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4-22 18:36:04

로버트 1세

로버트 브루스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eaa 0%, #005eb8 30%, #005eb8 70%, #003eaa);"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픽트인의 왕
알핀 왕조
키나드 1세 돔날 1세 카우산틴 1세 아드 기리크
픽트인의 왕 알바국왕
알핀 왕조
오하드 돔날 2세 카우산틴 2세 말 콜룸 1세 일둘브
알바국왕
알핀 왕조
두브 킬렌 키나드 2세 아믈리브 키나드 2세
알핀 왕조 둔켈드 왕조 모레이 왕조
카우산틴 3세 키나드 3세 말 콜룸 2세 돈카드 1세 막 베하드
모레이 왕조 둔켈드 왕조
룰라흐 말 콜룸 3세 돔날 3세 돈카드 2세 에드가르
둔켈드 왕조
알락산더르 1세 다비드 1세 말 콜룸 4세 일리암 1세 알락산더르 2세
알바국왕 스코트인의 왕
둔켈드 왕조 스베리르 왕조 발리올 왕조 브루스 왕조
알락산더르 3세 마르그레트 로버트 1세 데이비드 2세
스코트인의 왕
발리올 왕조 브루스 왕조 스튜어트 왕조
에드워드 데이비드 2세 로버트 2세 로버트 3세 제임스 1세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2세 제임스 3세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 메리 1세
제임스 6세 찰스 1세 찰스 2세 제임스 7세 메리 2세
윌리엄 2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브루스 왕조 초대 국왕
로버트 1세
Robert I
파일:Robert Bruce.jpg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영어 Robert the Bruce
중세 게일어 Roibert a Briuis
노르만어 Robert de Brus
스코틀랜드 게일어 Raibeart Bruis
초기 스코트어 Robert Brus
라틴어 Robertus Brussius
왕호 로버트 1세 (Robert I)
출생 1274년 7월 11일
사망 1329년 6월 7일 (향년 54세)
재위기간 1306년 3월 25일 ~ 1329년 6월 7일
배우자 마의 이사벨라 (1296년 결혼 / 1296년 사망)
엘리자베스 드 버러[1] (1302년 결혼 / 1327년 사망)
자녀 마조리[2], 마거릿, 마틸다, 데이비드 2세, 존, 엘리자베스
형제 이사벨라, 메리, 크리스티나, , 에드워드, 토머스, 알렉산더, 마틸다, 마거릿, 엘리자베스
아버지 6대 애넌데일 공 로버트 드 브루스
어머니 캐릭 여백작 마조리

1. 개요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2.2.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초기의 행적2.3.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
2.3.1. 존 코민 암살 사건과 스코틀랜드 국왕 등극2.3.2. 패배와 도주2.3.3. 로버트 1세의 반격2.3.4. 스코틀랜드 재정복2.3.5. 에드워드 2세의 반격 시도2.3.6. 1311년~1314년 잉글랜드 습격2.3.7. 해상 활동2.3.8. 배넉번 전투2.3.9. 1314~1316년 스코틀랜드군의 잉글랜드 북부 습격2.3.10.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2.3.11. 지속되는 전쟁과 협상2.3.12.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2.3.13. 1323년 ~ 1324년 잉글랜드와의 협상2.3.14. 치세 말기
3. 사후4. 가족5. 평가6. 기타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8. 같이보기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국왕.

본명은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로, 현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는 '라퍼르트 브루스'(Raibeart Brus)이며 그의 모어였을 중세 스코틀랜드어로는 '로베르트 브루스' 정도로 발음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 왕국을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한 군주이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인으로부터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스코틀랜드 왕국노르만계 귀족 브루스 가문 출신이다. 오늘날 인명으로도 흔히 쓰이는 브루스라는 성은 노르망디 지명의 브릭스(Brix)에서 비롯되었다. 이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인물은 《둠즈데이 북》에 거론된 로베르 브루스로,[A] 당시에는 'Bruis'라는 철자로 썼다. 아마 당시에는 가문이 아니라 인물의 별명쯤이었을 것이다. 로버트 1세의 6대조 로베르[A]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의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다비드 1세에 의해 애넌데일(Annandale)의 영주로 서임되었다. 그 후 브루스 가문은 대대로 애넌데일 영주로서 스코틀랜드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로버트 브루스는 1274년 7월 11일에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캐릭 여백작 마조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에어셔의 턴베리 성이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덤프리스셔의 로크메이벤에 있는 로크메이벤 성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본다. 아버지 로버트 브루스는 당시 생존했던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로, 마조리의 남편 자격으로 캐릭 백작위를 영위했다. 어머니 마조리는 캐릭 백작 니얼과 제3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월터 스튜어트의 딸 마거릿 스튜어트의 외동딸이었다. 형제로 에드워드 브루스, 토머스 브루스, 알렉산더 브루스, 닐 브루스, 크리스티나 브루스[5]. 메리 브루스[6], 이사벨라 브루스[7], 모드 브루스[8], 마거릿 브루스[9]가 있었다.

로버트 브루스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지역 관습에 따라 형제들과 함께 친철한 아일랜드인 가정에서 자랐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아마도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자리잡은 게일인 귀족 가문의 집에서 양육되었을 것이다. 그는 게일어노르만어에 능통했으며, 라틴어중세 영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그는 청년 시절 에드워드 1세의 궁정을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1286년,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가 왕비를 만나려고 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와중에 여행을 떠났다가 절벽에서 추락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스콘에 긴급 의회가 소집되어 왕위로 세울 사람을 누구로 삼을 지를 놓고 논의했다. 당시 알락산더르 3세의 유일한 외손녀이며 당시 3살이었던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있었고, 알락산더르 3세의 왕비 욜란드는 임신중이었다. 의회는 논의 끝에 왕비가 아기를 낳는 즉시 왕으로 받들기로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정계를 양분하던 제5대 에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갤러웨이 영주 존 1세 드 발리올 모두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겠다고 나섰지만, 의회는 둘 중 하나가 섭정이 되면 왕위까지 노릴 거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의회는 '수호자'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고, 브루스 가문과 발리올 가문 인사는 위원회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위원회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파이프 백작 돈카드, 부컨 백작 알락산더르 코민과 바데녹 영주 존 코민 2세,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제임스 스튜어트가 소속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선왕과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미래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욜란드 왕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1286년 11월 말, 욜란드는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사산했거나 출생 직후 사망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200여 년간 스코틀랜드 왕국을 이끌었던 둔켈드 왕조가 단절되었고, 마르그레트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제 수호자 6인은 마르그레트를 대신해 왕국을 통치하고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는 여성 상속인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발리올 가문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다. 1289년까지 수호자 중 한 명이 병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해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이들을 대체할 수호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는 허물어졌고, 귀족들간의 알력 다툼이 심해졌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국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선왕의 처남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마르그레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을 마르그레트의 권리와 안전의 보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에이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에이리크는 에드워드 1세의 설득과 로비에 넘어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289년,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그해 11월 6일, 솔즈베리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르그레트는 에드워드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290년 3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국 국경 인근 버검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와 마르그레트의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교황청이 이 결혼을 승인했다고 알렸다.

이리하여 모든 문제가 매듭짓는 듯 했지만, 1290년 9월 당시 7살이었던 마르그레트가 노르웨이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배멀미에 시달린 끝에 오크니 제도에서 사망했다. 이에 여러 귀족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경쟁했는데, 그 수는 14명에 달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 존 발리올을 비롯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들 중 가장 적합한 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스코틀랜드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브루스 가문은 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존 발리올의 통치에 협력하지 않았다. 1295년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사망했고, 로버트 1세의 아버지인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제6대 애넌데일 영주가 되었으며, 로버트 1세는 캐릭 백작을 맡았다.

로버트 브루스 부자는 스코틀랜드의 영주로서 국왕에게 충성 서약할 의무가 있었지만, 존 발리올을 받들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했고 1295/1296년 겨울 존 발리올의 군대 출동 요청을 무시했다. 이에 존 발리올은 애넌데일을 몰수해 바데녹 영주 존 코민 2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로버트 브루스 부자는 애넌데일을 넘기길 거부하고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아버지 브루스는 1295년 10월 6일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칼라일 성의 보안관을 선임되었다.

2.2.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초기의 행적

1296년 봄,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불복종한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이때 제6대 애넌데일 로버트 브루스는 자기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에드워드 1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잉글랜드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특히 던바 전투에서 부컨 백작 존 코민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결국 존 발리올은 1296년 8월에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하고 왕관과 왕복을 바쳤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세우지 않았고, 스코틀랜드 왕국 자체를 해체하고 총독을 세웠으며,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이 대관식 때 사용했던 운명의 돌런던으로 가져갔다.

그 후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 내 영지에 은거하고 다시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장남 로버트 브루스는 캐릭 백작으로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하지만 그는 1297년 4월 윌리엄 월레스앤드류 모레이가 이끈 반란군이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휩쓸자 반란군에 가담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1297년 여름, 에드워드 1세가 세운 스코틀랜드 총독 존 드 워렌을 보좌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이를 따르지 않고 에드워드 1세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딸을 파괴했다. 그러나 7월 7일 토벌대가 위협을 가하자, 제5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제임스 스튜어트윌리엄 르 하디가 어바인에서 항복할 때 사면받는 대가로 귀순했고, 어린 딸 마조리를 인질로 보냈다.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존 드 워렌이 이끄는 토벌대가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의 반군에게 격파되자,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다시 반군 편을 들었다. 그는 애넌데일을 황폐화하고 잉글랜드군이 점령하고 있던 에어 성을 파괴했다. 1298년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참패한 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에게서 애넌데일과 캐릭을 통치할 권리를 박탈했지만, 그가 귀순하고 자기를 위해 싸운다면 돌려줄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로버트 브루스는 윌리엄 월레스가 패전 책임을 지고 스코틀랜드 수호자 직위에서 사임하자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 수호자를 맡아 에드워드 1세에 대적했다.

