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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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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표
본명 이왕표(李王杓)
닉네임 날으는 표범 (재규어 리), 슈퍼 드래곤
출생 1954년 6월 11일
충청남도 천안군(현 천안시)
사망 2018년 9월 4일 (향년 64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0cm | 120kg[1]
종교 개신교
피니시 드래곤 스페셜 링크
파워 밤
스콜피온 데스락
테마곡 Super Dragon

1. 개요2. 기믹3. 주요 기술4. 프로레슬링 경력5. 프로레슬링 외 경력6. 비판
6.1. 자신의 과도한 위상관리6.2.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존중 부족6.3. 운영 미숙
7. 라이벌8. 타이틀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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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떤 사람들은 레슬링을 짜고 한다고 말하지. 각본에 의해 기술을 부린다는 거야. 우리는 진짜 피와 땀방울을 흘리는 거야. 아무런 고통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지. 그래서 내 챔피언 벨트는 더욱 더 값진 거야. 진짜 피와 땀방울이 묻은 챔피언 벨트이기 때문이지.
CB Mass - "진짜" 뮤직비디오 中.

대한민국프로레슬러이자, 김일의 후계자이다. 흔히 국내 팬들에게 역도산, 김일 이후 가장 유명한 한국 프로레슬러를 묻는다면 보통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 다만 일본 최고의 레슬러이자, 전세계 최고의 레슬러 중 하나로 언급되던 역도산이나 일본에서 이노키를 위협하던 악역이자, 70년대 한국 최고의 선역이었던 김일의 커리어와 비교하면 좀 격차가 있는 편이다.

2. 기믹

기본적으로 묶은 꽁지머리와 정돈된 수염에서 나오는 외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메인이벤터로 활동했던 기간이 길었고, 김일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있었기 때문에 반칙을 사용하지 않는 전형적인 선역 캐릭터로 활약했다.

신인 시절에는 이노키에게 명명받은 '플라잉 쟈가'라는 별명을 사용했고, 한국에서 경기할 때 당시 캐스터와 해설들이 '날으는 표범'으로 번역해서 소개했다.[2]

더벅머리에 단발 스타일로 활동했고, 도복을 입고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슈퍼 드래곤'이라는 링네임을 사용했는데, 등장할 때 용을 모티브로 한 빨강과 파랑이 섞인 반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다만 매 흥행마다 가면을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다양한 복장으로 등장했었다.

WWA 출범 이후에 격기도라는 무술을 창시했는데, 그 이후부터 등장할 때 종종 격기도 도복을 입었다.

3. 주요 기술

김일에게 직접 수련을 받았고, 신인 시절 일본에서 활동했었기에 일본 스타일의 타격 위주의 경기를 기반으로 드롭킥과 킥 위주의 공격과 몸을 날리는 공격을 선호했다.

피니시 무브로 파워밤을 주로 사용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턴버클을 딛고 돌아서 스피닝 킥을 하는 드래곤 스페셜 킥을 주로 사용했다. 간혹 드래곤 킥이라고 부르는 날아차기와 스콜피온 데스락으로 경기를 끝내기도 했다.

피니시 이후 핀을 할때 잭나이프 홀드 자세로 종종 승리를 거두었다.

4. 프로레슬링 경력

1975년에 데뷔했고, 커리어 초창기에는 일본의 여러 단체에서 주로 활동을 했다.
신일본 등에서는 영 라이언이라고 해서 수련생들을 다크 매치 등에서 고참 선수와 붙여 경험을 쌓게 하는데, 그래서 초반에 거의 20연패를 하는 등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50525_0013685269

오니타 아츠시와 데뷔전을 가졌고, 후치 마사노부에게 승리하였다. 그의 경기 스타일을 눈여겨본 안토니오 이노키가 '나는 표범이다!'라고 해서 플라잉 쟈갸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헐크 호건과 경기하던 중 그의 액스 봄버를 맞고 기절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는데, 프로레슬링 경기 기록 사이트인 케이지매치넷에 기록이 남아있다. 재규어 리가 이왕표이며, 그 태그팀 파트너인 양승휘는 역발산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한국 프로레슬링의 쇠퇴기가 시작되었다.열성적인 프로레슬링 매니아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이런저런 편의를 바줬었기 때문에,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로레슬링계는 경영난을 겪게 되어 점차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했다.[3]

