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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3:59:13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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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1988 - Opening Ceremony
국제올림픽위원회 공식 영상 풀버전[1]

1. 개요2. 특징3. 국내 방송사 중계진4. 식전행사
4.1. 해맞이
4.1.1. 새벽길4.1.2. 태초의 빛
5. 공식행사6. 식후공연
6.1. 좋은날
6.1.1. 강복, 차일춤6.1.2. 화관무
6.2. 혼돈6.3. 벽을 넘어서6.4. 정적6.5. 새싹6.6. 화합6.7. 한마당
7. 참석 주요 인사8. 여담
8.1. 대통령 겸 영부인 노태우
8.1.1. 논의
8.2. 비둘기 구이 사건8.3. 현대 누리꾼들의 재평가

1. 개요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특징

본 대회의 개회식은 전세계 10억 인구 (당시 세계 인구 50억 추산)가 TV로 시청하고 10만 관중이 주경기장에서 관람하였다고 한다. 한국 시간으로 1988년 9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2] 시작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회식이 보통 15시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것이었다.[3] 이러한 개회식 시간 조정에는 당시 국가 이미지 모토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맞춰 아침에 개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더 주요한 가설로는 미국 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여 미국의 저녁 시간대에 맞췄다는 얘기가 있다. 그 덕분에 개회식 당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된데다[4][5] 주간 정파 방송도 없이 연속으로 방송이 진행되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다.[6][7] 그리고 서울 올림픽은 낮에 개회식을 진행한 마지막 하계 올림픽이기도 하다.[8]

다음 올림픽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개최국인 스페인소피아 왕비펠리페 왕세자가 개회식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이들을 포함해 총리급 이상의 귀빈으로 일본다케시타 노보루 총리[9], 룩셈부르크장 대공, 감비아의 바카리 다르보 부통령, 스위스의 장파스칼 델라무라즈 부통령, 말레이시아의 아즐란 샤 부국왕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나카지마 히로시 WHO 사무총장, 토머스 브래들리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장, 그 해 미스 유니버스였던 폰닙 낙히란까녹[10], 태국의 티엔차이 시리삼판 부총리, 브루나이의 수프리 볼키아 왕자, 영국의 콜린 모이니핸 체육장관, 룩셈부르크의 기욤 왕자, 그리스 전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나카지마 겐타로 일본 문부대신, 스즈키 슌이치 도쿄도지사 등이 개회식에 참석했다. 참석인사들 중 정상급 인사라고 할만한 사람은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외에는 거의 없었다.[11] 대부분의 국가들은 주로 각료급 인사를 파견했다.

올림픽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식인 개회식에 정상급 인사가 다수 불참한 것은 세계 주요국이 몰린 미주와 유럽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이동거리가 먼 대륙이었던데다 이 당시만 해도 세계 사회 내에서 대한민국개발도상국이어서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위상이 꽤 높아졌지만 올림픽 당시만 해도 국력도 약하고 영토도 작았으며 올림픽 개최일 기준으로 몇십년 전 한국 전쟁을 치르고 빈곤에서 겨우 벗어난 아시아의 약소국이었기에[12] 각국 정부가 파견 인사의 급을 낮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올림픽 이후 대한민국의 위상이 수직상승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30년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우 정상급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개회식 당시 장내 아나운서에는 KBS에서 재직했던 원종관[13] 아나운서가 한국어 장내방송을 맡았다. 원종관 외에 양혜경 및 차명희 아나운서가 올림픽 공식 언어인 프랑스어영어 장내방송을 각각 진행했다.[14] 영어 방송 사고와 관련해서는 아래 여담 참조.

폐막 후 금성사가 총 2권짜리 VHS 비디오테이프로 나눠서 발매했는데, 제작은 한국방송사업단[15]이 맡았다.[16]

3. 국내 방송사 중계진

국내 방송사 중계진[17]
<colbgcolor=#eee,#191919> 파일:KBS 1TV 로고(1984-2018).svg파일:KBS 1TV 로고(1984-2018) 화이트.svg 서기원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파일:KBS 2TV 로고(1984-2018) 화이트.svg 이창호, 정미홍
파일:MBC 로고(1986-2005).svg파일:MBC 로고(1986-2005) 컬러 화이트.svg 김용, 조일수
KBS 라디오 우제근, 손석기, 박경희, 정혜실

4. 식전행사

개회식은 역대 올림픽 최초로 메인 스타디움 바깥의 한강에서 시작되었다. 한강에서 열린 '강상제'는 세계인들이 강을 통해서 잠실로 모이고 있음을 연출한 것으로, 전통 민요인 〈뱃놀이〉를 현대적으로 개사한 것을 배경음악으로 수상스키와 연날리기 등을 선보였다.[18] 용고를 얹은 유람선과 그 외에 다양한 선박들이[19] 메인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강상제는 끝난다.

4.1. 해맞이

4.1.1. 새벽길

강상제 공연이 끝나고 나서 큰 북을 세 번 치면서 개회식장으로 화면이 전환되고, 삼고무와 장구을 치면서 해맞이 공연 중 새벽길의 막이 올랐다. 그러고 나서 길놀이를 통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터씻기'를 행한다. 이후 강상제에서 운송되었던 거대한 용고가 조선 왕조의 군악대의 호위를 받으며[20]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세계수[21] 앞에서 해맞이를 위해 용고를 치자, 풍선들이 하늘로 떠올라 세계수는 해체되고 성화대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성화대가 모습을 드러낸 후, 한국의 선녀들과 그리스의 여신들이 만나서 동서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무용 '천지인'을 선보인다.[22]

4.1.2. 태초의 빛

다음으로는 대규모 매스게임을 선보였다. 매스게임에는 현대무용단과 세종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울예술전문대학, 동대문상업고등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23]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이처럼 개회식 예행연습을 위해 강제로 1년여간 단축수업을 받고 또한 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는 등, 2020년대 같았으면 수업권, 학습권, 학생 인권 등의 인권 침해 논란이 생길 만한 일이지만, 국가적으로 워낙 거국적인 행사였고 권위주의집단주의가 지금보다 강했던 시절이었기에 별 논란 없이 넘어갔다.[24]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폐회식 준비 때도 같은 문제가 제기됐다.[25][26] 출연자들은 '88'과 'WELCOME'을 큰 글자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선보인다.[27] 그러고 난 후 올림픽 팡파레가 울려퍼지고, 그 이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옥숙 여사,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입장한다.[28]

5. 공식행사

대통령 내외와 IOC 위원장 입장이 끝나고, 'WELCOME'을 만들었던 학생들은 '어서오세요', 올림픽 오륜마크, 서울올림픽 공식 휘장의 순서로 모양을 바꾸며[29] 매스게임을 선보였다.

