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white><colcolor=#000000> | |||
헤비급 | |||
아오야기 유마 | <colbgcolor=white> 미야하라 켄토 | <colbgcolor=white> 아시노 쇼타로 | |
주니어 헤비급 | |||
후치 마사노부 | 이노우에 료 | 아오야기 아츠키 | |
MUSASHI | 타무라 단 | 나가오 타이신 |
<[ruby(赤鬼, ruby=あかおに)] / Red Devil> [ruby(渕 正信, ruby=ふち まさのぶ)] / Masanobu Fuchi |
AJPW | |
<colbgcolor=#ed2121> 본명 | 후치 마사노부 [ruby(渕 正信, ruby=ふち まさのぶ)] |
생년월일 | 1954. 1. 14 ([age(1954-01-14)]세) |
신장 | 183cm |
체중 | 100kg |
출생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후쿠오카현 키타큐슈시 토바타구 |
학력 | 야하타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1] 야하타대학[2] (중퇴) |
경기 스타일 | 올드 스쿨 + 테크니션 |
피니쉬 무브 | 엔즈이기리 피스트 드롭 스몰 패키지 홀드 백 드롭 |
별명 | 주니어의 마표(ジュニアの[ruby(魔豹, ruby=ま ひょう)]) 론리 원 (ロンリーワン) 왕도의 전도사 ([ruby(王道, ruby=おうどう)]の[ruby(伝道師, ruby=でんどう し)]) 적귀 ([ruby(赤鬼, ruby=あかおに)]) |
테마곡 | Danger Zone - Kenny Loggins[3] (1986 - ) |
데뷔 | 1974년 4월 22일 (20세) 토쿠시마현 이케다정 시코쿠전력 옆 광장 전일본 제 2회 챔피언 카니발 8일차 vs 오니타 아츠시 |
SNS | 개인 블로그 |
주요 커리어 | 세계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 5회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 2회 AWA 서던 태그팀 챔피언 3회 NWA 월드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
1. 개요
”[ruby(30年, ruby=さんじゅうねん)]の[ruby(長, ruby=なが)]い[ruby(間, ruby=あいだ)]、[ruby(全日本, ruby=ぜん に ほん)]プロレスと[ruby(新日本, ruby=しん に ほん)]プロレスとの[ruby(間, ruby=あいだ)]には、[ruby(厚, ruby=あつ)]い[ruby(壁, ruby=かべ)]がありました。[4]
(30년간,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신일본 프로레슬링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있었습니다.)
[ruby(今日, ruby=きょう)]、その[ruby(壁, ruby=かべ)]をぶち[ruby(破, ruby=やぶ)]りに[ruby(来, ruby=き)]ました。
(오늘, 그 벽을 깨부수러 왔습니다.)
[ruby(全日本, ruby=ぜん に ほん)]プロレスは[ruby(選手, ruby=せんしゅう)][ruby(2人, ruby=ふたり)]しかいませんが、[ruby(看板, ruby=かんばん)]の[ruby(大, ruby=おお)]きさとプライドは[ruby(新日本, ruby=しん に ほん)]に[ruby(負, ruby=ま)]けてはいません!”
(전일본에는 선수 두 명[5]밖에 없지만, 간판의 거대함과 프라이드는 신일본에도 지지 않습니다!)
(30년간,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신일본 프로레슬링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있었습니다.)
[ruby(今日, ruby=きょう)]、その[ruby(壁, ruby=かべ)]をぶち[ruby(破, ruby=やぶ)]りに[ruby(来, ruby=き)]ました。
(오늘, 그 벽을 깨부수러 왔습니다.)
[ruby(全日本, ruby=ぜん に ほん)]プロレスは[ruby(選手, ruby=せんしゅう)][ruby(2人, ruby=ふたり)]しかいませんが、[ruby(看板, ruby=かんばん)]の[ruby(大, ruby=おお)]きさとプライドは[ruby(新日本, ruby=しん に ほん)]に[ruby(負, ruby=ま)]けてはいません!”
(전일본에는 선수 두 명[5]밖에 없지만, 간판의 거대함과 프라이드는 신일본에도 지지 않습니다!)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프로레슬러.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쭉 지켜온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리빙 레전드이다.
2. 커리어
야하타대학부속고등학교 시절 레슬링과 육상을 해왔고, 야하타대학(현 큐슈국제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 프로레슬링 입문을 목표로 상경하다가 열차 안에서 읽은 큐슈 스포츠 신문에서 일본 프로레슬링의 붕괴를 알게 되면서 일단 큐슈로 돌아갔던 후치 마사노부는 1974년 4월 10일에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문한다.그 해 경쟁단체인 신일본 프로레슬링도 이미 출범했지만 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자이언트 바바의 팬이기도 했던 후치가 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키는 스타로서는 격이 전혀 다르다고 말할 정도로 바바를 동경해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택했다.