신인 시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이왕표 선수는 주로 태그팀 레슬러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역발산의 파트너로 경기를 치렀다. 1985년 6월 20일에 김광식 (김일의 친동생)과 팀을 맺고 미스터 X & 블레이드 마스터즈에게 승리해 공석이었던 NWA 오리엔탈 태그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3년 이후 본격적으로 싱글 레슬러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한국 프로레슬링이 GWF로 흡수되었는데, 당시 미국 남서부의 최강자였던 로드 프라이스를 꺾은 데 이어 GWF 챔피언이었던 빅 쟈니 호크를 물리치며 커리어 첫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4] 그 후 이왕표는 유명해지기 전의 부커 T를 꺾었고, ECW 챔피언 경력을 가진 마이크 어썸까지 꺾으며 유명세를 쌓았고, 94년도에 김일의 후계자로 인정받아 한국 프로레슬링의 계보를 잇게 된다. 25번 타이틀 방어를 한 이왕표는 스스로 영구 GWF 챔피언이 되어 타이틀을 영구소장하게 되었다.

2000년, 한때 역도산, 김일이 챔피언을 지냈던 세계적인 단체였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 타이틀이 봉인되었었던 WWA를 부활시켰고, 그해 3월 장충 체육관에서 자이언트 커간을 꺾고 WWA 챔피언에 등극한다. 7월 28일 흥행에서 다른 외국인 선수들의 난입으로 자이언트 커간에게 타이틀을 뺏기지만 그해 하반기에 다시 승리를 거두며 챔피언 벨트를 되찾아온다.
(다른 기록에는 9월에 타이틀을 뺏기고 11월에 재탈환했다는 정보가 있다.)

WWA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이후로는 홍키 통크 맨, 페이크 커트 앵글(헤르난데스. 2000년대부터 TNA에서 LAX로 활동하며 당시 TNA 월드 태그팀 타이틀을 획득했었다.), 레더페이스 등을 상대로 승리하며 8년 이상 타이틀을 방어했다.

2003년 12월 WWE 내한 당시 스승인 김 일을 모시고 경기를 관람했다. 당시 태그팀 챔피언이었던 윌리엄 리갈& 랜스스톰과 함께 짧은 세그먼트를 찍었었는데, 당시 itv캐스터였던 김동연과 함께 태그팀 타이틀에 도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NOAH의 레전드 레슬러 미사와 미츠하루가 이왕표를 선배로 대우해준 덕에[5] 2000년대에 한국에서 WWA가 부활한 뒤 프로레슬링 NOAH와도 교류가 있었고, 아키야마 준이 내한해서 경기를 하기도 했다.

종합격투기 열풍에 편승해 울트라 FC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2008년에 밥 샙과의 종합격투기 경기를 발표하여 검색어 순위 1위까지 올라가는 등 엄청난 흥행을 예고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종합격투기 시합[6]에서 암바로 밥 샙을 탭아웃으로 이긴 후 울트라 FC의 초대 챔피언까지 차지했다. 이후 밥 샙이 2차전을 요청하자 프로레슬링 룰로 경기를 하게 되었는데, 레더페이스의 난입으로 방해를 받은 사이 밥 샙의 비스트 드롭킥을 맞고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이후 밥 샙이 1년 넘게 타이틀을 방어하다가, 2010년에 울산 흥행에서 밥 샙을 이기며 세 번째 WWA 챔피언에 등극했다.

2011년 12월 17일, 전남 고흥 흥행에서 신일본 2회 월드 챔피언이자, WCW 출신 레슬러였던 스캇 노튼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전남 고흥이란 곳이 레슬링 매니아들도 찾아가기 힘든 곳이라 실제로 경기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고,
일부 지역 신문을 통해서만 그 소식을 알 수 있었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12/18/2011121800025.html

2015년 5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2015년 5월 27일에 고향인 천안의 유관순 체육관에서 치를 예정이었던 은퇴 경기는 본인의 건강 문제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담낭암이 갑작스레 재발하며 투병 끝에 2018년 9월 4일 오전, 향년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왕표의 사망 이후 이낙연 국무총리 등이 애도를 표했고, JTBC 뉴스룸에서는 손석희 앵커가 앵커브리핑을 통해 이왕표의 죽음을 기렸다. 이왕표의 사망 이후 데이브 멜처가 그에 대해 짧게 소개했다. # 그리고 일본 내 매체에서도 짧게 이왕표의 부고 기사를 올렸다.

이왕표의 시신은 이후 화장되어 고양시 통일로 청아공원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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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WWA 흥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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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6일 병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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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3일 퇴원.

