에도 일본 역시 공동 개최라도 이룰 수 있었으니 어느 정도 성과는 달성한 셈이었다.
공동 개최안을 수용한 후, 일본은 "단독 개최에는 실패했지만 결승전이라도 우리가 치르겠다"고 주장했고 이에 한국은 추첨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실무 협의 결과, 개막식과 개막전, 본선 조 추첨식, 대회 공식 명칭 우선권을 한국이 가져가고, 지역 예선 조 추첨식, 폐막식과 결승전을 일본이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한국 역시 국민 정서상 대회 공식 명칭이 일한 월드컵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한일 월드컵이라 불리는 대신, 대회의 하이라이트인 결승전을 일본에 넘겨주었다.[67] 덧붙여 본선 조 추첨식과 3·4위전은 한국에서 치르고, 지역예선 추첨식과 IBC(국제방송센터) 기술조정센터는 일본에서 하는 것으로 협의되었다.
그래도 한국 입장에서는 당시 브라질 출신인 FIFA 아벨란제 전 회장의 일본 유치론에 반대하여 한국을 지지한 여러 국가들, 그리고 정몽준 전 회장의 노력 덕분에 공동 타이틀로 한·일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었다.[68] 그리고 2026년에 캐나다·미국·멕시코를 모두 묶은 북중미 월드컵 이전까지 유일한 공동 개회 월드컵으로 남았고 최초로 여러 국가의 공동 주관, 아시아 최초, 21세기 최초의 월드컵이라는 여러 타이틀을 얻었다.
1996년 한일 월드컵의 공동 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 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이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갔다.[69][70]
4. 역대 조직위원장
4.1. 한국 측
4.2. 일본 측
- 나스 쇼 (1997~2003)
5. 본선 진출팀[72]
5.1. 지역예선
자세한 내용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지역예선 문서 참고하십시오.각 지역 별로 예선을 통과한 팀(본선 진출/플레이오프)들은 다음과 같다.
범례 |
개최국 자격 자동 진출팀(●) |
전 대회 우승 팀 자격 자동 진출팀(★) |
대륙 간(유럽 vs 아시아, 남미 vs 오세아니아) 플레이오프를 거친 팀() |
탈락팀(취소선) |
- 남미(4.5장):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 북중미(3장): 코스타리카, 멕시코, 미국
- 아시아(4.5장): 대한민국●, 일본●,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
이란) - 아프리카(5장): 카메룬, 나이지리아, 세네갈, 튀니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 오세아니아(0.5장): (
호주) - 유럽(14.5장): 프랑스★, 러시아, 포르투갈,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크로아티아, 스페인, 이탈리아, 잉글랜드, 슬로베니아, 터키, 벨기에, 독일, (아일랜드)
예선에서 개최국 한국과 일본이 자동진출권이 주어진 가운데 2.5장의 출전권을 두고 경쟁이 펼쳐졌다.[73] 10팀으로 추려진 최종예선에서 각 조 1위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본선에 진출했고, 이란은 UAE를 각조 2위팀간 플레이오프에서 꺾고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갔다.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유럽 지역예선에서는 전 대회 4강 진출국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아일랜드에 밀려 유럽 예선에서 탈락했고, 독일은 홈에서 잉글랜드에 1-5로 털려서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우크라이나를 제치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다만 잉글랜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 지역예선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UEFA 계수를 엄청나게 갉아먹어 톱시드에서 잘려 아르헨티나가 톱시드인 조로 들어갔다. 터키는 플레이오프에서 오스트리아를 대파하고 1954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74] 이후 48년만에, 폴란드는 공산 정권 붕괴 이후 16년만에, 슬로베니아는 루마니아를 꺾고 첫 본선에 성공했다.
데이비드 베컴의 전설적인 프리킥이 나온게 이 한일월드컵 예선에서였다. 앞서 언급한 잉글랜드는 마이클 오언의 해트트릭으로 독일을 홈에서 5-1로 털어, 잔여경기가 독일보다 1경기 더 남아 알바니아를 이기고 골득실로 조1위로 앞선 채 최종전으로 행하였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최종전에서 잉글랜드는 선제골과 역전골 두 번이나 내주면서 크게 부진했는데, 후반전 추가시간에 독일이 홈에서 핀란드 상대로 득점 하나도 못하고[75] 거의 비긴게 확정이던 때에 베컴은 프리킥을 다시 얻는다. 부진한 팀원들을 매우고 여러 번의 프리킥 도전에서 막힌 베컴은 이미 역대급 경기를 보여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프리킥을 성공시키면서, 지난 월드컵에서 바보같이 퇴장당한 역적에서 혼자서 월드컵을 진출시킨 영웅이 되었다.
지난 10여년간과 전통적으로 꾸준히 대회서 내세운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는 이 월드컵부터 진출 실패하게 된다. 루마니아와 노르웨이는 예선에서 톱시드를 받았음에도 각각 이탈리아와 폴란드한테 밀려버렸다.
이 월드컵 기점으로 앞서 몰락한 국가들의 자리를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이 완전히 차지하게 된다. 이때까지 월드컵에 딱 두번만 진출했던 포르투갈은 이후 모든 월드컵 진출에 성공하여, 유럽 내 중위권에서 월드컵 우승후보로도 꼽히게 되는 강호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남미 지역예선에서 아르헨티나가 압도적인 1위를 한 반면, 브라질은 홈에서 7승 2무, 원정에서 2승 1무 6패를 기록해 안방 챔피언 신세로 전락하고 3위로 본선에 올랐다. 특히 꼴찌를 기록한 칠레에 0:3으로 패하기까지 했다. 특히 에콰도르는 브라질을 제치고 지역예선 2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이며 첫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파라과이는 4위로 2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우루과이는 6위 콜롬비아에 골득실에서 1 앞서 5위로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갔다. 지난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던 칠레는 지역예선 꼴찌[76]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참고로 월드컵 역사상 최다 점수 차 경기 및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당 최다 득점자가 이 대회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나왔다. 호주 대 미국령 사모아의 경기로 31-0이라는 기록적인 점수가 나왔으며 호주의 아치 톰슨은 이 경기에서 혼자 13골을 퍼부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는 추첨 결과 아시아 vs 유럽, 남미 vs 오세아니아가 되었다. 호주와 이란은 각각 우루과이와 아일랜드에 1승 1패를 기록했으나 골 득실에 밀려 탈락.[77] 결과적으로 오세아니아는 단 한 팀도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고[78] 아시아와 유럽의 대결 역시 예상대로 끝났다.
5.2. 조 추첨
다시보기(브라질 방송) 유튜브[79]
2001년 12월 1일,[80] 부산 벡스코에서 월드컵 조 추첨행사가 열렸다. 총 13명의 조 추첨자가 선정되었으며, 한국 측 인사로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월드컵 국가대표 홍명보 선수, 바둑기사 조훈현 9단, 산악인 박영석, 배우 송혜교, 국제심판 임은주 등 6명이 선정되었고, 일본에서는 오카노 순이치로 일본축구협회장과 프랑스 월드컵 때 일본 주장으로 활약했던 이하라 마사미 등 2명으로 결정되었다. 나머지 5명의 인원들은 대륙별 안배원칙에 따라 브라질 축구황제 펠레,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카메룬의 로저 밀러, 중국의 여자 축구스타 쑨웬, 프랑스 월드컵 공동위원장을 역임한 미셸 플라티니가 선정되었다.
시드 배정 | ||||
포트 A (톱 시드 / 8팀) | 대한민국(개최국), 일본(개최국), 프랑스(이전 대회 우승팀), 독일, 브라질, 스페인,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 |||
포트 B (유럽 / 11팀[81]) | 덴마크, 러시아, 벨기에, 스웨덴, 슬로베니아, 아일랜드, 잉글랜드, 크로아티아, 터키, 포르투갈, 폴란드 | |||
포트 C (아시아, 남미 / 5팀) |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에콰도르, 우루과이, 파라과이 | |||
포트 D (아프리카, 북중미카리브 / 8팀) |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세네갈, 카메룬, 튀니지, 멕시코, 미국, 코스타리카 |
한편 A조와 C조의 2라운드 진출 팀은 일본에서 F조와 H조의 2라운드 진출 팀과 토너먼트를 치르게 되고, E조와 G조의 2라운드 진출 팀은 한국에서 B조와 D조의 2라운드 진출 팀과 토너먼트를 치르게 된다.
구분 | 조별 리그 | 결선 토너먼트 (3·4위전 및 결승전 제외) |
A조, C조 | 한국에 배정 | 일본으로 이동 |
B조, D조* | 한국에 잔류 | |
E조, G조 | 일본에 배정 | 한국으로 이동 |
F조, H조* | 일본에 잔류 |
대한민국 경기 | ||||
A조 * | 프랑스 | 세네갈 | 우루과이 | 덴마크 |
B조 | 스페인 | 슬로베니아 | 파라과이 | 남아프리카공화국 |
C조 * | 브라질 | 터키 | 중국 | 코스타리카 |
D조 | 대한민국 | 폴란드 | 미국 | 포르투갈 |
일본 경기 | ||||
E조 * | 독일 | 사우디아라비아 | 아일랜드 | 카메룬 |
F조 | 아르헨티나 | 나이지리아 | 잉글랜드 | 스웨덴 |
G조 * | 이탈리아 | 에콰도르 | 크로아티아 | 멕시코 |
H조 | 일본 | 벨기에 | 러시아 | 튀니지 |
대진표 결과를 보면 조별리그의 아르헨티나-잉글랜드, 이탈리아-크로아티아[82], 잉글랜드-스웨덴 전과 8강전의 잉글랜드-브라질, 그리고 결승전의 독일-브라질 등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빅매치는 대부분 일본에서 열리게 되었다.
한편, 중국은 조 추첨 전에 조별 리그를 한국에서 치를 수 있도록 FIFA 측에 요청했다. 중국 본토에서 가까워 흥행에 유리한 점과, 중일관계 등을 고려해 중국은 C조에 배치되는 것으로 미리 결정을 하고, 조추첨을 시행했다. 그로 인해 또 다른 아시아 대륙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같은 국가에서 조별예선을 치를 수 없도록 합의가 되었으며 브라질이 한국, 아르헨티나가 일본에서 조별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조 추첨 결과 F조가 이번 대회 최악의 죽음의 조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A조가 다른 의미로 죽음의 조가 되어버렸다.
한편 한국 추첨자 선정에서 한국 축구의 전설로 불리는 차범근이 제외[83]되고, 축구와 관련이 없는 비축구 스포츠계 인사들이 채워지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으며, 특히 스포츠 분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배우 송혜교가 선정된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상당했다.[84] 차범근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경기 진행 도중 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되는 등 오랫동안 대한축구협회와 마찰을 빚은 전력 때문에 더욱 그랬다. 행사에는 재미교포 출신 가수 유승준이 그 당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소개되어 축하공연을 했다.[85] 행사의 남자 MC도 재미교포인 릭 윤이 맡았다.
