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FC 선수단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역대 소속 선수 | |||
종목 | 이름 | 역할 | 등번호 | |
축구 | 안정환 | 감독 | - | |
씨름 | 이만기 | 선수 | 49 | |
농구 | 허재 | 선수 | 90 | |
야구 | 양준혁 | 선수 | 10 | |
육상 | 이봉주 | 선수 | 41 | |
체조 | 여홍철 | 선수 | 7 | |
레슬링 | 심권호 | 선수 | 55 | |
사격 | 진종오 | 선수 | 5 | |
격투기 | 김동현 | 부주장/선수(GK) | 8 | |
테니스 | 이형택 | 주장/선수 | 3 | |
배구 | 김요한 | 선수 | 25 | |
빙상 | 모태범 | 선수 | 89 | |
수영 | 박태환 | 선수 | 11 | |
야구 | 김병현 | 선수 | 18 | |
유도 | 김재엽 | 선수 | 88 | |
태권도 | 이대훈 | 선수 | 77 | |
배드민턴 | 하태권 | 선수 | 2 | |
배드민턴 | 이용대 | 선수 | 45 | |
펜싱 | 최병철 | 선수 | 9 | |
연예 | 김용만 | 선수 | 19 | |
연예 | 김성주 | 중계/선수 | 28 | |
연예 | 정형돈 | 해설/선수 | 99 |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이봉주 李鳳柱 | Lee Bongju | |
출생 | 1970년 11월 8일[1] ([age(1970-11-08)]세) |
충청남도 천안군 성거면 소우리[2] (現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소우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거주지 |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 |
본관 | 전주 이씨[3] |
학력 | 성거초등학교 (졸업) 천성중학교 (졸업) 천안농업고등학교[4] (전학) → 광천고등학교 (졸업) 서울시립대학교 정경대학 (무역학 / 학사) |
신체 | 164.6㎝, 62㎏[5], 255㎜, A형 |
종목 | 육상 |
주종목 | 마라톤 |
소속 | 런코리아 |
종교 | 불교 |
병역 | 예술체육요원[6] |
가족 | 어머니 공옥희, 배우자 김미순 장남 이우석(2003년생), 차남 이승진(2004년생)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마라톤 선수이며, 손기정과 서윤복, 황영조에 이어 대한민국 마라톤의 계보를 이은 선수다. 이에 걸맞게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및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1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을 기록했다.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한국 마라톤은 국제 대회의 입상권 선수가 좀처럼 배출되지 못하고 있다.[7]2. 선수 경력
광천고등학교 1학년 때 육상 장거리에 입문했으며 개인 최고기록은 다음과 같다.- 마라톤: 2시간 7분 20초[8]
- 하프마라톤: 1시간 1분 4초
- 10,000m: 29분 44초 11
- 5,000m: 14분 12초 27
2.1. 1990년
제7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2.2. 1991년
제7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대한민국 마라톤의 대부로 알려진 정봉수 감독의 끈질긴 권유로 코오롱 사단에 입단했다.2.3. 1992년
1월 도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대한민국 최고 기록을 수립하며 4위로 골인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발전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져 출전을 포기하고 말았다.[9]2.4. 1993년
제74회 전국체전에서도 2시간 10분 27초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2월에 열린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 대회로 나섰다.2.5. 1996년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라톤의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금메달을 획득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니와 아쉽게도 단 3초 차이였는데, 이것은 역대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소 1·2위 격차였다. 이봉주 바로 뒤에 들어와 동메달을 획득한 케냐의 에릭 와이나이나는 다음 대회에서 에티오피아의 게자네 아베레에 이어 은메달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1일에 열린 일본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스페인의 알베르토 후스타도를 2초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이 대회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 게임 같은 대회처럼 비중 있는 대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12]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서 첫 뉴스로 보도하는 등 무려 다섯 꼭지가 후쿠오카 마라톤 우승에 관한 보도였을 정도로 이봉주와 투과니와의 리턴 매치가 주목을 받았던 경기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출신 조시아 투과니는 진눈깨비가 날리는 일본의 영하 날씨에 적응을 못하여 기권했다.
