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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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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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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 李氏 (完山 李氏)
전주 이씨 (완산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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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관향 <colbgcolor=#fff,#191919>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시조 이한(李翰)
주요 파조 주부공 (이양무의 4남)[1]
완풍대군 (환조의 장남)[2]
의안대군 (환조의 3남)[3]
선성군 (정종의 4남)[4]
덕천군 (정종의 10남)[5]
무림군 (정종의 15남)[6]
양녕대군 (태종의 장남)[7]
효령대군 (태종의 차남)[8]
경녕군 (태종의 4남)[9]
임영대군 (세종의 4남)[10]
광평대군 (세종의 5남)[11]
밀성군 (세종의 12남)[12]
월산대군 (덕종의 장남)[13]
해안군 (중종의 차남)[14]
덕흥대원군 (중종의 8남)[15]
집성촌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상도동
광주광역시 광산구 수완동
경기도 연천군 삭령면 도연리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완곡리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연봉동
평안북도 정주군 고덕면 관해동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석성동
인구 2,631,643명 | 국내 3위[16]
링크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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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문 겸 구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
파일: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종문.svg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문장[17]

1. 개요2. 기원
2.1. 대성팔족과의 연관성
3. 상세4. 용어5. 분파도6. 인물
6.1. 선원본계 종주(조선 왕조)
6.1.1. 고종 직계
6.2. 완풍대군6.3. 덕천군6.4. 양녕대군6.5. 효령대군
6.5.1. 18세손 이전6.5.2. 19세손6.5.3. 20세손6.5.4. 21세손6.5.5. 22세손 이후
6.6. 덕흥대원군
6.6.1. 12세손6.6.2. 13세손6.6.3. 14세손6.6.4. 15세손6.6.5. 16세손 이후
6.7. 광평대군6.8. 주부공파6.9. 그 외의 파계(派系)6.10. 계보 불명
7. 전국 분포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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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조선대한제국국성(國姓)으로 조선의 왕족들과 대한제국의 황족이 가졌던 성씨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시조 이한의 21세손이다.

전주 이씨는 국내의 모든 이씨 가문들 중 인구수가 가장 많은 가문으로 조선의 국성(國姓)답게 선원(璿源)[18]이라든지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 같은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제왕불감조기조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고도 하며 임금은 모든 백성 공동의 부모이므로 감히 그 임금을 시조로 하는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임금을 1세로 하여 세대를 따지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긴 것이다. 따라서 전주 이씨는 시조로부터 이양무(李陽茂)[19]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 목조대왕과 그 이후의 왕자파(王子派)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로 분류하고 있다.

2. 기원

시조는 통일신라 말기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재미있는 성씨 이야기'에 의하면 이한의 조상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설[20]신라 6성 중 하나인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는 설[21] 등이 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완산(完山)[22]은 선원(璿源)이 시작한 곳이라...''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8월 20일 임신(壬申) 1번째 기사
"삼가 선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경주 이씨이다.'' -《세종실록》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23]]
"삼가 선원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의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 휘 이한은 신라에 벼슬하여...''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 기사
"신의 22대 조상 이한에 이르러 신라에 벼슬하여 사공이 되었으며...''-《태조실록》5권, 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 기사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이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이한의 손자인 이천상이 신라에서 복야(僕射) 벼슬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공은 원래 중국사의 명예직이고, 복야라는 관직은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최초로 도입되었다고도 하는데, 진성여왕 시기는 통일신라가 끝날 무렵이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신라에서 복야 벼슬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신라는 삼국시대 신라가 아닌 통일신라를 말한다. 다만 고대의 기록에서 심지어 고려 때까지도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하는 시기보다 실제 바뀐 제도에 따라 관직이 임명되는 시기가 매우 늦는 경우가 보통이라 사공이나 복야에 실제로 임명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호족들의 성씨가 고려 초 '토성분정'과 이후 '봉미제도'로부터 생겼음을 감안하면, 성씨 제도를 시작한 중국에서 시조가 높은 벼슬을 하다가 왔다거나 통일신라, 고려 초기에 높은 벼슬을 하였다며 가문의 연원을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토성(土姓)이라는 것은 그 지역에 뿌리 내린 성씨라는 의미일 뿐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 나오는 경주이씨 기원 기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24] 다만, 경주를 본관으로 하며 기원이 신라까지 소급되는 9성[25]은 다른 성씨보다 일찍 발생한 성씨였으므로 사성정책이나 이주를 제외한 모든 이씨의 출처를 일괄적으로 경주 이씨로 소급하여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분명하지는 않다.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이씨(李氏) 성(姓)일 정도로 당대 유행하던 성씨이니 그래서 도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이는 전주 이씨뿐만 아니라 동성이본(同姓異本)인 성씨들의 공통적인 화제인데, 전주 이씨가 조선 왕가의 성씨이다 보니 독자적인 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 문제가 유달리 부각된다. 단순히 신라에서 벼슬한 이씨라는 점 때문에 신라 김씨가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 이씨가 경주 이씨를 중심으로 분화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조선 왕가의 선원 계보가 가문 바깥의 시선에서 봤을 때 경주 이씨와 연결될 여지가 있었다는 것 뿐이다. 어차피 아래의 인천 이씨 관계설에서 보듯 이광희(李光禧) 이전의 선계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당시나 지금이나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설에 불과하다.