6. 참가 선수 명단
자세한 내용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참가팀 정보 문서 참고하십시오.7. 대회 진행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6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75deg, #eda702, #073E90, #EC2720, #32a847)"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7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181818" | <colcolor=#fff> 조별리그 | A조 | B조 | C조 | D조 | E조 | F조 | G조 | H조 |
대한민국 경기 (D조) 폴란드전 (1차전) · 미국전 (2차전) · 포르투갈전 (3차전) | |||||||||
주요 경기 프랑스 vs 세네갈 (A조) | |||||||||
결선 토너먼트 | 16강 | 8강 | 준결승, 3PO | 결승 | |||||
대한민국 경기 이탈리아전 (16강) · 스페인전 (8강) · 독일전 (준결승) · 터키전 (3위 결정전) | |||||||||
대회 이후 | 결산 (대한민국 · 프랑스) | }}}}}}}}}}}} |
7.1. 개막식 & 폐막식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막식의 에밀레종 |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는 초박형 LCD 모니터로 에밀레종을 재현하거나[86] 차세대 통신기기 IMT-2000을 든 도우미들이 경기장 지붕에서 레펠을 타고 내려오는 등 각종 이벤트로 한국의 디스플레이, IT 기술을 잘 홍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막식 자체는 멋들어졌다는 평이지만 1988 서울 올림픽 개막식때와는 다르게 대중들에게 한국 대표팀의 활약상이 돋보이다보니 상대적으로 묻혔다.[87]
7.2. 조별 리그[32강]
조별 리그 | ||||
<rowcolor=#fff> 조 | 1위 (토너먼트 진출) | 2위 (토너먼트 진출) | 3위 | 4위 |
<colbgcolor=#32a847> A | <colbgcolor=#fbe7b7,#483404><colcolor=#000000,#dddddd> 덴마크 (2승 1무 / 7점) | <colbgcolor=#fbe7b7,#483404><colcolor=#000000,#dddddd> 세네갈 (1승 2무 / 5점) | 우루과이 (2무 1패 / 2점) | 프랑스 (1무 2패 / 1점) |
B | 스페인 (3승 / 9점) | 파라과이 (1승 1무 1패 / 4점) | 남아프리카 공화국 (1승 1무 1패 / 4점) | 슬로베니아 (3패 / 0점) |
C | 브라질 (3승 / 9점) | 터키 (1승 1무 1패 / 4점) | 코스타리카 (1승 1무 1패 / 4점) | 중국 (3패 / 0점) |
D | 대한민국 (2승 1무 / 7점) | 미국 (1승 1무 1패 / 4점) | 포르투갈 (1승 2패 / 3점) | 폴란드 (1승 2패 / 3점) |
E | 독일 (2승 1무 / 7점) | 아일랜드 (1승 2무 / 5점) | 카메룬 (1승 1무 1패 / 4점) | 사우디아라비아 (3패 / 0점) |
F | 스웨덴 (1승 2무 / 5점) | 잉글랜드 (1승 2무 / 5점) | 아르헨티나 (1승 1무 1패 / 4점) | 나이지리아 (1무 2패 / 1점) |
G | 멕시코 (2승 1무 / 7점) | 이탈리아 (1승 1무 1패 / 4점) | 크로아티아 (1승 2패 / 3점) | 에콰도르 (1승 2패 / 3점) |
H | 일본 (2승 1무 / 7점) | 벨기에 (1승 2무 / 5점) | 러시아 (1승 2패 / 3점) | 튀니지 (1무 2패 / 1점) |
7.3. 결선 토너먼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결선 토너먼트 대진표 | |||||
16강 | 8강 | 준결승 | 결승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1경기 (2002.06.15 15:30) | ||||
독일 | 1 | ||||
파라과이 | 0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8강 2경기 (2002.06.21 20:30) | |||
독일 | 1 | ||||
미국 | 0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준결승 1경기 (2002.06.25 20:30) | |||
독일 | 1 | ||||
대한민국 | 0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결승 (2002.06.30 20:00) | |||
독일 | 0 | ||||
브라질 | 2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5경기 (2002.06.17 15:30) | ||||
멕시코 | 0 | ||||
미국 | 2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4경기 (2002.06.16 20:00) | ||||
스페인 | 1 3 | ||||
아일랜드 | 1 2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8강 3경기 (2002.06.22 15:30) | |||
스페인 | 0 3 | ||||
대한민국 | 0 5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8경기 (2002.06.15 20:30) | ||||
대한민국 | 2 | ||||
이탈리아 | 1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2경기 (2002.06.15 20:30) | ||||
덴마크 | 0 | ||||
잉글랜드 | 3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8강 1경기 (2002.06.21 15:30) | |||
잉글랜드 | 1 | ||||
브라질 | 2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준결승 2경기 (2002.06.26 20:30) | |||
브라질 | 1 | ||||
터키 | 0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6경기 (2002.06.17 20:30) | ||||
브라질 | 3 | ||||
벨기에 | 0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3경기 (2002.06.16 15:30) | ||||
스웨덴 | 1 | ||||
세네갈 | 2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8강 4경기 (2002.06.2 20:30) | |||
세네갈 | 0 | ||||
터키 | 1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3·4위전 (2002.06.29 20:00) | |||
대한민국 | 2 | ||||
터키 | 3 | ||||
}}} | |||||
{{{#!wiki style="margin: -12px -5px" | <rowcolor=#fff> 16강 7경기 (2002.06.18 15:30) | ||||
일본 | 0 | ||||
터키 | 1 | ||||
}}} |
7.4. 우승
2002 FIFA 월드컵 우승팀 |
다섯 번째 우승 ★★★★★ |
8. 최종 순위
<rowcolor=#373a3c,#ddd>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브라질 | 7 | 7 | 0 | 0 | 18 | 4 | +14 | 21 | 우승 | |
독일 | 7 | 5 | 1 | 1 | 14 | 3 | +11 | 16 | 준우승 | |
터키 | 7 | 4 | 1 | 2 | 10 | 6 | +4 | 13 | 3위 | |
4 | 대한민국 | 7 | 3 | 2 | 2 | 8 | 6 | +2 | 11 | 4위 |
5 | 스페인 | 5 | 3 | 2 | 0 | 10 | 5 | +5 | 11 | 8강 |
6 | 잉글랜드 | 5 | 2 | 2 | 1 | 6 | 3 | +3 | 8 | |
7 | 세네갈 | 5 | 2 | 2 | 1 | 7 | 6 | +1 | 8 | |
8 | 미국 | 5 | 2 | 1 | 2 | 7 | 7 | 0 | 7 | |
9 | 일본 | 4 | 2 | 1 | 1 | 5 | 3 | +2 | 7 | 16강 |
10 | 덴마크 | 4 | 2 | 1 | 1 | 5 | 5 | 0 | 7 | |
11 | 멕시코 | 4 | 2 | 1 | 1 | 4 | 4 | 0 | 7 | |
12 | 아일랜드 | 4 | 1 | 3 | 0 | 6 | 3 | +3 | 6 | |
13 | 스웨덴 | 4 | 1 | 2 | 1 | 5 | 5 | 0 | 5 | |
14 | 벨기에 | 4 | 1 | 2 | 1 | 6 | 7 | -1 | 5 | |
15 | 이탈리아 | 4 | 1 | 1 | 2 | 5 | 5 | 0 | 4 | |
16 | 파라과이 | 4 | 1 | 1 | 2 | 6 | 7 | -1 | 4 | |
17 | 남아프리카 공화국 | 3 | 1 | 1 | 1 | 5 | 5 | 0 | 4 | 조별리그 |
18 | 아르헨티나 | 3 | 1 | 1 | 1 | 2 | 2 | 0 | 4 | |
19 | 코스타리카 | 3 | 1 | 1 | 1 | 5 | 6 | -1 | 4 | |
20 | 카메룬 | 3 | 1 | 1 | 1 | 2 | 3 | -1 | 4 | |
21 | 포르투갈 | 3 | 1 | 0 | 2 | 6 | 4 | +2 | 3 | |
22 | 러시아 | 3 | 1 | 0 | 2 | 4 | 4 | 0 | 3 | |
23 | 크로아티아 | 3 | 1 | 0 | 2 | 2 | 3 | -1 | 3 | |
24 | 에콰도르 | 3 | 1 | 0 | 2 | 2 | 4 | -2 | 3 | |
25 | 폴란드 | 3 | 1 | 0 | 2 | 3 | 7 | -4 | 3 | |
26 | 우루과이 | 3 | 0 | 2 | 1 | 4 | 5 | -1 | 2 | |
27 | 나이지리아 | 3 | 0 | 1 | 2 | 1 | 3 | -2 | 1 | |
28 | 프랑스 | 3 | 0 | 1 | 2 | 0 | 3 | -3 | 1 | |
29 | 튀니지 | 3 | 0 | 1 | 2 | 1 | 5 | -4 | 1 | |
30 | 슬로베니아 | 3 | 0 | 0 | 3 | 2 | 7 | -5 | 0 | |
31 | 중국 | 3 | 0 | 0 | 3 | 0 | 9 | -9 | 0 | |
32 | 사우디아라비아 | 3 | 0 | 0 | 3 | 0 | 12 | -12 | 0 |
9. 수상
- 최우수 심판 -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 페어플레이상 - 벨기에
- 최고의 인기팀 - 대한민국
9.1. 올스타팀
2002 FIFA 월드컵 올스타팀 | |||
GK | DF | MF | FW |
올리버 칸 뤼슈튀 레츠베르 | 페르난도 이에로 호베르투 카를루스 솔 캠벨 홍명보 알파이 외질란 | 히바우두 미하엘 발락 호나우지뉴 유상철 클라우디오 레이나 | 엘 하지 디우프 호나우두 미로슬라프 클로제 하산 사슈 |
Reserve | |||
이케르 카시야스 카푸 디트마어 하만 호아킨 나카타 히데토시 랜던 도노반 마르크 빌모츠 |
10. 기록실
- 가린샤 클럽 신규 가입
- 살리프 디야오(SEN): 덴마크전에서 동점골을 뽑은 이후 상대 선수를 걷어차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했다.
- 호나우지뉴(BRA): 잉글랜드전에서 공을 잡다가 공에 미끄러져서 상대 선수의 발목을 밟고 퇴장당했다.
- 최고령 선수: 얀 헤인체(덴마크), 38세
- 최연소 선수: 페미 오파분미(나이지리아), 17세
11. 팀별 리뷰
자세한 내용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팀별 리뷰 문서 참고하십시오.12. 한국 측 중계
월드컵을 앞두고 방송 3사 축구 해설자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먼저 SBS가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문선 MBC 해설위원을 영입하면서 그 전에 SBS로 넘어온 송재익 캐스터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게 되었고, 신문선이라는 필승카드를 놓친 MBC는 이에 질세라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지낸 차범근을 해설위원으로 영입했다. 여기에 KBS도 당시 종영한지 얼마 안된 태조 왕건으로 유명세를 날렸던 최수종을 객원 해설위원으로 불렀고 월드컵 경험이 있는 여러 현역 선수들도 객원 해설로 불렀으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부임한 이용수 해설위원을 대신해서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을 메인 해설위원으로 위촉했다.시청률 결과, 개막전에서는 1TV를 통해 중계한 KBS가 23.7%으로 1위에 올랐고, MBC가 20%로 2위, SBS가 10%로 역시나 꼴찌를 차지했다관련기사. 9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월드컵 개막전 시청률 1위를 장식했던 MBC가 1위자리를 내준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송재익-신문선 콤비로 2위 수성에 도전했던 SBS는 개막전 부터 시청률 꼴찌를 기록하면서 씻을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하지만 축구 국가대표팀이 조별 예선에서 D조 1위로 올라서며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였고, 이탈리아와의 16강부터 시청률 패권이 묘하게 흘러갔다. 차범근 효과와 이경규가 간다 버프를 받은 MBC가 1위를 기록했고, 이렇다 할 화제를 만들지 못하고 만년 꼴찌에만 머물러 있었던 SBS가 송재익-신문선 콤비 영입을 통해 수 많은 명언과 화제거리를 만들면서 단숨에 2위에 올라선다. 반면 개막전 시청률 1위로 기분좋게 시작했던 KBS의 시청률은 오히려 막바지에 갈수록 최하위로 떨어졌다. 해설위원과 캐스터의 평가는 타사보다 우월했으나, 뒤죽박죽한 편성이 발목을 잡은 것. 당시 KBS의 월드컵 편성은 개막전, 저녁 시간대의 대륙별 경기, 폐막식은 1TV[91]에서 오후 시간대의 대륙별 경기와 한국 국가대표팀 출전 경기를 2TV에서만 방송하기로 했었는데, 한국이 16강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외동포들이 1TV에서도 한국 경기를 편성해 달라는 민원이 인터넷 홈페이지와 시청자 상담실에 빗발치자, 편성국에서 16강부터 1,2TV 동시편성으로 편성정책을 바꿔 버리게 되었고 사실상 광고방송이 없는 1TV에 시청자들이 몰리게 되면서, 2TV 시청률이 사실상 한자리수대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관련 기사 1TV에서 편성을 취소하자니 해외 시청자들의 민원이 급증할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2TV에서 편성을 취소하자니 광고 해약에 따른 위약금 부과라는 광고 수익 저조의 후폭풍이 동시에 몰아 닥치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기에 편성국에서 뼈아픈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청률 지상주의와 성과 지상주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면서 공영방송의 본분을 망각한 전파낭비라는 신문사들의 매서운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KBS 스포츠국장은 시청률 참사의 책임으로 대회 이후 경질당했다.[92]
KBS와 MBC는 라디오 캐스터를 따로 두었는데 최고참급 캐스터가 투입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로급인데 KBS의 이명용과 이천규 캐스터, MBC의 임택근 캐스터는 고인이 되었다.
12.1. KBS
- TV 메인 캐스터: 서기철, 전인석, 최승돈, 이재후
- TV 스튜디오 MC: 장웅, 김동우, 박현우, 조건진
- 라디오 캐스터: 이명용, 이천규, 김윤한
- 해설위원: 허정무, 이상철, 이강석, 최경식, 채희영, 홍이삭, 고종수, 최수종, 이임생, 서정원
12.2. MBC
- TV 캐스터: 임주완[93], 최창섭[94], 송인득, 김창옥, 김성주[95], 임경진, 김상호, 박경추
- 라디오 캐스터: 임택근, 이광재
- 해설위원: 차범근, 김주성, 서형욱, 임태성, 조민국, 강석[96]
12.3. SBS
- 슬로건: 16강 코리아! 월드컵은 SBS
- 캐스터: 송재익, 한종희, 김정일, 손석기, 박상도, 서기원[HD], 박기만[HD], 박영웅[HD]
- 해설위원: 신문선, 강신우, 곽성호, 김성남, 정종덕[HD], 신우식[HD], 오일영[HD], 박철[103]
13. 흥행
월드컵 수익금은 18억 달러(약 2조 1,600억 원)로 TV 중계권료가 10억 8,000만 달러(약 1조 2,960억 원)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후원업체로부터 들어오는 돈도 3억 달러(약 3,600억 원)나 된다.그러나 FIFA가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것과 달리 공동개최국인 한일 양국의 흥행은 기대에 못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원인은 공동개최를 하다 보니 경기장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10개 경기장을 신축하는 데 2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 하필 한국, 일본이 공동 개최하여 양국 간의 경쟁 의식이 과열된 영향이 컸다. 통상적으로 월드컵을 위해 10개 안팎의 경기장이 사용되는 데 반해 2002 월드컵 때는 양국이 5개 정도가 아닌 각각 10개의 경기장을 개축/신축했다. 이는 원래 단독 개최를 상정하고 경기장 신축 계획을 잡았던 것인데, 공동 개최 결정 후에도 계획을 백지화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104]
또한 축구 열기가 높은 유럽과 남미에서 오기에는 너무 멀어서 관광객도 예상에 못 미쳤다. 한국 쪽에서 열린 경기는 비인기팀 경기의 경우, 경기장 관중석이 많이 비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본 역시 관중이 대량으로 비는 일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입장권 대행 업체인 '바이롬'의 각종 잘못이 원인이었다. 이런 공석 사태가 발생한 뒤 FIFA는 마지 못해 대회 이후 잘못을 인정했다.[105]
길거리 응원 문화가 확실히 자리잡았다. 한국의 월드컵 4위라는 호성적을 등에 업고 전국에서 이뤄진 거리 응원을 FIFA 측에서는 매우 감명깊게 관찰했고, 2006년 대회부터는 아예 FIFA에서 팬 페스트(FAN FEST)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거리 응원 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14. 대회 이후
2000년대 초반 들어 J리그에 스타 선수들을 빼앗기며 침체기에 들어서는 듯했던 K리그는 월드컵 이후 축구 붐에 힘입어 약 10년 간 평균 관중이 증가하였다. K리그는 2002년 당시 10개 구단 단일리그로 운영됐으나, 그 후로 21년이 지난 2023년 현재 K리그1 12팀과 K리그2 13팀 총 25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리그가 두 배 반으로 확장됐다.10개 지역의 월드컵 경기장은 대회 종료 당시 부산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수원시, 전주시 등 5개 경기장만 K리그 기존 구단의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서울특별시와 제주특별자치도에는 대회 종료 당시만 해도 원래 연고구단이 없었으나 각각 LG 축구단과 SK 축구단이 서울특별시와 제주특별자치도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사용자를 찾았다. 인천광역시,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는 프로축구단을 새로 만들면서 월드컵 경기장 사후 활용에 최대한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커다란 월드컵 경기장의 관중석을 모두 채우기에는 K리그의 인기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탓에[106]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는 결국 월드컵 경기장 사용을 포기하고 리그 규모에 맞는 운동장으로 이사 갔다. 더구나 홈구단을 입주시킨 경기장도 상황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어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빼면 모두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107]
히딩크 전 감독에 대한 자서전, 일대기 등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점령하였으며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대선 후보까지 오르게 된다.[108]
4강 진출이라는 성적은 한국 축구에게 세계의 벽은 여전히 높은 것을 잊게 할 정도로 너무 큰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109] 특히 2002년 월드컵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곧 잦은 감독 교체로 이어졌다. 일례로 히딩크 퇴임 이후 월드컵 본선에서 대표팀을 지휘한 감독 5명 중 무려 3명이[110] 본선 출전 1년 전에 지휘봉을 잡았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때는 예선부터 본선까지 국가대표팀 감독을 3번이나 바꿨고 결국 딕 아드보카트 전 감독을 선임해서 대회를 치러 32강 본선 조별리그 1승 1무 1패로 월드컵 17위로 원정 첫 승과 최다 승점(4점)을 달성했지만, 16강 진출은 실패했다.[111] 또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한국 대표팀을 원정에서 사상 최초로 2라운드(16강) 진출시키며, 월드컵 15위를 기록한 허정무 전 감독도 비판받았다. 또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1무 2패 월드컵 27위로 16강 실패한 홍명보 감독도 사실 대회를 1년도 남겨두지 않았을 때 팀을 맡았다. 아울러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1승 2패 월드컵 19위로 대회를 마친 신태용 감독 역시 본선 개막 1년 전에 부랴부랴 지휘봉을 맡겼다.