그러나 로버트 브루스와 존 코민 3세는 섭정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 존 코민 3세는 존 발리올의 외조카이자 지지자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어서 브루스 가문의 정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299년 세인트앤드루스의 주교 윌리엄 램버튼이 브루스와 코민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3번째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1300년 브루스는 사임하고, 잉그램 드 움프라빌이 그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수호자가 되었다. 1301년 5월 잉그램 드 움프라빌, 존 코민 3세, 윌리엄 램버튼이 모두 사임하고, 존 드 소울스가 스코틀랜드의 유일한 수호자가 되었다. 존 드 소울스는 일개 기사였지만, 브루스 진영이나 코민 진영에 속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했기에 수호자로 선출될 수 있었다. 존 드 소울스는 존 발리올을 복위시키기 위해 외교 활동과 군사 활동을 병행했다.

1301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여섯 번째 원정을 개시했다. 그는 보스웰 성과 턴베리 성을 함락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1302년 1월에 9개월간의 휴전을 맺었다. 1302년 2월 16일,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애넌데일과 갤러웨이의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세인트 존에게 귀순했다. 로버트 브루스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데, 많은 학자는 그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잉글랜드 국왕이 브루스 가문의 정적인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다시 인정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여기에 알렉산더 애버네시 등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도 로버트 브루스를 따라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의 귀순을 환영했고,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딸 엘리자베스 드 버러와 결혼시켰다. 결혼식은 에식스의 체름스퍼드인근 리틀에서 열렸다. 1303년, 에드워드 1세는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에든버러에 입성한 후 퍼스로 진군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수호자였던 존 드 소울스는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은 프랑스 왕국을 설득하기 위해 파리에 가 있었고, 존 코민 3세가 수호자를 맡았다. 존 코민 3세는 더 이상 에드워드 1세를 대적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다수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1304년 2월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오직 윌리엄 월레스사이먼 프레이저 만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세리크 숲에서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유격전을 이어갔다.

1304년 2월 20일, 로버트 브루스는 초대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 존 시그레이브와 함께 해프루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군을 섬멸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에드워드 1세로부터 상당한 보상을 받았으며, 애넌데일 영지와 캐릭 백작령을 돌려받았다. 그 후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총독 정부를 재건할 때, 총독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담당한 스코틀랜드 위원 22인에 포함되었다.

2.3.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

2.3.1. 존 코민 암살 사건과 스코틀랜드 국왕 등극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극비리에 램버튼 주교와 접촉해 새로운 봉기를 준비했다. 에드워드 1세도 그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던 것 같다. 1305년 9월, 에드어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에게 킬드러미 성을 "자신이 기꺼이 책임질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라"고 명령했다. 또한 1305년 10월 10일 6개월 전에 로버트 브루스에게 기증하기로 했던 길버트 드 움프라빌의 토지를 도로 회수하게 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1세가 중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파일:코민의 죽음.jpg
앙리 펠릭스 엠마누엘 필리포토(Henri Félix Emmanuel Philippoteaux) 작, <코민의 죽음>, 1856년.

1306년 2월 10일, 브루스는 덤프리스의 프란치스코회 교회에서 존 코민 3세와 만나 자기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존 코민 3세는 존 발리올이 왕이 되어야 하지, 그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이다가 로버트 브루스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에 의해 교회 제단 앞에서 피살되었다. 삼촌 로버트 코민 역시 그를 지키려 했다가 로버트 브루스의 처남인 크리스토퍼 세튼에게 피살당했다. 그 후 로버트 브루스는 교회에서 살해를 저질렀기 때문에 파문 당했지만,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면받았다. 그 후 6주 만에 스콘에서 부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 등의 추대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등극했고, 바데녹 영지를 몰수했다.

전승에 따르면, 코민은 에드워드 1세에게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의회에 이 일을 보고했다. 이때 의회에 출석했던 하트퍼드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가 브루스에게 경고했고,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한 뒤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는 1306년 2월에 열리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간주하며, 일각에서는 브루스가 위험한 정적이 될 존 코민 3세를 배제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고자 암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로버트 브루스가 교회를 떠났을 때, 존 코민 3세는 아직 살아있었다. 로버트 브루스는 로크메이벤 성으로 돌아와 친척인 제임스 린제이와 로저 커크패트릭에게 자신이 코민을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렸다. 커크패트릭과 다른 추종자들은 교회로 달려간 뒤 심하게 다친 채 누워 있던 코민을 확인사살했다고 한다.

2.3.2. 패배와 도주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그는 1306년 4월 5일에 에이머 드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발랑스는 '드래곤 깃발'을 들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걸 용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곧 반란 주모자 로버트 브루스, 추방령을 어기고 브루스에게 가담한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반란에 또다시 가담한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를 생포해 런던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한편, 로버트 1세는 덤프리스, 달스윈튼, 티버스, 에어 성을 공략했고, 킬마녹의 로버트 보이드는 로데세이 성을 점령하고 인버킵을 포위했다. 또한 그는 두나버티 성을 확보함으로써, 클라이드만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부 성 5개를 소유했다. 그는 일부 귀족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잉글랜드군이 확고하게 장악한 로디언에게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케이스네스, 서덜랜드, 로스, 부컨, 던바 등 다수의 귀족도 브루스의 반란에 반대했다. 그들은 존 발리올 만이 정당한 군주라고 여겼고, 존 코민 3세를 살해한 것을 비난했다. 특히 코민 가문은 로버트 브루스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1306년 6월,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는 퍼시 남작 헨리 퍼시,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클리퍼드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 주에서 모은 3,000명을 이끌고 퍼스로 이동해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6월 18일, 로버트 1세는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병사 4,500명을 이끌고 퍼스 서쪽의 구릉 지대를 넘어 퍼스로 진군했다. 연대기 작가 기스버러의 월터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기사들에게 문장 위에 흰 옷을 입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기사들의 문장과 반군의 정체성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로버트 1세는 적진에 사절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발랑스는 전투를 벌이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날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로버트 1세는 발랑스의 말을 믿고 알몬드 강 남쪽의 메스번 평원에 숙영지를 세우고 야영했다. 이때 일부 스코틀랜드인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다른 이들은 더 나은 거주지를 찾아 흩어졌다. 발랑스는 적이 무질서해졌다는 걸 눈치채고, 6월 19일 새벽에 스코틀랜드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금세 압도당해 사방으로 패주했다. 로버트 1세는 수백 명의 군인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의 부하 다수는 죽거나 생포되었다.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펨브로크 백작은 반란을 지지했던 윌리엄 램버튼 주교와 로버트 위셧 주교를 체포했다. 두 주교는 스콘의 수도원장과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혔다. 로버트 1세는 메스번 전투 패배 후 장병 500명을 수습한 뒤 인치프레이의 모리스 수도원장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랜드 서부로 퇴각해 아가일 산맥을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스트라스필란에 이르렀을 때, 아가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존 맥두걸이 이끄는 맥두걸 가문 사병 1,000명이 스코틀랜드군이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틴드럼 시에 주둔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잉글랜드군이 뒤에서 바짝 쫓고 있어서 물러날 수도 없게 된 로버트 1세는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존과 전투를 벌일 때까지 대담하게 기다렸으며, 적군이 수적 우위를 앞세우며 몰려오자 다른 장병들이 무사히 후퇴할 때까지 분전했다고 밝혔다. 로버트 1세가 그때까지 가지고 다녔던 모든 말이 맥두걸 가문 도끼병들에게 사살되었고,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길버트 드 라 헤이가 부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어느 순간 언덕과 호숫가 사이에서 홀로 남아서 적에게 에워싸였다. 공격자들은 그를 잡아 끌어내리려 했지만, 그의 망토와 못이 박힌 브로치만 벗겨졌고, 로버트 1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 브로치는 일명 '론의 브로치'로 일컬어졌으며, 맥두걸 가문의 수중에 넘어가서 두놀라 성에 보관되었다가 영국 내전 때 케레라 섬의 가일런 성으로 옮겨졌다가 1647년 뉴어크 영주 데이비드 레슬리가 가일런 성을 함락한 뒤 캠벨 가문의 수중에 들어갔다. 1824년 로크넬의 던컨 캠벨 장군이 맥두걸 가문에 브로치를 돌려줬다.