전주 이씨와 인천 이씨의 관계에 대해서도 특이한 부분이 있다.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 이자연, 이천상과 인천 이씨의 이한, 이자연, 이자상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이름과 한자의 차이점과 이자연의 아들 이천상, 이자연의 형제 이자상으로 관계가 다른 점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만약 이들이 서로 동일인이라면, 인천 이씨 시조의 허씨 분적설이 정설이다 보니 인천 이씨와 경주 이씨와의 관계가 설명돼야 할 것이다. 다만, 전주 이씨 이한, 이자연, 이천상은 조선 왕조가 일어나면서 추가된 부분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에 쓰여진 '이자춘 신도비(李子春 神道碑)'에 기록된 이성계 가문의 내력에는 전주 이씨 시조로 이광희(李光禧)가 나온다. 즉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전주 이씨가 왕가(王家)로 일어서자 가문의 격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해 고려에서 최고 명문가로 손꼽히던 인천 이씨로부터 가져온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인천 이씨 이자겸의 작위가 한양공(漢陽公)조선국공(朝鮮國公)이었으니 실로 기이한 일로 이와 관련해 조선과 한양이 인천 이씨의 나라와 도읍이 되려다가[26] 그 운을 받지 못하자 전주 이씨의 나라와 도읍이 되었다는 도시전설도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계보를 정리하면서 시조인 이한이 신라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총서와 왕실 족보인 《선원록》의 내용이다. 이는 모계를 태종 무열왕의 계보와 연결함으로써 단일국가의 정통성, 즉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를 이어서 전주 이씨가 세운 조선이 통일삼한을 잇는다는 상징적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왕조의 종묘에 고려 공민왕의 신위가 모셔진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27] 다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이한의 묘가 있다는 전주 건지산(乾止山) 일대를 샅샅이 뒤졌을 만큼 이한(李翰)은 실존했던 인물로도 볼 수 있으므로 당연히 실제 혼인했을 수도 있다.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권문세족들이 숙청당했지만, 대부분의 고려 귀족은 조선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 이들 양반의 수는 소수였고, 17세기 광해군이 공명첩을 시행하면서 급격하게 성씨를 쓰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는데, 돈을 주고 벼슬을 사는 매관매직이 늘어난 탓이었다. 물론 이는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했다. 임진왜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세수가 필요했고, 신분제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명첩을 시행한다.[28]

조선 말기인 1894년(고종 31년)에는 갑오개혁의 실시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모든 국가 제도가 근대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양반 상민의 신분 격차가 없어지고,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는 더욱 늘게 된다. 1909년 4월 1일 일제가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상당수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면서 족보를 세탁하다 간혹 다른 집안끼리 1대 조상(시조)이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 땐 애초 다른 집안끼리라도 족보를 아예 합쳐버려 같은 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웃지 못할 합본 행위도 성행하였다.[29]

당연하지만 모든 전주 이씨가 이안사부터 시작되는 왕의 자손인 것은 아니다. 이른바 '선계'라 하여 이안사 이전에 갈라진 계파들이 존재하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이안사와 달리 전주 지역에 남아있었다. 전주 한옥마을 인근의 오목대는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성계가 전주에 살고 있던 전주이씨 친척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인 곳이라는 전승이 남아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상당수 전주 이씨들이 한양으로 옮겨와 정착하게 되었다.

2.1. 대성팔족과의 연관성

이렇듯 조선 왕실의 근원에 대한 기원론적 고증에 있어서 한계는 분명해보이지만, 전주 이씨의 선원(先源)을 구성하는 씨족들의 경우 일부 선원선계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다. 전주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백제 지역의 토성(土性)이니만큼 백제계 씨족들과의 연관성이 주목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백씨(白氏)이다. 우리나라의 백씨[30]는 백제에 입조한 중국계 가문인 예씨(禰氏)[31]가 자리잡기 이전까지 웅진성을 본향 및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백제의 대귀족 가문이자 팔성(八性)의 하나인 백씨(苩氏)의 후손들로 강력하게 추정되고 있다.[32][33] 백제에서 백씨로서 이름을 남긴 이들로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와 달솔 백기(苩奇) 등[34]이 알려져 있으며 대성팔족의 한 축을 담당하던 대귀족 가문이었으니 여느 팔족(八族)[35]과 지방의 유력한 씨족들[36]처럼 백제 왕실과의 혈연적 관계도 두터웠을 것이다.[37]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계를 비롯한 전주 이씨의 일원들이 이러한 부분들을 눈여겨보거나 의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같이 전주 이씨의 상계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백제 왕실대성팔족까지 연결고리가 이어지게 될 수 있다.
다만, 위 백씨 인물들은 막상 남포 백씨나 수원 백씨 측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이 비슷한 실존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한 백광신이나, 그의 조카손자인 백경선 등이 있다.
전조태조(왕건)후손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38]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39]
조선이 막 건국된 당대의 사람들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인 이성계를 어느 정도 '백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성계 본인도 스스로를 '전주 출신'으로 여겼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훈요 10조>의 해당 구절은 지역의 해석을 백제로 오해한 것으로 최근엔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청주에 있었던 친궁예 세력에 대한 경고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40] 실제로도 이성계 가문이 본인들의 정체성을 백제인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딱히 없는 상황이다.[41] 그외 학계내 자료들에서도 전주 이씨와 대성팔족 또는 백제를 깊게 연관시켜서 분석한 논문들은 따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42]

3. 상세

조선시대 당시의 전주 이씨 사람들은 대군의 4대손(현손), 왕자군의 3대손(증손)까지의 극소수만이 공식적으로 왕족으로 대접 및 규제를 받았으며[43],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으로 갈수록 왕손이 귀해지면서 전주 이씨에서 왕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44] 이외의 전주 이씨들은 다른 양반들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인 무의공 이순신. 양녕대군의 6대손[45]이라 조상들과는 달리 종친이 아니라서 실무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46] 다만 세금면제와 양반이면 다 받는 병역면제가 주어졌다. 원래는 관리가 되어야 병역이나 세금면제였지만, 조선 후기에 양천제반상제로 바뀌어 가면서 다 빠져나가긴 했다. 그래도 왕족의 후손이라 전주 이씨 출신의 서얼들은 양반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2차 왕자의 난 때문에 왕족 대우 못받은 회안대군 이방간의 후손들도 《선원록》[47]에 오르려 애를 써서 숙종 때 소원성취했다.[48]

