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d400> 1세 | 2세 | 3세 | 4세 |
시조고 | 이자연 | 이천상 | 이광희 | |
<rowcolor=#ffd400> 5세 | 6세 | 7세 | 8세 | |
이입전 | 이긍휴 | 이염순 | 이승삭 | |
<rowcolor=#ffd400> 9세 | 10세 | 11세 | 12세 | |
이충경 | 이경영 | 이충민 | 이화 | |
<rowcolor=#ffd400> 13세 | 14세 | 15세 | 16세 | |
이진유 | 이궁진 | 이용부 | 이린 | |
17세 | ||||
선조고 | ||||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선조고의 부친 이린 | 李隣 | |
출생 | 미상 |
전라도 전주목 | |
사망 | 미상[1] |
전라도 전주목 | |
본관 | 전주 이씨 |
휘 | 린(隣[2] / 璘[3]) |
부친 | 이용부 |
형제자매 | 이준의, 이의방, 이거 |
배우자 | 남평 문씨[4] |
6대손 | 태조(조선) |
[clearfix]
1. 개요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이의방의 동생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열조부(6대조). 의종~무신정권기의 관료였던 문극겸의 사위이다.2. 생애
전라도 전주목 자만동[5]에서 대장군 겸 태자청 도솔부솔[6] 이용부(李勇夫)와 정승 이형의 딸 이씨 부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는 4남 1녀로 장남은 이준의, 차남은 이의방, 3남은 이린, 4남은 이거이며 딸은 우학유의 부인이었다.정확한 출생 시기는 모르나 장인 문극겸이 형 이의방보다 한 살 어린 것을 볼 때, 이의방과는 부자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듯하다. 이의방이 무신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1174년(명종 4년) 12월에 집주(執奏)로 임명받았다.# 집주(執奏)는 왕의 명을 출납하는 요직으로 무신정변 이전까지는 환관이 맡았으나 무신정변 이후부터는 무신정권 집권자들이 맡았다.
집주로 부임한지 1주일 만에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자 군을 끌고 나갔던 형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보낸 승려 종참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갑오정변).# 이의방은 역적으로 몰렸고 가문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왕태자비였던 이의방의 딸은 쫓겨났고[7]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그의 가족들도 전부 참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1. 최후 관련 이설
정작 이의방의 몰락 이후, 이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여러 설들이 있는데, 그 중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인 문극겸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았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린 역시 형들과 같이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고려사절요》에 '정균이 이의방을 죽인 후 이준의 형제 및 그의 당여 고득원과 유윤원을 잡아 모두 죽였다'고 적혀 있다.#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宣義門) 밖을 나가자 정균(鄭筠)이 몰래 종군승(從軍僧) 종참(宗旵) 등을 꾀어 호소할 것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이의방의 뒤를 따라가 틈을 엿보아 그를 죽이고, 사람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이준의(李俊儀) 형제 및 그 당여인 고득원(高得元)과 유윤원(柳允元) 등을 수색하여 잡아 그들을 모두 죽였다.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광효대왕>, 명종 4년(1174) 12월, -이의방과 그 당여가 제거되다-
저기서 주목할만한 문장은 '이준의 형제'이다. 만약 저 때 이준의만 죽인 것이었다면 굳이 이준의 형제라고 뒤에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냥 이준의라고만 적어도 될 것이다.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광효대왕>, 명종 4년(1174) 12월, -이의방과 그 당여가 제거되다-
그리고 문장을 잘 보면#, 이의방과 이준의 형제가 동시에 죽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른 형제도 정균 세력에게 살해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그게 바로 이린이라는 것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홈페이지의 이린 항목에는[8], 김영곤 작가가 집필한 역사소설 《고려왕비열전》[9]을 인용하여 '김영곤의 《고려왕비열전》에는 이린이 1174년에 참살당한 것으로 나와있다' 라고 적혀있다.[10]
또한 전주 이씨의 상고사를 다룬 연대, 작자 미상의 책 《완산실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인 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셨다. 그러나 '인 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완산실록》#
《완산실록》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 내용이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많다. 애초에 구조적으로 '실록'조차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대략적인 정황을 유추할 수는 있다. 저 문장 중에 '인 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란 구절이 있는데, 이는 이린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완산실록》#
그렇지만 《고려사》의 다른 기록을 보면, 위에서 말하는 이준의 형제가 꼭 이린으로 봐야할 지에 대해선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반박도 있다. 《고려사》 1171년 10월 11일 기록에는 궁궐에 불이 났을 때, 이준의(李俊儀)가 입직했다고 언급하고, 뒤에 이의방(李義方) 형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의방 형제는 정황상 이의방과 이준의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때처럼 이의방과 이준의가 참살당할 때도 둘의 관계를 강조하고, 둘이 죽은 시기는 다르지만 어쨌든 형제인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형제라고 뒤에 덧붙인 것으로도 볼 여지도 있다.
