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ANT BABA |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링네임 | 바바 쇼헤이 자이언트 바바(ジャイアント[ruby(馬場, ruby=ば ば)]) |
본명 | 바바 쇼헤이 [ruby(馬場, ruby=ば ば)] [ruby(正平, ruby=しょうへい)] |
생년월일 | 1938년 1월 23일 |
사망 | 1999년 1월 31일 (향년 61세) 도쿄도 신주쿠구 도쿄의과대학병원 |
신장 | 209cm |
체중 | 141kg |
출생지 | 일본 니이가타현 산죠시 |
가족 관계 | 아내 바바 모토코([ruby(馬場 元子, ruby=ば ば もと こ)])(1940 ~ 2018)[1] |
유형 | 왕도 스타일+자이언트 |
시그니쳐 무브 | 카와즈오토시 노텐 찹 코코넛 크러쉬 |
피니쉬 무브 | 16문 킥 32문 인간 로켓포 러닝 넥브레이커 드롭 |
별명 | 동양의 거인([ruby(東洋, ruby=とうよう)]の[ruby(巨人, ruby=きょじん)]) 세계의 거인([ruby(世界, ruby=せ かい)]の[ruby(巨人, ruby=きょじん)]) |
테마곡 | NTVスポーツ[ruby(行進曲, ruby=こうしんきょく)] ( - 1984)[2] [ruby(王者, ruby=おうじゃ)]の[ruby(魂, ruby=たましい)] (1984 - 1999)[3] |
데뷔 | 1960년 9월 30일 (22세) 도쿄도 타이토구 타이토구립체육관[4] 일본 프로레슬링 vs 타나카 요네타로 |
마지막 경기 | 1998년 12월 5일 (60세, 커리어 38년) 도쿄도 치요다구 일본 무도관 전일본 세계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 결승일 vs 후치 마사노부 & 에이겐 하루카 & 키쿠치 츠요시 (w/럿셔 키무라 & 모모타 미츠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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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VD 자이언트 바바 King Of Soul 오프닝 |
"왕도는 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죽더라도 왕도는 진흙 속 연꽃처럼 다시 필 것이다."[5]
"훈련생도 힘들어해서 박차고 나오는 이런 스타일의 레슬링은 빨리 망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은 기자에게
"훈련생도 힘들어해서 박차고 나오는 이런 스타일의 레슬링은 빨리 망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은 기자에게
"프로레슬링이야말로 진검승부를 뛰어넘는 것이다."
일본의 프로레슬러.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창립자. 역도산의 제자이자 그가 사망한 이후 일본을 대표한 인기 프로레슬러이기도 했다.
2. 상세
자이언트 바바란 링네임은, 1961년 미국 원정시합을 벌일 때 프로모터였던 빈스 맥마흔 Sr[6]가 붙여준 '바바 더 자이언트'에서 유래했다.앙드레 더 자이언트(일본 활동 당시의 닉네임은 몬스터 로시모프)와 함께 거인 프로레슬러의 정석을 다진 존재이다. 거인병 때문에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거구(209cm) 프로레슬러였으며, 특징적인 외모와 더불어 거구를 확실히 어필하는 기술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계 최초 헤비급 복면 레슬러인 더 디스트로이어와 라이벌로서 명승부를 벌였으며, 그밖에 루 테즈, 프리츠 폰 에릭, 도리 펑크 Jr, 브루노 삼마르티노 등 당대를 호령하던 강자들과 시합을 벌이며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굳히는 데 공헌했다.