2.5.1. 올림픽 은메달의 의미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서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 대한 대접은 이봉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봉주 이전까지 금메달 문턱에서 물러선 대한민국 선수에 대한 언론의 기사 내용은 대개 "은메달에 그쳤다, 동메달에 머물렀다"는 식의 부정적 표현이 많았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 이후로는 유도 남자 71㎏급의 곽대성이 나카무라 켄조[13]와의 결승에서 통한의 판정패를 당하자[14] 자리에서 엎어져 주먹으로 매트를 치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중계되었고, 기계체조 남자 도마의 여홍철이 결선 1차 시기에서 1위에 오르고도 2차 시기에서 고질적인 착지 불안에 발목을 잡혀 2위로 처지자 인터뷰 도중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지나치게 금메달에만 집착한다는 편견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폐막 후 MBC 뉴스데스크에서 이렇게 대한민국 선수들의 금메달 지상주의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올림픽 금메달만 바라고 매일 매일 지옥 훈련을 견뎌왔던 선수들 입장에서는 사무칠 정도로 아쉬운 것이 당연하다. 그만큼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갖는 주목도와 상징성이 엄청 나기 때문이다.하지만 1위와 불과 3초 차[15]로 금메달을 놓치고도 1위를 차지한 조시아 투과니와 손을 잡고 발맞추어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도는 이봉주의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은메달로도 기뻐하는 선수가 있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링크된 동영상에서 중계를 하는 캐스터는 공교롭게도 이 경기가 본인의 아나운서로서 마지막 올림픽 경기 중계가 된 당대 스포츠 캐스터 중의 원로 서기원[16] 캐스터였는데, 대한민국 선수가 3초 차로 금메달을 놓쳤는데도 이봉주가 골인하는 순간엔 아쉽다는 기색이 없었다.[17][18] 다음 날 각 신문도 이봉주의 은메달 소식을 1면에 이봉주의 골인 순간 사진까지 실어서 대서특필했는데, 이봉주 이전에 타 선수의 은메달 소식을 1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보도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봉주는 한국에서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은메달로 중앙 일간지 1면에 대서특필 된 최초의 선수가 된 것이다.
자연히 국민들과 선수들과 언론들에게도 은메달을 아쉬운 것이 아닌, 금메달보다 값진 것이라는 긍정적 인식이 이봉주 이후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은메달에 그쳤다는 부정적 표현 대신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 금메달보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은메달이라는 긍정적 표현을 더 자주 쓰게 되었고, 국민들도 최선을 다해 은메달을 딴 선수에게 질타나 아쉬움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더 크게 보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메달을 따고 대역죄인처럼 석고대죄하며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떨구던 선수들의 모습은 이봉주 이후로 눈에 띄게 줄었다. 멀리 갈것도 없이 이봉주 바로 다음 차례로 2000 시드니 올림픽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19] 은메달리스트인 강초현[20]은 시상대에서 금메달리스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활짝 웃었다. 또한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럽 출신 심판의 편파판정[21]으로 덴마크에 패해 은메달을 딴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현재까지도 졌잘싸의 가장 대표적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일본 땅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일본 유도의 성지 부도칸에서 열린 유도 경기에 출전한 조구함이 결승에서 일본의 아론 울프에게 연장 접전 끝에 패했는데도 그의 손을 높이 들어 승리를 축하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취약 종목인 육상 높이뛰기와 수영 다이빙에서 우상혁과 우하람이 각각 4위에 올라 한 끗 차로 메달 획득에 실패했는데도 그들의 표정에서 아쉽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전세계에 코로나를 전파한 중국에서 열렸고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추악한 대회로 남게 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는 차민규가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홈팀 중국 선수에게 0.07초 차로 금메달을 내줬는데도 선수 본인이나 중계진이나 국민들 모두가 기뻐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양궁 여자 개인전에서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 전원이 4강에 진출하고도 전훈영이 동메달을 놓쳐 아쉽게 포디움 스윕에 실패했지만 금 은 싹쓸이와 양궁 종목 4관왕에 전국민이 기뻐하였다.