정황상 정중부가 집권한 이후, 문신들을 이전처럼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대했던 것을 보면 문신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문극겸의 사위인 이린 역시 이때 대놓고 죽이기에는 의외로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탄핵하여 좌천시키자 인심을 크게 잃고, 조정 신료들의 미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며, 저 일은 결국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여 경대승이 정중부를 척살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기해정변)[11]
다만, 이린의 아들 이양무의 존재는, 저 당시 이린의 생사여부 판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혼인한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시점이었으니 1174년 혹은 그 이전에 이양무가 태어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12] 설령 이린이 저 때 죽었다 하더라도 이양무는 외할아버지 문극겸의 비호를 받아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확실한 것은 살았든 죽었든 저 때 이후, 이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 이린의 삶은 알 수 없다.
3. 가족과 후손
이준의, 이의방의 존재를 흑역사로 생각해 전주 이씨 측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렸다. 사실 고려 시대 무신정변의 주동자로써 반역자로 찍힌 이의방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과거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이린의 한자를 다르게 써놓는 등으로 애매하게 기록한 경우도 있었다. 현재는 전주 이씨 문중에서도 인정하고 있다.#[13]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대장군 이양무(李陽茂)이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딸은 류택(柳澤)과 혼인했다. 그 사이에서 나온 외손자가 바로 무신집권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권신 류경이다.
이양무의 5대손이 바로 태조 이성계이다. 사실상 현존하는 대부분 전주 이씨의 조상이다.[14] 이후 가계는 조선/왕사 참조.
4. 대중매체
[1] 정황상 형들과 같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2]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3]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의 기록.[4] 문극겸의 딸이다.[5] 현재의 풍남동 이목대, 전주 한옥마을 일대.[6] 태자를 시위하는 역할[7] 훗날 이의방의 딸과 혼인했던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강종(康宗)(제22대)이다. 강종이 즉위한 후 이의방의 딸을 복권시켰고, '사평왕후'(思平王后)로 추존했다. 그리고 짧은 혼인이었음에도 둘 간의 금슬은 괜찮았는지 수령궁주라는 딸을 한 명 두었다.[8] '16세(世) 인(璘) (3)' 단락 참조.[9] 2016년 금성출판사 출판[10] 원문: ...(생략)... 이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린 등 100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 작가의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생략)...[11] 문신들 중 문극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송유인이 문극겸을 탄핵한 것이 경대승의 거병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 천민 출신으로서 이의민, 두경승과 함께 권력을 나눠 가졌던 조원정도 문극겸에 의해 끌어내려진 탓에 그를 죽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문극겸이 조정 내에서 가졌던 영향력은 말년까지도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12] 이양무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진 것이 없다.[13] '16세(世) 린(璘) (3)' 단락 참조.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고 문장을 마무리 지은 것을 볼 때, 다른 견해의 제기 가능성도 열어둔 듯 하다.[14]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종파 분류에 따르면, 이린의 후손이 아닌 파는 시중공파(侍中公派, 이린의 숙부 이단신이 파조)와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이린의 동생 이거가 파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