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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그룹

1. 개요2. 역사
2.1. 해체
3. 계열사 목록4. 관계사 목록5. 관련 문서6. 참고/외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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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東明

1925년부터 1980년까지 동명목재상사를 주축으로 한 목재/제조업 특화 기업 집단. 라이벌 성창기업처럼 부산을 대표한 목재 재벌이었으나 신군부 세력에 의해 해체 당한 기업 1호였다.

2. 역사

1925년 목공 강석진이 경상남도 부산부 부산면 좌천동에 있는 일본인 가구점 근처에 '동명목재소'를 연 게 시초다. 1945년에는 범일동으로 이전/확장한 뒤 1949년에 '동명목재상사'로 사명을 바꾸고 1959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가공하고 1961년에는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해 호평을 받았다. 1964년에는 남구(당시 부산진구) 용당동에 대규모 목재 가공 공장을 만들었다. 거기에 1967년엔 부산은행을 세워 1968년에는 명예 회장에까지 추대됐다. 1973년에는 부산투자금융까지 세웠다.

1965년 당시 국내 재계 서열 1위의 재벌이었고 1970년대 당시에는 한국에서 7년 연속 수출 1위 기업이었다. 해체 직전까지만 해도 동명해운, 동명산업, 동명중공업, 동명개발, 동명식품으로 구성된 6개의 다양한 자회사와 동원공업대학(現 동명대학교), 동원공업고등학교(現 동명공업고등학교)[1]를 보유한 굴지의 재벌이었다. 거기에 1977년에는 '동명불원'을 세웠다.

파일:dongmyeongmokjae_gangseokjin_sodeuk.png
74년도 종합소득세신고소득금액 순위표
(신고분) <단위 천원>
순위 성명 주된 소득 장소 소득 금액 자진 납세
1 강석진 동명목재 4,785,473 811,342
2 조중훈 대한항공 1,490,524 501,700
3 권철현 연합철강 425,125 145,129
4 이상순 원풍산업 367,571 91,954
5 단사천 한국제지 305,909 86,841
6 전중윤 삼양식품 301,944 75,498
7 주창균 일신산업 293,987 78,586
8 서정귀 호남정유 288,478 93,718
9 장병희 영풍광업 278,896 67,772
10 최기호 영풍상사 278,634 68,094

1974년도 종합 소득 순위를 보면 1위에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이 위치해 있다. 2위 조중훈(대한항공)의 3배가 넘고 3위와는 11배 다만 이후에는 사업이 부진했던 것인지 1976년 5위, 1977년 3위, 1978년 8위로 정체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그래도 대단하지만. 동명목재 전성기 시절 강석진 회장은 자동차 수입 자유화가 시행되기도 한참 전에 국내에 몇대 없는 벤츠의 플래그십 차종인 벤츠 600을 타고 다녔을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 참고로 당시에는 자가용 보유 여부가 부유층 인증 여부와 마찬가지였던 시절이어서 소형차 1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부러움과 질투심을 사기에 충분했는데 그 와중에 고급 외제차를 직접 소유하고 다녔다니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잘 나갔다는 얘기다.

2.1. 해체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273131_STD.jpg
▲신군부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작성한 강석진 회장의 포기 각서

하지만 1979년 장남 강정남에게 사장직을 맡긴 후 방만한 운영과 해외 원목 가격 상승, 국내 건설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80년 국보위에 의해 표면상 강제 헌납 명분으로 1980년에 어이없게 강탈당해 사라지고 말았고 계열사들은 한국산업은행의 관리를 받다가 정리되거나 각자 다른 기업에 매각됐다.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 시기였던 1969년에 김대만 당시 부산직할시장이 수뢰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는데 이를 강석진 회장이 변호하다가 같은 시기 동명불원[2]을 고급묘로 이장하는 것이 차지철의 시야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해체 원인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이다. 이후 1980년 국보위가 들어서자마자 동명목재 노동자 투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투쟁이 그룹 자체를 와해시켰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두환 정부 시절 비슷한 이유로 희생된 국제그룹과 비교하면 둘 다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재벌이었던 공통점이 있고 당연하게도 두 그룹의 창업자 모두 말로를 어이없게 맞이하였다.

2008년에야 진실화해위원회신군부에 의한 강탈이라고 밝혔지만 실의에 빠진 강석진 회장은 동명목재를 강탈 당한 후 화병을 얻어서 1984년에 이미 작고했고, 아들 강정남 전 사장 등 후손들이 1988년 청원서를 내고 1997년 국가를 상대로 반환 소송을 걸어 1998년 1심 승소를 거뒀지만 이후 2000년 2심, 2002년 상고심에서 각각 패소당했다. 2010년에도 국가 및 부산시, 해운대구 등을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가 2011년 1~2심 전부 시효가 지나 번번이 기각 당하고 말았다. 공장 터는 현재의 동명공고 남쪽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옛 계열사 중에 구 오너 가문이 소유하는 거라고는 동명대학교동명공업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정도다. 그 외에 동래구에 있는 해바라기 맨션도 계열사 동명개발이 금양이라는 건설업체와 공동으로 건설한 것이고 현재도 남아있다.

3. 계열사 목록

4. 관계사 목록

5. 관련 문서

6. 참고/외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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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명공업고, 동명정보공업고등학교,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를 거쳐 2019년 현재 교명으로 변경했다.[2] 가족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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