즉 이봉주가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얻은 은메달은 단순한 은메달 1개가 아니라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 대한 한국에서의 선수, 언론, 국민들의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기념비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1) 한국 스포츠의 역사에서 손기정과 황영조로 대표되는 마라톤의 가치, 2)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목으로서 마라톤이 갖는 상징성[22], 그리고 3) 불과 3초 차이로 1위와 2위가 갈렸다는 점에서 '금메달에 못지 않은 은메달'이라는 평가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마라톤이 아닌 다른 종목에서, 조금 더 큰 기록 차이로 메달이 갈린 것이었다면, 이봉주가 남긴 '금메달 만큼 값진 은메달'의 신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향후 이봉주가 은퇴할 때까지 꾸준히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줬다는 점도 이러한 평가가 유지되는 데 일조했다.
2.6. 1998년
4월에 열린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의 한국 신기록으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2.7. 1999년
정봉수 감독과의 갈등과 '코오롱 사단'의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며 탈퇴해 은퇴설까지 나돌았다.2.8. 2000년
2월 13일 무소속으로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20초로 대한민국 최고 기록을 세웠다.[23]그러나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타국 선수와 부딪히는 바람에 24위로 뒤졌다. 타국 선수는 경기를 포기했지만 이봉주는 완주를 했으니 그의 열정과 성실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안타까운 성적은 본인으로서도 가장 아쉬운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 다시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2.9.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시드니 올림픽 챔피언 게자네 아베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47년 서윤복, 1951년 함기용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51년 만의 우승이었다.2.10.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진과 발바닥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았다.2.11. 2004년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14위를 하였다.2.12. 2007년
이후 약간의 공백을 거쳐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서울 국제 마라톤에 참가했다. 1.5km를 남겨둔 지점에서 케냐 선수를 앞지르고 2시간 8분 4초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2.13.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28위에 그쳤다.2.14. 2009년
10월 21일, 제 90회 전국체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5분 25초[* 2003년에 영국 선수인 레드클리프가 거둔 여자 마라톤 최고기록과 같다마라톤 문서에서도 나와있듯이 이봉주가 은퇴하고 대한민국 마라톤은 침체기에 빠져들었기에 대한민국 마라톤의 마지막 불꽃이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3. 은퇴 이후
2009년 12월 8일 장미란 선수와 함께 체육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하였다.2011년부턴 예능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댄싱 위드 더 스타, 불멸의 국가대표등 고정으로 출연하였다.
이후, 자기야 - 백년손님에도 출연하며 삼척에 거주하는 장인어른[24]과의 케미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처가집까지 강제호송차량을 보냈을 때 뛰어온 건 덤.
2016년 2월 6일 방영된 무한도전에서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에 초대받았다. 박명수 왈 그의 노안은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 달려서' 그렇다고 하여 큰웃음을 주었다.[25] 페스티벌 당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모든 주목을 받으며 입장했으며, 등장과 동시에 모든 패널들을 폭소로 몰아넣으며 못친소 에이스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 뒤로 둘이 친해졌는지 백년손님에서 우현을 처가댁에 초대했다.
2017년 3월부터는 영남고등학교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2018년 체육대회 때 '이봉주를 이겨라'라는 종목에서 한명도 이봉주를 이기지 못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더 지구력이 강해졌다. 그의 후배들이 아시안 게임을 비롯한 주요 국제 대회에서 2시간 30분대 후반 내지 2시간 50분 대의 저조한 성적에 그치는 일이 계속되어 이봉주의 빈 자리가 더욱 부각되었다.
2019년부터 방영되고 있는 JTBC 뭉쳐야 찬다의 어쩌다 FC 멤버로 출연해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허리 부상으로 인해 잠정 하차했다. 2021년 현재도 부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 허리가 심하게 굽고 압박 붕대나 배에 보톡스를 맞지 않고선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인데, 심지어 내로라하는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진단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보험 적용이 안 돼서 자비로 치료하고 있는데, 소속사 런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여 '복벽 이상운동증'이라고 밝혔다. 예전부터 관련 증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증상이 하루 이틀 정도, 짧게는 몇 분에서 몇 시간에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배를 당기는 증상이 심해지면서 허리가 굽고 지금은 경추, 흉추, 요추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휠체어와 지팡이가 없으면 움직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2021년 5월 26일 방영된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여, 비록 현주엽의 부축을 받기는 했지만 허리를 굽고 혼자 서 있을 정도로 상태가 조금은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현재는 낭종 수술을 진행한 뒤 회복 중이라고 하며, 수술은 다행히 무사히 완료되었고 위 문단에 나온 몸의 증세도 서서히 호전되는 중이라고 한다. 6월 19일 그의 근황이 전해졌는데 배가 당기는 떨림도 없고 허리도 꼿꼿이 편 사진이 공개되었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완료하여 현재는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술 이후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다. 수술 이후 나아질 줄 알았으나, 딱히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2023년 6월, 유튜브 채널에 나와 근황을 전했다. 살이 찐 상태이고, 여전히 건강은 안 좋다고. 두 아들은 재수와 삼수를 하고 있어 스트레스도 받는다고 전했다.