매스게임 출연진들이 휘장 모양 그대로 퇴장함과 동시에 올림픽 기수단을 선두로 선수단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개회식 입장은 한글 가나다 순대로 진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30]가 선두로 입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가나가 2번째, 영국령 홍콩이 159번째로 입장했다.[31] 다만, 국가 간의 관계 및 사정에 따라 순서를 조정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경우 원래 입장순서가 이라크 다음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영향으로의 견원지간으로 인해 몇 나라 뒤로 순서를 미루기도 했다.[32][33] 개최국은 마지막에 입장한다는 전통에 따라 한국은 맨 마지막에 입장했다.

1970년대까지는 열병식처럼 대열로 줄맞춰 다소 경직된 분위기로 입장했으나,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의 몬트리올 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러한 관행이 타파되어 손을 흔들고, 국기를 흔드는 등 자연스럽게 입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여전히 군부독재의 영향이 남아있던 권위주의 국가였으나 선례를 따라 자연스러운 선수단 입장을 하였다. 선수단이 입장하면서 경기장 한 쪽에서는 카드 섹션으로 입장하는 국가의 국기를 표현하고[34], 군악대 수준의 연주단이 한국의 대중가요, 전통민요, 동요, 그리고 세계 각국의 전통민요를 편곡하여 입장곡으로 연주했다. 그 배경 속에서 자국의 대표적인 의상을 입고 여유있게 들어오는 선수단을 보면 당시 군사정권 시기의 경직된 분위기를 깨려는 노력을 주최측이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개회식 영상을 보면 선수단 입장 시 동선이 잘 정리되지 않은 탓인지, 몇몇 국가의 선수들은 잠깐씩 멈춰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모든 선수단이 그라운드에 대형을 맞춰 서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온 국가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설 자리를 찾는 동안 뒤에 들어온 선수들은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44] 그래도 상술했듯 각 국가의 대표단이 자국의 이미지를 홍보하고자 개성을 뽐내는데 주력했으며[45][46], 다들 웃으면서 즐겁게 입장하는 분위기였는지라 입장이 지체되는 것 또한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국 선수단이 정상적으로 개최국으로서 입장했으며, 기수로 발탁되는 영광을 얻은 유도조용철 선수[47]를 앞세워 단상 바로 앞에 미리 만들어놓은 자리로 이동했다.

선수단이 모두 입장한 후, 박세직 조직위원장의 개회사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48] 도중에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는데, 사마란치 위원장의 말이 다 끝난 줄로만 알고 원종관 아나운서가 대통령의 개회선언이 있을 것이라며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이 탓에 사마란치 위원장이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도중 말이 끊기고 마는 초대형 방송사고가 터진다. 그래도 다행히 중간에 상황을 파악한 영어 방송 아나운서가 말을 중간에 끊어 사마란치 위원장은 대통령에게 개회선언을 부탁하는 말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49] 마지막으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를 한국어 발음으로 외쳤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이 개회를 선언했다.
''나는 제24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경축하면서, 서울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선언합니다.''
노태우 대통령

개회 선언 후 올림픽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관중들의 카드섹션이 이어졌다. 카드 섹션은 한국 전통 단청 무늬, 일월오봉도 그리고 오륜기의 색을 바탕으로 한 화합(Harmony), 전진(Progress)이 써진 글자였다. 팡파르가 울리는 순간 경기장 북쪽 한강과 잠실실내체육관 쪽에서 개회 선언을 경축하는 폭죽이 터졌다. 이어서 장내 아나운서의 올림픽 대회기 입장 안내가 있고 취타대가 선두로 들어오면서 그 뒤를 이어 역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냈던 양정모, 유인탁, 김원기, 신준섭, 조혜정, 최애영, 윤수경, 서향순 등 8명의 메달리스트들이[50] 올림픽기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왔다. 이후 합창단이 그리스어로 부른 올림픽 찬가가 울려 퍼지며 오륜기가 깃대에 게양되었다.

이어 전투기가 하늘 상공에 오륜기를 그리고 성화 음악과 함께 남문으로부터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바로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주자가 마지막에 바뀐 점인데, 원래 누구가 다 예상하는 것처럼 한민족 운동선수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51] 손기정이 점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모두가 예측이 가능하도록 너무 뻔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에서 개회식 이틀 전에 방침을 바꿔 손기정을 성화 점화자에서 봉송주자로 교체한 것이다.[52]

사실 손기정은 서울 올림픽 개회식을 무난히 소화하기 위해 76세의 고령임에도 무려 1년에 걸쳐 달리기 연습을 할 정도로[53] 성화 점화에 진심을 드러냈지만 당시 정부의 성화 점화자 교체 방침이 전해지자 격분한 나머지 의자를 집어던질 정도로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진정하고 정부의 방침을 수긍했으며 개회식 당일에는 어린이처럼 만면에 밝은 미소를 띄고 펄쩍펄쩍 뛰면서 성화봉송의 임무를 수행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이다.[54]