달리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로버트 1세는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병사들을 해산한 뒤,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 동생 닐 브루스,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 알렉산더 린제이,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산을 넘어 애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고,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그 후 아솔 백작은 브루스 가문의 여성들과 함께 도주하다가 테인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동생 닐 브루스도 체포되어 베릭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처남 크리스토퍼 세튼은 로크둔 성에서 체포되어 덤프리스에서 처형되었고, 크리스토퍼의 동생 존 세튼과 버나드 모왓은 8월 4일 뉴캐슬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왕비 엘리자베스는 홀더니스에서 가택연금 되었고, 자매인 크리스티나 브루스는 부컨 백작부인이며 로버트 1세에게 왕관을 씌워준 이사벨라 맥더프와 함께 록스버러와 버윅의 성벽에 매달린 철창에 갇혔다.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는 당시 12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런던 탑에 갇혔다가 나중에 요크셔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한편, 로버트 1세는 레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도주했다. 이후 두나버티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몰려오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가 그다음 6개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섬들이나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것이다. 14세기 연대기인 <게스타 아날리아>(Gesta Annalia)에 따르면, 킨타이어 반도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의 여성 영주인 크리스티나가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주한 로버트 1세를 섬에 숨겨줬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 에드워드 1세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 원정 중에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여성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2.3.3. 로버트 1세의 반격

1307년 2월, 로버트 1세의 형제 토머스 브루스알렉산더 브루스가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 스코틀랜드 기사 레지날드 크로퍼드, 킨타이어의 영주 맬컴 맥퀼런과 함께 선박 18척을 타고 갤러웨이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갤러웨이의 유력한 귀족인 둔갈 맥도월에게 라이언 호 전투에서 격파되어 전원 생포되었다. 맥도웰은 즉시 크로포드와 맥퀼런을 참수한 뒤, 브루스 형제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두 형제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잔혹하게 처형했다.

한편,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로버트 보이드는 아란에 상륙한 뒤 존 헤이스팅스가 브로딕 성으로 보낸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 로버트 1세는 헤브리디스 제도아일랜드에서 전사 300명을 모은 뒤 아란으로 이동해 부하들과 합류했고, 함께 캐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텐버리 성을 접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텐버리 마을을 야간을 틈타 약탈한 뒤 아란으로 후퇴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남서부 갤러웨이에 비밀리에 상륙한 뒤, 1307년 4월부터 캐릭과 갤러웨이 언덕에서 잉글랜드 수비대를 잇달아 습격했다.

캐릭과 갤러웨이에서 유격 활동을 벌인 것은 무모하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한 움직임이었다. 캐릭 일대와 잉글랜드 국경이 그리 멀지 않아서 잉글랜드군이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았고, 많은 성채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군대에 의해 강력히 방어되었다. 또한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을 여전히 따르는 영주들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특히 브루스 가문을 적대시하는 맥도월 가문이 갤러웨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로버트 1세는 갤러웨이에서 기반을 다져야 희망이 았다고 판단하고, 클래터링쇼스 호수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은 잉글랜드 숙영지를 습격하는 등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스코틀랜드 총독이며 로버트 1세를 상대로 메스번 전투에서 승리한 에이머 드 발랑스는 로버트 1세가 갤러웨이에서 준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끝장내기 위해 친히 장병 1,500명을 거느리고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를 예상하고 글렌 호수변 협곡인 글렌 트룰에 본부를 세우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글렌 트룰은 천혜의 요새였다. 호수가 협곡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사람들은 가파른 경사로 둘러싸인 좁은 길로만 통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중간쯤에서 언덕이 험준한 교각에 가로막혀서 통행이 무척 힘들었다. 여기에 로버트 1세는 일부 부하를 경사로 보내 레버와 쇠지렛대를 사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화강암 바위들을 분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07년 4월, 발랑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글렌 트룰 협곡에 접근했다. 그들은 길이 무척 좁아서 일렬로 전진해야 했다. 로버트 1세는 호수 건너편에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신호를 보냈고, 그의 부하들이 경사면을 따라 바위를 밀어냈다. 잉글랜드군이 이 때문에 혼란에 휩싸이자, 로버트 1세의 부하들이 경사면을 따라 돌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길이 너무 좁은 데다 갑작스러운 바위 세례에 혼란에 빠진 터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협곡에 들어갔던 잉글랜드 병사 대부분이 살해되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글렌 트룰 전투 소식은 곧 갤러웨이 각지에 퍼졌고,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군을 물리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가담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북쪽으로 진군해 에어 성을 우회하면서 병력을 600명으로 증강했다. 발랑스는 3,000 가량의 병력을 재차 규합한 뒤 로버트 1세를 추격했고, 5월 10일 에어셔의 라우던 힐에서 적군을 따라잡았다.

로버트 1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라우던 힐 정상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칼마녹 시 동쪽에 있는 라우던 힐 서쪽에는 어바인 강이 흐르는 습지대가 형성되었고, 동쪽에도 습지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양쪽 습지대 사이의 길 하나가 고원을 가로질렀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장에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세 개의 참호를 파고 담벽을 쌓아 영국 기병대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더욱 제한했다. 그 결과 전장에는 약 90m 너비의 틈새가 남았고, 잉글랜드 기병들은 오직 이 틈새를 통해서만 스코틀랜드 창병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기병대가 제대로 된 돌파력을 발휘하기에는 전장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발랑스는 돌격 한 번이면 오합지졸인 스코틀랜드 민병대가 와해할 거라고 오판하고, 기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90m 너비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려다가 돌격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창병들은 그런 그들을 손쉽게 격퇴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함성을 힘껏 내지르며 내리막길을 따라 돌진했다. 잉글랜드 후위대는 아군이 무너지고 적이 돌진하는 걸 보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살육당했다. 발랑스는 군대를 수습할 생각 조차 못하고 보스웰 성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발랑스를 상대로 라우던 힐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로버트 1세는 3일 후 발랑스와 합류하기 위해 진군하던 글로스터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를 급습해 에어 성으로 몰아냈다. 이후 잉글랜드의 압제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인들이 로버트 1세가 완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그의 군영에 잇달아 합류하면서, 로버트 1세의 병력은 수천 명으로 삽시간에 불어났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가 아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동안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게 역효과를 야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1307년 3월 13일, 그는 발랑스 및 다른 관료들에게 서신을 보내 브루스의 협박을 받고 지원한 자들을 사면하라고 명령했다.

1307년 7월 초, 에드워드 1세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기 위해 군대를 칼라일로 소집했다. 그러나 7월 7일,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했고, 장남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2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2세는 귀족 대다수의 충성 서약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원정을 이어가지 않고 군대를 해산한 뒤 런던으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1307년 9월 13일에 장 드 브르타뉴로 교체했다.

2.3.4. 스코틀랜드 재정복

1307년 9월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부임한 장 드 브르타뉴는 전임자 발랑스와는 달리 로버트 1세를 적극적으로 추적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는 이때를 틈타 캐릭, 스튜어트 영지, 클라이즈데일, 레녹스,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모은 보병을 이끌고 그레이트 글렌을 거쳐 스코틀랜드 북부로 이동해 1307년 11월 인버로키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로스 백작 윌리엄 2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 여러 통을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결국 로버트 1세와 휴전 협약을 맺었다. 로버트 1세는 여세를 이어가 존 코민 3세의 사촌이자 가장 강력한 정적인 부컨 백작 존 코민을 향해 진군했고, 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더그러스데일, 어퍼 클라이즈데일, 셀커크 숲, 그리고 제드버러를 잇달아 석권했다.

1307년 크리스마스 이전, 발랑스의 가신이었던 셀커크와 트위드데일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로버트 1세 편으로 돌아섰다. 뒤이어 레녹스, 멘티스, 파이프, 스트라선, 아솔, 앵거스 출신의 많은 스코틀랜드인들도 로버트 1세에 가담했다. 1308년 5월 23일, 로버트 1세는 인버루리 전투에서 존 코민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존 코민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그의 영지는 로버트 1세에 의해 초토화되고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하고 가축이 도살되었다. 이에 부컨 주민들은 코민 가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로버트 1세에게 복종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모레이로 이동해 그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1308년 여름까지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엘긴, 포레스, 네언, 인버네스 성들의 복종을 받아냈고, 1305년 이래 알렉산더 코민이 소유했던 블랙 아일의 어콰트 성과 타라데일 성을 접수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북부를 거의 석권한 뒤, 로버트 1세는 1308년 8월 아가일로 진군했다. 1308년 8월 15일 ~ 8월 23일, 로버트 1세는 제임스 더글러스와 함께 존 맥두걸이 지휘하는 맥두걸 가문을 브랜더 고개 전투에서 격파하고 던스태프니지 성을 복종시켰다. 아가일의 맥두걸 가문 수장 알렉산더 맥두걸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귀순했다. 뒤이어 스코틀랜드 북부에 남아있던 유일한 적수 로스 백작이 1308년 10월 31일에 귀순했다. 로버트 1세는 그를 관대하게 대하고 빼앗았던 영지를 돌려줬고, 로스 백작은 이때부터 편을 바꿔서 로버트 1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존 맥두걸과 알렉산더 맥두걸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몰래 도움을 청했지만, 로버트 1세가 이를 눈치채고 1309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제임스 더글러스와 함께 아가일로 재차 쳐들어오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한편, 로버트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형제인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이슬레이의 도널드의 지원을 받아 갤러웨이 정복전에 나섰다. 그들은 잉글랜드 지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러다가 1308년 6월 29일 도널드 맥켄이 이끄는 갤러웨이 귀족들을 디 강 또는 크리 강에서 격파하고, 헤스탄 섬에 있는 멕도월 성을 불태웠으며, 잉글랜드 지지자들이 잉글랜드로 도주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잔존한 잉글랜드군이 수비하는 성들을 하나둘씩 공략한 끝에, 1313년에 모두 평정했다. 로버트 1세는 동생의 공적을 기려 1309년 3월에 에드워드를 갤러웨이의 영주로 선임했다. 로버트 1세는 뒤이어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로디언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에 착수했다. 그 결과 여러 성이 차례차레 함락되었지만, 에든버러, 제드버러, 록스버러, 스털링, 베릭 등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들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헤딩턴, 러프니스, 디를레톤, 예스터, 던바, 셀커크, 캐버스 등과 같은 작은 성들도 1314년까지 버텼다.