12월, 6시 내고향에도 출연했는데 이전과 달리 호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굽었던 허리는 전과 달리 펴진 모습이며 건강은 괜찮냐는 질문에 "저도 이제 건강 많이 좋아졌다"고 답했다.# 인터뷰에서도 60%정도는 회복된 상태라고 밝혔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다행이라며 이봉주의 건강 회복에 대해 축하하는 반응.
2024년 6월 10일,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 이형택 특집에서 이형택과 함께 재활운동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비록 초저속이긴 하지만 손잡이를 잡지 않고 런닝머신 위에서 경보를 하는 장면이 나오며 수술 후유증을 거의 다 털어낸 모습을 보여줬다.
4. 수상 기록
올림픽 | ||
은메달 | 1996 애틀랜타 | 마라톤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98 방콕 | 마라톤 |
금메달 | 2002 부산 | 마라톤 |
5. 기타
- 마라토너로서 30살 이후 찾아온 슬럼프에서 벗어나 재기했으며, 44번을 도전해 41번을 완주한 엄청난 끈기와[26], 평발 및 짝발이라는 불리함을 극복했다는 점 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와 동갑이다. 경력상으로는 황영조가 앞섰기 때문에 가끔 조언 비슷한 걸 하다가 이봉주 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매스컴에서 이 둘을 라이벌 내지는 황영조의 후계자로 만들어 버렸지만, 실제로는 친한 친구 사이다.
- 은퇴 후에는 행실 면에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는 등 자기관리에 실패한 탓에 현재도 명성과는 별개로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황영조와는 달리, 긍정적이고 겸손한 성격을 가진 데다가 몸 관리를 잘하면서 현역 생활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에[27] 세간의 평판은 이봉주가 더 좋은 편이다. 언젠가 이봉주는 "황영조의 그 심장이 부러웠다.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재능이나 신체적 조건은 황영조가 훨씬 앞섰으나[28], 노력에서는 이봉주가 앞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황영조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중계했다.[29]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타까운 목소리로 동갑내기 선수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이봉주를 응원하기도 했다.
- 2019년 1월 2일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드라마와 영화에 카메오 출연을 한 경력도 있다. 2011년 개봉한 마라톤 영화 페이스메이커에 찬조 출연했었는데, 김명민이 황영조랑 붙으면 누가 이기냐고 묻는 질문에 죽을래?라고 윽박지르는 강렬한 씬을 보여주었고, 2017년 방영한 MBC 아침 드라마 역류에서 공다미(임도윤 분)의 느끼한 소개팅남 역할[30]을 맡아 짧고 강렬한 경기를 선보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은퇴한 지 한참 지났음에도 매일 아침마다 10~15㎞를 뛴다고 한다. 심지어 술 약속이 있어 차를 끌고 나가면 돌아올 땐 집까지 뛰어서 돌아온다고 한다.[31]
- 2000 시드니 올림픽 이후 동명이인인 어린이가 이봉주 선수의 홈페이지에 자신의 별명이 24등이 되었다면서 저를 위해서라도 1등을 하면 좋겠다고 응원의 글을 올리자 선물과 함께 이봉주 어린이의 별명을 1등으로 바꿔주겠다며 약속하고 2001 보스턴 마라톤에서 1등을 해서 그 어린이의 별명을 1등으로 만든 훈훈한 일화가 있다.
- 안치홍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 대상으로 이봉주를 지목하기도 했다.