손기정은 성화봉을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온 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이자 아시안 게임 당시 슈퍼스타로 등극했던[55] 중거리 육상선수 임춘애에게 넘겼다. 그리고 임춘애가 트랙을 마저 돌고 난 후 최종 점화자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성화 점화자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표어였던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시민들이 점화하게 되었다. 바로 건국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라토너 김원탁,[56] 섬마을 학교[57] 체육 선생님이던 정선만[58]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재학생이던 손미정[59]이다. 올림픽의 관례였던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뜨린 것.
비디오머그가 정리한 개회식 명장면
위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2분 3초경)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방식(엘리베이터)으로 성화대를 점화한 올림픽이다. 이전부터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근이었던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까지도 거의 대륙별 스포츠 권위 대회에서 사실상 성화대 옆에 계단이 놓여져 있었고 이를 올라가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60]

이 성화대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개회식과 폐회식 연출을 총괄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후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화대의 엘리베이터는 예산 문제로 피아노 줄을 도르래에 연결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화가 점화된 이후 농구 국가대표였던 허재와 핸드볼 대표선수 손미나가 선수 대표로, 이학래가 심판대표로 올림픽 선서를 진행한다. 선서 후 애국가가 장내에 연주되고 다음 공연을 진행하기 위해 선수단은 모두 퇴장했다.

6. 식후공연

6.1. 좋은날

6.1.1. 강복, 차일춤

옥색 계열의 한복을 입은 출연진들이 춤을 추면서 식후공연은 시작되었다. 육군 공수특전여단 22명의 고공강하 스카이다이빙 쇼로 막을 열었다. 이어 세계 최정상급 스카이 다이버, 비.제이. 워스*를 리더로 전세계에서 모인 30여명의 국제스카이다이빙연맹 소속 챔피언들이 팀이 선을 보였다. 이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낙하하며 오륜마크를 만드는 연습과 착지연습을 한 뒤* 한강 고수부지에서 둘레 840미터의 주경기장 안에 정확히 착지하는 과정을 한달 동안 리허설을 했다. 잠실 상공 4,000미터 상공의 치누크 헬기 2대에서 자유낙하 한 30여명의 세계 최정상의 스카이다이빙 곡예팀이 공중에서 오륜마크를 그리는 모습을 헐리우드 영화 폭풍 속으로, 고공침투 등을 촬영한 탐 샌더스#, 노먼 켄트# 등 3인조로 이루어진 전문 스카이다이버 촬영팀이 주경기장 전광판과 전세계에 위성 TV로 생중계하였다.# 이들 모두가 올림픽 경기장 안으로 정확하게 열을 그리며 착지하여 전세계 시청자들과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61] 스카이다이버들이 강하하는 순간 경기장에는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울려퍼진다. 한복을 입은 800여명의의 영등포 여상 학생들이 축제 때 치는 거대한 차일을 들고 나와 춤추며 흔듦으로써 지상에서 다시 한번 오륜 마크를 연출한 스카이 다이버들을 환영했다.

6.1.2. 화관무

이후 조선 왕조의 궁중무용인 화관무를 선보여 태평성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무궁화 모양을 만들어내며 화관무 공연이 끝나고, 무궁화는 갈라지면서 다음 공연인 혼돈이 시작된다.

6.2. 혼돈

태평성대가 지나면 혼돈이 오기 마련이다. 다음 공연 '혼돈'은 무용수들이 각국의 민속 가면을 들고 나와 어지러운 군무를 추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한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한국의 전통 가면들이 개회식장 지붕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 순간 개회식장의 육상 트랙 주위에서 불꽃 기둥이 솟아 나오고, 연기가 자욱해지면서 혼란스러운 모습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리고 올라온 전통 가면들은 개회식장 안의 혼돈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6.3. 벽을 넘어서[62]

혼란이 종식되고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수많은 태권도복을 입은 출연진들이 몰려들어오면서 시작된다. 품새, 송판 깨기 등을 모든 출연진들이 칼같은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6.4. 정적

파일:snapshot_j_20151024_0001.jpg
개회식의 명장면, 굴렁쇠 소년
벽을 넘어서 공연이 끝나고 태권도 시범단들이 모두 개회식장을 빠져나간 후,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개회식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으로 뽑히는, 이른바 "굴렁쇠 소년"이다[63]. 행사 도중 윤태웅[64]이라는 만 7세 소년(1988년 당시 서울잠원국민학교 1학년 재학)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였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65], 경기장 한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등장한 국민학생 소년이 관중에게 손을 흔든 이 퍼포먼스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기획한 사람은 당시 올림픽 개회식 준비에 참여하던 이어령. 올림픽이 끝난 후 문화부 장관으로 영전한다.

16년 뒤에 열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스타디움 바닥이 에게 해(海)를 상징하는 호수로 변하며 한 소년이 홀로 대형 종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는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감독을 지낸 예술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에 의하면,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 연출을 위해 과거 여러 올림픽의 개회식을 참고하던 도중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 장면에서 어린 소년이 혼자 굴렁쇠를 굴리며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던 순간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어 아테네 올림픽에서 어린 소년이 종이배 모양의 보트를 타고 물을 가르지르던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굴렁쇠 소년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다섯 아이들의 모티브가 된다.

6.5. 새싹

굴렁쇠 소년 다음에 나오는 아이들은 잠실종합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서울삼전국민학교[66]의 두 학년이 맡은 것이다. 전후 피폐해진 대한민국에서도 새로운 아이들, 즉 새싹들이 피어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공연이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아이들은 바람개비를 만들어냈고, 중앙으로 아이들이 달려오며 바람개비를 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후에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놀이 출연진들이 들어오면서 아이들은 퇴장한다.[67]

6.6. 화합

다음으로는 우리의 민속놀이 중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고놀이'를 선보였다. 승패를 가르는 대신, 모두의 협동을 통한 화합을 보여준다.근데 어찌 된 게 음악과 규모 때문인지 의도와는 달리 대판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고놀이는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개막식 모두 광주 칠석동 고싸움놀이 보존회가 시연을 준비했다.