로버트 1세의 통치는 이제 매우 견고해졌고, 1309년 3월 16일과 17일에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그의 주관하에 첫 번째 의회가 개최되었다. 회에서 참석한 고위 성직자와 남작들은 로버트 1세를 합법적인 국왕이자 알락산더르 3세의 후계자로 선언했고, 존 발리올의 통치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또한 의회는 1303년 파리 평화조약 이후 중단되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다만 잉그램 드 움프라빌, 로버트 드 움프라빌, 데이비드 2세 드 스트라스보기, 존 모브레이 등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은 여전히 잉글랜드 왕국을 따랐다. 로버트 1세는 존 코민 3세의 살해로 여전히 파문당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지만, 교황청은 잉글랜드의 압력 때문에 파문을 유지했다.

2.3.5. 에드워드 2세의 반격 시도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하는 동안, 에드워드 2세는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로 인한 정치 혼란에 직면하느라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을 소홀히 했고, 스코틀랜드 가신들의 구원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사실 에드워드 1세가 대규모 원정을 잇달아 벌이느라 부채가 대단히 많이 쌓였기 때문에, 원정을 벌이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가 귀족들의 압력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개버스턴을 추방한 후, 그는 1308년 8월 22일에 칼라일로 군대를 소집하여 스코틀랜드로의 새로운 원정을 이끌려 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취소도 없었다. 1308년 11월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휴전 협상을 벌인 후, 프랑스의 중재하에 1309년 2월 2일부터 11월 1일까지 유효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309년 7월 30일 스탬퍼드에서 의회를 소집한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새로운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9월 29일 뉴캐슬로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총애하는 개버스턴을 다시 불러들인 이래로, 유력 귀족들은 그의 정책에 강력히 저항했다. 이에 따라 군자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으면서, 원정은 취소되었다. 1309년 10월, 왕은 로버트 드 클리퍼드헨리 드 보몽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여 새로운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추가 협상을 진행했다. 서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나가도록 설득하고자 했던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중재를 통해 양자 간의 평화 협상이 이뤄졌지만,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결렬되었다.

1310년 6월 16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알렉산더 애버네시, 알렉산더 맥두걸, 그리고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직접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떠나지 않으면 나머지 가신들의 충성심을 잃을 것이라며, 조속히 원정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8일에 군대를 베릭으로 소집했다. 그러나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피어스 개버스턴만 그를 따랐고, 다른 귀족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베릭에 집결한 병력은 기병 1,700명, 보병 3,000명이었다. 얼스터 백작이 늦어도 1310년 6월까지 아일랜드에서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가일에 상륙해 왕을 도울 계획이었지만, 악천후와 역풍 때문에 함대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대신 일부 군대는 맨 섬의 수비대를 지원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중순에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9월 16일, 에드워드 2세는 록스버러에 도착했고, 9월 23일경에는 셀커크에 도착했으며, 9월 26일경에는 비가에 도착했다. 10월 중순, 잉글랜드군은 로버트 1세와 그의 군대가 스털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병력이 너무 적어서 정면 대결을 벌일 수 없었다. 10월 중순에 렌프루와 글래스고로 이동했고, 더 나아가 린리스고까지 진군했다. 이후 에든버러에 잠시 머무르면서 포스 강 남쪽에 있는 수비대를 지원한 뒤, 남쪽으로 후퇴하여 11월 11일경 다시 베릭에 도착했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이 이동하는 동안, 로버트 1세는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적 식량 수집대를 끈질기게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1310년 10월 28일, 에드워드 2세는 궁정과 국고를 요크로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베릭에 1311년 7월까지 머물렀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들 역시 1310년~1311년 겨울 동안 스코틀랜드 국경에 머물렀다. 그러나 군사 작전을 재차 감행하지 못했고, 로버트 1세가 로디언을 침공했을 때 소규모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와 협상하기로 하고,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로버트 피츠페인을 파견했다. 두 사람은 1310년 12월 17일 셀커크에서 로버트 1세와 접견해 협상했다. 그러나 피어스 개버스턴과 글로스터 백작이 멜로즈 수도원에서 만나자고 한 제의는 로버트 1세가 배신을 우려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심해지자, 에드워드 2세는 원정을 중단하고 1311년 7월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갔다.

2.3.6. 1311년~1314년 잉글랜드 습격

에드워드 2세가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간 직후, 로버트 1세는 경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1311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잉글랜드 북부로 쳐들어가서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를 약탈했다. 이후 9월 8일부터 23일까지 같은 지역에 대한 또 다른 습격을 지휘했다. 스코틀랜드는 이후에도 몇 년간 스코틀랜드에 남은 잉글랜드 성채를 꾸준히 공격했으며,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다만 1297년 윌리엄 월레스가 무차별 약탈을 자행했던 것과는 달리, 몸값을 지불한 마을과 영지는 살아남게 해줬으며, 때로는 도시를 약탈만 할 뿐 방화하지 않았는데, 이는 향후 약탈 시 몸값을 지불할 거라는 기대에 따른 조치였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소와 곡물을 훔쳤지만, 잉글랜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건 자제했으며, 오직 저항하는 자들만 학살했다. 때때로 잉글랜드군이 적군이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후퇴하도록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 북부에서 종횡무진했고, 노섬벌랜드 백작은 1311년과 1312년에 로버트 1세가 철수하는 대가로 2,000파운드를 지불했고, 1313년에는 알려지지 않은 거액을 지불했다. 1312년 8월, 로버트 1세는 타인 강 남쪽의 헥섬과 코브리지로 진군해 마을을 불태웠으며, 분견대는 더럼을 급습해 도시 일부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전리품을 빼앗았다.

이후 로버트 1세는 1312년 8월 16일 헥섬에서 몇몇 시골 지주들과 협상해 2,000 마크를 받고 1313년 한여름까지 지속되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컴벌랜드, 쿠플랜드,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도 비슷한 휴전 협정을 맺었다. 각 주에서는 즉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기에 인질을 제공해야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금이 제때 오지 않으면 인질을 학대하는 대신 소규모 습격을 의도적으로 벌여서 잉글랜드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1314년 4월, 로버트 1세의 형제 에드워드 브루스가 더럼주에 대한 공격을 지휘한 뒤 칼라일을 잠시 포위했다가 철수했다. 노섬벌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연례 습격이 이어지면서 행정부가 붕괴하였으며, 많은 귀족과 민중이 가난해지거나, 사망하거나, 스코틀랜드로 이탈했다. 더럼의 행정부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주민들은 엄청난 몸값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지불해야 했다.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내 성채에 대한 공세도 병행했다. 1313년 1월, 스코틀랜드인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퍼스를 점령했다. 한 달 후, 던갈 맥도웰이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덤프리스 성을 항복시켰다. 린리스고도 1313년 9월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로버트 1세는 자기가 탈환한 스코틀랜드 성과 도시에서 어떠한 유혈 사태도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며, 잉글랜드 수비대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걸 허락했다. 131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프랑스를 방문한 에드워드 2세에게 그해 6월 10일에 만료될 예정이던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1년 연장하라고 권고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잠시 공세를 중단했다가 1314년 초부터 전쟁을 재개했다. 1314년 2월 20일 밤, 스코틀랜드인들이 야간 공격을 감행해 록스버러 성을 함락시켰다. 그해 3월, 스코틀랜드군은 에든버러 성 인근 바위에 올라간 뒤 성으로 잠입해 함락시켰다.

2.3.7. 해상 활동

한편, 스코틀랜드군은 해상에서도 공세를 벌여 잉글랜드 북부 해안을 자주 약탈했으며, 맨섬은 1310년부터 1317년까지 스코틀랜드인이 접수했다가 잉글랜드인이 탈환하고, 스코틀랜드인이 다시 접수하는 식으로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또한 로버트 1세는 해외 무역에 힘을 기울였다. 스코틀랜드 상인들은 아일랜드로 들어와서 곡물, 고기, 기타 식료품뿐만 아니라 철, 무기, 갑옷도 구입했다. 무기와 갑옷은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생산되었다가 유럽 대륙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스코틀랜드는 유럽 대륙의 도시들과도 무역 활동을 수행했다. 그들은 북해를 통해 플란데런 백국한자동맹 도시들에 양모를 수출하고 곡물, 철, 무기를 수입했다. 심지어 하위치, 노리치, 킹스린, 헐 출신의 수많은 잉글랜드 상인이 당국의 엄격한 처벌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와 비밀리에 무역했다. 만약 이러한 무역과 밀수가 없었다면, 로버트 1세는 무기와 갑옷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전쟁에서 이기기는 요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1315년 3월 동앵글리아 함대 제독으로 임명된 존 보테투르만이 스코틀랜드 항구에 대한 효과적인 봉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면서, 당시 기근을 겪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밀 가격이 급등했다.

1312년 10월 29일, 로버트 1세는 인버네스에서 노르웨이 국왕 호콘 5세가 파견한 사절과 협정을 맺었다. 스코틀랜드는 이 협정에서 1266년 퍼스 조약에서 약속한 대로 서부 스코틀랜드 섬의 양도에 대한 연간 지불금 100 마크를 계속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오크니 제도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습격과 스코틀랜드 북부에 대한 노르드인의 공격에 대한 보상이 합의되었고, 해적 행위에 대한 사건은 법원에서 조사하기로 했다.