3. 생애
3.1. 미완의 거인 프로야구 유망주
원래는 야구 선수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5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투수로 입단했다. 그의 본명으로 구글링할 경우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은 시절 모습을 꽤 많이 볼 수 있는데, 투구는 사이드암 스타일로 보인다.이름에 거인이 들어가 있는 명문구단 요미우리에서 진짜 거인 선수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미디어의 관심이 적잖았고, 2군에서도 3차례나 2년 연속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지만 당시 요미우리 투수진에 벳쇼 타케히코, 후지타 모토시 등 쟁쟁한 레전드들이 많았기에 1군에서는 출장 기회를 거의 받지 못하면서 결국 통산 기록은 1957년에 3경기에 등판하여 0승 1패[7], 평균자책점 1.29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표본이 적어서 그렇지 등판한 경기에선 괜찮은 성적을 남겼으나 워낙 요미우리의 투수진이 두터웠기에 주전에서 밀려서 기회를 받지 못한 사례.[A]
결국 1957년 시즌 외엔 1군에서 전혀 기회를 받지 못하고 2군 생활만 이어가다 본인을 지지해 주던 후지모토 히데오 코치의 퇴단 등이 겹치게 되며 1959년을 끝으로 방출되고 말았다.[A] 이후 요미우리 시절 친분이 있던 타니구치 고로 코치가 새로 옮겨간 타이요 훼일즈에 추천을 받아 입단테스트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도중에 숙소 욕실에서 넘어져 유리문에 부딪혀서 깨진 유리에 몸 여러 군데를 베이는, 특히 투구를 해야 할 왼팔과 왼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더 이상 야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야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여담으로 2년차였던 1956년에 경기 중 시력이 갑자기 저하되는 일이 발생해 정밀진단을 받은 결과 뇌종양이 발견되기도 했다.[10] 당시 의사한테 "수술해도 실명 가능성이 높으니 아직 눈이 보일 때 마사지사 공부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어찌저찌 수술에 무사히 성공하면서 완치되었다고 한다.
3.2. 프로레슬러 활동
1960년에 프로레슬러로 전향했다. 이후 역도산의 제자로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과 함께 3대 기대주로, 사실상 수제자였다.[11][12] 역도산은 바바의 엄청난 덩치를 보고서 대성할 재목이라고 여겼고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특별대우를 해줬다고 한다. 구타도 상대적으로 덜하고(역도산의 제자 구타는 심각해서 그냥 폭력수준이었다. 그에 비하면 바바가 맞은건 애교수준이었다나) 훈련양도 거인은 몸을 소중히 해야한다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시켰다고 한다(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일반 제자들은 그냥 고문수준의 무지막지한 훈련을 시켰다.). 실제로 바바는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라 힘도 좋았고 훈련도 열심이었다. 땀이 바닥에 흥건이 고이도록 힌두 스쿼트를 했다는 일화[13]도 있었다. 참고로 신인 시절 안토니오 이노키와 16회 싸워 16전 전승했는데, 당시의 바바는 전략적으로 밀어주는 슈퍼신인이었기에 나온 결과.3.3.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
역도산이 사망한 후 역도산의 단체였던 일본 프로레슬링의 에이스가 되어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은 니혼 테레비(니혼TV)와 NET테레비에서 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니혼TV가 먼저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에 니혼TV 쪽에 좀 더 공을 기울여 바바는 니혼TV에서만 나오고, NET에서는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1971년 경영진과 대립한 안토니오 이노키가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제명당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개양하면서 이탈하고, 간판 스타가 없어져 곤란해진 NET 측이 자이언트 바바의 출연을 요구하여 일본 프로레슬링 측이 이를 수락했다.하지만 자이언트 바바를 자사의 스타로 여기고 있던 니혼TV 측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이 조치에 분노하였고, 니혼TV가 보복 수단에 가까운 형태로 자이언트 바바에게 접근하여 1972년 바바는 일본 프로레슬링을 탈퇴한 후 전일본(全日本) 프로레슬링을 개양해서 대성공을 거둔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격투기와 프로레슬링의 접목을 모색한 반면 자이언트 바바는 순수한 프로레슬링을 고집했는데,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색깔을 왕도(王道) 스타일이라 부른다.
선수로서도 유명하지만 전일본을 운영하며 프로모터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쌓았는데, 특히 외국인 레슬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비지니스를 떠나서 외국인 프로레슬러들이 인간적으로 바바를 좋아했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는 같은 거인끼리 이런저런 공감대가 많았는지 사적으로도 꽤 잘 어울렸다. 그 외에도 압둘라 더 부처나 스탠 핸슨 등이 그와 친해서 오랫동안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출연하였다. 이 인망은 이후 미사와 미츠하루, 코바시 켄타 등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성장한 그의 제자들이 신일본 프로레슬링보다 심각하게 낮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이언트 바바 사후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이전까지 전일본을 지킬만큼 높았다.
대장암이 이미 진행될 대로 진행된 와중에도 사망 불과 한 달 전인 1998년 12월 5일까지 시합을 뛰었으며, 1999년 1월 31일에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사망 시기는 비슷했지만 앙드레 더 자이언트보다 7년 정도 더 오래 살았다. 프로레슬러로 뛰는 동안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3회,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3회, P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4회, 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 1회 등의 타이틀 경력이 있다.