6.7. 한마당

마지막 순서였던 한마당에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 잡고코리아나가 열창했는데 트랙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공연자들이 자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우러진 것은 물론이고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와 개회식 식전/식후공연에 등장했던 전 출연자들까지 총집합했다.[68] 특히 하계 올림픽 사상 최초의 마스코트였지만 뮌헨 올림픽 참사의 비극에 묻혔던 1972 뮌헨 올림픽발디, 아프리카, 서방권, 공산권의 릴레이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1976 몬트리올 올림픽아미크,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의 미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샘이 19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69][70]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히 역대 올림픽 개회식 중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말[71]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다. 단순히 퍼포먼스의 완성도가 좋거나 노래가 좋다 정도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큰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피해국냉전 시대의 종지부를 찍는 엄청난 역사적 상징성을 함축하는 장면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서울 올림픽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 그 자체였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개회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자리를 같이 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16일간의 경기가 각 경기장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힘과 기를 겨루는 선수들이나 관전하는 모든 분에게 보다 큰 영광을 기원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개회식 한국어 장내 방송을 맡았던 원종관 아나운서의 개회식 종료 안내방송
안내 방송이 끝난 후 그라운드에 모인 개회식 출연자들이 관중들이 퇴장하는 동안 박수를 치며 동요 고향의 봄을 불렀고 경기장 밖 한강 둔치에서는 폭죽이 터지면서 올림픽 개막을 자축했다. 참고로 고향의 봄을 개회식 마지막 BGM으로 선곡한 것은 개회식 총괄 기획자 이어령 박사의 아이디어였다. 고향의 봄은 북한 미수복 5개 도의 도민가이다. 즉 실향민의 아픔을 상징하는 곡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령 박사는 냉전을 극복하고 전 세계가 하나로 화합하는 축제의 장에 참가하지 못한 북한과 대한민국의 실향민들을 위하여 마지막 곡으로 고향의 봄을 선정한 것이라고 훗날 밝혔다.

7. 참석 주요 인사


대한민국 측 참석 귀빈 명단을 보면 직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빠져있다. 12.12 군사반란5.17 내란으로 정권을 휘어잡은 전두환은 정권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올림픽 유치와 준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서울 올림픽 유치가 전두환의 12대 대통령 재임 중인 1981년 9월 30일에 결정됐고 전두환은 올림픽 개막을 6개월여 앞둔 1988년 2월 24일에 대통령직에서 퇴임했으니 서울 올림픽 준비를 주도한 사람은 노태우가 아닌 전두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본인이 준비한 행사였지만 본인으로 말미암아 생긴 여러 문제 때문에 올림픽 개회식에 못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올림픽 준비에 전두환이 온 힘을 다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전두환의 하나회 후배 박세직이 연희동 사저로 직접 찾아가서 전두환 측에 개회식 초청장을 전달했지만 "자신의 대회 참관 문제로 잡음이 일고 있는 것은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라며 결국 참석하지 않았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도 이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장세동, 이학봉, 안현태 등과 함께 연희동 사저에서 TV로 올림픽 개회식을 지켜보는 장면이 나온다. TV를 보면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려는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 정부의 푸대접에 분노하며 식식대는 이순자와 착잡한 측근들의 표정이 대조를 이룬다.

8. 여담

8.1. 대통령 겸 영부인 노태우


(다시 한 번 동영상의 29:33 부분을 자세히 들어보면 해당 안내문이 나온다.)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개막선언을 하는 당시 대통령, 그리고 올림픽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IOC위원장이 통상 나중에 입장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파티 시작 후에 모두가 기다리는 가운데 입장하는 것이라는 서양권의 전통문화에서 기인한다.

1988년 대회 개회식 당시에도 노태우 대통령과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식전 행사를 마칠 무렵 입장했다. 그런데 개회식장 안내 방송을 하던 중 오해의 여지가 생겼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입장을 알리는 영어 안내문이 다음과 같이 나온 것이다.

Ladies and gentlemen, the President and First Lady, Roh Tae-woo[73]Roh Tae-woo 지만, 이 안내문에서는 두음법칙이 적용된 표면형인 Noh로 발음되었다.] of the Republic of Korea, are now entering the stadium.

즉, 신사숙녀 여러분, 대통령 겸 영부인인 대한민국의 노태우께서 경기장에 입장하고 계십니다.라고 해석될 수 있게끔 안내방송이 나왔다.[74]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공식 국제행사의 안내방송에서 잘못된 문법이 사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원래 의도한 대로 표현하려면 \[...\] the President Noh Tae-woo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First Lady are now entering \[...\]이어야 하나 아나운서가 잘못 발음했다는 것. 그래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도 12.12 쿠데타의 주역인 5공 핵심 인사이자 군사정권 출신이었던만큼 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실수였을 텐데 당시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 그냥 넘어갔다는 설이 퍼졌었다.

8.1.1. 논의

이 표현은 공식석상에서 사용하기에 엄밀하지는 않더라도 심각하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다. 심지어 폐회식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만약 아나운서의 실수였다면 개회식과 폐회식에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다.

"Mr. and Mrs. 남편이름"으로 부부를 칭하거나 "Mrs. 남편이름"으로 부인을 칭하는 것은 미국에서 1970년대 너그러운 용법(sloppy usage)으로 통용되던 방식이고,[75] 아마도 이러한 관행을 본뜬다는 생각에서 스크립트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용역(register)이 잘못되었으므로 여전히 화용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표현임은 맞다. 대통령과 영부인은 둘다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공인이고 두 사람을 장삼이사 일개 부부로 통칭하는 것은 어색하다. 만약 외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을 우리나라에서 'the President and the First Lady + 남편이름'으로 호칭했다면 엄청난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이다. 실제로 다른 올림픽 개회식의 사례를 보면 단 한 건도 이와 같은 용법을 사용한 적은 없다.