2.3.8. 배넉번 전투

1314년 초, 스코틀랜드의 대다수 성을 탈환한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북부 칼라일까지 약탈대를 파견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대응해 15,000명에서 20,000명 사이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베릭 성에 집결해 스코틀랜드 원정을 준비했다. 이 무렵, 에드워드 브루스로우랜드의 주요 요새인 스털링 성을 포위했다. 스털링 성주 필립 드 모브레이는 1314년 6월 24일 이전에 구원받지 않는다면 항복하기로 했다. 이 소식은 5월 말에 에드워드 2세에게 전해졌고, 그는 스털링 성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하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버트 1세는 기존 전략대로 산악지대로 퇴각해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유격전으로 일관하려 했지만, 더 이상 영지들이 파괴되는 걸 원하지 않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회전을 피하면 이탈하겠다고 압력을 가하자, 전면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장을 물색한 끝에, 배넉번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5~6,000명 또는 10,000명의 보병대와 기병 500명을 보유했다.

양군은 1314년 6월 23일 배넉번 습지에서 마주쳤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습지로 둘러싸인 숲이 우거진 언덕을 점령했다. 첫번째 교전에서, 잉글랜드군의 공세가 격퇴되었고 선봉대 사령관 헨리 드 보훈이 로버트 1세와 일기토를 벌였다가 전사했다. 그날 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진영에서 넘어온 스코틀랜드 기사로부터 적이 일전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며, 왕과 귀족들간의 갈등이 심해서 단합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적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고, 6월 24일 아침 전병력을 이끌고 숲에서 출진해 잉글랜드 진영으로 향했다.

에드워드 2세는 적군이 숲에서 나와서 정면 대결하려 나올 줄은 예상 못하고 있다가 적군이 가까이 오자 황급해 전군을 출진시켰지만, 전투 대열로 재편성하는 데 애를 먹었고, 적의 대형을 교란해야 할 궁수들은 선두가 아닌 후방에 배치되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기병대는 구릉 지형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로버트 1세의 창병대는 쉴트론[10]을 결성했다. 그 후 벌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선봉대는 궤멸되었고, 지휘관인 글로스터 백작은 전사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잉글랜드군이 속절없이 밀렸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적을 습지로 몰아붙여서 살육을 자행했다.

배넉번 전투는 잉글랜드의 재앙이었다. 전사자는 10,000명이 넘었고, 포로는 500명에 달했으며, 여러 대영주와 기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생포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의 추격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던바로 도주했다. 스털링 성은 배넉번 전투 다음날 로버트 1세에게 항복했다. 이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귀족과 백성에게서 왕으로 인정받았다.

2.3.9. 1314~1316년 스코틀랜드군의 잉글랜드 북부 습격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왕실이 자신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잉글랜드 북부 습격전을 이어갔다. 1314년 8월 초,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와 로버트 1세의 심복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랜드 북동부로 진군해 리치먼드셔까지 진군하면서 가축을 약탈하고 곡물 밭을 파괴한 후, 스웨일데일과 스테인무어를 거쳐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브러, 애플비, 커크 오스월드를 방화했다. 또한 로버트 1세는 13세기에 조부가 소유했던 타인데일을 방문해 그곳 주민들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314년 8월, 에드워드 2세는 에이머 드 발랑스를 베릭 성과 트렌트 강 사이의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선임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베릭 수비대를 강화하는 것 외에는 스코틀랜드군의 공세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1314년 9월 20일 스코틀랜드 사절과 존 보테투르가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단이 더럼에서 평화 협상을 벌였다. 양자는 1314년 10월 6일부터 휴전하기로 합의했으며, 배넉번 전투에서 생포되었던 잉글랜드 영주 및 기사들 대부분이 풀려났다. 그 대가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와 그의 딸, 자매, 그리고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풀어줬다. 그해 11월, 요크의 윌리엄 그린필드 주교, 더럼의 리처드 켈로 주교, 요크의 세인트 메리 수도원장이 추가 협상을 위한 사절로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1314년 11월 6일, 켐버스케네스 수도원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국을 아직도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평화 협상이 실패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약탈을 재개했다. 1315년 1월 3일, 요크 대주교와 더럼 주교는 북부 잉글랜드의 여러 귀족을 요크에 초대하여 회의를 연 뒤, 스코틀랜드의 침입에게서 북부 잉글랜드를 방어할 방안을 논의했다. 1315년 2월, 에이머 드 발랑스는 노섬벌랜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미트포드 성을 건설했다. 그러나 배넉번 전투에서 막대한 전력을 잃은 여파가 여전히 심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잉글랜드 북부를 여러 차례 습격했다. 로버트 1세가 직접 습격을 지휘한 적은 거의 없고, 대신 에드워드 브루스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습격을 지휘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약탈전을 점점 더 대담하게 벌였다. 그들은 '호빈(Hobin)'이라고 불리는 작고 튼튼한 말을 탔고, 기수들은 이 말의 이름을 따서 '호벨라(Hobelar)'라고 불렸다. 병사들은 보통 가벼운 갑옷만 입었고, 공격할 때는 쉴트론을 형성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배넉번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아마도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많은 짐마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공격할 때는 신속하게 이동했지만, 철수할 때는 가축 떼를 북쪽으로 몰아야 해서 느릿느릿하게 이동했다.

1315년 초, 스코틀랜드인들은 타인데일까지 진격하여 홀트휘슬, 헥섬, 코브리지를 점령했다. 그해 6월에는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더럼 주로 쳐들어가서 하틀풀을 파괴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그해 8월 초 베릭에 도착한 뒤 6월 22일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칼라일을 구원하기 위해 일부 군대를 파견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칼라일을 맹공격했지만,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의 거센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하고 8월 1일에 철수했다. 1315년 8월 30일, 에드워드 2세는 겨울 동안 잉글랜드 북부에 머물러서 스코틀랜드를 막겠다고 선언했고, 11월 1일 에이머 드 발랑스를 대신해서 헨리 드 보몽을 스코틀랜드 변경의 동부 지역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1316년 1월 7일, 베릭 수비대는 로버트 1세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끈 스코틀랜드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2.3.10.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1315년 초, 로버트 1세는 전쟁의 무대를 확장하기로 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는 동시에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을 기획했다. 학계에서는 이 원정이 감행된 동기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기했다. 우선,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잉글랜드군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꾸준히 공급했다. 특히 더블린, 던독, 드로이다 항구는 잉글랜드 선박이 스코틀랜드 서해안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곳을 공략한다면,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할 때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는 경로를 상실하게 되며,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스코틀랜드에 곡물과 가축을 공급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일랜드 내 반 잉글랜드 정서를 품은 게일인들이 로버트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전승에 따르면, 타르 에오가인(현재 북아일랜드 타이론 주)의 소왕인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이 에오간의 남동쪽 소왕국인 베르됭과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가신들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가신 및 동맹자 12명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실제로 원정군 총사령관 에드워드 브루스는 얼스터에서 스코틀랜드 서부 귀족 앵거스 오그 맥도날드의 동맹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에드워드 브루스 본인의 개인적인 야심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를 정복한 뒤 형이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군림하는 동안, 본인은 아일랜드의 아르드리로 군림하며, 두 형제가 힘을 합쳐 잉글랜드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1315년 4월 26일, 스코틀랜드 의회가 에어 성에서 개최되었다. 로버트 1세는 이 자리에서 본인에게 아직 적법한 아들이 없다는 걸 상기하며,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를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스코틀랜드 왕위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왕위 후계자의 권한으로 병력과 함대 소집령을 스코틀랜드 전역에 반포했다. 이후 아일랜드로 진군한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곳에서 종횡무진했다. 그는 얼스터의 잉글랜드-아일랜드 군주들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했고, 캐릭퍼거스 성 수비대를 굴복시킨 뒤 던독까지 진군했다. 이후 앤트럼의 코너를 본부로 삼고 남쪽으로 약탈을 감행해 아일랜드 보안관 에드먼드 버틀러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여러 전투에서 잇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게일인들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얼스터를 제외하면 열렬히 호응하지 않았다. 1316년 8월 캐릭퍼거스 성을 공략한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해 가을 지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1317년 1월, 로버트 1세는 친히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동생과 함께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두 형제의 겨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로버트 1세는 군대를 얼스터로 이동시킨 뒤 스코틀랜드로 귀국했고, 잉글랜드 북부에 공격을 집중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서 남아 전쟁을 이어갔지만, 1318년 10월 던독 인근의 포하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1318년 12월, 잉글랜드군이 캐릭퍼거스 성을 함락시키면서, 아일랜드에서의 스코틀랜드 세력은 일소되었다.

2.3.11. 지속되는 전쟁과 협상

1316년 2월 또는 3월, 제임스 더글러스,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헨리 발리올이 이끈 스코틀랜드군이 콜드스트림 근처의 스캐이스뮤어 전투에서 머스와 티비엇 강어귀를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려 했던 베릭의 기병 수비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피어스 개버스턴의 조카 에드몽 드 카유를 비롯한 여러 기사가 전사했고, 잉글랜드인 50명 만이 무사히 탈출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베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또 다른 전투에서 잉글랜드 기병대를 격파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라비의 로버트 네빌을 사살했다.