4. 현역시절 그의 기술들
무척 다양한 기술을 구사했다. 또한 거물에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팬들은 평범한 기술도 이름 앞에 '자이언트'만 붙여서 신기술(?) 취급할 정도였다.- 16문 킥
자이언트 바바를 상징하는 기술 중 하나. 기술 자체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빅 붓이다. 자이언트 바바가 미국 원정에 다녀온 뒤부터 썼는데, 한 신문기자가 바바의 레슬링 슈즈 사이즈가 16인 데 착안해서 이름을 붙였다. 16은 미국 신발 사이즈인데, 기자는 일본 신발 사이즈 문(文)으로 착각했다. 16문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380mm(...)가 넘는다. 미국 사이즈 16은 340mm 정도고, 바바는 320mm를 좀 넘었다고 한다.[14] 자이언트 바바의 거구와 더불어 16문이면 '엄청 크다'는 느낌을 확실히 줬기 때문에 이 명칭은 바바의 상징이 되었다. 여느 선수와 다르게 왼발로 차는데, 투수 출신이라 오른발을 축으로 서는 자세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 32문 인간로켓포
평범한 드롭킥이지만, 209cm의 거한이 공중으로 붕떠서 드롭킥을 사용하면 그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임팩트다. 유래는 두 발로 차니까 '16문+16문'이라 32문. 바바는 "프로레슬러라면 당연히 드롭킥을 쓸 줄 알아야한다."라는 신조가 있었다.[15]
젊은 시절에는 두 다리가 모아져서 가지런히 머리 쪽을 향하는 정석적인 드롭킥이었으나, 커리어 후반부로 가면 날아차기 비슷해졌다.
16문 킥과 더불어 자이언트 바바의 양대 피니쉬 기술. 그러나 이 기술은 어지간히 큰 시합이 아니면 좀처럼 쓰지 않았다. 달려가다 몸을 날려 상대 머리를 걸고 넘어지는데, 과거 WWE에서 브렛 하트, 제프 하디가 간간히 보여줬다. 고전게임 WWF 슈퍼스타즈에서 랜디 새비지가 동형의 기술을 사용한다.
- 카와즈오토시(河津落とし)
- 노텐(脳天)챱
정수리를 수직으로 때리는 챱. 바바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식 명칭은 뇌천당죽가르기. 이 기술은 역도산에게 찹을 배우던 시절 "사부님, 사부님은 왜 정수리에 챱을 쓰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갑자기 역도산이 잔뜩 열받아서 바바를 마구 두들겨패고는 "바보자식아. 그럼 상대가 죽잖냐!" 하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16]
- 코코넛 크러쉬
철권 시리즈에서 아머 킹의 기본 잡기 때문에 상대의 머리를 한발을 앞으로 크게 내딛으면서 무릎에 찍어 버리는 모션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는 상대방의 얼굴을 무릎에 대고 갈아버리는 것에 가깝다. 남미 원주민들이 코코넛 껍질 까는 기구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코코넛을 까는 모습을 본 뒤 영감을 얻어 만든 기술이다. 자이언트 바바의 사용 장면을 보면 상대방의 면상을 무릎에 찍기보다는 비비는 모션이다. 먼저 머리가 무릎에 닿고, 그 다음에 머리를 축으로 몸이 회전한다.[17] WWF 슈퍼스타즈에서 앙드레 더 자이언트가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밖에 아토믹 드롭, 코브라 트위스트[18], 다이빙 보디 어택 등이 있다.
5. 여담
- 몸통은 엄청 두터운데 팔이 비정상적으로 가늘어서 특이한 신체 비율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이는 말단비대증을 가진 환자에게 자주 보이는 특징으로 안토니오 실바도 두꺼운 몸통에 비해 팔은 가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당대 자이언트 바바는 일본인 중 견줄 자가 없을 정도의 체격과 신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 가늘디 가는 팔 조차도 바바를 실제로 본 사람들에 의하면 충분히 두터워 보였다는 증언이 있었다.
- 1998년 12월 5일 시점에서 이미 대장암 말기였는데, 불과 약 두 달 만인 1999년 1월 31일 사망할 때까지 은퇴 경기 및 은퇴 선언을 하지 않았다. 이는 스승인 역도산과 제자인 미사와 미츠하루와 같다.