8.2. 비둘기 구이 사건

성화 점화 때 의도치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앉아 있었는데 성화를 점화하였다. 이때 당시의 화질수준과 멀리서 찍은 점, 카메라 각도 등의 이유로 비둘기들이 떼로 불길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각도에서 훨씬 더 고화질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사실 불에 타 죽었을 가능성이 있는 비둘기는 단 한 마리다. 대부분의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불이 붙여질 때 불길이 닿지 않는 외곽 난간에 있었고, 당연히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했으며 성화 점화 뒤 다 날아갔다. 성화대 안쪽 불을 붙이는 곳에 있었던 건 한 마리 뿐이다. 아래 영상을 참고할 것.



서울올림픽의 성화대가 이전 대회와는 달리 크고 화려해서 새들이 앉기에 좋았는데 앉아 있는 비둘기가 사람 마음을 알아주고 날아가는 것도 아닌데다 성화 점화 순서는 닥쳤으니 할 수 없이 불을 붙였다. 사실 비둘기 퍼포먼스는 이전부터 동물학대 논란이 많았다.[76] 허나 서울 올림픽에서 카메라 각도상 비둘기들이 몰살 당하는 모습이 보여졌기에 오해가 생겼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한 이어령은 불에 타 죽은 비둘기는 없다고 말했다.(2016년 7월 11일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순백이 아닌 비둘기는 추려내다 보니 남은 순백의 비둘기 수가 적었고, 순백 비둘기는 비쌌다. 그런데 비둘기가 날아올랐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기획이었는데, 연습을 시킬 때마다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고 날아가버려서 자꾸 줄어드니까 연습을 많이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개회식 때 숙달된 비둘기가 적었다. 걔네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경기장 주변에 있거나 크고 아름다운 성화대에 높이 앉아서 올림픽 경기장의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가난이 죄라며 이어령은 눈시울을 붉혔다. 비둘기는 불이 붙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날아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둘기가 타죽었냐고 여러 곳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어령은 말했다. “모든 것이 녹화되어 있으니 똑똑히 틀어봐요. 진짜라면 중계권을 가진 NBC에서 먼저 보도했을 거야. 서울발 특종 기사로 말야.”[77]

어찌 됐든 올림픽 개회식에서 비둘기를 일제히 날리는 풍경은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사실상 사라졌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에는 비둘기를 폐회식 때 풀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주로 밤에 개회식을 거행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개막식 때 비둘기를 날리는 행사를 없애기로 하고 IOC도 나서서 앞으로 모든 올림픽에서 비둘기를 행사에 활용하는 관행을 없애기로 했다. 거기다 비둘기는 이제 유해동물이 되었으니...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는 이 사건을 소재로 다소 과장된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주인공 성덕선우간다 피켓걸로 참가한 후[78] 아빠 성동일과 쌍문동 둘리슈퍼에서 올림픽 개막식 때 받은 각종 기념품을 자랑하면서 "불에 타 죽은 비둘기들을 묻어줘야 한다"고 비둘기 시체를 집으로 가져왔다.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8.3. 현대 누리꾼들의 재평가

서울 올림픽 개회식 이후 30여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개회식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행사가 되었다. 특히 행사 내용 전체가 녹화된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다시 공개되고 21세기 들어서 열린 올림픽들의 개회식에서 크고 작은 실수[79]가 부각되면서[80] 서울올림픽 개회식이야말로 짜임새 있고 특색 있으면서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 행사였다는 재평가 여론이 커졌다. 2020년에 올림픽 공식 유튜브 계정으로 서울 올림픽 개회식 영상이 업로드되면서 아날로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덤이다.

아울러 2020년대 들어 옆 국가들이 개최한 올림픽의 개회식코로나19의 영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스케일이 작고 허술했기에 직전에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과 많이 비교되었으며, 심지어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역대 가장 규모 큰 개회식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 무려 30년도 더 전에 열린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과도 비교되고 있다.[81]