1316년 봄, 5월 30일에 만료되는 휴전 협정의 연장에 대한 예비 협상이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1316년 2월 초, 링컨의 잉글랜드 의회는 배넉번 전투 이후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새로운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새로운 세금과 병력 모집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군자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는 데다 브리스톨에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원정일이 7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1316년 여름, 스코틀랜드군이 제임스 더글러스의 지휘하에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이들은 더럼 주와 요크셔 주의 도시와 마을들을 휩쓴 뒤 랭커셔 주에 처음으로 진군해 베로인퍼니스를 약탈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원정은 10월 6일로 연기되었다가 더럼의 리처드 캘로 주교가 사망하자 더럼 주교를 뽑는 문제가 급해졌고, 결국 11월에 취소되었다. 그해 11월 24일,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사절단을 선임했다.

1317년 3월 17일, 교황 요한 22세는 추기경 고슬랭 드 장과 루카 피에스키에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평화를 중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해 3월 28일, 교황은 로버트 1세를 재차 파문했고, 5월 1일에 휴전을 선포하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북부와 아일랜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칙서를 반포했다. 두 추기경은 7월에 런던에 도착해 중재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교황의 칙서를 묵살하고 전쟁을 이어갔다. 1317년 4월 23일,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제드버러 남쪽의 린탈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격파되었다.

한편, 1317년 5월 13일과 6월 11일 사이에 잉글랜드 함대가 포스만 북쪽 해안에 상륙한 후 약탈을 시도했다. 잉글랜드군이 던펌린에 상륙하자, 제9대 던바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이에 맞서려 했지만 군대가 전투를 벌이기 전에 도주하면서 실패했다. 이때 둔켈드 주교 윌리엄 싱클레어가 몇 마일 떨어진 오크터폴에서 패주한 장병들과 만나 그들의 비겁함을 꾸짖고, 직접 창과 갑옷을 챙기고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윌리엄 싱클레어가 이끄는 적군의 맹공격으로 패주했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배가 과적 상태를 버티지 못하고 침몰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1317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의 원정을 재차 계획했다. 이 작전은 원래 7월 8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국왕을 대신하여 외교 사절로 대륙에 파견되었던 펨브로크 백작과 배들스미어 남작이 아직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아 연기되었다. 이후 8월 11일 뉴캐슬에서 재차 원정을 떠나기로 했지만, 이보다 전인 7월 8일에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그동안 자신과 대립했던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동 원정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토머스는 이에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끝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고, 원정은 9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주교 7명과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으로 구성된 고위 사절단을 랭커스터 백작령의 중심지인 폰트프렉트 성으로 보내 토머스에게 합류를 요청하게 했지만, 토머스는 목숨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며 끝내 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일단 단독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1317년 9월 4일 요크로 출진했다. 그러던 중 폰트프렉트 성 근처를 지나갔는데, 토머스는 왕이 지나가자마자 다리를 막아서 지원군이 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뉴캐슬에서 기병 1,500명, 경기병, 궁수, 석궁병 및 보병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더럼에서 새로 선출된 주교인 루이스 드 보몽과 그의 추기경인 고슬랭 드 장, 루카 피에스키가 길버트 미들턴에게 공격받아 재산을 약탈당했다.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이 습격을 주도했다고 의심하고, 9월 8일 직후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1317년 1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다.

1318년 4월 초, 스코틀랜드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해 베릭 성을 함락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던 유일한 잉글랜드군의 요충지인 베릭 성이 스코틀랜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기로 마음먹고, 5월에 요크셔로 쳐들어가 하보트, 워크 및 미트포드 성을 점령한 뒤 노샐러튼, 리폰, 폰트프랙트까지 진군했다. 리폰 주민들은 대성당으로 피신한 뒤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 조건으로 1,000 마크를 지불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나레스버러를 불태운 후 스키튼을 거쳐 철수했다.

베릭이 함락된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에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화해한 뒤 1319년 늦여름에 함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제임스 더글러스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적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하여 요크셔를 위협했다.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보안관 존 호담이 그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9월 12일 마이톤 전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에게 패배했다.

랭커스터 백작은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요크에 병사 600명과 함께 남았지만,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벌여 1319년 11월 1일 길슬랜드 시를 파괴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다시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1319년 12월 22일에 최소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 측은 이 협정에 따라 1년 이내에 성을 철거하거나 스코틀랜드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노섬벌랜드에 있던 하보틀 성을 돌려받았다.

1320년 4월 6일, 스코틀랜드 백작 8명과 남작 30명이 아브로스 수도원에서 "우리는 절대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한 뒤 교황 요한 22세에게 발송해 스코틀랜드 독립은 인정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과 협상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 당국은 교황이 로버트 1세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철회할까 봐 두려워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가장 가까운 심복인 펨브로크 백작, 배들스미어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사절단 대표로 선임해 1320년 8월 칼라일에서 스코틀랜드 측과 협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정부는 8월 14일에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320년 8월, 브레친 영주 데이비드, 리데즈데일 영주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스트래선 백작부인 아그네스 코민, 로저 모브레이 등이 로버트 1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에 따르면, 공모자들은 윌리엄 2세 드 소울스를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고,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을 옹립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는 발리올 가문의 추종자들을 은밀히 모으고, 베릭에 병사 360명을 집결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스콘에서 소집된 스코틀랜드 의회는 주모자들을 사형 또는 종신형에 처했다.

1321년 1월 19일,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대표단을 결성했다. 이 사절단에는 요크 대주교, 칼라일의 존 홀튼 주교, 우스터의 토머스 콥햄 주교 , 윈체스터의 리고 드 아세리오 주교,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 배들스미어 백작, 내각장관 로버트 불독, 윌리엄 에어민, 그리고 랭커스터 백작의 추종자인 스티븐 시그레이브, 니콜라스 시그레이브, 폴크 레스트랭, 존 드 클래버링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교황 특사와 프랑스 대표단도 참여했다. 다만 펨브로크 백작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고, 리치먼드 백작이 그를 대신해 사절단에 합류했다. 3월 26일, 밤버러에서 양측이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9월 1일로 연기되었다.

얼마 후, 웨일스 변경 지방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 대항한 변경 지방 영주들의 반란이 발발했고, 헤리퍼드 백작도 여기에 가담했다. 1321년 여름에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참여하면서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은 자연히 이뤄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어쩔 수 없이 반란 수습에 전념하는 한편,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하보틀 성을 철거하도록 했다. 한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제임스 더글러스와 비밀 회담을 갖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3.12.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1322년 1월 6일,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는 휴전 협정이 만료되자마자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티사이드를 약탈한 뒤 하틀풀과 클리블랜드를 약탈하고 몸값을 받아냈으며, 부관인 월터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셔를 약탈하거나 몸값을 확보했다. 당시 랭커스터 백작은 남부 요크셔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지 않았다.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에 대한 군사 행동을 취하고 그를 북쪽으로 몰아냈다. 컴벌랜드의 보안관인 앤드류 하클레이는 왕에게 스코틀랜드인에 관해 경고했고, 왕의 승인을 받아 경기병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는 이 병력을 스코틀랜드인에 대항해서 쓰지 않고, 1322년 3월 북쪽으로 도망치는 랭커스터를 비롯해 헤리퍼드, 배들스미어를 포함한 나머지 반군을 공격해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랭커스터 백작을 체포했다. 그 사이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의 성을 접수한 뒤, 스코틀랜드인들과 비밀 협상을 한 증거를 발견했다. 결국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렇듯 잉글랜드 정세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버트 1세는 에드워드 2세를 압박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1322년 6월 17일, 로버트 1세는 제임스 더글러스,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스코틀랜드 대집사 월터 스튜어트와 함께 칼라일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홀름컬트럼 수도원을 먼저 접수하고 심하게 파괴한 뒤, 코플랜드 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한여름에 에그레몬트를 지나가면서 방앗관 2개를 불태웠다. 퍼니스 수도원장은 로버트 1세에게 자기 영지를 보전해달라며 돈을 줬지만, 로버트 1세는 이를 무시하고 퍼니스 영지 역시 약탈하고 방화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랭커스터 시를 향해 진군하면서 네더 켈릿과 토리솔름을 파괴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그 지역에 있던 교회 2곳 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7월 2일 랭커스터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나흘간 그곳에 머물다가 프레스턴을 거쳐 스커튼으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있던 밀 작물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프레스턴은 이때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수십 년간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다. 일부 스코틀랜드 분견대는 샘스베리로 진군해 그곳을 약탈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로 철수하다가 칼라일에 도착해 5일간 머물면서 부하들에게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도록 한 뒤, 7월 24일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이번 원정에서 막대한 가축과 전리품을 확보해, 잉글랜드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할 보급품과 식량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1322년 8월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 그리고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과 함께 2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수중에 넘어간 베릭 성을 우회한 뒤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들과 대적하는 걸 회피하고자 군대를 포스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면서, 잉글랜드군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가져갔다. 에드워드 2세는 로디언에서 적군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단지 절름발이 소 한 마리만 발견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서리 백작은 그 소를 보고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저 소는 내가 지금까지 본 소 중에서 가장 비싼 소일 것이다. 아마 천 파운드 이상 될 것이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8월 19일 머슬버러에서 야영한 뒤, 함대의 보급을 받고자 항구 도시인 리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 함대는 폭풍우로 인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리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8월 말에 국경으로 후퇴했다. 이때 에드워드 2세의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가 사망했다. 9월 2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남을 의사를 밝혔고, 9월 26일 밤버러, 워크워스, 던스턴버러, 올닉 성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직면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한편,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이 돌아가자 공세를 재차 벌이기로 했다. 9월 30일, 솔웨이 만에서 배를 타고 원더미어의 보우네스 인근으로 이동한 그는 10월 5일 칼라일 주변 지역을 파괴해,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도록 했다. 그 후 페나인 산맥을 통과하면서 스콧비, 칼라튼, 컴류 교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을 추격하고 있으며, 이미 몇 킬로미터 떨어진 노스앨러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10월 14일 스코틀랜드군이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리치먼드 백작이 이끄는 왕의 호위대를 격파했다. 에드워드 2세는 가까스로 체포를 모면하고 요크 지방으로 도주했고, 측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다.