조선왕조의 종친인 전주 이씨는 '이(李)' 성을 쓰는 어떤 집안과도 혼인하지 않는다. 조선 세종대왕 때 '같은 성씨를 쓰는 것은 본관은 다르더라도 근본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여, 간택에서부터 동성이본(同姓異本), 즉 이(李)씨 성의 배우자는 완전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민법상 동성동본간 통혼도 가능하기에 큰 의미가 없어졌지만 적어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이 불문율은 상당히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래서 조선 시대 왕비 중에 이씨가 없고, 나아가 왕가에 시집간 이씨가 없다. 후궁 중에는 이씨가 간혹 있으나, 정실 왕비 중에는 전혀 없다.[49] 따라서 외척 세력 중에는 이씨 자체가 없다. 유일한 예외라면 조선 건국 전 인물인 추존 대왕 목조의 부인 효공왕후 평창 이씨 정도뿐이다. 조선 이전인 고려 시대에는 전주 이씨인 왕비가 한 명 있는데, 강종의 왕비인 사평왕후(思平王后) 이씨이다. 이의방의 딸이며 조선 왕실의 직계 조상인 이린의 조카이다. 강종이 태자 시절 태자비였다가 이의방이 몰락하자 폐출당했으며, 이후 강종이 즉위한 뒤 사평왕후로 추숭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렇게 전주 이씨가 많아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자 전국적으로 전주 이씨를 발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주요 관직에 전주 이씨들이 줄줄이 오르게 되면서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천야록》은 저자 황현이 큰맘 먹고 쓴 것도 아니고, 야사에도 못 오를 수준의 당시 흘러다니던 야담들을 수록했으니 마냥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완용이 며느리와 바람 피우는 장면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장남이 보고 충격받아 자살했다는 이야기나, 김병국과 민규호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김병국이 이조판서가 되자 민규호가 "당신이 판서이니 이제부터 나는 정경부인"이라고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등 그 수준을 감안해야 한다.

조선 전기에 일찍 분파한 파일수록 후손의 수가 많아[50] 현재 효령대군[51], 양녕대군[52], 광평대군[53] 순으로 인구가 많다. 그리고 조선의 국성 아니랄까봐 과거 합격자의 수가 상당히 많아서, 생원과 진사과, 문과를 합쳐서 최다 합격자를 배출했다.[54] 전주 이씨는 왕성이니 예외이지만 일반 가문들을 급제자 수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급관리는 아무리 많아도 쳐주지도 않는다.[55] 전주 이씨는 혜택도 많지만 권력이 커지면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제약도 많았다. 전주 이씨는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 왕손이 많을수록 좋다며 이를 권장하였으며 또한 이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므로 가령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왕의 형제 효령대군 같은 경우는 손자가 33명, 증손자가 109명이었다. 갈수록 후손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전주 이씨는 조선시대에 정승 22명[56], 대제학 7명[57], 청백리 8명[58], 종묘 배향공신 14명[59], 문과 급제자 872명, 무과 급제자 1,470명을 배출하였다. 많은 분파들 중 으뜸가는 명가(名家)는 밀성군[60]로서 정승 6명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덕천군[61]는 부자 대제학 등 대제학 3명과 영의정 1명을 배출하였고, 광평대군[62]는 정승 3명, 선성군[63]는 정승 2명, 효령대군[64]는 정승 1명을 배출하였다. 대체적으로 정종, 태종, 세종, 성종 등 명군(名君)의 후손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의 종묘제례보존회는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보유단체'로 지정되었다. 즉, 문화체육관광부가 공인한 무형문화재 보유 단체로서, 정부에서 대동종약원에 종묘대제(宗廟大祭)의 종묘제례 관련 업무를 위탁한 형식이다. 종묘나 사직 대제 준비현장에 가면 전주 이씨 종친회 노인들이 제사 일로 논의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남양주 소재 홍유릉의친왕, 덕혜옹주, 회은황태손 등의 묘역은 평소엔 접근이 불가능하지만 제사 날짜에 맞춰 가면 손쉽게 입장하여, 제사 과정을 지켜볼 수도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전주 이씨다.[65] 구체적으로는 양녕대군 16대손이고[66]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장평도정 이흔의 큰아들 부림령 이순의 후손이다.[67]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조선의 프린스라고 소개하고 미국에서 주요인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중국, 일본과 달리 서구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나마도 망해 없어진 아시아 국가에서 온 입장에서 이렇게라도 해야 현지 엘리트층들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린스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프린스는 단순히 왕의 아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왕족 혈통의 남자후손을 아우르는 단어이고, 수많은 중동 왕자들도 단지 왕실의 일원일 뿐 왕위와는 상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프린스는 왕족의 남자후손을 전부 통틀어서 부르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엄연한 칭호다.[68] 조선왕조/대한제국이라고 해서 작위 및 칭호 체계가 없던 건 아니기에, 대군/친왕이나 대원군/대원왕같은 작호나 왕호가 프린스의 위치에 가깝다. 중동의 씨족사회처럼 조선에 전주 이씨 모두에게 칭호를 돌리는 관례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16대조 조상이 리처드 3세베네딕트 컴버배치를 프린스라고 부르지 않고, 황적이탈 이후 코무로 마코(小室眞子)를 더 이상 마코 내친왕(眞子内親王)[69]으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서양에서도 당연히 현지 작위 체계가 있다면 현지 방식을 따른다. 왕손이라는 것을 영어로 표현하려면 Royal blood, Royal offspring, Royal descendant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 된다.

4. 용어

한국의 성씨들 중 전주 이씨에서만 쓰이는 독특한 용어들이 있다. 국왕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 또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는 표현 등은 모두 전주 이씨 가문만의 독특한 용어들이다. 이중에서 '제왕불감조기조'는 제왕은 파조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국왕은 만백성의 아버지, 곧 국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왕을 1세로 하여 세대를 따지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어 왔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명칭의 계통들이 나오게 되었다.
총합 125파이나 파를 합하거나 끊어진 것이 있어 105파가 되고, 2012년 기준 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는 86파라고 한다.