당시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박지성, 이영표, 차두리 등이 유럽 무대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는 현재도 많은 한국 선수들이 유럽 주요 리그에서 활약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한국 대표팀은 미래를 위해 유망한 청소년 선수 4명을 훈련 파트너로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정조국, 여효진,
이 대회를 끝으로 월드컵에서는 연장전 골든골 제도가 더 이상 시행되지 않는다.[112] 골든골 제도는 연장 중에 한 팀이 골을 넣으면 바로 그 팀을 승자로 처리하여 바로 경기가 종료되는 방식이다. 이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이후의 대회에서는 연장에 돌입할 경우 무조건 연장 후반까지 경기를 끝마쳐야 한다.
2009년 열린 FIFA 총회에서 FIFA는 더 이상의 공동개최는 없다는 선언을 내었다. 하지만 이 선언은 2018년 월드컵 개최에서 폐기되어 벨기에-네덜란드[113], 포르투갈-스페인이 공동개최를 추진하였다. 투표 결과 둘 다 러시아에 밀려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후 2026년 월드컵 때 48개국으로 본선 진출 국가가 늘어나면서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 공동개최로 결정되어 "최초"지만 "최후"의 공동개최 타이틀은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2030년 월드컵에서도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가 공동개최를 하기로 했으니 공동개최는 앞으로도 명맥을 이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2002년 월드컵은 피파에서 "개별개최로 신청된 나라를 임의로 묶어서 공동개최로 만들어버린" 것이므로 처음부터 공동개최로 신청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기는 하다. 한마디로 월드컵 개최 유치전에서 무승부가 난 유일한 월드컵인 것이다.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페루자 칼초 소속으로 활약했던 안정환은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넣었단 이유로 소속팀에서 어이없게 방출당해 부침을 겪게 된다.[114] 남아공 월드컵 조추첨 직전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한국과 재대결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주로 일본과 중국 쪽에서 한국 대표팀의 도핑이나 심판매수 의혹 등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2020년 울산 현대가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비셀 고베를 이겼을 때의 비디오판독을 두고 '또 2002 때처럼 심판매수를 했니 어쩌니' 하는 지경. 그리고 중국 웹은... 축구 얘기(특히 손흥민 관련 기사)만 나왔다 하면 "2002년의 암흑 월드컵" 어쩌고 하며 한국을 근거 없이 폄하하는 데 여념이 없다.[115]
10년 후인 2012년 한국에서는 2002년 월드컵 10주년을 맞이하여 K리그 올스타전을 2002년 당시의 대표팀과 2012년 현재의 K리그 올스타와의 경기로 꾸몄다. 이후 6년 후인 2018년에도 개막한 지 16년째가 되던 날 2002년 당시 멤버들과 고등학교에 입학한 '월드컵둥이'들과 개막식이 열렸던 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에서 풋살 경기를 벌였다. #
이 대회에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실제로는 그라운드에 얼마 서있지도 못한 카카는 브라질이 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덕에 겨우 20분 정도만 뛰고 월드컵 우승 멤버가 되었다.[116]
이경규가 간다가 2002 월드컵 특집방송으로 부활하여 좋은 반응을 얻자 이후 한국 지상파 방송 3사는 다음 대회인 독일 월드컵부터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의 월드컵 특집과 더불어 월드컵 특집예능을 방영하는 등 월드컵 시즌에 맞춰서 특집방송을 경쟁적으로 편성하게 되었다.
이 대회 본선 16강전~4강전에서 한국과 대결한 나라들이 훗날 개최된 2006년부터 2014년까지의 월드컵에서 공교롭게도 대결한 순서대로 모두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117] 16강전 상대 이탈리아는 다음번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8강전에서 한국과 대결한 스페인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상 첫 우승을 달성했으며, 4강전에서 한국과 대결한 독일 또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118] 그리고 이 대회에서 한국에 패배를 안겨줬던 독일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한국에게 0:2로 져서 되로 준 거 말로 받은 꼴이 되었다. 게다가 역시 공교롭게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세 팀 모두 차례대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직후의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3위·4위전 당시 만났던 터키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지역 예선에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이 법칙은 깨지고 말았다.
15. 대회 공식 스폰서십
15.1. FIFA 월드컵 스폰서
- 어바이어: 미국의 통신회사
- 아디다스: 독일의 스포츠용품 제조회사로 월드컵 공인구 제공
- 버드와이저: 미국의 맥주 제조회사
- 코카콜라: 미국의 음료 제조회사. 월드컵 뿐만 아니라 올림픽도 후원하고 있다.
- 후지 제록스: 일본 후지필름과 미국 제록스의 합작.
- 후지필름: 일본의 광학기기 및 필름 제조회사
- 현대자동차: 한국의 자동차 제조회사
- 질레트: 미국의 면도기 및 면도용품 제조회사
- JVC: 일본의 오디오 및 가전제품 제조회사
- 마스터카드: 미국의 신용카드 및 금융회사
- 맥도날드: 미국의 패스트푸드 회사
- 필립스: 네덜란드의 가전제품, 의료기기 제조회사
- 도시바: 일본의 전자제품 및 반도체 제조회사
- 야후!: 미국의 포털사이트
- 듀라셀: 미국의 건전지 제조회사[119]
15.2. 한국 측 스폰서
15.3. 일본 측 스폰서
16. 군악대 / 취타대 행사 참여
개최국 팀 경기에서 개최국 군대가 행사를 지원한 최초의 월드컵이다.한국의 경기에서는 국방부와 군부대에서 행사 지원을 해 주었다. 한국이 출전하는 경기에서 대한민국 국방부 취타대가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 근처 군부대의 군악대가 국가 연주에 참여하였으며 소속 부대가 경계지원을 해 주었다.
또한 상대국 국가와 한국 애국가는 군악대의 군악 반주를 통한 한국 성악가와 상대국 가수 독창으로 라이브로 국가가 불러졌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터키전에서는 남성 가수(테너)가 불렀고, 미국전은 한국인이 독창했으며, 스페인전은 가수 초청이나 군악 반주가 없었다. 그 외의 나머지 상대국 가수는 상대국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가 초청되어 국가를 독창했다.
그 어떤 나라의 경기에서도 월드컵 본선에서 자국 군대가 국가 연주에 참여한 적은 없었으며 따라서 한국이 최초이다. 이는 정몽준 공동위원장의 제안으로 경기 전에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자는 취지였으며 FIFA의 승인을 받았다. 사실 모든 출전국을 라이브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우선 각 출전국이나 대회 조직위원회는 국가를 노래할 가수를 선정 및 초청해야 하고, 출전 국가의 악보를 모두 입수해야 하며 FIFA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일본 월드컵 축구 조직위원회는 반대의사를 피력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열리는 한국 경기에서만 성악가와 상대국 가수를 초청하여 라이브로 국가를 연주하기로 결정되었다. 방송으로 관현악 버전으로 애국가가 연주된 스페인전을 제외하고 경기 전에 양 국 국가 연주 시에 상대국 국가와 한국 애국가가 군악대의 취주악 판으로 연주되었다. 한국 군악대가 연주한 해외 국가는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튀르키예 국가로 스페인과 한국인이 열창한 미국 국가를 제외하고 상대국의 국가로 주로 한국에서 친숙하거나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가수들이 초청되어 한국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상대국 국가를 제창했다. 스페인전에서 군악대가 오지 않은 이유는 스페인 국가가 가사가 없어서 가수가 올 필요가 없고, 한국의 애국가를 노래하기 위해서만 가수가 초청되는 것도 형평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인전에서는 유일하게 군악대가 안오고 애국가도 스페인과의 형평성에 맞춰서 관현악 판으로 방송을 통해서 틀어 줬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더 한국이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다면 2002년에 이어 28년만에 자국팀 한국의 경기는 대한민국 국방부 협조로 취타대와 근처 군부대 군악대가 국가 연주 행사 지원을 할 가능성이 높고 상대국 가수들이 초청될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팀의 경우에도 최초로 주한미군 군악대가 초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는 한국과 미국 경기는 한국군 지휘자의 지휘로 한국군 군악대와 주한미군 군악대의 합동 군악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팀 경기전 국가 연주 군악대 및 가수 목록 | |||||
상대국 | 경기장 | 군악대 | 상대팀 가수 | 한국 가수 | |
대구 스타디움 | 제 2군 본부사령실 군악대 | 타르칸[121] | 테너 심송학 (경북대학교 교수) | ||
서울 월드컵 경기장 |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 | 안나 마리아 칸프만 (카우프만)[122] | 바리톤 최현수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 ||
광주 월드컵 경기장 | 군악대 행사 미참여. 가수 없음. | ||||
대전 월드컵 경기장 | 국방부 군악대[123] | 엘레나 보넬리[124] | 테너 김영석 (충남대학교 교수) | ||
인천 문학 경기장 | 17사단 군악대 | 마리자 두스 헤이스 누느스[125] | 테너 장원상 (경성대학교 교수) | ||
대구 스타디움 | 제 2군 본부사령실 군악대 | 소프라노 정경주[126] | 테너심송학 (경북대학교 교수) | ||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 53사단 군악대(육군) 해군 군악대 | 에디타 구르니아크[127] | 테너 조영수[128] (부산대학교 교수) |
17. 기타
17.1. 경기 내적인 부분
- 최초로 골대 골망에 사각 골망이 아닌 육각 골망을 사용한 월드컵 대회였으며 이후 201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월드컵에서는 육각 골망을 쓰고 있다.
- 대회 시작으로부터 6개월 전인 2001년 11월 30일에 디펜딩 챔피언의 차기대회 본선 자동 진출권 폐지가 결정되었다.[129] 그래서 이 대회의 우승국인 브라질도 2006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해야 했다.
- 서드 골키퍼가 규정화되면서 팀 엔트리의 등록선수가 22명에서 23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당연히 23번 등번호를 다는 게 가능했다.[130]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이 등번호의 주인공은 대전 시티즌의 레전드 골키퍼인 최은성이었다.[131]
- 특이점으로는 지역예선에서 못했던 팀들이 본선에서는 선전하고 되려 지역 예선이 잘했던 팀들이 부진했다. 지역예선에서 칠레[132]나 베네수엘라 상대로조차 고전하며 지역예선 탈락을 걱정한 끝에, 그나마도 에콰도르한테 밀려 3위로 올라온 브라질이 우승했다.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에 1-5라는 전설적인 점수로 대패를 당하고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우크라이나를 힘겹게 이긴 끝에 올라온 독일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스웨덴에 밀려 플레이오프까지 간 끝에 오스트리아를 이긴 터키도 3위를 하는 대이변을 만들었다. 반면 네덜란드를 떨어뜨리고 조 1위 본선 직행의 위업을 달성했던 포르투갈은 미국과 한국에게 연달아 깨지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브라질을 제치고 2위로 본선에 오른 에콰도르 역시 멕시코와 이탈리아의 맛집으로 전락해버리고 탈락했다.[133] 이탈리아 역시 조별리그에서 부진한 끝에 겨우 16강에 올랐지만 한국에 1:2로 역전패했다. 남미 1위의 압도적 화력을 보여준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의 오웬이 픽 쓰러지며 얻어낸 페널티킥으로 실점해서 얻게 된 1패가 원인이 되어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유럽 예선을 1위로 통과한 나라들 중 스페인과 잉글랜드만 살아남아 8강에 진출했지만, 각각 한국과 브라질에 패배했다. 결국 4강에서 대륙별 지역 예선 1위 팀이 모두 전멸했다.
- 유난히 본선 무승, 본선 전패 팀이 7팀씩이나 나왔다. 그 중에서도 본선 무승 전패 팀이 3개국[134]이나 나오는 진기록이 펼쳐졌는데, 이 중 슬로베니아만 유일하게 2득점이 있으며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예 0득점을 기록해 각각 뒤에서 2, 1위를 기록했다.
- 스웨덴 대 세네갈의 16강전, 한국 대 이탈리아의 16강전, 터키 대 세네갈의 8강전은 골든 골로 승부가 갈렸다. 세네갈은 스웨덴에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막판에 동점골을 성공시킨 데 이어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성공시킴으로써 8강에 올랐으나, 8강전에서는 터키에 골든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승전을 제외하고 2라운드 최대의 빅 매치[135]였던 브라질 대 잉글랜드 전에서 브라질은 잉글랜드의 오언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지만[136],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가 잇달아 골을 성공시키면서 2:1로 역전승을 거두었는데 특히 호나우지뉴가 직접 프리킥으로 작렬시킨 역전골은 이 대회 베스트 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이 당시 한국 대표팀 멤버들 중 가장 오랫동안 현역 선수로 뛴 선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월드컵 당시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던 현영민이었으며 현영민은 2017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해외 축구를 접하기 어려웠던 이때 당시에는 한국의 경기장이 만석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프랑스처럼 강팀의 경기라도 최소 3,000석씩 빈 좌석이 생겨 학생들과 공무원들을 동원해 메워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해외 축구를 쉽게 접할 수 있고 인기가 매우 높아진 요즘 시대에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린다면 당연히 사태가 다를 것이며, 인기팀의 경우 수강신청처럼 티켓 구입 경쟁률이 치열할 것이다.[137][138]
당시 프랑스 - 세네갈 개막전에 공석이 생긴 것은 티켓 판매 대행사, `바이롬(Byrom)`의 기술적 오류로 빚어진 일이었다. 월드컵-무능력이 부른 `입장권 파동`
그리고 한국에서 열린 외국팀의 경기에 관중이 별로 없던 점은, 티켓 가격이나 인구, 항공편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공동 개최였기 때문에 한국-일본 양국의 물가 차이를 고려하여, 티켓 가격을 별도 책정하지 않고, 동일하게 책정하였다. 따라서 한국 물가 수준에서는 비싸게, 일본 물가 수준에서는 다소 저렴하게 책정되었다. 당시 1인당 GDP는 일본이 한국의 3배 정도일 정도로 양국의 물가와 구매력 차이는 매우 컸다.[139] 그리고 일본은 인구가 1억이 넘어서 한국보다 관중 동원에 유리했고, 대륙간 항공 교통편도 훨씬 많아서, 외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쉽게 방문할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국내 문화가 외국팀의 경기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아서, 한국 경기를 제외하고, 외국팀끼리의 대결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현재에도 크긴 하다. 한국에서 이후에 FIFA U-17 월드컵, FIFA U-20 월드컵이 치러졌는데, 흥행에 참패했기 때문이다.