5. 프로레슬링 외 경력

일반인들에게 프로레슬러 하면 보통 이왕표를 떠올렸기 때문에, 90년대부터 은퇴 직전까지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주로 프로레슬링을 주제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거의 최우선적으로 섭외가 되었다.

1999년도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호기심 천국에서 4월 25일부터 2주 동안 프로레슬링 관련 다큐멘터리를 수입해서 방영했는데, 그 내용이 체어샷을 아프지 않게 때리는 법이라든가, 킥을 소리내서 때리는 법, 경기 전 심판과 사인을 주고받는다는가 하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프로레슬링 경기 중의 암묵적인 사인과 트릭들이었다. 방영 직후 내용을 알게 된 당시 한국프로레슬링 협회에서 항의하여, 그 다음 회차 말미에 이왕표 선수가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격투기와 같은 실전'이라고 주장하는 인터뷰를 방영하였다.

일본 단체에서는 아직도 프로레슬링 결과가 스포츠뉴스에 실리는 등 어느 정도 케이페이브를 지켜주는 편이다. 일본 레슬링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이왕표 선수가 그런 기조의 인터뷰를 할 수도 있었지만, 스토리라인 위주의 북미 프로레슬링에 익숙하던 레슬링 매니아들과 일반 팬들은 '프로레슬링이 쇼라고 알려진 지 20년이나 되었는데,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니냐' 는 평가를 내렸다.[7]

1999년도에 청춘시트콤 행진에 까메오로 출연했다.

2000년에 방영된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박치기왕 코너에서 개그맨 백재현이 그에게 프로레슬링을 배워서 데뷔전까지 치르는 여정을 보여주었다. 리얼리티를 표방한 예능 버라이어티 였지만 상당한 강도의 훈련을 받았고, 공중파 주말 버라이어티에서 많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잡았었다.
여기에서의 인연을 바탕으로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에 깜짝 출연하고, 개그맨 심현섭에게 바디슬램을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송강호 주연의 코미디 영화 반칙왕에서 프로레슬링 자문을 맡기도 했다.

2001년 프로레슬링을 바탕으로 한 격기도라는 무도를 창설했다. 김병만을 비롯한 몇몇 프로레슬링 좋아하는 개그맨들이 격기도 수련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부 프로레슬링 흥행에서 1, 2경기 정도 격기도 시범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통일교 재단의 선문대학교에서 13년간 체육학부 무도학과의 교수를 역임했다.

2003년에 MBC에서 방영된 일밤의 '대단한 도전' 코너에서 노지심과 함께 프로레슬링 특집으로 출연했다. 높은 곳에 있는 격파물을 드롭킥으로 격파하는 미션을 했는데, 시범을 보이면서 2미터 높이의 격파물을 드롭킥으로 맞추는 데 성공했다. 이경규, 김용만 등의 출연자들에게 코브라 트위스트와 피겨 4 레그락을 가르쳤다.

2010년 7월 3일에 방영된 MBC의 토크쇼 세바퀴에 출연하여 MC 왕종근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왕종근의 집에 초대받은 이왕표가 식사 중에 밥을 좀 흘렸는데, 집주인인 왕종근의 부인의 눈치를 보고 얼른 주워 먹었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줬다. 키 190에 100킬로그램이 넘는 세계 챔피언도 입담 센 여성 출연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여 많은 재미를 주었다.

2013년 8월, 담도암으로 수술 후 위독한 상태에 빠졌지만 회복하였다. 2013년 11월 15일에 KBS2 여유만만에 출연했는데, 담낭암 수술을 받기 전에 죽을 각오로 사후장기기증을 서약했고, 특히 안구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실명한 방송인 이동우에게 기증하기로 했었다고 밝혔다.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발언이 다시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도 기사화가 되면서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왕표의 여동생이 언론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기증을 받아 각막 수술을 해도 시력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이왕표가 암 환자라 기증 자체가 불가능해서 마음만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기에 서로 만나서 마음을 확인한 것까지가 사실이고 미담이었다고 딱 잘라 말했다.

2014년 10월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대리운전 사업을 시작했다.

2015년 은퇴 이후에 '앞치마를 두른 세계 챔피언'이라는 요리책을 냈다. 첫번째 담도암 투병 시절에 먹었던 항암 요리를 소개하면서 식이요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6. 비판

현재는 한국 프로레슬링판 자체가 워낙 쇠퇴하여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소수의 프로레슬링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프로레슬링 단체 운영 관련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왕표 선수가 단체를 대표하는 선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가진 몇몇 레슬링 매니아들에게 '왕표Suck' 챈트를 받기도 했다.