5. 분파도

6. 인물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기재한다.[A][B] 그리고 이하에서 ‘n세손’은 ‘n대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즉 손자가 2세손이다), 다른 문서나 기록에서는 양자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혼동이 발생하기가 쉬워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통일성을 위하여 아들(또는 딸)을 ‘1세손’으로 호칭한다.

6.1. 선원본계 종주(조선 왕조)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의 이성계 직계 가문은 전주 이씨 종가가 아니었다. 종가는 장남의 직계 후손인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은 이한의 장남 후손 즉 종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성계조차 위로 이복 형 이원계(李元桂)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성계 가문이 조선을 건국하고 왕가(王家)가 되면서 종가, 종주 자리를 가져와서 현재 전주 이씨 종주는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 이원(李源)이다.

6.1.1. 고종 직계

고종은 생전에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장성한 자녀는 명성황후 소생 순종과 장귀인 소생 의친왕, 엄귀비 소생 의민황태자, 복녕당 양씨 소생 덕혜옹주까지 불과 네 명뿐이었다. 순종은 두 명의 황후 사이에서 자녀를 보지 못했고, 의민황태자의 장남 이진은 만 1세가 채 되기 전에 요절, 차남 이구가 장성하여 일본에서 지내다 자녀 없이 사망했으며,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한 정략혼인으로 쓰시마 후추 번주 소(宗)씨 집안에 시집가 1녀를 두었고, 이 딸은 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되었다. 따라서 현재 구황족이라고 할 수 있는 고종의 후손은 모두 의친왕의 후손이다. 의친왕은 스무 명이 넘는 자녀를 보았고, 그중에서도 아직 10여 명이 고령이지만 생존해 있다. 이들을 통해 고종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황손들 중에 유명한 인물을 아래 적는다. 황손이지만 다른 가계로 입적한 인물의 경우는 해당 가계 항목에 적는다.

6.2. 완풍대군

6.3. 덕천군

6.4. 양녕대군

6.5. 효령대군

6.5.1. 18세손 이전

6.5.2. 19세손[91]

6.5.3. 20세손[97]

6.5.4. 21세손[107]

6.5.5. 22세손 이후

6.6. 덕흥대원군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과 그 아랫대에서 갈라져 나온 모든 파이다. 따라서 선조, 인조 이후에 갈라진 파도 여기에 적으며, 이들의 경우 덕흥대원군 기준 세수 옆에 파조를 동시에 적는다. 이들을 함께 묶어놓는 이유는,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후대 왕통에서 갈라진 파까지 포함해 서로서로 양자를 주고받고 하면서 긴밀히 교류하고 항렬자까지 통일해 다같은 한 일가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에는 이들 덕흥대원군파 출신 후손들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다수 배출된 것이 재조명되는등 부정적 인식도 강해졌고 후손들을 규합할 구심점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유대관계가 끈끈하진 않다.

여담으로 금원군파와 영양군파도 덕흥대원군파의 항렬을 공유한다. 금원군은 아들이 없어서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릉군을 양자로 들였고, 영양군은 덕흥대원군의 동복 형이기 때문이다.

6.6.1. 12세손[115]

6.6.2. 13세손[118]

6.6.3. 14세손[120]

6.6.4. 15세손[124]

6.6.5. 16세손 이후

6.7. 광평대군

6.8. 주부공파[133]

6.9. 그 외의 파계(派系)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 이창윤: 안원대군 21대손, 시조 40세손 창(昌)자 항렬이다. 온앤오프의 멤버.
* 이효석: 안원대군파.

도조의 장남 완창대군[134]
* 이희호: 완창대군 21세손, 시조 42세손. 김대중 前 대통령 영부인.
* 이석현: 완창대군파. 前 20대 국회의원이자 前 국회부의장.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135]
* 이희승: 진안대군 17세손, 시조 40세손 '羲'자 항렬.
* 이경영: 진안대군 19세손, 시조 42세손 '榮'자 항렬.

정종의 장남 의평군[136]
* 이맹기: 의평군 17세손, 시조 40세손 '基'자 항렬.

정종의 차남 순평군[137]
* 이정용: 순평군 18대손.

정종의 4남 선성군[138]
* 이영훈 : 신성군파 19세손,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 이장우: 선성군파 도성 종중. 배우.

태조의 3남 익안대군[139]
* 이인제: 익안대군 17세손, 시조 39세손, '濟'자 항렬. 前 노동부 장관, 정치인.
* 이길여: 익안대군 19세손, 시조 41세손, '來'자 항렬. 가천대학교 총장.
* 이원발: 익안대군

태조의 4남 회안대군[140]
* 이채연: 회안대군 20대손
* 이채령: 회안대군 20대손
* 이찬: 회안대군파. 세븐틴의 멤버.

성종의 5남 안양군[141]
* 이민우: 안양군 17세손, 시조 44세손. '雨'자 항렬. 가수이자 신화 멤버.

성종의 7남 회산군[142]
* 이귀남: 회산군 18세손, 시조 45세손. #

중종의 차남 해안군[143]
* 이미도: 해안군 18세손. 배우.

중종의 7남 덕양군[144]
* 이범림: 덕양군 14세손, 시조 42세손 '林'자 항렬. 군인, 해군 제독.
* 이학림: 덕양군 14세손, 시조 42세손 '林'자 항렬. 교육자, 기업인, 정치인.
* 이정섭: 덕양군 15세손, 시조 43세손 '燮'자 항렬. 배우 겸 요리연구가.
* 이태섭: 덕양군 15세손, 시조 43세손 '燮'자 항렬.