- 배포가 크고 남을 잘 챙겨주는 면과 쩨쩨한 면이 공존하는 양면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래도 보스로 괜찮은 사람이어서 전자의 성격과 카리스마로 신일본 에이스 무토 케이지의 1/3의 월급을 받고도 미사와 미츠하루 등이 바바 생전에는 단체에 충성을 다했다.
- 카페에서 종업원이 아이스 커피를 뜨거운 커피로 잘못 가져와서 이를 알고 바바에게 사죄하자, 얼음물의 물을 다 마시고 뜨거운 커피를 남은 얼음에 넣어 즉석에서 아이스 커피를 만들고 "봐봐 아이스 커피가 됐잖아"하면서 커버를 쳐줬다.
- 한 초등학생 팬이 바바를 만났는데 사인받을 종이와 펜이 없어 아쉬움에 울고 있자, 손을 줘보라 한 다음에 "종이는 없어질 수도 있지만, 이건 없어질 일 없어"라고 말하며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사인을 해 줬다고 한다. 이 초등학생 팬은 나중에 미노야 마사히코(みのや雅彦, 1961년생)라는 싱어송라이터가 되었고, 바바를 만나 그 때 손바닥 사인을 해 줬다며 손바닥을 보여줬다. 이를 본 바바는 조용히 미소지었다고 한다.
- 한편 코바시 켄타가 입단했을 때, 이전 바바의 심부름꾼이 바바를 제대로 못 챙겨준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바바의 심부름꾼을 코바시로 억지로 바꿔서 코바시가 바바의 심부름꾼이 되었는데, 바바는 이전 심부름꾼을 마음에 들어했었기 때문에 후배들이 강제로 심부름꾼을 바꾼 것에 삐져서 코바시에게 3~4개월동안 말도 안 했다고 한다. 그래도 코바시가 데뷔하게 되자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하면서 '잘 노력했구나'라고 말해줬다고. 이후로는 오히려 코바시에게 몸이 커져야 된다고 데리고 가는 곳마다 코바시의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여댔다고 한다.
- 퇴단하는 선수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면 의자를 뒤로 돌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6. 오마주
국민 프로레슬러라서 그래플러 바키의 마운트 도바나 괴짜가족의 거인 등 각종 대중매체에서 바바를 본뜬 캐릭터가 자주 등장한다.최홍만 역시 일본에서는 외모가 비슷해서 자이언트 바바의 재래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공상과학독본 2권에서는 여러가지 특촬물 속 인물들의 힘을 비교하기 위해서 그의 일률, 마력 등을 이용해서 강함을 비교하는 측정치의 단위를 자이언트 바바, 줄여서 자바바라고 불렀다.
7. 둘러보기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
2014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
역대 신춘 배틀로얄 우승자 | ||||
1983 | → | 1984 | → | 1987 |
밀 마스카라스 | → | 자이언트 바바 | → | 타이거 마스크 2세 |
역대 챔피언 카니발 우승자 | ||||
창설 | → | 1973, 1974, 1975 | 1976 | |
- | → | 자이언트 바바 | 압둘라 더 부처 | |
1976 | → | 1977, 1978 | → | 1979 |
압둘라 더 부처 | → | 자이언트 바바 | → | 압둘라 더 부처 |
1980 | → | 1981, 1982 | → | 1991 |
점보 츠루타 | → | 자이언트 바바 | → | 점보 츠루타 |
역대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 우승자 | ||||
1977 | → | 1978 | → | 1979 |
더 펑크스 도리 펑크 주니어 & 테리 펑크 | → | 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 자이언트 바바 & 점보 츠루타 | → | 더 펑크스 도리 펑크 주니어 & 테리 펑크 |
1979 | → | 1980 | → | 1981 |
더 펑크스 도리 펑크 주니어 & 테리 펑크 | → | 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 자이언트 바바 & 점보 츠루타 | → | 야수 콤비([ruby(野獣, ruby=やじゅう)]コンビ) 브루저 브로디 & 지미 스누카 |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프로모터 | ||||
마에다 아키라 (UWF) (1989) | → | 바바 쇼헤이 (전일본 프로레슬링) (1990 ~ 1994) | → | 초슈 리키 (신일본 프로레슬링) (1995 ~ 1997) |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부커 | ||||
에디 길버트 (CWF) (1988) | → | 바바 쇼헤이 (전일본 프로레슬링) (1989 ~ 1991) | → | 초슈 리키 (신일본 프로레슬링) (1992) |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5성 경기 [★] | ||||