6.1. 자신의 과도한 위상관리

중소규모 레슬링 단체에선 흔히 인지도 있는 선수가 오랜기간 챔피언 벨트를 보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왕표는 그 중에서도 좀 과도할 정도로 자신의 위상 보호에 신경을 썼다. 첫 단체의 대표로 활동했던 GWF 시절 모든 1대1 타이틀 전을 방어하며 GWF 월드 챔피언쉽을 영구소장하게 되었고, 이후에 부활시킨 WWA 월드 챔피언쉽도 8년 넘게 방어를 하였다.

1993년 이후 싱글매치에서 3번의 패배를 당했는데 1번은 안토니오 페냐 회장에 의해 번복되어 무승부 처리 되었고, 타이틀을 뺏긴 2번도 외국인 선수의 난입으로 인한 억울한 패배였다. 정리하자면 ‘1993년 GWF 월드 챔피언 등극 이후로 은퇴로 타이틀을 반납하기 전 까지 국내의 싱글매치에서 난입 없는 핀폴패나 서브미션 패배를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는 대충 계산해도 8,000일 동안 단 한번도 1대 1에서 반칙없이 패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8]

중간중간 NOAH 등 다른 단체와 교류가 있었을 때, 타지리나 아키야마 준 등의 유명 선수들이 내한해서 경기를 하기도 했는데도 그런 선수들과의 매치업은 잡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9]

그러다 보니 2000년 초반에 있었던 이왕표 도장 1기생들은 모두 나갔고, 당시 유망주 레슬러였던 한대호 선수는 싸이월드 홈피에 'WWA의 현실'이라는 글을 올리고 탈퇴했다.

은퇴 이후 한 팟캐스트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받는 비판에 대해 발언한다. 악역 전환을 하거나 자신이 한 발 빠져 1선에서 물러나고 싶어도 주간 흥행이 아닌 1년에 한두 번 정도 흥행을 여는 WWA의 현실상 악역 전환을 위한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가 없으며, 일부러 경기를 안 하고 경기 중 난입 정도만 소화한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반응은 "왜 이왕표가 경기를 안 하지?"라며 불만 섞인 반응이 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6.2.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존중 부족

WWA를 설립한 이후론 김일의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이왕표는 김일이 한국 프로레슬러들에게 비난당하던 시절에 그들과 함께 김일을 욕하다가 사태가 다시 김일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그에게 붙은 기회주의적인 면을 보였다. # 게다가 김일이 일본에서 어렵게 살다가 겨우 귀국했을 때 이왕표는 하나도 도움을 준 게 없고, 박삼중 스님 등이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김일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김일을 팔아먹고 다녔다.[10]

이왕표의 사망 이후 MBC SPORTS 부산 유튜브 계정으로 이왕표의 경기 중 GWF 타이틀 17차 방어전이 영상풀영상으로 올라왔는데, 3류 악당 기믹으로 분장한 '쇼군 카미카제'란 선수를 상대로 나쁜 퀄리티의 경기 끝에 이왕표가 이기며 GWF 타이틀을 방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쇼군 카미카제'란 선수가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니라 김일의 제자 및 양자이자 이왕표의 선배이며, 1970년대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점보 츠루타와 양대산맥으로 활약했고, 한국인 최초로 WWE의 링에 올랐던 김덕(WWF 활동 당시의 링네임은 '타이거 청 리')이었다.

이왕표보다 훨씬 격이 높은 선배인 김덕을 상대로 퓨드를 만들어 한국 프로레슬링 계에 안토니오 이노키 등의 거물을 불러와 시합을 했던 김일 시절처럼 다시금 양질의 경기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된 김덕을 3류 악당으로 만들어 김덕이 제 기량을 전혀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는 북미, 멕시코, 일본 등의 메이저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2000년대의 암흑기를 맞이하기 전이라 좋은 선수와 양질의 경기가 나오던 황금기였는데도 해설자를 통해 3류 악당으로 연출한 '쇼군 카미카제'를 당시 현역이던 전일본 프로레슬링 사천왕과 동급으로 포장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프로레슬링 자체를 싸구려 쇼 그 이상으로 보일 수 없게 만들었다.