선조의 4남 신성군[145]
* 이재설: 신성군 10대손

세종의 4남 임영대군[146]
* 두성령 이암: 임영대군 4세손, 시조 28세손.
* 이상민: 임영대군 21세손, 시조 45세손.
* 이동해: 임영대군 24세손, 시조 48세손 '東'자 항렬. SUPER JUNIOR의 멤버.

세종의 12남 밀성군[147]
* 이진욱: 밀성군파.

세종의 17남 영해군[148]
* 이정기: 영해군 15세손, 시조 40세손. 제헌 국회의원.

태종의 4남 경녕군[149]
* 이노근: 경녕군 19세손, 시조 42세손.

태종의 5남 함녕군[150]
* 이지선: 함녕군 24세손. 가수이자 코요태 멤버.
* 이윤성: 함녕군파.
* 이낙훈: 후령군 27세손, 시조 50세손.

환조의 3남 의안대군[151]
* 하령군 이양: 의안대군 3세손, 시조 24세손.
* 이용휘: 의안대군 19세손, 40세손 '徽'자 항렬
* 이호철: 의안대군 23세손, 44세손 '浩'자 항렬.

목조의 6남 안흥대군
* 이인근: 안흥대군파.

6.10. 계보 불명

7. 전국 분포

전국적으로 인구가 많은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를 제외하고 충청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부산광역시에 많이 살고 있다.[152] 반면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는 인구수가 적은데다 경주 이씨가 압도적으로 많아 전주 이씨가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럴 뿐 본관 인구 순위 3위인 만큼 대부분의 본관들에 비하면 많은 편이다.

그 밖에 북한에도 꽤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함경도 쪽에 많다. 애초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함경도 영흥 출신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다.[153]