- 이 당시 브라질과 잉글랜드는 일본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를 만난 아르헨티나와 덴마크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예상 외로 엄청난 고전을 해야만 했으며 결국 브라질과 잉글랜드는 둘이 8강에서 만났는데 일본의 응원 버프가 빠진 잉글랜드는 아르헨티나나 덴마크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브라질에게 역전패했다. 브라질은 잉글랜드를 이긴 이후에도 일본 팬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결승전에서 독일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 한 국가에서 벗어나지 않은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142]
- 한국: 프랑스, 우루과이, 한국, 미국, 스페인, 남아공, 슬로베니아, 파라과이, 중국, 코스타리카, 포르투갈, 폴란드
- 일본: 잉글랜드, 카메룬,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스웨덴, 크로아티아, 에콰도르, 일본, 러시아, 튀니지, 벨기에
- 덴마크는 한국에서는 프랑스가 속한 조에서 2승 1무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으나, 일본에서는 잉글랜드에 0:3으로 완패를 당했다.
- 멕시코는 일본에서는 이탈리아가 속한 G조에서 2승 1무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으나, 한국에서는 여태것 한 수 아래로 여기던 미국에 0:2로 패배했다.
- 조별리그를 한국에서 치르고 토너먼트를 일본에서 치른 팀들은 덴마크를 제외하고 모두 8강이상에 진출하였고, 반면 일본에서 조별리그를 치르고 토너먼트를 한국에서 치른 팀들은 결승에 진출한 독일을 제외하고 8강 진출에 실패했다.
- 일본에서는 승부차기가 단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 승부차기가 처음으로 채택된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를 제외하면[143], 월드컵 개최국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승부차기가 이뤄지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이뤄진 승부차기를 모두 치른 팀이 되었다.
17.2. 경기 외적인 부분
- 정몽준 부회장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 정주영 회장에게 공동개최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가 한 말은 "몽준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였다고. 일본을 제치고 1988 서울 올림픽을 단독으로 따낸 정주영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을 수 있었다.[144]
- 이 시절 카메룬 대표팀은 무려 민소매 유니폼을 도입했는데, 제프 블라터가 보기 안 좋다고 비판했다. 근데 블라터는 여자 축구 선수 핫팬츠 착용을 주장한 적이 있어서 까였다. 결국 카메룬 대표팀은 민소매 유니폼 안에 반팔 언더웨어를 받쳐 입고 뛰었는데[145], 이렇게 하니 기능성 유니폼의 의미가 없어졌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1승 1무 1패로 탈락했다. 마지막 3차전에서 강호 독일을 넘지 못하고 패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 용품 스폰서과 관련해 D조는 모든 조를 통틀어 나이키가 3팀(한국, 포르투갈, 미국)에 들어갔다. 폴란드만 푸마였다.
- 이때를 기점으로 서포터즈 클럽인 붉은 악마가 유명해졌다. 2002년 당시에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 특히 매 경기마다 펼친 카드 섹션 퍼포먼스가 매우 화제가 되었다.
각 경기별 카드 섹션 문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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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거리 응원은 대단한 장관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모두의 찬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151] 월드컵의 단골손님인 훌리건도 찾아볼 수 없었고,[152] 응원 이후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는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거리통제를 나온 의경들이나 당시 군부대[153]와 신병교육대는 물론이고[154] 장례식장도 월드컵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155] [156]그러나 몇몇 시민들[157]이 시내버스 천장 위에 올라가는 등의 지나친 행동을 보인다거나 수많은 인파 속에서 소매치기, 성추행 등의 범죄도 벌어졌었다.
- 군부대에서 군인들은 영내 단체 응원을 할 때 경기 직전 애국가가 연주되면 군인 신분이라 거수경례를 반드시 했다. 심지어 거리 응원 당시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거리에 나온 경찰(의경)들도 아무리 길거리 응원 시민 질서 통제를 나왔어도 경기 전 애국가 연주시에는 통제를 잠시 중단하고 신분 특성상 거수경례를 했다고 한다.
* 사회와 격리된 공간인 교도소와 구치소에서도 이 기간만큼은 밤 늦게까지 TV를 보면서 월드컵 응원을 허용했다. 또한 종교를 불문하고 정숙을 지켜야 히는 신성한 공간인 사찰, 성당, 교회 등지에서도 이 기간 동안에는 떠들썩하게 응원을 하였다. 이 외에도 평소에는 조용한 공간에서도 월드컵 기간 동안만큼은 많이 떠들썩하게 응원했다.
* 일부 대한민국 국군 부대에서는 단체로 영내 연병장 응원을 하기도 했다. 특히 부대 주변 민간인들도 초청한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심야시간의 경기시 일부 부대는 한국 경기에서 국가 연주시에 국기강하식을 동시에 하기도 했으며, 군인인 만큼 영내 응원시 애국가 연주시 거수경례는 반드시 했다.
- 한일 양국에서 인기를 끌고있던 이박사는 응원가에서 코리아재팬과 재팬코리아를 둘다 부르는 묘수를 보여줬다.
- 일본의 경우, 유이하게 수도에서 열리지 않은 월드컵이다.[158]
- 데이비드 베컴을 위시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헤어 스타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베컴의 포호크 머리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누구나 따라하는 간지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호나우두의 소위 다리미 내지는 깻잎머리는 만인에게 큰 웃음을 주며 월드컵이 지구촌 축제가 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내막은 참 씁쓸한데, 호나우두는 경기 내내 부상으로 인해 인터뷰 시 부상에 관한 질문만 받아서 기자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그런 헤어스타일을 했다고 한다.
-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선수들은 대회 종료 후 모두 병역 혜택을 받았다. 이미 1990년대에도 월드컵 16강 가면 병역혜택을 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 만큼 그 가치를 높게 평가 했었고, 아예 법으로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인 2002년 5월 10일 뉴스를 보면 16강 진출 시 병역특례에 관해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곧 열겠다고 할 정도로 법개정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또 2002년 5월에 국회의원 147명이 16강 진출 시 병역혜택을 줄 수 있는 병역법 시행령을 개정하도록 이한동 전 국무총리에게 건의문을 전달하기도 했으니 마냥 즉흥적으로 이뤄진 일은 아니다. 2002년 6월 14일 인천광역시 문학 경기장에서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 진출이 확정되었을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라커룸으로 들어와 선수들을 축하해주는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대표팀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성과와 보상에 대한 얘기가 오고갔는데,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홍명보가 젊은 선수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들에게 병역에 관한 혜택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건의했고,[159]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일사천리로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여당·야당뿐 아니라 설문조사를 해도 국민의 과반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와서 반대 의견은 힘을 잃었다. 원래 국방부와 병무청은 반대 입장이었다. 이렇게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는 현영민, 김남일, 최태욱, 설기현, 이영표, 이천수, 차두리, 안정환, 박지성, 송종국 등이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4강 진출로 병역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16강 진출 기념으로 16강전이었던 이탈리아 전과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역 혜택이 주어진 것이다.[160] 사실 축구든 야구든 특정 종목에만 따로 특혜를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특히 어떤 대회를 통해서 즉흥적으로 여론에 따라 법을 바꾸는것은 냉정하게 봐서 잘못된 것이다.
- HD로 중계가 된 첫 번째 월드컵이다. 전체 64경기 중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의 경기와 주요 경기를 포함 48경기가 HD로 중계되었다. 월드컵 주관방송사 HBS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161] 당시 정보통신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각각 치르게 될 32경기 중 24경기 이상을 HD로 제작해 총 48경기 이상을 HD로 제작하고 이 중 43경기 이상을 실황 중계한다고 밝혔다. 출처아카이브 당시에 월드컵 HD 중계 편성 정보를 알려주던 사이트가 있었다. 당시 월드컵 경기 방송 일정을 알려주던 사이트 아카이브[162]
17.3. 각 팀별 흥미로운 이야기
- 아일랜드 축구팬은 조별리그는 일본에서, 토너먼트는 한국에서 치르는 바람에 두 나라를 오가야 했다.[163] 체류 비용을 걱정했지만, 한국이 일본보다 물가가 싸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기도 했다. 거기다 지자체에서 여행객을 위해 둔치에 텐트촌까지 마련해 줘서 체류비가 많지 않은 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아무튼 그렇게 체류비가 남아서 '기왕 온 김에 관광 더 하고 가자'고 남은 아일랜드 팬들이 꽤 많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영어 원어민 강사로 채용되어서 말뚝 박은 사람도 있었으며 덕분에 2002년을 기점으로 한국에 재한 아일랜드인이 많아졌다.
- 체류비 이야기를 하자면 튀르키예 기자들을 뺄 수가 없다. 원래 자국 성적은 잘해야 16강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튀르키예가 계속 토너먼트에서 승리하자 튀르키예 기자들은 자국의 선전에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체류비 문제로 난감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 물가가 한국보다 비싼 것을 비판했다.
스페인 대표팀은 월드컵 기간 중에 한국의 토종개를 길렀다. 시장에서 보신탕이 될 운명에 처한 강아지를 보고 가엾게 여긴 스페인 기자가 10,000원을 주고 구해왔다고 한다. 이 토종개는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전 감독의 이름을 따서 '카마친(작은 카마초)'이라고 불렸다. 카마친은 스페인 선수들에게 몹시 사랑받았지만, 공항 검역에 걸려서 선수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못 데려갔다고 한다. 카마친에게 정이 들었던 이케르 카시야스는 공항에서 헤어질 때 눈물을 글썽였고, 라울은 잘 돌봐주라며 거금을 주고 갔다. 이후 카마친은 스페인 선수단이 머물던 숙소 관리자에게 맡겨졌다고 하는데, 몇 개월 후에 카마친을 그리워한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사람을 보내서 정식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한국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확한 근황은 알려진 바 없다.
8강 한국전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로 등장하여 실축한 호아킨 산체스의 암울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스페인 대표팀은 휴식일이나 훈련이 끝난 뒤에 할일이 없어 심심해하던 찰나 스페인어 통역사를 따라 한국의 PC방에 놀러갔다가 한국의 인터넷 속도와 PC캠의 신기함에 놀랐다고 한다.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는 거기서 야동을 봤다는게 포인트
- 올리버 칸은 한국에서 마셔본 두유, 베지밀의 맛에 반해서 한국에 있는 내내 베지밀을 달고 살았다. 이를 신의 음료라 극찬했으며 대회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 갈 때도 한 박스 부쳐갔다고 한다. 지네딘 지단의 경우는 음료수인 2% 부족할 때를 매우 좋아해서 훈련내내 물 대신 2%만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164]
- 브라질 대표팀 또한 여러가지 일화를 갖고 있다. 목욕탕에 때를 밀러간 호나우두는 때밀이 아저씨가 팬이라고 하자 자신의 팬티와 모자, 슬리퍼를 선물로 줬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호텔 직원과 탁구를 했는데, 번번이 지는 바람에 오기가 생겨서 계속 도전했다고 하며 그리고 브라질 대표팀은 노래방을 무척 좋아했으며, 카를루스와 호나우지뉴는 당시 오락실에서 유행한 펌프 잇 업을 즐겨 했다고 한다.
- 지네딘 지단은 대회 직전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했고 이후 부산광역시의 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병원 관계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근데 그 병원에서는 이 사진을 멋대로 광고용으로 써버렸고, 지단은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듣고 어이없어 했다.
- 세네갈 대표팀 선수 파디가는 대구광역시에 왔을 때 모 귀금속 가게에서 가족들에게 사 줄 목걸이를 고르고 있었다. 근데 파디가를 금은방 절도를 하러 온 아프리카 노동자로 오해한 금은방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해프닝이 있었고, 나중에 혐의가 풀리자 무안해진 금은방 가게 주인은 파디가에게 그 금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 포르투갈의 세르지우 콘세이상은 호텔 미용사 아가씨에게 반해서 날마다 머리를 손질하러 갔다. 콘세이상은 엄청 끈질기게 구애를 했지만, 결국 차이고 말았다. 미용사 아가씨는 콘세이상이 유명 축구 선수인 줄 모르고 그냥 외국인 노동자인 줄 알았다고 한다.
- 16강전을 앞두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숙소에 뱀이 출현하면서 선수단이 크게 분노한 일이 있었다. 혼비백산이 아니라 분노인 이유는,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군단 숙영지에 뱀이 출몰하면 필패한다는 징크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165][166]
- 우루과이 대표팀은 천안시 연수원에 베이스 캠프를 차린 후 몸도 풀겸 삼성SDI 천안공장 축구동호회와 경기를 가졌다. 비록 친선경기지만 컨디션 점검 차 레코바, 몬테로, 실바 등 정예 멤버가 출격했는데, 결과적으로 5:2로 이기긴 했으나[167] 예상 외로 2골이나 내주었다. 우루과이 스포츠기자들은 골을 넣은 직원의 이름과 나이를 묻기도 했다. # 참고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우루과이 상대로 2골을 넣어본 적이 2번밖에 없다.[168] 그리고 우루과이 대표팀은 연수원의 미니 냉장고를 매우 탐냈기에 삼성에서 선수 전원에게 미니 냉장고를 선물했다.
17.4. 그 외
- 한국의 경우는 사람들끼리 모아다가 반을 갈라서 한쪽은 폴란드를, 다른 한쪽은 포르투갈을 응원하도록 약속하고 응원했으며, 3/4위전에서는 튀르키예와 맞붙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진 형제의 나라 이야기에 힘입어 관중석에서 대형 터키 국기를 내걸어 주기도 했다. 실제로 튀르키예 현지에서는 한국 응원단의 이런 호의에 감동한 튀르키예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튀르키예에서도 이때를 튀르키예 축구의 황금기라고 추억하다 보니 현재까지도 이런 호의를 기억하는 튀르키예인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그래서 3/4위전이 열리던 시기에 튀르키예에서 여행중인 한국인들에게 숙박비와 식사비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 형제의 나라로 알려진 튀르키예 대표팀은 아예 튀르키예 서포터즈가 있어서 일방적으로 형제의 나라인 튀르키예 위주로 응원을 했다.
- 다만 한국 관중들도 세팀만은 찬밥 취급을 했고, 그 세팀은 바로 중국, 미국, 이탈리아였는데, 이탈리아의 경우 한국에서 치른 경기는 한국전 밖에 없었다.
- 중국은 악명 높은 소림축구 때문에 외면을 받았다.[169] 물론 나라가 가깝다보니 한국을 찾은 중국 서포터즈의 규모는 상당한 편이었다.