입문한지 불과 12일만에 데뷔했고, 당시에는 오니타 아츠시, 소노다 카즈하루[6]와 함께 후치 마사노부도 젊은 한 사람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갔다.
일본 외에도 미국,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무대에서도 경기를 가지고, 80년대 후반부터는 세계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 벨트를 5번 따내고 10대 챔피언 시대에는 역대 1위인 14번의 방어를 성공시키며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전일본 주니어의 정점에 서는 등 전일본 주니어 역사의 산 증인이 되었다.
2000년 미사와 미츠하루를 중심으로 세 명을 제외한 모든 소속 선수들이 바바 모토코의 횡포에 반발하며 전일본을 퇴단하는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이 터졌을 때, 카와다 토시아키, 당시 연습생이었던 하와이 출신의 마우나케아 모스맨[7]와 같이 전일본에 잔류하였다.
이 때 전일본 프로레슬링 재부흥을 위해 금단의 벽이라 불렸던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대회에 카와다와 같이 등장하여 전일본의 자존심을 살리면서도 단체 존속을 위하여 신일본과 교류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는 전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명 세그먼트를 하며, 신일본과 교류를 펼치기 시작하며 단체를 유지했고, 2002년 이노키즘에 반발한 무토 케이지, 코지마 사토시, 켄도 카신이 신일본을 탈단하고 전일본으로 이적하면서 전일본은 다시 제대로 된 단체의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바바 모토코 체제에서 무토 케이지 체제로 이어지면서도 선수들을 지도하고 띄워주는 중책을 맡고 전일본 재건에 노력을 하였다.
2000년대 후반에는 이미 50이 넘은 나이로 후진으로 물러나, 주로 젊은 선수들과 함께 첫 경기를 맡는 역할에 철저했다. 단체가 낳은 인물로서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간판을 지키는 중진이었지만, 우치다 마사유키에 의해 2009년부터 이사를 사임하고, 프리랜서 신분으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참전한다.[8]
2013년 7월 무토 케이지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소속 선수들이 시라이시 노부오의 정책에 반발하며 전일본을 퇴단하며 WRESTLE-1을 창립했고, 반면 소속 선수 인원이 줄어들자 프로레슬링 NOAH를 퇴단하고 프리 신분으로서 출전하던 BURNING 멤버 5명[9]과 같이 전일본 소속 선수로 돌아오게 된다.
1974년 입단 당시의 자이언트 바바 체제부터 미사와 미츠하루 체제, 바바 모토코 체제, 무토 케이지 체제, 시라이시 노부오 체제, 아키야마 쥰 체제, 2024년 현재 후쿠다 츠요키 체제에 이르며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리빙 레전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 볼 수 있다.
3. 경기 스타일
후치 마사노부가 개발한 저공 드롭킥은 많은 프로레슬러, 특히 주니어 헤비급 파이팅 스타일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저공 드롭킥과 무수한 관절기, 너클 파트와 안면킥, 아토믹 드롭의 자세로부터의 급소 공격 등 테크닉과 러프를 겸비해서 관중을 강하게 자극하는 파이팅 스타일을 확립해 주니어뿐 아니라 미사와 미츠하루 등 헤비급과도 당당히 맞섰고 이후 후치 마사노부는 적귀(赤鬼)라는 별명을 얻었다.
4. 여담
- 70의 연령에도 결혼을 단 한번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러셔 키무라와 에이겐 하루카 등 동료 선수들이 이야기 소재거리로 삼은 일이 많았으며, 특히 에이겐은 "후치가 결혼 안한건 마더콘이라서야!"라고 농담한 적도 있었다.
- 전일본 출신 중 '프로레슬링의 신' 칼 곳치의 교육을 받은 몇 안되는 레슬러이지만 곳치는 목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후치에게 브릿지만 겁나게 시켰다고 한다.
- 젊었을 적 오니타 아츠시가 자이언트 바바의 심부름꾼이었을 무렵 바바가 후치와 오니타를 데려가 스시집에 데려갔는데, 바바의 눈치를 보고 바바보다 한 단계 아래의 초밥을 주문하던 오니타에 비해 후치는 성게알, 참치 대뱃살 등 고급 초밥을 너무 주문해서 기가 질린 바바가 오니타에게 후치는 두 번 다시 스시집에는 안 데려간다고 했다고.