8. 관련 문서



[1] 이양무 - 4남 주부공. 대동종약원의 조선선원•혈통계도는 이양무(李陽茂)의 장남을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4남을 주부공(主簿公) 이영습(李英襲)으로 표기하고 있다. 주부공파에서는 주부공이 이양무의 3남으로 목조의 셋째 형이라고 하나 증명할 기록은 없다. 이영습은 고려말 위위주부동정(尉衛主簿同正) 벼슬을 지냈다.[2] 이양무 - 장남 목조 ~ 증손 환조 - 장남 완풍대군.[3] 이양무 - 장남 목조 ~ 증손 환조 - 3남 의안대군.[4] 환조 - 차남 태조 - 차남 정종 - 4남 신성군.[5] 환조 - 차남 태조 - 차남 정종 - 10남 덕천군.[6] 환조 - 차남 태조 - 차남 정종 - 15남 무림군.[7]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장남 양녕대군.[8]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차남 효녕대군.[9]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4남 경녕군.[10]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3남 세종 - 4남 임영대군.[11]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3남 세종 - 5남 광평대군.[12]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3남 세종 - 12남 밀성군.[13]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3남 세종 - 차남 세조 - 장남 덕종 - 장남 월산대군.[14]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3남 세종 - 차남 세조 - 장남 덕종 - 차남 성종 - 차남 중종 - 차남 해안군.[15] 환조 - 차남 태조 - 5남 태종 - 3남 세종 - 차남 세조 - 장남 덕종 - 차남 성종 - 차남 중종 - 8남 덕흥대원군 - 3남 선조.[16] 호적상 4,250,423명이며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을 기준으로 등록된 인구는 2,631,643명이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언급으로는 500만 전주 이씨란 언급이 있었다. 500만 전주 이씨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북한에 있는 전주 이씨 인구를 포함한 것이고, 두 번째는 단순히 남한으로 한정해서 따진 호적상 인구만 볼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는 완풍대군파의 종원(宗員) 수를 소개할 때 북한에 있는 추정 인구를 집어넣어서 소개한 부분이 나온다. 이러면 단순히 500만 명이라는 숫자는 맞을 수 있어도 북한까지 포함한 호적상 인구로 확대해보면 비례의 법칙에 어긋나는 부분도 존재한다. 두 번째 경우는 남한 한정 호적상 인구가 500만이라면 북한까지 포함한 비례의 법칙을 적용해보면 500만을 금방 넘긴다. 충분히 500만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17] 종중(宗中)에서는 종문 가운데에 종(宗)자를 새겨넣기도 한다.[18] 璿(구슬 ), 源(근원 ). 직역하면 구슬의 기원이란 뜻으로 임금의 조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19]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아버지[20] 연대, 작자 미상의 '완산실록'이라는 출처불명의 책에서 '중국 기원설'이 등장하는데,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인해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족보에 기재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21] 실제로 경주이씨 대종보를 보면, 시조 이알평에서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 사이의 실전 세계를 부록으로 수록하면서 중간에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실전 세계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의 조선 말기에 발견된 족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 대종회에서는 실전세계에 대해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36대에 이르는 경주 이씨 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무더기로 발견된 점,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 등에서 신뢰하지 않고 있다. 항렬자를 근거로 한 반론의 내용은 세대와 세대 사이를 구분하는 항렬자와 달리 형제 사이의 돌림자(중국으로부터 성씨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 성씨와 유사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도 추정)는 최소한 고려 초부터는 나타나고 있어서 적절하지 않지만, 고대 계통 36대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한국사에서의 족보 제작이 대체로 조선 성종 연간 즈음인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점과 웬만한 집안은 여말선초 이전의 세계는 정확하게 상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혹의 여지가 있다.[22] 전주(全州)[23] 모바일 기준으로 링크 좌측 한글 본문 5문단 21번째 줄. 우측 한문 본문에서는 59번째 줄에 謹按璿源所自, 卽慶州 李[24]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토성(土姓)'을 두고, "조선 전기 성씨의 한 부류. 고려 이래로 과거, 또는 서리직을 거친 벼슬아치 집단의 성씨"로 적고 있다.[25] 신라의 왕성王姓박씨, 석씨, 김씨서라벌의 6촌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26] 실제 고려 인종은 이자겸에게 선위하겠다고 하였으나 당황한 이자겸이 감히 받지 못했다.[27] 고려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지만, 조선 왕조에서 고려 왕조의 마지막 적통은 공민왕으로 보기 때문이다.[28]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는 보르게시아(borghesia, 부르주아bourgeois)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왕족, 귀족에 이어 제3계급의 신분(Terza steto)으로 불리며 급부상하는데, 유럽에서도 이들 '부르주아'들이 신분상승을 위해 매관매직으로 귀족의 작위를 사기 시작하면서 신분제가 급격히 흔들린다.[29] 예로 들면, 육종영(六宗英)의 한사람이었던 하령군 이양의 손자인 이계조와 이소조는 광산 이씨 중시조의 7세손으로,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경녕군의 5대손)은 《김포 이씨 족보》에, 수춘군의 현손인 이세호는 《충주 이씨 족보》에, 덕천군의 5대손인 시흥군(始興君) 이정은 경주 이씨 국당공파 12세손(중시조로부터 28세손)으로 나온다. 이들 경우에는 합본이라고 말할 수 없어도 《전주 이씨 족보》와 다른 이씨 족보를 대조해서 보면 직책이 서로 겹치는 경우가 있다.[30] 수원 백씨, 남포 백씨, 대흥 백씨, 상당 백씨, 임천 백씨 등[31]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팔아넘긴 백제의 매국노인 예식진의 가문.[32] 백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었던 7개의 왕비족인 대성팔족의 하나였으며 한성백제의 멸망과 웅진성으로의 천도를 계기로 중앙에서 대두된 백제의 대귀족 씨족이다.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가의 반란으로 몰락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력 자체는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다만 웅진성이라는 핵심 본거지는 중국계 이주민 계열인 예씨(禰氏)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웅진이 아닌 상당, 대흥, 남포, 수원 등으로 본관이 자리잡은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나라나 왜국으로 건너간 것이 일부 확인되는 국씨(國氏), 목씨(木氏), 사씨(沙氏) 등과는 달리 망명이나 포로 신세에 대한 기록이 없어 백씨들의 대다수가 통일신라에 잔류하여 한민족의 형성에 알게모르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다만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멸망 이전에 일본으로 넘어간 백씨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다. 