- 미국은 이 당시 극에 달한 반미 여론 때문에 한국 내에선 가장 외면 받은 팀들이었다.[170]
- 이탈리아는 한국과의 16강전을 이틀 앞두고 나온 프란체스코 토티의 자만섞인 기자회견으로 경기 당일 관중들로부터 집단 야유를 받았으며, 발언의 주인공 프란체스코 토티는 연장 전반에, 할리우드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유도하려다가 실패하고 이를 발견한 심판에 의해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으며, 결국 프란체스코 토티가 쫓겨난 이탈리아는 연장 후반 12분 안정환에게 골든골을 내주고 1:2로 역전패를 당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171]
- 월드컵 본선에 오지 못한 나라들의 대형 국기가 경기장에 종종 걸리기도 했다. 웨일스 국기나 이스라엘 국기 등등. 이쪽 나라 축구팬들이 구경와서 자국팀도 언젠가 월드컵에 진출하기를 바라며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지역적 혹은 정치적인 앙숙인 국가를 도발하기 위해 내걸기도 했다.[172] 한국 대표팀 경기에는 항상 네덜란드 국기가 걸려 있었는데, 이는 히딩크 감독의 고국이 네덜란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2 월드컵 진출에 탈락해서 기가 죽었던 네덜란드 사람들도 나름 위로를 얻었다고. 거기다 히딩크호가 승승장구 하니 "아이 신나~" 분위기.
- 오래전부터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대중들 사이에서 '월드컵둥이' 혹은 '월드컵 베이비'라는 별칭으로 불러왔다. 관련 영상 그러나 월드컵 베이비 여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분분한 편인데,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월드컵 베이비로 할지 아니면 월드컵 4강에 진출한 6월달에 태동하여 이듬해 3~4월달에 출생한 2003년생을 월드컵 베이비로 할지 많은 의견 대립이 생기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대중들은 단순히 월드컵 당시에 태어난 2002년생을 월드컵 베이비로 인식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월드컵 덕분에 신생아 수 증가에 따른 출산율 회복의 효과를 본 2003년생이 월드컵 베이비 붐에 부합된 명확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로인해 많은 2003년생들은 자신이 월드컵 베이비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며 월드컵 이후에 태어난 2002년생과 2003년생 모두 현재 21~22세이고, 2023년부터는 월드컵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 2004년생 이후가 성인이 되면서 더욱 세월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월드컵 대표팀의 구성원들의 일부 자녀들은 대를 이어 축구선수가 되었고 프로에 데뷔했다.
- 위에 서술에 이어서 1988년 서울 올림픽 다음으로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엄청난 사건인 만큼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에 진입하기 전[173] 까지는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는가?'가 월드컵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를 구별하는 대표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월드컵을 기억 못하는 세대도 아니고,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2021년 이후에 성인으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따라 세월이 꽤 지났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에 현재는 월드컵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을 나이든 세대로 월드컵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을 어린 세대로 구별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174]
- 기본적으로 2000년대 초반의 일이기도 하고, 새천년과 뉴 밀레니엄을 맞이한 국민들에게는 IMF 외환위기의 아픔을 이겨나고 맞이한 대축제였던지라 한국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대회이며 유튜브에서 고화질로 업로드한 당시 일부 경기 영상을 접한 대중들은 깨끗한 화질로 2002년을 처음 볼 수 있어서 매우 신기했다고 한다. 30세 이상 세대들에게는 2002 월드컵을 생생히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2024년 기준 벌써 22년이나 흐른 사건이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월드컵을 모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2002년 월드컵까지의 기간보다 2002년 월드컵부터 2024년까지의 기간이 훨씬 더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엄청난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 한국인들에게 너무 감명 깊은 일이라서 월드컵이 일어난 2002년을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한 해로 꼽는 경우도 많을 정도다. 경제력 뿐만 아니라 시민의식 자체가 가히 2002 월드컵을 계기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갈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988 서울 올림픽도 한국 사회가 일신되는 계기였지만, 이 때는 하필이면 한국인들에게 영혼의 숙적일 할 수 있는 일본과 사실상 1:1 정면 승부해야 하는 처지이다보니 온 사회가 어떻게든 일본에게 뒤쳐지는 모습만은 보일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이 분위기에서 대히트를 쳤던 것이 바로 양심냉장고. 흔히 첫 주인공이 지체장애인이었다는 점이 크게 회자되지만, 얼마 후 월드컵 대비 명목으로 일본의 정지선 준수 현황을 방영했을 때 시청자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175][176]
- 임산부들에게는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 특히 이해 7월에 아이를 낳은 임산부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는데, 이때는 거의 만삭이라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태아들이 신생아의 시력, 청력, 신체 구조가 거의 같아서 바깥 소리를 거의 대부분 들을 수 있었다. 골이 들어가면 엄마 배속에서 발로 엄마를 차던 아기들이 굉장히 많았다.
- 이 길거리 응원에 숨겨진 뒷이야기로, 실제 FIFA에서는 대형 전광판을 이용한 야외 방영조차도 중계비를 걷어갔다. 당시 금액으로 약 2,000만원 정도였다는데, 한국 쪽은 돈독 오른 놈들이라 욕을 하면서도 돈 내고 야외 방영을 했고, 일본 쪽은 안 내고 안했다.
- 대회 전 우려가 되었던 훌리건 문제는 그리 나타나지 않았는데, 일단 한국과 일본이 공권력에 있어서 남다른 국가였던 것이 한몫했다. 거기다 한국에서 조 예선 경기를 하는 나라들은 극성 훌리건이 드문 국가[177]이었고, 일본 쪽은 잉글랜드나 아르헨티나 등 전투력이 남다른 국가들이 있었으나 역시 별다른 소란을 벌이지 못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훌리건 제압용 무기만 따로 고안했고, 진압 훈련도 상당히 많이 했다.[178]
- 포르투갈전을 하루 앞두고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 일어났다[179]. 그렇지 않아도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에게 뺏긴 금메달과 미국전 무승부 때문에 반미감정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하지만 월드컵 기간 중에는 4강 신화의 열기에 묻혔다. 이때 국민 여론은 '포르투갈과 비기고 포르투갈과 사이좋게 16강에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조 최약체로 평가된 폴란드가 미국을 이기는 대이변이 일어났기에 포르투갈이 비기면 한국은 1승 2무로 조1위 포르투갈과 미국은 1승 1무 1패로 승점동률로 경합하는데 포르투갈이 폴란드를 4:0으로 도륙내버려서 골 득실 우위로 조2위 진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거스 히딩크 감독은 불필요한 리스크를 감수하지 말자는 이유로 전력을 다해 포르투갈을 이기는 선택을 하였다.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사람이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앙숙 관계라는걸 생각하자.
- 대회 기간 당시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삽질로 현재까지 풀리지 못한 미제 사건이 있는데, 그게 청주 물탱크실 주부 살인 사건이다. 또 2002년 6월 6일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미군 고압선 공사 중 사고로 1년여간 투병하던 전동록이 숨졌으나,[180] 미국전 당일에 열린 2002년 6월 10일 장례 투쟁은 경찰의 원천 봉쇄와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사그러들었으며 사건조차 묻혔다.(한겨레 기사)
- 도시빈민들 입장에서 월드컵 자체를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1986 서울 아시안게임 및 1988 서울올림픽 때처럼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미관 정리를 명분으로 재개발을 하거나 노점상을 정리했는데, 진보단체 입장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탄압'이라며 말이 많았다. 특히 1999년~2000년에는 상암지구 철거 과정에서 기존에 살던 주민들이 생존권 투쟁을 벌였으나 용역들과 공권력의 강제집행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고, 이 광경은 2002년작 독립영화 <상암동 월드컵 - 사람은 철거되지 않는다>에서 다뤄졌다. 또한 서울시도 2002년 1월 22일 '거리노숙자 특별보호대책'에 따라 월드컵 기간 중 '특별연수' 명목으로 노숙자들을 지방 민간시설에 수용하려는 계획을 추진해서 논란이 되자, 2월 7일에 이를 철회했다.(기사1, 기사2, 기사3, 기사4)
- 월드컵을 앞둔 때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의 비리 혐의가 드러나 파문이 일었는데, 검찰은 대회가 모두 끝나고 소환하려 했으나 여론의 뭇매를 맞고 2002년 6월 20일에 긴급 체포하게 된다.
- 당시 많은 남자 중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월드컵에 빠졌던 나머지 그해 1학기 기말고사 전교생(특히 남학생)[181] 평균 점수가 수직 하락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월드컵 때문에 학교 기말고사가 연기된 사례도 많았고 심지어 그 해 말에 있었던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평균이 낮게 나왔던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82] 또 일부 학교에서 한국 경기를 직관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조퇴 신청을 하기도 했는데 일부 학생들은 티켓 있는 척하고 조퇴하려다가 선생님에게 걸린 사례도 있었다. 사실 월드컵 뿐만 아니라 아시안게임, 지방선거, 대통령 선거 등 대형 행사가 1년 내내 몰려있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2002년 동안 많이 들떠있어서 공부하기엔 정말 최악의 환경이었다.
-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학들은 월드컵 기간 중에 수업이 있으면 월드컵 관람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여름방학을 예년에 비해서 일찍 했다고 한다.
- 2014년 JTBC 드라마 《12년 만의 재회 - 달래된장국》에서 한일 월드컵 당시의 경기 영상이 등장한 바 있다. 2002년 6월 당시 중원병원 로비에서 직원들과 손님들이 월드컵 중계 방송을 보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183]
- 코미디언 이주일도 이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폐암 말기로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인 3개월을 훨씬 넘겨 한국의 4강 신화를 휠체어를 타고 관람할 수 있었다. 월드컵 첫승 제물이었던 폴란드전 당시에 보건복지부장관의 초청을 받아 직접 경기를 관람하였으며, 이후 대표팀이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에 진출한 후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골든 골을 터뜨렸을 땐 너무 기뻐서 "암까지 이겨내고 건강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모 방송에 인터뷰를 하였다. 그러나 그건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월드컵이 종료되고 2달 뒤 폐암 투병 끝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 이 월드컵 기간 동안 가요계와 드라마계, 예능계는 그야말로 대불황이었다. 사람들 관심이 Only 월드컵이었으니까. 비몽이 타이틀 곡인 코요태 4집(50만 장 판매)정도가 극히 드문 예외였다. 다만 월드컵 관련 음반은 인기가 있었는데 윤도현의 오 필승 코리아 등 많은 월드컵 응원가들이 방송에 자주 나왔고 노래방 기계에 들어가기도 했다.
- 북한 조선중앙TV에서 일부 경기를 중계 방송했다. 대략 30여 경기를 중계방송했는데 전부 녹화 후 편집해 중계였으며 한국, 일본의 본선 조별리그 3경기는 중계하지 않았으며 8강에 진출한 미국의 5경기도 중계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16강 경기만 녹화 중계했다.
-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당일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국내 언론사들은 월드컵 관련 보도에만 집중했고 특히 국가적 비상 사태를 우선적으로 보도해야 할 지상파 3사도 3·4위전 중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을 단신으로 다루었다. 한국에 있던 외신들이 긴급 기사로 다룬 것과 대조되면서 나중에 이에 대해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한편 선수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묵념을 한 다음에 경기를 시작했다. 안정환이 마리텔에 출연하여 이에 대해 밝혔다.
- 동시기에 개최되었던 2002 NATE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하필 타이밍이 안 좋게 한일 월드컵 기간과 동시기에 개최되어 버렸고, 결국 결승전 관중수가 한일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버려 대략 7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온게임넷 스타리그 사상 최악의 흥행 실패 대회로 남게 되었다. 심지어 우승자인 변길섭은 아예 스타리그 우승자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준우승자 강도경도 스타리그 준우승 2회 기록을 콩라인 자격 요건을 충족시켰지만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 것도 묻혀서 이것마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이다.[186]
- 당시 모든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든 히딩크호 태극전사들과 같은 월드컵의 주역들 중 코칭 스태프 중에서는 핌 베어벡 전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수들 중에서는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이 가장 먼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사인이 암이었다. 참고로 2002 월드컵 개막전 골을 넣은 세네갈의 파파 부바 디오프도 2020년 11월 29일에 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별세했다.
-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끈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2021년 9월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끝으로 지도자 은퇴 선언을 했다.
- 2022년 6월 5일, 2002년 월드컵 20주년을 맞아 한국팀에 출전했던 선수들이 모여 축구 경기를 하는 팬서비스를 선보였다. #
- 한편, 2002 선수들이 2010년대 이후에 전부 선수로서 은퇴했음에도 아직까지도 영향력이 있다보니 선수 이름값만 믿고 발휘한다는 소수 축구팬들의 비판이 있다. 특히, 2000년대생들에게 주로 두드러지는데 2002 월드컵은 대단하나 아직도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 비판 요지이다.
18. 관련 마케팅
- 이 대회 마케팅에서 단연 두드러진 건 이동통신사였다. SK텔레콤은 붉은악마를 후원하며 'Be the Reds'란 슬로건 아래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 같은 응원 구호나 응원가를 써먹었고, KTF는 '코리아팀 파이팅'으로 밀었다.
- FIFA 공식 파트너인 현대자동차는 2000년에 EF 쏘나타 월드컵 에디션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01년에 뉴 EF 쏘나타와 베르나, 라비타 등 3개 차종부터 휠 꼭지에 월드컵 엠블럼과 휘장 문양 시트 등을 탑재한 '월드컵 에디션'을 출시해서 2002년에 아반떼 XD, 트라제 XG, 테라칸, 리베로 등 4개 차종에도 확대했다. 4강 진출 뒤엔 생산기간을 8월까지 연장했다. 또한 동년 5월 7일에는 조직위원회에 차량 1,053대를 후원하고 국가대표팀에까지 차량들을 기증했다.
- 같은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인 기아자동차도 프론트 펜다 좌/우측에 월드컵 휘장을 박고 휘장 무늬 시트까지 탑재한 스펙트라 및 스펙트라 윙 월드컵 모델을 내놨고, 봉고 프런티어도 월드컵 모델 겸 신형 모델 '사일런트'를 선보였으며 그랜버드 역시 월드컵 모델을 선보였다. 2002년 5월 24일~2002년 5월 30일에 월드컵 개최 도시 10곳에서 자사 차량 오너들을 대상으로 '월드컵 개최 기념 특별점검 서비스'를 개최했다.
- 한국맥도날드는 2001년부터 월드컵 관련 행사를 실시했는데, 특히 2002년 1월 16일에 '월드컵 공식 마스코트 이름짓기' 캠페인을 열었고,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플레이어 에스코트' 선발 프로그램도 처음 실시했다.(참고)
- 한국코카콜라보틀링은 2002년 5월 20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월드컵 우승국을 맞히면 그 나라로 5박 6일 여행을 보내는 이벤트를 선보였다.
- 오리온프리토레이는 치토스 포장에 역대 월드컵 공인구 사진을 담은 '축구공 따조'를 내놨다.
