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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11B2B><colcolor=#E6B366> 대한민국 제4대 헌법재판소장 이강국 李康國 | Lee Kang-kuk | |||
출생 | 1945년 9월 17일 ([age(1945-09-17)]세) | ||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용정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오수면 용정리)[1] | |||
본관 | 전주 이씨[2] | ||
현직 |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고문변호사[3] | ||
재임기간 | 대법관 (최종영 대법원장 제청 / 김대중 대통령 임명) | ||
2000년 7월 11일 ~ 2006년 7월 10일 | |||
제15대 법원행정처장 (장관급) | |||
2001년 11월 5일 ~ 2003년 9월 18일 | |||
제4대 헌법재판소장 (노무현 대통령 임명) | |||
2007년 1월 22일 ~ 2013년 1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11B2B><colcolor=#E6B366> 가족 | 배우자 김명원, 슬하 2남 1녀 | |
학력 | 전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법학 / 석사[4])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 박사[5])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명예박사) |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사도 요한) | ||
경력 | 제8회 사법시험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법원행정처 조사심의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제36대 대전지방법원장 대법원 대법관 (2000.07. ~ 2006.07.) 제15대 법원행정처장 (2001.11. ~ 2003.09.) 제4대 헌법재판소장 (2007.01. ~ 2013.01.)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변호사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초빙석좌교수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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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2. 생애
1945년 9월 17일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오수면) 용정리에서 아버지 호헌(澔軒) 이기찬(李起瓚, 1917. ~ 200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3년 전주고등학교, 196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해 치러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69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6]1972년 대전지방법원을 시작으로, 1977년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에서 판사로 근무했고, 같은 해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 연수를 다녀왔다.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1980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법원행정처 조사심의관, 1981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82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84년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1986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부장판사 겸 법원행정처 조사국장, 1989년 법원도서관장, 199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92년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1993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00년 대전지방법원장 등으로 재직하였다.
판사로 근무하던 중 최종영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대법관직을 맡았으며, 2001년 11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제15대 법원행정처장을 겸직하였다. 대법관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 전원합의체에서 유일하게 무죄의견을 냈던 적이 있다.
판사로 재직할 당시 헌법재판소법 제정에 참여했다.[7] 이 부분과 관련해서 2004년 노무현 탄핵과도 인연이 있다. 당시 헌법재판소법에는 '헌법재판소법 36조 - 위헌, 권한쟁의, 헌법소원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의견을 표시해야 한다.' 라고 적혀있었다. 탄핵 심판과 위헌정당해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법 제정당시 재판관들의 정치적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탄핵과 정당해산심판은 소수의견을 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노무현 탄핵에 찬성한 소수 재판관들[8]은 탄핵에 찬성하는 소수의견을 써야한다고 주장했고 탄핵에 기각한 다수 재판관들과 대립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문제로 이강국에게 자문까지 구했다고 한다. 이강국은 앞서 말한 바를 헌재에 전했다고 한다. 즉 소수의견은 표시를 하지 말라고 한 것. 결국 탄핵을 주장한 소수 재판관들은 한 발 물러서서 탄핵의 정당성을 담은 장문의 소수의견을 쓸 것을 요구했고 탄핵을 기각한 다수의 재판관들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되었다.
대법관 임기가 끝난 뒤 2006년에 잠시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변호사로 재직하였다.
2007년 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제17대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되었다. 201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 4월 임기를 마친 뒤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초빙석좌교수 등으로 임용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된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퇴임 후에는 대한법률구조공단 같은 곳에서 법률상담 봉사를 하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는데, 퇴임 후 정말로 그 약속대로 2년여간 법률상담 봉사를 하여,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2015년 법무법인(유한) 한결 변호사로 임용되었고, 2019년 법무법인(유한) 클라스 고문변호사를 지냈다. 2023년부터 법무법인(유한) 클라스한결 고문변호사로 활동하였다.
3. 여담
- 3대가 법조인으로 종사하였다. 아버지 호헌(澔軒) 이기찬(李起瓚, 1917. ~ 2002.)은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했고, 장남 이훈재(李勳宰, 1973년생)는 사법연수원을 제29기로 수료한 뒤 판사로 재직 중이다.[9]
[1] #.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2] 효령대군파-서원군(瑞原君)-춘성정파(春城正派) 19세 강(康) 항렬. 족보에 기록된 초명(初名)은 이강만(李康滿).[3] #[4] 석사 학위 논문: 통치행위의 연구(1969.)[5] 박사 학위 논문: 헌법합치적 법률해석(1980.)[6]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은 사법연수원 제도 도입 전 사법시험 합격자들이 연수와 연구 목적으로 입학하는 곳이었다.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석사 논문을 써야 졸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사법대학원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론이 원생들 사이에서도 여론으로도 커져 사법대학원보다 좀 더 실질적인 연수가 가능한 사법연수원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사법대학원 전의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는 사법관시보라는 제도를 통해 수습기간을 거쳤다.[7] ’4기 헌재’ 중흥 이끌고 떠나는 이강국 소장[8]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권성, 이상경, 김영일 재판관 이라고 한다.[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