다만 '타이거 청 리'는 커리어 대부분을 해외에서 경기를 해왔고 상당히 헤비한 레슬링 매니아가 아닌 한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인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일본 레슬러 기믹으로 국뽕이나 유도하자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11]

6.3. 운영 미숙

WWA 최고 회장이었던 AAA의 안토니오 페냐도 WWA에 신경을 전혀 안 썼으며, 루 테즈 이후 회장이 된 압둘라 더 부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형편없는 각본과 운영, 돈 들여 티켓을 구매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막장 흥행으로, 한때는 NWA와 자웅을 겨루며 최고의 전통을 가진 단체였던 WWA를 한국으로 타이틀이 넘어오자마자 유령단체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생전 김일이 안토니오 이노키도, 자이언트 바바도 차지하지 못했던 타이틀이라며 자랑할 정도로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역도산의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세계 타이틀이기도 했던 유구한 역사의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은 프로레슬링 비인기 국가 지방 단체 타이틀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다만 예전부터 WWA의 후계를 자처하는 단체들은 우리나라의 WWA 이외에도 존재하는데, 이름도 모두 World Wrestling Association으로 동일하다.

"울트라 FC"의 경우엔 당시 돈 프라이 등 이종 격투기에서는 잔뼈만 굵은 퇴물들을 긁어 모아 어떻게든 흥행을 열어보려 했지만 부실한 운영으로 한때 흥행이 취소된 적도 있었다. 돈 프라이를 제외한 모든 선수는 구두 계약이었고, 인터파크가 가져가는 티켓 수수료를 생각하지 않고 가격을 책정해서 티켓 발매 중에 입장료를 수정하는 등 미숙한 운영을 보여주었다.

7. 라이벌

한국 프로레슬링 특성 상 WWE와 같은 정돈된 스토리로 이어지는 라이벌은 없었지만, 권선징악이라는 단순한 스토리로 국내 흥행에서 자주 초청했던 외국인 선수들과의 대립들은 있었다.

GWF 시절 당시 GWF 월드 챔피언이었던 빅 쟈니 호크에게 승리를 거두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시절 같은 GWF 소속 레슬러였던 신인시절의 부커 T와 마이크 어썸 등을 초청해서 승리했다고 한다.

메인이벤터가 된 이후 90년 후반에서 2000년 직후까진 공포영화 캐릭터 기믹의 레슬러 제이슨 더 테러블을 초청하여 종종 대립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WWF 출신 레슬러 자이언트 커간과 WWA 타이틀을 놓고 대립을 펼쳤다. 제이슨 등의 외국인 선수들의 난입으로 패배한 적이 있었으나 그 외에는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이왕표를 상대로 가장 위협적으로 몰아 붙였던 상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WWA 네버다이 투어 때에는 당시 WWF 최장기 인터콘티넨탈 보유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홍키 통크맨과 짧은 대립을 하기도 했다. 타이틀 전에서 자이언트 커간에게 신경을 뺏긴 사이 홍키 통크맨이 기타 샷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당시 WWA 회장이었던 안토니오 페냐 회장의 개입으로 타이틀을 뺏기진 않았다. 이후 다시 타이틀을 걸고 대결했을 때 이왕표 선수가 승리를 거두었다.

2000년대 중반, 한국에 초청을 받았던 TNA 출신의 레슬러 헤르난데스에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페이크 커트앵글'이라는 링네임을 사용하고 커트앵글의 등장음악으로 출연했었기에, 당시 관객들 중에서는 진짜 커트앵글에게 승리를 거둔 것으로 착각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이왕표 선수의 부고 이후 외국 레슬링 관련 뉴스에서도 이때 당시의 자료와 사진을 보고 착각하는 바람에 '커트앵글에게 승리를 거둔 한국 레슬링 대부'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 K-1 격투기선수 출신 레슬러였던 밥 샙과 대립했는데, 울트라FC 타이틀 조인식에서 무례하게 행동하는 밥 샙의 뺨을 때리는 세그먼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세그먼트는 스포츠 뉴스 등에도 언급될 정도로 나름의 화제성이 있었는데 막상 이후에 벌어졌던 이종격투기 룰 경기나 프로레슬링 경기 모두 합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경기력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다.

이종격투기 경기에선 이왕표 선수가 암바로 승리를 거두었었고, 프로레슬링 경기에선 레더페이스의 체어샷을 맞은 이왕표 선수를 밥 샙이 드롭킥으로 침몰 시키며, 이왕표의 장기집권을 잠시 멈추게 하기도 했다. 1년 넘는 기간 동안 타이틀을 보유했던 밥 샙은, 다시 도전한 이왕표 선수에게 패배하여 타이틀을 내주었다.