- 2010년, 일밤의 예능이었던 오늘을 즐겨라에서 마라톤, 달리기 특집 총 3편에 연달아 출연[32]하였다. 첫 번째는 연예인 연합 42인과 이봉주 1인의 하프 마라톤 릴레이 대결, 두 번째는 육상트랙 오늘을 즐겨라 멤버 7인과 이봉주 1인의 대결, 세 번째는 자신의 모교인 천안 성거초등학교 학생 185명과 이봉주 1인의 하프 마라톤 대결에 출연하였었다. 아무래도 해당 방송 출연은 침체되어 가는 마라톤을 살리기 위한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이봉주의 첫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2013년 11월 1일, 나 혼자 산다 방송에서 이성재의 지인으로 잠깐 나왔는데, 현재는 치킨 장사를 하고 있다. 이성재와는 광고를 같이 찍으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그 외에는 손기정 기념재단의 감사 및 대한육상경기연맹 홍보이사로 활동중이다.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심판으로 데뷔했다. 9월 28일 남녀 20㎞ 경보와 10월 1일 남자 50㎞ 경보, 10월 2일 여자마라톤과 10월 3일 남자마라톤에서 심판으로 활동했다.
- '봉주르 라이프'라는 스카이라이프 광고를 찍은 적이 있다.
- 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라 국립묘지 안장대상이 된다. 대선배 손기정도 청룡장 수훈자격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는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진종오도 마찬가지로, 안장시 체육인 XXX로 적혀 안장된다.
- 허재와 5㎞짜리 마라톤을 한 적 있는데, 그걸 가지고 되겠냐고 허재를 신나게 갈궜다.
- 삼성전자 육상단 소속 시절에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또 하나의 가족' 시리즈 광고에 출연했던 적이 있는데, 본인이 직접 출연한 건 아니고 클레이 인형으로 만든 캐릭터로 연출한 마라톤 편에 등장했다. 이봉주가 달리는 도중에 시내에 설치된 디스플레이로 이봉주의 어머니가 아들을 응원하는 모습이 나오자 이봉주가 고개를 돌려 "어머니!"하고 반가워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후 힘을 내서 1위로 완주하는 내용의 광고. 이후 이듬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이 광고를 잠시동안 다시 냈던 적이 있었다.
- 어린 시절 축구선수가 꿈이었으나 돈이 없어 축구의 꿈은 접었고, 대신 돈이 거의 안 드는 마라톤을 선택했다고 한다. 신체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매일 12㎞나 되는 학교까지의 거리를 버스비도 아끼고 훈련도 할 겸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직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자신과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돈이 없는 어린 아이들을 도와주는 선행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다.
- 사고로 세상을 떠난 처남의 자식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키우고 있다. 이봉주가 먼저 조카를 집으로 데리고 와 자신이 조카를 챙겨줘야겠다고 이야기했고, 아내는 이봉주의 결정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 2022년 5월 위버스에서 LE SSERAFIM의 팬이 되었다고 직접 밝혔다.
- 2023년 11월, 자기야 - 백년손님에서 각별한 케미를 보여주던 장인어른이 숙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기야 - 백년손님에서 기억되는 모습과 2022년, 스타 다큐 마이웨이에서 아픈 이봉주를 위하여 태백산 가시오갈피를 구해오며 사위를 지극정성으로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같은 해인 5월에도 이봉주와 함께 삼척 국제마라톤대회에 나와 5km 완주하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 터라 갑작스러운 소식에 팬들은 더욱 애도를 표하고 있다.