[1] 강상제 앞부분이 일부 잘린 채로 게시되었다.[2] 서머타임 적용[3]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은 14시에 시작되었다. 하루 중 가장 밝을 시각인데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 당일 하필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당시 동영상을 보면 한낮에 열린 행사였음에도 분위기가 다소 음침하다.[4] 당시는 토요일을 반공일(半空日)이라고 불렀다. 절반의 공휴일이라는 뜻. 반공이 아니다. 주 5일제와 52시간 근무제도가 시행되기도 한참 이전이라서 토요일에도 직장인은 오전 근무를 했고 학생들은 오전 수업을 했다. 따라서 개회식이 늦은 오후나 저녁이었으면 임시공휴일 지정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지만, 얄짤없이 근무시간(+학교 수업시간)인 오전에 개회식이 열리게 되었으므로 별 무리없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5] 사실 개회식이 근무시간 후에 열렸다 한들 임시공휴일 지정은 애초부터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다. 일단 재계가 일을 시키려는 특유의 욕심을 발동해봤자 상대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 단군 이래 최초이자 최고의 국가적 이벤트를 앞둔 상황에 전국민을 대동단결시켜도 모자랄 판에 재계가 쓰잘데기 없는 욕심으로 초를 치는 것은 당시 군사 정부가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올림픽 몇 년 전까지 정부의 명령을 함부로 반항했다가 정부의 탄압에 의해 흔적도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국제그룹동명그룹의 사례도 알고 있었기에 알아서 조용히 기었다고 볼 수 있다.[6] 불과 2005년까지도 지상파의 경우 낮에는 방송이 없었다.[7] 사실 주간 정파시간대 자체가 특집편성 앞에서는 무력화되었다.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올림픽 당시에는 당연히 온갖 특집 프로그램으로 융단폭격을 때렸고, 이외에도 1987년에 불어닥친 태풍 셀마호 내습같은 기상특보나 남북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전두환 해외순방 귀국 퍼레이드 등등 의외로 낮에도 방송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낮 방송 종료는 어디까지나 정규편성에 한했던 이야기. 사실 꼭 특집이 아니어도 방송이 가능했다. 당시 스포츠 중계에 한해서는 정파시간대에도 방송이 가능했었다. 올림픽 역시 스포츠 행사니까 특집 타이틀 안달고도 중계가 가능했다. 실제 올림픽 기간 내내 낮 정파 없이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방송이 이뤄졌다. 심지어 정파시간대에는 지금의 EBS인 KBS 제3TV에서도 중계를 했었다.[8] 동계 올림픽까지 포함하면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마지막.[9] 예비 올림픽 격이었던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도 당시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참관했다. 2년 밖에 안 지났는데 총리가 바뀐 건 안비밀[10] 태국 출신이다. 1988년도 미스 타일랜드, 동년도 미스 유니버스. 개막식 중계에 등장하기도 했다.[11] 본래 방글라데시의 에르샤드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불발되었다.[12] 현재 시점인 2020년대에 대입하자면 베트남호찌민시에서 2020년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가정했을 때, 국제사회의 시선이 어떠할 지를 생각해보면 된다.[13] 올드 스포츠 팬들에게는 친숙한 아나운서로 다양한 스포츠 중계방송을 맡았다. 특히 축구 중계를 전문으로 했는데 '83 축구 수퍼리그 개막전 중계를 맡기도 했다.[14] 출처: <KBS 저널> 1988년 9월호 p91.[15] 영상사업은 1991년 KBS 영상사업단으로 독립했으며, 법인 자체는 'KBS 문화사업단'이 됐다가 1999년 KBS 영상사업단으로 역합병됨.[16] 2021년작 영화 <모가디슈>에서 소품으로 썼는데, 작중 한신성 한국대사가 시아드 바레 대통령에게 가져가려던 선물들 중 하나였다.[17] KBS 중계진 참고 자료: <KBS 연지 1989>.[18] 이 당시 호돌이가 수상스키를 타는 모습도 슬로우모션 영상으로 공개됐는데 대회 마스코트의 파격적 등장에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19] 한강 유람선과 모터보트 등의 선박이 강상제 공연에 동원되었다.[20] 조선 시대 임금의 행차 모습을 빗댄 것이다. 용고가 태워진 가마를 임금으로 치환하면 임금의 행차 모습과 똑같다.[21] 성화대에 풍선들을 붙여 만든 것이다.[22] 천지인 공연 중에 세계수를 이루던 풍선 일부가 날아가지 못하고 개회식장으로 떨어졌는데, 이를 급하게 주경기장 하부 통로로 끌어내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는 해프닝이 있었다.[23]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 당시 '손님맞이' 매스게임에도 동원되었다.[24] 사실 이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전국체전을 개최하는 도시마다 이런 학생 동원은 평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면 동원되던 김일성 때려잡자(반공 대회)도 있었고. 참고로 한국은 민주화가 되고 이런 군중동원 체제가 사라졌지만 북한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25] 링크된 기사에 나오는 배명고등학교서울올림픽주경기장은 자동차로 10분이면 갈 정도로 매우 가깝다.[26] 하물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와 이태원 압사 사고를 겪었고 학생 인권이 발달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 2010~2020년대 학부모들은 1980년대와 같이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대규모 매스게임에 더욱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학부모들의 이런 반응이 아니더라도 2020년대 이후로는 저출산의 심화로 학생들을 대규모로 동원하기가 어렵다.[27] WELCOME은 본부석 맞은 편에서도 잘 볼 수 있게 본부석 맞은 편에서 먼저 선보이고, 그 후 바로 본부석 방향으로도 한 번 더 선보인다.[28] 이 과정에서 영어 방송 사고가 발생한다.[29] 특히 공식 휘장을 표현하는 매스게임 장면은 올림픽 개최에 대한 상징성이 어마어마했던 탓에 한동안 애국가 영상이나 국가 홍보 영상에 이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30] 그리스는 올림픽의 전통에 따라 동하계 올림픽때 항상 선두로 입장한다.[31]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이전이었기에, "홍콩 차이나"가 아닌 그냥 "홍콩"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한국어 순서 기준으로 가장 늦게 배치가 되었기에 당연히 개최국인 한국 바로 앞으로 순서가 배정되었다.[32] 서울 올림픽 개회식이 재평가를 받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들을 배려 하여 입장 순서를 조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때 항상 내세우는 세계평화의 정신을 구현한 것이기도 하고, 국가 간의 감정을 배제한 공정한 경쟁을 추구하는 올림픽의 가치관과도 상통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음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이라크 바로 다음 순서로 이란이 입장하며 이러한 배려는 서울 올림픽만의 특징이 되어버렸다.[33] 훗날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는 남북한이 동시입장할 계획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중국 간체자 획수 순으로 한국 다음으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연달아 입장하기로 했는데, 올림픽 개막을 한 달도 안남기고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 터져 결국 입장 순서를 조정하여 한국과 북한 사이에 몇몇 나라들이 입장했다.