1994년 1월 29일 | 전일본 프로레슬링 '94 신춘 자이언트 시리즈 최종일 | 6인 태그 매치 후치 마사노부(X) & 성귀군([ruby(聖鬼軍, ruby=せい き ぐん)]) (카와다 토시아키 & 타우에 아키라) vs _초시대군([ruby(超時代軍, ruby=ちょうじだいぐん)]) (미사와 미츠하루 & 코바시 켄타(O) & 자이언트 바바)_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최우수 선수상) | ||||
안토니오 이노키 (1974) | → | 자이언트 바바 (1975) | → | 안토니오 이노키 (1976 ~ 1978) |
안토니오 이노키 (1976 ~ 1978) | → | 자이언트 바바 (1979) | → | 안토니오 이노키 (1980,1981)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고 수훈선수상 | ||||
창설 | → | 자이언트 바바 (1974) | → | 점보 츠루타 (1975, 1976) |
안토니오 이노키 (1979) | → | 자이언트 바바 (1980) | → | 점보 츠루타 (1981)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특별대중상 | ||||
창설 | → | 자이언트 바바 (1974) | → | 점보 츠루타 (1975, 1976)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대중상 | ||||
더 그레이트 카부키 (1983) | → | 의형제 콤비([ruby(義兄弟, ruby=ぎきょうだい)]コンビ) (자이언트 바바 & 럿셔 키무라) (1988) | → | 폐지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고특별대상 | ||||
창설 | → | 자이언트 바바 (1980) | → | 폐지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특별대상 | ||||
창설 | → |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1983) | → | 간류지마의 싸움 (안토니오 이노키 vs 마사 사이토) (1987. 10. 4)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특별공훈상 | ||||
안토니오 이노키 (1998) | → | 자이언트 바바 (1999) | → | 스탠 핸슨 점보 츠루타 (2000)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30주년 기념 특별공훈상 | ||||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1990)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5000시합 기념 특별상 | ||||
자이언트 바바 (1993)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상 | ||||
파워 파이터즈 (사카구치 세이지 & 스트롱 코바야시) (1976) | → | 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 (점보 츠루타 & 자이언트 바바) (1978, 1980) | → | 안토니오 이노키 & 후지나미 타츠미 (1981) |
안토니오 이노키 & 후지나미 타츠미 (1981) | → | 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 (점보 츠루타 & 자이언트 바바) (1982) | → | 학용 콤비([ruby(鶴龍, ruby=かくりゅう)]コンビ) (텐류 겐이치로 & 점보 츠루타) (1983, 1985)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연간 최고 시합상 (베스트 바웃) [★] | ||||
1979년 8월 26일 | 신일본 & 전일본 & 국제프로레스 합동 흥행 도쿄스포츠신문사 창립 20주년 기념 프로레스 꿈의 올스타전 | 제 9시합 타이거 제트 싱(X) & 압둘라 더 부처 vs BI포 _(안토니오 이노키(O) & 자이언트 바바_) | ||
1980년 12월 11일 | 전일본 프로레슬링 셰계최강태그결정리그전 최종일 | 우승결정전[21] 더 펑크스(도리 펑크 주니어 & 테리 펑크) vs _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점보 츠루타 & 자이언트 바바)_ | ||
1981년 1월 18일 | 전일본 프로레슬링 자이언트 바바 3000시합연속출장기념시합 | PWF & AWA 헤비웨이트 3전 2선승제 더블 타이틀 매치[22] 번 가니에(AWAC) vs 자이언트 바바(PWFC) | ||
1982년 2월 4일 | 전일본 프로레슬링 신춘 자이언트 시리즈 최종일 | PWF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23] 스탠 핸슨 vs 자이언트 바바(C) |