여담으로 학계에서는 수촌리 고분군의 주인들이 이들 백씨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33] 백제 멸망 이후 부여씨 왕실과 대성팔족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백제 지배층은 고구려 왕족과 귀족들보다 더 낮은 관등인 5두품으로 주로 격하된 뒤 신라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변성(變性)하거나 은성(隱性)한 정황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백씨(白氏)도 마찬가지다. 백씨 외에도 이천 서씨, 능성 구씨, 나주 임씨 등 여러 성씨족들이 있다.[34] 백제에서 왜로 건너가 노반건축 관련 기술을 전수해준 장덕(將德) 관등의 백제인 백매순(白昧淳)의 존재도 전해지고 있다. 본래 백씨(苩氏)인데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백씨(白氏)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5] 사씨(沙氏), 진씨(眞氏), 해씨(解氏), 국씨(國氏), 연씨(燕氏), 목씨(木氏) 등.[36] 흑치씨(黑齒氏), 귀실씨(鬼室氏), 억례씨(憶禮氏) 등.[37] 근친혼을 통해서 왕실과 왕족의 범위를 제한함으로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확보하려던 신라와 초중기의 고려와는 정반대로, 고구려백제에서는 일찍이 왕실과 귀족간의 혼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귀족 계층 전반으로 왕실의 혈통이 퍼지는 것을 굳이 억제하지 않았다. 고구려에서는 대표적인 예로 명림홀도연정토가 있으며 백제에서는 흑치상지, 억례복류, 귀실복신 등의 선조들이 이러한 왕족과 귀족간의 혈연적 결합으로 태어난 후손들이다. 신라의 고위 왕족인 만명공주와 혼인한 가야 금관국김서현이라든지, 일찍이 경순왕에게 시집가 여러 김씨 본관의 조상이 된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라든지, 여말선초 때 노책에게 시집가 교하 노씨의 시조모가 된 고려의 고위 왕족인 경혜비 왕씨 등의 사례가 이례적인 것이다.[38] 후백제를 의미하기도 한다.[39]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6일. <훈요 10조>의 8조에 대한 해석을 떠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이성계의 출자에 대한 평가다. 해당 문구는 왕씨 몰살이 발생하기 전 왕씨 몰살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나왔던 발언이다.[40] 다만 이는 위처럼 나타나는 당대의 해석과는 상이하는 것으로, 고려에서는 이를 구 백제 땅으로 인식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41] 이성계가 등장할 즈음인 여말선초 때는 이전 여몽전쟁이라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국유민의식이 희석된지 오래였다. 다만 고려와 고려 왕실 차원에서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의식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요동 정벌 등과 같은 대외 영토확장 사업에서도 나타난다.[42] 말 그대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므로 학계 입장에서는 크게 눈여겨 보지 않는다. 전주 이씨에 대성팔족의 피가 흘러도 결국 대성팔족이 선원(璿源)의 근본이 되는 집단이 아닌 여계(女系) 혈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 문서처럼 전주 이씨와 경주 이씨, 그리고 인천 이씨와의 관계를 더 주목하는 것이 사실이다.[43] 이는 제후국의 질서를 따른 것이다. 다만 대군이나 왕자군이 부왕의 형제인 백부 또는 숙부, 당숙 등에게 출계하거나 봉사손으로 지명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경우 생부인 부왕이 아닌 출계한 양부의 기준을 따랐고, 추존왕의 후손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대우를 정했다. 예를 들어 인조의 적3남인 인평대군의 현손인 이진익은 인평대군이 숙부인 능창대군의 양자로 출계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안흥군 이숙의 대에 왕족 대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은언군의 후손들은 은언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 의황제로 추숭되었기 때문에 덕안군 이재덕까지 장조 의황제의 현손 자격으로 왕족 대우를 받았다. 다만 양자, 봉사손 출계 기록이 깔끔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그냥 생부 기준으로 왕족 지위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은신군이 그 예로,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되었으나 중간에 경창군의 6대손 낙천군 이온이 연령군의 양자로 들어왔다 후사 없이 죽은 후 은신군이 연령군가로 들어오며 계보가 엉키는 일이 있었는데, 이 복잡한 계보는 대한민국 시대가 되어서야 정식으로 매듭을 지었다.[44] 현대에 일반적으로 대한제국 황족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남계 후손들은 의친왕의 혈맥에서 이어진 10여 명 남짓으로, 270만 명이나 되는 전체 전주이씨들 중에서도 매우 극소수이다. 조선 후기에 왕족이 줄어드는 문제는 꽤나 심각했는데, 이를 늦추기 위해 대원군의 봉사손은 몇 대가 지나도 왕족 지위를 유지하게 했을 정도였다.[45] 양녕대군의 서5남 장평도정 이흔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과 안동김씨 성균관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김씨의 다섯째 아들.[46] 조선은 성종 재위기 이래로 왕족들에게는 종친 관련 업무에만 종사하며 그나마 실제 하는 일도 많지 않은 명예직만 주어졌다.[47] 조선 시대 일종의 왕실 족보책.[48] 이건 족보에서 파였다가 다시 복권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숙종 때면 회안대군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300년 가까이 흐른 시점이라 후손들은 항렬상 이미 왕족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49] 이씨 후궁 중 유명한 인물로는 역시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친할머니인 영빈 이씨를 들 수 있다. 영빈 이씨는 전의 이씨 출신이다. 이외에도 전계대원군이 은언군의 전주 이씨(!) 출신 첩에게서 태어나는 등 드문 예외가 있다.[50] 무슨 대군파, 무슨 군파 이렇게, (왕이 되지 못한) 왕자를 기준으로 파를 정하기 때문에 당연하다. 일찍 분파한 만큼 왕통에서는 멀었기 때문이다.[51] 효령대군은 태종의 차남이다.[52] 양녕대군은 태종의 장남이다.[53] 광평대군은 세종의 5남이다.[54] 국성이므로 서얼금고법의 적용에서 예외되는 특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과거를 준비할 재력에 서얼금고 면탈의 특권이 더해져 차순위 가문을 더블스코어로 앞지를 수 있었다.[55] 명문가의 척도는 고위직인 정승이 나왔는지, 정승보다 더 쳐주는 대제학이 나왔는지, (전주 이씨는 왕족 그 자체이므로 해당되지 않지만)왕비를 얼마나 배출했는지, 유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국통(國統)을 상징하는 문묘 종사를 이뤘는지, 정치가로서 최고 영예인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종묘 배향을 이뤘는지, 국가가 어려울 때 앞장섰는지 등이다.[56] ◆영의정(11명) : 이화, 이유(李瑈), 이준, 이원익, 이홍주, 이성구, 이경석, 이경여, 이유(李濡), 이상황, 이최응. ◆좌의정(6명) : 이사철, 이헌국, 이이명, 이건명, 이관명, 이헌구. ◆우의정(5명) : 이후원, 이창의, 이휘지, 이서구, 이지연.[57] ※괄호 안의 숫자는 임명된 연도이다. 이양원(1590), 이경석(1638), 이민서(1680), 이관명(1719), 이진망(1730), 이광덕(1741), 이휘지(1776). ◆3대 대제학: 이민서 - 이관명 - 이휘지. ◆부자 대제학: 이진망 - 이광덕.[58] 전고대방 기준. 이석근, 이세장, 이원익, 이직언(=이시언), 이태영, 이제, 이의필, 이단석.[59] 이화(의안대군), 이방의(익안대군), 이천우, 이제(양녕대군), 이보(효령대군), 이원익, 이보(능원대군), 이서(완풍군), 이요(인평대군), 이유, 이구(남연군), 이상황, 이헌구, 이희(익평군).[60] 밀성군은 세종의 12남이다.[61] 덕천군은 정종의 10남이다.[62] 광평대군은 세종의 5남이다.[63] 선성군은 정종의 4남이다.[64] 효령대군은 태종의 차남이다.[65] 이승만은 자신이 전주 이씨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을 말아먹은 구황실에 대해선 대단히 싫어했다. 구황실 재산을 모두 몰수하였고, 일본에서의 입국을 거부하였으며, 여권 발급까지 거부할 정도였다. 