[34] 카드섹션 구역 넓이만큼의 국기를 현수막으로 만든 후, 그것을 각 자리의 크기에 맞게 잘라서 스케치북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뒷 좌석 단원들이 앞 좌석 단원이 들고있는 페이지를 넘기면 그대로 다음 국기가 나타나게끔 설계를 했다.[35] 당시 선수단 입장곡 음악물을 제작하기 위해 주최위원회에서 각국에 민요 및 가요의 음원을 요청하였으나, 30개국에서만 회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국가의 음악이 계속 연주되는 상태에서 다음 국가의 선수단이 들어와줘야 하는, 다소 안타까운 전개가 나왔다. 다만 이에 관련해서 외교적인 마찰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는데, 앞 국가의 음악을 들으며 입장하는 국가들은 음원을 보내지 않은 국가들이었다. 따라서 주최위원회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이 강했다.[36] 자세히 보면 군사정권의 잔재가 진하게 남은 시기였기도 하고, 행진곡으로 응용하기 좋은 곡을 찾다 보니 타국의 군가가 많이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37] 그리스의 전설적인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작사 및 작곡을 하고, 그리고리스 비티코치스가 부른 그리스의 대표 가요. 직전 대회인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그리스 선수단은 이 곡을 들으며 입장했다.[38] 번역하면 Axes by the river, 즉 강가의 도끼라는 뜻이다.[39]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오페라로, 이스마일 파샤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여 세운 오페라하우스의 개관식에서 상연시키고자 베르디에게 직접 주문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개관식 때까지 완성을 못해 대신 리골레토를 올렸고, 아이다는 나중에 완성되고 카이로에서 초연을 했다. 이외에도 타 부분이 선수단 퇴장 음악 초반부에 연주된다.[40] 당시 위를 보고 걷자를 행진곡풍으로 편곡하면서 전주 부분이 상당히 길어졌는데, 일본 선수단이 입장할 때는 전주 부분이 연주된 반면 막상 노래의 도입 부분이 연주될 때는 이미 이스라엘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었다. 어느정도 주객전도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41] 올림픽 전해인 1987년까지만 해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대놓고 중공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국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의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한 가창조국을 연주해도 크게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은 당시는 이 곡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였을 수도 있다. 이미 서울 아시안 게임의 중화인민공화국 선수단 입장식 때도 이 곡이 쓰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 당시보다도 더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영향을 끼치려 하고,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반중 감정이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치솟음에 따라 다시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하더라도 가창조국 연주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에서 개최하는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서 맨 마지막 자국 선수단이 입장할 때 꼭 이 곡을 튼다.[42] 우리나라에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갑니다로 알려져 있는 바로 그 동요이며, 폐회식에서도 여러 번 연주되었다.[43] 말라위~말리 입장시 연주된 신아리랑 행진곡과 타령 행진곡과 곡조가 비슷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곡이다.[44] 따라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선수단이 스타디움을 한 바퀴 돌고 그라운드가 아닌 지정 좌석에 올라가서 바로 앉는 것으로 동선을 설정했다.[45] 이러다보니 자유 진영 국가들과 공산 진영 국가들의 이미지가 단번에 비교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 선수단과 소련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는데, 미국은 짙은 푸른색 계통의 유니폼을, 소련은 옅은 붉은색 계통의 유니폼을 입고 왔다. 또한 미국은 입장하는 동안 어느 선수가 "Hi mom, I`m here"과 같은 현수막을 꺼내들고, 어느 선수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끼리 장난을 치는 등 최대한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는데, 소련은 비슷한 규모의 선수단이 웃으면서 손인사만 하고 대열을 유지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야말로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전체 600명 안팎의 대규모 선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선수단보다는 소련 선수단의 입장 속도가 훨씬 빨랐다.[46] 여담으로 미국 선수단이 얼마나 자유롭게 입장했으면 바로 뒷 순서인 바누아투 선수단은 미국 선수단의 후미에 가려 카메라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으며, 바누아투의 다음 순서인 바레인 선수단은 아예 입장할 타이밍을 놓쳐서 피켓 요원이 먼저 걸어나가 자기 혼자 카메라에 잡히는(...) 진풍경도 벌어졌다.[47] 이 대회 남자 최중량급에서 동메달을 받았다.[48] 잘 보면 박세직 위원장과 사마란치 위원장이 올라선 연단이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49] 원래 이 말까지 한 후 안내방송이 있어야 했다. 사실 성화 점화 당시 비둘기 사건보다도 이 상황이 더 심각했으나 사마란치 위원장이 크게 상관하지 않고 끝까지 환영사를 마쳤으며, 무엇보다 그 이후에 등장한 퍼포먼스가 너무도 엄청났기에 묻혔다.[50] 전부 하계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다.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낸 것은 이 대회 폐회 후에 열린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이 최초다.[51] 손기정 옹의 금메달 획득 당시 공식적인 국적은 일본이지만 그가 한민족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의 별도 수립 이후로 범위를 바꾸면 대한민국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양정모가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이고 북한은 1972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리호준이 최초다.[52] 반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너무나도 뻔한 대한민국 동계스포츠 최고의 스타 김연아가 성화 점화자가 되었다. 다만 이 부분은 어쩔 도리가 없었는데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회식 당시 스포츠와는 아무 연관이 없던 배우 이영애를 성화 점화자로 선택했다가 조직위원회가 욕을 왕창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동계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경험이 있는 체육인으로 성화 점화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기훈도 있었지만 인물의 인지도나 콘텐츠 파괴력만 놓고 보면 김연아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53] 서울 올림픽이 치러질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70대 초반이었다. 