19. 둘러보기
20. 관련 문서
[1] 2022년 대외적 국호 표기를 튀르키예로 변경했으나, 2002년 당시에는 대외적으로는 국호를 터키로 표기했기 때문에 튀르키예가 아닌 터키가 올바른 표현이다.[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후 FIFA 규정이 바뀌면서 유니폼 전면에는 국기가 아닌 축구 협회의 로고 또는 별도 로고를 새기도록 규정했음에도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은 터키 국기를 달고 출전했다. 이로 인해 당시 터키 대표팀 유니폼에는 별도 로고가 없다.[3] 아시아 국가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4위 기록이며, 역대 최고의 성적이다.[4] 세계 최초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다. 이탈리아 방송사 RAI와 일본의 NHK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일부 지역에서 진행했다. 2002 월드컵까지는 일부 지역에서 일부 경기만 HD로 중계했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부터는 모든 경기가 전 세계에 HD로 중계되었다. 올림픽의 경우 일본에서 하이비전 시험방송 개념으로 1988 서울 올림픽 영상을 HD로 제작한 것이 세계 최초이다. UHD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최초.[5] 올림픽의 경우 단 한 번도 공동 개최 사례가 없으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역시 단일 국가, 단일 도시에서 개최됐다. 지역별 스포츠 대회 중에서는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이 2000년에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공동개최로 열린 적이 있고 이후 종종 공동개최 사례가 나오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외에 공동 개최된 월드컵의 사례는 24년 뒤 개막하는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있다.[6] 개최 시기를 조금 앞당긴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2002년 월드컵이 막을 내린 직후인 2002년 7월 6~7일에 태풍 라마순이 한반도를 강타하였고 비슷한 시기인 2002년 7월 10~11일에 태풍 차타안이 일본 간토~도호쿠 지방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라마순의 경우 남해안까지만 지나갔기에 수도권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차타안의 경우 일본 수도권인 간토 지방 전역을 강타하여 1만 이상의 주택 침수 및 수백여 건의 산사태가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미크로네시아(47명 사망)보다는 적지만 최소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7] 같은 이유로 1988 서울 올림픽도 1970년대 이후 열린 하계올림픽 중 가장 늦은 9월 17일에 개막했다.[8] 당시 디펜딩 챔피언인 프랑스가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여기를 참조해보자.[9]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프로그램들도 월드컵을 다룰 수 밖에 없었다. 6시 내고향 같은 지역 프로그램들도 시골의 월드컵 즐기는 풍경을 방송했으며, 심지어는 클래식 공연도 지휘자 및 연주자 전원이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공연할 정도였다.[10] 2014년부터는 월드컵이 개최된 지 10년 이상이나 지났고 2014년 월드컵은 시간대가 한국 기준 새벽시간인 데다가, 그 당시 알제리 패배 등 성적이 꽤 안 좋았기 때문. 또한 2014년 월드컵의 경우 이 해 4월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여파로 한국 전체가 장기간 초상집 분위기였던 점도 한몫했다.[11] FIFA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동일해야 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즉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해 대회명을 언급하더라도 일한 월드컵이 아니라 한일 월드컵으로 불러야 한다.[12] 논란은 전혀 없는 편이지만 한국 내에서는 대회 명칭을 2002 FIFA 월드컵 대한민국·일본으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공식 명칭은 아니다. 공식 명칭은 한국/KOREA로 쓰는 것이다.[1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뿐만 아니라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도 FIFA 월드컵에 참가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월드컵 남북한 공동 개최가 논의되기도 했었다. # FIFA가 공식 명칭을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또는 남한(South Korea)으로 채택했다면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국가 개념과 동시에 지역 개념을 포괄할 수 있는 한국(Korea)으로 채택한 것이 적절한 선택이었던 셈이다.[14] 2002 월드컵의 공식 입장 음악을 50초 분량으로 짧게 편곡한 것이다. 참고로 공식방송사인 KBS 방영 인트로의 경우 음악은 같지만 영상이 다르다. 마스코트를 사용한 버전인데 이 대회는 마스코트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15] 되려 유튜브에서 KOREA/JAPAN 월드컵이라고 표기된 동영상에 일본 네티즌들이 몰려와 2002 월드컵의 명칭은 JAPAN/KOREA라고 근거 없는 억지를 부리며 열폭하는 촌극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연히 별 호응도 얻지 못하고 묻힌다.[16] 김덕수 참여[17] 일본의 태고 연주 그룹 KODO 참여.[18] 한일 월드컵이 끝난 3개월 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축구 선수 입장에서도 사용되기도 하였다.[19] 월드컵송의 경우 전 대회인 프랑스 월드컵 때 나온 노래였지만, 곡이 워낙 좋고 몇년 되지 않은 노래라 2002년에도 사용되었다.[20] 이는 KBS에서 밀던 조수미의 '챔피언'(아래 문단 참조)에 대항한 MBC의 준 테마곡이었다.[21] 하지만 이후 2006년 월드컵 때는 윤밴은 따로 응원가를 만들지 않았다. 사실 윤도현 밴드도 국대축구 팬들의 "월드컵의 인기를 이용해먹었다"는 비판에는 할 말이 많은 것이, "오 필승 코리아" 자체가 윤밴의 음악이 아니라 기존 국대 응원가이던 것을 붉은악마와 협업하여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만들었던 트랙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편곡 및 음원제작 참여만 윤밴이 한 것이고 컴필레이션 음반 제작은 유니버설과 붉은악마가 진행한 것이며, 원래는 경기장에서 불러 오던 가요였다. 이런 컴필레이션 음반은 1998년, 2002, 2006, 2010 등 매해 나왔으며, 이후 2006년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YB에서 밝히기로는 "밴드 이미지가 월드컵이나 축구 관련으로 굳혀질까 봐 그랬다"고 한다. 참고로 2006년에는 버즈가 오 필승 코리아를 편곡해 부르게 되며, 공식 응원가는 Reds, Go Together 였다.[22] 에릭 레비 (Eric Lévi) 작곡, Era 연주[23] 그런데 MBC에서는 한 때 이 노래를 국가대표팀 경기 중계에서 득점이 나올 때마다 삽입하여 너무 자주 튼다고 빈축을 샀다.[24] 가뜩이나 2000년대 초반은 프라피룬 등의 대형 태풍이 유독 한반도를 자주 강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대회가 끝난 직후에는 사상 최악의 강수량을 보인 루사가 강습했고 그 다음해에는 역대 최악의 태풍 5손가락 안에 꼽히는 매미가 내습했다. 즉 태풍은 한국인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오기 힘든 상징이었다.[25] 김규삼의 초기작 '역전 시네마'라는 영화 패러디 개그물에서 월드컵 영향으로 파리만 날리는 그 달의 영화관 리뷰는 포기하고 악당들이 각국 축구단을 납치해서 경기를 시키는 내용을 그렸는데, 거기서 툭 던져주는 축구공이 그냥 공에다 매직으로 "피버노바"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즉 일반 사람들에게도 먹히는 개그 코드가 될 만큼 당시 피버노바의 인지도가 있었다는 이야기.[26] 지금은 중국 인건비가 올라가서 이런 짝퉁 수작업은 다른 나라로 넘어간지 오래지만 당시는 그야말로 "Made in China"의 전성시대였던 시기다.[27] 기포 플라스틱 자체는 1994년 퀘스트라 때부터 적용되었다.[28] 사실 이 골키퍼가 잡기 힘든 공 운운은 이후 대회가 진행될 때마다 공인구 얘기에 따라붙는 얘기라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 까놓고 말하자면 이는 FIFA측이 대회에서 더 많은 골이 나도록 기술개발 방향을 유도한 측면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29] 스틸야드는 월드컵 경기를 치를 요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30] 미국 10개, 캐나다 3개, 멕시코 3개 총 16개 경기장을 활용한다.[31] 실제 건설된 곳은 상암동이 아니라 성산동이다.[32] 당시까지만 해도 리모델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숫자로 나온 결과에도 많은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기도 했다.[33] 이 마개조는 2020년이 되어서 시행하게 된다.[34] 요코하마에서 결승전 개최. 다만 도쿄의 대체재 지위는 사이타마가 갖고 갔다.[35] 경상도에만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세 곳이 있어서 포항시까지 주게 되면 지역 편중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36] 당초 한국에서는 특별시+광역시에 7개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일본과 비율을 맞추고자 10개로 늘렸고 이때 추가된 수원시, 전주시, 서귀포는 국고지원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경기장을 유치했다.[37] 상암(수색)과 인천광역시 문학동 지역은 미개발지이긴 하였으나 당시에도 강변북로, 제2경인고속도로 등과 연계된 시내외 교통의 중심에 해당했으며 2002년 당시 이미 도시철도 연계가 완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상암은 서울특별시 시내 전 지역 지하철 역사 내에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따로 방향표기까지 되어 있었다.(다만 중국어는 '세계배체육장' 이라는 월드컵경기장의 직역표현을 사용해서 저게 축구경기장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었다.)[38] SSG 랜더스가 운영한다.[39] 2008년 3월 5일부로 대구스타디움으로 정식 명명되었다.[40] 당초 전국체전용으로 기존 구장을 신축 또는 리모델링하려고 했는데, 월드컵 유치로 계획을 수정하여 경기장 규모를 키웠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서울 축구전용구장 신축 반대 여론이 제기되면서 한때 월드컵 개막전 장소로 거론되기도 했다.[41] 인천 문학과 마찬가지로 한때 월드컵 개막전 장소로 거론되기도 했다.[42] 월드컵 기간 중에는 본 관중석과 그라운드 사이에 가변좌석을 설치하여 축구전용구장으로 운영했지만, 월드컵이 끝난 후 가변석을 철거하고 육상트랙을 설치해서 종합운동장으로 변했다. 당초 설계를 종합운동장으로 했다고 한다.[43] 가변석 철거 후 현재는 40,245석.[44] 위치가 서귀포시여서 '서귀포 경기장'으로 통칭되기 쉽지만 정식으로는 제주를 달고 있다.[45] 이후 가변석 철거, 보수 공사로 인해 2013년 현재는 29,971석이다.[46] 명명권 채택으로 2005년부터 닛산 스타디움으로 명명되었다.[47] 광주와 유사하게 월드컵 기간 중 가변좌석을 활용하여 5천 석 정도를 늘렸다. 현재도 축구 경기에는 사용 중이나, 광주와 달리 처음부터 육상경기장 명목이었다.[48] 명명권 적용으로 2014년 이후 '얀마 스타디움 나가이'. 한일 월드컵에 사용된 경기장 중 가장 먼저 완공되었다.[49] 명명권 적용으로 2007년 이후 '도호쿠 전력 빅 스완 스타디움'. 2014년에는 명명권을 덴카가 구입했다.[50] 명명권 적용으로 2013년 이후 '노에비아 스타디움 고베'. 덧붙여 이유는 불명이지만 FIFA의 경기 기록에는 2007~2012년 사용된 스폰서 명칭 '홈즈 스타디움 고베'로 기재되어 있다. FIFA는 원래 경기장의 스폰서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51] 양쪽 골대 뒤 임시 스탠드를 설치한 상태에서의 수용 인원으로, 대회 종료 후에는 임시 스탠드를 철거하여 34,000석으로 조정되었다. 단, 홈팀인 비셀 고베가 상단 스탠드를 열지 않아 J리그에서의 정원은 30,132석으로 되어 있다. 이전 버전에 서술된 6만 석짜리 경기장은 이전 홈으로 사용하던 고베종합운동공원 육상경기장(애칭 유니버시아드 기념 경기장)으로 이 경기장과는 무관하다.[52] 야구장-축구전용구장 간 전환이 가능한 구조이다.[53] 예를 들어 관중석 중 지붕이 덮이는 면적이 20%도 되지 않으며, 관중석도 4강전 등 주요 경기 용도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54] 2002 월드컵 개최지 관련 논의가 한창 뜨거웠던 1990년대 당시, 한국은 1988 서울 올림픽과 1993 대전 엑스포 개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고, 경제규모 세계 11위의 최상위권 중진국이었다. 일본도 1991년 거품 붕괴 여파로 성장률이 1% 아래로 떨어지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고 1995년에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넘긴 웬만한 북유럽 국가 뺨치고 스위스에 준하는 수준의 엄청난 부국이었다.[55] 사실 국력만 따진다면 호주도 가능했지만 당시 호주는 축구의 인기가 럭비·크리켓에 비해 많이 낮았고 월드컵 개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외에 인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는 일부 지역에 한해 인기가 높을 뿐, 국가 전체로는 크리켓·하키의 인기가 축구보다 높으며 축구 실력이 매우 떨어졌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 여파로 국제 왕따였으며 인도와 마찬가지로 축구 실력이 너무 허접했다. 중동은 축구의 인기도 높고 실력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사우디는 외국인(특히 이슬람권 이외의 외국인)이 입국하기가 까다로울 만큼 폐쇄적이었고 이란은 혁명 이후로 줄곧 반미·반서방 노선을 취한 데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은 축구보다 야구의 인기가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축구가 야구보다 더 인기가 높았고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도 야구에 밀리긴 해도 축구 인기도 제법 있었던 반면, 일본은 축구가 단 한 번도 야구보다 인기가 높았던 적이 없을 만큼 야구의 인기가 워낙 압도적이라는 점이다.[56] 대한축구협회는 1988 서울 올림픽 폐막 직후인 1989년 정부에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제안했으나, 1993 엑스포 준비에 정신이 없었던 시점이라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57]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브라질에는 상당한 규모의 일본계 이민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현재도 일본과 브라질의 교류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활발 한 편 이다.[58] 일본은 199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첫 본선 진출을 거의 다 이뤄놓고 이라크에 발목을 잡히고 94월드컵 24개국 본선 티켓을 한국으로 내주면서 아시아 3위로 탈락했다. 그리고 다음 대회인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때 32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어서야 첫 진출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때도 지역 예선에서 홈에서 한국에게 역전패당하는 등 고전한 끝에 조 2위로 떨어져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각 조 2위끼리 치르는 플레이오프에서 이란과 연장 접전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98월드컵 32개국 본선 진출 티켓을 얻었다. 이후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된 중동의 카타르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까지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1934년 이탈리아 이후로 무려 88년 만에 월드컵 진출 경험이 없는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카타르는 '돈으로 월드컵 진출권을 샀다'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도 32개국 중 32위라는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한 골은 넣어서 골 한번 못 넣어보고 떨어지지는 않았다.