공포영화 캐릭터 기믹의 레슬러 레더페이스와 많은 타이틀전을 치렀는데, 단 한번도 레더페이스에게 타이틀을 내주지 않으면서 거의 천적 수준의 전적을 자랑했다. 패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가장 많은 대립을 했으나 라이벌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매니아들 사이에선 같은 김일 도장 1기 문하생이자 태그팀으로 종종 경기를 뛰었던 역발산과 가장 비교된다.

80년대에 역발산이 일본에서 '슈퍼 스트롱 머신'의 멤버로 먼저 잘 나가고 있었을 때, 이왕표는 상대적으로 별다른 커리어가 없었기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는 역발산의 위상이 이왕표보다 다소 앞서 있었다.[12] 이후 두 선수가 의견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는데, 이왕표가 GWF 챔피언에 오르고 이후 김일이 이왕표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역전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일부 매니아들 정도만 그 시절 역발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8. 타이틀 보유 기록



[1] JTBC 뉴스룸 2015/5/25 인터뷰에서 담도암 수술로 체중이 90kg까지 내려갔다고 밝히기도 했다.[2] 맞춤법상 '나는 표범'이 맞는 말이다.[3]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축구나 야구같은 구기종목과 그 외에로는 씨름, 권투 등을 더 좋아했으며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생각해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4] 오리지날 GWF는 북미 프로레슬링이 지역구이던 시절에 나름 규모있는 단체였다. 이 GWF에선 당시에도 유명세를 보이던 에디 길버트, 마이크 어썸을 비롯해 무명시절의 부커 T, JBL 등이 활동했다. 하지만 GWF 타이틀은 월드 타이틀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이왕표가 GWF 챔피언이 된 후 GWF가 망하자 이것을 맘대로 세계 타이틀이라고 주장하며 본인이 'GWF 세계 타이틀'이 걸린 흥행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레슬링 갤러리에서 의혹을 제기한 주장글[5] 미사와 미츠하루는 자이언트 바바의 손제자고 이왕표는 김일의 제자이니 미사와 입장에서 이왕표는 사숙이라고 할 수 있었다.[6] 대다수가 프로레슬링 경기처럼 각본이 있는 시합인 걸 알았지만 이왕표 측은 끝까지 실전 시합이었다고 주장한다.[7] 이왕표가 인터뷰를 하던 1999년 당시 WWF에선 스티브 오스틴과 더 락이 대립하며 역대급 재미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팬들이 시대에 뒤떨어졌다 라는 평가를 내린 것도 일리가 있었다.[8] 오랫동안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고 있어서 욕을 거하게 먹은 로만 레인즈도 약 1,316일 정도다. 하지만 한국프로레슬링의 경우 1년동안 하는 경기 자체가 많지 않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9] 다만 이것은 양 단체 간 위상 보호를 위해 서로 맞대결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을 수 있다. 실제로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 경기도 한국에서는 거의 잡힌 적이 없어서 단 한 번만 열렸을 정도다. 당연히 싱글 매치는 아니었고 태그 매치였는데, 워낙 한국과 일본 프로레슬링의 위상 자체가 차이가 나다 보니 한국에서 열린 경기였음에도 안토니오 이노키 팀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났다.[10] 인터뷰로 스승을 비난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기사에 따르면 김일 측도 당시 도제식 문화로 인해서 신인급 레슬러들에게 최소한의 월급만 지불하는 문제가 있었고, 국내 선수에게 챔피언 벨트도 물려 주지 않아서 커리어를 찍을 기회도 주지 않았다. 김일이 다시 귀국하고 94년에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인정받은 이후 2006년 김일이 사망할 때까지 10년 이상 그를 모셨고, 사망 이후에도 김일의 이름으로 프로레슬링 흥행을 지속적으로 열어서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당사자간 화해가 없었다면 애초에 후계자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11] 그리고 사실 김덕도 미국에서 활동했을 당시 거의 자버로 활동했다. 그리고 일단 한국인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거의 사실상 일본인과 별 차이도 없었고 실제로 태그팀 경기를 했을 때 친구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미스터 푸지였다. 그렇긴 해도 명색이 선배인데 저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사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이왕표 역시 한 단체의 에이스인 이상 함부로 지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예 타이거 청 리를 저렇게 썼던 것으로 보인다. 타이거 청 리도 한국에서는 거의 활동한 적도 없었으니 그냥 넘어갔을 듯하고.[12] 당시 이왕표는 신인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역발산의 인지도를 올려주는 쩌리 역할을 많이 담당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