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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5 20:07:07

이긍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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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조고의 곤손자
이긍휴 | 李兢休
관직 사공(司空)
본관 전주 이씨
긍휴(兢休)
부친 이입전
모친 백씨(白氏)
부인 이씨(李氏)[1]
자녀 이염순 외 6남[2]
17대손 태조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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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국성 전주 이씨시조 이한의 내손자.

2. 상세

이입전의 아들로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시대의 '사공'은 3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으며,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이긍휴는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셨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서 6금불(六金佛)이 와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이긍휴가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긍휴는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했고, 9년(또는 8년) 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한 후 훗날을 기약했다고 한다.



[1]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2] 《동국세기》및《충효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