[59] 그래도 지금은 페루와 칠레는 사이는 꽤 좋아진 편이다. 자세한 건 페루-칠레 관계 문서 참조.[60] 당시 남미 집행위원들은 아벨란제 회장 포함 브라질 2,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각 1명씩 분포해 있었는데, 칠레와 에콰도르는 에초에 일본을 지지했던 데다, 아르헨티나 역시 반브라질 감정과 별개로 브라질 못지 않은 친일 국가다.[61] 당시 유럽 측 집행 위원들은 조앙 아벨란제 전 회장의 장기 집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62] 아프리카가 한국 찬성 분위기로 선회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직전에 열린 미국 월드컵 당시 미국이 아프리카 국가인 모로코를 꺾고 개최지로 선정된데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탓에 상업성 문제를 강조하며 일본의 개최를 지지하는 아벨란제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상업성 면에서 불리한 아프리카 입장에서 이를 두고 보면 유럽, 남미는 물론 상업성에 이점이 있는 아시아나 북미에도 밀려 들러리 신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으로는 그나마 아시아에 확실히 앞서고, 북미도 멕시코를 제외하면 실력적으로 아프리카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몽준은 2006 월드컵의 아프리카 개최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럽 상대로도 이중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4년 후인 2010년으로 연기되었고, 이런 행보는 추후 그의 FIFA 내 행보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63] 아벨란제 전 회장의 장기 집권에 염증이 난 유럽세가 반대 세력으로 한국을 밀고 있었고 여기에 아프리카세도 가세했으니 일본 지지 쪽은 아벨란제 회장과 남미 뿐이었는데 그 남미조차도 한국파인 아르헨티나·우루과이·페루·볼리비아와 일본파인 브라질·칠레·파라과이·에콰도르로 나뉘어 있었다.[64] 후에 정몽준 전 부회장은 한국이 공동 개최라도 이룬 것은 FIFA 내부의 정치 싸움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즉, 아벨란제로 상징되는 남미파들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세계 축구 최강의 집단인 유럽세를 활용했던 것이다. 한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월드컵이 한일 공동개최로 결정되었음을 전해듣고선 "몽준이가 하는게 다 그렇지 뭐."라며 피식 웃었다고 전해진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1980년 당시, 인지도가 떨어지던 한국이 사실상 내정된 상태였던 일본 나고야를 꺾고 단독으로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신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물론 정주영 전 회장 본인이 가장 이뻐했던 자식이 6남 정몽준였기에 진짜 폄하했다기 보단 애정을 담은 농담이었다.[65] 같은 대륙이기도 하거니와 하필이면 또 이웃나라였다. 만약에 같은 대륙이었더라도 물리적 거리가 멀었다면 이 정도의 대립이 벌어지지는 않았다.[66] 사실 일본은 1988년 올림픽에서도 삽질을 벌인 끝에 한국에게 패배한 바 있다.[67] 이를 두고 명분에 집착하여 실리를 버렸다는 비난도 일부 나왔으나 대회 공식 명칭이 한일 월드컵(Korea/Japan 2002)로 후대에 영원히 기록되는 것을 고려하면, 결승전 대신 공식 명칭을 선점한 결정도 충분히 실리적이었다. 일본은 자국 내에서 2002년 월드컵을 '일한 월드컵' 또는 '일본 월드컵'으로 칭하며, 대회 로고를 파란색 배경에 띄워 놓아 파란색 폰트로 적힌 KOREA의 시인성을 떨어뜨리고 빨간색 폰트의 JAPAN만 돋보이게 하는 등 한국의 존재를 애써 축소하는 시도를 자주 벌이는데, 만일 공식 명칭을 일본이 선점했더라면 이런 왜곡 행태가 자국 내에서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 벌어졌을 수도 있다.[68]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정몽준은 2002년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69] 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전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 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70] 적절하게도 둘 다 사상 첫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지만, 일본이 16강전에서 터키에게 져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 맞대결은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 대신 준결승까지 오른 한국이 그 터키와 3·4위전에서 맞붙었으며 그 경기 종료 이후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등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71] 박세직 전 위원장은 과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도 맡은 적 있다.[72] 32개팀.[73] AFC가 2.5장은 가혹하다며 3장을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결국 2.5장으로 확정됐다.[74] 당시 터키는 유럽예선에서 스페인을 격파하고, 54월드컵 9위를 기록했다.[75] 이미 핀란드 원정에서 비겼고 이는 8년 후 반복되었다. 단 밀린 이때와 달리 그때 독일은 러시아를 넘고 본선 진출하였다.[76] 2000 시드니 올림픽 이전에 치러진 7라운드까지는 브라질을 상대로 3-0으로 압승하는 등 3승 1무 3패를 기록하며 대륙간 플레이오프 위치에 있었으나, 올림픽 직후부터 거짓말처럼 11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하며 추락한다.[77] 호주는 원정 0-3 패, 홈 1-0 승. 이란은 원정 0-2 패, 홈 1-0 승.[78] 그나마 호주는 그다음 월드컵에서 32년 만에 본선에 진출하였고, 이후로도 월드컵 본선에 나가고 있으며, 한국과 비슷한 입장이 되었다.[79] 안타깝게도, 2002 월드컵 조 추첨 영상 자료가 인터넷에 있지 않아 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2022년도에 브라질의 한 축구팬이 당시 비디오로 녹화한 것을 유튜브에 올렸기에 로스트 미디어 신세는 어느정도 면했다.[80] 이날 일본에서는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가 오랜 난임 끝에 아이코 공주(현재 [age(2001-12-01)]세)를 낳아, 월드컵 조 추첨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81] 조 추첨 중 남은 3개 팀은 포트 C로 추첨이 이뤄졌음.[82] 전대회 4강 진출국[83] 이 때문에 국내보다 차범근에 대한 인지도가 높던 유럽에서는 혹시 차범근이 죽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84] 송혜교는 탑시드 배정을 맡았고 포르투갈이 속한 2번시드 추첨은 펠레가 뽑았다. 다만 송혜교가 추첨의 묘미인 포트를 섞는 것을 안 하고 대충 손으로 집어서 뽑는 행동은 축구팬들에겐 거슬렸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추첨자 선정 통보를 받았을 때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처음에는 이렇게 큰 행사인 줄 몰랐다. 국제적인 행사인 것을 알게 된 뒤 깜짝 놀랐다"는 송혜교의 인터뷰 내용 때문에 이런 논란은 더욱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85] 유승준은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립싱크 공연을 해서 작은 논란도 있었다. 또한 이 공연이 본인의 병역 논란이 터지기 전 마지막 한국 공연이었다.[86] 백남준작 '동방으로부터'[87] 애초에 월드컵 개막식은 올림픽만큼 공을 들이지도 않고, 그렇게 주목받지도 못한다. 대신 개막전이 큰 관심을 받는다.[32강] [89] 마의 6골 벽을 깨뜨린 호나우두도 MVP감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기자단 투표가 호나우두가 2골을 넣기 전인 결승전 하프타임에 열렸기 때문에 칸이 수상자가 되었다. 이 대회 이후로 MVP 투표가 결승전 종료 이후에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 2018년 현재까지 골든볼이 우승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리오넬 메시가 골든볼을 수상하며 우승팀에서 골든볼 수상자를 배출하게 되었다.[90] 골든볼, 실버볼, 브론즈볼을 통틀어서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아시아 선수의 수상이다. 골든볼은 골키퍼인 올리버 칸이, 실버 볼은 공격수 호나우두가 받아간 것을 보면 수비수 홍명보가 브론즈 볼을 받은 것은 이번 대회 최고의 수비수로 홍명보가 뽑혔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다.[91] 기존에 진행하던 무궁화 위성방송은 2002년 스카이라이프 출범 직전 위성 1TV는 1TV 재전송채널로, 위성 2TV는 KBS KOREA(현 KBS 라이프 및 KBS 스토리)로 재편되었다. 1TV는 광고방송을 하지 않기에 한국 대표팀 경기를 중계방송 하지 않았다.[92] 묘하게 20년 뒤 월드컵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MBC가 김성주 - 안정환 효과와 예능 버프로 1위로 올라섰고, SBS가 배성재 - 박지성 콤비로 2위로 올라섰으며, KBS는 여러 축구 유튜버들을 영입하는 수를 두었음에도 대중적인 화제를 모으지 못해 최하위로 떨어졌다. 심지어 이 때의 KBS 스포츠국장도 시청률 참사의 책임으로 경질당했다.[93] 폴란드전, 포르투갈전 중계.[94] 미국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 독일전 중계.[95] 터키전 중계.[96] 라디오 중계. 이탈리아전에 특별 해설자로 투입했다.[HD] HD 중계만 참여.[HD] [HD] [HD] [HD] [HD] [103] 라디오 중계 보조 해설자로 참여했다. 당시 박철은 '박철의 두시탈출'을 진행하고 있었다.[104] 다만 대회 운영과 준비를 한 대한민국월드컵조직위원회(KOWOC)는 2002년 1662억 원 흑자를 보았다.[105] 매진되었다는 경기가 수천자리씩 남아있었다. 아직 남은 표가 몇 장이고 경기 전까지 어떻게 팔지를 공개하고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운영을 엉망으로 했었다.[106] 홈 관중이 꾸준히 들어오는 소위 '인기구단'은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정도 뿐이다. 지역 팬들의 충성도가 높은 울산 현대도 시 외곽 지역인 문수경기장으로 홈구장을 옮긴 뒤에는 한동안 관중 동원 성과가 좋지 못해서 고생했으며 2000년대에 창단된 시민 구단은 점진적으로 팬덤 규모를 넓혀가고 있으나 지역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는 못하고 있다.[107] 2층 스탠드를 통천으로 가리거나 아예 폐쇄했다.[108] 다만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통해 후보에서 물러났다.[109]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멕시코 등 세계 강호들도 그동안 1998 월드컵부터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을 할 정도로 월드컵 본선 무대는 죽음의 조가 많은 만큼 쉬운 대회가 아니다.[110] 딕 아드보카트, 홍명보, 신태용[111] 아드보카트 전 감독은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을 자신의 준비 부족이라고 인정했지만 시간의 부족함도 토로하며 1년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팀워크를 다지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고 말했다.[112] 단, FIFA 주관 성인대회로 범위를 넓히면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 결승전에서 98분 티에리 앙리가 넣은 결승골이 최후의 연장 골든골이다.[113] 원래 룩셈부르크도 같이 묶어서 베네룩스 3국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114]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브라질의 골키퍼 클라우지우 타파레우가 비슷하게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타파레우는 승부차기에서 선방하지 않았으며 로베르토 바조가 실축하였다.[115] 이는 스페인전 당시 중국 쪽 중계 캐스터가 무슨 대단한 편파판정이 난 양 제멋대로 지껄인 탓이 매우 크다.[116] 사실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 메이저대회의 성적은 선수 개개인이 아니라 팀 선수단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아무리 경기 출장을 하지 않았더라도 엔트리에 이탈한 적만 없다면 팀이 우승할 경우 우승컵 행사에 똑같이 참여할 수 있으며 우승 메달도 수여된다. 물론 우승 상금 배당은 낮은 순위로 받게 되겠지만. 1994년 월드컵 때의 호나우두도 같은 이유로 인해 당연히 우승 멤버로 인정받았다.[117] 즉 토너먼트에서 우승후보급 쟁쟁한 상대들만 연달아 꺾으면서 4강에 간 것이며, 이는 홈빨이라는 미명으로도 4강 진출을 폄하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118] 덤으로 이때 상대 팀 골키퍼였던 잔루이지 부폰(이탈리아), 이케르 카시야스(스페인), 올리버 칸(독일)은 모두 야신상을 수상했다.[119] 일본에만 이 광고판이 있었다.[120] 2001년 이전에는 한국주택은행이 스폰서였다.[121] 터키의 가수이자 월드스타로 2002 월드컵에서 터키 축구 팀의 마스코트.[122] 2002 월드컵에서 축가를 부른 독일 오페라 가수.[123] 3군 통합 기지인 계룡대 관할 군악대이다.[124] 이탈리아의 국제적 가수로 전세계 최고 권위의 130개 국가 극장에서 공연한 적이 있으며 또한 2012년에 한국에 다시 찾아와서 공연한 적이 있는 국제적 가수이다.[125] 포르투갈의 파두가수이며 마리자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2014년 리스본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챔피언스리그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다.[126] 원래는 월드컵 공식 주제가를 부른 미국 가수 아나스타샤가 미국 국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미 대사관의 제안으로 독창자가 바뀐 것이다. 소프라노 정경주는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의 최측근인데 한국 사람이 미국 국가를 독창한 점은 한-미간 친선 관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계획 이었다는 미국 대사관 측 입장 이였다고 한다. 소프라노 정경주는 미국과 연관이 있다면 주한 미 8군 중령이자 군목인 남편을 두고 있다는 것과 큰 아들을 미국의 의과대학에 보내고 있다는 것인데 이게 인연이 되어서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5월말쯤 미국전 때 미국 국가를 불러달라고 제의해 왔고,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인인 정경주 씨를 추천(미 대사관은 역사적인 한·미전과 양국간의 우호관계 의미를 살리기 위해 한국인 소프라노 정경주를 선택했다고 한다.)했고, 한국인인 소프라노 정경주가 미국 국가를 독창하게 된 것이다.[127] 폴란드의 스타 가수이다.[128] 가수 조영남의 동생이다.[129] 세네갈 쇼크 때문이 아니다.[130] 1998 월드컵까지만 해도 선수 한 명을 희생해서 서드 골키퍼를 데려가기도 했다.[131] 하지만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한국 대표팀에서 23번을 받은 선수가 월드컵 본선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다가 2018년이 되어서야 조현우가 처음으로 본선 경기에 출전하였다. 다만 조현우는 등번호가 그래서 그렇지 주전 골키퍼 포지션이었다.[132] 201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칠레가 강호가 된 거고 이 당시 칠레는 베네수엘라와 둘이 남미의 바닥을 책임진 약골 형제들이었다. 다만 칠레가 바닥이란 말이 억울할 수 있는게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 지난 월드컵에선 16강까지 올라갔고, 2년전에 열린 올림픽에선 동메달까지 탄 팀이다. 2010년대 들기 전 까지 이리고 치이고 하는 베네수엘라하고 똑같이 비교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베네수엘라는 아직도 월드컵 진출을 못한 남미 축구 연맹 소속 국가다.[133] 대신 크로아티아를 동귀어진시켰다.[134] 슬로베니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135] 당시 8강에 브라질, 잉글랜드, 스페인, 한국, 세네갈, 독일, 터키, 미국이 올라왔는데, 이때 당시 우승급 전력이었던 잉글랜드와 브라질이 서로 8강에서 맞붙었다. 그리고 남은 우승급 전력인 스페인은 당시 다크호스였던 한국과 맞붙었다.