한편, 타인머스 수도원에 머물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남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적대했던 이자벨은 단호히 거부하고 다른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그러지 못했고, 타인머스는 곧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게다가 해상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백국 함대가 순찰했다.

이자벨은 적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호위대 일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배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 후 이자벨과 수행원들이 배에 타는 동안, 스코틀랜드군이 도시로 진입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자벨의 수행원 2명이 사살되었다. 이자벨은 배에 오른 뒤 플란데런 선박들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륙한 뒤 요크로 가서 남편과 합류했다.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속아서 자신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맞서 이자벨과 동맹을 맺은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몽이 이자벨이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의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별동대를 이끌고 랭커셔와 요크셔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많은 종교 건물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보존해줬다. 그 후 해안가를 따라 이스트 라이딩으로 진군하면서, 인근 교구에 있던 수도원들로부터 몸값을 뜯어냈다. 로버트 1세는 10월 20일 베벌리 타운으로부터 400파운드를 받아낸 뒤 스키튼으로 진군하면서 여러 마을과 도시로부터 역시 몸값을 받아내는 대가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이윽고 스키튼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행군을 멈췄고, 토머스 랜돌프는 10월 22일 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우가 닥치자 스코틀랜드로의 귀환길에 올랐고, 11월 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2.3.13. 1323년 ~ 1324년 잉글랜드와의 협상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는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칼라일 주변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가 초토화되는 걸 목도하고, 더 이상 로버트 1세에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에드워드 2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와 협상하기로 했다. 1323년 1월 3일, 하클레이는 로크마벤에서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에 4만 마크를 지불하고 에드워드 2세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하기로 했다. 또한 에드워드 2세가 이 조약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 로버트 1세와 하클레이는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하클레이가 자기 허락 없이 그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했다. 그는 즉시 체포령을 내렸고, 하클레이는 2월 25일 체포된 뒤 3월 3일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2세 역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로버트 1세와 재협상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1323년 3월 14일에 5월 22일까지 유효한 임시 휴전을 맺었다. 4월 29일 휴전 기간이 6월 2일로 연장되었고,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가 대표하는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뉴캐슬로 향했다. 5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펨브로크 백작, 엑서터의 월터 스테이플던 주교, 휴 르 디스펜서, 로버트 불독에게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할 권한을 위임했다.

처음에는 협상이 느릿하게 진행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5월 11일 자 편지에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최근 몇 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이 저지른 수많은 습격과 범죄에 대해 불평했다. 그러다가 1323년 5월 말, 대표단은 평화 조약에 합의하지 않고, 1336년 6월 12일까지 최소 13년간 유효한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로버트 1세는 이번에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두 대표단은 요크의 비숍소프에 도착했고, 요크 대주교의 궁정에서 국왕과 특별히 소집된 내무부는 5월 30일에 장기 휴전을 인정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추가 협상을 시도했다. 1324년 11월 18일, 그의 사절인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요크에서 잉글랜드 대표단을 만났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 왕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가 요크까지 이르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넘겨받을 것을 요구했으며,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동부 에식스에 있는 그의 가문의 옛 영지를 돌려받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대관식에 사용되는 운명의 돌을 반환해야 했다. 그 대가로, 로버트 1세는 자기 딸 한 명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 동맹을 프랑스 국왕과 교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2.3.14. 치세 말기

1325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앵거스에 있는 올드 몬트로스의 땅과 데이비드 그레이엄 경의 영지인 카드로스를 교환했다. 그 후 그는 카드로스에 저택을 세운 뒤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저택에는 왕과 왕비의 방과 유리창, 예배당, 주방, 제빵소, 양조장, 매사냥장, 약초원, 새장, 해자, 사냥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낚시를 위한 부두와 해변 구역도 있었으며, '왕의 큰 배'가 상시 대기했다고 한다. 당시 스코틀랜드 본토의 주요 왕궁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카드로스 영지는 아마도 오랜 전쟁, 반복되는 기근,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궁핍에 시달리는 로버트의 신민들을 위한 소박한 거주지로 지어졌을 것이다.

로버트 1세는 적어도 1327년부터 중병에 시달렸다. 1327년 7월 12일, 로버트 1세가 헨리 맨더빌 경과 휴전을 맺었을 당시 얼스터 출신 수도자가 상황을 보고 지인에게 쓴 편지가 현존한다. 그 편지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혀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해 곧 죽을 것같았다고 한다. 스칼라 연대기와 라네코스트 연대기는 로버트 1세가 나병에 걸렸다고 기술했지만, 로버트 1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그의 말년에 대해 기록한 여러 기록 중 어느 것도 피부 질환의 징후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습진, 결핵, 매독, 운동 뉴런 질환, 또는 뇌졸중을 알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듯 로버트 1세가 중병에 걸려서 통치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된 뒤,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등이 나라를 대신 이끌었다. 그러던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로저 모티머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에 의해 폐위되고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3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왕국이 어수선해지자,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는 이 기회를 틈타 아직도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1327년 6월 15일, 제임스 더글러스, 토머스 랜돌프, 마르 백작 돔날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기병 10,000명이 국경을 넘어갔다. 그들은 보급품과 짐을 거의 챙기지 않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식량을 현지 주민으로부터 빼앗았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군사 관행, 즉 병력을 집중시켜서 이동하는 것과는 현저히 달랐고, 스코틀랜드군은 이 때문에 높은 수준의 기동성을 지녔다. 그들의 분산된 대형은 적어도 70마일(110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서 기동했으며, 잉글랜드군은 그들의 수, 주요 목표 및 이동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로저 모티머는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를 대동하여 스코틀랜드 원정에 착수했지만, 웨어데일 전역에서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농락당하고 패퇴했다.

웨어데일 전역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북부 잉글랜드에 활개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은 북부 잉글랜드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 지출은 7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41,000파운드가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반면 잉글랜드 정부의 연간 수입은 30,000 파운드였고, 수입을 제외한 지출액은 빚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당국은 1327년 9월 중순 링컨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산의 1/20를 직접세로 거두기로 했다.

스코틀랜드군이 노섬벌랜드로 출진해 그 일대의 여러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로저 모티머와 이자벨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로버트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해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로버트 1세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전쟁을 끝내기를 갈망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협상이 순조롭게 이어진 끝에,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에서, 그리고 5월 4일 노샘프턴에서 전쟁을 끝낼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 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30여 년간 이어지던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종결되었다.

1328년 10월, 교황청은 마침내 스코틀랜드와 로버트 1세의 파문을 해제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덤프리스셔의 휘손에 있는 성 니니안의 성지순례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 1329년 4월 초 도착한 뒤 4~5일간 금식하고 성 니니안의 이름으로 기도한 후 카드로스로 돌아갔다. 1329년 6월 7일, 로버트 1세는 카드로스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을 침대 곁으로 불러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수도원에 막대한 선물을 주고, 애어의 성 세르프 수도원과 베릭의 도미니코회 수도원, 덤펀린 수도원에 은을 나누어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하게 했다. 그러면서 성지에서 사라센과 싸우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서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절친한 동지였던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이 세상에서 범죄로 인하여 눈을 감는 즉시, 내 몸에서 내 심장을 떼어내라. 그리고 내 심장과 내 보물을 가져가서 우리 주님께서 누워 계시고 내 몸이 거기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성묘에 내 심장을 바치기를 바란다.

3. 사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었고, 흉골을 톱으로 잘라 심장을 꺼낸 뒤 은 상자에 넣었다. 로버트 1세의 내장은 세인트 세르프 예배당에 안치했으며, 왕의 몸통은 검은색 잔디 천으로 장식된 마차에 실려 카드로스에서 덤펌린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장례 양초를 만들기 위해 478스톤(3,040kg)의 밀랍을 구입했다. 로버트 스튜어트와 검은 가운을 입은 여러 기사를 포함한 애도자들의 행렬이 장례식 행렬을 따라 던펌린 수도원 으로 들어갔다. 로버트 1세의 시신은 나무 관에 담겨 1328년 6월 이후 샤르트르의 토마스가 파리 에서 구입한 흰색 이탈리아 대리석 상자형 무덤 아래, 바닥 아래 석조 금고에 안치되었다. 그의 무덤 꼭대기엔 아래의 라틴어 비문이 세워졌다.
Hic jacet invictus Robertus Rex benedictus qui sua gesta legit repetit quot bella peregit ad libertatem perduxit per probitatem regnum scottorum: nunc vivat in arce polorum
여기에 무적의 축복받은 로버트 왕이 잠들었다. 그의 업적에 대해 읽는 사람은 그가 싸운 수많은 전투를 접할 것이다. 그의 정직함으로, 그는 스코틀랜드 왕국을 자유로 이끌었다. 이제 그는 천국에서 살리라.