- 2000년 8월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G1 CLIMAX 료고쿠 국기관에서의 마이크웤, 나아가 쵸노 마사히로에 대한 퍼포먼스는[10] 그야말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붕괴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 2007년 1월 4일에 열린 신일본 돔 대회에서 실황 중계로부터 「전일본 최후의 양심」(全日本最後の良心)이나 「색백 댄디즘」(色白ダンディズム)이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렸다. '색백'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피부가 하얀 사람에게 붙는 말로, 후치의 피부가 이전 시대 레슬러로서는 이례적으로 하얗기 때문에 붙었으며 이 하얀 피부가 타격기를 맞으면 새빨갛게 변하기 때문에 '붉은 귀신'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 헬로키티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헬로키티 굿즈 담당사이자 한때 전일본의 스폰서였던 아스나로사에서 세계에 한 벌 뿐인 헬로키티 입장 가운을 선물해 주어 입고 입장한 적도 있었다.
5. 둘러보기
레슬링 옵저버 선정 5성 경기 | ||
1989년 | 1월 28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 6인 태그팀 매치 레볼루션 (텐류 겐이치로 & 삼손 후유키 & 카와다 토시아키) vs 후치 마사노부 & 야츠 요시아키 & 점보 츠루타 |
1990년 | 10월 19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 6인 태그팀 매치 타우에 아키라 & 점보 츠루타 & 후치 마사노부 vs 코바시 켄타 & 미사와 미츠하루 & 카와다 토시아키 |
1991년 | 4월 20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 6인 태그팀 매치 타우에 아키라 & 점보 츠루타 & 후치 마사노부 vs 코바시 켄타 & 미사와 미츠하루 & 카와다 토시아키 |
1992년 | 5월 22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 6인 태그팀 매치 타우에 아키라 & 점보 츠루타 & 후치 마사노부 vs 코바시 켄타 & 미사와 미츠하루 & 카와다 토시아키 |
1992년 | 7월 5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십 후치 마사노부 & 오가와 요시나리 vs 키쿠치 츠요시 & 코바시 켄타 |
1994년 | 1월 29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 6인 태그팀 매치 카와다 토시아키 & 타우에 아키라 & 후치 마사노부 vs 코바시 켄타 & 자이언트 바바 & 미사와 미츠하루 |
2000년 | 12월 1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오사카부립 체육회관 대회 | 신일본 vs 전일본 태그최강전[11] 카와다 토시아키 & 후치 마사노부 vs 나가타 유지 & 이이즈카 타카시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노력상 | ||||
스네이크 아사미 타카치호 아키히사[12] 후지와라 요시아키 (1975) | → | 카이 쇼지 고 류마 후치 마사노부 (1976) | → | 록키 하타 초슈 리키 츠루미 고로 (1977) |
코시나카 시로 후지와라 요시아키 (1982) | → | 타카다 노부히코 후치 마사노부 (1983) | → | 폐지 |
[1] 현 큐슈국제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 후배들로는 주로 배드민턴 선수들과 프로야구 선수들이 많다.[2] 현 큐슈국제대학[3] 영화 탑건의 OST이자, 후치의 상징곡. 후치는 이 곡을 테마곡으로 한 뒤 단 한번도 테마곡을 바꾼 적이 없다.[4] 전일본 사상 최고의 마이크웤.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이 터져 연습생 마우나케아 모스맨 포함 단 세 명만 남은 단체라고 할 수도 없는 단체의 프라이드를 지킴과 동시에 30년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일본과 전일본의 사이를 봉합하면서도 신일본의 협력을 얻어내어 존속이 불투명한 단체를 존속시켰다는 점에서 가히 단체 사상 최고의 마이크웤이라고 불릴 만한 마이크웤이었다.[5] 후치 마사노부 본인, 카와다 토시아키.[6] 이후 링네임을 하루 소노다로 변경. 1987년 11월 28일 신혼 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남아프리카 항공 295편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7] 이후 링네임을 타이요(일본어로 태양.) 케아로 변경했다.[8] 소속 선수로 복귀하는 2013년 7월까지 전일본 이외의 다른 단체의 대회에는 단 한번도 출전한 적이 없었다.[9] 아키야마 쥰, 카네마루 요시노부, 스즈키 코타로, 시오자키 고, 아오키 아츠시.[10] 자기의 모자를 후치에게 던지며 어딜 기어들어오냐는 식으로 항의하던 쵸노가 신일본 현장 감독 초슈 리키를 공격했다가 두들겨 맞은 후 모자를 링에 그대로 두고 내려가자, "쵸노, 잊은 물건이다."라고 말하면서 모자를 장외의 쵸노에게 쿨하게 던졌다.[11] 30분 시간초과 무승부.[12] 훗날 독무의 창시자이자 슈퍼킥의 개발자인 '동양의 신비' 더 그레이트 카부키로 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