그 이유에 대해선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그가 고종 퇴위 음모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평생 후유증이 남을 정도의 심한 고문까지 당했기에, 구황실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공화주의자로서, 구황실 인사들의 귀국으로 군주제(전제입헌이든)로의 회귀라는 여론이 형성되어 왕정 복고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66] 그런데 양녕대군파인 이승만이 효령대군파인 이기붕의 맏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 이는 법에도 금지되었던 일이며(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갈수 없다.), 집안 족보가 꼬이게 되는 일이었다.[67] 참고로 무의공 이순신의 직계손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은 무의공의 10대 방계손.[68] 물론 공작 이상의 고위 귀족 가문의 후계자를 프린스로 칭하는 관례가 아직까지도 남아있긴 하다. 예시를 보고 싶다면 왕위 요구자 항목을 참고하자.[69] Princess Mako of Akishino.[70] 시중공의 7세손에서 황강공파, 문정공파, 문하평리공파, 문헌공파로 분파되었다. 황강공파가 시중공파 중에서 대종(大宗)이며, 문하평리공파와 문헌공파에 관한 자료는 거의 드물다.[71] 이의방의 형제로 막내동생이다. 이의방과 의견을 달리하여 무신정변에 반대하였다.[72] 이윤경(李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가 있다고 몇몇 자료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이윤경은 이영습의 손자이다.[73]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아들들인 5대군파, 익조 이행리(李行里)의 아들들인 7대군파, 도조 이춘(李椿)의 아들들인 4대군파, 환조 이자춘(李子春)의 아들이자 태조 이성계의 형제인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대군파도 여기에 포함된다.[A] 연령대에 비해 항렬이 높은(세대교체가 느린) 경우다.[B] 연령대에 비해 항렬이 낮은(세대교체가 빠른) 경우다.[76] 이기용의 양녀가 되었으나 이후 의친왕의 호적에 입적했다.[77]대한민국 국방부장관기획재정부장관[78] 대한민국 45대 국무총리 이낙연 아들[79] 조부 이용연(李龍淵)이 양도공의 종손이다.[80]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그 이억기 장군이 맞다.[81] 조선조 최연소 과거 급제자, 조선말기 암행어사의 아이콘.[82] 세계적인 사업가(진).[83] 이승만의 직계는 아니고 방계 10대조 조상이다.[84] 기사 원문에는 16대손으로 적혀 있으나 17대손 또는 17세손이 맞다.[B] [B] [A] [A] [A] [A] [91] 효령대군 19세손, 시조 42세손 '康'자 항렬[B] [B] [94] 이기붕의 아들인데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양녕대군파의 17세손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이승만이 파와 항렬을 무시하고 멋대로 입양한거라 억지다.(...) 그래도 족보에 양녕대군파로 출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이강석 족보.png[A] [B] [97] 효령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宰'자 항렬[A] [99] 족보상 이름이 연재(年宰)다.[A] [A] [102] 족보상 이름이 준재(準宰)다.[A] [A] [B] [B] [107] 효령대군 21세손, 시조 44세손 '廷' 또는 '秀'자 항렬[A] [109] 호적에는 '壽'자를 쓰지만 본인은 '秀'자를 쓴다고 한다.[B] [B] [B] [B] [B] [115] 문조, 철종,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116] 이희 생전에는 외자를 '火' 부수로 짓는 게 항렬명 규칙이었다.[117] 은전군의 양자 풍계군의 아들로 입양되었으나 정치적 혼란에 엮여 파양당했다. '군' 작호는 왕의 4대손까지만 주는데, 선조의 10대손, 정원군(원종 추존)의 9대손,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 그래서 파양당해서 본가로 돌아감과 동시에 봉호는 무효화된다. 그래서 '전(前)'을 붙인 것. 여담으로, 정원군의 추존은 인조의 억지로 한 것이었는데, 세자도 아니었던 일반 서자를 왕으로 추존한 것은 법도에 어긋나서(당대의 신료들도 반대가 많았는데 인조는 우격다짐으로 뚫었다.), 통상 그냥 정원군으로 통칭한다. 그래서 정식 문서명도 원종이 아니라 정원군. 참고로 위키백과는 좀 더 엄근진해서 좀 껄적지근하지만 어쨌든 추존 왕호인 원종이 정식 문서명이다. 그래도 이런 족보 따질 때는 추존 왕도 엄연히 왕으로 간주한다.[118] 헌종, 고종과 같은 항렬이다.[119] 이시인 생전에는 '時'가 항렬자였다.[120] 순종, 영친왕과 같은 항렬이다.[121] 이하전 생전에는 '銓'이 항렬자였다.[122]산업통상자원부[123] 족보 이름은 '이정용(李正鎔)'이다.[124] 이구와 같은 항렬이다. 이 항렬대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정식 봉호를 받은 왕족, 황족이 존재하고 이후로는 없다.[125] 양자 입적 전에는 의친왕 2세손[126] 북한에서 귀순한 장교가 아닌 동명이인.[127] 족보 이름은 이우음(李愚音)이다.#[B] [A] [A] [A] [B] [133] 대동종약원의 조선선원•혈통계도는 이양무(李陽茂)의 장남을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4남을 주부공(主簿公) 이영습(李英襲)으로 표기하고 있다. 주부공파에서는 주부공이 이양무의 3남으로 목조의 셋째 형이라고 하나 증명할 기록은 없다. 이영습은 고려말 위위주부동정(尉衛主簿同正) 벼슬을 지냈다.[134]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장남.[135]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장남.[136]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차남 정종의 장남.[137]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차남 정종의 차남.[138]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차남 정종의 4남.[139]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3남.[140]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4남.[141]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차남 세조의 장남 덕종의 차남 성종의 5남. 성종의 장남 이효신, 3남 요절한 왕자, 10남 이견석을 포함해서 서차를 정함.[142]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차남 세조의 장남 덕종의 차남 성종의 7남. 성종의 장남 이효신, 3남 요절한 왕자, 10남 이견석을 포함해서 서차를 정함.[143]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차남 세조의 장남 덕종의 차남 성종의 11남 중종의 차남. 성종의 장남 이효신, 3남 요절한 왕자, 10남 이견석을 포함해서 서차를 정함.[144]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차남 세조의 장남 덕종의 차남 성종의 11남 중종의 7남. 성종의 장남 이효신, 3남 요절한 왕자, 10남 이견석을 포함해서 서차를 정함.[145]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차남 세조의 장남 덕종의 차남 성종의 11남 중종의 9남 덕흥대원군의 3남 선조의 4남.[146]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4남.[147]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12남.[148]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3남 세종의 17남.[149]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4남.[150]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차남 태조의 5남 태종의 5남.[151] 목조의 4남 익조의 4남 도조의 차남 환조의 3남.[152] 다만 경상남도의 경우 부산 및 경북 경주와 가까운 경남 동부 지역은 경주 이씨가 더 많고, 경남 서부 지역으로 갈 수록 전주 이씨들이 더 많이 산다. 그리고 부산광역시의 경우 전주 이씨와 경주 이씨의 인구가 서로 엇비슷하다. 대체로 동부산 및 동래권에서는 경주 이씨가, 서부산과 원도심에서는 전주 이씨가 좀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53] 단, 북한에서는 '봉건적 제도'라는 이유로 본관을 철폐하고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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