제임스 더글러스는 로버트 1세의 심장이 담긴 은 상자를 목에 걸고 예루살렘으로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현되지 않자,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나스르 왕조에 대한 원정을 벌이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 1330년 8월 25일, 카스티야군은 테바 전투에서 우스만 이븐 아비 알울라가 이끄는 나스르 왕조군을 격파했다. 이때 전투에 참여한 제임스 더글러스는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했다가 본대와 동떨어져 버렸고, 그라나다군은 이를 확인한 뒤 즉시 제임스와 일행들을 에워쌌다. 존 바버의 묘사에 따르면, 제임스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목에 걸었던 로버트 1세의 심장이 담긴 은관을 집어든 뒤 적군 앞에 던지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가라, 용감한 심장이여! 네가 항상 원했던 대로! 더글러스는 너를 따라오든지, 아니면 죽을 것이다."

이날 제임스와 로슬린의 윌리엄 싱클레어, 로건 씨족의 기사 로버트와 월터가 전사했다. 존 바버에 따르면, 전투가 끝난 뒤 제임스의 유해와 로버트 1세의 심장이 담긴 관이 회수되었고, 제임스의 뼈와 살은 삶은 후 갈스톤의 윌리엄 키스 경이 스코틀랜드로 가져가서 세인트 브라이드 교회에 안장했다. 로버트 1세의 심장은 모레이 백직아자 스코트랜드의 새 수호자 토머스 랜돌프가 가져가서 멜로즈 수도원의 높은 제단 아래에 안치했다.

로버트 1세 사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당시 데이비드 2세는 5살의 소년이었기에,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서 나라를 대신 통치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에게 축출되었던 귀족들이 영지를 되찾기 위해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며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4. 가족

5. 평가

브레이브하트(Braveheart)[11]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에드워드 1세 때부터 에드워드 3세 때까지 3세대의 잉글랜드 왕들과 싸워 온 그야말로 근성의 사나이. 오늘날에도 스코틀랜드 독립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사실상 왕위 계승이 단절되어 잉글랜드에게 그대로 잡아먹힐 뻔한 스코틀랜드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므로 많은 활약상과 일화를 남겼다.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의 군대를 격파한 배넉번 지방에는 아직도 전투 당시에 로버트 1세가 직접 깃발을 세우는 데 사용했다는 '보어의 돌'이 남아있으며, 1968년에 만들어진 스코틀랜드의 국가스코틀랜드의 꽃》은 배넉번 전투에서 그가 거두었던 승리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노래한 것이다.

전략의 달인인 동시에 본인의 무술 실력도 굉장히 뛰어났다. 도피 생활 중 에드워드 1세의 추격자가 쫓아올 때나 배신자들이 잡으려고 들 때 상당한 무쌍을 찍은 적도 많고, 배넉번 전투 중에는 직접 군대를 사열하던 중 잉글랜드군의 귀족 출신 기사 헨리 드 보헌이 공격해오자 1대1로 맞서 싸워 죽였고 같이 있던 종자까지 죽여버렸다. 왕이 직접 기사와 결투를 벌여 이기는 모습에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고 잉글랜드 측은 깜짝 놀랐다. 다만 함께 출정했던 귀족들은 칭찬하면서도 왕이 그렇게 몸을 막 굴리면 어떡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최고 지휘관인 국왕이 함부로 최전선에 나서다 저격이라도 당하여 다치거나 죽을 경우, 군대의 사기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지휘체계가 붕괴되어 참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성공했을 경우에는 아군에게는 버프를 적군에게는 디버프를 주므로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다.

6. 기타

한국 내에서 출간된 위인 일화집 중 로버트 1세의 일화를 담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거미가 계속해서 그물이 끊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그물을 쳐 결국 완성시키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게속 대항하기를 선택했다는 이야기.[12]

그러나 이 이야기는 본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더글러스[13] 경의 설화였으나, 19세기 즈음에 로버트 1세의 이야기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애당초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거기에 이야기의 주인공마저도 와전된 것.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영국인들마저도 대부분 다 로버트 1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다.[14]

여담으로 스튜어트 왕조의 왕들은 그의 후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스튜어트 왕조의 개창자인 로버트 2세가 그의 외손자다. 결과적으로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인 그의 후손들이 잉글랜드 왕국의 왕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안면 스캐닝 기술을 이용해 2016년 12월 그의 생전 모습을 재현했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7.1. 영화

7.1.1. <브레이브 하트>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앵거스 맥페이든이 역을 맡아 주인공으로 등장한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 영웅이었던 윌리엄 월레스의 동지로 묘사된다. 윌리엄 월레스의 높은 이상을 받들어 그를 후원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그를 배신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윌리엄 월레스를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여 재기시키고자 했지만 에드워드 1세와 그의 눈에 밉보일까봐 두려워하던 귀족들의 함정에 걸려 오히려 윌리엄 월레스를 붙잡혀 가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윌리엄 월레스와 함께 싸웠던 동료들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규합하여 배넉번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격퇴하고 자유를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역사를 각색했기에 그대로 믿으면 안되고 실제론 윌레스와 좀 복잡한 관계다. 일단 브루스 가문 자체가 스코틀랜드 혈통이 끊기고 왕위계승 분쟁이 심하게 일어나자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아군으로서 서로 싸우지 않았으나 왕이 되려던 로버트 1세에겐 평민들과 하급기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윌레스가 다분히 방해되기도 했고, 월레스와 정치노선이나 출신도 많이 차이나는 편이니... 애당초 둘간에 영화에서 보이던 무언가 끈끈한 접촉 같은건 별로 없었고, 필요하면 협력하고 필요없으면 소 닭보듯 하는 사이에 가까웠다.

7.1.2. <아웃로 킹>

2018년 공개된 크리스 파인이 주역 로버트 브루스를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아웃로 킹>에서는 그의 즉위부터 라우든 전투 승리까지를 다루고 있다. 윌리엄 월레스가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한 뒤,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굴복하지만 기회를 노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침내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당하자 다시금 저항의 의지를 불태우고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의 기습으로 세력을 잃고 가족도 포로로 잡힌다. 설상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그를 외면하거나 공격하기까지 한다.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다시 세력을 모은 로버트는 라우든에서 에드워드 2세를 격파하고 훗날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다.

제목인 <아웃로 킹>의 의미는 잉글랜드에 반기를 든 로버트 브루스를 두고 에드워드 1세가 부른 멸칭[15]이기도 하며, 또한 스토리 중간부터 기사도 따위 내다버리고 싸우는[16][17] 로버트 브루스의 행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7.1.3. <배트맨 시리즈>

등장인물 브루스 웨인의 이름 브루스를 로버트 브루스에서 따왔다. 참고로 웨인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미국의 장군 앤서니 웨인에서 따왔다고 한다. 기사

7.2. 게임

7.2.1. <문명 6>

확장팩 흥망성쇠에서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등장이 확정되었다. 영상

7.2.2. <도미네이션즈>

협의회 고문관으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협의회/로버트 더 부르스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협의회/로버트 더 부르스#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협의회/로버트 더 부르스#|]][[협의회/로버트 더 부르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3. 만화

네이버 웹툰 사신소년에서 이름모를 엑스트라의 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영웅'. 로버트 브루스의 이름값이 아까운 수준으로 전투씬도 생략당하고 주인공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슴에 칼이 꽂혀 쓰러진다. 이후 주인공 이경호가 회수하여 사용하는데 이전보다는 유의미하게 사용한다. 주된 능력 및 활용처는 뛰어난 방어력으로 보인다.

8. 같이보기



[1]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딸.[2] 로버트 2세의 어머니.[A] 노르만계 귀족 출신이므로 노르만어 발음으로 기재[A] [5] ? ~ 1356, 제7대 마르 백작 가르트나이트와 초혼, 브루스 가문의 기사 크리스토퍼 세튼과 재혼, 보스웰 영주 앤드류 머레이와 삼혼[6] ? ~ 1323, 닐 켐밸 경과 초혼, 알렉산더 프레이저 경과 재혼[7] 1275 ~ 1358,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의 왕비[8] ? ~ 1329년 이전, 제4대 로스 백작 아오드의 부인[9] ? ~ ?, 윌리엄 드 칼라일 경의 부인[10]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11]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본 사람들은 윌리엄 월레스의 별명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로버트 1세 브루스의 별명이다.[12] 티무르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패배하여 숨어든 곳에서 최후를 각오하고 비탄에 잠겨있을 때, 개미가 자기 몸보다 큰 먹이를 물고 벽을 타고 올라가다가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며 결국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재기의 희망과 용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13] 실제 역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는 용맹했던 인물로 잉글랜드에서는 'Black Douglas'란 별명으로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손꼽히게 뛰어난 명장인데 로버트 브루스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총 지휘하는 총사령관에 임명할 정도로 신뢰하는 최측근이었다. 더글러스는 로버트 1세 브루스 사후에는 스코틀랜드를 떠나서 레콩키스타에 참전하여 카스티야 왕국을 위해 싸우다가 테바 전투에서 4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14] 참조[15] 무법자라는 뜻이다.[16] 변장하고 성에 숨어 들어 기습으로 성을 뺏고, 빼앗은 성을 불태워버리는 청야전술 등. 마지막 라우든 언덕 전투 직전엔 병사들에게 “국가를 위해서건 가족을 위해서건 싸워만 준다면 이유 따윈 상관없다”고 아예 대놓고 질러버린다.[17] 다만 작중에서 기사도를 먼저 버린건 잉글랜드 쪽으로 이 때문에 로버트는 딸과 아내가 사로잡히고 동생을 참혹하게 잃었다.