[1] 음력 1970년 10월 10일[2] 디지털천안문화대전[3] 덕흥대원군파 15대손 ○주(○柱) 항렬. 선조의 형 하원군의 8남(서6남) 진성군 이해령의 13대손이다. 前 국무총리 이해찬, 전 NHN 대표 이해진, 원로배우 이해랑의 바로 아랫 항렬이고 덕흥대원군의 후손 전체로 따지면 순종황제의 손자뻘 항렬이다.[4] 現 천안제일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활동했다.[5] 뭉쳐야 찬다에서 밝혔다.[6]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7] 육상 종목 전체로 대상을 넓히면, 높이뛰기의 우상혁이 등장했다.[8]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 기록이다.[9] 사실 1992년은 이봉주에게 좋은 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선수들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가 아니다.[10] 1995 세계선수권 우승자였다.[11] 이 대회에 출전한 황영조는 레이스 도중 발바닥이 찢어지는 불운이 겹쳐 29위에 머물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얼마 후 은퇴 선언을 했다.[12] 다만 당시 해당 대회가 50주년이라 참가 선수들의 위상이 평소보다 훨씬 높았다.[13] 4년 후 2000 시드니 올림픽 같은 체급 8강에서 대한민국의 최용신에게 한판패했다. 하지만 정작 최용신은 준결승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연거푸 한판패해 메달을 받지 못했다.[14] 더군다나 한일전이었다.[15] 상술한 대로 역대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단 격차 은메달이다. 100m 달리기로 따지면 1/10000초 정도 차이라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1/100초 차로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금메달을 놓친 선수로는 김윤만과 차민규가 있다.[16] KBS 사장을 지냈던 서기원과는 동명이인이며, 2023년 7월 27일 타계했다.[17] 하지만 골인 후 이봉주가 트랙을 돌 때 은메달도 대단하긴 하지만 조금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18] 이봉주 이전에는 대한민국 선수가 은메달을 딸 때마다 캐스터들의 음성 톤에서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더군다나 애틀랜타 올림픽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깝다 올림픽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간발의 차로, 혹은 뒷심 부족으로 금메달을 놓친 경우가 많았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딴 은메달 15개는 단일 올림픽 대회를 기준으로, 그리고 단일 색상으로 최다 기록이다.[19] 새천년 첫 올림픽 첫 메달 이벤트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 종목에서 대한민국의 여갑순이 이 대회 1호 금메달을 획득했었다.[20] 2위와 2점 앞선 1위로 결선에 진출했다. 9발째까지 공동 선두였으나 마지막 10발째에서 실수를 범해 0.2점차로 은메달을 땄다. 반대로 24년 후 올림픽에서는 반효진 선수가 2위와 불과 0.1점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21] 이 편파판정은 올림픽 기계체조 사상 최악의 오심 및 편파판정으로 남게 된 남자 개인종합 양태영 사건에 밀려 이슈화되지 못했다.[22] 그 상징성 때문에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 출전한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가 중반부터 압도적 선두를 달리다가 관중의 방해로 페이스가 흐트러져 동메달로 만족한 사건이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널리 기억되고 있고, 리마는 브라질의 국민 영웅이 되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개막식에서 내로라하는 브라질의 스포츠 스타들을 제치고 성화 점화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23] 기존에는 신기록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마라톤은 신기록이 없다. 코스의 차이, 날씨 등의 변수에 따라 기록이 천차만별이라 획일화해서 적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비공인으로 적용되는 최고 기록 개념만 통용된다. 이 대회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세계 30위권 기록에 들어갈 정도였지만 현재는 세계 100위권조차 못 들어간다.[24] 이름은 김영극. 노란 추리닝을 좋아하여 붙여진 별명은 바나나 장인. 자기야 하차 후 2023년 노환으로 사망.[25] 참고로 박명수 - 이봉주 둘은 1970년생으로 동갑이며, 생일도 불과 2주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26] 매 경기마다 40km를 넘게 뛰는데, 대략 연습 거리까지 포함하면 200,000km 쯤은 된다고 한다.[27] 황영조 항목에도 나오듯이 그가 여러 구설수에 오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조기 은퇴는 결코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28] 황영조의 신체적 우위는 해녀였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29]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연패가 유력했으나 1996년 3월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한 동아마라톤에서 레이스 도중에 다리에 쥐가 나는 불운으로 중위권으로 밀려났다. 그를 구제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한육상경기연맹은 황영조를 예비출전 명단에 넣었지만 황영조는 며칠 후, 은퇴 선언을 하고 올림픽 출전을 포기했다.[30] 정확하게 극중 배역은 집주인 홍초희의 지인으로, 마라톤 동호회 회장 역할이다.[31] 물론 이봉주니까 가능한 거지, 일반인은 절대 따라해선 안된다. 과음한 상태에서 긴 거리를 뛰어오다간 큰일나니 돈이 좀 들더라도 대리운전 부르거나 택시 타는 게 낫다.[32] 도합 전적은 1승 2패.[33] 이봉주는 스포츠인이지만, 야구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일 뿐이다.[34] 참고로 윤종신은 우투좌타로 뛰었고, 천하무적 야구단에 출연한 적 있는 마리오는 좌투우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