[136] 오언에게 선제골을 내준 과정에서 브라질의 센터백 루시우 선수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137] 한국 선수들의 적극적인 유럽 리그 진출과 미디어 발달로 인한 해외 축구에 대한 관심과 노출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에 많은 사람들이 경기를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월드컵에 나올 정도의 팀은 약체로 분류되더라도 그중에서 스타 플레이어나 유명 선수는 몇몇 있는 경우가 많아 그들을 직접 보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138] 다만 실력을 떠나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국, 혹은 같은 대륙의 프로리그에서 뛰고 있던 파라과이나 튀르키예, 유럽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단 세명 뿐이었던 코스타리카 같은 팀들의 경기까지 매진될 것이라고 보는 건 해축 팬덤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파울로 완초페나 하칸 쉬퀴르는 좋은 선수들이지만, 당시가 아닌 지금 기준으로 봐도 이들의 티켓 파워는 5~6만 석을 매진시킬 수준은 안된다. 한국의 해축 팬덤은 유럽 리그 위주로 형성되었지 코스타리카/튀르키예 프로팀들의 경기에 대한 인지도는 거의 없는데,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 대표팀 간 경기를 보기 위해 한국팬들이 경기장을 메울 확률은 높지 않다.[139] 한마디로 '이제 막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 VS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0개국 중 하나' 수준의 차이였다.[140] 중국, 일본, 한국[141] 조별리그 3차전에서 중국을 3:0으로 이기고 C조 2위로 16강 진출, 16강전에서는 일본을 1:0으로 이겼으며 3위 결정전에서는 한국을 3:2로 이기며 3위를 차지하였다.[142] 결승전이 일본에서 열렸기 때문에 만약 한국이 결승전에 갔다면 아래 목록에서 빠질 수 있었고, 일본은 결승전에 갔어도 한 국가에서만 모든 경기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143] 이때는 토너먼트가 결승전 단 한경기에 불과한 탓이 있다(그 이전 경기는 모두 조별리그였다).[144] 1988 서울 올림픽 유치 당시는 경쟁 상대가 그나마 대등한 편인 나고야였고 이미 올림픽을 2차례씩이나 진행했던 참이라 "도쿄와 삿포로에서 했는데 또?"라는 식으로 다소 시큰둥해서 일본 측의 개최 열기가 높지 않았었다. 반면 월드컵 유치는 한국은 물론 일본도 갖은 힘을 다 쏟아부었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올림픽 유치 때와 비교하면 한국의 위상이 훨씬 높아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낸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1998년 프랑스 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이 고작이라 명분에서도 밀렸다. 하지만 1989년에 월드컵 유치위가 출범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1994년에서야 늦깎이로 부랴부랴 참가했다는 점 역시 1988 올림픽과의 큰 차이점. 1988 유치전에서도 한국이 후발주자이긴 했지만 나고야가 1977년, 한국이 1979년에 유치전을 시작해 크게 차이가 나는 편은 아니었다.[145] 두 겹으로 입은 것을 볼 수 있다.[146] 경기는 2:0으로 종료.[147]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을 의식한 문구. 붉은 악마 측에서는 깊은 생각 없이 적은 건데, 문구를 미리 발견한 이탈리아 측에서는 항의까지 할 정도로 격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반대로 잉글랜드는 이거 보고 싱글벙글했는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자기네가 유일하게 우승한 월드컵이다. 독일 부분 첨언하자면, 1966년 결승에서 잉글랜드에 패한 나라가 서독이다. 연장전까지 해서 2:4 잉글랜드 승.[148]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해 유니폼에 별을 새기자는 의미.[149] 그러나 이 월드컵에서 실제로 별을 새긴 국가는 브라질이다.[150] See you at K-리그. 월드컵은 끝났으니 이제는 K리그에서 보자는 뜻이다.[151] 이에 대한 일화로 90대 할머니가 3.1 운동 이후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자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월드컵부터다. 정확히는 4강전부터. 그 이전까지는 국제스포츠 중계시 자막에 보통 ‘한국’이라고 썼고 신문이나 TV 등 언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보통 대한민국이라고 정식 명칭을 전부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며 이 월드컵조차도 8강전까지만 해도 한국이라는 표기가 주를 이뤘지만, 4강전에서 SBS가 선제로 한국 표기 대신 대한민국 표기로 자막을 바꾸고 송출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월드컵 종료 시점에서는 언론에서도 꼬박꼬박 대한민국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고, 이 이후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지상파 3사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표기로 자막을 통일하면서 완전히 대한민국이라는 표기가 자리를 잡았다.[152] 이건 잉글랜드가 속해있는 F조가 일본에서 경기를 치렀던 것도 있다.[153] 이 때 취사장에서 보던 연병장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영내응원을 하던 부대마다 차이는 있으나 한국팀 경기는 단체응원을 했다고 한다.[154] 당시에는 훈련병들은 TV시청이 불가능했으나 월드컵 만큼은 연병장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연병장(운동장)에서 한국팀 경기만큼은 훈련병들도 무조건 관람하게 했다고 한다.[155] 원본은 2002년 6월 15일자 MBC 뉴스데스크 일부. 장소는 경기도 광주시의 한 장례식장이며, 포르투갈전 다음 날 뉴스 영상이다. 골이 들어가자 상주와 유가족들 조문객이 소리를 지르고 환호했다고 한다.[156] 유퀴즈에 나온 장례지도사도 부산에서 격었다고 한다. #[157] 8강전 승리 때에는 수유동의 어느 경찰마저 순찰차 위에 올라갔다. 물론 외친 건 대한민국이 아니라 몰려나온 시민들에게 '차도에 나오지 마세요 위험합니다'였다.[158] 단, 요코하마시와 이바라키시, 사이타마시 등은 도쿄도에서 인접해있으며 일본 수도권에 속하는 지역인지라 도쿄에서의 접근에는 문제가 별로 없었다. 도쿄의 경우 높은 지가로 인해 신축 월드컵 경기장을 지을 여건이 되지 않았고, 기존의 경기장들도 노후화되어 월드컵을 개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월드컵 유치 신청을 하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선례는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의 스톡홀름. 같은 주 솔나에서 대신 개최되었다.[159] 참고로 홍명보 본인은 이미 상무에서 병역 의무를 마친 뒤였다.[160] 그리고 이렇게 특정 종목에만 병역 혜택을 준 사례가 있었기에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 진출 기념으로 야구 선수들에게 법을 바꿔서 병역특혜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종목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올림픽 동메달 이상,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원칙은 모든 종목에게 같은데 축구와 야구에만 특혜를 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FIFA 월드컵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병역 혜택은 사라졌다.[161] 2002 월드컵부터는 HBS라는 전용 방송사에서 국제신호 제작을 전담했다. HBS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원문-A separate High Definition 1080i clean feed was also provided alongside the Standard Definition 4/3 feeds for live coverage of 48 matches of the 64 played at the event, highlights covered all other matches. Eight special HD cameras were employed to achieve the HD production.-대략적인 내용은 8대의 카메라를 사용했으며 1080i로 제작되었고 64경기 중 48경기를 생중계했으며 하이라이트는 전 경기를 제작했다는 내용이다.[162] 여기는 SBS 단독 HD중계 19경기와 KBS 단독 HD중계 3경기를 포함해 총 52경기가 HD로 중계된 것으로 나와있다.[163] 조별리그를 치른 일본에는 약 3만,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16강 전에는 8천 명이 방문했다. 아일랜드뿐 아니라 독일과 멕시코, 이탈리아도 조별 리그만 일본에서, 결승전을 제외한 토너먼트는 한국에서 치렀기 때문에 두 나라를 오가야 했다. 반대로 덴마크와 세네갈, 브라질, 터키는 조별 리그만 한국에서, 3/4위전을 제외한 토너먼트는 모두 일본에서 치렀다.[164] 여담이지만, 축구 선수마다 수분 보충을 위해 물/이온음료를 선택한다. 2002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팀닥터였던 최주영에 따르면 안정환은 게토레이와 물을 반반 섞어서 마셨다고 한다.[165] 군단 숙영지인데 왜 국대와 상관 있냐면 이탈리아 국대 별칭이 '아주리 군단'이었으며 게다가 진짜로 패배했다.[166] 참고로 뱀이 나왔던 곳은 바로 프란체스코 토티의 방이었다고 한다.[167] 7:2 혹은 9:2였다는 증언도 있다.[168] 1982년 친선전에서 2:2 무승부 승점 1점 기록, 2018년 친선전 2:1 승리 기록.[169] 4년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출정식 전날 대한축구협회에서 차범근 감독조차 반대한 중국하고 친선경기를 치르게 하였고 여기서 황선홍 선수가 큰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한국 대표팀은 마르세유 참사를 당했으며, 차범근 감독이 억울하게 경질까지 당했다. 이로인해 반중감정이 폭발했다. 또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때도 중국의 리자쥔의 반칙으로 인해 한국선수들이 크게 피해를 보았고 이게 한국인들의 분노게이지를 상승시켰다. 특히 리자쥔은 2000 세계선수권에서도 한국의 김동성 선수를 고의적으로 스케이트 날로 부상을 입혔다. 그것도 스케이트 날을 김동성의 몸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건 명백히 반칙을 넘어서 살인미수를 하려고 한 것이었다. 차라리 아래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금메달을 강탈한 오노조차도 상대방을 다치게 하려는 반칙을 하지는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악질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나중에는 히딩크호의 4강진출마저 심판매수라고 폄하까지 하는등 혐한행동도 서슴치 않아서 어찌보면 찬밥취급 받는게 가장 당연했던 팀이다.[170]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쇼트트랙 금메달 사건과 미국전을 치르고 3일 후 일어난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 화근이었다. 다만 여중생 압사 사건은 그 이후에 파장이 더 컸지만. 반면 당시 미국 팀의 일원이었던 랜던 도노반은 한국전이 열린 대구광역시 경기장에서 어르신들이 보여준 호의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 한인타운에서 한국을 응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광역시는 알다시피 보수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데다가 한국의 보수는 대개 친미적이라서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171] 전반전에도 김남일의 얼굴을 손등으로 가격하여 경고를 먹은 프란체스코 토티였다.[172] 이와 비슷하게 유로 대회에서도 이탈리아를 도발하려고 상대국 팬들이 태극기를 올렸다.[173] 2002년생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20년까지이다.[174] 한일 월드컵때 전국민과 함께한 실질적인 마지막 세대인 2000년생과 2001년생을 포함한 1990년대 후반생은 비록 월드컵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월드컵 당시에 날짜가 나오는(사진에 따라 날짜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필름카메라로 찍은 붉은 악마의 비 더 레즈 티를 입고 응원하는 사진이 각 개인의 가정 사진첩에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20대 후반만 되어도 월드컵을 기억할 수 있다.[175] 마침 2002년이 국민의 정부의 마지막 해에 IMF 외환위기 극복으로 경제주권을 회복한 지 1년이 지난 시기였다. 그리고 브라질의 총 GDP를 처음으로 넘기고 현행 한류의 시초격이던 겨울연가가 방송한 해다.[176] 자세한 사항은 선진국/대한민국 문서 참조. 물론 완전한 선진국 진입까지는 1인당 GDP가 20,000 달러를 넘긴 2006년까지, 선진국 인식 확립까지는 대침체를 메이저 선진국 중 유이하게(나머지 하나는 호주) 무사히 넘긴 2009년~201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사실 여러 지표로 보면 경제적으로는 1인당 GDP가 10,000 달러를 넘긴 1994년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지만 외환위기 때문에 논외.[177] 터키도 유명하지만, 정작 이쪽은 원정 응원을 많이 오지 못했다.[178] 사실 그보다는 한국의 시민의식이 좋아진 것도 있고, 한국인은 특히 소위 집단문화가 강하고 중요한 순간에 있어서 의식이 뚜렷하다. IMF때 보여주었던 시민 의식이 여기서도 빛을 발한 것이다. 그 뒤로 2007년 기름유출 사고때 보여주었던 집단 시민 의식도 그렇고 말이다. 거기에 한국은 치안이 매우 좋다.[179] 이 쪽은 이후의 조사를 통해 단순히 교통사고로 인한 과실치사였음이 밝혀졌고, 피해 학생의 유가족들도 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후에 가해자를 용서한데다, 해당 사건의 가해자가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손에 사망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극심한 죄책감과 PTSD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가해자에 대한 동정 여론이 크게 일었긴 했다. 그러나 이는 사건이 발생한 지 수 년이 지나서 반미 감정이 희석되었을 때의 이야기지, 당시에는 주한미군 측에서 고의로 학생들을 깔아뭉갰고 이를 대한민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은폐하려 했다는 가짜 뉴스가 돌았던터라서, 가뜩이나 주한미군 측이 해당 사건을 한국의 사법당국으로 이첩시키길 거부했던 것 때문에 이들에 대해 분노하는 여론이 들끓었던터라, 가해 병사만 억울하게 천하의 개쌍놈으로 찍혀서 욕이란 욕은 다 들어야했다.[180] 사고 전부터 공장 건물과 고압선이 가까이 있어 감전 위험이 상당한데도 주한미군은 공사를 강행했으며, 막상 사고가 일어나자 미군측은 피해자 전씨에게 위로금 60만 원만 주고 묻으려고 했다.[181] 물론 남학생이 스포츠에 더 관심이 많긴 하나 그 당시의 월드컵 열기는 남녀노소 상관없었다. 상갓집에서도 월드컵 응원하는 판에 심지어 당시는 동네 아줌마들도 모이면 축구 얘기를 할 정도로 분위기가 월드컵에 올인되어 있었다.[182] 이 해 여름에는 아폴로눈병이 창궐하기도 하였는데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결석의 경우 공결 처리하는 규정을 악용하여 학교에 가기 싫은 학생들이 서로 눈병을 옮겨주는 풍조가 생겨 수업 결손이 유난히 많은 해였다.[183] 그리고 한국의 8강전이 있던 날, 두 주인공이 검열삭제를 해서 여자주인공이 임신을 하게 된다.[184] 이 시즌은 프로야구 창설 이래 가장 암흑 시즌이다. 평균 관중이 4,501명으로 역대 2번째로 낮다. 반면 일본프로야구는 야구 기반이 워낙 잘 다져진 나라이기도 하고 해서 월드컵 디버프를 그다지 받지는 않았다. 센트럴리그 평균관중이 31,532명, 퍼시픽리그 평균관중이 23,100명이다. 그럼에도 일본프로야구도 일본 축구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은 게임을 하지 않았다.[185] 2004년도 있긴 하지만 그 때는 병역비리 사건 말고는 딱히 큰 사건 사고가 없으면서 야구하기 정말 최적화된 환경이었기 때문에 예외로 친다.[186] 사실 이 대회가 흥행에 실패를 한 건 한일 월드컵의 열기에 묻힌 것도 있지만 그 당시 대회 시드를 받았던 임요환, 홍진호, 김동수, 조정현의 16강 조기 광탈, 그 당시 변길섭과 강도경의 한빛 스타즈 팀킬 결승 등의 요인도 있었다. 그래서 반대편 리복배 KPGA 투어 2차 리그 결승전은 아예 8강 스페인전 당일에 열고, 팬들과 선수들이 다 같이 결승이 열린 양재동 한전 아츠풀 센터에서 낮에 열린 스페인전 경기를 응원한 뒤, 축구 경기가 끝나자 바로 결승전을 여는 참신한 시도로 흥행에 꽤 성공했었다. 거기에 대진도 팀킬 경기이긴 하지만 홍진호와 이윤열이라는 흥행 카드들이 올라왔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음 시즌인 2002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결승전이 박정석의 가을의 전설 재현이냐 임요환의 전승 우승이냐의 떡밥과 함께 역대 스타리그 최다 결승전 관중인 25,000명이 모이면서 흥행에 대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