[1] 태어났을 때의 성씨는 이토(伊藤), 자이언트 바바와 결혼하기 위해 지인 집에 양자로 들어간 후에는(벼락부자 집안이었던 본가에서 반대가 심했다.) 카와이(河合). 자이언트 바바가 사망한 이후 전일본의 대표를 맡았으며, 의심이 많고 날카로운 성격으로 알려져 선수 겸 사장 미사와 미츠하루를 위시한 선수단과 갈등을 빚어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이언트 바바와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며, 2018년 사망했다.[2] 닛폰 테레비 스포츠 행진곡. 문자 그대로 닛폰 테레비에서 스포츠 중계에 사용하던 곡으로, 사실상 닛폰 테레비에서 하던 전일본 중계방송과 자이언트 바바의 상징곡. 일본 올드 팬 중에서는 이 곡을 더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3] 왕자의 혼. 원래는 1982년 세계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 입장곡으로 쓰였던 곡이었는데, 전 요코즈나 와지마 히로시가 전일본에 입단하자 여태까지 써오던 NTV 스포츠 행진곡을 양보하고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유명세는 NTV 스포츠 행진곡보다 떨어지지만 바바 커리어 최초이자 최후의 바바 전용 테마곡이어서 이 쪽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다.[4] 현 타이토 리버사이드 스포츠 센터[5] 지금 왕도의 상황을 보면 어울리는 말이다.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과 프로레슬링 NOAH 창립, 2009년 미사와 미츠하루의 사망과 스와마, 미야하라 켄토 등 걸출한 후임 선수들의 등장, 코로나로 인한 프로레슬링 업계의 부진과 프로레슬링 NOAH의 부활 등 자이언트 바바의 말 대로 왕도는 계속된 시련 속에서도 부활하고 있다.[6] WWE 회장 빈스 맥마흔의 부친. WWF 시절 회사의 근본을 닦은 업적이 있다.[7] 1957년 10월 10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25차전. 이 경기에선 프로 유일의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5이닝 1실점(1군에서의 유일한 실점)으로 그럭저럭 호투했지만 팀 타선의 침묵에다 후속 투수들이 주니치 타선에 줄줄이 얻어터진 것까지 겹치면서 결국 요미우리는 이 경기를 10-0으로 참패했고, 바바도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날 경기는 상대팀 주니치의 레전드 투수 스기시타 시게루가 통산 200승을 달성한 경기이기도 했다. 경기 결과[A] 이 점에 관해선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와 구단 수뇌부 사이의 갈등 가운데서 미즈하라 감독에게 구단 수뇌부 측 파벌로 찍히는 바람에 기회를 못 받았다는 설이 있다.#[A] [10] 거인병의 원인 중 하나인 뇌하수체 종양은 커질 경우 시각교차로를 눌러 시력의 저하를 유발한다.[11] 다만 나이는 김일 쪽이 연상이었다.[12] 사실, 역도산의 가장 오래된 제자이자 역도산 생전에 가장 큰 푸쉬를 줬고, 사후에 JWA의 회장자리까지 이어받은 인물은 토요노보리였다. 하지만, 도박에 횡령까지 해서 JWA를 대차게 말아먹고 쫓겨나듯이 탈단했는데, 탈단하면서 이노키까지 데리고 나가버려서 자이언트 바바는 그 두 선수의 몫까지 맡아 JWA를 먹여살리면서 역도산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갔던 김일이 JWA에 복귀한 것도 이 시기. 후에 토요노보리의 단체가 엉망이 되면서 이노키도 JWA에 복귀했다.[13] 그래플러 바키에 이 장면이 나온다.[14] 물론 발 넓이도 있으니 320mm 정도면 신발 사이즈는 340mm를 신어도 이상하지 않긴 하다.[15] WWE에선 부상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북미에서는 거인 선수에게 드롭킥을 자제시킨다. 자이언트 바바는 자신의 신조 때문에 샌드백을 세워놓고 열심히 드롭킥을 연습했다. 반대로 안토니오 이노키는 드롭킥을 잘 못써서 대신할 기술로 엔즈이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16] 역도산은 춉으로 야자수열매를 깬 적이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17] 정확히는 무릎에 상대방의 머리를 대고 강하게 발을 굴러서 충격을 주는 기술이다.[18] 안토니오 이노키의 기술을 빌려온 것으로, 이노키가 이걸 보고 더 독하게 개발한 것이 만자 굳히기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21] 링아웃 승리[22] 1승 1무 1패 무승부로 양측 모두 타이틀 유지[23] 양 선수 반칙 무승부로 타이틀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