환갑에 이르면 성대한 잔치를 하고 고희를 맞으면 엄청나게 장수했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보통의 노인들이라면 거동이 힘들어지는 연령대였음에도 손기정은 펄쩍펄쩍 뛰어 다녔을 정도로 탄탄한 체력을 자랑했다. 그는 평상시에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했으며 90세까지 살다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났다.[54] 그리고 4년 뒤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황영조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 우승을 차지하는 장면을 직접 경기장에서 목격하는 감격을 맞이하게 된다.[55]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본인의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임춘애의 인생 스토리는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끝에 당당하게 올림픽 개최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모습과 닮았기에 최종 성화 봉송주자로 안성맞춤이었다. 참고로 임춘애는 이 대회에서 주최국 특례에 따라 출전 자격을 얻어 대회에 출전했지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56]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바로 이전 짧게나마 한국 마라톤계를 빛냈던 선수였다.[57] 흑산중학교 소흑산분교(현 가거도분교)[58] 아내가 만삭이라 낙도 근무를 할 수 없던 친구를 대신해, 스스로 낙도 근무를 선택했다고 한다.#.[59] 이후로도 계속 무용계에 종사하며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다.#.[60] 바로 다음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성화는 시각장애인 양궁선수가 불화살을 쏘아올리는 형태로 점화했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는 파킨슨병을 앓던 복싱스타 무하마드 알리가 떨리는 손으로 이동식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는 형태로 성화를 점화했다.[61] 이 때 참석한 분의 회고에 따르면 '잠실 운동장? 엄청나게 넓어 보이지? 그 정도 크기 DZ(drop zone)면 2층에서 콩을 떨어뜨려서 이쑤시개에 꽂는 게 더 쉬울 거다."라고(...) 실제 스카이다이빙 DZ는 보통 km 단위로 지정하는데 잠실주경기장 필드는 긴 변이 380m밖에 안 된다.[62] 88 올림픽 개회식의 주제문이기도 했다.[63] 최상단 개회식 영상 2시간 53분에서 그 장면을 볼 수 있다.[64] 올림픽 개최가 독일 바덴바덴에서 결정된 날인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난 덕에 '88 호돌이 호순이 선발대회'를 통해 같은 날 태어난 또래 88명 중 개막식 참여 아동으로 뽑혔다고 한다.(나머지 당선자 1명은 차효림) 현재 [age(1981-09-30)]세. 이후 MBC <그사람 그후> 14회(1995년 2월 17일 방영분)와 SBS <진실게임> 269회(2005년 4월 26일 방영분)에 출연하면서 근황이 알려졌고, 2009년 10월 4일 방영한 해피선데이 1박 2일 시즌1 연평도 1편에 깜짝 출연했다. 2008년부터 2017년 2월 초까지 듀오정보 광고 모델로도 고정 출연했고, 2018년아우디의 CF 모델로도 출연하는 등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재밌는 TV 롤러 코스터에서도 주역으로 나왔다.[65] 이전의 식순이 '혼돈'을 표현한 공연과 '벽을 부수는' 태권도 공연과 대조되게 상당히 정적이다.[66] 이 학교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 당시도 '꼭두각시' 공연에 아이들을 출연시켰다.[67] 고놀이 출연진들이 들어오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화면 아래에 바람개비를 흔들면서 퇴장하는 걸 볼 수 있다.[68] 일부 공연 출연자들은 개회식장 중앙의 축구장이 아닌 객석 쪽에 자리하기도 했다.[69] 개회식 영상을 자세히 보면 호돌이 탈을 쓴 출연자가 신이 난 나머지 상모 돌리기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70] KBS 1TV에서 개회식 중계를 맡았던 정미홍 아나운서는 무대에 오른 마스코트들을 설명하면서 마스코트의 이름이 아닌 개, 비버, 곰, 독수리 등 동물의 명칭으로 언급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71] 언제부터인가 매번 하계/동계 올림픽 개회식이 진행된 이후에는 서울 올림픽 개회식 영상에 "서울 올림픽만큼 힙하고 이채로웠던 퍼포먼스가 없다"는 호평 댓글이 줄줄이 달리고 있다.[72] 당시 스페인 왕위 승계 서열 1위로 2014년 스페인 국왕에 즉위했다. 차기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최국의 대표자 자격으로 어머니인 소피아 왕비와 방문한 것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울 올림픽 요트 종목에 선수로 출전한 누나 크리스티나 공주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73] 노태우대통령의 공식 로마자 성명은[74] 단 뒤 이어진 불어 안내문에는 올바르게 나왔다.[75] 여성인권운동 이전의 맥락에서 부인의 사회활동이 없던 경우 외부인이 부인의 이름을 아는 것이 기대되지 않았으므로 남편이름을 통해 호칭되는 것이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관행이 70년대, 남부의 경우 80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76]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선 '살아있는 비둘기 쏘기'가 경기 종목이었다. 300마리 가량의 비둘기가 선수들의 목표물로 던져져 21마리의 비둘기를 쏜 벨기에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올림픽 경기지만 하늘로 날아오른 비둘기들이 총을 맞고 추락하는 장면을 관중들은 봤다. #[77]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비둘기들이 타죽었다고 보도했지만 위 녹화 영상에서 보듯이 타 죽었을 비둘기는 한마리 뿐이다. 어쨌든 비둘기가 타기는 했다는 거잖아.[78] 본래는 마다가스카르 피켓걸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개회식 3일 전에 인터뷰를 하다가 마다가스카르가 정치적인 이유로 불참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 날은 언니의 생일이기도 해서 저녁에 집에서 언니의 생일파티를 했는데, 3일 후로 다가온 자신의 생일파티를 언니와 같이 해주자 피켓걸 참가가 무산될지도 모를 허탈함이 겹친 성덕선은 가족들에게 둘째로서 겪는 서러움을 모조리 쏟아내기에 이르렀다.[79]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블루스크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성화대 1개 고장,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의 사륜기,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의 거꾸로 계양한 오륜기 등이 대표적이다.[80] 서울 대회 개막식 역시 실수가 있긴 했지만 다른 대회에 비해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이다. 지적받았던 실수는 상술했던 선수단 입장 간 동선 문제로 인한 선수단의 멈춤 문제, 사마란치 위원장의 말 끊기, 경기장 방송 호칭 문제, 비둘기 통구이 의혹 정도이다. 그러나 서울 대회 당시에는 역대 최다규모의 선수들이 참여한 상태였고, 이 선수들을 그라운드에 오열을 맞춰 세워야 한다는 통념이 남아있었기에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대인배처럼 크게 상관하지 않고 넘겼으며 대통령 겸 영부인 발언 역시 예외적인 영어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간주해도 되었다. 비둘기 통구이 의혹은 가장 많은 비판을 받던 부분이었으나, 21세기 들어서 카메라 각도 때문에 생긴 오해였고, 사실 성화에 휘말린 비둘기는 한 마리 뿐이었다는 해명까지 나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81] 2018년도에는 드론을 날리는데 1988년도에는 사람까지 날렸었다는 멘트까지 나왔을 정도로 한국에서 열린 올림픽의 개회식에 대한 호평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